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7장 민간 시찰 (8/21)

사랑스러운 왕자를 위하여

3

얀씨 장편소설

목차

7장 민간 시찰

8장 악마(3)

9장 악마(4)

10장 꽃

마차는 늦지 않게 상점가에 도착했다. 마차를 맡아주는 공간에 가져다 놓은 후 우리는 상점가를 두리번거렸다.

“울리세에게 뭘 사 주는 게 좋을까요?”

“도련님은 요셉 님의 미소만 받아도 좋다고 하실 겁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주려면 제대로 된 걸 사야지.”

돈이야 제한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뭘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평소에도 망설임 없이 구매하기 때문에 모자란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평소 울리세가 가지고 싶었던 걸 사는 게 좋을 듯했지만 생각이 나질 않았다.

“굳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럼요. 이런 고민을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것 또한 선물이에요.”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새로 사 줄까. 아니면 옷을 사 줄까. 그 어떤 것도 울리세는 기쁘게 받을 것을 알기에 너무나 어려웠다.

“학원이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은 꽤 많이 남았습니다.”

“좋아.”

이렇게 된 것 큰 상점은 모두 돌아보자.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을 다 사는 거야! 내게는 넘쳐나는 것이 돈과 시간이었다.

나는 앞장서서 눈앞에 있는 3층짜리의 큰 건물 안에 들어갔다. 집사님은 나를 따라와 옆에서 함께했다. 건물 안에는 다양한 고급스러운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쇼핑의 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돈을 펑펑 썼다.

“이 모든 걸 도련님의 선물로……?”

“뭐……. 선물을 하나만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옷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양하게 사들였고, 책 또한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모두 사들였다. 처음에는 집사님이 짐을 들었지만, 물건이 내 양손과 집사님의 양손을 차지하자 배달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모두 들고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더 안 사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벌써 쇼핑만 두 시간째였다. 내가 생각해도 오늘의 소비는 조금 과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님이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마차를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알겠어요.”

나는 홀로 남아 상점을 마저 돌아다녔다. 조금은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훈훈한 내부에서 구경이라도 할 참이었다.

가게에는 다양한 상품이 있었다. 이 세계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지위가 낮다면 꾸미는 것이 당연시되었기에 남성 용품도 화려한 것이 많았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장갑은 나나 집사님도 무리 없이 사용할 크기였다.

“아.”

그에 반해 단조로운 색감의 검은 가죽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고위직의 귀족들을 위한 것일까. 꾸밈새는 없었지만 공들여 제작한 것이 눈에 띄는 장갑이었다. 검은색과 감색의 두 종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격대가 꽤 높은 것을 보니 높은 지위의 사람을 위한 것이 맞는 듯했다. 나는 손을 장갑에 대보며 크기를 쟀다.

“이거 선물용으로 사고 싶은데요.”

“좋은 선택이십니다, 선생님.”

점원은 네모난 상자에 장갑을 포장했다. 다행히 바람같이 손이 빨랐고 집사님이 오기 전에 끝냈다. 리본으로 매듭지은 귀여운 포장이었다.

돈을 지불한 나는 집사님이 오기를 기다리다 그가 몰고 온 마차를 탔다. 선물은 내 주머니에 안전하게 들어간 채였다. 주머니보다 약간 작은 상자가 계속해서 내 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나올 때가 아니었다.

선물을 꺼낼 때가 기대되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어설픈 콧노래가 마차 안에 흘렀고, 마차는 저택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어쩐지 상점가에 갈 때보다 조금 느린 것 같았다.

* * *

“요셉…….”

“응…… 응?”

울리세가 나를 향해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제야 저녁 식사 시간에 공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허겁지겁 아무것도 안 한 척을 했지만 울리세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어지간해선 정신을 빼놓지 않는 나를 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잠깐…….”

작게 미소를 지었다. 뭐든지 웃는 낯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법이다. 어색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웃자.

울리세는 일단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똑똑한 아이니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거겠지. 그제야 나는 속으로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식사 시간이 끝났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넋을 놓고 계셨던 겁니까?”

“아.”

집사님이 뒷정리를 하다 슬쩍 물었다. 울리세는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간 참이었다. 둘만 남은 식당이었기에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속삭이듯 그에게 말했다.

“내일…… 울리세 생일이니까 파티라도 해주고 싶어서요.”

“파티?”

집사님은 조금 놀란 듯했다. 왜 저런 반응이지? 원래 생일에는 촛불도 켜고 노래도 부르고 그런 법 아니겠는가. 어린 시절에는 부끄러웠던 그것들이 나에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울리세에게도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언젠가 내가 사라지더라도 기억할 추억으로.

그래, 그러고 보니 생일에는 케이크가 필요하지. 나는 뒤늦은 깨달음에 집사님을 바라보았다.

“집사님, 저 케이크 만드는 법 좀 알려주세요.”

“……케이크 말입니까.”

“네. 생일이면 케이크잖아요.”

무슨 케이크가 좋을까? 울리세는 옥수수를 좋아하긴 하지만 옥수수 케이크는 뭔가 미묘했다. 다른 맛을 싫어하거나 편식하진 않았으니 화려하고 다채로운 맛도 괜찮을 것 같다.

집사님을 기대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건 집사님의 도움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었다. 나는 요리라곤 계란 프라이 같은 간단한 것밖에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이따 주방으로 내려오세요.”

“감사해요!”

집사님이 도와주신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지. 집사님은 뭐든 잘하니까! 하지만 나는 몰랐다. 제빵이 이렇게나 힘든 분야였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세계에는 아직 자동 거품기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 * *

“빨간 망토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와 얼싸안았어요. 그렇게 그 둘은 행복하게 살아남았답니다. 끝!”

“……재미, 있었어.”

동화책을 들으며 누워 있는 울리세의 눈이 끔뻑거리는 것이 졸려 보였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한번 쓸어주고 볼과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기쁜지 울리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우리 울리세, 좋은 꿈 꿔.”

“응…….”

방의 불을 끄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러곤 후다닥 주방으로 내려갔다. 오늘따라 울리세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동화를 듣느라 책 하나를 통째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집사님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런 동화책이야 백 권이라도 읽어줄 수 있었을 텐데.

많이 늦었을까? 괜스레 초조해져 발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오셨군요.”

집사님은 재료를 한가득 올려둔 채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오자마자 덮은 그 책은 참 조그마했다.

“죄송해요. 늦었죠?”

“아닙니다. 어서 만들도록 하죠. 내일 아침에 드릴 생각입니까?”

“네. 밥 먹고 후식으로 내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때 선물도 주고.”

울리세를 위해 샀던 선물은 내 방 한쪽에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받고 울리세가 기뻐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헤실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조리대 앞에 섰다.

“뭐부터 하면 돼요?”

“일단 계량은 제가 다 해놓았습니다. 자, 과일 먼저 썰어주세요.”

내 앞에 수북이 과일이 쌓였다. 나는 그것들을 어색하게 하나하나 썰었다. 집사님은 그 옆에서 계란에 설탕 같은 것을 넣고 휘저으며 걸쭉한 무언가를 만들었다. 거품기로 일정한 속도로 휘젓는 데 정말 기계 같았다.

“그건 뭘 만드는 거예요?”

“제누와즈…… 케이크 시트입니다.”

집사님은 밀가루처럼 보이는 것을 채 쳐 넣곤 주걱으로 휘저었다. 걸쭉해진 저것을 구우면 케이크 시트가 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새삼스럽지만 연금술사들은 굳이 금을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내게 이미 요리는 훌륭한 연금술 같았다.

“다 썰으셨습니까?”

“아.”

집사님이 하는 것을 보느라 써는 것을 소홀히 했다. 나는 빨리 과일을 써는 것에 집중했다. 일정한 간격이 되었으면 했지만 비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내 최선이었다.

“다 썰었어요.”

“흠. 그럼…….”

집사님은 잠시 내게 맡길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할 것이 그렇게 없나? 조리대 위에 올라간 재료들을 보아도 제빵에 재주가 없는 터라 도통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생크림 같은 거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생크림을 말입니까?”

하지만 그러한 나도 아는 게 있었으니, 바로 생크림이었다. 내 기억 속의 케이크는 대개 생크림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래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뱉은 말이었다. 케이크 하면 바로 생크림이 떠올랐으니까. 나는 나중에야 끔찍한 선택을 했다는 걸 알았다.

“……힘드실 텐데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집사님의 눈은 못 미더운 빛을 띠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없으면 용감하다고 하던가. 나는 큰 걱정이 없는 상태였다. 그가 하는 제과 제빵은 매우 손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냉장고에서 통을 가져오더니 내용물을 움푹한 볼에 부었다. 흰색의 액체는 조금 노란기가 돌았는데 우유 같았다. 그러곤 얼음이 담긴 용기에 우유가 담긴 볼을 넣고 내게 내밀었다.

“이것을 빠르게 저어주시면 됩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저는 오 분이 걸립니다만…….”

집사님이 오 분이면 나는 십 분이면 만들 수 있겠지. 나는 기세등등하게 거품기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열심히 휘저었다.

오 분 정도까진 괜찮았다. 끝난 줄 알았지만 집사님의 입에서 끝났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중간중간 내 그릇을 확인하고 설탕을 넣었다.

“힘, 힘들어…….”

그렇게 십 분. 나는 죽을 맛이었다. 왜 안 끝나는 거지? 어째서? 집사님의 오 분은 어떻게 계산된 것일까. 분명 현실에선 생크림을 힘들게 만드는 것 같지 않았는데. 나는 그제야 그것이 자동 거품기의 힘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집사님이 내 앓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내가 힘들어할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다. 이미 케이크 시트는 집사님이 만들었다. 내가 한 것은 고작 과일을 썬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생크림 정도는 내가 만들어야 울리세의 입에 들어가는 것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집스럽게 팔을 움직였다.

“제가 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팔이 빠져라 휘저었다. 체감상 두 시간은 휘저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겠지. 집사님은 크림에 브랜디를 조금 부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얼마 후, 집사님이 생크림이 완성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나는 빠질 것 같은 팔을 내려놓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한 거겠죠?”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안심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사님이 타이밍 좋게 의자를 놓은 덕에 땅바닥에 앉지 않을 수 있었다. 더 힘내고 싶었지만 내 힘은 모두 소진된 후였다.

그는 구워진 케이크 시트를 3개로 분리해 층층이 쌓기 시작했다. 시럽을 바르고, 생크림을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다시 시트를 올리고. 그것을 반복한 뒤 마지막으로 생크림을 가득 올려 전체적으로 펴 발랐다. 순식간에 생크림만 얇게 발린 꾸미기 전의 매끄러운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와…….”

“꾸미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힘든 것도 잊고 홀린 듯 다가갔다. 집사님이 자리를 비켜줘 케이크 앞에 섰다. 그러나 막상 앞에 서니 어떻게 꾸밀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런 것도 많이 해봐야 수월히 하는 법이었다.

고민하는 나를 보며 집사님이 조언해 주었다.

“마음 가시는 대로 꾸미시면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집사님이 마무리한다니 갑자기 용기가 났다. 내가 조금 망쳐놓아도 집사님이 마무리하면 분명 예쁠 것이다. 실패의 걱정을 던 나는 어떻게 꾸밀지 결정했다.

일단, 자르지 않은 딸기를 꺼내 하트 모양으로 테두리에 두르고 그 안을 자른 과일들로 빼곡히 채웠다. 내 마음의 표현이었다. 집사님이 짤 주머니를 가져와 가장자리를 생크림으로 꾸몄다. 순식간에 생크림으로 만든 레이스들이 케이크를 꾸몄다.

조금은 어설픈 하트로 꾸며지긴 했지만 정말 만족스러웠다. 이 순간만큼은 아까의 고생이 잊혔다.

“수고하셨습니다.”

“집사님이야말로 수고하셨어요. 정말 감사해요. 진짜 예쁘다…….”

“내일 아침에 먹으면 더 맛있을 겁니다.”

“울리세가 기뻐할까요?”

집사님은 대답이 없었다. 의아함에 집사님을 돌아보자 그는 어쩐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프면서도 기쁜, 요상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상한 걸 물어봤나 싶어 의아해할 찰나, 그가 깔끔하게 표정을 정리하고 말했다.

“……물론이지요.”

확답에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때, 12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집에 울려 퍼졌다.

뎅, 뎅, 뎅.

만드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케이크를 만드느라 잊고 있었던 집사님을 위한 선물이 떠올랐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집사님에게 평소 신세 졌던 것도, 지금 나를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에도 지금이 선물을 주기 딱 좋은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님의 정체에 대한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애써 떨쳐냈다.

방 안에 고이 있던 선물을 들고 집사님에게 달려갔다. 그는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

“……이건?”

집사님이 조심스럽게 내 선물을 받아 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딱 선물로 보이는 모양새였으니 이게 무엇인지를 물어본 것은 아니었을 거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주절주절 설명을 시작했다.

“평소에 돌봐주시는 것도 그렇고, 저한테 해주신 것도 많고. 오늘도 집사님 저 도와주셨잖아요. 그래서요.”

그래. 그런 의미다. 집사님의 정체도 지금의 내 선물과는 관련이 없다. 이건 내 호의의 표시였다. 그동안 그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가. 물론 중간중간 시비를 걸고 나쁘게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얻은 도움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문득 집사님이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을 알아채 다른 곳을 보며 말하던 것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

일순간 방이 환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가 환한 웃음을, 흰 이를 한껏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때보다 기쁘게. 고작 선물이 뭐라고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서글프기도 했다. 그 서글픔의 이유를 나는 애써 무시했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진짜요?”

“네. 정말로…….”

집사님은 포장지를 뜯지도 않은 선물을 꼭 쥐며 말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처음 받은 어린아이처럼. 태어나 처음으로 단것을 먹은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선물 풀어보지도 않고……. 뜯고 실망하면 어떻게 해요?”

집사님은 그제야 허겁지겁 포장지를 뜯었다. 놀라운 점은 급하게 뜯었음에도 포장지와 리본이 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부자재까지도 상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다. 집사님은 어디 하나 찢기지 않은 포장지와 리본을 정리된 조리대 위에 놓았다.

“정말, 정말 마음에 듭니다.”

내가 준 것은 어느 정도 가격이 나가긴 하지만 희소성이 없는 가죽 장갑이었다. 고작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물 다루듯 쓰다듬더니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던지고 착용했다. 마치 그를 위해 제작된 것처럼 꼭 맞았다.

“집사님이 기뻐해서 다행이에요.”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의 손을 쓰다듬었다. 내가 준 그 장갑을 몇 번이나.

그 손길에 부끄러워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제 곧 봄이 성큼 다가오겠지만 아직 사늘한 늦겨울. 내 주위는 한여름의 한복판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이른 아침.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잠에서 깼다. 어제의 베이킹으로 팔이 욱신거렸지만 아파할 때가 아니었다. 울리세는 바지런했고, 그 아이를 놀래주려면 나는 더 빨리 일어나야 했다.

조금은 익숙해진 집사님의 시중을 받고 나와 선물을 식당에 준비해 두었다. 집사님은 나를 묵묵히 도와주었다. 그의 손에는 내가 선물해 준 검은색의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쑥스러워 모른 척했다.

집사님의 도움 덕분에 준비는 일찍 끝났다.

“요리는 다 끝났죠?”

“네. 내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제가 울리세를 데려올 테니까 케이크 꺼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하며 울리세의 방으로 향했다. 적막한 복도에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쳐 기분이 상쾌해졌다. 날듯이 빠르게 울리세의 방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똑똑.

“응……. 들어와…….”

울리세의 졸음기 가득한 대답이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이는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노크 소리에 깨어난 것 같았다.

나는 아이의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눈가를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울리세, 잘 잤어?”

“응…….”

나에게 기대듯 어리광 부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울리세는 마치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 귀여움에 홀려 안아주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울리세, 오늘은 같이 식당으로 가자.”

“응…….”

내 품에서 벗어나기 싫은 듯한 아이를 얼러 욕실로 들여보냈다. 울리세는 게으름을 피우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미적거리지 않고 깨끗이 씻고 나왔다. 옷 입는 것을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울리세는 집사님 못지않게 옷을 단정하게 입는 능력이 있었다.

아이가 다 입고 나를 보면, 나는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울리세는 정말 옷도 잘 입네! 형보다 백배는 나아.”

울리세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나란히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집사님이 차려놓은 만찬이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집사님은 자리에 없었다. 울리세는 식탁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 무슨 날이야?”

“그럼. 날이지. 여기 앉아서 잠깐 기다려 봐.”

나는 후다닥 주방으로 향했다. 집사님이 어제 만들어놓았던 케이크를 꺼내고 있었다. 식당에 없어서 어디 갔나 했더니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기다리셨으면 제가 가지고 갔을 텐데요.”

“아니에요, 제가 가지고 가고 싶어요.”

집사님은 나에게 케이크 접시를 건네주었다. 케이크에는 집사님이 꽂아놓은 초도 있었다. 나이 개수만큼 꽂혀 있어야 할 촛불이 하나만 있었다. 일렁이는 불꽃이 꺼질까 조심하면서 빨리 식당으로 되돌아갔다. 울리세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얼굴로 요리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경계심 많은 고양이 같았다.

“울리세~”

아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러곤 아까보다 더욱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더 커질 수 없이 동그래진 눈은 토끼 같았다. 부끄럽지만 울리세가 더욱 기뻐하길 바라며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

울리세는 그제야 오늘이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울먹거리는 눈망울은 아침 햇살을 받은 이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기쁘게 웃으며 노래를 마저 불렀다.

“사랑하는 울리세~ 생일 축하합니다!”

“……요셉.”

“자. 빨리 후 불어. 소원도 빌고.”

울리세는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촛불을 껐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알기만 한다면 이루어줄 자신이 있었다.

“생일 축하해, 울리세.”

“나, 잊고 있었어……. 생일.”

“앞으로는 이 형이 계속 축하해 줄게. 싫어도 챙겨줄 거야. 형이 할 수 있는 만큼 계속.”

울리세는 내 말을 듣더니 결국 나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묵직한 달려듦에 몸이 뒤로 휘청였다. 다행이었던 것은 케이크를 식탁에 내려놨기에 떨어뜨리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에게 뛰어든 조그마한 몸을 꼭 끌어안았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렇게 한동안 식당에는 상처받은 어린 짐승이 우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나는 울리세를 끌어안고 계속해서 토닥였다.

“이제 밥 먹을까?”

“……응.”

벌겋게 부은 코와 눈을 집사님이 가져다준 차가운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진정된 아이는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나 또한 자리에 앉았다.

집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배분했다. 사실 아침이기에 무거울 수도 있는 만찬이었다. 다행인 것은 울리세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야무지게 고기를 썰어 먹었다. 나 또한 흐뭇하게 음식을 먹었다.

“먹고 우리 선물도 뜯어야지?”

“……선물?”

“그럼. 생일 하면 선물이지. 형이 울리세 주려고 엄청 사 왔어.”

울리세는 대답 없이 손을 빨리 움직였다. 입안에 미어터질 듯 음식을 밀어 넣었다. 아이가 가진 기대감을 엿볼 수 있었기에 나는 웃으며 울리세를 말렸다. 저렇게 먹다간 탈이 날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울리세, 천천히 먹어. 선물 어디 안 도망가.”

“……응.”

울리세는 아까보단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평소보다는 배로 빨랐다. 나는 계속 피식피식 웃으며 음식을 먹었다. 유쾌한 생일 파티였다.

[왕자의 일기가 해금되었습니다!]

이 알림만 아니라면.

“아…….”

꿈결처럼 행복했던 한때가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수포가 터지듯 아롱거리는 인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일기장을 보는 걸 잊지 마.’

돌아온 후 피곤함과 집사님의 바뀐 행동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기장. 일기장을 봐야만 했다.

“요셉? 어디, 아파?”

“아냐. 아냐, 어서 먹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음식을 먹었다.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 하나도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잠식한 일기장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울리세다. 나는 애써 일기장의 생각을 미루고 울리세에게 집중했다.

* * *

울리세의 선물 개봉식이 끝났다. 아이는 그 어떤 물건이어도 뛸 듯이 기뻐했다. 선물해 준 사람의 입장에서 그보다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아이와 한동안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인 뒤 학원에 보냈다. 평소처럼 집사님이 마차를 몰았으니 집에는 나 혼자 남았다.

“……인벤토리.”

예전보다는 덜 떨리는 목소리로 창을 띄웠다. 전에는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꾸준한 연습은 빛을 발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게임 시스템 창은 악마의 하수인들에 비해선 별것 아니었다. 조금 떨리는 손이었지만 금방 일기장을 꺼내 든 나는 심호흡을 했다.

“후……. 후우…….”

마음을 다잡고 낡은 일기장을 펼쳤다. 겉보기는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는 생각보다 새로운 내용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확인하는 것을 잊어 꽤 쌓인 탓이었다.

[처음으로 맞춤옷을 만들어 입었다. 제대로 된 의복을 입으니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다. 정기 평가 때 이 옷이 있었다면 무시당하지 않았을 텐데.]

정기 평가? 신년 평가를 말하는 걸까. 약을 먹은 듯 쓴 기분이 들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어떠한 아이는 볼품없는 대접을 받을 거라는 예상. 하지만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노트 속의 인물은…….

“아냐, 아냐.”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고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적힌 내용이 많지 않아서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다음 내용은 불길하긴 했지만 여전히 희망적이었다.

[내 외모는 쓸모가 있다. 후원자를 얻었다.]

“……외모.”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독이다. 현실에서도 뛰어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불행하게 스러져 가는 일은 적지 않았다. 그것도 그 사람에게 돈과 권력이 없다면 뻔할 일이었다.

순간 집사님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또한 외모로 꽤 많은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니까. 계속해서 떠오르는 집사님의 얼굴을 밀어내고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누구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상처 치료가 익숙해서 다행이다.]

[내가 왜 신을 믿어야 하지? 내가 고통을 받았을 때 신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았다.]

[역겨운 신도들.]

갈수록 춤추듯 아름다워지는 글씨는 일기의 주인이 나이를 먹으며 좋은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았다 해도 내용을 보면 커갈수록 내면의 분노를 키웠음을 알 수 있었다.

“…….”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다른 페이지와 달랐다. 흰색의 종이가 아닌 검은색의 종이. 그 어느 페이지보다 유려한 필체로 글씨가 씌어 있었다. 어쩐지 낯익은 필체였다.

[무화과 한쪽, 루비 가루, 소환자의 피 한 방울.]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 음식의 조리법이라기엔 내용물이 이상했다. 순간 꿈속의 후보자님이 생각났다. 집사님과 똑같이 생겼던, 자신을 울리세라고 말했던 그 후보자.

후보자님은 소환술에 관한 책을 얻어 갔다. 이것이 소환술에 대한 정보일까.

“……으…….”

노트를 덮어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꿈속의 그 후보자는 집사님과 너무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그가 집사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후보자였다. 집사님은 평민인 집사다. 후보자일 리가 없다. 그랬기에 나는 꿈속의 그를 집사님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집사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쌍둥이 정도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집사님과 울리세는 무언가 복잡한 혈연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을 후보자라고 말한 그는 자신의 이름이 울리세라고 했다.

잊으려고 했던 가설이 또다시 머릿속에 맴돌았다.

집사님과 똑같은 얼굴. 후보자. 울리세. 집사님과 닮은 외모의 울리세. 울리세에게 사용하니 집사님과 울리세 두 명 다 깨어났던 일. 울리세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인가? 아니. 그건 꿈속의 후보자님이 부정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팽팽 돌아가는 탓에 뜨거워진 이마에 손을 올렸다. 대조적으로 차갑게 식은 손이 서늘해 살 것 같았다. 추측으로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나 증거가 부족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 긴 고민 끝에 쉬기 위해 침대에 엎드렸다.

* * *

울리세의 생일이 지나고 얼마 후였다. 따스한 봄바람이 창밖에서 불어 들어왔다. 매서운 추위가 가시고 드디어 따뜻한 봄날이 온 것이다. 아이가 봄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셉 님.”

“네?”

울리세가 학원에 가 빈 평화로운 시간. 그림을 그릴까 했지만, 오늘은 집사님과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사님과 갖는 티타임은 이제 없으면 허전할 정도가 되었다. 반쯤 열어놓은 창가에서 막 꽃망울을 터뜨린 향기가 흘러들어 와 기분 좋게 방 안에 차올랐다.

“이제 슬슬 마법 공부를 재개하셔야겠습니다.”

“아…… 그거 끝난 거 아니었나요? 이제 싸울 일도 없고…….”

내심 이제 여행 갈 일도, 어디론가 갈 일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럼 자연스레 괴물도 만날 일이 없겠지. 내가 어마어마한 흑마력이 있다지만 그걸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쓰지만 않는다면 눈에 띌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집사님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그의 얼굴은 칼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호했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하긴 내 입장에선 나쁠 것은 없다. 집사님의 말대로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또 연습한다면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원래 미숙한 사용으로 고수에게 들키는 클리셰가 흔하지 않은가. 나는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어려운 수업을 또 어떻게 헤쳐 나가나 싶어 고민이 많았다.

“그럼 내일부터 도련님이 학원에 가시고 나면 두 시간 정도 수업하는 것으로 정하지요.”

집사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를 마셨다. 앞으로의 수업에 대한 걱정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공부란 내게 너무나 먼 종류였다. 하지만 이미 하겠다고 한 것을 물릴 수도 없고 그만둘 이유 또한 없었다.

집사님과의 수업에서 빠른 진취를 얻어내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 전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글러 버린 희망 같다.

함께하는 다과 시간이 끝나고 나는 터덜터덜 작업실로 걸어갔다. 내일부터 공부를 해야 한다니 격렬하게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원래 사람은 할 것이 생기면 딴짓하고 싶게 마련이다. 마치 시험공부 전 청소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업실 내부는 내가 청소를 짬짬이 한 것도 있지만 집사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그런지 먼지 한 톨 없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꺼내 들고 연필을 움직였다.

“후…….”

전보다는 손이 풀렸다지만 역시 오랜 기간 쉰 터라 예전과 같은 실력이 나오지 않았다. 흘려보낸 시간의 곱절을 연습해야 그 전보다 나을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종이에는 별 의미 없는 물건 그림이 가득했다.

“…….”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단순 작업은 재미없다. 게임을 좋아해도 게임의 단순 노동은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듯, 나 또한 며칠간 평범한 물건들을 그리는 것에 질린 참이었다.

주방에서 가져온 사과를 그리던 것을 멈추고 으적으적 먹어치웠다. 그리고 새로운 종이를 꺼내 지금까지의 연습과는 전혀 다른 것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시작은 울리세였다.

아이의 사랑스럽고 또랑또랑한 눈부터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볼, 앙증맞은 입술. 솔직히 내 기술이 모자라고 손이 굳어 그 귀여움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만족스럽게 그려졌다. 그림을 양손으로 들어 올려 보고 있자 등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이신가요?”

“으아아악!”

깜짝 놀라 앉은 채로 펄쩍 뛰어오른 바람에 무릎을 책상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무릎에 작렬하는 고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옹송그리자 집사님이 당황하며 나를 살폈다.

“괜찮으신가요, 요셉 님?”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번쩍 들어 뒤로 밀어낸 뒤 나를 살피는 집사님은 크게 놀란 듯싶었다. 이게 다 새가슴 때문이다. 다행히 크게 부딪친 건 아니었다. 다쳐도 멍 정도일 게 분명했기에 집사님을 말렸다.

“으……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놀라실 줄은…….”

집사님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평소에도 자주 놀랐는데 이렇게 다쳤던 적은 없어서 더 놀란 모양이다. 뭐 그래 봤자 멍 정도지만 말이다. 집사님은 내가 만류해도 무릎을 계속해서 주물렀다.

“정말로 괜찮아요, 집사님. 자. 이것 봐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바짓단을 올려 무릎을 보여주었다. 얼얼하긴 했지만 불그스레해진 것뿐이었다. 멍이 그렇게 빨리 들 리가 없으니까. 집사님은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그것 참 다행이지만…… 요셉 님.”

하지만 집사님은 손을 다리에서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바지가 걷혀 드러난 맨살을 은근하게 매만졌다. 순식간에 둔통이 아닌 뱀이 타고 오르는 듯한 간지러움이 오금부터 몸 전체로 퍼졌다.

“조금은 조심성이 있으셨으면 좋겠군요.”

“아, 아니 그게…….”

근래 집사님은 내 옷을 손수 입혀준다. 그 말은 집사님이 내 몸을 자주 본다는 소리다. 심지어는 간호하면서 내 알몸까지 질리도록 봤다. 그런데 고작 무릎에 갑자기 이런 태세 전환이라니.

요즘의 집사님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수작질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나뿐이었다. 다리를 은근하게 만진 것이 언제냐는 듯 집사님은 단정하게 바짓단을 내려주었다. 사람을 홀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이런 무심한 모습에 내가 괜한 착각을 하나 싶었다.

“……요셉 님.”

“아, 아니……. 그…… 감사해요.”

억울한 기분이 들어 한참을 노려보다가 집사님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지러운 감정만큼이나 너저분한 책상을 허둥지둥 치우기 시작했다. 아까의 소동으로 울리세를 그린 종이가 애매하게 구겨져 있었다. 다행인 점은 그림 부분은 멀쩡했기에 잘라 버리면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은 그만 그리실 건가요?”

“뭐…… 네. 좀 속이 복잡하네요.”

“……그렇군요.”

집사님 또한 옆에서 도와 작업실을 정리했다. 빗자루를 가져와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치우자 청소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났다. 평소 작업실 청소를 꾸준히 한 덕이었다.

작업실을 나서려고 하자 집사님의 큰 손이 내 팔목을 잡았다.

“어? 왜요?”

“모델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집사님은 흘긋 울리세를 그린 종이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사람을 그린 것은 저 그림이 처음이다. 그런데 갑자기 모델이라니? 뜬금없는 소리에 머리를 갸웃했다.

“갑자기요?”

“……기억을 되새기면서 그리는 것보단 모델이 있는 게 좋지 않습니까?”

“뭐…… 그야 그렇긴 하지만.”

집사님의 말이 맞기야 했다. 어쨌든 보고 그리면 상상과 자료만으로 그리는 것보다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이 집으로 전문 모델분들을 부르기는 좀 그랬고, 애초에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당장 모델이 급한 것도 아니다. 무언가 중요한 작품을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괜찮아요. 뭐 거창한 걸 할 것도 아니고…….”

“…….”

그러나 집사님은 손목을 놔주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내가 팔을 가볍게 흔들자 재차 입을 열었다. 손목은 그대로 잡은 채였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제가…… 모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네? 왜요?”

생각을 거치지 않고 튀어 나간 말에 집사님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물론 집사님의 외모는 그야말로 그리고 싶게 생긴 아름다운 조각상과 같았다. 내 입맛에 맞는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 저런 외모를 그리고 싶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왜 그가 나서서 모델을 제안하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제가 모델로 부적합하나요?”

집사님은 고단수였다. 시무룩한 기색을 팍팍 내며 나를 보는데, 눈망울이 촉촉한 것이 마음을 쿡쿡 찔렀다. 분명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죄책감이 크게 들었다. 집사님의 티 날 정도로 가증스러운 연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결국 그의 심통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내뱉었다.

“집사님이 어디가 모자란다고 그래요! 그까짓 모델 서주시면 고맙죠, 뭐!”

“그럼 언제라도 불러주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론 연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억울함과 아쉬움에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집사님은 그런 나를 작업실 밖으로 이끌며 태연히 말했다.

“도련님의 수업이 끝날 시간입니다. 오늘도 가실 겁니까?”

“물론이죠…….”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집사님은 나를 마차로 안내했고, 우리는 울리세를 맞이하러 떠났다.

돌아올 때는 복덩이인 울리세와 함께였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저녁, 내 작업실을 구경하던 울리세는 자신을 그린 그림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을 완성이 되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에 울리세는 크게 기대하는 것 같았다.

아이의 기대감에 완성작을 어찌할지 걱정이 든 것만 빼고는 그날도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 * *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집사님이 한껏 솜씨를 부린 음식이 상을 가득 메웠다. 아침이니 가볍게 만들었기에 가짓수가 많아도 위에 부담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무리 없이 아침을 해치우고 함께 식후 차를 마시는 중, 집사님이 편지를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붉은 실링으로 봉해진 편지는 어디선가 본 문양이 찍혀 있었다.

“이건?”

“초대장입니다.”

“어디서요? 우릴 아는 사람이 있어요?”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실링의 무늬가 보낸 사람의 가문인 것 같았다. 한데 이런 쪽에는 지식이 없는 터라 나에겐 너무나 불친절한 관습이었다. 뜻밖에도 무늬의 주인을 알려준 것은 울리세였다.

“……이거 샬라메…… 공작가야.”

“샬라메? 아, 브렌다 공녀.”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싶었더니 브렌다 공녀의 집안이었다. 쌍독수리 무늬는 잊기도 힘든데 어떻게 바로 떠올리지 못했나 싶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난 좀 멍청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집에서 왜 나한테…….”

의아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태오 또한 나와 울리세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앞으로 자신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단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 나와 울리세가 조용히 구석에 있을 때, 우리들의 행보가 그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간절히 원할 초대장이었지만 나에겐 그야말로 골칫덩어리였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봉투를 뜯지 않고 만지작거리고만 있자 집사님이 달래듯 말했다.

“샬라메는 힘이 있는 공작가입니다. 밉보여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결국 봉투를 페이퍼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뜯었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상투적인 초대가 적혀 있었는데 어딘가 흠잡을 곳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긴 흠잡을 곳이 있어도 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입장이겠지만 말이다.

“아…… 이런 거 싫은데.”

하지만 울리세를 위해서라도 가야 했다. 무엇 때문에 초대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무시한다면 앞으로 아이의 삶이 고단해질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권력자들은 대체로 넓은 마음씨가 아니었으며, 속 좁고 뒤끝이 길어 어떻게든 자신이 싫어하는 자들의 인생을 거꾸러뜨렸으니까. 그게 울리세가 된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났다.

굳은 결심을 하고 집사님에게 말했다.

“이날…… 갈 테니까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울리세는 집에 있을래?”

과자를 오물오물 먹던 울리세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혹시나 가기 싫은데 거절을 못 하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 형이 가서 해결하고 올게.”

“……아냐. 나 브렌다…… 만나고 싶어.”

“브렌다 공녀? 그러고 보니 학원에서 대화도 한다고 했었지.”

울리세와 하는 저녁 대화는 학원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브렌다의 이야기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연말 연회를 기점으로 울리세는 아이들과 조금은 친해진 것 같았다. 물론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는 브렌다뿐만이 아니었다. 스케이트를 탄 이후 다른 아이들이 꾸준히 울리세의 입에 올랐다. 나중에 집에 초대해 보라고 해야지. 아이가 친해진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몇 시간을 들어도 참으로 즐거울 게 분명했다.

“그래, 그러자……. 그러고 보니 친구 집 가는 건 처음이지?”

“……응.”

그러고 보니 울리세가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친구 집에 놀러 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야기는 자주 해도 그렇게까지 친한 친구는 없는 걸까? 내가 그 주제를 좋아해 일부러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혹시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유의하며 말했다.

“울리세, 혹시 다른 친구랑 놀고 싶으면 집사님한테 말하고 다녀와도 괜찮아.”

“……나는…… 요셉이랑, 있는 게 좋아.”

“응. 형도 울리세랑 있는 거 좋아. 그래도 혹시나 해서……. 놀러 가면 형이 용돈도 더 줄 테니까. 너무 참지만 말고. 알았지?”

울리세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기뻐 보이지 않는 기색이라 나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가족에게서 졸업하는 건 보통 절친한 친구를 사귀는 것으로 시작하니까. 그저 아이에게 빨리 더 친한 친구가 생기길 바랄 뿐이었다.

“그럼 두 분 모두 가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집사님은 예의 검은 노트를 꺼내 끼적였다. 예상치 못한 일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연말 연회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픈데 이제는 대놓고 큰 권력자를 대면해야 한다니. 동생 친구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가면 안 되겠지?

“어휴.”

* * *

시간은 금방 흘러 약속한 날이 되었다. 집사님은 속성으로 예법을 알려줬고 그것을 외우느라 그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슬프게도 예법은 복잡하기 그지없어 내가 외운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아마 직접 만나러 가면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겠지. 내 멍청한 돌대가리에 박수를 보낸다. 짝. 짝. 짝. 그래도 울리세는 곧잘 따라 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연말 연회 전에는 알려주시지 않으셨어요?”

나는 공작가의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집사님에게 물었다. 우리가 평소 타는 것과는 다른 마차였다.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마차는 공작가에서 보내준 것이었다. 브렌다 공녀가 타고 다니던 것과 비슷해 처음에는 브렌다가 찾아온 줄 알았다.

어쨌든 그에게 갑자기 물은 연유는 연말 연회에 가기 전에는 이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단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전 파티에도 고위 귀족은 잔뜩 있었는데 말이다. 실제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백작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고.

“그야, 그때에는 도련님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어……. 그게 왜요?”

집사님은 자주색의 벨벳 원단으로 만든 마차 의자 위에 곧게 앉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 똑바른 모습은 집사복을 입었음에도 그를 귀족으로 착각하게 할 만큼 기품 있었다. 한편으로는 청초함까지 있었는데 집사님은 어두운 옷을 주로 입어 검은색의 집사복에도 불구하고 백합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잠시 침을 삼켰다.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은 먼저 말을 걸지 않습니다. 같은 지위의 인간이 아닌 이상. 히스틱 백작은 조금 예외입니다만…… 보통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세계의 귀족들은 굉장히 콧대가 높은 모양이다. 말도 안 걸 정도라니. 하긴 생각을 해보면 이미 그들은 그들만의 친목이 있을 것이고, 말을 먼저 걸어올 사람이 한 트럭은 될 거다. 굳이 나 같은 기사에게 먼저 말을 걸 사람은 없겠지.

새삼 공작이 우리를 초대한 것이 얼마나 의외의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울리세는 가서 브렌다 만나니까 좋아?”

“……응.”

조금 신이 난 듯 발을 파닥거리는 아이는 정말이지 깜찍했다.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은 키가 작은 울리세라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성장을 위해 먹을 걸 좀 더 풍족하게 해야 할까?

나는 흘긋 집사님을 보았다. 나보다는 10㎝ 가까이 큰 그니까 울리세도 훌쩍 크겠지? 둘이 아직까지도 무슨 관계인지 제대로 모르겠지만 어쨌든 혈연관계인 것은 분명하니까. 안 그러면 저 외모의 흡사함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차는 흔들림 없이 귀족이 모여 사는 동네로 향했다. 고작 구역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여유로움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거대한 저택들이 널찍하게 자리해 있었고 마차가 지나다니기 쉽게 넓은 도로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시종이 마차를 열어주었고 집사님은 먼저 내려 우리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우리가 도착한 공작의 저택은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궁전이라고 해도 괜찮을 크기는 말할 것도 없고 담쟁이덩굴 하나 없이 정돈된 집은 전체적으로 하얀색이었다. 하얀색의 외벽을 유지하는 데는 인력과 돈이 많이 든다. 흰 외벽과 붉은 지붕, 3층은 되어 보이는 그 저택은 공작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마중 나온 공작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그는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이렇게 대단한 위세를 보이는 공작가의 일원이니 호가호위할 수 있는데도 우리를 대하는 행동에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안내된 응접실에서 사용인이 가져다준 차를 홀짝이며 공작이 오길 기다렸다. 차는 집사님이 해준 것보단 덜 맛있었다. 그 점이 나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집사님도 앉았으면 했지만 그는 사용인의 입장인지라 소파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공작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브렌다와 꼭 닮은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땋아 내린 중년 남성이었다. 스무 살이 넘는 자녀가 있는 모습이라기엔 정정한 외모였다.

“늦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공작이라는 고위직의 귀족을 이렇게 제대로 만난 것은 처음이기에 딱딱하게 긴장하고 말았다. 대본을 읽는 것처럼 어색하게 말하며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일어난 내가 한심해 보이겠지. 공작은 부드럽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로선 나처럼 긴장하는 사람이 처음은 아닐 테다.

“콘라드 샬라메일세.”

“아, 요셉 김입니다. 이쪽은 울리세고요. 이쪽은…….”

집사님을 소개하려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나는 집사님을 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작이 뭐가 필요해서 사용인의 정보를 알아두겠는가.

공작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손짓으로 의자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와 울리세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자리에 앉았다. 아까까지 푹신했던 소파가 어딘지 조금 딱딱해진 기분이 들었다.

“작위가 있다고 들었는데?”

“네, 기사 작위가 있습니다.”

공작이 나를 천천히 훑어본다. 그리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마 이미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역시 직접 마주하니 기사와는 거리가 먼 모습에 나를 훑어보는 것일 터였다.

이내 공작은 눈빛을 거둬들이고 차를 마셨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 부른 이유와 내 기사 작위가 상관없기 때문일 거다.

“내가 이곳에 자네들을 부른 이유를 아는가?”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이미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오도 눈앞의 공작도 도대체 언제 어디서 울리세의 가능성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라는 것도 본인들의 이득에 관한 가능성일 테지.

마태오는 우리에게 편안한 나날을 약속했다. 눈앞의 공작은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을 내밀어 유혹할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편하겠군.”

그는 아까의 미소 띤 얼굴을 사그라뜨리고 오만한 모습을 내보였다. 본래 그의 모습이겠지. 찻잔을 잔 받침에 소리 없이 내려놓은 그가 고압적으로 말을 이었다.

“나와 손을 잡았으면 하는데.”

내용은 동료가 되자는 제안 같았지만, 그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협박에 가까웠다.

도대체 왜? 그 정도로 울리세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는 걸까? 물론 내게 울리세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다.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이 세계에서 울리세보다 중요한 것은 내게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 사정이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쁜 것처럼 내게 울리세는 그런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남에게는? 객관적으로 울리세는 아직 강하지도, 무언가 뛰어난 결과를 내보인 적도 없다. 대회라든가 그런 것을 나간 적도 없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울리세가 대회에 나가지 않아도 그저 이만큼 자라준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

울리세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쥐었다. 그 순간,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이런 경험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나는 집사님의 기세를 버틴 적이 있다. 사실 지금이 훨씬 살 만했다. 위압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내 대답에 공작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태도였다. 태어나기부터 권력을 쥔 자가 내보일 수 있는 오만함.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내가 보기엔 기가 찬 오만이었다.

마음속 반골 기질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기사 작위가 있다고 쳐도 공작에게는 거의 평민과도 같은 신분이다. 그에게 있어 나는 수틀리면 뒤에서 슬쩍 죽일 수 있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다.

울리세를 위해서라도 나는 보기 좋게 웃었다. 최대한 무해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공작은 울리세를 흘긋 보며 입을 열었다.

“후보자님과 자네의 근처에서 유독, 악마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고 있네.”

“많이, 라니요. 우연일 뿐입니다.”

“그 우연이 세 번이나 되었지. 돈을 퍼부어 흔적을 찾으려는 귀족들도 한 번을 찾을까 말까라네.”

세 번. 맨 처음 숲에서 만난 그때와 호숫가의 일까지도 공작은 모두 아는 모양이다. 공작은 돈도 인맥도 출중한 듯했다. 지끈거리며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집사님의 말이 맞았다. 여행 같은 건 가지 않는 게 옳았다. 과거의 나에게 가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생각도 없네. 나는 그저 브렌다가 왕좌에 오르길 바랄 뿐이지.”

공작의 눈은 야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왕을 만들어내겠다는 킹 메이커의 꿈이 있는 걸까.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다는 집념이 그의 눈에서 느껴졌다. 그것에 위축되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들었다.

“…….”

그 순간, 집사님이 나를 지지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길에 마음이 든든해져 재차 마음을 다잡고 공작의 이야기를 들었다. 공작은 그런 나의 모습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네가 내 손을 잡는다면, 울리세 후보자님에겐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거절하겠습니다.”

“신중히 대답하는 게 좋을걸세.”

공작은 연달은 거절에 기분이 상한 듯 눈썹을 잠시 꿈틀거렸다. 그는 눈썹 외에는 어느 것 하나 바꾸지 않고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화살촉처럼 나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얇은 밧줄 하나 위를 걷는 듯 팽팽한 긴장감이 응접실에 감돌았다.

하지만 나의 손을 꼭 잡은 울리세의 손과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집사님의 손이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공작과 손잡지 않아도 울리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수 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을 남 비단길 깔아주는 데 이용당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날카로운 긴장감에 잠겨 있을 때였다. 낭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공작 각하,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시면 곤란하죠.”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공작과 똑같은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브렌다였다.

또각거리는 어린이용 구두를 신은 브렌다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연회장과 학원에서 보았던 바지가 아닌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다. 우리를 협박하며 표정에 변화 하나 없었던 공작은 처음으로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브렌다…….”

“손님들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는데, 처음으로 공작이 평범한 사람 같았다. 그의 진심은 모르겠지만 브렌다를 아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공작이 한참 브렌다를 향해 무언의 시선을 보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 조그마한 몸에서 그런 배짱이 나오는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알아서 하거라.”

결국 브렌다를 이기지 못한 공작의 한숨 어린 허락이 떨어졌고, 브렌다는 의기양양한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핑그르르 돌아가는 치맛단이 꽃잎같이 참 예뻤다. 울리세에게도 저런 재질로 만들어진 옷을 하나 만들어줄까. 튜닉 같은 거면 통풍도 되고 좋을 텐데.

“그럼 손님들은 이쪽으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울리세와 집사님은 정확히 예법을 지켰겠지만 나는 제대로 했는지 잘 모르겠다. 머릿속으로 태연하게 울리세의 옷을 생각하긴 했지만 이래 봬도 꽤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수 안내하는 브렌다의 뒤를 졸졸 따라가자 본래 있었던 응접실과 비슷하게 생긴 방에 도착했다.

“이곳은 제 손님만을 대접하는 응접실입니다.”

브렌다는 응접실의 상석에 앉았다.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브렌다가 앉고 나서야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집사님은 그 전처럼 소파의 뒤에 호위하듯 섰다.

집사님을 뺀 모두가 자리에 앉자 브렌다가 허리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왜 갑자기…….”

“저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브렌다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양이었다. 아까의 공작이 내가 아는 고압적인 귀족의 모습이었다면 브렌다는 어딘가 조금 달랐다. 공작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 것 같았다면 브렌다에게선 부정한 짓은 경멸할 대쪽 같은 꼿꼿함이 느껴졌다. 마치 고고한 학 같았다.

“괜찮아.”

울리세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브렌다는 허리를 펴고 우리를 보았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는데 약간 긴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브렌다는 울리세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브렌다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울리세에게 물었다.

“……정말로?”

“응.”

울리세의 대답을 들은 브렌다는 모든 걱정을 털어버린 듯 안도했다. 누구라도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는 건 바라지 않겠지. 옅은 미소를 지은 브렌다는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 같았다.

“공작 각하는 가끔 저를 너무 위하실 때가 있어서…….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하죠.”

브렌다가 조금 툴툴거리더니 사용인이 가져다준 차를 한 입 마셨다. 고급스러운 시트러스 향이 응접실에 은은하게 퍼졌다. 공작과의 자리에선 아무것도 먹지 않던 울리세가 오독오독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아이도 이 자리가 편한 듯했다.

“괜찮아요.”

울리세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지만 브렌다에겐 존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마태오와 비슷한 느낌.

생각해 보면 마태오는 모르겠지만 브렌다는 무려 공작가의 공녀다. 후보자임을 떠나 어쨌든 나보다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존대를 해야 하는 사람인 게 맞다. 나보다 한참은 어린아이에게 무조건 존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놈의 신분제는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분의 마음도 알고 저 또한 부응하고 싶지만…… 이럴 때는 정말이지 난감하답니다.”

“하하…….”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왠지 상사의 말을 웃음으로 넘기는 회사원이 된 기분이었다. 회사는 다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는 와중, 브렌다가 눈을 반짝이며 울리세를 보았다.

“그래도 오늘은 각하께 조금 감사하는 마음도 있네요. 널 만나고 싶었어.”

기대감이 가득 찬 눈은 연말 연회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호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울리세에게도 드디어 첫사랑의 달콤 쌉싸름한 분홍빛의 기류가 도는 것일까 했지만 곧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 대단하더라.”

“……별로…….”

“별로? 별로라니. 선생님이 너만 칭찬하는 거 모르는 줄 알아? 곧 초급반은 졸업하고 중급반으로 갈 거라면서? 이대로라면 상급반도 금방이라는 말이 파다해.”

나는 놀라 울리세를 보았다. 그도 그렇듯 울리세는 학원에서 이룬 성취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학원에서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했다거나 검을 휘두르는 게 힘들었다는 투정 어린 어리광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저렇게 브렌다가 눈을 빛낼 정도의 결과를 보이다니.

아까 내 생각이 너무나 한심했다. 울리세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눈부신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브렌다가 아는 정도면 남들도 알음알음 알고 있겠지. 보호자로서 실격이었다. 먼저 학원에 찾아가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빨리 시간을 내어서 찾아가 봐야겠다.

나는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울리세에게 물었다.

“울리세, 정말이야?”

“……별거…… 아닌데.”

“별거가 아니라니! 완전 별거인데!”

이 자리가 어딘지도 잊어버린 채 기쁨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칭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강해지고 싶다며 저택에서 열심히 땀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초급반을 졸업하다니. 감동과 기쁨을 표현하며 울리세를 부둥켜안았다.

한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을까, 작은 헛기침이 들려왔다.

“사이가 좋군요.”

“아. 하하……. 하하.”

울리세와 사이가 좋은 건 좋은 것이지만 남의 집에 와서 주책없이 굴었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어색하게 웃으며 울리세를 놓으려고 하자 아이가 나를 세게 한 번 꼭 끌어안고 떨어졌다. 그 행동에 행복해져 입이 귀에 걸릴 듯 웃었다.

“그런데 그쪽은 저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네?”

브렌다의 시선을 따라가니 무표정한 집사님이 브렌다를 보고 있었다. 공작가에 와서 허투루 입을 열지 않던 조심스러운 집사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침묵하는 집사님을 향해 브렌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유능한 집사인가?”

“……유능?”

“모르셨나요? 꽤 유명한 소문이랍니다. 숲속의 고저택을 홀로 관리하는 헌신적인 집사가 있다고. 못 하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 있지요.”

그런 소문이 있다니. 그러고 보면 첫 번째 괴물을 잡은 것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대체 그 숲속에서 싸운 것을 어떻게 아는 걸까. 그 숲은 인적도 드물었는데 말이다.

하여튼 집사님이 유능한 걸 모두가 알다니 나중에 스카우트 제안을 해 빼 가면 어떻게 하지? 집사님이 없으면 저택은 돌아가지 않을 거다. 나 또한…….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뜨끈해진 볼을 손등으로 식혔다.

“발언해도 좋아.”

“…….”

“무슨 발언을 해도 문제 삼지 않겠어.”

자연스러운 하대는 브렌다에게 정말이지 잘 어울렸다. 다른 이를 향해 하대하는 인생을 당연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브렌다가 우리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한다 해도 결국 그는 고고한 신분제의 기득권이다. 아마 저 오만함은 그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브렌다에게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럼 주제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좋아.”

집사님은 차갑기 그지없는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 침묵하던 것이 거짓인 듯 그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후계 다툼은 물밑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꼿꼿하게 굴어봤자 공녀님의 손해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공녀님처럼 굴지는 않을 겁니다.”

“흠.”

“결국 공녀님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겠지요.”

나는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공작가의 공녀에게 하는 말치고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아무리 책잡지 않는다곤 했지만 화풀이를 한다면 못할 것도 없기에 나는 브렌다 공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의 표정에 불쾌감은 보이지 않았다.

“잘 알고 있군. 맞아, 나처럼 하는 사람은 없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게 있어.”

브렌다는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마치 비단 같았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그 얼굴에 감돌았다.

“난 어리지만 제법 유능해.”

미소는 바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공작의 총애도 작위도 아닌 본인의 능력. 자신이 이루어낸 결과물에 대한 믿음이었다.

물론 정말 본인의 재능이 좋기도 하겠지만 브렌다가 얼마나 애지중지 다루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능력을 꽃피우고 저 자신감을 가지는 데에는 다른 이의 사랑 또한 필요하니까. 도도한 그 미소는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공작 각하가 어떻게 말씀하셨든……. 울리세는 나랑 친하게 지내줬으면 좋겠어.”

“……응.”

브렌다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웃음에는 오만함은 티끌조차 없었다. 울리세는 조금 주저하다가 브렌다의 손을 잡았다. 브렌다는 손을 흔들었다.

손을 마주 잡은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다른 모든 상황을 떠나 울리세에게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기뻤다. 나는 울리세를 보다가 집사님을 돌아보았다.

“…….”

집사님은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커진 눈.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변화가 미미했지만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이래 봬도 1년 가까이 함께 지낸 사이다. 평소 집사님과 보내는 시간이 길었던 나는 그의 표정을 나름대로 잘 파악했다. 그는 울리세와 브렌다를 뚫어져라 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참.”

원하는 것을 얻은 듯 기쁘게 웃으며 차를 마신 브렌다는 마치 별거 아닌 사실을 잊었다 방금 떠올렸다는 듯 여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로 제가 충고 하나 해드릴게요. 후보자…… 마태오 주피터는 조심하세요.”

“네?”

마태오? 여기서 마태오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브렌다는 내 의문 어린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은 진지해 보였다.

내 기억 속의 마태오는 하얀색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얀색의 사제복.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한 성스러운 분위기. 그것뿐이었다. 그와 대면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기에 마태오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겉보기엔 아무리 봐도 조심하라고 해야 할 정도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심지어 그는 병원으로 봉사 활동까지 오지 않았는가. 나이도 어리고. 브렌다는 왜 이런 말을 꺼낸 걸까.

“…….”

하지만 입은 굳게 닫혀 더 이상 말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경고에서 끝낸다는 걸까. 하긴 여기서 구구절절 이유를 이야기하면 뒷담에 가까워진다. 그러면 본인의 이미지만 상하는 일이 되는 거지.

“그럼,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울리세, 다음에도 우리 집에 찾아와 줬으면 좋겠어. 초대장을 보내면 와줄 거지?”

“……응.”

울리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브렌다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공작으로 인해 기분 나쁜 방문이 될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브렌다 덕분에 기분 좋게 떠날 수 있었다.

* * *

브렌다의 호의로 올 때와 같이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푹신하고 흔들림 없는 마차를 다시 타자 저택의 마차를 조금 더 좋은 것으로 바꿀까 고민되었다. 별 영양가 없는 고민을 하던 중, 집사님이 울리세에게 말을 걸었다.

“……브렌다 공녀가 마음에 드십니까?”

집사님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이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 좋은 일일 텐데 왜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걸까? 브렌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브렌다는 객관적으로 좋은 아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가족들은 그를 사랑함에 모자람이 없다. 친구로 지내기 좋은 아이다. 심지어 둘은 같은 후보자로 공통분모까지 있다. 애초에 울리세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집사님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응.”

“……어째서죠?”

집사님의 얼굴에선 미세한 혼란이 엿보였다. 울리세는 그런 집사님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대답을 해주었다. 그 대답은 정말이지 간단하고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멋있어.”

브렌다가 멋있긴 하지. 울리세가 브렌다를 처음 보았을 땐 열등감이나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는데 정말이지…… 아이의 정신적 성장이 너무나 기뻤다. 감격의 파도에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집사님의 작은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은 비열하게까지 보였다.

“그렇군요.”

저렇게 냉소적인 반응을 할 필요는 없잖아. 첫 만남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태도에 순간 화가 났지만 울리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이가 있는 곳에서 화를 낼 수도 없어 나는 있는 힘껏 참아냈다. 그렇게 불편한 공기 속에 마차는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돌아와 한 소리 하려고 했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집사님에게 말을 걸려고 하니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뒤였다.

심지어 식사 때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식당에 가니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과 울리세뿐이었다. 평소 식당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집사님은 온데간데없었다. 울리세와 도란도란 저녁을 먹기는 했지만 집사님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아까의 화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후우…….”

이제는 화가 아니라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왔다. 이유 모를 그의 빈자리에 잠자리에 들고도 침대에서 계속 뒤척였다. 잠이 오지 않는 몸이었지만 끈질긴 노력 덕분일까, 어떻게든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나는 느리게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

내가 서 있는 공간은 화려한 복도였다. 최근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공간, 왕궁이었다.

또 그 꿈이다. 벌써 몇 번이나 꾼 꿈. 경험이 있기에 알아챈 덕도 있지만 바로 꿈이라 생각한 이유는 꿈속의 인물이 날 통과해 지나쳤기 때문이다. 귀신이 나를 통과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집사님과 얼굴이 똑같은 그 후보자님을 찾았다. 평소라면 근처에 있었을 그 아름다운 후보자님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정처 없이 복도를 걸어 나갔다. 덕분에 나는 현실에서보다 더 자세하게 왕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벽에 그려진 아름다운 천사의 그림부터 세밀하게 조형된 식물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녔음에도 목표한 후보자님을 찾을 수 없었다. 텅 빈 복도에서 나는 불현듯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 즉시 나는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볼을 있는 힘껏 꼬집어도 눈을 감고 숫자를 세도 이 외로운 꿈속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공포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진심이십니까?”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것이 무색하도록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집사님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 내 아이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울리세 후보자의 목소리였다. 비스듬하게 열려 있는 문의 틈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쫓아 들여다보자 그렇게 찾던 후보자님이 보였다.

“진심입니다! 울리세 후보자님……. 제, 제 마음을…….”

그의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수줍게 볼을 붉힌 채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내가 예상한 바가 맞는다면, 무례하게도 고백 장면을 훔쳐보고 있는 셈이다. 양심이 자리를 피해줘야 한다고 외쳤지만 차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빤히 그 장면을 계속 보았다.

“하지만…… 공자, 저는…….”

그는 불쾌감도 거부감도 표하지 않았다. 그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백하는 남성의 옷은 단정하고 화려한 장신구가 없었다. 이 나라는 고위직일수록 옷이 단조로워진다. 그럼 결국 저 남자는 후보자님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이겠지. 그의 난처한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압니다! 알아요……. 울리세 후보자님이…… 일정한 상대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렇다면.”

“하지만, 하지만…….”

무려 눈물까지 글썽이며 간절하게 후보자님을 보는 남성의 모습은 매우 간절했다. 그를 향한 절절한 사랑이 문 너머의 나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나조차 마음이 따끔따끔 아플 정도였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후보자님에게 간청했다.

“그저, 몸뿐만인 관계라도 좋습니다. 다른, 다른 사람들도 받아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정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후보자님은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푸른 눈은 요요하게 빛났고 매혹적인 그 눈빛에 남성뿐만 아니라 나 또한 침을 꿀꺽 삼켰다. 방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끈적끈적한 기류로 가득 찼다. 내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네…… 네. 울리세 님이라면!”

그 말을 들은 후보자님은 씩 웃고 남성의 입에 입을 맞췄다. 영화에서 본 듯한 격한 입맞춤에 나는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옥죄어왔다. 무언가가 강하게 심장을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각도를 달리해 키스를 계속하는 모습에 가슴의 통증이 심해져 그들에게서 겨우겨우 시선을 떼려는 참이었다.

등 뒤에서 또각거리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발걸음의 주인은 나를 통과해 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그 안에서 숨을 나누던 둘은 급하게 떨어졌다. 아니, 급한 것은 남성뿐인 것 같았다. 그는 흐트러진 숨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방을 뛰쳐나갔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급한 모습이었다.

“……브렌다 후보자.”

나는 깜짝 놀라 난입한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180㎝ 가까이 되어 보이는 큰 키. 내가 알던 브렌다 공녀와 놀라울 만큼 흡사한 분홍색 머리칼. 흰색의 제복은 그를 위해 만든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얼굴도 내가 아는 브렌다와 흡사했다.

아니, 그런데 브렌다라니. 내가 아는 브렌다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십 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이런 성인이 아니라.

“정말이지 천박하군요. 레트 공자에게 약혼자가 있는 걸 모르나요?”

“하하. 저에게 받아달라 구애한 것은 공자입니다. 그건 모르시나 보지요?”

브렌다 후보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내 도덕성으론 저런 행동은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브렌다는 후보자님의 반응에 더욱 화가 난 듯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왕위 후보자라면 조금 더 몸가짐을 제대로 하는 게 좋겠군요. 역겨운 냄새가 왕궁 전체에 진동을 해.”

“불행히도 이 나라에 저같이 욕망에 충실한 자가 넘쳐난답니다, 브렌다 후보자. 저는 그저 거절하지 않을 뿐이지요.”

현실의 울리세와 브렌다의 사이는 이렇게 험악하지 않다. 브렌다는 울리세를 향해 눈을 빛내고, 울리세는 브렌다에게 멋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꿈속의 두 명은 악연 그 자체였다.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모를 때, 울리세 후보자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꼿꼿하게 굴어봤자 손해일 뿐입니다. 결국 브렌다 후보자,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겠지요.”

나는 얼음처럼 꽁꽁 굳었다. 저 말을 현실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집사님이 브렌다 공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브렌다 공녀가 눈을 부릅뜨고 후보자님을 노려보자 꿈이 일그러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잠, 잠깐!”

조금 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꿈의 정체와 저 후보자의 정체를.

하지만 내 간절한 외침에도 꿈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꿈속의 두 명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공간이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 또한 무너져 어떠한 대화도 듣지 못한 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번쩍 떴다.

“으……. 으으.”

자기 전보다 어지러워진 머릿속에 앓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가해지는 압력에 조금 시원함을 느낄 때, 서늘한 손길이 내 손에 닿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이었다.

“그렇게 하시면 눈이 안 좋아집니다.”

“……!”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 것이 정말이다. 유례없이 기겁한 덕분에 혀를 깨물 뻔한 나를 집사님은 세심하게 살폈다. 열이 있는지, 어딘가 아픈 곳이 있는지 꼼꼼히 살피는 모습은 꿈속의 나른하고 유혹적이었던 후보자님과는 정말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랐다.

“집, 집사님.”

“몸이 아픈 건 아닌 것 같군요. 나쁜 꿈을 꾸셨습니까?”

부드럽게 이마를 쓸어내리는 손길은 정말이지 다정했다. 그런데 자기 전에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이 자연스럽게 내 방에 들어와 있는 모습이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자기 전에 걱정했던 것이 억울해져 나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그랬어요.”

“저런.”

집사님은 흐트러진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아.”

“왜 그러십니까, 요셉 님?”

나 또한 내 행동에 당황한 참이었다. 어째서일까. 집사님이 꿈속의 그 후보자님과 같아 보였다. 들이미는 유혹을 거절하지 않은 모습이 지금의 다정한 모습에 겹쳐졌다. 살며시 피어오르는 가슴의 둔통과 아직도 잠기운이 남아 있는 정신이 혼탁하게 뒤섞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손을 놓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유 모를 행동에 수치스러웠다.

“혼자 주무시기 외로우십니까?”

웃음기 서린 말과 함께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묵직한 무게로 인해 침대가 쑥 가라앉았다. 그는 아이를 달래듯 나를 느리게 토닥였다. 그 손길에 잠이 오기는커녕 깨어난 나는 집사님에게 마차 안의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아까 낮에…… 마차에서 왜 그런 거예요?”

“…….”

일정한 속도로 나를 토닥이던 손길이 멈췄다. 또다시 집사님이 모습을 감출까 걱정되었기에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울리세랑 브렌다가 친하면 좋은 거 아니에요? 근데 왜…….”

“……도련님과 브렌다 공녀는 성격이 맞지 않습니다.”

단언하는 그 말에 꿈이 떠올랐다. 후보자님을 경멸 어린 눈으로 노려보던 브렌다 후보자. 그런 브렌다 후보자를 조롱하듯 말하던 후보자님. 하지만, 그건…….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니요. 둘은 맞지 않습니다.”

“집사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집사님이 울리세도 아니면서.”

차가운 침묵이 방 안을 메웠다. 생각하지 않고 튀어 나간 말에 집사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떠한 대답을 할지 두려워 눈 하나 깜짝하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을 때, 집사님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좋은 밤 되시길.”

“집, 사님.”

방을 떠나는 집사님의 옷자락을 다시 한번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방을 떠나는 게 더 빨랐다. 허망하게 남은 나는 집사님이 나간 문을 멍하니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요.”

어째서 그는 부정하지 않았을까. 별말도 아닌데. 웃어넘길 수 있는 말인데. 집사님과 울리세, 그리고 꿈속에서 보았던 후보자님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저 심증. 형태 없는 심증만이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 나갔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계속해서 찔러대며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 * *

집사님은 그날 밤에 있었던 대화를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나 또한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기에 그날은 조용히 잊히는 듯했다.

울리세와 집사님, 그리고 꿈속의 후보자님이 같은 사람이라는 의혹은 너무나 말이 되지 않았기에 나 또한 잊어갔다. 애초에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심증을 증명할 증거가 없으니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아 보였다. 애초에 내가 이 세계에 있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음 날 편안한 점심시간, 학원에 가기 전이기에 울리세가 오물거리며 야무지게 밥을 먹었다. 옛날에 새 모이만큼 먹었던 것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검술을 시작한 후로 두 접시는 뚝딱 해치우는 모습은 정말이지 흐뭇했다.

“요셉.”

열심히 밥을 먹던 울리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오믈렛을 먹다가 울리세를 보았다.

“응?”

“나…… 예법, 배우고 싶어.”

예법? 그런 걸 가르치는 학원도 있나? 집사님을 돌아보자 그는 이미 익숙한 수첩을 꺼내 들고 끼적이고 있었다.

“적합한 예법 초급반이 있습니다. 등록할까요?”

“예법이면 뭘 배우나요?”

“사교 예절부터 왕궁 예법까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울리세가 갑자기 이걸 왜 배우고 싶다고 한 걸까? 사실 배우면 나쁠 것 없는 과목이다. 집사님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공책에 끼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기뻐 보이는 울리세를 향해 물었다.

“예법은 갑자기 왜 배우고 싶은 거야?”

“……브렌다가, 멋있어서.”

포크를 만지작거리는 울리세는 쑥스러운지 볼을 붉혔다. 그제야 나는 울리세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브렌다의 그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자신보다 훨씬 크고 나이 많은 공작에게 기죽지 않는 모습. 이것이 바로 귀족, 이것이야말로 기품이라고 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그걸 보며 울리세는 이 조그마한 머리로 어떻게 하면 자신도 멋있어 보일까 고민했단 것 아닌가. 정말이지 귀여웠다.

“그래. 집사님, 언제부터 가면 돼요?”

“오전반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오전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 진행하는 수업이 있군요. 오늘 도련님을 모셔다드리고 등록해 오겠습니다.”

“나, 열심히 할게.”

울리세는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브렌다라는 존재가 울리세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역시 나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을 무턱대고 질투하기보다 이렇게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이 몇 배는 좋다.

그날 울리세에게 내가 생각했던 바를 말해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울리세가 만약 용기 내지 못하고 그날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 일어서지 못하게 되면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울리세는 그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예법 수업은 내일부터 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응. 고마워요, 집사님.”

집사님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수첩을 접고 품에 넣었다. 울리세와 브렌다의 접점을 탐탁지 않아 했던 것치고는 싱거운 반응이었다. 어쩌면, 나와의 대화를 없던 것으로 하려는 것처럼 마차 안의 대화도 없던 것으로 치부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럼 나, 학원…… 오늘 빨리 갈래.”

“요즘 일찍 가네?”

“응. 나 혼자…… 훈련하려고.”

먼저 가서 예습하는 모범생이 내 새끼라니! 갑자기 전교 일등 자녀를 둔 학부모의 기분에 동조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뭐라도 하나 쥐여주고 싶은 기분은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더 연습하겠다는 아이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오버워크로 병을 얻은 선수들이 생각나 황급히 울리세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이미 허락을 받은 기쁨에 음식을 복스럽게 먹고 있었다. 볼이 빵빵하니 햄스터 같았다.

“울리세, 그런데 이렇게 훈련하는 거…… 괜찮은 거야?”

“……응? 뭐가?”

내 걱정스러운 표정에 울리세 또한 진지한 표정이 되었으나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걱정되는 부분을 이야기하려는 나를 대신해 집사님이 입을 열었다.

“오버워크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네……. 안 그래도 어리고……. 과하게 하면 안 좋으니까요.”

“괜찮아.”

울리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이가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 깜짝 놀라 바라보자 울리세는 어느새 많이 성숙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걱정이 한결 가셨다.

“괜찮아. 선생님이…… 지도해 주셔.”

“아, 그렇구나. 형이 괜한 걱정을 했네. 다행이야.”

혼자 연습한다고 해도 학원에 선생님이 상주하지 않는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내가 뭐 그런 학원에 다녀봤어야 알지. 정말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쉬었다.

아이는 다시 음식을 열심히 먹었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뺨이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천천히 먹어 울리세. 체하면 큰일이잖아.”

* * *

울리세는 기운차게 밥을 먹고 집사님과 함께 학원으로 떠났다. 나는 그들을 배웅하고 기지개를 켠 뒤 작업실로 향했다. 이제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작업실로 가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집사님이 돌아오면 마법 수업을 해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기 전에 낙서를 하는 이 잠깐의 시간이 참 좋았다. 햇볕이 잘 들어오게 커튼을 걷은 후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일부터 울리세가 아침부터 없구나. 오전부터 작업해도 괜찮을 것 같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작업실을 메우고 텅 빈 종이 위에는 그림이 빼곡하고도 어지럽게 메워졌다. 슬슬 오랜 시간 굳어 있던 손도 다 풀렸고 다른 재료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뭘 쓸까? 파스텔? 물감? 재료를 고르는 등 일련의 과정에 푹 빠져 있을 때, 부드러운 손길이 내 볼을 매만졌다.

화들짝 놀라 펄쩍 뛰려는 몸을 그 손이 부드럽게 어깨를 쥐어 진정시켰다. 그 덕분에 전처럼 다리가 책상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집, 집사님. 깜짝 놀랐잖아요.”

집사님의 접촉에 놀라 손을 휘두른 덕분에 그리던 그림의 선이 삐죽 날아간 것이 보였다. 보통이라면 열받을 상황인데도 집사님의 얼굴을 보면 화가 귀신같이 사그라진다. 집사님은 자신의 얼굴이 끝내주게 잘생긴 것에 감사해야 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님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 이론 수업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집사님은 마력구를 만들던 첫 수업 이후 이론 수업을 끝내고 실기 수업을 하는 순서로 진행했다. 뭐든지 이론이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법이라면서. 슬픈 건 이론도 이해해야 튼튼하게 토대를 만드는 법이다. 한데 나는 열 개를 설명하면 두 개를 이해하는 식이었다. 내 돌머리에 찬사를 보내는 바다.

“요셉 님, 이해하셨나요?”

“……음……. 조금?”

그래도 집사님은 이제 내 평범함을 이해한 모양이다. 설명도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해지고 느려졌다. 집사님의 첫 이론 수업은 정말이지 받아 적기도 힘들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그 변화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좋습니다. 요셉 님의 성장이 보여 기쁘군요.”

정말로 기쁘다는 얼굴이라 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 열심히 해서 전부 이해하면 지금보다 더 예쁜 미소를 지어주는 걸까? 내 돌대가리야 좀 힘을 내봐! 하지만 눈이 벌게지도록 종이를 노려봐도 마력이 어쩌고저쩌고 신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집사님.”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 집사님을 불렀다. 꿈에서 후보자님과 노인이 대화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물론입니다. 백마법의 금기는 사자 소생. 흑마법의 금기는 소환술이었지요.’

왜 소환술이 금기인 것일까? 물론 악마 소환술 같은 것도 있지만 그냥 소환술은 단순한 물건이나 정령 같은, 그런 신기한 것들도 소환할 수 있지 않은가. 정령을 소환해서 공격하는 드루이드 직업은 RPG 게임에서 심심치 않게 구경할 수 있다. 그것도 착한 캐릭터 쪽에서 말이다. 이참에 물어봐야겠다.

“흑마법의 금기가 소환술이란 걸 읽은 적이 있는데……. 왜 그런 거예요?”

“……소환술…….”

집사님의 눈빛이 일순간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은 곧 무뎌져 흐려졌다. 그는 교재로 쓰던 초급 마법서를 덮고 피곤한 듯 눈가를 주물렀다.

“그렇군요. 제가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군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백마법과 흑마법은 각각 금기가 있습니다. 백마법은 사자 소생술, 흑마법은 소환술이지요.”

“오…….”

일단 수업이 될 것 같으니 노트에 끼적이며 설명을 들었다. 집사님은 배운 내용을 불시에 쪽지 시험을 보곤 했다. 필기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작게 웃곤 설명을 이어나갔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아마 요셉 님이 생각하는 이유가 모두 맞습니다.”

“아, 역시.”

매체에 많이 나오는 것들. 죽은 사람을 되살리면 생사의 경계가 흐려져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 혹은 윤리적 문제 같은 것도 있고. 심지어 죽은 자를 되살린답시고 좀비를 만드는 영화 같은 것도 있었다. 좀비 사태를 상상하니 역시 오싹했다. 이제 판타지는 나에게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사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마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사라지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지요. 기아 상태와 다름없습니다. 물론, 대기 중의 마나를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것이 인간의 체질이기에 보통은 그런 일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휴식을 가지면 금방 회복합니다.”

이것 또한 처음에 배운 내용이다. 나에겐 극단적으로 흑마법에 적합한 마나가 많다는 것도. 사람에게 내장된 마나의 성질에 따라 무슨 마법을 배울 수 있을지 정해진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은 결국 시체입니다. 이미 죽었기에 마나를 회복할 수도 마나를 가지고 있지도 않지요. 결국 주변 마나를 미친 듯이 흡수하게 됩니다. 대기 중의 마나를 모두 흡수하는 것으로 시작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나까지 흡수합니다.”

“와, 그건…….”

“결국, 되살아난 자의 근처는 죽은 자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끔찍하네요.”

“사자 소생을 처음 시도했던 자가 살던 마을은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오랜 복구 끝에 이제 풀 한 포기가 자랐다고는 하더군요.”

생각보다 더 끔찍하고 규모가 큰 이유였다. 역시 금기된 이유가 있다. 설명을 한차례 끝낸 집사님은 잠시 숨을 골랐다. 어쩐지 조금 힘들어 보여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집사님은 표정을 수습하고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흑마법의 금기는 아시다시피 소환술입니다. 백마법에 비해 이것이 금지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간단하다고요?”

“네. 소환술로 어떤 것이 소환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럴 수가. 어떤 것을 특정해서 부르는 방법이 이 세계에는 없는 것인가.

“맨 처음 소환술을 개발, 시도한 사람은 아주 작은 정령을 소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걱정 없이 기뻐하며 정령 소환술로 명명하고 다른 이들에게 퍼뜨렸지요. 그 여파는 아주 거대했습니다.”

“…….”

“사람들은 새로운 마법을 너도나도 시도했으니까요. 소환진은 정령뿐만이 아니라 몬스터부터 이름을 모르는 것들까지 수십이 소환되었습니다. 그 난리가 상상이 되십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다면 별의별 것이 다 소환되어 사람들을 공격했을 것 아닌가.

“아주 끔찍한 재앙이었습니다. 차라리 몬스터는 나았지요. 가장 끔찍한 것은 악마가 소환되었다는 겁니다.”

“……악마?”

집사님의 얼굴이 매우 진지해졌다. 나는 멍하니 집사님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검은 책을 강탈하던 후보자님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지금 왕국을 혼란스럽게 하는 악마 또한 소환술로 나타난 것이 분명합니다.”

꿈속의 일이 언제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도 모르는 환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떠올리고 말았다. 일기장의 내용과 그 검은 책을 강탈해 가던 아름다운 얼굴까지.

“이미 왕실은 그렇게 규정하고 있을 겁니다. 후보자들과 후견인들의 정보 수집으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도 있지만……. 글쎄요, 저는 소환술을 쓴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집사님은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과 다르게 눈은 아주 살짝 일렁이고 있었다. 내 의문 어린 시선을 피할 수 있음에도 집사님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무언가를 내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가장 높은 확률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어떠한 속내도 털어놓지 않았다. 자의인 걸까 타의인 걸까. 꿈속 후보자님의 얼굴이 또다시 집사님과 겹쳐 보였다. 잠시 이런저런 고민으로 가만히 있을 때, 짝. 집사님의 작은 박수 소리가 서재 안에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오늘 수업은 끝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과를 준비해 드릴까요?”

“……응, 그렇게 해주세요.”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하곤 서재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공부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수업에 쓴 책은 다음에도 쓸 테니 책상에 모아두고, 필기한 노트를 정리하고……. 점점 깨끗해지는 서재와 반대로 내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후.”

깔끔해진 서재를 뒤로하고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어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집사님은 무엇일까. 집사님을 꿈속의 울리세 후보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단 시간대가 맞지 않다. 후보자님은 집사님과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꿈속의 브렌다 또한 집사님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현실은? 브렌다 공녀는 어렸다. 게다가 집사님과 울리세의 공존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동일 인물이 현실에 나이가 맞지 않은 상태로 공존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고 납득할 수 없었다.

“후우우…….”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사실에 골이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다. 책 냄새를 맡으니 더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서재 밖으로 나섰다. 집사님이 다과를 식당에 준비해 놓았을 거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쪼르륵. 집사님이 홍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공부한 나보다 가르쳐 준 집사님이 더 고생했을 텐데 그는 언제나 나에게 이러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향긋한 홍차 향을 맡으며 집사님에게 대답했다.

“집사님이야말로 고생하셨어요.”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시간을 공유했다. 그가 만들어준 다과를 즐기자 소용돌이치던 머릿속이 차분히 진정되었다. 오늘도 정말 맛있는 다과였다.

“집사님은 마법 공부가 쉬우셨어요?”

“……그렇게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오오, 역시.”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을 표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게 있을까? 못하는 것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잠시 짧은 잡담을 나누었다. 짧았던 이유는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작업실로 가 종이를 꺼냈다.

“흠 정말 질이 좋네.”

정말이지 이 세계에 와서 행복한 점 하나는 질 좋은 종이를 마구 쓸 수 있다는 거다. 종이란 게 생각보다 재료비에서 많이 차지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한 장에 몇백 원부터 몇천 원까지. 가장 싼 종이를 산다 해도 결국 대량으로 소비하다 보면 그 값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비싼 종이를 마음껏! 낙서용으로도 소비할 수 있다! 이렇게 좋은 것에만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어찌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원래 좋은 것에 익숙해지면 질이 나쁜 것을 못 쓰게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일단은 지금을 즐기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무엇을 그리실 생각입니까?”

“깜짝이야!”

집사님이 또 소리 없이 뒤로 다가왔다. 벌써 정리를 끝내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책상에는 준비를 끝낸 종이와 화구들이 놓여 있었다.

“글쎄요. 사람을 그릴까 하긴 하는데…….”

“그럼 저번의 약속을 지켜주시지요.”

“약속?”

내가 집사님과 무슨 약속을 했었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집사님을 바라보자 그는 매우 서러운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다. 시무룩하게 내려간 팔자 모양의 눈썹과 눈물을 머금어 빛나는 눈은 내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끼게 했다.

대체 내가 무슨 약속을 잊었는 거지? 내가 또 어떠한 실수를 했는가!

“너무하시군요…….”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집사님의 눈은 더 처량해졌고 난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모델 말입니다. 절 그려주시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아…….”

내가 그걸 약속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기억을 뒤져보니 그랬다. 하지만 고작 그거 가지고 저렇게 세상 무너질 듯 서운해하다니. 잠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까먹은 내 잘못이 맞았다. 이제는 거의 울 것 같은 집사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지, 지금부터 그려요.”

집사님이 원했던 건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집사님은 아까까지 서러워하던 기색을 싹 감추고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거의 도깨비에 가까운 둔갑이었다. 구미호도 집사님에게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할 거다. 그 모습에 나는 더 얼이 빠졌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어떻게 있으면 좋을까요?”

“아……. 그냥 저기에 앉아주세요.”

멍한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집사님은 채광 좋은 자리에 의자를 가져와 편하게 앉은 후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천사와도 같았다. 그 덕분에 속으로 생각하던 불평불만 또한 수그러들었다. 미의 신 같은 존재가 모델을 서준다는데 굽실거려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힘들면 얘기해 주세요. 쉬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연필을 집어 들었다. 밑그림을 먼저 올릴 생각이었다. 삭삭, 연필이 종이에 그어지는 소리가 작업실을 메웠다. 하지만 나는 곧 크나큰 난관에 봉착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렀다.

“…….”

집사님의 얼굴은 정말로 잘생겼다. 내가 기억하는 티브이 속의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아름다운 그 얼굴은 언제나 나를 홀렸다. 하지만 그 외모를 그릴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힘내서 그리고는 있지만…… 종이 속의 집사님은 감자 같았다. 찌그러진 감자. 혼신의 힘을 끌어내어 그린 그림은 집사님의 미모를 1%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죄악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손이 멈춰 계시는군요. 잠시 쉴까요?”

내가 집사님에게 해야 할 말을 집사님이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긁었다. 집사님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달걀귀신처럼 비어 있는 밑그림 얼굴을 보곤 턱을 매만졌다.

“제가 그리기 어려우신가요?”

“네……. 원래 잘생긴 사람 그리는 게 가장 힘들어요…….”

변명처럼 대답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진실이었다. 가끔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도 사진으로 못 담아내지 않는가. 기계조차 담아내지 못하는 외모를 어떻게 사람이 표현하겠는가. 내가 좀 더 잘 그렸으면 이야기가 달랐을까 싶지만 아마 미남 미녀를 그리기 힘들어하는 건 다 똑같을 것이다.

“……흠. 그럼.”

집사님은 턱을 매만지던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곤 슬그머니 자신의 얼굴로 내 손을 이끌었다.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흰 피부가 감기듯 손에 달라붙었다. 당황해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보통 그리기 힘들면 만지곤 하던데……. 만져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아니, 아니! 괜찮아요!”

“저런. 사양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그의 눈이 은은하게 타오르며 나를 꿰뚫었다. 나는 메두사의 눈빛을 받아 굳은 전사들처럼 석상처럼 굳어 가만히 집사님을 보았다. 그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놓지 않았을뿐더러 나아가 자신의 얼굴을 만질 수 있게끔 손을 움직였다.

“어떻습니까. 만지니까 조금 더 그리기 쉬우시지 않습니까?”

“…….”

어떻게든 그의 눈빛을 피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집사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 만지고 싶었다. 곳곳을 매만지고 구조를 이해하고 싶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욕망인지, 아니면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손을 집사님에게 맡기고 곁눈으로 흘금거렸다.

스스로가 불에 뛰어드는 나방같이 느껴졌다. 그때, 손이 물컹거리는 것에 닿았다.

“아……!”

“입술이 마음에 드십니까?”

놀라 소리를 내자 집사님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보란 듯이 내 손을 입술로 이끌었다. 그러자 꿈속에서의 후보자님이 떠올랐다. 모르는 남자와 입을 맞추던 그 모습이.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떨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요셉 님?”

“아, 그…… 이제 괜찮아요. 나머지는 다음에 그려요.”

“……요셉 님.”

집사님이 무섭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러난 만큼 성큼 다가왔다. 주춤, 한 발자국 멀어지니 그는 두 발자국 걸어왔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여서 뒤로 더 물러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등에 벽이 닿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양팔로 나를 움직일 수 없게 가두었다.

“왜, 왜 그러세요.”

“저야말로 물어보고 싶군요. 왜 그러시는 겁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를 내리찍는 위압감은 없음에도 오싹했다. 이상한 긴장감이 나와 그 사이에 진득이 감돌았다.

“그게…….”

이 공간을, 이 순간을 빠져나가고 싶어도 집사님이 양팔로 단단히 벽을 짚고 있었기에 나갈 틈이 없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자 집사님이 왼손으로 내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집사님의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왜 피하시는 겁니까?”

“……으……. 그게…….”

우물쭈물 말꼬리를 흐렸다. 날 놔주길 바랐으나 집사님의 손은 굳건했다. 결국 나는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깜, 깜짝 놀라서요. 그것뿐이에요.”

“거짓말.”

내 턱을 잡은 손에 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아프진 않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미약하게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당신의 거짓말은 모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주시죠. 왜 피하십니까.”

그의 상태를 보니 정말로 진실을 말하기 전까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거짓말도 바로 눈치챘다. 내가 그의 표정을 알아채듯 그 또한 내 표정을 잘 파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결국 나는 더듬거리며 진실을 말했다. 수치스러운 이유를 말하려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꿈, 에서.”

“꿈?”

“네. 꿈에서…… 집사님이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왔어요.”

“저와, 똑같은?”

일순간 집사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매우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내 말에 어처구니없어할 줄 알았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예상 밖이었다.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뭘…… 했습니까.”

“……다, 다른 사람하고 키스했어요. 그래서 그냥 그 장면이 생각나서 그런 거예요.”

집사님의 얼굴이 다시 한번 창백해졌다.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무언가 충격적인 것을 마주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작은 미소가 떠오르며 사라졌다.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게 신경 쓰이셨습니까? 다른 사람과의 입맞춤이?”

“아니. 그게 왜 그런 말이 되는 거예요!”

“그야 요셉 님의 말이 그런 뜻이니까요.”

아까의 창백해진 얼굴은 어디 갔는지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순식간에 행동을 뒤바꾸니 익숙해질 틈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내 턱을 아직 놓아주지도 않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의 눈길을 오롯이 받아냈다.

“입을 맞춰 드릴까요.”

“네?! 아뇨, 아뇨, 아뇨! 왜 또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예요?!”

집사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왜 갑자기 이런 미친 성희롱남이 된 거야?! 이 정도면 거의 천지가 개벽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달라졌다. 도망가고 싶어도 집사님의 손길은 날 놔주지 않았고, 물러나고 싶어도 뒤에는 벽이 있을 뿐이었다.

“사양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나를 유혹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곱게 휘며 나를 바라보는 그는 열망으로 타올랐다. 사르르 녹을 듯한 그 눈짓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다 안다는 듯 그는 더 짙게 웃었다.

“저를 그리기 위해선 구석구석 잘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이유라고…….”

그는 턱을 잡은 손을 슬그머니 내려 내 목덜미를 살며시 쥐었다. 벽을 짚고 있던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종이 한 장 지나갈 공간마저도 사라진 채였다. 거부해야 하는 나는 집사님의 힘과 얼굴에 말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 그런 이유지요.”

그는 나를 낱낱이 파헤치려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숨을 멈췄지만 이미 의미가 없었다.

그가 내 아랫입술을 조심스럽게 빨곤 혀로 느릿하게 핥았다. 입을 열기 바라는 듯 소심한 행동이었다. 목덜미와 허리를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에 비하면 자신감 없는 태도였다.

그런 와중에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나 또한 시선을 피해 눈을 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에 나는 결국 굴복하고 눈을 슬며시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가 두꺼운 혀를 미끄러뜨리듯 집어넣었다. 소심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나운 무뢰한처럼 입속을 사납게 헤집었다.

“흐, 후으. 읍.”

그가 내 허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입천장을 혀로 훑었다. 여리고 민감한 부분들을 자극하자 꾹 감은 눈앞이 쾌락으로 희게 질렸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환락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저 느낄 뿐이었다.

한참을 희롱에 시달렸다. 그가 나를 놓았을 때는 그저 입맞춤에 진이 빠져 녹초가 된 후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헉헉거리며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한 나를 집사님이 팔로 지탱해 주었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의 행태였다.

억울해 그를 째려보자 집사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그 미소는 희열에 차 있었다.

“이제 절 조금 더 잘 아시게 된 것 같습니까?”

“흐……. 으…… 집사님, 제정신이세요?”

“물론.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입니다.”

나로선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낯선 모습이었으니까. 아니, 생각해 보면 최근 그의 행동은 퍽 살가웠다. 물론 평소에도 상냥했지만, 요즘은 더 엄청났다. 그 행동의 연장선인 걸까?

어떻게든 행위의 이유를 찾았지만 도통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그가 다시 한번 잡고 입을 맞췄다. 쪽. 처음과는 다른 짧은 입맞춤이었다.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떠셨습니까?”

“…….”

“만족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는 또다시 휘청이는 내 몸을 든든히 지탱했다. 목소리는 걱정스러움을 담은 듯했지만 깊은 만족감이 그 속내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영혼이 빨릴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집사님을 걷어찼다.

“윽.”

평소라면 피해 맞지도 않았을 어설픈 공격에 집사님은 그대로 얻어맞고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날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풀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뛰쳐나왔다.

문을 넘어 도망가기 전, 돌아보자 집사님은 아주 약간 엉거주춤하며 아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망설이면 그가 잡으러 올 것 같아 부리나케 뛰어 도망쳤다. 육식동물에게서 도망치는 초식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과 벌게진 얼굴을 가리며 나는 내 방으로 도망갔다.

방으로 돌아와 차가운 물을 몇 번이나 들이켜도 몸은 진정되지 않았다.

“으으.”

유혹하던 그 눈빛에 작살에 꿰인 듯 내 마음은 아직도 그의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웅크린 상태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진정하려는 노력 덕일까, 그 상태로 잠이 들고 말았다.

웅크려 잔 것이 문제였을까? 꿈속의 나는 어떠한 힘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가위에 가까운 꿈이었다.

어둑해지는 저녁, 겨우 일어나 보니 나는 곱게 이불에 눕혀져 있었다. 웅크리고 있는 나를 침대에 옮겨 꼼꼼하게 이불까지 덮어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꿈으로 도피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집사님 생각에 볼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 * *

요전번의 일 때문에 집사님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바로 다음 날. 우리는 단둘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일상이었다.

“울리세, 잘 다녀와.”

“응. 다녀올게.”

예법 학원 첫 등원. 그런 기념비적인 날에 울리세를 마중 나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학원으로 갔다. 그 마차를 움직이는 것은 집사님이었다. 마차는 아무런 문제 없이 안정감 있게 우리를 학원 앞에 데려다주었다.

울리세는 나를 한번 꼭 안아주고 학원 안으로 쓱 들어갔다.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 나는 어느새 곁으로 온 집사님에게서 어색하게 멀찍이 떨어지며 손을 내렸다.

“날씨가 좋군요.”

집사님은 그런 내게 서슴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벌린 거리가 우스울 정도였다. 한 발자국 멀어지면 세 발자국은 다가와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대답했다.

“그러네요.”

“그럼 잠시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떠신지요.”

“산책?”

잠시 솔깃했다. 하늘은 맑고 높았고 봄이 다 되어 날씨 또한 조금 쌀쌀했지만 시원하니 딱 좋았다. 아무리 집에만 머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어쩌다가 한 번쯤은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가는 길에 맛있는 제과점도 있으니 들르는 건 어떻습니까.”

“……집사님이 한 게 더 맛있을 것 같은데요.”

집사님이 단것으로 아이를 꾀듯 이야기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집사님의 음식에 깊이 매료된 후였다.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고 해도 집사님의 솜씨만큼 맛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 퉁명스러운 말에 집사님은 살짝 웃은 뒤 말했다.

“제가 먹어봤는데 괜찮더군요. 그럼 가시죠.”

“엇, 아.”

집사님은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에스코트했다. 놀라서 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아프지는 않게, 하지만 빠져나갈 순 없을 정도의 힘으로 꾹 잡았다. 사실 정말로 싫었다면 그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거나 소리 지를 수 있었다. 그 손을 놓지 않는 것은 결국 내 의지였다.

“진작 밖으로 나올 것을 그랬습니다.”

“……그러네요.”

우리는 한동안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했다.

가지런히 정리된 길을 걸어가니 머릿속도 함께 상쾌해지는 듯했다. 손에 들어간 힘은 내가 거부하지 않자 슬며시 사그라들었지만 끝내 놓지는 않았다. 집사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 순간을 오래 즐기고 싶다는 듯이.

하지만 모든 것에 끝이 있듯, 산책의 끝도 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목적했던 제과점에 도착했다. 사랑스러운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꾸며진 외관은 어쩐지 이 도시에서 유독 튀는 느낌이었다. 21세기의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인테리어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이 빼곡히 가게 안에 들어차 있었다.

“진짜 인기 많나 보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요.”

집사님은 어쩐지 난감해 보였다. 그가 원래 생각했던 계획은 이것이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도 저 손님들을 치울 수는 없을 거다. 나는 웃으며 해결법을 말했다.

“포장해 갈까요? 집에서 먹으면 되죠.”

“……그렇게 해야겠군요.”

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가게 안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모두 예의를 지켜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제는 먼저 가라는 말을 안 하네요?”

“……요셉 님이 알려주셨잖습니까.”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띤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에게 살아가는 재미를 알려준 기분이 들어서였다.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려줬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기뻤다.

“헤헤.”

가만히 웃자 집사님이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세심하게 어루만졌다. 그 어루만짐이 가면 갈수록 은밀해졌다. 손길이 점점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을 쓸어내리고 마디마디를 건드렸다. 그 행동이 길어질수록 내 얼굴은 달아올랐다.

“집,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요셉 님?”

부끄러움에 볼을 붉혀도 집사님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만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남들이 본다면 멀쩡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달아올라 있으니 정말 이상한 광경일 것이 틀림없었다.

집사님의 손길을 버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 직전, 줄이 줄어들어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그는 아쉬워하며 손장난을 멈췄다.

“자허토르테 하나.”

집사님은 태연하게 케이크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주문을 듣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종업원이 꺼내 든 케이크는 과연 먹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크기였다. 그는 손장난은 멈췄지만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집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으면서도 그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마부석에 앉았다. 한 손으로 마차를 모는 모습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집으로 되돌아온 우리는 간단한 다과 시간을 즐겼다. 집사님의 말대로 케이크는 맛있었다. 물론 집사님이 직접 만든 케이크보단 덜했지만 말이다. 나중에 울리세가 집에 오면 꼭 먹여야겠다.

그가 잘라 온 조각 케이크를 평화롭게 반쯤 먹었을 때, 집사님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셉 님.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어떤 거요?”

“요셉 님도 예법을 배우시는 건 어떻습니까?”

갑자기?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울리세도 배우는 것이고 저번 공작과의 만남과 연말 연회 등의 일을 떠올리면 예법을 배워야 하는 건 거의 필수였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자 집사님이 이야기를 이었다.

“요셉 님은 기사 작위를 가지고 계시지요.”

“어…… 일단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셉 님에게서는 작위를 가진 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기품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직접 딴 건 아니니까. 어쩐지 불법으로 작위를 취득한 사람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앞일을 위해서라도,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배우고 싶지 않다. 예법이란 것은 매우 골치 아프니까. 그걸 바로 최근에 경험했으니 더욱 꺼려졌다. 고민하자 집사님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요셉 님과 도련님은 이미 공작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 전에는 주목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다릅니다.”

“…….”

“다른 자들은 그 공작이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요셉 님에게 관심을 가지겠지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머릿속으로 다른 귀족들과의 만남을 상상해 보았다. 최근에 겪은 일 덕분에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귀족들과 허술하게 어버버 하는 나. 그야말로 희극이 따로 없었다. 연극이었다면 난 개그를 노린 광대 같은 역할 아니었을까.

“도련님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요셉 님, 당신이 제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건 도련님의 흠이 됩니다.”

“……어쩔 수 없네요.”

내가 남도 아닌 울리세의 약점이 될 수는 없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예법 수업을 들을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집사님은 어쩐지 밝아진 얼굴로 믿음직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능력 있는 집사입니다. 이렇게 된 것, 지금부터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지금요? 맛있는 다과를 즐기던 평화로운 시간이 갑자기 공부 시간이 되었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집사님을 바라보자 그는 아까와 같은 평화로운 모습이 아닌, 공부를 가르칠 때의 단호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 칼 같은 변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를 마실 때 팔꿈치가 테이블에 닿으면 안 됩니다.”

집사님은 아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내 몸을 교정했다.

처음에 편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음식을 즐기던 모습은 사라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뻣뻣하게 교정한 내가 남았다. 거의 고문이었다. 잔을 잡는 데에도 법칙이 있었다. 손잡이를 엄지와 검지로만 잡는 게 보통이라니 미쳐 버릴 정도였다.

왜 이렇게 세세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많은 걸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막말로 이걸 전부 지킨다고 해도 차 맛이 좋아지지는 않으니까.

결국 내가 힘들어하자 간략한 예법 수업과 동시에 다과 시간도 끝났다. 다 해치우니 거의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기분이었다. 울리세는 이런 것을 학원에서 배우고 오는 걸까. 정말이지 고생이 많을 것 같다.

“첫날이니 이 정도만 하지요. 마법 공부는 조금 쉬고 나서 하겠습니다.”

“아아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허물어지듯 테이블에 엎어졌다. 왠지 졸업한 지 오래인 학교를 다시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대학교가 아닌 고등학교를 말이다.

갑자기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다른 세계에 간 사람들은 뭐 특출한 힘이나 능력 등이 있는데 난 대체 뭐지?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난 돈도 많았고 작위까지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과했다.

눈물을 훌쩍이며 한참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자 집사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손길을 받자니 이렇게 수업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님의 이런 다정한 행동은 마치 마약 같았다. 그의 냉정하고 무서운 모습을 알고 있음에도 다정한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빠졌다. 나를 향한 자조적인 웃음을 몇 번이고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 * *

하루 일과가 끝나 목욕을 즐긴 후 방에 들어서자 집사님이 내 잠자리를 봐주고 있었다. 그는 이제 내 생활의 대부분을 관리했다. 자기 전 방의 온도부터 침구, 일어나서 탈의까지. 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오늘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수치는 처음뿐. 익숙해진 지금은 우습게도 편안할 뿐이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엎드려 주시겠습니까?”

집사님의 손길에 이끌려 침대에 눕자 그가 내 허리 위에 올라탔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내 어깨와 등을 시원하게 눌렀다. 그제야 그가 하는 것이 마사지라는 것을 알고 몸에 힘을 풀었다.

“으, 으윽, 아. 아, 아파요!”

“몸이 많이 뭉치셨군요.”

그는 무자비하게 몸을 꾹꾹 눌러댔다. 시원한 것과 동시에 고통이 함께 밀려들어 소리 질렀지만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자세가 안 좋으셔서 그렇습니다. 그림 그리시는 자세도 굉장히 어깨에 안 좋은 자세더군요.”

“아으으윽…… 아, 읏! 그건, 아, 버르으읏!”

한참 몸을 주물럭거리던 손을 받아내고 나니 다시 한번 녹초가 되었다. 가만히 누워 헐떡이자 집사님이 컵에 물을 쪼르륵 따라서 건네주었다. 잔을 받아 꿀꺽꿀꺽 마시자 좀 살 것 같았다.

“앞으로 스트레칭을 자주 하셔야겠습니다, 요셉 님.”

“으……. 하지만 까먹는걸요.”

“그럼 제 안마를 주기적으로 받으셔야겠군요.”

스트레칭은 귀찮지만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또 받는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나는 앞으로 자주 스트레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잘 알았다. 분명 까먹고 안 하다 이 안마를 받게 될 것이란 것을. 미래를 본 것처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요셉 님, 식사 예절을 배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 왜요?”

“생각보다 기본이 있으셔서 말입니다.”

내가? 배운 적도 없는데……? 나는 예법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대부분 서민이 그렇듯 말이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자 집사님이 말을 이었다.

“흘리시지도 않고, 소리 내서 드시지도 않고, 식기를 너무 짧게 사용하지도 않으시지요.”

“그런 건 누나가 가르쳐 줬어요.”

나의 생활을 담당했던 누나는 내 식사 예절을 꽤 신경 썼었다.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면 남들이 흉을 본다면서.

생각해 보면 또래들의 식기 사용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엑스 자로 교차해서 사용하는 아이들부터 젓가락을 포크 쓰듯이 찍어 쓰는 아이들. 다들 학원을 다니느라 보호자와 식사할 시간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자유분방해진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아이가 그랬으니 내가 아무렇게나 식사한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텐데. 누나는 굉장히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제가 다른 애들도 다 엉망으로 쓰는데 왜 내가 이런 걸 배워야 하냐고 화를 낸 적도 있어요. 그래도 누나는 계속 가르쳐 주더라고요.”

덕분에 내 젓가락질은 올곧았다. 그것으로 이득을 본 적이 없어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집사님의 반응을 보니 누나가 가르쳐 준 것이 헛된 것은 아닌 듯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가족분들이 좋은 분들 같군요. 보고 싶진 않으십니까?”

집사님은 물을 다 마신 빈 잔을 가져가며 흘리듯 물었다.

가족, 보고 싶었다. 누나와 형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 세계에 있는 것이 괴로울 뿐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눌렀다.

“보고 싶죠! ……보고야 싶지만…….”

집사님은 복잡한 표정을 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그 얼굴에선 감정 하나 느낄 수 없었다. 최근 집사님은 다채로운 표정과 감정을 드러냈기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나는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만나고 싶어도 지금은 만나지 못하니까…… 하하.”

이상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집사님은 무표정한 얼굴을 바꾸지 않았고, 나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집사님이 어떠한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다.

잠시간의 침묵 후, 집사님이 슬며시 물었다.

“가실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는 반쯤 엎드린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조금 축축해진 뒷덜미를 아주 조심스럽게 쥐었다. 안마하던 사무적인 손길과는 다르게 달라붙는 듯한 손길이 어쩐지 오싹했다.

그 이유 모를 섬뜩함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입을 뻐끔거렸다. 목에 뭔가 걸린 듯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저 손을 움직여 목덜미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지치셨을 텐데 쉬시지요. 그럼.”

계속 침묵하자 그는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언제 나를 만졌냐는 것처럼 순식간에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갔음에도 엎드린 채로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의 손길이 아직까지도 내 목덜미에 남아 있는 듯했다. 집요했던 그 손길을 계속 되새기며 나는 밤을 지새웠다. 두려움인지 기대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뒤죽박죽된 채로.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느새 잠에 취해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뚜벅이는 걸음 소리와 함께 집사님이 방에 들어왔다. 그가 최근 방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건 일상이었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쪽. 가벼운 입맞춤이 볼에 닿았다. 비몽사몽 중이던 정신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내가 꿈을 꾸었나 싶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그는 내 당황스러움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나의 등을 받쳐주어 앉혔다. 나는 어벙한 얼굴로 그 손길을 받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맨 처음 시중을 받을 때는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는데 몇 주가 지난 지금은 완벽하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럼 어서 씻고 오시죠.”

“아, 그…… 네.”

아무래도 입맞춤은 꿈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비비며 욕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곁에 있던 집사님이 내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니, 집, 집사님?”

“자. 어서 씻고 나오세요.”

그는 내 허리를 약하게 툭 쳤다. 나는 멍하게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그 일련의 과정은 모두 기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머릿속이 뽀뽀로 인해 터질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집사님이 왜 저러지? 미쳤나? 요즘 나에게 왜 이러는 거지? 키스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가면 왜 이러냐고 물어봐야지. 꼭 물어봐야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나갔지만 막상 집사님을 앞에 두니 입을 꿰맨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날이 따뜻하니 조금 가볍게 입으셔도 괜찮으실 겁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산뜻한 크림색의 셔츠와 갈색의 바지였다. 나에게 정중하게 옷을 입혀준 그는 흰색의 카디건 같은 것을 마저 입혀주었다. 양털 같은 것으로 짜인 카디건은 마치 입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그럼 식사 시간에 뵙지요.”

그는 내 목덜미를 가볍게 쓸고 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그가 왜 저러는 걸까? 내게 이럴 필요가 있나? 나를 좋아하나? ……그럴 리가 없다. 집사님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나는 그가 처음에 보였던 적대감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결국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아침을 먹고 울리세를 학원으로 보내니 집사님과의 예법 수업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춤을 배울까 합니다.”

“갑자기 춤이요?”

아니, 어제까지 식사 예절을 배웠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춤을? 의아해 묻자 집사님은 진지하게 말했다.

“요셉 님은 운동이 필요합니다.”

“…….”

맞는 말이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뼈를 때리시면 어떻게 해요, 집사님.

“다시 한번 스텝을 밟아볼까요.”

“으……. 으으.”

집사님은 먼저 어떻게 하는지 시범을 보여줬다. 이곳의 사교댄스는 왈츠와 비슷한 형태인 것 같았다. 춤에 대해선 일자무식이지만, 왈츠가 대충 어떠한 모습인지는 알아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대충 알긴 했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거다. 오른발이 나가야 하는 곳에 왼발이 나가거나, 맞는 발이 나가긴 하지만 타이밍을 못 맞춘 다거나. 아주 개판이었다, 개판.

“……요셉 님은 정말…… 재능이 없으시군요.”

“…….”

애석하다는 집사님의 얼굴이 폐부를 아프게 찔러왔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정말 재능이 없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사격은 정말 잘했다. 하지만 춤이라든가 운동은 젬병이었다.

어릴 때 또래의 아이들은 태권도를 배웠다. 남녀 할 것 없이 태권도를 배웠는데, 나는 이틀도 못 가고 때려치웠다. 검도 또한 시도해 보았지만 무리였다. 계속 넘어지고 제대로 하지 못해 멍투성이가 되어서 형도 더 하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공만 있으면 축구를 하는 애들 사이에는 낄 수가 없었다. 너무 못해서 내가 속한 팀이 내리 지자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춤? 무리다. 단언컨대 무리다.

“안 배울 수는 없을까요…….”

“하지만 요셉 님, 아주 기본은 할 수 있으셔야 합니다.”

“으으…….”

집사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허리를 펴고 스텝을 차근차근 밟았다. 하지만 정말 슬프게도 노력과는 달리 제대로 된 스텝을 밟을 수는 없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꼬락서니가 별로란 걸. 이건 정말이지 재앙 같은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집사님은 내 지옥 같은 스텝을 한 시간 넘게 보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드디어 포기를 한 모양이다. 아무리 예법상 춤을 한 곡이라도 춰야 한다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춤을 춰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보단 나을 거다.

끝을 고하길 기다리며 눈을 반짝였지만, 집사님은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굳어 있지 않았다.

“앞으로 요셉 님은 저와만 추셔야겠습니다.”

“네?”

“제가 리드하겠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내 손을 이끌었다. 아니, 기초를 배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실전이라니요. 하지만 나를 이끄는 손은 단호했고, 나는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잡고 몸을 밀착했다.

원래 왈츠가 이렇게 몸을 밀착하는 춤이었던가? 티브이나 영상 사이트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게 왈츠의 다라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밀착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깊어지기도 전, 그가 나를 이리저리로 이끌었다.

“앗.”

“괜찮습니다.”

그의 알기 쉬운 리드에도 불구하고 집사님의 발을 몇 번이나 짓밟았다. 그의 발등이 걱정돼 더욱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는 리드를 멈추지 않았다. 분명 아팠을 텐데 유지하는 그린 듯한 미소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방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은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황홀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느새 나는 그 어떤 때보다 능숙하게 그의 손길에 이끌려 완벽한 춤을 추고 있었다.

“와!”

희열에 찬 탄성을 뱉으며 집사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의 상냥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방 안에 흐르는 음악 소리만이 끊기지 않고 퍼졌다.

“왜 그러십니까, 요셉 님?”

지금이었다. 지금까지 집사님이 왜 나에게 그렇게 행동했는지의 이유를 알기 위한 기회. 지금이 아니라면 어쩐지 다시 물어볼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아니,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집사님의 손을 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뱃속 깊은 곳에서 용기를 끌어와 집사님에게 물었다.

“집사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집사님은 그 전과 같이 성큼 다가오려고 했지만 내 진지한 목소리에 멈췄다. 우뚝 멈춘 그에겐 아까와 같은 다정한 표정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드러운 왈츠곡은 멈추지 않고 방 안에 계속 흘렀지만 우리 둘의 분위기는 경직된 채였다.

“집사님, 요즘 되게 이상한 거 아시죠.”

“……제가 말입니까?”

조금만 진정했다면 그의 말에 당혹감이 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극도의 긴장감에 빠져 있었기에 그것을 알아차릴 기력이 없었다.

“이상해요! 이상해요……. 집사님이, 너무.”

“너무?”

머릿속에 빙글빙글 집사님의 행동들이 휘몰아쳤다. 다정하고, 배려심 있고, 보살펴 주며…… 나에게 입을 맞췄던 그 모습을. 예전에도 집사님이 나를 유혹하는 듯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정말 너무 심했다!

나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큰 소리로 외쳤다.

“파렴치해요!”

“……파렴치?”

“네! 계속, 계속…… 저번에도 그렇고…….”

차마 그가 했던 짓을 말할 수가 없어 얼버무렸다. 이것이 내 최선이었다. 그는 내가 횡설수설하자 한참이나 빤히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리를 유지했던 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런 행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는 그 듬직한 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서 자신을 보게 했다. 그러곤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첫 키스 때의 조심스러움은 없었다. 거침없이 입술을 핥고 깨물어 입을 벌리게 했다. 벌린 틈 속으로 침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나를 농락했다.

능숙하게 내 혀를 희롱하는 그의 혀를 깨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행위가 좋았기에. 바로 방금 전 파렴치하다고 했던 것이 우습게도 나는 그 행동을 기껍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과거, 다시는 그를 향해 뛰지 않을 것 같았던 심장이 주책없이, 쉼 없이 뛰었다. 그가 나에게 강압적으로 대했기에 멈춘 설렘이었다. 참으로 자존심도 없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흐, 후우, 후우.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

사냥 같았던 키스가 끝나고 허물어지는 몸을 그가 지탱해 주었다. 내 허리를 잡은 그 팔을 꽉 쥐며 울먹이자 그가 나를 꾹 껴안았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진정으로, 모르시는 겁니까?”

“뭘, 뭘요?”

“하아…….”

그는 울음기가 가득한 내 목소리를 듣곤 나를 고쳐 안았다. 그러곤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긴 나를 달래듯 토닥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그 일정한 토닥임에 몸은 나를 배반하고 축 늘어졌다.

“요셉 님. 저는…….”

“……네.”

“저는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내가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집사님이 저 말을 하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나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네.”

“하하.”

허탈하다는 듯 나지막하게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울리니 기분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는 것이 아닌 설렘으로 인한 것이었다.

날 좋아한다고? 나를? 기쁨과 의문이 복잡하게 섞여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제가 왜 당신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겠습니까. 그런…… 그래, 파렴치한 짓을요.”

“저도, 그걸…… 몰라서…….”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을 앞에 두면 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손길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역겨운 희열이 뱃속에서 들끓었지요.”

“……어…….”

그는 나를 더욱 꽉 옭아매듯 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껴안긴 나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놔달라고 하기도 전에 집사님이 말했다.

“절,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애원에 가까운 속삭임에 몸이 굳었다. 그의 고백이 이어졌다.

“요셉 님이 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제 행동의 면죄부가 되어주었지요. 역겹지만, 그랬습니다.”

그제야 나는 집사님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기엔 요셉, 당신은…….”

“…….”

“제발…….”

그는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참지 못했다고. 그는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폭력적인 짓을 했는지는 제대로 모르는 듯했다. 나는 힘껏 그를 밀치고 그에게서 벗어났다.

“요셉 님.”

“저한테, 빨리 저한테 사과해요!”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해도 내가 그에게 그런 행동을 당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그 행동을 좋아했다 해도 그는 나에게 그러면 안 됐다.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한 것은 강제 추행이었다.

“제가 집사님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솔직히 집사님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고 배기겠어요! 하지만, 그렇지만…….”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내가 올려다보았던 터라 색다른 광경이었다.

“……요셉 님.”

억울했다. 그에게 가진 내 감정을 이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역겨움을 느꼈다곤 했지만, 그게 뭐? 어쩌라는 거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집사님한테 그런 행동을 당할 이유는 없어요! 빨리 사과해요!”

분을 못 이기고 바닥을 쾅 내려쳤다. 음악이 끝난 레코드판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집사님은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흐린 눈동자가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그는 죄책감과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로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요셉 님.”

“…….”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진솔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느끼고 싶은 걸까? 집사님의 사죄를 들으니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미약하게 떨고 있는 손은 희게 질려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내가 가까워진 것을 알고 흠칫 몸을 떨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집사님.”

나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을 잡았다. 그가 고개를 조심스럽게 올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에는 이루 말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용서해 줄게요.”

“…….”

“사실 좋긴 했거든요. 그러니까 용서해 줄게요. 집사님이니까.”

그가 기쁨과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꽃이 만개하는 듯한 싱그러움이 얼굴에 담겨 있었다. 화사한 그 얼굴에 홀려 작게 웃자 집사님은 내가 잡은 손을 꾹 맞잡고 말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저 같은, 사람이라도.”

평소의 멋있는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의기소침해 보였다. 어째서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자신감이 없는 그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제가 할 소리 아니에요?”

“어째서 그런 말을…….”

“집사님에 비하면 전 평범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칼같이 반박했으나 오히려 평소와 같은 모습이라 안심이 되었다. 아무 말 없이 웃자 그가 말을 이었다.

“요셉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네? 제가요?”

“네. 왜 모르시는 거죠? 저는 언제나 당신에게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반짝이는 눈은 나를 향한 애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그 빛은 선명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것이 바로 콩깍지구나.

“그거야 집사님만 그런 거 아닐까요.”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요셉 님을 좋아할 것 아닙니까?”

정말 콩깍지란 위대하구나. 나는 말을 말기로 했다. 이대로 있다간 내 칭찬에 부끄러워 몸져누울지도 몰랐다.

* * *

사람이 연애를 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더니. 그 말은 진실이었다. 본래도 따스했던 봄바람에서는 이제 달콤한 냄새까지 맡아졌다. 벅차오르는 행복과 기쁨, 애정에 표정이 제어되질 않았다.

“요셉.”

나를 부드럽게 껴안는 손길에 입꼬리가 더욱 주체할 수 없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우겨본다.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집사님.”

“산책하시던 중이셨습니까?”

울리세를 학원에 보내고 홀로 집에 남은 나는 집 주변을 산책 중이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금 미친 사람 같았을 거다. 아무도 없는데 홀로 히죽거리며 파닥거리고 있었으니까.

올가미에 얽혀 있는 것처럼 그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니 집사님의 향기가 몸에 배는 듯했다. 그에게선 플로랄 계열의 향기가 우디 향기와 섞여 났다. 함께 뒤섞여 달콤하면서도 건조한 향기가 그에게 놀라울 정도로 어울렸다.

“네. 울리세는 학원에 잘 갔나요?”

집사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내 몸에선 무슨 냄새가 날까? 향수를 뿌리지 않으니 평소의 냄새가 날 텐데. ……홀아비 냄새가 나면 어떻게 하지? 물론 집사님의 세탁으로 언제나 옷에선 깨끗한 향기가 났지만 모르는 일이다.

당황해 떨어져 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나를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조금만 더…….”

흐리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자니 몸에서 힘이 빠졌다. 집사님 손을 쥐고 더 편안하게 기대자 그의 손아귀에 힘이 세게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좋아 못 이긴 척 그대로 있었다. 만족한 건지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연인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은 그의 미소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거다. 미소 띤 그 얼굴은 정말이지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아침 이슬과 한곳에 어우러진 장미와도 같았다. 이것이 바로 복지지. 하…… 행복하다.

“날씨가 좋으니 조금 더 산책하는 건 어떠십니까?”

“좋아요.”

집사님은 날 꼭 안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것도 잠시,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그의 온기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집 주변을 천천히 거닐었다. 맨 처음 왔을 때 귀신의 집처럼 음침한 모습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울창한 나무는 정돈되었고, 길은 가지런하게 돌이 깔려 있어 걷기 편했다. 모두 집사님 덕이었다.

오밀조밀 걷기 좋게 깔린 길을 함께 걸어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맞잡은 손은 나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불현듯 불안감이 나의 폐부를 찔렀다.

그랬다. 나는 아직 집사님의 정체를 몰랐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연인이 되었다. 그는 나에게 예전과 같은 행동을 보이지 않고 다정하게 대해준다.

하지만 난 그의 이름조차 모른다. 지금껏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 인지하지 못했을 뿐. 게다가 꿈속에서 나왔던 그 후보자님과 집사님의 연관성조차 찾지 못한 채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지금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요셉,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겁니까?”

“아, 그냥 집사님의 이름이 궁금해서요.”

집사님은 다정한 미소를 계속해서 띠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을 뿐이었다. 그 손길에 술렁이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었다.

“……저는.”

한참을 말없이 있던 집사님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들썩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분명 입이 벙긋거린 것 같은데 말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집사님은 그저 숨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무슨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집사님, 저 배고파요.”

“다과를 준비할까요.”

“네. 우리 먹으면서 공부해요.”

집사님은 내 티 나는 말 돌림을 받아들였다. 행복과 기쁨으로 시작된 산책은 마음 한편이 불편한 채로 끝나 버렸다.

집사님이 준비해 온 다과는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아 그 찝찝함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달콤함은 씁쓸함과 대조되어 더욱 내 마음을 쿡쿡 찔렀다.

* * *

“오늘 예법 학원에서 칭찬…… 받았어.”

“그랬어?”

“응. 바로 중급반으로, 올라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울리세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자랑했다. 아이의 볼은 기쁨과 수줍음으로 발그레했는데 싱그러운 장미 같아 정말 사랑스러웠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를 꼭 껴안았다. 밥이고 뭐고 껴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 울리세, 예법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데……. 진작 보내줄 걸 그랬어.”

한참을 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곤 떨어져 나왔다. 울리세는 밥을 먹은 것도 아닌데 배불렀을 때처럼 뿌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포동포동한 아기 새 같은 모습에 나 또한 행복해졌다.

“식겠습니다.”

한 번 더 끌어안아 주려 할 때, 뒤에서 집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 좋은 말에 자리에 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쉬워하며 착석하자 식사가 재개되었다. 그러는 와중, 근래 울리세와 자주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요즈음 나도 일이 많아 이것저것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속으로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을 질책하며 울리세에게 물었다.

“그럼 울리세, 축하 기념으로 이번 주에 놀러 갈까? 멀리는 못 가지만 시내에 놀 곳 있을 테니까.”

“……음.”

평소라면 바로 좋다고 했을 아이가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낯설어 잠시 바라보자 울리세는 꾸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죄책감과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그런 아이의 표정은 참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아이의 외모가 집사님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리라.

“나, 약속 있어.”

“약속?”

울리세가 주말에 약속을 잡았다고? 누구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이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브렌다랑.”

브렌다 공녀와? 둘이 친해져 주말에 따로 만나기까지 한다니 정말 기쁜 일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관계가 진척돼 약속까지 잡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한편으로 모순적이게도 조금 쓸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고 놀기로 했어?”

“집에…… 놀러 오래.”

“잘됐네. 울리세, 브렌다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울리세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이렇게 된 것, 둘이 절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의 실력 향상을 위한 자극 또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남녀 사이의 친구 같은 건 허상 같은 거라고 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나중에 집에도 꼭 데려와.”

“……응.”

아이는 여러 가지로 기쁜지 발갛게 얼굴을 붉히고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학원에서의 즐거운 이야기. 브렌다와의 이야기. 다른 친구들과의 이야기. 선생님의 칭찬 등등. 나는 즐겁게 맞장구쳐 주었지만 계속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묘하게 추워 중간중간 팔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식사가 끝난 후, 내 방으로 돌아와 잠시 쉴 겸 목욕을 하기로 결정했다.

옷을 훌렁훌렁 벗고 뜨끈한 물을 가득 받은 욕조에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 탄성이 나왔다. 하지만 곧 조금씩 발끝부터 잠식해 오는 우울함에 다리를 모아 고개를 숙였다. 한숨이 작게 나왔다.

“왜 이러지…….”

울리세가 친구가 생겨 놀러 가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아이에게 사회성이 점점 생기고 있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어쩐지 품 안에 있던 아이가 훌쩍 자라 떠난 것 같았다. 고작 주말 약속일 뿐인데 말이다.

“후우…….”

내가 친구와 약속을 잡고 놀러 갈 때 형과 누나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아니면 후련함을 느꼈을까? 어쨌든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요셉, 들어가겠습니다.”

“으아악! 저 목욕 중인데요!”

내 비명에도 집사님은 성큼성큼 들어왔다. 조끼와 재킷을 벗은 그는 와이셔츠를 팔까지 접어 올리고 있었고 장갑 또한 벗은 채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난 그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저, 저 혼자 할 수 있는데요.”

“압니다.”

그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내 곁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예전과는 달리 뻔뻔하게 굴기로 한 모양이다. 연인 사이니 함께 목욕한다거나 그, 그런 것들은 괜찮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사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당황스러워 몸을 웅크리고 욕조의 선단을 향해 엉덩이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내 그런 모습을 보고 실소한 뒤 욕조에 무언가를 부었다. 그러자 향긋한 프리지어 향기가 물씬 올라왔다. 입욕제 향기인가 보다.

“향은 괜찮으십니까?”

“……네.”

고개를 숙이고 소심하게 대답하자 그의 손이 물을 가볍게 헤집었다. 미지근했던 모양인지 그가 뜨거운 물을 조금 더 틀었다. 물이 조금 더 뜨끈해지고 나서야 나는 물이 좀 미지근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뜨겁지는 않으시지요?”

“네…….”

사실 내 알몸은 집사님이 수두룩하게 보아 부끄러워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거야 연인이 되기 전이고 병간호 때문에 보였던 거다. 의료 관계자에게 보이는 것과 연인에게 보이는 것은 천지 차이다.

“손을.”

그는 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눈치 보며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자 그가 작게 웃으며 손을 맞잡곤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흐늘거리며 내 몸 위로 겹쳤다.

“손톱이 거치시군요.”

나도 모르게 잠시 몸을 움찔거리며 떨었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들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되는 몸.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몸. 수면이 필요하지 않은 몸.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 몸은 성장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자라지도 않았고 손톱이 길어지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히 내 걱정과 다르게 집사님은 별말 없이 손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톱 정리는 나에게 머나먼 일이었다. 손톱을 깎는 정도가 내가 하는 전부였다. 게다가 유화나 수채화를 하다 보면 손톱 밑에 물감이 들어가는 일이 꽤 흔했다. 무언가 해봤자 금방 지저분해지니 할 필요를 못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경험해 보니 꽤 기분이 좋았다. 그는 깔끔하게 다듬은 내 손을 주물럭거리며 마사지까지 해주었다.

향긋한 입욕제의 향기와 집사님의 다정한 손길. 처음에야 긴장되었지만 점점 느슨해졌다. 경직되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리고 기분도 많이 나아졌다. 그도 그럴 듯 몸이 따뜻해 이완되고 좋아하는 사람이 손톱까지 다듬어주는데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기분은 나아지셨습니까?”

집사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올리자 낮게 웃으며 내 손을 잡은 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집사님은 내가 우울해하는 것을 눈치채고 이렇게 시중이라는 구실로 욕실에 들어온 듯했다. 거친 손과 다르게 그는 너무나 다정했다.

“알고 있었어요?”

“물론이지요. 제가 모르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내 손을 토닥이고 물에 온수를 더했다. 손톱을 손질하는 사이 물이 조금 식었기 때문이다. 흘러넘칠 듯 찰랑이는 물에 몸을 조금 더 편하게 누였다. 집사님이 내게 허튼짓을 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나에게 손댈 마음이 있다면 뭔 짓을 해도 난 막을 수 없으리라. 그는 나보다 힘이 한참이나 셌다. 노력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괜히 긴장해 몸을 딱딱하게 굳힐 바엔 조금 더 편하게 있는 게 이득이었다. 그가 나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냥……. 갑자기 마음이 허하더라고요.”

“…….”

“울리세에게 친구가 생기는 것을 그렇게 바랐으면서. 저 좀 웃기지 않아요?”

헛웃음을 치며 털어놓았다. 집사님은 그새 자리를 바꿔 내 머리맡에 있었다. 그가 구석에서 꺼내 든 조그마한 바가지로 내 머리카락을 적셨다.

“눈을 감으세요.”

“괜찮은데…….”

나는 말로만 괜찮다고 하며 눈을 순순히 감았다. 집사님의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전문적이기까지 했다. 미용실에서 몇 번이나 느꼈던 능숙한 손길과 닮아 있었다. 샴푸에서 나는 향기로운 장미 냄새를 맡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최근 울리세에게 신경을 못 쓴 게 너무 미안해요. 그 와중에 친구와 친해져서 놀러 간다니 정말 기쁘긴 한데…….”

다시 말하니 마음이 쓸쓸해졌다. 내가 그 아이에게 뭘 해준 게 있다고 이렇게 외로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많은 것을 해주어야 하는데. 조금 더 보호자 노릇을 잘해줘야 하는데.

슬프게도 처음 해보는 역할이라 부족한 점이 많았다. 되돌아보면 잘하겠다고 한 행동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결과를 부른 적도 많았다. 미숙했던 과거의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올 정도였다.

“요셉, 많이 외로우신가 보군요.”

“……그냥 좀 그래요.”

그는 내 두통을 알았는지 두피를 살살 주물렀다. 그 손길이 시원해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그는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처럼 마사지를 잘했다.

“으……. 집사님?”

“아, 목을 뒤로 젖혀주시지요.”

집사님의 손길이 잠시 멈춰 의아하게 부르자 그는 내 몸을 부드럽게 뒤로 기대게끔 했다. 머리를 헹구려는 것 같아 고개까지 욕조의 밖으로 젖히자 기다렸다는 듯 느리게 머리카락에 물이 부어졌다. 다 헹궜음에도 그는 한참 동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빗겨주었다.

“눈 떠도 괜찮아요?”

“…….”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까의 담백한 손길과는 분명히 다른 의도를 담고 있었기에 눈을 뜨기가 도리어 어려워졌다. 그는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집사님은 어느새 내 옆에 바짝 붙은 채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있어도 외로우신가요?”

“……아, 아니요.”

홧홧해지는 얼굴에 팩하고 고개를 돌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장소 탓에 더 크게 울리는 목소리가 송곳처럼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가 다시 한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열로 들끓는 그의 푸른 눈과 직면하고 말았다. 호랑이 앞의 쥐새끼처럼 바짝 얼어버린 몸은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겁을 먹으신 겁니까.”

그가 눈을 초승달처럼 곱게 휘곤 내 볼을 다른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오싹거림이 그 손길을 뱀처럼 타고 올랐다. 공포와는 다른 기대감에 의한 반응이었다. 발이 천천히 곱아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내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밖에서 기다릴 테니 몸을 마저 닦고 나오세요.”

“……어?”

멍청하게 바라보자 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몸도 씻겨 드릴까요? 저는 좋습니다만.”

“아뇨! 아뇨! 괜찮아요!”

“하하.”

그는 유쾌한 웃음을 흘리고 욕실을 나섰다. 나는 온몸이 빨갛게 익은 채로 홀로 남아 숨을 돌렸다. 멍하니 손으로 한참이나 볼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정신이 들어 후다닥 몸을 씻었다.

밖으로 나가니 집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젖은 머리카락을 성심성의껏 말려주었다. 욕실에서의 긴장감이 무색하게도 담백함뿐이었다.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이 부끄러워 나는 그날 밤 이불을 몇 번이나 차올렸다.

* * *

쓸쓸함을 느낄 틈도 없이 시간은 바쁘게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적적함을 느낄 것 같으면 집사님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달래주었다. 그는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그렇게 봄이 천천히 지나갔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모르고스는 리드하는 쪽과 리드받는 쪽을 계급으로 정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법 수업이 이어졌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 곡만큼은 완벽하게 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집사님의 주장이었다. 덕분에 나는 팔자에 없는 춤 연습을 정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성별은 상관없어요?”

내가 살았던 현실은 대체로 춤출 때 역할을 성별로 정했기에 모르고스의 법은 조금 생소했다.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이 나라의 태양은 성별을 무관하고 올라설 수 있습니다. 고작 여성, 남성이라는 이유로 낮은 계급에 리드받는 입장이 된다면 치욕스럽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다. 정말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 나라는 현실보다 평등한 감이 있었다. 신분제가 선명하게 있는 세계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조금 우습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십니다.”

“뭐가요?”

“요셉의 작위는 기사지요. 가장 낮은 계급이니 리드할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뭔가 기분은 이상했지만 요는 춤을 두 번 배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겠지. 천만다행이었다. 지금도 가장 기본인 춤을 외우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으니까. 리드하는 쪽과 받는 쪽 둘 다 배우면 나는 그 어떠한 포지션도 제대로 추지 못하게 될 것이 확실했다.

몇 번이나 스텝을 반복해서 추느라 기진맥진이 되어버리자 집사님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요셉처럼 못 추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저 놀려요?”

눈을 세모꼴로 떠 노려보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수업의 끝이 다가왔다.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

수업의 마지막은 집사님의 리드로 춤을 추곤 했다. 고된 수업 끝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배우는 것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처음보다 그의 발을 밟는 빈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요셉이 잘 추게 되면 아쉬울지도 모르겠군요.”

“왜요?”

“이렇게 춤을 추지 못할 테니까.”

그의 손길에 핑그르르 돌았다. 제자리로 돌아와 그를 바라보자 그는 짙은 아쉬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토라진 듯한 그 표정에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왜요. 또 추면 되죠.”

집사님이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손뿐만이 아닌 그의 몸에 전반적으로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서로 눈을 빤히 쳐다보며 춤추는 것을 멈췄다. 그는 나를 그 자리에서 껴안았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그 행동에선 들뜸이 묻어났다. 그의 기분이 전염되는 듯해 나 또한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씰룩였다.

“그래요, 같이 또 추면 되는 거겠죠.”

그는 나를 꼭 껴안고 몇 번이나 읊조렸다.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분명 그는 기쁜 듯했는데 한편으로 그 목소리에는 애처로움이 깃들어 있어 어쩐지 조금 슬퍼졌다.

* * *

여러모로 복잡했던 시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왔다. 울리세는 이제 브렌다 공녀뿐만이 아닌 다른 친구들의 집에도 놀러 가기 시작했다. 전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의 변화였다. 아이의 표정에는 장난기와 즐거움이 가득했다. 나와 집사님과의 관계 또한 여전했다.

평화로운 한때였으나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란 것을 집사님이 손에 든 편지를 보고 알아챘다. 편지에는 금박의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왕실에서?”

“네. 벌써 그런 때가 되었나 봅니다.”

연말 초대장에 있었던 그 화려한 문양이었다. 왕실에서 왜? 그런 때는 또 뭐지? 의아해 멀뚱히 그를 보았으나 집사님은 말없이 종이를 건네주었다.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 지나 드디어 민간 시찰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편지를 받은 후보자는 밑에 적힌 장소로 시찰을 나가길 바랍니다. 제출할 보고서는 양식을 동봉하겠습니다.

-장소: 흐말렌.]

민간 시찰?

“이게 뭐예요?”

“후보자 중 점수가 높은 자를 추려 하는 시험입니다. 생각보다 도련님이 점수가 좋은 모양이군요.”

“헐…….”

큰일 났다. 지금까지 여행을 갔다가 좋은 꼴을 본 적이 없기에 여행 자체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게 최근이다. 흐말렌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수도는 아닐 터. 그렇다면 기차나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타 지역에 갔다가 또 큰일이 나면 어떻게 하지? 또 괴물이 나와서 다치면 어떻게 하냔 말이야. 등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집사님은 설명을 이었다.

“시찰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후보자는 백성들의 생활을 보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 방법을 보고서로 써야 합니다.”

“……울리세는 어린애인데요? 그런 걸 해요?”

나는 울리세의 나이 정도에 보고서를 쓴 경험 따위 없었다. 독후감이나 일기 같은 걸 쓰면 모를까.

“그렇습니다. 후보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많은 것이 더 유리하지 않나? 원래 배운 것이 많으면 보이는 것이 많게 마련이니까. 근데 지금은 보고서고 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의 안전이 제일 중요한데 이걸 안 할 수는 없나? 수도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데…….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왕명이니까요.”

묻지도 않았는데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길. 어떻게 하지. 걱정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방금까지 평온했던 것이 모두 거짓같이 정신이 없었다.

“요셉?”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울리세가 저 멀리서 다가왔다. 발소리 없이 다가온 울리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손에 든 공문을 쥐여주었다.

“아, 이거……. 브렌다도 가.”

“브렌다 공녀도?”

“점수가 높은 후보자들이 뽑히는 것이니 당연합니다.”

아이는 어쩐지 들떠 보였다. 하긴 친구들과 여행을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그 마음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여행은, 여행은 안 되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걱정 때문에 한숨이 튀어나왔다.

“괜찮습니다.”

집사님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 든든한 손길을 느끼자 급격하게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이제 잘 훈련된 개처럼 그가 어깨를 두드리기만 해도 안심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게 길들여지다니 처음 이 세계에 온 내가 본다면 믿지 못할 상황이었다.

“……흐말렌은 먼가요?”

“그렇게 멀지도 않지만 가깝지도 않습니다.”

그나저나 흐말렌이라……. 어쩐지 조금 익숙한 이름이다. 아는 장소는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쨌든 꼭 가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숨을 푹 쉬고 집사님에게 말했다.

“그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공문에 같이 동봉된 보고서 양식을 읽고 있는 울리세를 보았다.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랐다. 잘 먹고 꾸준한 운동을 해서인지 울리세는 키가 많이 컸다. 게다가 예법 수업 덕인지 몸가짐이 발랐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도망은 갈 수 있겠지.

그리고 나도 집사님에게 꾸준히 흑마법을 배웠다. 저번과는 달리 어떻게든 이번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

7장 민간 시찰

지나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은 빠르게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았던 민간 시찰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혹시 모를 일을 걱정해 철저하게 대비했다. 꾸준히 사용 연습을 했던 인벤토리가 이번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인벤토리에 생존 물품들을 넣었다.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인벤토리 안에 있는 물건들이 망가지거나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정말이지 큰 수확이었다. 그 안에 옷가지며 음식이며 돈, 거기에 간단한 무기까지 넣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니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아졌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많이 느셨군요.”

“하하…….”

또 하나의 대비는 마법 연습이었는데 집사님이 놀랄 정도로 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진작 이랬으면 좋았을 걸 싶지만, 역시 절박함이 없었다면 이 성과는 불가능했겠지.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가장 간단한 마나구 정도는 날릴 수 있을 것 같다.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후우. 안 할 수가 없죠.”

나는 시든 이파리처럼 엎어졌다. 그러자 집사님이 책을 덮고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살며시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간지러운 행동에 작게 웃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동안 여행에서 좋은 꼴을 못 봤잖아요…….”

“그건 그렇긴 합니다.”

집사님은 짧게 수긍했다. 아니라고 하기엔 여행에서 우리는 정말로 고생을 많이 했다. 우연이라고 치부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세 번 갔다가 세 번 전부 망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우연도 세 번이면 운명’. 현실이었다면 무당이라도 찾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집사님이 느릿하게 내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얼굴로 슬그머니 손을 옮겼다. 그러곤 귀한 물건을 만지듯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 손길을 받자니 비싼 자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깃털이 지나가는 것처럼 섬세하고 조심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언제나 집사님 덕에 살았죠, 뭐.”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모두 집사님 덕에 살아남았다. 세 번째는 내가 하긴 했지만 그건 운이 좋았던 것이지 내 능력 덕분이 아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는 어쩐지 죄책감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물어보기도 전, 그가 내 눈을 손으로 덮었다.

“제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다짐하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게 가만히,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기차를 타고 흐말렌으로 떠났다. 복잡한 속과 다르게 철마는 거침없이 선로를 나아갔다.

“그러고 보니…… 보통 시찰이라면 뭘 해요?”

“다양합니다. 회계감사를 하는 후보자 또한 있었지요.”

“회계감사요?”

생각보다 더 제대로 된 시찰이었다. 회계감사라니 난 그걸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르는데. 하지만 개나 소나 그것을 할 수 있을 수는 없겠지. 게다가 울리세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니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집사님을 바라보자 그가 설명을 이었다.

“보통은 후보자에게 자격이 있어야 할 수 있는 행동이 많아집니다. 왕실에서 허가증을 내줘야 가능하지요. 후견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후견인의 능력이요?”

“네. 쉽게 예를 들자면, 브렌다 공녀의 후견인은 샬라메 공작이죠. 샬라메 공작의 입김으로 이런저런 편의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 그거 괜찮은 거예요?”

그건 좀 치사한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울리세는 물론이고 집사님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물론이지요. 후보자가 능력 좋은 후견인을 만나는 것 또한 능력입니다. 좋은 핏줄을 타고나는 것도 재능이지요.”

어쩐지 돈과 인맥으로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생각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분제가 있는 세계에선 이런 게 당연한 걸까? 집사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그 말투엔 어쩐지 빈정거림이 담겨 있었다. 당연하다고 하는 그도 내심 속으로 욕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런 것을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은 기득권뿐이리라.

울리세는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과자를 먹었다. 그 순진한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브렌다는 어디로 가는지 알아?”

“응. 나랑 다른, 곳.”

“아쉽네. 친구랑 놀고 싶었지?”

“……응.”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크게 낙심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많은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나는 울리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 간식을 시켰다. 달콤한 간식을 먹으며 울리세는 마음을 달래는 듯했다. 나는 아이에게 음료수를 따라주었다.

그때까지의 난 혹시 모를 괴물이 침입할까 걱정하느라 전전긍긍이었다.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르는 위협은 나를 바짝 긴장하게 했다. 집사님은 그런 나를 눈치챈 건지 아무 말 없이 다정히 손 잡아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흐말렌. 나는 예상 못 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오래간만이군요. 울리세 후보, 요셉 씨.”

“어……?”

기다랗고 밝은 회색 망토로 겉을 꽁꽁 가리고 있어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후드를 살짝 벗었는데, 그 안에는 성스러운 백금발의 미소년이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은은하게 지은 그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훌쩍 큰 마태오였다.

그의 뒤에는 전에 봤던 껄렁해 보이는 남자가 듬직하게 서 있었다. 여기서 만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한 자들이었다. 사실 거의 잊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무려 그에 관한 경고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어……. 오랜만이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마태오는 기쁘다는 듯 웃으며 다시 모자를 썼다. 얼굴을 거의 가려 수상해 보일 법도 했지만 그 옷에는 몇 번 보았던 종교 마크가 새겨져 있어 수상함을 완화해 주었다.

“여긴…… 어쩐 일로?”

“모르셨습니까?”

마태오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대답하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몸이 흠칫 움츠러들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지하기엔 어떠한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집사님 또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내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찰은 두 명이서 같은 도시를 담당합니다. 저도 흐말렌으로 배치받았고요.”

몰랐다. 집사님을 돌아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태오는 우리가 흐말렌에 함께 배치받은 걸 언제 알았던 걸까? 집사님도 아는 듯한데 난 왜 몰랐던 거지? 그나저나 이런 우연이라니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겠…… 지?

나는 마태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나이에 맞지 않게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정말이지 무해해 보였다.

‘후보자……. 마테오 주피터는 조심하세요.’

그때, 브렌다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말 때문일까 어쩐지 그 미소가 불길해 보였다. 하지만 곧 고작 말 한마디에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꺼림칙해하는 내가 간사하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느낀 떨떠름함이 미안하게도 그는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숙소를 잡아놓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뇨. 그럴 필요는…….”

“저번에 신세를 지기도 했으니 부디 제가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주세요.”

미안하다는 듯 웃고 있는 마태오의 뒤에서 험악한 눈초리가 날아와 꽂혔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할 거냐는 눈초리였다. 사실 후보자가 저렇게 저자세로 나온다면 난 거절할 명목이 없다. 가진 작위래 봤자 기사일 뿐이고 뒷배 없이 돈만 많을 뿐이니까.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울리세가 뚱하게 마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리세 또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알겠어요. 숙소는 어디인가요?”

거절할 수 없었다. 물론,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불편할뿐더러 아이가 싫어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거듭되는 청을 거절해 괜히 불편해지는 사이가 되면 울리세에게 손해일 수도 있었다. 계속 거절하기에는 예의가 아니기도 했고.

나는 울리세의 손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잡았다. 그러자 울리세가 내 허리를 안고 어리광을 부렸다. 원하는 사람만 만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라지만 지금은 내가 능력이 부족해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초래한 것 같아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조금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숙소는 멀지 않아요.”

기차역 근처의 숙소를 예약한 듯 그는 마차를 잡지 않았다. 집사님과 나는 짐을 들고 나란히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역을 나오자마자 우울한 분위기가 싸늘하게 감돌았다. 그 기류는 숨을 막히게 할 정도로 짙고 가득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점은 그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며 화들짝 놀랐다는 것이다. 마치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귀신을 본 것처럼 허옇게 질린 표정들. 내가 귀신의 집에 온 것인가 갸웃할 정도였다.

“집사님, 저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모르겠군요.”

집사님 또한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울리세 또한 주변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종내에는 사람들이 후다닥 자리를 떠나 거리에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도시는 마치 유령도시처럼 적막했다. 텅 빈 거리를 걸어가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입니다.”

마태오의 안내가 끝났다. 도착한 숙소는 어쩐지 조금 허름해 보였다. 깔끔했지만, 최근 좋은 숙소에만 머물렀기에 더욱 낡게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그래도 일단 마태오를 따라 들어가니 내부는 깔끔한 것이 괜찮아 보였다.

“여기 열쇠 받으시죠. 302호로 가면 돼요.”

방은 한 개인가? 세 명이서 한 방? 당황해서 마태오를 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침실 두 개가 딸린 방이니 괜찮을 거예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세 명이라 침대가 부족했다. 황당해 계속 쳐다보자 노란 머리의 남자가 집사님의 어깨를 턱 하고 잡았다.

“사용인을 위한 방은 따로 잡아놨어.”

당연히 그가 우리들과 한 방에서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 뭐라고 하기도 전, 집사님은 껄렁거리는 남자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곤 어깨를 툭툭 털며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가시죠, 요셉. 도련님.”

집사님은 나에게서 열쇠를 건네받고 뚜벅뚜벅 숙소로 향했다.

나는 마태오와 남자에게 대충 인사하고 울리세의 손을 잡아 집사님을 뒤따랐다. 남자의 시선에 미약한 경멸이 서려 있어 순간 굳었지만 앞서 나갔던 집사님이 어느새 되돌아와 그 시야를 차단해 주었다. 저 남자는 날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숙소는 조금 작긴 했지만 괜찮았다. 침구 또한 깔끔했고 먼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진드기 같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아이에게 방을 하나 내주자 한 방이 남았는데 문제는 침대가 하나였다.

“집사님은 어디서 주무시려고요?”

숙소가 크지 않다는 말은 방에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침대와 작은 협탁 빼고는 있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집사님은 몸이 자그맣지도 않았다. 바닥에서 자려면 웅크려서 온몸이 결릴 것이 분명했다.

“……매정하군요.”

“네?”

“연인을 바닥에서 자게 하실 겁니까?”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나를 보는 얼굴은 치명적이었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연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함께 자는 것이 맞겠지. 나는 비 맞은 고양이 같은 얼굴의 연인을 황급히 토닥였다.

“아, 아니. 미안해요. 그게…… 제가 누군가와 같이 자본 적이 없어서 생각을 미처…….”

“……다른 사람과 자본 적이 없습니까?”

“없죠! 없어요.”

그는 순간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표정에 그가 또 연기했다는 것을 알고 얄미워 어깨를 아프지 않게 한 대 때렸다. 그는 그것이 좋았는지, 아니면 재미있었는지 한 번 더 하하 웃었다.

“그럼…….”

“요셉.”

불쑥 울리세가 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에 후다닥 아이에게 다가갔다. 뒤를 돌아봐 집사님에게 나중에 보자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사님은 어쩐지 작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그게…… 있잖아.”

아이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구겨진 종이였는데 받아 들어 펼친 나는 안색이 자연스럽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발등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실종 아동 전단지]

“이불 속에 있었어.”

“이런 게 왜 여기에 있지?”

“……몰라.”

전단지를 보니 울리세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실종된 날짜를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등골에 선연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불길한 직감이었다. 나도 모르게 종이를 꾸깃 접으며 울리세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울리세. 혹시 보고서 도와줄 일이 있으면 꼭 말하고.”

“응.”

“짐은 다 정리했니?”

“……아니. 하는데…… 저걸 발견했어.”

“그렇구나. 형이 도와줄게.”

울리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훌쩍 큰 것처럼 느껴져도 아직 많이 어렸다.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짐은 금방 정리할 수 있었다. 얼마나 이 도시에 있을지 몰라 일주일간의 짐을 챙겨 왔는데 초여름이기에 가벼웠기 때문이다.

빠르게 끝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집사님에게 전단지를 건넸다.

“집사님, 이것 좀…….”

어쩐지 조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던 집사님의 안색이 나빠졌다. 누가 봐도 명백히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도 여기가 처음 아닌가? 무언가를 알 리가 없는데.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시 발등이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발등이 아파서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보니 불안했다. 불길한 기운이 발목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불안이라는 이름의 독사가 나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어디선가 비웃음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역시 여행을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안색이 좋지 않군요. 괜찮으십니까?”

“음……. 그게 좀 그렇네요…….”

“마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집사님은 나를 소중히 침대에 앉힌 후 다급하게 방을 나서려 했다. 그의 옷자락을 황급히 잡아챘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분명했다.

“같, 같이 있어주세요.”

“…….”

지금 절실한 건 마실 것이 아니었다. 집사님의 온기가 필요했다. 이 세계에서 나를 가장 안정시켜 주는 것은 집사님과 울리세의 온기였으니까.

하지만 아직 아이인 울리세에게 불안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울리세에게 그런 모습을 비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집사님을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알겠습니다.”

집사님은 큰 고민 없이 내 옆에 바로 앉았다. 살며시 껴안는 손길은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게 느껴져 그를 마주 안았다. 천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너울거리는 불안감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것은 물 밑의 모래처럼 계기만 있다면 다시금 마음을 혼탁하게 어지럽힐 것이란 걸 나는 잘 알았다.

* * *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민간 시찰 내내 미약한 걱정에 시달리며 긴장을 놓지 못한 것이 무색하게도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울리세는 홀로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지만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나는 금붕어 꽁무니에 붙은 똥처럼 아이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녔다. 익숙하지도 않은 도시. 그것도 아동 실종이 최근까지 일어난 도시에 홀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이 도시는 울리세에게 기묘한 시선을 보냈다.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데 아이에게만 시선이 향하는 건 어딜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히 시선뿐이긴 했다. 말을 걸거나 해를 입히진 않았다. 하지만 그 공포스러운 눈동자를 생각하노라면 도저히 아이를 혼자 둘 순 없었다.

체력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역시 하루 종일 돌아다닌 후면 녹초가 되어 침대로 가 기절에 가까운 잠이 들었다. 집사님과 함께 침대에서 자는 엄청난 상황이었지만 그것에 신경 쓸 상황이 못 되었다. 너무나 피로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장점을 꼽자면 덕분에 그동안 함께 있지 못한 시간을 만회하듯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아이가 얼마만큼 자랐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튼튼해진 몸은 한참을 걸어 다녀도 지치지 않았고, 사람들의 틈에 끼어 있기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1년 동안 이렇게 자랐다는 점이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감동에 젖어 아이를 따라다닐 때였다. 울리세가 어느 낡은 게시판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곳에는 요 며칠간 수도 없이 보았던 실종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수십에 달하는 그 전단지를 보니 다시 발등이 시큰거리며 쑤셔왔다. 어디선가 들리는 비웃음이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알았다.”

“응? 뭐가?”

울리세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아이는 조금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이 도시…… 애들이, 없어. 한 명도.”

“……!”

그랬다. 보통이라면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아이가 이 도시에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 만한 공간은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감돌았고 어른들의 얼굴에는 우울함만이 드리워 있었다. 사방팔방에 실종 전단지가 굴러다니는 이 도시의 기이함을 멍청하게도 나는 그제야 알아챘다.

아무리 아동이 많이 실종된다고 해도 아이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울리세, 돌아가자.”

나는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순간 아이의 팔뚝을 강하게 잡았다. 그와 동시에 내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집, 집사님.”

“진정하세요, 요셉. 지금은 아무런 위협도 없습니다.”

그가 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자 치밀어 오른 공포와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그 덕에 아이를 잡고 있었던 손을 천천히 놓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세게 잡았던 듯 울리세가 팔을 주물렀다. 내가 그랬다는 것에 깜짝 놀라 아이에게 빨리 사과했다.

“미안해 울리세. 형이 갑자기…… 갑자기 무서워서. 아팠지……. 미안해.”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따뜻하고 조그마한 손이 내 다른 손을 꼭 잡아왔다.

“고마워.”

따뜻하고도 작은 위로에 나는 완전히 진정했다. 많이 컸다지만 아직은 나보다 한참은 작은 울리세를 품에 안은 뒤 우리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울리세가 밖에 돌아다니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죠?”

문을 걸어 잠그고 덜덜 떠는 나를 집사님과 울리세가 꼭 안았다. 두 명이 나에게 전해주는 온기에 나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그들의 온기는 이제 거의 만병통치약과 다름없었다. 그것을 집사님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도련님. 어서 보고서를 쓰시죠. 바로 돌아갑시다.”

“응.”

“요셉도 짐을 싸세요.”

집사님은 빠르게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울리세는 아무런 반발 없이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나 또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행인 점은 언제나 이 장소를 떠날 수 있게 조치를 취해뒀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는 거다. 내 짐을 모두 싸고 울리세의 짐 또한 모두 싸자 보고서도 마무리가 되었다.

“그럼 어서 떠나요.”

집사님과 울리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마치 의도한 것처럼 똑같아 형제처럼 보였다.

짐을 들고 수선스럽게 내려오자 때마침 마태오를 마주쳤다. 그는 평소와 같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반가움도 잠시, 우리를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우린 이제 집으로 되돌아가려고요.”

일단 이 숙소를 잡아준 것은 마태오였기에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마태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조금 더 머무르시는 건 어떻습니까? 보고서는 신경 쓰는 게 좋습니다. 점수가 꽤 높거든요.”

“갈 거야.”

울리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짤막한 대답은 무례함에 가까웠지만 마태오는 불쾌해하지 않고 도리어 안타까워했다. 걱정해 주는 그 모습에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난다면 불이익이 있을 텐데…….”

“점수가 조금 깎이는 것으로 끝날 겁니다.”

집사님이 차갑게 대꾸했다. 마태오가 말하는 투를 보면 큰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았지만 점수가 깎이는 정도라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울리세는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있으니까. 오히려 깎인다면 환영할 따름이었다. 그럼 다음에는 이 시찰을 안 오게 될 수도 있으니까.

왜 마태오는 심각한 것처럼 말했을까? 마태오에게 점수가 깎이는 것은 큰 불이익에 해당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이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럼 다음에 봐요.”

어쨌든, 괜히 걱정해 주는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집사님의 말에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자 어색하게 웃으며 마무리 지었다. 마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와 요셉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우리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서둘러 발을 옮겼다. 등 뒤로 마태오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분을 느꼈다.

우리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을 비켜 지나 기차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 아닌지 역은 한적했다.

“표를 사 오겠습니다.”

“빨리, 빨리 다녀와요.”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곤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나와 울리세는 손을 꼭 잡고 벤치에 앉았다. 아이의 따뜻한 온기는 넘실거리는 불안과 초조함을 진정시켰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그 순간, 발등에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했다. 칼로 쑤시는 것 같은 강렬한 고통이었다. 아파서 신음하기도 전 피리 소리가 하늘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어?”

기현상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혼란에 빠진 사람들만이 북적일 뿐이었다. 저 멀리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집사님이 시야에 잡혔다. 집사님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울리세의 온기를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러나 내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울리세?!”

허공에서는 종소리와 비슷할 정도의 큰 피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내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품에서 사라진 아이의 온기만이 정신을 장악했다.

그때 열차가 도착하고, 한적했던 기차역에는 금세 사람이 빼곡해졌다. 바글거리는 사람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어 공포가 증폭되었다. 발목을 타고 오른 뱀이 나를 향해 비웃었다. 날름거리는 혀가 마치 칼날과도 같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울리세!”

“요셉, 요셉. 진정하세요. 진정해요, 요셉.”

집사님의 손길이 나를 감싸 안았지만 진정할 수 없었다. 집사님을 떨쳐낸 나는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져 사람들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이를 찾을 수는 없었다. 연보라색의 사랑스러운 내 아이는 발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요셉. 진정하세요.”

집사님은 광인처럼 날뛰는 나를 결국 힘으로 제압했다. 그가 나를 강하게 껴안자 날뛸 도리가 없었다. 억센 힘은 아까처럼 떨쳐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고 스쳐 지나갔다.

그 많던 사람이 역에서 빠져나가고 다시 한적해질 때까지의 시간이 지났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을 집사님의 품에서 버틴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한적해진 역사에는 여전히 울리세가 보이지 않았다.

“집사님……. 어떻, 어떻게 해요.”

“…….”

집사님은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며 어디론가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내 눈은 사방을 훑어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보이는 것은 벤치에 덩그러니 남은 짐뿐이었다.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 급하게 꾸린 짐은 엉망이 되어 사방팔방에 뿌려져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의사가 필요하십니까?”

집사님이 이끈 곳에는 내 몰골을 보고 놀라는 역무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호소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집사님이 더 빨랐다.

“도련님이 사라지셨습니다.”

“도련님?”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는데, 공포가 서린 눈동자라 내 불안감은 점점 심화되었다.

“혹시…… 도련님의 나이가?”

“11살……. 11살이에요. 아직, 아직 많이 어린데…….”

공포에 이어 체념, 슬픔이 들어찼다. 그들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것을 집사님 또한 알아차렸는지 그의 기세가 무시무시하게 뿜어져 나왔다. 언젠가 나를 억누른 적이 있는 그 기세가 역무원들을 향했다. 역무원들은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사지를 벌벌 떨기 시작했다.

나 또한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발등의 고통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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