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래도, 그냥 지금 일이 싫은 거지 그 작품 자체가 싫은 게 아니니까 다시 살펴보게만이라도 해 줘.”
이렇게까지 말하니 뭐라고 더 할 말이 없다. 애는 써 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기영이 형이 로비에 성공한 로비스트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너무 믿지 말지. 부담되게.
게다가, 내 생각엔 그 작품이 싫은 게 맞는 것 같은데.
최수호는 단순히 일에 염증을 느끼거나 번아웃이 온 게 아니다. 힘들어서 그만둘 고비는 이미 10년간 충분히 넘겨 왔다.
최수호가 싫다고 하는 건 아마 어머니 때문일 거다.
내가 기영이 형을 배웅하고 돌아올 때까지도 최수호는 눈가를 가린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부모님 얘기에는 늘 민감했지만, 이렇게까지 구는 건 오랜만에 본다.
일 그만두고 싶다더니. 몰리긴 몰린 모양이다.
“한라봉 줄까.”
상자에 굴러다니는 한라봉을 하나 집어 들었다. 우울할 때 비타민 먹으면 기분이 나아진다던데 진짤까. 아무튼 피로 회복은 되겠지. 일단 까 주기로 했다.
헐거운 겉껍질 정도는 잘 벗겼는데, 최수호 흉내를 내느라 속껍질을 벗겨 보려고 했더니 대참사다. 엄지 아래서 과육이 짓이겨졌다. 한라봉 정도는 혼자 깔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게 무색하다. 살갗을 타고 과즙이 뚝뚝 떨어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눈썹을 모으고 고민하는데 최수호가 어느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멋쩍다.
“미안. 터지네, 이게. 다시 까 줄게.”
“괜찮아.”
최수호는 내 손목을 당기더니, 다 터진 과육을 그대로 입에 넣었다. 흠뻑 젖은 내 손가락까지.
과육을 씹어 넘기고 손을 적신 과즙을 정성스럽게 핥는다. 넋이 나갔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마른침을 삼켰다. 손가락에 혀가 감기는 감촉이 간지럽고 미끄럽다. 당장 빼내고 싶은데 그럼 더 이상해 보일까 봐 참는 중이다.
아닌가? 빼는 게 더 낫나? 최수호하고 키스한 이후로 뭐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헷갈린다.
“안 더럽냐.”
“하나도 안 더러워.”
최수호가 내 손톱을 슬며시 깨물었다. 그래, 빼는 게 낫겠다. 나는 당장 손을 뒤로 숨겼다.
“하지 마, 기분 이상해.”
입술을 핥으며 최수호가 내 다른 쪽 손을 끌어당겼다.
“기분 나빠?”
“…….”
“싫어, 열아?”
내 손등에 입술을 내리며 최수호가 지그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곧장 다시 손을 뺐다. 그래도 살갗에 감촉이 선명하다.
싫지는 않다. 그게 문제다.
최근 최수호하고 이런, 걸 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최수호가 고백하기 전에도 최수호와 내 사이는 유난스러웠지만 그걸 진심으로 싫다고 여긴 적은 없다.
최수호가 이런 식으로 닿는 게 정말 싫었다면 애초에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혼란스럽다.
나를 바라보던 최수호가 내게로 몸을 숙였다. 거리가 서서히 좁혀진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나 싶도록 조용하게 서서히.
최수호는 이렇다. 약해지는 순간을 기막히게 파고든다.
“그만.”
입술이 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까워질 즈음, 최수호의 코끝에 검지를 튕겼다.
딱밤을 놓자마자 최수호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맵시 있게 올라간 코끝이 금세 발갛게 물든다. 좀 세게 튕겼나?
“아파.”
“물티슈 줘, 손 닦게. 너도 입 닦아라, 과즙이라 끈적거려.”
아쉬운 듯 나를 힐긋거리던 최수호가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
“내가 알아서 생각할 거니까 재촉하지 마.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밀어붙이려는 거 하지 말고.”
“넘어와 주면 안 돼?”
“안 돼. 네가 그럴수록 복잡해져서 더 생각하기 힘들어지니까 하지 마.”
물티슈를 손에 말아 쥔 채 최수호가 맥없이 소파에 웅크렸다. 또 풀 죽은 시늉이다.
“이거 뭐야?”
대충 손을 닦고 화제를 돌릴 겸 테이블의 대본을 집어 들었다. 아까 이걸 보자마자 최수호의 얼굴이 굳는 걸 봤다.
대본을 슬슬 넘겨 보니 매번 보던 최수호 대본하고 좀 다르다. 눈썹이 저절로 구겨졌다.
“너 외국 가냐? 기영이 형이 아까 할리우드 어쩌고 하더니.”
하긴. 수호네 어머니가 거기서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배우라는 걸 생각하면 영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한때는 최수호 이름에 늘 수호네 어머니 이름이 앞서 나왔을 정도다. 모자 관계라도 커리어는 각자라더니 갑자기 수호 데려가려고 하시는 건 의외지만.
“할리우드는 무슨. 그건 그냥 형이 하는 말이고. 해외 촬영이 대부분인 거지, 외국 작품은 아니야.”
최수호가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대본을 테이블 모서리로 밀었다.
“이거 왜 하기 싫은데?”
“지겨워서.”
뭐가 지겹다는 건지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연기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자기 입으로 연기하는 게 재미있다고 말한 적은 없어도 최수호는 연기 일은 좋아한다. 옆에서 보면 안다.
“이거 때문에 배우 그만둔다고 한 거야?”
“어차피 안 될 텐데 붙잡고 있는 거 슬슬 지긋지긋해서.”
최수호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가라앉았다.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최수호의 말에는 여전히 주어가 없지만 나는 내용을 짐작한다. 수호가 왜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다.
최수호는 한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어 했다. 더도 덜도 아니라 딱 한 사람.
최수호가 몸을 더 바짝 웅크렸다. 덩치가 커서 그래도 소파 밖으로 다리가 빠져나간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최수호가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아웃복서의 문제점은, 피하기만 하기엔 링이 너무 좁다는 거다. 체력 싸움이다. 견제력이 흐려진 아웃복싱은 의미가 없다. 클린치를 걸고 시간을 벌어 봐야 조만간 먹힌다. 최수호는 자기 흐름을 잃고 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또 그 여자한테 질질 끌려가겠지.”
“…….”
“안 되는 건 그만둘 줄 알아야 하는데 왜 나는 그러질 못하지, 열아.”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니니까. 계속하는 게 쉽지 않듯 그만두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대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뭔가 싶다.
사실 그렇다. 원하는 것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서로 전혀 다른 길에 있다. 이따금 겹치기도 하지만 그건 마음이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징크스 같은 건 미신이다. 신인왕전에서도 형은 늘 하던 대로 자기 행운의 상징이라는 염주를 차고 나갔지만 사고는 벌어졌다.
형이 쓰러졌을 때 내가 아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불러도 봤다. 기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 잘하고 있어.”
최수호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이럴 때면 아직도 최수호가 배곯고 괴롭힘당하는 어린애인 양 애면글면 못 챙겨 안달하는 우리 부모님 심경이 이해가 간다.
우리 부모님이나 나로는 다 메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수호가 우리 집 애였으면 좋을 거라고 엄마는 종종 말하지만, 그렇게 될 순 없다. 혈연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최수호하고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수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다른 데서 넘친다고 빈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최수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속으로 기원하면서 나는 최수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기도는 부질없는 일, 원한다고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데도 바라고 마는 게 인간의 마음이니까.
* * *
왜 원수 같던 애들도 잘 때는 천사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최수호도 얌전히 자고 있으면 영락없이 천사다. 실제로 천사같이 생기기도 했고. 알맹이만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새 잠이 든 최수호의 이마를 쓸어 보니 뜨끈하다. 열 있네. 얜 피곤하면 열부터 난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소파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손을 붙잡혔다.
“가지 마.”
하여간, 최수호.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으면서 붙잡는 손만 억세다.
“맨날 그 소리냐. 내가 널 두고 어딜 간다고. 놔 봐.”
“싫어. 안 놓을래.”
“나 약 가지러 가야 하니까 좀 놔 보라고.”
잡힌 손을 휘휘 흔들자 최수호의 미간이 약간 좁혀 들었다.
“키스해 주면 놓을게.”
“너 그, 키스 타령 소름 끼치니까 그만해. 친구끼리 키스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그럼 뽀뽀해 주면 놓을게.”
“헛소리하지. 내가 네 약 가지러 가지, 내 약 가지러 가냐?”
“나 약 필요 없어. 뽀뽀해 주면 다 나을 것 같아.”
“미쳤나. 옆구리에 든 멍이 뽀뽀한다고 빠지냐? 놔, 쫌. 놔.”
힘으로 손을 뿌리치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근데 이러면 우는 애 억지로 떼어 놓고 가는 기분이 든단 말이다.
찝찝해서 약상자를 찾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최수호의 윗옷을 끌어 올리자 내가 낸 성대한 멍 자국이 보였다. 살도 흰 편이라 자줏빛 멍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운동하면서 부상은 물리게 봤는데 왜 최수호 몸에 난 상처에는 진저리가 쳐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다쳐도 이렇게 신경 안 쓰는데 얘가 다치면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연고를 꼼꼼하게 바른다고 한참을 조심조심 손을 놀렸다. 화한 약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여기저기 상처 나서 어떡하냐.”
대부분이 내가 낸 상처라 양심이 심히 찔린다. 물론 최수호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하고 몸이 생명인 애를 상하게 했으니 죄책감은 든다. 최수호 팬들이 알면 내 목을 조르고 싶어 하겠지.
“괜찮아. 촬영할 때도 원래 많이 다쳐.”
“그거랑 맞아서 나는 거랑 다르지.”
“난 너 때문에 다치는 게 더 좋아.”
“다치는 게 뭐가 좋아. 때리지 말란 말 돌려서 하냐?”
“때려도 돼.”
최수호의 대답에 한숨이 푹 나왔다. 때려도 되긴. 옛날부터 다치거나 아픈 건 지독히 싫어했으면서.
“옆에만 있어 주면 네가 나한테 뭘 하든 괜찮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
듣다 보면 막막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최수호의 코를 콱 틀어쥐자 최수호는 콧잔등을 얻어맞은 개처럼 놀란 얼굴을 했다.
“뭘 하든 괜찮은 게 어딨어? 내가 너한테 잘못하면 그러지 말라고 해야지, 최수호 이 멍청아.”
맹하게 눈을 깜빡이던 최수호가 이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