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GAME CLEAR?
눈앞의 모든 것이 사그라들고 나는 엉망이 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난잡하게 어질러진 물건들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보석 가루가 퍼져 있었다. 내가 악마를 소환했던 너무나 오래전, 그날의 방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날. 나의 인생이 더욱 나락으로 빠졌던 그날이었다.
“어째서?”
광기에 찬 시민들의 열기와 신앙에 사로잡혀 요셉을 처단하던 기요틴. 그 모든 것이 눈에 선한데, 나는 악마와의 내기에서 아직도 이기지 못했는데. 되돌아간다면 이 시점이 아닌 새로운 ‘플레이어’가 집에 찾아오는 때여야 했다.
“하…… 하하.”
나오지 않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나긴 역겨운 인생 속에 찾아온 유일한 빛을 또다시 잃어버렸기에 거대한 상실감이 나를 지배했다. 메마르고 앙상한 우울함이 어깨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손에 넣어봤기에, 그 다정함을 맛보았기에 더 절망스러웠다.
이렇게 사라질 것이었다면 왜 나에게 찾아왔는가. 사람이란 단 한 번 맛보았던 쾌락을 잊지 못한다. 나 또한 인간이었기에 다정한 구원을, 요셉을 잊을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무한한 애정. 무조건적인 믿음. 무조건적인 보호. 어린 나에게 퍼부어지던 그 책임감. 사랑.
곱씹던 와중, 나는 변동을 깨달았다.
“…….”
나를 보며 웃어주던 요셉. 나를 보며 기뻐하던 요셉.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오던 요셉. 그 모든 것은 어린 나의 시점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나와 분리되었던 어린 시절의 조각이 겪었던 감정. 그를 향한 친애의 감정. 내가 가진 애욕의 감정과는 궤가 다른 감정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천천히 과거를 떠올렸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인 악마와의 계약이었다.
‘자기가 자신만만한 거 재미있네. 그럼 조금 더 어렵게 해도 괜찮겠어.’
내 눈에 손을 올리는 그 행위. 아주 간단한 그 행위가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할지 그때의 나는 몰랐다. 오만하고 들떠 있던 나는 악마에게 이김으로써 굴러들어 올 왕좌에 시야가 좁혀져 있었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에 눈을 부여잡고 있는 나에게 악마가 말했다.
‘우리 자기의 눈에 매혹의 저주를 걸었어. 자기의 눈을 본 자들은 모두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들 것이고, 인간의 주술로는 해제할 수 없을 거야.’
‘……!’
‘이제 내기의 조건을 이야기해 볼까?’
악마는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번개같이 내질러 내 가슴을 꿰뚫었다. 눈의 통증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충격에 나는 숨을 멈췄다. 귓가에 무언가 조각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우리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생긴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악마가 내 몸에서 손을 빼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름 끼치는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울렸다. 잊지 말라는 듯이 혀를 날름거리며.
‘이 사랑스러운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생긴다면, 우리 자기가 이기는 거야.’
솔직히 그 조건을 듣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악마가 말하지 않았는가. 내 눈에 매혹의 저주를 걸었다고. 나에게 사랑이란 정욕에 가까운 감정이었기에 그 순간 나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마의 손에 끌려 나온 것은-
‘인사해. 자기의 파편이야. 정말이지 작고 사랑스럽지? 아끼고 사랑한다면 행복한 엔딩을 볼 수 있을 거야.’
남루한 옷을 입고 삐쩍 곯은 아이. 몸에 학대의 흔적이 만연한 그 몰골은 너무나 잘 알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건 나였다.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는 나. 비루먹은 짐승 같은 모습의 나.
‘우리 자기. 내가 이길 일은 없다고 했지?’
악마는 즐겁게 웃었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저런 모습이어도 나였다. 교양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나였지만, 일단은 나였다. 사랑하게 만들어야 하는 대상이 내가 아니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
‘우리 자기 귀엽긴. 어디 한번 열심히 해봐.’
악마는 13개로 늘어난 입으로 히죽거렸다. 그 입안의 희고 날카로운 이빨이 선명한 악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아득한,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듯 정신은 암전되었다. 어쨌든 날 사랑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그동안 수많은 유혹을 받은 기억이 있기에 난 자신만만했다.
그 후로 찾아온 멍청한 얼굴의 플레이어. 그들을 유혹하기는 너무나 쉬웠다. 플레이어는 내 눈을 보자마자 매혹되었고, 그런 자들을 구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자’가 죽었습니다!]
[새로운 플레이어가 도착했습니다!]
갑작스레 떠오른 네모난 창. 그제야 나는 조각을 기억해 냈다. 그 누구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내 파편은 쉽게 죽어버렸다. 나를 향해 허덕이던 플레이어 또한 퇴출당했으며 새로운 플레이어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각을 대충 신경 썼다. 그러나…….
[엔딩 82 ‘노숙자’]
[엔딩 90 ‘마약중독자’]
[엔딩 56 ‘스트리퍼’]
[엔딩 74 ‘호스트(C)’]
플레이어는 나에게만 신경 쓰느라 조각을 방치했고, 목숨만 붙어 있던 조각은 온갖 밑바닥 인생을 겪게 되었다. 심지어 역겨운 아르바이트를 시키기도 했다. ‘위험한 여관’ 따위가 쓰인 검은 수첩을 몇 번이고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일부인지 수첩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각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역겨운 삶을 되풀이했다. 되풀이될 때마다 나는 의문을 가졌다.
악마가 말했던 사랑이란 뭐지? 나를 향해 정욕을 불태우던 플레이어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문제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플레이어가 조각을 사랑하게 만들기로 했다. 다만 그러자니 내 눈이 문제였다.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눈의 저주를 가리는 데 성공했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거나, 아예 눈을 감고 다니거나, 마지막에는 마법적 조치를 취한 선글라스를 착용하기까지.
마지막, 선글라스 착용에 종착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엔딩 2 ‘재상’]
[엔딩 6 ‘대장군’]
[엔딩 9 ‘고위귀족’]
[엔딩…….]
[…….]
수많은 ‘좋은’ 엔딩들. 하지만 나는 승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각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절망. 흘러가는 시간. 가끔은 모든 것이 귀찮아 조각을 비롯해 내버리고 훌쩍 떠날 때조차 있었다. 악마와의 계약을 플레이어에게 털어놓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입을 벌릴 수조차 없었다.
[계약은 비밀을 엄수해야지, 자기?]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에 악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악마는 이런 의도를 숨기고 있었구나. 나를 조롱했던 거구나. 악마가 나에게 제약을 달아놓았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나에게 명시하지 않은 제약이 또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몇 번이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되돌아온 후에, 나에게 남은 것은 체념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는 어느 날, 요셉이 찾아왔다.
그를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럼에도 승리하지 못함에 절망했지만 할 수 있는 한 그와 오래 살아갔으면 했다. 종내에는, 나와 함께 도망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죽었다.
또다시 나만 홀로 남았다.
덩그러니 시간에 버려졌다.
“……아냐.”
아니다. 내 속에 살아 있는 조각의 기억들. 그 어떤 기억보다 선명한 요셉의 환한 얼굴. ‘집사’를 향해 웃는 것이 아닌 그 아가페적인 사랑. 그것들은 조각을 향한 기억들이었다. 조각과 분리되어 내가 가질 수 없는 기억. 조각이 내게 돌아와서 합쳐진 기억이었다.
요셉이 보고 싶어.
그리움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를 복기했다.
처음에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눈을 보고도 매혹되지 않은 남자. 셀 수도 없는 시간 동안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악마의 저주는 강력했고, 인간의 정신은 나약했다.
의심. 끝없는 의심이 이어졌다. 악마가 나를 괴롭히려 하는 것이 아닐까? 희망 고문인가? 나는 언제. 대체 언제…….
이제 왕좌 따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안식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포기하면 내 영혼은 악마의 손에 들어가 안식은커녕 영원히 고통받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날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악마와 연관되어 있다기엔 너무나 멍청했고 도덕적이었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아이를 보듬으며 나에게 화를 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조금의 기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멍청한 요셉. 멍청하고 다정한 요셉…….
단언컨대 그는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고지식한 인물에 가까웠다. 어린아이를 돌봐야 해. 내가 지켜야 해. 작은 아이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안달복달하는 모습은 웃기기까지 했다.
나는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닌데. 너는 지금 별 가치도 없는 것을 아끼고 있어. 속으로 요셉을 조롱했다. 깔보면서도 정작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견고한 조각의 벽을 무너뜨린 그는 방실방실 웃으며 더욱더 울리세를 아꼈다. 살아오면서 그러한 애정을 받아본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를 낳은 여자조차도 나를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동정이겠지. 알량한 동정이겠지. 너도 분명 버릴 거야. 나를 버리겠지. 모두가 그랬으니까. 부정하고 밀어내던 나날 중 짐승의 형태를 한 하수인이 요셉을 향해 돌진했다. 조각과 함께이니 그것을 방패로 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아악!’
고작 그 조그마한 아이를 보호하겠다고 등을 내주는 모습. 그게 뭐라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비실비실한 그 애새끼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뒤늦게 악마의 하수인을 다 죽였지만, 늦어 버린 후였다. 요셉은 뼈와 내장이 보일 정도로 크게 다친 채 쓰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마력을 끌어 올려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본래라면 플레이어를 위해 절대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이자가 플레이어라는 등의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힐.’
요셉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박살 난 뼈가 이어지고 근육이 차올랐다. 그 순간, 제정신을 차렸다. 이건 아냐.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마력의 이동을 멈추고 힐을 멈췄다. 회복되던 몸이 멈추고 더운 피가 계속해서 퐁퐁 솟아올랐다.
‘더…… 안…… 회복, 해?’
조각의 울렁거리는 눈빛을 무시하고 나는 요셉을 안아 올려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은, 요셉을 훌륭히 치료해 왔다. 나는 아직 괜찮아. 나는 달라지지 않았어. 나는 그대로야. 염불을 외듯 생각했다. 내 벽은 다시 견고해졌다.
‘요…… 셉……?’
조각은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면 짜증이 치솟았다. 내 어린 시절은 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는데. 더 쓸모없어졌어. 반복되는 나날이 조각을 마모시킨 것이 분명했다.
악마가 나를 비웃는 듯한 소리가 귀에 울렸다. 하지만 쓸모없는 조각의 안위를 걱정하는 요셉의 말은, 나를 흔들었다.
‘울리세, 너는 쓸모 없지 않아.’
‘그리고 울리세, 네가 쓸모없든 있든 형이 너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거야. 이 형이 울리세에게 뭐야.’
‘……후, 후견인.’
‘그치? 후견인은 보호자라는 거야. 네 보호자. 형은 널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널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지. 네가 너 자신을 쓸모없다고 하는 건 이 형이 할 일을 못 한 거나 다름없어. 형을 못난 사람으로 만들 거야?’
흔들리고, 흔들렸다. 조각의 벽은 진작 무너져 내렸다. 나만이 쓸모없이 너덜거리는 벽을 붙들고 그를 경계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렇게 둘 수는 없어. 이대로면……. 분명 저 사람은 숨기는 게 있어. 그런 것이 분명해. 나는 끝까지 그렇게 생각하며 때를 기다리기 위해 몸을 낮췄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술을 좋아하는 요셉이 쫄랑쫄랑 내려왔다. 술은 입을 가볍게 만든다. 숨기고 있던 속내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집사님이랑…… 친해져서 너무…… 좋아요.’
우린 친하지 않아.
‘응. 사실…… 집사님이, 나쁜 사람인가…… 했어요. 너무, 못되게 굴어서…….’
그럼 당신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건가? 아연함에 볼을 발갛게 붉히는 요셉을 보았다. 멍청한 플레이어. 멍청하지만 다정한 요셉. 바보같이 좋은 사람.
하지만 그는, 악마와 계약을 한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넘어갈 뻔할 때였다. 그의 마력이 폭주해 문양이 드러났다. 휘몰아치는 마력에 황급히 뛰어온 나를 문양이 비웃었다. 그의 발등에 자리 잡은 뚜렷한 검은색의 문양. 나에게 재앙을 안겨준, 내가 불러온 불행.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이렇게 뚜렷한 계약의 증거가 없었다.
그는 확실히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랐다. 다른 점을 꼽자면 수없이 많았다. 일단, 돈이 많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무일푼으로 저택에 찾아왔다. 외모 또한 달랐다. 그들은 모두 고정된 ‘후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모두 악마의 변덕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듯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한 번쯤은 이런 플레이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악마와의 계약으로 받아낸 것이라면? 내 눈에 매혹되지 않았던 것 또한 계약의 대가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그를 보기가 힘들었다. 나를 보며 웃었던 악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정 이자 또한 악마가 보낸 것일까? 이 사람마저? ……나를 조롱하기 위해?
‘네. 오늘 말이죠. 제가 사랑한다고 해줬거든요.’
요셉의 말에 나는 경악해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사랑. 악마가 말했던 사랑을 요셉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 조건을 달성한 게 아닌가?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다른 변화는? 없었다. 나와 같은 악마의 계약자. 사랑을 말했지만, 해방되지 않는 나. 모든 것이 예상과는 달랐고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요셉이 크게 다쳤다.
악마의 공간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본인을 희생한 것이다. 그에게 감사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구하고자 노력한 요셉의 모습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를 비열한 일등석 승객으로 기억했다.
그는, 조각이 중요하지 않았던 걸까? 본인이 사라지고 조각이 어떻게 될지는 걱정조차 하지 않은 걸까? 내가 홀로 남을 것을, 생각하지 않은 걸까? 그제야 나는 인정했다. 내가, 그를, 요셉을…… 사랑한다.
사랑을 인정하고, 그를 최선을 다해 유혹해 연인의 자리를 꿰찼다.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던 대로 행동하다가 분노를 샀지만, 그는 너무나 선량했고 나를 사랑했다. 나를 위해 본인의 상처를 되짚어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만큼이나 불길한 존재였다.
요셉의 배에 씨앗이 심어졌다. 차원의 꽃 씨앗을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나는 마법에 대해선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오래된 고서적에 쓰인 것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 꽃에는 심지어 악마의 흔적까지 짙게 남아 있었다.
악마와 어떠한 계약을 했겠지. 그가 나를 버린다는 가정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꽃 두 송이를 피우고도 그 끔찍한 고통을 버티는 이유를 짐작하는 건 쉬웠다. 하지만, 두 송이라면 나와 단둘이 떠날 수도 있는데. 저 쓸모없는 어린아이 따위 버리면 되는 건데. 끊임없이 그만두라 말했으나 요셉은 고통을 버텨냈다. 그만두지 않았다.
내 나약한 어린 시절의 모습이 끔찍했다. 버릴 수만 있다면 버려도 좋았다. 저주받은 아이 따위. 그 누구도 사랑해 주지 않는 아이따위 지켜 무엇 할까.
더 고통스러워진다면, 요셉은 저 아이를 버리고 나와 단둘이 떠나지 않을까?
좁디좁은 쪽방을 나서 여론과 수사 현황을 살피며 나는 일부러 요셉을 도우지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마태오는 그야말로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선동했다. 선량하고 신성해 보이는 외견 덕에 아무에게도 의심 사지 않았다. 하지만 여론의 극을 달리게 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저 남자가 우리를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갔어요!’
‘일등석 사람들은 우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문을 막기까지 했어요!’
‘그 열차의 사고로 내 딸이……!’
악마의 하수인이 기차를 장악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을 사람들은 요셉에게 뒤집어씌웠다. 아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차가 중단된 기간 동안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까지 분노를 터뜨렸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여론을 그대로 두었다.
조각이 아파 사색이 된 요셉을 돕지 않았다.
총을 맞아 엉망이 된 모습을 봤음에도, 돕지 않았다.
나와, 떠나줘. 나와 단둘이. 나와 함께 이 모형 정원에서 도망가요, 제발. 몇 번이고 속으로 간청했다. 그만두라고. 도망치자고.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악마의 제약은 사라지지 않았다. 할 수 있었던 말은 감옥 안에서의 몇 마디 뿐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끝끝내 버텼다.
‘집사님……. 제가…… 죽으면.’
엉망이 된 모습. 썩어가는 팔. 그런데도 그 두 눈은 나를 향한 사랑과 조각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그를 외면했음에도, 곁에 있어주지 않았음에도.
‘내 꽃으로 꼭, 울리세랑 이 세계를…… 탈출해야 해요. 꼭이에요.’
당장에라도 그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온몸의 마력을 끌어 올렸지만, 그 순간 모든 마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내 귓가에 악마가 속삭였다.
‘자기~ 힘을 쓰면 안 되지.’
결국 요셉의 목이 떨어졌다. 데구루루. 발치로 굴러온 내 연인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난 차가운 현실로 되돌아왔다. 연인을 잡아먹고, 나를 구원한 빛을 버리고, 이렇게. 비참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냥 도망칠걸. 그냥 요셉의 말을 들을걸. 내가 왜 그랬지? 쓰레기 같은 놈 그냥 죽지 그랬어. 견디지 못할 정도의 죄책감에 나는 울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넋을 놓았다.
멍청한 요셉. 바보 같은 요셉. 다정하고 도덕적인 요셉. 나의 사랑하는 연인. 나의 구원자. 나의 요셉.
그때였다. 눈앞에 너무나 익숙한 글자가 떠올랐다.
[승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승리하신 계약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선택 보상: <차원의 꽃>, <영원한 권력>]
[선택하신 보상은 귀하에게 귀속됩니다!]
“……!”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차원의 꽃!”
요셉을 만나러 가야 했다. 영광의 관도, 영원한 권력도, 그 어느 것도 이제 길거리의 돌멩이같이 가치 있지 않았다.
눈앞에 눈부신 빛과 함께 꽃이 나타났다. 요셉의 피부 위에서 자라던 그 꽃이었다. 그것을 기도하듯 부여잡으며 나는 꽃을 사용했다. 주변이 흐려지고 연기처럼 허물어지며 나는 세계를 넘어갔다. 나의 유일한 빛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