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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벽(1) (2/21)

2장 벽(1)

아이는 아무 말 없었다. 관리되지 않아 엉망인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은 아무런 감정을 비치지 않았다. 그 인형 같은 모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서류상 아이의 나이는 10살이었다. 그런데 저런 눈이라니. 10살짜리 아이에게서 보이면 안 되는 눈빛이었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어선 안 되었다.

“……큼큼, 후견인님?”

말없이 아이를 보고 있자 집사님이 나를 불렀다. 그나저나 후견인님이라니 거리감이 너무 느껴지는 호칭이다. 얼마나 이 세계에 머무를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식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님을 보며 말했다.

“요셉이라고 불러주세요, 집사님.”

“그럼 요셉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보통은 이름을 가르쳐 주면 자신의 이름도 말하게 마련이다. 한데 집사님은 보통과는 달랐다. 집사님은 아무런 표정 없이 동전 지갑에 가까운 형태의 조그마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딸칵하고 열어 내게 보여주었다.

“……?”

“총 300골드. 이것이 도련님을 돌봐 드릴 수 있는 전 재산입니다.”

“…….”

“도련님의 생활비며 앞으로의 충당을 위해서는…….”

집사님이 무어라 말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랬다. 이 게임은 아동 인권이라곤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비인도적인 게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건강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몸은 일은커녕 당장 집중적으로 돌봐줘야 했다.

“요셉 님?”

“후견인이란…… 미성년자의 몸과 재산을 법적으로 보호하거나 대신할 책임이 있는 성인이죠.”

가방을 뒤적여 신분증과 서류, 그리고 이곳에 오기 위해 일부 꺼냈던 돈을 집사님에게 내밀었다.

“후견인은 피후견인의 안정된 생활과 건강관리를 위한 신상 보호 역할을 해야 하고요.”

“…….”

집사님은 왜인지 몰라도 내가 내민 것들을 받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짙은 푸른색의 눈에는 깊은 경계심과 의문이 서려 있었다.

저 남자는 내가 이 어린아이를 노동의 길로 밀어 넣을 줄 알았나?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아이는 잘 먹고, 잘 쉬고,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그러면 된다. 그것이 아동의 권리다. 내가 직접 일을 하러 가는 한이 있다 해도 그것만큼은 지켰을 거다.

게다가 후견인이 피후견인을 경제적으로 돌보면 돌봤지 저 코딱지만 한 재산을 갈취한다니. 그런 비도덕적인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받으라고 재차 손을 흔들자 집사님은 조심스럽게 서류와 신분증을 가져갔다. 서류를 검토하던 그가 일순간 눈을 크게 떴으나 그 모습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재산을 어느 정도 사용하면 좋을까요? 범위를 정해주셔야 앞으로의 일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만.”

“……네? 당연히 전부죠.”

집사님은 잠시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보듯 응시했다.

“요셉 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고작 아이 하나 돌보겠다고 이 모든 재산을 쓰시겠다니.”

“네? 애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집사님은 한심하다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난 물러나지 않았다.

“혹시 아이에게 빚이나 뭐 그런 금전적인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도 좋아요.”

“……없습니다.”

“그럼 빨리 아이에게 밥이라도 먹이죠. 아니, 병원을 먼저 가야 하나.”

아이는 이 모든 소란에도 꼼짝없이 가만히 있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 또한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애를 썼다. 아이는 다행히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똑바로 보았다.

“미안해. 정신없었지? 자기소개부터 했어야 하는데……. 형 이름은 요셉이야. 성은 김. 요셉이라고 불러줘.”

아이는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아이가 대답하기를 기다리며 다리가 저릴 때까지 쪼그려 앉아 있었다. 피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아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집사를 사랑하지…… 않아?”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물음에 당황스러워하자 집사님이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집사님을 올려다보았다. 집사님의 얼굴은 그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아 생명이 없어 보였다. 아까의 아이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요셉 님.”

집사님의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쪼그려 앉았던 탓인지 조금 비틀거렸다. 뒤로 자빠질 뻔했으나 집사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뻘쭘해하며 빠르게 일어나 똑바로 섰다.

“요구하시는 건 도련님의 식사뿐입니까?”

“일단은요.”

“알겠습니다. 그럼 도련님을 방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집사님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군소리 없이 아이와 함께 응접실을 빠르게 나갔다. 나가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아 마치 신기루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에 말을 잃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뭔가 지친다.”

엄청나게 지치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쳤나? 갑작스럽게 닥쳐온 게임 속 세계는 나를 끊임없이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콕콕 찌르는 그것은 불안감이었다. 정말로 꿈이라면 어서 깨어나 정신과 상담을 예약할 텐데.

이곳에 왜 왔는지에 대한 의문부터, 두고 온 가족들까지 생각나 머리가 복잡했다. 가족들과의 사이가 모두 살가운 것은 아니었으나 나쁘지도 않았다. 주기적으로 연락 또한 주고받았기에 내가 사라지면 누구보다 발로 뛰며 찾아줄 내 가족들이었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내가 이곳에 있는 시간과 정비례할까?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어지러웠다.

“에잇.”

나는 생각을 더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아 있으니 잡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 터. 뭐라도 해야 했다.

응접실을 나서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복도가 나를 반겼다. 어쩐지 쿰쿰한 곰팡내가 나는 것 같았다.

“……일단 집 주변의 나무를 벌목하거나 다른 곳에 옮겨 심어야 하지 않을까.”

햇빛은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이었다. 물론 성인에게도 필요했다. 이렇게 어두운 집은 신체적인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인 건강에도 좋지 않다. 하지만 이곳의 법이 어떤지 아직 모르니 벌목 같은 걸 진행해도 될지 모르겠다. 뭐…… 나중에 집사님과 상의하면 괜찮겠지.

나는 아무도 안내해 주지 않은 집을 돌아다녔다. 무례한 짓인가 싶어 주춤했던 것도 잠시, 어차피 이곳에 머물게 될 텐데 조금 둘러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음.”

집 안은 지저분했다. 쓰레기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먼지가 쌓여 있는 곳이 많았다. 집사님은 뭘 한 거지? 집에 집사님 외의 다른 고용인은 없는 듯싶은데. 창틀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자 손가락이 시커메졌다.

“…….”

어쩐지 슬퍼졌다. 아이, 울리세도 이 집도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방치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어째서 게임 속에 들어오게 된 건지,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이 방치된 집을 깨끗이 만들고 빼빼 마른 아이를 통통하게 살찌워서 건강히 만들어줘야지. 일단은 그것을 목표로 하자. 돈도 있으니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요셉 님.”

“아이고 깜짝이야!!”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 격한 반응에 놀랄 법도 하건만 집사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다니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암살당한 사람들의 기분이 이런 걸까?

“아니, 왜 갑자기 그렇게 아…… 놀라 죽을 뻔했네.”

“집사의 소양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집사라면 기척 없이 다니는 것이 당연하게 된 건가? 아니면…… 이 시대의 상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했다. 놀라는 것에 한자리하다 보니 나는 진정하는 것에도 요령이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좀 잘 놀라는 성격이라.”

“염두에 두겠습니다. 그보다.”

집사님은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뒤 말했다.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잘생긴 남자가 이렇게 행동하니 그림 같았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식당에 가시겠습니까?”

“아, 울리세는요?”

“이미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생각보다 내 산책이 길어졌던 모양이다. 나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집사님은 뒤돌아 안내하기 시작했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 도착한 식당은 크지 않았지만 작지도 않았다. 길쭉한 테이블. 그 테이블 각각의 끝에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 끝과 끝에 앉는다면 분명 대화도 하기 힘드리라.

나는 음식을 들고 주저 없이 아이의 곁에 앉았다. 집사님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무시했다.

“잘 먹겠습니다. 울리세 너도 많이 먹어.”

“…….”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 그 조막만 한 입으로 조금씩 먹었다. 복스럽게 먹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언가 먹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나 또한 음식을 집어 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먹어야 사람은 힘을 내는 법이다.

아이는 얼마 먹지 않았다. 새 모이만큼 먹고 식기를 내려놓기에 걱정스러웠으나 더 먹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입에 맞지 않니?”

“…….”

“도련님은 방에 가서 쉬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오늘 만나서 좋았어. 앞으로 잘 부탁해.”

아이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조금의 침묵 후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아이가 나에게 치고 있는 벽은 참 견고했다. 어떻게 해야 저 벽을 허물수 있을까 고민이었다.

“집사님.”

“네.”

“앞으로 아이가 먹는 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풍족하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스케줄은?”

스케줄이라. 순간 게임이 떠올랐다. 게임 속의 스케줄은 교육, 아르바이트, 휴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저런 상태의 아이에게 무언가 공부를 시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일단은 울리세가 괜찮아질 때까지 쉬어야겠죠.”

“……알겠습니다.”

집사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잘생긴 얼굴은 몇 번을 보아도 감탄이 나왔다. 집사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눈을 빤히 보았다. 그 눈은 어쩐지 끈적했고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아닙니다.”

집사님은 시선을 피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식사가 끝났으니 식당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머물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앞으로 이곳에 얼마나 더 있게 될까? 일단 도저히 꿈같지 않아 게임 속에 들어왔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잘 모르겠다. 게임 속에 들어온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하지만 꿈이라기엔…… 이렇게 생생한 꿈이 또 있을까?

사실 꿈인지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깊게 생각하기도 싫었다. 꿈이라면 언젠가는 깰 거고, 현실이라면…… 글쎄,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이 있을 테니까. 방법이 있다고 믿고 싶다.

어쨌든 이곳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집사님의 뒤를 따랐다. 어두운 복도가 집사님의 짙은 복장에 녹아들어 그가 어둠 자체로 보이는 듯했다. 마치 어둠에 잡아먹힌 듯한 모습은 기분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빨리 이 어두운 집을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

* * *

어두운 집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돈이 있으니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다행이다…….”

역시 판타지 세계에서도 돈이 최고다. 혹시나 했던 벌목법은 없는 듯했다. 아니라면 사유지라 괜찮은 것일까? 울리세가 소유한 토지 면적이 어느 정도지? 이 집이 끝인가?

하여튼 이 어두컴컴한 집에 빛이 좀 들어오면 아이의 건강이 조금 나아지겠지. 현실에서는 방구석에서 잘 나가지 않았지만, 이론적으로 햇볕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공사를 하루라도 빨리 진행해야 했다.

“그럼 하루라도 빨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집사님은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저 기척 없는 발걸음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어떻게 저렇게 다니는지 모르겠다. 무협지 같은 걸 보면 저런 발걸음을 구사하는 사람들은 고수던데. 사실 집사님은 엄청난 강자인 것이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이에게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안녕, 울리세.”

“…….”

아이, 울리세는 오늘도 멍하니 그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이런 상태의 아이에게는 심리 치료 같은 것이 필요할 텐데.

하지만 불행히도 나의 전공은 아동심리가 아니었다. 왜 나는 대학을 미술로 가서 쓸모가 없는가. 아니, 미술 치료 같은 것도 있는데 그쪽으로 진로를 틀 것을 그랬다. 그럼 현실에서도 취업은 진즉 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몰려오는 자괴감에 슬퍼졌지만 이내 떨쳐냈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지.”

아이가 무서워할까 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어제 식당에서의 거리 정도쯤에 떨어져 앉자 다행히 아이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에 이 거리감을 새겨두며 테이블에 주방에서 가져온 쿠키를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젯밤 내 머릿속을 메운 고민이었다.

“이제 집이 좀 밝아질 거야. 청소도 제대로 될 거고. 그동안 불편하지 않았니?”

“…….”

나는 이 방면의 전문가도 아니고 오히려 무언가를 할수록 안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정신 쪽은 본디 예민한 분야니까. 그래서 어제 열심히 고민한 결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말을 거는 것뿐이란 결론을 내렸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스케줄도 네 의사에 따라서 할 거야. 혹시 배우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게 있음 말해줘. 형 돈 많아.”

“…….”

어떻게든 있는 힘껏 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기 위한 내 필사의 노력이었다. 평소에 스트리머로서 아무 말 대잔치를 했던 경력은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스트리밍을 하다 보면 진짜 이상한 어그로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표정 관리는 필수였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웃는 얼굴로 떠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이든 간에 과유불급이다. 너무 많이 대화하면 오히려 꺼릴지도 몰랐다.

“그럼 형은 이만 가볼게. 언제든지 형이 필요하면 찾아오기만 하면 돼. 알겠지?”

“…….”

“그럼 이따가 점심 먹을 때 보자.”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일어나 응접실에서 나왔다. 나오기 전 살짝 뒤돌아보니 아이는 처음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다음에는 다른 음식을 가져와야겠다. 아이의 마른 몸이 신경 쓰였다. 저 나이대 아이들은 젖살이 빠지지 않아 오동통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울리세를 보면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이따금 나를 찔렀다.

애써 생각을 털어내고 복도를 나아갈 즈음 집사님이 나타났다. 또다시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탓에 나는 기겁하며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아이고!!”

“……요셉 님은 참으로 경쾌하시군요.”

저거 날 탓하는 거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눈앞의 집사님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후광이 비치는 것같이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심하게 놀란 탓에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러다간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몰랐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뭐라 하기도 전, 집사님의 사과에 화는 빠르게 식었다. 대체로 사과받으면 금방 화가 풀리는 성격 덕이었다. 친구들이 호구라고 한 적도 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화가 오래 가봤자 본인만 힘들게 마련이다.

“……아니에요, 제가 새가슴인 게 문제죠 뭐.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집사님은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받아서 읽어보자 대략적인 공사 비용이 적혀 있었다. 이곳의 시세도 자세한 과정도 모르는 나는 얼마 읽지 않고 집사님에게 종이를 넘겨주었다.

“저는 잘 모르니까 집사님한테 맡길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은 종이를 갈무리해 다시 품에 넣었다. 별것 아닌 행동임에도 매우 기품 있어 보였다. 마치 한 마리의 백로 같은 고고함이었다. 그는 곧 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은 석탄처럼 새카만 색이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정말 이대로 도련님을 쉬게만 두실 겁니까?”

“네. 당연하죠. 아 참, 혹시 아이 건강 기록은 있나요? 다른 곳이 아픈지 걱정되네요.”

흘깃 봐도 빼빼 마른 아이니 어딘가 아픈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영양 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커서도 고생한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집사님은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눈썹을 찡그려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음에도 여전히 잘생겼지만.

잠시 침묵하던 집사님이 차갑게 말했다.

“그걸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은 덕에 입을 다물었다. 집사님의 날 선 대답은 나를 당혹하게 했다. 아이를 아끼기에 생판 남인 나를 배제한다기보단 정말로 그것을 왜 신경 쓰냐는 말투였다. 그럼 본인이 하겠다는 걸까? 그런 것치고는 아이가 이미 쭉정이처럼 말라비틀어졌는데 무슨 자신감일까?

“아니…….”

“당신의 역할은 부모가 아닙니다.”

집사님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얼굴로 냉혹히 말했다. 그가 미처 숨기지 못한 경멸이 목소리에서 배어났다. 그 목소리는 마치 뱀의 독처럼 차갑게 내게 스며들었다.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 있자 집사님은 말을 더 잇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내가 너무 오지랖을 부렸나.”

집사님은 나보다 아이를 오래 보살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굴러들어 와 아이를 이래라저래라 했으니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밀려오는 수치스러움에 목뒤를 벅벅 긁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 * *

그날의 점심은 침묵의 시간 그 자체였다.

나는 집사님과의 대화가 신경 쓰여 아무 말 하지 못했고, 아이는 아까와 같이 말이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그래도 밥을 먹긴 먹는다는 거였다. 제대로 음식을 섭취한다면 금방 살이 오를 것이 분명하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아이가 밥을 먹으러 오지 않았다.

“……어쩌지.”

그 작달막한 아이가 밥을 굶는다고 생각하자 걱정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어린아이가 끼니를 거르는 것과 성인이 끼니를 거르는 것은 많이 달랐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하게 식당가를 서성였다. 먹음직스럽게 조리된 고기는 볼품없이 식어 기름띠가 생겼다. 배는 고프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일단은 아이가 중요했다.

“가봐야겠다.”

결국 식당을 벗어나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인 점은 이미 이 집의 곳곳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아이의 방이 어딘지는 알았다.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아 어두운 복도를 지났다. 컴컴한 복도는 마치 곰팡이가 슨 듯했다.

서둘러 도망치듯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2층의 끄트머리에 있는 방. 그곳이 바로 아이의 방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있어도 대답을 안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다급해졌다.

“울리세, 형인데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아이의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는 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방은 살풍경했다. 가장 필요한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 있어야 할 것도 없었다.

아이의 조그마한 키보다 훨씬 큰 침대에는 아이가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방을 둘러보았으나 방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 그리고 옷장밖에 없었다. 아이가 사라진 건가? 그렇다면 정말 큰일인데. 공황에 빠지기 전, 시야에 옷장이 들어왔다.

“옷장?”

옷장은 아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죽이고 다가가 옷장 문을 열었다.

“…….”

그곳에는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자고 있었다. 딱딱한 옷장의 바닥에 있는 대로 몸을 웅크린 아이는 연약해 보였다. 옷장에는 옷도 몇 벌 있지 않았다. 침대에 있는 이불을 가져와 잤다면 차라리 조금 덜 안쓰러웠을까.

나는 아이가 너무나 깨질 듯이 연약해 보여 차마 손도 대지 못했다. 게다가 내 손길에 깨어난다면 어떠한 반응을 할지 걱정스러웠다. 결국 나는 망설이다 이불을 가져와 아이에게 덮어준 뒤 옷장을 조금 열어놓았다. 저런 갑갑한 공간에 있다가 질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우.”

나는 조심히 아이의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아이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어째서 저렇게 안타까운 모습으로 있는 걸까. 어린아이들이 아지트를 만든다는 이유로 좁은 공간을 만드는 것과는 달랐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 것이기에 아이들은 아지트에 좋아하는 것을 가져다 놓게 마련이다.

하지만 울리세는 아니었다. 그 좁은 공간에 편히 누울 베개도, 덮을 만한 이불도 가져다 놓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숨기려는 모습 같았다. 다친 짐승이 구석진 곳으로 숨듯이 말이다.

“요셉 님.”

“으악……!”

크게 소리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고 옆을 보았다. 또다시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집사님이 있었다. 집사님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이의 방이라도 무단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아니…… 아니. 그게, 그건 아는데…….”

“알면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님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물론 내가 잘못한 것이 맞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이가 저런 식으로 자고 있는 것을 집사님은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나를 책망할 때가 아니었다.

“잠깐, 잠깐만요. 저는 아이가 사라진 줄 알았어요.”

“…….”

집사님은 내가 온 힘을 다해서 화제를 돌리자 눈썹을 삐뚜름하게 꿈틀거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잘생긴 얼굴을 흉흉하게 쓴다. 기세만큼은 흉악범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하고 말했다.

“아이가…… 어딨는지 알고 있었어요?”

“제가 알아야 합니까?”

집사님은 여전히 냉랭했다. 아이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나는 애초에 생각을 잘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부모가 아닙니다.’

그가 나에게 뭐라고 했던 것을 나는 내가 오지랖을 부려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

냉혹한 눈에는 애정과 걱정 따윈 없었으며 오히려 멸시가 담겨 있었다. 집사님은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이 정리되자 차갑게 식었다. 울리세가 저렇게 되어버린 것에 집사님 또한 한몫했으리라. 눈앞에 생긴 남자는 끝내주게 잘생겼으나 쓰레기였던 모양이다.

나는 인상을 팍 구겼다. 우리에게는 깊고 진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오로지 울리세를 위한 깊고 진지한 이야기가.

“집사님, 저랑 잠시 얘기 좀 해요.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이쪽으로 오시죠.”

집사님은 내가 얼굴을 구기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단단한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는 곧 쌩하니 몸을 돌려 안내했다. 잘생긴 얼굴이 아까울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

집사님이 거침없이 걸어 안내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그가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의자를 뺐다. 그러곤 서서 기다리는 것이 내가 앉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재수는 없지만, 직업 정신은 확실해 보였다.

“고마워요.”

“제 일일 뿐입니다.”

일이 아니었으면 해주지 않았을 거다, 하는 말이 뒤이어 들리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이긴 했다. 집사니까 하는 거지 그가 굳이 내 의자를 빼서 앉을 준비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막말로 작업 거는 상대에게도 이렇게는 안 한다.

집사님은 내가 앉자 맞은편에 자리를 잡곤 나를 빤히 보았다.

“이야기할 건 뭔가요?”

“혹시 아니라면 제가 사과하겠는데…… 혹시.”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골랐다. 예상했던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말을 이었다.

“집사님은 울리세를 싫어하나요?”

“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집사님은 빠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그 어떤 변명의 조짐이나 망설임이 있었다면 좋았을까? 집사님은 섬뜩하리만치 냉혹한 모습을 유지할 뿐이었다. 얼굴엔 숨기지 않는 경멸과 증오가 비쳤다. 고작 10살짜리 아이에게 보이는 것치고는 너무한 감정이었다.

“왜요?”

“제가 그것을 말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듯했다. 그래, 내가 알아봤자 뭘 하겠어. 지금 중요한 건 아이의 건강이다. 아이가 저렇게 옷장에서 자신을 숨기듯 자는 것은 절대 좋은 상태가 아니다.

“집사님, 당신이 아이를 싫어하든 말든 저는 상관없어요. 아니, 마음 같아선.”

나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빠득 갈았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이라면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 맞다. 심지어 자신이 모실 도련님이라면 더 열과 성을 다해서 돌봐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 이것만큼은 물어봐야겠어요. 당신에게 울리세는 주인님 아닌가요?”

“하, 주인이라.”

집사님은 짜증스럽게 대답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암울하게 가라앉은 푸른색의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면 집사님은 누구에게 고용돼서 이 집에 있는 걸까.

“나는 오늘 아이가 사라진 줄 알았어요. 방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어서.”

“그래 봤자 옷장에 처박혀 있었겠지. 아니면 책상 밑이나. 안 그렇습니까?”

나는 집사님의 말에 딱딱히 얼굴을 굳혔다.

“알고 있었어요……?”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주인님 일인데 말이죠.”

이죽거리는 집사님은 평소의 냉혹한 모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그 미소마저도 멋들어지게 보였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감상이었다.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자는지 알아내야죠.”

“하아…….”

집사님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느릿한 움직임에도 위압감이 넘쳤고, 실제로도 나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고작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뿐인데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짐승이 사냥을 앞두고 거리를 재는 행동 같았다. 검은색의 가죽 장갑에 반 정도 감싸진 손이 테이블을 훑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당신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고 집사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빙설과도 같은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저 도련님을 후원하고 교육하면 되는 겁니다.”

짙은 색으로 일렁이는 푸른 눈은 갈 길을 잃은 혐오로 물들어 있었고, 겁을 먹은 나는 차마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 덕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눈에 일렁이는 상처를, 채 숨기지 못해 드러난 송곳 같은 상흔을 볼 수 있었다.

그가 힘주어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강한 악력에 내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 손을 놓았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요셉 님. 부르시면 언제든 오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그대로 걸어 응접실을 나갔다. 절도 있고 예의 바른 인사로 자신을 꾸몄지만, 여전히 매서운 기세를 마지막까지 흘렸다. 나는 멍하니 얼얼한 어깨를 계속해서 주물렀다.

홀로 남은 나는 집사님의 눈에 설핏 보였던 상처의 이유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집사님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로선 알 수가 없었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닮았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나온 한마디에 놀라 흡 숨을 들이켰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비슷한 보라색 계열의 머리칼, 같은 푸른색의 눈. 집사님과 아이는 어딘지 닮아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빼닮았다. 그렇다면 무언가 출생의 비밀이 있을지도……?

“하지만 그렇게 말할 필요까진 없잖아.”

집사님과 아이가 혈연관계고 또 둘만이 공유한 비밀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가장 사적인 상처를 헤집은 거고. 그럼 그 상처 어린 눈빛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 어떤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렇게 상처받은 아이를 가만둘 수는 없다.

“일단 자자.”

방으로 되돌아온 나는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일단은 자고 내일 생각하자. 그렇게 나는 잠에 들었다.

* * *

하늘의 태양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정오. 나는 도시로 잠시 내려왔다. 생각보다 집과 거리가 멀어 걸어서 오는데 힘들어죽을 뻔했다. 오래간만의 운동에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고작 이 거리를 움직였다고 팔다리가 후들거리다니.

집에 마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슬프게도 난 말을 탈 줄 몰랐다. 물론 몰 줄도 몰랐다. 마부를 고용할 돈은 있지만 어디서 어떻게 고용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이렇게 걸어 다녀야 할 것 같다. 자전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후우…….”

간신히 마을의 어느 커피 하우스에 자리 잡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커피는 현대보단 종류가 빈약했으나 맛은 나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니 몸에 활력이 돌았다. 역시 현대인의 스태미나 포션.

“살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다가왔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걸친 신사였는데, 멋들어지게 다듬은 콧수염이 인상 깊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말을 건 걸까?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분이시군요. 이곳에 이사 오신 분인가요?”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탐색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눈초리. 부모 없는 아이라며 나를 평가하던 어른들의 눈초리와 같았다. 어릴 때야 주눅 들었으나 지금은 별것도 아닌 시선이다.

나는 매끄럽게 받아쳤다.

“잠시 오게 되었습니다. 용건이라도……?”

“아니, 아닙니다. 로자는 좋은 곳이지요. 좋은 추억을 쌓아가시길 바랍니다.”

남자는 나에 대한 평가를 마쳤는지 멀리 떨어져 나갔다. 처음 본 얼굴이니 혹시 하는 마음에 왔었겠지. 그리고 아무래도 자신과 함께하기엔 내가 급이 맞지 않다고 판단했을 거다. 그것을 반증하듯 남자가 되돌아간 장소에는 그와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흠.”

나는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단정한 셔츠와 면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저들이 입은 옷과 비교하면 초라하긴 했다. 나는 잔에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 팁을 놓았다. 충분히 쉬었으니 원래의 목적지였던 상점가를 돌아볼 예정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종업원이 나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거리로 나섰다. 등 뒤에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오늘은 아이의 방에 놓을 새로운 가구를 볼 생각이었다. 가구는 아니어도 꾸밀 무언가를 사고 싶었다.

나는 시내로 나오기 전까지 고민했던 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그 아이가 옷장에서 나올지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살풍경한 방을 풍족하게 만들어주기로.

“흠…… 뭐가 좋을까.”

수도는 역시 수도였다. 가게는 넘쳐나듯 많았고 사람 또한 많았다.

나는 부지런히 시내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이의 방에 놓을 물건으로 눈에 차는 게 없었다. 돈도 많으니 그저 마음에 드는 것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어떤 것은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어떤 것은 너무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꼭 한 개씩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우.”

한숨을 쉬며 거리에 우뚝 섰다. 그때, 길 건너 작은 가게가 눈에 띄었다. 아기자기한 인형이 전시된 가게였다. 나는 홀린 듯이 그 가게로 들어갔다.

딸랑-

가게는 겉으로 보기에도 작았지만 들어서니 더욱 아담했다. 아이의 키에 맞춘 듯 진열대는 낮았고 그 위에는 다양한 인형들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노인이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은 다정해 보였다. 이 작은 가게의 포근한 분위기가 노인에게서도 묻어 나오는 듯했다.

“편히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노인은 도둑질이 걱정되지도 않는지 안쪽으로 도로 들어갔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보는 시선이 없으니 물건 보기가 한결 수월했다. 나는 마음 편히 인형을 구경했다.

어떤 것은 봉제로 만들어졌고, 어떤 것은 목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자그마하지만 정교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인형을 살펴보기 위해 손을 댄 순간이었다. 띠링! 알림 창이 떠올랐다.

[오류가 일부 복구됩니다!]

[화려한 목각인형: 감수성+2 기품+1]

“어?”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알림 창이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알림 창은 급격하게 현실성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며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인형 옆에 떠올라 있던 알림 창이 사라졌다. 다른 것을 시험 삼아 들자 아까와 비슷한 내용의 알림 창이 떠올랐다.

[푹신한 팬더 인형: 감수성+4]

“…….”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비현실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디디고 있는 땅이 울렁거리며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진이라도 찾아온 듯했다.

“손님, 괜찮으신가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이마를 짚고 어지러움을 견디고 있자 어깨에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노인이었다. 안쪽에 있던 노인이 언제 나온 것인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게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 생명력이, 온기가 나를 진정시켰다.

“네……. 감사합니다.”

“뭘요. 젊은 친구가 어디 아픈가요?”

“……아뇨, 그냥 좀.”

말을 얼버무리자 노인은 괜찮다면 다행이라고 웃었다. 나는 재빨리 푹신해 보이는 봉제 인형을 하나 들어 올렸다. 빨리 구매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노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인형을 포장해 주었다. 원통형의 상자에 빨간 리본이 이쁘게 묶였다.

“그럼 다음에 또 오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터덜거리며 마차를 한 대 잡아 집으로 향했다.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속은 진탕이 되어 뒤죽박죽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게임 창이 보인 것일까?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였기에 들어오는 바람은 날카로웠다. 게임이라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은 현실감 있었다. 이 세계에 처음 와서 맡은 아카시아 향처럼.

* * *

“다녀오셨습니까.”

집사님이 문을 열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제의 싸늘하고 고압적인 태도는 간데없었다. 그는 그저 예의 바른 집사 그 자체였다. 어제의 일만 아니었다면 그가 그저 평범한 집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내가 손에 든 커다란 선물 상자를 보더니 표정을 구겼다.

“그건 뭡니까?”

“……아.”

송곳처럼 날카로운 그의 말에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정신이 다른 곳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얼빠진 모습 때문일까. 집사님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 모습조차도 냉정해 보였다. 겨울이 아님에도 이곳만은 얼어붙은 동토처럼 추웠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이는 어디에 있나요?”

“모릅니다.”

집사님은 냉정한 대답을 남기고 집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만이 선물을 들고 현관에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아이를 찾기 위해 집 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방에도, 응접실에도, 식당에도, 그 어디에도 아이는 없었다.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열심히 집 안을 뒤졌다.

“어디…… 어디 갔지?”

발을 멈추지 않고 집 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겨우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집 안의 구석진 곳.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아 지저분한 먼지로 가득 찬 그 장소에 아이는 마치 방치된 골동품처럼 구겨 앉아 있었다. 연보라색의 고운 머리칼에 지저분한 먼지가 낙인처럼 묻어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아이를 발견하자 안심돼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고 머릿속에는 온갖 잡생각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가 있는 장소의 위생 상태 때문에 다시 걱정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하얀 먼지가 가득한 곳은 아이의 기관지에 너무나 좋지 않아 보였다. 어린아이에게 위생은 중요하니까.

“여기에 있으면 몸에 안 좋을 거야. 형이랑 나가지 않을래?”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을 거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아이는 언제나 그랬듯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오늘 사 온 인형을 꺼내 들었다. 이러려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 가장 필요한 듯했다. 과거의 나, 잘했다.

“안녕.”

최대한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톤을 꾸며내 뱉으며 아이에게 인형을 들이밀었다.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봉제 인형이라면 아이도 겁을 먹지 않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다행히 아이는 반응해 주었다. 투명한 유리 같은 그 눈으로 인형을 바라보는 모습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곰돌이 1호야.”

“…….”

아이가 반응하자 나는 흥이 나 열심히 말했다. 손으로 인형의 손발을 휘저으며 율동도 취했다. 살면서 이렇게 필사적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 내 모습은 인형극을 하러 가도 문제없으리라.

“이곳은 너무너무 지저분해. 우리 나가서 놀지 않을래?”

아이는 한참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그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형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것이 허공에 떠올랐다.

[곰 인형으로 아이의 감수성이 오릅니다! +2

기품이 오릅니다! +1]

순간 얼굴이 굳을 뻔했으나 아이가 볼 것 같아 필사적으로 관리했다. 하지만 손에서 힘이 빠져 인형을 놓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이는 인형을 품에 꼬옥 안았다. 서글픔과 분노가 스멀거리며 내 안을 헤집어놓았다.

아이를 위해 고심해서 사 온 선물이 그저 게임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아이의 스탯을 올리기 위해 사 온 것이 되어버렸다.

진정되었던 비현실감이 다시 한번 날 후려쳤다. 나는 일순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외면해도, 애써 아니라고 해도 이 세계가 게임이라고 자꾸만 나에게 얼굴을 들이민다.

네가 사랑하는 아이는 고작 코드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끔찍함이 내 정신을 잠식했다.

“…….”

하지만 인형이 마음에 드는 듯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보자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비현실감에 좌초되어 가라앉는 나를 끌어올려 구조해 주었다. 답답했던 가슴에 한줄기의 바람이 부는 기분. 상쾌한 기분을 음미하는 그 순간, 찌를 듯이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우뚝 서 나를 보는 집사님이 있었다. 어제보다 더욱더 싸늘한 표정이었으며 눈이 마주치자 그는 보란 듯이 나를 비웃었다.

“……!”

대체 왜 자꾸 저러는 걸까. 내가 그 모습에 발끈하자 집사님은 몸을 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 집사님이 서 있었던 것이 모두 허상인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후…… 아니야. 참자. 지금 여기엔 아이가 있잖아? 나는 속으로 분을 참았다. 다행히 아이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인형을 꼬옥 품에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이 지저분한 창고에서 나가니 그건 다행이었다.

뒤따라 나가니 아이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가끔 보면 아이는 짐승과도 같았다. 기민하게 기척을 숨기고 사라지는 것이 참으로 대단했다. 물론 그것이 좋다는 건 아니다. 사라진 아이를 찾느라 방금처럼 마음을 졸이는 건 더 이상은 사양하고 싶다.

“후…….”

아이가 없으니 이젠 참을 필요가 없었다. 참고 참았던 짜증이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집사님은 도대체 왜 저렇게 밉살맞게 구는 걸까. 무슨 상처가 있는지 몰라도 저렇게 대할 필요는 없잖아. 아이는 고작 10살인데. 사람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연약한 어린아이에게 그러는 것은 어른의 도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꾹꾹 화를 눌러 참았다. 한집에 살아갈 사람들끼리 싸워 험악한 사이가 될 필요는 없다. 아니, 험악해진다면 이 집에서 지내는 것에 큰 애로 사항이 생길지도 모른다.

나 혼자라면 괜찮지만, 아이에게도 영향이 갈지 모르니까 말이다. 집사님이 울리세를 이 이상 더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집사님은 나와 싸우기 위해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김요셉, 너는 성숙한 대한민국 시민이야. 도발에 넘어가지 말자. 넘어가지 말자.”

세뇌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차분하게 똑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지금은 집사님의 적의를 상대해 줄 시간이 없다. 눈앞에 상처받은 아이가 있으니까.

또, 갑작스럽게 나오는 게임 창을 발견할수록 심경이 복잡했다. 그 두 가지만 해도 감당하기 충분히 버거웠다.

“힘내자.”

주먹을 꽉 쥐고 자그맣게 외쳤다. 그래. 고민해 봤자 답도 안 나온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나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이를 위해 조금 더 노력하자. 이곳에 있는 동안은 아이에게 충실하자. 게임이든 뭐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결정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 * *

“하아.”

그날 밤 나는 아이의 방에 몰래 찾아갔다. 도둑고양이처럼 찾아간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다시 옷장에서 잘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인형과 함께 침대에서 자주지 않을까 하는 아주 조그마한 기대감.

하지만 조심스럽게 찾아간 방 안 침대에는 아이가 없었다. 썰렁한 침대는 아이가 침대에 올라가지도 않았다는 걸 알려주었다.

“…….”

끼익. 조심스럽게 옷장을 열자 아이가 웅크려서 자고 있었다. 그러나 전과 다른 점은 내가 사 왔던 인형을 꼬옥 껴안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인형의 목에는 검은색의 리본도 매여 있었다. 서툴게 묶인 것을 보니 울리세가 직접 한 것 같았다.

그 사랑스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하지만 내 손길을 아직 두려워하는 아이를 알았기에 황급히 손을 거두고 옷장을 조금 열어둔 채 방을 나왔다.

그래.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랬다. 조금 더 노력한다면 아이는 저 감옥같이 갑갑한 옷장에서 나올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마음먹었다.

“또 훔쳐보고 있군요.”

“……아니에요.”

그때, 집사님이 또다시 유령같이 뒤에서 나타났다.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북풍한설과도 같았다. 어제보다 더한 위압감이 나를 덮쳤다. 방비할 틈도 없이 덮쳐온 기세에 나는 육식동물 앞의 초식동물이 되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였다.

두려움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가 내 어깨를 쥐었을 때의 고통이 느껴지는 듯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얼마나 나약해 보일지 알았기에 바로 손을 내려 맞잡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연약히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저는 제 할 일을 할 거예요.”

“당신의 할 일은, 어제도 말했듯.”

“아니요.”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서 있으려 노력했다. 눈앞의 집사님은 마치 태산과도 같이 자리에 우뚝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맹수의 눈처럼 희번덕 빛나는 눈빛이 나를 꿰뚫었다. 어제처럼 겁먹어 움츠러들면 내 말은 무시당하고 말 것이다.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집사님을 쳐다보았다. 자꾸만 떨리는 손은 아예 보이지 않도록 뒷짐 지듯 두 손을 등 뒤로 젖혀 꽉 쥐었다.

“저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미성년자를 보호할 거예요.”

“……하.”

“제가…… 제가, 못 미더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최대한 노력할 거예요. 물질적으로도, 그 외의 것들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집사님은 짧게 헛웃음을 지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불처럼 일렁이는 눈은 시시각각 다른 감정을 담아내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집사님에게서 뿜어 나오는 위압감이 더욱 거세졌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이빨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참아내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어디.”

집사님은 거침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가 되자 집사님은 허리를 숙여 마치 입맞춤을 할 것처럼 얼굴을 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어느새 그의 양손은 내 어깨에 올라와 있었다.

곧 그 손은 마치 목을 조를 것처럼 천천히 내 목으로 올라왔다. 다행히 조르지는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두려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번, 잘해보시죠.”

여전히 쉼 없이 일렁이는 눈동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하지만 그 심해와도 같은 짙은 푸른 눈 속에서 해구같이 깊이 팬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대체 이 남자에게는 어떠한 사연이 있는 걸까.

“기대해도, 좋아요.”

“……요셉 님,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대답하자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거친 기세가 귀신같이 사라졌다. 집사님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프로페셔널하고 예의 바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아주 공손하게 인사한 그는 저 멀리 떠나갔다.

“하아…….”

그가 자리를 떠나자 다리에서 힘이 빠져 땅에 주저앉았다. 온몸은 마치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어쩐지 앞으로 시비가 좀 줄어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확실해진 한 가지. 집사님은 나를 시험했다. 겁을 먹어 꼬리를 말고 도망가길 원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맞다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외쳤다. 그건 직감에 가까웠다.

“……도망갈 줄 알고.”

아이를 두고 저 멀리 도망가기를 원한 집사님. 하지만, 어떻게 내가 울리세를 두고 도망갈 수 있을까. 아이는 불안정하고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게다가…… 도망간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이 세계에 부랑자처럼 남겨진 난민과도 같은 존재니까. 나는 아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내 자신이 우스워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씻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방으로 움직였다. 땀으로 흠뻑 젖어 찝찝한 느낌이 온몸을 뒤덮었다.

* * *

“어서 오세요. 젊은 분이 또 오셨네요.”

이제는 익숙한 노인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노인은 인형 가게의 주인이었다. 울리세에게 줄 선물을 위해 자주 들락날락했더니 이제는 단골손님 취급이었다. 나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오랜만이긴요. 어제도 왔는데 그러시네.”

노인은 사람 좋게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주 오게 돼서 알게 된 것은 저 안쪽이 인형 공방이라는 것이다. 노인이 새로운 인형을 손에 들고 나온 것을 보게 된 후 알게 된 사실이었다.

새삼스레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한동안 가게에 있는 봉제 인형은 내가 모두 사 갔기에 커다란 크기의 봉제 인형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노인의 수제작으로 만들어지는 터라 인형의 공급은 빠르지 않았다.

“흠.”

꼼꼼히 인형들을 살펴보았다. 며칠간 이 가게뿐만이 아닌 다른 가게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점. 모든 것에서 알림 창이 떠올랐다. 지금만 해도 눈앞에 있는 목각 인형 옆에 떠올라 있었다.

[꼼꼼한 목각인형: 손재주 +1]

처음에는 알림 창이 주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충격을 먹고 몸서리쳤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며칠간 꾸준히 수십 개의 창을 보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볼 때마다 넋을 잃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다행인 것은 알림 창은 내가 무시하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떤 게 좋을까.”

발이 붕 뜬 것 같은 이질감에 집중하는 것보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을 고민하는 게 더 나았다. 나는 다시 한번 인형들을 죽 둘러보았다. 생명이 없는 인형들은 어쩐지 아이를 닮아 있었다. 조금 더 푹신하고 보드라운 것들을 주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내가 쉽게 고르지 못하고 있자 노인이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품에는 커다란 토끼 인형이 들려 있었다. 딱 봐도 포근해 보였다.

“손님이 좋아할 것 같아서 안쪽에 잠들어 있는 녀석을 꺼내 왔지요.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네. 완전요. 이거 계산해 주세요.”

토끼의 귀를 시험 삼아 만져보자 생각보다 더 감촉이 좋았다. 이거라면 아이의 침대에 올라갈 식구로 충분하리라. 만족스러운 쇼핑에 미소가 지어졌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네모난 선물 상자에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었다.

“젊은 사람인데 벌써 아이가 있나요?”

“아…… 아니요, 동생이에요.”

“동생이 많이 좋아하겠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었다. 노인은 내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단 걸 알았는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네모난 선물 상자가 포장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 능숙히 계산을 끝내고 가게를 나섰다.

“오늘은 침대에서 자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여전히 딱딱하고 차가운 옷장 구석에 웅크려서 잤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형을 침대에 올려놓으면 아이가 그것을 옷장에 가져간다는 거였다. 좁고 구석진 곳에 인형들과 함께 자는 아이는 귀여웠으나 안쓰러웠다.

“흠. 그러고 보니 바닥에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았지.”

카펫은 보온을 위해서는 필수였다. 서양식의 건축물은 온열 기구를 사용하기에 카펫을 깔아 온도를 유지했다. 이걸 이제야 생각하다니. 인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의 방에 카펫을 깔아주는 게 먼저였다. 서양권에서 살아봤으면 이런 걸 바로 알았을 텐데.

나는 허겁지겁 거리를 돌아 카펫을 파는 가게를 찾았다.

“어떤 색을 찾고 계신가요?

“음…….”

급하게 온 것이라 미처 색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원하는 색을 떠올리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의 아름다운 로열블루의 눈동자가 바로 생각났기 때문이다.

“짙은 파란색은 없나요?”

“물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이 안내해 준 곳에는 아름다운 카펫이 진열되어 있었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형상의 예술품에 가까운 카펫부터 단조로운 모양이 장식된 카펫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직원은 나에게 카펫에 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 길고 지루한 설명을 반쯤 흘려들으며 나는 부드럽고 적당히 화려한 카펫을 하나 골라 결제했다.

“이 주소로 배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딸랑, 가게를 나섰다.

성공적인 구매였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 역으로 향했다. 그 도중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자수정 같은 머리카락. 집에서 자주 보는 집사님의 머리카락이었다.

집사님은 평소와는 달리 집사복이 아닌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아름다운 파란 눈동자가 검은색의 선글라스에 가려 탁해 보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밖에 나와서까지 집사님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저 남자는 나를 위협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무서운 자였다. 자신을 손쉽게 해할 수 있는 존재에게서 멀어지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다. 집사님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리려고 했으나 그보다 집사님이 먼저 나를 보았다.

“아.”

집사님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긴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 다가왔다. 큰 키에 나보다 긴 다리다 보니 가까워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쇼핑을 하고 계셨나요?”

“네.”

집사님은 내 품에 있는 커다란 선물 상자를 보고 아주 짧게 실소했다. 여전히 아이에게 무언가를 사 주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네? 뭐를요?”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집사님은 빈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든 단추를 꼭꼭 잠근 옷은 그를 강철같이 견고하게 만들어주었고, 아이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미동이 없는 표정은 굳건함을 더했다. 얼굴과 목을 제외하고 그가 드러낸 피부의 면적은 반장갑이라 보이는 손바닥 끄트머리 정도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도와달라니. 세상이 무너질 징조인 것이 분명했다.

“이리로.”

집사님은 뚜벅거리며 앞장섰다. 빠른 걸음에 다급하게 쫓아가자 그가 나를 흘긋 보더니 발걸음을 맞춰주었다. 이럴 때 보면 매너가 참 좋았다.

“제가 뭘 도와주면 돼요?”

“짐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갑자기? 나는 내 품에 안긴 선물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부피가 굉장히 큰 짐을 하나 들고 있으니 노력한다면 그나마 손 한쪽이 비어 들 수야 있을 거다. 하지만 그뿐, 큰 도움은 되지 못할 텐데.

집사님은 식료품 가게로 들어가 물건을 익숙하게 구입했다. 그는 질 좋은 상품을 고르는 데 이골이 나 보였고 심지어 능숙한 말솜씨로 가격을 깎기까지 했다. 보기와는 다른 생활력이었다.

“여기.”

집사님은 나에게 종이봉투를 안겨주었다. 다행인 것은 그다지 무겁지는 않았기에 한 손으로도 충분히 들 수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 안을 들여다보니 치즈와 소시지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집사님은 그것 외에는 나에게 아무것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5개가 넘는 묵직한 봉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힘들지 않을까?

“그거 무거우면 저한테 좀 주세요. 도와달라면서요?”

“충분합니다.”

집사님은 무뚝뚝하게 답하며 마차 역으로 향했다. 그다지 무겁지 않다 해도 5개가 넘으면 꽤 무게가 나갈 텐데. 한편으로는 아까 걸을 때 속도 맞춰준 것도 그렇고, 도와달라고 했으면서 고작 한 개만 준 것을 보면 사실 상냥한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나에게 행했던 폭력이, 고통이 선명하게 상기되었다.

그래. 상냥한 사람은 무슨. 그는 나를 시험하려 드는 독사 같은 남자야. 긴장과 경계를 풀지 말자.

“이리로 가주세요.”

마부는 내가 수첩에 적은 주소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떨어지고 쓴 방법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울리세의 저택 주소가 너무 길었던 탓이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을 외우기엔 내 머리가 돌이었다.

나와 집사님은 마차에 나란히 앉았다.

속력을 내어 집으로 향하는 마차의 안은 끔찍하게 조용했다. 나는 침묵을 어떻게든 이겨 나가기 위해 의자의 무늬를 본다거나 괜스레 창 너머의 풍경을 구경했다.

“일단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군요.”

“……네?”

한참을 다른 곳을 보느라 대답이 늦었다. 집사님의 눈은 까만 선글라스에 가려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모자람 없이 먹고 입고 있습니다. 채광 또한 공사를 통해 괜찮아졌고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집사님의 솔직하기까지 한 감사 인사에 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이렇게 인사를 들을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건 또 새로운 인형입니까?”

“네.”

“도련님의 방을 동물원으로 만들 생각이신 것 같군요. 저번에는 고양이였죠. 이번에는 뭡니까?”

“토끼요.”

집사님은 짧게 실소했다. 마차에는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어쩐지 집사님은 심기가 거슬린 듯했다. 저번의 시험 이후 그는 대놓고 나에게 뭐라고 하진 않았으나 이렇게 싫다는 기색을 참지 않고 드러냈다. 아까까지의 매너는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순간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무례한 행동에 열이 받아 집사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분노는 그를 본 순간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그가 너무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존재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 보다. 긴 다리를 꼬고 있는 집사님의 모습은 명화의 그림처럼 멋있었다. 내가 다리를 꼬면 저런 그림이 안 나올 테지.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마차를 세우고 외쳤다. 집사님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우아한 그 행동은 집사라기보단 어쩐지 영화에서나 보았던 귀족처럼 기품 있었다. 집사님이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

“……고마워요.”

에스코트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저 검은색의 반장갑에 가려진 손을 한 번쯤 만져보고 싶기도 했고. 그의 손은 보기 좋게 길게 뻗어 있어 한 번쯤 만져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예술품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앗!”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고 있을 그때,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마부가 기지개를 켜며 손에 있는 마편을 놓친 것이다. 마편은 허공을 날아 집사님의 얼굴에 떨어졌다. 다행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그의 눈에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씌워져 있던 선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봐요! 조심해야죠!”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으리들 괜찮으신가요?”

마부가 사색이 된 채 허겁지겁 달려와 집사님을 살폈다. 집사님은 잠시 얼굴을 부여잡고 몸을 엉거주춤 웅크렸다.

“……선…… 스.”

“네? 뭐라고 했어요?”

“선글라스!”

집사님의 절박하기까지 한 외침에 마부가 허겁지겁 선글라스를 주웠다. 그러나 선글라스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집사님은 짜증을 내며 눈가를 가렸고, 마부는 덜덜 떨며 처분을 기다렸다. 나는 혹시 눈가에 깨진 선글라스 파편이라도 들어갔나 싶어 집사님을 살폈다.

“눈을 왜 가리고 있어요? 혹시 눈 안에 파편이라도 들어간 거예요?”

“아니…….”

“잠시 봐요!”

눈에 파편이 들어갔다면 큰일인데. 초조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집사님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붙들었다. 집사님은 왜인지 몰라도 공황에 빠져 있었다. 진짜 어디 다친 거 아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불안감이 커졌다.

아무리 집사님이 정신없어도 체격 차 때문인지 억지로 떼어내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찌 저찌 성공했다. 다행히 그의 아름다운 눈은 조금 붉게 달아오른 것 외에는 다친 곳 하나 없었다.

“젠장…….”

정신을 차린 집사님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욕에 내가 당황하기도 전, 억센 손길이 뒤에서 튀어나와 나를 잡아채 밀었다.

콰당탕! 느닷없다 보니 나는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어이없는 상황에 화를 내려는 찰나, 황당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죽을상을 하던 마부가 집사님의 손을 잡고 사랑을 외쳤다. 그 이상한 광경에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롱하기까지 한 분홍색의 눈은 제 인생 가장 아름다운 보석임이 분명합니다!”

분홍색 눈? 집사님은 파란색 눈이 아니었나?

마부는 마치 성난 황소처럼 집사님에게 달려들었다. 집사님의 기색이 점점 흉흉해졌다. 나를 압박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살기를 담은 기운이었다. 그러나 마부는 그것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몸을 들이밀었다.

나는 다급하게 일어나 마부를 옆으로 밀었다. 마부가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원치 않는 구애를 받는 집사님을 위해서였다.

“그만하세요!”

“넌 뭐야!”

“당신이야말로 뭐 하는 거야! 이거 추행인 거 몰라요?!”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

마부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나에게로 돌진했다. 성난 황소 같다고 했던 생각은 취소한다. 미친 황소 그 자체였다. 아까의 쩔쩔매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마부는 내가 빨간색 깃발인 것처럼 돌진했다.

그러나 나에게 닿기도 전,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

“집사님…….”

“요셉 님, 괜찮으십니까?”

집사님이 그 길쭉한 다리를 십분 발휘해 달려오는 마부를 걷어찬 것이다. 달려오느라 가속도가 붙어 걷어차기엔 힘들었을 것 같은데 하나의 춤 같은 유려한 모습이었다. 얻어맞은 마부는 심하게 아픈지 땅에서 바들거렸다.

“집사님은요?”

“저는 기분이 더러운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운 후 몸을 탈탈 털어주었다. 흙먼지가 떨어지고 멀쩡한 모습이 되자 집사님은 마부에게 걸어갔다. 그에게서 흉흉한 기운이 아까보다 더하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마부는 겁에 질리긴커녕 집사님이 가까워지자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달라붙으려고 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집사님의 눈이 아름답지만 저렇게까지 미칠 정도인가? 아니, 추행의 원인을 집사님에게서 찾으면 안 되지. 저 마부가 이상한 놈인 것이 분명했다.

“꺼져.”

마부의 정신 나간 행동에도 집사님은 차갑게 말할 뿐이었다. 그제야 마부는 정신이 든 것인지 후들후들 떨며 마차를 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마을로 휘청거리며 뛰어갔다. 처량한 모습이었지만 자업자득이었다.

집사님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 나에게 되돌아왔다.

“폐를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집사님은 태연히 마차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당황스러웠지만, 그 혼자 일하게 둘 순 없었다. 나 또한 돕기 위해 움직이려 했으나 내 팔을 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다쳤지 않습니까!”

집사님은 들고 있던 식료품을 땅에 떨어뜨리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셔츠의 팔 부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뒤늦게 상처를 인지하자 그제야 고통이 밀려왔다.

“아파…….”

“이리로 오세요.”

집사님이 어쩐지 당황하며 나를 이끌었다. 나를 겁박하던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 간극에 나는 얼이 빠져 그대로 집사님의 방까지 걸어갔다.

* * *

집사님의 방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1층의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은 언제나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들어갈 생각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방은 마치 울리세의 방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침대와 책상, 옷장. 방에 있는 가구는 그 3개가 끝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따사롭고 푹신한 방을 차지한 것은 나 같았다. 이 집의 주인은 울리세고, 집사님 또한 이 집에 오래 머물렀음에도 말이다.

“아…… 따가…….”

멍하니 방을 둘러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집사님이 내 팔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덕분에 셔츠에 상처가 쓸려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자 집사님의 손길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심하게 까졌군요.”

“하하……. 이렇게 다친 줄은 몰랐는데…….”

“아픈 것도 모릅니까?”

집사님은 타박하듯 말했으나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고, 덕분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조그마한 대야에 물을 담아 가져오더니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러곤 대야 위로 가져가 슬쩍슬쩍 물을 부어 상처를 씻어냈다.

“아, 아파요.”

“참으세요.”

혹여 내가 팔을 뺄까 싶었는지 집사님은 꽉 잡고 있었다.

상처를 어느 정도 물로 헹궜을까, 그는 곧장 알코올로 내 상처를 소독했다. 그다지 심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상처였지만 엄청 아팠다.

“으윽!!”

다행인 건 집사님이 정말 속전속결로 끝냈다는 점이다. 아픔에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이겨내고 있자니 집사님이 재빨리 내 상처에 약을 바르고 거즈를 올려 붕대까지 칭칭 감아놓았다. 그제야 집사님은 잡았던 손을 놓은 후 말했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익숙한가 봐요.”

어쩐지 사라진 손길이 아쉬워 잡혔던 부분을 만지작거리자 집사님은 치료 용품들을 철제 박스에 정리하며 대답했다.

“네. 혼자 치료할 일이 많았죠.”

“……혼자요?”

“네.”

집사님의 말은 무덤덤했다. 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의 쓸쓸함이 묻어난 것을. 나는 부러 웃으며 그 부분을 굳이 집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는 제가 치료해 줄…….”

“아닙니다.”

집사님은 상자를 든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푸른색의 영롱한 눈은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랬다. 잠시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어 잊어버릴 뻔했다. 그는 나를 싫어한다. 나에게 폭력을 동반한 시험을 행사할 정도로.

“아……. 음, 미안해요. 그럼…….”

나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등 뒤로 집사님의 한숨이 들린 듯했으나 내 착각일 것이다.

나는 허둥지둥 방으로 되돌아왔다. 뒤늦게 아이의 선물이 떠올라 문을 나섰지만 바로 앞에 집사님이 가져다 놓은 건지 네모난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정신을 빼놓고 있을 때 챙겨 왔던 모양이다. 날 싫어하는 거면 일관되게 싫어하면 좋을 텐데. 아니, 이건 그가 집사로서 한 일일 터.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자. 나는 아까의 찝찝함을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그는 상자에 먼지가 묻었는지 확인한 후 아이의 방에 가 인형을 선물했다. 아이는 새로운 인형을 마음에 들어 했으나 침대가 아닌 옷장에 가져다 놓았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청아하게 집 안을 울렸다. 집사님은 식사 시간이 되면 작은 종을 울렸고, 나는 이제 그 소리를 들으면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이었다.

“와아.”

식탁 위에 가득 올라온 음식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평소보다 가짓수가 많은 음식은 평소에 먹는 것들이 아닌 정찬에 가까웠다.

구운 칠면조와 감자, 뭉근하게 끓인 브로콜리 감자 수프, 바질과 치즈 가루를 양껏 넣어 만든 페스토 파스타, 마요네즈와 베이컨, 삶은 계란을 갖은 야채와 버무린 샐러드. 한쪽에는 관자가 보기 좋게 구워져 브로콜리와 함께 있었다. 버터 구이 옥수수는 매쉬드 포테이토와 함께했다.

나는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으나 그저 그런 평일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앉으시죠. 도련님도.”

어느새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울리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이도 이렇게 화려한 식탁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 표정에 진즉 해줄 걸이란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집사님이 보내는 시선에 재빨리 식탁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집사님은 앉지 않고 접시에 음식들을 일정량 담아서 건네주었다. 접시는 데워져 있었는지 따뜻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아니요.”

혹시나 내가 모르는 기념일이 있나 해 물어봤지만 칼 같은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손을 바지런히 움직여 음식을 먹었다. 정말로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었다. 나는 집사님을 돌아보았다. 집사님은 식탁의 한편에 서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두고 보고만 있다니 그럴 순 없었다.

“집사님도 드세요. 이렇게 맛있는데.”

“……맛있습니까?”

“네. 정말로요. 빨리 앉으세요.”

하지만 집사님은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집사님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불쾌한 기색은 없어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그를 내 맞은편의 자리에 안내했다. 집사님은 못 이긴 척 끌려왔다.

“자, 앉으세요. 앉으세요.”

“……전 집사입니다.”

“집사라고 해서 같이 먹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빈 접시를 찾아 그가 나에게 해주었듯 음식을 옮겨 주었다. 집사님이 한 것처럼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 최선이었다. 다행히 접시를 받아 든 집사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기 전, 나는 아이를 확인했다. 아이의 접시에는 많은 음식이 남아 있었으나 옥수수가 확연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울리세, 옥수수가 맛있니?”

“…….”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볼이 살짝 발그레한 것이 확실히 맛있는 모양이다. 아이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나는 웃으며 접시에 새로운 옥수수를 놓아주었다. 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응.”

아이가 대답했다. 그저 단 한마디, ‘응’이라는 대답일 뿐이었는데 날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많이 먹어.”

나는 행복함에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춤추듯 폴짝이며 앉았다. 기분이 좋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아이의 견고한 벽에 실금이 생긴 것 같았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앞을 보자 집사님이 음식을 먹지 않고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자 집사님은 자신의 몫인 옥수수를 먹기 시작했다. 집사님도 옥수수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식탁의 음식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집사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2개의 접시를 가져와 나와 아이의 앞에 각각 놓아주었다.

“와…… 이게 뭐예요?”

“파운드케이크입니다.”

파운드케이크는 조그마한 원통으로 생겼는데, 움푹 들어간 중앙에 화이트 초콜릿이 흘러내리듯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캐러멜 너트와 생과일들이 장식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주제에 공들여 만든 디저트인 것이 티가 났다.

먹기 아까워 보기만 하자 집사님의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식은 먹으라고 가져오는 겁니다. 장식물이 아닙니다.”

그 말에 나는 얼른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그의 말대로 이 맛은 장식물이라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케이크들이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파운드케이크였다. 황홀경에 젖어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 먹었다.

어느새 접시가 비었다. 오늘의 저녁은 정말이지 최고의 시간이었다.

* * *

“룰룰루~ 맛있는 케이크, 흐흐흠~ 맛있다~ 룰룰루……? 어?”

목욕하고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방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두웠던 복도는 나무를 벌목하는 공사 끝에 환한 달빛이 들어와 조금은 밝아졌다.

그리고 그 복도의 끝. 집사님이 서 있었다. 마치 조각상같이 꼼짝도 안 하는 그 모습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를 사랑했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집사님은 조각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달빛에 감싸인 집사님은 신이 곱게 빚은 듯 아름다웠다.

“요셉 님.”

밖을 보던 집사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푸른색의 눈동자를. 사파이어 같은 그 눈동자는 찬란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마부의 말이 떠올랐다.

‘영롱하기까지 한 분홍색의 눈은 제 인생 가장 아름다운 보석임이 분명합니다!’

“집사님.”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홀리듯 집사님에게 물었다.

“집사님의 눈 색은…… 무슨 색인가요?”

처음엔 정신도 없었던 터라 그저 위화감을 느끼고 끝났지만, 마부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떠올랐다. 게임 속 집사님의 눈은 분명 화려한 분홍색이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집사님의 눈은 파란색이다. 그 둘은 헷갈릴 수가 없는 전혀 다른 색이다.

내가 본 파란색 눈이 진짜인지, 아니면 마부가 본 분홍색 눈이 진짜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

집사님은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날카로운 그 눈빛은 내 몸을 관통하듯 했으나 폭력성은 없었다. 오히려 어딘지 음습하고 우울한 느낌이었다. 늪에 가라앉은 듯한 무거움이 함께 느껴졌다.

“집사님?”

“요셉 님은…….”

집사님은 뚜벅뚜벅 내게로 다가왔다. 달빛에 비쳐 산란하듯 아름다웠던 눈이 어둠처럼 짙게 가라앉았다. 별빛보다 아름다웠던 눈은 어두운 심해로 바뀌었다. 하지만 종류가 달라진다고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눈은 어두울지언정 여전히 찬란했다.

“제 눈이 무슨 색으로 보이시나요?”

넋을 놓고 눈을 보는 바람에 코앞까지 집사님이 다가온 줄도 몰랐다. 나는 놀라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 내 모습을 봤다면 펄쩍 뛰는 생쥐 새끼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았음에도 놀란 내가 우스웠다.

집사님은 그런 날 가만히 보며 재차 물었다. 처음보다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보이시나요?”

“그…….”

나는 손으로 입가를 쓸며 막았다. 나도 모르게 주책없이 주절주절 말할 뻔했다. 보이는 그대로의 감성을 말했다가 집사님이 내보일 반응이 무섭고 부끄러웠다. 게다가 아까의 그 성추행범과 같은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튀어나오는 찬양을 속으로 삼키며 단조롭게 말했다.

“파…… 파란색으로 보여요.”

“……그렇군요.”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집사님은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계속 사람의 눈을 잡아먹듯 쳐다보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것이겠죠.”

집사님의 말은 모호했다. 본인의 눈 색이 어떤 것인지 확정 짓지 않았다. 무엇이 진실일까. 아니, 지금 이 모든 상황에 진실이랄 것이 있을까? 다 거짓인 게 아닐까?

갑자기 발작처럼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진짜일까? 꿈속에 잠겨 버린 건 아닐까. 속이 울렁거렸다. 어지러웠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 가운데에서 형형한 푸른빛만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윽…….”

참을 수 없는 구토감에 토악질할 것 같아 입을 두 손으로 꾸욱 눌렀다. 눈앞이 희게 질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괜찮다고 스스로 세뇌하듯 설득하고 다짐해도 이렇게 한순간에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만다. 나약한 스스로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다.

아무런 위험이 없는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비록 언제나 돈 걱정에 머리가 아프고 미래에 대한 암담함에 괴로워도, 그래도, 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목숨의 위협이 없는 안전하고 그리운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요셉 님.”

그때였다. 나의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집사님의 손길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위로하는 그 손은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평소의 싸늘하고 매서운 목소리가 아닌, 훈풍이 도는 다정한 목소리는 나를 향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나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집사님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장갑과 옷의 너머로 전해져 오는 열기는 뜨거웠다. 그 온기가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붕 떠 있던 몸이 땅에 내려앉는 느낌에 어지러움도 차분히 가셨다. 집사님은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등에서 시작된 온기가 몸 전체를 데웠다. 따뜻했다. 은은한 불 속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 죄송해요, 폐를…….”

“아닙니다.”

집사님은 내가 괜찮아지자 놀랍도록 빠르게 떨어졌다. 나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도, 다정한 목소리도 모두 허상처럼 사라졌다. 몸에 남은 따뜻한 온기만이 그것이 허상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집사님이 뚜벅뚜벅 복도의 끝으로 사라져 갔다. 달빛을 받아 어슴푸레 보이는 복도의 끝엔 내 눈으로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사님은 그 어둠의 너머로 사라졌다. 어둠에 삼켜진 집사님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 * *

그날 이후 집사님의 행동이 조금 달라졌다.

“집사님?”

“…….”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그곳을 보면 어김없이 집사님이 우뚝 서 있었다. 장승처럼 서 있는 그 모습은 어딘지 이상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기만 한다는 것이다. 평소처럼 가시 돋친 말을 한다거나 시비를 거는 행동은 없었다. 어쩐지 유순해졌다.

오늘도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쳐다보다 발을 돌려 가버렸다. 다정해진 걸까? 같이 생활하는 입장에서 집사님의 변화는 기꺼웠다.

나는 싱글거리며 아이를 찾았다. 오래 찾을 것도 없이 아이는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이의 품에는 맨 처음 사 준 봉제 인형이 안겨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인형의 목에 달린 검은 리본을 더욱 단단히 매주었다.

“같이 나가서 놀 거야?”

“…….”

“시내까지 갈 거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리세는 이제 나에게 이런 자그마한 의사 표현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느리지만 천천히 달라지고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아이의 모습이 정말이지 기특했다.

나는 기쁘게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마을까지는 너무 먼데. 형이 데려다줄게. 아니, 혼자 가면 위험하니까 형이랑 같이 가자.”

“…….”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서 강제로 따라가면 아이가 또다시 거리를 벌릴까 두려웠다. 결국 나는 고민하다가 아이의 손에 돈을 들려주었다. 살짝 닿은 접촉에 아이가 움찔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돌아올 때는 꼭 마차를 타도록 해. 알겠지? 여기까진 너무 머니까.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면 안 돼. 어른들은 너 같은 어린애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니까. 알겠지?”

“…….”

“인형의 이름은 지어줬니?”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형에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일까. 나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면 너를 지켜주는 기사가 된단다. 이름을 지어주고 친구가 되어주렴.”

“…….”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에겐 동심이 필요하지. 동화 같은 이야기는 정서에 도움이 된다. 본래는 혼자 자는 아이가 무섭지 않도록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이는 인형을 안고 집을 나섰다. 마을까지는 먼데 괜찮을까? 아이가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걱정이 벌써부터 태산 같았다.

그때, 내 뒤에 있던 집사님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평소 야생동물보다 조용히 다녔던 그를 생각하면 명백히 의도적으로 낸 발소리였다. 집사님은 태연한 얼굴로 여상하게 말했다.

“도련님은 평소에도 혼자 나갔다가 오십니다.”

“……진짜요?”

“제가 거짓을 말한 적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었다. 속을 뒤집어놓은 적은 있지만, 거짓을 말한 적은 아마도 없었다.

“그럼 다과를 준비할 테니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지요. 따뜻한 걸 마시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실 겁니다.”

솔직히 걱정이 한가득해 입맛은 없었으나 생각해 주는 것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응접실로 걸어가 집사님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집사님은 이미 준비를 끝냈던 것인지 트레이에 아기자기한 귀여운 다과들을 올리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예쁘게 뻗은 손이 준비한 과자를 놓고 차를 따라주었다. 향긋한 향이 주변을 맴돌았다.

“울리세가…… 평소에도 자주 밖에 나가나요?”

“아니요. 예전에는 나갔던 것 같기도 하군요.”

집사님이 마주 앉아 말했다. 어딘지 어긋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난 걱정에 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의무적으로 손을 움직여 음식을 입에 넣었다. 집사님이 직접 우린 차는 맛있고 향도 좋았다. 과자 또한 바삭해 내 입에 꼭 맞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 내 정신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지금이라도 뒤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더 드시죠.”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면 집사님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평소에도 아이가 혼자 나갔다 왔다고 하고…… 너무 감싸고돌면 오히려 정서에 안 좋을 수도 있다. 과보호는 아이의 성장에 좋지 않으니까. 거기다 집사님의 걱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한 생각의 흐름 때문에 나는 의자에 계속 엉덩이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하게도 지나갔다. 초조함은 그에 비례하듯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밝았던 창문이 어둑해졌다. 뜨거웠던 차가 차갑게 식고 접시 위의 과자가 두 번은 더 텅 비워졌을 때, 결국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요셉 님.”

“너무 늦어요.”

“요셉 님.”

집사님이 나를 재차 불렀으나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 공황에 빠진 나는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허겁지겁 문으로 나서는데 집사님이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는 어딘지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십니까?”

“아뇨. 하지만 가봐야-”

“알겠습니다.”

집사님은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따라오라는 신호 같아 나 또한 허겁지겁 뒤따라갔다.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으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집사님이 말했다. 그가 앞서가고 있는 터라 집사님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다만 빛을 받아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뒷모습은 지독히도 쓸쓸해 보였다.

“지저분하고, 쓸모없는 멍청한 애새끼가 없어지니 좋은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의 그 어떤 말보다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적의를 차곡차곡 쌓아온 걸까. 말에서 풍기는 독기가 무거웠다.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말을 왜 그렇게 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집사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의 입에서 형체 없는 송곳이 날아왔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의사 표현도 못 하고. 제대로 하는 거라곤 얌전히 앉아 있는 것뿐. 그 어디에 쓸모가 있습니까?”

“이봐!”

화가 나 존댓말 쓰는 것도 잊은 채 나는 집사님의 팔을 낚아챘다. 집사님은 그제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짙은 혐오감에 물들어 있었다.

아니, 혐오감인가? 증오? 이것은 누구에게 보내는 감정일까. 깨진 거울만큼 아슬아슬한 정신이 그 눈에 담겨 있었다.

“요셉 님. 지금까지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했습니다.”

아이를 어르듯 다정하고 상냥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갈 곳을 잃은 미아의 표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표정과는 별개로 집사님은 도저히 곱게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의 말을 뱉었다.

“그 미친놈들이 그렇다고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꾹 참고 겨우 내뱉자 집사님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팔에서 떼어내고 구겨진 정장을 탁탁 털어 주름을 없앴다. 그러곤 아까와 같은 요동치는 감정을 순식간에 감추고 차갑게 말했다.

“도련님에게 가도록 하지요.”

집사님은 아까보다 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그는 걸었지만, 나는 거의 뛰듯이 쫓아갔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가자며 걸음을 붙들지 않았다. 아이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 * *

쉴 새 없이 움직인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시내에 도착했다. 하지만 집사님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발을 옮겼다. 마치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잠깐이라도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어둑해진 골목길 너머에는 놀이터가 있었다. 이렇게 구석진 곳에 있다니. 안전이 걱정스러운 위치였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그렇게도 찾던 울리세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모습으로.

평범한 가정에서 잘 먹고 잘 큰 듯한 아이들은 울리세보다 한참은 건장해 보였다. 아이들의 손에 무력하게 잡힌 울리세는 입을 벙긋거리며 손을 뻗었고, 그 손이 향하는 곳에는 엉망이 된 인형이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이 울리세와 비슷해 보였다.

“거지새끼가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훔친 거 아냐?”

아이들의 순수함이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까. 충격을 먹어 비틀거리려는 몸을 다급하게 움직여 아이를 불렀다.

“울리세!”

“뭐야?”

“몰라, 누구야?”

내가 땀범벅이 된 상태로 뛰어가자 아이들은 당혹한 듯했으나 이내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 떳떳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의기양양한 얼굴에 나는 거의 울먹거리며 울리세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신음 하나 없이 내게 들렸다. 정말로 가벼운 무게였다.

“너희…… 너희 왜 이런 짓을 했니?”

울리세가 내 품에 힘없이 안겨 내 팔뚝을 꼭 안았다. 괴롭힌 아이들은 그런 울리세가 보이지 않는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지새끼잖아요. 아빠가 거지들은 전부 때려죽여야 한댔어요.”

“맞아요. 부모 없는 애들이 커서 불량배가 된다고. 전부 잡아야 한다고 했어요.”

“우린 잘못한 거 없어요.”

키득거리며 서로를 보는 아이들의 눈에는 악의가 없었다. 그렇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자라난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회를 살아간다. 저 아이들에게 잘못은 없었다. 저들의 보호자 문제였다.

“이 아이는 거지도 아니고 고아도 아냐! 게다가 그런 이유로 사람을 괴롭히면 안 돼!”

아이들에게 조금 더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나의 팔을 잡아오는 가녀린 손길이 느껴졌다. 그 즉시 나는 품의 울리세를 향해 내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아이들은 내가 시선을 떼자 그 즉시 뿔뿔이 흩어졌다.

아이의 몸에는 벌써 푸릇하게 멍이 올라왔다.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아이가 벽을 세우는 것에 겁을 먹고 혼자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뒤를 몰래 따라가서라도 아이의 안전을 챙겼어야 했는데.

“울리세, 미안해. 형이 같이 갔어야…….”

“요셉 님.”

“……미안해.”

아이는 그런 나를 보더니, 어딘가로 손짓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짓밟힌 인형이 있었다. 나는 허둥거리며 아이를 안아 든 채 인형을 들어 올렸다. 흙발에 밟혀 엉망이 된 인형은 뜯어져 솜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요셉 님,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맞아. 병원, 병원에 가야.”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떻게든 아이를 안아 들고 발을 옮겼다. 그런 나를 보던 집사님은 혀를 차더니 아이를 대신 안아 들었다. 나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모습이었기에 내가 안겠다며 굳이 실랑이하지 않았다. 집사님은 빠른 발걸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의료진은 아이의 모습에 기겁하곤 치료를 시작했다. 아이는 낯선 의료진으로 인해 조금 겁에 질린 것 같았으나 치료가 먼저였다.

“보호자님.”

“……아, 네.”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비척비척 다가가자 그는 나를 심각한 얼굴로 보며 열을 쟀다.

“보호자님도 열이 있으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내가 아픈가? 아픈 건가. 집사님이 정신이 없는 나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곁눈으로 보여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으나 집사님은 단호했다.

“약 놔드릴 테니까. 한숨 주무세요.”

“하지만…….”

“요셉 님, 도련님은 제가 돌보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집사님은 비어 있는 침대에 날 눕힌 후 내 어깨를 손으로 살며시 쥐었다. 그 따뜻한 온기에 놀랍게도 기분이 안정되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로서의 일을 하는 겁니다.”

“……네.”

자그맣게 대답해 수긍하자 집사님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울리세에게 가는 거겠지. 간호사가 팔에 빠르게 주사를 놓았고, 차가운 약이 팔에 주입되었다.

약에는 수면제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

꿈도 꾸지 않고 깨어난 나는 주변을 확인했다. 누워 있는 곳은 마지막으로 있었던 병실이 아니었다. 익숙해진 저택의 내 방이었다.

언제 이곳으로 옮겨진 걸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울리세와 집사님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불안해 부리나케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아이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급했고 그 덕에 큰 발소리가 났다.

“울리세!”

언제나 조심스럽게 열었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이는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이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나는 광인처럼 집 안을 뒤졌을지도 모른다.

“몸은…… 괜찮니?”

“…….”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몸에서 약 냄새가 진동했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좋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맞았던 것일까. 죄책감과 슬픔 때문에 마음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딘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는지 부목 같은 건 보이지 않았던 거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다행이야……. 미안해. 미안하다.”

안도하며 바닥에 주저앉자 엉망이 된 인형이 보였다. 울리세가 꼭 쥐고 있는 인형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이 지저분했다.

“인형이 엉망이 됐네……. 형이 고쳐줄게. 걱정하지 마.”

“……왜.”

나는 바람과도 같이 인형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울리세를 보았다. 아이가 놀란 나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투명한 그 눈에는 휘몰아치는 혼란이 담겨 있었다.

“왜…… 왔어?”

첫 만남 이후로 처음 듣는 목소리는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이유겠지. 감격에 차 울어버릴 뻔했으나 이내 대답을 위해 침을 삼키고 심신을 진정시켰다. 지금이 아이가 내게 준 기회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너를 찾으러 시내에 갔는지 물어보는 거야?”

“…….”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보호자가 자신을 찾으러 오는 것이 낯선 듯싶었다.

“그야 늦게까지 안 들어오니까 그랬지.”

아이의 눈에 의문이 가득 찼다. 아이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보호를 누리지 못한 울리세를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말했다.

“앞으로 형은 네가 늦으면 찾으러 나갈 거야. 아니, 앞으로는 함께 밖으로 나갈 거야. 혼자 다니는 건 너무 위험해.”

“……응.”

혹시 싫어할까 걱정했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내 손길을 거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옆에 앉았다.

“용돈은 잘 썼어? 부족하진 않았고?”

“……응.”

그 못된 녀석들에게 뺏겼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울리세가 쓴 모양이다. 우리는 한동안 조용조용히 대화를 했다. 그동안 견고하게 서 있던 벽이 어느 정도 허물어졌다는 점이 너무나 기뻤다.

더 대화하고 싶었지만, 아이의 몸이 아플까 봐 나는 망가진 인형을 들고 방을 나섰다. 아이는 나를 향해 손을 자그맣게 흔들었다. 고사리 같은 앙증맞은 두 손을 흔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 방에 되돌아온 나는 인형을 꿰맬 물건을 찾았으나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쩔까 하는 도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네?”

“접니다.”

집사님이었다. 하긴 집의 문을 두드릴 사람은 집사님 정도밖에 없다. 벌컥, 문을 열었으나 집사님은 문턱에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괜찮으신 모양이군요.”

“아……. 아! 맞아, 집사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병원도 그렇고 아까 울리세도 그렇고.”

“…….”

그제야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앉았고, 집사님은 내 앞에 마주 서 한참 동안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언가 이야기할 것이 있어 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결국 나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그에게 용건이 있었기에.

“집사님, 저 인형 꿰매야 하는데 혹시 바늘은 없나요?”

“……제가 꿰매 드리겠습니다.”

집사님은 방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안주머니에서 반짇고리를 꺼냈다. 왜 그것을 들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잘 어울리긴 했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 생각했었지만…… 난 바느질을 못 했다. 고작 단추 정도만 꿰맬 수 있는 내가 인형을 수선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집사님. 사실 저 바느질 못 하거든요.”

“…….”

“덕분에 살았어요.”

집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인형을 꿰맬 뿐이었다. 덕분에 방 안의 공기가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해졌다. 집사님은 왜 내 방에 찾아온 것일까.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생각할 때, 집사님이 드디어 꽉 다문 입을 열었다.

“요셉 님은 왜 도련님께 지극정성이시죠? 어차피 남 아닙니까?”

“어…….”

“지금까지 수많은 후견인이 있었습니다. 모두 도련님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목적 하나로 이곳에 왔었고…… 모두 떠나갔지요.”

메마르고 지친 감정이 그의 말에서 느껴졌다. 평소의 냉혈한 같은 이미지는 어디로 간 건지 그는 매우 지쳐 보였다. 젊은 외견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노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 헌신적이죠?”

“그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아이를, 울리세를 돌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처음 찾은 것이 후견인 서류였고 그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 같아서. 아이가 과거의 나 같기 때문이다.

홀로 남아 방치되어 한동안 삐쩍 말랐던 과거의 나. 나는 아이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와 나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 구조받았지만 울리세는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울리세를 구해주고 싶었다. 내가 언젠가 그랬듯.

하지만 그것을 모두 집사님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고 굳이 이런 얘기를 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니까. 결국 나는 싱긋 웃으며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아이를 박대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예뻐할 이유 또한 되지는 않습니다.”

집사님이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아이에게 헌신적이냐고. 오늘의 그는 꽤 집요했다. 평소의 냉혈하고 선을 긋던 행동이 오늘따라 그리울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든 아이가 저렇게 방치되어 있다면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안 그래요?”

집사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아는 듯싶었다. 나를 뚫어져라 보던 것도 잠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에는 수선이 다 된 인형이 들려 있었다. 정말 손이 빨랐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

“네?”

“더러워졌으니 인형은 세탁 후 드리겠습니다. 그럼.”

집사님은 내가 잡기도 전에 방을 나가 버렸다. 돌풍처럼 왔다가 사라진 그는 신기루 같았다. 나는 홀로 남은 방에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울리세를 싫어한다. 지금까지의 행동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까의 질문도 어떻게든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납득하고자 하는 마음에 던진 것 같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 눈은 뭐지.”

하지만 깊게 가라앉은 그 푸른 눈은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으며 상처를 드러내 애원하고 있었다. 아이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여기서 살면 살수록 집사님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에게는 나를 향한 경멸과 걱정이 공존했다. 너무나 복잡한, 미로 같은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미로에서 탈출하기 위한 명주실이 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예감이 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미궁에서 빠져나갔던 것과는 다르게 난 미궁의 미노타우르스에게 잡아먹힐 거란 걸.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직감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

문득 창문을 보았다. 내 입가는 알 수 없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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