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1장 현실. 그리고 (12/21)

사랑스러운 왕자를 위하여

4

얀씨 장편소설

목차

11장 현실. 그리고

외전1 GAME CLEAR?

외전2 악마들의 다과회

외전3 재회

외전4 그리움

외전5 행복한 하루

외전6 칠전팔기(七顚八起)

외전7 비밀 상점

외전8 조각의 짧은 기억

외전9 광신도의 종말

작가 후기

“그건 드실 수 없습니다. 처분했습니다.”

“네? 왜요?”

처분했다는 소리는 버렸다는 건가? 갑자기 왜? 좋은 것처럼 보였는데. 패키지는 좋았지만 안에 있는 찻잎은 상태가 좋지 않았나?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자 울리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셉……. 브렌다의 말, 잊었어?”

울리세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물론,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조심하는 것은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설마 차에 독이라도 들었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건 너무 억측 같았다. 사실 아직은 그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확신도 없었고.

“제 주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뇨, 아뇨. 사실 전 차보단 주스가 좋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자 집사님은 꽃같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집사님이 만들어준 주스는 과일의 알갱이가 살아 있는 아주 달콤한 생과일주스였다. 현실에서 이 정도 퀄리티의 주스를 먹으려면 비싼 돈을 들여야 할 터였다.

“요셉, 이거.”

울리세가 자신의 몫인 주스를 슥 내밀었다. 내가 맛있다고 하니 자신의 몫을 양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울리세의 기특한 모습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은 울리세 건 울리세가 먹었으면 좋겠어.”

“……나는 요셉이, 먹으면, 좋겠는데.”

“아냐, 형 거 여기 있잖아. 형은 이거로 충분해.”

보란 듯이 내 몫인 주스를 쭉 마시자 울리세는 도로 잔을 가져가 나처럼 쭉 마셨다. 어른을 따라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라 정말이지 귀여웠다. 그런 안온한 시간이 계속되길 바랐던 것은 내 욕심이었던 걸까? 벼락 같은 고통이 또다시 나를 관통했다.

숨조차 쉬지 못하는 강한 통증에 나는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렸고, 유리잔은 산산조각 났다.

“요셉!”

“요셉!!”

닮은 두 개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지만 고통에 혼이 나갈 것 같아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거대한 뱀이 온몸을 강하게 죄어오는 듯 강한 압박감에 입을 강하게 틀어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토할 수 없다는 생각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온 세상이 돌아가는 듯한 어지러움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 어지럽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성이 없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으. 우윽, 아……. 읍!”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괴롭히는 고통. 나를 걱정할 집사님과 울리세. 세계가 뒤집히는 혼미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꾸역꾸역 입과 배를 부둥켜안고 참았다. 그 와중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괜찮습니다. 토하세요.”

참으려 했다. 식당에서 토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흔드는 순간, 토기를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위장이 뒤집힐 기세로 게워내자 고통이 조금 가셨다.

“도련님. 요셉을.”

작은 손이 나를 부축했다. 울리세였다. 울리세는 분명 나보다 한참 작은 어린애였기에 부축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의 힘은 셌다. 울리세가 나를 부축하며 어딘가로 바로 이끌었다. 흐린 눈으로 뒤를 보자 집사님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울…… 으윽.”

울리세에게 말을 하려 했지만 또다시 치밀어오는 고통에 입을 다물었다. 울리세는 나를 조금 더 빠르게 옮겼다.

근처 방에 들어온 건지 달칵거리는 문소리가 얼핏 들렸다. 아이는 나를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언제 이렇게 자란 건지, 아이는 정말 강해져 있었다.

“요셉.”

“……으.”

떨리는 집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차가워진 손으로 나의 이마를 매만졌다. 그 서늘함에 안도를 느끼기도 전, 다시 한번 내장을 쥐어짜는 고통이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배를 움켜쥐고 이불 속에 옹송그렸다. 주변 모든 것을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이 나를 장악했다. 악마와 거래를 한 과거의 나를 탓하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이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걸. 이게 다 뭐라고. 이건 현실이 아닌데. 고작 게임인데.

사람이란 간사하기 그지없어 견디기 힘든 고통이 계속해 밀어닥치자 비열한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맨몸으로 심해에 갇힌 듯 사방에서 쏟아지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 어느 정도 나아졌다. 겨우겨우 눈을 떠 주변을 힘없이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집사님과 울리세가 있었다. 집사님은 괴로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요셉, 괜찮으십니까?”

“……네, 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아파서 정신이 없을 때 소리라도 지른 걸까? 잘 모르겠다. 울리세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였다. 제정신이 아니어서일까? 아이의 눈물이 보석처럼 보였다.

“요셉.”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손바닥이 따끔했다. 손을 살펴보니 피가 미끈거리며 묻어 나왔다. 반달 모양의 자국이 짙게 나 있는 것을 보니 고통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쥔 나머지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 손으로 울리세를 만질 수는 없어 숨기듯 다시 이불 속으로 넣었다.

“다치셨군요.”

집사님은 그런 내 손을 잡아 밖으로 꺼내곤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주 능숙하게 젖은 수건으로 피를 닦아냈고, 울리세는 바로 약과 붕대를 감아주었다. 붕대를 감는 건 좀 과한 것 같았지만 아이의 걱정 어린 손길을 군말 없이 받아냈다.

“콜록, 콜록……. 울리세…… 고마워. 집사님도 고마워요…….”

한차례 기침을 하고 나니 목소리가 조금 더 수월하게 나왔다. 아까보다 한결 멀쩡한 목소리였기에 울리세와 집사님의 얼굴에 옅은 안도감이 서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사……. 그거.”

울리세가 집사님을 보며 말했다. 집사님은 그게 뭐냐는 말도 없이 재깍 무언가를 들고 왔다. 쟁반 위에는 흰 그릇이 있었는데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냄새가 났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든 말든 울리세는 나를 부축해 침상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집사님에게 물었다.

“그건…….?”

“몸에 좋은 약입니다.”

“…….”

그릇의 뚜껑을 열자 녹갈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기묘한 냄새는 뚜껑이 열리자 고약한 냄새에 가까워졌다. 숨을 쉬면 들어오는 끔찍한 향기에 입과 코를 틀어막았지만 집사님도 심지어 울리세마저도 눈빛으로 먹기를 종용했다.

“진짜, 먹어야 해요?”

“요셉, 이 집사와 도련님의 마음을…… 버리실 겁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면 제가 쓰레기가 되잖아요. 그야말로 눈물로 읍소하는 모습은 매우 처량해 보였다. 심지어 그런 얼굴이 둘이었다. 울리세와 집사님이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토할 것 같은 느낌의 약을 억지로 먹었다.

* * *

끔찍한 약을 먹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악마와의 게임은 끝나지 않았고 고통은 불시에 엄습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상황을 모두 숨기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집사님과 울리세는 나를 병원에 데려가거나 왜 아픈지 묻지 않았다. 그저 보약이라며 끔찍한 약을 내게 먹일 뿐이었다. 그것이 정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성의와 울먹거리는 눈 때문에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많이 자랐네.”

꽃은 생각보다 금방 자랐다. 2주가 지난 후 배에 자란 꽃은 한 송이가 막 피어난 참이었다. 마름모의 조그마한 문양이었던 것이 어느새 명치 위까지 자라나 있었다. 현실에서 이걸 들켰다면 형에게 혼났겠지. 형은 은근히 고지식해서 문신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한 송이…….”

자라난 꽃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꽃은 한 송이로는 부족했다. 울리세, 나, 집사님. 총 세 송이가 필요했다. 그나마 꽃이 피어나는 속도가 빨라서 다행이었다. 느리고 천천히 아픈 것보단 차라리 빠르고 강하게 아파서 금방 끝내는 것이 나았다.

“요셉.”

“깜짝이야! 집사님, 언제 왔어요?”

언제 온 건지 욕실의 문에 기대 있는 집사님은 어딘지 토라져 보였다. 조금 놀랐지만 옛날에 펄쩍 뛰었던 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는 내게 소리 없이 걸어와 배를 슬그머니 만졌다. 정확히 장미 문양이 피어난 그 자리였다.

“요셉.”

“……네.”

음산하게까지 들리는 음울한 목소리에 거울을 보자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지로 지은 듯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미소였다.

“포기하더라도 저는…… 요셉을 탓하지 않습니다.”

“……집사님.”

“그럼 작업실로 다과를 준비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집사님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짙은 체념의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랬다. 원래 아픈 사람도 힘들게 마련이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의 잔열이 남은 것처럼 달아오른 피부를 애써 감추듯 나는 옷을 단정히 갖추고 욕실을 나섰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어요. 나는 당신도 울리세도 포기할 수 없어. 나에겐 둘 모두가 있어야 해.

그가 아무리 괜찮다고 하더라도 나는 괜찮지 않았다. 꼭 모두와 함께 행복해질 것이다.

* * *

주변 숲속에 급히 지은 탓에 방열이 좋지 않아 후덥지근한 주택. 싱글거리는 미소를 띤 마태오와 그의 호위 기사가 어두운 방 안에 있었다. 금발의 호위 기사는 마태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이레, 아직도 저택에 침입하지 못했나요?”

“죄송합니다. 저택의 방비가 생각보다 단단합니다. 그 집사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서…….”

“선물로 위장해 보낸 성물도 건들지 않는 듯하니……. 곤란하군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빛은 그 어떤 때보다 날카롭고 사나웠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악마와 관련된 자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태오에게 너무나 큰 불쾌감을 주었다.

호이레는 고개를 조아리며 마태오의 눈치를 봤다. 호이레는 그 누구보다 마태오에게 순종적이고 맹목적이었다. 호이레의 몸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마태오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마태오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큰 죄악에 가깝다고 여겼다.

“악마의 저택이 어떻게 보호되고 있기에 호이레 당신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죠?”

마태오는 호이레의 실력을 알았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단에서 키워진 개였다. 오로지 마태오의 곁에 두기 위한 존재.

베르시펠리스 교단은 오랜 기간 계획했고, 그 계획의 구심점이 바로 마태오였다. 그런 자의 곁에 있는 사람이란 엄선 끝에 고른 인재일 수밖에 없다. 배신은 생각할 수도 없는,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충직한 사냥개가 호이레였다.

“저택에 사는 사람이 고작 셋이지만 경계는 공작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미 하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때 기자가 사진을 찍어간 것이 기적일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그 이후 집사라는 자의 경계로 기자들은 접근도 못 하고 있고요. 최근에는 마법으로 결계 또한 쳐놓은 것 같습니다.”

“……과연.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인가 보군요. 그 집사는.”

앞에 놓인 차를 한입 마신 마태오는 생각에 빠졌다. 그는 요셉을 악마를 소환한 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확고한 그 생각에 의문이 든 호이레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요셉이란 자의 발등에 있던 문양이…… 대체 무엇이기에.”

“호이레 당신이 내게 질문을 하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죄송합니다.”

마태오는 흐말렌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폭주하는 흑마력으로 인해 의복이 찢어져 노출된 발등에 있던 문양. 집사와 울리세가 빠르게 가렸지만 마태오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악마는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호이레 당신도 그것은 알고 있겠죠.”

“네.”

“모르는 자들은 그 문양을 그저 흑마력의 집합이라고 치부하겠죠. 그것만으로도 그자에게 눈독을 들이는 흑마법사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이 나는 알 수 있어요.”

마태오는 교단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교단의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마태오는 차기 교황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예비 교황 수업에는 악마의 기운을 가려내는 수업 또한 있었다. 그것을 흑마력과 구분하는 것은 교황의 필수 자질이었다. 마태오는 그 수업을 아주 힘들게 이수했고 그 기억이 뼛속까지 남아 있었다. 잠결에도 악마의 기운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의 혹독한 훈련이었다.

“그건 악마의 흔적입니다. 계약의 흔적이죠.”

사실 왕국과 교단에 보고해 지원을 받아 저택에 쳐들어간다면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태오는 그 누구보다 왕좌를 간절하게 원했다. 요셉을 고발한다면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는 더욱 확실한 것을 원했다.

영웅.

악마를 무찌른 영웅. 그 타이틀은 값지고 빛나는 것이라 얻기만 한다면 왕좌를 손쉽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왕좌를 얻어 교단의 위치를 드높이고 결론적으론 그가 믿는 베르시펠리스교를 국교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교단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언론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요셉은 저택에서 잘 나오지 않았고, 마태오는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는 것을 최근 느끼고 있었다. 현재 그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었다. 마태오는 손안의 성물을 굴렸다. 추기경이 그에게 준 성물로, 겉보기엔 진주 팔찌였다. 흰 진주알이 차갑게 빛났다.

“호이레.”

“네, 마태오 님.”

“나를 대신해 교단으로 가 이단 심판관을 소환하세요. 한시가 급합니다. 제 인장을 가져간다면 교단도 시급히 처리해 줄 겁니다.”

호이레가 요청해도 교단은 즉시 수락해 도움을 주겠지만, 마태오의 의도는 호이레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았다. 충직한 개에게도 먹이뿐만이 아니라 간식이 필요한 법이니까. 마태오가 호이레에게 보이는 신뢰는 다디단 과자와도 같았다. 그는 이것으로 마태오에게 더욱 충성할 것이다.

호이레는 크게 감격한 눈으로 마태오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작은 창에서 한줄기의 빛이 마태오의 뒤를 비췄다. 후광을 받은 마태오는 호이레의 눈에 마치 성자와 같아 보였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호이레. 어서 빨리 출발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마태오는 품속에서 한 장신구를 꺼내 호이레에게 건넸다. 신분을 증명할 성물이었다. 호이레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자리를 박찼다.

“당신의 어깨에 교단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마태오가 가볍게 이야기했다. 호이레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마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손목의 진주 팔지를 매만졌다.

‘토끼가 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유인하면 되겠지.’

그는 큰 소동을 일으키는 자리에 기자들을 미리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본래 생각했던 그림과는 다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끔은 가장 간단한 방법이 제일 효과적일 때가 있는 법이다.

“기다려라, 역겨운 자…….”

경멸 어린 말을 뱉는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어 말과 얼굴이 불협화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고 마태오는 계속해서 싱글싱글 웃었다.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창밖 나무의 푸름이 금빛으로 바뀌는, 초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

* * *

사실 조금 기대했다. 나는 혈기 왕성한 이십 대 청년이다. 집사님 또한…… 어? 집사님이 몇 살이었지? 겉으로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데……. 순간, 연인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어 이마를 쳤다.

통. 경쾌한 소리가 방에 울렸다. 하여튼 집사님 또한 분명 겉보기엔 혈기왕성한 나이대로 보인다. 혈기왕성한 두 명이 연인이고, 뜨거운 밤도 보냈으면 기대하는 게 있지 않겠는가.

“열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으으…….”

하지만 현실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빠르고 강하게 아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탓일까 몸이 아픈 빈도가 더욱 잦아졌고 하루의 절반을 꼬박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실 법도 했지만, 고통이란 정말이지 사람을 갉아먹었다.

고통에 정신을 잃으면 몇 시간이 지나 있었고 기절을 하지 않아도 아픔을 견디다 보면 시간을 까먹기 일쑤였다.

“나…… 괜찮아, 으, 요.”

어색하게 웃는 순간 밀려오는 고통에 입술을 짓이겼다. 며칠 사이에 넝마가 된 입술은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집사님은 나의 입술을 고통스럽게 매만지며 약을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약이 너무나 썼다.

“……도련님을 데리러 갈 시간이군요.”

“같이…… 가야 하는데.”

아쉬움에 말꼬리를 늘였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내 몸이 마중을 나갈 상태가 아니란 건 너무나 잘 알았다. 집사님은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곤 내 이마 위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넘겼다. 땀 때문에 축축해진 머리카락이 몇 가닥 이마에 달라붙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저녁에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그냥…… 아무거나, 괜찮아요.”

고통 때문에 입맛이 뚝 떨어져 버린 탓에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언제나 집사님의 요리가 맛있어서 밥풀 하나 남기지 않았던 나였지만 지금은 한술 뜨면 다행인 지경이 되었다. 그 덕분에 집사님은 내 식사를 그 전보다 더욱 신경 썼다. 그 관심이 나는 너무나 기꺼웠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응……. 다녀와요.”

손을 흔들 힘조차 없어 집사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상시와 달리 미련이 남는 듯 몇 번이나 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며 몇 번이나 웃은 후에야 방에 나 홀로 남게 되었다. 조금은 얼얼한 배를 매만졌다.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자 녹초가 된 몸은 손쉽게 잠의 영역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슬프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거대한 노크 소리가 저택을 울렸던 것이다.

쾅쾅쾅! 노크라기보단 문을 박살 낼 기세로 두드리고 있었다.

“으으으…….”

그 소리가 우레와도 같아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귀를 틀어막고 버텨도 불청객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인 점은 고통이 또다시 재발하지 않았다는 거다.

“갑니다! 가요!”

고함을 치자 귀신같이 조용해졌다. 현관문과의 거리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은 모양이다. 작은 한숨을 쉬고 얇은 가운을 단단히 여며 쥔 채 저택의 문 앞에 섰다.

“누구세요!”

“요셉 씨, 마태오입니다.”

“마태오, 후보자? 갑자기 왜……?”

“긴급한 사항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더없이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물었지만 기실 강요에 가까운 고압적인 말투였다.

“지금은 조금…… 곤란한데요. 제가 오늘은 좀 아파서 다음에-”

“급한 사항인지라, 그럼 문을 부술 수밖에 없군요.”

뭐? 황당해 되묻기도 전 쾅쾅쾅! 다시 거세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반사적으로 틀어막았다. 문을 부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소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도망가야 하나? 누가 봐도 공격성을 띤 태도에 적개심을 품은 목소리였다. 좋은 뜻으로 찾아온 게 아니란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냥 온 거였다면 문을 부순다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내가 도망치고 집사님과 울리세가 돌아온다면, 저 밖의 무뢰배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게 되는 것 아닐까?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쾅쾅쾅! 생각하는 와중에도 소음은 이어졌다. 안 그래도 고통 때문에 정상이 아닌 터라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문 열지 않고 버틴다면 울리세 후보자에게 좋을 것이 없을 겁니다!”

울리세에게?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할 게 분명했으나 협박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힘없이 잠금쇠를 풀자마자 문이 거세게 열렸다. 그 바람에 문에 부딪힐 뻔한 것은 정말이지 불쾌한 기분을 들게 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요셉 씨.”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온 이유는 뭔가요?”

혹여 날 향한 적개심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경계하며 물어보았다. 하지만 마태오는 대답 없이 성큼 흙발로 집 안에 들어왔다. 그의 호위 기사 또한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신발에 묻은 진흙이 현관을 어지럽혔다. 불쾌감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들어왔다. 무례한 행각에 무언가 작신거리며 뇌를 밟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말했지 않습니까. 중요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마태오의 손에서 흰 진주알이 빛났다.

저게 뭐지?

그 순간, 마태오의 손에서 흰 파동이 날아들었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그것은 예전에 마태오가 썼던 힘과 똑같아 보였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무거운 기운들이 나를 휩쓸었다. 동시에 코, 입, 눈,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쿨럭, 쿨럭. 이게, 이게…….”

피를 토하고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뭐지? 어떻게 된 거야? 피가 시야를 가려 눈앞이 붉게 물들었고 몸을 휩쓴 파동이 아직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과연. 내 예상이 맞았다!”

마태오는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하며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간헐적인 빛무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나를 걷어차는 발길에 저 멀리 날아갔기 때문이다.

“악!”

무자비하게 걷어찬 자는 마태오의 호위 기사였는데 그 눈에는 경멸이 가득 묻어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그 눈빛에 바싹 굳어 웅크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마태오가 뚜벅거리며 걸어왔다.

“여기 금기를 범한 악마의 소환자가 있다!”

마태오가 입은 것과 똑같은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문으로 몰려들어 와 나를 에워쌌다. 어떻게 그걸 안 거지? 나조차도 몰랐던,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을? 사제복을 입은 자 중 한 명이 다가와 무언가를 뿌렸다. 차가운 그것은 내 살가죽에 닿자마자 타들어가는 고통을 선사했다.

“아아악! 아파! 아파!!”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자 누군가가 내 얼굴을 철썩하고 때렸다. 그 무자비한 폭력에 몸을 덜덜 떨며 앞을 보자 마태오가 희열감에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자애로웠지만 나에게는 그저 악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름 모를 후보자의 후견인이 가는 장소에는 악마가 나타난다. 재미있는 소문이지요.”

덜컥 몸이 굳었다. 나 또한 도시를 떠날 때마다 하수인의 습격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마태오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소문이었고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흐말렌에서 이유를 알아냈지요.”

마태오가 강한 힘으로 내 발등을 밟았다. 성장기 소년의 힘이란 강하고 잔인했다. 또다시 비명을 지르면 얻어맞을까 봐 필사적으로 소리를 삼켰다.

“발등의 문양. 이거 계약의 문양이지? 하면 안 되는 계약을 했고, 그것으로 울리세 후보자를 왕위를 올리겠다는 파렴치한 생각을 한 거겠지!”

마태오는 평소의 예의는 집어치우고 격하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아니었다. 단언컨대 아니었다. 난 발등에 문양이 나타났을 때, 악마와 계약되어 있는지 몰랐다. 하수인들이 왜 우리를 쫓아온 건지 지금도 몰랐다. 억울해 눈을 부라렸지만 마태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 발을 짓이겼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 얻어맞지는 않았다.

“으으으……. 으윽.”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 안의 흑마력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또다시 씨앗에서 고통이 시작돼 집중력이 모두 흐트러졌다.

모이던 마력은 초라하게 흩어졌다. 결국 나는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면서 땅을 뒹굴었다. 마태오가 가하는 고통과 씨앗이 주는 고초를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죄인을 잡아라!”

마태오의 즐거운 목소리가 울리자 사방에서 억센 손으로 나를 억류했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반응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어느 쪽이 하늘이고 땅인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다. 피가 다시 입과 코, 귀, 눈에서 쏟아져 나왔다. 누가 보아도 동정을 일으킬 모습일 테지만 사제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차이던 도중 검은빛이 방에 들이닥쳤다. 밤보다 짙은 그 어둠은 강한 풍압으로 방을 휩쓸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가 사방팔방으로 낙엽처럼 날아갔다.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어 바닥에 쓰러지는 나를 따뜻한 손이 받쳐내었다.

“집…… 아……. 으으, 으윽. ……아.”

분노로 일렁이는 푸른 눈이 사방을 쏘아보았다. 그의 손에는 검은빛이 둘러진 레이피어가 채찍처럼 휘어 있었다. 레이피어는 뱀처럼 요사스럽게 흔들렸다. 눈가에 피가 고여 푸른 눈이 일순간 보라색으로 보였다. 격노한 눈빛이 내게로 향하자 크게 상처 입은 여린 눈이 되었다. 내 어깨를 쥔 손이 단단하게 나를 지탱했다.

“감히…….”

집사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매끄러운 얼굴에 핏대가 흉악하게 올라왔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손에 들린 검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뻗었다.

그 모습에도 마태오의 그린 듯한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마태오를 보호하려는 듯 호위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파들거리는 손으로 집사님을 잡았다.

“도망, 도망가요.”

집사님은 나를 다시 품에 고쳐 안고 방을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고함과 다급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주변을 재차 둘러보고 상황을 파악하려는 순간, 다시 한번 고통이 나를 쥐어왔다. 거대한 손아귀에 쥐여 터지는 압박. 내장이 입으로 밀려 나가는 것 같은 고통과 뇌수가 끓는 괴로움.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 채 집사님의 품에서 숨을 얼마나 내쉬었을까. 나는 정신을 잃었고,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끝이 없는 강한 고통과 집사님의 단단한 손길뿐이었다.

* * *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희미한 시야에 천장의 오래된 전등에 달라붙은 벌레가 보였다. 하루살이의 날갯짓이 이명과 함께 섞였다.

여기가 어디지? 천장에 발린 벽지는 누르스름했고 간간이 곰팡이마저 피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건강이 나빠질 것 같은 모습에 눈을 찌푸리며 딱딱하게 굳은 고개를 돌렸다. 우득- 굳은 관절에서 소름 돋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울…… 리세.”

2평이 아주 조금 넘어 보이는 좁은 방. 어쩐지 먼지 냄새가 나는 이불 위에 내가 누워 있었고 울리세는 벽에 기대서 잠들어 있었다. 아이는 평소에 입고 있던 질 좋은 옷이 아닌 어딘지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삶 중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지내본 적은 없었다. 몇몇 동기가 머물던 고시원과 아주 비슷한 이 방은 대체 어디일까. 마태오의 추적을 피해 집사님이 찾아낸 장소일까?

아이를 보며 주변을 관찰하는 도중, 울리세가 눈을 깜빡이며 떴다.

“아…….”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내게 무릎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걸으면 관절에 좋지 않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이에게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을 거다. 폭행 때문인지 아니면 씨앗으로 인한 고통 때문인지 아려오는 팔을 움직여 아이의 얼굴을 쓸었다. 아이의 볼은 이미 눈물로 축축했다.

“괜찮아……?”

“……응.”

아무리 아파도 아이를 토닥여 줄 힘은 끌어내야 했다. 참지 못한 듯 또르르 흐른 눈물을 닦고 아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고?”

“여긴…….”

아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벽에서 들려왔다. 옆방의 누군가가 있는 힘껏 친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숨을 죽였다. 아무래도 벽이 생각보다 얇은 모양이다.

한동안 눈빛만을 교환하고 있자 낡은 문이 아주 조용히 열렸다.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방이 작아 눈치를 챈 거지 조금만 넓었다면 열리는 것을 눈치 못 챘을 정도로 조용했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집사님이었다. 그는 저택에서처럼 소리 없이 움직여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달라진 것은 그의 옷차림새였다. 언제나 단정하고 맵시 있게 입었던 집사 제복이 아닌 아주 평범한 흰 셔츠와 조끼, 바지 차림새였다. 길거리를 지나가면 열에 다섯은 있을 그런 모습.

그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흑마력이 수증기보다 옅게 방에 퍼졌다.

“이제 마음껏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방음 마법을 설치했습니다.”

그런 게 있다니. 역시 마법 만만세다.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면 저렇게 간단하게 하지 못할 텐데 정말 집사님은 대단했다.

“여긴…… 어디예요?”

집사님은 드물게 한숨을 쉬었다. 피로해 보이는 모습에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그는 금세 얼굴을 갈무리하고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는 여전히 애정이 있었기에 일순간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나의 닻과 같았다.

“이곳은 뒷골목의 쪽방촌입니다.”

쪽방촌이라니,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들어보기만 했던 장소다. 뉴스에서나 보았던 장소. 내가 이 장소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생이란 것은 알 수가 없다더니 정말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이세계에 떨어지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금액을 가진 부자가 되더니, 사랑스러운 아이가 생기고, 후광이 비칠 정도의 아름다운 남자가 연인이 되었다. 괴상한 괴물과 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도망자 신세라니.

혹시 차원이동을 하면, 다들 이런 경험을 하는 건가? 나만 이럴 리가 없다. 이제 어지간한 판타지 소설론 만족을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신원 확인도 불필요하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습니다. 거주인들도 많이 바뀌니 어느 정도 숨어 있기는 괜찮습니다.”

“……그건, 콜록콜록…… 다행이지만.”

집사님은 어디선가 물통을 꺼내 내가 앉는 것을 부축하곤 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미지근한 물이 기도를 타고 내려가자 말하기가 조금은 편해졌다. 집사님이 베개를 등 뒤에 쌓아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베개에선 쿰쿰한 냄새가 났지만 그의 보살핌이 나를 기쁘게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막했다. 아직 꽃은 단 한 송이만 완벽하게 피어 있는 상태였다. 한 송이가 더 피고 있지만 아직 꽃대만 자랐다. 이 세계에서 도망가기엔 너무나 모자랐다. 최소한 두 번째 꽃이 다 자랄 때까지만이라도 도망쳐야 하는데.

선로의 중간에 강제로 서 있게 된 기분이 들었다. 발을 꽁꽁 묶어놓아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차를 피할 수 없게 된, 그런 암담한 기분이었다.

“일단 이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걱정하시지 마세요. 이 집사가 있지 않습니까.”

집사님의 냉정한 얼굴에는 불안함 따위 하나도 없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 든든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로……. 어디로요? 이 도시를 떠나면 또, 또 악마가, 하수인이…….”

도시를 벗어나면 어김없이 있었던 공격들. 우연이라고 믿을 수 없는 그것들. 순간 마태오의 말이 떠올랐다.

‘발등의 문양. 이거 계약의 문양이지? 하면 안 되는 계약을 했고, 그것으로 울리세 후보자를 왕위를 올리겠다는 파렴치한 생각을 한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단언컨대 마태오가 내 문양을 봤을 때는 악마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아니,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악마를 그 전부터 만났다. 악마인지 모르고 이 세계에 오기 전, 계약서에 이름을 쓰고 사인했다. 그것이 계약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계약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단언컨대 단 한 번도 마태오가 말한 이유로 계약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바로 계약을 모두 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우수 플레이어’.

지금 생각해 보면 플레이어라는 것 자체가 계약자의 또 다른 명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계약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 같은 게 아니었을까?

“문양…….”

나는 발등의 문양을 생각했다. 집사님은 분명 내 발등의 문양을 설명해 주었다. 흑마법에 대한 적합률을 높여주고, 거대한 마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그랬다. 그는 내 발등의 문양이 주는 효과만을 이야기했을 뿐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집사님이 내 시선을 피하듯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순간 탈력감이 몸을 지배했다.

이미,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울리세가 나를 꼭 껴안아 온기를 전해주어 아이를 꽉 잡은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한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고 내 손을 잡아 울리세를 놓게 한 후 자신의 얼굴로 이끌었다. 양손으로 눈과 귀를 스쳐 입을 막았다. 그러곤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나에게 어떠한 것도 말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꿈속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었던 어리석은 남자가 떠올랐다. 나의 양손을 동아줄처럼 부여잡은 남자를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픔이 흘러나왔다. 한순간의 실수였는데 꿈속의 울리세도, 집사님도, 둘 다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자그마한 손이 내 손 위에 올라왔다. 나를 잡은 두 명의 손. 그 누구보다 꼭 닮은 푸른 눈들이 나를 바라본다.

“……집사님.”

“네.”

“울리세.”

“응.”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둘은 지금 나에게 제일 소중한 보석이다. 그래, 이제 와 발등의 무늬나 계약이 뭐가 중요하겠어.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 상황에 대한 대책이었다. 이 도시를 떠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불가능. 그렇다면 어떻게든 오랜 시간을 버텨 꽃 세 송이를 피워 이 세계에서 도망치는 게 가장 나으리라.

“사랑해요.”

둘에게 최대한 환하게 웃어주었다. 비록 몸은 엉망으로 다쳤고 장소가 허름하기 그지없어도, 그들에게 애정을 보여주기 위해, 안심시키기 위해 고통이라곤 한 점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꾸며내어 웃었다.

“…….”

집사님이 왜인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얼굴로 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조그마한 울리세는 내 옆구리를 껴안으며 몸을 구겨 넣듯 웅크렸다. 분명 편안하지 않은 자세들임에도 왜인지 이것이 가장 완벽한 모습인 것 같았다.

완벽한 균형을 이룬 삼각형. 그 기이한 안정감이 우리를 단단히 결속했다. 각자 뿌리를 가진 나무가 하나로 얽힌 것 같은 기분이 편안했다.

“앞으로…… 도망 다녀야 해요. 오랫동안.”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꽃이 자라나는 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앞으로 고통이 얼마나 더 빨리 진행될지는 몰랐다. 일정이 어떻게 될지 가늠도 안 되는 상황에 어물거리며 대답했지만 집사님은 개의치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요셉.”

그는 내 양손을 잡고 얼굴을 묻은 그 상태 그대로 말했다. 어쩐지 기도하는 듯이 경건해 나는 말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향해 내리쬐는 빛도 성물도 없지만 순간 이 방이 성당의 한편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믿어요.”

꾹 잡힌 손을 마주 잡았다. 신뢰를 바라는 그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과 손을 잡는 정도가 다였지만 말이다. 그가 부디 내 진심을 알아채길 바랄 뿐이었다.

* * *

쪽방에서 지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건물 내 공용 화장실이 있긴 했지만 불결했고 조리를 할 장소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밖에 나가 음식을 사 오기에는 보관할 장소조차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사 오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나도 집사님도 수배가 내려져 있었다. 울리세 사진까지 퍼져 있으니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나야 평범하기 그지없으니 어떻게든 묻어갈 수 있다고 쳐도, 집사님은 천 리 길 너머에서 보아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근심에 차 있는 그때, 인벤토리가 번뜩 떠올랐다.

“……정말 이상하게 보지 말아줬으면 해요.”

“요셉이 무엇을 하든 제가 놀랄 일은 없습니다.”

“울리세도 형 이상하다고 하지 마…….”

“안 해.”

그들의 반응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걱정하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고 우선순위가 분명했다.

집사님과 울리세는 견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었지만 그럼에도 역시 그들 앞에서 인벤토리를 쓰는 건 무서웠다. 누구라도 미지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이 쪽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인벤토리 기능이 필요했다.

“인벤, 토리.”

눈앞에 이제는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흐말렌에 가기 전에 넣어놨던 물건들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역시 준비성이 좋으면 언젠가 도움이 되게 마련이다.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음식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냈다. 넣을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부드러운 빵과 치즈, 우유 같은 것이 나열되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울리세와 집사님을 확인했는데 그들의 눈은 아까와 별다를 게 없었다. 덕분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은 괜찮겠군요.”

“응. 대단해.”

울리세는 걱정했던 것과 달리 도리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은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마음이 뭉클해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스며 나오는 눈물을 어떻게든 참으며 집사님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곰팡이 슨 쿰쿰한 방에서 그는 그 어떤 때보다 상냥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요셉? 왜 그러는 겁니까. 괜찮습니까?”

“울지 마.”

손에 든 빵을 내려놓고 나를 달래는 둘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을 정도로 따뜻했다.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편안했다. 나는 훌쩍이다 코와 눈물을 닦아내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어서 먹어요.”

“응.”

단순한 빵과 치즈, 우유였지만 너무나 맛있었다.

우리는 쪽방에서의 빈곤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창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나는 하루의 반을 미약한 고통에 시달리며 누워 있었고, 울리세는 나가지도 못한 채 그런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죄책감이 스멀스멀 자라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울리세에게 이 쪽방 생활은 학대였다.

“다녀왔습니다.”

집사님은 생각보다 자주 밖으로 나섰다. 외모를 가린 것도 아닌데 들키지 않는 걸 보면 그가 어떠한 마법적인 조치를 취한 게 아닌가 싶다. 또는 내가 모르는 능력이 있을지도.

그는 밖에서 무얼 하는 걸까? 탈출을 위해 무언가 시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집사님…….”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싶었지만 배에서 알싸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고통은 크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덜 느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최대한 아픈 부위를 누르면 덜 아팠던 덕에 배를 움켜쥐자 몸이 즉각 반응했다.

“…….”

울리세가 가까이 다가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동안 쪽방에서 아프면 울리세는 언제나 그렇게 온기를 더해주었다. 너무 아플 때는 그것조차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고는 했다.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으려 하자 집사님의 큰 손이 나와 울리세의 손을 한 번에 쥐었다. 똑 닮은 두 쌍의 푸른 눈이 나를 지켜본다. 쿰쿰한 먼지 냄새만이 있는 쪽방이건만 그들에게서 나는 향기는 너무나 좋았다. 싱그럽고 생생한 꽃향기와 바스러지는 듯 메마른 꽃향기는 놀랍게도 조화로웠다.

“요셉, 포기해도 괜찮습니다.”

“……네?”

집사님은 강하게 손을 잡았다.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빼지 않았다. 울리세는 아픔을 느끼지 않은 듯 담담해 보였다.

“제, 제가 포기할 수는…….”

내가 포기하면? 내가 꽃을 피워내는 것을 포기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포기한다고 해서 발등의 문양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다. 이 수도에서 빠져나간다 해도 우리는 악마의 하수인에게 쫓길 것이다. 영원히 우리는 도망자가 될 것이다. 아무리 뛰어간다 해도, 그 과정이 설령 행복하다 해도 도피의 끝에는 낙원이 없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알아챘을까. 그는 조금 더 강하게 손을 부여잡았다.

그 덕분에 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집사님에게 집중했다. 그의 눈은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메마르고 늙어 지쳐 있던 그의 눈은 타오르듯 무언가를 갈망하고 애원하고 있었다.

“포기하면 제가,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그 간절한 말을 또다시 듣자니 갑자기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놓고 편하게 그의 품에 기대고 싶었다. 그 누구도 이런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것을 기꺼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적된 괴로움과 현 상황에 관한 죄책감이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집사님이 아닌 울리세를 보면 그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후보자 울리세의 모습이 다시 한번 선연하게 떠올랐다. 나는 집사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전, 포기 안 해요.”

“요셉…….”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집사님은 결국 눈을 감았다. 재차 나에게 말할 정도로 그 또한 궁지에 몰려 있는 듯했다. 울리세가 잡혀 있던 손을 슥 빼자 그는 꾹 잡았던 손을 입가로 가져가 입맞춤했다. 얕은 숨이 그대로 느껴지는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했다.

“왜…… 당신은 이제야 나타난 걸까요.”

집사님의 말에 동의하듯 울리세가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들을 바라만 보았다.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어느새 사그라져 있었다.

“왜…… 이제야.”

쓸쓸한 냄새가 맡아졌다. 누군가는 들으면 웃을 생각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간간이 그에게선 오래되어 바스러진 낙엽의 냄새가 났다. 비가 내린 후의 축축하고 외로운 향기였다. 그것은 그에게 깊은 상흔처럼 자리 잡아 있었고, 그것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 밥 먹어요.”

“……그럽시다.”

집사님은 방 한쪽에 접어놓은 앉은뱅이책상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쪽방이지만 집사님이 가져온 물건이 하나둘 자리를 차지했다. 그중 한 개가 이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최소한 상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도 다리가 부딪치는 아주 좁은 쪽방 한편에서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 * *

다행히 추적은 한 달이 다 가도록 근처까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심각해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집사님은 간간이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하고 왔는데 아마도 돈을 벌러 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이 상황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가난한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집사님은 그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때리거나 폭언을 퍼붓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집사님은 밖에서 신문을 자주 들고 왔는데, 나는 갈수록 끔찍한 인간이 되어갔다.

[왕실의 은닉.]

최근 마태오 후보자의 폭로로 왕실이 은닉했던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무려 왕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진실이었는데 그로 인해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악마를 소환한 금기를 범한 자가 나타났는데, 소환한 자가 후보자의 후견인이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악마에 대하여.]

[금기를 범한 후견인.]

[악인에 대하여.]

[숨겨진 재력가, 악마를 소환하다.]

[베르시펠리스교 지지자 늘어나.]

[시민 왕실을 향한 폭동. 귀족들이 폭력으로 진압해.]

[왕국은 이대로 괜찮은가.]

정말이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나에 대한 정보와 악마에 관한 것을 숨긴 왕실에 대한 비판이 섞여 혼돈 그 자체였다.

조용한 곳은 이 쪽방뿐인 것 같았다. 집사님이 첫날 방에 방음 마법을 걸어준 이후, 밖에서 나는 소음 또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날 걸었던 마법이 계속 지속되다니. 집사님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안 자라네.”

작은 거울을 통해 배를 확인했다. 씨앗에서 자라난 꽃은 어느새 탐스럽게 두 송이가 피었다. 명치까지 자라난 꽃은 낙인처럼 보였다. 나머지 한 송이는 아주 조그맣게 싹을 틔우고 있을 뿐 자라나기에는 또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옷자락을 내리자 눈앞에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월말에 뜨는 스테이터스 창이었는데 울리세의 성장세와 하락세를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무시하려는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수치가 보였다.

[체력: 423 → 383]

[건강: 100 → 79]

건강치가 떨어졌잖아!!

눈이 벌게질 정도로 비비고 다시 보아도 수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 물론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우리는 비좁은 쪽방에 기거하고 있으니까. 쪽방에는 창문조차 없었고 곰팡이가 곳곳에 슬어 있다. 이 공간은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년이 다 되어가도록 열심히 올린 체력이 깎이고 건강치가 이십이나 떨어졌다는 건 정말이지 화가 났다.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보양식이라도 사 먹인다면 좋아지지 않을까.

고민하는 와중 다른 한쪽에 나타난 알림 창이 나를 좌절시켰다.

[소지금: 0G]

[당신의 소지금은 현재 왕실에서 동결시켰습니다!]

[특정 이벤트를 해결하지 않으면 동결은 풀리지 않습니다!]

[특정 이벤트를 해결하지 않으면 소지금을 올릴 수 없습니다!]

당연히 못 쓸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설명까지 해줄 필요는 없잖아. 미약한 소름이 돋았다. 특정 이벤트. 내가 처한 이 상황을 또다시 게임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저 문구는 정말이지 몇 번을 봐도 끔찍했다.

결국 화가 난 것도 잊어버린 채 모든 알림 창을 꺼버렸다. 탈력감에 몸이 축 늘어졌다.

“후…….”

“……웅…… 요셉?”

한숨을 쉬자 옆에서 자고 있던 울리세가 꼬물거리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그래, 내가 게임으로 치부하지 않으면 되지. 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리자 울리세가 졸린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평소와 같이 화사한 얼굴인데 도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몸이 상했던 걸까. 마음이 너무 아팠다.

“미안해.”

“뭐가?”

스텟 창으로 보이는 건강 수치는 이십이나 떨어지긴 했지만 아직 팔십에 가까웠다. 그 정도면 아직은 건강한 수치이긴 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떨어진다면, 울리세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과거와 달리 아이는 정말 묵직해졌다. 거의 이 년이 되어가는 시간은 짧으면서도 아이의 성장에 한해선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울리세, 형이 사는 곳에 가면 어떻게 하지?”

“……뭐가?”

“형이 사는 곳은…… 형이 부자가 아니거든.”

생각해 보면 대책 없는 행동이긴 했다. 이 세계에서 둘을 끌고 탈출한다면? 그 후 그들을 어떻게 건사할 것인가. 일단 둘은 신분이 없고 나는 능력이 없다.

나 하나 챙기는 것도 겨우 했는데 둘을 더? 완전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울리세는 아직 한참이나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지 않는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면 조금 막막했다.

“괜찮아. 요셉이 있으면.”

“그래?”

“응.”

“형이 지금처럼 맛있는 것도 못 먹여주고, 또 배우고 싶은 것도 못 배우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울리세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나에게 달라붙었다. 내 옷을 필사적으로 잡은 손이 애처로웠다. 하긴 세계에서 넘어가 신원이고 뭐고 복잡한 문제에 시달린다고 해도 이 세계에서 악마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보다 백번 천번은 나을 것이다.

“요셉.”

“응?”

“나, 화장실.”

생리 활동이 없는 나와 달리 울리세는 화장실에 주기적으로 가야 했다. 공용 화장실은 지저분했고 남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요강 같은 것을 쓸까 고민했지만 울리세와 집사님이 반대했다. 사실 방에 요강을 둘 만한 공간도 없었다. 방은 정말 좁았고 나와 울리세 집사님이 누워서 자면 더 이상 뭔가 놓을 공간이 없었다.

울리세는 내 품에서 나와 옷을 꼼꼼히 정돈했다. 모자를 꾹 눌러 써 머리카락을 가렸다. 그동안 자르지 않아 길어진 머리는 모자 속에 숨기기 용이했다. 이미 이곳에 살면서 몇 번을 안전하게 다녀왔지만 뒤에서 지켜보는 나는 걱정스럽고 초조했다.

“다녀올게.”

“응. 조심히 다녀오고, 다른 사람 조심하고. 휴지 가져가지?”

“응.”

아이는 문을 열고 밖을 살펴보더니 재빠르게 나섰다. 화장실 가는 게 뭐라고 거의 첩보 활동에 가까웠다.

빨리 모든 것이 끝나 원래의 세계로 함께 돌아가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집사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일까 싶다. 그라면 순식간에 많은 걸 배우고 신분 문제도 해결할 것 같았다.

걱정이 무색하게 울리세가 금방 방으로 되돌아왔다. 몸에 쌓인 피로에 안전하게 되돌아온 모습을 보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어두운 방 안에 집사님과 울리세가 내 옆에 붙어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늦은 밤이나 새벽 같았다. 쪽방에는 창문도 시계도 없어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둘의 온도를 느끼고 있자니 요람에 누운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밤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곰팡이가 수두룩하게 피었던 천장은 집사님의 손길로 조금은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면적을 자랑했다. 집사님의 특출한 능력에도 지금 같은 상황을 모두 해결하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잠을 다시 청할까 했지만 정신이 말똥했고 이 쪽방에서 할 건 딱히 없었다.

“…….”

아니, 하나 있기는 했다. 시스템을 확인하는 것.

누워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시스템 창을 보면 일어나는 현기증과 비현실감은 양옆의 집사님과 울리세로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는 집사님과 울리세를 깨우지 않게 거의 숨소리에 가깝게 말을 내뱉었다.

“시스, 템.”

게임 창이 틱 떠올랐다. 순간 버티기가 힘든 어지러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시스템 창에 이 상황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이 감옥 같은 쪽방 생활. 울리세의 건강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따위 비현실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겹게 눈을 떠 울리세를 보았다. 아이는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자고 있었다. 내 옆구리가 원래부터 아이의 자리인 것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집사님 또한 아주 평온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웠고 평소의 냉한 분위기가 흐르지 않아 순해 사랑스러웠다.

“…….”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시스템 창으로 옮겼다. 시스템 창은 게임에 어울리는 UI로 꾸며져 있었다. 설정. 옵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추가된 것 또한 없었고. 메인 메뉴 같은 것도 있었지만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후…….”

손을 슬쩍 움직여 시스템 창을 끄려는 순간 손에 힘이 빠져 여러 개를 동시에 스치듯 눌렀다. 그러자 눈앞에 왠지 대충 만든 듯한 창이 삐로롱 유치한 효과음과 함께 떠올랐다.

“……?!”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참아냈다. 이럴 때만큼 사소한 것에도 겁먹는 새가슴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다. 혹시 자는 것을 방해했을까 양옆을 확인했으나 다행히 둘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조금 웅얼거리며 내 허리를 꽉 껴안은 것이 다였다.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고 새로 뜬 창을 확인했다.

[D씨의 비밀 상점]

……비밀 상점? 이런 것도 있단 말인가 이 게임은. 퀼리티가 떨어지는 도트로 꾸며진 상점은 당황스러운 것이 가득했다.

마시면 바로 1㎏이나 빠지는 저지방 우유 같은 거라든가. 먹으면 근육이 증가하는 닭가슴살 프로테인. 먹으면 매력이 올라가는 엘프의 꿀. 아니, 이런 걸 왜?

보호자로서 아이의 건강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렇게 외적인 것을 관리할 필요가 있는 건가? 와, 키가 자라는 버섯도 있네. 대체……. 이런 것으로 몸을 관리하면 의존하게 된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템 창 하단에 있는 다음 페이지 넘김 표시를 눌렀다. 내가 원하는 것은 건강을 올리는 아이템인데 있으려나.

“후우…….”

순간 다시 올라오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아직 아이템 창은 한참 남았다. 아이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고 집사님의 손을 슬며시 쥐었다. 그러자 마음이 평온해졌고 다시 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비밀 상점에 내게 도움되는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

[안 보이는 옷.

: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옷! 전 연령 사용 가능!]

명명백백하게 어떠한 동화를 모티브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옷이었다. 도트마저도 리본만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아니지, 옷이랄 것도 없는 아주 변태적인 아이템이었다. 심지어 전 연령 사용 가능? 변태를 넘어 범죄자다.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은 아동 학대, 착취에 성폭력까지 아주 가지가지를 하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겠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하지만 끝까지 건강에 도움되는 항목은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정신적인 노동을 하며 본 걸까. 얻은 게 없었다.

“후우…….”

시스템 창을 꺼버리자 다시 방 안이 어두워졌다. 분명 시스템 창을 확인하기 전까진 또랑또랑한 정신이었는데 지금은 몹시 피곤했다. 기말 과제를 하느라 일주일을 고생했던 그날의 몸 상태였다. 한숨을 푹푹 쉬며 눈을 감자 큰 손이 내 눈을 가렸다.

“깨셨습니까?”

“……제가 깨웠나요?”

“아닙니다.”

시스템 창을 볼 때 깨어나지 않아서 안도했다. 그는 마지막에 내쉬었던 내 한숨 소리에 깬 듯싶었다. 미안해 웃자 집사님이 내 입을 쓸어내렸다. 깃털을 만지는 것 같은 섬세한 손길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흐흐, 간지러워요.”

“어서 주무세요. 아직 새벽입니다.”

집사님이 몸을 더욱 밀착한 후 귀에 속삭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녹아내리는 달빛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치밀어 오르는 간지러움에 귀를 긁고 싶었지만 집사님이 나를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끔 꽉 껴안아 움직일 수 없었다.

“응…….”

그 순간, 울리세가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는지 칭얼거렸다. 아주 작게 속닥거렸는데도 워낙 좁고 조용했기에 잠결에도 들은 모양이었다. 집사님의 팔에 실린 힘이 느슨해져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귀를 긁적이며 울리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연적으로 집사님을 등져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미안해. 미안. 자장…… 자장.”

옅게 토닥이자 찡그렸던 표정이 다시 순하게 풀어졌다. 양처럼 얌전한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렸다. 다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자 나 또한 그것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피로했던 정신이었기에 현실을 천천히 떠나갔다.

“안녕히 주무시길.”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런 내 정신에 안녕을 고했다. 묵직한 손길이 내 몸을 다시 감싸 안았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행복감이 내 몸을 포근하게 데웠다.

“…….”

그랬기에 나는 정말로 몰랐다. 집사님이,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비정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나는 몰랐다. 어쩐지 방음 주문을 뚫고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는 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 * *

잠에서 깨어나 일어났지만 방은 여전히 컴컴했다. 옆을 확인하자 집사님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쪽방에 머무르게 된 이후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님이 옆에 놓고 나간 듯한 물수건으로 가볍게 얼굴을 닦자 조금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직 자나……?”

평소라면 나보다 부지런한 울리세가 몸을 씻고 와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을 읽을 시간이었다. 집사님은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핸드북을 아이에게 몇 권 준 것 같았다. 책은 주머니에도 가볍게 들어갈 만큼 작았는데 할 것 없는 이 방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울리세는 왜인지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나?”

좁은 방에서 지내는 건 피곤한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조심히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상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울리세?”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 축축해진 옷. 열로 달아올라 씩씩거리는 숨. 그 모든 것이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이마의 열을 재어보았다. 끓어오르는 솥처럼 뜨거웠다.

나는 당장 울리세의 몫으로 준비된 물수건으로 아이의 땀을 닦아냈다. 축축한 옷 또한 벗겨내고 인벤토리의 새 옷을 꺼내 입혔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다였다. 수배자의 몸이었기에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도, 약을 사 올 수도 없었다. 인벤토리에 있는 약품을 확인했지만 불행히도 감기약 같은 것은 없었다. 게다가 아이가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모르니 감기약이 있더라도 먹일 수는 없었다.

좁은 방 안에서 우왕좌왕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집사님, 집사님…….”

지금 당장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집사님뿐이었다. 집사님은 나갔다가 금세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 곧 돌아와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아이의 땀을 닦고 열을 최대한 식힐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아이의 옷을 다시 한번 갈아입힐 때까지도 집사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피가 송골송골 났지만 아픔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몸은 연약해 열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성인보다 더 빠르게 나빠진다. 땀을 닦고 열을 내리려는 모든 노력을 해보았지만 처음 알아챘을 때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안 되겠어.”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검은 후드 망토를 꺼내 둘렀다. 최소한 얼굴이라도 가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황급히 아픈 아이를 이불째로 끌어안았다. 얇은 이불이 아이의 얼굴을 가렸다. 이제 안기에는 많이 큰 탓에 너무나 무거워서 팔이 저릿해 왔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기 직전, 정말 나가도 괜찮은 건가에 대한 일말의 주저함 때문에 머뭇거렸다. 하지만 품에 안긴 아이의 힘겨운 숨이 가슴팍에 닿자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방 밖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헉, 헉…… 헉.”

문을 열자 좁고 청결하지 못한 복도가 나왔다. 어디로 나가야 밖인지 몰랐지만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초조함에 시야가 좁아져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진한 장소는 막다른 장소였고 나는 되돌아 뛰었다.

“아, 뭐야. 소란스럽게.”

내 뜀박질 소리가 거슬렸는지 쪽방 주민 한 명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숨길 수 없는 고단함이 얼굴에 역력한 중년 남자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 바짝 다가가 질문했다.

“여기, 여기 병원은 어디로 가면 있죠?”

“뭐야, 병원? 대로변으로 나가서 한참은 가야 할 텐데?”

다급한 나의 기색에 남자는 화내는 것도 잊은 채 대답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제야 나는 짙은 낭패감에 젖었다. 너무 조급하게 굴어서인지 이불이 젖힌 탓에 울리세의 얼굴이 노출되어 있었다. 빠르게 갈무리했지만, 이미 남자가 본 뒤였다.

“쯧쯧, 애가 아프구먼. 저 밑에 가면 약방이 있긴 해.”

“감사합니다!”

“근데 애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급하게 인사를 하고 복도를 달렸다. 다행히 아까와는 다르게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 높은 건물은 아니었던지 2층 정도를 뛰어내려 가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역겨운 쓰레기 냄새가 은은하게 나는 거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약방, 약방.”

복잡하게 들어선 건물들. 너저분한 쓰레기.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 그 모든 것 중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이 빠져라 살펴보아도 남자가 말했던 약방은 보이지 않았다.

“울리세, 어떻게 하지……. 울리세…….”

참으려 했지만 막막함에 결국 꼴사납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작 아픈 것은 울리세인데……. 나는 울 자격도 없었다. 내가 마태오에게 걸리지 않았다면. 그렇지만 않았다면 울리세는 병원에 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 테다. 아니, 일단 아프지도 않았겠지.

눈가를 훔치고 다리를 움직였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다짜고짜 붙들고 물었다.

“여기, 여기 약방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약방?”

상대방이 수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뒷골목이라도 얼굴을 가린 후드 차림이 흔하지는 않은가 보다. 하지만 곧 아픈 아이를 품에 안은 것을 보고는 측은지심이 들었는지 동정하는 눈빛으로 알려주었다.

“약방은 저 골목 너머로 가면 있어.”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누군가는 나를 알아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울리세가 너무나 위급했다. 땀이 비 오듯 흐를 정도로 절박하게 뛰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약방은 정말이지 불법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수상한 약들이 어지럽게 책상에 널려 있었다.

“계십니까!”

약방은 텅 비어 있었다. 목청이 터져라 불렀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행이 소름 끼치도록 짙게 미소 짓고 있었다.

불덩이 같은 울리세만이 내 품속에서 떨었다. 아니야, 이대론……. 이대로 이곳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아까 남자가 분명히 말했다. 대로변으로 나가면 병원이 있다고. 나는 희망을 쥐어짜며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너!”

그런 내가 수상해 보였는지 거리를 순찰하던 경찰이 나를 불렀다.

안 되는데. 아직 울리세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했는데. 아직도 아이는 불덩이와 다름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내가 지켜야 하는데. 내가 지켜주기로 했는데…….

나는 이제는 후들거리기까지 하는 다리를 있는 힘껏 움직여 달렸다.

“저기 수상한 자가 있다!”

품 안의 씩씩거리는 아이를 어떻게든 추슬러 안고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병원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신이시여, 제발! 하느님 부처님 누구든지 좋아요. 제발 당신이 신이라면 울리세를 가엽게 여겨주세요! 도와줘!!

하지만 신은 내 간절함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강한 바람에 품이 넓은 모자가 벗겨지고 내 얼굴이 드러났다. 나를 알아본 것인지 주변 사람 몇몇이 손가락질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방에서 집사님을 기다렸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아까 그 약방에서 약사를 기다렸어야 하는 걸까. 나는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왜 집사님은 오지 않는 걸까.

턱을 얼얼할 정도로 악물고 거리를 내달렸다. 누군가를 기다리기엔 내 품에 안긴 아이가 너무나 무거웠다.

“큭!!”

또다시 불행이 나에게 미소 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프지 않았던 몸이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픔에 순간 힘이 쭉 빠져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경찰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빨간 깃발을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황소처럼 그들이 매섭게 다가왔다.

“수배자가 맞아!”

“품에 있는 것을 내려놔!”

고통과 초조함에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울리세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갈퀴처럼 내 본능을 자극했고, 결국 몸에 맴돌던 흑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폭주로 발등이 타오르는 듯 아파왔지만 이미 고통에 오래 시달린 터라 큰 자극은 못되었다.

일렁이는 흑마력이 나와 울리세를 보호하듯 에워쌌다. 평소라면 공격적이었을 마력은 방어적인 형태를 띠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 방어적인 모습에도 주변 경찰들과 시민들이 주춤거리며 조금씩 물러났다.

“마법사는 늦는 건가?!”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 곧 도착합니다!”

“제길, 빨리 와서 마력 제어진 펼치라고 해!”

고통으로 인해 청각이 엉망이 됐기에 물속에 있는 듯 소리가 웅웅 울렸다. 제대로 들리지 않는 상황. 그 와중에 똑똑히 귓가에 파고든 소리가 있었다.

“저자가 그?”

“세상에, 그런 무서운 짓을 한 사람치곤 평범하게 생겼네요.”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 더 무섭다잖아요.”

사람들이 수군거림이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경찰들이 나선 상황임에도 사람들은 대피하긴커녕 멀찍이 물러서 구경했다. 그 점은 이 세계에 오기 전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며 품 안의 울리세를 껴안았다. 품에 있는 어린아이는 열에 들떠 나를 잡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아니, 저놈이 들고 있는 걸 잘 봐봐요!”

“후보자님이잖아!”

새된 비명이 날카롭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시민들과 경찰들의 긴장감이 내게도 느껴졌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어떻게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아니, 이곳을 벗어난다 해도 데려갈 수 있을까?

“후보자님을 해방해라! 너는 포위되었다!”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나.

초조함에 한 행동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울리세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내가 잡혀간다면 울리세는 치료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마력을 거둬들이고 항복하려는 그 순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그 어떤 때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열한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저 후보자님도 악마에 물든 것 아닐까?”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지만 생각해 봐. 그동안 저 미친놈이랑 같이 있었는데 저렇게 어린 분이 물들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세상에.”

날 괴롭히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내가 저들에게 잡히는 것은 예정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아픔에 잠식된 몸은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설령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지금 내 몸은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시민들은 악의적인 수군거림을 멈추지 않았고 경찰들 또한 그 말에 아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경찰이란 자들이 귀의 얇기가 종이보다 얇았다.

“……으, 하…… 하하. 하하하.”

나는 있는 대로 몸에서 흑마력을 일으켜 위협적인 기세를 만들어냈다. 검은 마력의 연기는 독사의 혀처럼 주변을 위협했지만 실질적인 위험은 없었다. 흐말렌에서처럼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것이 아닌 이상 공격은 내가 직접 다듬어야 했다.

즉, 이것은 그저 허세였다. 어떻게든 악인을 연기해야 했기에 부리는 허세. 아이의 몸을 부러 꽉 껴안고 악에 받친 목소리로, 언젠가 보았던 악당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하하, 후, 보자를 이용해 악을 강림하려고 했는, 데! 못…… 으으…… 이루다니!”

서글픔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른 이들에겐 그저 분노와 억울함 때문에 흘리는 것이라고 여겨지길 바랄 뿐이었다. 아이를 감싼 이불의 일부분을 일부러 벗겨냈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파서 헐떡이는 아이의 모습이 노출되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원하는 것은 울리세를 향할 동정이었다. 저들이 아이를 구조해 병원으로 데려가길 원했다.

“당장 후보자님을 놓아라!”

“그, 하아……. 으으…… 그럴 순, 없지!”

일부러 보란 듯이 거세게 외쳤다. 지금 나는 악독한 악당이어야 했다. 연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경찰들이 일제히 총을 꺼내 들었다. 내가 연기를 잘한 모양이다. 그제야 수군거리던 시민들이 모조리 도망갔다. 그들 역시 총에 맞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탕! 탕!

허공에 찢어지는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언제든지 나를 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나는 혹시 모를 사격에 울리세가 맞을까 공포에 질렸다.

“아이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 은가 보지?!”

나와 그들 사이에 팽배한 긴장이 서렸다. 갑자기 몸 안의 마력이 얼어붙었다. 말 그대로 얼어붙은 마력은 눈처럼 결정화돼 부서졌다. 몸을 보호하던 마력조차 없어진 나는 맨몸으로 그들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경찰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탕!!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총소리가 뒤늦게 인식됐다. 동시에 오른쪽 어깨에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다행인 점은 이미 내 몸은 고통으로 지져지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아이를 품에서 놓고 앉은 그 상태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살, 살려주, 세요.”

구차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빌었다. 내가 전의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건지 경찰이 우르르 달려와 포박했다. 아이를 챙긴 다른 경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쳤다.

“몸이 불덩이야! 빨리 근처의 병원으로 이송해!”

그 소리를 듣자 고통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억센 손이 나를 바닥에 밀쳐 묶는 그 상황에도,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도 기분이 나아졌다. 흐려지는 눈으로 경찰의 손에 옮겨지는 울리세를 마지막까지 보고 있는 와중,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제길. 빨리 압송해!”

가물어가는 시야로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푸른색이 스쳐 지나갔다. 집사님인가? 아니, 그일 리가 없다. 그라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다.

나도 울리세도 없는 쪽방에 놀랄 집사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나만 겪으면 되는 거니까. 나만.

그렇게 나는 아이가 병원으로 이송될 거란 사실에 안도하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똑. 똑. 똑.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 위로 떨어졌다. 정신이 깨어나며 몸의 고통 또한 함께 깨어났다. 오감이 되돌아오며 내가 딱딱한 장소에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무것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유치장인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쪽 벽은 쇠창살로 막혀 있고 나머지 벽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만들어진 지 오래된 장소인지 듬성듬성 이끼가 끼어 있었다.

“……모포라든가 그런 것도 없네.”

쪽방만큼 좁은 장소에는 모포는 물론이고 볼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조차 없었다. 기본적인 것조차 없는 방은 수감자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쪽방에서도 느꼈지만 생리 활동이 없어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들이 볼 수 있게 트인 공간에서 치욕스러운 기분을 계속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어디지?”

누가 봐도 지하 감옥에 가까운 장소였다. 이 세계는 설마 죄수를 이런 장소에 처박아놓는 건가? 이십 세기 정도의 문명이 아니었나? 이 시기에 이 정도로 인권이 망하진 않았을 텐데. 게다가 이 세계는 기묘하게 문명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온 세계보다 더 평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만큼.

“으으으…….”

고민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온몸이 미친 듯이 아파와 강제로 생각을 중단당했다. 옷을 들춰 확인하자 시퍼런 멍이 가득했다. 기절했는데도 몇 번이고 걷어찼던 모양이다. 심지어 총을 맞았던 어깨에는 대충 붕대가 감겨 있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해준 것 같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으면 안 되기에 해놓은 처치로 보였다.

“후우.”

벽에 기대앉아 한숨을 쉬었다. 배를 확인했지만 마지막 한 송이가 피어나기엔 한참이나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몸에 피어난 꽃은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시스템을 사용하는 건가? 다 피어나면 몸에서 꽃이 빠져나올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쓰고자 하는 그 시점이 되면 알 수 있겠지. 인어가 있던 그 장소에서도 진주를 어떻게든 사용하지 않았는가.

몸을 가누며 잡념에 빠져 있을 때,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던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음습한 복도를 밝히는 흰빛이 가시처럼 삐죽 내 눈을 찔렀다.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인가?”

“아.”

암흑 속에서 더러움이란 하나도 묻지 않은 순백의 존재. 본인이 바로 빛인 것처럼 뚜렷한 모습의 마태오가 금발의 호위 기사와 함께 나를 멸시하며 보고 있었다.

나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때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눈빛이었다. 아니,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때보다 더욱 심화된 눈빛에는 수렁보다 깊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마주 보고 있자니 속이 매스꺼워지기까지 했다.

“역겨운 자가 눈을 떴군.”

“…….”

악마를 소환해 내기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악마와의 게임마저도 내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전부이지 않은가. 가만히 있자니 억울해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닥쳐라. 말하는 것을 허락한 적은 없다.”

호위 기사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군. 나는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맞는 역할인 듯싶다. 순종적으로 입을 다물고 웅크리자 마태오는 흡족한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악마를 소환해 왕국에 재해를 가져온 역겨운 자.”

왕국에 재해를 가져왔다고? 그제야 나는 신년 평가 때 국왕의 연설을 기억해 냈다.

‘나라에 가장 어두운 악이 도래했소.’

‘나라를 좀먹는 악, 악마를 물리치는 자는 높은 점수를 받게 될 것이오.’

여행을 가면 나타났던 하수인들. 그들은 대체로 몬스터에 가까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수인이었지 악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니 나 또한 그들이 하수인인 것을 아이템으로 알지 않았는가. 그저 평범한 사람들에겐 하수인은 바로 악마 그 자체였을 것이다. 기차를 통째로 사라지게 하고, 사람들을 죽이며, 아이를 납치하는 그런 악마.

그렇지만 너무 억울했다! 난 악마의 하수인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그것들은 내가 악마를 소환하기 전부터 있었다고!

“난 아니야!”

“닥쳐라!”

쨍그랑!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내 머리에 맞아 깨졌다. 깨지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액체가 내 머리를 적셨다. 머리를 울리는 고통에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보자 얇은 유리 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축축한 무언가가 얼굴에 흘러내려 닦으려는 그 순간,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피부에 엄습했다.

“아아악!!”

예상치 못한 고통에 얼굴을 박박 긁고 지저분한 바닥에 뒹굴었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바로 이런 걸까.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지? 난 그저 집사님을, 울리세를 구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바닥을 벌레처럼 기며 괴로움에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나지막한 마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수로 정화하는 중이니 참도록.”

“정…… 흐으윽…… 화라니, 아악!”

어느새 성수가 얼굴에서 흘러내려 몸까지 들어갔다. 가슴팍을 통해 배까지 흘러간 것 같았는데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더 강한 통증이 작렬했다. 꽃에 닿아서 더 괴로운 것이 분명했다.

“감사히 여기도록. 처형 날까지 최대한 죄를 사해주려고 하는 거니까.”

처형? 재판도 안 받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아픔에 뇌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사형이든 뭐든 그 모든 과정에 절차가 있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고통에 비명이 또 나올까 입술을 짓씹고 마태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마태오 뒤에 선 호위 기사가 분노하며 말했다.

“왜 노려보는 거지? 역모를 저지른 자는 즉결 심판인데. 마태오 님이 무려 죄를 덜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았느냐. 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리도록 해!”

이 고문을 감사히 여기라고?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야기였다. 땅바닥에 몇 번을 굴러 몸에 있는 액체를 어떻게든 털어내자 고통이 조금 가셨다. 아니, 그 성수의 효과가 끝난 걸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조금 정상으로 돌아온 몸 상태로 씩씩거렸다.

“엿이나…… 흐, 먹어.”

“……!”

호위 기사가 분노하며 당장에라도 창살의 문을 열어 내게 뛰어오려는 것을 마태오가 막았다. 그는 분노라곤 보이지 않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에는 경멸뿐만이 아닌 동정 또한 있었다.

그 동정이 역겨워 나는 인상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

“호이레, 화내지 마세요. 저 역겨운 자는 불쌍한 자기도 합니다.”

“저런 자에게 불쌍하다니……. 정말이지 상냥하시군요, 마태오 님.”

“저자가 우리의 신을 믿었다면 이런 무도한 짓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자신이 한 짓으로 사후 어떠한 짓을 겪게 될지 몰랐음이 분명해요.”

“과연…….”

“저자에게 우리의 신 베르시펠리스 님을 믿게 한다면 조금이라도 죄가 사해질지 모르지요. 그럼 우리의 주는 우리를 기특하게 여기어 은총을 내려주실 겁니다.”

정말 미친놈의 헛소리였다. 어린 나이에 저렇게 깊게 신에 빠지다니. 정말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실함이 과하면 광신도가 된다. 종교는 자신을 다스리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지만 너무 과하면 저렇게 남을 핍박하게 된다.

나는 좁아 피할 공간이 없음에도 슬금슬금 뒤로 몸을 움직였다. 저들에게서 최대한 떨어지고 싶었다.

“그러니 앞으로 처형 날까지 매일매일 찾아올 테니 감사히 여기도록.”

그들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옷을 펄럭이며 되돌아 나갔다. 어쩐지 들뜬 듯한 발걸음 소리가 더욱 몸을 욱신거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완벽하게 홀로 남은 상태. 나는 얼굴을 더듬거렸다. 다행히 성수는 불타는 듯한 고통을 줬지만 실제로 녹아내리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뭘 했다고…….”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어 그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막을 새도 없이 터진 서러움은 둑이 무너진 것처럼 쏟아져 내렸다. 눈물이 엉망진창으로 흘러 얼굴을 적셨다. 몸에 묻은 먼지가 지저분하게 엉켜 보기 흉했지만 이곳에는 나뿐이었기에 보는 눈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홀로 갇힌 상태라는 게 다행이라는 점이 우스웠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원래라면 울리세가 있었기에 치지 못했을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땅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참고 있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한 셈이었다. 그러자 조금은 속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엉망으로 통곡하고 있을 때, 기다리길 마지않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엉망이시군요, 요셉.”

통곡을 멈추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검은 가죽 신발이었다. 민무늬의 검은 바지. 검은 조끼. 흰 셔츠. 그 위로는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조각 같은 얼굴이 있었다. 빛 하나 없는 곳에서 달처럼 은은히 빛나는 것 같은 모습은 신이 곱게 빚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심해를 그대로 잘라 담은 것 같은 어두운 푸른 눈은 나를 투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사, 님……. 왜?”

어두운 공간에서 절대자같이 오만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집사님이란 정말이지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이 장소에? 하지만 곧 구해주러 온 것임을 확신하고 나는 너저분한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집사님은 역병을 피하듯 뒤로 물러났다.

“집사…… 님?”

내가 더러워서 그런가? 정확히 얼마나 더러운 꼴인지 몰라도 저렇게 재빨리 물러날 정도면 끔찍한 몰골인 거겠지. 나는 손을 옷에 문질러 닦고 얼굴을 닦아냈다. 뒤늦게 손도 옷도 지저분해 닦이긴커녕 더 엉망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집사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물러난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요셉.”

“왜……. 왜…….”

나는 차마 두려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묘비 위의 까마귀처럼 나를 굽어살피고 있었다. 내가 언제 죽는지 가늠하는 그 눈빛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정했다. 차가운 그 모습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어두컴컴한 지하가 아니라 얼음이 가득한 동토에 가두어진 것은 아닐까. 혼란과 고통이 나를 잠식했다.

“이제, 포기하실 생각이 들었습니까?”

“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택, 쪽방, 그리고 이 장소까지. 그는 또다시 내게 포기를 권했다. 냉정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눈빛은 다시 보니 절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너무 세게 쥐어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명백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난, 포기 안 해요.”

그 모습을 보니 다시 마음속에 결의가 차올랐다.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 어떻게든 성공해서 둘에게 자유를 줘야겠다는 다짐. 언젠가 그 둘이 함께 웃으며 구속에서 벗어나 생을 즐기게 해주겠다는 결심.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굳건히 기둥이 되어 자리 잡았다.

“난 포기 안 할 거예요. 안 해.”

집사님은 내 결연한 목소리에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골짜기처럼 깊고 선명한 상처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은 건지 다시 나를 직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다만 그는 말을 하기 전, 초조함을 감출 수 없는지 몇 번이나 입술을 핥았다. 붉은 혀가 에덴동산에 있는 뱀의 혀같이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이 집사가 어떻게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제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귀도, 입도, 눈도, 모든 것이 막혀 있을 터였다. 누가 그의 행동을 막고 있을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괴롭게 인상을 찌푸린 집사님은 결국 몸을 세차게 돌렸다.

“다시, 다시…… 오겠습니다.”

대답하기도 전,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그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간절히 바라듯 내가 그를 바랐기에 봤던 것일까? 괴로움 때문에 환상을 본 것인지 일순간 헷갈렸다. 무질서한 정신을 다잡을 자신이 없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감옥에서 눈을 감으니 조용한 심연이 나를 반겼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저택에서 울리세와 집사님을 기다릴 때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곧 내 곁으로 돌아왔었으니까. 쪽방에서도,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내 곁에 없었다. 돌아온다는 확신도 없었다.

“흐으…….”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혹한 추위가 날 감싸 안았다. 그것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내 몸에 촘촘하게 달라붙었다. 뱀의 비늘과도 같은 서늘함이 몸에서 미끈거리는 듯했다. 이가 소란스럽게 덜덜 떨렸다. 인벤토리 안 여분의 옷이 생각났지만 얼어붙어 굳은 관절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몸을 옹송그리는 것뿐이었다.

* * *

감옥 안에서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지나갔다. 감옥은 쪽방보다 더욱 어두웠다. 눈이 어두운 곳에 적응해 주위를 보는 것에는 익숙해졌다지만 낮과 밤을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식사를 줬다면 최소한 아침저녁을 알아챌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지급하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회개했나?”

마태오는 자신의 호위 기사 호이레를 이끌고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밤인지 낮인지, 혹은 새벽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내가 이 감옥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고통.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내 몸은 움찔거리며 움츠러들었다. 몸에 각인된 고통은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차라리 씨앗이 내게 주는 고통이 견딜 만했다. 그것은 내가 미래를 위해 견뎌야 하는 시련이었으니까.

반면 그들이 주는 고통은 그들의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나를 위한다고 말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 자신의 신앙을 위한 행동이었다. 정말이지 역겨웠다.

“…….”

하지만 마음속 생각을 말할 용기는 없었다. 역겹다고 내뱉는 순간 가해질 폭력이 두려웠다. 본디 평범한 사람에 가까운 나는 말을 하기는커녕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웅크렸다. 그러한 나 자신의 나약함이 지겨웠다.

“그래. 보기 좋아.”

마태오는 그런 내가 마음에 드는지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눈은 곱게 휘어 있었다. 나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쇠창살에서 최대한 멀어져 벽에 붙었지만 좁은 공간에서 떨어져 봤자다. 여전히 마태오의 가지런한 흰 이가 보였다.

“마태오 님이 직접 성력을 부어주는 것이니 감사히 여겨라.”

호이레의 말이 무엇인지 인식하기도 전, 흰빛이 나를 덮쳤다. 처음에는 그저 눈만 부실 뿐이었는데 점점 수십 개의 따가운 가시가 찔러오는 고통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저 콕콕 찌르던 느낌이 시간이 갈수록 수십 개의 대바늘을 깊숙이 찔러 넣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섬세한 고통이었다.

“아, 아아, 아악!!”

오늘은 한번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비명을 질렀다. 온몸에 구멍이 뚫려 피가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피 같은 것은 흐르지 않았다. 믿기지 않아 온몸을 쓸어내리고 만져 확인해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만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이렇듯 마태오는 내게 무형의 고통을 선사했다.

씨앗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꽃이 피어나야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것인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피어나지 않는 거니까.

“회개하여 죽음 후의 죄를 덜어라.”

“아아악!!”

마태오가 무어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과한 고통에 청력이 멍해지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익숙해졌다고 좋은 건 아니었지만 기도일 것이 분명한 저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은 좋았다.

빛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이제는 어둠보다 빛이 더욱 싫어질 것 같았다. 빛이 사그라지고 고통이 뒤따라 아주 천천히 사그라졌다. 나는 웅크린 그 상태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이 정도의 진행이라면 처형까진 꽤 많이 정화될 것 같군요.”

“과연 마태오 님이십니다.”

“모두 우리의 주 덕분이지요.”

서로 주고받으며 칭찬한 그들은 자리를 떠났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는 또다시 나 혼자만이 남았다. 몸이 조금 안정되어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옷을 들춰 꽃을 확인했다. 처음보다 자라긴 했지만 거의 변화가 없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우…….”

가만히 앉아 있으니 벌레가 내 머리를 파먹는 것 같았다. 아니, 머릿속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팔을 무언가가 아프게 갉아 먹는 것 같았다. 다급하게 총상을 입었던 상처를 확인해 보았다.

“으으…….”

대강 처치한 채 상처를 감고 있던 붕대를 뜯어보자 흉하게 곪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진작에 조치했어야 하는 건데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 신경을 못 쓴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의학에 지식이 없는 내가 보아도 심각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늦었지만 인벤토리에서 약을 꺼냈다.

“읏…….”

아예 상의를 벗고 인벤토리에서 꺼낸 깨끗한 흰 수건에 물을 적셔 더러워진 상처 부위를 어떻게든 닦아냈다. 이를 악물고 고름을 짜내려 했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고통이 너무 심해 고름을 짜낼 수가 없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혼자 감는 바람에 어설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참에 더러워진 몸을 대충이라도 닦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하지만 조만간 또 찾아올 마태오가 이런 장소에서 어떻게 옷을 갈아입었냐며 닦달을 할 것이 분명해 결국 냄새나는 천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

상처를 확인하자 더 아픈 것 같은 기분에 벽에 기대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빛 하나 없는 이 감옥에선 할 것이 없었다. 누군가가 있다면 말이라도 했을 텐데 간수조차 없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어떻게 했어야 됐나 하는 생각을 곱씹는 것조차 끝나면 멍청하게 넋을 놓기 일쑤였다. 그나마 암흑에 익숙해진 눈으로 벽돌을 세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하다 보면 익숙한 고통이 찾아왔다.

“아, 으…… 으으…….”

명치를 송곳으로 갈아버리는 듯한 고통에 땅을 긁고 신음을 뱉으며 견디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아니, 지나가지 않았던가?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 몇 시간 혹은 몇 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울리세……. 집사님…….”

나도 모르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한번 내뱉으니 멈출 수 없었다.

“형……. 누나…….”

몸과 마음이 괴로우니 더 간절하게 그들이 그리워졌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는데 정말이지 서럽고 외로웠다. 보는 눈이 없으니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었다.

“흑, 흑…… 엉엉……. 허어엉…….”

어두운 감옥 안에 내 울음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홀로 울리는 목소리조차 고독감을 더해 힘들었다. 누군가 어깨를 토닥이고 위로해 주길 간절히 원했지만 돌아온 건 메아리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바닥에 웅크려 사정없이 울어젖혔다.

얼마나 울었을까, 머리가 띵할 정도가 되어서야 울음을 그쳤다.

“아…….”

그대로 가만히 웅크려 있고 싶었지만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있었던 탓인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저렸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꿔 누울까 하던 와중, 아까까지 없었던 검은색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집사, 님.”

그는 얼마 전 찾아왔던 그 냉정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나는 멍청하게 그를 보며 이 어두운 감옥에서 어떻게 저렇게 또렷하게 보이는 걸까 생각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너무 오래 갇혀 있던 바람에 뇌가 녹아내린 것 같았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셨습니까?”

“생…… 각?”

집사님이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약하게 떨릴 정도로 강하게 쥔 손에서 무언가가 떨어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거운 것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정말 무거운 것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상해져서 환청을 들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그 소리에 집중해 넋을 놓으며 멍청하게 굴었지만 집사님은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꽃, 말입니다.”

집사님이 직접적으로 꽃을 입에 담은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놀라움에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던 머리가 조금씩 개었다.

보다 깨끗해진 시야로 집사님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놀랄 정도로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이 멍울처럼 그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꽃…….”

그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쇠창살에 가깝게 다가온 그는 초조한 눈을 하고 있었다.

“포기하신다면 제가, 이 집사가, 이 제가, 모두 해결하겠습니다.”

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리는 모습. 그는 전보다 더욱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집사님을 보며 나는 배를 감쌌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나는 결국 그의 시선을 피하듯 구석으로 기어가 웅크렸다.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감옥에 울렸다.

“꽃은, 얼마나 자랐, 쿨럭, 습니까?”

계속해서 그의 말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기침 소리에 걱정이 되어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집사님!”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아픔조차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입을 틀어막은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각혈이라니. 지금까지 그는 내게 다친 모습 같은 건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 상처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괴로워하며 피를 토하다니.

심지어 피를 조금 토한 것도 아니었다. 어두운 감옥임에도 알 수 있을 만큼 피는 끊임없이 바닥에 떨어져 고였다. 철퍽.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감옥에 소름 끼치게 울렸다.

집사님을 살피려 하자 그가 귀신같이 차가운 손으로 내 손목을 붙들었다. 꽉 쥔 손가락이 맹금류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포기하세요.”

“싫…… 아파요…….”

집사님은 내 몸을 끔찍하게 생각하던 평소와 달리 아프다고 했음에도 더 세게 손목을 잡았다. 그의 입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아니, 입뿐만이 아니었다. 눈에서도 귀에서도 점점이 떨어졌다. 그의 고운 얼굴이 피로 얼룩지자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 움직일 수 없게 한 뒤 창살 틈으로 다른 쪽 손을 쑥 넣었다. 그러곤 말릴 틈도 없이 내 옷자락을 들춰 꽃을 확인했다. 배에 피어난 꽃을 확인하는 그의 눈은 그야말로 살벌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꽃은 절반밖에 자라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건지 그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집사님이 어떻게, 해결하려고요.”

나는 일부러 냉정하게 대답했다. 의도한 것이었지만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 깜짝 놀랐다. 차갑게 말한 것이 먹힌 것인지 집사님의 손아귀 힘이 느슨해졌고, 나는 그 틈에 손을 뿌리쳐 뒤로 물러났다.

“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집사님의 고함이 감옥에 쩌렁쩌렁 울렸다. 순간 그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찾아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낌새는 없었다. 하긴 집사님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고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울리세’가 소중합니까?”

“그야…… 당연하죠.”

“말도 안 되는 게임을, 큭…… 쿨럭쿨럭, 할 정도로?”

말을 이어갈수록 그의 몸에서 쏟아지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가끔은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나오기도 했다. 떨어지는 피가 고이다 못해 넘쳐흘렀는데 어느새 그 피가 내 발치에까지 흘러들었다. 축축이 젖은 발에 놀라 펄쩍 벽에 달라붙었지만 이미 묻은 피는 낙인처럼 남았다.

“네……. 당연하죠.”

“절, 저만을, 선택해 줄 순 없는 겁니까?”

그가 애절하게 나를 보았다. 그 눈이 나를 향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피투성이로 애원하는 그 모습에 단장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 누가 자신의 연인이 저런 모습을 하는데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의 삶은 사랑 이전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그를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그러나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그가 내게 보이는 애정이었기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송이지 않습니까. 쿨럭쿨럭, 저와, 저와 도망가면…….”

“…….”

“그런, 쓸모없는 어린애보다…… 저를, 그냥 이 집사와 함께 떠나면 안 됩니까?”

“…….”

“도망가면, 제가 계약을 큭…… 으윽……. 어떻게든 해지해 드리겠습니다.”

고통이 심각했는지 피를 토하다가 허리를 구부리고 신음을 참는 그를 보니 눈물이 절로 고였다. 분명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말해 저렇게 피해가 온 것이겠지. 그를 향해 뻗으려는 손을 꾹 잡아 멈추고 차갑게 대답했다.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게든.”

“제가, 악, 마와 내기……. 계약한 건 알고 있잖아요.”

“…….”

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말을 이었다. 지금만큼은 눈앞의 집사님을 보면 일어나는 심통에 몸이 아픈 것이 잊혔다.

“집사님이…… 아무리 능력이 대단해도 어떻게 악마와의 계약을 해지하겠어요.”

“할 수, 있습니다!”

못할 것이다. 그 또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그저 인간이기에. 악마를 마주하면 느낄 수 있는 기운. 악마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존재감. 평범한 인간이 이길 수 없음을 확신하게 하는 그 기세. 집사님이 아무리 대단하고 능력 있다 하더라도 그는 이길 수 없다. 그 또한 사람이니까. 심지어 그마저도 악마의 손아귀에 있지 않은가.

“안 돼요.”

물론 이길 수 있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분명 꿈속의 울리세는 악마와 계약을 했다. 내가 내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울리세는 계속 악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된다. 그 조그마한 아이의 모습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아동 학대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 거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다. 마음 같아선 경찰에 신고해서 구조를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 세계에선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해야 했다.

“……안 돼요.”

집사님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슬픔, 분노, 기쁨. 그것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나를 혼란케 했다. 그는 왜 기쁘게 나를 보고 있을까. 어떤 것이 그를 기쁘게 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모든 감정을 잡아먹은 절망이 탐욕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알겠…… 습니다.”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그는 처음과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곧게 자리에 섰다. 피를 토하고 고통스럽게 신음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가 토한 피로 엉망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를 거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음이 너무나 죄였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집사님.”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고개를 빠르게 들어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집사님은 없었다. 또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남은 것은 그가 쏟아낸 피뿐이었다. 찐득하게 흐르는 피는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낙망 같기도 했다.

질척한 피 웅덩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내 정신 또한 암흑 속으로 추락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나락이었다.

* * *

시간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착실히 지나갔다. 마태오의 신성력 고문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고 정신을 차리면 감옥에 홀로 남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차가운 돌바닥이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고통은 가시면 다시 오지 않았지만 나는 차라리 상처가 남았으면 했다. 고통스러웠던 부위가 깨끗한 상태인 것을 보면 내가 제정신이 맞는지, 혹여 미쳐 버린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태오가 정말 나를 고문했나?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정말 마태오 때문인가? 아니, 이 모든 것이 환상은 아닐까. 암흑 속에서 멍하니 있다 보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라리 씨앗의 고통이라도 왔으면 했다.

집사님과의 대화 이후 씨앗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자라지 않는 꽃은 더욱 스트레스를 주었다. 심지어 집사님은 피로 범벅이 되었던 그날의 대화 이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더욱 깊은 공허로 밀어 넣었다. 전하지 못한 말은 심연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았다.

“으으…….”

아피야 할 씨앗은 아프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총상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약한 냄새까지 나는 상태로 노란 고름이 줄줄 흘렀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짜기에는 이제 건드는 것만으로도 아픈 지경이라 붕대를 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안 자라면…… 어떻게 하지…….”

꽃이 이 이상 자라지 않는다면, 악마와의 내기에서 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악마와의 내기를 무를 수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마태오는 내게 처형 날까지 죄를 사해준다고 했다.

“하하…….”

꽃이 다 자라기도 전에 처형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몸의 꽃을 울리세에게 전할 수는 있을까. 모르겠다. 아파오는 팔과 아릿하게 남은 전신의 통증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다면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요셉.”

앳된 목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눈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와 햇살이 가득한 공원. 그곳에서 나는 돗자리를 깔고 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옆을 돌아보자 울리세가 방긋 웃으며 내게 매달려 있었다. 나를 부른 것은 울리세였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아이를 품에 껴안았다. 큰 만족감이 차올랐다. 어떠한 고통도 근심도 없는 온화한 감정이 나를 감싸 안았다.

“요셉.”

그런 나를 부드럽게 부르며 다정한 손길로 껴안는 존재가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 존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상냥한 나의 연인이었다.

“집사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내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 나를 감싸는 온기. 모든 것이 완벽했다. 행복이라는 것을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지금까지 꿈을 꾼 것이 분명했다. 그 모든 고통과 내기는 지독한 악몽일 것이 분명했다.

“아!”

하지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짧은 비명을 질렀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어지럽게 흐려졌다. 나를 보호하던 따뜻하고 평화로운 것들은 비눗방울이 터지듯 일순간 모두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아픔과 냉기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어두운 감옥 안에 갇혀 있었고, 내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화할 시간이다. 역겨운 자.”

집사님과 울리세를 찾기도 전 내리꽂히는 목소리. 냉정한 흰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쓰러져 자는 나를 걷어차 깨운 것이 분명했다. 허탈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태오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신성력을 퍼부었다.

아, 또다시 고통이 찾아왔다.

고통에 잠식된 정신은 그 무엇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점점 멀쩡하게 깨어 있는 시간이 짧아졌다. 나는 나약해 빠진 터라 도무지 이 현실을 견디고 있기가 힘들었다. 행복한 꿈에서 눈을 뜨면 참혹한 현실이 반겨 힘들었지만 도피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꿈은 마약처럼 끊을 수 없었다. 달콤하고 행복했다. 왜 사람들이 몸에도 안 좋은 마약에 중독되어 허덕이는지 이번 일로 깊게 이해했다.

“오늘로 정화는 마지막이구나.”

마태오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제는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고 비루할지 예상이 갔다. 그런 와중, 마태오가 한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마, 지막?”

최근 비명 말고는 말을 한 적이 없어 더듬거렸다. 노파처럼 목소리가 쉬어 듣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말을 멀쩡히 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호이레는 비웃음을 날렸고 마태오는 빙긋 웃었다.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아주 성스러운 미소였다.

“처형이 내일 낮으로 결정되었답니다.”

처음 봤을 때와 다를 것 없는 예의 차린 말에 일순간 내가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혼동이 올 정도였다. 하지만 곧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여전히 감옥에 있다는 것을 직시시켰고,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하, 하……. 처형.”

“주의 곁으로 가면 우리의 주는 역겨운 당신을 받아들여 억겁의 시간 속에서 벌을 주실 겁니다.”

“하하…….”

헛웃음이 계속 튀어나왔다. 크게 선심 쓰는 듯한 말투. 내가 받을 벌에 기뻐하라는 것처럼 들렸다. 정말이지 역겹고 이해할 수 없는 언동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그런 말을 자주 들어서일까, 이젠 화가 나지도 않았다. 아니, 일단 화낼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는 그들의 대화를 견딜 수가 없어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폐하께서 화형을 허락하시다니. 이게 몇 년 만의 화형입니까?”

“글쎄요……. 오래간만이긴 하지요. 요즘이야 그런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죠.”

희열 띤 목소리가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손을 들어 귀를 막았지만 그들의 대화 소리는 그 무엇보다 선명히 들려왔다.

“어떤 시민 단체는 아무리 그래도 화형은 너무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더군요.”

“하하, 정말 살기 좋아졌습니다. 저런 역겨운 자의 걱정을 하는 자도 있다니.”

“요즘이야 사람에겐 모두 권리가 있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는 시대지 않습니까. 참으로 우습지요. 인간의 권리란 신이 내려주는 것인데.”

“그래서 단두대를 꺼내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합니다.”

“단두대라…….”

한참을 인간의 권리에 대해 대화를 하던 그들이 이야기를 멈췄다. 나를 향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무시하며 눈에 더 힘을 주어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차가운 액체가 나에게 뿌려졌다. 저들이 평범한 물을 뿌릴 리가 없었다. 차가웠던 액체는 순식간에 뜨겁게 달궈져 나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성수였다.

“아아아악!!”

“마지막이라고 이렇게 더 신경 쓰시다니. 정말 마태오 님은 사려 깊으십니다.”

“신의 종이라면 해야 할 일이지요.”

그들은 유쾌한 발걸음으로 감옥을 나섰다.

또다시 홀로가 된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질렀다. 총상을 잊을 정도의 통증이 내 몸을 지배했다. 성수를 맞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수로 인한 고통은 몇 번이나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괴로움에 몸을 비튼 지 한참이 지나서야 고통이 사그라졌다. 몸을 추스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아 그대로 몸을 늘어뜨렸다.

“화형…….”

화형이라니. 21세기를 살아가던 나에게 화형은 세계사 속에서나 나오던 처형 방법이었다. 단두대조차도 말이다. 심지어 한국은 극악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사형당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더욱 낯설었다.

감옥과는 거리가 멀었던 삶을 살았는데 이렇게 감옥에 갇히고 사형까지 받게 되다니.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후우…….”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배를 확인했다. 꽃은 단 한 치도 자라지 않았다. 눈곱만큼도 자라지 않은 꽃을 보니 암담했다. 내일이 되어도 이 꽃은 자라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란다 해도 피어날 정도로 자라지 못하겠지.

절망감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내가 조금 더 강해서 감옥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감옥에 들어오고 나는 마법이라곤 하나도 사용할 수 없었다. 죄수를 가두는 장소이니 그 어떤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

“집사님…….”

집사님이 나를 도와주면 좋을 텐데. 감옥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나와 대화하던 집사님이 그립고 서운했다. 나를 꺼내서 도망쳐 꽃이 모두 자라기를 기다린다면 좋았을 텐데. 세 송이의 꽃으로 우리 셋이 도망가면 될 텐데. 그는 도대체 왜 그렇게 울리세를 싫어할까. 도대체 왜? 알 수가 없었다.

“……울리세.”

다 자라난 두 송이의 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꽃을 집사님에게 전달할 수는 있을까? 내 시체를 집사님에게 쥐여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집사님은 이 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으니 분명 사용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다.

“……하아아.”

사형은 분명 아프겠지. 고통 중에 가장 괴로운 것이 작열통이라던데 화형보단 단두대형이 차라리 낫다. 제발 밖에 있는 단체들이 목소리를 크게 내주었으면 좋겠다. 한 번에 목이 날아가면 화형보단 아프지 않겠지. 어찌 되었든 이제 사는 것보단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으, 으으…….”

총상은 이제 아주 살짝 건들기만 해도 끊어질 듯 아팠다. 최대한 어깨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조심히 누워 접촉을 적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기실 의사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나간다 하더라도 이젠 이 팔을 쓰지 못할 것이다. 고약한 냄새와 줄줄 흐르는 고름은 붕대를 적시고 옷에도 묻어났다. 심지어 다친 어깨는 오른쪽이었다.

“하…… 하하…….”

나는 오른손잡이다. 모든 일상생활이 오른손잡이에 맞게 적응되어 있다. 오른팔을 쓸 수 없다면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거다. 그리고 그림도 그리지 못하게 될 테지. 그림을 자의로 그리지 않는 것과 외부 요인으로 그리지 못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하…….”

나는 그림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른손이 없다면 왼손으로 그리면 된다. 하지만 왼손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여 그려야 원래의 실력을 찾을 수 있을까.

“하하하…….”

아니, 이건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는 내일 죽을 것이고, 죽음 뒤에는 내기에서 져 악마의 손아귀로 떨어지겠지. 어찌 되었든 이후 살아날 기회는 없을 것이다.

“울리세……. 집사님…….”

욕심과 고통에서 벗어나니 울리세와 집사님이 걱정되었다. 그 무엇보다 울리세가 걱정이 되었다. 내가 멍청하고 연약한 탓에 내기에서 이기지 못해 울리세는 악마의 손에 남게 되었다. 게임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울리세는 얼마나 더 괴로워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악마의 손에서 살아남아 자유로워질까.

모르겠다. 꿈은 울리세와 악마의 대화를 알려주지 않았다.

“미안해…….”

흐느껴 울며 그대로 꿈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보여주었던 꿈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공허에 계속해서 현실로 잡혀 들어오기를 수십 번. 지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결국 억센 손에 나는 감옥에서 일으켜 세워졌다.

“악!!”

하필이면 아픈 오른쪽 어깨가 잡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비틀어 그 손에서 빠져나와 웅크렸다. 경련하는 팔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끅끅 울었다. 눈물로 흐려진 눈을 움직여 위를 바라보자 처음 보는 남자 두 명이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들의 신발에는 철로 덧댄 앞코가 붙어 있어 부딪히는 곳곳이 얼얼했다.

“이놈을 만지면 저주에 걸리는 건 아니겠지?”

“성직자들이 축복을 내려줬으니 괜찮겠지.”

“찝찝하니 이놈을 갖다 두고 옷을 전부 태워야겠어.”

제발 내 팔을 잡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들은 각각 양팔을 잡고 나를 일으켰다. 심각한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몸을 비틀자 그들은 나를 놓고 마구 때렸다.

“악! 악!! 그, 그만! 아!!”

“시끄러워!”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단단한 부츠가 나를 넝마로 만들었다. 온몸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들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신나서 세차게 걷어찼다.

결국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 정도로 두들긴 후에야 내 옷을 잡아 찢었다. 그러곤 천 뭉치를 입에 쑤셔 넣었다. 역겨운 맛이 입에 가득 들어찼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게 되었다.

“이제야 조용하네.”

“이 녀석이 우리한테 저주를 거는 건 아니겠지?”

“교단에 기부를 하러 가자고. 그럼 신께서 축복을 내려준다고 하더군.”

그들은 다시 내 양팔을 각각 잡고 감옥의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들에게 잡힌 팔과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은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입이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감옥의 밖으로 나가고도 한참이나 긴 계단을 질질 끌려갔다. 걸어갈 힘조차 없어 발과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자연스레 새로운 상처가 나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점점이 흐른 피가 발자국처럼 남았다.

“정말 무겁군. 젠장, 두둑이 준다는 그 말만 아니었으면 안 했을 텐데.”

“우리가 하겠다고 안 나섰으면 제비뽑기라도 했을걸.”

“다 왔군. 문을 열어!”

앞에 거대한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갇혀 있었던 걸까. 나를 끌고 온 자들이 소리치자 잠시간의 시간 끝에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날카롭게 다듬은 창 같았다. 고통에 눈물을 흘리던 눈이 갑작스레 지르듯 쏟아진 빛에 더욱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으…….”

“악한 놈이 맞군. 빛을 보고 이리도 괴로워하다니.”

빛에 겨우겨우 익숙해져 주변을 보자 검은 사제복을 입은 자가 가득했다. 그들의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고,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태오의 옷자락에 수놓아져 있던 문양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베르시 어쩌고저쩌고하는 종교의 교단인 것 같았다.

그 문양이 눈에 밟힐수록 마태오가 나에게 가했던 고문이 기억나 괴로웠다.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를 보며 괴로워하고 있어요…….”

“역겨워…….”

“성하께서 저자의 영혼은 악마로 인해 더러워져 오염되었다고 하셨지요.”

“마태오 님께서 그를 친히 정화했다던데……. 과연 고고하신 분입니다.”

교인들의 목소리가 따갑게 귀를 울렸다. 남자들은 멈추지 않고 움직여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갔다. 점점 교인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 반면 다른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빨리 형을 집행해라!”

“악마!!”

사람들의 성난 목소리였다.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목소리를 듣자 내가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잡은 그들은 교단의 밖으로 끌고 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저렇게 분노한 사람이 가득하다 보니 감히 나갈 생각을 못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혼란을 틈타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는 법이므로.

질질 끌려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널찍한 광장이었다. 거대한 성당 같은 건축물이 아름답게 서 있는 장소였는데 가까운 곳에 정문이 있었고, 양옆으로 기다란 담장이 존재했다. 문에서는 많은 수의 경찰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문 너머로 분노한 사람들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망가진 기차의 사진을 거대하게 인쇄한 것이었다. 기차 사고의 피해자거나 피해자의 가족이겠지. 기차 사건은 내가 한 게 아닌데도 내 소행으로 되어 있었다.

억울함에 입술을 짓씹고 있자 남자들이 나를 한가운데로 내던졌다. 그 자리에는 거대한 단두대가 자리해 있었다. 화형이 아니었다는 점이 그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단두대의 밑에는 사형 집행인이 있었다. 어두운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터라 사형 집행인의 표정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까마귀 같아 나는 몸을 움츠렸다.

“죄인의 사형을 집행하겠다!”

사형 집행인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강한 힘이었지만 앞서 나를 끌고 온 사람들보다는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다행히 덜 아프게 일어날 수 있었다.

곧 죽을 사람이기에 챙겨주는 걸까? 그렇기다엔 검은 장갑을 낀 집행인의 손이 어딘지 익숙했다. 그는 심지어 내 입을 막았던 더러운 천을 빼주며 말했다.

“요셉.”

“……으…….”

익숙한 목소리. 낮게 분노한 그 목소리는 집사님이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얼굴을 가려 그가 내가 아는 집사님이라는 걸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단두대로 이끌며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

“제발…….”

울먹이는 목소리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다른 사람들이 사형을 집행하라며 무어라 떠들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떠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고 내 신경은 모두 집사님에게 향했다.

“집사님……. 제가…… 죽으면.”

“…….”

“내 꽃으로 꼭, 울리세랑 이 세계를…… 탈출해야 해요. 꼭이에요.”

겨우겨우 말하자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굼떠! 저리 비켜, 내가 하겠어.”

집사님은 허무하게 떠밀렸고, 분노를 터뜨린 사람이 나를 억압했다. 나는 거칠게 단두대에 고정됐다.

“네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아? 너 같은 놈은 더 괴롭게 죽어야 하는 건데. 퉤.”

나에게 침을 뱉은 자는 곧 멀어졌다. 다행히 집사님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남겨서일까. 나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통도 억울함도 들지 않은 평안한 상태였다.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라면 분명 어떻게든 꽃을 이용해 상황을 해결해 주겠지. 무려 연인의 유언인데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다.

“집행!!”

쐐액- 머리 위에서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 마지막에 울리세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아이가 많이 울 텐데. 내가 죽으면 많이 울 텐데. 내 죽음이 아이에게 큰 상처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부디, 내가 남긴 꽃으로 자유를 찾기를.

턱.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의식은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것이 죽음인가?

[특수 조건 완수!]

[특수 이벤트 완료!]

[GAME CLEAR!]

눈앞에 우스울 정도로 이질적인 글자들이 지나갔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겼어!]

“……어?”

너무나 익숙한 천장. 고통이라곤 하나도 없는 몸.

“이게 무슨……?”

나의 익숙한 자취방이었다.

고통 어린 게임에서 빠져나와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11장 현실. 그리고

한참 동안 눈을 깜박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꿈인가? 내가 또다시 꿈으로 도피한 것일까? 떨리는 손으로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 만졌지만 고통도 상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동안 내 몸과 마음을 괴롭게 했던 어깨의 상처조차 없었다. 매끄러운 피부에는 상처의 흔적조차 없었다.

“……뭐, 지?”

볼을 세게 꼬집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바로 느껴졌다. 이 상황은 꿈이 아니었다. 게임 속에서 빠져나온 것일까? 죽음으로? 나는 다급하게 배를 확인했다. 배에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점조차 없는 피부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뭐지…….”

침대 옆에 충전 중인 핸드폰의 화면을 켜자 게임 속으로 들어가기 전 바로 그날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길고 긴 이상한 꿈을 꿨던 걸까. 상처가 없음에도 일순간 매서운 고통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날카로운 고통에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참고 숨을 골랐다. 이 장소가 꿈이 아니라면 이 고통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건 가짜야, 이건 가짜야. 이건 가짜야…….”

몇 번이나 되뇌며 강조하자 고통은 스멀거리며 가라앉았다. 식은땀으로 가득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힘들었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 장소가 환상이 아닌 진짜라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희망을 품었다가 현실의 고통에 비명 지르고 싶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주변의 물건을 만졌다.

“……아…….”

내가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이불. 오래 사용해 낡은 베개. 베이지색의 벽지. 컴퓨터를 놓으면 꽉 차는 네모난 책상. 촉감, 시각, 후각. 그 모든 것이 이 장소가 사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두려움으로 푹 잠긴 입을 겨우 열었다.

“시, 스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스템을 불렀다. 언제나 보란 듯이 나왔던 시스템들은 흔적조차 없었다.

확실했다. 나는 게임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곳은 내가 살던 나의 현실이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 눈물이 흘렀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딱딱한 물건을 확인했다. 1년이 넘게 구경도 못 한 내 핸드폰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다시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가물가물한 비밀번호를 겨우 기억해 누르자 배경 화면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이, 이게…….”

힘이 빠진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깨져 어떠한 모습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사진이 떠 있었다. 내가 이런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분명 내 기억상 핸드폰 화면은…….

“집사님…….”

하지만 내가 그리는 연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엉망으로 깨져 일그러진 화면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상해진 배경을 두고 볼 순 없어 귀여운 고양이 사진으로 바꾸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곧 밀려오는 초조함에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내용은 <가장 아름다운 왕자를 위하여>였다.

“왜…….”

검색 결과로 나오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이 게임은 추천받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게임이었다. 실제로 채팅에서도 해봤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런데 이 검색 결과는 뭐지? 이렇게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수가 있나? 인터넷에서 깨끗하게 자료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주 조그마한 것도 어딘가에 남게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캡처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게임은 없었던 것처럼.

“…….”

핸드폰을 끄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기록 하나 남지 않았다. 몸에도 상처 하나 없었고, 무언가 손에 남은 것조차 없다. 내가 겪은 것은 뭐지? 내가 미친 건가?

그 순간, 핸드폰의 진동이 나를 혼란에서 끌어냈다. 끊이지 않는 진동인 걸 보아 전화인 듯해 화면을 확인하자 ‘첫째 형’이란 글자가 떠 있었다. 나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형…….”

-셉이니? 잘 있고?

“응…….”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에 눈물을 참느라 천천히 대답했다. 형은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남들이 들으면 무뚝뚝하다 생각했겠지만, 나는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돈 부족해?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아니, 아니야. 괜찮아. 형 나 잘…… 살고 있어.”

-그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형도 그렇고 누나들도 있는 거 잊지 마. 우린 언제나 네 편이니까.

“응……. 알고 있어.”

-그래, 돈 없다고 굶지 말고. 형이 먹을 것 좀 보냈다. 나중에 택배 잘 받아.

“응.”

형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형이 나를 걱정하는 것이 절실히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순간 나를 향해 미소 짓던 울리세가 떠올라 마음이 저릿해졌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왔으니 그 사랑스러운 아이는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허하자 견딜 수 없게 외로워졌다. 누군가 옆에 있기를 바랐지만 집사님은 이곳에 없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곰팡이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피어나 속을 좀먹는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오랜만에 들은 소리였다.

“배…… 고프네.”

공복이 너무 오래간만이라 잠시 멍하게 배를 문질렀다. 아무리 외롭고 슬퍼도 배가 고프다니. 그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무언가를 해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아 한참을 가만히 있으니 위장이 아프게 조여왔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혼자서 옷을 갈아입으려니 조금 어색했다. 그도 그럴 듯 집사님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시중들어 줬으니까. 또다시 그들을 생각하고 말았다. 서글픔에 고개를 떨궜다. 공허함이 나를 지배하려 했지만 애써 털어내고 집을 나섰다.

문을 여니 아침 햇살이 나를 반겼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햇살은 따사로웠다. 눈을 찡그렸다가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시의 정경이 쓸쓸해 나도 모르게 팔을 부여잡았다.

* * *

“으으으…….”

얕은 헛구역질을 참으며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취방 근처에는 식당이 여러 곳 있었고, 그중 몇 군데는 자주 가는 단골집이었다. 분명 게임 속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맛있게 먹었던 곳인데 마치 쓰레기를 먹은 듯한 맛에 몇 숟갈 먹지도 못했다. 돈이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

생각해 보지 않아도 이유는 분명했다. 집사님의 음식에 너무 익숙해진 거다. 한숨을 크게 쉬며 편의점에서 과일 주스를 사 마셨다. 그러나 슬프게도 과일의 맛은커녕 설탕물에 가까운 인공 향이 가득해 역겨웠다. 결국 주스마저 쓰레기통에 황망히 버렸다.

“이제…… 뭘 먹고 살지…….”

이 세계에서, 본래의 세계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나에겐 암담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필연적으로 돈이 필요하다. 직접 한다고 해도 싱싱한 재료를 사야 했고, 내 실력은 재료를 아깝게 하는 수준이다. 결국 완성품을 사 먹어야 하는데 맛있는 음식은 비쌌다.

“하아…….”

나는 해결 방법을 알 수 없어 막막함에 젖은 채 터덜터덜 걸었다. 바람이라도 쐴 요량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심권인 것치고는 집값이 다른 곳보단 싸고 한산했다. 덕분에 산책하기에 좋았다.

“후우우우…….”

힘내서 걸어봤지만 그마저도 얼마 걷지 못하고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앉아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평온하게 흘러가는 사람들. 바쁘게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

그 순간, 갑자기 어떤 사람들이 슥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네? 네…….”

인상 좋은 남녀였다. 그들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 어색하게 대답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인공적이기 그지없는 표정이라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저희가 선생님께 도움이 되는 영상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네? 영상이요?”

“네. 저희가 영상을 보여 드린 후에 설문 조사를 받고 있는데 한번 시간 내서 해주시겠어요?”

싱글싱글 웃는 낯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이 건네주는 패드로 영상을 보았다. 영상은 곧 다가올 재앙이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고,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며, 선택받은 선지자가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낙원으로 데려간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나는 무시하면 되는 이 허무맹랑한 영상을 보며 손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으……. 으으.”

“선생님? 왜 그러세요? 선생님?”

방금까지만 해도 인상 좋아 보였던 사람들이 경멸 어린 눈동자로 나를 보는 듯했다. 나를 잡아 당장에라도 감옥에 넣을 것만 같았다. 공포심에 젖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나는 손에 든 패드를 그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힘껏 달렸다. 두 쌍의 눈동자가 끈질기게 쫓아와 나를 물어뜯을 듯했다.

“으, 으으……. 으으.”

이가 딱딱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무형의 공포가 아가리를 벌리고 몇 번이고 나를 물어뜯었다. 나는 황야를 질주하는 광인처럼 정신없이 질주했다. 사람들과 엉망으로 몇 번이고 부딪치며 도망치다 체력이 방전되어 길거리에 형편없이 엎어졌다.

“괜찮으세요?”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다가왔지만 그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조차 나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오들오들 떨며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큼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은 비위생적이었지만 조금 살 것 같았다.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후우…….”

새삼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계로 돌아오며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정신 상태는 형편없이 무너졌다. 언제나 나를 지탱해 주던 울리세와 집사님은 이제 곁에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흑…….”

내가 해낸 게 뭘까? 울리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주지 못했다. 울리세와 악마와의 계약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꽃을 피워내 게임에서 이기지도 못했다. 내가 해낸 것이 뭐지?

“게임…….”

아니. 아니다. 잠깐. 아니었다. 분명 내가 이 세계에 돌아오기 전, 분명히 들었다.

‘네가 이겼어!’

분명 악마의 목소리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어린아이인지 노인인지 모르는 그 오묘한 목소리. 그런데, 내가 내기에서 이겼다고? 내가?

나는 꽃도 피워내지 못했는데.

울리세도 집사님도 구하지 못했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내 앞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아함에 슬쩍 고개를 들자 검은색의 구두를 신은 발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구두였다.

“요셉.”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 나를 깊이 애정하는, 걱정 어린 목소리. 눈물이 참을 새도 없이 주르륵 쏟아졌다. 내가 미친 걸까? 내가 미쳐서 그리운 모습이 나타난 걸까?

“요셉…….”

차마 올려다보지 못하고 있자 익숙하지만 조금은 거친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그는 조금 떨리는 손길로 주물렀고 그 손길에 나는 점차 긴장을 풀고 안정되어 갔다.

“요셉. 제가 왔습니다.”

아주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옮겼다. 개미가 기어가는 속도보다 느리게. 상대방을 직시하는 순간, 흐려져 사라질까 봐 두려워 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창백하기까지 한 차가운 피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모아 조각한 것 같은 외모. 그 무엇보다 깊은 심해와 같은 푸른 눈. 사랑스러운 보라색의 머리카락.

“당신의 집사, 당신의 연인인…… 울리세가 여기에 왔어요.”

“……울리세?”

“네, 요셉.”

그는 환하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눈앞에 마주 앉았다. 그러곤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나를 아주 자연스럽게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평소의 집사님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있는 이곳이 뒷골목이 아닌 게임 속의 그 오래된 저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사님이…… 잖아요? 어떻게, 여기에…….”

“요셉, 당신이 악마와의 게임에서 이겨서 해방되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나는 덜덜거리는 손을 들어 집사님의 뺨을 만지려고 했다. 진짜인지, 정녕 실존하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까 넘어져 이리저리 쓸린 터라 손에는 상처가 생겨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지저분해 보여 손을 오므리고 등 뒤로 감추었다. 그러자마자 집사님이 두 손을 잡아 손끝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하지만 울리세는요? 울리세는 어디에 있고, 집사님 혼자 왔어요?”

만약에 울리세가 없다면. 집사님이 혼자 넘어온 거라면. 그런 거라면 아무리 집사님이어도 나는 그를 진정으로 반길 수가 없었다. 눈에 힘을 주고 집사님을 노려보자 그가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으며 내 사랑스러운 작은 울리세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요셉, 정말 몰랐나요?”

“…….”

“울리세는 저였어요.”

“……네?”

집사님은, 아니, 울리세는 나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박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 가장 들뜨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가 정말로?

“악마가 저에게서 뽑아 간 제 어린 시절의 조각. 그게 어린 울리세입니다. 저는 이름과 역할을 뺏겨 그저 집사가 되었지요. 승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집사.”

“…….”

“내기를 이기기 위해선 제 어린 모습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제게 건 매료의 저주 때문에 저를 본 ‘플레이어’들은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요셉, 당신을 빼고.”

머릿속에 분홍색의 눈동자를 가졌던 일러스트가 지나갔다.

그랬구나. 울리세와 집사님이 그렇게 닮았던 이유는 둘이 동일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일 인물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틀린 셈이었다. 은연중에는 이미 사실을 납득했던 걸까? 집사님이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내뱉은 순간, 놀랍게도 빠르게 수긍되었다.

“집사님…….”

“울리세라고 불러주세요.”

“울리세…….”

“네. 요셉.”

그는 나를 마주 보고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찬란한 환희로 차 있었다. 그 모습은 태양과도 같이 빛나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꽉 안았다. 큰 안온함이 나를 감쌌다. 나의 울리세…….

“정말…… 보고 싶었어요.”

“네.”

“정말로…….”

“이렇게 제가 왔지 않습니까.”

그는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우리는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서로를 놓지 않았다. 한참이나 온기를 나누고서야 서로를 놓고 마주 섰다. 야외에서도 선글라스를 벗고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빛났다. 나는 그의 큰 손을 마주 잡고 이끌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울리세를 싫어했어요?”

“……요셉 당신은 당신의 가장 부끄러운 시절을 좋아할 수 있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예요?”

“그렇습니다.”

정말 별것 아닌 이유였다. 하지만 납득이 가는 이유기도 했다. 새삼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 체감되었다. 인상을 구기는 그는 앳되어 보였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풀린 의문에 밝게 웃었다. 자꾸만 바보처럼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마주 웃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울리세가 나를 찾아 현실에 왔다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아니까. 하지만…….

“나 그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그때?”

“단두대 때요.”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었죠?”

“……그렇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해 줘야 해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믿음이 조금씩 차올랐다. 나를 이렇게 든든하게 지탱해 주고 안정시켜 주는 그가 있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겠지.

“어쨌든 그때 못 했던 말이 있어요.”

“뭔가요?”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본편 완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