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지런히 내 접시를 채우는 건 다름 아닌 최수호다. 껍질을 까던 손길을 멈추고 최수호가 눈매를 부드럽게 접는다.
“너 다리 좋아하잖아.”
너, 나 옹졸해 보이라고 일부러 이러냐. 따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최수호는 원래 이런 식이다.
우리 엄마 말에 따르자면 나는 힘만 세지 손에 섬세한 맛이 부족해서, 새우니 오렌지니 껍질이 있는 건 모조리 엉망으로 만들었다. 껍질을 까려고 손을 놀리면 살이 뭉텅뭉텅 으깨져서 먹을 수 있는 게 얼마 안 됐다.
어느 날, 조생 귤을 반쯤 터뜨려 버린 날 보다 말고 최수호가 남은 귤을 까기 시작했다. 나는 최수호가 까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때 이후로 최수호는 껍질이 있는 건 죄다 자기 손으로 까 주려고 한다.
“고맙다.”
떨떠름하게 말하자 최수호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찝찝하다. 아까 있던 일을 생각하면 얘하고 마주 앉아서 게나 먹고 있을 게 아닌데. 이 와중에 게는 맛있고 난리다.
열심히 게를 까는 최수호와 그걸 받아먹는 나를 가족들은 말없이 따뜻한 눈으로 보고 있다. 체하겠다.
“먹다 말고 어디 가니?”
결국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앉아서 더 먹다간 백 퍼센트 체한다.
“내 방. 다 먹었어.”
“아직 남았는데 더 먹지?”
“배불러. 그리고…….”
체중 조절해야 해. 순간 그렇게 말할 뻔했다. 이젠 할 필요도 없는데.
식탁에 앉은 형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예리한 눈이 내 속을 꿰뚫어 본 것 같아 억지로 몸을 돌린다. 우리 형 눈이야 원래 저 모양으로 생겨 먹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오늘따라 자꾸 지레 찔린다.
비밀이 많아지면 이런 법이다. 나는 원래 뭘 숨기는 데 서툴다.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으려는데, 닫히기까지 한 뼘을 남겨 두고 문이 덜컥 멈췄다. 갑자기 느껴지는 저항에 눈살을 찌푸리자 아니나 다를까, 벌어진 문 너머로 최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 줘.”
얼마 전에 본 뱀파이어 영화가 떠오른다. 허락 없이는 집에 못 들어오는 뱀파이어가 주인공한테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최수호도 그거하고 좀 닮았다. 어떤 부분이 닮았냐면, 얼굴이.
“가라.”
최수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꾸역꾸역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다칠까 봐 마음 놓고 세게 문을 닫지도 못하겠다. 그러니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최수호는 기어이 안으로 들어왔다. 괜히 힘만 뺐다.
“왜 더 안 먹어? 체급 때문에?”
씩씩거리는 나를 앞에 두고 최수호가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방금 문을 사이에 둔 힘 싸움 따윈 없었다는 투다. 엄마, 아빠 때문에 이걸 확 걷어차서 쫓아낼 수도 없고.
“체급은 무슨. 경기 나갈 일도 없는데.”
“나갈 수도 있지.”
“우리 엄마, 아빠 졸도하는 꼴 보고 싶냐?”
“나가고 싶잖아.”
당연히 하고 싶다. 경기에 나가서 이기고, 또 다른 경기에 나가고 싶다. 챔피언이든, 국가대표든 하고 싶다. 운동은 계속하고 있지만 경기에 나갈 수 있을 때와는 느낌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목표가 사라지면 방향도 잃게 된다.
내가 최수호에 대해 아는 만큼 최수호도 나에 대해서라면 잘 안다. 혹시 내가 복싱을 그만두고 어떤 기분인지도 짐작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멋쩍어서, 나는 괜히 인상을 썼다.
“그런 얘기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마라. 당분간 너 안 본다고 했지? 나가.”
“나 너 안 보면 못 사는데.”
“미친 소리 그만하고 나가라.”
“미친 소리 아니고 진짜야.”
배우라서 그런가. 느끼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난리다.
“약 먹었냐?”
질색하자 최수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왜 또 들러붙는데.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한 걸음씩 피하다 보니 어느덧 뒤가 침대다. 자꾸만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다.
원래 거기 앉으려고 했던 것처럼 매트리스에 주저앉자 최수호가 덩달아 내 앞에 앉았다. 최수호는 바닥에 앉았는데도 눈높이 차이는 크지 않다. 분명 어릴 땐 나보다 작았는데 어느 틈에 이렇게까지 자란 건지. 밥도 많이 안 먹는 게.
얌전히 앉은 최수호가 내 눈치를 살폈다. 최수호가 황동색 눈으로 올려다볼 때면 괜히 입이 마른다. 잘생긴 게 깡패라고, 눈깔을 어떻게 떠도 근사하고 난리다. 이래서 일부러 바닥에 앉은 건가 싶다.
“아까 억지로 키스해서 미안.”
키스.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던 말이 최수호의 입에서 발음되자 속이 안 좋아졌다.
“그딴 말 안 쓰면 안 되냐?”
“그딴 말?”
“키…… 어쩌고.”
“키스를 키스라고 하지 뭐라고 해?”
환장하겠네. 목 위로 벌겋게 피가 몰리는 게 느껴진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최수호의 눈길도.
“입술만 닿은 거 가지고 그게 무슨 키스냐? 그냥…… 사고지, 그런 건.”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가는데 최수호의 낯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너 또 무슨 이상한 거 생각하지?”
“아니.”
입에 침이나 발라라. 아니면 집중할 때 나오는 그 골똘한 표정이나 숨기든가.
“됐고, 게 다 먹었으면 집에나 가.”
발로 어깨를 떠밀어도 최수호는 꼼짝하지 않고 버틴다. 체급 차이가 나면 이래서 힘들다.
“네가 나 용서해 줄 때까지 못 가.”
“해 줄 생각 없어. 돌아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람 안 괴롭히고 얌전히 혼자 반성하면.”
“지금도 반성하고 있는데…….”
“반성하는 놈이 한 시간을 못 참고 우리 집에 쳐들어오냐?”
“너한테 사과하려고.”
“이유진한테는 미안하다고 했냐?”
최수호가 입을 다물었다. 보나 마나 미안하단 말은커녕 연락도 제대로 안 했겠지. 항상 주변에 사람을 몰고 다니는 최수호한테 친구가 나밖에 없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이유진한테 미안하다고 해.”
“그럼 용서해 줄 거야?”
“나한테 다신 그딴 짓 하지 말고.”
“키스?”
“키스 아니라고 했지.”
“이유진하고는 키스했어?”
“뭐…….”
말문이 막혔다. 침묵이 길어지자 최수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처럼 보이던 눈이 인상을 달리한다.
배우는 배우라는 건지, 최수호는 때때로 놀랄 정도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인간 같다.
이럴 때 말려들면 나만 피곤해진다. 나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자꾸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사람 말을 들으라고. 난 너하고 그런 사이 될 마음 없다고 분명 얘기했다.”
“안 사귀어도 키스는 할 수 있잖아.”
“미쳤냐? 내가 애를 잘못 키웠네.”
“나 진심이야.”
최수호가 너무 심각하게 말하는 바람에 대답할 기회를 놓쳤다. 내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최수호는 마음껏 열렬해진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 처음부터.”
“…….”
“이유진보다 내가 먼저였다고.”
힘주어 말하는 최수호의 태도는 고백보다는 항의에 가깝다. 혹은 공격이거나.
단순히 내 주의를 끌고 싶어서, 장난으로 이러는 게 아니다.
최수호는 진지했다.
소꿉친구가 실은 어릴 때부터 날 좋아했다는 고백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쇠뭉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
“왜 이유진이야? 왜 난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네가 다른 사람하고 사귄다는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아. 너한테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못 참겠어.”
성토하는 목소리에 열기가 실린다. 정신없이 지껄이며 나를 응시하는 눈이 열에 들뜬 사람처럼 젖어 있었다.
배 속이 오싹했다.
좋아한다고. 예전부터 그랬다고.
줄곧 붙어 지내던 시간이 지금까지와 다른 색으로 반전된다. 속이 저려 어금니가 저절로 꽉 깨물렸다.
“……어쩌라고, 나더러.”
“사귀자.”
거절만 벌써 세 번은 넘게 한 것 같은데, 최수호는 한 번도 내 대답을 들은 적 없다는 양 꿋꿋하다. 내가 그러겠다고 대답할 때까지 사귀자고 할 셈인가.
“네가 좋아하게 했잖아.”
내가 언제? 누구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은데 침을 삼키기조차 어렵다. 내장에 불길이 번져 나갔다. 최수호가 내 손바닥에 볼을 묻었다.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손바닥에, 손가락 마디마다, 손톱과 손등에 막무가내로 입술이 문질러진다. 입술이 짓눌리면서 단단한 이가 살에 닿을 때면 물어뜯길 것만 같아 섬찟했다.
“받아 줄 거 알아.”
“내가, 왜…….”
“열이는 내 말은 뭐든 들어주니까.”
얼음물을 맞은 듯 머리가 차가워졌다. 등골까지 찬 기운이 퍼져 나간다.
이런 걸 좋아한다고 할 수 있나. 장난감 뺏기기 싫은 고집의 연장일 뿐 아닐까.
진짜 애를 잘못 키웠다. 매번 져 주고 만 내 잘못이다. 하지만 최수호한테는 아무도 없으니까.
‘난 너밖에 없어.’
최수호가 어린 시절부터 세뇌하듯 내게 새겨 넣은 이 말은 차마 끝까지 최수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손 놓으면 당장 떨어져 버릴 것처럼, 수호는 늘 아슬아슬했다.
보통 친구끼리 그렇게까지 하냐며 혀를 내두르던 주변 사람들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사람들 말이 맞다. 이런 건 비정상이다.
“그만해.”
“뭘 그만해야 하는데?”
“네가 지금 하는 짓 전부 다.”
“싫어.”
최수호가 내 손에 이를 세웠다. 단단한 치아가 살을 누르는 감촉이 소름 끼쳤다. 손을 빼내려 들자 손목이 붙잡힌다.
“그만 못 해, 난.”
최수호와 눈높이가 순식간에 대등해졌다. 침대 위로 올라온 최수호가 이번에는 내 어깨를 떠민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몸이 휘청거렸다. 위기감과 황당함이 동시에 닥쳤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냐. 열 받게 하지?”
양 손목을 힘껏 쥐자 최수호가 얕은 신음과 함께 내 어깨를 놓았다. 최수호의 살에 떠오른 손자국을 나는 외면한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게 우겨서 될 일 같아? 너 지금까지 나 그런 식으로 본 거, 그게 자랑이야? 네가 좋다고 사귀자고 하면 내가 당연히 받아 줘야 해? 말이 되냐.”
말이 연달아서 튀어 나갔다. 내가 듣기에도 공격적인 말투다. 빠르게 쏟아지는 잽이 최수호와 내 사이의 거리를 벌린다.
여기서 주춤거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