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수호 10분 후에 데리고 나와 줘.”
탐탁지 않았지만 기영이 형을 향해 알았다는 표시를 한 후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최수호가 싸우는 링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대신 수건을 날려 줄 수도 없고 연예계 일을 코치해 줄 수도 없다.
그냥 링 밖에서 최수호가 싸우는 걸 보면서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 수호가 쓰러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시합을 지켜보는 게 내 몫이다.
“왜 벌써 앉아 있어.”
최수호는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나쁘다.
“휴식 얼마 안 남았잖아.”
“그러니까 1분이라도 더 누워서 쉬어야지.”
물병을 따서 건네도 최수호는 받으라는 물병은 안 받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뽀뽀해 주면 안 돼?”
그러더니 어김없이 헛소리다.
“너 지금 그런 소릴 하고 싶냐?”
“나 아파.”
최수호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내리깔린다. 이마에는 땀이 배고 입술은 열로 버석버석 마른 채 저따위 불쌍한 소리라니.
괘씸하다. 괘씸하고, 속이 아팠다.
예전부터 최수호가 아플 때면 나도 아픈 것만 같았다.
“물부터 마셔.”
“열아, 나 정말 아파.”
“최수호 너, 진짜 개새끼다.”
“뽀뽀해 주면 그만 아플게.”
아픈 개새끼, 최수호가 고개를 옆으로 눕히며 미소 지었다.
“내가 뭐 하자고 이딴 소릴 진지하게 들어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최수호 옆에 앉아 물병 주둥이를 최수호의 입술에 들이밀어 가며 탄식했다. 물병을 잡은 최수호가 순식간에 물병 절반을 비웠다.
물기에 촉촉해진 입술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최수호의 입술은 도톰하니 고른 모양에 길이마저 적당하다. 입술 가운데 맺힌 물방울이 빛을 모았다.
마른침이 넘어간다. 힘주어 삼키는 바람에 식도가 알알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털어 냈다. 자꾸 신경 쓰니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다.
“물 마셨는데 뽀뽀는?”
물병 뚜껑을 닫으며 최수호가 물었다. 남의 속이라도 읽은 것 같다. 집요한 놈.
“지금 하라고?”
최수호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겪어 온 바에 따르면 이때 무시하고 넘어갔다간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 들어줄 수 있는 걸 요구할 때 해 주는 게 낫다.
그래, 말마따나 애한테 뽀뽀한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었다.
고개를 가까이 붙이자 최수호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인다. 땀도 흘렸는데 이 자식한테서는 좋은 냄새만 난다. 최수호는 아플 때도 기가 막히게 잘생겼다.
지난번 최수호가 입 맞췄던 게 떠올랐다. 간지럽던 감촉과 온도가 고스란히 생각나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가져다 대려던 계획이 무너졌다.
내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최수호가 먼저 입술을 겹쳤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입술이 내 입술에 부드럽게 눌린다.
벌써 세 번째다. 최수호의 입술은 저번만큼 뜨거웠고, 닿은 곳에서 따갑고 간지러운 느낌이 퍼져 나가는 것도 같았다.
최수호는 이번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입술을 가만히 마주 댄 채 나를 정신없이 응시하고 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떨어지려 하자 최수호가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어깨에 최수호가 머리를 기대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뛴다.
너무 큰 소리라 귀가 울렸다.
“미안해.”
뜨거운 숨이 섞인 중얼거림이 귓가에 닿았다. 심장 박동과 최수호의 음성이 한데 섞인다.
“열아, 역시 나는 네가 너무 좋아.”
데운 시럽 같은 고백이 끼얹어지는데도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귀에 화상을 입은 것같이 따끔거렸다. 끈끈하고 뜨거운 시럽이 가슴으로 흘러내리려 했다.
* * *
남들은 다 바쁜 세트장에 나 홀로 앉아 있기. 광고주라도 된 기분이다.
기영이 형은 급한 연락이 왔다고 허겁지겁 세트장을 빠져나가면서 내가 앉을 의자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최수호 촬영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으니, 그간 촬영들을 구경해 본 가락에 의하면 여기서 한 너덧 시간은 가뿐히 버텨야 할 판이다.
지저분한 천으로 된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 내구성이 의심스러운 의자 골조가 가냘프게 울었다. 일어설 때쯤 내 몸에서 날 소리의 예고편 같다.
최수호는 머리하고 메이크업 손봐야 한다고 아직 휴게실에 잡혀 있고 나는 할 일이라곤 없다. 방금 휴게실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는 정도밖에는.
키스.
아니, 키스는 아닌가. 사실 지금까지 최수호하고 했던 세 번 다 키스는 아니었지.
나도 모르게 혀가 나와 아랫입술을 훑었다. 최수호의 입술은 항상 따뜻하다. 부드럽고, 가까이 오면 상큼한 냄새가 난다.
운동화 안에서 발가락이 서서히 움츠러들었다. 최수호와 닿아 있으면 찌릿하게 오르는 정전기가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쳤네. 두통이 올라올 것만 같아 주먹 쥔 손을 이마에 문질렀다. 삼세번이라는데 네 번째는 없어야 한다.
문제는 내가 다음에 최수호가 또 입술을 들이대면 피할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매번 같은 패턴이다. 최수호가 잘생기고, 예쁘고, 불쌍하게 조르면 이쯤이야 괜찮지 않나 싶어진다.
그렇다고 계속 이럴 수는 없잖아. 고백 대답은 또 어쩌지.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곤죽이 된다. 이러다 나까지 열나겠다.
“정열, 너도 아프냐?”
지척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눈가를 가린 주먹을 치우자 누군지 보였다.
“아프겠냐.”
“최수호는 괜찮은 거 맞아?”
주머니에 손을 삐딱하게 찔러 넣은 미남이 내게로 다가왔다. 예상한 사태다.
“양용배, 너 최수호 좋아하냐.”
“이게, 씨. 미쳤냐?!”
입에서 불이라도 뿜겠다. 냉미남이라고 사방 천지에서 방방 띄워 주는 양용배가 애처럼 팔짝 뛴다. 최수호도 애 같지만 얘는 다른 의미로 일곱 살 애새끼 같다.
“그럼 너, 나 좋아하냐?”
“야!”
“둘 다 아닌데 왜 맨날 따라다니냐. 하여간 최수호한테 관심 엄청 많아.”
“따라온 거 아니거든? 나도 촬영하러 온 거거든?”
“네 촬영하면 되지 왜 최수호를 쫓아다니냐고, 내 말은.”
“내가 언제. 야, 나는. 어? 오늘 최수호랑 나랑 같이 찍는 장면도 있고 하니까 동료로서 걱정한 거지.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야 할 거 아냐.”
“승부는 무슨. 시합하냐? 넌 어떻게 스무 살이 되도록 철이 안 드냐, 용배야.”
“용배 아니고 장혁준이라고 몇 번 말해.”
“알았으니까 가서 촬영 준비나 해, 양용배.”
“이게. 난 다 했어! 최수호만 준비하면 돼.”
양용배가 떡 벌어진 가슴을 내밀며 식식거렸다. 그래도 아는 사람 왔다고 쪼르르 내 옆에 와서 떠들고 있는 게 귀엽다면 귀엽다. 최수호가 리트리버나 말라뮤트 계열이라면 얘는 도베르만이나 진돗개 정도 되려나.
“용배야, 수호가 걱정되면 직접 가서 말해라. 애냐.”
“걔 분장 고치는 중이잖아.”
“금방 나올 텐데 나오면 말해. 걱정되는데 괜찮은 거 맞냐고.”
“최수호랑 말하면 짜증 나.”
“말든가, 그럼. 근데 저거 괜찮은 거야?”
나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도 진짜 건물 천장이 아니라 세워 놓은 세트의 천장이었는데, 거기 매달린 조명등 중 하나가 얼핏 보기에도 간신히 붙여 놓은 수준으로 헐겁게 설치되어 있었다.
“세트 천장 고정 제대로 안 돼 있어서 그래. 원래 저기 달면 안 되는 건데 동선상 저 위치에 조명 있어야 해서 억지로 달았대.”
“위험해 보이는데.”
“드라마 촬영에 위험한 게 한두 개냐. 레커차에 비하면 쟤는 약과다. 그래도 사전 제작이라 여긴 나은 거야.”
“너네는 뭐, 맨날 이런 살벌한 현장에서 촬영하냐.”
하긴 최수호가 드라마 찍는 동안 본 부상만 몇 개며, 사고는 또 몇 갠지 말하면 입만 아프다. 어떨 때는 운동선수인 나보다 자주 다쳤다. 지금은 그나마 몸값이 올라가 혼자 쉬게 해 주기도 하니 다행인가 싶다.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 확 그만두라고 해 버릴걸 그랬나. 기영이 형이 들으면 기함할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최수호가 그만두고 싶다는 말까지 하게 만든 그 영화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정말 최수호가 하게 될까. 양용배는 알려나.
“최수호 영화 있잖아.”
“무슨 영화.”
“이번에 그 영화. 해외 진출한다는.”
거기까지만 듣고도 무슨 이야기일지 감이 잡히는지 양용배가 슬금슬금 내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부담스럽게 가깝다.
“뭔데. 뭐, 이번에 에이케이에서 투자하는 거? 최수호 무슨 얘기해? 빨리 말해 봐.”
기영이 형이 용배가 하고 싶어 난리인 영화라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 일단 떨어져서 얘기하자고 말하려는 순간, 모양 좋은 손이 양용배와 내 사이에 쑥 들어와 양용배를 밀어냈다.
“열아, 나 준비 다 했어.”
호랑이는 제 말 하면 오고, 최수호는 양반은 못 된다.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최수호가 나하고 양용배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최수호가 몸으로 양용배를 밀어냈다.
휘청거리며 밀려난 양용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최수호를 쏘아보았다. 최수호는 물론 양용배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야, 최수호…….”
“여기 앉아 있을 거야? 나 촬영하는 거 보게?”
“어, 촬영 많이 남았어?”
“야, 최수호.”
“같은 신 리테이크 중이라 모르겠어.”
“최수호오오!”
양용배가 사자후를 질렀다. 귓구멍이 막히지 않은 이상 안 들릴 턱이 없지만 최수호는 여전히 나만 보는 중이다.
익숙한 풍경이다. 나하고 양용배가 같이 있는 걸 보자 헐레벌떡 달려왔을 최수호는 양용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양용배는 최수호 시선을 끌겠다고 바락바락 짖고.
둘 사이는 이런 식이다. 최수호가 양용배를 생무시하고, 양용배는 약이 올라 죽고, 최수호가 가끔 양용배를 상대해 주면 양용배는 그게 또 약이 올라서 빈사 상태가 된다. 10년을 마주치면서도 둘이 친구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수호야.”
“응, 열아.”
“용배 말하잖아.”
내가 용배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최수호는 비로소 양용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최수호의 태도는 저기에 그런 게 있었나 힐긋 확인하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선을 받은 양용배가 진저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