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목청껏 부르자 싸늘한 미남이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와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어쭈, 무섭네.
“야, 용배라고 부르지 말라고.”
미남, 양용배가 말했다.
“용배를 용배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장혁준, 이 새끼야. 장, 혁, 준!”
“본명하고 뭐 하나도 맞는 게 없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 부끄럽냐?”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거거든? 혁준이도 엄마가 지어 주셨그든? 지는 정열인 게.”
“우리 형 정진, 나 정열. 뭐.”
“너희 형제 이름 진짜 유치해.”
“우리 형 앞에서도 그 말 해 봐라.”
“너네 형은…… 무서워.”
얼굴에 안 어울리게 소심한 자식. 어려서 나하고 최수호한테 시비 걸다 우리 형의 엎어치기에 당한 이후 형 이름만 들어도 깨갱이다.
초등학생도 아니면서 내 이름을 가지고 시비 터는 중인 미남의 이름은 양용배. 예명은 장혁준. 최수호하고 동갑인 남자 배우. 아역 출신에 시원시원하고 선 굵은 외모로 누나 팬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
참고로 나하고는 사는 동네부터 나온 학교까지 하나도 겹치는 데가 없다. 양용배와 나의 접점은 단 하나뿐이다.
“용배 씨랑 친구야?”
아까부터 나를 따라온 밤송이 수염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용배 아니라고요!”
용배 아닌 용배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지가 홍길동인가. 용배를 용배라고 부르지 못하고…….
“양용배, 최수호 어딨어.”
마주칠 이유가 없는 나와 양용배 사이의 유일한 교집합. 그건 최수호다.
데뷔 초 촬영장에서 주인공 아역으로 만난 이후 양용배는 최수호를 라이벌로 선포했다.
그때 찍은 드라마가 두 남자의 어긋난 운명과 악연 따위를 그리는 투톱 시대극이긴 했는데, 역할에 과몰입을 한 건지 주변에 또래가 최수호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양용배는 그날부로 최수호를 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리고 최수호는 날 따라다니는 게 일이었으니 양용배와 내가 마주친 건 당연했다.
최수호를 사이에 두고 여기저기서 마주친 지 거의 10년이다. 썩 다정한 사이는 아니라도 웬만한 친구들보다 서로 오래 봤다.
친하진 않아도 편하기는 한 사이다. 친구보다 가까운 건 적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솔직히 양용배는 적도 못 되지만.
“최수호, 휴게실.”
“휴게실? 어딘데, 쉬는 중이야?”
휴게실이라는 편안한 답을 들었더니 오히려 불길했다. 기영이 형이 아무 일 없는데 날 호출할 리가 없다. 양용배의 찝찝한 표정이 내 추측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수호 씨 아까 쓰러졌어.”
양용배가 말을 고르는 틈에 옆에서 불쑥 답변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역시나 밤송이 수염이었다.
“그나저나 수호 씨 친구였구나. 난 누구랑 아는 사이인가 했네. 수호 씨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지. 근데 말이야. 혹시 이름이…….”
“어디예요?”
뒤에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앞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밤송이 수염의 팔을 힘껏 잡았다.
“최수호, 지금 어디 있어요.”
* * *
최수호만큼 미련한 자식이 또 있을까.
의자를 붙여서 만든 자리에 누워 있는 최수호를 보니 부글부글 화가 끓었다. 이마에 붙어 있는 아이스 시트가 그나마 조치인 듯했다.
때려치운다더니. 어제는 배우 그만두고 싶다던 놈이 촬영하다 열이 나서 쓰러져 놓고도 계속하겠다고 뻗대고 있는 건 뭔가.
기영이 형이 병원이라도 다녀오자고 했다는데 최수호는 오늘 분량은 일단 마쳐야겠다고 부득불 우겼다고 했다. 좀 쉬면 된다며 누웠다지만 내가 보기엔 절대 ‘좀 쉬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최수호, 일어나.”
젖은 담요처럼 무겁게 늘어져 있던 최수호의 눈꺼풀이 올라왔다. 나를 보자 눈빛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온다. 병상에 누운 개가 꼬리만 열심히 치는 걸 보는 것 같아 기분 더럽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그거 물어볼 때야?”
“오늘 재수 학원 간다며.”
“진작 다녀왔어. 일어나, 병원 가.”
“20분만 쉬고 촬영 다시 들어가기로 했어.”
“네가 무슨 달구지 끄는 소냐? 이렇게 아픈데 왜 꾸역꾸역 일을 해. 이제 쉴 거라고 그랬으면서.”
“편집 분량 때문에 추가 촬영하는 거라……. 스태프들하고 배우들 다 모였는데 나 아프다고 돌려보낼 수 없잖아. 나 빠지는 장면 없어서 다 찍어야 해.”
속이 터져 나간다. 아무리 그래도 몸은 챙겨야 할 거 아니냐고 닦달하고 싶었으나 최수호는 아프면 일 못 하니까 운동과 영양제를 거르지 않던 애다. 목 아낀다고 잘 때도 마스크 쓰고 자던 애를 무슨 수로 혼내겠나. 최수호가 그렇게까지 애써도 아프게 만드는 환경이 잘못된 거지.
스스로가 아무리 강하게 저항해도 버텨 낼 수 있는 고통엔 한계가 있다. 못 버티는 사람 잘못이 아니다.
“병원 갔다 와서 찍으면 안 돼?”
“링거 맞으면 한 시간 넘는데 시간이 안 될 것 같길래. 해열제는 먹었어.”
“밥은.”
“기영이 형이 사다 준 거 먹었어.”
“나가서 먹을 시간도 없었다는 소리네.”
최수호가 웃는 듯 마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맞는 소리다. 살인적인 스케줄에 쫓기는 최수호 씨가 끼니 거르고 다니는 거야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물론 낯익은 것과 속상한 건 별개의 문제다.
“촬영은 언제 끝나.”
“좀만 더 하면 돼. 열아, 나 정말 괜찮아. 요즘 가끔 이래. 쉬면 금방 괜찮아져. 알잖아.”
알긴 뭘 안다는 건지. 물론 이게 최수호의 지병 같은 것임은 알고 있다. 최수호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가장 일차적인 수단은 열이었다.
수호는 어린애일 때도 자기 입으로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미련스럽게 버텼다. 자기가 못 하겠다고 하면 지구가 망할 거라고 믿는 애 같았다.
참다 보면 열부터 올랐다. 감기처럼 감염으로 나는 열이 아니라서 쉬면 곧 나아졌지만 난 그게 더 슬펐다. 최수호는 몸이 아프지 않으면 자기가 쉬어도 된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애였다.
의자 옆쪽에 쪼그려 앉자 누워 있는 최수호와 얼핏 눈높이가 맞았다. 땀으로 습해진 앞머리 아래 메이크업의 흔적이 남아 있다. 머리카락을 만져 주자 최수호가 기분 좋은 듯 눈매를 축 늘어뜨렸다.
일정이 눈코 뜰 새 없는 게 요즘 일만은 아니건만, 수호가 부쩍 아픈 건 아주머니가 한국에 오셨다는 소식 때문일 거다. 긴장해서 이런다. 그래서 더 버티는 거고.
“촬영 끝날 때까지 같이 있을게.”
“…….”
“왜.”
“열이는 너무 다정해.”
또 저 소리. 처음 앓아누운 최수호를 안아 줬을 때도 수호는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었다.
그래도 아플 때는 나한테 꼬박꼬박 아프다고 투정했는데 그마저 못 했다는 게 난 또 안쓰럽고 난리다. 위장이 다 시큰했다.
“재수 학원은 어땠어?”
“원장이 나더러 재수에 소질 있다더라.”
수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쏟아져 나온 웃음소리가 곧 칼칼한 기침으로 변했다.
“물 가져올게.”
만류하는 수호를 두고 문을 나서자 앞에 기영이 형이 서 있었다.
“수호 어때?”
허겁지겁 묻는 걸 보니 일부러 비켜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플 때 최수호는 다친 동물처럼 예민해져서 웬만해서는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예외는 나 정도다.
“아프죠.”
“많이?”
준비해 두고 있었는지 기영이 형이 생수병을 내밀었다. 수호 때문인지 형도 덩달아 안색이 안 좋다.
“촬영까지 20분 남았는데 괜찮을까?”
“애가 아픈데도 자꾸 일한다고 하면, 회사 차원에서 말려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저러다 애 잡을지 누가 알아요.”
촬영 운운하는 소리에 울컥해 말이 뾰족하게 나왔다. 기영이 형은 열없게 내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형 탓한 건 아니고요.”
기영이 형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안다. 형이 배 째라 식으로 촬영 접고 수호를 쉬게 할 수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나마 지금껏 수호를 맡았던 매니저 중에 제일 수호를 챙긴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기영이 형이 나를 부른 건 최수호를 설득해 병원에 데려가 달라는 게 아니다. 아픈 데 일해야 하는 애 기분이나마 달래 주고 싶어서 부른 걸 거다. 챙겨 주는 거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최수호가 괜히 앓아 가며 버티는 게 아니다. 수호 주변에는 쉬어도 괜찮다고 해 줄 사람이 얼마 없다.
“촬영, 괜찮을 것 같대요. 본인 말로는.”
우기는 걸로밖에 안 들려서 문제였지만. 그래도 듣고 싶은 답을 들은 기영이 형의 얼굴빛은 한결 나아졌다.
이러니 최수호가 괜찮다고 버티는 거겠지. 최수호가 일하다 아플 때 ‘괜찮냐’고 묻는 건 궁금해서 묻는 것보다는 ‘괜찮아야 한다’는 뜻일 테다.
“들어갈게요.”
물병이나 챙겨서 다시 들어가려는데 자꾸 옆통수가 따가웠다. 시야 한구석에 집요히 밟히는 인영을 따라 시선을 굴리자 아까부터 지겹게 마주치던 밤송이 수염이 저만치 서서 기영이 형과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다니는 건가. 아무리 봐도 구경하러 온 모양새인데. 왜?
“저 사람, 도대체 누구예요?”
아예 삿대질하며 묻자 기영이 형이 내 검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황 감독님.”
평범한 촬영장의 광인인가 했더니 감독님이란다. 무슨 감독. 카메라 감독? 조명 감독? 팽팽 놀면서 돌아다니는 걸로 봐서는 감독은커녕 잡상인이라고 해도 믿겠다.
“황춘식 감독님. 열이 너도 저번에 영화 봤잖아. <악과>. 그거 찍은 감독님이셔.”
“<악과>? 액션 영화요? 영화감독이 여기는 왜 있는데요?”
나와 눈이 마주친 밤송이 수염이 커피가 들었을 종이컵을 입에 문 채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꼭 갈색 곰이 앞발을 흔드는 모습 같다. 거대한 삽살개나.
영화는 엄청 살벌하던데 감독 본인은…… 이상하다.
“감독님 친구 분이시래. 이 드라마 감독 친구. 이번 드라마 감독님이 원래 영화감독이거든. 놀러 오라고 부르셨다고 들었어. 좀 특이한 분이지?”
“예.”
내 망설임 없는 대답에 기영이 형이 쓴웃음 지었다. 감독 중에 이상한 사람 많다고 최수호가 학을 떼더니.
물병을 챙겨 돌아서려니 기영이 형이 나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