소설리스트

28화 (28/88)

28.

“자기가 불러 놓고 나가라면 다야?”

목소리를 높였으나 형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정진 환자 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통화가 끊겼다.

“정진 개새끼.”

아무리 액정을 노려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만 더 열 받지. 지는 나 혼자 체육관 보는 것도 못 미더워하면서 남이 걱정하는 줄은 모르나.

“전화 잘 썼어요. 고마워요, 누나.”

“관장님하고 싸웠어?”

핸드폰을 받아 든 지원 누나가 조심히 물었다. 이걸 싸웠다고 해야 하나. 싸움도 상대방이 상대를 해 줘야 하는 거다.

“자기 체육관에서 나가래요. 저 가 볼게요.”

가라는데 가야지 어쩌겠나. 굳이 반항한다고 여기서 버티고 싶지도 않았고, 뭣보다 돌아온 형하고 마주쳤을 때 형이 자기 말을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게 하기도 싫었다.

라커룸에서 짐을 챙겨 나오자 지원 누나가 나를 살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도 아니고 형제 싸움에 끼다니 누나 타이밍도 측은하다.

“열아,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내가 아픈 것도 아니고.”

형이 딱 이렇게 생각할 거다. 정열이 안 괜찮을 게 뭐 있나. 지가 아픈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게 궁금한가. 졸라 독선적인 형 새끼 같으니라고.

“형 올 때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속으로 욕을 해 놓고도 체육관을 나서기 전 지원 누나한테 또 형 얘기를 했다. 체육관만 잘 봐 달라는 건 아니고 그래도 형이 지원 누나한테는 이것저것 부탁도 하고 의지하니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어, 응. 뭐 할 말 있으면 전화해. 내 번호 알지?”

걱정이 한창인 지원 누나에게 손만 흔들어 줬다. 체육관에서 내려가는 계단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운동도 제대로 못 하고 이게 뭐냐.

산책 겸 길을 돌아서 집에 갈까 고민했다. 자꾸 따라오는 한 사람만 아니었어도 산책 코스로 방향을 틀었을 거다.

“왜 따라오세요?”

거슬려서 결국 물어봤다. 체육관을 나서고 계속 황 감독님과 같이 걷고 있다.

“정열 씨 가길래 나도 슬슬 가려고 했지.”

황 감독님은 천연하게 대꾸했다. 이럴 줄 알았다.

“버스 정류장 이쪽 아닌데요.”

“그래?”

지적했으면 빨리 방향을 바꾸는 성의라도 보여야 할 텐데 황 감독님은 태연하게 나를 따라왔다.

링에서 후려쳐 버리지만 않았어도 따라오지 마시라고 했을 거다. 그놈의 죄책감이 뭔지. 정진한테는 대거리 한 번 시원하게 못 하고 지금은 불편한 동행을 계속하고 있다.

아파트 입구에서 멈추자 황 감독님이 멈춰 섰다. 따라가는 중이라는 의사 표현이 노골적이다. 어디까지 따라오시려고.

“저한테 용건 있으시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게 낫겠다. 이대로 우리 집까지 같이 들어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처음 만난 어제부터 지금까지, 이건 아무리 순수하게 봐도 꿍꿍이가 없다고 쳐줄 수가 없다. 내가 다니는 체육관까지 쳐들어와서 궁둥이 붙이고 있을 정도면 뭔가 별러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 거다.

“이걸 용건이라고 해야 하나?”

“뭔데요. 뜸 들이지 마시고 그냥 말로 하세요.”

“실은 말이야.”

뜸 들이지 말랬더니 바로 말한다. 시원시원해서 좋다고 해야 해?

“어제 정열 씨가 나한테 5년 넘게 영화 안 찍고 팽팽 놀다 보면 영원히 백수 된다고 그랬잖아.”

“그렇게까지 말한 적 없는데요.”

“안 그래도 내가 요즘 신작을 준비하고 있거든.”

진짜 속전속결. 시원하다 못해 춥다.

“수호 씨한테 한번 읽어 달라고 해 줄 수 있을까?”

황 감독님이 짊어지고 있던 배낭에서 책 같은 걸 꺼냈다. 두툼한 종이 뭉치는 가로로 길게 제본되어 있었다. 황 감독님이 내 손에 쥐여 준 걸 펼쳐 보고야 정체를 알았다. 대본이다.

“이걸 최수호한테요?”

내가 최수호 친구라서 부탁하는 건가. 장수를 쏘려면 말을 쏴라, 그런 건가?

언짢았다. 내가 말 취급당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이용해서 최수호를 마음대로 하려고 드는 게 싫다.

“최수호가 무슨 일을 할지는 수호가 알아서 하는 거고 저는 걔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해요. 그럴 주제도 아니고요. 죄송한데 이건 감독님이 직접 수호한테 전해 주시든지…….”

“수호 씨가 이 작품을 하게 해 달라는 게 아니야. 읽어 봐 주는 정도면 족해.”

대본을 되돌려 주려 하자 황 감독님은 고개를 저었다.

“정열 씨한테도 부탁하고 싶어. 한 번만 읽어 줘. 궁금해. 이게 내가 영화로 찍어도 될 만한 가치는 있는 얘긴가.”

황 감독님이 아까 내게 준 것과 같은 대본을 하나 더 내밀었다. 두 권을 겹쳐 쥐고 거슬거슬한 표면을 만져 봤다.

제목인지, 맨 첫 장에 검은 폰트로 글씨가 쓰여 있다. <록키 키드>.

“난 바닥을 쳤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 좋더라고. 윤서화 선생님이나 록키처럼.”

내 평생 수호네 어머니와 록키 발보아가 나란히 불리는 걸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록키는 미래가 없는 밑바닥에서 무명 복서로 살았고, 세계 챔피언과의 시합에서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록키>의 주연이자 각본가인 실베스터 스탤론은 <록키>를 찍기 전까지 무명 배우였다.

우리 동네로 이사 오기 전 최수호가 어머니와 어떻게 떠돌며 살았는지 들었다.

계약은 해지되고, 위약금은 물어줘야 하고, 일은 끊기고, 수호는 자라고. 수호네 어머니가 가는 동네마다 기자가 몰려들고 주민들이 불편해해 메뚜기처럼 집을 옮겨 다녀야 했다고 한다. 왜 우리 동네에서는 수호가 클 때까지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정열 씨도 그렇잖아.”

“갑자기 저요?”

무슨 닭살 돋는 얘기를 하시려고요. 난색을 보이는 내 앞에서도 황 감독님은 진지했다.

“패배 문턱까지 몰렸다가 다시 일어나서 도저히 못 이길 것 같은 경기에서 이겼을 때, 난 평생 이 선수 팬이 되겠구나, 했거든.”

무슨 경기인지 짐작이 간다.

형이 무패의 복서라면 나는 악전고투한 경기로 유명했다. 난 대전 운이 지독하게 안 좋은 축이었는데 국가대표로 나간 첫 올림픽 예선에서 메달리스트를 만나 버리는 식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 경기에선 이겼다. 매 경기가 어렵진 않았지만 이가 갈릴 정도로 힘겨운 경기가 예약이라도 한 듯 주기적으로 왔다.

나는 어려운 시합에서 쓰러진 적이 없다. 가장 상성이 안 좋고 불리한 라운드에서도 녹다운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복서였다.

“은퇴하려고 했어. 다신 영화를 못 찍겠구나, 싶은 일이 있어서. 하지만 판정패도 아니고, 싸워 보지도 않고 내 발로 링을 걸어 나가는 건 멋있지가 않잖아.”

지금 황 감독님은 링에 주저앉거나 제 발로 이탈해 버리기 직전이라는 말일까. 시합을 포기하기 전 내지르는 주먹이 이 대본인가.

손에 든 대본이 무겁게 느껴졌다. 누구나 자기 링이 있고 자기만의 싸움이 있다.

“그 대본은 내 얘기야.”

자리를 떠나기 전 황 감독님이 짧게 덧붙였다. 나는 두 권의 대본을 물끄러미 보다 품에 넣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며 들어가자 조용해야 할 집에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갔을 시간인데. 거실까지 가 보니 소파에 아빠가 앉아 있었다.

“웬일로 집에 있어. 사장님 파업했어?”

“소상공인 놀리지 마라.”

아빠가 보고 있던 TV를 껐다. 쭉 보시지, 뭘.

“일 보고 잠깐 들어왔지. 금방 다시 나가. 진이는 왜 연락을 안 받냐.”

“언제 전화하셨는데요.”

“방금, 한 5분 전?”

“그럼 나 때문일걸.”

나 때문에 머리끝까지 빡쳐서 안 받는 거든가, 병원에서 뭐 하느라 못 받는 거든가. 아부지 연락 무시할 정도면 둘 중 하나다.

“둘이 싸웠어?”

역시 우리 형제 업고 키운 사람답게 대답만 듣고도 척척이다. 싸우긴. 형이 일방적으로 날 걷어찬 거지.

“정진, 싸가지 없어.”

“인마, 너는 동생이 돼서 형하고 왜 싸워. 형한테 대들지 마.”

“예전에는 형이 동생한테 이겨 먹냐고 형더러 싸우지 말라더니 왜 말이 바뀌어.”

“그거는…….”

“형 쓰러진 후로 무조건 형한테 거스르지 말라고 하잖아.”

형은 든든한 맏이였다. 혼을 내도 금방 털어 버리고 잔병치레로도 엄마, 아빠를 걱정시킨 적이 없다. 힘 잘 쓰는 장정이라고 시골 할머니 댁에 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형한테 뭘 부탁하려고 들었다.

형은 온 가족에게 이미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랬었는데.

“환자 취급 그만해. 그러니까 형이 집에서는 병원 얘기도 안 꺼내는 거 아니야. 아픈지 어떤지 말도 안 하고. 자꾸 그러니까, 형이.”

자기가 병원 다니는 것도 집에 그늘 만드는 것처럼 여기잖아.

어느새 소파에서 일어선 아빠를 보자 끝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빠의 얼굴은 망연하게 굳어 있었다.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걸. 이왕 지금까지 참았으면 더 참을 걸 그랬다.

“수호네 반찬 가져다주러 갈게.”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서 일그러진 표정을 감췄다. 이럴 때 도망가는 곳은 내게도 정해져 있다.

* * *

혹시라도 소리가 날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현관과 현관 복도는 깨끗하다. 나 가고 청소는 했나 보다.

거실까지 커튼이 닫혀 있어 어둑했다. 침실 문은 닫힌 상태였다.

일단 부엌으로 가 들고 온 반찬 통을 내려놓았다. 최수호의 냉장고에는 우리 엄마가 챙겨 준 반찬, 생수, 영양제 몇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게 전부다.

크기와 비교해 든 게 거의 없는 냉장고를 보고 있으니 허전해졌다. 거실도 그렇다. 가구 외에는 뭐가 없다.

소파, 테이블, TV. 작은 방에는 옷. 침실에는 침구. 최소한의 생활 가전만 갖춰 놓고 끝이다.

한국에 머무르기로 하고 나서 우리 집과 가깝다는 조건을 보고 계약한 집이다. 이사를 도와주러 총출동한 우리 집 식구들이 민망할 정도로 최수호는 짐이 없었다.

최수호는 예전에 살던 집에서 물건을 거의 가져오지 않았다. 중학교 때 이사해 지금까지도 이 집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호는 집에 잘 들어오지도 못하고 살았다.

현관에 들어올 때처럼 소리 죽여 침실에 들어가자 곤히 잠든 최수호가 보였다. 해가 중천인데 커튼 치고 겨우 잠들어 있는 불쌍한 노동자다.

“잘생기긴 잘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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