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왕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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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씨 장편소설
목차
4장 악마(1)
5장 무너진 벽
6장 악마(2)
7장 여행이 끝난 뒤
다행히 표정 관리를 잘해냈기에 별다른 잡음 없이 우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울리세는 유쾌해 보였고 집사님은 조금 멍해 보이는 것 빼곤 모든 게 괜찮게만 느껴졌다.
안심하고 방에 되돌아온 나는 일기장부터 펼쳤다. 처음 봤던 페이지 말고도 두 장이 더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비뚤거리는 글씨체로 적힌 내용을 읽었다.
[혼자 마법을 독학하기로 했다. 검보다는 낫겠지. 이대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마법으로 그 자식을 내쫓았다. 도망가며 나를 보는 눈이 마음에 들었다.]
그 자식? 저번에 해금된 일기에서 나왔던 폭행범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기를 쓰는 왕자라는 아이는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 분명했다. 폭행에 노출되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 확실했다. 뭐든 간에 신고가 시급한 상황.
그래도 노트가 낡은 것을 보니 먼 옛날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성인이 되었을 테니 조금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울리세 같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화들짝 놀랐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울리세와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데. 어쩐지 이 일기장의 주인과 울리세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울리세는 왕자일 수가 없다. 일단 아이는 아직 그저 후보자일 뿐이다. 내가 옴으로써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이제야 막 누리고 있다. 게다가 이 일기장은 너무나 낡았다. 나는 누렇게 변색된 내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누굴까…….”
누군지 모를 이 일기장의 주인이 보고 싶었다. 누군지 알고 제대로 도와주고 싶었다. 현실의 나였으면 부족한 통장의 현실에 도와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모두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일기장의 해금 조건도 모른다. 누군지 안다면 좋을 텐데.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면 제일 좋을 거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피해자가 없다는 거니까.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이걸 봐도 괜찮은 걸까? 게임에서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해금해 모으는 콘텐츠는 자주 있었다. 나도 그런 것을 모으는 걸 좋아하고.
하지만 지금 나에게 이건 현실에 가까웠다. 게다가 하필 일기장이다. 사람의 가장 개인적인 사정이 담겨 있는 비밀스러운 부분. 이미 개인적인 부분을 잔뜩 본 상태여서 양심이 납작해지는 기분이었다.
“……으.”
이 조그마한 노트를 어떻게 해야 할까. 방 안에 두기도 그렇고 들고 다니기도 그렇다. 이럴 땐 게임다운 게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인벤토리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현대인이 게임을 할 때마다 가장 부러워하는 것. 인벤토리. 질량과 부피를 따지지 않고 일정량이 수납 가능한 게임 캐릭터의 특권! 나는 그런 것이 없으려나. 너무 가지고 싶다. 아니, 그런데 막상 또 그런 기능이 튀어나오면 혼란스러울 것 같다. 지금까지도 게임 시스템이 나오면 힘들었으니까.
[오류가 일정 복구됩니다!]
“어?”
[인벤토리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어!”
눈앞에 반투명하고 네모난 판이 나타났다. 게임에서 흔히 보이는 바로 그 디자인이었다. 나는 아려오는 머리를 꾹 눌렀다. 한참을 침묵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손에 든 노트를 판에 가져다 대어봤다.
“으…….”
노트는 쑥 하는 소리와 함께 창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아 더욱 소름이 끼쳤다. 전부 다 들어가자 인벤토리 창에는 도트로 귀엽게 찍힌 일기장이 나타났다. 이렇게 게임스러운 것이 나타나다니.
나는 심호흡을 시작했다. 아까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막상 진짜로 나오니 어지러웠다. 어서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인벤토리라는 편리한 것을 얻은 것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편해지니까 좋은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딛고 있는 땅이 쑥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내 나약한 정신이 이것을 받아들이기 벅찬 모양이다.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왜…… 안 사라지지.”
씩씩거리는 숨을 어떻게든 참으며 창을 노려봤다. 오른쪽 상단에 있어야 할 x자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무시하면 어느 순간 사라졌던 시스템 창들과 달리 이번의 인벤토리 창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왜지? 그동안의 것들과 다른 이유가 있나? 어떻게 해서 이번 창이 나타났지? 어지러운 머리로 곰곰이 생각했다.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겨우 인벤토리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했던 걸 기억해 냈다. 설마……? 하지만 시도해 볼 필요는 있었다.
“인벤토리 창, 사라져.”
거짓말같이 인벤토리 창이 사라졌다. 그것을 보자 온몸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음성인식이라니. 엄청나게 미래지향적이잖아.
나는 VR게임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마우스로 클릭하거나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못한 게 멍청했다. 지금까지 SF 배경인 게임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하하. 하……. 후…….”
그렇다면 지금까지 떴던 스탯 창이라든가, 알림 창 모두 말하면 뜨는 걸까? 궁금증이 드는 동시에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겨우겨우 버틴 것과 다름없다. 예고 없이 뜨는 시스템 창. 울리세의 상태에 따라 변동하는 수치들을 알려주는 스탯 창. 모두 싫었다.
“……차라리 여기가 정말로 현실이면 좋을 텐데.”
정말로 현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게임 시스템이 없는 현실이었다면…….
허탈함에 공허한 웃음이 나왔다. 하하. 현실이었다면 난 울리세와 집사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 거다. 김요셉은 사실 겨우겨우 하루를 버티는 가난한 서민이니까.
나만 존재하는 방 안에서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침대에 올라가 잠이 들었다. 도피에 가까운 취침이었다. 하지만 도피로 도착한 곳은 예상치 못한 공간이었다.
“어…….”
먼지가 가득한 창틀. 차가운 돌이 깔린 복도. 나무가 빼곡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창문. 익숙한 장소였다. 내가 머무르는 울리세의 저택이다. 이제는 집사님의 청소로 깨끗하지만 처음 왔을 때의 집은 이런 모습이었다. 1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먼 옛날의 장소 같았다.
“……뭐지.”
내 몸을 봤지만 평소의 나였다. 자기 전의 옷 그대로였다. 나는 시험 삼아 볼을 꼬집어보았다.
“꿈이네.”
아프지 않았다. 꿈이라 인식하니 무언가 마음이 편해졌다. 뭘 해도 괜찮은 것이 꿈 아니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것, 복잡한 속을 꿈으로나마 후련하게 털어내고 싶었다. 뭐라도 부수면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꿈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이놈의 애새끼는 먹는 것도 많이 처먹고, 귀찮아죽겠네!”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걸걸하고 신경질적인 남성의 목소리에 부엌으로 향했다. 꿈이었기에 들킬 일은 없지만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가 냄비를 거칠게 휘젓고 있었다.
“어휴, 귀찮아. 대충 섞어 줘야지.”
국자로 퍼 올린 음식은 그야말로 잔반에 가까웠다. 가축에게나 줄 것 같은, 아니, 요즘은 가축도 제대로 된 사료를 먹는다. 저건 음식물 쓰레기였다. 꿈이기에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에 감사했다. 분명 고약한 냄새가 났을 거다. 하지만 딱 봐도 역겨운 모습이었기에 절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어……!”
얼굴을 찡그리며 옆을 보자 조그마한 그림자가 후다닥 어딘가로 사라졌다. 저게 뭐지? 저런 폭력적인 남자보단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에 더 호기심이 일었다. 이 장소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것도 한몫했다.
나는 빠르게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현실이었으면 지쳤겠지만 꿈속의 나는 무적이었다.
“기다려!”
그림자는 정말로 재빨랐다.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림자는 이 저택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점차 구석지고 음습한 곳으로 향했다. 따라가며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도착한 곳은 어둡고 쥐가 있을 것 같은 아주 지저분한 방의 구석이었다.
“아이고, 지저분해라. 이런 곳은 건강에…… 안 좋을…….”
조그마한 그림자. 발걸음 소리가 없던 조그마한 그것은 아주 꼬질꼬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귀여웠을 얼굴은 삐쩍 말라 볼이 움푹 팼고 머리는 쥐 잡아먹은 듯 이리저리 잘려 있었다. 낡은 옷을 걸친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얼룩덜룩한 그 몸은 폭행의 흔적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퍼석한 연보라색의 머리카락과 심해보다 깊은 푸른색의 눈동자.
“울…… 리세?”
그건 울리세였다. 형편없는 모습, 내가 처음 만났던 때보다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울리세였다.
“왜……?”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꿈이라면 이상하고 좋은 것만 꾸면 안 되는 걸까. 차라리 귀신이나 괴물이 나오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어린아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꿈이라니.
심지어 그 어린아이가 울리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끔찍했다. 재앙에 가까웠다. 어서 꿈에서 깨고 싶었다. 볼을 있는 대로 꼬집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지만 나는 여전히 참혹한 꿈 안이었다.
“이 빌어먹을 쥐새끼는 어디로 간 거야?!”
설상가상으로 아까 그 남자의 고함이 울렸다. 크지만 낡은 집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는 위협적이었다. 걱정스러움에 울리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조용히 웅크려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숨은 듯 필사적으로 보였다.
“……!”
불현듯 깨달았다. 아이는 현실의 울리세와 다른 점이 있었다. 울리세는 처음 만났을 때 아무런 생기가 없는 인형 같았다. 몸이 깡마른 것은 비슷했지만 얼룩덜룩한 폭행의 흔적은 없었다. 머리카락도 아무렇게나 자라 있긴 했지만 저렇게 마구잡이로 잘려 있지 않았다. 저것은 필시 다른 사람이 괴롭힘을 목적으로 자른 흔적이었다.
그리고 뭣보다 내 아이는, 저렇게 사람을 죽일 듯이 불타는 눈동자를 하고 있지 않았다.
푸른색의 어두운 눈동자는 고통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로 타오르고 있었다. 자그마한 아이는 온몸이 누더기처럼 엉망이었지만 그 눈만은 생생히 살아 있었다. 텅 비어 생기가 없던 울리세의 눈과는 정반대라 낯설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바로 밖에서 들려왔다. 아이는 무섭게 문을 노려보았다. 이게 꿈이라서 다행이다. 저렇게 분노로 자기를 불태우는 아이의 모습은 서글프니까. 아이는 그저 웃기만 하면 되는 건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배우고, 누구보다 행복하면 되는 건데.
쾅!
문이 열렸다. 동시에 내 의식이 멀어졌다. 다행이다. 아무리 꿈이라도 아이가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이 그저 단순한 악몽이기를, 현실의 그 무엇과도 관련이 없기를 바랐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기도했다.
* * *
복도에 내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겨울이라 싸늘해진 바닥 덕분에 발이 시렸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에게 가장 급한 건 울리세였다. 악몽 속의 엉망진창이었던 아이가 계속 눈에 밟혔다. 당장 울리세가 멀쩡한 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한참을 뛰어 폐가 아팠다. 평소에는 체력이 안 좋으니 적당히 기세를 조절하는데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참혹한 형태를 하고 있던 울리세가, 아니, 울리세와 닮은 그 아이가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쉬지 않고 뛴 바람에 힘들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한참을 숨을 고르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후우…….”
울리세는 방 안에 있었다. 내가 사 준 수십 개의 인형에 둘러싸여 푹신한 침대 위에서 요정처럼 잠들어 있었다. 옷장 안에 숨어들 듯 자던 아이는 이제 이렇게 평화롭게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확인하자 그제야 걱정이 녹아내렸다.
“다행이야.”
꿈속에서 악의에 노출된 아이는 그저 내 망상이겠지. 일기장을 본 탓에 영향을 받은 것일 터.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할까? 꿈이란 걸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현실과 연관이 없길 바랐다. 기실 그것은 하나의 직감에 가까웠다. 분명 현실과 어떠한 식으로라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
“…….”
울리세의 앞머리를 쓸어 만지며 나는 한참을 방에 머물렀다. 새벽녘이 올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방을 나오기 전, 울리세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천사 같은 아이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꿈결에 빠져 있었다.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망막에 새길 듯이 계속해서 울리세를 쳐다보았다. 계속해서.
하지만 결국 꿈속의 비참했던 아이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 *
“…….”
입맛이 없었다. 꿈을 꾸기 전의 심란한 상황과 손에 꼽힐 정도로 끔찍했던 악몽은 나를 초췌하게 만들었다. 현실의 울리세가 분명 행복함에도 나는 계속 그 아이가 눈에 밟혔다.
집사님이 정성스럽게 끓였을 옥수수 수프는 맛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목구멍에 넘기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심지어 배도 고프지 않아 더했다. 차라리 배가 고팠으면 좋았을 텐데.
“……요셉.”
“아, 응. 울리세 왜 불렀어?”
울리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차 싶었다. 나 혼자 있는 식탁도 아닌데 이렇게 티를 내다니. 게다가 꿈속의 아이가 신경 쓰인다 해도 결국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눈앞의 울리세다.
나는 허겁지겁 내 피곤함을 수습했다. 있는 힘을 다해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이의 걱정스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 아파?”
“아니, 아냐. 그냥 잠시 멍 때린 거야.”
“……진짜?”
내 필사의 노력에도 아이는 계속 나를 걱정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굴었으면 이런 조그마한 아이가 나를 걱정할까. 폐부를 찌르는 자괴감에 나 자신을 속으로 몇 번이고 때렸다. 상상 속의 나는 피떡이 되어 엎어졌다. 더 때리고 싶었지만 울리세를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응. 걱정하지 마.”
울리세는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내가 표정 관리를 잘해서 다행이었다.
달그락. 집사님이 내 옆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의아해 집사님을 보자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피곤하신 듯하여…….”
“……감사해요.”
그는 내가 잠을 그다지 자지 못한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하긴 눈 밑이 퀭하니 모를 수가 없긴 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는 사람을 초췌하게 만든다. 잠이 필요 없는 몸이어도 스트레스에 못 잔 것처럼 보인다는 게 조금 우스웠지만.
어쨌든 집사님의 세심한 보살핌에 나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내 배는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효과는 있는 듯했다. 옛날이었으면 이런 커피 스무 잔을 마셔도 잠이 깨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한 잔만 마셔도 정신이 들었다.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 조금 웃겼다.
“그럼, 도련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응.”
“잘 다녀와, 울리세.”
울리세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활기차게 식당을 나섰고, 등원을 위해 집사 또한 떠나갔다.
텅 빈 식당에 나 혼자 남자 갑자기 적막함이 덮쳐왔다. 이래서야 혼자 살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다. 씁쓸함에 커피 잔을 문지르고 한 입 마셨다. 집사님의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하아아…….”
어제의 일이 계속 생각났다. 일기. 인벤토리. 악몽.
아무리 생각해도 난 조금 더 게임 시스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고 게임 시스템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아무리 갑작스럽다고는 해도, 어제의 새로운 게임 시스템 등장에 나는 또다시 패닉에 빠졌다. 새로운 게임 시스템이 등장할 때마다 이럴 수는 없다.
그리고 진정된 후 생각하니 인벤토리란 세상에서 가장 편리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긴 했지만 애초에 내가 먼저 중얼거리지 않았던가. 그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 이 좋은 걸 안 쓸 수는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인…… 벤토리.”
인벤토리 창이 나타났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창이었다. 내가 먼저 부르긴 했지만, 또다시 깜짝 놀라 몸이 들썩였다. 덕분에 의자와 식탁이 넘어질 듯 크게 덜컹거렸다.
“후우…….”
심호흡을 했다.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나는 집사님이 울리세를 데려다주고 올 동안 익숙해지고자 인벤토리에 물건을 넣었다 빼는 둥 한참을 조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고작 이런 것에 손발을 벌벌 떠는 게 웃기기도 했다. 영화 같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데. SF 장르는 허공에 떠오르는 이런 패널을 종종 사용하니까.
연습하던 중, 밖에서 나는 마차 소리에 멈췄다.
“요셉 님, 땀에 잔뜩 젖으셨군요. 괜찮으신가요?”
“으…… 네.”
집사님이었다. 어지러움에 이마를 짚고 있자 울리세를 데려다주고 돌아온 집사님이 나를 살폈다. 나갈 때만 해도 피곤해 보일 뿐 그렇게까지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돌아오자 골골거리고 있으니 당황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방에서 할걸. 아니다, 아까 생각난 김에 바로 하지 않았다면 정작 방에 들어가 아무것도 안 했을 가능성이 컸다.
“잠을 잘 못 주무신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오늘따라 유독 힘들어하시는군요. 몸이 편찮으신 건가 걱정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하얀 손수건은 집사와 닮아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다정한 보살핌에 나는 빠르게 현실감을 되찾았다.
집사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울리세와 같이 나에겐 닻이 되어준다. 그가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내 심정을 듣는다면 집사님은 질색할지도 몰랐다.
“그……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 감사해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집사님은 어느 정도 내 이마를 훔치곤 손수건을 거둬갔다. 멀어지는 손길이 못내 아쉬웠다.
“커피…… 는 이미 드셨으니 허브티라도 타 오겠습니다.”
금세라도 자리를 떠날 것 같은 모습에 나는 황급히 그를 붙들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따뜻한 허브티가 아니었다. 사람의 온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집사님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에 나는 되레 놀라 집사님을 놓았다.
“죄송해요.”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집사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느껴졌다. 따가울 정도로 머리 위로 박히는 시선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따뜻한 손길이 머리에 내려앉았다. 슥슥. 내 머리를 쓰다듬은 건 분명 집사님이었다.
“요셉 님,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겨울임에도 느낄 수 있는 봄 같은 따뜻함. 이끌리듯 고개를 들자 나를 향해 은은하고 온화한 미소를 보일 듯 말 듯 짓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집사님…….”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친구니까.”
친구. 그 소리를 듣자 몸에 가득했던 피로감이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고작 친구라는 단어임에도 날아갈 듯 좋았다. 나와 집사님의 사이에 높았던 벽이 어느 정도 없어진 것 같아 그런 걸까.
“그럼 허브티를 타 오겠습니다.”
내가 진정하자 집사님은 재차 허브티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의 손길 덕에 아까보다 훨씬 안정적인 상태가 된 나는 그제야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땀내가 슬슬 올라오고 있었고 온몸이 끈적끈적했다. 한마디로 지저분한 상태였다. 그런 나를 섬세하게 살펴준 집사님은 정말 호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차를 얻어 마실 수는 없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님, 저 차는 괜찮아요!”
크게 외치고 내 방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달렸다. 빨리 욕탕으로 들어가 더러움을 씻어내고 싶었다. 다행인 점은 내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집사님이 나를 붙잡는 일은 없었다.
몸에서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벅벅 닦은 나는 맹세했다. 앞으로 익숙해지는 훈련은 방 안에서 하기로.
* * *
나 홀로 하는 훈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왔던 시스템 창 같은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직접 접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 인벤토리 창을 켠다고 정신이 혼미해지지는 않았다. 제대로 쓰기에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이만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요셉 님.”
“네?”
식사 시간. 보통 집사님은 식탁 옆에 가만히 서 있거나 음식을 가져다준다. 같이 먹자고 얘기를 해보긴 했다. 하지만 그가 우리와 식사를 함께한 건 저번의 휘황찬란한 만찬 음식을 차렸던 때 외에는 없었다.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 이 집에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오는 것은 신문 정도였다. 시내에서 정기 구독을 한 후로 꾸준히 오고 있었다. 그 외에는 이 세계에 친지 같은 것이 없어 올 리가 없는데……. 광고인가?
하지만 받아 든 편지는 그야말로 고급스러웠다. 편지를 봉한 실링에는 멋들어진 문양이 찍혀 있었다.
“……후원자 요셉 김 귀하?”
혹시나 해 받는 사람 이름을 확인했지만 내 이름이 맞았다. 언제 보아도 성이 뒤로 가는 이 형식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뜯기 전 집사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온 거예요? 안 쓰여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뜯기엔 봉투가 너무 고급이었다. 어쩐지 허락을 받고 뜯어야 할 것 같았다. 집사님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마치 마실을 나가자고 하는 듯한 평이한 어조였다.
“왕실입니다.”
편지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우뚝 멈췄다. 내가 잘못 들은 것 아닐까? 왜 왕실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냔 말이다. 어디라고요? 초조한 얼굴로 집사님을 돌아보자 그는 한 치도 바뀌지 않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왕실에서 온 초대장입니다.”
갑자기요? 뜬금없이? 예상하지 못한 초대장이었다. 놀란 나를 비웃듯 실링에 새겨진 왕가의 문장이 반짝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금가루가 실링에 포함된 모양이다.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한 채 굳어버리자 집사님이 평온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에겐 놀랄 일이 아니었나 보다.
“매년 겨울 신년을 기념하며 열 살 이상의 모든 후보자와 후견인을 초대합니다.”
“와아……. 안 갈 순 없나요?”
울리세가 가고 싶다 하면 가야겠지만 솔직한 마음으론 정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파티와는 억만년쯤은 거리가 먼 소시민이다. 외국은 소소하게 파티를 열거나 그런다던데 나는 그런 경험조차 없다. 분명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 나오는 곳처럼 휘황찬란할 텐데 나는 가장 안 어울리지 않을까. 그곳에 가서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집사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필수 참석입니다.”
“으으.”
절로 오만상이 써졌다. 정말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신년은 그냥 집에서 기념하고 집에서 소소하게 지내고 싶은데. 아마 현실이었다면 게임을 하겠지.
원래 계획은 집사님에게 도와달라고 한 후 크리스마스 음식 같은 거라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는 크리스마스가 있나? 없어도 다 같이 만찬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테다.
뜯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조심히 봉투를 뜯었다. 실링 왁스에도 새겨져 있던 화려한 문양은 종이에 큼지막하게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실링에도 금, 종이에도 금이었다. 고작 종이 주제에 비싸 보였다. 실제로 나보다 비쌀지도 몰랐다.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히 편지를 쥐어 글을 읽어 내렸다.
“으, 진짜 필수 참석이네?”
초대장에는 날짜와 시간, 그리고 후견인의 파트너까지는 참석이 가능하다고 씌어 있었다. 파트너라. 하긴 이런 자리에는 파트너를 데리고 가는 게 일반적이겠지. 하지만 난 파트너가 없는데…….
“집사님도 가는 거죠?”
꼭 가야 했지만, 나는 이런 장소가 처음이었고 나를 도와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저 말입니까?”
집사님이 드물게 반문했다. 잠시 나를 뚫어져라 본 집사님은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일개 집사에 불과합니다. 초대장도 없는 제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 저랑 파트너로 같이 가주세요!”
답은 이것뿐이었다. 일부러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홀로 파티장에 갈 자신이 없다.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울리세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반면, 집사님이라면 어쩐지 능숙하게 대처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어도 난 아는 사람이 없다. 결국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집사님뿐이었다.
“…….”
순간 한참 전에 꾸었던 꿈이 스쳐 지나갔다. 집사님과 똑같이 생겼던 자. 높은 계급 사람 모두 그에게 아부했었지. 반쯤은 잊고 있었던 꿈이었다. 나도 모르게 초대장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
꿈을 회상하느라 잠시 눈앞의 집사님을 잊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집사님은 내가 다른 생각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대답은 수락이었다. 마음에 걸리던 꿈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다행이다, 감사해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집사님의 손을 잡아 악수하듯 흔들었다. 두세 번을 흔들고 나서야 내가 너무 격 없이 굴었나 걱정했지만 집사님은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얼굴에도 불쾌감은 보이지 않았다. 안심한 나는 손을 두어 번 더 흔들었다. 감사의 표현이었다.
“요셉 님,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집사님의 말에 손을 놓자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준비할 게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나는 집사님에게 맡기기로 마음먹고 울리세에게 향했다. 파티가 열려 참가해야 하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울리세는 자신의 방에서 내가 예전에 선물해 준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어찌나 자주 읽었는지 책이 조금 너덜너덜했다. 다른 책을 또 사 줘야지.
“울리세.”
“……요셉.”
아이는 반갑게 미소 지으며 돌아보았다. 읽던 책을 망설임 없이 덮고 나에게 도도도 다가오는 건 정말이지 귀여웠다. 이 기분에 다들 아이를 낳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방이 좀 썰렁하네.”
“응. 괜찮아.”
푹신하게 깔린 카펫과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 침대와 바닥 곳곳에 있는 푹신한 인형들, 형형색색의 동화책. 모두 내가 산 것이었다. 마음대로 방을 채우긴 했지만 그래도 다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좀 아이가 사는 방 같았으니까.
울리세가 다른 것도 원해줬으면 좋겠다. 아냐. 방부터 옮길까? 방이 너무 작았다. 앞으로 아이는 콩나물 크듯이 쑥쑥 자랄 텐데. 그런데 익숙한 곳에서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면 울리세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음, 이 부분은 나중에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
“무슨…… 일이야?”
“응. 형한테 이게 왔어.”
울리세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울리세는 받아 들고 느리지만 꼼꼼히 읽었다. 아이의 눈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가기 싫은 모양이다. 어린아이라면 이런 화려한 자리를 동경할 법도 하건만 울리세는 아닌가 보다.
“가기 싫어?”
“응.”
울리세로선 보기 드물게 단호한 대답이었다. 왜 싫어하는 걸까? 아이는 이제야 열 살이고 파티에 갈 일이 없었을 텐데. 아니면 사람 많은 곳이 괜찮아진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싫은 것일 수도 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지 궁금했지만 울리세는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궁금하다고 해서 아이의 상처를 헤집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선 굳이 묻지 않았다.
“그래도, 형도 가고 집사님도 같이 가니까 괜찮을 거야.”
“……응.”
울리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같이 가는 것이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듯했다. 내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뻤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눴다. 아이의 높은 체온은 추운 겨울 최고의 난로였다.
집사님은 저녁 시간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무언가 바리바리 사 들고 온 그는 무겁지도 않은 모양이다.
“도와줄까요?”
“괜찮습니다.”
그는 마치 깃털이라도 든 듯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나는 머쓱해 뒤통수를 긁적이며 위를 향해 소리쳤다.
“짐 놓으면 식당으로 오세요!”
집사님의 대답은 없었지만 그가 들었음을 나는 의심치 않았다.
늦게 오는 그를 대신해 저녁을 만들었다. 이래 봬도 자취 경력은 조금 되었고 어느 정도 먹을 만큼의 결과물을 만들긴 했다. 다만…….
“…….”
그동안 집사님의 음식에 길들여져서일까 내가 만든 음식은 정말 맛없었다. 그저 베이컨과 빵을 굽고 계란을 올린 간단한 음식임에도 말이다. 옥수수 알갱이를 버터에 볶은 것도 역시 예전 만찬 때보다 맛이 못했다. 배도 고프지 않은 이상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먹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먹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나와는 달리 울리세는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에게 맛없는 음식을 먹이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요리도 배워야 하는 걸까.
“미안해. 형…… 요리 못하지?”
“……맛있어.”
결국 난 식사를 포기하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역시 인스턴트커피가 달콤해서 맛있는데 부엌에는 원두커피뿐이었다. 물론, 이쪽도 맛있긴 했다. 홀짝거리며 커피를 어느 정도 마시니 집사님이 채 지우지 못한 밖의 냉기를 몰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요리는 제가 할 수 있습니다만…….”
눈썹을 찡그린 집사님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일이 있는 사람에게 밥을 하라고 할 순 없으니 내가 대신한 것이었는데 조금 시무룩했다. 그래도 조금은 기뻐할 줄 알았다. 보통 바쁠 때 자신의 일을 대신하면 기뻐하는 법이니까.
“오늘 바쁜 것 같아서요. 집사님 것도 해놨어요. 맛은…… 없지만.”
“……맛있어.”
울리세가 기특하게도 내 말에 반박해 주었다. 그래, 울리세라도 맛있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집사님 입에 맞을까. 환상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니 분명 먹고 나서 지적하지 않을까. ‘요셉 님, 조리할 때 온도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미루어 보아 확실했다.
“요셉 님, 요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집사님은 무려 허리까지 숙인 공손한 인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당황스러운 건 나뿐인 것 같다. 이렇게까지 인사를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평소 우리에게 요리를 해주는 건 집사님이니까 말이다. 그가 우리에게 해주는 것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보답이었다.
집사님은 주방에 남겨놓은 몫을 가져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한 입 먹고 뭐라 할 줄 알았는데 주저 없이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 모습에 나는 깊은 안도를 느꼈다.
“내가…… 맛있다고, 했잖아.”
울리세는 조금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못 믿은 것이 미안해 울리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사님은 그렇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옥수수 한 톨까지 모두 싹싹 먹었다. 내가 하면 분명 한 소리 들을 행동이었지만 그가 하니 귀공자 같았다. 손끝 하나하나에 기품이 서려 있는 느낌. 물론 나 같은 서민이 기품을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전부터 생각해 온 거지만 울리세와 집사님은 옥수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둘이 같이 살아서 입맛이 비슷한 걸까?
“잘 먹었습니다.”
집사님은 인사 후 식탁에 놓인 접시들을 수거해 갔다. 내가 그다지 먹지 않은 것에 잠시 눈썹을 까딱했으나 묻지는 않았다. 그도 그렇듯 내가 먹는 양은 굉장히 변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집사님의 음식은 언제나 맛있어 어느 정도는 항상 먹긴 하지만 말이다.
“드시지요.”
“어?”
집사님은 탱글탱글한 초코 푸딩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위에 생크림까지 귀엽게 올려져 있는 간식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울리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 내가 먹기보단…… 울리세가 좋아하는 디저트이니 울리세가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요리를 대접받았으니 보답하는 게 맞지요.”
“어…… 저만요?”
“마지막 남은 푸딩입니다.”
“요셉 먹어……. 아까, 안 먹었잖아…….”
내가 아까 밥을 제대로 먹지 않긴 했지만, 역시 아이를 두고 이런 간식을 먹을 순 없었다. 울리세는 나를 걱정해서 먹길 바라는 거지, 푸딩을 먹고 싶지 않은 건 아닌 듯했다.
푸딩을 한 입 떠 울리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울리세는 도리질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덩그러니 남은 푸딩을 아이를 두고 혼자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감하게 울리세를 바라보자 아이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싫어.”
울리세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뒷모습이 어딘지 화가 나 보였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도련님의 걱정을 무시하니 토라지신 것 같군요.”
“아.”
집사님의 친절한 설명 덕에 이해가 되었다. 그렇구나. 나는 시무룩하게 푸딩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간식은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전부 드시고 도련님에게 가시죠. 그럼 도련님도 용서해 주실 겁니다.”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천천히 푸딩을 떠먹었다. 집사님이 만든 것인 만큼 맛있었지만 울리세의 뒷모습이 계속 떠올라 목구멍으로 푸딩이 넘어가지 않았다. 빨리 울리세의 방으로 가고 싶었다. 집사님은 띄엄띄엄 먹는 나를 한동안 지켜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푸딩을 해치웠다. 이 조그마한 것이 먹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귓가에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면 나오는 웅장한 음악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푸딩 자체는 맛있었다. 집사님이 공들여 만들어 준 음식인데 온전히 즐기지 못한 게 슬플 정도로.
“집사님 감사합니다. 맛있었어요.”
“어서 도련님께 가보시죠.”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울리세의 방으로 갔다.
방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었다. 창밖의 나무들이 바람에 쓸쓸히 흔들렸다. 겨우 온 방 앞. 심호흡하자 요동치는 심장이 겨우 진정되었다.
똑똑.
“들어, 와.”
울리세가 허락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목소리는 화가 나 있지도 토라져 있지도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나는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 침대 위에서 울리세는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새로 사 준 책이었다.
“울리세, 아까는…….”
“…….”
울리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나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미안해. 형이 네 마음도 모르고.”
“……괜찮아.”
책을 덮은 울리세는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작고 따뜻한 사랑스러운 어린아이. 배려하고 위해준다는 명목으로 한 행동이 아이를 상처 입혔다. 이렇게 착하게 나를 용서해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처음 하는 보호자의 역할에 빨리 익숙해져 상처를 주지 않게 되면 좋겠다.
“맛있었어?”
“응. 울리세가 양보해 줘서 더 맛있는 것 같았어.”
“나도…… 좋아하는 거…… 요셉, 주고 싶었어.”
어쩜 이렇게 상냥하고 착할까. 분명 본인이 좋아하는 거니까 먹고 싶었을 텐데 날 주기 위해 꾹 참은 거라니. 아직은 어린아이다 보니 꽤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기가 힘든 나이니까.
“우리 울리세 이렇게 착해서 어떻게 하지?”
“……왜?”
“나중에 울리세 혼자 산다고 집 나가면 형 슬퍼서 울지도 몰라.”
장난스럽게 울먹이자 울리세가 날 조금 더 세게 껴안았다. 나 또한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울리세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웅얼거렸다.
“나, 안 가……. 요셉도…… 가지 마.”
“물론이지.”
“나랑, 같이 있어…….”
“응.”
하지만 말하는 내내 내 얼굴은 씁쓸하게 굳어 있었다. 아마 이 세계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을 거다. 설령 이게 현실일지라도 이 세계는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아니다. 그걸 증명하듯 게임 시스템은 계속해 나타났다. 나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내 가족이 기다리는, 내가 본래 태어난 세계.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울리세를 꼭 껴안아주었다. 기만적인 행동이 역겨웠다.
* * *
“잘 어울리시는군요.”
거울 안의 나는 난생처음 보는 근사한 모습이었다. 내 몸에 딱 맞춘 옷은 맵시 있었다. 옛날 졸업식에나 입어본 정장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푸른색의 와이셔츠는 조금 화려하지 않나 싶지만 어차피 파티인데 뭐 어떤가 싶다.
“요셉……. 잘 어울려.”
울리세는 자신의 몸에 꼭 맞는 귀여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와이셔츠에 짙은 푸른색 재킷, 검은색 바지, 재킷과 같은 색의 넥타이. 그야말로 근사한 신사 같았다. 이렇게까지 어울리는 옷을 맞춰 오다니 집사님의 눈썰미가 새삼 대단했다.
근데 내 몸 치수도 모를 텐데 어떻게 만든 거지? 잴 틈이 있었나? 순간 머릿속에 방 안으로 몰래 들어와 치수를 재는 집사님이 떠올랐다. 범죄에 가까운 상상이었다. 하지만 집사님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지우고 아이를 칭찬했다.
“울리세도 정말 잘 어울린다. 신사 같아.”
아이는 자신을 몇 번이나 내려다보았다. 계속해 살펴보는 것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처음 옷을 가져왔을 땐 울리세의 몸에 맞지 않아 집사님이 당황하며 도로 가져갔었다. 대부분의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집사님이었기에 신선했다. 한편으론 어떻게 해결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몸에 딱 맞는 걸 보니 수선을 잘한 모양이다.
우리가 이렇게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것과 다르게 집사님은 평소와 같은 집사복을 입고 있었다. 본인의 옷은 맞추지 않은 건 아니겠지? 집사님도 파티장에 나와 함께 가야 하는데 말이다. 걱정스러움에 물었다.
“집사님은요?”
“아직 재봉이 덜 끝났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어디에서 옷을 맞춘 거예요? 너무 멋있는데.”
치수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다음에 또 맞출 생각이었는데 집사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는 거지? 그냥 의상실을 물어본 것뿐인데. 답은 예상외의 인물에게서 나왔다.
“……집사가…… 만든 거야.”
울리세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믿기지 않았다. 대체 집사님의 재능은 어디까지 펼쳐 나가는 걸까? 요리, 청소, 싸움, 의료에 그치지 않고 이젠 패션이라니. 놀라 집사님을 보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고 인정했다.
“제가 만든 게 맞습니다.”
“그럼 전에 사 온다는 게…….”
“옷감을 사 온 겁니다.”
대단하다. 정말 이걸 만들어내다니. 다시 한번 옷을 내려다보았다. 현실에서 보았던 패션쇼에서나 볼 법한 옷에 비견될 정도였다. 집사님이 한 땀 한 땀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멋있어 보였다.
“집사님, 감사해요. 정말 멋있어요.”
“……별것 아닙니다.”
집사님은 차갑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멋대로 부끄럼을 타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는 한참을 싱글벙글하며 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거울에 비친 나는 여전히 딴사람 같았다. 비싼 옷을 사 입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면 이제야 납득된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아니, 집사님의 솜씨가 대단한 걸지도 몰랐다. 옷 하나로 사람이 달라진 것 같으니까.
“그나저나 도련님이 그렇게 자라셨을 줄은…….”
“아, 그러고 보니 그럼 그 옷도 집사님이 수선하셨어요?”
“……작은 옷을 늘릴 수는 없지요. 새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한마디로 집사님은 울리세의 옷을 두 번이나 만든 거다. 내 옷은 한 번에 제대로 만들었으면서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애초에 몸 치수를 재면 되는 건데.
“그러고 보니 집사님, 옷 치수는 왜 안 재신 거예요? 재봤으면 울리세 옷도 다시 만들 필요가 없었을 텐데.”
“……요셉 님의 몸 치수는 알고 있었습니다.”
“네? 어떻게요?”
“요셉 님의 몸을 닦아드릴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의 말에 얼굴이 타올랐다. 그랬다. 생각해 보니 그는 내 알몸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몸을 청결하게 한다는 이유로 구석구석을 닦아내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어떻게 치수를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아니, 근데 그거로 어떻게 치수를 알아요?”
“왜 모르죠?”
“…….”
집사님의 진심 어린 의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은 순수한 의문으로 차 있었다. 집사님은 아무래도 가능한 모양이다……. 범인인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아니, 범재와 천재를 떠나 인간이 그게 가능한가?
“그리고 평소에 대충 눈대중으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지하게 집사님의 종족이 줄자인가 고민하다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근데 울리세는 왜……?”
“……너무 옛날 치수를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많이 자라긴 했죠.”
“……네.”
보기만 하면 대충 치수를 안다던 집사님은 입을 다물었다. 어딘지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가끔 보이는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그 정도로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들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울리세와 집사님은 무슨 관계일까.
“정말…… 많이 자랐더군요.”
아주 작게 말한 집사님은 금방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냉담하고 이성적인 모습. 그 모습을 철갑처럼 두른 그는 울리세가 가져온 옷 또한 개서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 시렸다.
“요셉.”
“응.”
그 자리를 메우듯 아이가 나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달라붙었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내 가슴팍에 비벼진다. 그 어린 짐승 같은 행동에 차가웠던 공기는 거짓말처럼 따뜻해졌다. 나는 아이의 애정 어린 행동에 보답하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안았다. 난로를 껴안은 듯 따뜻했다.
* * *
시간은 지나 어느새 12월 말이 되었다. 초대장에 적힌 연회의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았다. 눈이 내렸다면 마차를 끌고 가는 것에 애로 사항이 생겼을 거다.
오늘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집사님은 마부를 고용했고 우리는 연회에 가기 위해 준비했다. 뭐 준비라고 해봤자 옷을 확인하고 몸에 걸칠 액세서리를 정돈하는 정도였다. 사실 집사님이 얼굴에 팩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런 걸 해본 역사가 있어야지 어색해서 못하겠다.
“밥은 조금만 드세요. 배가 나오면 옷 태가 안 삽니다.”
“……누가 본다고.”
내 작은 말에 집사님은 눈을 희번덕 빛냈다. 섬광과도 같은 눈초리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연회장은 칼 없는 전장입니다. 입은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평가받는 장소죠.”
“……그럼 전 늦은 거 아닐까요? 예의범절도 모르는데.”
“그러니 보이는 것에 힘을 주는 겁니다.”
하긴 낮잡아 볼 빌미를 줄 필요는 없다. 게다가 어차피 나는 먹지 않아도 괜찮은 몸. 하지만 울리세까지 굶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아이야 똥배 나오고 그런 게 당연한 거지. 고작 옷 태 하나 내자고 못 먹게 하는 건 학대였다.
내가 아이를 걱정스럽게 보자 집사님이 말했다.
“도련님의 옷은 조금 넉넉하게 지었으니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울리세의 접시는 지킬 수 있었다. 집사님의 혜안이 빛을 발했다. 그렇게 점심이 지나가고, 연회의 시작이 점점 다가왔다. 울리세는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다며 나를 내쫓았다.
내 방으로 돌아와 정장으로 갈아입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요셉 님.”
“들어오세요!”
집사님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집사님은 아직 연회복으로 갈아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데리러 온 게 아니라면 왜 온 걸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니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옷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네? 괜찮아요! 울리세를 도와주세요!”
“도련님은 이미 챙겨 드렸습니다.”
울리세는 이미 도와줬다니 그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시중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뒷걸음질 쳤으나 내가 물러나는 것보다 그가 다가오는 게 더 빨랐다. 집사님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다릅니다. 평소처럼 입으면 구겨지니 얌전히 계셔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다행인 것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부끄러울 일은 없겠…….
“바지를 잠시 벗어주시겠습니까.”
“네?”
바지를요? 여기서요?
“네.”
“……제가 혹시 말했나요?”
“아니요. 하지만 눈으로 말하고 계셨습니다.”
굳건하게 서 있는 집사님의 모습에서 옷을 벗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옷을 벗기엔 역시 좀, 이상했다. 집사님은 그런 나를 향해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그가 손에 든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게…… 뭐예요?”
“가터벨트입니다.”
가터벨트? 머릿속에 살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내가 아는 가터벨트는 여성들이 입는 속옷 종류인데……. 뜨거운 밤을 보내기 위한 아이템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왜 나에게 들고 오는 거지?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집사님이 변태였나? 그래, 변태였던 모양이다.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집사님의 이미지가 모조리 박살 났다. 집사님은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요셉 님, 이건 셔츠 가터입니다.”
“……셔츠?”
집사님이 고개를 끄덕했다. 내 볼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집사님이 변태인 게 아니라 내가 변태였다.
“셔츠를 고정하는 물건입니다. 보기 좋게 옷을 입기 위해선 필수죠. 무슨 생각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아악!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는 변태다. 파렴치한 놈이다. 집사님은 그저 할 일을 하기 위해 가져온 것인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해버렸다.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허겁지겁 바지를 벗었다. 내가 허둥지둥하든 말든 집사님은 여상하게 가터를 착용시켜 주었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에 벨트를 매주었고 가터에 셔츠를 연결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서일까. 그의 손이 어쩐지 뜨거워 당황스러웠다. 이 순간을 얼마나 견뎌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고 있는데-
“흣!”
집사님의 손이 허벅지의 가장 안쪽을 스쳐 지나갔다. 민감한 부분을 훑고 지나가니 내 입에서 남세스러운 소리가 튀어 나갔다. 양손으로 재빨리 입을 막았지만 슬프게도 신음을 뱉은 뒤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집사님은 듣지 못한 걸까? 그는 표정 변화 없이 꼼꼼하게 가터를 착용시킨 채 물러나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모르는 척해주는 거겠지. 그 배려를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앉았다. 그는 내 앞에 무릎 꿇고 가터벨트를 종아리에 두른 후 양말에 연결했다. 집사님의 손이 양말에 닿았을 때 나는 조금 안심했다. 미리 양말을 신어 문양을 훌륭히 숨겼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양말을 신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이것도…… 필요해요?”
“물론입니다.”
난생처음 하는 물건들이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벨트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신기해 멀뚱히 가터를 보고 있자니 집사님이 순식간에 다른 발에도 가터 착용을 끝냈다.
“옷을 마저 입어주시겠습니까?”
그는 세 발자국 떨어진 채 이야기했다. 끝난 게 아니었나? 집사님은 방에서 나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후다닥 옷을 입었다. 바지를 입고 조끼, 정장 재킷까지 모두 착용하자 멀끔한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앗.”
집사님이 어느새 다가와 신발을 내밀었다. 그의 시중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내가 비켜달라 해도 비키지 않을 테다.
나는 무릎 꿇은 그의 어깨를 잡고 발을 신으로 밀어 넣었다. 집사님이 내 뒤꿈치를 은근히 만졌다. 아주 찰나의 접촉이었다.
“그럼 머리와 화장을 해드리겠습니다.”
“네? 화장이요?”
“연회장에 맨얼굴로 가실 생각입니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집사님을 보니 이 세계는 꾸미는 것엔 성별이 무관한 모양이다. 하긴 도시에 나갔을 때도 화려하게 자신을 꾸민 남성이 많았다.
그나저나 화장이라니,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굳이 떠올리자면 선크림 정도를 바른 게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것을 화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집사님은 어디선가 가져온 화장품으로 내 얼굴을 토닥거렸다. 뭔지 모르는 것들이 내 얼굴에 가볍게 발렸다. 다행인 것은 두껍게 바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화장이 끝난 내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뚜렷해 보였다. 집사님은 화장을 끝낸 후 바로 머리를 솜씨 좋게 만져주었다. 미용실에서 스타일링을 갓 마치고 온 머리 같았다.
고데로 이리저리 머리를 볼륨 있게 살리고 가르마까지 타 이마가 살짝 보였다. 자연스럽고 깔끔하니 나와 잘 어울렸다. 나중에 또 해볼까 싶었지만, 혼자서 이 머리를 하기엔 불가능하리라. ……근데 저런 도구는 어디서 가져온 거야? 있는지도 몰랐네.
“정말…… 신기하네요.”
거울 속의 나는 정말로 타인 같았다. 몇 번이고 믿을 수가 없어 거울을 살펴보았다. 핸드폰이 있었으면 찍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평소 프로필 사진을 셀카로 하지 않는 나조차 찍어 프로필 설정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별것 아닙니다. 그럼 저도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집사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히 대꾸하곤 방을 나갔다. 뒷모습이 정말로 멋있었다. 집사님의 재능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나는 거울을 한 번 더 본 후 방을 나섰다.
* * *
“…….”
멋들어지게 꾸미고 오래된 저택의 복도를 걸어가니 마치 영화에 출연한 기분이었다. 몽롱한 기분을 즐기며 나는 울리세를 만나러 발을 옮겼다.
밑으로 내려가니 울리세는 이미 집사님이 완벽하게 꾸며주어 귀여운 꼬마 신사가 되어 있었다. 깜찍하게 머리를 쓸어 올린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참지 못하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도 울리세는 기쁘게 웃었다.
거실에서 난로를 쬐며 집사님을 기다렸다. 우리를 꾸며주고 난 후였기에 집사님의 준비가 늦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일찍 방에서 나왔다.
한참 집사님을 보았다. 그도 그럴 듯 집사님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연출이 있다. 무도회 같은 곳에서 주인공이 너무나 예뻐서 넋을 빼는 장면. 그땐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넋 놓고 멍청하게 볼 수가 있나 싶어 코웃음을 쳤다.
과거의 나는 뭘 몰랐다. 바보다. 집사님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그러모아 빚어 만든 것 같았다. 그야말로 찬란한 미의 화신.
그의 옷은 화려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새카만 검은 옷은 까마귀가 떠오를 정도였고 무늬조차 없었다. 푸른색의 행커치프가 유일한 색이었다. 단조로운 옷이었지만 옷걸이가 빼어나니 도리어 얼굴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요셉 님.”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 집사님의 목소리에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작게 웃으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세지 않은 힘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요셉…… 아파?”
“아…… 아아아아! 아냐. 아냐, 형 괜찮아. 집사님 가죠.”
누가 지적한 것도 아닌데 나는 지레 놀라 펄쩍 뛰곤 앞장서 현관으로 나섰다. 울리세는 쪼르르 따라와 내 손을 꼭 잡았다. 손에 들어찬 작은 온기가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진정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타시죠.”
“흐억!”
언제 앞으로 걸어갔던 거지? 마차 문을 열고 있는 집사님의 얼굴이 평소보다 눈이 부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기껏 진정시킨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울리세를 마차에 태우고 후다닥 올라탔다.
“……요셉, 괜찮아?”
“응? 응. 형 괜찮아……. 그냥 좀, 놀라서…….”
한숨에 가까운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진정하기도 전, 집사님이 올라타 마차를 두 번 두드렸다.
마차는 느릿하게 출발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울리세는 한쪽에 앉았는데, 좌석은 두 명이 앉으면 꽉 찼다. 그 말인즉 집사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는 거다.
“……”
심장에 좋지 않았다. 바로 앞에 미의 신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집사님이 집을 나서며 선글라스를 꼈다는 것이다. 옅은 색의 선글라스는 밤에도 써야 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든 듯했다. 그의 푸른 눈이 탁해져 아쉬웠다.
하여튼 덕분에 얼굴이 조금이나마 가려져 아까보단 괜찮았다. 안 썼으면 마차 안이 대낮처럼 환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집사님 뒤쪽에서부터 후광이 비쳤으니까. 태양이 마차 안에 강림했을 거다.
“요셉 님.”
“헉, 네. 왜 그러세요?”
“……제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내가 너무 뚫어지게 보았나. 아니라고 하기엔 나는 양심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정말 열심히 보긴 했다. 하지만 다른 곳을 보고 싶어도 한번 얼굴에 시선이 고정되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과거 여우에게 홀렸다는 말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아마 그들은 여우에게 간을 뺏기는 그 순간까지 황홀했을 것이다. 분명 행복한 죽음이었겠지.
“……네.”
작게 대답하자 집사님이 작게 웃었다. 그때 내 옷을 잡아당기는 작은 힘이 느껴졌다. 힘겹게 시선을 돌리자 울리세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응?”
“나는, 마음에 들어?”
귀여워서 심장에 무리가 온다. 내가 계속 집사님만 홀리듯 본 것이 울리세는 서운했던 걸까. 나는 거의 바보처럼 흐물흐물 웃으며 울리세에게 말했다.
“물론이지, 울리세.”
“진짜?”
“그럼. 이런 옷이 잘 어울리는지 알았으면 진작 열 벌, 아니, 스무 벌은 사서 입혔을 텐데. 형이 모자랐다. 형을 용서해 줘.”
“요셉은…… 잘못한 거, 없어.”
아이고, 귀여워라. 장난으로 말했는데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린아이 같아 너무 귀여웠다. 잠시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정말 눈도 마음도 호강하는 행복한 날이었다.
* * *
마차는 중간중간 멈췄다. 연말이다 보니 도심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이런 점은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왕궁 입구. 그곳에는 다양한 마차가 줄을 서 있었다. 부를 과시하듯 화려하게 꾸민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탄 마차를 그다지 조촐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사이에 끼어 있으니 비교가 되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굉장히 많네요.”
“계승 후보자는 꽤 수가 많습니다.”
수가…… 많다고? 왕이 후궁만 백 명 두고 그런 걸까? 애가 얼마나 많은 거지? 의문에 찬 내 표정을 본 것인지 집사님이 이어 말했다.
“후보자는 왕족의 피가 얼마나 섞여 있느냐에 따라 달렸습니다. 왕족의 피가 어느 정도 흐르면 자격을 얻을 수 있지요. 왕비와 후궁 소생의 아이뿐만이 아니라 폐하 혈육의 소생들도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피가 더 옅어지면 자격은 받을 수 없습니다. 왕실에는 혈육을 검사하는 기구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후궁뿐만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자식까지 된다니. 그렇다면 왕위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식들의 손으로 권력을 쥘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다들 자식들에게 필사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셉, 몰랐어?”
“응.”
울리세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세계의 상식인 것 같은데 정말 공부를 해야 하나. 무식한 인간으로 보일까 봐 겁난다. 아니, 무식한 것이 맞다.
사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일이 별로 없어서 공부를 안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공부는 언제 하든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계속 상식이 필요한 일이 생기니 시작하긴 해야겠다.
긴 줄이 끝나고 초대장을 문지기에게 보여주자 마차 내부를 확인한 후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왕의 인장이 새겨진 초대장을 위조하는 인간은 없나 보다. 생각보다 허술한 보안 관리였다.
“마법으로 확인하는 겁니다.”
“아.”
집사님은 내 생각을 읽는 걸까? 어떻게 저렇게 적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걸까. 설명을 듣자 그제야 납득되었다. 하긴 왕이 기거하는 곳의 보안이 저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그나저나 마법이 있는 세계라서인지 과정이 간단한 게 너무 신기했다. 현실에서야 명단과 신분증 대조 같은 것이 전부일 텐데. 뭔가 마법이 만능처럼 보였다. 나도 배울 수 있을까?
마차가 멈췄고,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다양한 사람들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중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각자 멋들어진 옷을 차려입은 어른들과 아이들. 울리세 같은 어린아이도 있었지만 거의 어른이 다 된 아이 또한 있었다. 이 모두가 왕좌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걸까. 어른들이 바라기에 왕좌를 노리는 아이들도 분명 있겠지. 어쩐지 입맛이 썼다.
연회장은 역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맛있는 음식은 한쪽에 핑거 푸드로 마련되어 있었고, 천장에서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났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의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순간 강한 기시감이 들어 눈을 깜빡였다.
“……뭐지?”
난 분명 이 연회장에 처음 왔다. 전에 왔을 리가 없다. 하지만 처음이라기엔 이 공간이 어쩐지 익숙했다. 강한 데자뷔가 나를 지배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싱그러운 생화가 곳곳에 있고 바닥에는 아름다운 문양의 대리석이 깔렸다.
“요셉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집사님이 물었다. 울리세 또한 나를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올려다보았다. 정신 바짝 차리자.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며 웃었다. 왜 강렬한 기시감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일 아니겠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
“……촌뜨기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촌뜨기 맞는데요, 뭐.”
집사님의 속삭임에 긍정했다. 나는 촌뜨기가 맞았다. 그것도 대형 촌뜨기.
세계의 바깥에서 온 이방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현실에선 이런 장소에 올 일도 없었던 서민이기도 하고. 서민이 귀티 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촌스러운 짓은 없다. 어차피 기품이란 태어날 때부터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다. 나로선 무리다.
“…….”
그렇게 따지면 집사님은 굉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기품이 철철 흘러넘쳤다. 울리세 또한 귀공자 같은 면모를 보여줬다. 처음 만났을 때의 깡말라 초췌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삼 나 자신이 뿌듯해졌다. 저렇게 건강한 모습이 되기까지 분명 내 노력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 배고파.”
“테이블에서 기다려 주시죠.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집사님이 음식이 차려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 또한 울리세와 함께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로 걸어갔다. 지정석은 없는 것 같았고, 덕분에 자유롭게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것은 다른 이들 또한 자유로워 우리 앞에 모르는 누군가 앉았다는 점이다.
“안녕하십니까.”
준수하게 생긴 금발 남성. 흰색의 정장을 멋들어지게 입은 그가 싱글거리며 앉았다. 눈에는 날카로운 호기심이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요셉 김입니다.”
인사를 하니 받아줘야지. 하지만 남자 쪽에선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뭐야, 자기소개는 안 하는 건가? 의문스러워 고개를 갸웃하자 한참을 가만히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분이군요. 파트너분이신가요? 아니면…… 후견?”
“후견인입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제임스 히스틱입니다.”
그렇군. 누군지 모르겠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사라졌다. 뭐야 대체? 왠지 예전 커피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또 무언가 내가 자격 미달로 떨어졌나 보지. 상관없지만, 앞으로 무언가 이쪽에 진출할 일이 생긴다면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스틱 백작이군요.”
테이블에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집사님이었다. 집사님은 나에게 왔다 간 저 남자의 정체를 아는 모양이다. 제대로 본 것도 아닌데 작위까지 아는 걸 보면.
집사님은 내 옆에 앉아 귓속말에 가깝게 조용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샬라메 공작 쪽에 있는 자입니다. 공녀가 아닌 다른 후보자를 후견하고 있기는 하지만 왕위에 올리기보단 관직의 주요 인물이 되길 바라고 있죠.”
“무조건 왕좌를 노리는 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자리는 요원한 법. 차라리 그들의 눈에 들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더 이득이죠. 샬라메 공작 쪽이 너무 우세이기도 하고요.”
그렇군. 하긴 왕좌란 단 한 자리밖에 없다. 차라리 왕좌에 확실히 앉을 자를 보필해 높은 자리를 꿰차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럼 저 남자는 내가 쓸모 있다면 파에 영입하기 위해 온 건가? 스카우터 같은 일을 하는 모양이다.
“울리세, 맛있니?”
“……응.”
작은 카나페를 오물오물 먹는 울리세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래. 맛있게 먹을 수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람은 점차 늘어나 북적거렸다.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후보자와 후보자의 후견인, 후견인의 파트너까지 들어오니 어느새 공간이 꽉 찼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우리를 향한 시선이 있긴 했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아까의 히스틱 백작 이후로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울리세, 제가 없었으면 집사님이랑 둘이 왔겠죠?”
“……일개 집사는 이 연회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파트너가 아니라면 올 수 없는 건가. 하지만 필수 참석이니 보호자가 필요할 텐데.
“그랬다면 도련님은 혼자 오셨겠죠.”
후견인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보호자로서 참석하지 못하나 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분명 후보자 제도가 생기고 난 후 모두의 뒷배가 단단하지는 않았을 거다. 왕이 아닌 쪽의 작위를 따라간다고 했으니 분명 누군가는 비천하게 태어났을 테지. 울리세만 봐도 그랬다. 울리세는 내가 있기에 홀로 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들은 이 틈바구니 속에 쓸쓸하게 혼자 있는 걸까? 어른들의 관심에서 밀려난 소외된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슬프네요.”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혼자 온 아이가 분명 있겠죠. 옛날의 울리세 같은 아이요.”
“……그렇겠죠.”
[왕자의 일기가 해금되었습니다!]
갑자기? 알림 창이 떠올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알림 창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진지한 대화 중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기는 인벤토리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지금 살피기엔 허공에서 물건을 꺼낸 것으로 보일 테니 이따 집에 돌아가서 펼쳐봐야겠다.
“……어?”
저 멀리에서 폭신한 분홍색 머리를 가진 여자아이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흰색의 바지와 검은색의 상의를 입은 당당한 분위기의 브렌다였다. 검술 학원에서 보았던 때 이후 처음이었다.
“이쪽으로 오는 것 같죠?”
“……그런 것 같군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브렌다는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체 없이 걸어 앞에 서더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후보자 브렌다 샬라메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요셉 김입니다. 무슨 일로……?”
너무나 격식 있는 인사에 나도 모르게 절로 존댓말을 했다. 어린아이임에도 깍듯이 예의를 지켜야 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브렌다는 울리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녕. 나 알지?”
“아, 안녕. 브렌다…….”
브렌다는 울리세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울리세는 영문을 모른 채 그 눈빛을 받아냈다.
“검술 학원에서 잘 봤어. 너 대단하더라.”
“아…… 고마, 워.”
“앞으로 인사하고 지내자.”
“……브렌다.”
브렌다는 울리세와 대화를 조금 더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장승처럼 서 있는 프리실라 샬라메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 듯 엄한 목소리를 뱉었다. 부루퉁한 표정을 잠시 지은 브렌다는 울리세에게 손을 흔든 뒤 우리에게 깍듯한 인사를 하고 연회장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울리세, 학원에서 잘 지내는 모양이구나?”
“……응.”
울리세를 보는 브렌다의 눈은 승부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울리세가 학원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나? 아이에겐 평소 공부의 성과보단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어보는 터라 몰랐다. 나중에 몰래 학원에 참관하러 갈 수는 없을까? 울리세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집사님?”
그런 우리를 집사님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아닌 복잡 미묘한 표정. 왜 그런 표정으로 보고 있을까. 집사님에게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홀의 음악이 멈췄다.
“모르고스 왕국의 28대 국왕 폐하, 페르탁시온 아르곤티오 전하가 드십니다!”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왕은 참 잘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울리세의 외모가 어디서 왔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정도로.
검은색의 정돈된 긴 머리카락. 푸른색의 눈동자. 굳센 입매가 왕의 고집을 보여주는 듯했다. 고급스럽지만 화려하지 않은 단정한 의복 차림의 왕은 큰 존재감을 드러냈다.
높은 단상에 있는 의자에 앉은 왕은 주변을 한번 휙 돌아보았다.
“올 한 해도 수고가 많았소.”
느릿한 말투에는 위엄이 넘쳤다. 확실히 능력 순으로 관이 계승되다 보니 어중간한 존재가 왕의 자리에 앉지는 않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친아들인 울리세를 이렇게 방치한 것을 보면 글러먹은 인간이다.
“올해도 많은 후보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소. 미진한 자뿐만 아니라 높은 성취를 올리는 자도 모두 정진하도록 하시오.”
뭐야. 비밀 시험관이라도 있는 건가? 아이들의 평가를 언제 했다는 거지?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럼 가장 우수한 자에게 상을 내리겠소.”
상? 연말 시상식인가? 사람들의 반응이 당황스러움이 아닌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연례행사인가 보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정말 연말 시상식과 다를 바가 없는데? 티브이에서 본 것과 비슷한 느낌에 갑자기 친숙감이 들었다.
“브렌다 샬라메!”
호명하자 사람들이 브렌다가 앞으로 나설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줬다. 당당하게 왕의 앞으로 걸어가는 브렌다는 어린아이임에도 멋있었다. 울리세 또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은 선망으로 반짝였다.
“후보자는 괄목할 만큼의 성장을 보였다. 그 성과에 이 상을 내린다.”
“감사하옵니다! 폐하!”
왕은 브렌다에게 백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검을 내렸다. 아이에게 맞지 않는 큰 검을 브렌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고 예를 갖추었다. 얼굴에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조금의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브렌다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끝인가 싶었지만, 왕은 여전히 서 있었다.
“오늘 중요한 공지가 있소.”
사람들 사이로 긴장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인 것 같았다. 그 분위기에 당황해 집사님을 확인했다. 집사님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초연한 얼굴.
“후보자들에게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겠소. 나라에 가장 어두운 악이 도래했소.”
무거운 분위기가 흐른다. 발등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긴장되어 옥죄는 분위기에 나 또한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내 손을 잡았다.
아래로 시선을 내려 손을 보니 울리세가 자그마한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그 작지만 힘차고 다정한 온기에 긴장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고마워 아이에게 웃어주자 왕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나라를 좀먹는 악, 악마를 물리치는 자는 높은 점수를 받게 될 것이오. 영광의 관으로 가는 길이 조금 더 편해지겠지.”
이게 말이야 방귀야? 악마를 물리치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얼굴도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들 황당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생각을 해보아라. 내가 보았던 후보자들은 대개 어렸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조차도 성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에게 악마 퇴치라니! 악마라는 게 그렇게 쉬운 존재일 리가 없다.
“의무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후보자 자격 박탈과 국외 추방의 벌을 내릴 것이니 모든 후보자와 후견인은 명을 들으시오.”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났다. 의무를 다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이들에게 말을 안 들으면 쫓아낸다고 말하다니. 협박이랑 뭐가 다른가. 목 끝까지 분노가 차올랐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욕을 내뱉으면 큰일이 날 것이 분명했다.
“폐하! 그게 무슨 소리옵니까! 그것은 귀한 몸이신 후보자님들이 나서지 않아도 될 싸움입니다!”
한 사람이 꽤 용기 있게 발언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왕은 발언한 귀족의 얼굴을 무심하게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을 받은 귀족이 흠칫 몸을 떨었다.
“번복하지 않겠소. 후보자들은 나라를 보호할 의무가 있소. 하지만 연약하고 전투를 배우지 않은 후보자들도 있지.”
다행이다. 왕도 대가리에 생각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나는 작은 손을 꽉 맞잡았다.
“모든 싸움에 참가하라는 것이 아니오. 악마에 대한 정보와 다른 후보자와의 협력 등, 점수를 얻을 기회는 많을 것이오.”
귀족들은 술렁였다. 누군가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어린아이들은 겁에 질린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탐욕 서린 눈동자와 두려움에 가득 찬 아이들의 눈동자는 대조되어 서글펐다.
“이는 신성한 왕명이며 대대로 이어져 나갈 명이오! 악마를 물리친다 하더라도 악이 늘 없을 수는 없는 노릇. 앞으로 나라를 위협하는 악에 후보자들이 나서야 할 것이오!”
폭풍과도 같은 선언과 함께 왕은 연회장을 나갔다. 아직 연회는 끝날 시간이 아니었으나 왕이 오기 전 들떴던 분위기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함과 불안, 그리고 기묘한 기대가 기분 나쁘게 울렁거렸다. 아는 사이끼린 정보나 눈빛을 교환했고 끼리끼리 모여 사라졌다.
딱히 친한 사람이 없다 보니 이곳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집사님을 보았다.
“……이제 집에 가도 괜찮겠죠?”
“그럴 것 같군요.”
“울리세, 집에 가자.”
아이는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의 다른 이들은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파가 있는 자들은 서로 동맹을 맺겠지. 그들의 눈에 공포에 질린 아이들은 띄지 않는 듯했다. 우리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나왔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 마차에 타고 나서야 나는 분노의 한숨을 내뱉었다.
“……미친 거 아닐까요.”
“지금의 폐하는 지극히 뛰어나신…….”
“아니, 뛰어나고 나발이고 애들을 그렇게…… 하.”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이마를 꾹꾹 누르며 치밀어 오르는 두통과 역겨움을 참았다. 울리세가 말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수한 눈동자에 치유를 받으면서도 이 어린아이가 싸움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 서러웠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계속해서 뇌리에 상처 입어 우는 울리세가 떠올랐다. 들은 적 없는 울리세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고통스럽게 메아리쳤다.
“요셉……. 진정해.”
아이가 나를 달랬다. 악마 같은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울리세가 도리어 나를 걱정해 주었다. 내가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꼴사나웠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나는 울리세를 보았다.
“화내서 미안해 울리세……. 하…….”
“드시죠.”
집사님이 차가운 얼음물이 담긴 유리잔을 건넸다. 받아 들어 꿀꺽거리며 마시자 냉기가 머리를 차갑게 만들어주었다. 겨우 분노가 진정되었다.
마차 안에는 올 때와 정반대로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앞으로의 일에 머리가 복잡해 집사님의 외모를 볼 틈도 없었다.
아무리 직접 싸우지 않아도 괜찮다곤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정보를 얻기 위해선 사방팔방을 뛰어야 했다. 협력해서 싸우기엔 친한 후보자 또한 없었다. 한순간 머릿속에 브렌다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에겐 더욱 친한 다른 후보자가 있을 터였다. 공작의 파벌은 커 보였으니까.
* * *
연회 의상을 벗고 깨끗하게 씻은 나는 울리세의 방으로 갔다. 울리세는 기특하게도 혼자 옷을 벗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깨끗하게 씻은 모습에 웃으며 울리세의 곁으로 갔다. 다행인 점은 울리세가 두려움에 차 있지 않다는 거였다. 두려움을 숨긴 기색 또한 없었다.
“안 무서워?”
“뭐…… 가?”
“……악마 말이야. 무섭지 않아?”
울리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이는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아까 연회장에서의 집사님 표정이 생각났다. 무표정하니까 더 비슷한 것 같네. 어딘지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얼굴이었다.
“형이 어떻게든 해볼게.”
“……어떻게?”
“형이 말했잖아.”
나는 든든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목소리는 일부러 높였다. 허세 가득한 모습 같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도였다.
“형 돈 많다니까. 그 돈이면 다른 나라로 가도 잘 살 거야.”
“……응.”
내 말을 듣고 안심한 걸까. 울리세가 작게 웃으며 내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어리광을 받아주고 침대에 눕혀주었다. 동화책을 읽고 아이가 꿈나라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 방에서 나왔다. 하루가 유독 길었다.
“……술이나 마실까.”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하루였다. 나는 터덜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분명 어딘가에 와인이 있을 거다. 예전에 집사님이 주었던 맛있는 와인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뭐라도 마셔야 했다. 내 정신이 알코올을 요구했다.
요리용 와인이라도 마실 작정으로 부엌에 도착한 나는 선객을 발견했다.
“요셉 님?”
“아…….”
집사님이었다. 내일 요리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인지 여러 가지 식재료가 부엌에 널려 있었다. 집사님이 요리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저녁 식사는 식탁에 앉아 있으면 집사님이 가지고 왔으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멋쩍게 웃었다. 술을 마시러 왔다고 하기엔 조금 부끄러웠다. 저번의 추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다시는 그렇게 마실 일이 없을 거다. 또 그런 술주정을 하면 내가 개다.
하지만 집사님은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 용건을 안 것인지 부엌에 있는 자그마한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갔다. 저 장소는 처음 보는데.
“여기 있습니다.”
“헉.”
그는 손에 와인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저 문이 저런 용도였구나. 하긴 이렇게 큰 저택인데 와인 전용 보관소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 꿈속의 조그마한 울리세가 저곳에도 숨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요셉 님?”
와인을 받아 들고 잠깐 생각에 빠져 넋이 나가 대답을 못 하자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짧은 생각에서 빠져나온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해요. 어떻게 아셨어요?”
“물을 가지러 오신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것만으로 알아챘다고? 집사님은 전생에 셜록 홈스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안 거지? 내가 이마에 술 먹고 싶다를 써놓은 것도 아닌데. 내 놀란 표정에 집사님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저쪽에 앉으시죠. 안주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그런 폐를…….”
“친구 사이에 그런 것쯤이야.”
아니, 친구 사이에도 요리를 갖다 바치지는 않는데요. 집사님은 조리대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거절의 말은 거절할 생각인 것 같다. 나는 얌전히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저번, 술판을 벌였던 그 자리였다.
“오늘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군요.”
“뭐 그렇죠. 후우우…….”
집사님이 요리하며 한 말에 다시 속이 답답해졌다. 아직도 나는 왕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 심각한 사안을 어린아이들에게 맡기다니. 그런 건 전문적인 전투 요원에게 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군대가 없다 하더라도 이 세계에는 마법사도 있지 않은가.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집사님의 말에 없던 희망도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끼익, 거칠게 의자 밀리는 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다.
“앉아서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기다릴 틈이……. 뭔데요, 그게?”
“앉아서 기다려 주신다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방법이 궁금해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으나 집사님은 정말로 당장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손은 태연히 냄비의 새우를 버터에 볶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우뚝 서 굳건하게 요리만 하는 집사님의 등을 한참을 노려보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속 시원하게 그냥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가만히 앉아서 요리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입을 열면 재촉할 것 같아 꾹 다물고 있자 부엌에는 요리 소리만 가득했다. 열리지 않은 입안에서 갈 곳 잃은 말이 계속해 맴돌았다. 울리세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보니 너무나 초조했다. 꾹 쥔 손안에 땀이 끈적였다.
“드시죠.”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 생각에 애가 타 속이 시커멓게 되었을 때였다. 집사님이 내 앞에 먹음직스러운 치즈 새우볶음을 내려놓았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치즈와 버터로 맛있게 볶아진 새우는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급한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방법은요?”
집사님은 재촉 어린 질문에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깊은 눈빛은 나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에 파헤쳐지는 기분을 한참 버텼을까, 집사님이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폐하는 후보자들이 직접 싸우는 것까지는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네?”
집사님은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와인이 크리스털처럼 빛났다.
“후보자들의 점수 채점을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아뇨. 그걸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르더니 한잔했다. 그가 뜸을 들이니 목이 타 나 또한 한 모금 마셨다. 이야기를 끊는 수준이 거의 주말 드라마급이었다.
“후보자들의 곁에는 비밀리에 수행하는 수행원이 있습니다. 후보자가 위험해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죠. 아무도 그들의 정체를 모르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니 접선 또한 할 수가 없습니다.”
“어쌔신이에요?”
과거 암살 게임의 주인공이 생각났다. 건물을 자유자재로 타고 다니는 그 게임을 꽤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났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술을 한 모금 마셨다고 취한 건가. 정신을 다잡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들이 사람을 죽이면 대단한 성과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역사상 그들을 매수하려는 자는 많았으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또 바로 법으로 제재당해 후견인 자격을 박탈당했죠.”
“……음. 정말 대단하네요.”
“하여튼 그들의 존재가 있으니 후보자들이 악마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을 비호하는 후견인들이 뒤에서 어떻게 손을 쓰려 해도 채점관들이 다 폐하께 보고할 테니까요.”
굉장하다. 한마디로 부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거잖아. 단 하나의 부패가 없을 수가 있다니. 여러 의미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란 것이 느껴졌다. 현실의 시험에는 부정이 판을 치니까.
“하지만 악마를 처단하기 위한 노력이 백 퍼센트 후보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폐하 또한 아실 겁니다.”
“뭐, 그렇죠?”
실제로 후보자들은 미성년자였다.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후견인들의 보호가 없다면 험한 세계에서 버티긴 힘들 거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악마의 정보를 찾고 처단한다? 어지간한 능력으론 불가능할 거다.
“폐하가 원하는 것은 후보자들의 노력과…… 후견인들의 노력입니다.”
“후견인?”
“네. 그들은 모두 돈이 많고 직위가 높죠. 그들이 손을 쓴다면 악마에 관한 정보는 순식간에 들어오겠죠. 그들의 돈이라면 용병을 고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왕실 입장에서 그것은 굉장한 이득이겠죠.”
확실히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격이었다.
“후보자들은 후보자 나름대로 악마라는 절대적인 적이 생기니 노력할 겁니다. 또한 굳어 있는 후보자 순위를 뒤집을 수도 있고요.”
“순위?”
순위도 있는 건가. 아니, 있을 수밖에 없다. 점수를 매기는 시험에서 등수가 매겨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
“영광의 관은 가장 뛰어난 자에게 내리지만 재능만으로 쓰기엔 힘들지요. 보통은 핏줄이 좋은 아이에게 좋은 후견이 붙으니까요.”
“……브렌다 공녀처럼?”
“그렇습니다. 브렌다 공녀는 유력한 계승 후보입니다. 그 공작가가 후견하고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폐하의 총비니 더할 바가 없습니다.”
입맛이 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세계든 결국 보이지 않는 특혜가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적절한 토지가 없다면, 누군가의 적절한 보살핌이 없다면 피어날 수 없다. 환경은 재능만큼이나 중요했다. 범재라도 지원이 있다면 수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악마에 관한 공로를 올리면 바닥에 있던 후보자라도 치고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조금 더 좋은 조건의 후견인을 얻을 수 있겠죠.”
하긴 기회라면 기회였다. 왕의 진정한 노림수는 이것일까? 모르겠다.
“뭐 그것도 결국 운이지만. 결국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체로 샬라메 공작가 같은 곳이 독식할 겁니다. 연줄과 돈이 있으니까.”
“……그럼 울리세는 어쩌죠?”
나는 돈이 정말 많다. 편법으로 만들어진 돈이었지만 하여튼 나는 돈이 많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정보를 얻는 방법 따윈 몰랐다.
판타지 소설 같은 걸 보면 정보 길드 같은 게 단골 소재였는데 대부분 전용 암호 같은 게 있게 마련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모를 그런 것. 즉, 지금 상황에서는 돈이 있어봤자 쓸모없었다.
“저는…… 연줄 같은 건 없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는 노력을 보이면 되는 거지요.”
집사님은 어느새 와인을 다 마시고 빈 잔을 채웠다. 나 또한 한 모금 더 마셨다. 도수가 센 것인지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대충 노력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이면 추방 명은 내리지 않을 겁니다.”
“다행이다…….”
집사님의 단언에 안심됐는지 온몸의 힘이 쫙 풀렸다. 결국은 그렇게 엄포라곤 했지만 겉으로라도 열심히 하는 척을 한다면 괜찮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문제없다. 정보와 악마의 흔적을 찾는 척이라도 하면 되겠지.
이렇게 된 거 정보를 찾는 척하면서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울리세와 함께 바캉스를 다시 한번 떠나고 싶었다. 여행을 생각하니 여름 바캉스 때 나를 공격했던 몬스터가 생각났다. 검은색의 흉악했던 그 괴물. 그것이 혹시 악마와 관련 있는 무언가일 수 있을까? ……음, 아냐. 내가 예민한 거겠지.
이내 생각을 털어버린 나는 술을 쭉 들이켰다. 긴장이 풀리자 혀에 달콤한 와인 맛이 느껴졌다. 술맛이 돌기 시작하니 눈앞의 조금 식은 안주가 맛있어 보였다.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이제야 드시는군요.”
그야 머릿속이 걱정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갈 리가 없었다. 술조차도 속이 타 마실 정도였으니까. 울리세의 앞날에 걱정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왕에 대한 분노가 슬금슬금 차올랐다.
“아니, 근데 진짜 너무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왕이요. 왕이 어쩜 그렇게 냉정해요?”
왕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일단 이해는 했다. 그로선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악을 처단할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후보자들은 모두 왕의 핏줄이었다. 자신의 직계 자손일 아이들부터 형제자매의 아이들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모질 수 있을까. 누군가는 분명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텐데.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는 다 나았을 상처가 시큰거리는 듯했다.
“왕이니까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되잖아요. 다들 어린데…….”
“하지만 후보자죠. 모두 영광의 관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진짜 걔네가 원하는 걸까요.”
후보자의 자격은 혈통이었다. 타고난 혈통이 있다면 아이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승 후보자가 된다. 그리고 왕좌를 노리길 바라며 키워지고 세뇌당했을 확률이 높다. 너는 후보자니 왕좌를 노려야 해. 왕좌가 아니라면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해. 그것이 진정한 아이들의 목표일까?
“원합니다.”
“그럴까요? 분명 다른 꿈을 꿀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걸 꿀 기회조차 박탈당한 건 아닐까요.”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동자가 일순간 지나갔다. 그 아이들 모두가 왕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을까. 그 자리에 목숨을 걸 정도로 처절할까. 그리고……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모르겠다.
“모르는 일이죠. 요셉 님이 알 방법도 없고요.”
“……그건 그렇죠. 어휴, 전 울리세만 챙겨야지.”
새우와 와인을 번갈아가며 반복해 먹었다. 맛있는 것끼리의 시너지는 엄청났다. 하지만 저번의 끔찍한 숙취와 술주정을 기억했기에 어느 정도 알딸딸해지자 와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또 울리세가 걱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집사님이랑…… 친해져서 너무…… 좋아요.”
“그렇습니까.”
“응. 사실…… 집사님이, 나쁜 사람인가…… 했어요. 너무, 못되게 굴어서…….”
지금은 이미 정은 정대로 들었고 친구가 되었다. 그는 조금 까칠할 뿐 나쁜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쁜 사람이면 날 그렇게 챙겨줄 리가 없다. 울리세와는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내 말에 집사님은 흐릿하게 웃었다. 술에 취해 헛것을 보나 싶었으나 역시 그는 웃고 있었다. 뜻밖의 광경에 나 또한 마주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마음이 아프군요.”
“하지만…… 집사님이…… 너무했잖아요.”
집사님은 그저 조용히 술을 더 마실 뿐이었다.
정말이지 맨 처음 만났을 때 집사님의 태도를 생각하면 울컥할 때가 많다. 하지만 역시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거겠지. 언젠가 더 친해진다면 사정을 들을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힘이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저 미소 또한 더 많이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응?”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미소를 더 보고 싶다고? 힘이 되고 싶다고?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왜?
얼굴이 타오를 듯 붉어졌다. 아냐. 진정하자, 김요셉. 왜 그런 거겠어. 얼굴이 너무 좋아서겠지. 나는 얼굴에 약했다. 잘생기고 예쁜 것을 사랑했다. 집사님은 완벽한 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 그래서일 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 때문일 뿐이다.
“요셉 님?”
“으악!”
허둥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집사님이 다가왔다.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그것을 눈치 못 챘고 덕분에 정신을 차렸을 때, 코앞에 있는 얼굴에 비명을 질렀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사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어이가 없겠지. 걱정해 줬는데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벌떡 일어났으니.
“저, 저 방에…… 갈게요.”
술을 먹긴 했지만 내 발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혼자 있을 공간이었다. 조금은 흔들리는 발로 열심히 걸었는데, 허리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집사님이었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는 내가 당황스럽게 했음에도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내게 집사님의 손길은 독이었다. 평소에는 별생각이 들지 않을 부축이었을 텐데 오늘따라 얼굴이 주체가 안 됐다.
나는 생선처럼 파드득 튀어 오르며 외쳤다.
“저 혼자 갈게요!”
나는 어떻게든 발걸음을 서둘러 방으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나를 잡는 손은 더는 없었다. 집사님이 포기한 거겠지.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볼을 때렸지만 불타오르는 볼은 진정할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후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식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손마저도 뜨겁고 땀까지 서려 있어 열을 더할 뿐이었다. 나에게 갑작스러운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 * *
타오를 듯한 얼굴. 터질 듯이 뛰던 심장. 그 모든 것은 술기운이 원인이리라. 원래 술 마시면 옆에 있는 사람이 예뻐 보이고 그러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술기운이 떨어진 새벽에도, 겨우 자고 일어난 지금도 집사님을 생각하면 여전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으으…….”
얼마 자지 못한 탓에 머리가 아팠다. 관자놀이와 목덜미를 문지르며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제야 나는 잊고 있었던 일기장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래, 일기장을 보자. 이유를 알지 못해 정신없는 것보단 차라리 일기장이 나았다.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연습 또한 해야 했고.
“이…… 인, 벤토리.”
더듬거린 말이었지만 인벤토리 창은 문제없이 떠올랐다. 빨리 익숙해져서 일기장 외에도 쓸모 있는 것을 넣어놔야 할 텐데.
나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꺼냈다. 다행인 점은 그동안 간간이 연습해 처음처럼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수준까진 아니게 되었다는 거다. 인간은 성장하는 생물이 과연 맞았다.
“아.”
[아무리 노력해도 후견인이 없으면 난 위로 올라갈 수 없다. 그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다음에 이 연회장에 홀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다.]
씁쓸한 내용이었다. 이 일기장의 주인인 왕자도 울리세와 같은 처지였던 시절이 있었나 보다. 내가 후견인으로서 울리세에게 오기 전 아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힘겨운 시절이. 그나마 이 일기장의 주인은 독한 것 같았다. 어린아이임에도 비뚤거리지 않고 힘 있게 쓴 글씨가, 내용이 그것을 증명했다.
“…….”
일순간 꿈이 생각났다. 증오를 불태우던 작은 짐승 같았던 울리세를, 내가 본 적이 없던 작은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각을 길게 이어나가려던 나는 발등이 따끔해 일기장을 덮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문양이 있을 발등을 한참 노려보았다. 종종 통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저놈의 문양 때문에 양말을 벗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때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집사님이 울리는 식사 시간 안내였다. 오늘은 또 어떤 요리가 나올까. 어제 먹었던 치즈 새우도 맛있었는데. 잊으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달빛에 비쳐 찬란하게 빛나던 푸른색이 떠올랐다.
“젠장.”
또다시 집사님의 얼굴이 머릿속을 잠식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이런 적이 난생처음이었기에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일은 달아오르려고 하는 볼을 식히기 위해 세수하는 것뿐이었다.
* * *
“요셉 님.”
“허으어허억.”
뒤를 돌아보자 집사님이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했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오후가 다 되어가는 내내 이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랄 일이 아님에도 집사님이 말만 걸면 펄쩍 뛰었다. 식사 시간에는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아까는 삐끗해서 넘어질 뻔도 했다. 과거 생쥐 새끼 같다고 나를 비유했는데 이 정도면 생쥐가 나보다 강심장일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사님의 얼굴만 보면 심장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과거의 나는 대체 어떻게 행동했던 걸까.
“……오늘따라 이상하시군요.”
“봐, 봐주세요.”
벌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 말하자 그가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꼼꼼하게 보는 집사님은 내가 아픈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나를 바라보아도 내가 이러는 이유는 알지 못할 거다. 나는 아픈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그가 대단해도 나도 모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겠죠?”
“네. 물론, 물론이죠.”
이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젠장. 멍청한 김요셉. 바보 같은 김요셉.
“그, 전…… 이만 할 일이 있어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앞에 있으면 숨기고 싶어도 계속 어리바리하게 행동하게 되니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평소보다 더 민첩하게 자리를 피하는 나를 집사님이 뒤에서 황망하게 불렀다.
“요셉 님?”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덫과도 같아서 벗어나기가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돌아본다면 어쩐지 가여운 사냥감처럼 사냥꾼의 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재촉해 황급히 어두침침한 공간으로 향했다. 그 길이 꿈속에서 한번 가보았던 공간이란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 여긴…….”
어둡고 먼지가 조금 쌓인 공간은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했다. 꿈속에선 너무나 어두웠고 엉망이었던 울리세에게 집중하느라 몰랐던 이곳은 작은 서재였다. 낡은 책 냄새가 방 안에 부영하고 있었다. 홀린 듯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방에 아이는 없었다.
자고로 현실도피에 가장 좋은 건 영상물을 보는 거다. 드라마부터 영화, 예능 프로 등등. 현실이었다면 다양한 것이 나를 반겼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영상은커녕 티브이조차 없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내가 볼 수 있는 건 이 책들뿐이다.
책에는 취미가 없지만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상식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읽어서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공부 싫다…….”
<제국의 역사>, <후견인의 역사>, <왕의 계보>. 어쩐지 한 가지 분야에 집중된 듯한 책은 굉장히 낡아 보였다. 자그마한 손자국까지 나 있는 책은 족히 50년은 된 듯했다. 표지의 제목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펼치면 찢어질 것 같은 책을 다시 꽂아 넣었다.
“정말 낡았네.”
다른 책들 또한 낡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장소만 곱절의 시간이 지나간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책을 꺼냈다. 누군가가 공부를 했는지 메모가 지저분하게 이곳저곳에 있었다.
“……어?”
자그마한 글씨. 아이다운 느낌이 있지만 굉장히 반듯한 이 글씨는 어딘가 익숙했다. 기억을 꼼꼼히 되새기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주 최근, 고작 몇 시간 전에 본 글씨였기 때문이다.
“인벤…… 토리.”
오늘 아침에 읽은 일기장을 펼쳤다. 책에 쓰인 메모와 글씨를 비교했다. 일기장이 조금 더 감정을 실었기에 글씨가 날아간 것 빼고는 놀랍게도 흡사했다. 이 일기장을 쓴 아이가 이 책을 공부한 것일까?
나는 책에 대한 흥미가 살짝 생겨 일기장을 도로 넣어놓고 책을 읽었다.
“……이게 뭐야.”
[마력이란 백마력과 흑마력이 있고 타고난 마력의 특성에 따라 백마법사와 흑마법사가 될지 결정된다. 백마법이란…….]
마법. 새삼스럽게 이 세계가 판타지 세계라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에 대한 이론이 책에 자연스럽게 적혀 있는 세계. 나에게는 소설과도 같은 내용이었기에 더욱 집중해서 읽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소설이 아닌 학문으로서의 마법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백마법과 흑마법의 정의와 그것의 역사 어쩌고저쩌고. 마법서라고 하면 보통은 마법 주문과 응용법이 있는 거 아닌가? 내가 기대한 내용은 없고 온통 어려운 이론만 나오자 급격하게 졸리기 시작했다.
팔락팔락. 대충 훑고 지나가니 페이지는 어느새 절반을 넘겼다. 이걸 내가 왜 읽고 있는 거지. 내게 필요한 것은 이 세계의 상식이다. 이런 재미없는 마법 이론이 아니란 말이다. 다른 책들이 낡기는 했지만 뒤져보면 이렇게 양호한 상태의 책이 한 권이라도 더 있을지 몰랐다.
그래, 그만 읽자. 책을 덮으려는 순간, 아이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흑마법 페토스]
[페토스=파괴]
[창조]
뭔 소리지? 메모가 씌어 있는 페이지를 읽어보니 가장 기초인 마법 주문이 있었다. 흑마법의 공격 마법 중 가장 기초라는 주문과 그 역사와 정의. 그것을 보고 쓴 메모인 것 같았다. 메모를 읽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새로운 메모가 있었다.
[페토스니아토]
“페토스…… 니아토?”
본래의 주문보다 훨씬 긴 단어를 아무런 생각 없이 읽었다. 그저 무심코 읽었을 뿐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발등이 타오를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격통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마 견디기가 힘든 고통이었다.
“아…… 으아악!”
내 몸에서 검은색의 아우라가 술렁이며 빠져나왔다. 검은 안개에 가까운 그것은 닿는 족족 주변을 먼지로 스러지게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차라리 발이 잘렸으면 좋겠을 정도로 아팠기 때문이다.
“아아악!!”
결국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은 고통이 오감을 마비시켰다.
눈을 떴음에도 볼 수 있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귀가 들림에도 들리는 것은 내 비명뿐이었다. 촉각은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코로 맡을 수 있는 건 내 몸이 타는 듯한 냄새뿐이었다. 혀에서는 비린내가 느껴졌다.
내 피일까?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이 현실인지 망상인지조차 모르겠다. 한참을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던 나는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까지 나는 다른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통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 * *
메마른 입안에 깔끄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뜨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뻑뻑한 눈은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호소했다. 온몸의 관절이 삐그덕거리며 나를 괴롭혔다.
“으…… 으으…….”
신음을 뱉자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안아 올렸다. 익숙한 손길에 몸을 기댔다. 나를 간병하는 손길은 미지근한 물을 입으로 부어주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하아…….”
“요셉 님, 괜찮으십니까?”
뻑뻑한 눈을 애써 뜨니 바로 코앞에 집사님이 있었다. 아니, 집사님일 수밖에 없지. 나를 그렇게 부드럽게 간호해 주는 사람은 집사님뿐이니까. 다행인 점은 몸이 아프다 보니 심장이 조금 빨리 뛴다 해도 딱히 감출 필요가 없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빨리 뛰는 심장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집사님…… 제가, 왜…….”
한순간에 늙어버린 듯 쉰 목소리로 묻자 집사님은 작게 한숨을 쉬고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에게서 깊은 피로함이 느껴졌다.
“비명을 듣고 달려가니 요셉 님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어디 다치신 건가 살펴보았지만 건강하셨고요. 방이 엉망이 되었더군요.”
“헉……. 그…… 감사…….”
“그보다.”
집사님이 내 말을 끊었다. 그제야 나는 집사님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꽉 쥔 두 손. 일자로 다물어진 입. 그 모든 것에서 그의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집사님은 분노가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내 발을 매만졌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 건드려 오는 그 손길은 정확하게 검은색 문양이 있는 부분을 향해 있었다.
“이 문양은 왜 숨기셨습니까, 요셉 님?”
“그…… 그게.”
집사님의 손에서 발을 빼놓으려고 했지만 그가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잡아챘다. 내 발이 독수리의 발에 낚아채인 먹잇감 같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발에 새겨진 저 문양은 위험한 것이었나 보다.
나는 결국 발을 빼지 못하고 집사님을 바라보았다.
“요셉 님은 이 문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추궁하는 목소리가 심장을 푹 찔렀다. 울컥거리며 두려움이 흘러나왔다. 모른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차갑게 내려다보는 그 눈에 온몸이 굳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차게 뛰던 심장과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이 거짓말같이 공포로 딱딱해졌다. 집사님의 번뜩이는 그 눈에는 살기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의 증오가 생생히 느껴졌다.
……나는 무슨 착각을 한 걸까. 지금까지 잘 대해주고 다정하게 군다고 그게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한 걸까. 나는 얼어붙은 입을 어떻게든 열어 대답했다.
“몰, 몰라요. 일어나니까…… 갑자기 생겨 있었어요.”
멍청하게 더듬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최선이었다. 집사님은 심기가 불편한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날카롭게 옥죄이던 손이 발을 해방했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몸은 발을 숨길 정도로 풀리지 못했다.
“이 문양은 요셉 님의 흑마법에 대한 적합률을 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방금의 날카로운 기세를 숨긴 집사님은 아까까지 보았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아도 전처럼 제어할 수 없었던 두근거림은 살아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놓인 들불은 차가운 냉기로 처참하게 식어버린 후였다. 안도할 일이었지만 어쩐지 따끔한 상처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그 문양에는 강대한 마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은 쓰러지기 전 읽었던 책 한 권이 다였다. 심지어 그 책은 너무 어려운 소리로만 가득 차 있어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분명 내 얼굴은 이해하지 못해 멍청한 표정이었을 거다. 그러니 집사님이 저렇게 한숨을 쉬는 거겠지.
“한마디로 요셉 님의 몸에는 강대한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 있는 거지요. 아마 이 정도면 대마법사도 눈독을 들일지 모릅니다. 다만…….”
집사님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몸을 쓸어 올렸다. 냉한 손이 몸을 타고 오를 때마다 뱀이 타고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눈에는 평소 나에게 보였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소름이 오스스 돋으며 점점 버티기 힘들어질 때 그의 손이 떨어졌다.
“마법에 재능이 있을지는 시험해 봐야겠군요. 오늘부터 저와 수업하셔야겠습니다.”
“네?”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내 몸에는 엄청난 양의 마력이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럼 나쁜 건 아닐 텐데 왜 그는 나에게 그런 무서운 눈빛을 보냈던 걸까.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왜 그와 수업을 해야 하지?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집사님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요셉 님이 쓰러진 이유. 이 책에 있는 마법 주문을 외워서가 아닙니까?”
그의 손에 들린 책. 그것은 내가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책이었다. 무참하게 뜯어진 책은 엉망진창이었다. 쓰러지기 전에는 저 정도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설마, 그 검은색의 아우라 때문인가?
“요셉 님은 지금 갓 태어난 아이가 칼을 쥔 것과 같습니다. 쓰지 못하는 힘이 요셉 님의 안에 있는 거지요. 다루지 못하는 힘을 사용하려 들었으니 지금 이렇게.”
그의 손이 내 머리와 발끝까지를 죽 가리켰다. 어딘가 모멸스러운 듯한 그의 눈빛에 발끈했지만 결국 내 탓이 맞아서 할 말도 없었다.
“쓰러지셨지 않습니까? 앞으로 마법을 배우셔야 이런…… 일이 없으시죠.”
“……알겠어요.”
두근거림이 사라진 가슴에 황량한 허무함이 느껴졌다. 사실 두근거릴 때 편하지는 않았다. 집사님의 얼굴만 보면 화끈거리는 얼굴은 부끄러웠고, 시도 때도 없이 두근거리니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지니 남은 것은 따끔거리는 고통과 외로움뿐이었다.
“……치료는 감사해요.”
“별것 아닙니다. 앞으로 마법을 배우기 전까지 흑마법에 관한 것은 얼씬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님은 한참을 나를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남은 것은 나뿐이었다. 나 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꾸깃꾸깃 이불에 구겨 넣었다. 꼴 보기 싫은 검은 문양이 새겨진 발도 이불 속에 숨겼다. 얼굴을 베개에 박고 눈을 깜빡였다.
“…….”
집사님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 큰 슬픔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그저 황량한 들판에 홀로 남은 고독한 기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맞았다. 나는 이 세계에 연고도 없이 혼자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추위에 팔을 쓰다듬었지만, 추위는 여전했다.
“흑…….”
갑작스럽게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도꼭지가 망가진 것처럼 눈물샘은 퐁퐁 눈물을 쏟아냈다. 제어할 수 없었던 설렘이 눈물로 바뀐 것같이 나는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 * *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어제 집사님과 대화를 하고 난 후 펑펑 울고 아무런 조치 없이 자버렸기 때문이다. 차가운 물을 틀어 세수하자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왔다.
“하아…….”
왜 그렇게 감정이 폭발했는지 모르겠다.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울 일도 아니었다. 폭풍과도 같은 감정이 지나간 후 남은 것은 무던함이었다.
게다가 오히려 생각해 보면 지금이 나았다. 마주치기만 해도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일상 생활이 불가능했을 거다. 집사님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래. 괜찮아.”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쉼 없이 되뇌었다. 괜찮다고, 좋은 일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뱃속 깊은 곳에서 다시 외로움이 치솟아 오를 것 같았다.
한참 차가운 물로 현실을 일깨운 후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종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먼저 가 있을 생각이었다. 방 안에 머물면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옥죄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복도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을 만났다.
“요셉 님, 아직 식사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아…… 그냥 기다릴게요.”
집사님이었다. 그는 요리하다 잠시 주방을 벗어난 건지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니, 어색한 것은 나뿐인가? 집사님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는 식당으로 향하던 발을 서둘렀다. 그러나 식당으로 가는 길은 부엌으로 가는 길과 같았기에 우리는 나란히 복도를 걷게 되었다.
“눈이 부으셨군요.”
“아, 네.”
그의 시선이 나에게 한참을 머물렀다. 조금 더 세수했어야 했나? 나는 시선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공허한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집사님은 내 미소를 보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기다란 식탁의 상석에는 울리세, 바로 그 옆이 내 자리다.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일찍 나오긴 했지만 할 것이 없었다. 무료함을 달래고 있자니 내 앞에 하얀색 컵이 놓였다.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하얀 머그컵에 담긴 짙은 갈색의 액체. 달콤한 향기.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는 액체의 정체는 코코아였다. 차갑다 못해 아팠던 그의 행동은 종적을 감춘 듯했다. 향긋한 코코아 향기가 씁쓸한 냄새로 느껴졌다.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뇨. 그냥, 좀…….”
한 입 마시고 내려놓자 집사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지.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혀는 맛있다고 요동쳤지만 어쩐지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힘들었다.
나는 말문을 돌리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침은 전부 다 되었나요?”
“……네. 거의 다 했습니다. 곧 종을 울리려고 했지요.”
“그럼 제가 울리세 깨워 올게요.”
드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마음이 앞서 조금 시끄럽게 일어나 버렸다. 집사님이 무어라 말하려고 한 것 같았지만 나는 후다닥 자리를 피해 도망치듯 울리세에게 갔다.
생각해 보면 울리세에겐 조금 미안했다. 매일 저녁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는데 어제는 내가 쓰러졌으니 아이는 저녁도 혼자 먹었을 거다. 혼자 땅을 파느라 아이를 방치하다니, 보호자 실격이다.
똑똑.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울리세?”
울리세는 웅크린 채로 이불 속에서 자고 있었다. 자기 몸만큼 큰 인형을 껴안은 울리세는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자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떠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경계의 눈빛을 띠었지만 나를 보자마자 눈처럼 녹아 없어지고 애정이 드러났다.
“요…… 셉.”
“응. 아침이야, 울리세.”
침대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기분이 좋은지 손에 머리를 비볐다. 작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손이 저릴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아쉬워하며 손을 뗐다. 아이는 그제야 일어났다.
“요셉. 어제…… 아팠어?”
“응? 응. 좀…….”
“나, 걱정했어.”
“아이고, 착해라. 형이 미안해. 어제 잠깐 조금 상태가 안 좋았지 뭐야.”
나를 걱정했다는 착한 울리세를 품에 껴안자 아이 특유의 달짝지근한 우유 냄새가 났다. 그 향기에 치유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응……. 다행히야.”
나의 품을 파고드는 이 작고 여린 아이가 내 곁에 있다는 걸. 이 세계에 홀로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외롭지 않다는 걸. 그런 당연한 사실을 어째서 깨닫지 못했는지. 이미 이 아이가 이 세계에 머무르게 하는 닻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미안한 마음에 애정을 담아 아이를 더욱 꼭 껴안았다.
“울리세, 형이 정말 사랑해.”
“……!”
아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했다. 쟁반만큼 커다래진 눈은 큰 충격을 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이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미 나는 아이에게 큰 애정을 느꼈는데도 말이다. 멋쩍음에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뒤 다시 한번 아이에게 말했다.
“사랑해, 울리세.”
“……진짜? 진짜지?”
아이가 울먹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분명 울리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겠지. 친아버지인 왕은 울리세를 이런 공간에 처박아놓았고, 그를 돌보는 사람은 집사님이니까. 집사님이 울리세에게 애정 표현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울리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울리세는 정말이지 기뻐 보였다. 아이의 눈에는 찬란히 피어난 감정이 가득했다. 애정, 행복, 사랑. 세상의 모든 긍정적인 것이 봄날처럼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피워냈다. 내 노력이, 사랑이 헛되지 않았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우리를 축복하듯 감싸 안았다. 누군가가 보면 나를 비웃을 테다. 고작 게임 속의 캐릭터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하지만 이렇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냉혹하고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해도 이 아이를 사랑했을 거다. 나는 기쁜 얼굴로 아이를 껴안고 울리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럼. 진짜지. 형은 울리세를 사랑해.”
울리세는 기뻐하며 나를 다시 세차게 안았다.
“나도…… 사랑, 해.”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애틋함에 나는 울리세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내가 지닌 애정이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헐떡이던 외로움은 온기로 인해 먼지처럼 사그라졌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쁨, 반짝이는 별빛 같은 행복이 충만하게 나를 채웠다.
“울리세, 우리 그럼 밥 먹으러 갈까?”
“……응.”
아이는 떨어지기 싫은 듯 뭉그적거렸지만 이내 씩씩하게 떨어져 나왔다.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고 우리는 나란히 복도를 걸어 식당에 들어섰다.
식탁에는 이미 집사님이 음식을 준비해 놓았다.
“늦으셨군요.”
조금 늦었나 보다. 웃음으로 무마하고 자리에 앉았다. 집사님이 나에게 주었던 코코아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치우지 않았다 해도 식었으니 그다지 맛있진 않았을 테지. 나는 싱긋 웃으며 울리세를 보며 말했다.
“먹자.”
“응.”
아까 입맛이 없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음식이 쑥쑥 들어갔다. 역시 집사님의 요리 솜씨는 대단하다. 고작 프렌치토스트인데도 이렇게 맛있다니. 이 레시피로 디저트를 만들어 카페를 차리면 문전성시를 이룰 거다.
내가 기분 좋게 먹자 집사님이 의아한 듯 물었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군요.”
“네. 엄청요. 오늘은 날씨도 좋네요.”
창밖에서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마음이 안정되어서일까. 집사님을 보아도 마음이 괴롭지 않았다. 울리세를 향한 애정이 방패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울리세를 향한 고마움이 부쩍 크게 느껴졌다.
“…….”
집사님은 뜻 모를 얼굴을 했다. 어쩐지 기묘한 표정이었는데,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했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하여튼 긍정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그 표정을 외면하고 음식을 먹었다.
접시의 음식을 모조리 비우고 후식인 커피를 홀짝였다. 집사님이 숙취 이후에 타주는 커피 외에는 모두 달콤해 맛있었다. 울리세는 사과 주스를 마셨다. 안온한 시간 중 집사님이 불쑥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학원에 모셔다드린 후,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저요?”
“네.”
잠시 나를 말하는 줄 모르는 바람에 뒤늦게 답했다.
마법이라. 배우면 나도 영화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막 화려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걸까. 순간 이동도 쓰고? 순간 이동을 배우면 좋을 것 같다. 그럼 기차와 마차를 타지 않아서 쾌적할 테니까. 아무리 좋은 마차를 타도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힘들었다.
“요셉…… 뭐, 배워?”
“아, 응. 형 마법 배워야 할 것 같아서…….”
“왜?”
호기심이 아이의 눈에서 반짝였다. 생동력 넘치는 그 눈동자에 히죽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되도록 아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냥. 배우고 싶었거든. 형 마법에 관심이 많잖아.”
“……응. 건국제 때…… 그랬었지.”
다행히 예전에 마법에 관심을 보인 덕에 아이는 별 의심 없이 수긍했다. 다행이었다. 발등의 문양이 생각했던 것만큼의 끔찍한 무언가는 아니었다. 최악의 최악으로 죽음까지 생각했으니 차라리 나은 상황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장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기엔 그때 집사님의 반응은 너무나 끔찍한 무언가를 목도한 것 같았다. 그 살기와 경멸이 섞인 눈빛이란,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을 전제로 그가 했던 말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이 검은 무늬는 역시 들키면 좋은 것은 아니리라. 다룰 수 없는 방대한 양의 마력. 대마법사가 눈독을 들인다니 그럼 내 발을 잘라 가버릴지도 모른다. 끔찍한 생각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시간은 금방 지나가 울리세가 학원에 등원할 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든든히 먹은 아이는 어쩐지 우물쭈물 내 앞에 서 있었다. 평소라면 인사하고 마차를 타러 갔을 텐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의아함에 시선을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자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무슨 일이야? 학원 가기 싫어?”
“우웅. 그건, 아니야…….”
“그럼?”
그리고 그때, 볼에 가벼운 나비가 앉은 듯한 촉감이 느껴졌다. 가볍고 상냥한 접촉. 뽀뽀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울리세를 보자 부끄러운지 볼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울리세를 향한 애정은 안 그래도 깊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한번 아이에게 더욱더 깊게 빠져 버리고 말았다.
“울리세 잘 다녀와.”
쪽. 나 또한 아이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었다. 아이는 기쁜지 병아리처럼 폴짝거리며 마차를 타러 사라졌다. 집사님은 크게 놀란 듯했다. 창백해진 안색. 크게 뜨인 눈. 주체하지 못하는 눈.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듯 벌렸다 닫히는 입. 큰 동요를 숨기지 못한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급하게 자리를 떴다.
“……왜 저러지?”
고작 아이와의 애정 표현일 뿐인데 그는 마치 귀신을 본 듯한 반응을 보였다. 희게 질린 얼굴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집사님은 언제나 울리세와 관련된 것에 이런 큰 반응을 보였다.
왜일까? 둘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미움에는 분명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집사님이겠지. 닮은 외모로 생각해 보면 가정사 정도인데……. 가정사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어 확신은커녕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뭐 일단 집사님이나 기다려 볼까.”
그런데 마법은 어디서 공부하는 거지? 우선, 수업 시작 전 서재에서 다른 마법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저택에는 전에 내가 쓰러진 방 말고 서재가 따로 있다. 그 전의 장소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한 마법으로 엉망이 되었다. 슬쩍 보고 왔었는데 엉망진창인 꼴이 저택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서재는 그 전의 곳보다 가기가 편했고, 아이를 위한 동화책도 그곳에 꽂아놓았다. 그곳에는 마법 공부에 괜찮은 책이 있겠지.
* * *
서재는 집사님의 청소로 먼지 하나 없었다. 낡은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는 도서관과 같은 냄새가 났다. 공부를 위해 도서관을 갔던 기억이 냄새를 타고 떠올랐다. 그다지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다. 턱을 긁고 서재를 구석구석 뒤져보았다.
“오, 이거 재미있어 보인다.”
사람은 딴짓을 즐기게 마련이다. 나는 본연의 목적을 잃고 서재를 돌아다니며 재미있는 것을 찾아 보았다. 물론 책을 즐기지 않기에 몇 장을 넘기고 덮는 식의 행동을 반복했다. 그 덕에 나는 단시간에 쓸모없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
어느 도시에서는 아이를 버리는 끔찍한 일이 자주 벌어졌다든가. 저승으로 가는 기차는 불의 악마가 운전한다는 것. 인어는 사람의 기억을 좋아한다 등등. 정말 쓸모없는 정보뿐이었다. 아마 오래 기억하진 못하겠지.
“여기에 계셨군요.”
“으악!”
펄쩍 놀라 손에 든 책을 떨어뜨렸다. 나는 언제쯤 집사님이 나타날 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새가슴인 이상, 다른 영혼이 내 몸을 차지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겠지.
그는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바쁜 나를 대신해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아놓았다.
“수업은 여기서 진행하지 못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어디서 진행하나요?”
“야외에서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유였다. 힘도 제대로 조절 못 하는데 내부에서 연습했다간 세간을 박살 낼 것이 분명하니까. 이미 엉망으로 만든 전적도 있지 않았는가. 어쩐지 재앙 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어서 가요!”
집사님은 별말 하지 않고 앞장섰다.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를 쫓아가는 모양새였다. 얼마를 걸었을까, 집사님이 뒤돌아보았다.
“왜 뒤에서 오십니까?”
“네?”
“옆으로 오시죠.”
나는 후다닥 옆으로 다가갔다. 하긴 지금까지 나름 친하게 지냈는데 너무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멋쩍음에 뒷머리를 긁었다. 그와 친해졌다고 기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너무나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집사님이 나에게 험하게 군 것은 어제가 처음이 아니다. 그랬음에도 그를 향한 기대감에 크게 상처를 받은 나 자신이 한심했다. 결국 치미는 창피함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다시 안 좋아지셨습니까?”
“네? 아뇨, 그냥 좀…….”
“……요셉 님.”
집사님이 걸음을 멈췄다. 나란히 걸어가던 나는 한 발자국 앞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 마주 서자 집사님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흐르는 진중한 분위기에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네?”
“어제, 제가 너무…….”
그는 말을 삼켰다. 집사님이 느끼는 긴장감이 와닿았다. 그 또한 지금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이제껏 그는 아무렇지 않게 사죄를 했다. 그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고 또한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지금 이렇게 긴장하는 걸까?
“……죄송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집사님은 처음으로 미숙해 보였다.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는 초인 같은 남자가 오늘따라 어린아이 같았다. 갈피를 잃어버린 연약한 어린아이.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긴장이 풀어지도록 장난스럽게.
“괜찮아요. 집사님이 뭐 그렇게 재수 없게 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제가 말입니까?”
“그럼요. 특히 처음 만날 때도 그랬잖아요. 괜찮아요. 그냥 어제는…… 좀, 저도 예민했죠.”
집사님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번졌다. 그러고 보니 집사님은 친구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나를 친구라고 해주었고.
그렇다면 친구끼리 사이가 어색해진 것은 그도 처음일 것이 분명했다. 친구끼리의 사과, 화해. 그 모든 것이 처음일 터이니 어색한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저도 미안해요, 집사님.”
“……그럼 갈까요.”
우리는 나란히 걸어 야외로 향했다. 어제의 별것 아닌 앙금이 마음속에서 녹아내렸다. 발걸음이 날 듯이 가벼워졌다. 추운 겨울임에도 내 마음은 봄날 같았다. 불편했던 공기는 집사님이 먼저 사과를 해준 덕에 괜찮아졌고, 울리세와의 거리는 아이가 나에게 애정 표현을 해줄 정도로 가까워졌다. 기쁘고 행복했다.
“도련님과 사이가 좋아지신 것 같더군요.”
“네. 오늘 말이죠. 제가 사랑한다고 해줬거든요.”
“……사랑?”
집사님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주절주절 자랑을 떠들었다.
“네. 제가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울리세가 말이에요…….”
그러나 자랑을 끝마치지 못했다. 집사님이 내 어깨를 강하게 낚아챘기 때문이다. 세게 쥔 손은 평소의 부드러운 손길과는 정반대였다. 손아귀에서 그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사랑한다고 말씀했다고요?”
“윽, 아파요……. 아파요!”
강하게 옥죄어오는 손아귀에 작게 비명을 지르자 집사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 자신도 그렇게 세게 잡았던 건 인지하지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픈 것은 여전했기에 나는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죄송, 합니다.”
말을 더듬으며 사죄하는 모습을 보니 화도 나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런 거예요?”
“……도련님께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집사님의 눈은 기이한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흥분과 기대가 뒤섞여 묘한 열기를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평소 냉혹하다고 할 수 있는 냉정한 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게 왜요?”
“다른…… 변화는 없었습니까?”
“네?”
“다른, 무언가 다른 변화가…….”
그는 다급하게 중얼거리며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시선이 한 장소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나를, 집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진정했다. 방금까지의 열기는 거짓인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집사님?”
전지가 나간 장난감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굳은 게 생명력이 모두 빠져나간 시체 같았다. 잘 만들어진 인형 같기도 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스러워 손을 뻗어 집사님의 어깨를 쥐었다.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깨를 작게 흔들자 텅 비었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괜찮아요?”
“……아.”
그제야 집사님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평소와 같은 냉함을 몸에 두르고 이성을 되찾은 모습은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어쩐지 꿈결을 헤매는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까의 모습은 거짓인 양 태연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요셉 님. 잠시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군요.”
“아뇨, 괜찮긴 한데…….”
“그럼 가시죠.”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는 물어볼 틈도 주지 않았다. 칼바람이 부는 듯 쌩하니 뒤돌아선 그에게 캐묻기에도 좀 그랬다. 나는 저려오는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앞서 나간 집사님을 뒤따랐다.
“같이 가요.”
* * *
“정말이지…….”
집사님의 황당하다는 눈길에 몸이 움츠러든다. 주변은 엉망이 된 서재처럼 검은 그을음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숲이 아니라 공터인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큰불이 났겠지. 이 꼴이 된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이렇게…… 재능이 없으시다니.”
그랬다. 집사님은 나를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었다. 수업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현대사회에서 대학교까지 나온 사람이라는 거다. 공부를 싫어하긴 하지만 이해력이 모자라진 않다는 소리다.
뜬구름 같았던 그 책의 내용보단 집사님의 설명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나는 아주 기초 중의 기초인 마법구를 만드는 것부터 성공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정돈하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집사님은 나에게 아주 강대한 양의 흑마력이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력이 많으면 뭐 하나. 제어하질 못하는데.
마법구를 만드는 데는 아주 조금의 마력이 필요했다. 그야말로 마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처음 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쥐어짜야 그나마 조그마한 마법구를 만드는 것에 그친다고 한다. 그 쥐어짜는 것을 시작으로 마력 제어를 가다듬는 거다.
그러나 나는 쥐어짜지 않아도 마력이 술술 나왔다. 마법구를 만드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 다만 너무 큰 것이 튀어나왔고, 이동마저도 제어하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나가기 일쑤였다. 제어하지 못하는 거대한 마력구는 실패나 다름없었다.
“…….”
집사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순간 발끈했다. 사람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지. 어떻게 저렇게 멍청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을 하느냔 말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아주 쉬운 주문이라도 누군가에겐 어려울 수 있다.
“처음인데……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니에요?”
“저는 한 번에 성공했습니다만.”
정정한다. 집사님 같은 천재가 아닌 이상이라고 해야겠다. 제길. 왜 저 사람은 생긴 것도 완벽하고 못 하는 것도 없어서 나를 이렇게 바보로 만들지. 천재가 사람을 가르치면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총을 주시면 안 될까요?”
“이 나라의 총기 규제는 엄격합니다. 제대로 된 허가증을 취득해야 하지요.”
“따면 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집사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투에 쓰려면 노점의 그런 장난감으론 턱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총을 써야 할 텐데, 요셉 님의 조종 능력으로는 마탄을 쓰기 전에 총이 박살 나고 말 겁니다. 요셉 님도 크게 다칠 거고요.”
젠장. 내 재능을 이렇게 쓰지 못하다니.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마법 연습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나는 마법구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엄청난 양의 마력에서 아주 조금의 내용물을 덜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어려웠다.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괜찮을 텐데 몸속에 형체 없이 존재하다 보니 고난도였다.
“요셉 님.”
집사님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언제 벗은 건지 늘 끼워져 있던 검은색의 반장갑이 없어 맨손이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멀뚱히 보았다. 왜 갑자기 손을 내미는 거지?
“손을.”
“아, 여기요.”
손을 조심스럽게 올리자 싸늘한 공기 때문인지 조금은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그 싸늘함에 놀라 손을 움츠리려 하자 집사님이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깍지를 껴 잡았다. 맞잡은 손 사이로 몽글거리는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제 마력을 느껴보세요.”
계속 그 쉬운 마나구를 만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결국 직접 시범을 보여 알려주려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진작 이렇게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한참을 삽질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잖아. 속으로 투덜거리자 집사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네.”
고분고분한 학생처럼 대답하자 집사님이 다시 마법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흐르는 물을 느끼는 것처럼 마주 잡은 손으로 그 마력을 느끼다 보니 어느 정도 대충 감은 왔다. 집사님은 총 세 개의 마법구를 만든 후 미련 없이 손을 놓아주었다.
자유로워진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자 집사님이 말했다.
“자. 다시 한번 해보시죠.”
집사님이 손수 시연해 준 덕분일까.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마법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동그래야 할 마법구는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이리저리 튀어 나가진 않았으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마법구가 찌그러진 건 처음 보지만 뭐, 잘하셨습니다.”
“와!”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난생처음 성공한 마법이었다. 기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을 찌그러진 마법구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루어낸 최초의 마법은 불완전했지만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집사님이 설명을 시작했다.
“흑마법은 대체로 공격 마법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하여, 기초라지만 마법구는 시전자에 따라 훌륭한 공격 마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건요?”
“……찌그러졌으니 날아가다가 궤도가 휠 수도 있겠군요. 연습이 더 필요합니다.”
한참을 마법구를 신나게 들여다보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집사님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없애나요?”
“…….”
잠시 조용한 정적이 공터를 휩쓸고 지나갔다. 집사님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나는 허공으로 마법구를 날렸고, 마법구는 조금 휘는가 싶더니 어느 정도 날아가다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저걸 유지하는 것도 노력해야 하는 건가. 대체 공연에 나왔던 아이들은 얼마나 마법에 재능이 있는 거지.
그렇게 그날의 수업이 끝났다. 그래도 마법을 성공하기는 했으니 성과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 * *
“그래서 우리 언제 여행 갈까?”
“여행?”
돌아온 저녁 시간. 집사님이 내온 코코뱅을 먹으며 이야기를 꺼내자 울리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설명을 해준 적이 없었구나. 집사님과의 악마 토벌 해결법을 듣고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한심하긴, 아이에게 설명이 먼저인데.
나는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국왕 폐하가 말씀하신 악마 토벌 말이야. 보여주기식이라도 해야 쫓겨나지 않잖아? 그러니까 그걸 빌미로 잠시 놀다 오자. 하는 척이라도 하면 되겠지.”
“……응. 하지만.”
울리세는 조금 머뭇거렸다. 그 눈가에 서린 걱정을 보자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울리세의 자그마한 손을 잡고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울리세.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진짜?”
“그럼. 설마 그런 안 좋은 일이 또 있겠어? 게다가 형 마법도 이제 쓸 수 있으니까.”
“풋.”
아주 작은 코웃음이 들려 돌아보자 집사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그의 웃음을 들었다. 제길, 비웃다니. 하지만 지금은 울리세의 안심이 더욱 중요했다. 울리세는 마법이라는 말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응……. 좋아.”
“그치? 흠, 한동안 학원에 쉰다고 해야겠네.”
“연락하겠습니다.”
집사님이 있으면 정말 편했다.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사소한 것부터 큰일까지 해결해 주니까. 이래서 돈이 있으면 비서를 고용하는 걸까. 아니, 하여튼 지금은 그것보단 여행지를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디로 갈까? 저번에는 산에 갔으니까 이번에는 바다? 아니면 뭐 축제라도 하는 곳이 있으려나?”
“겨울 바다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돔이 제철이니 먹으러 가는 분들도 많고요.”
“돔!”
이 세계에도 돔이 있구나. 입에 침이 고였다. 순간 머릿속에 찬 것은 싱싱한 회와 나머지 부위를 넣고 끓인 매운탕이었다. 칼칼하고 맛있는 음식에 들떴다. 바다다. 그래, 바다. 바다로 가야 한다.
“울리세는 어때?”
“나는, 다 좋아. 요셉이랑…… 같이라면.”
요리에 정신이 팔린 나와 달리 울리세는 귀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야말로 순수함의 결정체였다. 식욕에 휩싸였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님은 검은색의 수첩에 무언가를 끼적였다.
“우리 울리세가 역시 최고네. 형도 울리세랑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응.”
뒤늦게 음식에서 벗어나 울리세를 챙겼다. 내가 음식에 넋이 나가 있던 것을 아이가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울리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흥얼거렸다. 나 또한 여행이 기대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겨울 바다를 산책하는 것도 좋겠지. 뭐든 간에 이렇게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게 기뻤다.
* * *
“일등석은 정말 돈값을 하는 것 같아요.”
집사님의 일 처리는 빨랐고 여행 일자 또한 빠르게 잡혔다. 일 등급 기차 예매부터 별장 예약까지 한순간이었다. 새삼 신기했던 것은 이 세계의 별장은 따로 개인 소유의 별장 이외에 펜션 같은 개념으로도 있다는 거였다. 여름의 그 별장 또한 그런 식으로 예약한 것이었고.
인기가 많아 예약 따기가 힘들단 것은 집사님의 설명으로 알게 되었다. 어쩐지 별장 예약 구조가 현대와 비슷했다. 그의 능력은 이런 곳까지 뻗어 있었다. 현대였다면 티켓팅을 잘하지 않았을까 싶다.
“비싼 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래요.”
우리는 기차의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훈훈한 난방과 푹신한 의자. 심지어 이 기차에는 사람을 부르는 벨 같은 것도 있었다. 저번 여행에서 탔던 기차에는 없었던 거였다. 출출하면 간식을 시켜 먹는 것도 괜찮겠지.
“얼마나…… 가야 해?”
“음. 한참을 가야 할 텐데…….”
“못해도 5일은 꼬박 달려야 합니다. 졸리시면 저 옆의 문을 열면 침대가 있습니다.”
엄청 오래 가네. 한국이었으면 국내 이동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반나절 정도가 최대일 텐데. 이 나라가 크긴 큰가 보다. 저번에는 기차를 얼마 타지 않았으니 이렇게 오래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들떴다.
“그래도 이 기차는 빠른 편입니다. 마법으로 이리저리 손보았다고 하더군요. 인기가 많아서 예약하기 조금 힘들었습니다.”
집사님이 힘들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끝내주는 경쟁이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런 사소한 대화를 하며 열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람을 불러 간식을 먹기도 하고 카드놀이도 했다. 그리고 역시 울리세와 집사님에게 계속해서 졌다. 다음에는 카드가 아닌 다른 것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
집사님이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기차의 불이 모두 꺼졌다. 해가 지고 깜깜해지고 있었기에 불이 꺼진 기차 안은 어둑어둑했다. 어두워진 내부에 불안이 스멀거리며 기어올랐다. 긴장감에 옆에 앉은 울리세의 몸을 꼭 껴안았다. 혹시 모를 일에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정전은 순간이었다. 기차는 금세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깜짝이야. 이게 무슨…….”
잠시 기차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하지만 금방 되돌아온 것을 보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울리세에게 웃어주었다. 아이가 불안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울리세는 다행히 겁먹지 않은 듯 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젠장!”
그러나 집사님은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로 그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다급하게 나와 울리세를 껴안았다. 당황해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 큰 충격이 기차를 덮쳤다.
쾅!!
몸이 사정없이 기울고 집사님이 감싼 것이 무색하게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울리세에게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여행 일정 중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통탄한 일이었다.
4장 악마(1)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정신이 들었다. 기차 내부는 엉망이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들은 죄다 쓰러져 있었고, 유리창 또한 금이 가 깨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비싼 객실이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은 뿌연 수증기에 가려 불투명하게 보였다. 멍한 정신으로 품 안의 울리세를 확인했다. 다행히 어딘가 다치진 않은 듯했다. 다만 기절한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집…… 사님?”
뿌연 수증기가 시야를 가렸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기절하기 전 곁에 있었던 집사님이 없었다. 어디론가 튕겨 나간 걸까. 아니면 다른 장소를 확인하러 간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품의 어린아이를 챙기고자 나는 다시 한번 꼼꼼하게 울리세를 살폈다.
“후…….”
다행히 옷에 가려진 부분 또한 멀쩡했다. 아이는 그저 충격에 기절한 것 같았다. 아이를 어떻게든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멀쩡한 것은 울리세뿐이었나 보다. 나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으…….”
쓰러지기 전 종아리가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다. 심각한 것은 아닌 듯 바지를 걷어 올리니 멍이 든 게 다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객실이 난리가 날 정도인데 이 정도 부상이면 기적이었다.
“요셉 님, 일어나셨군요.”
“집사님!”
드륵 하는 소리와 함께 객실이 열리고 집사님이 들어왔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그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넘쳤다. 심지어 상처 하나 없고 옷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쩐지 그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그 모습을 보자니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러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도련님은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군요.”
“네. 그런데 이게 무슨…….”
집사님은 나보다 먼저 깨어났고 밖에 갔다가 왔으니 상황을 파악했을 것 같아 질문한 순간이었다. 안내 방송이 나오려는지 찢어지는 듯한 스피커 소리가 울렸다.
끼이이이-
그 요란스러운 소리에 울리세가 몸을 움찔거렸다.
[아. 아. 들리나? 들리겠지.]
걸걸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도 말하는 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괴팍함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장이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승객들의 대피 같은 것을 안내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그 목소리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장난스러움 또한 담겨 있었다. 불안이 슬금슬금 차올랐다. 설마…….
[안녕하십니까. 기차의 운행을 맡은 시판, 시판입니다. 기차는 종착역까지 급행으로 운영됩니다.]
매우 정중한 내용은 예상과는 달랐다. 나는 당연히 욕설이라든가 이 기차는 우리가 접수했다, 등의 강도 같은 말을 예상했다. 편견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종착역은 아궁이.]
네?
[종착역은 연옥의 아궁이입니다.]
“저게 무슨, 소리죠?”
“……요셉 님. 아무래도, 악마의 영역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넋을 놓았다. 악마? 왕이 말했던 그 악마를 말하는 걸까. 그런데…… 악마가 이렇게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거였나?
믿을 수가 없어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검보라색의 불길이 치솟은 게 보였다. 불길함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불꽃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아, 알겠어요.”
시야가 부연지 눈을 비비는 울리세를 얼러 안았다. 다리의 통증을 무시하고 일어나자 집사님은 조금 눈가를 찌푸렸지만 앞장서 걸었다.
객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우리가 있던 객실은 양호했단 걸 깨달았다.
“끄…… 으…….”
객실에서 튕겨 나온 사람이 이리저리 뒤틀린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피가 철철 나는 상태였다. 이 난장판에서 멀쩡한 것은 우리뿐이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집사님은 귀찮은 것을 치우듯 발로 쓱 밀었다.
쾅! 쾅!
그때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집사님이 말했다.
“무시하시죠.”
“하, 하지만.”
무시하기엔 처절하게도 간절한 소리였다. 이 상황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단 한 개, 구조 요청뿐이다. 하지만 집사님은 매정하게 무시한 채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반면 나는 다리가 얼어붙은 듯 걸어갈 수 없었다. 쾅쾅거리는 소리가 나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
결국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등석이 있는 객차와 이, 삼등석 사람들이 쓰는 식당차와 연결된 통로. 그 통로의 문에 있는 동그란 창 너머, 사람들이 들리지 않는 울음을 내지르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뚫어질 듯 강렬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그들을 도와주리라 믿는 건지 간절한 눈으로 애타게 구조 요청을 하고 있었다.
당황해 문을 황급히 살펴보았다. 저들이 문을 열지 못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열차에 탔을 때 문은 잠겨 있지 않고 개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문고리를 단단히 묶어놓고 문틀에 무거운 무언가를 끼워놓았다. 절대로 열지 못하게. 강렬한 악의와 이기심이 느껴졌다. 누가 저렇게 해놨을까.
“요…… 셉.”
“……아.”
충격에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으니 울리세가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왔다. 아무 곳도 다치지 않은 울리세가 나를 꼭 껴안았다. 보호해 달라는 것처럼.
한참을 울리세를 껴안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걸어가기에는 문 너머의 사람들이 두드리며 내는 소리가 족쇄처럼 달라붙어 나를 괴롭혔다.
“요셉 님!”
“으…….”
앞서 나간 집사님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팔을 단호하게 붙들었다. 거친 손길에 집사님을 쳐다보자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곳에 멈춰 있는 나를 비난하듯 엄하게.
“어서 나가야 합니다.”
“하지…… 만.”
“이곳은 악마의 영역입니다.”
집사님은 잔인한 현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차는 악마의 손에 들어가 연옥으로 달리고 멈추지 않을 겁니다. 종착 지점에 도착하는 그 순간 연옥의 불길에 불타 우리는 재가 되고 말 거고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공포에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저들을 동정할 시간에 발을 움직이십시오!”
불타 죽는다. 나는 느리게 창밖을 보았다. 우리를 잡아 삼키려는 듯 휘몰아치는 불꽃은 짐승의 아가리를 닮아 있었다. 집사님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의 동요하지 않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다급해 보였다.
“……요셉.”
다시 한번 품속의 울리세가 내 팔을 쥐었다. 나는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의 눈길이 나를 족쇄처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무거워진 발걸음은 죄책감의 무게였다.
집사님이 느리게 움직이는 나를 잡고 빨리, 재빨리 움직였다. 기차의 내부에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찼다.
“이 수증기, 위험한 건 아니죠?”
“위험하진 않습니다. 기차 내부에 있는 연료인 물이 불 때문에 기화되어 일어나는 현상이죠.”
기차의 연료가 물이라고? 전기나 마력 같은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강화되었다지만 마법으로 움직이는 기차는 아닙니다.”
“그럼 창밖으로 보이는 불꽃은…….”
치이익. 신발의 밑창이 불에 눌어붙어 바닥에 붙었다. 집사님의 말이 맞았다. 불은 기차를 달궈 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마치 꽁무니에 불이 붙은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도망가도 끝은 죽음뿐인 몰이사냥을 당하고 있었다.
수증기는 점점 늘어났고, 그 덕에 온 힘을 다해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려지고 말았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던 나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리는 수증기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쾅쾅- 계속해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그 소리가 내 귓가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애써 무시하려는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복도를 지나 우리는 일등석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식당차에 들어섰다. 그곳에도 많은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정신을 잃은 채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이 기차에서 멀쩡한 사람은 우리 세 명뿐인 것 같았다. 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도 이마에서 피를 흘리거나 그랬으니까.
그런데…… 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을까?
정신을 잃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나 또한 충격으로 기절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와 집사님, 그리고 울리세를 제외한 모든 일등석의 승객과 승무원이 기절해 있는 것은 이상했다.
집사님에게 이끌려 걸어가며 나는 불현듯 든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기절하기 전 밖에 나갔다 온 집사님. 기절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발로 밀어 치우는 집사님.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요셉 님.”
당신이 이 사람들을 기절시켰나요? 말하고 싶었지만 질문은 입으로 나가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가 정말로 그랬다면? 하지만 집사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고 있다. 설령 저자들을 기절시킨 것이 그라고 해도 나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는다.
“아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품속의 울리세를 꼭 껴안고 눈을 질끈 감아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지킬 것이 있었다. 도덕성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울리세가 나에게 답하듯 세게 목을 껴안았다. 집사님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식당 칸의 옆문을 열고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후끈거리는 열기와 수증기는 이 통로에서 흘러나온 듯 안개의 바다를 건너는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물과 석탄을 실은 칸입니다. 이 통로는 승무원들의 이동을 위해 만든 공간이죠. 이곳을 지나면 기관실이 있습니다. 악마는 그곳에 있을 겁니다.”
신발이 달라붙지 않도록 빠르게 걸었다. 넘실거리는 수증기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며 벽에 몸이 스칠 때마다 데는 것 같았다. 울리세의 팔다리가 스칠까 더 꽁꽁 싸맸다.
분명 길지 않은 통로임에도 지나가는데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다. 좁은 목구멍 같은 통로를 지나 단단히 닫힌 문이 나오자 집사님이 발로 걷어차 열었다.
“윽.”
썩은 계란 냄새가 나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여러 가지의 용도를 알 수 없는 레버가 가득한 기관실. 본래 있어야 할 기관장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검은색의 털이 흉하게 난 것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짐승이라기엔 사람과 닮았고, 사람이라기엔 짐승을 닮았다. 여름 여행 때 보았던 무엇인지 모를 그 몬스터와 닮았다. 거대한 짐승을 앞에 둔 오금이 저리는 이 기분은 그 생각이 맞다고 소리쳤다. 그것보단 지성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비슷한 무언가라고.
심장이 두려움으로 벌렁거렸다. 이제는 나아 아문 옆구리의 흉터와 문양이 있는 발등이 욱신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님이 다정하게 말했다. 뜨거운 열기. 숨 막히는 수증기. 괴물에게서 쏟아지는 위압감. 그 모든 것을 집사님의 말이 상냥하게 가려주었다. 무서워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내 앞을 막아선 그의 등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다른 이들에게 무심하고, 다친 사람을 외면하는 잔인한 사람이었음에도 그의 행동에 나는 위안과 기쁨을 얻었다. 나는 정말이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룰 위반이야!]
괴물이 소리 질렀다. 무슨 의미인지도 파악하기도 전, 집사님의 유려한 레이피어가 채찍처럼 휘어져 날아들었다. 고통으로 혼미해 흐릿한 눈으로 보았던 때와 달리 똑바르게 본 전투는 아름다웠다.
압도적인 무력, 필사적이지 않은 전투. 그 모든 것은 매혹적인 춤사위와 같았고 배부른 짐승의 장난질 같기도 했다. 그것에 홀려 두려움을 잊고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라.”
[룰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내가, 해줄 것 같아!]
그르륵, 괴물은 거대한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렸다. 그 위협을 작은 비웃음으로 넘긴 집사님은 계속해서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괴물의 몸에는 큰 상처가 생겨났고, 꿀렁이며 체액이 쏟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색이 바뀌다 보니 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열어.”
[크으윽…….]
괴물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을 긁으며 일어나려 했지만 집사님의 공격은 무자비했고 심각한 상처로 다리가 난자되었다. 한참을 가만히 보느라 바닥에 눌어붙은 신발을 어떻게든 떼어 그 체액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 순간, 바닥에 이상하게 찌그러진 비대칭의 문이 솟아올랐다. 마치 게임 클리어 후 밖으로 나가는 포탈이 생긴 것과 비슷했다.
“요셉 님, 가시지요.”
“……네.”
집사님은 문을 열었다. 찌그러진 문은 기름칠한 것처럼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저곳을 나가면 안전할 것이다.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환한 빛이 나오는 문 옆에서 집사님은 나를 보았다. 어서 들어오라는 것처럼. 그 모습은 완벽한 집사였다. 어디를 가든 에스코트를 하는 완벽한 집사 그 자체.
그때 나는 뒤에 두고 온 사람들이 생각났다. 크게 다쳐 쓰러진 사람들.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 애써 외면했지만 그럼에도 작게 들리던 비명. 그 모든 것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저 문을 넘어가면 안전해짐에도.
“……요셉?”
“요셉 님. 어서.”
아이가 나를 잡았다. 집사님이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울리세를 집사님에게 넘겨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집사님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울리세를 받아 들었다.
당황해하는 집사님을 문 너머로 밀었다. 평소라면 내가 어찌하든 밀리지 않을 남자였지만 당황한 지금은 달랐다.
“요셉 님!”
“울리세를 부탁해요.”
문 너머로 밀려 넘어지는 집사님과 울리세를 보며 문을 세차게 닫았다.
울리세의 안전이 확보된 이상 내가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이대로 도망간다면 살아남는다 해도 편안하지 않겠지. 사람들의 비명이 나를 괴롭힐 거다. 숨 쉬는 순간순간 죽은 이들의 차가운 손이 내 목을 조르겠지.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기차는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있었고, 수증기 또한 더욱 양이 많아졌다. 문을 열고 싶어도 단단히 묶인 문고리는 내가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기관실을 빙글빙글 돌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김요셉, 너는 최소한 대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이야. 생각을 해, 생각을! 불이 붙은 기차를 어떻게 멈추지?
“잠깐. 불?”
‘위험하진 않습니다. 기차 내부에 있는 연료인 물이 불 때문에 기화되어 일어나는 현상이죠.’
불을 끄려면 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차의 연료는 물이다.
그 물을 터뜨려 버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게다가 불이 꺼지지 않는다 해도 연료가 사라지면 기차가 멈출지도 몰랐다. 일단 당장 종착역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큰일은 멈추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이 더 기화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했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발등이 또다시 따끔거리고 차장실에서 죽어가던 괴물이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플레…….]
생긴 것과 다르게 가냘프게 속삭인 그것은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 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이만큼 버틴 것도 용했다.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검은색의 종이가 한 장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 수상했지만 그 종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결국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XX의 찢어진 노트]
이상한 이름이었다.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재빨리 좁은 통로로 이동했다.
이제 통로는 거의 찜통에 가까웠다. 눈앞은 수증기로 아예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통로를 헤집어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집사님에게 배웠던 마나구를 사용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마나를 조절해 모으자 손에 찌그러진 마법구가 생겨났다. 그것을 날려 벽에 명중했지만 벽에는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마법구는 연기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몇 번이고 만들어 날렸지만 소용없었다.
“왜……!”
분명 연습 때에는 사방팔방으로 날아가긴 했지만 주변을 그을리고 헤집어놓을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아. 나는 그제야 문제점을 알았다. 내가 마력을 조절해서 마력구를 만들었기에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악!”
신발이 녹아 발의 일부분이 뜨겁게 달궈진 바닥에 닿았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일부러 마력을 제어하지 않고 제멋대로 마법구를 만들었다.
역시나 마력이 제어되지 않아 마법구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자그마한 창을 부수고 벽에 흠집을 냈다. 하지만 내가 원할 정도의 파괴력이 나오지 않았다. 벽을 부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속에 있는 마력을 긁어모았다.
“좀, 부서…… 져!”
쾅!!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마력구가 벽을 박살 냈다.
콰아아아-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전, 더 많은 양의 수증기와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몸이 익는 고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물이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와 내 몸을 휩쓸었다.
고통에 버둥거리며 더 이상 휘말리지 않게 무언가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온몸이 익어가는 고통에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어딘가는 이제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무서웠다.
결국 나는 어딘가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것이 나았다. 계속되는 고통을 생생히 느끼는 것보다는 나았다. 부디 깨어난 후에는 이 고통이 사그라들길 바라며 온몸에 힘을 풀었다.
* * *
“아…….”
눈을 뜨니 기차 안이 아니었다. 온몸을 괴롭히던 고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허겁지겁 내 몸을 살펴보았는데 평소와 같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습이었다. 멀쩡하게 여행을 떠날 때의 그 모습이었다.
볼을 당겨보았다.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몇 번을 꾸었던 그 꿈이 확실했다.
“여긴 어디지?”
오래된 고성 같은 분위기의 내부였다. 외벽에 담쟁이덩굴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로, 좋게 말하면 고풍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낡은 곳. 겨울이라면 외풍이 숭숭 들어올 것 같았다. 꿈이다 보니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후보자님이 이렇게 방문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때, 기나긴 복도의 끝에서 누군가가 굽실거렸다.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동공에 크게 울려 듣지 못할 수가 없었다. 꿈에는 언제나 집사님이 나왔다. 그러나 저 멀리서 굽신거리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영광이라니 모두 대마법사님 덕분이지요. 저를 알아봐 주신 것은 공 아니십니까?”
사람을 홀릴 듯한 목소리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검은 반장갑을 낀 손이 꺾인 복도에서 슥 나와 노인의 손을 잡았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노인의 얼굴은 감격에 차 있었다.
“후보자님, 정말로 장성하셨습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의 주인이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와 몸을 드러냈다.
역시 손의 주인은 집사님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는 집사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파티장이 배경이었던 꿈에서 본 미소와는 조금 다른 편안한 미소였다.
그런데 후보자라고? 집사님의 얼굴을 한 저 남자가 후보자? 내가 아는 집사님은 그저 집사님일 뿐인데. 저 남자가 집사님이 아닌 걸까? ……저 얼굴이 둘이라니. 집사님은 그럼 쌍둥이 형제가 있나?
“하하. 제자가 이렇게 찾아뵈었는데 계속 서 있게 두실 겁니까?”
“아이고, 이 늙은이가 이런 실수를. 이쪽으로 오시죠.”
그들은 날 향해 걸어왔다. 나는 그들이 걸어오길 기다렸다 그 뒤를 졸졸 쫓아갔다. 내 모습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봤다면 새끼 오리처럼 졸졸 쫓아가는 게 좋게 보이진 않았겠지. 아니, 일단 쫓아갈 수도 없었을 거다.
“오늘은 그래서 어쩐 일로 이 늙은이를 찾아오셨습니까?”
“제자가 스승을 찾아왔을 뿐입니다.”
“허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시니 감사하군요.”
분위기는 훈훈했다. 썰렁한 복도에서 훈풍을 느낄 정도로. 그야말로 은사님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였다. 그도 이런 모습이 있을까 싶어 계속 구경했다. 사실 다른 걸 보고 싶어도 이 꿈을 꾸면 볼 건 저 후보자님밖에 없긴 했다.
“사실 물어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제게 말입니까? 후보자님은 이제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계실 텐데요.”
“하지만 대마법사인 스승님보단 모자란 것이 사실이죠.”
그들은 복도의 끝에 있는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과연 마법사의 방답게 수백 권의 책이 방 안에 쌓여 있었다. 마법사 하면 떠오르는 거대한 솥단지도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낙서가 가득한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판타지 게임에 나오는 마법사의 방 그 자체였다.
“……청소해 주고 싶다.”
하지만 청소하고 싶은 것은 나뿐인지 후보자님과 노인은 바닥의 종이를 밟고 방의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의자에 앉았다. 놀랍게도 손님이 오긴 오는 모양이었다. 노인의 것뿐만 아니라 다른 의자가 하나 더 있어 그들은 나란히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스승님, 제가 묻고 싶은 건…….”
후보자님은 잠시 말을 삼켰다. 고민에 빠진 수려한 청년의 모습은 절로 걱정을 일으켰다. 걱정에 조급해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은 허둥지둥 후보자님을 향해 물었다.
“이 노인이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울 테니 편하게 말해보세요.”
노인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기세였다. 후보자님이 노린 것은 이것이었을까. 그는 흐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렇게 나이를 먹었음에도 스승님에게 의지하게 되는군요.”
“이 노구, 의지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분위기는 이보다 더 훈훈할 수 없을 정도로 따스했다. 제자를 걱정하는 스승, 그 스승을 의지하는 제자. 완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후보자님의 말 한마디에 처참하게 박살 났다.
“제가 궁금한 건 다름이 아닌 소환술입니다.”
“……소환술?”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훈풍이 불던 방 안은 냉기로 가득해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되게도 후보자님의 얼굴은 여전히 따뜻하게 웃는 낯이었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후보자님을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소환술을 저에게 물으시는 겝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가르쳐 준 마법의 금기는 기억하시겠지요?”
“물론입니다. 백마법의 금기는 사자 소생. 흑마법의 금기는 소환술이었지요.”
뭔가 굉장히 납득이 가지 않는 금기였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주문이 금기인 것은 이해가 갔다. 다양한 매체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대개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곤 했으니까. 죽은 자는 그대로 보내줘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소환술은 왜 금기시하는 거지? 여러 판타지 배경인 게임에선 다양한 것을 소환한다. 정령이라든가 마수라든가. 개인적으로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였기에 노인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걸 아시면서 이렇게 물어보는 겝니까?”
“네.”
후보자님은 아까까지의 평온함을 얼굴에서 몰아냈다. 냉혹하고 잔인한,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얼굴이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내가 현실에서 보는 표정이 빙하 같은 얼굴이었다면 지금의 표정은 독이 든 꽃에 가까웠다. 독이 든 걸 알지만 그 아름다움에 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꽃.
“……제가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노인도 나와 같은 것을 느꼈나 보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후보자님의 표정은 다시 아까와 같이 평온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이전의 표정을 본 이상, 그것이 꾸며낸 얼굴이란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저 평온한 모습이 거짓이라는 게 안타까웠다. 자신을 가르친 스승에게까지 저런 모습이라니. 그에게는 진실된 관계란 것이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모두 후보자님이 아시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스승님이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검은 책이요.”
노인의 얼굴에 짙은 패색이 떠올랐다. 눈을 크게 뜬 노인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감추지도 못한 채 노인이 말했다.
“어떻,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요. 제가 아직도 그 어리고 꼬질꼬질한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곤란합니다.”
후보자님이 무해해 보일 만큼 해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노인도 나도 알았다. 저 모습이 치명적인 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노인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마른세수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작게 말했다.
“……이건 금서입니다.”
“압니다.”
“이걸……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글쎼요……. 그걸 알려 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노인은 한참이나 고뇌했다. 이마에선 비지땀이 흘렀고 말라 앙상한 손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핏줄이 솟아났다.
창밖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창이 덜컹거리며 매섭게 소음을 내는 사이, 후보자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스승을 존중하는 제자의 모습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스승님, 저는 이 나라의 왕좌를 노리는 후보자랍니다.”
“…….”
“스승님이 금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고할 수밖에 없겠군요. 이 나라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맞지요.”
“……!”
노인은 소스라치며 경악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는 모습이었다. 극렬한 배신감이 주름이 가득한 눈가에 서렸다.
“하지만, 하지만 이 대화를 채점하는 사람들이……!”
“저런, 스승님. 저는 그렇게 무능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후보자님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노인의 마지막 발악은 그렇게 간단히 짓밟혔다. 결국 바들거리던 노인은 자신의 손으로 책 사이에 숨겨져 있던 검은색의 책을 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들어올 적 다정하고 애정이 어렸던 눈은 배신감과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후보자님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스승님, 오늘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면 꼭 찾아오세요. 이 제자, 스승님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어드릴 수 있답니다.”
후보자님은 뚜벅거리며 방을 나섰다. 초라하게 고개를 숙이는 노인을 뒤로하고 나는 그를 쫓았다. 노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총애하던 제자에게 배신당한 스승의 기분이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은 후보자님은 만족스러워 보였고 일순간 광기 어린 눈빛을 보였다.
저 낡은 책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소환술에 대해 물었으니 소환술에 대한 거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물감이 물에 번지듯 꿈속의 세계가 무너졌다. 아무래도 꿈에서 깨어나는 모양이다.
온몸에 저릿하게 고통이 스며든다. 그렇게 나는 꿈속에서 깨어났다. 마지막으로 본 후보자님은 낡고 휑한 그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뒤로 긴 그림자가 홀로 늘어져 있어 지독히도 고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