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88)

2.

전원이 들어온 TV 모니터에 익숙한 얼굴이 비친다. 더 열 받게.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샌드백에 최수호의 모습이 겹쳤다. 환장한다. 앞까지 돌아온 샌드백을 결국 치지도 못하고 돌려보냈다.

“얼굴 왜 저러지.”

보지 말아야지. 결심해 놓고 지원 누나가 중얼거리는 말에 돌아보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다.

예감은 적중했다. 화면 속 최수호는 가관이었다. 터져서 딱지가 엉겨 붙은 입술은 고스란히 드러냈고 뺨 언저리에는 엷은 멍이 보인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다쳤구나, 어렵잖게 알아차릴 꼴이다.

“좀 이상하지 않아?”

제가 패서 그래요.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열심히 땀만 닦았다.

시위하는 거지, 저건. 나는 돌아오는 샌드백을 멈춰 세웠다. 멍 자국을 봤더니 뭘 때릴 마음도 사라졌다.

“보통 메이크업으로 다 가리고 나오지 않나? 아니면 안 나오든가. 이야, 진짜 심하다.”

“…….”

“배우도 참 할 직업이 못 되나 보다. 드라마 찍다 저렇게 다치기도 하는구나. 하긴 이번에 첩보물 찍지? 와이어 액션. 힘들 거 같아. 나 요즘 스턴트 연기 배우잖아. 운동하고는 또 다르게 장난 아니더라.”

드라마 찍다 다치기는 무슨. 되는대로 말하는 거지. 정말 드라마 찍다가 다친 거면 저런 식으로 드러냈을 리 없다. 나름대로 자기 일에는 철저하니까.

내가 생각하고도 우스워서 모니터에 비치는 최수호를 노려보았다. 인터뷰에서 터진 상처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철저한 직업 정신을 가진 놈이 저지를 짓은 아닌데.

최수호는 배우 일만은 열심이다. 나하고 엮이면 자기 기준을 다 내팽개쳐서 문제지.

“연기란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근데 열아, 저거 네 전화 같은데.”

짐을 두는 곳에서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기본음이 몇 번씩 이어지는 게, 내 벨 소리 맞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최수호면 받지 말아야지. 그 생각부터 든다.

하지만 개인 로커를 열고 휴대폰을 꺼냈을 때 보인 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번호였다.

- 얘, 열아. 엄마 오늘 반찬 했거든? 너 수호한테 반찬 좀 가져다줘.

여보세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말이 좌르르 쏟아졌다. 아니나 다를까 심부름이다. 엄마가 이 시간에 왜 전화를 하나 했다.

“나 운동 중인데.”

- 엄마도 아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

“솔직히 말해 봐. 나 엄마 자식 아니지? 난 어디서 주워 온 거고 최수호가 진짜지?”

- 얘, 네 아빠 얼굴 봐라. 거기서 수호 얼굴이 어떻게 나와?

“이거 아빠한테 말한다.”

- 그러든가, 말든가. 내가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니고.

하여간 말로 박 여사 이길 생각은 말아야 한다. 아빠가 괜히 잡혀 사는 게 아니다.

“암튼 나 오늘 바쁜데. 형한테 시키면 안 될까.”

- 너 수호랑 싸웠니?

“싸우긴 뭘 싸워.”

- 애들도 아니고 자꾸 싸우고 그러니. 그 착한 애랑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최수호가 착해?”

- 착하지, 그럼. 수호만큼 착한 애가 어딨니.

엄마한테나 착하겠지. 하긴 최수호는 우리 가족한테만은 입 안의 혀처럼 구니까. 특히나 우리 엄마는 어릴 때부터 수호한테 한없이 관대했다. 최수호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거다.

- 어쨌든, 반찬 집에 싸 뒀으니까 네가 갖다 줘. 군말하지 말고. 집도 가깝잖아. 너 여전히 체육관인지 이따 네 형한테 다 확인해 볼 거니까 괜히 엄마 말 무시했다간 봐. 엄마 이만 미용실 가 봐야 해서 끊는다.

“잠깐만, 엄마. 박 여사!”

전화가 매정하게 끊겼다. 확실해. 난 주워 온 자식이고 최수호가 친자야.

오늘 진짜 걔 얼굴 보고 싶지 않은데. 열심히 인상 써 봤자 닥친 현실이 변할 리 없다.

라커룸에서 옷을 꺼내 입으면서도 벌써 한숨이 차오른다. 엄마고 최수호고, 하여간 사람 괴롭히는 데 일가견 있다.

“계속 보고 계시네요.”

밖으로 나가도 TV 소리가 계속 들렸다. 지원 누나는 여전히 줄넘기는 손에만 들고 모니터를 쳐다보느라 바쁘다. 운동 안 하실 건가.

“어? 어, 나 최수호 좋아하거든.”

“최수호를요?”

하필이면 쟤를? 내가 떨떠름하게 반응하자 지원 누나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겼잖아. 그리고 왜, 엄청 성격 좋아 보이지 않냐? 저런 남동생 하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친구여도 환장할 지경인데 남동생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다.

“성격 나빠요.”

“응?”

“성격, 엄청 나쁘다고요, 최수호.”

“하나도 안 그래 보이는데. 어, 열아. 너 가? 관장님한테 인사 안 하고 가?”

“네. 형한테 저 엄마 심부름 때문에 먼저 간다고 대신 말 좀 해 주세요.”

“또 심부름?”

“저 주워 온 자식이거든요.”

“아이고, 그런 출생의 비밀이. 수고하십쇼.”

손까지 흔들어 주는 지원 누나와 마주 인사하며 체육관을 나섰다. 거리의 바람을 맞자 살갗에 밴 땀이 금세 마른다. 춥다.

“샤워도 못 하고 나왔네.”

관장이 가족일 때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 나쁜 점은 넌 죽어도 프로는 되지 말라며 뜯어말린다는 점이다. 또 나쁜 점은 자꾸 운동할 때 심부름을 떠맡게 된다는 거다. 더 나쁜 점은 형제가 감시탑 역할을 하는 바람에 핑계를 대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는 거고. 좋은 점은, 잘 모르겠다.

집에서 반찬 통을 들고 최수호의 아파트 문 앞에 서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육관에서 우리 집까지가 걸어서 10분 거리, 우리 집에서 최수호네 집까지는 다시 5분 거리다.

최수호를 안 보고 살기엔 나는 최수호하고 너무 가깝다.

아파트 현관에서 최수호의 집 호수를 호출하자 곧바로 문이 열린다. 꼭 내가 올 걸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최수호의 반응은 자연스럽다.

최수호의 집 문 앞에서 멈춰 서 잠깐 내 인생의 실수에 대해 되짚어 봤다. 대체 이 새낄 왜 만났으며, 친구는 왜 했던 건지.

현관문이 열리고 최수호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내 안에서 대답을 찾았다. 그래, 얼굴 때문이었지.

최수호가 너무 예쁘고 약해 보여서 지켜 줬던 것뿐인데. 어린 날의 오판이 이런 결과를 부를 줄이야.

“너 반찬 가져다주라더라, 엄마가.”

최수호가 빙그레 웃었다.

“열아.”

나를 문안으로 당기는 최수호의 손길은 스스럼이 없다. 늘 이렇다. 번번이 헛짓거리해 대는 최수호도 최수호지만, 지겹게 당하고도 이 자식을 받아 주는 나도 나다. 이번에야말로 절교해야 했는데.

나는 뭐가 문제길래 자꾸 이 자식을 용서하고 마는 걸까. 소꿉친구가 뭐길래.

친구 잘 사귀란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사람 하나 잘못 사귀었다간 평생 괴롭다.

“올 줄 알았어.”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다.”

내가 투덜거리건 말건, 최수호는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열이는 다정하니까.”

난 이 자식이 정말 싫다.

* * *

“그 얼굴을 하고 TV에 나가고 싶냐?”

눈앞에서 보니 꼬락서니가 더욱 가관이다. 별로 크지도 않은 얼굴에 멍하고 상처를 달고 있으니 유독 불쌍해 보인다.

나는 결국 최수호의 거실에 주저앉아 약통을 뒤졌다. 멍을 빼는 연고는 상자 맨 아래 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굴러다니고 있었다.

“왜. 그래도 잘생겼잖아.”

말은 잘한다. 농담이면 좋으련만, 최수호는 자기가 잘생긴 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짜증 난다. 반박을 못 하겠어서 더 짜증 나고. 이 새낀 왜 잘생겨서.

“얼굴이 아깝다.”

“안 그래도 혼났어. 나 약 발라 줘.”

“왼손 들어 봐.”

최수호는 곧장 왼손을 들었다. 이럴 땐 말 참 잘 듣는다.

“오른손 들어 봐.”

다시 재빨리 오른손으로 바꿔 든다. 청기, 백기 잘하겠네.

“양손 다 멀쩡하지? 네가 발라.”

최수호의 표정이 잠깐 멍해졌다. 한 방 먹인 기분이라 뿌듯해졌다.

“열아.”

그 한 방 먹인 기분도 잠깐뿐이다. 최수호는 나를 다루는 데 노련하다.

“열아…….”

“그딴 표정 짓지 말랬다, 내가.”

“그딴 표정이 어떤 건데?”

물어보면서, 최수호는 정확히 ‘그딴 표정’을 지었다. 한껏 처연하고 넋 나가게 잘생겨 보이는 표정.

저 자식, 다 알면서 저러는 거야. 확실해. 자기 얼굴 어떻게 이용해 먹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놈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알면서 넘어가는 내가 천치고 등신이지. 한숨을 푹 쉬며 약통을 들자 최수호가 싱글거리며 내 앞에 앉았다.

“역시 열이는 착해.”

“닥치고 있어. 정신 사납게 떠들지 말고.”

“다정해.”

이 자식은 역시 똑바로 말을 듣는 법이 없다. 연고를 짜 얼굴에 발라 주는 동안에도 최수호는 싱글벙글이다. 웃을 때면 처지는 눈매가 한껏 기분 좋은 강아지 같다. 성격이 나쁠 거면 저렇게 생기지나 말든지.

“열아.”

“좀 그만 부르면 안 되냐? 귀에 딱지 앉겠다.”

“응. 안 부를게. 그리고 나 이유진하고 안 사귀어.”

연고를 바르던 손이 절로 멎었다. 짜증이 솟구친다. 나는 최수호에게서 손을 뗐다.

“어쩌라고.”

내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최수호의 웃는 얼굴에는 여전히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니들이 사귀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내가 이유진하고 안 사귀는 거 좋지 않아?”

“야, 최수호.”

목소리를 내리깔자 최수호가 겨우 입을 다물었다.

“작작 해라.”

보자 보자 하니까 한도 끝도 없다. 넘어가 주려고 했더니 매를 번다. 남의 애인 뺏어 놓고도 태연자약하게 저런 소릴 할 수 있는 뻔뻔함이 감탄스럽다. 하나도 안 미안하단 말이지. 예상한 반응이지만 직접 겪으니 짜증이 솟구친다.

“이유진이 왜 좋았어?”

나를 물끄러미 보던 최수호가 문득 물었다.

이유라면 많다. 이유진은 생머리가 잘 어울렸고, 목소리가 귀여웠고, 복싱을 좋아했고, 내가 체대에 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해 줬다. 좋은 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유진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지난 1년, 제일 괴로울 때 그 애가 옆에 있었다.

“예뻐서.”

“내가 더 예쁘지 않아?”

최수호가 환하게 웃으면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기가 막힌다. 더 기가 막히는 건 틀린 말도 아니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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