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열이는 너무 다정해.”
도대체 뭐가 다정하다는 건데. 기가 찬다.
당연히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대우 못 받는 사람처럼 그러지 말라고 핀잔하려다 한숨만 푹 쉬었다.
“옷이나 내려. 더 약 바를 데 없지?”
“더 발라 주면 안 돼?”
“바를 데가 없는데 어떻게 바르냐?”
“그럼 그냥 만져 줘.”
이제는 최수호의 만져 달라는 말이 도저히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다.
“아무 데도 가지 마, 열아.”
수작 부리지 말라고 밀어내려는 걸 안 건지. 최수호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나를 약해지게 한다.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촉촉한 음성, 축 처진 말투, 눈매. 안 그러겠다고 결심해 놓고 또 약해진다.
“이거 다 발라 주고 집에 갈 거야.”
“자고 가. 아무 짓도 안 할게.”
“참 믿음직하다. 됐거든. 내일 재수 학원 가야 돼.”
“너 재수해?”
“부모님께서 대학은 반드시 보내야겠다는 데 어쩌냐. 해야지. 지금 내 수능 성적으로 대학 가려면 돈 내야 돼.”
“특기생으로 가면 되잖아.”
“약 올리냐?”
“복싱 다시 하면 안 돼?”
순간적으로 딱밤이나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아까 본 멍이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않았어도 해 버렸을지도. 내 앞에서 복싱 얘기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건 이제 최수호밖에 없다.
“그 말 우리 형 앞에서 하면 너 맞아 죽어. 나도 죽고.”
“대학 어디 갈 건데.”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생각한 적 없다. 재수 학원도 아빠가 닦달해서 가는 것뿐이다.
“몰라. 공부하면서 생각해야지.”
“나랑 결혼하자. 내가 너 책임질게.”
“미친놈이 진짜. 약상자 네가 치워. 간다, 들어가서 자.”
결혼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이대로 있다간 오늘도 최수호 페이스에 어영부영 휘말릴 것 같아 일부러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섰다.
최수호는 당연한 듯 함께 일어나서 내 뒤를 따라왔다. 거실에서부터 현관까지 졸졸졸.
“가서 빨리 자. 아픈 놈이.”
운동화를 구겨 신는 나를 최수호가 벽에 기대 물끄러미 바라본다. 센서가 작동해 현관 불이 들어왔다. 주황색 조명 아래 선 최수호의 모습은 가히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열아, 좋아해.”
근사하게 고백하는 남자 주인공 같다. 고백의 대상이 여주인공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완벽한 장면이다.
예쁘고 상냥한 여주인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꿉친구로 같이 자라면서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내자식은 좀 심하지 않냐.
“너무 좋아해.”
빗나간 상대에게 고백하면서도 최수호는 절절하다. 너무 절실해서, 내가 못 견디겠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차면서 대꾸하자 최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럴 때만 말 잘 듣지. 나 마음 약해지게 하는 데는 하여간 도가 튼 놈이다.
문을 나서자마자 더운 숨이 푹 비어져 나왔다. 현관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을 등지고 쪼그려 앉았다. 이마로 열이 몰린다. 최수호의 열을 내가 가져오기라도 한 듯이.
“어쩌라고, 나더러…….”
웃는 최수호의 얼굴은 쓸쓸해 보였다.
최수호가 외로운 건, 정말이지 질색이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싸한 약 냄새가 코끝에 오래 머물렀다.
* * *
<최고의 재수 학원! 100% 합격 보장!>
노란색 현수막에 검고 굵게 강조된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다.
건물 계단을 나서자마자 방금 나온 재수 학원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인 현수막을 맞닥뜨리는 기분은 떨떠름하다. 아빠도 내 옆에 나란히 서서 현수막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것 같냐.”
아빠는 건물 옆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곧장 가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냥 뭐, 열정적이더라.”
솔직한 답변이다. 열정적이라는 감상 외에는 달리 할 말도 없다.
상담받으러 원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눈을 빛내면서 말하는데 레이저 나오는 줄 알았다. 무슨 대학 합격이 아니라 날 화성으로 보내 주기라도 할 것처럼 비장했다.
“인마, 열정은 선생이 아니라 네가 가져야지.”
“나도 알긴 아는데 그게 갖고 싶다고 막 생기나.”
아빠 말대로다. 문제는 나였다.
목표 대학, 없음.
가고 싶은 과, 없음.
되고 싶은 것, 없음.
하고 싶은 것, 역시 없음.
재수 학원 원장은 어떻게든 내 목표를 설정해 주고 싶었던 모양인지 어릴 적 장래 희망이며 좋아하는 여가 생활까지 끌어와서 대학 학과에 갖다 붙이려고 시도해 봤으나, 실패했다.
장래 희망은 복서였고 취미는 운동이었으니 어쩌겠나. 어릴 때 특기 사항은 죄다 스포츠로 점철되어 있었다.
대강 점수 맞춰 설정하기도 여의치 않았던 게, 난 전 과목 등수가 뒤에서 세는 게 빠른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때 담임이 나한테 의리 있다고 그랬다. 본인 먹고살 길 있는 놈이 애들 바닥 깔아 준다고.
그런데 순식간에 그 살길이라는 게 막혀 버렸으니 인생 모를 일이다.
“정열, 너 아직도 미련 있지.”
노란 현수막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아빠가 말했다. 나는 주차장에나 가기로 했다.
“그래도 네 엄마 앞에서는 티 내지 마라. 엄마 속상해. 엄마 속상하면 아빠도 속상해요.”
“난 눈치도 없는 줄 알아?”
“내 여자 울리지 마라.”
근엄한 선언에 진저리가 쳐졌다. 이 아저씨, 어디서 본 건 많아 가지고. 드라마 보는 게 취미이자 낙인 아빠는 종종 이렇게 극적인 대사를 인용해 듣는 사람을 질색하게 했다.
“도대체 그게 언제 적 광고야. 징그러워.”
“너희 엄마, 진이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내가 그걸 왜 몰라.
옆에서 고스란히 봤는데 모를 리가. 아무리 자식보다 내 여자가 우선인 아빠라지만 살짝 야속해지려고 한다.
“몰랐으면 내가 복싱 포기했겠어?”
먼저 운전석에 오른 아빠가 장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말대답했다. 효자답게 입이나 다물고 있을걸.
“나 대학 갈게.”
“그래…….”
“뭐든 할 만한 거 있겠지.”
복싱이 아니어도.
생략한 말을 알아차렸는지 아빠는 말이 없었다. 이럴 땐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게 편하다. 나도 입 다물고 안전벨트를 채우는데 핸드폰이 나를 대신해 시끄러워졌다.
[열아, 지금 바빠?ㅠㅠ]
무슨 알림인가 확인해 보니 기영이 형이 보낸 문자다. 바쁜지 묻는 거며, 물음 뒤에 붙은 울음이며 의도가 아주 확실한 문자였다.
이건 구조 신호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지라 지금 기영이 형이 처해 있을 상황이 대강 그려졌다. 전화를 걸자 아니나 다를까 곧장 연결됐다.
“뭔데요, 형. 또 최수호가 사고 쳤어요?”
- 열아…….
이 형, 또 울겠네. 최수호, 또 뭘 어쨌길래.
- 안 바쁘면 혹시 와 줄 수 있어?
기영이 형의 부탁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한테 선택의 여지가 있기는 하냐고.
더불어 아무 고민 없이 뛰어갈 수 있는,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는 게 조금은 안심됐다.
* * *
- 오늘 드라마 추가 촬영 있거든.
촬영 다 끝났고 당분간은 쉴 거네 어쩌네 하더니 최수호는 결국 오늘도 소처럼 일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수호가 단 몇 달이라도 제대로 쉬는 걸 본 적이 없다.
- 그런데 수호 상태가 좀. 열아, 네가 와서 봐 줄래?
더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요는 최수호한테 내가 필요하다는 거고, 그렇다면 나는 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기영이 형이 장소를 찍어 보내자 아빠는 군말 없이 거기까지 차를 몰았다. 내가 최수호한테 가는 건 우리 가족한테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뭘 찍을 때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외에서 지방까지 넘나드는 최수호지만 이번 촬영지는 다행히 멀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창고처럼 커다란 세트장에는 커다란 글자가 간판 대신 붙어 있다.
최수호 때문에 촬영 현장에 드나들 일은 제법 있었는데, 언제 가도 사람이 많고 부산스럽다. 카메라는 물론이고 붐 마이크에, 조명에, 장비들이 한가득하다. 스태프들은 다들 바쁘다.
입구를 찾아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앞이 가로막혔다. 팔에 철제 사다리를 안은 수염이 밤송이처럼 삐죽빼죽하게 난 중년의 남자가 내 앞에 있었다.
급히 옆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부딪혔다간 아슬아슬하게 안고 있는 저 사다리에 어디라도 얻어맞았을 게 뻔하다.
“오, 잘 피하네.”
사고가 날 뻔했는데 잘 피하네? 까슬한 수염 위쪽의 얼굴은 별반 놀란 기색도 없다. 바빠서 그렇겠거니 싶어 가던 길 가려는데 수염 난 남자는 계속해 말을 했다.
“이야, 마스크 좋다.”
“…….”
“어?”
앞에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밤송이 수염이 갑자기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가를 찾듯 꼼꼼히 뜯어보기까지 한다.
“지나갈게요.”
이상한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부딪혀 봐야 사고만 난다. 저 사다리에 얻어맞을 뻔했던 것처럼. 더군다나 지금은 남하고 사고 날 시간이 없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세트장 내부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아직 촬영 중은 아닌지 조립된 세트장만 중앙에 놓여 있었다. 기영이 형부터 찾으려고 핸드폰을 꺼내려는 차에 밤송이 수염이 다시 출현했다.
“어디 가? 여기 관계자 이외에 출입 금지인데.”
왜 따라오는 거지. 관련 없는 사람이면 쫓아내려고 이러나 싶어 잠시 멈췄다.
“친구가 관계자예요.”
“친구가 누군데? 스태프?”
최수호요, 대답하기 직전에 멀찍이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장 차림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카메라를 기웃대고 계신 분. 멀리서 보기에도 비율이 남다르다.
“야.”
이름도 떼 놓고 무작정 부르자 주변의 몇몇이 나를 돌아보았다. 더불어 모니터 확인에 여념 없던 장신의 남자도 내 쪽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들자 신장보다 얼굴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멀찍이서 봐도 이목구비의 깊이부터 다른 미남이다.
최수호가 누구한테나 호감을 살 수 있을 만한 반짝반짝한 왕자님 계열이라면, 저쪽은 선이 짙은 미남자였다. 최수호가 재벌가 도련님에 의사, 변호사라면, 저쪽은 자수성가 독고다이 형사, 정비사 정도.
“양용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