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악마(3)
역무원들은 이제 거의 시체처럼 창백해 불쌍할 정도였다. 이렇게 겁을 먹었으면 입을 열 법도 한데 조가비처럼 다문 입은 좀처럼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집사님이 눈썹을 꿈틀거리곤 기세를 점점 강하게 해 그들을 압박했다. 결국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굴복해 덜덜 떨리는 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아이는 끌려간 겁니다!”
“어린, 아, 아이들은 모두 잡혀가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들은 어떻게든 똑바로 말하려고 했지만 집사님의 기세에 거의 짜부라져 버렸다. 희게 질린 상태로 덜덜 떠는 걸 보니 미안할 정도였다. 지금껏 말한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미안하긴커녕 애가 탔다. 눈물이 나와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제발……. 말해주세요……. 제…… 제…….”
울리세의 웃는 모습. 사랑스러운 미소. 위로해 주는 작은 온기. 나를 향한 애정 어린 시선. 그 모든 것이 눈앞에 선했다. 상상하자 코끝에 아이의 싱그러운 장미 향기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자 치솟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흑……. 울리세…….”
모두 내 탓 같았다. 분명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허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자 순식간에 아이가 사라져 버렸다. 대체 뭐가, 어떤 것이 이런 짓을 했을까. 내가 손을 제대로 잡고 있었다면, 제대로 꼭 붙들고 있었다면 울리세는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 아이들은.”
역무원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래된 고통과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모두 숲으로 끌려갔어요.”
“숲?”
우느라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집사님이 물었다. 집사님의 시선을 받은 역무원은 흠칫했지만 다행히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숲에 마녀가 있다는 말도 있고…… 귀신이 있다는 소문도 있고…… 악마가 있다는 소문도 있어요.”
악마! 또 악마인가. 왜 수도를 떠나기만 하면 이 사달이 나는 걸까.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로써 정말로 여행을 떠나면 악마가 꼬이는 것이 사실화되었다.
“허공에서 정체불명의 피리 소리가 나면 열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숲에 끌려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고는 안 했습니까?”
“했죠. 했는데…….”
역무원은 괴로운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했지만 숲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아니, 나오긴커녕 찾을 수조차 없었어요. 어느 순간 되돌아 나오니까.”
“그럼 숲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숲이 분명해요.”
다른 역무원이 비명처럼 대답했다. 눈에는 정체불명의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왜 그들은 모두 숲으로 끌려갔다고 하는 걸까. 아무리 그곳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어째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이상하고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숲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 간절함을 알았는지 집사님이 나를 부축했다.
“그 숲은 어디죠?”
역무원들은 더듬거리며 숲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가지 않는 게 좋다는 말까지 소심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무시했다. 숲은 마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나오는 도시의 외곽에 자리해 있었다. 마차를 잡아 그 위치로 가달라고 하자 마부들은 매우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그 숲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웃돈을 주자 한 명이 가겠다고 나섰다.
“요셉.”
“……네…….”
산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 울적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 더 잘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해 맴돌았다. 수업도 더 열심히 듣고 준비도 열심히 했는데 모두 헛일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을 발휘하기도 전, 아이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체 나는 뭘 한 거지?
“요셉의 탓이 아닙니다. 제가 봤을 때 도련님은 갑자기 투명해지면서 사라졌어요.”
“……그래도.”
“요셉.”
죄책감에 집사님의 시선을 피하자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아플 정도로 잡아오는 그 힘에 나도 모르게 집사님을 보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요셉의 탓이 아닙니다.”
희로애락이 없는 표정이 나에게는 큰 위로로 다가왔다. 만약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을 거다. 한 것도 없는데 걱정을 끼치고 있다며 말이다.
내 손을 잡은 그 손을 꾹 맞잡았다. 얼얼할 정도로 세게 잡은 힘이 오히려 버팀목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희망적인 생각이 퐁퐁 솟아올랐다.
분명 다른 이도 아닌 집사님과 함께라면 울리세를 구해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희망적인 생각도 점차 피어났다. 여름의 숲에서 만난 그 괴물과의 조우에서도 불타오르는 기차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게다가 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인어의 손에서 살아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분명, 이번에도 울리세를 안전하게 되찾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기운을 차리셨군요.”
“네. 우울해할 때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집사님을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의 연인. 상냥하고 누구보다 강한 그는 분명 나를 도와줄 거다. 울리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는 나를 도와줄 것이다. 지금까지 쭉 그랬으니까.
“도착했습니다!”
싸울 결심을 마치자 때마침 마차가 목적지에 도달했다.
집사님은 평소와 같이 나를 에스코트했고 우리는 을씨년스러운 골목에 발을 디뎠다. 마부는 우리가 마차에서 내린 것을 확인하자 부리나케 자리를 떠났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이 산을 정말이지 극히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산에 무엇이 있길래?
“가시죠.”
집사님이 내 손과 허리를 잡아 이끌었다. 나는 집사님의 인도를 따라 길을 걸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산의 입구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우리를 붙들었다.
“요셉 씨?”
아직은 어린 티가 묻어나는 남자의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아까 인사하고 헤어진 마태오와 그의 호위가 서 있었다. 마태오는 나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마태오가 있는 걸까? 그들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아주 여유롭게 걸어왔다.
“어째서, 여기에?”
“별거 아니에요. 이 도시의 문제점을 찾다가 원인이 이 숲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문제점……?”
의아해 물어보자 그는 거리낌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민간 시찰에는 백성들의 삶을 보고 문제를 찾아 개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이 도시의 문제점 중 하나는 출생신고가 없다는 점입니다.”
“출생신고요?”
갑자기 출생신고?
“출생신고가 없는 이유를 찾으니 아동 실종 사건이 큰 원인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정체불명의 괴현상에 아이들이 실종되고 있고, 그 덕분에 두려움을 느낀 어머니와 임신한 여성들이 이 도시를 떠났지요. 혹은 아이를 전부 다른 곳에 사는 친지에게 위탁하거나……. 덕분에 흐말렌은 이런 별명이 붙었지요. 아이가 울지 않는 도시.”
발등이 또다시 따끔거렸다. 진작 알았다면 이 도시에 오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아이들이 모두 실종되고 있다면 왜 진작 왕국은 이 사건을 해결하지 않은 거지? 이 모든 위협을 왜 놔둔 거지?
왜 나는 울리세를 따라 도시를 돌아다녔음에도 몰랐던 걸까? 진정으로 내 두뇌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또다시 자책으로 우울해지려는 순간, 집사님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자책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걸 해결하려면 원인인 이 숲에 있는 기이한 현상을 제거하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마태오가 방긋 웃었다. 주변이 밝아지는 느낌이 드는 환한 미소였다. 정말이지 그는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
“여러분을 만났군요. 한데 울리세 후보자는 어디 갔습니까?”
“울리세는, 저 산에…….”
마태오는 내 짧은 말에 바로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저런, 그럼 어서 출발하도록 하지요. 미약하지만 힘을 보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사님, 어서 가요.”
산으로 가는 길 내내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이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내는 노력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런 건 무리였다. 심적으로도 평상시의 상태가 아니긴 했지만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발등의 고통이 심해졌다. 뜨거운 불로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빈약한 체력이 한계를 호소했지만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홀로 떨어져 있을 울리세를 생각하면 이런 것에 멈출 수는 없었다. 견딜 수 있었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점점 짙어져 사리분별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우리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대로라면 아이를 찾기는커녕 우리 또한 조난을 당할 것 같았다.
“어떻게…….”
“쉿.”
이 안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상의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집사님이 굳은 얼굴로 내 말을 막았다.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그를 알기에 무언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장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마태오가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로 안개를 향해 말했다.
“나와라, 사특한 것.”
마태오의 호위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두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집사님은 동시에 나를 보호하듯 껴안았다. 순간 나 자신의 무능함이 느껴졌다.
[아이고. 귀찮다, 귀찮아.]
예상외로 안개를 헤집고 나온 자는 후줄근한 차림의 남성이었다. 머리는 이리저리 삐쳐 있었고 화려했을 광대복은 엉망으로 구겨져 볼품없었다. 손에는 녹색의 피리가 있었는데 그 또한 금이 가 있어 제대로 된 구실을 할지가 의문이었다.
한마디로 위험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것이 내 아이를 납치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뱃속에서 끓어올랐다. 나는 집사님의 품에서 미친 듯이 뛰쳐나가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울리세를, 내 아이를 돌려줘!”
“요셉!”
집사님이 당황해서 뛰어와 나를 뒤로 끌고 갔다. 진정하지 못하고 분노로 씩씩거리자 마태오가 정체불명의 흰빛을 나에게 퍼부었다. 그 빛은 안정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지 점점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뭐야. 아이를 버리러 온 게 아닌가? 흐음. 흐음.]
남자는 히죽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먼지가 낀 듯 탁한 그 눈은 오래된 인형의 안구같이 보였다. 남자는 아까까지 헐렁이처럼 굴던 태도는 집어치우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손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뒤로 정리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남자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오랜만의 플, 아니, 손님이군.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이야!]
조금은 미쳐 보였는데 도리어 아까보다 생기 있었다. 마태오가 그런 남자를 보며 깊은 미소를 지었다. 인자하다기보단 깊은 혐오감이 깃들어 있는 미소였다. 저런 싸늘한 눈빛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아 어쩐지 무서웠다.
남자는 마태오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은 채 피리를 흔들며 과장된 행동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얼굴은 권태로웠지만 노랫가락은 흥겨워 그 부조화가 소름이 끼쳤다.
[어두운 숲, 어두운 숲. 그곳에는 아이를 먹는 괴물, 악마가 있지!]
그 순간 타들어가듯 발등이 아파왔다. 기차와 호수 밑에서 아팠던 것과 똑같았다. 눈앞의 저 남자는 악마의 하수인임이 분명했다.
[아이를 버리면 은화 20개, 돌아가는 길에는 빵 조각을 흘리세요!]
어딘가 익숙한 내용을 노래한 남자가 피리를 입에 댔다. 집사님은 지체하지 않고 검을 빼 들었고 금발의 남자 또한 하수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하수인은 히죽 웃으며 제자리에서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피리를 불었다.
[-----!]
거대한 소리였다. 하수인이 피리를 불자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체불명의 피리 소리는 하수인의 연주였다. 안개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고 어쩐지 군침이 도는 단내가 하수인의 뒤편에서 흘러나왔다.
“……저게 뭐지?”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기자기한 집이 있었다. 집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갓 구운 것처럼 윤이 흐르는 과자들이었다. 정말이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현상이었다.
자꾸만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하수인에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울리세를 돌려줘! 나는 아이를 버린 적이 없어!”
집사님이 나를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하하, 요셉 씨. 악마와 대화를 시도하시다니 순진하시군요.”
마태오가 아까와 똑같은 미소를 띤 채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를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판단했지만 그는 악마라고 결정지은 모양이었다. 마태오를 호위하던 남자는 이미 하수인을 향해 달려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따끔거리는 위압감을 뽐내는 하얀색의 빛이 마태오의 손에 응집되었다.
“악마는 그저 죽이는 게 답이랍니다.”
희게 웃는 얼굴은 담겨 있는 살의와 달리 성스러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집사님은 어느새 검을 집어넣은 채였다. 그도 그럴 듯 마태오 일행은 거의 날아다니며 하수인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우리가 끼어들 필요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나에게는 저 하수인이 중요하지 않았다. 집사님과 나는 눈빛을 교환했다.
“가죠.”
집사님이 내 손을 잡고 앞서 달려 나갔다. 나도 그에게 이끌려 힘껏 뛰었다. 마태오 일행은 우리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희열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와 다르게 하수인은 짜증을 내며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룰 위반!!]
하지만 나도 집사님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순식간에 과자 집 문 앞에 도달했다. 하수인에게 지킬 예의 따윈 없었다. 마음이 급해 문을 발로 걷어차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집 안은 어수선했다. 이리저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천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고, 한쪽에는 거대한 솥이 부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마녀의 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내부였다.
“울리세!!”
목이 아플 정도로 크게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들리는 소리는 전투로 인한 소음뿐이었다. 집사님은 조급해 재차 소리 지르려고 하는 나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하세요.”
“아니, 어떻게, 어떻게 제가 진정을 해요.”
“진정하세요. 제가 도련님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나는 허둥대는 것을 멈추고 집사님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다. 집사님은 다급한 상황과 맞지 않게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했다. 군데군데 이상한 점액질이 달라붙은 카펫을 치운 그곳에는 철로 된 녹슨 문이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안방을 돌아다니듯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떻게…….”
“도련님은 이 밑에 있습니다.”
깊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그 말에 지체하지 않고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기자기했던 과자 집 지하에는 달콤한 향기로 가려져 있던 시취가 가득했다.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게 쇠창살이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끔찍한 의도를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삐쩍 말랐다 하더라도 저 창살을 빠져나가지는 못했겠지.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쇠창살 너머에는 자그마한 백골들이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으……. 으으…….”
역겨움에 신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었다. 아이들의 백골에는 그 어떤 손상조차 없었다. 그건 결국 어떠한 상해도 아이에게 입히지 않았다는 점과 일맥상통했다. 납치해 감옥에 방치할 뿐이라면, 아직 울리세는 잡혀간 지 오래되지 않아 살아남았을 것이란 희망이 생겼다.
제발, 제발.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집사님이 손을 잡고 이끌어주었다. 깊고 어두운 지하인데도 그는 너무나 잘 아는 공간인 것처럼 발걸음을 거침없이 옮겼다. 집사님은 어떻게 이 공간을 잘 아는 걸까? 어째서…….
“울리세!”
감옥의 가장 깊숙한 공간. 그곳에 울리세가 웅크린 채로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과 다를 바 없는 깔끔한 모습이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날 올려다보는 아이는 하나도 겁에 질리지 않아 보였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집사님이 없었다면 분명 형편없이 나뒹굴었을 것이다.
“요셉!”
내가 휘청이자 놀랐는지 울리세가 벌떡 일어나 쇠창살에 매달렸다. 그런 울리세의 머리를 쓰다듬고 내 품 안에 넣고 싶었지만, 쇠창살은 너무나 촘촘했다. 손을 세워 넣을 수조차 없었다. 집사님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더니 다시 한번 레이피어를 꺼내 들었다.
“요셉……. 도련님, 잠시 물러나 주시지요.”
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멀찍이 물러섰다. 울리세 또한 쇠창살에서 멀어졌다. 집사님은 우리가 거리를 둔 것을 보고 검을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어지는 검은 마치 두부를 써는 것처럼 부드럽게 쇠창살을 갈라 버렸다.
나는 그 즉시 울리세에게 달려가 품에 안았다.
“울리세! 울리세! 걱정했어, 정말로……. 괜찮니? 뭔 짓을 당하진 않았지?”
“응. 괜찮아.”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정말 괜찮아 보였다. 아이의 따끈한 체온이 품 안에서 느껴지자 마음이 금세 안정되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요셉, 울지 마.”
아이가 집사님과 똑같은 다정한 손길로 나를 토닥였다. 그러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주르륵 흘렀다. 그런 나를 진정시킨 것은 집사님의 말이었다.
“요셉.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 흐흑 네……. 네. 빨리 가요.”
그랬다. 아직 이곳은 짐승의 아가리 안이었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서 난 힘인지 나는 울리세를 그대로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님이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했지만 줄 수 없었다. 절대로 다신 그 허망하고 두려운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내 품 안에 있어야 안정이 되었다. 지금만큼은 발등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앞서가는 집사님을 뒤따라 뛰어갔다. 그러는 와중, 쇠창살 너머 백골들이 눈에 밟혀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그러십니까? 힘드시면…….”
“……집사님.”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었을 아이들. 울리세를 되찾으니 우습게도 그들에게 정신이 향했다. 죽어서도 이 장소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아이들이 가여웠다.
“……이…… 쇠창살들 다 부숴주시면 안 될까요?”
집사님에겐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다. 아까 울리세를 가두던 쇠창살을 너무나 쉽게 가른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집사님은 나를 한번 슥 보더니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아이들을 가두었던 것들이 사라졌다.
“부수면서 갈 테니 따라오십시오.”
“고마워요.”
집사님은 아주 잠시 나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해석하기도 전에 그는 앞서 달려 나갔다. 텅- 텅텅. 잔해물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우리는 한참을 뛰어 지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다시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분명 처음에는 군침이 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그저 끔찍한 것을 숨기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한 손으로 울리세를 안고 남은 손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참아냈다. 그때였다.
쾅! 거대한 충격이 집 벽을 박살 냈다. 엉망이 된 채 집 안으로 굴러들어 온 것은 금발의 그 남자였다. 마태오를 호위하던 남자는 가벼운 생채기가 가득한 상태였으나 금세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뛰쳐나갔다.
“아직 싸우고 있는 모양이군요.”
집사님이 그들을 몰래 훔쳐보더니 되돌아와 말했다.
“뒷문으로 돌아 나가죠.”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들입니다.”
그냥 두고 도망가자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집사님은 죄책감 하나 없었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나는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마태오와 남자는 아주 익숙하게 하수인과 전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합이 잘 맞았고 전투에 매우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하수인에게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힘을 합친다면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집사님에게 도와주자고 말하려는 순간, 울리세가 내 옷을 붙잡았다.
“…….”
“안전한 곳에 가야 합니다.”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내 품에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그 무엇보다, 심지어 내 목숨보다 우선해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마태오는? 마태오 또한 어린아이였다.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그 또한 성인은 아니었다. 나는 어찌할 바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순간,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들려왔다.
[룰 위반은! 용납할 수 없어!!]
하수인이 마태오와 남자를 무시하고 내게 번개처럼 날아왔다. 하수인의 손길은 내 품에 있는 울리세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몸속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본능에 가까운 행위였다.
“울리세를 건들지 마!”
발등이 타오르듯 아파왔다. 내 몸에서 무형의 검은 마나가 옷을 찢고 할퀴듯 하수인에게 달려들었다. 하수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채 공격을 맞고 자리에 쓰러졌다. 넝마처럼 엉망이 되었는데도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요셉!”
그 시선을 의아해할 새도 없이 밀어닥치는 고통으로 인해 자리에 쓰러졌다. 처음 마법을 쓴 그날 같았다. 한줄기 남은 이성으로 품에 있는 아이가 다칠까 더 세게 끌어안았다. 고통으로 흐려진 시야 사이로 내 몸에서 튀어 나가는 마나가 멈추지 않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의 수업이,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하…….”
어쩐지 섬뜩한 미소를 띤 마태오가 눈에 들어왔다. 왜 나를 보고 그런 얼굴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이 내 정신의 끝이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로.
* * *
“젠장, 젠장!”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끔뻑 떴다. 마지막에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을 기억하기에 당연히 침대 같은 곳에 누워 있으리라 생각했다. 집사님이 나를 숲속에 방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엉망이 된 어느 화려한 방에 우뚝 서 있었다. 쓰러지기 전 나를 괴롭히던 고통 또한 사라진 채였다. 하지만 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는데 특히 양말이 거의 넝마에 가까워져 문양이 드러난 상태였다. 아마 마나가 폭주했기 때문이겠지.
양말을 벗을까 고민하는데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그 빌어먹을 여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 남자는 집사님과 똑같지만 다른, 후보자님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의 기품 있는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게 광인과도 같았고, 그의 어린 시절 독기가 가득했던 모습과도 흡사했다. 왠지 혀끝이 썼다.
“……그래. 그거야.”
그는 옷을 단정히 차려입었다. 엉망이 된 방과 대조적으로 아무 일도 없는 양 깔끔한 그는 참으로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눈빛을 빛냈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해 평소의 냉랭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가 방을 나서자 주위가 무너지며 풍경이 바뀌었다.
“…….”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이 된 방 한가운데에서 그는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책을 읽어 내렸다. 검은색의 그 책은 과거 언젠가 꾸었던 꿈에서 집사님이 노인으로부터 갈취한 것이었다.
방은 방금보다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은 바뀌기 전의 풍경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면 이제는 방 한가운데 동그랗게 공간이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조금 지난 모양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시간대가 바뀌는 게 정말 꿈 같았다.
동그란 공간에 후보자님은 하얀색의 가루를 아무렇게나 뿌렸다. 한쪽에 있는 촛불에 빛이 반사되어 가루는 장소에 맞지 않게 반짝였다.
“무화과 한쪽.”
작은 칼로 과일을 조각내는 그에게선 이제 음산한 기운까지 맴돌았다. 그 와중에 나는 이것들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소환자의 피 한 방울.”
내가 보았던 그 검은 일기장의 내용과 똑같았다. 그 괴악한 모습을 보자니 몸이 뻣뻣한 통나무처럼 굳었다. 진짜 소환술일까? 눈앞의 후보자님이 안광을 빛내며 마력을 내뿜었다.
과일즙이 흥건한 나이프로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베자 피가 떨어져 내렸다. 짙은 피가 루비 가루와 섞이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방 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발등에서 끔찍한 고통이 타고 올라왔다. 꿈속에서는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꿈은 보통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것이 꿈인 것이 확실할까? 설마 꿈이 아니라면?
의문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연기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내가 알고 있는 존재가 떠올라 있었다.
“와아- 내가 소환되는 건 정말 정말 정~ 말 오랜만인데!”
내가 보았던 때보다 몇 배는 더 즐거워 보이는 개발자는 여전히 산만한 모습이었다. 뒤죽박죽 반죽되듯 바뀌는 모습.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는 개발자는 이제 머리가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자기가 나를 소환한 거지?”
“……그래. 당신은 뭐지?”
자신이 소환한 것을 보며 희열감 넘치는 눈을 하고 있는 후보자님은 조금 미쳐 보였다. 잇몸이 보일 정도로 찢어져라 웃자 이가 희게 빛났다. 깊게 베어버린 것인지 손바닥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가 그의 광기처럼 흘러넘쳤다.
“나? 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 하지만 우리 자기가 익숙한 이름으로 불러줄까.”
개발자는 히죽거리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이제는 눈이 여섯 개가 되어 있었다. 보통의 범주에서 한참은 넘어선 눈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나를 보며 기쁘다는 듯 웃었다.
“나는 악마야.”
악마? 개발자가 아니라? 이 세계를 만든 개발자, 신 같은 것이 아닌 악마? 금기인 악마가 바로 저것이란 말인가? 망치로 뒷머리를 후려 맞은 듯 충격에 머리가 얼얼했다. 왜 나는 이것을 진작 인식하지 못한 걸까.
당황한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개발자, 아니, 악마는 내가 아닌 후보자님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후보자님은 당연한 것을 요구하듯 양팔을 벌려 악마에게 말했다. 그 모습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너를 소환했으니 나를 도와! 나를 왕좌에 앉게 해!”
“와, 진짜 우리 자기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네.”
히죽거리는 악마에겐 불쾌함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손에 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강한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점 더 아파오는 발등의 고통을 참아내며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이 무엇보다 중요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럼 자기, 나랑 내기를 하자.”
“내기?”
“이기면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게. 왕좌? 그런 것 따위 우스울 정도의 힘을 네게 주겠어.”
악마는 매혹적으로 웃어 보였다. 후보자님은 조금 고민을 하는 것 같았지만 곧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그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떠한 매체에서도 저런 내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사람은 없었다. 동화에서조차 말이다.
“좋아! 좋아, 계약을 하자. 자기가 이기면 힘을 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자기의…….”
“네가 이길 일은 없어!”
벌써 이긴 것처럼 구는 후보자님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모습보다 어려 보였다. 흥분해 날뛰는 그는 자신보다 훨씬 늙은 사람을 가볍게 주무르고,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남자를 가지고 놀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를 노려보던 그 어떠한 때보다 미숙했다.
“우리 자기가 자신만만한 거 재미있네. 그럼 조금 더 어렵게 해도 괜찮겠어.”
악마는 그 어떤 준비 동작 없이 후보자님의 눈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까까지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 행위는 거칠기 그지없었다. 악마는 찢어지게 웃으며 손을 치웠다.
“이게, 무슨…….?”
손 아래 드러난 눈은 짙은 푸른색이 아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분홍색 눈이었다.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볐지만 색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이질감에 당황했지만 그 눈은 너무나 당연하게, 본래 그랬던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그래. 마치 게임에서 보았던 캐릭터의 눈처럼.
악마는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주변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모든 것이 허물어질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지만, 슬프게도 마지막까지 내가 들을 수 있는 내용은 없었다.
악마가 개발자였다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 거지? 개발자는 자신이 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 그 게임에 들어온 거고. 그럼 이 세계를 만든 것이 개발자라는 것인데, 그 개발자가 바로 악마라고 한다.
악마는 지금 왕명으로 처단이 내려진 존재. 꿈속의 남자는 울리세고, 집사님과 똑같이 생겼고, 악마를 소환했고…….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혼란스러움에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하아…….”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자 꿈에서 깨어남을 깨달았다. 전신이 심한 근육통에 시달린 것처럼 아팠다. 눈을 살며시 뜨자 며칠간 마주해 어느새 익숙해진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녁이 된 듯 따스한 노을빛이 창가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요셉.”
창가에 그림처럼 서 있던 집사님이 빠르게 다가왔다.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발을 몇 번 만지더니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곤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의 것이 맞는지도 모를 이름을.
“울리세…….”
“…….”
역광이 강하게 비쳤다. 그 반동으로 집사님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짙은 그림자가 졌고, 흐릿한 시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사랑스러운 연인은 심연보다 어두운 모습을 한 채로 곁에 있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그는 묵묵히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나긴 침묵이 지나고도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손길이 다정하기 그지없어 그가 나를 사랑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매우 걱정했다는 것도.
“……조금 아파요.”
“많이…… 걱정했습니다. 돌아가면 공부부터 다시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셨으면서. 배운 건 숲에 가실 때 갖다 버리셨습니까?”
질책하는 목소리였지만 볼을 쓸어내리는 손은 그 어떤 때보다 다정했다. 덕분에 그런 말을 들음에도 상처를 받는다든가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가벼운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얼얼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곧 눈가를 찌푸렸다.
“조금 더 쉬어야겠군요. 더 주무세요.”
“울리세는요?”
“도련님은 괜찮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련히 집사님이 마무리를 했겠냐마는 역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도시에 머무르는 이상 내 걱정은 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우리…… 집에 돌아가요.”
“……네.”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움직이고 싶었지만 온몸이 얼얼해 그럴 수 없었다. 집사님의 손에 시야가 가려져 사방이 어두워지자 다시 잠이 몰려들어 왔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몸은 식사도 배변도 필요 없고, 수면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잠이 온다는 점이 이상했다. 하긴 지금 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나 싶다. 이 세계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악마가 제대로 뭔지도 모르며, 심지어 내 연인의 이름조차 모르는데 말이다.
“주무세요.”
멀어지는 집사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결국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내심 깨어나기 전 보았던 꿈을 이어 꾸기를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꿈을 꾸지도 못한 채 잠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한참 후, 내 몸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져 눈을 뜨자 울리세가 배 위에 엎어져 있었다.
“울리세?”
“요셉…….”
몸은 자기 전보다 훨씬 나아 약간의 둔통만 있었다. 다행이었다. 낫지 않았다면 내 몸 위에 있는 울리세가 사랑스럽다 해도 비명을 질렀을 테니까. 울리세는 어리광을 부리듯 나를 꼭 껴안았다.
“……괜찮, 아?”
“응. 물론이지.”
나 또한 팔을 움직여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슬슬 무거워 숨이 막혀오기에 아이를 안은 채로 옆으로 조금 굴렀다. 아이와 나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게 되었다.
“울리세는 어디 다치지 않았지?”
“응…….”
우리는 사이좋은 부자처럼 체온을 나눴다. 아이의 보송한 장미 향기가 콧등을 간질였다. 그 행복을 잃어버리는 줄 알고 정말이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단순히 아이를, 어린 미성년자를 보호한다는 책임감으로 돌보는 것은 이미 지났다. 나는 울리세를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그 누가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했다.
“도련님.”
온화한 시간에 집사님이 들어왔다. 그는 발소리를 크게 내며 옆으로 다가왔다. 안온했던 분위기가 발걸음 소리에 부서졌다. 평소에는 소리 없이 다가왔으니 이 발걸음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어쩐지 심통이 난 어린아이 같아 웃음이 났다.
“집사님도 누울래요?”
“……제가 끼기에는 많이 좁군요.”
그건 그랬다. 매일 함께 붙어서 자기야 했지만, 지금은 울리세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셋이 눕기에 싱글 침대는 작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집에 있는 침대는 넓으니까.”
“…….”
집사님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기차표를 사 왔으니 이제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아, 네. 울리세, 일어나자. 짐은 다시 정리해야겠다. 혹시 먼저 정리했니?”
이전의 소동으로 인해 싸놓았던 것이 엉망이 되었으니 다시 챙겨야 할 거다. 아니, 잠깐만. 내가 짐을 기차역에서 챙겼던가? 생각에 빠지자 울리세가 손으로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가지런히 정리된 짐들이 있었다.
“직원들이 요셉의 짐도 정리해서 보관하고 있더군요.”
“맞다. 가서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라도 찾아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남이 짐을 정리했다고 하니 조금 민망하긴 했다. 어쨌든 나는 나가기 위한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조금 소란스러울 테니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란이요?”
소란스러울 일이 있나? 하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해낸 일이 좀 큰일이긴 했다. 아동 납치 사건의 가해자를 잡아낸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럼 경찰이라도 왔나? 이 세계에도 경찰이 있겠지? 있었던 것 같은데. 혼자 의문에 빠져 있자 집사님이 대답했다.
“기자가 잔뜩 있습니다.”
“네? 아, 저희가 하수인을 해치운 것 때문에요? 어떻게 알았지?”
집사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은 맞습니다만……. 저희를 찾아온 건 아닙니다. 마태오 후보자를 찾아온 것이지요.”
“네?”
“하수인을 해치운 것은 마태오 후보자의 공으로 되어 있습니다.”
“네?”
하수인을 해치운 건 확실하게 나다. 울리세를 보호하려고 하는 순간 제어하지 못하고 마나를 때려 박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려 과하게 쏟아부어 이렇게 하루 종일 몸져누워 있지 않았는가. 물론 내가 그것을 잡아 죽였소, 하고 광고를 할 것은 아니었다만 왜 그게 마태오의 공이 된 거지?
“그게 왜 마태오의 공으로 되어 있어요?”
“그럼 도련님의 공이 되길 바라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울리세를 바라보자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음의 답은 물론 아니요였다. 아이에게 유명세가 더해져 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다 잡은 건데 자신들이 잡았다고 하는 게 좀 열받았다. 분명 내 기억 속 마태오 일행은 하수인에게 이렇다 할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지만요…….”
“마태오 후보자는 진지하게 왕관을 얻고 싶어 하더군요. 이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하긴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바른 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역시 기분 나빴다. 그런 성스러운 인상으로 공을 날름 가로챈다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공을 채 가줘서 관심이 돌려진다면 우리에겐 나쁠 것이 없었다.
“어휴……. 어서 집에나 가요.”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가는 게 편할 겁니다. 정문에서 마태오 후보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더군요.”
절대 정문으로 가면 안 되겠다. 나는 빨리 몸을 움직여 씻었다. 후다닥 씻고 나오자 집사님이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이제는 익숙해 아무렇지 않게 몸을 맡겼는데 그 과정을 울리세가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늦게 알아챘다. 그제야 나는 수치심에 작게 비명을 지르고 집사님의 품에서 벗어났다.
“요셉?”
“으악! 울리세, 이건 말이야!”
“……옷시중?”
“그렇습니다.”
울리세는 곧 관심 없다는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별 충격을 받지 않은 모양이다. 다 큰 성인이 이렇게 도움을 받아 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에 큰 거부감이 없나 보다. 창피함을 느낀 내가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집사님은 옷을 착실하게 갈아입혔다.
“가지요.”
“네…….”
왠지 벌써부터 진이 빠져 버린 바람에 몸이 축축 늘어졌다. 그런 나를 집사님은 능숙하게 잡아 인도했다. 울리세는 뒤에서 야무지게 자신의 짐을 들고 종종걸음을 쳤다. 더 이상 한심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울리세의 짐을 들었다.
“괜찮은, 데.”
“형이 들게.”
“주시지요.”
집사님이 못마땅한 얼굴로 울리세의 짐을 가져갔다. 아니, 처음부터 들어주지. 아직도 집사님은 아이를 못마땅해하는 모양이다. 도대체 왜.
숙소 일 층으로 가는 길, 벌써부터 소란스러움이 귀를 괴롭혔다. 계단 위에서 슬쩍 내려다보자 그야말로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의 우울한 얼굴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들 들떠 있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또렷한 목소리. 마태오의 목소리였다.
“이 흐말렌 도시를 괴롭히는 악마는 제가 신의 부름을 받고 처단했습니다. 모두 안심하세요.”
“저쪽으로 돌아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집사님이 속닥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에 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기에 울리세의 손을 잡고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다행인 것은 사람들의 시선 모두 마태오에게 가 있었기에 우리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저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습니다. 이 자리에 없는 분들의 도움이 있었지요…….”
걸음이 빨라질수록 마태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 순간 뒤통수를 찌르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가시처럼 날카로운 눈을 한 마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매서운 눈길은 동토처럼 차가웠고, 그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녹이듯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이끌었다. 나를 보고 있는 집사님과 울리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발을 다시 급하게 옮겼다. 뒤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두 울리세 후보자님 덕이랍니다…….”
“울리세 후보자? 그 후보자님은 처음 듣는군요!”
“마태오 후보자님! 조금 더 말씀을!”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수도에 도착해 저택으로 가기 위한 마차를 탔다. 집에 거의 다 왔음에도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마태오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할퀴어 남은 상처처럼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 시선의 의미가 궁금해 계속 멍하니 생각에 잠기자 집사님과 울리세는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옆에 앉은 울리세가 내 오른손을 잡았고, 앞에 마주 앉은 집사님이 내 무릎을 짚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놀랄 만큼 흡사한 표정으로 뚱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래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까부터, 뭐 해?”
어쩐지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슨 대답을 하지 고민하는 순간 마차의 너머로 못 보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왜 그러십니까?”
“공사를 하네요.”
저택의 근처에는 사람이라곤 없고 나무만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무가 사라지고 사람이 살 만한 집터가 생기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정도 공사가 진행되어 있었다. 분명 흐말렌 지역으로 갔을 때는 이런 것이 있었던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고작 일주일이 조금 된 기간이다 보니 혼동하기도 어려웠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진행이라니 부실 공사인가?
“……그렇군요. 보지 못한 집인데…….”
집사님은 어쩐지 심각한 표정으로 밖을 보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들어설지 모르겠지만 주택이라면 사람이 이사를 올 테고, 그럼 우리는 이웃이 생기는 셈이다. 울리세가 브렌다라든가 학원 친구가 있지만 가까운 이웃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겠지. 물론 그 집에 울리세 또래의 아이가 있다면 말이다.
한편으론 이 모든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근거 없는 직감이었다. 이미 한차례의 고비를 넘어왔음에도 여전히 서늘한 칼바람이 불길하게 불어오는 듯했다.
생각보다 일상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집사님은 여전히 다정하게 나를 돌봐주었다. 자잘한 시중부터 자기 전의 마사지까지. 나도 성인인지라 그의 접촉이 기꺼웠고 오히려 더 끈적거리는 분위기가 조성되길 내심 바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니길 바랐다. 그도 그렇듯 나는 처음이었기에 여러 가지로 무서웠다.
“요셉, 괜찮습니다.”
“……진짜요?”
“네.”
그런 내 고민을 아는 듯 그는 매일 밤 부드럽게 나를 안아주며 입을 맞췄다. 첫 키스와 두 번째 키스를 생각해 보면 굉장히 신사적인 태도였다. 그는 나에게 강압적으로 굴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라면 그의 조심스러운 행동이 이해되질 않는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가 굉장히 순종적으로 굴고 있다는 거다.
“……그럼 키스해 주세요.”
“분부대로.”
기다렸던 건지 그가 잡아먹을 듯 입을 맞춰왔다. 허겁지겁 입을 맞추는 그는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입안을 누비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에 짙은 욕정이 깃든 그는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해 입을 맞추었다.
혀를 빨고, 치열을 핥고, 입술까지 깨문 탓에 키스가 끝났을 때는 입술이 넝마가 되었다.
“조금 더…… 해도 되겠습니까?”
입술은 아릿하게 아파왔고 호흡이 힘들어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간절하기까지 한 눈빛에 욕망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나는 눈을 슬며시 감으며 대답했다.
“……네.”
뱃속 깊은 곳에서 열락이 치밀어 올랐다. 열렬하게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점점 끓어오르는 열에 나는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집사님은 그런 나를 인내하며 기다렸다. 아마 내가 달아오르는 몸에 욕망을 더 참지 못하고 요구하면 그때 참지 않겠지. 그날이 무서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 울리세 또한 새로운 성장에 발을 디뎠다.
“나 이거, 배우고 싶어.”
울리세가 조심스럽게 내민 종이는 섬세한 그림이 그려진 전단지였다. 톱니바퀴가 예쁘게 그려져 있었고 ‘기계학 초급반 모집’이라고 씌어 있었다. 울리세가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울리세, 기계에 관심이 있니?”
“……조금.”
어린아이들은 공룡과 로봇을 좋아한다. 울리세 또한 그랬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과의 피가 아이에게 흐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아이가 크면 체크무늬 셔츠를 입으려나. 어쨌든 아이가 배우고 싶다는 것을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집사님이 익숙하게 스케줄을 조절했다.
“그리고…… 이거.”
아이는 어쩐지 쑥스러워하며 나에게 무언가를 하나 더 건넸다. 얇은 종이였는데 아무 생각 없이 읽던 나는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발표회?”
“응……. 요셉이, 오면 좋겠어.”
종이에는 큼지막하게 내부 발표회라고 씌어 있었다. 아이의 성장이 궁금했던 나는 학원에 한번 들를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굉장히 반가웠다. 카메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세계에도 카메라가 있겠지? 아니, 잠깐. 증기기관차가 있는 시대니까 그 티브이만 한 오래된 사진기일려나? 그럼 가져가질 못할 텐데.
“싫어……?”
생각에 빠져 미처 대답하지 못한 나머지 울리세가 실망한 눈동자를 내보였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스트레스 상승 시스템 창을 무시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형은 무조건 갈 거야, 무조건!”
“응.”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울리세의 얼굴에는 실망의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를 놀렸던 모양이다. 그 인형 같은 얼굴을 하던 아이가 이런 장난을 칠 줄 알게 되다니, 장족의 발전이었고 너무나 기뻤다.
그렇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평화로운 한때가 유유자적 흘러갔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이 점점 늘어나 힘들지 않을까 했지만 아이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뜨는 아이의 스테이터스 창도 모든 부분에서 굉장한 상승률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주, 나는 애써 이 평온함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허억!”
나를 바라보는 여섯 개의 눈동자. 악마의 눈동자. 차라리 회피하고 싶었던 그날의 꿈. 꿈속에서 악마가 나를 바라보며 깔깔 웃고 있었다.
“……후우…….”
정말로 잊고 싶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현실에 안주하고 싶었다. 연인과 행복해하며 아이의 성장에 즐거워하는 그런 삶에 머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악마는 나를 또다시 들쑤셨다. 잊지 말라고 찔러대는 것 같았다. 아니, 이 모든 것도 내가 결국 도망치지 못하기에 일어난 일이겠지.
“인, 벤토리.”
생존 물품들 사이에 잠들어 있던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그 속에 적힌 소환 재료들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악마를 만나봐야겠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악마에게 직접 듣는 그 방법밖에 없다.
“……근데 재료가…….”
무화과라든가 소환자의 피 같은 건 구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이 루비 가루는 어디서 구하냔 말인가. 돈이라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지만 돈이 있어도 파는 곳을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집사님이면 알 것 같은데.”
“제가 뭘 알 것 같습니까, 요셉 님?”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와 옆을 돌아보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집사님이 서 있었다.
나는 허둥지둥 손에 든 일기장을 침대 안에 구겨 넣었다. 어디서부터 봤을까? 일기장을 꺼내는 장면을 봤을까? 두려움과 초조함에 식은땀이 나 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괜찮으신가요?”
“어, 언제 여기 들어왔어요?”
“방금 왔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사님은 여전히 기척이 없었기에 한참 전에 들어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집사님이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지만 인벤토리 사용을 보았다면 그것에 대해 물어봤을 것이 당연했다. 게임 시스템에 관련된 창들은 이 세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그럼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 쓰는 이상한 광경이었을 테니까.
그런고로 방금 들어왔다는 그의 말은 사실일 테다. 아니, 사실이면 또 이상하다. 연인의 방에 몰래 들어왔다는 거니까. 어, 그건 좀 이상한데, 음……. 집사님이니까 상태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올 수도 있긴 하지.
“요셉?”
“아, 죄송해요. 잠깐 멍해서…….”
이상한 생각을 이어 하느라 대답하지 못했는데 어딘가 아파 보였나 보다. 그가 걱정스러워하며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물론 나는 아픈 것이 아니었기에 열은 나지 않았고 그는 손을 금세 물렀다.
“아프신 건 아닌 것 같군요.”
“하하. 그건 아니에요…….”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건 뭔가요?”
그냥 좀 넘어가 주지. 집사님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팽팽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생각했고 번개같이 이유 하나를 생각해 냈다.
“그게, 그림 그릴 때 재료로…… 좀 특이한 게 필요해서…….”
“어떤 것 말입니까?”
“……보석 가루요.”
세상엔 다양한 재료가 존재했다. 그냥 요리 재료로도 그림을 그리는 판국인데 보석 가루 정도야 우습지. 진짜 해골에 다이아를 박기도 하는데 말이다. 이 세계에 아직 그런 실험적인 작품이 없다면 우기면 그만이다! 그래!
“보석 가루? 그런 걸 재료로 쓰기도 합니까?”
“물론이죠. 별의별 걸 다 쓰는걸요. 피로 그리는 사람도 있고…….”
집사님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피면 괜찮은 편이지. 내가 아는 작가는 피와 소변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거에 비하면 보석 가루는 양반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말에 힘이 들어가고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구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요.”
“어? 그래요?”
“네. 연금술을 하는 자들은 별것을 다 쓰니까요.”
순간 교과서에서 배운 금속을 황금으로 바꾸는 말도 안 되는 연금술들이 생각났다. 이 세계에는 연금술이 가능한 걸까? 그건 좀 궁금한데. 나중에 견학이 가능하다면 가보고 싶다. 걱정을 던 나는 활짝 웃으며 집사님에게 말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밤중 잠에서 깰 정도로 가지고 싶으셨던 겁니까?”
“……하하. 뭐, 그렇죠…….”
“이런 사소한 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길.”
집사님은 피식 웃으며 내 곁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침대 안에 숨겨놓은 일기장을 한구석에 밀어 넣고 옆으로 꿈지럭거리며 움직여 자리를 만들었다.
“여기 누워요.”
“……눕다니.”
“에이, 뭐 어때요. 전에도 같이 잤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끄러웠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려 덤덤히 제안했지만 이래 봬도 용기를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니, 정확히는 그와 함께 체온을 나누며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서였다. 저번 흐말렌에서는 느긋하지 못했으니까. 그냥 내 욕심이었다.
집사님은 조금 붉어졌을 내 얼굴을 보더니 겉옷을 벗었다. 그는 날이 더웠음에도 셔츠와 베스트, 재킷을 완벽하게 차려입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그것들을 모두 입고 침상에 눕기엔 좀 갑갑했을 것이다. 셔츠 단추 몇 개를 끌러 목을 드러낸 그는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럼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그 모습을 보자 끌어모았던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부끄러움만 치밀어 올랐다. 그래 봤자 이미 집사님은 거부하지 않고 내 옆에 냉큼 누운 후였다.
그는 처음 고민했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곤 빈틈없이 몸을 붙인 후 목덜미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행위가 간지러워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간, 지러워요, 하하.”
“전부터 생각했지만 예민하시군요.”
뉘앙스가 야릇하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겠지. 집사님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나를 끌어안았다. 더 밀착할 틈도 없다 보니 하나로 섞이는 묘한 기분이 들었고, 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하아…….”
충족감을 느낀 것은 나뿐이 아닌 듯 그 또한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발끝부터 열이 올라 천천히 뜨거워지는 기분을 무시하며 그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끌어안긴 그의 몸에선 바스러지는 꽃향기가 흘러넘쳤다. 그 향에 휩싸이는 기분이란 황홀했다.
“앞으로 이렇게 자주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뭐. 안 될 것도 없죠.”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허락을 받으려는 모습에 어쩐지 쑥스러웠다. 천천히 연애의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 몸을 간질였다. 아까까지 낯 뜨겁게 달아오른 몸은 어디로 갔는지 새콤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좀 우습긴 했다. 어쨌든 그 감성에 달콤하게 취한 채로 눈을 감았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어 들리는 빠른 심장 소리가 나를 깊은 수마로 빠져들게 했다.
“응……. 울…… 세……. 잘 자.”
나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는 집사님에게 웅얼거렸다. 그는 방금까지와는 다른 우울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 요셉 님.”
집사님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모른 채로 그렇게 나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에 깊이 잠겼다.
꿈조차 꾸지 않은 그날 밤이 지난 아침. 빈 침상 위에 남은 것은 흐린 장미의 잔향뿐이었다. 집사님은 벌써 일어난 건가? 방 안을 둘러보니 테이블 위에 흰색의 가루가 담긴 자루가 있었다.
“……이게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흰 가루에 의아했지만, 곧 꿈에서 후보자님이 사용했던 가루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집사님에게 루비 가루를 부탁했던 것도.
그런데 이게 루비 가루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물론 아닐 경우, 가루를 못 쓸 것도 없었다. 진짜 그림 재료로 써버리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은 곧 쓸모없어졌다. 자루를 손에 든 순간 아이템 이름이 떠올랐으니까.
[루비 가루(환금 아이템)
: 상점에서 비싸게 매입한다.]
그동안 시스템 창이 많이 나타났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한 탓에 참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많이 나타나는 덕에 오히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인지를 못 할 때조차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온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럼 이따 밤에 해야겠다.”
탁자 위의 루비 가루를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지금은 아침이고 무언가 하기에는 아침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또한 금기인 소환술이다 보니 모두가 자는 시간을 노리는 것이 좋으리라. 물론 어젯밤처럼 집사님이 찾아올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낮보단 밤이 그나마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문을 잠가놓으면 되기도 하고.
밀어 넣은 루비 가루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신경 쓰였지만 별수 없었다. 지금은 울리세와 아침을 먹을 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어제의 나른한 모습은 한 치도 보이지 않는 멀끔한 집사님이었다. 나를 준비시키기 위해 온 모양이다.
나는 그의 시중을 받고 아침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평소와 같은 평온한 하루였지만 나의 신경은 시간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요셉…… 괜찮아?”
“응?”
어둑해진 밤. 울리세의 침대맡에 앉아 동화책을 읽는데 아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오늘…… 뭔가 힘들어 보여서…….”
“형이?”
별로 티 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내가 더 긴장했던 모양이다. 들킨 이상 울리세를 진정시키는 것이 더 급했다. 나는 웃으며 울리세를 토닥거렸다.
“아니야. 그냥 졸려서 그런 것 같아.”
“졸려?”
“봄이면 좀 나른하고 그렇잖아? 아픈 건 아니니까 괜찮아, 울리세.”
울리세는 바다같이 투명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것 같은 눈동자에 나는 숨을 가만히 삼켰다. 나비의 날개와도 같은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인 아이는 방긋 웃었다. 꽃망울이 터지는 것 같은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응. 다행이다…….”
“그럼 마저 읽어줄까?”
고개를 끄덕인 울리세를 위해 나는 동화책 읽기를 재개했다. 이렇게 책을 읽어준 지도 벌써 꽤 오래되었다. 매일매일 읽어주고 있기에 이제는 새롭게 읽어줄 책을 찾는 것도 큰일이었다. 하지만 읽어줄 수 있는 책을 찾지 못하는 때까지, 아이가 더 이상 동화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계속 읽어주고 싶었다.
한참을 읽었을까 울리세가 조그마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잠이 깰까 아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처음 울리세의 방과는 다른 널찍한 방. 벽난로가 있고 널찍한 침대가 있으며 바닥에는 두꺼운 카펫, 벽에는 아름다운 무늬의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다. 인형들이 곳곳에 놓여 있는 이 방은 도련님이 지내기에는 충분히 좋았다.
흡족해하며 내 방으로 돌아오자 집사님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마사지를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어서 소환술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자는 척을 해야 하는데 집사님의 저 마사지를 피할 변명은 없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 누웠고 그의 손길을 구석구석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몸이 노곤하게 풀려 기분이 좋아 그대로 잠들 뻔했지만, 입안을 필사적으로 씹은 덕분에 잠들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도 함께 자고 싶지만…….”
“싶지만…….?”
같이 자는 건 너무나 좋지만 지금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정말로 아쉬운 듯한 얼굴을 하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양심이 아파왔다. 내가 말이 없자 집사님이 말을 이었다.
“끝내야 할 일이 있어 오늘은 늦게 잠들 것 같군요. 나중에라도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요셉의 옆자리에서 온기를 나눠 받고 싶군요.”
“……물, 물론이죠.”
내 말을 듣고 집사님은 방긋 웃었다. 만개한 꽃처럼 매혹적인 그 미소에 나는 해야 할 일도 잊은 채 멍하니 그 얼굴을 감상했다. 세상의 그 어떠한 싱그러운 꽃이라도 그에게 비견할 바는 못 되리라.
“요셉,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응……. 이따 봐요.”
집사님은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방에서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느린 발자국에는 미련이 흘러넘쳤다. 나 또한 아쉬움에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달빛마저도 아쉬운지 그를 비추었지만, 그는 결국 방에서 사라졌다.
“…….”
우습게도 날카로운 외로움이 나를 할퀴듯 지나쳤다. 홀로 남는 것은 내가 바랐던 일임에도 못이 박히는 듯한 흉통에 잠시 몸을 옹송그리고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멀쩡해져 자리에서 일어났고, 꿈에서 보았던 그대로 행동했다. 루비 가루로 원을 만들고 인벤토리에 숨겨놨던 무화과를 자르고.
“읏.”
인벤토리에서 나이프를 꺼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었다. 손가락에서 흐른 피가 느리게 땅에 떨어졌다.
나는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떨어지는 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은 감각. 현실에서 유리되는 그 기분.
그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자 몸속의 마나가 원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쏟아낸 것처럼 마나가 쑥 흘러 나갔다.
검은 연기가 솟구쳐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가 뜨자 기괴한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발등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참으며 그것을 바라보자 일곱 개의 머리통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기괴한 존재가 열 개의 눈으로 나를 보며 찢어지듯 웃었다.
“안녕 자기, 기다리고 있었어.”
악마였다. 미지근한 여름의 열기를 뚫고 악마가 내 방에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