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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벽(2) (3/21)

3장 벽(2)

위험천만했던 날 이후 아이는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다행이고 기쁜 일이었다.

“……요셉.”

아이는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아쉬웠지만 상관없다. 그까짓 호칭보다 울리세가 나를 불러주는 게 훨씬 좋으니까.

나를 조심스럽게 부르는 아이에게 웃어주며 대답했다.

“응. 무슨 일이야?”

“간식…… 같이…… 먹으면.”

아이는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우물쭈물하거나 말을 삼키는 등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울리세가 말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대견하고 기특할 뿐이었다.

“……안 될까?”

“안 되긴 같이 먹자. 같이.”

울리세가 아주 작게 웃었다. 자세히 보면 모를 정도로 작은 웃음이었다. 평소 인형같이 생기 없는 무표정이었던 아이였기에 자그마할지라도 웃음이 더욱 눈에 띄었다. 그 미소를 보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 나 또한 웃으며 아이와 식당으로 향했다.

“요셉 님.”

식당에는 이미 집사님이 테이블에 다과를 세팅해 놓은 채였다. 집사님은 그날,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문 이후로 무언가 철저해졌다.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전 준비해 놓는 지금 같은 행동이 그 방증이다.

집사님은 앉기 편하게 울리세의 의자를 움직여 주었다.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나는 아침의 일을 회상했다.

* * *

“요셉 님.”

“응…….”

졸렸다. 심하게 졸렸다. 부드러운 이불에 발목을 비비며 잠에 푹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요셉 님, 아침입니다.”

“……형…… 나 졸려…….”

형인가? 내가 언제 형네 집에 갔었지. 비몽사몽 정신으로 고개를 돌려 베개에 묻었다. 엎드린 덕에 가려진 빛은 자기 딱 좋았다. 하지만 형은 나를 부드럽게 일으켰다.

“요셉 님, 접니다 집사. 일어나세요.”

“……집사?”

눈이 번뜩 뜨이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게임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나를 아이 다루듯 일으키고 있는 집사님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해하기엔 버거운 현실에 나는 멀뚱히 집사님을 보고만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일어나셨군요. 자, 아침 준비를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네?”

과부하 된 머리로는 집사님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집사님은 그런 나를 부드럽게 마저 일으켰다. 부드럽지만 강한 힘이었기에 나는 번쩍 들려 어리둥절한 상태 그대로 방에 딸린 욕실 앞까지 걸었다. 어린아이 걸음마 연습을 시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씻고 나오시죠.”

“……어…… 네.”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하기도 전, 집사님은 욕실 문을 열어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멍한 정신과는 달리 몸은 착실히 세면대 앞으로 가 세수를 시작했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자 가출했던 정신이 빠르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이상한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됐다.

“내가…… 환상을 봤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나는 욕실에서 세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집사님이? 그래. 분명 내가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 헛것을 봤다거나. 치아까지 확실히 닦은 나는 욕실 문 앞에서 고민하다가 조심히 문을 열었다.

“요셉 님, 오래 걸리셨군요. 이리로.”

문을 세게 닫을 뻔했다. 집사님은 내 침대 옆에서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잠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역시나 그가 손에 든 것은 내 옷이었다. 그것을 도대체 왜 들고 있는 건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았다.

집사님이 옷을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고 나에게 걸어왔다.

“아직 잠이 덜 깨셨습니까?”

“어…….”

“그러신 것 같군요.”

집사님은 멀쩡하게 되돌아온 내 정신을 다시 아득한 우주의 너머로 보냈다. 정신이 다시 몸에 안착한 것은 집사님이 내 잠옷 대용인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 때였다.

“으악! 뭐 하는 거예요, 집사님!”

후다닥 와이셔츠의 앞섶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났다. 나는 마치 파렴치한을 보듯 집사님을 노려보았다. 집사님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표정은 사적인 감정이 없는, 그야말로 무표정 그 자체였다.

“저는 그저 옷시중을 들어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왜, 왜요! 지금까지 그런 거 없었잖아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집사님은 파랗게 질린 나에게 다시 뚜벅뚜벅 다가왔다. 옷시중이라니. 세상에 그런 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아주 어린 시절, 제대로 생각나지도 않는 시절에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을 터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웅크리고 외쳤다.

“피, 필요 없어요!”

그러나 집사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작 몇 걸음 떨어져 있었기에 다가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 앞에 우뚝 선 발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발 같았다. 전날만 해도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는데 하루아침에 바뀐 평가였다.

“하아…… 요셉 님.”

집사님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강한 힘으로 일으켰다. 일어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의 힘은 참으로 강했다. 나는 마치 동물처럼 번쩍 들어 올려졌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져 집사님을 보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옷시중을 강요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어.”

“오늘 입으실 의복은 여기에 두었습니다. 그럼.”

그러곤 방에서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언제나 보았던 모습이었지만 참으로 재빨랐다.

겨우 안정을 찾은 나는 침대에 펼쳐진 옷을 집어 올렸다. 갓 말린 듯한 햇볕의 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보드라운 그 옷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집사님이 갑자기 왜 저러실까, 행동의 이유를 생각하면서. 물론 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맛있다.”

아침의 일을 회상하느라 잠시 넋을 잃고 있을 때, 아이의 조그마한 감탄이 들려왔다. 아이의 손에는 삼각형 모양의 옥수수 스콘이 들려 있었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울리세는 정말로 옥수수를 좋아하는 듯싶었다. 집사님도 그걸 알고 음식을 만드는 걸까.

“많이 먹어.”

아이는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거리며 오물오물 스콘을 먹었다. 전보다 확연하게 잘 먹는 걸 보니 안심되고 기분이 좋았다. 아이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음식이다. 울리세가 음식을 조금씩만 먹는 걸 보고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요셉 님도 드시죠.”

“집사님도 드세요.”

집사님은 반쯤 빈 내 잔에 차를 따랐다. 항상 그렇듯 제안을 거절하는가 싶었는데 그는 얌전히 빈 잔을 하나 꺼내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가 아닌 티타임이니 함께해도 괜찮은 걸까? 그가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집사님이 플레인 스콘에 잼과 크림을 바르는 모습은 정말이지 영화와도 같았다.

“하하.”

“요셉 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그냥, 평화로워서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이렇게 사이좋게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옷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그쪽을 보자 울리세가 내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할 말이 있나 싶어 아이를 보자 울리세가 조용히 물었다.

“요셉…… 기분…… 좋은 거, 같이…… 먹어서야?”

“응. 우리 울리세 덕분이네.”

아이가 기쁜 얼굴로 스콘을 우물거렸다. 햄스터 같은 모습에 흐뭇할 때였다. 듣고 싶지 않았던 알림이 귓가에 울렸다.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불청객이었다.

[일정 오류가 복구됩니다!]

[스테이터스 창이 복구됩니다!]

[체력: 20

건강: 10

…….]

“어…….”

기분 좋았던 감정이 파도처럼 쓸려 나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향기로웠던 홍차는 떫은 무언가가 되었고, 달콤했던 과자는 쓴 잡초를 먹은 것처럼 텁텁했다. 눈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그저 게임에 불과하단 사실은 너무나 끔찍했다.

“요셉 님.”

“아.”

“괜찮으신지요.”

집사님이 어느새 다가와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 온기는 허상이라기엔 현실감 있었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게임이라는 것이 나타날 때면 나는 비현실감에 맥을 잃기 일쑤였다. 익숙해지면 더한 것이 튀어나와 재차 고통스러웠다.

“으…… 괜찮, 괜찮아요.”

“요셉…….”

아이가 나를 조심스럽게 잡아왔다. 손에 느껴지는 온기는 집사님과 같이 나를 이 땅에 발붙이게 해주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다. 이제 저 스탯 창은 시도 때도 없이 아이와 있을 때 나타나겠지. 그럼 또 익숙해질 거다. 물건을 감상할 때면 뜨는 알림 창에 익숙해진 것처럼.

“응. 미안해. 잠시 어지러웠나 봐.”

“차가운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집사님이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아직도 손을 잡고 있는 울리세를 보았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얼굴 옆에 게임에서 보았던 스탯 창이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시해도 사라지지 않아 x 버튼을 눌러 꺼버리려고 하는 순간, 지나칠 수 없는 수치가 보였다.

[스트레스: 246]

잠시 눈을 비볐다가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임의 최고 수치는 999. 999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비현실감에 어지러워할 때가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면 이 스탯 창은 아이의 상태를 아주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정밀 검사지라고 할 수 있었다.

[체력: 13

건강: 10

지능: 10

기품: 9

매력: 3

성품: 24

스트레스: 246

평가: 병약한 아이.]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울리세였다. 겨우 두 자리 수인 건강과 체력. 그것은 내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10살의 아이라기엔 너무나 작고 앙상한 손. 이제 겨우 마음을 열어주었지만 늦은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라도 아이의 건강을 위해 내가 더욱더 노력해야 했다.

“요셉 님.”

“아. 고마워요, 집사님.”

“별말씀을. 아까보단 괜찮아 보이시는군요.”

“네. 그럴 때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나는 스탯 창에 선명하게 떠 있는 스트레스 수치를 보며 말했다. 집사님이 나를 뚫어져라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이의 스트레스 수치였다.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 먹고 잘 쉬는 거다. 요양 여행이라도 가볼까? 물 좋고 공기 좋은 숲이나 바다로 간다면 평소와 다른 장소에 가는 것이니 좋아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울리세를 보았다.

“울리세, 우리 여행 갈까?”

“……여행?”

“응. 싫어?”

울리세는 집사님을 흘금 보았다. 그러고 보니 스케줄 관리는 집사님이 하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집사님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전에 보았던 수첩을 꺼내 들어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다.

“요셉 님, 바캉스를 떠나실 여비가 충분하십니다. 바다와 산 어디가 좋으십니까?”

“음…… 울리세는 어디가 좋아?”

“……산.”

아이가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좋아. 산이란 말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집사님이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기간은 얼마 정도가 좋겠습니까?”

“음……. 뭐 길게 가죠. 한 달 가요, 한 달.”

“……알겠습니다.”

“울리세 우리 여행 가는 거야. 가서 형이 고기도 구워 줄게.”

울리세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어쩐지 기대하는 모습 같아 뿌듯했다. 그래, 돈도 많고 이제는 아이가 나를 멀리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요양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많이 가야겠다.

나는 그날 울리세가 여행을 기대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기쁜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다. 집사님이 울리세의 스테이터스 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말았다.

* * *

기차는 하얀색 증기를 내뿜으며 매끄럽게 철도를 달려 역으로 들어왔다. 검은색의 철마는 위풍당당했다. 증기기관차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하철이면 모를까 증기기관차는 무슨, 평범한 기차마저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와아…… 오진다. 와…….”

“오진다?”

집사님이 나도 모르게 나온 감탄사에 의아함을 표했다. 현대 유행어여서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다행이었다. 왠지 모르게 집사님 앞에선 바르고 고운 말만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저 아름다운 모습 앞에서 상스러운 말을 쓰는 건 모독 같다고 느껴서일 수도.

“아니에요. 우리가 탈 열차는 이건가요?”

“그렇습니다.”

“울리세 자, 타자. 조심하고.”

“응…….”

아이는 나에게 꼭 붙어 있다가 그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기차에 올랐다. 안전하게 기차에 탑승하고 아이를 객실에 데려다준 다음 다시 내려왔다. 승무원에게 맡기지 못한 중요한 짐을 집사님에게 맡겨놓고 왔기 때문이다.

“요셉 님은 먼저 들어가 계시죠.”

집사님이 아주 자연스럽게 짐을 들고 있었다. 확실히 집사인 그가 허드렛일해야 할 위치이긴 했다. 우리에겐 다른 고용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집사님이 집 안을 청소하는 하녀라도 고용한 줄 알았는데 그것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최근에 알았다. 진작 알았다면 청소나 요리를 도왔을 텐데.

“둘이서 하면 빠르니까요. 자.”

나는 빠르게 가방 하나를 들었다. 다른 것도 들려 했지만 이미 집사님이 들어버려 나는 아쉬운 대로 한 개만 들고 들어갔다.

혼잡한 복도를 지나 짐을 모두 옮기고 앉자 몸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나보다 더 많은 짐 가방을 들고 온 집사님은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는데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맡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나는 보란 듯이 팔을 내밀어 근육을 자랑하는 것처럼 굴었다. 물론 근육 같은 건 없는 몸이었기에 볼품없을 뿐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한 것이었는데, 집사님은 웃기는커녕 진지하게 내 팔뚝을 살폈다. 내 팔은 슬프게도 가늘었다.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는 사람이 근육이 있을 리가.

“앞으론 요셉 님도 건강을 챙기셔야겠군요.”

“……네.”

본전도 못 건지고 팔뚝을 조심스럽게 내리며 의자에 앉았다. 객실은 1등석이었기에 모든 것이 참으로 고급스러웠다. 벨벳으로 만들어진 좌석은 푹신푹신했고 객실 자체도 기차라기엔 널찍했다. 뭣보다 이 객실을 통째로 쓰고 있기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없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

울리세는 창밖을 흘금거리며 구경했다.

아이는 참으로 기특했다. 처음, 인형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나와의 접촉을 꺼리지 않았다. 조금 겁을 먹지만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지나면 더욱 건강해질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과하게 빠른 진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편한 여행을 위해서라도, 울리세를 위해서라도 이 1등석은 참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우리 카드 게임할까?”

“……카드?”

역시 여행에 오면 카드 게임이지. 고스톱이어도 재미있었겠지만 그건 바닥에 앉아서 해야 제맛인 게임이다. 울리세는 처음 보는 건지, 내가 꺼낸 카드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눈을 반짝거리는 게 귀여워 카드를 넘겨주었다.

울리세는 카드를 하나하나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요셉 님, 도박은…….”

“도박이요? 돈 안 걸면 도박이 아니죠! 자, 집사님도 해요.”

집사님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돈을 걸지 않으면 도박이 아니란 것에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순순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심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울리세가 카드를 돌려주었고, 나는 카드를 섞었다. 생각한 게임은 원카드였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주 쉬운 게임. 나는 울리세에게 게임의 룰을 알려주었다.

“응……. 알겠어.”

아이는 똑똑한 머리로 게임의 룰을 금방 이해했다. 기특함에 머리를 쓰다듬자 울리세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울리세와 화기애애하고 있자니 집사님이 내 손에서 카드를 가져갔다.

“카드를 배분하겠습니다.”

촤르르. 내가 카드를 섞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손놀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나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집사님은 사실 타짜였던 걸까?

그렇게 게임은 시작되었다. 열차는 쉼 없이 달렸고, 우리는 종일 카드를 붙잡고 놀았다. 처음엔 그저 재미로 시작했으나 나는 토종 한국인이었다. 게임에 지곤 못 산다는 뜻이다.

“한 판 더 해요!”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카드를 배분했다. 그렇게 게임은 한 판, 두 판, 열 판……. 서른 판이 넘자 나는 집사님을 이기긴커녕 울리세에게까지 졌다.

울리세는 처음 하는 사람처럼 어색했던 것도 잠시, 몇 판 하고 나자 아주 익숙하게 카드를 냈다. 그야말로 카드 게임의 신동이었다. 대단했다. 하지만 역시 계속해서 지니 현타가 짙게 왔다. 내가 이렇게 게임을 못하다니. 그래도 게임 스트리머였는데. 자괴감이 몰려왔다.

“가실까요.”

집사님은 가지런히 트럼프 카드를 정리하곤 짐을 들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짐을 들어 기차에서 내렸다. 아이가 내릴 때 잡아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자 청량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찼다. 아이가 숲을 골라서 온 거긴 하지만 숲으로 오길 잘한 것 같다.

“마차를 예약해 놨습니다.”

집사님이 익숙한 거리인 것처럼 앞서 걸었다. 이곳에 왔던 적이 있는 걸까? 나와 울리세는 뒤따라 걸어갔다. 우리는 튼튼해 보이는 마차에 짐을 옮기고 올라탔다. 별장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별장은 어떻게 보면 본래 울리세의 저택과 비슷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존재해 특히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울리세의 저택이 어딘지 음습하고 우울한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밝은 흰색의 건물이라 그런지 경쾌하고 따스한 느낌이 강했다.

“우리 집도 도배 한번 할까요?”

집이 조금 밝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꺼낸 말이었지만 집사님의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에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싫어할 일이었나?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는 아이와 내 짐을 번쩍 들고 집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별장 안에 짐을 모두 풀고 아이와 나는 한결 가벼운 옷차림새를 했다. 집사님은 주방에서 식재료를 다듬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가 요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오늘은 내가 바비큐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집사님, 오늘은 제가 요리할게요.”

“아닙니다. 요셉 님은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죠.”

집사님은 도마 앞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굳건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힘으로 밀어내자니 손에 칼을 든 사람을 함부로 밀거나 그러면 사고가 날 것이 자명했다. 나는 그의 곁을 우물쭈물 어슬렁거렸다.

그러자 집사님이 나를 슥 돌아보았다. 손에 든 날카로운 식칼이 번쩍 빛났다.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길 바랍니다.”

“……네.”

말을 안 들으면 칼로 찌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찌르지는 않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허둥지둥 물러나 거실로 나갔다.

울리세가 거실에서 널찍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여름에 가까운 계절. 슬슬 태양이 뜨거운 햇볕을 내리쬐었지만 녹음이 드리운 숲은 시원해 보였다. 산책하기엔 참 좋아 보였다.

“울리세, 우리 저기 잠깐만 다녀올까?”

“……응.”

아이 또한 숲에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울리세와 나는 손을 꼭 맞잡고 숲으로 산책을 나섰다. 집사님이 바라는 대로.

그리고, 허망하게도 길을 잃었다.

“…….”

멍청했다. 처음 오는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다니다니. 안일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들어올 때 보였던 오솔길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끼와 풀, 나무, 돌. 그것들만이 이 주변에 있는 전부였다.

“……요…… 셉?”

내가 당황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아이가 나를 불안하게 올려다봤다.

요셉 진정해. 너는 혼자가 아니야. 지켜야 하는 어린아이가 있어. 아이를 불안하게 할 수는 없다. 보호자는 어린아이를 안정시킬 의무가 있다. 그렇게 되뇌자 몸은 순식간에 진정했다.

“응. 울리세.”

“…….”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꾹 쥐었다. 내 손에 달린 아이의 안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아까와는 달리 일단 가는 길을 표시하기 위해 지나가는 자리마다 나뭇가지를 꺾어놓았다. 자연 훼손이 양심에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으.”

하지만 아무리 표시를 하고 걸어도 길을 잃은 건 변함없었다. 빙빙 돌아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도 수십 번. 나는 지치고 말았다. 아이는 지쳐 내가 업은 지 오래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집사님이 나를 찾으러 올 수 있을까. 일말의 희망은 집사님뿐이었다. 그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키에에엑!!”

“……!”

비지땀을 흘리며 숲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엄청나게 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아려올 정도의 목청이었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괴물이 있었다.

“뭐…….”

검은색의 털이 길고 덥수룩하게 나 있어 전체적인 형상을 알 수 없는 괴물이었다.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흉악한 모양새가 비현실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게임과 다른 점은 나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어서 저 괴물을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눈앞의 괴물은 흉흉한 살기를 보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생생하게 찔러오는 살기가 내 정신을 붙들어놓았다.

“아…… 으…….”

“캬오오오.”

낮고 육중한 울음소리에 오금이 저렸다. 거대한 호랑이 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빌어먹을 게임 시스템은 왜 이럴 때는 도움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게임 시스템이면 공포 저항을 준다든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스킬이라도 뜨든가.

“……요셉. 요…… 셉.”

등 뒤에 업혀 있던 아이가 내 옷을 꾹 쥐었다. 겁에 질린 듯 가엽게도 오들오들 떨었다.

그래. 나는 지킬 것이 있었다.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등에 업힌 아이를 앞으로 돌려 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을 등지고 뛰었을 때 제일 먼저 공격당할 것은 아이니까. 최소한 품에 안아 보호해야 했다.

“크륵, 크륵.”

괴물이 기괴하게 웃었다. 덥수룩한 털들 사이로 길쭉이 난 이빨이 위협적이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괴물이 나를 따라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저것은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해 사냥하는 것이 아닌, 놀잇감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배가 부른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이 젖어갔다.

“…….”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뒤돌아 뛰었다. 하지만 열 걸음쯤은 뛰었을까, 괴물은 한 걸음만에 나를 따라잡았다. 크륵, 크륵. 괴물의 비웃음이 들렸다.

제발. 제발……. 누구를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애원을 하며 뒤돌아보자 나를 향해 휘두른 거대하고 육중한 괴물의 팔이 보였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웅크려 아이를 보호했다.

“아아악!”

살면서 이렇게나 큰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살점이 패 날아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몸을 따라 흐르는 혈액이 끔찍했다. 내장이 흘러나가는 끔찍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볼 울리세가 걱정스러웠다.

나는 아이를 더 세게 품에 안았다. 아이가 버둥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것은 보지 않는 것이 나았다.

“괜…… 괜찮…… 으, 아.”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물거리는 눈을 어떻게든 떠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집사님이 기다란 레이피어를 들고 서 있었다. 흐릿한 시야였지만 집사님이 괴물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썰어버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무참히 가지고 놀던 괴물은 잔혹하게 도륙되었다.

“아…… 으윽. 하하…….”

밀려오는 안도감에 작게 웃자 고통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흘러내리는 피가 의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심각할 정도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가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사실이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요셉 님!!”

집사님의 다급한 목소리와 울리세의 버둥거림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다행인 것은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 * *

[오류가 일부 복구됩니다!]

고통에 잠식되어 있던 정신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 알림 창이 보였다. 시야가 흐릿해 그런지 보이는 알림 창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곧 알림 창은 사라졌고, 난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희미한 푸른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창문가에 기대어 그 너머를 보는 집사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새벽빛을 받는 그는 마치 매끄러운 대리석 같았다. 허상같이 존재감이 흐릿한 그는 얼마 바라보지 않았음에도 귀신같이 내 시선을 알아챘다. 그는 아지랑이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요셉 님.”

대체로 무표정인 채 자신을 내보이지 않던 집사님의 얼굴이 어쩐지 지금은 짙은 안도감으로 가득했다. 어딘가 생기가 담긴 그 얼굴은 희미한 존재감을 부풀려 현실에 있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왜일까. 집사님은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큰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으…….”

집사님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무언가를 달그락거리며 꾹꾹 눌렀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고통이 한결 괜찮아졌다. 진통제였던 모양이다.

“울리…… 세는……?”

아이가 마지막까지 걱정이었다. 물론 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단단히 보호하긴 했다. 그래서 아마도 다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집사님은 내 말을 듣곤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지금 그게 걱정됩니까!”

“으…… 으으, 하지만…….”

“생치기 하나 나지 않았으니 본인 몸이나 걱정하시죠!”

울리세가 다치지 않았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다쳤다고 하면 스스로의 무능함에 화가 났을 거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지? 병원인가? 울리세가 다쳤던 그날 보니 이 세계의 병원은 꽤 많이 발전한 것처럼 보였다. 그건 나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과거였다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2차 감염은 무서운 법이니까.

“여긴…… 어, 으으, 어디인가요.”

“저택입니다. 병원은 이미 다녀왔고, 치료는 배워 왔습니다.”

“어…….”

배워 왔다고? 며칠 전 내 상처를 치료해 주던 집사님이 생각났다. 익숙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전문적인 느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전문적인 치료를 배워 온 걸까? 그렇다면 집사님은 집사를 할 게 아니라 의료 쪽으로 빠져야 하는 것 아닐까.

웃기는 점은 집사님의 실력에 대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는 거다. 걱정하기엔 그는 평소에 너무나 유능하니까. 그에겐 실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한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집사님의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언제나 낀 그 검은색 반장갑이 없었는데, 내 생각보다 손이 더욱 고왔다.

“더 주무시죠.”

그 고운 손이 내 눈가를 덮고 쓸어내렸다. 그의 손은 겉보기에는 부드러웠지만, 실제론 거칠었다. 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처럼 그 손에선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집사님……. 살아온 세월이 순탄하지 않았구나.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눈을 순순히 감았다. 집사님은 내 눈에서 한참 손을 떼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빛을 차단하는 그 상냥한 손길에 나는 속절없이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뜨니 알 수 없는 장소에 서 있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꿈이라고 단정 지었다.

고풍스러운 연회장. 내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장소는 휘황찬란했다. 번쩍이는 샹들리에와 화려하게 꾸며진 음식들.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사치스러워 눈부셨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보는 나에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꿈속 특유의 몽롱함이 주변에 감돌았다. 그 부유감이 꿈이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중앙에서 손과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둥그러니 옷자락들이 퍼지는 모습이 마치 꽃 같았지만, 각각의 눈은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과거에 본 영화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뭐, 어차피 꿈이니 별문제는 없겠지. 나는 이곳저곳을 쏘다녔고, 사람들은 나를 인식하지 못했다.

“오늘도 참으로 아름다우시군요. 마치 태양이 이 파티에 떠오른 것 같습니다.”

“하하.”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기도 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나는 곳을 보자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잠들기 직전까지 보았던 그였다.

진보라색의 머리칼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푸른색의 눈동자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아름다웠다. 찬란한 그 모습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때의 집사님보다 생기 넘쳤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가 얼마나 흐릿하게 퇴색되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번에도 1위를 하셨죠. 대단하십니다.”

“노력이 빛을 발했을 뿐입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미소 짓는 그는 자연스러웠다. 바로 저 자리가 본래의 자리라는 듯 너무나 싱그러웠다. 나는 그 찬란한 모습에 매료되어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빛나는 태양 같은 그 모습을.

왜일까, 문득 잠들기 전 보았던 빛이 바랜 듯한 집사님의 모습 또한 떠올랐다.

* * *

“으…….”

깨어나니 고통이 아스라이 밀려왔다. 다치지도 않은 발등이 유독 아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처음 정신이 들 때보단 덜 아팠다. 진통제가 아직도 잘 드는 모양이다.

“요셉…….”

울리세가 울먹거리는 얼굴을 한 채 날 보고 있었다. 언젠가 인형 같은 모습일 때 아이가 감정을 드러내길 바라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우는 표정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윽.”

하지만 진통제가 아무리 든다 한들 나는 환자였다. 그것도 중환자. 급하게 움직이려 하자 옆구리에서 격통이 몰려왔다. 상처가 있는 부위였다.

결국 나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옆구리를 움켜쥐고 웅크렸다.

“뭐 하는 겁니까!”

집사님이 다급히 나를 눕히고 상처를 살폈다. 울리세는 더욱 울먹거렸다. 집사님은 화가 난 듯 미간을 사정없이 구기고 있었다. 멍청하게 군 것이 맞았기에 나는 얌전히 집사님의 손길을 받았다. 붉은 피가 배어나 붕대가 잔뜩 젖었다. 상처가 터진 모양이다.

“요셉…… 미안해. 나 때문에…….”

“뭐? 왜 나한테 미안해해.”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떠 아이를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면 고통도 못 느끼는 모양이다. 이 순간만큼은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이는 죄책감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친 것이 큰 상처가 된 것 같았다. 어른인 내가 아이를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에도 아이는 상처 입고 말았다. 하지만 난 다시 똑같은 상황이 온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내가 다친 것은 내가 약한 탓이다.

“나…… 쓸모…… 없고 약해. ……미안, 흑…… 미안해.”

“뭐? 왜 쓸모가 없어?”

자리에서 재차 일어나려 하자 집사님이 강한 힘으로 내 가슴께를 눌렀고, 나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웠다. 결국 나는 손만 움직여 아이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정말이지 마음이 아팠다.

“아무…… 아무것도…… 못, 해.”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괴롭힘을 당해도 울지 않았던 아이가 옷을 꽉 잡으며 울었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게 너무나 안쓰러웠다.

나는 집사님을 올려다보았다. 앉게 해달라는 눈짓이었으나 집사님은 단호하게 무시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어 조심히 잡아당겼다. 울리세는 내 손길을 무시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흑…… 힉. ……미안해, 흑.”

“울리세. 울리세, 형 좀 봐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을 꾹 쥔 채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물과 콧물로 온통 젖은 얼굴을 옷깃으로 대충 훔쳐주었다. 휴지가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너는 쓸모없지 않아.”

“하지…… 끅, 하지만…….”

“아니, 다시 말해줄게. 울리세. 너는 쓸모없지 않아.”

아이는 믿지 않는 것 같은 눈치였다. 누군가 이 어린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던 걸까? 쓸모없다고? 마음 아프고 화나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곤 말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와 똑같은 말을 하는 울리세에게.

“그리고 울리세, 네가 쓸모없든 있든 형이 너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거야. 이 형이 울리세에게 뭐야.”

“……후, 후견인.”

“그치? 후견인은 보호자라는 거야. 네 보호자. 형은 널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널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지. 네가 너 자신을 쓸모없다고 하는 건 이 형이 할 일을 못 한 거나 다름없어. 형을 못난 사람으로 만들 거야?”

“아냐! ……아냐. 요셉은, 요셉은…….”

다시 그 큰 눈에 눈물을 울먹거리는 울리세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작은 동물이 애처롭게 떠는 모습과 비슷했다. 나는 울리세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 말해봐. 나는 쓸모없지 않다.”

“……나, 나는…… 쓸모없지…… 않다.”

“그래. 잘했어. 형은 널 아주 많이 좋아해. 너는 이렇게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줘. 네가 하나도 다치지 않아서 형은 너무나 행복해.”

“……응.”

울리세는 내 말을 듣고 야무지게 자신의 눈물을 닦아냈다. 울어 붉게 물든 눈은 곧 퉁퉁 부어 아플 것 같았으나 아이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햇살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스트레스가 감소됩니다. -10]

스탯 알림 창만 아니라면 좋았을 텐데.

햇살이 아이의 얼굴을 비쳐 눈부신 미소를 빛냈으나 그 옆의 인공적인 게임 창은 모든 것을 끔찍하게 만들었다. 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비현실감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 * *

나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이제 스탯 창은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결국 인형을 살 때처럼 나는 빠르게 익숙해졌다. 아이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거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요셉…… 빨리 나아…….”

[스트레스가 증가합니다. +1]

“응. 형 빨리 나을게.”

[스트레스가 감소합니다. -1]

내 작은 말 하나하나에 움직이는 스트레스 수치는 울리세가 날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 수 있게 해줬다. 나는 다시 한번 아이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가 다 클 때까지 굳건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요셉…… 나…….”

“응.”

“나…… 무술 배우고 있어.”

“무술?”

내가 깜짝 놀라자 울리세는 부끄러운 듯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이 꽃봉오리처럼 수줍어 보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집사님을 보자 그는 이제 알았냐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요즘 울리세의 체력 수치가 부쩍 올라 있었다.

“도련님은 저번부터 기초 체력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와, 울리세. 대단하다. 힘들진 않아?”

“응……. 괜찮아. 내가…….”

아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를 향해 눈을 빛내며 외쳤다. 의욕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은 순수한 아이다웠다.

“내가…… 요셉을 지킬 거야!”

울리세의 귀엽지만 충격적인 발언에 눈을 멍청하게 깜빡였다. 물론 기쁘다. 기쁘긴 한데……. 나를 지켜준다는 것이 조금 미안했다. 내가 보호자로 완벽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로 아이가 그런 다짐을 한 것 같아서였다.

사실 아이가 내 보호 속에서 안전히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뭐……. 내가 다쳐서 이미 물 건너가긴 했지만 말이다. 평범하게 자라는 아이는 보호자를 지키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아이는 내가 너무 놀라 굳은 탓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자 이내 조금씩 울먹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싫…… 싫어?”

“뭐?! 싫을 리가 있겠어?”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대답했다. 울리세의 말이 마음 아픈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이의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이는 그제야 안심한 듯 웃었다.

“자, 도련님. 오늘 해야 하실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아. 응. 요셉……. 이따가 봐.”

아이가 작게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씩씩하게 방문 너머로 가는 아이는 기운차 보였다. 처음의 인형같이 생기 없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정말이지 흐뭇하고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갑작스럽게 아이가 쑥쑥 큰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동시에 아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에 기뻤다.

“울리세는 누가 가르치고 있어요?”

“접니다.”

“네?”

놀라 집사님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들고 왔다.

자세히 보니 그가 손에 든 것은 이제는 익숙한 드레싱 도구들이었다. 그는 상처가 덧나지 않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했다. 그 능숙한 솜씨를 볼 때마다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실 의사가 아니었나 의심까지 들었다.

“잠시 보겠습니다.”

“읏.”

커다란 거즈를 솜씨 좋게 떼어낸 옆구리는 흉했고 크게 꿰매져 있었다. 제법 큼지막한 상처였으나 생각보단 작은 상처이기도 했다. 다친 순간엔 내장이 흘렀을 거라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장에 손상도 없는 듯했고. 아마 그랬으면 지금 깨어나 있기도 힘들었지 않을까.

문제는 상처의 부위가 부위다 보니 움직이기가 정말 힘들다는 거다.

“다행히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군요.”

“아…… 감사합니다. 근데 울리세를 직접 가르친다고요?”

“네. 문제 있습니까?”

문제없을 리가 없다. 집사님은 근래 가시 돋친 입을 다물고는 있지만, 꾸준히 울리세를 향한 적의를 내보였다. 내가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도 매우 탐탁지 않아 했고.

그러나 아까 본 아이의 얼굴은 아주 밝았다. 괴롭히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안 괴롭힙니다.”

“아.”

“표정이 너무 잘 드러나시는군요.”

“그…… 죄송해요.”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상처를 다시 꽁꽁 싸맸다. 내 무례한 행동을 지적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정말이지 면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볼일이 보고 싶진 않으신가요.”

“네…… 네?”

“화장실 말입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나는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생각지도 못한 주제였고 정말로 사적인 질문이었다.

“그 몸으로 가시긴 불편하실 텐데요.”

“아. 으…… 그,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가시고 싶다면 꼭 불러주시길. 지금까지 어떻게 가신지 모르겠지만…… 요셉 님의 상처는 보기보다 커 혼자 움직이면 터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먼저 터질 것 같은데요……. 나는 그저 고개만 계속 끄덕였다. 집사님은 부끄럽지도 않나? 그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인지 드레싱 도구를 챙겨 방을 나갔다.

나만이 방에 홀로 남아 얼굴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으으으…… 부끄러워.”

병자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예, 부탁드립니다’ 하고 도움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배변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부끄러운 것 중 하나니까 말이다.

“어?!”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왜 지금까지는 인지를 못 했는지 모를 사실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화장실에 간 적이 있었나?”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기억을 되새겨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 세계에 갑작스럽게 떨어진 후 나는 볼일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한가? 아니. 먹은 것이 있다면 나올 것 또한 있어야 하는데? 나는 급격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화장실에 가야 했다.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받고 싶었다.

“읏…….”

혼란에 빠져 혼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옆구리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에 몸이 경직되고 중심을 잃은 나는 침대에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악!”

엉망진창으로 바닥에 엎어졌다. 큰 충격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비명을 들은 것인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벌컥.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집사님이 내게 달려왔다.

“요셉 님!”

집사님은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들고 침대에 올려주었다. 내 옆구리를 확인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픔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곧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옆구리에서 퍼지는 고통이 극심했으나 새어 나오는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흐흐…… 윽. 하하…… 하하, 으…….”

고통이 내게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랬다. 고통이란 살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 나는 생생히 이곳에 살아 있다. 집사님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나에게 무언가를 주사했다.

“아픔에 잠시 혼란스러우신 것 같군요. 조금만 주무시고 계셔야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윽…….”

수면제였을까. 급속도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그 와중에도 옆구리를 더듬거렸다. 축축한 무언가가 묻어 나왔다. 아마도 상처가 터진 모양이다. 터진 상처를 건드리자 더한 고통이 밀려들어 왔지만 나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주무시죠.”

“하하, 으응…….”

집사님이 내 손목을 잡아채 침대에 고정했다. 고통에서 빠져나와 몽롱한 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 지금만큼 싫었던 적이 없다. 내가 살아 있음을 더 느끼고 싶었다. 내가 아직 인간임을 증명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이후, 집사님은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 이상한 행동을 할까 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기도 했고 계속 같이 있으니 불편했다.

“그…… 정말로 괜찮아요. 그때는 제가 좀.”

“네. 그러니 다신 그럴 일이 없도록 여기에 있어야겠습니다.”

“그…… 네.”

집사님은 한심하다는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순조롭게 아물어가던 상처가 내 미친 행동으로 도로 터졌고, 결국 나는 누워 있는 기간만 더 길어졌다. 배변 활동의 부재로 혼란에 빠졌던 정신은 진정하자 멀쩡히 돌아왔다. 내가 당시 조금 미쳤었지……. 부끄럽지만 인정했다.

“울리세는요?”

“요셉 님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다시 아프다는 소리에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네? 왜요? 그냥 이쪽으로 오게 하지.”

집사님은 싸늘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 눈초리를 받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칼날이 나를 스치고 가는 기분을 느꼈다.

“저번에 도련님과 대화 중 움직이려고 했던 것. 기억 안 나십니까? 저번의 일도 있으니 잠시 아무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으…… 네.”

결국 집사님도 내 상처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었다. 본래의 세계였다면 면회 사절 같은 거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밖을 보았다. 강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새삼 좋은 날씨를 보니 여행이 안 좋게 마무리된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는 학원이 없나요?”

“학원? 도련님 때문에 물어보십니까?”

“네. 이왕이면 또래와 함께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집사님은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제는 익숙한 스케줄 수첩이었다.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던 집사님은 능숙하게 무언가를 체크하며 말했다.

“무술 초급반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등록할까요?”

“……울리세에게 한번 물어보고요. 다른 애들과 만나는 게 싫을 수도 있으니까.”

집사님은 뭔가를 끄적거리곤 도로 수첩을 품에 집어넣었다. 나는 울리세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 참지 못하고 히죽거렸다. 아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기분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기쁜 일이었다. 더군다나 처음의 그 생기 없던 모습을 생각하면 뿌듯하기까지 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아……. 그 울리세가 절 지켜준다는 게 너무…… 하하.”

“그 조그마한 것이 요셉 님을 지킨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좋습니까?”

날카로운 말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도 저렇게 꼬이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걸까. 집사님에게는 그렇게 보였던 걸까. 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이 아닌데!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눈을 빛내며 말하는 울리세를 생각할수록 씁쓸함은 가셨다.

“아니요! 설마요. 귀여운 거죠.”

“귀엽다?”

“네. 그리고…… 이제 건강해질 테니까요. 무술 같은 걸 하면 체력도 붙을 거고. 집사님이 알려주면 잘 따라오나요? 힘들어하진 않아요?”

그래. 결국 울리세가 운동을 시작하면 건강에 좋을 터. 나를 지켜주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본인을 지킬 힘이 될 거다. 집사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집사님은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침묵이 어색해질 즈음에 대답했다.

“도련님은 무엇이든지 잘 따라옵니다.”

“다행이네요. 다행이야.”

운동이 마냥 쉽지는 않을 텐데 잘 따라온다니 마음이 놓였다. 일단 적성에 맞아야 뭐든 하는 법이니까. 학원에 가게 된다면 아이들과 사이가 좋을지도 걱정이지만 일단 한시름 덜었다.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울리세가 부디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랐다.

* * *

“식사하시죠.”

집사님은 쟁반을 탁자 위에 놓곤 나를 조심히 일으켜 앉혔다. 이렇게 아픈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의 손길이 익숙해졌다. 집사님은 정말이지 병간호의 프로였다. 게다가 상처를 살피는 것을 보면 전문적이었다. 정말로 그는 집사가 맞을까? 평범한 집사라기엔 잘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집사님은 내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먹기 편한 수프와 빵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가 다친 곳은 오른쪽 옆구리. 그 말인즉, 오른쪽 손을 쓰기엔 힘들다는 거다. 게다가 난 오른손잡이였다. 물론, 오른손을 쓰라면 못 쓸 것도 없지만 내 옆에는 눈을 시퍼렇게 빛내고 있는 집사님이 있었다.

“으으…….”

후들거리는 왼손으로 수프를 떠먹으려 했으나 장렬히 실패했다. 몇 번을 노력했으나 음식은 내 입이 아닌 접시 위로 도로 떨어졌다. 덕분에 접시는 엉망이 되었고, 내 기분 또한 처참해졌다. 이런 간단한 것도 못하는 것에 서러워질 때, 집사님이 숟가락을 뺏어갔다.

“자.”

“어……. 제가 먹을 수 있는데.”

집사님은 수프를 듬뿍 뜬 숟가락을 내 입에 가져다 댔고, 내 미약한 반항을 듣지 못한 척 더 들이밀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치를 보고 있자니 집사님이 무언의 시선을 던졌다. 빨리 먹으라는 뜻을 담은 눈총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결국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받아먹자 집사님은 다시 수프를 내게 떠먹여 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먹고 나자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주었다. 부드러운 빵은 맛있었다. 수치스러운 것만 빼면 정말이지 완벽한 식사였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그날의 저녁은 끝났다.

하지만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 후의 모든 식사에서 집사님의 시중을 받게 될 거란 것을. 편하지만 수치스러운 날들이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옆구리의 상처는 지지부진하지만 아물고는 있는 듯했다. 집사님의 과분한 식사 시중 또한 계속되었다. 처음에야 얼굴을 붉히고 뜸을 들이며 먹었지만 이제는 얼굴은 붉힐지언정 뜸을 들이지는 않게 되었다.

“냄새가 나는군요.”

“네?”

“몸 말입니다. 닦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식사 시중보다 더한 것이 있을 줄이야. 과부화 된 머리는 이해를 거부했다. 집사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그가 무엇을 하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 그, 집사님?”

“네. 왜 그러십니까.”

조그맣게 불렀는데 세찬 물소리 사이로 어떻게 들은 것인지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벌겋게 익은 얼굴로 말했다.

“닦…… 닦는다니요?”

끼릭- 물소리가 멈추고 수도꼭지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집사님은 양동이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담아 가져왔다. 흰 수건도 팔뚝에 걸친 채였다. 이해를 거부하는 머리도 이렇게 확실한 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집사님은 비죽 웃었다. 나는 뻣뻣이 굳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몸을 씻긴다는 것은…… 그러니까, 결국 알몸을 보인다는 소리와 같았다. 물론 집사님은 내 배변 활동까지 수발을 들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알몸은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난 둘 다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식사 시중이 나았다.

“그…… 안 하면…… 안 될까요.”

“이래저래 더러우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도련님에게 해가 될 수도 있고요.”

언제 울리세 걱정을 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이 맞다. 최근 조금 나아졌기에 아이는 꾸준히 나에게 문병을 왔다. 안 그래도 연약한 아이인데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나는 결국 수긍의 한숨을 내쉬었고, 집사님은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내게로 손을 뻗었다.

집사님은 과연 집사였다. 그러니까, 그는 시중의 프로였다. 그는 내가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들어 앉히고는 단추를 풀어냈다. 상처가 땅길 법도 했지만 그의 시중은 완벽했고 또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완벽함과는 별개로 난 고작 상의 하나 벗겨진 것인데 부끄러웠다. 그는 그저 시중을 들 뿐인데도 말이다. 사람에게 내장된 수치스러움이란 대단했다.

“손이…… 참 빠르시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집사님은 흰색 수건을 물에 적셨다. 검은색의 반장갑을 벗지 않은 손이 수건과 대조되었다. 문득 그 안의 하얀 손이 보고 싶었다. 부드럽지 않고 거칠었던 그 손이.

“닦겠습니다.”

멍하니 손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집사님은 젖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 손이 지나가는 장소마다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웠다. 그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열꽃이 피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조심스러운 손길은.

“밑에도 하겠습니다.”

“집사님!”

질끈 감고 있었던 눈을 번쩍 떠 다급히 집사님을 불렀다. 내가 부끄러움에 익어버린 것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그는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안 하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는 딱 잘라 대답하곤 내 바지를 벗겼다. 상의와 다르게 바지는 벗기기 쉬웠다. 그는 속옷과 바지를 한 번에 끌어 내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얼마 없었다.

찰박찰박. 수건을 물에 헹구는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서늘한 공기가 닿아 소름이 돋았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부분이 노출되어 있기에 더 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집사님은 성기 쪽이 아닌 허벅지부터 닦아내기 시작했다. 다행인 걸까 아닌 걸까. 어쨌든 그곳을 닦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몸에서 가장 냄새가 나기 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베개를 꾹 잡고 집사님의 시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긴장을 해서일까, 아니면 집사님의 손이 느릿해서일까. 하반신을 닦아 내리는 시간이 끝나지를 않았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마르셨군요.”

집사님이 다리를 들어 올려 오금을 닦아 내렸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다행히 내 몸은 들썩이기보단 경직되는 길을 택했다.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진 몸을 집사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 내렸다.

“으음……. 평균이죠. 이 정도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나는 평균이었다. 뱃살이 나오지도 마르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체형. 도대체 내 어디를 보고 말랐다고 하는 걸까. 그는 이제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 발을 닦았다. 만지고 싶지 않은 부분일 텐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댔다.

“이렇게…….”

그는 덧그리듯 내 발을 쓸어내렸다. 사심 없이 몸을 닦아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손짓, 어떠한 의도를 품은 게 확 느껴졌다. 복사뼈에서 발등으로. 발등에서 발가락 사이로. 간지러울 정도로 느릿하게 스친 손길이 이내 가장 연약한 살을 꾹꾹 눌렀다. 발에 자연히 힘이 들어가 움츠러들었다.

“바, 발이 마른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군요.”

내가 필사의 노력으로 내뱉은 말에 집사님은 다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왔다. 방금은 왜 그랬던 걸까. 집사님의 의도를 고민하는 사이 그는 내 다리를 모두 닦아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닦을 곳이 딱 한 곳 남아 있었다.

“으…….”

하지만 다행히도 집사님의 손길은 그야말로 무미건조했다. 발을 매만지던 그 손길이 이상했다는 확신이 들 만큼 달랐다. 그는 빠르게 내 음부를 닦아 내렸다. 혹시나 접촉에 발기할까 두려웠으나 그의 손길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고, 그는 오로지 청결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손길에 발기할 리가 없었다.

집사님의 손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드디어 끝이었다. 천년과도 같은 긴 시간이었다. 집사님은 내게 햇볕의 냄새가 나는 보송한 옷을 입혀주었다. 벗길 때와 같이 빠른 속도였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집사님이 묘한 눈길을 내게 보냈다. 언젠가의 증오도 평소의 무심함도 아닌 묘하게 들끓는 눈이었다. 평소와 다른 매혹적인 눈빛에 나는 정신없이 그 잘생긴 얼굴을 대놓고 보았다.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십니까?”

“앗, 그……. 어…… 네?”

“계속 바라보시기에 마음에 드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닌 모양이군요. 취향에 부합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놀란 나머지 빠르게 답하지 못하자 집사님이 오해한 듯했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아, 아니. 사람이 좀 늦게 대답할 수도 있지 뭘 또 그렇게 오해를 해요! 집사님 얼굴 진짜 잘생겼거든요. 취향이고 자시고 그 얼굴은 취향을 뛰어넘는 얼굴…….”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멍청한 김요셉, 멍청한 김요셉. 같은 남자에게 외모 칭찬을 들어봤자 기분이 나쁠 것이 분명한데. 나는 겁을 먹고 집사님을 조심스럽게 훔쳐봤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집사님은 꽃이 피어나듯 웃었다. 아주 작게. 마치 만년설 사이에서 피어난 작고 소담한 꽃 같았다. 언젠가의 꿈에 비하면 수수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냉혹한 표정이 다시 그 자리를 대신했다. 피어난 아름다운 미소에 넋을 잃었던 나는 알몸으로 설원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그 차가움에 온몸이 꽁꽁 언 것처럼 한참을 굳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분명 여름임에도 쌀쌀한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 * *

집사님은 그날 이후 꼬박꼬박 몸을 닦아주었다. 이틀 걸러 뽀송해지는 몸에선 냄새가 날 틈이 없었다. 내 몸을 닦는 집사님은 정말이지 후련해 보였다. 그동안 꼬질꼬질한 몸이 그의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선 일전과 같은 차가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이었을까.

“아직도 그렇게 얼굴을 가리고 계시는군요.”

“그럼 어떻게 해요…….”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는 집사님의 얼굴이 그전의 미소와 같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곧 알몸뚱이가 잘 마른 옷으로 가려졌다. 그제야 나는 시뻘겋게 익은 얼굴을 내보일 수 있었다.

“언제나 요셉 님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같군요.”

“네…… 네? 뭐가요?”

“당연히 한 번쯤이라도 발기하실 줄 알았습니다.”

“네?!”

무덤덤한 얼굴로 말할 내용은 아닌데? 그는 의료 지식을 설명하듯 태평했지만, 저 보석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무언가 신성 모독적으로 느껴졌다. 집사님은 나를 흘깃 보더니 다시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당신은 내 얼굴을 칭찬했죠.”

“그랬…… 죠?”

설마 일전의 그 반응은 내가 얼굴을 칭찬해서 그랬던 걸까? 절대 사람을 평가할 의도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으나 상대방이 기분 나빴다면 내 잘못이 맞다. 그것도 무려 수발을 이렇게까지 들어주는 사람에게 그런 실례를 하다니, 무례도 그런 무례가 없다.

“저…… 그, 죄송해요.”

“……갑자기 왜 사과를 하시죠?”

“그, 그게 그……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요. 외모를 평가할 생각도 없었고. 죄송해요.”

“…….”

집사님은 잠시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다행이었던 점은 그의 시선에는 분노 같은 것이 담겨 있지 않았다. 지금은 화가 나지 않은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발기를 하지 않았던 거죠.”

“바바바발기했어야했나요?!”

그의 입에서 또 나오리라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툭 뱉어졌다. 나는 놀라 숨도 못 쉬고 대답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말도 더듬었다. 이 멍청한 김요셉!

“아닙니다. 다만, 제 얼굴을 칭찬하며 다가오는 사람 중에선 대뜸 발기해 달려드는 자가 있어서 말입니다.”

“네?? 그런 미친놈들도 있어요?”

“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었기에 다행히 상처가 땅기는 일은 없었다. 으…… 멍청한 김요셉. 상대방이 불쾌할 만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트라우마를 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기억나게 해서.”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집사님은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지옥에 처박아 넣었다. 또한 과거 그를 희롱했던 자들을 함께 불지옥에 처박았다. 얼굴을 몰라 상상 속의 사람들은 모두 달걀귀신이었으나 불지옥에서 잘 타들어갔다.

“……하여튼 요셉 님, 전 화나지도 않았고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네…….”

용서를 받았으니 다행이다. 집사님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다정한 손길을 보아하니 화가 눈곱만큼도 난 것 같지 않아서 안심되었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집사님도요.”

그렇게 방 안에 나 홀로 남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고, 꿈에서는 울리세와 집사님이 나를 보며 웃었다. 분명 꿈임에도 달콤한 아카시아 향이 났다.

* * *

“이제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와!”

나는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자유를 얻은 해방의 탄성이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느라 좀이 쑤셨다. 아무리 아프다지만 아예 침대에서 벗어나질 못하니 힘들었다. 조금씩 움직여야 운동도 되고 빨리 낫는 법인데 말이다.

격한 반응에 집사님은 곧바로 내 가슴께를 눌렀다. 언젠가 한 번 당한 적이 있었던 행위였다.

“그렇다고 그렇게 움직이시면 다시 덧날 수 있습니다. 아주 조심해서 다니셔야 합니다.”

“아, 알겠어요.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대답을 듣고도 집사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애절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그제야 그는 가슴에서 무거운 손을 떼주었다. 다시 침대에 눕혀지기는 싫었기에 아까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리세는 어디에 있어요?”

“도련님은 지금 뒤뜰에 계십니다.”

나는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집사님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그가 내 발을 쥐었다. 당황해 발을 크게 움직일 뻔했으나 집사님이 잡는 것이 더 빨랐다.

“맨발에 신을 신으시면 안 됩니다.”

“어…….”

집사님은 내 발을 부드럽게 쥐고 흰 양말을 신겨주었다. 충분히 내가 할 수 있었기에 괜찮다고 말하려 했으나 각도 하나 달라졌다고 새삼 집사님의 얼굴이 너무 잘생겨 잠시 말을 잃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촘촘한 속눈썹. 오뚝한 코. 심지어 그는 정수리의 가마까지 완벽했다. 나는 집사님이 신발을 신길 때까지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것은 단언컨대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앗…… 그…… 감사해요.”

뒤늦게 한참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붉히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넋 놓고 감상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무릇 문명인이란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이러한 행동에 트라우마가 있지 않은가. 무례한 행동을 저질렀음에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집사님은 나를 올려다본 채로 발을 놔주지 않았다. 그 얼굴은 마치 무기질처럼 딱딱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도 아름다웠기에 나는 또 넋을 잃었다.

“……제 얼굴이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이시군요.”

“앗!”

또다시 정신 못 차리고 얼굴을 구경해 버렸다. 멍청한 김요셉, 저번에 그렇게 실례를 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내 뇌는 금붕어인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이 생각은 금붕어에게 실례였다. 금붕어도 나보단 나을 것이다.

“……봐도 상관없습니다.”

“……진짜요? 저번에…….”

“괜찮습니다.”

집사님은 내 발을 놓아주었다. 갑갑한 곳에서 해방된 것처럼 개운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떠한 것에서 자유로워졌는지는 모른다. 나는 그저 그 잘생긴 얼굴을 마음 편히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기뻤다.

* * *

“허억……. 허억.”

울리세는 힘든지 거친 숨소리를 내며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은 힘들어서이기도 했지만 무더운 더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방에서 나온 뒤 울리세를 보러 달려왔다. 옆구리가 조금 땅겼지만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아이는 널찍한 뒤뜰에서 홀로 조용히 큰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리고 힘들면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아이는 벌떡 일어나 다시 열심히 달렸다. 마치 오뚝이 같았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멀찍이서 보는 나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운동도 적당한 정도가 좋은 법. 과한 운동은 결국 몸을 해친다. 실제로 운동선수들이 검진을 받으면 생각보다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게 나온다. 슬픈 현실이다.

몸이 다 큰 어른도 그렇게 되는 마당인데…….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저러다가 아직은 어린 울리세가 다칠까 걱정되었다.

“오늘의 기초 훈련은 모두 하셨습니까?”

“……응.”

아이를 조금 쉬게 할까 말이라도 걸려는 순간, 집사님이 노린 듯이 어디선가 스르륵 다가와 울리세를 훈련시켰다. 팔굽혀펴기부터 이름 모를 운동까지. 집사님은 시종일관 차분했고, 울리세는 군말 없이 따랐다. 힘들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비지땀을 흘렸지만 울리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 근성 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집사님이 멀리에 있는 나를 향해 눈짓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겠지. 이렇게까지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모를 리가 없다.

나는 허겁지겁 아이에게 다가갔다. 뛰어가려 했으나 집사님의 눈초리가 사나워 옆구리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하지만 속도를 올려 걸어갔다.

“울리세! 수고했어!”

“요셉!”

힘들어했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울리세는 벌떡 일어나 나에게로 뛰어왔다. 양팔을 벌리고 기다리자 곧 아이가 품에 쏙 들어왔다. 뛰어오는 모습이 나비가 팔랑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아이는 내 상처가 걱정이었는지 아주 살짝 껴안았다. 땀에 젖어 미끌미끌했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은 아이를 칭찬할 때였다.

“계속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형은 이렇게 운동하라면 이미 쓰러졌어.”

“헤헤…… 진짜? 나…… 잘했어?”

“그럼.”

아이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새집처럼 헝클어졌지만 그마저도 귀엽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칭찬을 퍼부어줄 때였다. 집사님이 헛기침을 하며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아직 덜 칭찬했는데.

“도련님, 지저분해지셨으니 씻으셔야 합니다.”

“아…… 알겠어.”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찰싹 붙어 있던 울리세는 아쉬운 듯 나를 한 번 더 꼭 안고 떨어졌다. 나 또한 아쉽기 그지없었으나 운동을 한 후 씻는 건 당연하니까.

아이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계속 보시더군요.”

“애가 걱정돼서요.”

집사님은 코웃음을 쳤다. 뭐야, 애를 좀 걱정할 수도 있지. 아니면 이 세계의 아이들은 모두 저 정도는 하는 걸까? 게임 세계이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정말 혹독해 보였다. 나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애가 엄청 힘들어 보여서요. 저라면 그만큼 했다 진작 실려 갔을걸요.”

“하긴. 요셉 님은 힘드시겠죠.”

아니, 이 사람이 대놓고 나를 무시하네. 나를 무시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리고 내가 유달리 연약한 것도 아니다. 현대인 10명을 모아놓으면 아까의 그 운동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일 거다. 대표적인 게 나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현실의 기준으론.

“그럼 집사님은 안 힘들어 보여요? 에가 엄청 헉헉거리면서 힘들어하는데.”

“그 정도는 합니다. 그리고 할 만할 겁니다.”

“네? 본인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집사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바로 반박이 올 줄 알았기에 그 침묵은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내가 이상한 거라도 말한 걸까? 되짚어보아도 별다른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짧은 침묵이 우리 사이를 메웠다.

“저도 어릴 때 힘들지 않았으니까요.”

“네? 진짜요?”

“네.”

집사님은 덤덤히 말했다. 과연. 나를 괴물에게서 구해준 그 힘은 어릴 때부터의 단련 덕분인 걸까. 상처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집사님의 무력은 정말이지 강력해 보였었다. 평소의 냉혹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힘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그야말로 주인공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이 나라에 사는 다른 애들도 다 그 정도는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뭐야.”

김이 팍 샜다. 그렇다면 결국 본인의 재능이 출중해서 힘들다고 못 느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운이 좋았던 것도 있을 테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이런 식으로 훈련해서 몸이 망가지지 않은 것은 천운이니까.

결국 울리세가 힘들지 않을 거라는 말은 개소리였다.

“그럼 집사님이 대단한 거네요. 그걸 일반화하면 어떻게 해요? 울리세는 힘들지도 몰라요.”

“…….”

집사님은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런 집사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학원에 정식으로 등록하기도 전이다. 몸이 상해서 학원이 아닌 병원에 가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어린 나이에 병원에 익숙해지는 건 서글픈 경험이다. 나는 무섭기 그지없는 상상을 떨쳐내고 힘차게 말했다.

“집사님이 대단해서 모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면 아까처럼 할 경우, 힘들 수도 있어요. 아까 울리세도 엄청 헉헉거렸잖아요.”

“…….”

“어린 몸인데 너무 과격하게 운동하면 도리어 관절 같은 곳이 안 좋아질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 안 좋아져요.”

“……그렇군요.”

집사님은 어쩐지 깨달음을 얻은 듯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충격을 먹을 일일까? 하긴 천재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왜 자신처럼 하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 한다고 들었다. 그들은 숨 쉬듯이 하는 거니까. 제길, 재수 없다. 나도 하루만 평범하고 싶다. 매일이 평범하니까.

생각해 보면 집사님과 나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나는 뭘 해도 평범했다. 생긴 것도, 능력도 모두 평균 이상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집사님은 외모가 너무나 아름다웠고 심지어 재능도 특출했다. 반짝이는 보석과도 같은 그와 달리 나는 길가의 돌멩이, 혹은 가로수와 같았다. 솔직히 너무 대단하니 질투도 나지 않았다.

“제가 대단한 거였군요.”

“……어. 네.”

“아무도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요셉 님, 감사합니다.”

“뭘요.”

집사님은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던 걸까? 보통 천재는 자신이 천재란 것을 알게 마련이다. 주변에서 추켜세워 주니까. 그러나 그는 오늘에야 알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사님이 가끔 보여주는 과거의 편린들은 외롭고 쓸쓸했다.

“그럼.”

집사님은 등을 돌리고 집 안으로 걸어갔다. 내 착각이었을까. 그의 등이 어쩐지 적막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쓸쓸함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오만일 터이다. 나는 그와 친하지 않으니까. 그럴 사이가 아니니까.

결국 나는 뻗을 뻔한 손을 꾹 말아 쥐고 그저 그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여름임에도 쌀쌀해 나는 팔을 쓸어내렸다.

* * *

상처로 고생한 지 한참이 지났다. 뜨거운 햇살이 드디어 누그러지고 나무의 이파리들이 예쁜 색들로 물들었다. 단풍이 색색으로 물드는 건 한국과 똑같았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갑작스럽게 아스라이 올라왔으나 애써 무시하며 오늘도 난 방 침대에 앉아 상처를 집사님에게 보이고 있었다.

“…….”

본래도 큰 상처였는데 중간에 한 번 터져서 그런지 낫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꼼꼼하지만 확실히 꿰매져 있었던 상처는 이제 실밥도 제거해 흉터만 남았다. 흉터가 남긴 했지만 이만큼 깔끔하게 완치된 것은 집사님 덕분이었다.

집사님은 상처를 한참 살피더니 말했다.

“이제 다 나았습니다. 고생 많으셨군요.”

“와!”

나는 셔츠를 내리고 환호성을 질렀다. 격한 반응을 보이려고 하면 나를 제지하던 집사 또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정말로 다 나은 모양이다.

세상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기뻤다. 나를 치료해 주느라 고생했던 집사님을 새삼스레 살펴보았다. 그는 내 기쁜 모습과 달리 무덤덤해 보였다.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요셉 님?”

“정말로 감사해요. 저 구해주시고, 계속 치료도 해주시고, 수발도 다 들어주시고.”

집사님은 얌전히 듣더니 손을 내밀며 내 말을 끊었다. 말을 끊는 것은 무례한 행동임에도 그의 절도 있는 행동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고도의 기술이었다. 나는 아마 천년만년 공부해도 저 수준까진 갈 수 없을 거다. 내 생각엔 저것도 재능이다.

“요셉 님, 저는 집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집사님이…… 이걸 다 하나요?”

“원래라면 병원에 입원하셔야 했지만……. 가지 못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저 때문이기에 제가 요셉 님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이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집사님은 이렇게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기에 자신 탓이라는 걸까?

생각해 보면 저번에 울리세가 다쳐 병원에 허겁지겁 갔을 때도 일어나 보니 내 방 안에 있었다. 병원에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집사님에게 물었다.

“혹시…… 병원에 철천지원수라도?”

“아닙니다.”

집사님은 인상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고운 이마에 깊은 골이 생겼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유가 뭘까? 집사님은 먼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분명 말할 만한 사정이었다면 먼저 이유를 설명해 주었겠지.

뭐, 일단 내 몸은 이렇게 다 나았다.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앞으론 크게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어쨌든 감사해요. 집사님이 해야 했을 일이어도 돌봐준 게 고맙지 않은 건 아니니까.”

“…….”

집사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여튼 이제 몸도 다 나았으니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침대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게 된 이후 스스로 몸을 닦긴 했으나 샤워와 입욕은 금지였기 때문이다. 이젠 자유의 몸이니 속 편하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겠다.

“그럼 집사님, 저 목욕 좀 할 거니까…….”

“네. 그럼.”

집사님은 빠르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나는 옷을 훌렁훌렁 벗고 욕조에 들어가 물을 받았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멍하니 보며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물이 나를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뼛속까지 뜨끈해지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하아…… 좋다.”

기분 좋은 한숨을 쉬며 욕실을 아무 생각 없이 훑어보았다. 세면대, 거울, 그리고 변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다 나은 상처임이 분명한데 아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 고통으로 인해 현실감을 되찾긴 했으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나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배변을 하고 있지 않다. 이유는 여전히 불명이었다.

“……그러고 보면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긴 했으나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울리세와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먹는 것일 뿐. 내 몸은 대체 어떻게 변한 걸까. 감도 오지 않았다.

게임에서나 볼 법한 시스템 창, 생리 현상이 없는 몸. 나는 지금 인간인가? 살아 있는 인간이 맞는 건가? 고통이 느껴지는 걸 보면 살아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이것은 현실이며 나는 살아 있다고, 인간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인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아야!”

갑자기 발등이 찌르듯이 아팠다. 날카로운 창으로 찔린 듯한 강한 통증이었다. 돌연 찾아온 고통에 발등을 확인했으나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무언가 물었나 싶었지만 벌레 또한 없었다. 게다가 고통은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내게 의문만을 남겼다.

뭐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나는 갑작스러웠던 통증을 핑계로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을 외면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내가 미쳐 버린 걸 인정해야 할 듯해 두려웠다. 나는 애써 목욕을 마저 즐겼다. 더운물에서 나온 수증기가 욕실을 가득 메웠다.

혼잡스러운 머릿속과도 비슷한 광경에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곧 건국제군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건국제?”

집사님은 식탁 옆에서 수첩을 꺼내 들고 물었다. 건국제가 뭐지? 나라가 생긴 날을 축하하는 건가? 건국제가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집사님이 설명을 시작했다.

“매년 10월 12일에 열리는 건국을 축하하는 행사입니다. 나라의 가장 큰 축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대회가 열리고 그곳에서 인재를 발굴하기도 하지요. 축제이니 볼거리도 많습니다.”

“그런 것도 있구나…….”

대회도 열린다니 나중에 울리세도 그곳에 나가 상을 받아 오는 날이 올까? 울리세는 오물거리며 소시지를 먹고 있었다.

울리세는 정식으로 학원에 등록하지 않았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이 두려운 것일까, 한 번 물어보기는 했으나 고민하는 것이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니 사람이 많이 모일뿐더러 구경하는 대회에 나갈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학원에 등록하겠냐고 처음 물어봤을 때가 여름. 지금은 벌써 가을이다. 곧 시간을 내서 한 번 더 물어봐야겠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잠시 울리세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집사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반문하자 집사님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건국제 말입니다. 도련님을 대회에 참석시킬 생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휴식?”

“아……. 울리세, 어떻게 할까? 놀러 갈까? 볼 것도 먹을 것도 많을 것 같은데.”

아이는 잠시 포크를 입에 문 채 고민에 빠졌다. 식기를 가만히 물고 있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에 그 모습을 본 집사님의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하지만 내가 준 시선에 입을 열려다 멈췄다. 그렇게까지 엄하게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

아이는 침울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싫다면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쓸쓸한 저택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다 큰 어른이 홀로 은둔해서 살기를 결정한다면 아무런 유감이 없다. 사람들에겐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니 더욱 많은 것을 경험하고 삶을 결정했으면 좋겠다. 물론 정말 가기 싫다면 가지 않겠지만 말이다. 조금 흥미를 일으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지만 난 건국제에 관해 잘 몰랐다.

“집사님은 가본 적이 있어요?”

“이 나라에 있으면서 가보지 않은 것이 더 드물 겁니다.”

“와, 얘기 좀 해주세요. 전 가본 적이 없어서.”

눈을 반짝거리며 집사님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대회는 둘째 치고 축제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 울리세가 관심을 조금 보일까 싶어서였다. 집사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는 작은 국기가 걸리고, 나라 곳곳에서 올라온 여행객으로 굉장히 붐빕니다. 이맘때 마을의 숙소는 전부 꽉 차 시기를 잘못 맞추면 노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가장 큰 축제다웠다. 현대의 축제와 어쩐지 비슷한 것 같았다. 축제니까 성수기니 숙박 시설이 붐비겠지. 다행히 우리는 집이 여기에 있어 노숙할 필요는 없었다.

“모르고스 왕국은 기사의 나라로 사설 공연은 검무가 주를 이룹니다. 물론 공연에는 다른 학원들도 참가합니다. 대회를 나가지 않은 원생들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귀엽겠네요.”

“제법 본격적입니다. 본인들의 가치를 내보여 후원자를 얻어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과연. 대회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끼를 뽐내는 거구나. 학예회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런 가벼운 것이 아닌 오디션 프로그램 같았다. 다들 이를 갈고 무대에 서겠지.

“대회 또한 다양합니다. 무술뿐만 아니라 예술 계열도 있고 마법 계열 또한 있습니다. 과거 유명한 위인들은 이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을 당연시할 정도로 역사가 깊습니다.”

예술이라……. 나도 한번 나가볼까?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려 출품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안 그린 지 꽤 되었는데 재활을 시도하는 것도 좋을지 몰랐다. 이 세계에선 게임 스트리밍도 못 하고, 울리세를 돌보지 않는 시간 동안 할 것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뭔가 엄청나네요. 축제라기보단…… 거대한 대회 같기도 하고.”

“뭐, 비슷합니다. 축제라지만 대회를 노리고 1년을 꼬박 준비하는 사람도 있지요. 상위권인 사람들은 왕성에서 스카우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

축제가 아니라 이 정도면 국가고시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험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축제에 관한 것을 더 듣고 싶었다.

“그런 무대 말고 축제에서 재미있던 게 있나요?”

“…….”

집사님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술술 설명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뭐 놀이 기구라든가, 음식이라든가…….”

“……설명할 건 이 정도인 것 같군요. 직접 가서 경험해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집사님은 대화는 끝이라는 듯 수첩을 덮고 품속에 넣었다. 어쩐지 말을 돌리는 것 같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건 직접 가서 경험하는 게 좋겠지. 나는 빙긋 웃으며 울리세를 보았다. 아이는 울적해 보였다.

“재미있는 거 형이랑 같이 찾아볼까? 보물찾기 같겠다.”

“…….”

울리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가 당황해 뭐라고 하기도 전, 도망가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재빠른 야생동물 같았다.

[스트레스가 증가합니다. +20]

“아…… 이런.”

내가 욕심이 큰 나머지 너무 급했나 보다. 아이의 선택을 기다렸어야 했는데. 아무리 부드럽게 말했다 해도 울리세에겐 강요로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눈앞을 가린 알림 창을 휘저어 버린 후 침울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빠르게 아이를 뒤따랐다.

일렁이듯 사라지는 알림 창이 지저분한 잔재를 남겼다. 멍청한 김요셉, 바보 김요셉.

똑똑. 노크 후 울리세의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내가 사 온 많은 인형이 엉망진창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인형들은 이정표처럼 옷장의 앞까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울리세는 옷장의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울리세. 형이…… 미안해.”

옷장을 감히 열어볼 수 없어 나는 멈춰 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금 상황은 내 욕심과 오만이 벌인 사태였다. 울리세가 조금 밝아지고 나에 대한 벽을 허물어 날뛰어 버렸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헝클어지는 머리칼이 내 마음속 같았다.

“그냥…… 같이 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가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안 가도 괜찮아. 중요한 건 네가, 울리세 네가 즐거운 거니까.”

“…….”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아이가 나에게 벽을 세운 걸까 걱정스러웠다. 이만큼 가까워진 데 짧지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나는 아이의 여리고 사랑스러운 부분을 봐버렸다. 울리세와 웃으며 이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 세계에 있을 수 있는 동안에는.

얼마나 이 세계에 있을 수 있을까.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통 이런 게임의 엔딩 나이는 18살인데……. 그렇게 셈하니 10년도 남지 않았다.

“……미안해. 하지만 밥은 꼭 먹으러 와. 요즘 운동하느라 배고플 텐데.”

대답 없는 아이의 앞에서 이렇게 버티는 것도 폭력이 될 테지. 축 처지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 방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벌컥! 옷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아이가 온몸의 체중을 실어 덮쳐왔다. 그래 봤자 조그마한 아이였기에 나는 조금 휘청이는 것이 다였다. 아이는 내 뒤에서 허리를 꾹 안았다. 얽혀 있는 고사리 같은 손이 사랑스러웠다.

“……울리세.”

“나…… 나…….”

아이의 손은 땀에 젖어 축축했고 연약하게 바들거렸다. 극도의 두려움에 흠뻑 젖은 상태. 대체 왜 겁에 질린 걸까. 축제에 사람이 많다고 해서일까? 하지만 나는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걸까.

나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울리세, 진정해. 왜 그렇게 겁에 질린 거야?”

다정하게 물었지만 아이는 바들바들 떨 뿐 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허리를 놓게 했다. 그리고 애처롭게 떠는 아이가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마주 본 채 안아주었다. 꼭 안아주자 몸의 떨림이 점차 사그라졌다.

내가 못 미더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문제였다면 울리세는 더욱 겁에 질렸을 테니까.

“괜찮아?”

“……응.”

내 품에 안겨 웅얼거리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에 앉았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내 옷을 부둥켜 잡아 코알라처럼 달라붙었다. 그 손을 살포시 감싸 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화가 났어. 형이 뭔가 잘못했어?”

아이들이 화를 내는 데는 모두 그들만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유를 알고 또다시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조용히 도리질만 쳤다.

“그럼 형한테 이유를 말해주면 안 될까? 부탁할게.”

“…….”

아이는 내 품에 고개를 박았다. 숨이 막힐까 걱정될 정도로 아이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그…… 이.”

“응?”

아이가 웅얼거렸다. 품에 얼굴을 박고 있는 데다가 작게 말해 안타깝게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아이의 말에 집중했다.

“마을에…… 그 애들…….”

“응.”

울리세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역시 아이는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걸까. 부디 울리세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이겨내길 바랐다. 그런 기억에 사로잡히기엔 울리세의 인생이 아까웠다. 아이는 말을 떠듬거리며 이어나갔다.

“요셉을…… 지켜야 하는데…… 나, 너무…… 약해.”

훌쩍거리며 말하는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나를 지키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이는 그때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울리세는 정말로 용감한 아이다. 아이는 이미 폭력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이고, 울리세. 이 형은 너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세.”

“하지만,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들고 손으로 내 옆구리를 만졌다. 괴물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었던 부분이었다. 이제 그곳에는 상처가 없지만, 흉터가 남아 있었다. 상처 입고 쓰러지고 일어나 대화했던 그날, 싫을 리가 있냐고 말했던 과거의 나를 죽이고 싶어질 정도로 애틋한 손길이었다.

“울리세, 형 좀 봐봐.”

“……응.”

아이는 울먹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벌써부터 붉게 물든 눈가는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이 자그마한 아이는 나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보호자 실격이다, 김요셉.

“이 형은, 네가 지키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나 때문에.”

“아냐. 그건 너 때문이 아니야. 그건 형이 해야 하는 일이었어. 저번에도 말했지? 형은 뭐라고?”

“……보호자.”

“그래. 형이 너를 보호하는 건 법으로도 정해진 일이야.”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맨 처음은 동질감이었다. 피골상접한 그 모습은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으니까. 처음에는 그것이 울리세를 보호하는 데 큰 이유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울리세를 사랑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애정은 무거워졌다.

게다가 아이에게 향하는 애정이 무거워질 때마다 이 이상한 세계에 현실감을 느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정신 차리라는 것처럼 뜨는 게임 시스템이 나를 괴롭혔다. 마치 이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날카롭게 나를 도려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이와 집사님 덕분에 제정신을 유지했다. 이들은 나의 닻이었다. 망망대해에서 헤매는 나에게 있어 유일한 목숨 줄이었다.

“울리세가 형을 지킨다고 하고 싶은 걸 못 하면 형은 너무너무 슬플 것 같아. 그리고 화도 날 것 같아.”

“내가…… 싫어서?”

“아니! 형이 그럴 리가 없잖아. 형이 싫어서야. 형이 모자라서 네가 하고 싶은 걸 참는 거니까.”

울리세는 잠시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깜빡거리는 눈이 흐릿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울리세.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건국제에 가고 싶어? 형을 지키지 못해서 가기 싫은 게 아니라, 네 솔직한 생각이 듣고 싶어.”

“나는…….”

울리세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다가도 금세 다물었다. 아마도 아이는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 말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 거다. 그러니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겠지. 들어줄 사람 없는 말은 속으로 삼키게 마련이다.

나는 차분히 아이가 말하길 기다렸다.

“요셉이…… 슬픈 게, 싫…… 어.”

“응.”

“나, 나는.”

아이는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가…… 가고 싶어!”

“옳지. 잘했어.”

“사실, 사실…… 나도 기사 공연…… 보고 싶어.”

“기사가 좋아?”

“……응.”

번쩍거리는 기사가 멋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기사는 좀 멋있어 보였다. 칼, 갑옷, 말. 이 모든 것에 마음이 뛰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 나에겐 불가능했다.

나는 작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그래. 우리 볼 수 있는 건 다 보고 오자.”

“맛, 맛있는 것도.”

“물론이지. 형 돈 많다? 먹고 싶은 건 다 사 줄게.”

[스트레스가 감소됩니다. -40]

아이가 안심한 듯 미소를 띠었다. 아이를 다시 한번 꼭 안은 후 눈가를 가린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머리카락은 눈가를 전부 가리고 있었다. 이러다간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시력이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평소에 너무 자연스럽게 다녀서 미처 인식을 못 했다.

“머리카락도 자를까?”

“……요셉이…… 잘라줘.”

“나? 형이 자르면 이상해질 텐데.”

“요셉이…… 잘라줘.”

아이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손길을 타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쩔 수 없지. 이곳에도 바가지가 있겠지? 그걸 뒤집어씌워서 자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촌스럽겠지만 엉망으로 잘라 이상해지는 것보단 나을 테다.

“알겠어. 이상해도 형 탓하면 안 된다?”

“응.”

아이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울리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진 인형과 옷장 안의 인형을 주워 옮기며 방 안을 함께 정리했다. 인형은 양이 많아 침대에 모두 올리지는 못했고, 옷장 안을 제외한 방 곳곳에 놓였다. 그 덕분에 방 안이 아기자기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따가 간식 먹자.”

“응.”

울리세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빨갛게 부은 눈가를 식히기 위해 세수를 할 생각인 듯했다. 나는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웃으며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귀신처럼 인기척도 없이 집사님이 서 있었다.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자 집사님이 넘어질까 걱정했는지 나를 잡아주었다. 이런 배려를 해줄 시간에 놀래주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병 주고 약 주고의 달인이다. 나는 놀라 쿵쿵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야기는 끝났습니까?”

“놀랐잖아요!”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화낼 기력도 없다. 집사님은 언제나 이렇게 나를 놀랬으니까. 게임 창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귀신처럼 소리 없이 다가오는 집사님은 아무리 여러 번 맞닥뜨려도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못할 거다.

“그래서 이야기는 잘 끝내셨습니까?”

“아, 네. 가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집사님은 수첩을 꺼내 끄적였다. 무엇을 쓰는지 궁금했으나 그보다 키가 작았고, 또 그것을 훔쳐보기엔 나는 예의란 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둘만 갈 생각은 아니겠죠?”

“어…… 네. 그런데요?”

“위험하니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왜? 하는 생각에 거절하려 했다. 아이와 함께할 텐데 집사님이 끼다니. 그가 이번엔 무슨 망언을 할지가 벌써 걱정되었다. 요즘 들어 그런 일은 없었지만, 역시 과거의 행실이란 이렇게 발목을 잡는 법이다. 그러나 예상외의 말이 들려왔다.

“알겠어.”

“울리세?”

아이가 세수하느라 촉촉이 젖은 앞머리인 채로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온 걸까? 아니, 그것보다 울리세가 집사님의 동행을 허락한 것이 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당황스러운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아이는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집사는, 강하니까.”

“아…….”

단번에 이해되었다. 아이는 아직도 내가 걱정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집사님이 표독스러운 말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막는 수밖에. 아이가 나의 신변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 * *

서늘한 가을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건국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건국제가 다가올수록 아이의 눈동자가 기대감에 반짝거리는 것이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건국제 전에 앞머리를 잘라야 할 텐데. 아직도 내 손을 믿지 못한 탓에 시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머리칼을 모아 뒤로 넘기고 핀을 꽂아주었다. 음……. 앞으로 그냥 이대로 두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잠이 안 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으나 유독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뭔가 입이 심심했다.

그랬다. 야식이 먹고 싶었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족발부터 매콤한 떡볶이, 튀김에 순대, 라면 등등. 수많은 음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몸이란 신기했다. 배는 고프지 않아도 갑작스럽게 입이 심심하다니. 뇌의 농간이 다름없다.

“그래. 부엌에 가면 뭔가 있을지도 몰라.”

결국, 나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한국의 야식 같은 건 없겠지만 다른 뭔가가 있을 거다, 분명.

방을 나오고 나서야 맨발이란 걸 알았지만 차가운 바닥재가 기분이 좋아 그냥 돌아다니기로 결정했다. 발이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지 뭐. 원래 난 양말을 잘 신고 다니지 않았다.

“먹을 거~ 먹을 거~”

분명 냉장고에는 식재료가 있을 테다. 오늘 저녁으로 나온 오리 요리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렌틸콩과 함께 나온 오리고기는 참 맛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니 입에서 침이 흘렀다. 발걸음을 빨리해 부엌으로 향했다.

“앗…….”

“요셉 님.”

그리고 그곳에는 예상외의 인물이 있었다. 집사님이 식탁에 치즈와 와인을 놓고 자작하고 있었다.

집사님은 평소의 그 금욕적인 복장이 아닌 편안한 튜닉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반장갑은 여전히 손을 가리고 있었는데, 편안한 차림과 달리 구두와 장갑은 그대로라 금욕적인 인상을 주었다.

“어……. 집사님은 왜 여기에?”

“보시다시피.”

그의 손에 들린 유리컵에는 검붉은 와인이 담겨 있었다. 술……!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왠지 양주가 담겨야 할 것 같은 투명한 컵이었다. 아니, 그나저나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 말은 왜 여기에 있냐는 거였다.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 네.”

야식을 먹고 싶어 왔지만 집사님의 존재로 야식은커녕 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색한 공기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그때, 집사님이 벌떡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왔다.

“어?”

“맨발이시지 않습니까.”

집사님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 무릎을 꿇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당황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집사님은 꿋꿋이 내 발에 손을 올렸다. 맨발에 닿는 가죽의 재질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아니, 괜찮아요!”

“안 됩니다. 바닥이 돌이라 차갑습니다.”

“괜찮아요! 진짜로 괜찮아요, 집사님!”

하지만 집사님은 내 발을 놓아줄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은근슬쩍 내 발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의도가 의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저 신발을 신기기 위해서는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 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살을 집사님이 은근한 열기를 담아 쓸어 만졌다. 아냐, 착각이겠지. 설마 집사님이? 하지만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때, 집사님이 나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명백한 유혹이었다.

“아, 알겠어요! 신발 신을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 다급한 대답에 집사님은 손길을 멈췄다. 발을 조심스럽게 들자 집사님은 아까의 손길이 거짓인 것처럼 담백하고 프로페셔널하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나보다는 훨씬 큰 발이었기에 헐렁했지만, 집사님은 만족스러워했다. 맨발로 다니는 게 집사님에겐 큰 문제였나 보다.

“하……. 맨발이 뭐가 어때서…….”

“그래 놓고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런 거 가지고 감기 안 걸려요.”

고작 신발로 씨름하느라 기력이 사라진 나는 식탁 앞의 작은 의자에 구겨지듯 앉았다. 나는 왜 야식이 먹고 싶었던 걸까. 배도 고프지 않은데. 몇 분 전의 나를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달그락.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눈앞을 보니 빈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드시죠.”

집사님은 조용하고도 깔끔히 와인을 내 앞의 잔에 따라주었다. 와인 잔이 아니라 그런지 기묘한 부조화를 일으켰지만 뭐 어떤가. 이곳은 파티장도 아닌데. 본래 집에서 먹으면 소주도 물컵에 마시고 그런 거다. 아니, 잔이 있는 것이 대단한 거지. 난 귀찮아서 병째로 마시곤 했다.

“음, 네. 감사합니다.”

주는 술을 거절할 순 없지.

사실 난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온 후 술이라곤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었다. 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마셨다가 주정을 부리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본의 아닌 금주를 한 지 반년. 눈앞의 술은 끝내주게도 유혹적이었다.

집사님은 술을 따르고 본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그러곤 내가 없는 것처럼 자신의 술을 마시며 사색을 즐겼다. 그럼 나도 눈치 볼 것 없지! 내 몫으로 따라진 와인을 벌컥 마셨다.

“맛있어!”

현실에서 먹었던 싸구려 와인과는 달랐다. 슬프게도 난 와인에는 조예가 없었고, 어쩌다 편의점에서 마시는 게 다였다. 한데, 떫기까지 했던 그 와인들과는 다르게 향기도 풍부했고 달고 맛있었다. 현실에서 이런 걸 마셨다면 아마 와인을 쟁여놓고 마셨을지도 모른다.

“와…… 맛있다, 맛있다.”

맛있는 걸 먹으니 절로 흥겨워졌다. 즐거움에 어깨가 들썩였다. 접시에 놓인 큐브 치즈를 오물거리며 먹었다. 젠장. 이것도 맛있었다. 먹자마자 한입 가득 느껴지는 치즈 맛에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게 맛있습니까?”

“앗, 깜짝아!”

집사님이 있음을 분명 알았지만 거의 잊어버린 채 먹고 있어서 놀라 버렸다. 그런 내 모습이 어이없었는지 눈썹을 까딱거리는 그의 모습에 순간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네, 맛있어요. 너무 오래간만에 먹어서.”

“……그렇군요.”

집사님은 다시 조용히 술을 마셨다. 화가 나 보이진 않았다. 앞으론 조용히 먹어야지. 오랜만에 먹다 보니 신나 입을 주체하지 못했다. 조용히 치즈를 먹고, 술을 마시고를 반복하니 내 컵의 와인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워 한참을 노려보자 다시 잔에 붉은 와인이 채워졌다.

“감사해요~”

와인을 따라준 것은 집사님이었다. 취기가 올라 즐겁기 그지없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안주를 더 먹기 위해 접시를 더듬거렸으나 큐브 치즈들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언제 다 먹은 거지? 내 안주!

“없네……. 맛있다…….”

하지만 없어도 술을 먹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으아, 맛있어! 술은 맛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오르는 취기와 즐거움에 취해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맛있다, 맛있어. 집사님~ 이거 너무 맛있어요.”

눈앞의 남자, 요셉은 내가 따라주는 족족 마셔대더니 취해서 해롱거렸다.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술잔을 소중하게 쥐어 잡고 엎어져 있는 게 그린 듯한 술꾼의 모습이었다. 영상구라도 가져와서 기록을 남기고 싶을 정도였다.

“하아…….”

“이렇게 맛있는 술을 주다니……. 집사님, 나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멍청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히죽거리는 남자는 술에 취해 본심을 줄줄 말하고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좋은 기회였다.

이자의 본심을 들을 수 있는 기회.

실실 웃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럼에도 술에 취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해 히죽거렸다. 요셉 김…….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곳에 온 사람 중 이 남자처럼 돈이 많은 자는 없었고 자신의 몸 그대로 온 자 또한 없었다. 그리고…….

‘집사님의 눈 색은 무슨 색인가요?’

나는 내 눈가를 쓸어내렸다.

이제는 나조차도 볼 수 없는 푸른색의 눈. 비천한 태생이었지만 눈만큼은 고귀함을 드러냈던 내 푸른색의 눈. 이제는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색으로 뒤덮여 끔찍하기만 한 눈을 이 남자는 똑바로 보았다.

그 시선을 받을 때면 이상한 울렁거림이 생기곤 했다.

“……요셉 님.”

“네엥?”

술을 홀짝거리며 아까보다 더 마셔서인지 어린아이처럼 대답하는 모습이란.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뚠 미소를 지으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당신은 왜 도련님에게 잘 대해줍니까?”

“도련님…… 도련…….”

남자는 생각이 나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뇌었다. 그의 미간엔 깊은 골이 팼다. 이내 생각이 난 듯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울리세?”

순수하게까지 보이는 올곧은 미소였다.

“네.”

헤벌쭉 웃는 게 간식을 눈앞에 둔 개 같았다. 아니, 정정한다. 바보 같았다.

“그야…… 애잖아.”

술을 야금야금 마시며 요셉은 말을 이어갔다.

“애들은~ 어? 그냥 맛있는 거 먹고, 놀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거야. 참 나, 기가 차서. 내가 게임 켰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애한테 알바? 일? 어휴, 미친놈들. 쓰레기 같은 놈들.”

구시렁거리는 그는 대화의 상대가 나란 것을 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저것이 정말 진심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믿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날려 ‘그것’을 지키는 것을 보고도 말이다. 믿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야…….”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생판 남인 아이에게 이 정도의 돈과 정성을 쏟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분명 이 남자도 목적이 있을 거다. 그도 그럴 듯 인간이란 모두 이기적이고 욕망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니까.

그렇기에 계속해서 그를 시험했다. 끊임없이 ‘그것’을 욕하고, 그를 트집 잡고, 유혹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얼마나 체면을 차리는 것인지 계속해서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남자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기대되었다. 얼마나 추악한 인간일지. 아니, 남자가 그런 인간이길 바라는 걸까. 조금 혼란스러웠다.

“울리세가 웃으면…… 귀여워.”

“…….”

“너무너무 귀여워. 힐링돼.”

“하아…….”

……술로 진심을 꺼내는 건 무리인 모양이다. 아니면 소아성애자인 걸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인간은 다 쓰레기니까. 내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것도 취향이 그쪽이라 그런 걸 수도 있다. 순간 느껴지는 둔통에 가슴께를 쥐었다. 역겨워서 그런 것 같았다.

“게다가…….”

바보처럼 헤실헤실하던 얼굴이 쓸쓸히 변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보일 수 없는 깊은 외로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남자가? 항상 애정을 듬뿍 받은 것을 티 내던 남자다. 그런 그가 이런 모습이라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없어…….”

텅 빈 술잔을 들고 우울한 얼굴을 하는 남자를 보니 한순간 진지하게 생각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요셉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차오를수록 그의 얼굴이 반짝거리며 행복해져 갔다.

“맛있다. 맛있어.”

“하아…….”

술 냄새가 가득한 밤. 요셉의 웃음소리와 내 한숨이 어우러졌다.

* * *

“으으으…….”

쪼개질 듯한 두통에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텅 빈 안주 접시와 맛있는 와인. 필름이 끊긴 것이 분명했다. 멍청한 김요셉. 정신을 잃었던 부엌에서 눈을 떠야 했는데 내 방 침대 위였다. 커튼 사이로 침입해 온 햇살이 눈을 아프게 찔렀다.

“머리 아파…… 으으으.”

와인은 숙취가 심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다. 하지만 와인을 취할 때까지 마신 적이 없어 몰랐다. 이렇게까지 머리가 아플 줄은. 심지어 속도 쓰렸다. 그렇게 맛있었는데 소주를 들이부었을 때보다 숙취가 심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아픔을 감수할 만한 맛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일어나셨군요.”

“……집사님.”

집사님이었다. 집사님은 숙취로 얼굴을 찡그린 나를 보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만했다. 숙취에 찌든 사람은 누가 봐도 한심할 테니까.

그는 몸을 틀어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고 집사님이 내게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저 여기로 데려다주신 거…… 집사님이죠?”

“네.”

“죄송해요…….”

정말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사람이 술을 먹으면 곱게 방에 들어갈 것이지 거기서 필름이 끊겨서 남의 손에 의지해 방으로 돌아오다니. 이게 무슨 추태냐. 김요셉, 정신 차려. 집사님은 이 집에서 일하는 거지. 네 고용인이 아니라고!

“자.”

과거 나 자신을 욕하고 있자니 집사님이 날 부드럽게 일으켰다. 숙취를 염려한 것일까,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덕분에 흔들림 없이 일어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욕실로 이끌었다. 그가 틀어놓은 물이 세면대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씻으시죠. 세수라도 하시면 좀 괜찮으실 겁니다.”

“으으…… 네.”

머리를 망치로 치는 듯한 고통이 계속 이어졌다. 본래라면 여기까지 부축을 받을 필요도 없었겠지만, 지금의 내게 집사님의 도움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정말이지 부끄러웠다. 집사님은 내가 세수하는 것을 기다리고 수건을 건네주었다. 뜨거운 물로 한 번, 차가운 물로 한 번. 번갈아 세수했더니 조금은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그럼 이쪽으로.”

집사님은 내 허리를 잡고 부드럽게 인도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손길이라 집사님이 내 허리를 잡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왜 허리를 잡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뒤늦게야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대로 복도를 지나 식당에 도착했고, 집사님은 나를 의자에 앉힌 후 부엌으로 사라졌다.

“으으…….”

햇빛이 재차 눈가를 강타했다. 동시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앉아 있으니 속이 더 쓰려오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아무리 와인을 많이 먹었다고 해도 스무 살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서른 살도 먹지 않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웃길 수도 있지만 정말로 몸이 낡은 느낌이었다. 운동해야 하나.

아, 숙취가 있는 상태에서 운동할 생각을 하니 피곤함이 더 몰려오는 것 같다.

“드시죠.”

소리도 없이 내 앞에 뚜껑이 덮인 작은 그릇이 놓였다. 새콤한 냄새가 났다. 의아하게 집사님을 바라보자 그는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줬다.

붉은 수프였다. 해장하라고 준 걸까? 순간 머뭇거리자 집사님이 내 손에 손수 수저를 들려주었다.

“토마토 수프입니다.”

토마토 수프? 해장에? 나에게 해장이란 시원한 콩나물국이나 얼큰한 뼈 해장국 같은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순간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조리 본래의 세계에 있는 것. 여기선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게다가 집사님이 날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하지만 토마토 수프라니? 한 번도 해장을 위해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해장으로 피자를 먹는 사람도 있긴 했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뇨, 아뇨. 잘 먹을게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못 배워먹은 놈이 될 순 없었다. 설령 이것이 술에 취한 나를 옮기느라 고생한 보복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눈을 딱 감고 한 숟갈 먹었다.

“아…… 맛있다.”

토마토의 시큼한 맛만이 가득 느껴질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새콤한 맛에 마늘의 향기와 칼칼한 매콤함까지. 그야말로 해장에 딱이었다. 한국인의 영혼이 환호성을 질렀다.

심지어 맵고 짠 걸 좋아하는 내 입맛에도 제격이었다. 한 입 두 입 먹으니 쓰렸던 속이 진정되었다. 처음의 주저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미친 듯이 퍼먹었다.

“이것도 드시죠.”

집사님이 내민 조그마한 컵에선 진한 커피 향기가 느껴졌다. 장난감처럼 작은 컵을 보아하니 에스프레소인 모양이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에스프레소라니. 숙취에 커피를 마셔도 되는 건가?

……음, 해장술이란 것도 있는데 못 먹을 것도 없지. 게다가 이렇게 완벽한 해장 음식을 해준 집사님이다. 에스프레소도 해장에 좋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난 쓴 걸 잘 먹진 못했다.

“으…….”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에스프레소의 끔찍한 맛을 상상하고 얼굴을 구겼다. 언젠가 먹어본 적 있었던 그 맛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로 끔찍했다.

“……요셉?”

그렇게 있는 와중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울먹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울리세가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라 나는 당황해 에스프레소를 식탁에 놓고 아이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곧 숙취의 여파로 휘청이고 말았다.

“요셉!”

아이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달려왔다. 큰 소리에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 듯했지만 아이에게 최대한 멀쩡하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러나 아이는 도리어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또 아파?”

“아니! 아니, 형 안 아파. 그냥. 좀…… 음.”

차마 아이에게 정신없이 술을 퍼먹어서라는 말을 못 하겠다. 그건 정말이지 면이 서지 않았다. 수치스러워 웃음으로 넘기려고 했으나 아이의 울먹임은 심해져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련님, 요셉 님은 지금 숙취를 겪는 것이니 그렇게 반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 집사님!”

차마 내 입으로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뭔데……. 수치스러움에 당황해 큰 소리를 냈으나 곧바로 내 목소리에 머리가 찡 울렸다. 으으, 바보 같은 김요셉!

머리를 쥐어 싸고 끙끙거리고 있자니 집사님이 아까와 똑같이 부드러운 손길로 부축해 의자에 앉혀주었다.

“숙취……?”

“술을 많이 마시면 생기는 증상입니다.”

울리세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나아졌다. 어딘가 다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안심한 거겠지. 하지만 역시 어린아이에게 숙취로 고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다음 날 상태가 안 좋아질 때까지 먹는 건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민망함에 얼굴이 붉게 익었다.

“요셉…… 술, 마시지 마…….”

“응…….”

“약속.”

아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만국 제스처였다.

하, 하지만 술을 마시지 말라니 너무나 큰 약속이다! 내가 주저하자 아이의 눈이 아까보다 빠르게 울먹이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약속이야…… 약속.”

울먹거리는 눈으로 웃는 울리세의 얼굴엔 안도감이 번져 있었다.

그래. 앞으로는 술을 마셔도 과음은 지양하자. 아이가 저렇게 좋아하기도 하고, 또 이렇게 술 먹고 고생하는 건 사양이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뒤가 이렇게 힘들면 고생이다.

“드시죠.”

“아.”

집사님이 잊어버렸던 커피 잔을 쥐여주었다. 쓴 향이 코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그래. 토마토 수프는 맛있었지만, 에스프레소를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음은 하지 말자. 그나저나 토마토 수프는 평소에도 먹을 수 있는 걸까?

“윽.”

집사님의 성의를 생각해 나는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며 한입에 꿀꺽 삼켰다. 최대한 혀에 닿지 않게 마셨으나 쓴맛이 혀를 타고 올라왔다. 크레파스를 씹어 먹는 맛이었다. 나는 식당의 한복판에서 꼴사납게 몸서리쳤다. 이것이 진정한 집사님의 복수였던 모양이다.

* * *

건국제 당일은 날이 아주 맑았다. 뉴스를 볼 수 있었다면 강수량은 바닥을 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 세계는 영국을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영국은 언제나 흐릿한 이미지였는데, 이곳은 해가 쨍쨍한 날이 많았다. 스모그 현상 같은 건 없는 모양이다. 이왕 노는 것이니 우중충한 것보단 나았다.

“그럼 이따가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들.”

오늘 하루 고용한 마부가 공손히 말했다. 집사님은 품에서 웃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마부는 코가 바닥에 닿을 것처럼 굽실거렸다. 집사님이 주는 돈이 후하긴 했다.

“확실히 마부가 있으니까 편하네요.”

본래였다면 먼 거리를 걸었어야 할 텐데 집사님의 준비 덕에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나라에서 가장 큰 축제라고 했던 것이 허풍은 아니었는지 시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도였으니 본래도 사람이 적은 편은 아니었는데 지금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야말로 사람의 파도였다.

“요셉, 요셉.”

“응?”

울리세가 내 손을 가볍게 흔들어 주의를 끌었다. 울리세를 내려다본 나는 깊은 흐뭇함에 감싸였다. 놀러 가는 날이었기에 한껏 빼입은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멜빵 칠부바지와 흰색 셔츠에 동그란 빵모자. 긴 앞머리는 차마 자를 수 없어 옆으로 넘겨 핀으로 고정했다. 그야말로 사랑스러움의 극치였다. 이게 공격이었다면 나는 치명상을 입고 죽었으리라.

“왜 그래?”

“나…… 저거.”

울리세가 가리킨 곳에는 크레이프 장수가 있었다. 굉장히 현대적인 디저트에 나 또한 눈이 동그래졌다. 줄이 긴 게 인기가 많은 듯했다. 음식을 건네받은 사람들은 맛있는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 오겠습니다.”

집사님이 대뜸 그렇게 말하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니, 왜 갑자기 혼자 가는 거야. 나는 울리세를 데리고 집사님을 쫓아갔다. 사람들이 많아 아이를 놓칠까 봐 중간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집사님의 발걸음이 어찌나 빨랐는지 그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집사님, 왜 먼저 가요.”

“왜 오셨습니까?”

사람들에게 꾸벅이며 양해를 구하고 집사님의 옆에 섰다. 그럼에도 끼어들기 같았는지 눈초리가 따가웠다.

“그야 저도 먹고 싶으니까요.”

“……기다리셨으면 요셉 님 것도 사 갔을 겁니다만.”

“에이, 이런 건 같이 기다리는 거죠. 그게 길거리 음식의 묘미잖아요.”

복작거리는 대기 줄 사람들은 각자 음식을 기대하며 일행과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은 높은 웃음소리가 주변을 수놓았다.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활기차고 즐거움이 가득 차 있었다. 나 또한 기대되어 웃으며 울리세를 보았다.

건국제의 시작이었다.

* * *

[스트레스가 감소됩니다. -10]

[스트레스가 감소됩니다. -10]

[스트레스가 감소됩니다. -10]

건국제에서 크레이프를 먹고 공연들을 구경하자 울리세의 스트레스가 비약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테이터스 창을 한 번쯤 확인하고 싶은데…… 도무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것을 확인하게 되면 아이가 게임 속 캐릭터라는, 지금이 현실이 아닌 게임이라는 인식이 다시 들까 봐 무서웠다.

알림 창을 완벽히 꺼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시스템 창을 이제는 나름 자연스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와…….”

우리는 마술 학원의 공연을 보는 중이었다. 공연을 하는 아이들은 적어도 열다섯 살은 되어 보였는데 모두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손에서는 타오르는 뱀이 솟구치고, 돌이 떠오르고, 물방울이 허공에 문양을 수놓았다. 모두 상상 이상이었다. 현실의 그 어떤 창작 매체보다 대단했다.

“대단하다.”

“……요셉은…… 마법이 좋아?”

아이가 어쩐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왜 그렇게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대답해 주었다.

“응? 그렇지? 형이 있던 곳엔 마법이 없었거든.”

“……그렇구나.”

아이는 공연을 처음 구경할 때와는 달리 풀이 죽었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번쩍이는 공연은 이제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허둥지둥 울리세에게 집중했다.

“형이 뭐 잘못 말했어? 왜 그렇게 시무룩해.”

“……아무것도, 아니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표정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새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뭔가 캐묻기도 그랬다. 과하게 행동해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즐거웠던 시간이 어둡게 침체되고 말았다.

“다음 공연이 시작되는군요.”

집사님이 어색한 공기를 뚫고 말했다. 정신을 차리자 허공을 수놓던 화려한 마법들이 사라져 있었다. 울리세를 신경 쓰느라 공연을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내게는 공연보단 아이가 더 중요했기에 상관없었다.

“검술 학원이군요. 앞서 나왔던 학원 중 이 학원이 가장 큽니다.”

“학원도 여러 곳이 있어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수도에 얼마나 많은 학원이 있는지 모르시는군요.”

멍청한 질문이었다. 집사님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 보면 학원이 많지 않으면 공연이 이렇게 이어질 리가 없다. 출연할 아이들이 없을 테니까. 게다가 수도가 작은 것도 아니니 학원이 적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원생들이 공연을을 시작했다. 아이들의 손에는 시퍼런 진검이 들려 있었고 위험해 보였다. 손에서 불꽃이 튀어나왔을 때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검을 들어도 괜찮은 것일까?

“요셉…….”

“응? 왜 그러니?”

울리세가 나를 불렀다.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심각해진 얼굴은 침통하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말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울리세는 고민이 커 보였다. 즐겁기만 해야 할 외출이 어쩌다가 이렇게 심각해진 거지? 나는 침착하게 울리세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검보다…… 마법, 하는 게…… 좋아?”

심각한 고민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마법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보고 괜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세상에, 그저 하고 싶은 걸 하면 좋을 것을. 내 눈치를 보다니 안심한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아팠다. 울리세가 그 어떤 걸 하고 싶다고 해도 도와줄 수 있는 게 나인데. 물론 범죄에 관련된 건 좀 설득을 하겠지만 말이다.

“울리세, 형은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좋겠어. 물론 네가 저런 진검을 들고 싸운다고 생각하면 걱정되지만…….”

“하지만…… 마법이 좋다고 했잖아?”

“네가 하는 것에 형이 좋고 싫고는 상관없어. 형 눈치 볼 필요 없어. 정말이야.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마법은 형이 배우고 싶은 거야.”

[스트레스가 감소됩니다. -10]

울리세는 어느새 안심한 얼굴을 하고 눈을 반짝이며 검술 학원의 아이들이 검무를 추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검을 수족처럼 다루고 있었다. 과연 저 정도는 돼야 무대에 올라 자신을 선보이는 건가. 이 세계 또한 경쟁이 치열하단 걸 새삼 느꼈다.

나는 이 세계에 오고 나서 한 번 죽을 뻔하다시피 했지만, 위험이라면 모를까 치열함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돈이 많았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살 곳도 있는 지금 나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다니 모순적으로 느껴질 만큼.

“울리세.”

“응?”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한 울리세는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부신 열정을 보기만 해도 기뻤다. 드디어 꿈을 꾸는 아이가 기특하고 감격스러웠다.

나는 울리세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기 학원에 가서 검술을 배우는 건 어때?”

“……학원?”

“응. 집에서 하는 것도 좋지만 체계적으로 배우는 게 더 좋을 거야.”

“……배우면 나도.”

울리세의 눈이 현란한 칼 놀림을 보이는 무대 위로 집중되었다. 춤사위에 가까운 검술은 나조차도 시선을 뺏길 정도였다. 선망으로 가득 차 반짝이는 그 얼굴을 보니 아이가 할 대답이 예상되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럼. 열심히 하면 할 수 있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표시였다. 나는 집사님을 향해 눈짓했다. 집사님은 예의 그 수첩을 꺼내 들어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며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럼 건국제 후 가장 빠른 시간으로 잡아보겠습니다.”

“응. 고마워요.”

품에 안긴 아이의 무게가 묵직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빼빼 마른 모습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층 더 성장한 듯한 아이의 모습에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을까. 갑작스러운 그리움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나를 키워준 형과 누나가 보고 싶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우울하고 말랐던 나를 건강하게 만들고 기뻐했을까. 그들도 꿈을 꾸는 어린 나를 보며 배가 부른 듯 행복했을까. 나도 그들의 눈에는 사랑스러웠을까.

“요셉 님.”

그리움에 잠식되어 우울해지기 직전, 집사님의 부름에 헤어 나올 수 있었다. 검술 공연은 끝났는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집사님과 함께 울리세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어쩐지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 이상하고 신기한 것을 보는 듯 일렁이는 눈. 한 쌍의 눈 모두 짙은 푸른색이었다.

나는 기묘함에 시선을 떨쳐내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공연 끝났네요. 우리 다른 거 보러 갈까요?”

“……점심을 드실 시간입니다.”

“그렇구나. 울리세, 우리 점심 먹으러 갈까?”

“응.”

아이와 손을 잡고 공연장을 나왔다. 울리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내게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떠날 수 없다. 원래 나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을 것이다.

분명 처음엔 나도 그랬다. 그래서 수첩에 쓰여 있는 이곳으로 왔다. 이곳이 게임 속이라면 게임처럼 행동하면 돌아갈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이 조그마한 아이가 생각지도 못하게 나를 이곳에 잡아놓았다. 울리세는 이 세계에 붕 떠 있는 나를 붙잡는 닻이기도 했으나 떠나지 못하게 하는 닻이기도 했다.

책임감은 아이를 두고 현실로 쉬이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를 길러준 누나와 형들이 그렇게 나를 키웠다. 아무리 그리워도 나는 이곳의 아이를 책임져야 했다. 누군가는 미련하다 욕하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평범한 인간인 김요셉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나는 평범하고 천재가 아니었기에 누군가 가르쳐 준 이 방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 * *

“와아!”

울리세가 작게 박수를 쳤다. 집사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쯤이야!”

내 손에는 장난감에 가까운 장총이 들려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다니던 중 현실에 있었던 사격 게임과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상품으로 걸려 있던 여우 인형을 울리세가 내심 가지고 싶어 하기에 오랜만에 실력을 좀 발휘해 보았다.

집사님은 나를 허약하다고 무시했지만 나는 이래 봬도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다! 더군다나 사격은 내 특기였다. 제대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결과가 보여주었다.

“예상…… 외의 특기가 있으시군요.”

“이래 봬도 사격만큼은 자신 있다고요!”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격장의 경품을 쓸어갈수록 노점 주인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 세계는 총이 있는데 마법을 쓰는 건가?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아니, 생각해 보면 마법과 과학의 조합은 대단한 시너지를 일으킬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총을 쏘면 마탄이 날아가는 게임 속 캐릭터를 떠올렸다.

울리세가 얻고 싶어 했던 인형을 뺀 나머지 경품들은 상인에게 돌려주었다. 죽상이었던 상인은 그제야 살아나 감사의 인사를 했다. 돈도 많은데 상인들 등골을 빼먹기엔 좀 그랬다.

“선생님, 감사의 표시로 이거라도 가져가시죠.”

상인은 나에게 주섬주섬 책을 건네주었다. 아동을 위한 동화책이었다. 아이가 있으니 준 모양이다. 감사의 인사라니 받지 않을 수도 없었거니와 울리세에게 주면 좋을 것 같아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이 없어 옆구리에 책을 꼈다.

우리는 그 후로 밤늦게까지 건국제를 즐겼다. 울리세는 시종일관 환한 모습이었고,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리세는 결국 마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조용한 마차 안, 나와 집사님은 마주 앉아 있었다. 내 무릎 위에는 울리세가 누워 있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그렇군요.”

즐겁지 않았던 걸까? 나는 오랜만의 축제를 재미있게 즐겼다. 울리세도 재미있게 즐긴 것은 확실하다. 이왕이면 세 명 다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하긴 놀러 와서 고용주랑 같이 있는데 즐겁지 않은 게 당연하다. 알고는 있지만 조금 아쉬웠다. 그때, 집사님이 말했다.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

어둑한 마차 안 어슴푸레한 달빛으로 보이는 집사님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 또한 즐겼다니 안심되었다.

“다음에 이런 기회 있으면 또 다 같이 가볼까요?”

“……위험하니 두 분께서만 가시면 안 됩니다. 제가 동행하는건 당연합니다.”

“위험하지 않아도요.”

나 또한 그를 보며 웃었다. 그의 미소가 나에게 좋아 보였던 것처럼 내 미소 또한 그에게 좋아 보이길 바라며.

“우리 또 놀러 가는 거예요.”

집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는 침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어색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조용하지만 부드러운 기류가 마차 안을 포근하게 만들어줬다. 마부는 웃돈을 받은 만큼 빠르고 안전하게 집으로 마차를 몰았다.

아무도 없는 저택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쩐지 저택이 우리를 잡아먹을 것 같아 팔을 몇 번 쓸어내렸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안아 옮기려 하자 집사님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아이가 아무리 무거워도 내가 옮겨주고 싶었다. 집사님은 역시 예의상 내민 것인지 재차 손을 건네지 않았다. 그 행동에서 울리세를 향한 거부감이 짙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는 아직도 울리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싶다.

나는 집 안으로 발을 옮겼다. 울리세의 방까지 돌아가 아이의 신발을 벗기고 침대에 눕히니 더웠다. 확실히 힘들었다.

“잘 자.”

아이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방을 나섰다. 오늘 하루는 즐거웠지만 고단했다. 방으로 순식간에 돌아온 나는 옷이 허물인 양 훌훌 벗었다. 얼른 씻어야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으니 속도는 게 눈 감추듯 빨랐다.

수증기가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받아 목욕을 하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그제야 오래 걸어 다니느라 혹사했던 발이 얼얼하게 고통을 호소했다.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망치로 수십 번 내려치듯 연신 두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뜨끈한 물에 발이 시원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을 음미했다. 욕조는커녕 샤워 부스도 없던 현실의 원룸을 생각하니 갑자기 인생 역전을 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옷을 두고 가겠습니다, 요셉 님.”

“으악!”

현실에 대한 생각에 잠시 우울해지기도 전, 집사님의 목소리에 물에 잠길 뻔했다. 집사님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놀래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허물처럼 마구 벗어놨던 옷을 봤을까? ……봤겠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빨리 씻자.”

부끄러움에 괜히 더 벅벅 몸을 닦고 나오니 방바닥에 널려 있어야 할 내 옷이 모두 사라졌단 걸 알았다. 제길, 집사님이 다 치운 모양이다. 성인이 자기 일도 안 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부끄러움에 욕실에서보다 얼굴이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열이 오르니 목까지 탔다.

“아오.”

기세 좋게 물을 마시려 했으나 짜증 나게도 물병은 비어 있었다. 내가 다 마시고 채우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된 것, 어떻게든 물을 마시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방으로 향했다.

복도는 어두웠지만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벌써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 기간이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성큼성큼 내디뎠다.

부엌에 도착해 냉장고를 여니 마실 물을 담은 병이 보였다.

이곳의 수돗물은 석회질이 가득 들어 있어 마시면 배가 아팠다. 예전에 수돗물을 마시고 배앓이했을 때 집사님이 한심한 눈길을 보냈던 것은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 그냥 마셔도 괜찮았는데. 여긴 정수기가 없는 걸까? 나중에 시내에 가면 한번 찾아봐야겠다.

“목이 마르셨습니까?”

“흐이익!”

떨어뜨릴 뻔한 물컵을 꽉 쥐고 뒤돌아보자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보는 집사님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집사님의 이런 행동에 익숙하지 않은데 그는 매번 놀라는 내가 익숙해진 모양이다. 제길.

“하아, 하아……. 네.”

집사님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관찰하듯이 보는 그 눈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랬기에 나 또한 마주 보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요?”

“네.”

어쩐지 조금 지쳐 보이는 집사님은 벽에 몸을 살며시 기댔다. 언제나 대체로 단정하고 각 잡힌 모습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풀어진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선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느껴졌다. 분명 내 눈앞에 있는 그는 젊은데도 죽을 날을 받아놓은 노인 같았다. 그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검을 좋아한 기억이 나긴 하지만…….”

의외였다. 울리세를 그렇게 싫어했으니 아이가 좋아하는 건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생각해 보면 기초 훈련을 시켰던 것은 집사님이다. 모를 수는 없겠지.

집사님은 잠시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켰다. 쓸쓸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메웠다. 그것도 잠시, 집사님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익숙한 것 같군요.”

“뭐가요?”

“그런…… 축제 말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가셨었나요?”

집사님은 말을 돌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실패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아뇨. 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내 대답을 들은 사람은 으레 모두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곤 한다. 나는 전혀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멋대로 내 사정을 재단한다. 부모가 일찍 죽었으니 저 아이는 고생을 하고 살았겠지, 라고.

그래. 내가 조금 아팠던 시기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나를 우선해 보호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자랐다. 그랬기에 나는 사람들의 그 상투적인 반응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집사님은 예상과 달리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고아?”

그 눈빛엔 어떠한 연민도 존재하지 않았다. 메마른 목소리는 그저 사실만을 묻고 있었다. 무례한 질문임에도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보다 낫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보내는 동정에 지쳐 버린 탓이다.

“뭐, 고아…… 라면 고아지만 전 형과 누나들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열 살, 많으면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혈육들은 홀로 남은 나를 책임졌다. 큰형이 나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둘째 누나는 나의 생활을, 셋째 누나는 나의 정신적인 케어를 맡았다. 그들은 나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언제나 짬을 내어 나와 시간을 보냈다.

나는 부모만 없을 뿐이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건강한 유년을 보냈다. 아주 운이 좋은 편에 속하면 속했지, 불쌍한 아이가 결코 아니었다.

“다정했나 보군요.”

“아마 집사님이 생각하는 다정함은 저희 가족에게 없을 거예요.”

물론 행복한 유년 생활을 보내긴 했지만, 그들이 다정하다곤 할 수 없다. 아니, 다정한 것은 맞다. 그러나 미디어에 자주 나오는 유난스러운 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나를 사랑보다 더 큰 책임감으로 보살폈으니까.

나를 돌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나의 형과 누나들이 차갑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누구보다 상냥했다. 그들은 나에게 완벽한 보호자였다.

“집사님은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만 개인 사정을 말하는 것 같아 말을 돌릴 겸 물었다. 그리고 집사님의 얼굴을 본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늙어 보이고 지친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어쩐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처럼 가시를 세운 모습. 아까 보였던 여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과 정반대였다고 하면 되겠군요.”

눈에는 미약한 분노가 언뜻 비쳤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당황스러워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는 사냥하는 짐승처럼 아주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님에도 느껴지는 위압감에 학습된 공포심으로 심장이 죄어왔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요셉 님.”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지운 후 느릿하게 부엌에서 벗어났다.

홀로 남은 나는 어두운 부엌 안에 우뚝 서 집사님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래된 시간에 풍화된 듯한 모습과 사나운 들짐승 같은 모습 중 어느 것이 그의 진실된 모습일까. 아니면 둘 다 거짓이고 시리도록 차가운 빙해 같은 모습이 진실된 모습일까? 알 수 없었다.

[왕자의 일기가 해금되었습니다!]

“어?”

일기? 뜬금없이 튀어나온 알림 창은 알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에게 일기 같은 것은 없었다. 애초에 요즘 누가 일기를 쓰냔 말인가. 그런 건 초등학생 때 억지로 쓴 게 전부다.

짐작 가는 것조차 없어 나는 무시하고 방으로 되돌아갔다. 물도 다 마셨으니 더 이상 부엌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알림 창은 곧 사라졌다.

* * *

“아, 맞아. 물 가져올걸.”

방에 되돌아오자 텅 빈 물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 잊어버린 모양이다. 지금 당장은 목이 마르지 않으니 괜찮지만 이왕 가는 것 한 번에 해결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 이거 집사님이 가져다 놨나?”

물병의 옆에는 아까 상인이 덤으로 준 동화책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건국제가 너무 신나 잊고 있었다. 집사님이 주워다 놓은 건가? 언제 가져다 놓은 거지? 어쨌든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동화책을 살펴보았다. 귀엽게 단순화된 표지가 앙증맞았다.

“동화라.”

다 크고 나선 만화책 정도밖에 읽지 않았기에 동화책이어도 글 위주의 책은 오래간만이었다. 물론 아동 동화이니 그림이 색색으로 들어차 있었지만.

팔락거리며 동화를 대충 넘겨 보았다. 내일 울리세에게 가져다줘야지. 그때, 책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뭐지?”

바닥에 떨어진 것은 손바닥만 한 낡은 수첩이었다. 동화책 사이에 끼어 있던 걸까. 종이로 만들어진 값싸 보이는 수첩에선 세월감이 짙게 묻어났다. 나는 별생각 없이 펼쳐 보았다.

[오늘 건국제가 열렸다. 가고 싶다. 하지만 눈에 띄면 또 맞겠지. 젠장.]

어린아이의 비뚤거리는 글씨. 걱정스러운 내용. 다른 뭔가가 더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다였다.

그 순간 아까 갑작스럽게 떠오른 알림 창이 생각났다. 왕자의 일기란 것이 이걸까? 하지만 왕자가 누구지? 집사님이 예전에 말해주길 왕자란 계승이 결정된 계승자만 쓸 수 있다고 했다. 이 나라에 계승이 확실히 정해진 자가 있는 걸까?

“……모르겠네.”

도리어 복잡해진 머릿속에 작게 한숨을 쉬며 수첩을 서랍장에 넣었다. 해금되었다는 알람을 보면 어떠한 조건이 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언젠가 현실에 돌아갈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일단 함부로 둘 수는 없었다.

“일단 자자……. 피곤해.”

어쨌든 지금은 잘 시간이었다. 목욕한 후 노곤해진 몸이 숙면을 요구했다. 터벅터벅 침대로 걸어간 나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눈을 감았다. 잠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눈을 떴다. 아무것도 없지만 어쩐지 익숙한 공간에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익숙함의 이유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거기네.”

이 세계에 오기 전 사인을 했던 공간이었다. 개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있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때와 다른 점은 이젠 사인할 종이 같은 것도 없다는 거?

그런데 나는 분명 잠들었는데……. 왜 여기로 온 거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제발 누군가 가르쳐 준다면 좋겠다.

“하하!”

그때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세상의 즐거움을 응축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나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누, 누구 있어요?”

“안녕! 오랜만이야!”

눈앞에 불쑥 튀어나온 여자 덕에 나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집사님은 이 여자에 비하면 양반이다.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여자는 그런 내 모습을 키득거리며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뒤로 물러난 채 눈앞의 여자를 관찰했다. 상대방이 누군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내 눈은 휘둥그레 커졌다.

“……헐.”

눈앞의 여자는, 아니, 남자는, 아니, 지금은 여자구나. 그는 몸이 계속해서 뒤죽박죽 바뀌었다. 성별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의 색과 피부의 색, 생김새도 바뀌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키까지 작아지거나 커지거나를 반복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다. 그럼 괴물인가? 나를 공격했던 괴물이 떠올라 소름이 쭈뼛 돋았다. 차라리 개꿈이 나을 것 같다. 아니, 개꿈이 맞나?

“어머 어머, 자기 놀랐구나~ 놀랐구나!”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키득거리는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가 내게 공격성을 보이지 않아 아까보단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풀지는 않았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후로 바꾸지 않은 유일한 것이라면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아 그 감정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그는 거의 미쳐 보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아, 아하. 아하! 맞아, 설명해 주는 걸 잊었네.”

그는 통통 튀며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사실 탱탱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신 사나웠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보다 산만했다. 이제 그에게 공포감을 느끼기보단 어지러웠다. 그의 행동에 내 정신이 나사가 빠진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나는 우수 플레이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온 개발자야!”

나에게 반짝이는 눈을 들이대며 하는 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우수 플레이어? 개발자? 안 그래도 그의 행동 때문에 정신이 없는 나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하하, 우리의 우수 플레이어는 멍청하구나.”

까르르 웃는 목소리는 내 고막을 아프게 때렸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 멈췄다.

유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에 끔찍할 정도로 차가운 적막만이 가득 찼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공포가 다시 한번 등을 타고 올라와 나를 놀려댔다.

“뭐였지? 하도 오래전에 만들어서 기억이 안 나네……. 가장 아름다운 왕자 어쩌고 그거.”

“……설마 <가장 아름다운 왕자를 위하여>?”

“아, 맞아. 그거 그거. 아이고,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끄덕거린 후 차가웠던 분위기가 거짓인 것처럼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걸 만든 사람이야. 너희 말로는 개발자? 그런 거.”

“네?”

설명을 들었으나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게임을 만든 게 자기라고? 따끔거리는 발등을 다른 한 발로 문지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뇌세포를 모두 동원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온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상한 세계로 온 원인이 바로 저 자칭 개발자 때문이란 걸까? 게다가 오래전에 만들었다니? 내가 기억하기로 <가장 아름다운 왕자를 위하여>란 게임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작이었다.

또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존재가 인간일까? 모습을 휙휙 바꿀 때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확신이 생겼다. 스멀스멀 몰려온 공포가 내 목덜미에서 킬킬거렸다.

“오류랑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서 우리 플레이어를 쫓아내려고 했는데 말이지.”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멈추지 않고 화려하게 바뀌는 눈으로 그는 내 발등을 흘긋 보았다. 순간적으로 커진 따가움에 눈가를 찌푸렸지만 내 발등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렇게 재~ 미있게 게임을 즐겨서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온 거지.”

“어…… 네.”

고작 그거? 그것 때문에 이렇게 나타났다고?

“갑자기 인사를 하고 싶어서 온 것뿐이야. 그럼! 다음에 또 봐!”

그는 손을 흔들거리며 인사했다. 그리고 눈을 깜빡하자 어젯밤 잠들었던 침대의 위였다. 창문으로 밝은 햇빛이 들어와 내 얼굴을 매만졌다. 꿈인가? 그런 것치곤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와 똑같았다.

“뭐지.”

게임을 만들었노라 말하는 이상한 존재. 어딘지 모르는 이상한 공간. 그 존재는 나에게 혼란만 남기고 사라졌다.

갑자기 찾아와 혼자 깔깔거리며 게임을 즐겨줘서 고맙다니. 혼란스러워진 것 빼고는 도대체 얻은 것이 없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았는데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하려니 복잡한 걸까. 잘 모르겠다.

“……치트 때문에 오류가 났나?”

알림 창은 잊을 만하면 오류를 복구했다는 메시지를 날렸다. 개발자가 말했던 오류라는 것이 내가 썼던 치트 때문에 났던 걸까? ……그랬다면 그가 나를 때리지 않은 것이 용하다. 치트는 많은 플레이어가 암암리에 쓰긴 하지만 결국 편법이니까.

그렇게 기묘한 변신을 하던 존재가 평범한 사람인 나를 때릴 무력이 없을 것 같진 않다. 그럼 아마 난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죽겠지. 새삼 내 머리가 아직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어휴…….”

그래도 이왕 나타난 것, 이 세계에 대한 것이나 더 알려주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왜 이 세계에 왔는지. 이 세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니, 그것은 알려줬나. 이 세계가 게임이란 걸 빼도 박도 못하게 확정 지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래도 게임이면 게임 설명서 정도는 줬음 좋겠다. 알아서 읽고 파악할 텐데. 물론 이 와중에도 마음 한편으론 이 모든 것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통까지 느꼈음에도 말이다.

그럼 이 세계를 창조한 건 그 존재인가? 난 지금 신을 만나고 온 건가? 신을 보면 죽는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건 개소리였나 보다.

“씻자, 씻어.”

아무리 생각해도 명쾌한 답을 낼 수 없어 고개를 휘휘 젓고 욕실로 가기 위해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당황스러운 것이 눈에 띄었다.

유난히 따끔거렸던 적이 많았던 오른쪽 발등에 검은색의 문양이 떡하니 그려져 있었다. 문신에 가까워 보이는 그 문양은 동그란 원형에 밖으로 삐쭉한 송곳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반으로 자르면 왕관과도 같을 그 문양은 단언컨대 아까 이상한 장소에서도 없었다.

“이게…… 뭐지? 분명 발등은 깨끗했었는데.”

불길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을 보니 식은땀이 다 흘렀다. 아까 개발자라는 존재가 내 발등을 보았던 것이 덜컥 마음에 걸렸다. 지워지길 바라며 벅벅 문질렀으나 번지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섬광과도 같은 직감이 내리쳤다.

이건 남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종류란 걸.

그 어떤 창작 매체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검은색의 문양을 좋은 의미로 쓰진 않는다. 백 퍼센트 전부 다 안 좋은 의미였다. 아니, 혹시 모를 가능성을 생각해 일 퍼센트는 빼주자.

“으으……. 머리 아파.”

이상한 장소, 이상한 존재, 이상한 문양까지. 하룻밤 사이에 복잡한 일이 많이도 생겨 버렸다. 나는 흰색의 양말을 챙겨 신고 씻으러 갔다. 앞으로 답답하게 양말을 신고 다닐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하아…….”

갈수록 늘어나는 의문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숨으로도 해소되지 않은 혼란이 계속해서 소용돌이쳐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머릿속과 가슴이 꽉 막혀 답답했다.

“하아아아아…….”

* * *

“앞으로의 등원을 위해 마차와 말을 구매했습니다. 전에는 간간이 필요했지만 이젠 매일 쓰게 될 테니까요.”

식사 시간. 집사님이 영수증을 건네며 보고했다. 어차피 집사님이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 보고는 안 해도 괜찮은데 참 성실했다. 나는 영수증을 대충 보고 넘겨주었다. 그런데 마부는 고용하지 않는 건가?

“마부는요?”

“제가 몰 거니까 괜찮습니다.”

당연하듯 말하는 집사님은 언젠가 치료를 배워 왔다는 모습과 비슷했다. 집사님이 못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왠지 집사님은 뭐든지 다 척척 잘해낼 것 같다. 완벽함의 화신 같은 느낌?

“앞으로 도련님은 매주 검술 학원에 가시게 될 겁니다. 수업은 오후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진행됩니다.”

“울리세, 괜찮니?”

“응.”

아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몫으로 준비된 팬케이크를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걸 보니 든든했다. 동시에 앞으로 울리세가 학원에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머리는…… 꼭 내가 잘라야겠어?”

“응. 요셉이…… 잘라주면 좋겠어.”

아이의 머리는 여전히 눈을 가리고도 남을 길이였다. 축제 이후 쭉 머리를 넘겨 핀으로 고정해 주긴 했지만, 역시 한번 전문적인 손길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내가 손을 대면 분명 처참해지겠지.

결국 나는 결정을 보류했다. 앞머리를 넘긴 울리세는 귀여웠다. 이대로 둬도 괜찮을 것 같다. 더 길어지면 묶을 수도 있고. 묶어도 울리세에겐 잘 어울릴 테다.

“하하……. 집사님 학원 등록은 다 끝났나요?”

“네. 필요 서류도 다 제출했습니다.”

“준비물 같은 건요?”

“준비했습니다.”

조금 아쉬웠다. 아이와 함께 물건을 고를까 했는데. 집사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 내가 손댈 필요가 없었다. 물론 전부 준비해 줘 내 몸은 편했지만 말이다. 기껏 만반의 준비를 해준 사람 앞에서 아쉬움을 티 낼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집사님.”

“제가 할 일입니다.”

그나저나 수업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첫 등원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기에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새삼스레 조금 들떴다. 이렇게 된 것, 학원에 가기 전 시내로 가 맛있는 거라도 먹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아이의 물건은 함께 못 샀지만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울리세, 우리 학원 가기 전에 놀러 갈까?”

“놀러?”

“응. 먼저 가서 주변의 지리도 좀 둘러볼 겸 산책도 하고. 어때?”

울리세가 기대된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긍정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벌써부터 외출이 기대되었다.

* * *

슬프게도 외출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축제의 여파로 대부분의 가게가 쉬었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쁘고 쓸모없는 것을 사는 즐거움을 울리세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제길. 조금 알아보고 올 걸 그랬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 외출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달랬다.

“요셉, 다음에…… 또 오자.”

그나마 울리세가 실망한 것 같진 않은 듯해 다행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면 나는 죄책감에 짜부라졌을 거다. 울리세에게는 조금의 실망도 느끼게 하기 싫었다. 나와 함께하는 대부분의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내 조그마한 욕심이었다.

“응. 다음에는 여기 닫힌 곳 다 가는 거야.”

“응.”

“……곧 학원이 열리겠군요.”

서로 약속하고 손을 흔들고 있자 집사님이 조용히 짧고도 길었던 산책의 끝을 알렸다. 주머니에서 집사님이 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확실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울리세의 손을 잡고 학원을 향했다.

“오늘 어떨 것 같아?”

“조금, 걱정…… 돼.”

역시 다니고 싶다고는 했지만, 막상 닥치면 무서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주는 울리세가 고마웠다. 나는 울리세의 손을 꼭 잡곤 말했다.

“누가 괴롭히거나 놀리면 형이 있다고 말해.”

“형……?”

“응. 우리 형이 와서 다 혼내줄 거라고.”

최대한 믿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해 씩 웃었다. 울리세는 그런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의도와 달리 그 눈동자에는 불신과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요셉은, 약하잖아.”

……갑자기 팩트를 들고 와서 나를 때리면 어떻게 하니.

사실이었다. 무력으로 따지자면 나는 하찮기 그지없는 일반인이니까. 재난 영화의 등장인물로 치면 피하지 못해 죽는 엑스트라1. 액션 영화라면 악당의 공격에 휘말려 죽는 사람1일 것이다. 울리세의 걱정은 타당했다.

“울리세, 물론 형이 힘은 약하지만 그런 거 말고도 사람은 강할 수 있어.”

“……어떻게?”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고 말했다. 불변의 진리!

“돈. 형, 돈 많아.”

옆에서 걷던 집사님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맞는 말인걸. 현실이라면 돈도 없어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곳에선 아니다. 나는 아마 이 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을지도 몰랐다.

만약 이 세계가 중세 시대에 가까웠다면 돈보다는 지위가 더 강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중세 시대에도 돈이면 못하는 것이 없다. 부는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권력이자 지위다. 그리고 나는 서민으로서 그 돈의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돈이 있으면 어쨌든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 그러니까 믿어도 괜찮아.”

“……응.”

울리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아이가 돈으로 무엇을 어떻게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몰랐으면 좋겠다. 그저 내가 자신의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주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일이 닥쳐와도 나를 믿고 나아갈 수 있겠지. 아이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나 또한 노력해야 했다.

학원으로 가는 길.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등원 시간이 돼서 홀로 오는 아이, 보호자의 손을 잡고 오는 아이, 마차를 타고 오는 아이. 가지각색이었다. 새로운 얼굴인 울리세를 흘긋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시에 나 또한 시선을 받았다.

“신경 써서 입고 오길 잘했네.”

작게 중얼거렸다. 게임 속이라도 결국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첫인상에서 판단할 수 있는 건 외양뿐이기도 하니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부러 멋들어지게 꾸며 입은 것은 다른 부모들이 울리세를 낮잡아 보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정도로 갑갑하게 차려입었으니 누구도 울리세를 없는 아이라고 무시하지 않겠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울리세를 때리던 아이들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거지새끼잖아요. 아빠가 거지들은 전부 때려죽여야 한댔어요.’

‘맞아요. 부모 없는 애들이 커서 불량배가 된다고. 전부 잡아야 한다고 했어요.’

‘우린 잘못한 거 없어요.’

“요셉 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각에 빠져 잠시 멍해 있자 집사님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나는 웃으며 다시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의 속물적인 모습이 너무 싫었다. 나 또한 부모 없는 아이라며 손가락질당했던 기억이 있기에.

사고에 의해 조실부모한 아이에게 향하는 손가락은 따가웠다. 한여름이 한겨울인 것처럼 매서웠다. 울리세가 이런 모습을 모르길 바랄 뿐이었다. 부디 아이에게 내가 든든한 벽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내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울리세, 끝나면 데리러 올 테니까. 즐겁게 지내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알겠지?”

“응.”

씩씩하게 대답한 울리세는 나를 한 번 꼭 껴안았다. 나 또한 세게 마주 안아주었다. 그때,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마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런 곳에…….”

“이런 곳에 후보자가…….”

무려 네 마리의 말이 쌍두독수리가 새겨진 하얀색의 마차를 끌고 학원의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대단한 사람을 태웠다는 걸 알 수 있는 호화로운 마차였다.

마차는 천천히 세워졌고, 딱 달라붙는 하얀색의 승마 바지를 입은 여자아이와 보호자로 보이는 여성이 함께 내렸다. 둘 다 분홍색 머리였다. 비슷한 색의 머리칼을 보아 여자아이와 여성은 혈연관계 같았다.

“샬라메 가문이군요.”

“집사님, 알고 있어요?”

“네. 촉망받는 후보자는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됩니다. 저기 어린 귀공녀의 이름은 블렌다 샬라메입니다. 샬라메 공작의 여동생이 낳았고, 공작이 후원하는 후보자죠.”

공작가가 후원자라니. 아이에게 들이는 품이 장난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울리세에게 하는 건 소꿉장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브렌다라는 아이는 굉장히 고고해 보였다. 어린아이가 갖췄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고풍스러운 기품.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브렌다는 당당한 걸음으로 학원 안으로 들어갔고, 그를 뒤따라 보호자와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까지 우르르 학원 내로 들어갔다. 덕분에 주변이 한산해졌다.

“공녀의 옆에 있던 자는 프리실라 샬라메로 공작의 첫째 딸입니다. 공작이 후계로 점찍어놓았지만…… 글쎄요. 본인은 프리실라 후보자를 지키는 것에 모든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와, 대단해요. 집사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나는 기사를 봐도 딱히 기억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실제로 다들 알고 있는 듯한 블렌다를 나만 알아보지 못했다. 집사님의 상세한 설명에 신기해 탄성을 질렀다.

집사님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매끈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집사의 일입니다.”

이런 게 진짜 집사님의 일인가? 의문이 들었으나 현실에서 집사는커녕 내가 집안일을 했기에 진실을 알 수는 없었다. 인터넷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곳에는 스마트폰이 없을까. 못 쓴지 벌써 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너무나 불편했다.

“요셉…….”

아차. 울리세가 나를 불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계승 후보자를 보고 겁에 질린 걸까? 어쨌든 중요한 점은 아이가 안절부절못한다는 거였다.

나는 아이와 마주 보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아이의 눈동자가 그제야 확연하게 보였다.

“응. 왜 그래?”

아이는 우물쭈물하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까의 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초조함에 휩싸여 있었다. 다른 후보자를 처음 보느라 신경을 못 쓴 내 실수였다. 울리세를 계속 신경 썼어야 했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응. 그냥…… 나 집에, 가고 싶어.”

풀이 죽은 모습이 마음 아팠다. 울리세의 눈에 브렌다가 더없이 멋있어 보였던 게 분명하다.

자신보다 훨씬 재능 있어 보이는 계승 후보자. 그 아이가 또래라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터. 울리세처럼 자신감이 없는 아이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구나 빛나는 아이를 동경하게 마련이지만, 이건 너무 타이밍이 안 좋았다.

“혹시 아까 그 아이 때문에 그래?”

울리세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이 콕콕 쑤셨다. 다 큰 성인도 자신보다 잘난 사람들을 보면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나만 해도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질투가 났으니까.

“네가 그 아이만큼 못 할 것 같아?”

“……응.”

“울리세, 형도 너처럼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어.”

“요셉도?”

울리세가 눈을 동그랗게 떠 나를 바라봤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람이라면 대부분 느끼고 살걸. 하지만 울리세, 사람은 각자의 속도가 있는 거야.”

“속도?”

“그래. 아까 그 애는 너보다 먼저 시작해서 훨씬 앞서 나가 있는 거지. 물론 앞으로도 네가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너 자신에게 집중해야 해.”

“내가…… 못 해도?”

“그럼.”

사람에겐 분명히 재능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내가 열흘을 걸려 연습했던 걸 단 한 번에 해낸다. 천재란 분명 존재하며 그들은 세상을 바꾸어낸다. 나도 과거엔 그들의 존재에 우울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늪이다. 그들의 발걸음에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중요한 건 네가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야.”

“……노력.”

“그래.”

울리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침울함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내 말을 들어줘서 다행이었다. 아이가 부디 남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다녀올게…….”

“그래.”

아이를 한번 꼭 안아주었다. 품에 안긴 울리세에게선 어린아이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났다.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는 아이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아이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학원으로 뛰어갔다. 힘찬 발걸음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휴.”

“말을 잘하시더군요.”

안심의 한숨을 내뱉자 집사님이 그제야 다가왔다. 그는 평소와 같은 차가운 얼굴이었다.

“칭찬 고마워요.”

“하지만 결국 그건 자기만족 아닙니까? 나는 이만큼 했으니 괜찮아, 라는.”

비꼬는 건가? 순간 화가 나 집사님을 쏘아보았으나 그 얼굴은 북극의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해 금세 식어버렸다. 시비가 아니라면 화낼 필요도 없으니까.

“자기만족이라도 괜찮아요. 계속 열등감에 치여 사는 것보단 훨씬 건강한 삶일 테니까요.”

“그렇군요.”

“집사님은 그런 생각 하신 적 없어요?”

“……글쎄요. 자, 돌아가시죠. 도련님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집사님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런 경험이 없었던 걸까? 하긴. 집사님은 뭐든지 잘했다. 당장 내 상처만 해도 어떻게 된 건지 금방 배워 완벽히 치료해 줬으니까. 열등감과 질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지도.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집사님이 마차 문을 열어주자 고맙다 인사한 후 들어갔다.

[왕자의 일기가 해금되었습니다!]

근데 일기는 왜 계속 해금되는 거야?

일기를 보고 싶었으나 수첩을 들고 온 게 아니라서 당장 볼 수가 없었다. 앞으론 수첩을 들고 다녀야 할까? 하지만 들고 다니다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았다. 수첩의 크기가 조그마해 떨어뜨린다 해도 눈치를 못 챌 테니까.

게다가 일기장은 굉장히 사적인 물건이다. 남들의 눈에 띈다 생각하면 좀 그랬다. 애초에 내가 봐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마차는 부드럽게 집으로 향했다. 신기한 점은 다른 마부가 몰았을 때는 이렇게 부드럽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집사님이 운전하니 흔들림 하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집사님이 손수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손수 시중을 들었는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려섰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한 번도 이렇게 살아보질 않았으니 잡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고 보니 요셉 님,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사님이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삐걱하며 목각 인형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더니 작게 피식 웃었다.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작은 웃음이었다. 그 모습에 긴장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필요 이상으로 겁먹은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걸 너무 티 낸 것 같아서.

“왜, 왜 웃어요!”

“아니, 제가 뭐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왜 생쥐 새끼처럼 얼어 있어요.”

뭐, 뭣……. 충격이었다. 내가 평소 놀라는 나를 쥐로 비유하긴 했지만 남의 입으로 들은 건 처음이었다.

집사님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는데 그제야 조금 사람 같았다. 물론 집사님은 사람이겠지만 평소 그는 너무 차갑고 딱딱했다. 그야말로 잘생긴 조각상 같았다.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

요즘 들어 집사님의 감정 표현이 간간이 보여 조금 기뻤다. 피그말리온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 생쥐 새끼가 뭐예요!”

“무례했군요. 사과드립니다.”

그는 웃었던 것이 허상인 것처럼 바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연기처럼 사라진 표정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언젠가 집사님이 감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은 날이 오면 좋겠다. 저 얼굴로 활짝 웃는다거나, 볼을 붉히면 복숭아같이 정말 예쁠 것 같은데.

순간 우는 얼굴조차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 볼을 쳤다. 찰싹찰싹. 김요셉, 정신 차려.

“……왜 갑자기 자해하십니까?”

“아뇨. 아니에요, 현타가 좀 와서.”

“현…… 타?”

“그런 게 있어요.”

나는 변태였던 걸까. 사람이 우는 걸 생각하고 예쁠 것 같다니. 명백히 평범함에서 벗어났다. 아냐, 누군가는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난 아니었단 말이야! 파렴치한 내면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웠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 집사님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큼큼.”

“아, 죄송해요.”

집사님이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울리세의 일정을 적을 때 쓰는 그 수첩이다. 진지하게 말하기에 뭔가 심각한 줄 알았는데 울리세의 일정 문제였던 모양이다. 별것도 아닌 것에 지레 겁먹은 셈이다. 으, 부끄러워.

그는 내가 수치스러워 하든 말든 수첩을 팔락팔락 넘기더니 닫았다.

“여기서 말을 나눌 만한 주제가 아닌 것 같군요.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죠.”

생각해 보니 이곳은 현관 앞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 * *

식당에서 집사님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을까, 그가 카트를 끌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저 커다란 것을 끌고 오는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정말이지 몇 번을 보아도 신기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니에요.”

내 앞에 놓인 찻잔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내가 조금 더 차에 조예가 깊었다면 무슨 차였는지 알 수 있을까? 애초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차는 이곳에 와서 처음 마셔보았다. 커피라면 자주 들이켜 봤지만 그건 맛보단 살기 위해서가 더 큰 이유였다. 맛보단 양. 카페인 만세. 미대생이란 그런 슬픈 생명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앞으로 도련님을 어떻게 키울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울리세는 잘 자라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나는 울리세가 원하는 것을 지원해 줄 생각이다. 이곳에는 의무교육이 없는 것 같으니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글 같은 것은 필수로 배우는 것이 좋겠지만 아이는 글은 읽을 줄 아는 것 같았다.

어디서 배운 걸까? 내가 왔을 때 본 모습으론 누군가 가르쳐 줄 환경이 아니었는데. 홀로 배웠을까?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진지하게 공부를 권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홀로 글을 깨우칠 정도라면 무엇을 배워도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할 건데요?”

“하아…….”

집사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분명 나 보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평소에 행동을 잘 숨겼으니까. 정말 너무하네.

“요셉 님은 후견인이지요. 후견이라면 영광의 관을 도련님에게 씌워주고 싶지 않으십니까?”

영광의 관. 왕관을 말하는 거겠지. 확실히 후보자를 후견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런 목적이 있을 테다. 하지만 난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걸 노리고 이 세계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사실 나는 권력에 대해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있으면 좋다곤 하지만 모든 매체의 권력자들은 대체로 피폐한 삶을 살았다. 심지어 현대에서 거의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진 재벌들마저도 그랬다.

권력자의 삶이 정말 행복할까? 물론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그걸 원치 않는다면 평범하게 살길 바랐다. 물론 아이가 원한다면 어떻게든 지원해 줄 생각이지만 말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관을 쓸 수 있는 건 가장 뛰어난 후보자. 그렇다면 검술뿐만이 아니라…….”

“울리세가 왕위에 오르고 싶다고 했나요?”

집사님은 언제 입을 열었냐는 듯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내가 혹시나 아이에게서 듣지 못한 것인가 싶었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아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 집사님은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 그는 울리세를 싫어하는 게 맞는 걸까? 둘의 관계가 궁금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캐물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저 단순하게 싫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어 보였다.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아닌가? 아무튼 음, 저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듯한 눈은 어쩐지 관찰의 빛을 띠고 있었다. 내 말에 속뜻이 있을지 판단하는 걸까. 하지만 숨긴 의도 같은 건 없다. 아이가 원하는 걸 하고 살아간다, 내 진심이었다.

“억지로 시키면 될 것도 안 되게 마련이에요. 혹시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나요?”

“……귀족들이라면 어느 정도 교양은 배우긴 합니다만, 도련님은 따지고 보자면 귀족은 아니라서.”

“네?”

울리세가 귀족이 아니라고? 그럼 계승권은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이 세계의 법은 정말 이상하다. 현실과 흡사하다가도 이렇게 종종 동떨어진 느낌을 들게 했다.

“도련님은 현 폐하의 자식은 맞습니다만, 이 나라에서 후보자는 모두 폐하가 아닌 쪽의 핏줄로 취급됩니다. 물론 직계인 것은 맞으니 계승권은 가지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모친은 평민이었지요. 브렌다 후보자를 기억하십니까?”

“네. 분홍색 머리카락의…….”

“그분의 어머니는 현 샬라메 공작의 여동생입니다. 그러니 공작가의 귀공녀로 취급되는 거지요. 물론 귀족가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공녀도 그저 평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후보자를 내칠 귀족가는 없다고 보면 되지요.”

정말 특이하고 복잡한 계승법이었다. 그냥 왕 자식이면 왕족으로 취급해 주지 이게 뭐람. 그렇다면 아이가 필수로 배워야 하는 교양 같은 건 없는 거구나. 교양이란 게 배우면 좋지만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뭐……. 울리세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괜찮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집사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말할 정도면 내 결정에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그의 눈은 그 어떠한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분노도, 실망도 없었다.

그는 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의 의도는 뭘까?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집사님의 용건은 이것이 끝인 걸까. 하지만 그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가 다른 얘기를 꺼내길 기다리며 스콘을 한 개 먹었다.

스콘에는 블루베리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스콘의 반을 잘라 잼을 발라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역시나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맛있었다.

“집사님, 이거 맛있어요.”

“……많으니까 많이 드시죠.”

생각해 보면 이 큰 집을 집사님 혼자 관리하는 건 참 대단했다. 심지어 이렇게 매끼 매시간마다 간식이며 밥까지 해주다니. 정말이지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나도 나중에 해드려야지. 하지만 내 평범한 실력으로는 집사님을 실망시키기만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집안일 말인데…… 정말 혼자 해도 괜찮아요? 도와드릴 수 있는데.”

“제 일입니다.”

헉, 그러고 보니 집사님에게 한 번도 돈을 지급하지 않은 것 같다. 설마 집사님은 지금까지 무급 봉사를 한 걸까? 아, 안 되는데! 나는 당황해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까지 무료 봉사하신 건 아니죠?”

“네?”

“아니, 제가 돈을 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이 큰 집을 관리하면서……. 혹시 알아서 가져가고 계신 건가요? 그럼 다행인데.”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들이켜곤 말했다. 그 모습에서마저도 기품이 느껴져 입에서 침이 흐를 뻔했다.

“제 봉급은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래서 받는다는 거야, 아니란 거야? 내가 계속 걱정스러움에 말을 끝내지 않자 그는 짜증이 난 건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걱정해 줘도 이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현대에서 을로 살아왔던 나로선 무급 봉사란 죄악에 가까웠다. 뭣보다 나는 형편없는 갑이 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다시 한번 딱 잘라 대답했다. ……그래. 사실 집사님처럼 철두철미하고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무급 봉사를 할 것 같지는 않다. 저렇게 칼같이 말할 정도면 무언가 받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 * *

울리세는 다행히 학원에 잘 적응하는 듯했다. 그 바탕엔 확실히 내 덕도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비싼 옷을 못 알아볼 테지만, 어른들은 아니니까. 일부러 신경 써서 입은 보람이 있었다. 보호자의 말끔한 모습 덕분에 울리세를 거지 취급하며 따돌리는 아이는 없는 듯했다.

“오늘 학원은 어땠어?”

“괜찮았어…….”

아이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나는 크게 안심했다. 혼자 학원에 가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기특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다. 본인은 괜찮다곤 했지만 내재되어 있는 공포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울리세는 정말 용기 있는 아이였다.

“친구는 생겼어?”

“……아니.”

하지만 역시 친구가 없는 것은 좀 걱정이었다. 교우관계는 소중하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집단생활을 편히 하려면 친구가 필요한 법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집단생활을 당연시하니까.

물론 울리세가 진정으로 친한 친구가 생겼으면 했다. 친한 친구가 생긴다면 인생에 또 다른 즐거움을 얻게 되니까. 동시에 필요에 의한 친구도 있었으면 했다. 밥 같이 먹는 친구, 그날 과제를 알려주는 친구, 그런 친구들 말이다.

……이건 너무 찌든 생각이겠지. 하지만 그런 친구는 상부상조하며 살면 인생이 편하다. 뭐…… 아직 필요에 의한 친구를 사귀기엔 어리니까 넘어가자.

나는 울리세에게 교류할 또래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친한 아이가 생기면 좋겠네.”

“……응.”

아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했다. 부모의 선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조치는 했으니까. 저 아이랑 놀지 마라. 이런 소리는 나오지 않겠지. 그럼 자연스럽게 울리세에겐 친구가 생길 거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걸.

말을 좀 느릿하게 하지만 누군가는 개성으로 이해해 줄 거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 * *

시간은 온유하게 지나갔다. 물리적으로 다치는 일도,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도 없었다. 아, 아이의 성장한 스테이터스 창이 달의 마지막 날에 떴을 때는 좀 피곤하긴 했다. 그러나 다행히 내 정신은 버텨냈다. 나도 그렇게까지 나약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이때를 위한 것인 듯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고 나뭇잎이 색색으로 물들더니 앙상하게 변했다. 점점 날씨는 추워지고 옷을 더욱 두껍게 입은 어느 날,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하늘의 노을이 빨갛게 지는 시간이라 하얀 설원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와…….”

서울은 눈이 잘 내리지 않았다. 내려도 아주 조금 내리고 마는 수준이라 이렇게 쌓인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창에 달라붙듯 가까이 가 눈을 구경했다. 솜이불이 덮이듯 쌓이는 눈은 정말 포근해 보였다. 치울 생각을 하면 조금 피곤할 테지만, 숲속까진 내가 손댈 필요가 없을 거다.

“눈을 처음 보십니까?”

“에이, 설마요.”

“그럼 왜 이렇게……?”

다가온 집사님이 머그잔을 내밀었다. 받아 들어 냄새를 맡아보니 달콤한 코코아 향기가 맡아졌다. 따끈한 코코아를 마시며 하는 눈 구경이라니, 최고였다. 심지어 코코아에는 마시멜로도 담겨 있었다.

“제가 사는 곳은 눈이 이렇게 안 내려서요.”

“더운 나라에 사셨습니까?”

“음. 아뇨, 그건 아니지만……. 제가 사는 곳엔 잘 안 왔어요. 복무하는 쪽도 잘 안 오고. 지금 생각하면 왜인지 모르겠네.”

집사님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구경했다. 아름다움이란 오랫동안 몇 번이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문득 사사로운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선 환경오염으로 눈이 지저분하다고 했는데 여기는 깨끗할까.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며 한참을 구경했을까. 다리가 아팠다. 아무리 좋아도 너무 들떴나 싶어 머쓱했다.

“앉으시죠.”

“아…….”

집사님은 내가 아플 거란 걸 예상했던 걸까? 하긴, 한참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플 것은 당연한 이치이긴 했다. 집사님이 어느새 푹신한 의자를 가져왔다. 정말이지 세심한 사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자 또 어디선가 가져온 화려한 담요를 내 무릎에 덮어주었다. 이렇게 보살핌을 받다 결국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어떡하지 싶다.

“모르고스 왕국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눈이 너무 많이 오면 기차가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 지방에 고루고루 눈이 오지요. 더 오는 곳은 있어도 덜 오는 곳은 없습니다.”

“와, 그 정도로 많이 와요? 고생 많겠다.”

서울 토박이인 나는 눈 때문에 고생했던 적은 그다지 없었다. 배치되었던 부대도 눈이 많이 안 오는 지역이었다. 아니, 오긴 하는데 복무하던 시기에는 거의 안 왔다.

여하튼 내 인생에 눈은 딱히 인연이 없었다. 스키장 같은 것도 잘 안 갔으니까. 나는 나가는 것보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산으로 휴가를 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렇구나……. 그래도 다음에는 산으로 가보고 싶네요.”

눈이 덮인 산은 끝내주게 아름답겠지. 사진으로는 꽤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현실로 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동시에 내 체력이 과연 설산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가 다 빨리는 기분이었다. 산에 오르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것이 자명했다.

“그렇게 하지요. 아, 하지만…….”

“하지만?”

집사님이 수첩을 꺼내 들었다. 무언가 일정이라도 있는 걸까. 그가 수첩을 확인하고 말하려 입을 열 때였다.

타다다닥.

작은 발걸음 소리가 활기차게 들려왔다. 이 집에서 그런 발걸음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눈!”

추위에 발그레해진 통통한 볼살. 라일락을 닮은 사랑스러운 연보라색의 머리카락. 이제는 보기 좋게 통통해졌지만, 여전히 작은 울리세였다. 아이는 평소 인기척 없이 다녔는데 오늘은 눈을 보고 들뜬 모양이었다.

“울리세, 이리 와.”

“응.”

고개를 끄덕인 울리세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나는 덮고 있던 담요를 울리세에게 감싸주었다. 반쯤 남은 코코아를 건네주자 아이는 기쁜 기색을 띠곤 홀짝거리며 마셨다. 폭신한 담요를 두른 아이는 요정 같기도 했고 눈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귀여웠다.

“눈이 오는 게 좋아?”

“으음……. 눈이 좋은 건, 아닌데…….”

눈이 좋은 게 아니라고? 그런 것치고는 아이는 정말 기뻐 보였다. 숨기지 못하는 기쁨과 설렘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면, 눈이 내리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는 걸까?

“그럼 왜 그렇게 눈을 반겼어?”

“응……. 학원에서, 스케이팅.”

스케이팅? 내가 의아해하자 옆에 있던 집사님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마을에 있는 호수가 업니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죠. 눈이 올 정도면 호숫가도 꽁꽁 어니까 내일쯤이면 타는 사람들이 있겠군요.”

“울리세, 스케이트 타고 싶어?”

“응. 학원 애들이, 말했어.”

스케이트라. 아주 어릴 적에 누나와 함께 탔던 기억이 났다. 큰 빙판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사람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패기가 넘쳤기에 금방 날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처음이었는데도 무척 잘 타서 누나가 내 진로를 스케이트 쪽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관심이 없었기에 금방 사라진 진로였다.

어릴 적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내일 타러 갈까?”

“……진짜?”

“응. 형 스케이트 잘 타.”

“헤헤.”

울리세가 기쁜 듯 웃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싶다고 얘기하면 될 텐데. 아직 아이는 눈치를 보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뒤에서 아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포근한 솜털 같은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아까 집사님이랑 얘기했는데 산 쪽으로도 나중에 놀러 가자.”

“산…….”

울리세는 벌써 기대가 되는지 가라앉았던 얼굴이 다시 상기되었다. 울리세가 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귀여워 미칠 것 같다. 나도 덩달아 산으로 가는 여행이 기대되었다.

울리세와 어떤 것을 하고 놀까. 바비큐도 구워 주고 밤하늘도 봐야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고기 하나는 잘 굽는다.

“드시죠.”

“아, 고마워요.”

집사님이 코코아를 한 잔 더 가져다주었다. 울리세 또한 새로운 잔을 받았다. 눈이 내리는 추운 밖과 다르게 집 안은 포근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평온했다.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설렘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냈다.

* * *

“으아악!!”

김요셉은 멍청하다.

“으어어억.”

아니다, 깁요셉은 멍청하지 않다. 그냥 뇌가 텅텅 비었다.

“요셉 님!”

꽁꽁 언 빙판에서 나는 갓 태어난 초식동물처럼 바들거렸다. 아니, 그것보다 못했다. 동물들은 그나마 금방 적응해서 뛰어다니지만 난 한참을 후들후들했다. 어릴 적의 나는 도대체 어떻게 스케이트를 탔던 걸까. 나는 내 다리로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집사님이 허둥거리는 나를 잡아주었다. 나는 그 손을 동아줄 잡듯 쥐었다.

“으어어……. 집사님, 집사님…….”

한심하다는 집사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집사님의 손이 간절했다.

“아니, 이러실 거면…… 왜 오자고 하신 겁니까?”

“저도, 저도 제가 이럴 줄 몰랐어요…….”

거의 울듯이 말하자 그가 잠시 한숨을 쉬고 나를 단단히 부여잡아 주었다. 그 행동에 큰 감사함을 느꼈다. 나로선 이 빙판 위에 있는 지금의 상황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과 똑같았다. 누군가는 엄살을 부린다고 하겠지만 나에겐 정말 중대했다.

“요셉…… 괜찮아?”

혼미한 정신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나와는 달리 안정감 있게 서 있는 울리세가 보였다. 울리세가 얼마나 날 한심하게 볼까. 잘 탄다고 했는데 이렇게 못난 모습이라니. 겁에 질려 창백해졌을 게 분명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울리세는 놀고 와. 저기 애들도 있는 것 같은데.”

건너편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울리세를 바래다주며 보았던 익숙한 아이도 있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기회가 될지 몰랐다. 울리세는 머뭇거리며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에게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도련님, 다녀오시죠. 요셉 님은 제가 살피겠습니다.”

“……응.”

울리세는 천천히 멀어져 갔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길래 힘껏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울리세는 몇 번이고 내 얼굴을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그제야 흐물거리는 다리로 집사님에게 몸을 의지했다.

“흐어어…….”

“쯧.”

집사님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기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황. 주저앉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분명 얼음에 익숙해져 다리에 힘을 준다면 쑥쑥 나아갈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이미 겁을 먹어버려 도무지 나아질 수가 없었다.

공포란 사람을 지배하고, 난 나약한 인간이다. 고작 스케이트 가지고 뭘 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무서운 걸 어떻게 하겠는가! 단추를 보고 공포에 질리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면 난 양반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음부턴 오지 말아야겠군요.”

“으…… 으으. 울리세가 원하면 와야죠.”

“이런 모습으로?”

집사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가 오고 싶다면 와야지. 물론 난 다신 이 얼음 위로 발을 들이지 않을 거다. 아이를 밖에서 지켜만 보는 것도 괜찮겠지.

“전 저 밖에서 기다리면 되죠…….”

“……뭐, 그래도 좋다면야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집사님은 부드럽게 나를 이끌었다. 오늘 얼음판 위에 올라오고 나서 처음 제대로 걷는 거였다. 거의 기어가는 것과 같았던 내 속도와 달리 집사님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릴 정도로 움직였다.

조금은 즐거운 것도 같았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잡고 있어 안심되기도 했다. 집사님이 계속 이끌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좀 너무한 생각인가? 그도 자신의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으니까. 나 같은 한심한 사람을 챙기는 것보단 나으리라. 지금이야 내가 빙판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니 어쩔 수가 없지만 말이다.

“살았다…….”

드디어 땅을 밟았다. 방금까지 조금 즐겁다고 생각한 건 취소다. 역시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 이 안정감 있는 바닥이 최고다. 과거 조상이 되는 동물이 바다에서 땅으로 진출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곧바로 신발을 갈아 신었다. 날카로운 스케이트화는 손이 베일 만큼 날이 서 있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신고 다닌 걸까. 신었다는 것만으로 내 용기는 증명된 것이 아닐까.

“조심하시죠. 다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자, 이것 봐요.”

내 발에는 푹신한 털 부츠가 완벽하게 신겨져 있었다. 집사님이 가져온 것이었는데 정말이지 따뜻했다. 손 또한 티끌 하나 다치지 않았다.

집사님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밖에서 바라보니 많은 사람이 스케이팅을 즐겼다. 분위기 좋게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호수 밖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긴 다 큰 성인이 아직 성장기인 아이의 체력을 따라가기엔 무리가 있겠지.

“드시죠.”

“앗, 감사해요.”

집사님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컵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따끈한 커피가 담겨 있었다. 어디서 가져온 걸까? 주위를 둘러보니 한쪽에서 커피를 팔고 있는 상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컵을 판매하는 상인 또한 있었다.

음, 어딜 가나 상부상조하는 상인들의 모습은 똑같네. 보기 좋았다.

“집사님은요?”

“저는 괜찮습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갔는지 커피는 달콤했다. 개인적으론 단것을 좋아했기에 내 입맛에는 딱이었다. 홀짝거리며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 사이로 울리세가 보였다. 울리세는 아이들의 무리 틈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아이들은…… 잔인하죠.”

“네?”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울리세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울리세 주변에 있는 아까 보았던 검술 학원의 아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어느 한 남자아이가 심술궂은 얼굴을 한 채로 울리세를 밀어 넘어뜨렸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피가 넘쳐 바닥에 흘렀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바로 울리세에게 달려가려는데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했던 것이 스르륵 풀렸다.

“자신보다 약하고 못 한 것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괴롭힙니다.”

“아니에요.”

나는 안심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넘어진 울리세를 어떤 아이가 일으켜 세워줬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는 밀어 넘어뜨린 아이에게 화를 냈다.

집사님이 말한 잔인한 아이들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순수한 잔인함에 상처를 입었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이 모두가 잔인한 건 아니었다.

“집사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에요.”

“…….”

심술궂은 얼굴을 한 아이는 새침하게 자신의 친구들과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을 유독 괴롭히는 듯했다. 저런 폭력성은 어릴 때 제대로 교육해야 할 텐데……. 울리세는 남은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울리세의 표정은 밝았다.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울리세는 그 아이들과 곧 친구가 된 듯 삼삼오오 모여 스케이트를 탔다. 아이다운 즐거움이 얼굴에 드러난 듯해 기쁘기 그지없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돌아보자 집사님은 어쩐지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거론하기도 전, 그는 무뚝뚝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앗.”

“커피를 흘리셨군요.”

집사님은 어느새 나에게 다가와 손수건으로 옷에 흘린 커피를 닦아주었다. 가끔 그의 앞에서 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나하나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혹시 부자들은 모두 이런 대접을 받고 자랄까? 나는 자립심을 중요시하는 가족들과 자라 모르겠다. 아마 우리 가족들은 부자였어도 다 큰 어른을 이런 식으로 돌봐주지는 않았을 거다.

“제가 스케이트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네?”

“배우시면 괜찮을 겁니다.”

“아뇨. 아뇨, 아뇨. 전 여기에 있고 싶은데…….”

하지만 집사님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내가 한참 전에 벗어놓은 스케이트화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단단한 손으로 내 발목을 꽉 잡았다. 그 힘에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집사님!”

“도련님이 아까 요셉 님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하던 것 같던데…….”

그가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여 나는 바동거림을 멈췄다.

그랬다. 울리세는 아까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봤다. 하지만 그 눈빛엔 약간의 실망 또한 담겨 있었다. 내가 잘 탄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니 함께 스케이트를 타는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집사님이 정중히 내 신발을 벗겨 갈아 신겼다. 순식간에 나는 안정감 있는 땅에서 추방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기분이 갑자기 절실하게 이해되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차갑디차가운 빙판이었다. 사람들은 즐겁게 웃고 있었지만 굳은 내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

집사님은 아까처럼 부드럽게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등 뒤의 온기에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운동을 정말 못한다는 거였다.

“으…… 으으.”

집사님은 정말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었다. 몸의 균형을 잡는 법부터 나아가는 법까지.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도와주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얼음에서 스스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윽!”

심지어 넘어지기까지 했다! 꽤 크게 넘어졌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로 넘어져 엉덩이만 아프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아픔까지 겪어버려 아까보다 더 꽁꽁 굳어버렸다. 내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자니 지나가는 모르는 어린아이가 동정의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어른으로서 면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요셉 님은 확실히 몸 쓰는 것에 재능이 없군요. 사격은 어떻게 잘하시는 거죠?”

“……으.”

결국 집사님은 나를 반쯤 안듯이 부축했다.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잡았다. 나는 집사님의 몸을 바들거리며 잡았다. 그것이 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한 손짓이었다. 하지만 그 손을 집사님이 떼어놓았다.

배신감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자 집사님은 작게 한숨을 쉬고 내 손을 자신의 허리로 옮겨 감을 수 있게 해주었다.

“자, 이제 바로 서보세요.”

무작정 매달리는 것보다 지금 이 자세가 더 안정적이긴 했다. 아까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면 지금은 허리를 곧게 펼 수 있었다. 한층 안정적인 자세로 서자 집사님은 내 허리를 잡고 천천히 나아갔다.

“요셉 님처럼 이렇게 못 타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저도 저처럼 못 타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침울하게 대답하자 작은 울림이 느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그 울림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큭.”

집사님이 웃고 있었다. 그것도 소리까지 내며!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충분히 들릴 정도의 소리까지 내며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놀라 버리고 말았다.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미남이었다. 경국지색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그런 그가 웃으니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집사님에게는 감탄의 눈길이, 나에게는 의아한 눈길이 쏟아졌다.

조금 기분이 처졌다. 그도 그럴 듯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셉 님?”

“아…….”

“갑자기 기분이 왜 나빠지셨습니까?”

내가 침울해지자 집사님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물었다. 즐거운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진 후였다. 내가 어두워지지 않았다면 그 웃음은 계속 그의 얼굴에 머물렀을 텐데. 바보 같았다고 마음속으로 자책했다.

“그냥…… 죄송해서요.”

“무엇이 말입니까? 요셉 님이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지만 그걸 사과하실 필요는…….”

“아뇨. 그게 아니라.”

은근슬쩍 나를 까네? 하지만 정말로 못하는 것이 맞았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저흴 연인으로 보는 것 같은데…….”

“……그런데요?”

“제가 너무 비교돼서……. 어휴, 죄송해요. 오해받게 만들고.”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옆구리를 서로 안고 있는 모습은 오해를 사기 쉬웠다. 아마 날 향한 의아함은 너처럼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잘생긴 사람과? 하는 뜻이었을 거다. 나는 길거리를 다니면 누군가 알아채기도 힘들 만큼 평범하게 생겼다. 말 그대로 군중 속에 녹아들기에 딱 좋은 모습이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고 딱히 열등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막상 그런 눈빛을 받으니 미안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에게 나 같은 사람이 엮이는 건 좀…… 그랬다. 나는 말로는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었나 보다.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이 연인으로 보는 것 정도는.”

“네?”

순간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상상 속의 나는 집사님과 입을 맞추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그 민망하고 천인공노한 상상이 끝까지 가기도 전, 집사님이 나를 이끌었다.

그의 리드로 얼음판 위를 나아가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빙판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얼굴을 슬그머니 간지럽혔다.

“어차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고 대화 또한 할 일이 없을 텐데 요셉 님이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군요.”

“……그것도 그러네요.”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역시 집사님과의 연인 관계는 상상만으로도 죄악감이 들었다. 나는 집사님의 얼굴은 굉장히 좋아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 마음은 팬심에 가까웠다. 감히 내가 집사님과? 하는 기분. 그렇기에 생각만 해도 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얼굴은 완벽했다. 그야말로 신이 직접 곱게 빚은 듯한 외모. 그가 미소를 지으면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의 얼굴만큼은 욕할 수 없었다. 그 얼굴이 바로 면죄부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과 있어야 한다. 나 같은 평범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집사님의 말이 맞았기에 나는 열심히 무시했다. 신경을 쓰기에는 얼음 위에서 익숙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했고.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호숫가를 돌아다녔다. 아니, 내가 끌려다녔다고 해야 하겠지.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현실감을 상실할 정도로 괴상한 게임 시스템에 익숙해졌다. 그것에 비하면 사람의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사님,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이거 알려주신다고 한 거요. 결국…… 못 배우긴 했지만 이렇게 다니니까 기분이 좋네요.”

살랑거리는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추운 겨울이었기에 찬 바람이었지만 나를 반쯤 껴안은 집사님의 온기에 춥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 불현듯 이 관계가 연인이 아니라면 마치 친구 같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자연스레 별생각 없이 입으로 내뱉었다.

“우리 친구 같네요.”

“네?”

매끄럽게 나아가던 몸이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집사님 때문이었다. 그가 크게 놀라며 몸을 파드득 떨었기 때문이다. 거의 안마기 수준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질겁하며 집사님에게 매달렸다.

“으악! 집사님! 넘어질 뻔했잖아요!”

“죄송합니다.”

평소에 빈틈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라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새로웠다. 한 번에 나를 부축할 사람이 허둥대며 몇 번이나 헛손질했다. 평상시와 다른 귀여운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놀랐어요?”

“……폐를 끼쳤군요.”

당황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그는 금방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순간 나는 악동 같은 장난스러운 기분이 들어 일부러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우린 친구 아니에요?”

내 말을 듣자마자 집사님은 또 발을 삐끗했다. 아까와 똑같이 넘어질 뻔하지는 않았으나 명백히 친구라는 단어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귀엽게 반응하니 놀리고 싶은 마음이 퐁퐁 솟아났다. 실수 연발인 집사님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제…… 가?”

“네. 전 우리가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최대한 불쌍한 척을 했다. 허벅지를 몰래 꼬집으며 눈물을 유도했다. 두꺼운 옷이었으나 필사의 노력 끝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짜낼 수 있었다. 내 안에 있는 연기의 재능을 힘껏 끌어내 집사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친구 아니에요?”

“……윽.”

조금 상처다. 집사님은 얼굴을 찡그리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굴을 돌려 버렸다. 물론 놀리는 거였지만 이렇게 싫어할 필요는 없잖아. 날카로운 반응에 상처받아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집사님은 고개를 돌린 것과는 별개로 스케이트 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순식간에 불편한 시간이 되었다. 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침울해진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나이를 먹고 우울한 감정을 통제 못 하게 된 것은 오랜만이었다.

“집사님…… 이제 저 쉴래요.”

“……아.”

혼자 땅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어 그에게 부탁하니 무언가 기분이 처참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무언가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 돈 빼고 내가 내 손으로 무언가 이룬 게 있었나? 심지어 돈마저도 치트로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아이의 성장에 일조했다 해도 그것은 아이가 힘을 낸 것, 내가 이룬 게 아니었다. 그나마 아이를 보호한 것 정도가 다인데 그것도 결국 크게 다쳐 집사님이 나를 치료하고 간병해 주었다.

이 정도면 내가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똥 싸는 기계, 아니, 난 이제 화장실도 안 가잖아. 그럼 난 뭐지.

“요셉 님.”

“아.”

벌써 땅이었다. 집사님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따뜻했던 품에서 벗어나려니 조금 아쉬웠다. 밸도 없는 놈 같으니. 속으로 수도 없이 나를 욕하고 있는 와중, 집사님의 손길이 다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요셉 님, 그…… 저희는…….”

“요셉!”

집사님이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울리세가 활기차게 뛰어왔다. 추운 공기에서 신나게 놀아 볼이 붉게 터 있었다. 살짝 우울했는데 울리세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아이의 볼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말했다.

“잘 놀고 왔어?”

“응. 나, 친구, 생겼어.”

아이는 평소보다 더 상기된 얼굴로 종알거렸다. 즐거워서일까, 아이는 평소보다 더 더듬거렸다. 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를 세게 껴안았다. 울리세는 거부하지 않고 나를 마주 껴안았다. 아이의 손아귀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힘이 가득했다.

“축하해! 친구는 어디에 있어? 형이 맛있는 거 사 줘야지.”

“응……. 저기.”

울리세가 가리킨 곳에는 울리세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병아리 같기도 했고 아기 펭귄 같기도 했다. 나는 주책맞단 걸 알면서도 입꼬리를 간수할 수 없었다. 헤실헤실한 얼굴이 부디 위험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형이 뭐라도 사 줄게. 친구들 불러와.”

“……괜찮아?”

“형이 말했잖아. 돈 많다고. 자, 어서 데려와.”

“응!”

울리세는 신나게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흐뭇하게 바라보며 울리세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이들은 생기 넘치게 왁자지껄 얘기를 나누며 내 쪽으로 달려왔고, 먹고 싶은 것을 종알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이들에게 한 아름 사 주었다.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간식을 먹는 울리세의 모습이란 감격 그 자체였다. 얼마 전만 해도 친구가 없다고 말했던 아이가 눈앞에 선명하건만……. 이렇게 또 아이의 성장을 확인하니 행복했다.

“형 쉬고 있을 테니까 놀고 와.”

“응.”

마지막으로 코코아를 사 주자 아이들은 기쁜 얼굴로 홀짝거렸다. 그러곤 또다시 스케이트를 타러 사라졌다. 분명 한참을 놀았을 텐데 지치지도 않는 체력이 부러웠다.

나는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구경했다. 얼마나 구경했을까, 내 머리 위로 불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요셉 님.”

“아.”

집사님이었다. 아까의 우울함은 아이들 덕분에 가셨지만 불편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낼 순 없다. 앞으로도 같이 지내야 하는 사이였으니 웃으면서 지내는 편이 좋을 터.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왜 그러세요, 집사님?”

“……아까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할 것이 없이 가만히 웃기만 했다. 어색했다. 아무리 웃는 낯으로 대하려고 해도 이런 숨 막히는 공기를 집사님이 모를 리가 없다.

입을 몇 번이나 우물거리던 집사님은 얼굴을 단단히 굳혔다. 그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마치 마지막 보스를 잡으러 가는 용사의 얼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까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네?”

“제가…… 오해를 하게 한 것 같아서.”

작게 한숨을 쉬며 목덜미를 주무르는 그는 급격하게 초췌해 보였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니.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 어쩐지 안도감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저는, 친구가…… 없습니다.”

네? 다시 한번 되물을 뻔한 것을 다행히 멈출 수 있었다. 집사님이 친구가 없다고? ……그러고 보면 집사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거나 그가 누굴 만나러 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야 이곳에 연고가 없다지만 집사님은 알 법도 한데 말이다.

“그래서……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오해하게 해 죄송합니다.”

그런 거였나. 내 오해였구나. 미안함과 수치스러움이 배꼽부터 올라왔다.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혼자 착각해 땅을 파고 있었다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집사님이 먼저 사과를 하게 하다니……. 사과해야 하는 건 나였다.

“아니에요, 집사님……. 저야말로 오해해서 미안해요.”

모든 것이 오해였다고 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히죽거리며 집사님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친구인 거죠? 그죠?”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런 거로 하죠.”

“와!”

기뻤다. 날카로운 야생 고양이가 가만히 다가와 곁을 내준 그런 상황 같았다. 아주 약간의 우월감과 순수한 기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대뜸 집사님에게 달려들어 껴안았다. 친구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겠지!

“정말 기뻐요!”

“……고작 친구에 이렇게 기뻐하다니.”

그는 작게 웅얼거리듯 말했지만 포옹하느라 달라붙어 있어서 너무나 잘 들렸다. 하지만 기쁜걸. 살면서 친구를 한 번도 사귀지 않은 것도 아닌데 너무나 기뻤다. 나 또한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한 번 더 타시겠습니까?”

“응?”

“스케이트.”

뭘 말하는 건지 몰라 올려다보자 집사님이 작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기분이 더 좋아져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의 허리를 잡고 얼음 위를 춤추듯 돌아다녔다. 고작 친구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이 즐거움을 즐기고 싶었다.

[왕자의 일기가 해금되었습니다!]

온유하길 바랐던 스케이트의 시간은 또다시 난데없는 알림 창에 깨졌다. 도대체 이 일기장은 왜 계속 해금이 되는 거지? 내가 뭘 했다고. 의미 불명이었다. 알림 창에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이겨내고 겨우겨우 즐거웠던 시간을 끝냈다.

사랑스러운 왕자를 위하여

1권

얀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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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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