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답해 줘.”
떼쓰는 것만 도가 튼 놈인데.
“난 너하고 안 사귈 거야.”
“왜?”
“친구고, 너 그런 식으로 안 좋아하니까.”
최수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안 좋아해도 되니까 사귀기만 하면 안 돼?”
굳은 얼굴이 연기할 때 특유의 축축하고 처량한 눈빛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왜 사귀냐.”
“사귀다 보면 좋아질지도 모르잖아.”
“너하고 평생 봐 왔는데 사귄다고 좋아지겠냐? 그리고 너, 내 취향 아니야.”
“내 얼굴 좋아하면서.”
네 얼굴 싫어하는 사람도 있냐. 그 말은 하려다 말았다. 보나 마나 우쭐하면서 말꼬리를 잡으려고 들 테니까.
“생긴 거 좋다고 사귀었으면 나는 옆집 개하고도 사귀었다.”
애초에 그런 걸로 연애를 시작할 리가.
이쯤에서 대화를 끊기로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릇을 싱크대에 담그고 남은 반찬 뚜껑을 닫는 내내 끈질긴 시선이 느껴졌다.
급기야 몸을 일으킨 최수호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가 거슬린다. 바로 앞에 서면 은근한 위압감이 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또 쓸데없는 말이 나오기 전에 잽싸게 선수를 쳤다. 견제는 공격이 완전히 들어오기 전에 해야 한다.
“그럼 이유진하고도 다시 사귀지 마.”
이런 식으로 공격이 꽂히기 전에.
또냐. 이가 악물린다. 눈치 보는 척하면서 결국은 자기 하고 싶은 짓은 다 한다. 미안하다더니 또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이제 못 사귀거든. 누구 때문에.”
“다른 여자애들하고도 사귀지 말고.”
“하.”
이어지는 최수호의 말에 헛웃음이 튀어 나갔다.
“나하고 안 사귀어도 되는데, 다른 사람하고도 사귀지 마.”
어이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주제에 최수호는 진지하다. 이유진하고 그 꼴이 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사람을 사귈 마음 따윈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내 마음이고.”
하지만 이거하고 그건 다른 문제다.
“안 돼.”
내가 고개를 젓자 최수호가 내 앞을 막아섰다. 뒤로는 새하얀 아일랜드 식탁이 등을 가로막는다.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최수호가 집요하게 몸을 틀어 저지했다. 끈질긴 자식.
“내가 누굴 사귀든 말든, 그걸 왜 네가 정해.”
최수호가 대놓고 인상을 썼다. 최수호는 순전히 내가 이유진하고 사귀었으니까 이러는 거다. 내 관심을 뺏기기 싫은 것뿐이다. 이런 면에서는 다섯 살 애만도 못한 놈이니까.
“그럼 또 다른 사람하고 사귈 거야?”
“어.”
“왜 난 안 되는데?”
“너 그런 식으로 안 좋아한다고.”
어영부영 어리광을 받아 주다 피 본 게 몇 번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내가 최수호와 알고 지낸 세월 동안 얻은 교훈이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안 되는 건 일찌감치 딱 자르라는 거다.
“앞으로도 그럴 일 없어.”
내가 잘라 말하자마자, 최수호가 내 뺨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내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오래간만에 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쪽. 쪽. 쪽.
입술이 정신없이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입술에 닿는 감촉이 현실 같지가 않다. 이번에는 뇌로 폭발적으로 피가 몰렸다.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 입술이 벌벌 떨렸다.
“야, 이, 이 미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생각할 여유는 당연히 없다.
“미친 새끼야!”
또다시 다가오는 얼굴을 향해 나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아야.”
퍽.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다음 순간 최수호는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주먹이 다 얼얼하다.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진짜, 너, 씨발, 깜짝이야…….”
“욕하네.”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 대꾸해 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최수호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등을 타고 흐르는 피가 보였다.
“피 나냐? 야, 그러길래 이딴 짓을 왜 해?”
황급히 최수호의 앞에 앉자 피비린내가 훅 풍긴다. 최수호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 아직 멍도 다 안 빠졌는데.”
그러게 누가 그런 짓 하랬냐고. 넌 맞아도 싸.
해 줄 말은 많은데 최수호의 코에서 뚝뚝 떨어지는 새빨간 피를 보고 있자니 입이 안 떨어진다. 스파링하면서 코피야 지겹게 봤는데 왜 최수호가 흘리는 피는 심장이 다 철렁한지 모르겠다.
“숙여 봐. 피 역류할 수도 있으니까 고개 들지 말고. 뼈는 괜찮아?”
“잘 모르겠어.”
“고개 돌려 봐.”
소매로 대충 피를 문질러 닦던 최수호가 순순히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코 아래로 엷은 핏자국이 남아 있다. 거기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최수호의 얼굴이 어느덧 아까처럼 가까워졌다는 건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하지 마라. 맞는다.”
급하게 최수호의 어깨를 잡았지만 이미 거리가 너무 가깝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거리에서 달싹였다.
어깨를 쥐고 밀어내려 힘을 실어도 최수호는 밀리지 않는다.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큰 게 온몸으로 밀어붙이니 버티기 힘들다.
“응. 때려.”
즐거운 듯한 어조에 기가 막혔다. 찡그리는 나를 향해 최수호가 환하게 웃었다. 눈이 반달처럼 접히고, 입매에서 번져 나간 웃음기가 최수호의 얼굴을 다시 빚는다. 눈동자에 햇빛이 투명하게 깃들었다.
이럴 때 어이가 없다. 이 개새끼, 왜 잘생긴 거지.
잠시 손에 힘이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입술이 닿았다. 피비린내와 말랑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머릿속에서 어울리지도 못하고 겉돈다.
나는 최수호의 옷자락만을 힘껏 구겨 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또 주먹이 나갈 것 같았다.
입술이 세게 눌리다가 느슨해진다. 떨어지려나 싶어 숨을 쉬려고 들면 자꾸만 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숨을 참느라 목 위로 피가 쏠렸다.
“그만.”
어깨를 잡았던 손을 더듬더듬 올려 최수호의 턱을 움키자 그제야 얼굴이 멀어진다. 겨우 반 뼘만큼의 거리지만 호흡을 고를 여유 정도는 생겼다.
그 약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최수호가 다시 몸을 밀어붙인다. 피해도 입가에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눌렸다. 아랫입술에, 턱에 자꾸 닿는 감촉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그만, 해라.”
지금 무슨 짓을 당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턱을 잡은 손을 움직여 최수호의 입술을 덮자, 최수호가 웃으며 손가락을 핥았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혀가 미끄러진다. 축축하고 뜨거웠다. 진저리를 치며 손을 떼어 내자 최수호가 킥킥거리며 고개 숙인다. 어지러웠다.
“한 번만 더 하자.”
취한 듯 나른하게 헐떡대는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솜털이 곤두서면서 야릇한 닭살이 돋았다. 귓가에 닿는 숨결이 끈적하다.
“열아, 너 너무 귀여워…….”
“…….”
“나 흥분할 거 같아.”
최수호가 속삭인다. 이마가 맞닿았다. 축축하게 흐려진 눈이 나를 바라본다. 거기 묻어나는 적나라한 욕망에 소름이 올랐다. 입술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아무리 밀어내도 금세 추격당한다. 거칠어진 숨소리와 끓어오를 듯한 눈길이 낯설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최수호를 알고 지냈다. 이 자식에 대해서는 뭐든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한데…… 이런 얼굴은 모른다.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한다느니 사귀자느니, 모두 소꿉장난 같은 헛소리다.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리는 건 예상에 없었다.
“좋아해.”
내장이 다 간지럽다. 이 달착지근한 말투라니.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다. 최수호가 조심스럽게 내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쪽.
느리게 빨아 당기는 움직임 끝에 따끔한 통증이 돋았다. 뜨거운 혀가 아랫입술을 핥아 적신다. 입술이 붓칠을 당하는 도화지처럼 젖어 들었다.
어지럽고, 숨 막히고,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이게 진짜…… 말 안 듣냐!”
나는 최수호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렀다. 아까하고 달리 이번에는 충분히 계산된 펀치였다.
급소를 맞아 콜록대는 최수호를 내버려 두고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울렁거린다.
“너 당분간 나 볼 생각 하지 마라.”
말하고 나자 발이 저절로 현관으로 움직였다.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최수호가 따라오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온통 뒤통수로 쏠린다. 마음이 급해져 운동화 뒤축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채 도망치듯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열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린 것도 같았지만,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었다.
손등으로 아무리 입술을 문질러도 감촉이 사라지지 않는다.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한데, 터질 것처럼 오른 열이 도무지 내리지 않았다.
* * *
“이제 나한테 최수호하고 관련된 심부름시키지 마.”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만지던 엄마가 나를 빼꼼히 돌아본다. 미용실에 다녀왔다더니 얼마 전 겨우 어깨까지 기른 머리가 곱슬곱슬하다.
“왜?”
“왜는 왜야.”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할 말이 궁색하다. 그 새끼가 나한테 오늘 입술을 비벼 댔다고 이실직고할 수는 없으니까.
“얘는 왜 말을 안 해? 너희 진짜 싸웠니?”
“어, 싸웠어. 그러니까 심부름시키지 마. 나 걔랑 당분간 안 만날 거야.”
“왜 싸웠는데?”
“그냥 싸웠어.”
“그냥 싸우는 게 어디 있어. 열이 네가 또 일방적으로 삐친 거지?”
“아니거든.”
“아니긴. 너희 둘이 싸우는 거 매번 그런 식이잖아. 맨날 수호가 먼저 사과하고.”
그야 엄마가 보기에는 그럴 만도 하다. 나한테 쩔쩔매면서 따라다니는 최수호만 보였을 테니까. 걔가 그전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나만 알고 있는 거고.
걔가 내 여자 친구랑 헤어지게 한 걸로도 모자라서 나한테 억지로 입까지 맞췄다는 소릴 들으면 엄마가 뭐라고 할까. 농담도 잘한다면서 깔깔 웃지 않을까. 내가 들어도 농담 같다. 아니,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수호는 도대체 너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