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알겠으니까…….”
내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누가 바깥에서 열심히 벨을 울린 덕이다.
딩동. 딩딩동.
“응, 알겠으니까?”
최수호는 뻔뻔하게 못 들은 척이다. 벨 소리가 더 이어지나 싶더니 이번에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수호야! 형인데 문 좀 열어 줘!”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 다음엔 애타는 외침이 쩌렁쩌렁하다.
“기영이 형이네.”
“없는 척하자.”
“뭘 없는 척해. 빨리 가서 문 열어.”
“너하고 둘이서만 있고 싶단 말이야.”
이걸 말이랍시고 하고 앉았다. 왜 기영이 형 전의 매니저들이 허구한 날 갈려 나갔는지 이해가 간다.
“없는 척하지 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저기요. 계세요? 수호 님…… 문 좀 열어 주세요.”
기영이 형의 호소는 이제 가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 갔다. 대답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부르는 점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게 짐작 간다.
“빨리 가서 문 열어.”
“한 시간만 있으면 갈 텐데…….”
한 시간을 세워 놓은 적 있다는 소린가. 사실이라면 기영이 형이 너무 불쌍하니까 그냥 한 말이길 빌어야겠다.
“네가 안 열면 내가 연다.”
때마침 떨어지기도 좋은 핑계다. 나는 최수호의 팔을 떼어 내고는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탕탕.
복도에 울려 퍼지던 쇳소리가 드디어 그친다.
“수호야, 웬일로 이렇게 빨리…… 열아?”
나를 본 기영이 형이 눈을 홉떴다.
“최수호 안에 있어요.”
“둘이 있었어?”
“네.”
“그러니까 내가 수호가 너하고 같이 있는 시간을 방해한 거네.”
기영이 형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말이 어째 이상하다.
“어.”
내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렸다. 돌아보니 최수호가 싸늘한 얼굴로 서 있다. 짜증 났네, 최수호.
“형이 방해한 거야.”
말투부터 찬바람이 쌩쌩 분다. 다른 사람들한테 나한테 하는 거 반의반만 해도 싸가지 없단 소린 안 들을 텐데. 물론 성격 나쁘단 소린 여전히 듣겠지.
“음……. 팀장님이 너 이거 갖다 주라고 하시길래.”
기영이 형이 흔들리는 눈으로 발치에 내려 두었던 상자를 끌어안았다. 상자 위에 또박또박 글자가 쓰여 있다. 유기농 한라봉. 상자 표면에는 금색 스티커도 몇 개 붙었다.
“한라봉이네.”
“백 퍼센트 유기농.”
기영이 형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리고 이것도 갖다 주라고 하셔?”
상자에 겹쳐 놓인 종이 철을 흔들며 최수호가 빙그레 웃었다. 앞에 쓰인 글자로 봐서는 무슨 시나리오 같다. 기영이 형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빠르게 흔들렸다.
“팀장님이 너한테 꼭 대답 받아 오라고…….”
“대답 이미 진작에 드렸는데 끈질기시네.”
“……줄 거 다 줬으니까 난 이만 갈까?”
“응. 내일 봐.”
최수호가 그대로 현관문을 닫았다. 아주 순식간이다. 한라봉 상자를 든 채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기영이 형의 모습이 문 너머로 잔상처럼 사라졌다.
“최수호, 어른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굴지 말랬지.”
한 소리 하자 최수호가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찬바람 몰아치던 무표정에서 불쌍한 강아지 표정으로 바뀌는 건 또 얼마나 순식간인지 놀라울 지경이다.
“하지만 열아.”
“문 다시 연다.”
최수호는 어깨만 늘어뜨릴 뿐 더 뭐라고 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아직 상자를 떠안은 모습 그대로 서 있는 기영이 형이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형, 들어오세요.”
기영이 형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최수호.”
“응?”
“한라봉 정도는 나도 깔 수 있거든.”
내 말을 듣고도 최수호는 부지런하게 한라봉 까기에 여념이 없다. 겉껍질뿐만 아니라 투명한 속껍질까지 정성스럽게 벗겨서 내 입에 넣는다. 거실에 상큼한 향기가 진동했다.
“그래도 까 주고 싶어서.”
이럴 때 최수호가 주는 걸 안 받아먹었다간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알고 있는 고로, 입에 들어오는 대로 부지런히 먹었다. 남이 보는 앞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해도 상대가 기영이 형이라 민망함이 좀 덜하다. 기영이 형도 이런 꼴 한두 번 보는 게 아니니까.
“형은 안 드세요?”
“나? 아니, 아니야. 열이 너 다 먹어. 수호가 까 주는 거 먹다간 난 체할…… 난 한라봉 알레르기가 있어서.”
가만히 있는 사람 앞에서 어미 새와 아기 새를 연출하고 있으려니 겸연쩍어 묻자 기영이 형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심경인지 다 안 들어도 알 만하다. 저번에 볼 때보다 증세가 심해진 거 같은데. 최수호가 요즘 진짜 어지간히 사람 괴롭히나 보다.
이 와중에 최수호는 한라봉을 곱게 까서 내 입에 넣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영이 형이 앞에 있는데 쳐다도 안 보는 싸가지가 대단하다.
“시놉시스 어때, 수호야?”
눈치를 살피던 기영이 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최수호는 여전히 눈길도 안 준다.
“별로.”
“너 그거 안 읽어 봤잖아.”
일 얘기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은데. 기영이 형이 다 죽어 가는 얼굴이라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내 말에 최수호는 다시 시놉시스를 집어 들었고, 기영이 형은 다정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기영이 형이 나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날 보는 눈빛이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열아, 내가 한라봉 마저 까 줄까?”
“됐어요. 저야말로 체하겠네요.”
“내가 우리 팀장님한테 말할게, 너 우리 회사 들어올래? 수호 전속으로 오면 우리 팀원들 다 쌍수 들고 환영할 텐데. 팀장님은 행복해서 정신 나갈지도 몰라. 수호 너도 좋지?”
기영이 형의 자신만만한 물음에 종이 철을 들여다보던 최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열이는 복싱해야 해서 매니저 못 해.”
최수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맞다, 운동하지.”
기영이 형은 선선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뇨. 이제 그만뒀어요. 대답하면 그만인데 그냥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괜스레 울렁거렸다.
당연하다는 듯 내가 복싱을 할 거라고 말하는 최수호가 신기하다. 나조차 할 수 없는 말을.
사실이 어떻든, 그 확신이 싫지 않았다.
“진짜 아깝게 됐다. 너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수호 옆에 붙어 있기만 해도 되는데. 그럼 우리 팀장님 탈모도 괜찮아질 거고, 내가 증원해 달라고 할 때마다 사무실에 칼바람 불지도 않을 거고, 내 위장병도…….”
“나 듣고 있어. 사람 앞에 두고 애물단지라고 대놓고 말하네.”
말없이 종이 철만 넘기던 최수호가 툭 말을 던졌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영이 형이 소스라쳤다.
“애물단지라니? 누가 그래? 우리 대배우님을 두고 누가 감히? 너랑 작업하고 싶어서 안달 난 PD들, 감독들 줄 세우면 충무로에서 상암까지 줄을 선다. 그럼, 그럼!”
“다 읽었어.”
기영이 형이 필사적이거나 말거나 최수호는 별 반응 없이 읽던 걸 내려놓았다. 둘이 맨날 저러나. 처음 봤을 때부터 저런 분위기였던 거 같긴 하다. 이젠 좀 나아졌을 줄 알았더니.
“어때?”
“나쁘지 않네.”
“그렇지? 이게 요즘 충무로에서 핫해요. 내가 또 너한테 질 떨어지는 거 갖다 주고 그러지 않잖아. 우리 수호 보는 눈을 믿으니까.”
시놉시스를 내려놓은 최수호는 다시 한라봉을 까기 시작했다. 다시 말이 없다.
기영이 형은 열심히 최수호를 기웃거리고 최수호는 나한테 한라봉을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바쁘다. 이러다 진짜 내가 체하겠다.
“수호야? 우리 최 배우님?”
“어.”
“시놉 맘에 든다며?”
“안 해.”
단호하다 못해 서릿발이다. 찔끔 움츠러드는 듯하던 기영이 형이 메고 있던 가방에서 슬그머니 종이 철을 하나 더 꺼냈다.
“그럼 너희 어머님이 추천하신 것도 있……는……데…….”
“…….”
“이게 무려 해외 투자가 100억이 넘게 들어간 대작이야. 제작비 400억 육박. 알잖아. 수출 겨냥하고 사이즈 키운 영화인 거. 해외 배우들도 엄청 나오고. 이거는 너희 어머님 아니어도 무조건 해야 하는 작품이라니……까…….”
“…….”
“우리 수호, 할리우드 가야지……?”
기영이 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최수호한테서 찬바람이 쌩쌩 분다. 거실이 순식간에 남극 한가운데로 변했다.
“이건 그냥 준 거고 그게 진짜지?”
기영이 형이 내민 종이 철을 내려다보면서 최수호가 테이블에 던져 놓은 시놉시스를 손으로 툭, 튕긴다. 최수호의 입술 사이로 길고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두고 가면 내가 내일 팀장님한테 직접 얘기할게요.”
피로가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목소리가 분위기를 삽시간에 어둡게 만든다. 말을 마친 최수호가 소파에 기대 미간을 주물렀다. 기영이 형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대다 시놉시스만 가방에 주워 담았다.
“알았어. 나 갈게…….”
기영이 형이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기영이 형을 따라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 최수호는 크게 움직이지 않고 손 인사만 했다.
“열아, 네가 수호 좀 설득해 주라.”
최수호로부터 멀어지자 기영이 형은 나를 붙잡았다. 현관에서 인사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기영이 형 손에 이끌려 신발을 구겨 신고 문을 나서고 있었다.
“내가 팀장님한테 까여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거 정말 놓치기 아까운 기회야.”
복도로 나를 끌어낸 기영이 형이 문을 닫고는 소리 죽여 소곤거렸다.
기영이 형이 나한테 부탁하는 건 다 수호와 관련된 일이다. 제발 최수호 좀 말려 달라거나, 최수호 좀 찾아 달라거나, 그 외에도 기타 등등. 기영이 형은 최수호의 모든 길이 나로 통한다고 굳게 믿는 눈치다.
“우리 회사에서도 이 작품 하고 싶어 하는 애들 줄 섰어. 혁준이 알지?”
“아, 용배요.”
“응, 용배……. 걔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아무튼. 걔도 이거 하고 싶어서 난리야.”
그럼 용배 시키면 되지, 왜 굳이 싫다는 애를.
“수호가 하기만 하면 대박이라니까. 성인 배우로 출발 지점인데 작품 선택 중요하단 말이야.”
“본인이 하기 싫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