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88)

22.

수호네 어머니는 최수호가 중학생이 되자 미국에 진출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최수호에게 함께 갈지, 남을지를 물었다.

‘그래, 같이 있자.’

벤치에서 최수호를 마주 보며 나는 수호가 아직 여기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호가 볼 수 있고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서 좋았다.

‘……열아.’

‘왜. 나랑 있겠다며. 나 때문에 남은 거라며. 그러니까 나랑 한국에서 무사히 지내려면 애들하고 싸우지 좀 마.’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는 그림을 상상하고 주먹을 내밀었더니, 최수호는 그걸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거기 뺨을 기대고 웃었다.

여름을 맞아 짙은 녹색으로 변한 나뭇잎들이 머리맡에서 파도쳤다. 잎과 잎 틈새로 햇빛이 조그마한 별처럼 떨어져 내렸다.

햇볕 아래 수호가 웃고 있어서, 안심했다.

한국에 남기로 하고 난 후 어머니 짐이 모조리 빠진 집에서 수호는 울었다.

아주 많이 울었다.

할 수만 있다면 최수호 대신 다쳐 주고 싶다.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같은 마음이다.

수호를 지켜 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무엇으로부터든.

* * *

옛날부터 내가 최수호를 과보호한 건 사실이다. 내 첫사랑은 작고 약하고 귀여워서 안 그럴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과보호를 했어도 최수호만 할까 싶다.

“초상났냐.”

내 어깨에 얼음 팩을 대고 있는 최수호는 가히 사색이었다.

“뭘 호들갑을 떨어. 머리도 아니고 등에 맞은 걸 가지고.”

“병원 가자.”

“안 그래도 이따 갈 거야. 지 쓰러졌을 때는 죽어도 안 가겠다고 버티더니.”

위에서 떨어지는 걸 직격으로 맞아서 걱정했는데 조명이 작고 가벼운 덕분에 뼈가 상하진 않은 듯했다. 병원에 가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선 욱신대는 거 말고 큰 이상은 없다.

그러니 괜찮다고 수십 번 말했건만 왜 내가 다 죽어 가기라도 하는 양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아까부터 찰싹 붙어 앉아서 혼비백산, 눈에 초점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됐다.

“괜찮다고, 최수호. 나 멀쩡해.”

아직도 창백한 뺨을 건드리자 최수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다친 건 난데 얘가 죽을상이다.

“나 때문에 다친 거잖아.”

목소리가 절절 끓는다. 머무르는 시선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다.

“왜, 고맙냐?”

“너 다치는 것보다 내가 다치는 게 나아.”

“낫긴 뭐가 나아. 얼굴이 재산인 게. 헛소리하지.”

그대로 떨어졌으면 최수호 머리에 직격이었다. 최수호가 맞았으면 어땠을지 생각도 하기 싫다.

아무튼 떨어진 조명은 부서지고, 촬영은 다시 제동이 걸리고,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머니를 보자마자 넋을 놓고 있던 애가 관심을 딴 데로 돌렸다는 거다. 지금도 정신없어 보이지만 아까 그 시체 같은 얼굴보다는 낫다.

“기영이 형은 너희 어머니하고 회사 들어가셨다며. 나하고 있느라 인사 제대로 못 한 거 아니야?”

기영이 형이 말했던 바쁘게 나갈 사정이 뭔가 했더니 수호네 어머니를 모셔 오는 일이었다. 아마 수호를 보러 오신 거겠지.

“어차피 회사 오시는 길에 잠깐 들르신 거야.”

그래서 인사를 했다는 건지, 못 했다는 건지. 최수호가 얼음 팩을 치우고 내 환부를 확인했다. 그나마 나아졌던 표정이 다시 왕창 구겨진다. 내렸던 옷을 다시 정돈하고 최수호의 미간을 건드렸다.

“얼굴 안 펼래?”

“안 펼래.”

“못생긴 얼굴 하지 말고 인상 펴.”

“열아, 나는…… 찡그려도 안 못생겼어.”

환장한다. 맞는 말이라 더 환장하겠다. 최수호, 이 얼굴에 대한 자부심 미친다. 8할은 내가 거름 줘 가며 키운 자부심인 걸 생각하면 더 미친다.

“봐. 안 못생겼지.”

미간에 어설픈 주름을 만든 채 최수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바짝 들이댔다. 촬영한다고 찍어 바르기까지 한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깜빡이는 걸 보면 왜 엄마가 자주 보는 로맨스 소설에서 주인공 예쁘고 잘생겼단 얘기만 주야장천 되풀이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10년을 넘게 봐도 적응이 안 되는데, 아무렴 서로 사랑에 빠진 연인끼리야 매일 감탄할 수도 있겠다.

“어, 잘생겼다. 미남이다. 너 잘생긴 거 알겠으니까 뒤로 좀 가.”

“왜.”

“최수호, 사람들이 본다.”

정말이다. 일부러 잡동사니가 쌓인 구석 자리에 앉았는데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우리를 기웃거리는 중이다.

시선이 따끔따끔하다. 그야 뉴스까지 오르내리는 톱스타가 웬 사내놈한테 찰싹 붙어서 당장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얼굴 마주 대고 있으면 구경하고 싶기도 하겠지.

아까부터 지나치게 가깝다. 나하고 최수호가 손잡고 끌어안는 거야 어릴 때부터 봐 온 우리 가족들이나 그러려니 하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학창 시절에 익히 들었다. 너하고 최수호 사귀느냐는 말에 코웃음만 치던 때가 있었는데.

“보라고 해.”

너 나 좋아한다고 아주 동네방네 광고를 해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이젠 최수호가 날 좋아한다는 데 적응해 버린 내가 무섭다.

입술이 가깝다. 또 입 맞출 때의 감촉이 떠오르려고 했다. 얼음을 치우자 어깨에서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끈한 기운도 혼란에 한몫했다. 열기가 목을 타고 얼굴로 올라온다.

“둘이 뭐 하냐. 사귀냐.”

양용배가 앞에 서자마자 나는 한 손으로 최수호의 얼굴을 힘껏 밀어냈다. 최수호의 잘생긴 얼굴이 내 손바닥 밑에 납작 눌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힘껏.

“사귀긴, 넌 뭘 그런 소리를. 왜.”

“……왜 왔어.”

내 뒤를 이어 최수호가 스산하게 물었다. 내 손가락 사이로 고개를 든 최수호의 얼굴 위쪽에 음울한 그늘이 졌다.

“왜 오긴. 정열 괜찮나 물어보러 왔지.”

양용배가 내 다친 어깨를 흘긋 보았다. 혹시 정말 목까지 달아올라 있진 않을까 싶어 나는 괜히 뒷덜미를 주물렀다.

“열이 괜찮대. 이제 가.”

“이씨, 가긴 뭘 가. 매니저 형 차로 병원 태워다 주게 따라오기나 해.”

“촬영 안 끝났잖아.”

“세트 손보고 잠깐 쉰대. 밥차나 왔으면 좋겠다.”

“병원 나도 같이 갈래.”

나는 뭐 입을 열 틈도 없이 얘기가 오간다. 최수호의 동행 선언에 양용배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거길 왜 따라가. 병원에 가려면 아까 가라고 할 때 가든가 했어야지.”

“너랑 열이랑만 못 보내.”

“나랑 같이 간다고 안 했거든? 운전은 매니저 형이 하는데 어떻게 나랑 정열만 같이 가냐.”

“그래? 그럼 넌 가지 마. 나랑 열이만 다녀오게.”

“진짜……. 사람 빡치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최수호, 너 정도면 싸가지도 재능이야.”

양용배가 뭐라고 하건 최수호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냥 나 혼자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둘 다 오지 말라고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나는 소싯적 받은 상금은 어머니의 주도하에 다 예금으로 묶여 있는 백수 겸 예비 재수생이었다.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택시비까지 감수하느니 저 둘의 법석을 감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것이 명백한 오판이었다는 게 불과 10분 후에 밝혀졌다.

* * *

택시를 탈 걸 그랬다.

“넌 조수석에 타.”

“네가 왜 이래라저래라야? 조수석이 좋으면 최수호 네가 조수석으로 가든가.”

“난 열이 옆에 탈 거야.”

“나는 내가 타고 싶은 자리에 탈 거야!”

“니들은 지치지도 않냐…….”

양용배네 밴 앞까지 오면서 계속 옥신각신이다. 두 인간 사이에 끼어 있으려니 어깨보다 귀가 더 아픈 것 같다.

드디어 밴의 문이 열리자 맨 뒷좌석에 처박혀 벌렁 드러눕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물론 거기까지 들어가 봐야 최수호가 옆에 앉겠다고 비집고 들어올 게 뻔하니 그냥 창문 옆에 앉는 걸로 타협 봤다.

“둘 다 안 타고 뭐 하냐.”

이 ‘뭐 하냐’는 두 가지 의미다. 첫 번째로는 정말 뭘 하는 건지 묻는 거. 두 번째로는 한심스러운 작태에 기가 찬다는 뜻.

덩치는 산만 한 남자 둘이 서로 어깨로 밀며 문에 끼어 있다. 바깥에서 여심을 사로잡았다며 스타 대접을 톡톡히 받는 두 녀석이라는 걸 고려하면 무슨 억지로 웃기려 드는 촌극 같다.

“내가 먼저 탈 거야.”

“내 찬데 네가 왜.”

“내가 열이 옆에 탈 거라고.”

“싫은데? 내가 정열 옆에 탈 건데?”

“네가 열이 옆에 왜 타.”

“너한테 지기 싫으니까.”

잘들 하는 짓이다. 동네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 이러니까 쟤네 둘이 10년을 봐도 앙숙인 거다.

“열아, 네가 대충 자리 정해서 태워.”

진작 운전석에 앉은 용배네 매니저 형이 허허, 웃으며 권했다. 그게 마음대로 돼야 말입니다.

“아니면 둘 중에 더 잘생긴 사람이 열이 옆에 앉아라.”

운전석에서 허허, 웃음소리와 함께 나온 말에 최수호와 양용배의 눈길이 허공에서 강렬히 부딪혔다. 불티가 튀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나는, 머리가 다 아팠다.

용배네 매니저 형은 어디까지나 농담의 연장으로 가볍게 권한 듯했으나 이는 밴 뒷좌석에 파리스의 황금 사과를 내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스의 세 여신을 경쟁하게 했던 그 황금 사과 말이다. 한 알의 황금 사과가 내 옆 좌석을 데구르르 굴러갔다.

“당연히 나지.”

양용배가 당당히 좌석에 오르려다 뒤로 끌려갔다. 최수호는 양용배의 뒷덜미를 가차 없이 잡아 끌어내고 내 옆자리에 착석했다.

“야! 야! 네가 거기 왜 앉아. 안 비켜?”

바닥에 넘어질 뻔한 양용배가 급하게 균형을 되찾고 차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스타렉스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닫혔다.

“비켜라, 최수호.”

양용배가 최수호의 멱살을 잡았다. 아까 세트장에서 본 촬영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장한 얼굴이다.

“못생긴 놈은 뒤로 가서 앉아.”

역시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목소리를 내리깔며 최수호가 말했다.

“못, 못생겨? 내가 어딜 봐서. 나 잘생겼어!”

“나보다 못생겼어.”

“내가 너보다 훨씬 낫그든? 정열, 너 봐봐. 얘가 나아, 내가 나아.”

“그냥 내가 뒤에 가서 앉을게. 둘이 앉아라.”

하아, 한숨과 함께 일어서자 당연히 붙잡혔다. 한쪽 팔은 최수호한테 잡혔고 앞은 양용배가 막고 있다.

이럴 때 보면 죽이 잘 맞는데 말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