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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무너진 벽 (5/21)

5장 무너진 벽

“요셉 님!”

크게 소리쳐 봤자 하수인이 만든 문은 매정하게 사라졌다. 그가 나에게 강제로 떠넘긴 것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다.

대체 왜? 왜 그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는가. 그저 문을 넘어오기만 한다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데.

“……사람들을 구하러 간 거야.”

“뭐라고?”

그것이 말했다. 요셉에게 말했을 때와는 다르게 더듬지 않는 명료한 목소리. 생기가 깃들어 있긴 했지만 이것이 바로 본모습이었다.

요셉과 함께 있었던 모습이 거짓인 건 아니었다. 요셉이 주는 사랑과 정성으로 잠시 변화했을 뿐. 그 주체가 사라지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것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흉통으로 가슴이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저것을 보고 있으면 수치스러움이 밀려들어 왔다. 나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한번 말했다.

“요셉은 사람을 구하러 간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공허한 외침이 나무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철로가 지나가는 평야에는 나무가 드문드문 심어 있었다.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를 걷어찼다. 이제야 이 끔찍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가 그 장소를 탈출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된다.

“안 돼…….”

요셉의 얼굴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의 웃는 얼굴. 부끄러워하는 얼굴. 빛을 받으면 오색으로 빛나는 수정처럼 다채로운 그 표정들.

이 세계에 갇히고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이란 단순했다. 욕정. 욕망. 요셉은 그 모든 것과 달랐다. 맹하고, 순했다. 그는 나와도 달랐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에게 추저분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들과 사실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요셉은, 내가 본 그 어떤 인간보다 높은 도덕성을 빛냈다. 다시 머릿속이 요셉으로 가득 찼다. 나를 도와주고, 나를 구조하고, 나를…….

“아, 이것이.”

그제야 알았다. 나는 지금 이 작고 가혹한 모형 정원을 탈출할 기회가 바스러질까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감정을 깨닫자 얼마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의심하고 비아냥거렸던 남자는 추악하지 않다고. 네가 그렇게 매도하고 싶었던 사람은 황홀할 만큼 하얀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 같은 너저분하고 역겨운 인간마저도 홀릴 만큼.

“이것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너무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미 요셉은 악마의 영역 안에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가 그곳에서 죽는다면 이 세계는 다시 첫날로 재구성되겠지.

이곳에는 또다시 나만이 존재하게 된다. 나 홀로, 이곳에, 비참한 감정과 함께.

“온다.”

그것이 말했다. 동시에 거대한 충격이 대지에 내리꽂혔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뜨거운 수증기. 박살 난 철판. 바닥을 흥건하게 적셔 진흙으로 만드는 물.

“요셉!”

기차였다. 부서진 철마가 연옥으로 가는 길에서 생환했다.

“요셉!!”

외쳤으나 들리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신음이었다. 기차가 이 꼬락서니로 현실로 돌아왔으니 멀쩡히 도착한 사람은 없겠지. 아니, 무사한 사람이 한 명은 꼭 있어야 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뒤돌아 사라진 요셉. 그만큼은 다친 곳이 없어야 했다. 냉철한 이성은 그럴 수 없다며 요셉의 부상 확률을 계산했으나 무시했다.

다행인 점은 나는 요셉의 마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마법 수업을 도와주며 그의 성질을 본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기차에는 요셉의 마력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가 마법을 사용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겠지.

그 자취를 뒤쫓아 요셉을 찾을 수 있었다. 소리 지르기 전에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 뛰어난 머리는 지금 두려움으로 마비된 듯했다.

“……!”

힘없이 늘어진 몸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찬 바람이 부는 날씨에 푹 젖어버린 옷을 입고 있음에도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피부가 정상이 아니었다. 다급하게 살펴보자 물집이 심각하게 생겨 있었고 곳곳이 붉거나 검게 변해 있었다.

심각한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니, 치료를 받는다 해도 완치가 될지가 의문인 끔찍한 상황이었다.

빠르게 다가가니 요셉의 발등에서 검은색의 희미한 빛이 흘렀다. 그 빛이 사라지자 요셉의 몸에 있던 화상은 조금 나아져 있었다. 얼굴의 물집도 가라앉았고 다리에 보이던 검게 익어버린 상처 또한 옅은 붉은색으로 나아져 있었다. 악마의 알량한 배려였다.

나는 다급하게 그를 안아 들었다. 푹 젖은 몸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나마 아까와 같이 죽어버린 사람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통각을 느낀다는 거였으니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뒤늦게나마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지만 그의 몸은 연약했다. 동상까지 걸리면 큰일이었다.

“제발…….”

* * *

사무치는 고통 사이로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와 겨우 눈을 떴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했기에.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이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게 정을 붙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울리…… 세…….”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있는 울리세였다. 너무나 다급해 보이는 집사님 또한 옆에 있었다. 뿌연 시야에서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 걱정이 뚝뚝 흐르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미안…….”

“아니, 아닙니다.”

“사, 람…… 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한계까지 소모된 마력에 몸속은 텅 비었고 고통은 내 기력을 갉아먹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생존자……!”

“……찾아! ……찾아라!”

집사님이 나를 들어 올려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 속도에 울리세가 뒤처질까 걱정되었다. 어른의 발걸음을 아이가 뒤쫓아 오기엔 힘드니까.

“……울, 리세…….”

“알아서 쫓아올 겁니다.”

냉정하게 말하는 모습에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체력이 없었다. 나는 결국 힘없이 눈을 감았다. 멀어져 가는 의식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부상자입니까?!”

“보호자분은 상처가 없으신가요?”

따뜻한 온기가 내게서 멀어져 갔다. 아무래도 나를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들것에 올린 모양이었다. 안온한 품에서 떨어져 나오자 싸늘한 공기가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내가 오랜 시간 깨어 있지 못했다는 거다.

울리세를 잘 돌봐줘야 할 텐데. 하지만 집사님이라면 잘 돌봐주겠지. 전에도 내가 다쳤을 때 잘해줬으니까…….

그것이 내 마지막 생각이었다.

* * *

눈을 뜨기도 전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맡아졌다. 특유의 병원 냄새였다. 아릿한 고통이 온몸을 괴롭혔다. 눈을 어떻게든 뜨자 처음 보는 흰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병원 천장이겠지. 주변을 둘러보자 시스템 창이 보였지만 그것은 읽기도 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을 살필 기운도 없어 고개를 돌리자 희미한 시야 사이로 초췌한 집사님이 보였다. 짙은 선글라스를 쓴 그의 안색은 평소보다 거무죽죽했다. 그 옆의 작은 소파에는 울리세가 쪼그려 누워 있었다. 아이의 피부는 피로로 거칠어졌고 심지어 눈물 자국까지 남아 있어 죄책감에 양심이 아팠다.

“울…….”

말을 마치기도 전 집사님이 눈을 번뜩 떴다. 누구 하나 죽일 것같이 흉흉한 눈을 하고 있어 입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는 성큼성큼 나에게로 다가왔다. 피폐하고 험악한 모습을 했음에도 놀라운 점은 그 미모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퇴폐적인 콘셉트를 잡은 잡지 화보 같았다. 내가 입이 굳지 않았다면 멍청하게 미모를 찬양했을지도 몰랐다.

“요셉 님.”

“하, 하하…….”

어색하게 웃자 집사님이 더욱 험악한 기운을 내보였다. 심장이 후들거릴 정도로 무서운 모습에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굳어버렸다. 한참을 나를 내려다본 집사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제정신이십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하아.”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평소의 이성을 어느 정도 되찾은 듯했다. 분노로 가득 찼던 모습이 사라지고 냉한 얼굴이 드러나자 놀란 가슴이 진정되었다. 언젠가는 싸늘하다고 투덜거렸던 태도가 이제는 안정을 주는 것이 웃겼다.

“그, 그래도 잘 돌아왔잖아요.”

“…….”

작게 중얼거리자 집사님의 눈총이 다시 사나워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는 나를 더 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고통스러운 눈으로 애타게 내 몸을 훑었다.

상대방이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으니 나 또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힘들어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저, 괜찮은 건가요?”

“곳곳에 화상을 입었지만 심각하지 않습니다. 2주 조금 넘게 치료하면 낫는다고 하는군요.”

생각보다 얕은 상처였다. 분명히 기절하기 전에 굉장히 아팠는데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

집사님이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병원으로 오기 전 짧게 제정신을 차렸을 때, 옆에 기차 잔해들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

그렇다면 기차 안에 있는 사람 또한 되돌아왔을 텐데 그들은 괜찮을까? 벽을 박살 내 물로 어떻게든 한 건 좋았지만, 내가 이렇게 다쳤으니 분명 다른 이들도 엉망이겠지. 원래라면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타 죽었을지도 모르니…… 그들이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많이 다쳤을 것 같은데…….”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베르시펠리스 교단에서 도와준다며 대대적으로 선전 중이니까요.”

베르시펠리스 교단? 종교 단체에서 봉사 활동 같은 걸 온 건가?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 세계의 종교겠지? 그래도 역시 돈이 필요할 텐데. 이 세계에는 보험 같은 게 없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말이다.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집사님은 한숨을 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신성력을 가진 신관이 몇 왔다고 하니 괜찮을 겁니다.”

“신성력이요?”

“그래 봤자 승객이 많을 테니 요셉 님에게까지 오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도 가장 위급한 환자 쪽으로 먼저 간다고 하더군요.”

그렇구나. 신성력이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게임에서 자주 보던 힐링 같은 거겠지? 몸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단은 안심이었다. 그는 크게 안도한 나를 보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셉 님, 본인의 몸이나 챙기시죠. 그렇게 남을 구하려다 자기 목숨만 날아가면 좋을 것 같습니까?”

그가 날을 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뒤에 남은 사람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가 몇이나 구해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제 꿈자리가 사납지는 않겠지.

“그건…… 아니지만 일단 살았으니까요.”

물론 화상으로 인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다. 2주 정도면 지난여름에 다친 상처보단 훨씬 괜찮았다. 그나저나 울리세가 받았을 상처가 걱정이다. 또 이렇게 여행이 엉망이 되다니. 아이에게 여행이 부정적인 걸로 각인되면 어떡하지? 그것 또한 문제였다. 더 좋은 인상을 위해서라도 빨리 퇴원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야겠다.

“……걱정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집사님을 바라보자 그가 내 이마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얼음장 같은 손에 놀라 움츠러들자 집사님이 손을 도로 가져갔다.

집사님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싸늘한 병실이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정한 표정에는 진솔한 걱정이 서려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그는 한참이나 나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순간, 울먹이는 울리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셉.”

“울리세?”

소파에서 내려온 울리세는 쪼르르 다가와 조막만 한 팔을 벌렸다. 그러나 나에게 안기기도 전 집사님의 손에 제지당했다. 그는 날카롭고도 엄한 목소리로 울리세에게 말했다.

“요셉 님은 몸 곳곳에 화상이 있으니 달려들면 안 됩니다.”

“울리세, 괜찮니?”

집사님은 경고를 준 후에 옆으로 물러갔다. 울리세는 경고를 단단히 새겼는지 나에게 달려들지 않고 조심히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손을 들어 눈물을 얼른 닦아주었다.

“울긴 왜 울어. 형 괜찮아.”

“하지만, 하지만…….”

아이는 아까보다 더 훌쩍이기 시작했다. 안아서 달래고 싶었지만 뒤에서 형형한 눈빛을 보내는 집사님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닦아주는 것뿐이었다. 옷 사이로 팔목에 치료를 위해 붙인 거즈가 보였다. 보이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에 보이니 손목이 아픈 듯했다.

“정말로 괜찮아. 빨리 나아서 우리 다른 곳으로 놀러 갈까?”

상냥하게 말해봤지만 아이의 울먹거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눈물이 마치 옥구슬처럼 컸다. 집사님은 뒤에서 그런 우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들어오라고 대답도 하기 전, 문이 달칵 열렸다. 아직은 앳된 얼굴을 가진 소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백금발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묶여 있고 얼굴은 굉장히 곱상하게 생겼다. 흰색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현대의 검은 사제복과 색만 다를 뿐 똑같은 모습이었다. 날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이었다.

“누구…… 신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태오 쥬피터입니다.”

예의 바르게 말하며 싱긋 웃는 모습은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집사님이 평소와 같은 무심함을 몸에 두른 채 그의 앞에 다가갔다.

“문을 함부로 열어도 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지금은 환자의 안정을 위해…….”

마태오는 집사님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왔다. 자신보다 한참은 큰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 것이다. 무례한 행동임에도 얼굴에 걸린 화사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아 그런지 이상하게도 예의 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과 같은 계승 후보자랍니다.”

낯선 이의 등장에 눈물을 멈춘 울리세는 마태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내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나서기도 전, 그런 울리세를 도와준 것은 놀랍게도 집사님이었다.

“무례하시군요.”

집사님이 다시 성큼 앞으로 다가와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든든한 벽처럼 앞에 선 그는 마치 기사와도 같았다. 하지만 마태오는 강적이었다.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이야말로 무례하군요. 저는 지금 저와 같은 후보자님과 대화 중이랍니다. 사용인 주제에 방해하지 말아주시겠어요?”

마태오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이는 행동은 오연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기품이 묻어나는 게, 어딘지 브렌다와 비슷해 보였다.

계승 후보자들은 모두 이런 분위기인 걸까. 아니, 그때 연회장에서 본 후보자 중 그렇지 않은 아이도 많았다. 마태오와 브렌다. 둘이 유독 특출한 것이 분명했다.

집사님은 결국 이를 악물고 옆으로 물러났다. 지위로 밀어붙인다면 집사님이 끼어들 구실은 없을 거다. 울리세가 내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아이가 대화를 원치 않아 하는 것 같아 내가 입을 열었다.

“제가 후견인이니 저랑 대화하시죠. 전 요셉입니다.”

마태오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그에게 존댓말을 하게 만들었다. 마치 부모의 등 뒤에 숨듯 울리세는 내 옆에 꼭 붙어 섰다.

“그럼요. 저는 제안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제안?”

“그런데 흠…… 다리가 아프군요.”

집사는 눈썹을 꿈틀거리곤 구석에 있던 간이 의자를 들고 왔다. 보기만 해도 삐걱거릴 것 같은 얇은 의자였다. 일단은 귀한 손님이니 울리세가 자고 있던 소파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마태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히 마태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았다.

“왕명을 기억하고 계시겠죠?”

“네, 뭐……. 그걸 하러 가려다가 이 난리가 난 거니 모를 수가 없죠.”

마태오는 어쩐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무엇이 그를 만족스럽게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마태오는 성직자 의복을 입고 있다. 그럼 악마를 엄청 싫어하는 종교인 같은 건가?

“저는 악마를 잡고 싶습니다.”

“……네.”

“여러분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란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딘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지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우리가 악마의 영역으로 끌려간 건 분명 우연이었다. 그도 그럴 듯 우리는 그저 여행을 가고 있었을 뿐이니까. 뭐 수상한 것을 들고 간 것도 아니고, 딱히 악마를 찾지도 않았다. 그런 척을 하려고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를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란 정말이지 거룩하기 그지없었다. 성가대의 합창이 들리는 것 같은 그 모습에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일 뻔했다. 내가 종교를 믿지 않음에도. 다행이었던 점은 마태오의 뒤에 더욱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인 집사님이 있었기에 참아낼 수 있었다.

내가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 울리세가 입을 열었다.

“싫어.”

겁을 먹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로 또박또박 말한 울리세는 아까와는 달리 당당해 보였다. 그늘에 숨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작은 등이 놀랍게도 커 보였다.

“울리세 님이 왕좌를 원하지 않는 것은 잘 압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앞으로의 치세에 평안하게 지내실 수 있음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필요 없어.”

다시 단호하게 말한 아이는 그야말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것같이 단단해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깬 것은 마태오의 실소였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미련 없이 일어난 마태오는 바로 문밖으로 나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듯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울리세가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집사님 또한 무시했던 마태오가 울리세에게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따가운 흰빛이 흘러나왔다. 신성력인가? 조금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그 사이를 집사님이 가로막았다.

“이만 가주시길 바랍니다.”

“…….”

마태오는 잠시 아무 말 없더니 굳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럼 이만. 쾌차하시길.”

마태오는 병실에서 나갔다. 일정 시간을 두고 집사님 또한 방 밖으로 나섰다.

무거운 분위기가 병실 안에 흘렀다. 마태오는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집사님은 왜 마태오의 앞을 막았던 걸까? 신성력이면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 뭐……. 나한테 쓰지 않고 더 아픈 다른 사람에게 쓰면 좋은 거겠지.

* * *

그 후 나는 병실에서 세심한 보살핌을 받아 예상보다 빠르게 쾌차했다. 집사님은 의사의 퇴원 허락을 받자마자 짐을 챙기곤 말했다.

“갈아입고 나오시죠. 퇴원 수속을 밟고 오겠습니다.”

울리세 또한 집사를 따라갔다. 같이 있어도 괜찮은데 내가 옷 입는 걸 배려해 주는 걸까. 아직 어린데 기특했다. 나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그나저나 이후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여행을 가는 도중 이런 사고가 있었으니 왠지 원래 예약해 둔 장소로 가기에는 꺼려졌다. 아까 울리세도 꺼리는 것 같았고. 어떻게든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이렇게 악마랑 엮여 해치운 것이니 왕명 쪽도 해결된 것 아닐까? 나중에 아니라고 하면 마주친 악마의 모습이라도 말해주면 괜찮겠지. 어쨌든 모로 가든 서울만 간다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잘 해결되었으니 다른 장소로 여행을 가고 싶다. 어떻게든 집사님을 설득해 볼까.

생각을 정리하며 병실을 나오자 집사님과 울리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울리세는 나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행복한 얼굴로 병아리처럼 총총 달려왔다. 아이를 마주 안아 껴안자 깊은 만족감이 나를 채웠다.

“아이고, 형 기다렸어?”

“응.”

나를 꼭 안고 볼을 비비적거리는 울리세를 안아 들었다. 기차의 안에선 번쩍번쩍 들고 다녔는데. 그때는 역시 위급 상황이라 생각지도 못한 힘이 솟아올랐던 모양이다. 묵직한 것이 팔이 아렸다. 그런 우리에게 집사님이 성큼성큼 다가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셉 님, 집으로 돌아갑시다.”

집사님의 미소에 넋을 놓은 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장소로 다시 여행을 떠나자고 말하려고 한 것도 잊은 채. 울리세는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용케 알고 품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병원에서 걸어 나왔다.

* * *

그러나 우리는 기차역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엥? 운행 정지?”

“그렇습니다, 고객님.”

몇 번을 물어도 그 말뿐이었다. 일단은 창구에서 나오자 다른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직원에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운행 정지로 피해를 입은 예약 손님인 것 같았다. 2주나 지났는데 저렇게 항의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니. 화난 승객들로 인해 역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미어터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래도 왕실에서 명령이 내려온 모양입니다.”

상황을 살피러 갔던 집사님이 신문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오늘 발행된 신문의 첫 페이지에는 사고가 난 기차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높은 곳에서 찍어 마지막 기억에서 보았던 잔해보다 더욱 참혹해 보였다.

[왕실이 기차의 운행을 중단하다.

마법으로 강화되었던 기차 유니콘호가 탈선으로 인한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부상자와 사상자가 나왔으며 정확한 피해 규모는 추산 중이다. 왕실은 다른 사고가 있을지 모른다며 모든 기차를 정지시켰고 그로 인한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그 외에도 병실에서 보았던 마태오의 사진이 실린 기사들 또한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인자함의 상징이었다. 교단의 봉사 활동에 관한 내용 같아 보였다. 모퉁이에 브렌다에 관한 기사도 있었다. 후보자들은 각자 활약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기차의 사고는 악마로 인한 것이었는데 역시 비밀인가 보다. 확실히 갑자기 악마가 나타나 나라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하면 큰 혼란이 일어나겠지.

“일단 그럼 마차 역으로 가봐요!”

기차가 없다면 역마차를 타면 된다. 기차가 생긴 후 역마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지만 없진 않을 거다. 우리는 마차 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들어가지조차 못했다. 그곳마저도 시장 바닥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어휴.”

“어쩔 수 없군요. 개인 마차를 빌려야겠습니다.”

“빌릴 수나 있을까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습니다.”

확실히 쉽게 거절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면 하나 정도는 빌릴 수 있지 않을까? 개인 마차를 생각하다가 까먹고 있던 여행이 떠올라 번뜩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집사님의 팔을 탁 잡았다. 의아한 얼굴의 집사님이 나를 보았다.

“집사님. 우리 집에 가지 말고 다른 곳에 가요.”

“…….”

“…….”

집사님의 얼굴은 싸늘해졌고 울리세는 아무 말 없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그렇게 질색을 하다니. 하지만 역시 반응을 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 어떻게든 여행을 가야 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여행에 대해 안 좋은 기억만이 남을지 모른다. 아니, 이미 남아버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설득을 시작했다.

“우리 이제 점수 딸 필요도 없고…… 괜찮을 거야.”

“하지만…… 요셉.”

“정말로 괜찮을 거야. 나는 울리세랑 좋은 추억을 쌓고 싶어. 이렇게…….”

나는 일부러 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집사님은 내 의도를 알아채고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울리세는 아니었다. 아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나는 더 강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병원에서 울었던 기억 말고.”

울리세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거의 넘어갔음을 확신했다. 그 사실을 집사님 또한 알아챈 듯했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며 품속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바다는 이미 틀렸으니 산으로 하겠습니다.”

“네!”

끄적거린 집사님은 다시 품에 수첩을 넣었다. 다시 한번 한숨을 작게 쉰 그는 마차 대여소로 향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집사님은 생각보다 이르게 되돌아왔다. 혹시 대여하지 못한 건가 싶었는데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었다. 마부는 그야말로 로또 당첨이라도 된 표정이었다. 그런데 마차에 오르기 전,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요셉 씨.”

“네?”

뒤를 돌아보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있었다. 병실에서 보았던 마태오였다.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경건한 분위기의 마태오와는 달리 껄렁거리는 분위기의 그는 어쩐지 조금 양아치 같았다. 그는 마태오와 같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다만 검은색이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만나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울리세는 내 뒤에 쏙 숨었다. 집사님이 마부와 마차를 두고 내 곁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네, 안녕하세요.”

“다른 지역으로 가시나요?”

소년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당황해 쳐다보자 마태오가 간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저희도 탈 수 있을까요?”

“네?”

“지금 마차를 구할 수 없어 고생하고 있었답니다…….”

눈썹을 시무룩하게 내린 모습이 비에 맞은 강아지와 같은 꼴이었다. 다시 말해, 불쌍하기 그지없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태워달라니.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우리가 어딜 가는지 알고요?”

“어디로 가시는지……?”

집사님을 돌아보자 그는 매우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일순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곧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무심히 말했다.

“울펜스 지역으로 갑니다.”

“잘되었네요!”

손뼉까지 치며 안도하는 그를 보니 안 된다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거절을 했겠지만, 지금은 기차도 마차도 상황이 안 좋았다. 여기서 거절하기엔 너무 매정한 것 같았다.

“마차를…… 대여하시는 건?”

“그러기엔 돈이……. 제 후견인은 교황 성하이십니다. 과한 지출은…….”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울먹울먹한 소년을 보니 차마 거절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함께하자고 하기엔……. 나 혼자라면 괜찮았지만 울리세와 집사님까지 있었다.

내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뒤에 멀뚱히 서 있던 금발의 남자가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금발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아직 어린아이가 고생할 게 뻔히 보이는데 거절하는 건 역시 찜찜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같이 가요.”

“감사합니다!”

마태오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집사님은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내가 허락한 이상 그도 어쩔 수는 없었다.

* * *

다행인 점은 마차가 작지가 않다는 거다. 다섯 명이 마차에 타도 꽉 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만 있었다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겠지만 어색한 사람이 두 명 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마차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요셉 씨는 혹시 신을 믿으세요?”

답답할 정도로 경직된 공기 속에서 마태오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미소는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서먹한 공기를 먼저 깨뜨려 주는 건 감사할 따름이었다. 문제는 내가 신을 믿지 않는 거였지만.

“아뇨. 저는 무신론자라.”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고자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신실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안 믿는다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거짓말했다가 들키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분위기가 더 껄끄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태오는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하긴 요즘 무신론자분들이 늘어나고 있다곤 들었습니다.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시대가 찾아왔다는 거겠지요.”

아직은 어린데 말하는 건 정말 성숙했다. 마태오는 타깃을 돌려 울리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울리세 후보도 신을 믿지 않으시나요?”

“…….”

울리세는 옆에 앉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단호하게 말했다.

“안 믿어.”

“주님을 믿으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진답니다. 그분이 언제나 우리를 보살펴 주신다니 생각만 해도 기운이 나지요.”

진지하게 포교를 하는 모양이다. 마태오도 그다지 나이가 많지는 않은데 종교에는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에게 포교는 사양이다. 종교는 나이가 먹은 뒤에 가져도 늦지 않다. 내가 그만하라 말하기 전, 집사님이 입을 열었다.

“그쯤 해두시지요. 도련님은 그런 것에 관심 없으십니다.”

“……저번부터 말했지만.”

“아! 마태오 씨, 알겠어요. 다음에 생각해 볼게요.”

분위기가 사나워지기 전에 끼어들어 대화를 멈췄다.

집사님은 대단한 사람이다. 못 하는 것이 없는 천재. 그러나 고작 작위가 없는 집사이기에 이런 취급을 당한다. 새삼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 하지만 신분제가 있는 사회에선 어쩔 수 없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렇게 대화를 끊는 정도였다.

다행인 점은 그 후 마차의 대화가 어떻게든 평범하게 이어졌다는 거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마태오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어색한 공기가 희석되었다.

울펜스 영지라는 곳은 눈이 많이 내렸었는지 마차로 가는 길옆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집사님이 결정한 거니 어련히 좋은 곳일까 싶지만 조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눈이 많이 쌓이면 이래저래 사고가 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마차는 중간에 볼일 보는 시간 빼고는 멈추는 일 없이 달렸다. 아무래도 중간에 쉬면 마을에 제때 도착을 못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속을 달랬다.

그렇게 열심히 달린 덕분일까. 우리는 해가 다 지기도 전, 노을이 아름다운 때에 도착했다.

“나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도착해 문을 열어주었다. 집사님과 금발의 남자가 먼저 내렸다. 집사님은 나와 울리세를, 금발 남자는 마태오를 부축해 주었다. 껄렁거리는 인상인 것치고는 일에 성실한 남자였다.

“저는 교단의, 그러니까 교황님의 후원을 받는 걸 말했던가요?”

“네.”

마태오는 싱긋 웃었다.

“저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그 어느 곳이든 교단으로 연락주세요. 요셉 씨와 울리세 님에게는 언제든 열려 있을 거랍니다.”

“아…… 네.”

마태오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조금 멀어져 뒷모습이 작아질 무렵, 어디선가 검은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두엇 나타나 그들과 함께했다. 마태오는 보이는 그대로의 위치에 있는, 말 그대로 대우받는 후보자 같았다.

“다시 타지요.”

“아, 도착한 게 아니었어요?”

“산장까지는 거리가 있습니다.”

도착한 줄 알았는데 마태오를 내려주기 위해 잠시 멈춰 세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도착지가 알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소년에게 거취가 알려지는 건 어쩐지 꺼림칙했다.

우리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기다렸다는 듯 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드디어…… 갔네.”

울리세가 조금 기쁜 듯 말했다. 마차 안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울리세다. 마태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기뻐하는 건 울리세뿐만이 아니었다. 집사님 또한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둘 다 힘들었구나.”

“응.”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그도 그럴 듯 나는 그들 사이의 엉망이었던 대화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신분 사회로 인한 차별.

순간 꿈속의 집사님이 떠올랐다.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미소 지으며 존재감을 뽐내던 그 모습. 대마법사를 협박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모습. 보석으로 만든 꽃 같았던 그 모습.

아니, 그건 후보자님인가. 외모가 너무나 똑같아 집사님처럼 느껴졌다. 집사님이 그처럼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면 좋을 텐데……

“요셉 님?”

“네?”

“갑자기 왜 넋을 놓으셨습니까?”

“아, 아뇨.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도대체 그 꿈들의 정체는 뭘까? 꿈에서 나온 후보자님은 집사님과 흡사했다. 비참한 현실에 노출된 아이는 울리세와 비슷했고. 그저 꿈이라기엔 현실과 비슷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도플갱어 꿈일까?

“하하.”

“왜…… 그래?”

“응? 아, 그냥 갑자기 웃음이 나오네. 울리세랑 놀러 가는 게 좋아서 그런가 봐.”

현실이고 꿈이고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나는 이상한 게임 속에 들어왔는데. 괴물이 있고, 악마가 있고, 마법도 있다. 나는 나에게 안기는 울리세를 꼭 껴안고 집사님을 마주 보았다. 집사님의 푸른 눈을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옅은 검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본연의 색은 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무슨 축제라도 있나 봐요.”

“울펜스 영지는 겨울이면 눈꽃 축제가 열립니다.”

현실에서 한 번쯤 들었던 축제였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눈꽃 축제는 티브이에서 자주 나왔다. 얼음으로 조각상을 만들어 전시한다거나 눈썰매를 타는 정도가 광고에서 본 전부였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가진 지식은 얄팍했다.

“눈꽃…… 축제?”

“울펜스 지역에서 일어나는 희소한 현상을 기리는 축제더군요.”

희소한 현상이라. 아무래도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축제는 아닌 모양이다. 마차의 창가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그 희소한 현상이라는 것을 기대하는 걸까. 아이들은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축제이니 다들 신난 것 같았다.

마차는 도심을 통과해 바로 옆에 있는 산 쪽으로 올라가 우리를 내려주었다. 마부는 싱글벙글하며 떠나갔다.

올라오는 길에 호수가 있다는 팻말이 보였다. 산장이었지만 산이 도심 바로 근처에 있어 그냥 뒷산 정도의 위치 같았다. 마을로 내려가는 건 마차가 없어도 금방 갈 수 있어 보였다.

산장은 꽤 준수했다. 흰색의 통나무로 만들어진 산장은 아담하기는 했지만 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정도는 되었다. 테이블과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정원도 있는 듯했다. 다만 지금은 겨울이기에 모두 눈으로 덮여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예약했어요?”

“제가 못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집사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확실히 집사님은 하늘의 별을 따 오라고 하면 우주선을 만들어 올 것 같은 이미지다. 그가 못하는 게 있긴 있을까? 아마 그는 한 나라의 왕 노릇을 해도 잘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들어가요.”

집사님이 앞장서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울리세도 손을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산장 안은 아늑했다. 목조로 만들어진 벽에는 아름다운 무늬로 짜인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한편에는 검은색의 벽난로가 있었고 집사님은 그곳에 불을 지폈다.

“일단 몸을 녹이고 계시지요.”

집사님은 다시 산장 밖으로 향했다. 오자마자 나가려는 분주한 모습에 나는 그를 붙잡아 세웠다.

“어딜 가려고요?”

“잠시 상점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짐이 모두 소실되었으니까요. 오기 전에 조금 사긴 했지만 오래 머물기엔 부족합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쓸 정도만 사서요.”

……그러고 보니 그랬지. 여행하는 것에 집착해 짐을 찾지 못한 것을 잊었다. 멍청한 요셉. 기차가 그 모양 그 꼴이 되었으니 화물칸에 실렸을 짐이 어찌 되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데.

“같이 가요!”

“아닙니다. 요셉 님은 도련님과 함께 여독을 푸시고 계시길 바랍니다. 목욕이라도 하고 계시는 게 좋겠군요. 느긋하게 즐겨주세요.”

칼바람 불 듯이 단호히 말한 집사님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별장을 나갔다.

과연……. 목욕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오겠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울리세와 함께 목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원래 우정 다지기의 최적의 장소는 목욕탕이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그런 적이 없지만. 하여튼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목욕탕은 친분 다지기에 최고라고 했다.

“울리세, 우리 목욕할까?”

“목욕……?”

“응. 같이 목욕하자. 형이 등 밀어줄게.”

울리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씻기 전에 손을 잡고 산장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산장의 내부는 생각보다 꽉꽉 들어차 있었다. 개인실에 작은 욕실이 딸려 있었지만 1인용이었기에 둘이 들어가기엔 조금 비좁았다. 우리는 탐험을 하듯 돌아다녔고 조금 큰 욕조가 있는 욕실을 찾아냈다.

“여기가 좋겠다.”

“응.”

뜨거운 물을 트니 문제없이 콸콸 나왔다. 그런데 욕조가 어쩐지 두 명이서 들어가기 위해 디자인된 느낌이었다. 욕실을 뒤져보니 향기가 좋은 입욕제도 있었다. 뭐, 이래저래 씻기엔 정말 좋은 장소였다.

“그럼 어서 씻자.”

나는 아이가 탈의하는 것을 도와줬다. 물론 울리세가 혼자 할 수 있었지만 내가 도와주고 싶었다. 울리세의 옷을 벗기며 아이를 일부러 간질였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꺄하하! 요셉! 하하! 그, 하하!”

웃다 지치기 직전에 아이를 놓아주었다. 아이는 헐떡이다가 나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간지럽혔다. 복수였다.

“흐힉히하하하!”

아이의 손에 한참을 농락당하며 쉼 없이 웃었다. 그제야 아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놓아주었다. 한참을 웃어 힘이 빠진 터라 우리는 가볍게 몸을 씻었다.

아이의 몸 곳곳에는 아주 오래된 흉터들이 있었다. 속상해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닦아냈다. 그러곤 널찍한 욕조 안에 입욕제를 풀고 말했다.

“자. 욕조 안에서 몸 담그고 있어.”

“응.”

입욕제는 울리세에게 어울리는 사랑스럽고 향긋한 장미 향이었는데,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미 꽃잎이 떠다니는 연분홍색의 불투명한 물 안에 있는 울리세는 마치 꽃의 요정 같았다.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살도 오르고 운동으로 튼튼해진 것 또한 보였다. 흉터 때문에 속상한 것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흐뭇했다.

“뜨끈뜨끈 목욕은 최고~ 룰루-”

기분이 좋아진 나는 정체불명의 노래를 부르며 몸을 열심히 닦고 울리세가 있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는 끼여 앉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넓었다. 참방거리며 놀기도 하고 잡담하며 한참을 욕조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흠. 그런데 역시 이런 넓은 욕조에 장미 입욕제라니. 아무리 봐도 신혼부부용 같지? 뭐, 지금 우리가 잘 쓰고 있으니 준비해 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감사의 인사를 속으로 했다.

“형이 나중에 바비큐 해줄게.”

“바비큐?”

“밖에 캠프파이어가 있더라고. 철판도 구하면 구워 먹을 수 있을 거야.”

울리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뜨거운 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가 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님?”

“네. 옷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둘 테니 나오시면 갈아입으십시오.”

그는 정말 자신의 말은 완벽하게 지킨다. 진짜 목욕이 끝나기 전에 오다니. 물도 슬슬 식어가 우리는 욕조에서 나와 한 번 더 씻고 밖으로 나왔다.

집사님이 사 온 옷은 니트였는데 색만 다를 뿐 디자인은 같아 정말 형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똑같아…….”

“싫어?”

“아니…… 좋, 아.”

그것은 울리세 또한 마찬가지였던 듯 아이가 나를 껴안았다. 아이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우리는 한참을 껴안고 있다 거실로 나갔다.

집사님은 전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 집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두꺼운 재질처럼 보이진 않는데 안 추운 걸까.

“나오셨군요. 식사하시죠.”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뼈가 붙은 거대한 고깃덩어리였는데 위에 이름 모를 갈색의 소스가 뿌려져 있었다. 옆에는 곱게 으깨진 감자가 곁들여져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나는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울리세, 많이 먹어.”

그러고 보니 마차 안에서 먹은 건 고작 얇은 샌드위치 정도였다. 집사님이 거하게 한 상을 차릴 만했다. 이제는 젓가락보다 익숙해진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먹자 어딘지 익숙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족발?”

“네. 돼지 족발 요리입니다. 아시는군요.”

“그럼요. 제가 이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족발은 최고의 야식이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신기했다. 이 세계의 족발은 살코기를 발라주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이것도 특색 있고 고기는 끝내줬으니 불만은 없다. 울리세를 보니 아이도 맛있는지 잘 먹고 있었고.

“술까지 있으면…….”

“요셉.”

“앗.”

맛있게 요리를 먹던 울리세가 스산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평소의 사랑스러움이 아닌 차가운 표정이었는데 어쩐지 집사님을 닮아 있었다.

“술은, 안 돼.”

“응. 응, 형이 알지. 약속했잖아.”

그랬다. 울리세와 술을 마시지 않기로 약속했다. ……미안, 울리세. 이미 형 한 번 마셨어. 미안함에 속으로 아이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집사님이 나를 의미심장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모른 척했다. 다행히 집사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 *

날이 어둑어둑 저물었다. 우리는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산장에는 각자 잘 수 있는 만큼의 방이 있었고, 나는 가장 따뜻해 보이는 방을 울리세에게 주었다. 아이는 꼼질거리며 나를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곤 방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흐.”

바보처럼 웃은 나 또한 표정이 느슨해진 채로 내 방으로 향했다. 아이가 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침대에 들어가 눕자 장시간의 마차 이동으로 피로해진 몸이 금방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몽롱해 눈을 무겁게 끔벅일 때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

커튼을 쳤지만 작은 틈으로 들어온 달빛에 비친 반짝이는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만 보아도 그 무언가가 집사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그 모습을 보니 요정이 내 앞에 내려온 듯했다. 아니, 요정이라기엔 너무 큰가.

“그만 웃으시고 주무시죠.”

그를 보고 헤실거렸는지 집사님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그 말은 다정하게 녹아 있었고 그는 큰 손으로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내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잠자리를 살피러 온 듯했다.

“…….”

그는 한참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무겁게 감았던 눈을 떠 올려다보자 그는 스러질 듯 아련한 미소를 띤 채 내 눈가를 자신의 손으로 덮어주었다.

“주무세요.”

검은색의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러자 마법처럼 그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고 깊은 잠이 나에게 손짓했다. 깊은 물에 잠수하듯 천천히 수마에 빠져들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좋은 꿈 꾸세요, 요셉.”

꿈속으로 완벽하게 빠져들기 전 내가 대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침 햇살이 내 얼굴을 괴롭혀 일어났을 때 그의 흔적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채로 나는 개운하게 일어났다.

* * *

“오늘 점심은 사 먹는 건 어때요?”

“네?”

집사님이 드물게도 반문했다. 집사님의 음식은 여전히 끝내주게 맛있었다. 한 입만 먹어도 입이 호강한다. 하지만 역시 여행을 왔다면 현지의 음식을 먹는 것이 미덕이다. 그 나라, 그 도시 특유의 음식을 즐기는 법을 울리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제…… 요리에 무슨 문제가?”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집사님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여행을 오면 여행지의 대표 요리점 같은 곳에 가는 게 재미있잖아요.”

“아…… 아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본인의 요리에 큰 문제가 없음을 안 집사님은 평소의 얼굴로 수긍했다. 울리세는 요리를 먹으며 간간이 기대를 내비쳤다. 나 또한 아이가 그럴수록 점점 기분이 고조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멀쩡하게 여행의 두 번째 날을 맞는 건 처음이었다.

“다행이다.”

“……뭐가?”

내 손을 잡고 있던 울리세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걸 들었는지 물었다. 나는 씩 웃으며 다른 손으로 울리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핀…… 다시 꼽아줘…….”

내가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덕에 울리세의 앞머리를 고정했던 핀이 헐거워져 있었다.

울리세의 머리는 여전히 길었다. 내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정돈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의 머리를 자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길 바라며 나는 앞머리를 다시 고정해 주었다. 보기 좋게 동그란 이마가 귀엽게 드러났다.

“우리 울리세, 이마도 참 예쁘지.”

“그래……?”

“이마도 코도 눈도 참으로 예뻐. 크면 정말 미남이 될 거야.”

울리세는 쑥스러운 듯 내 손을 힘주어 꼭 잡았다. 발그레한 얼굴은 복숭아 같았고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눈이 쌓인 산길을 함께 내려갔다. 집사님은 우리보다 더 먼저 앞서 나가 빙판길인지를 확인했다. 그의 헌신이 무색하게 위험은 없었고 우리는 안전하게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광장에서 축제의 메인 이벤트가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 눈꽃…… 축제였나요?”

마을의 곳곳에는 흰색의 꽃이 그려진 작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 희소현상이라는 것을 이 도시의 사람들은 정말로 좋아하는 듯했다. 울리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깃발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특정일에 어쩌다 한 번씩 도시에 얼음으로 된 꽃이 한가득 피어난다고 하더군요. 그 특정일을 축제일로 정한 거고요.”

“와- 신기하다. 예쁘겠네요.”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고 보게 된다면 행운의 축복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행운의 축복이라. 그 정도로 드문 현상인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 행운의 축복이라는 것을 받는다면 기분이 좋을 테니까. 상상만 해도 아름다웠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꽃이 한가득 피어난다니. 사람들의 들뜸이 이해가 되었다.

“이따 광장에 가볼까?”

“얼음꽃은 광장에만 피진 않을 겁니다. 산장에서 기다려도…….”

“이왕 온 거 제대로 즐기고 싶어서요. 물론 울리세가 원한다면요. 울리세는 괜찮아?”

“응.”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울리세는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집사님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집사님은 이 근방의 식당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길도 헤매지 않고 척척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장소는 매우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어쩐지 평소에 먹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 나올 것 같았다.

“집사님, 여기 말고 우리 다른 곳 가요.”

“네? 이 근방에서 가장 나은 식당이 이곳인 것 같습니다만.”

내가 고개를 젓자 의아한 표정을 한 집사님이었지만 금세 의견을 굽혀주었다.

우리는 잠시 거리를 걸었다. 마을의 들뜬 분위기에 나도 물드는 기분이었다. 다만 핸드폰이 없어 맛집을 검색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괜찮았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여유를 즐기는 이 순간이 좋았다.

“축제…… 니까.”

“응?”

“건국제처럼…… 간식 파는 사람도, 있을까?”

울리세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건국제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음식을 사 먹었다. 그때 먹었던 크레페는 맛있었는데. 축제에 노점상이 안 오는 것이 더 이상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올걸? 축제는 그런 상인들이 꼭 오거든. 축제가 아니어도 사람이 모이면 물건을 팔러 와.”

“아…… 맞아. 스케이트 때도.”

고개를 끄덕이는 울리세는 호숫가에 음료를 팔러 왔던 사람들을 기억해 낸 듯했다.

“저곳은 어떻습니까?”

그때 옆에서 걷고 있던 집사님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담한 가게에서 사람들이 기분 좋은 얼굴로 나오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분명 끝내주는 식사를 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좋은 시간을 보낸 것이겠지. 둘 중 어떤 것이더라도 이 가게를 선택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어떤 것 같아, 울리세?”

“응…… 괜찮아.”

빵 모양의 간판이 있는 걸로 미루어 보아 빵 종류의 음식을 파는 곳이겠지. 자고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아무리 못해도 중간은 간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한 자리 남은 듯한 빈 테이블로 가 앉았다.

“흠. 식사용 팬케이크를 파나 보군요.”

메뉴판을 넘겨받은 집사님이 슥 훑어보더니 말했다. 식사용? 내게 팬케이크는 간식에 가까웠다. 꿀과 생크림을 얹어서 먹는 달콤한 간식. 단것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기대감에 찼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종업원이 와 물었으나 나와 울리세는 아직 메뉴를 보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집사님은 능숙하게 주문을 시작했다.

“식사용으로 내용물은 소고기로.”

“알겠습니다. 음료는?”

“우유와 배 주스 두 잔으로.”

“주문받았습니다.”

종업원은 메뉴를 받고 총총 사라졌다. 내용물이 소고기? 팬케이크라면 꿀 같은 달콤한 것을 뿌리는 것이 정석 아닌가? 식사용이라 다른 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집사님이 설명을 시작했다.

“울펜스 지역의 팬케이크는 얇게 구운 빵에 든든한 내용물을 말아 먹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먹으면 든든하긴 할 것 같다. 근데 그건 팬케이크가 아니라 또띠아 같은데. 뭐, 이 지방에서 팬케이크라고 하면 팬케이크인 거겠지. 그리고 이것 또한 맛있을 거다. 밀가루에 고기라면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음료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가져온 우유는 작은 꿀이 담긴 종지도 함께 서빙되었다. 나는 그것을 울리세의 앞에 놓아주었다. 자연히 남은 배 주스는 나와 집사님의 앞에 놓였다.

“와인도 괜찮았겠지만…….”

“안 돼.”

집사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리세가 단호하게 말했다. 집사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소한 대화를 하며 식당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생각보다 금세 나왔다. 그렇게 특출나게 맛있지는 않았다. 아마 맛은 따지자면 그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나았겠지. 아니, 그것보다 집사님의 음식이 더욱 맛있을 거다.

“맛있어?”

“응.”

울리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마을에 나온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여행하는 느낌을 울리세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 별것 아닌 대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 여유. 역시 아까 나온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이 가게를 고른 것은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기뻐 보이시는군요.”

“그럼요. 같이 이런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울리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사님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의 몫인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렇게 조용하고 화목한 시간이 지나갔다.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이 그렇게 평화롭게.

식당을 나온 우리는 잠시 마을을 돌아다녔다. 저녁의 하이라이트 이벤트 말고도 곳곳에는 즐길 만한 것이 많았다.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들을 전시한 공간. 자그마한 공연들. 심지어는 즉석에서 기념품을 만들어주는 장인들의 공간도 있었다. 실력 있는 장인인지 가격대가 좀 있었지만 다들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나 또한 울리세를 위해 하나 구매했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꽃 조각을 받은 아이는 날듯이 기뻐했다.

“고마워!”

울리세는 나를 꼭 껴안더니 애지중지하며 꽃 조각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커 아이의 자그마한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집사님이 그것을 가져가곤 울리세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련님, 산장에 가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대로 들고 다니시면 잃어버리실 것 같군요.”

“……응.”

시무룩하게 대답했지만 집사님의 말이 맞았다. 울리세는 텅 빈 손을 잠시 보다가 내 손을 잡았다. 풀 죽은 아이의 손을 꼭 잡자 아이는 금세 잊은 듯 방긋 웃었다.

우리는 예상외로 오랫동안 마을에서 축제를 즐겼다. 아까 내 말을 증명하듯 길가에 노점상이 많아 주전부리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렇게 저녁까지 광장에 있었다. 울리세의 손에는 아이의 머리카락처럼 몽실몽실한 솜사탕이 들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 점점 어두워지자 가로등에 빛이 들어왔다.

* * *

“드시죠.”

“고마워요, 집사님.”

집사님은 노점에서 사 온 감자 수프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울리세의 것도 있어 받아 건네주니 아이가 꼴깍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달콤한 간식으로 배를 채워 조금 걱정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축제의 메인 이벤트라고 해서 나는 조금 거창한 것을 기대했다. 퍼레이드라든지 그런 것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매우 조용한 이벤트였다. 얼음꽃이 피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모두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광장에 앉아 따뜻한 음료를 마셨다.

“응?”

주변을 둘러보다가 흰색의 옷자락이 일순간 눈에 띄어 멈칫했다. 사제복 같아 다시 주변을 둘러봤지만 착각이었는지 사제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사실 얼음꽃은 핀다면 울펜스 지역 전역에 피어나니 산장으로 돌아가도 괜찮습니다만…….”

“아니에요. 이왕 온 거 제대로 축제를 즐기고 싶어요.”

집사님은 마지막 권유였는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았다. 추운 날씨였지만 울리세와 거의 붙어 앉아서일까 전혀 춥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따뜻한 온도에 웃는데 근처에 앉은 가족의 대화가 불현듯 들려왔다.

“얼음꽃을 본 적 있어, 엄마?”

“그럼. 엄마가 아주 어릴 때 본 적이 있단다.”

“정말? 그럼 행운의 축복을 받았어?”

그러고 보니 행운의 축복이라는 것을 받는다고 했지. 그런데 그 축복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행운이니까 뭐 돈을 줍는다거나 그런 행운일까? 이 세계에 오기 전이라면 로또라도 당첨되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 같다. 자본주의에는 돈이 최고지.

“울리세는 꽃을 보면 어떤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어?”

“……행운?”

울리세는 손가락을 입에 댄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고민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원하는 행운이 많은 걸까, 아니면 생각이 나질 않는 걸까. 이왕이면 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울리세는 이내 곤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요셉이 있어서, 괜찮아.”

가슴으로 찡하고 오는 감동에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내가 있어서 괜찮다니! 내가 있어서 괜찮다니! 보는 눈이 없었다면 이 광장을 백 바퀴는 돌았을 거다. 물구나무를 선 채로.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리세를 껴안으며 말했다.

“형도 울리세가 있어서 괜찮아! 울리세야말로 이 형의 행운의 요정이지.”

“헤헤.”

울리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똑똑히 들렸다. 나는 더 세게 울리세를 껴안고 아이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묵직한 몸무게. 정말 아이가 많이 자랐다는 것을 느꼈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옛날 같았으면 아이가 소리 내어 웃는 일도 없었겠지.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밖에서 그러시면 사람들이.”

“에이, 뭐 어때요. 형 동생이 애정 표현 좀 할 수 있는 거지. 그치?”

“응.”

“도련님은 동생이…… 하…….”

집사님은 결국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긴 나와 울리세는 까마득한 격차가 있긴 했다. 나는 이 세계의 신분으로 고작 기사였고 울리세는 왕위 계승 후보자다. 아무리 친모의 신분이 평민이라 울리세 또한 평민의 신분이라도 엄연한 왕의 핏줄이다.

“뭐 어때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걸.”

“……제가 뭐라고 합니다만.”

집사님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독기가 없어 그저 가벼운 트집 정도로 보였다. 위압감으로 찍어 누르던 집사님을 본 적이 있기에 이 정도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집사님 부러워요? 집사님도 안아드릴까요?”

“……후.”

웃는 낯에는 침을 못 뱉지. 내 인생의 격언이다.

놀리듯 말했지만 집사님은 화를 내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울리세를 조금 더 안정감 있게 껴안았다. 잠시 조용해졌을 때, 문득 집사님은 바라는 것이 뭔지 궁금해졌다. 나는 딱히 고민하지 않고 바로 집사님에게 물었다.

“집사님은 축복을 받는다면 무슨 행운이 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집사님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인데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려나 보다.

그는 흘긋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얇게 뜬 눈과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새초롬하게 뜬 눈이 분명함에도 짙은 색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뱀처럼 기어와 나를 옭아맸다. 하지만 분명 내 착각일 거다. 집사님이, 그가 나에게 이런 시선을 보낼 리가 없으니까.

“하…… 하하, 집사님?”

“네.”

“생각나는 게 없어요? 하긴 집사님은 뭐든 잘하니까 행운이 없어도 괜찮겠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내 볼을 찔러왔지만 나는 꿋꿋이 둔한 척 마주하지 않았다.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끊은 것은 울리세였다. 아주 담담하고 또렷하게 아이가 말했다.

“집사가 원하는 건 자유야.”

“어?”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아이를 보고 집사님을 보았다. 집사님은 내게 보내던 시선을 돌려 울리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험악한 시선에 울리세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울리세에게 진심으로 해를 끼친 적이 없음에도 내 몸은 바로 울리세를 보호했다.

“집사님, 진, 진정하세요.”

“…….”

집사님은 한참이나 내 품속에 있는 울리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훌쩍 떠났다.

그가 매섭게 자리를 떠난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아이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숨이 막혔는지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울리세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아이는 대체 왜 그랬을까?

“울리세, 아까는 왜…… 그런 거야?”

“…….”

하지만 울리세도 입을 딱 다물었다. 고집 있게 다물어진 입은 아무래도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집사님은 어른인데도 어른스럽게 굴지 못했다. 자유라, 그게 그의 약점이었을까.

“노예제도가 있는 세계인가 여기.”

아니면 퇴사를 외치는 현대인과 비슷한 걸까. 하지만 고작 그런 거면 사직서를 내면 그만이다. 왜 저렇게 민감하게 군 건지 모르겠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울리세가 내 한숨을 들었는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집사님은 한참이 지나도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단둘이 남아 광장에서 함께 피어날지 모르는 얼음꽃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기다리던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쉬운 기색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되돌아갔고, 우리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장으로 돌아갈까?”

“응.”

길을 모르지는 않았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산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길을 걸었다. 이벤트는 아주 늦은 시간에 끝났다. 얼음꽃이 대체로 피어나는 시간이 늦은 밤이기 때문이다. 위험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아직 길거리에 있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돌아가면 집사님이 와 있을까?”

“응.”

어쩐지 확신에 찬 말이었다. 하지만 울리세가 집사님의 위치를 알 리가 없다. 내 착각이겠지. 어느새 길거리를 벗어나 산길에 들어섰다. 다행히 가로등이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그리고 산장에 도착해 문을 열자 그곳에는 집사님이 있었다. 아까의 그 흉악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평소의 차가운 모습이었다.

“오셨군요. 오시는 길은 위험하지 않으셨습니까?”

“어, 네. 집사님은…….”

“들어오시죠. 벽난로 앞에 몸을 녹이고 계시면 따뜻한 것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까는 굉장히 화나 보였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니. 어쩐지 더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뿐인 듯 울리세는 안으로 척척 들어가 벽난로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곤 옆자리를 툭툭 쳤다.

나는 떨떠름하게 아이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생각보다 밖의 추위가 나를 많이 얼렸던 모양이다. 훈훈한 열기에 노곤해져 그냥 바닥에 눕고 싶어졌다.

“누우시면 안 됩니다. 드시고 조금 뒤에 들어가서 씻으세요.”

“네에…….”

집사님이 건네준 머그잔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강차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추웠으니 감기에 걸리지 말라는 의도로 고른 것 같았다. 나와 울리세는 홀짝거리며 차를 마셨다. 뜨거운 차를 마시니 내장까지 후끈해진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집사님.”

“별말씀을. 제가 할 일입니다.”

집사님은 감정의 편린 하나 보이지 않고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멀찍이 서 있었다. 아까까지는 마치 가족처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쉬웠다.

차를 모두 마신 후 울리세와 목욕할까 했지만 아이는 혼자 하고 싶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아쉬운 마음을 참고 나도 빠르게 목욕을 했다. 그러곤 두꺼운 잠옷을 입고 도망치듯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그러나 복잡한 마음에 잠들지 못했다.

“제길.”

이 세계로 온 뒤 내 몸은 생리 활동이 사라졌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 몸은 수면도 필요하지 않다. 물론 자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자야 하니까 자야지 하는 느낌. 그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생각이 들면 귀신같이 잠기운은 사라졌다.

“젠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투를 걸친 나는 밖으로 나왔다. 저택과는 다른 아늑한 복도를 지나 산장의 밖으로 나왔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마당은 눈 덕분인지 반짝반짝한 것이 예뻤다. 나는 문 앞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마치 영혼이 빠져나오듯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외투가 두꺼워 다행이었다. 그때 등 뒤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요셉 님.”

급한 발걸음은 평소와 다르게 인기척이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집사님의 등장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를 보고 눈에 띄게 안심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추운데 그렇게 나오신 거예요?”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나와는 달리 그는 와이셔츠에 특색 없는 얇은 천 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감기에 걸리는 건 당연했다. 급하게 외투를 벗어 집사님에게 둘러주었다. 다행히 외투의 품은 커 나보다 큰 집사님에게도 넉넉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안 돼요. 집사님이 아무리 천재라도 병을 피해 갈 수는 없어요.”

집사님은 잠시 말이 없더니 내가 둘러준 외투를 입곤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튀어 오를 뻔했지만 단단하게 나를 붙든 손에 굳건히 그의 품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갑, 갑자기 왜?”

“아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눈을 초승달같이 곱게 휘며 웃었다. 그 눈에서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유혹이 다시 한번 나를 이곳에 붙들어 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눈빛에 휘어 잡혀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저도 안아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제가 언제요?”

“저런. 모른 척하시다니. 이 집사,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나를 껴안은 이 남자가 집사님이 맞나? 이렇게 능청스러운 행동이라니. 나를 단단히 옭아맨 손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덩치가 훨씬 컸기에 단단한 그 품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놔…… 주시면 안 될까요?”

“감기 걸립니다. 또 요셉 님이 앓아누우시면 이 미천한 집사 마음에 상처가 더 생길 것 같군요.”

집사님이 이렇게 능글맞은 사람이었나. 내가 혼란에 빠진 것과 별개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건 따뜻했다. 광장에서도 느꼈듯 사람의 온기란 추위에 큰 도움을 주니까. 그는 내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는지 이젠 나를 껴안고 계단 위에 앉았다.

그렇다.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된 것이다. 내가 아무리 집사님보다 허약하다 해도 성인 남성이다. 무게가 꽤 나갈 텐데 그는 종이 인형 다루듯 했다.

“오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직도 집사님이 내게 보내던 차가운 눈빛을 기억한다. 온몸이 저려오는 살기. 나를 향해 보내던 증오심. 봄날처럼 달콤하던 기분이 북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싸늘해졌던 그때.

내가 착각만 안 했어도 그 행동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거다. 그의 점점 다정해진 행동에, 친밀감에 내가 들뜨지만 않았어도.

지금 집사님이 내게 하는 행동에 또다시 들뜬다면 나는 재차 상처받고 말겠지.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다시 뛰려 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집사님을 올려다보았다.

“……글쎄, 왜일까요.”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얼굴은 진주같이 매끄럽게 빛났다. 농염한 유혹을 담은 푸른 눈이 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느라 음영이 진 얼굴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외모에 끔찍이도 약한 나는 그 매혹적인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싫으신가요?”

“아…… 뇨.”

그는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여우에 홀린 것처럼 순순히 대답했고 결국 그의 품에 단단히 가둬졌다. 싫지 않다고 말한 것은 나였다.

“이번 여행에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러게요…… 다행이에요.”

벌써 여행은 이틀째였다. 이대로라면 안심해도 괜찮겠지. 내가 신경을 쓴 만큼 집사님 또한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하긴 그 두 번의 난리 통에 내가 크게 다쳤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꼼짝없이 그가 간호하게 되니까 말이다.

“이런…… 여행은 처음입니다.”

“처음이요?”

“네. 이런 평화롭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은…… 처음이군요.”

집사님의 지친 목소리는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위로하듯 나를 껴안은 그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요셉 님은 이런 여행을 자주 다니셨나요?”

“음. 아뇨. 그건 아니에요.”

“많이 다니신 것처럼 보였는데…….”

현대 한국에서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나 같은 서민은 시간적 여유도 자금의 여유도 없었다. 물론 작정하고 여행을 가고자 하면 갈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난 그 정도로 여행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아주 어린 시절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여행과 형, 누나와의 짧은 여행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형이랑 누나가 아주 가끔 놀러 가자고 했거든요. 놀러 나가는 것도 정서교육에 필요하다면서.”

“……좋으신 분들이군요.”

“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자랐죠.”

가족 이야기를 하니 그리움이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현실에서 그다지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오래 만나지 못한 건 오래간만이었다. 다들 일부러라도 한 번씩 안부를 물어보고 시간을 내어 교류했다.

“요셉 님 덕분에…….”

가족들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어 있을 때 집사님이 느릿하게 말하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솜털을 만지듯 조심스럽고 세심한 손길에 볼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얼굴은 토마토처럼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울리세에게 여행의 좋은 기억을 남겨주려고 한 것인데 의외로 집사님까지 즐겼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감사 인사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집사님의 의도를 모르겠다.

아니, 진정 모르는 게 맞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어떤 미인이 와도 고개를 수그릴 미모는 마치 꽃들의 왕 모란과도 같았다. 그 어떠한 꽃도 그의 앞에선 빛이 바래고 그 어떠한 보석도 가치를 잃을 거다. 그런 그가 내게 보내는 시선은…….

“제 얼굴에 무언가 묻었나요?”

사르르 웃는 그 눈은 농염하게 익은 술처럼 나를 꾀어냈다. 착각이라고 계속 되뇌었으나 나 또한 성인이다. 유혹하는 눈빛을 착각하기엔 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왜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대체 왜? 이 세계에 와서 한 것은 울리세를 보살핀 것뿐이다. 그것마저도 보호자의 역할이 미숙해 잘못 행동한 적이 종종 있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의 다정한 행동에 착각했던 적이 있지 않나. 이것 또한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이것은 내 착각이다. 그럴 것이다.

“잘생겨서…… 저도 모르게 보고 있었어요.”

집사님은 피식 웃었다. 요즘 따라 집사님의 웃음이 헤퍼진 것 같다. 그것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가 웃는 모습을 상상해 보아라. 그야말로 국보급의 보물이다. 볼 때마다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계단참에 앉아 있었다. 추운 겨울날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서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공유했다.

그 순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설탕 가루처럼 작은 알갱이가 허공에서 춤을 추며 내려왔다. 마치 요정이 춤을 추는 듯한 그 모습에 시선을 뺏기자 알갱이가 닿은 곳에서 서서히 얼음꽃이 피어났다. 신비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나는 감탄을 계속 내뱉었다.

“와. 와, 너무 예쁘다. 와……. 와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집사님이 놔주지 않았다. 그때 운 좋게도 알갱이가 바로 앞에 떨어졌고, 덕분에 피어난 꽃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생김새는 장인들이 조각한 크리스털과 비슷했다. 그러나 아무리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어 아름다워도 결국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이 얼음꽃에 비하면 그 빛이 바랠 것이 분명했다.

“운이 좋았군요. 보통이면 이 시간에 피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건 왜 피어나는 걸까요?”

“글쎄요.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군요. 그저 희소한 현상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집사님도 모르는 게 있구나. 그는 나를 품에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주섬주섬 겉옷을 벗어 도로 내게 입혀주었다. 겉옷을 입었음에도 그가 나를 놓아 급격하게 빈 온기에 싸늘함을 느꼈다. 그는 앞에 피어난 얼음꽃을 똑 떼어내 내게 내밀었다.

“요셉 님에게 행운이 오기를 바랍니다.”

멍하니 꽃을 받아 들자 그는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쥐어진 얼음꽃이 차가웠을 텐데도 나는 그걸 느낄 새가 없었다.

잔상처럼 집사님의 모습이 망막에 그대로 남았다. 꽃을 건네주는 집사님은 손에 쥔 꽃보다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교교한 월색이 드리운 얼굴은 얼음꽃의 눈부심을 꺾었다. 그 모습에 매료당한 나는 손의 꽃이 녹아 물이 될 때까지 넋을 놓았고, 손이 축축해진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주변의 얼음꽃들도 녹아 사라진 채였다.

“하…… 제길.”

복잡해진 속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지러워진 머리를 부여잡고 나는 내 방으로 황급히 되돌아왔다. 처음 집사님에게 두근거렸던 그날 같은 모양새였다.

* * *

지난밤. 한참을 밖에서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집사님의 온기 덕분일까.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다. 삼 일째 되는 날은 마을로 나가지 않았다. 벽난로 앞에서 뜨끈한 온기를 즐기며 카드놀이를 하거나 구석에 있던 오셀로를 했다. 체스나 장기 같은 게임은 못 하지만 오셀로는 간단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사님은 워낙 뭐든 걸 처음부터 잘했고, 울리세마저 두 판 정도 하더니 나를 계속해서 이겼다. 순간 기차에서 했던 카드 게임이 생각났다. 울리세는 나중에 게임 쪽으로 나가도 분명 대성할 거다.

“그러고 보니 밖에 캠프파이어를 할 만한 곳이 있던데. 오늘은 거기서 놀까요?”

“그런 게 있기는 했지요. 하지만 춥지 않을까요?”

“요셉이…… 바비큐 해주기로, 했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집사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에 박혀 있던 커다란 석쇠를 들고 왔다. 고기를 굽기에 제격이었다. 울리세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아이와 나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집사님은 이미 불을 지피고 석쇠를 고정해 놓았다. 테이블에는 구워 먹을 고기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스테이크용 같아 보이는 고기부터 소시지까지, 그야말로 고기 파티였다.

“오늘은 제가 구울 테니 모두 앉아서 기다려요.”

“하지만…….”

“응.”

집사님이 뭐라고 하기도 전 울리세가 다람쥐처럼 캠프파이어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집사님은 잠시 울리세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저번의 요리는 집사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바비큐는 고기를 굽기만 하면 되니까 괜찮으리라.

그리고 그 생각은 얼추 맞았다. 소금을 쳐 구운 고기를 우리는 행복하게 먹었다. 집사님도 울리세도 우물거리며 먹는 걸 보니 내가 다 배불렀다. 집사님과 울리세는 내가 안 먹는 것 같았는지 입에 고기를 계속 물려주었다.

“배불러…….”

울리세가 보기 드물게 과식을 한 모양이다. 하긴 평소라면 접시에 담겨 오는 만큼만 먹었는데 오늘은 내가 굽는 족족 입에 넣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아기 새처럼 받아먹는 모습이 귀여워 계속 구워 준 내 실책이었다.

“아이고, 배불러?”

배를 문질러 주자 아이의 배가 빵빵하게 부푼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집사님은 그런 우리를 보며 말했다.

“산책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떨까요. 이 앞에 호숫가가 있습니다.”

맞다. 오는 길에 표지판이 있었지. 소화도 시킬 겸 주변 구경을 가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울리세와 나는 손을 잡았고, 집사님은 앞서가 길을 살폈다.

“집사님, 그렇게 앞에 가지 말고 같이 가요.”

“하지만…….”

“괜찮아요. 길이 언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 얼른요.”

재촉하자 집사님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냉큼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란히 길을 걸어가자 기분이 좋았다.

호숫가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10분 정도를 걸었을까 저 멀리 호수 일부분이 보였다. 하얗게 언 것이 그 위를 걸어 다녀도 괜찮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스케이트…….”

울리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겐 스케이트화가 없었다. 저택으로 되돌아가면 다시 스케이트를 타러 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 세계의 추운 날씨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이왕이면 조금 더 유지되면 좋을 텐데.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호숫가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어?”

차가운 무언가가 발목을 세게 잡았다.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튀어나온 사람의 손이었다. 단단히 얼어붙었던 호수는 어느새 소리 없이 부서져 일렁이며 속내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길게 생각하기도 전, 나는 억센 힘에 끌려가 물에 처박혔다.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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