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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악마(4) (10/21)

9장 악마(4)

“자기~ 나 불렀어? 뭐 문의 사항이라도 있어? 그런데 자기는 플레이어니까 옵션으로 물어볼 수 있는데 직접 부를 줄은 몰랐네~ 아! 자기네 사람들은 게임 회사에 클레임을 마구 넣는다며?”

아니, 악마가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지금 이게 그런 건가? 그럼 자기는 우수 플레이어가 아니라 블랙 컨슈머가 되는 건가? 아니지, 이 경우에는 악의적이라기보단……. 뭐, 어쨌든 이렇게 불려 온 게 정말 얼마 만이야~! 자기는 내가 얼마나 즐거운지 모를 거야.”

악마를 소환하고 겁에 질린 것이 무색하게도 악마는 정말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쉼 없이 종알거리는 것을 듣자니 정말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긴장이 허물어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자 악마가 깔깔 웃어댔다.

집사님이 들을까 겁이 나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해 보이자 악마는 소리 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사이 머리는 두 개가 되었고 눈은 모두 사라진 채였다.

“그래서, 날 왜 불렀어?”

“……알고 있잖아요? 내가 왜 불렀는지.”

악마의 입이 더는 찢어질 곳이 없을 만큼 올라갔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정말이지 악마라는 단어와 딱 어울렸다.

“맞아. 나는 알고 있지.”

“…….”

“내 선물은 어땠어?”

악마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았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은지 악마가 연이어 말했다.

“재미있었어? 자기가 게임에 오류를 나게 해서 뜨면 안 되는 게 계속 뜨더라고. 스크립트도 망가지고, 배역들은 고장 나고.”

“…….”

“고칠까 했는데…… 그냥 뒀어. 어때, 나 잘했지? 응? 자기 덕분에 난 너무 재미있는데. 자기가 사는 세계에선 이스터 에그라고 하면서 좋아하는 요소 아니야?”

악마는 맨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첨예하게 달랐다. 성별도, 목소리도, 모습도, 모두가 뒤죽박죽으로 고정된 형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모습이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저 극도의 쾌락주의자적인 태도일 거다.

“……그, 것보다.”

“응. 왜? 뭐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이 선택이 맞는 걸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 악마와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꿈속의 울리세가, 그가 그 계약에 묶여 있는 거라면.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아라. 나는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 무엇도 없다. 꿈속의 울리세가 나의 작은 울리세나 집사님과 어떤 관계인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가설뿐이다. 일기장이 어떠한 원리로 해금되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는 내 연인의 이름조차 모르지 않는가. 나는 눈뜬장님이며 무지몽매하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이 모든 일의 원인에 관여되어 있는 악마를 불러내는 것. 그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것이 가시밭길일지라도 외길이라면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나와, 계약해요.”

“계에에에약? 세상에, 자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악마는 깜짝 놀란 듯 제자리에서 세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곡예에 가까운 그 행위에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하지만 악마는 그보다 빠르게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계약? 자기가 정말 계약이라고 한 게 맞아?”

“……네.”

“세에에상에, 세상에!”

악마는 정말로 즐거운 것 같았다. 그도 그렇듯 그의 몸에는 찢어지게 웃는 입이 열세 개는 더 나타나 있었다. 쩍 벌린 입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마치 불을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기차를 불태우던 불과 닮아 있었다.

“나랑 계약을 해서 어떤 걸 얻고 싶은데? 응? 집에 가고 싶어? 그런 거면 지금이라도 그냥 내보내 줄 수는 있어. 뭐였지? 로그아웃? 그런 건 사실 플레이어의 기본 권리잖아. 안 그래?”

“아뇨,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씨, 로그아웃이 되는 거였어? 그럼 처음부터 할 수 있게 해줬다면…… 아니지.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자. 울리세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희희낙락하면서 얼씨구나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책임져야 할 사랑스러운 어린아이가 있고, 연인인 남자가 있다. 나 홀로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울리세, 가 계약을 한 걸 알아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건지는 확실하게는 모르겠는데. 꿈속의 울리세가 말이에요.”

“응. 그런데?”

악마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채집통의 개구리를 보는 눈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울리세의 계약을 파기하고 나와, 나와 계약을 해요.”

“자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상도덕이 있지. 어떻게 계약을 파기해? 사회생활은 해봤어?”

악마한테 지적받고 싶지는 않은데. 악마는 귓구멍을 파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나랑 게임을 해요.”

“게임?”

다행히 다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악마는 재미에 크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임이라면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맞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옷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나와 게임을 해서 이기면 내 말대로 계약을 파기해 줘요.”

“흐으으음.”

악마는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얄따란 꼬리 여섯 개를 살랑거리며 악마는 내 주위를 아주 천천히 돌았다. 나무늘보처럼 느릿한 행동이었지만 그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어느새 나타난 수십 개의 눈이 악마의 몸 전체를 뒤덮은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징그럽고 무서웠지만 꾹 참아내고 말을 이었다.

“내가, 지면 뭐든지 할 테니까.”

“뭐든지?”

“……네.”

본래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지는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한 것이 정답이었는지 수십 개의 눈은 빙긋 웃었고 악마가 입을 열었다.

“좋아. 우리 귀여운 왕자와의 계약도 조금은 질려가는 참이었고……. 우리 자기와 게임을 해볼까?”

“게임은…….”

“게임은 내가 정할게. 괜찮지? 우리 자기?”

안 괜찮아요. 은근슬쩍 내가 잘하는 게임을 내밀려고 했는데. 하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악마는 히죽거리며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팔을 움직였다. 끔찍한 고통이 배꼽 위에 타들어가듯 내리꽂혔다. 놀라 악마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 우리 자기, 게임을 시작하자. 네 배꼽 위에 꽃의 씨앗을 심었어.”

“씨, 앗?”

“그래, 씨앗. 고통을 양분 삼아 자라나고, 영혼 위에 꽃 필 거야. 자라날수록 우리 자기는 고통에 시달릴 거고.”

“그게 무슨…….”

“오, 그게 무슨 게임이냐고 묻는다면……. 이건 참기 게임이야. 고통을 참고, 참고, 참아서 꽃을 피워내면 이 세계를 탈출할 수 있는 거지. 한 송이당 한 명이야. 몸에 피어난 꽃은 차원을 이동해 도망갈 수 있어.”

“……그거면…… 되는……?”

정말 그것이면 되는가. 아픈 것을 참기만 하면? 그럼 집사님과 울리세, 그리고 나까지 총 꽃 세 송이를 피워내면 이 세계에서 도망갈 수 있는 건가? 희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자 더욱 즐거워 보이는 악마가 계속 공중제비를 돌며 말했다.

“물론이야. 참기만 한다면 말이지. 언제든지 포기해도 좋아. 언제든지. 로그아웃을 외치기만 한다면 너는 이 게임을 끝낼 수 있어.”

“……내가 지면…… 어떻게 되나요?”

“하하. 악마가 요구할 게 뭐가 있겠어? 그렇지?”

뭐든지 간에 좋게 끝나지는 않겠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악마는 한참 깔깔 웃더니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기억해. 한 명당 한 송이란 것을. 그럼 우리 자기, 기대할게!”

“으으으…….”

거의 다 사라진 악마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박수 소리와 함께 다시 선명하게 몸을 드러냈다. 그러곤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 참. 자기가 까먹은 것 같은데 우리는 이미 계약한 관계야.”

“……뭐?”

“우리 자기 사인은 잘 보고 했었어야지~!”

깔깔깔, 악마는 나를 비웃으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릿속이 멍해 말문이 막혔다.

‘사인하라는 건가?’

눈앞의 종이 뭉텅이. 익숙한 이용 약관 동의가 씌어 있던 그것. 떠오르는 사인은 개꿈인 줄 알았을 때 무심코 서명한 그것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이마를 찰싹 때렸다. 악마에게 무어라 항의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이 세계에 오면서 악마와 계약관계였다는 건가. 그저 습관처럼 체크했을 뿐인데. 하……. 어쨌든 악마와의 게임에서 이기면…… 괜찮겠지? 게다가 게임을 나가는 건 플레이어의 권리라고 했으니 아마 그렇게 강한 계약은 아닐지도 몰랐다.

“으…….”

살살 아파오는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땀을 뻘뻘 흘려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그저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악마가 박아 넣은 씨앗을 확인하고 싶었다. 또 샤워를 하지 않으면 분명 내일 고생할 것이 뻔해 보였다.

“…….”

욕실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확인하자 배꼽 위에 마름모의 검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악마가 말한 씨앗이겠지. 발등 위의 무늬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배꼽 위의 문양과 발등의 문양은 빛을 하나도 흡수하지 못하는 검은색을 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닮아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게 잘한 짓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해낼 수 있을까.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지금이야 적은 복통으로 끝나지만 나중에는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진통제를 구하면 좀 나으려나.

멍하니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고 몸을 담갔다. 그 직후 몸이 노곤해져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

흐릿해지는 눈으로 잠들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져 결국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눈꺼풀을 꿰매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잠시만 눈을 감고 있자. 잠깐만 쉬고 일어나는 거야. 그렇게 하자. 정신이 점점 탁하게 몽롱해졌다.

“요셉!”

“흐어어어어어?”

강한 손길로 나를 잡는 것에 놀라 허우적거리자 미지근한 물이 찰랑거리며 나를 간질였다. 아까 분명 뜨거운 물이었는데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나를 잡은 손의 주인은 물론 집사님이었다. 걱정과 화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안 왔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아직도 멍한 나를 가만두지 못하고 물에서 들어 올렸다. 덕분에 집사님의 옷이 젖고 엉망진창이 됐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 그는 나를 수건으로 감싸 안고 욕실 밖으로 나섰다. 그에게 아기처럼 달랑달랑 들려 옮겨지는 게 이제는 너무나 익숙했다.

“어…… 많이 놀랐어요?”

“후…….”

내 어벙한 물음에 그는 그저 한숨으로 대답해 주었다. 심지어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가만히 쥐여주었다. 그는 얌전히 있는 나의 머리를 차분하게 말려주었다.

“정말,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하하……. 몰랐어요. 너무 피곤해서.”

“하아…….”

그는 급격하게 피로해진 얼굴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머리카락도 몸도 보송보송해지자 집사님이 옷을 입히려 들었다. 수치스러워할 새도 없이 먼저 속옷을 입혔다.

“……이건.”

“앗!”

그가 내 배꼽 위의 씨앗을 발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문양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발등의 무늬 또한 바로 알아본 집사님이다. 악마와의 게임으로 얻어낸 것이긴 하지만 그가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긴장감이 날카롭게 맴돌았다. 그는 씨앗이 깃든 피부 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더니 아무렇지 않게 잠옷을 입히며 말했다.

“……남에게 보이면 안 되는 게 생기셨군요.”

“…….”

“조심하셔야 합니다. 옷도 양말도 잘 챙기셔야 합니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나를 침대에 눕힌 그는 그저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눈에는 깊은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진득한 초콜릿처럼 눅진한 애정이 나를 향해 흘러내렸다. 그것에 취해 있던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집사님…….”

“……네, 요셉 님.”

“……아시는 거죠?”

악마를 알고 있는 거죠,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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