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왕자를 위하여
1
얀씨 장편소설
목차
1장 계약
2장 벽(1)
3장 벽(2)
1장 계약
“오늘은 추천받은 게임을 해볼게요. <가장 아름다운 왕자를 위하여>? 뭐예요 이건?”
[배고파요: 요요 님, 드디어 RPG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전기구이: 와 드디어?]
[자본주의돼지: <속보> RPG팡인이 드디어 다른 장르를 개척하나.]
말하자마자 다다닥 올라오는 채팅에 순간 울컥했다. 내가 RPG 좀 할 수도 있지. RPG 재미있잖아.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한 게임이 RPG 정도밖에 없긴 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게임 스트리머다. 원래 이 길로 갈 생각은 없었다. 끔찍한 레드오션에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였으니까. 그러나 전공이었던 순수 미술은 더한 레드오션, 아니, 오션 자체가 없었다. 그곳은 운과 연고가 없으면 성공하기 힘들었다.
졸업 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던 와중 신기하게도 게임 방송으로 어느 정도 성공하게 되었다. 나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내가 RPG 말고 다른 게임을 하는 게 그렇게 신기해요?”
[그걸 이제알았냐 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만원 감사합니다……. 이제 알았냐니, 너무하네…….”
투덜투덜하며 게임을 구매해 컴퓨터에 설치했다. 어릴 때야 멋모르고 불법 다운로드를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가치관이 생성되어 게임을 정식 구매해 플레이한다. 정식 구매하니 업데이트 패치뿐만 아니라 한글 패치도 쉬워 너무 좋았다. 자본주의의 참맛이다.
“그런데 이거 무슨 게임이에요? 처음 듣는 게임인데.”
[MAAA: 육성 게임이에요! 프린세스 메X커랑 비슷한 거!]
“아~ 근데 저 그것도 안 해봤어요.”
채팅방은 육성 시뮬레이션으로 유명한 게임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냐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렇게 유명했나? 그래도 게임 스트리머를 하며 돈을 버니 앞으론 타 장르 자료 수집도 좀 해야겠네.
“아니, 프메를 안 한 게 말이 되냐니 안 할 수도 있죠. 그럼 님들은 어, <파이널 아타리아> 해봤어요? 어?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해요?”
[MAAA: 그건 또 뭔 아재 겜이야.]
“아재라니! 저 어릴 땐 핫했던 겜이거든요? 거참. 내가 아재가 아니라 님들이 어린 거라고요!”
나는 시청자들에게 아무 말을 하며 다운로드가 완료된 게임을 실행했다.
게임을 켜자 화려하고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음악이 흘러나왔다. 돈을 많이 들인 게임이었는지 퀼리티가 좋았다.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디자인된 메인 화면에는 귀엽기 그지없는 왕자가 있었다. 그림 담당이 영혼을 갈아 그린 듯한 퀄리티였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일러스트를 살펴보자 채팅방이 ‘ㅋ’ 자로 가득해졌다.
[반바지최고: 역쉬 우리 왕자님 얼굴은 남자도 홀리지, 암암.]
[AEE213: 저러다가 후견인 엔딩 보는 거 아님?]
“후견인 엔딩이요? 그게 뭐예요?”
[반바지최고: 아 그거 왕자랑 결혼하는 엔딩이에요.]
“네? 왕자 나이가 몇인데요? 제 캐릭터 성인 아니에요? 미성년자랑 결혼한다고요? 도둑놈 아냐? 미친 새끼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대답에 채팅방이 다시 한번 ‘ㅋ’ 자로 도배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한 것인데 도대체 뭐가 웃긴 걸까? 내가 갸웃거리자 한 구독자가 채팅을 썼다.
[반바지최고: 그건 모르는 일이죸ㅋㅋㅋㅋㅋㅋ 빨리 실행이나 해요!]
나는 그 채팅을 보고 나서야 게임을 켠 지 벌써 10분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 일러스트를 보고 있었단 사실에 부끄러워 얼른 게임을 실행했다.
[아이의 이름과 생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름과 생일도 바꿀 수 있구나. 생각보다 더 세심하네. 하지만 나는 귀찮았기 때문에 기본 설정 그대로를 유지한 채 실행했다.
[왕국 모르고스.
모르고스의 왕좌 계승법은 독특하다. 핏줄로 이어지거나 누가 먼저 태어났고 누구의 배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닌 재능, 능력의 우열에 따라 계승된다. 성별도 나이도 종족도 상관없이 가장 우수한 아이가 왕위를 계승한다.]
“아, 스토리인가.”
굉장히 독특한 계승법이었다. 저렇게 된다면 나중에 반란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걸까. 내가 신기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스토리는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당신은 타고난 책략가로 왕위 후보자 중 가장 재능 있어 보이는 아이를 골랐다. 그리고 오늘부터 그 아이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내가 왕으로 만든다고? 아, 육성 시뮬이었지…….”
오프닝 스토리가 끝나고 화면에 또다시 작화 퀼리티가 남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집사: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당신을 보좌할 집사입니다. 편하게 집사라고 불러주십시오.]
진보라색의 곱슬머리는 윤기 나며 반짝거렸고, 그 어떠한 보석도 영롱한 분홍색의 눈동자 앞에선 빛이 바랠 듯했다. 그린 사람도 사랑에 빠질 듯한 외모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저 그림일 뿐이어서 다행이었다. 현실에 있었다면 나는 사랑에 빠졌을 테니까.
[정신차려라 님이 2,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아, 미안해요. 집사님이 너무 잘생겨서. 세상에.”
[반바지최고: 아까 왕자보고 홀린 건 약과였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OZ234: 집사님 얼굴 최고존엄이긴 하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애기죽인: 아 얼빠 어디 안 간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키잡최고: 장르 바뀌는 거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쨈아범: 아니 부내 나; 더러워;]
채팅방이 혼란의 도가니탕이 될 것 같아 나는 집사를 보며 침을 흘리던 걸 멈추고 단호하게 말했다.
“뭘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다들 그만 싸우세요. 집사 그만 볼 테니까.”
채팅방은 싸우기 직전이었으나 다들 착하게 멈춰주었다. 다행이었다. 시청자가 싸우는 순간 사람들은 그저 말리기만 해도 누구의 편을 드니 마니 하며 스트리머인 나를 욕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쉬며 게임을 진행한 것도 잠시-
“……뭐라고?”
[집사: 현재 전 재산은 300골드입니다. 앞으로의 스케줄을 짜주세요.]
“……?”
내가 잘못 본 건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집사: 현재 전 재산은 300골드입니다. 앞으로의 스케줄을 짜주세요.]
“진짜로 300골드? 300골드라고 한 거 맞죠? 많은 건가? 실버랑 브론즈도 있나?”
RPG 게임을 주로 하다 보니 자연스레 게임의 화폐를 브론즈, 실버, 골드 순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게임이든 대부분 골드가 가장 큰 단위를 맡는다.
과연,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들지. 아무래도 아이를 키우는 게임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돈을 많이 주는 모양이다. 그래, 순진하게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반응에 채팅방은 뒤집어졌다.
[역키잡최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쨈아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많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AAA: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이순간을즐겨 님이 3,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설마 여기…… 골드가 끝이에요?”
[역키잡최고: 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거 밥 먹으면 끝임ㅋㅋㅋㅋㅋ]
믿을 수 없다. 아이를 키우는 게임인데 돈을 그것밖에 안 주다니. 내가 키우는 아이는 이 나라의 왕자 아닌가? 그렇다면 나라에서 받는 돈이 분명 있을 거다. 그런데 이것밖에 주지 않는다고?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A2314: 알바 시켜야죸ㅋㅋㅋㅋㅋ애 돈 벌러 보내야 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애를요? 아기 아까 메인 화면에 걔 아니에요? 왕자 아니었어?”
당황스러워 화면을 전환해 아이를 확인했다. 아이는 메인 화면의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연보라색의 요정 같은 머리칼은 곱슬해 귀여움을 더했고 짙은 로열블루의 눈동자는 핏줄의 고귀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이는 10살이었다.
“미친 거 아냐?!”
나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가 화를 내자 채팅방이 더욱 ‘ㅋ’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을 아이가 충당하게 하다니. 이것은 엄연한 아동 학대의 현장이었다! 아무리 게임이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콧김을 씩씩 뿜으며 게임 창을 잠시 최소화했다.
[개돼지: 뭐 하는 거임?]
[예나선정이딸: ???갑자기 인터넷은 왜 킴?]
나는 채팅창을 무시하고 검색을 시도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울리고, 내가 무엇을 검색했나 시청자들이 봤는지 또다시 ‘ㅋ’이 채팅창에 범람했다. 시청자들이여, 마음껏 웃어라. 나는 진심이다.
[가장 아름다운 왕자를 위하여 돈 치트]
[제작사님여기요 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아, 조용히 해요. 애를 키우는데 어? 애한테 알바를 시키는 게 말이 돼요?”
나는 게임 창을 켜 스케줄 탭을 켰다. 그곳에는 뻔뻔하게도 공부 밑에 아르바이트라고 당당히 쓰여 있었다. 애초에 이 게임은 미성년자를 돌보긴커녕 일자리로 보내 생활비를 충당케 하는 비인도적인 설계가 전제였다.
“이것 봐요, 이 목장 보여요? 애가 무슨 목장입니까? 목장에 가서 뛰어놀고 동물과 교감하는 그런 거면 몰라. 여기서 일하면 뭘 하겠어요? 무거운 거 나르고 그러겠지. 그러다가 몸 망치는 거예요!”
[반바지최고: ㅋㅋㅋㅋㅋㅋ미친 거 아냨ㅋㅋㅋ 과몰입 오타쿠임? ㅋㅋㅋㅋㅋ 벌써 왕자 최애얔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아니. 저는 지극히 정상이란 말이에요오오.”
내가 울먹거리는 흉내를 내며 말꼬리를 길게 늘였지만, 사람들은 웃기 바빴다.
다들 내가 웃기다 이거지? 나는 오기가 생겨 다시 검색 창을 켜 치트를 찾았다. 그러나 게임에 쓸 수 있는 치트는 찾을 수 없었다.
[예나선정이딸: 원래 이 게임이 치트가 안 먹히기로 유명해요ㅋㅋㅋㅋㅋㅋ그냥 하시는 겤ㅋㅋ]
“안 해보곤 모르잖아요!”
결국 가장 간단한 메모리 에디트 툴을 다운받았다. 프로그램 내부의 수치를 찾아서 변경해 주는 건데 사용법은 아주 간단했다. 시청자의 말에 따르면 안 먹힐 가능성이 컸으나 나는 시도라도 할 생각이었다.
“300골드가 뭐야, 300골드가. 공부가 하루에 60골드인데 미친 거 아냐? 알바 시급은 왜 이래? 하루에 12골드? 여기 시세 왜 이래?”
투덜거리며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나는 분노에 가득 차 프로그램 창에 숫자 9를 한가득 늘어놨다. 그리고 엔터.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 되는데요? 아까 안 된다는 사람 누구예요? 되는데?”
[예나선정이딸: ????? 어?????]
[제작사님여기요 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채팅방은 아까와는 달리 물음표가 가득했다. 반응을 보면 안 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300이 999,999,999가 된 모습을 보니 내가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했다. 그래, 이 맛에 치트를 쓰는 거지.
“이제 애 잘 키울 수 있겠네요! 저장~ 저장~”
콧노래를 부르며 저장하는 그때, 컴퓨터 전원이 갑작스레 꺼졌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컴퓨터를 재부팅하려 했으나 켜지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스트리밍 사이트로 들어가 긴급 모바일 방송을 켰다. 조그마한 창에 켜지지 않는 컴퓨터가 비쳤다.
“여러분 갑자기 컴퓨터가 나갔어요. 오늘 방송 못 할 것 같아요…….”
[반바지최고: 치트 써서 벌 받은 거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
[AA11: 제작사 단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잇, 조용히 해요. 일단 빨리 수리 맡기고 고쳐지는 즉시 다시 원래 방송대로 진행할게요. 죄송해요.”
채팅방은 괜찮다는 말이 가득했다. 나는 짧게 인사하고 방송을 종료했다. 원래대로라면 새벽까지 해야 할 방송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종료된 탓에 할 일이 없어 심심했다. 옛날이라면 컴퓨터가 없어 고통스러웠겠지만 핸드폰이 있는 현대인은 무서울 것이 없다.
나는 빠르게 온라인 수리 접수를 맡기고 침대에 늘어졌다.
“잘생겼었지…….”
머릿속에 단 한 번 봤었던 집사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잘생기고 예쁜 얼굴에 약한 나에겐 치명적일 정도의 외모였다. 컴퓨터가 고쳐지면 계속 집사의 일러스트를 봐야 할 텐데 처음 볼 때처럼 넋을 놓았다간 또 채팅방이 난리가 날 터.
‘그래, 이건 방송을 위해서야.’
나는 집사의 얼굴에 익숙해지기 위해 인터넷에서 집사의 일러스트를 찾아 핸드폰의 배경 화면으로 설정했다.
“흠……. 잘생겼다.”
잘생긴 외모가 화면에 들어차니 세상이 환해 보였다. 집사의 얼굴을 전국에 배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자체 발광이 되니 전기가 필요 없을 텐데. 나는 한참 주접을 떨며 핸드폰을 보고 히죽거리다가 잠에 빠졌다. 오래간만의 이른 숙면이었다.
* * *
“……어?”
그리고 눈을 뜨니 눈앞에는 웬 종이 뭉텅이가 있었다.
마치 보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은 두꺼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선명한 게 꿈치고 굉장히 생생했다. 오랜만의 개꿈인 듯싶었다.
[<가장 아름다운 왕자를 위하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용 약관 동의]
제1조……? 뭐야, 이건. 이용 약관 동의?
게임할 때 자주 보이는 이용 약관이 꿈에 나오다니 너무 많은 게임을 했던 모양이다. 앞으론 게임을 좀 줄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요즘 그거로 밥 먹고 사는데……. 뭐야, 어떻게 해야 하지?
대충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고 마지막 장을 펼치자 눈앞에 뿅, 하는 소리와 함께 볼펜이 나왔다.
“사인하라는 건가?”
종이 맨 밑에는 동의하시겠습니까? 라는 문구가 있었다. 네모 체크 박스와 이름, 사인까지 넣는 칸이 있었는데 원래 게임에서 보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참 꿈다웠다.
꿈인데 뭘 못 하겠냐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주 활기차게 네모 박스에 체크했다. 박스 밖으로 튀어 나간 체크 표시가 참으로 힘찼다.
“김…… 요…… 셉…….”
이름 석 자를 정성스럽게 쓰고 사인까지 하니 잘 써진 캘리그래피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개꿈이었지만 이 정도의 만족감을 줬으니 꽤 좋은 꿈이 아닌가 싶다.
그 순간 갑자기 사인한 종이가 불타 사라졌다. 깜짝 놀라 손을 살폈지만, 고통도 상처도 없었다.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엥?”
허공에 이상한 알람이 떠올랐다. 꿈이 정말이지 게임다웠다. 일어나면 중독 상담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면 상태가 심각했다.
[계약을 이행합니다!]
[오류] [오류] [오류]
[오류] [오류] [오류]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오류 창이 허공을 가득 메웠고 이 개꿈은 언제 깨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전혀 모르는 곳에 서 있었다. 꿈이 그렇듯 갑작스러운 장소 이동이었다.
열려 있는 창가로 산들거리는 꽃향기가 실려 들어왔다. 나무로 된 창틀은 현대에선 보기 드문 형식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종이에 사인했던 장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가 서 있는 곳은 낯선 침실이었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사실적인 감각은 덤이었다.
“……이게 뭐지.”
손을 들어 볼을 죽 잡아당겼다. 꿈이란 걸 확인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었다. 늘어난 볼은 아릿하게 아팠다. 하지만 내 주변은 여전히 낯선 침실이었다.
다시 말해, 여전히 나는 꿈속이었다. 하지만 아프다면 현실이란 건데 왜 나는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어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꿈도 있는 걸까?
“……납치?”
꿈보다는 타당한 상상이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창문가로 다가갔다. 납치였다면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옳으리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막혀 있는 공간일 거란 상상과는 달리 창의 너머에는 도시가 있었다.
“…….”
사람들은 벽돌로 고르게 깐 바닥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삶의 터전으로 걸어갔다. 어린아이들은 밝게 웃으며 손잡고 뛰어놀았다. 길가의 아카시아 나무는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아름다웠다. 창가로 날아온 달콤한 향기는 아카시아 꽃 냄새였던 모양이다.
“……납치가 아닌가?”
창문은 보란 듯이 열려 있었으나 어느 정도 높이가 있었다. 그러나 2층 정도의 높이였기에 뛰어내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혹시나 해 방문 쪽으로 걸어가 열어보았는데 그 또한 잠겨 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뭐지.”
방 안의 거울에 의아한 얼굴을 한 내가 비쳤다. 평범한 흰 티에 면바지. 내가 잘 때 입었던 옷이었다. 생긴 것도 나였고, 다친 곳도 없었다. 나는 결국 이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얻은 것은 신분증과 수첩, 그리고 서류였다.
……왠지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과 유사하네. 그러니까 빙의나 환생, 차원 이동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수첩을 들어 펼쳤다.
“일단 수첩을 읽어볼까.”
팔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양장 노트가 넘어갔다. 그러나 중요해 보이는 정보는 없는 듯했다. 그날의 저녁 메뉴 같은 시시콜콜한 메모들 정도가 다였다.
얼굴을 찌푸리며 계속해 페이지를 넘기자 마지막쯤에 뭔가 눈에 띄는 메모가 보였다.
[피후견인 선택 2/1일.
울리세.
4/1 면담.
4/5 입주.]
“후견? 입주? 울리세?”
알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어쩐지 느껴지는 기시감에 등골에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흘렀다. 후견, 울리세. 이 모든 것은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아동 착취 게임?”
자기 전에 잠깐 했던 그 게임이었다. 설마…….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볼을 꼬집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수첩을 닫고 서류를 확인해 보았다.
[재산 목록: 999,999,999G]
“……나 부자네.”
정확히 방송 도중 치트로 적용했던 돈이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다른 서류를 보았다.
“후견인 인정 서류?”
서류에는 내 인적 사항, 그리고 내가 후견하게 될 아이의 신상과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연보라색의 곱슬한 머리칼과 짙은 로열블루의 눈동자. 게임을 켰을 때 보았던 사랑스러운 아이와 비슷했지만, 사진에 있는 모습은 어쩐지 초췌했다.
“……하.”
어안이 벙벙하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하지만…… 볼을 꼬집었을 때의 통증과 여전히 맡아지는 달콤한 향기, 그리고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 등. 아까부터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이 꿈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 인정하자. 여기가 게임 속이 아니라면 이 상황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인정하려고 했지만, 머리 한구석에선 현대인인 내가 비명을 질렀다. 과학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이 상황은 역시 조금 힘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와 물건들을 챙겼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은 4월 5일이었다. 한 장씩 뜯어내는 형식인 옛날 달력은 수첩에 적혀 있던 입주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가 되든…… 일단 가봐야지.”
게임 속이라면 게임처럼 행동하면 될 터이다. 게임에 들어온 것치곤 UI 같은 게 보이지 않았으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예상은 갔다. 진짜 현실에서 했던 게임이라면 퀘스트 창이라도 켜지지 않을까 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서류에 적힌 집 주소는 외우지 못할 것 같아 움직이려다 말고 쪼그려 앉아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밖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내 옷은 튈 것이 분명하니까.
다행히 옷장에 와이셔츠와 베스트 같은 옷이 있었다. 미묘하게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옷을 입으니 왠지 촬영 현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준비를 마친 듯해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방 안에서 찾은 작은 가방에 서류를 넣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아마도 내 소유인 듯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담하지만 살기 좋아 보였다.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주거지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어떻게 되든 내 수중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있다. 두려울 것이 없다.
나는 먼저 은행에 들러 돈을 조금 찾았다.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였다. 다행인 점은 사람과 말이 통한다는 것이다. 글 또한 읽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텐데.
은행을 나온 나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마차 대여소를 찾아갔다. 저 멀리서 증기기관차가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는 있지만 아직 자동차는 없는 시대인 것 같았다. 굳이 따지면 1,800년도의 영국과도 같은 느낌?
하지만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형형색색인 걸 보면 잘 모르겠다. 겉만 비슷해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 시대보다 더 발전되어 보이는 것도 몇몇 개 있었다. 높이 솟아오른 빌딩과 건물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어디로 가쇼?”
“여기로 가주세요.”
수첩에 적힌 주소를 보여주자 마부는 어렵지 않게 읽곤 마차를 끌었다. 덜컹거릴 줄 알았으나 길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인지 부드럽게 나아갔다.
마차는 꽤 오래 달렸다. 번화한 도심을 거쳐 외곽까지,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나무가 울창히 자란 곳으로 달렸다. 그곳까지도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내 엉덩이는 3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왔쇼.”
“감사합니다.”
나는 가방에서 지폐를 대충 집어 꺼내 주었다. 시세를 몰라 왕창 내민 돈에 마부는 굽실거리며 인사하곤 떠나갔다. 시세보다 많은 돈이었나 보다.
마주한 집은 어쩐지 음침했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져 그런지 집에는 빛이라곤 한 줄기도 닿지 않았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마치 마녀의 집 같았다. 어두운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주택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저만한 크기의 집에 하물며 아이가 살 텐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누구십니까?”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제비꽃처럼 우아한 보라색의 머리. 바다의 한복판을 그대로 담은 듯한 파란 눈동자. 옥같이 투명한 흰 피부. 내가 게임을 하면서 정신없이 보았던 집사님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집사님에게서 느껴졌다. 어딘가…… 무언가가 내가 알던 것과 다른 것 같은데…….
“누구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게임에서야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보아도 괜찮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니었다. 나는 무례함을 사과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 큼큼…… 요셉, 김입니다. 후견인으로 왔습니다.”
“……후견인?”
집사님은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하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내 날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과 마주쳤다. 강렬하기까지 한 그 시선에 나는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끝낸 것은 나였다.
“……저, 왜 그러시는지.”
집사님은 왜인지 몰라도 당황한 듯 견고했던 무표정이 무너졌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혼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음같이 단단한 표정이 되돌아왔고,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류.”
“네? 아, 증명 서류요?”
집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방을 뒤적여 서류를 주었다. 집사님은 서류를 받아 들곤 몇 번이고 읽더니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는지 돌려주었다.
“이쪽으로. 도련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왕자님인데 도련님이라고 부르나요?”
집사님은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몸을 멈춰 세우고 나를 보았다. 표정은 한겨울처럼 차가웠다. 게다가 눈에 서린 그 한심함이란. 멍청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이 나라에 왕자와 공주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 건 계승 후보자로 최종 결정된 사람뿐입니다.”
“아…….”
“그런 기본적인 사항도 모르고 어떻게 후견인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쯧.”
집사님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을 잡은 손에는 검은색의 반장갑이 끼워져 있었는데 길쭉한 손에 참으로 잘 어울렸다.
어쩐지 빈정거리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 나는 뒤따라가며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속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재수 없게 구는 것은 내가 멍청하게 굴었기 때문이겠지. 하긴, 내가 멍청하긴 했다. 게임을 한 시간도 채 하지 못해서 설정을 몰랐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얼마나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상식을 공부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어느 한 방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네.”
들어선 방은 응접실인 듯했다. 대개의 집이 그렇듯 응접실은 가장 좋은 위치에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위치했을 거다. 손님맞이를 어두컴컴한 곳에서 하진 않으니까. 창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어 방 안은 깜깜하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창을 가린 커튼을 걷자 먼지가 풀풀 날렸다.
“콜록콜록.”
하지만 생각과 달리 주변의 나무 때문에 빛은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환기라도 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기름칠을 안 한 지 얼마나 된 걸까. 창문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삐걱거리며 열렸다.
“후…….”
“큼.”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헛기침이 들렸다. 뒤돌아보자 응접실의 문 쪽에 언제 온 건지 집사님이 서 있었다. 집사님은 눈이 마주치자 한 발짝 옆으로 움직여 뒤에 있던 조그마한 아이를 보여주었다.
“…….”
“이분이 후견인님이 후견하시기로 결정한 울리세 도련님입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리세를 보았다.
분명 내 기억상의 아이는 포동포동하고 발그레한 장밋빛의 사랑스러운 볼과 갓 피어난 싱그러운 꽃처럼 윤기 나는 머리칼, 세상의 빛을 모아 반짝이는 사파이어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아이는 달랐다.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채 푸석푸석한 연보라색의 머리를 중구난방으로 길러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옷 너머로 보이는 몸은 그야말로 뼈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움의 사 자도 찾아볼 수 없는…… 피골상련 그 자체였으며, 과거의 내 모습과 유사했다.
“……지금이라도 후견인 자격을 물리시려면.”
“저기, 얘.”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아이는 겁이 나는 것인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한참이나 큰 내가 서 있으면 아이가 무서울 것 같아서였다.
“배는 안 고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