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막무가내시네요.”
촬영장에서 겪은 바를 떠올려 보면 안 된다고 해도 끈질기게 우길 게 틀림없었다. 뭐, 스파링한다고 일 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어느 정도 수준까지 배우셨는지 모르니까 그럼 메소드 복싱으로 해 보세요. 지원 누나, 여기 좀 도와주세요.”
“난 정열 씨랑 붙어 보고 싶은데.”
내 부탁을 듣고 다가오던 지원 누나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왜요? 여자라 저랑은 붙기 싫으세요?”
손을 감싼 핸드 랩을 고쳐 감으며 지원 누나가 씩 웃었다. 저 누나 저러다 불붙으면 아무도 못 말린다. 10년 넘는 경력자에 아마추어 경기 트로피도 수두룩한 사람이다. 스파링 매너 안 좋은 회원들 스파링에도 종종 투입되는 우리 체육관의 참교육자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내가 정열 씨 팬이라서 그래요.”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황 감독님은 손사래를 쳐 가며 지원 누나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다친 것 때문에 지금은 곤란한가? 그러면 나중에라도 괜찮은데.”
안 그래도 어깨 때문에 지원 누나한테 도와 달라고 한 거였는데. 관절이나 인대 나간 것도 아니고 스파링이라고 해 봐야 겨우 잠깐일 텐데 이렇게까지 몸 사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아뇨. 해요.”
그놈의 팬이라는 말이 문제였다.
팬이라고 나서는 사람은 전에도 만난 적 있다. 활동할 땐 시합을 따라다니며 응원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1년이 지나고 잠정적인 은퇴에 가까워지자 그만둔 게 아쉬운 복서에나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게 씁쓸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경기할 때 사람들이 날 응원하는 게 신기하고 이상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의아했지만 꼭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의 승리를 바라는 데 계기는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누가 나를 호의로 바라봐 주었다는데 싫을 사람은 없을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함께 즐거워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건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다.
내 가장 좋았던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이라니, 팬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좀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글러브를 챙겼다. 복싱화, 헤드기어, 체스트 가드, 보호대, 마우스피스까지 꼼꼼하게 챙겨 건네자 황 감독님이 콧노래를 불렀다. 안 찬다는 만용은 안 부려서 다행이다. 그래도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몇 분 치고받으면 만족하겠지. 대충 받아 주다 끝내면 된다. 솔직히 스텝이나 오래 밟을 지 걱정이었다.
링에 오르고 1분 만에 생각이 바뀌었다.
스파링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상대의 주먹을 보다 공격에 대응이 늦어진다. 스텝을 밟는 걸 잊고 멈추거나 과하게 스텝을 밟다 지치는 경우도 흔하다. 무엇보다 거리 감각이 떨어진다.
한데 황 감독님은 연타 콤비네이션에, 받아치기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치는 데마다 적절한 블로킹, 어디로 펀치가 들어올지 헷갈리게 하는 페인팅도 제법. 주먹에도 제대로 힘을 뺄 줄 안다.
날렸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나 보다. 지원 누나도 어느샌가 훈련을 멈추고 지켜보고 있었다.
연타가 쏟아졌다. 레프트 잽, 라이트 잽. 더블 잽.
정확하고 빠른 펀치다. 다시 들어오는 잽을 글로브를 들어 블록하면 카운터 잽을 피하려고 미리 상체를 젖혀 스웨이로 피하려고 든다.
황 감독님은 내 공격을 예상하고 계속해 먼저 피했다. 팬이라더니 경기를 꽤 보신 모양이다. 일단 붙으면 몰아세워진다는 걸 짐작하고 의도적으로 거리를 벌리고 있다.
아웃복서. 하지만 원래 본인 스타일은 근거리에 가까워 보인다. 말하자면 복합형이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낼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가진 타입.
간만의 스파링에 아드레날린이 돈다. 물론 체육관에서도 회원들과 스파링은 왕왕 했지만 내 체급 중엔 솔직히 재미있는 상대가 없었다.
평소였다면 더 시간을 냈을 거다. 그러나 슬슬 어깨가 축났다. 아무래도 부상이 있다 보니 부담된다. 몇몇 동작을 제한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도 갑갑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끝내기로 마음먹고 파고들었다. 유효타를 내주면서 거리를 좁히자 황 감독님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훅으로 한 번에 끝낼 생각이었다.
피벗 잽을 날려 우측 방어가 빠지면…… 라이트 훅으로 끝낸다.
“혹시 최수호 씨 아니세요?!”
지원 누나의 흥분한 목소리가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순간 내지르는 주먹에 갑작스레 힘이 실렸다.
아차 싶었지만 주먹은 이미 나갔고 깨달음은 늦었다.
뻐억.
타격음이 최수호를 찾던 지원 누나의 외침만큼이나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글러브로 묵직한 타격감이 전해졌다. 낭패였다.
“괜찮으세요?”
나는 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황 감독님도 멈춰 있었다. 그러더니 우뚝 선 어깨가 흔들렸다.
“감독님…….”
붙잡으려고 뻗은 손이 황 감독님의 어깨를 스쳤다. 손이 제대로 닿기도 전, 황 감독님의 몸이 벌러덩 넘어갔다.
* * *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냐, 괜찮아. 역시 선수 주먹은 다르네. 아주 골통이 다 울리더라고.”
황 감독님이 얼음주머니를 볼에 댄 채 손을 내저었다.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듯 얻어맞은 볼이 부풀어 있다. 더더욱 고개가 무거워졌다.
쓰러지자마자 다급히 사무실로 옮겨 온 참이었다. 풀어헤친 보호대가 바닥에 고스란히 놓여 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형이 오늘따라 매서워 보인다. 바닥이든 황 감독님 볼이든, 이 꼴을 형이 봤으면 난 죽었다.
“힘 조절은 기본인데 제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해요.”
“에이, 괜찮다니까. 그나저나 수호 씨는 정열 씨 만나러 왔나 봐?”
덩달아 벌서듯 서 있던 최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체육관에 들어올 때 쓰고 있던 마스크와 모자는 벗은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뉘 집 자식인지 예의도 바르다. 아까부터 나를 향해 뜨겁게 쏟아지는 지원 누나의 시선을 모른 척하는 게 슬슬 힘에 부쳤다. 누나의 눈빛이 내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최수호라니? 정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지원 누나, 여기는 최수호고요. 제 소꿉친구예요.”
“소꿉친구?”
“동네에서 같이 자랐어요.”
“열아, 너 내가 최수호, 아니 최수호 씨 얘기할 때 뭐라고 했지?”
“성격 나쁘다고요.”
듣던 황 감독님이 조용히 입가를 가렸다. 뭐가 웃긴 건지.
“왜 친구라고 말 안 했어.”
지원 누나는 내게 엄청난 배신을 당한 듯 억울해했다.
“저한테 물어본 것도 아닌데 거기다 대고 갑자기 친구라고 말하기도 좀.”
잘난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이상하다. 뭐라고 변명해도 지원 누나는 배신자를 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최수호 씨, 제가 엄청난 팬이거든요. 저번에 하신 수목 드라마 있잖아요. <내일은 괜찮을 거야>, 엄청 재밌게 봤어요. 비하인드 컷까지 싹 다.”
“감사합니다. 그건 저도 재밌게 촬영했어요.”
성격 나쁘다는 내 말이 무색하게 최수호는 반짝이는 미소를 머금은 소위 접객용 얼굴을 하고 아주 친절히 대답했다. 최수호는 내 주변 사람들한테 싹싹하다.
재미있는 촬영은 무슨. 나한테는 같이 일한 상대역 배우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으면서. 막판에는 촬영 분량을 거의 생방송으로 찍으며 열악한 제작 환경에 이를 갈기도 했다.
“우리 둘 다 팬이네. 지원 씨는 수호 씨 팬, 나는 정열 씨 팬.”
황 감독님이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내 팬이라는 소리에 최수호의 눈이 당장 황 감독님에게로 굴러간다.
“최수호, 여기는 우리 체육관 신규 회원 분.”
“황춘식 감독님이잖아.”
“수호 씨, 안녕. 혹시 내가 보낸 대본 읽어 봤어?”
“최근에 촬영이 빡빡해서요.”
업계인이라 그런지 최수호는 이미 황 감독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낯선 침입자라도 만난 경비견처럼 눈은 세모꼴로 뜨는지 모를 일이다.
“감독? 대박.”
지원 누나의 눈빛은 최수호와 정반대로 초롱초롱해졌다. 스턴트 연기 배운다더니 요즘 영화에 관심이 많다.
“요즘은 이름만 감독이고 알바생에 가깝지. 그보다 수호 씨, 오늘 새벽까지 촬영하지 않았나?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최수호를 쏘아볼 차례였다. 설마하니 밤새 촬영하고 옷 갈아입자마자 튀어 온 건가. 엄마한테 물어보면 바로 진상을 알 수 있을 거다. 분명 우리 집부터 들렀다가 나 체육관 갔다는 소리 듣고 온 걸 테니까.
“안 잤냐.”
“잤어.”
“이동하는 동안 차에서 쪽잠 잔 거 말고.”
“…….”
안 잤네.
한숨도 제대로 안 잔 게 분명하다. 자세히 보면 눈 밑에 푸른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같다.
“지원 누나, 형 언제 오는지 알아요?”
“넌 몰라?”
지원 누나가 반문했다. 역시 누나한테는 알려 줬네.
형은 나한테 병원 얘기 하는 걸 싫어한다. 그나마 내원이 주기적이었을 땐 알았지만 요즘은 경과 보러 형이 예약 잡아 들르는 수준이었다. 뭐 하러 가는 건지,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형은 묻기 전에는 가족들한테도 말을 안 했다.
“늦어도 체육관 오전 수업 전에는 오겠다고 하셨으니까 한 10시쯤?”
“그러면 저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10시까지 최수호를 여기 앉혀 놓을 수는 없었다. 체육관에 마땅히 재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금방 다녀올 테니까 계세요. 지원 누나한테 접수하고 가셔도 되고요.”
“아니야. 나 시간 많아.”
황 감독님은 그저 허허실실이다. 아이스 팩에 눌린 수염이 젖은 게 신경 쓰였다. 죄책감이 든다. 솔직히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는데 그거까지 미안해지는 중이다.
멀뚱하게 앉아 있는 최수호에게 나는 보호대를 챙기듯 모자와 마스크를 쥐여 주었다.
“최수호, 나와.”
* * *
뒤에서 꾸준히 발소리가 따라온다. 평소라면 옆에 찰싹 붙어서 걸을 놈이.
잠시 멈추고 기다리자 최수호는 그제야 내 옆에 섰다.
“어디 가?”
“너희 집.”
체육관에서 집까지 가까워서 다행이다. 날도 적당히 풀려서 걷기 괜찮았다. 최수호 집까지 대충 15분이니까 최수호 데려다 놓고 돌아올 땐 뛰어와야겠다.
“우리 집,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