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정열
1.
[인생이란 건 결국 난타전이야.]
록키 발보아는 말했다.
[이 세상은 결코 따스한 햇볕과 무지개로만 채워져 있지 않아.]
어릴 적 형 손에 끌려가 영화 <록키>를 봤고 복싱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형이 선수 생활을 접고 체육관을 차렸을 때, 체대에 진학하겠다는 나를 부득부득 말리다 울음을 터뜨렸을 때 나는 록키의 말이 옳았음을 알았다.
인생은 난타전이다. 아무리 피해도 따라와 집요하게 펀치를 날린다.
졸업이 머지않을 즈음 나는 무자비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드를 올려도 주먹은 생각도 못 한 곳에서 꽂혀 들어왔다.
고등학교 3학년. 나는 체대에 진학하지 못했고, 연애에는 실패했으며, 내 인생 계획은 예기치 않은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생각해 보면 반쯤은 이 자식 때문이다. 지금 내 몸 위에 올라탄 이 개자식.
“최수호, 넌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냐.”
헐떡이는 소리가 불 꺼진 방에 습하게 울렸다. 내 목소리 같지 않다.
닫힌 커튼 사이로 노을이 쏟아졌다. 어렴풋한 햇빛으로 물든 흰 침대는 잼을 바른 식빵 같다. 설탕 알갱이가 씹히는 오렌지 잼, 질릴 정도로 달콤한 냄새. 시트를 움켜쥐자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힘들어?”
질릴 정도로 단 목소리.
최수호를 이루는 건 대개 그렇다. 목소리도, 하는 짓도, 생긴 것까지.
내 위에 올라탄 최수호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어스름 속에서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살갗이 희다.
보통 눈에 띄는 색이라고 하면 진한 색을 떠올리겠지만, 최수호는 정반대다. 확연히 밝은 체모나 눈동자와 가지런한 생김새가 합쳐지면 왜 이 자식이 어릴 때 혼혈입네, 아니네 괴롭힘당했는지 짐작해 봄직하다.
어릴 적 철없는 어린애들이 최수호를 물고 늘어진 건 예전부터 이 자식이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일 거다. 스타성이라는 게 이런 거 아닐까.
노을빛이 최수호의 뒤에서 내리쬐어 빛나는 윤곽을 그렸다. 최수호는, 반짝인다.
아뜩하다. 걔들이 철없이 굴지만 않았어도 내가 지금 이 자식하고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런 걸 두고 나비 효과라고 하던가.
얘하고 이렇게 되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마주치지 말아야 했는데. 후회해 봐야 늦었지만.
“열아, 왜 대답 안 해.”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알아챈 건지 최수호가 내 목을 깨물었다. 맞닿은 하반신이 꽉 눌린다. 뜨거운 숨이 목울대까지 치받혔다. 이를 악물어도 소리가 새어 나갔다. 최수호가 웃었다.
“아파?”
저 득의양양한 표정이라니. 누가 이 자식을 착하다고 한 건가. 예의 바르다는 둥, 다정하다는 둥, 친절하다는 둥.
인터넷이나 TV에서 떠들어 대는 최수호는 내가 아는 최수호하고는 영 다른 사람 같다.
최수호를 이루는 요소는 하나같이 달착지근하다. 나한테만 빼고.
“열아, 대답해 봐. 응? 힘들어?”
부드럽게 채근하는 목소리나 골 때리게 잘생긴 웃는 얼굴만은 최고의 애인이 되어 줄 것 같은 배우 어쩌고 하는 타이틀에 걸맞다.
최고의 애인?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누가 뽑았는지 몰라도 그 사람들한테 이 꼴을 보여 줘야 하는데. 최수호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은 알까.
“대답 안 하면 아프게 할 거야.”
이 새끼가 정신 나간 변태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나만 알기는 억울하다.
내가 대답하지 않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최수호가 내 가슴을 베어 물었다. 악, 소리가 나도록 아프게 깨무는 걸로도 모자라 살을 잘근잘근 씹는다. 가슴에 집착하는 걸 봐서 구순기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거다.
“……힘들어.”
마지못해 백기를 들자 최수호는 근사하게 웃었다. 장점은 얼굴밖에 없는 놈이다.
속으로 욕을 퍼붓는 동안 최수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민감해진 살갗에 혀가 닿자 간지러웠다.
“넌 내가 힘든 게 그렇게 신나냐? 즐거워?”
억울하고 분하다. 어쩌다 이런 새끼를 만나서 고통받고 있는 건지. 좋아하는 사람이 힘든 게 좋다니. 변태 중에도 상변태 아닌가.
“나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는 건 좋아.”
묻지나 말걸. 뻔한 걸 왜 물었을까. 최수호의 대답이 내 복장을 긁을 거야 원래 정해져 있는 건데. 당연히 좋아하겠지. 아니면 사람을 기어이 이 지경까지 끌고 왔을 리가.
“진짜 좋아, 열아.”
최수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꼭 술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도취한 목소리다. 흠뻑 취해서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해 버릴 것 같은 사람의 목소리.
최수호가 이럴 때마다 좀 무섭다. 폼으로 운동하는 게 아니니만큼, 완력으로는 최수호한테 밀릴 일이 없는데 왜 얘한테 이따금 위압감을 느끼는지 나도 모르겠다.
“너도 좋아한다고 말해 줘.”
“…….”
“빨리.”
“……하던 거나 하자.”
이 자식이 이렇게 조를 때마다 왜 이토록 난처한 기분이 드는지, 정말이지 나도 모르겠다. 최수호하고 관련된 일 중엔 이해할 수 없는 게 많다.
“빨리 좋아한다고 해 줘.”
“무슨 애도 아니고…….”
“안 그러면 괴롭힐 거야.”
개자식. 선전 포고가 무서워 살 떨릴 지경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무섭다. 이 새낀 저 말을 지키고도 남을 놈이고, 이미 실현한 새끼니까.
위에 올라탄 최수호의 무게가 새삼 묵직하게 느껴졌다. 숨이 막힌다.
“좋아해. 좋아할 테니까, 좀 내려와, 이 미친 새끼야.”
“나도 좋아해.”
최수호는 그야말로 녹아내리듯 웃었다. 나름대로 이 자식 얼굴에 적응됐다고 생각한 나마저 얼이 빠질 정도였다.
그래. 문제는 항상 이거다.
나는 이 개자식한테 약하다.
최수호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내가 그 잘난 외모의 어디를, 어떻게 이용하면 내가 무장 해제가 되는지 잘 아는 것도 모자라 자기 면면을 보란 듯 이용한다.
나는 이런 최수호가 귀엽고, 짜증 나고, 불쌍하고, 또 좋아서.
오늘도 이 자식한테서 벗어날 수가 없다.
* * *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 날, 내 연애는 끝났다.
“미안해, 열아. 나 수호 좋아해.”
내 첫 여자 친구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뿌옇게 번지는 입김 사이로 갸름한 얼굴이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긴 속눈썹에 가지런한 눈매, 내가 좋아했던 여자애의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흐린 입김 너머로 번진다.
이유진은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괜히 안쓰럽게.
“그래. 알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비볐다. 눈가가 아픈 건 어제 했던 스파링에서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소복하게 쌓인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따가웠다.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진 건 다 그런 이유다.
“집에 잘 들어가. 졸업 축하한다.”
“열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는 들지 않았다. 몸을 돌리면서 원래대로라면 다음 주에 치러야 했던 경기를 생각했다. 그리고 올해는 유독 눈이 자주 내린다는 생각. 추위가 호되다는 생각과, 이대로 눈에 파묻혀 버리고 싶다는 생각들.
“열아.”
누군가 앞에서 나를 불렀다. 이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고개를 들기도 전에 알아챘다. 모를 수가 없다. 최수호의 목소리를 못 알아듣기엔 이 자식하고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최수호.”
나는 일부러 최수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눈발이 수정액처럼 최수호의 모습을 드문드문 지운다. 흰 얼굴이 눈송이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미안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난처한 얼굴일 거라고.
최수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 여자 친구가 자길 좋아한다고 고백한 걸 뻔히 들은 뒤에도.
새삼 화낼 일은 아니다. 원래 저런 놈이니까.
이유진이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면 어쩔 수 없다. 그게 우연히 최수호였던 거다. 우연히 내 첫 여자 친구가, 우연히 내 13년 지기를 좋아하게 됐을 뿐이다. 하필이면.
애인 생기면 최수호는 애인 근처에도 두지 말란 주변인들의 충고를 좀 귀담아들을 걸 그랬다. 뺨에 얼얼하게 번지는 추위를 견디며 나는 걸음을 재촉한다.
“이유진한테 잘해 줘라.”
찬 공기 탓에 목구멍이 맵싸했다. 나는 고개를 움츠리며 최수호를 지나쳤다.
하필이면, 우연이라고 해도, 지금은 최수호 얼굴 따윈 보고 싶지 않다.
“내가 왜 잘해 줘야 하는데.”
발걸음이 멎었다. 최수호의 말이 내 발을 붙잡았다.
“나 이제 쟤한테 관심 없어. 쟤하고 사귈 일도 없고. 잘해 줄 생각도 없어.”
“뭐…….”
“너하고 사귀는 애 아니었으면 애초에 쳐다도 안 봤어.”
뒤를 돌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이유진이었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주먹이 뻗어 나갔다. 최수호는 피하지도 않았다.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났고, 나는 쓰러진 최수호의 위에 앉아 흩날리는 눈과 최수호의 입가에서 번져 나온 핏자국을 보고 있었다. 턱에 번진 새빨간 얼룩 위로 눈이 쌓였다.
최수호는 눈밭에 나뒹구는 순간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최수호는, 끝까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끝에 끝까지.
* * *
충격은 쌍방향이다. 뭔가를 친다는 건 나 역시 맞는다는 소리다. 주먹을 뻗을 때마다 강렬한 타격감이 손등을 두드린다.
샌드백이 크게 흔들리다 내게로 돌아온다. 나는 가차 없이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살살해. 누가 보면 부모님 원수라도 패는 줄 알겠네. 휴식 종 울렸는데 안 쉬어?”
옆에서 줄넘기를 뛰던 지원 누나가 툭 물었다. 평일 아침이라 체육관에 있는 건 우리 둘 정도다. 관장인 우리 형마저 자리를 비워서 체육관은 썰렁하다.
“스트레스 푸는 중이라서요.”
“에이, 그러다 다칠라.”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더 힘껏 샌드백을 쳤다. 원래 누군가를 때릴 때는 내가 다칠 걸 각오해야 하는 거다.
차라리 두들겨 맞기라도 하고 싶었다. 사실 맞고 싶은 게 아니라, 날 제대로 때릴 수 있을 법한 사람하고 실컷 주먹질이나 하고 싶다. 죄책감 없이 화풀이하고 싶었다.
“너 그러다 진짜 손 나간다? 나랑 잠깐 TV나 봐. 너 그 얼굴로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살벌하다, 야. 나 무서워서 연습을 못 하겠어.”
“걱정은 고마운데 누나 혼자 보세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스트레스 풀자고 샌드백 열심히 두들겨 봐야 근육통 말고 남는 거 없다니까…… 어, 최수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