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88)

13.

“또 오버하시네.”

“오버는. 너는 내 마음을 몰라서 그래. 나 요즘도 잠을 못 자. 너하고 진이가 자꾸 꿈에 보여서.”

천 관장님이라면 그럴 수 있지. 형이 쓰러져 구급차를 탈 때 천 관장님은 우리 엄마만큼이나 많이 울었다. 원래 감성적인 분이시긴 하지만 그땐 정말 놀랐다.

형의 사고 후에도 천 관장님은 포기하지 않고 병원을 드나들었다. 당장 어마어마했던 수술비를 선뜻 내주겠다고 나섰고 형의 재활 치료에 우리 식구만큼이나 관심이 많았다. 천 관장님은 우리 형이 링에 복귀하길 바랐다. 형도 처음에는 복귀하려는 것 같았다.

사고 후로 형은 달라졌다.

형이 천 관장님한테 했던 짓을 돌이켜 보면 천 관장님이 아직 형이나 날 챙겨 주시는 게 신기한 일이다. 나라면 저렇게 못 한다.

“제발 복싱 계속하면 안 되겠냐.”

이 대단한 사람이 나한테 우는소리를 하고 있다니. 천 관장님 팬들이 보면 나 가만 안 두고 싶어 할 텐데. 쓴웃음이 나왔다.

“진인 본인이 안 한다니까 어쩔 수 없더라도, 나는 너 꼭 계속했으면 좋겠다.”

내 손을 움켜쥔 바윗돌 같은 손에 굳건한 힘이 실린다. 이 주먹을 동경했다. 이 손이 가리키던 빛나는 무대, 영화에서 봤던 치열한 링, 순수하게 나와 상대만 생각하면 그만인 장소에 가고 싶다.

“계속하고 싶은 거 맞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진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데.

천 관장님은 내 대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오신 것처럼.

“안 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 대신 답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우리 형이 나와 천 관장님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열이 복싱 안 해요, 관장님.”

형이 단호하게 말했다.

체육관이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천 관장님도, 뒤로 빠져 있던 지원이 누나도 입을 다물고 나와 형을 힐끔거렸다. 내게 머무르는 형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천 관장님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네. 저 복싱 안 해요.”

이미 결론 난 얘기다. 흔들릴 거 없다.

안 하기로 했으니까 지킬 거다. 그래야 한다.

천 관장님의 눈썹이 안쓰럽게 무너진다.

“관장님,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형이 천 관장님을 불렀다. 나는 애꿎은 로프를 당겨 댔다.

“와, 나 방금 국내 복싱계 별들을 눈앞에서 다 봤네. 정진에, 정열에, 천수관 선수까지.”

지원이 누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붙였다.

“저는 왜요. 천 관장님이나 별이지, 우리 형하고.”

천 관장님이야 국내 복싱계에서 모르면 간첩인 인물이니 더 말할 것 없고, 우리 형도 한때는 만만치 않았다.

복싱계에서 한 몸에 기대를 모았던 떠오르는 샛별, 그 천수관이 업어 기른 애제자. 미들급 금메달리스트 정진.

무패 행렬로 한때는 끝내주는 별명까지 얻었다. 팬도 꽤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프로 전향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불행하게 은퇴한 극적인 스토리로 더 유명하다. 부상으로 은퇴하고 차린 체육관에 그럭저럭 사람이 모일 정도의 유명세는 되니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처음 지원이 누나도 우리 형 보러 여기 등록했다고 그랬다. 팬이었다나.

“무슨 소리래. 정열, 너도 유명하잖아. 기사도 엄청 떴는데. 형제가 쌍으로 인재 났다고 말들 엄청났지.”

“저 알아보는 사람 없던데요.”

“알아봤는데 네 눈이 무서워서 말 못 붙이는 거 아니고?”

그런 가능성도 있었네. 어깨를 으쓱이자 지원이 누나가 낄낄대며 내 등을 두드렸다.

“관장님은 너 절대 복싱 다시 안 시킬 건가 보네.”

“…….”

“하긴…….”

지원이 누나가 말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안다. 형이 왜 나를 링 위로 올려보내기 싫어하는지, 내가 누구보다 가까이서 봤다.

지난 1년은 내가 겪어 본 그 어떤 경기보다 지난한 사투였다. 이제 끝난 거라면 다신 재경기를 치르고 싶지 않다.

‘너 나처럼 되고 싶어서 그래?’

철들기 전부터 항상 나는 형처럼 되고 싶었는데.

‘다시 아무것도 안 보일까 봐, 못 걸을까 봐…… 무섭다, 열아…….’

이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지금도 형을 보면 가끔 좀, 울고 싶다.

“정열, 잠깐 와 봐.”

체육관으로 돌아온 형이 라커룸 쪽을 손짓했다. 어깨에 힘이 쭉 빠진다. 제발 천 관장님 얘기하려는 건 아니면 좋겠다. 형하고 복싱 얘기는 하기 싫다.

“엄마가 수호 보약 가져다주라고 하시더라.”

다행히 복싱 얘기는 아니다. 형이 천 관장님이 가져온 비닐봉지 옆에 나란히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뭐? 보약?”

“오늘 한의원 가서 지어 오셨대.”

“미쳤다. 아빠한테도 잘 안 지어 주던 보약을.”

“…….”

“우리 박 여사, 최수호 팬클럽 회장인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투덜거려도 형은 이렇다 할 맞장구 없이 묵묵하다.

“관장님이 뭐라셔?”

형은 기어이 천 관장님 얘기를 꺼냈다. 보약 얘기만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잘 지내냐고.”

“너 다시 오라고 하시지?”

“인사 삼아 하시는 소리지, 뭐.”

“엄마나 아빠한텐 오늘 관장님 뵀단 소리 하지 마. 특히 엄마한텐.”

“어, 알아.”

“너 찾아오셔도 만나지 마.”

“…….”

“형 위해서 그렇게 해.”

‘열아, 형이 부탁할게. 형 위해서라도 복싱 그만둬라.’

지난 1년 동안 형한테 평생 받을 부탁을 한꺼번에 받는 기분이었다. 절대 아쉬운 소리 안 하던 인간이었는데. 형은 절대 꺾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최수호 보약 갖다 주고 올게.”

오늘은 엄마가 나한테 심부름이라도 시켜서 다행이다. 형의 저런 얼굴만 아니라면 뭐든 좋다. 그게 나한테 열렬히 고백한 내 소꿉친구하고 단둘이 보는 일일지라도.

상자를 집어 들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자 형이 라커룸에서 나갔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나는 잠시 지켜보았다.

한때는 기능을 거의 회복했던 형의 다리는 합병증이 생기면서 다시 상태가 나빠졌다. 뇌혈관연축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멀쩡한 다른 눈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형은 말했다.

티셔츠에 머리를 넣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옷 속은 닫힌 방처럼 어둡다. 닫힌 공간에서, 나 혼자다.

‘계속하고 싶은 거 맞지?’

천 관장님의 물음이 머릿속을 뱅뱅 돈다.

하고 싶다는 것만으로 계속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걸 이제야 배워 가는 중이다.

내가 더 예리해지면, 더 빠르게 움직이면, 대담해지면 누구든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패배를 맛보기 전까지는 뭐든 할 수 있으리라는 찬란한 환상이 나를 앞으로 뛰게 했다.

난 내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결국 졌다.

이미 쓰러진 형을 다시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내 입으로 그만두겠다고 했다. 정말로 진다는 건 그런 거였다. 앞을 못 보게 되는 것.

인생은 정당한 적수가 아니다. 룰을 어기고 발목을 건다. 몰래 뒤로 다가와 훅을 때린다.

나는 예기치 못한 공격에 보기 좋게 뻗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링에 고꾸라져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진 거다.

보약이 든 상자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체육관을 나서 최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열아!

전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최수호가 내 이름을 외쳤다. 오늘따라 그게 반갑다.

“집이냐?”

- 나? 지금은 회산데.

“그래? 엄마가 너 보약 주래서 가져가는 길인데. 경비실에 맡겨 놓을 테니까 좀 찾아가라.”

- 우리 집 가는 중이야?

“어. 야, 경비 아저씨한테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집 올 때 찾아서 올라가. 알았지.”

- 나 지금 갈게.

“회사라며. 뭘 오기까지 해. 그냥 경비실 맡길 테니까…….”

-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예상은 했지만 다시 전화를 걸어도 안 받는다. 열심히 뛰어오는 중이시겠군.

[올 거면 빨리 와.]

메시지를 보낸 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기꺼이 나한테 뛰어올 사람이 있다는 건 사실 위안이 된다. 최수호가 있다는 건.

* * *

확 보약 문 앞에다 두고 집에 갈까.

문 앞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으려니 갈등 때린다. 앞으로 10분만 더 기다리고 연락 없으면 가야겠다.

경험상 최수호는 이때쯤 나타난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타이밍은 기막힌 놈이다.

“열아!”

아니나 다를까 내가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볼 즈음 최수호가 등장했다. 헐레벌떡 내 쪽으로 달려온 최수호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 계속 기다렸어?”

“그럼 어디서 기다려.”

“비밀번호 알잖아.”

최수호가 키패드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야 비밀번호는 안다. 내 생일이니까.

최수호 비밀번호야 뻔하다. 내 생일, 내 첫 대회 우승 일, 나하고 처음 만난 날.

처음엔 유난이다 싶었는데 이젠 익숙해졌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요즘은 최수호한테 너무 적응해 버린 건 아닌가 무섭지만.

“그래도 남의 집에 막 들어가 있긴 좀.”

“남의 집 아닌데.”

“그럼 내 집이냐.”

“응.”

“그래. 친구 잘 사귀어서 벌써 집도 갖고, 내가 호강한다.”

천 관장님 말투가 딱 이랬는데.

‘제자 잘 둬서 내가 호강한다.’

입맛이 괜히 쓰다.

“진짜 호강시켜 줄 수 있어.”

“뭘, 어떻게 호강을 시켜 주게. 성이라도 사 줄 거냐.”

“응.”

단숨에 대답이 돌아온다.

“응, 해 줄게.”

“……돈 많아서 좋겠다.”

“응.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수 있을 만큼 있는데.”

“갑부 나셨다.”

고령 갑부면 흔들릴 자신 있다.

‘최수호가 사귀자고 하면 고민해 봤을걸.’

지원이 누나가 한 농담들이 대뜸 떠오른다.

“사람들이 이래서 다 너한테 넘어가나.”

얼굴, 몸, 돈, 성격……은 아니지만. 마지막만 빼고 다 가지긴 했네.

“이제 나랑 사귀고 싶어졌어?”

“보약 어디에다 둬? 부엌?”

“열이 너만 좋으면 나는 언제든 지…….”

“부엌에 둔다.”

할 말만 하고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자 최수호가 시무룩한 얼굴로 따라왔다.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자 의자를 끌어다 내 앞에 앉는다.

“엄마가 오늘 지어 온 따끈따끈한 보약이래. 너 아프다는 말 듣자마자 한의원 달려가셨나 보더라.”

“열아, 기분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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