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88)

10.

“최수호 너…… 진짜 나 좋아하냐?”

목이 바싹바싹 탔다. 상황의 심각성이 해일처럼 몰려오고, 뒤통수가 다 얼얼하다. 최수호는 앞서도 지겹게 말했건만 나 혼자 처음 듣는 것처럼 떨고 있다.

“너 아니면 안 돼.”

왜 하필 나지.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수호한테 저런 말을 들으면 꼼짝 못 하고 넘어갈 여자애들이 수두룩할 텐데. 최수호가 저 얼굴로 호소하면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인 걸까.

“너도 좋아해 줘.”

“…….”

“내가 잘할 테니까 나만 좋아해 주면 안 돼?”

그런 게 내 마음대로 됐다면 이러고 있겠느냐고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누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내 멋대로 됐다면, 나도 지금…….

만일 내 뜻대로 최수호를 좋아할 수 있었다면 지금 나는 최수호를 좋아하기로 결심했을까.

내가 생각해 놓고도 충격이다. 이러니 최수호가 막무가내로 굴지.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나 상처받아서 무슨 짓이든 저지를지도…….”

저런 식으로 사람 몰아붙이기나 하고.

“협박하지 마.”

“협박이 아니라 진짜 그럴 것 같아서 하는 얘긴데.”

“…….”

“너한테까지 버려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제 그냥 다……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좋아. 끝내 무뎌지는 소리가 덧없다.

거짓말이 아니다. 연기도 아니다. 최수호는 누구든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 만큼 연기를 잘하지만, 나는 최수호의 거짓말만은 알아볼 자신이 있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그 말을 외우기라도 하듯 최수호는 천천히 읊조린다. 한 자씩 삼키다 보면 말이 체화되기를 바라는 사람 같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전이라면 최수호 상태가 이 꼴이 되기 전에 알아챘을 텐데. 내 생각만으로 벅차서 미처 몰랐다.

“그런 식으로 좀 말하지 마. 너 좋다는 사람 널리고 깔렸는데 왜 하필…….”

하필이면, 나냐.

내 여자 친구도 너 좋다는 판국에.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최수호는 진작 연애 중일 거다.

“생각해 볼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 정도다. 솔직히 뭘, 어떻게, 어디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힌다. 벌써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다.

최수호랑 사귀어? 최수호랑 손잡고 영화 보러 가고, 똑같은 티셔츠 입고, 밤새도록 전화하고.

미친. 이미 다 해 본 거네.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생각만 조금 바꿔도 많은 게 달라 보인다더니. 그 말뜻을 이런 식으로 몸소 깨닫고 싶진 않았는데.

아무튼 도저히 머리에 그림이 안 그려진다. 남자를, 최수호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적당히 사귀겠다고 하면 되잖아. 달래 주고 넘어가면 되는데. 나중에는 적당히 헤어지고.”

나를 쳐다보던 최수호가 무슨 좋은 팁이라도 주는 것처럼 간단히 말했다. 기함하겠다. 적당히 사귀긴. 연애가 중간고사도 아니고 뭘 적당히 해.

“사귀는 걸 어떻게 적당히 하냐? 너는, 야. 헤어지는 게 쉬워?”

뇌가 지끈거리는 혼란 속에는 서운함도 있었다. 나는 수호와 내 관계가 지금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최수호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게 섭섭하다.

사귀다 헤어지면 전처럼 못 만날 텐데 그래도 된다는 건가. 보통은 그래서 친구에서 애인도 되려다 마는 거 아니냐고.

“네가 헤어지고 싶을 때 다시 헤어지고 친구 해도 돼.”

“그딴 소릴 잘도 한다. 냉장고 자석이야? 붙였다 뗐다. 야, 그럴 거면 애초에 사귀자고 하지 마.”

“어차피 나는 너하고 헤어져서 못 사니까 열이 네가 그만 사귀자고 하면 알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잖아.”

얼이 빠졌다. 최수호는 나하고 뭔가 단단히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수호는 나하고 애인이 되기 위해 형제이자 친구이기를 포기하려는 게 아니었다. 형제이자 친구이자, 애인까지 하고 싶은 거였다.

욕심도 더럽게 많다. 물론 심보를 지적하기엔 태도가 지나치게 저자세이긴 하다.

“무슨 헛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 네 머릿속이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너 말 그런 식으로 하지 마.”

“무슨 말?”

“그런 식으로…… 함부로 해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나오는 대로 뱉었다. 최수호는 종종 저럴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시건방지고 무신경한 주제에, 자기가 미남이라는 것도 잘 알다 못해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그러는 걸까.

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곤 하는지.

최수호가 그런 소릴 하면 속상하다. 어릴 때 생각도 나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던 최수호가 곧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열이는 진짜 다정해.”

최수호의 눈이 반쯤 접힌다. 눈빛이 몸서리치게 달착지근하다. 앞에 최수호를 추앙하는 소녀 떼들이 있었으면 죄다 쓰러져 나갔을 미소다.

“사랑스러워.”

“뭐래.”

사실 나도 좀 버겁다. 허구한 날 보는 게 저 얼굴인데 왜 내성이 안 생기는 걸까. 분명 내 잘못은 아니다. 최수호 얼굴 탓이지.

“얼마나 기다려야 해?”

“……나도 몰라.”

“나 참을성 없는 거 다 알면서.”

“이참에 좀 길러라.”

“안 돼. 못 참아.”

뭐 중대 발표라고 말투가 단호하기 짝이 없다.

“기다려 줄 테니까 키스는 하게 해 줘.”

“또 이상한 소리 한다.”

“이미 했는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

너무 당당하게 주장하는 통에 저게 진짜 타당한 소리는 아닌지 헷갈린다. 고백받고 생각 좀 해 보겠다는 사람한테 생각하는 동안 키스는 하게 해 달라니.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그럴싸하게 말하는 것도 재주다.

“제발.”

반응할 기회도 주지 않고 최수호가 내 목덜미를 감았다. 몸이 아래로 끌려 내려간다. 천천히, 차근차근.

벗어나려면 그럴 수 있었는데도 피하지 못했다.

가까워지는 최수호의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눈썹을 구기면서도,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는 최수호의 저 눈만 보면 꼼짝을 못 하게 된다.

벌꿀처럼 끈적대는 눈동자. 나를 애타게 응시하는 최수호의 눈.

입술이 서서히 맞닿았다. 포개진 입술에서 달콤한 숨과 열기가 느껴진다. 최수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샅샅이 내 표정을 살피는 시선이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섭다니. 웃긴 얘기다.

입술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목 뒤를 감싸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기어든다. 분명 입술만 겹칠 뿐인데 점점 공기가 야릇하게 달아오른다. 최수호의 입술이 조금만 움직여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도저히 안 되겠다.

더 참지 못하고 나는 최수호의 어깨를 떠밀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목에 감긴 팔이 풀린다.

“…….”

“…….”

몸을 떼어 내고도 최수호와 내 가빠진 숨소리가 한동안 주변을 어지럽혔다. 한바탕 뛰기라도 한 양 숨결이 거칠다. 입술에 아직도 감각이 남아 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어색한 공기를 견디기 힘들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너 촬영 바쁘다면서 밖에서 이런 것만 하고 다녔냐?”

고집부리면서 눈웃음으로 사람 녹여서 입술 들이대기나 하고. 괜히 입술을 벅벅 문지르는 나를 최수호는 싱글벙글하며 바라보았다.

“연예계 무섭다더니.”

투덜대자 최수호가 내 손을 쥐고 만지작댔다. 손바닥 안쪽을 비비는 손길이 간지럽다.

“너하고밖에 안 했어.”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닌데. 네가 처음이야.”

최수호가 손장난을 치다 말고 내 손에 입 맞췄다. 이딴 낯간지러운 장난질은 어찌나 잘하는지.

“이런 거 하고 싶은 사람, 너밖에 없어.”

어느덧 몸을 일으킨 최수호가 내 손등에 입술을 비빈다. 입 맞출 때의 감촉이 떠올라 목이 막혔다. 피가 통하지 않을 때처럼 손이 저렸다.

“좋아해.”

저놈의 좋아한다는 말 좀 그만하면 좋겠다. 들을 때마다 기분 진짜 이상하니까.

“손 닳겠다, 그러다가.”

“안 닳게 조심할게.”

손을 빼려 힘을 주자 최수호가 지그시 나를 올려다본다. 이런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닌데.

나는 손을 맞잡지도, 그렇다고 빼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버텼다. 최수호의 입술이 조금씩 손목으로 올라온다. 저린 감각도 최수호의 입술과 함께 기어올랐다. 독에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뭔가 좀, 이상해질 것 같다.

“열아, 너 방에 있니?”

숨 막히는 순간을 깬 건 바깥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부리나케 최수호의 손아귀에서 손을 잡아 뺐다.

“방에 있어요.”

심장 벌렁거린다. 오늘따라 엄마 목소리가 반가워 죽겠다.

“왜 밥 안 먹었어? 오는 길에 호떡 사 왔는데 나와서 먹을래?”

“지금은 좀…….”

“왜? 방에서 뭐 하는 중이야?”

엄마가 알면 놀라 자빠질 걸 하는 중이지. 엄마 아들 최수호하고 키스했어. 벌써 두 번째야. 나 당장 내일 연예 프로그램에 떠도 놀라지 마.

“수호 와 있어서.”

“수호가 와 있어?”

엄마가 놀란 듯 되물었다.

“네, 저 방에 있어요.”

“들어가도 되니? 수호도 호떡 먹을래?”

“최수호 아프대.”

다급한 발소리가 내 방으로 직진한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호들갑스러운 표정의 엄마가 등장했다.

“수호 아프니?”

“별거 아니에요. 몸살 기운이 좀 있어서요.”

“기영이 형이 그러는데 그간 응급실도 왔다 갔다 하고 계속 아팠대.”

“어머, 세상에. 얘는 아프면 일찍일찍 말을 하지! 지금 죽 해 줄까? 따뜻한 차 좀 마실래?”

최수호 아프다는 말에 엄마 표정이 한껏 심각해졌다. 조금만 있으면 전복죽에 생강차가 내 방으로 배달될 기세다.

망설이는지 엄마와 나를 번갈아 보던 최수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확인하는 최수호의 미간에 얼핏 힘이 들어간다.

“괜찮아요. 저 일 때문에 지금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다시 일하러 갈 거구나. 적어도 아직 정말 그만둘 생각은 없나 보다. 왜 내가 안심하는 걸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이러다 애 잡겠다.”

“열이가 간호해 줘서 나아졌어요.”

“열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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