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6/18)

2.

아서는 친절하게도 엘리엇의 짐을 직접 마차에 실었다. 혹여나 릴리벳이 짐을 빼돌리거나 엘리엇의 마음을 바꿀까 봐서 우려하는 눈치였다. 그렇게까지 못 믿을 건 없지 않나.

방해 없이 엘리엇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이 지나친 그는 엘리엇이 남은 일행과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먼저 마차에 올라서 엘리엇을 기다렸다. 멀고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작별 인사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엘리엇이 마차에 오르자마자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부에게 출발을 지시했다.

어떤 수를 썼는지 마부는 보통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달렸다. 아무래도 아서에게서 특별한 보상을 약속받은 듯했다. 속도가 빠른 탓에 마차는 많이 흔들렸다. 즉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뿐더러 때때로 전신에 충격이 왔다. 등이 아팠다.

“등이 아파. 속도를 줄여.”

말을 꺼내자마자 아서가 엘리엇의 곁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아서는 엘리엇의 어깨를 팔로 감싸더니 제 쪽으로 쓱 끌어당겼다. 그러니 덜 흔들려서 제법 안락했다.

“괜찮아?”

“아까보다는.”

“기대고 있어.”

거대한 덩치기에 기댄 제 몸이 무거울까 봐서 걱정할 일도 없었다. 엘리엇은 그에게 기댔다.

“대단히 친절하군.”

“비꼬지 말아.”

아서는 엘리엇을 단단히 끌어안으면서 타박했다.

“비꼰 거 아니야. 의외라서 그런 거지.”

“난 언제나 너에게 친절했어.”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눈을 살짝 치켜뜨자 아서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적어도 마음은 그랬어. 네가 날 너무 증오하니까 어쩔 수 없이….”

“네 악업은 전부 내 탓이라는 거군.”

“전부 거짓은 아니잖아?”

반문이 돌아왔다. 잠시 생각하던 엘리엇은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일정 부분은 인정하지.”

“대단히 너그러우신데.”

“비꼬지 말아.”

“비꼰 거 아니야.”

“따라 하지 마. 유치해.”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난 네 앞에서는 언제나 유치해. 사랑하니까.”

“사랑한답시고 갖은 핑계를 다 대는군.”

눈살을 찌푸리긴 했어도 어쩐지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모처럼 연인이 되었는데 굳이 싸워서 무엇 하겠나. 유치한 행각을 해도 미워지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잘 거야. 로드니아에 도착하기 전까진 깨우지 말아.”

“걱정하지 말아. 내가 있는 한 누구도 네게 손대지 못해.”

“네가 건드릴까 봐서 걱정인 거야, 네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건드리지 않겠다는 대답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간.

때때로 얼굴과 손을 지분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종종 이마 끝에 따뜻하고 탄력적인 것이 닿았다가 떨어지기도 했다. 마치 새로 선물 받은 인형의 드레스 자락을 보듬는 소녀의 사랑스러운 손길 같았다. 물론 상대는 사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시커먼 남자고 이쪽도 드레스 따윈 걸쳐 본 일도 없는 남자라는 점이 문제지만. 단둘만 있는 공간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사랑해.”

귓가에 들리는 속삭임이 무척이나 달콤했다. 덕분에 좋은 꿈을 꾸었다.

오후에 출발했기에 로드니아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한나절 마차 여행을 했을 뿐인데도 멍 때문에 그런지 온몸이 굳어서 고통스러웠다. 제 발로 일어서기도 힘들어 결국 아서의 품에 안겨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로우드 남작 댁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익숙하여 제 침대만큼이나 편안한 아서의 침대에서 느긋하게 쉬었다. 옷도 구두도 전부 아서가 일일이 벗겨 주었다. 아서는 심지어 엘리엇의 몸에 서늘한 로드니아 밤기운이 스며들지 않도록 인간 난로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의 든든한 몸에 안기는 기분이란.

“완전히 어린애 취급이군.”

“어린애 취급이 싫다면 계란에 설탕 대신 후추를 뿌리는 게 어때?”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남자였다. 엘리엇은 품을 열어 주는 남자에게 안기면서 속삭였다.

“아프니까. 후추보단 설탕이 좋아.”

“그럴 줄 알았어.”

빙긋 웃음이 그려진 입술이 엘리엇의 눈가에 닿았다.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눈을 반짝 떴다. 같은 베개를 벤 구릿빛 피부를 가진 미남의 멋진 마스크가 숨결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똑같이 엘리엇을 빤히 보던 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그 ‘아서’와 이럴 수 있다니. 정말 순간순간이 새로워서.”

“나도 마찬가지야. 그 ‘엘리엇’이 이렇게 순순히 내 곁에 누울 줄이야.”

강인한 얼굴에 은은한 감동이 피어올랐다. 엘리엇은 제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이런 신기함이 얼마나 갈까.”

“꽤 오래. 적어도 너와 싸우지 않고 잠드는 밤이 당연해질 때까지는.”

“너무 빨리 적응해서 지루해지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럴 일 없어. 그리고 지루해져도 상관없잖아.”

“상관이 왜 없어?”

엘리엇의 물음에 아서가 대답했다.

“원래 반려는 익숙해지는 거야. 그 지루한 익숙함이 궁극적 사랑이라고.”

“못 말릴 로맨티스트로군.”

“싫어?”

아서는 꼭 좋고 싫은지를 따져 묻는다. 그러지 않아도 될 때가 되었는데. 아니, 아직은 그만큼은 아닌가? 엘리엇은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

그러곤 아서가 더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키스로 입을 막아 버렸다.

입술을 열고 혀를 얽었다. 아서의 손길은 엘리엇의 전신을 쓰다듬었다. 의사가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고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밤새도록 엘리엇을 가졌을 것이다. 얇은 잠옷 바지 위로 불룩 솟아오른 그의 성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엘리엇은 손을 아래로 내려 아서의 발기한 물건을 잡았다. 키스에 몰두하던 아서가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하, 만져 줄까?”

“이미 만지고 있잖아.”

약간 구겨진 이마에서 다급함이 흘러내렸다. 엘리엇은 입술을 다시 겹치면서 아서의 성기를 마음껏 주물렀다. 빛에 그을린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낮은 비음이 흘렀다. 뿌리에서부터 끝까지 천천히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 굵은 핏줄이 걸릴 때는 일부러 꾹 힘을 가하기도 했다.

“큭… 후.”

아서의 절정은 놀라울 만큼 순식간이었다.

젖은 손을 들어 올리자 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 물수건을 적셔 와 엘리엇의 손을 닦았다.

“아침에도 했는데 이렇게까지 빠를 줄이야. 열여섯 살도 아니고.”

“네가 야하게 만지니까 그렇지.”

가스 등불에 비친 아서는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었다. 단순히 성적 흥분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평소와 태도가 조금 달랐다. 엘리엇과 눈길을 못 마주쳤다.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누가?”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갑자기 발끈하는 모습에서 확신했다.

“음흉한 변태가 첫 몽정을 한 소년처럼 부끄러워하다니.”

“아니라니까.”

물수건을 팩 팽개치는 그를 보며 엘리엇은 옆 빈자리를 툭툭 쳤다. 아서가 순순히 와서 몸을 눕히는 순간 엘리엇은 그의 붉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귀여운 건 너겠지.”

“툴툴대는 모습까지 귀여워.”

“그만해.”

고개를 돌리는 아서가 너무 웃겨서 엘리엇은 쿡쿡 웃었다. 눈앞에 있는 귓바퀴가 점점 더 빨개졌다. 그 모습이 마치 잘 익은 사과 같아서 엘리엇은 이를 세워 아서의 귓바퀴를 꼭 깨물었다.

“아프잖아.”

“사랑해.”

엉뚱한 대답에 아서가 결국 졌다. 그는 엘리엇을 보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짧고 가벼운 키스가 이어졌다. 손으로는 서로의 구석구석을 지분거렸다. 한참 장난을 치다가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다음 날 정오가 지난 시각. 눈을 떴더니 엘리엇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어나서 씻고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었을 때 아서가 돌아왔다. 엘리엇이 자는 사이 그는 레이디 클레어가 써 준 소개장을 들고 의사를 만났다. 곁에는 의사가 함께였다.

청진기로 멍이 든 등 곳곳을 청진한 의사는 문진에 촉진까지 마친 후에 진단을 내렸다.

“뼈는 이상이 없습니다. 근육이 상할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고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요양하세요. 하루에 두 번 냉찜질하고 연고를 꾸준히 바르세요.”

역시 예상한 대답이었다. 의사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연고를 하나 주고는 떠났다.

“다행이야. 꼽추가 되는 줄 알았어.”

내심 걱정하였기에 엘리엇은 안도하며 벗었던 셔츠를 도로 입었다.

“레이디 클레어의 친척분은 대단히 운이 없으셨어. 아니면 내가 젊어서 다행인 건가.”

“그걸 믿어?”

“뭐?”

아서가 쿡쿡 웃었다. 그에 엘리엇은 입을 쩍 벌렸다.

“허풍이야?”

“당연하지.”

세상에. 고귀하신 숙녀분이 허풍을 친다고? 그것도 없는 친척을 만들어 내서 꼽추가 되었다느니 하는 흉악한 거짓말을?

“…레이디 클레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레이디라도 입과 뇌가 있으니 하고자 한다면 허풍 정도는 치겠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분이 어떻게 그런… 네 짓이군.”

대번에 원흉을 찍어 냈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클레어가 갑자기 소개장을 써 준 일도 의심스러웠다.

“방금 다녀간 의사가 진짜 낙상 전문가는 맞아?”

“아마도?”

“아마도?”

“낙상으로 유명한 사람을 수소문했거든.”

“이런 사기꾼들.”

오만상을 찌푸리는 엘리엇을 향해 아서가 뻔뻔한 웃음을 지었다. 아주 작당한 것이었다.

“소개장 내놔 봐.”

“무슨 소개장.”

“레이디 클레어가 너에게 준 것.”

손을 척 내밀자 아서는 약간 주춤했다. 반보 앞서면서 침묵으로 강요하자 아서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제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편지 봉투를 꺼냈다. 엘리엇은 봉투를 냉큼 낚아채 안에 든 걸 꺼냈다.

‘친애하는 글래스턴 씨.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벌이는 유치한 소동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군요.

얼른 내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해요. 그리고 이것으로 그가 당신과 저 사이에 품은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C-

PS. 그도 함께 배를 타는 건가요?’

“이게 뭐야?”

“뭐긴. 레이디 클레어의 조롱이지.”

믿기 힘들어 빠르게 다시 읽어 내렸다. 진짜 조롱이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네가 레이디 클레어와 무슨 사이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때가 되었어. 그리고 배 얘기는 뭐지?”

엇나가던 마음이 통하는 바람에 자세하게 캐묻지 못하고 미뤄 두었던 얘기였다.

소개장에 적힌 내용상 레이디 클레어가 아서와 엘리엇의 관계를 아는 건 명확했다. 엘리엇이 아는 레이디 클레어와 아서의 관계는 오해라고도 했으니.

레이디 클레어와 아서가 무슨 일로 얽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서는 그녀가 타인의 사적인 일을 함부로 발설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 눈치였다. 또 뭔가를 함께 작당한 만큼 아서가 레이디 클레어의 약점도 잡고 있으리라. 아서 글래스턴은 능히 그럴 만한 인간이므로. 다만 그 모든 일에 자신이 배제된 점이 엘리엇은 못마땅했다.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했는데.”

“그럼 이 자리에서 죽이면 되는 건가? 그럼 들을 수 있어? 네 권총이 어디에 있더라.”

소개장을 접는 것과 동시에 엘리엇은 주변을 둘러보며 권총 보관 상자를 찾았다.

아서는 고리대금업에 신대륙 광산 개발 같은 거칠고 위험한 일을 해서 그런지 항상 무기를 가까이에 두었다.

침실에 놓는 작은 보조 테이블 위에 특별한 표식 없는 적당한 크기의 나무 상자가 있었다.

“아하. 저거군.”

궐련 혹은 개인 편지 따위를 보관하기 위한 상자의 뚜껑을 올리는 순간 검은 총신이 보였다. 어느 틈에 곁으로 다가온 아서가 상자를 거칠게 닫았다. 하마터면 엘리엇의 손가락이 낄 뻔했다.

“레이디 클레어에게 배편을 알아봐 주기로 했다.”

“그건 이 소개장 추신만 봐도 유추할 수 있는데.”

“신대륙으로 가는 배편이야.”

“너에게 몰래 알아봐 달라고 할 배편이 그 외에 있을까?”

정말로 궁금한 건 레이디 클레어가 왜 하필 아서와 함께 신대륙으로 가느냐는 점이었다.

고귀한 레이디가 젊은 외간 남자와 함께 신대륙으로 가는 사건이 가끔 발생했다. 대부분은 주변의 눈과 가문의 반대를 피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머나먼 땅으로 떠나는 사랑의 도피였다.

아서 글래스턴은 부유한 사교계 명사라 대부분 가문에서 교제를 환영한다. 그러나 왕가 정도 되면 말이 달라진다. 출신이 불분명할뿐더러 설사 죽은 대령의 진짜 유복자라고 해도 고작 대령의 아들 따위는 황녀의 손녀인 ‘레이디’와는 신분이 맞지 않는다.

현재도 둘이 가까이 지내는 일로 사교계에 각종 소문이 무성했다. 허풍을 잘 치는 불량 레이디와 협잡꾼이 무슨 이유로 공공연하게 몰려다닐까. 아서의 연인으로서 엘리엇은 알 권리가 있었다.

“레이디 클레어는 모험을 원해.”

“모험?”

“그래. 로드니아 생활에 진저리를 치는 중이지.”

“고작 그걸로 너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려고 한다고? 그러면 레이디의 평판도 땅에 떨어져서 가문에서도 쫓겨날 거고 생활도 엉망이 될 거야.”

“‘고작’이 아니지. 가문에서 못생기고 멍청하고 난봉꾼 기질까지 있는 외국인과 결혼시키려 든다면.”

“뭐?”

“레이디 클레어는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서 도피하는 거야.”

설명이 이어졌다.

레이디 클레어의 가문은 겉보기엔 화려해도 내실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방탕한 도박 생활과 어머니의 사치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심지어 레이디 클레어의 할머니인 황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처지였다. 황녀도 처음에는 계속 도와주다가 나중에는 감당이 되지 않아 역정을 내면서 자식 내외와 갈등을 빚었다. 끝내 더는 돈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궁지에 몰린 부부는 한 가지 묘수를 내었다. 바로 사교계에서 큰 인기를 끄는 딸을 거부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다. 황가 방계로 태어난 만큼 정략혼에 대해서 크게 거부감이 없던 레이디 클레어도 처음에는 수긍했었다. 차라리 부모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부부가 딸의 결혼 상대에 관해 오로지 재산만 따진다는 점이었다. 실질적 결혼 당사자인 레이디 클레어에겐 최악인 상대만 골라 들이댔다. 추악하게 생겼거나 성질머리가 너무나도 고약하거나 혹은 너무 늙은 남자였다.

그 끔찍한 후보 중 하나가 아서의 고객이었다. 입이 가벼운 남자 덕분에 아서는 레이디 클레어의 난처한 처지를 알게 되었다.

“가출을 도와주기로 했어. 대신 레이디 클레어는 내게 황녀를 비롯한 여러 귀족을 소개하기로 하고. 레이디 클레어의 진취적인 성정은 황녀 전하께 물려받은 것이 분명해. 그분은 다른 귀부인들은 잔인하고 무섭다고 싫어하는 신대륙 얘기를 엄청나게 즐겁게 들으셨거든. 내게 호감을 보이시더군.”

“황녀를 소개하다니.”

엘리엇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녀 전하는 사교계의 명사 중 명사였다. 그분의 눈에 든 이상 사교계 진입은 순식간이었다. 백작과 깊은 친분을 쌓은 경로도 이제 알았다. 분명히 황녀가 귀띔을 해 줬으리라.

아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단하지? 물론 레이디 클레어가 내게 관해 좋게 얘기해 준 덕분이야. 대신 레이디 클레어의 신대륙 인맥은 내가 책임지기로 했지. 아무리 신대륙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레이디가 갑자기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또 고귀한 레이디의 존재는 신대륙 사교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거야. 거기 사람들은 황족과 귀족에 대해서 호기심이 크거든.”

사교계에서 발을 넓히는 일은 쉽지 않다. 레이디 클레어와 함께 어울린 이유는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엘리엇이라도 그런 기회를 놓치진 않을 거다. 다만 이대로라면 아서는 공개적으로 레이디 클레어의 남자로 낙인찍힌다.

“그럼 네가 레이디 클레어와 사랑의 도피를 한 것으로 알려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사랑의 도피란 얘기는 삼가 줘. 소름 돋아.”

정말로 그렇다는 듯이 아서가 진저리를 쳤다.

“레이디 클레어를 신대륙까지 데리고 갔다가 어느 정도 자리만 잡으면 바로 돌아올 거야.”

“그래도 한번 생긴 소문이 잦아들 때까진 오래 걸릴 거야. 거기다가 혼자 돌아오면 자칫하면 사랑의 도피까지 한 레이디를 먼 땅에 버린 천하의 막돼먹은 종자가 될 수도 있다고.”

“내 평판을 걱정하는 거야?”

“그야 네가 쓰레기로 낙인찍히면 함께 다닐 수가 없잖아! 내 평판도 있는데.”

엘리엇의 항의를 아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넌 내 평판이 땅에 떨어지면 나를 버릴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공공연하게 다니기 어렵단 얘기야.”

“왜?”

“그러니까.”

너무 당연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서를 엘리엇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잠시 침묵하는 사이 아서는 심기가 뒤틀렸는지 팔짱을 꼬았다.

“아하. 전부터 넌 그랬지. 내 출신이 천하다는 이유로 괄시했어. 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부를 쌓고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어도 네 성에 차진 않겠지. 나는 그래 봤자 사창가의 사생아일 뿐이니까.”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럼 뭐지?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내가 중요하기에 평판만을 따지잖아. 내가 파산하고 사교계에 드나들지 못하게 되면 넌 나를 버릴 건가? 아니, 물어볼 것도 없이 버리겠지. 사실 나랑 이렇게 얽힌 것도 결국 돈 때문이니까.”

날 선 비난이 날아들었다.

“아서 글래스턴!”

“랜튼이라고 불러도 돼.”

시니컬한 대답에 엘리엇은 기가 막혔다. 지금 아서가 화를 낼 상황인가?

“너는 다른 여자와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삐딱하게 구는 거야.”

“그건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라고.”

“겉보기에만 그렇다고 한들 모두가 그렇게 믿으면? 나는 평생 독신으로 알려질 텐데 그것도 모자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쓰레기인 상황까지 감당하란 말인가? 모두가 내게 와서 너와의 절교를 운운할 텐데 그건 생각 안 해? 아니면 나는 평생 제대로 된 사교 활동도 없이 나이트스톤의 외로운 독신자로 늙어 죽으란 얘기야?”

“…….”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는지 아서의 입꼬리가 실룩했다. 뭔가 반박할 말을 찾는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거기서 엘리엇은 쐐기를 박았다.

“그런 상황이 되면 릴리벳이 가장 기뻐하겠지? 당장 내게 다른 사람을 소개하려 들 거야. 여자든, 혹은 다른 남자든.”

“그건 용납 못 해.”

다른 남자 얘기에 아서는 숫제 으르렁댔다. 무슨 짐승도 아니고. 더욱이 여자보다 남자에 더 반응하는 점이 은근히 불만스러웠다.

“그렇다면 너도 내 입장을 헤아려야지. 레이디 클레어와의 본격적인 도피는 절대로 안 돼. 그분만 보내.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붙이든지.”

“다른 사람?”

“그래.”

“오호라.”

아서가 빙그레 웃었다. 화를 내던 작자가 갑자기 그러니 섬뜩했다.

“그럼 네가 레이디 클레어와 사랑의 도피를 하면 되겠군.”

“뭐?”

“레이디 클레어도 싫어하진 않을 거야.”

“이런 미친놈이!”

“협조해.”

뻔뻔한 협잡꾼의 멱살을 잡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진짜 화를 내려는 찰나였다.

똑똑.

“주인님. 손님이 왔습니다.”

길퍼드였다.

“나중에 오라고 해.”

아서가 아직 닫힌 문을 향해 소리쳤다.

“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길퍼드가 우기는 일은 드물었다. 엘리엇은 잡았던 멱살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난 아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초대한 사람도 없는데 누구야.”

그는 문을 벌컥 열자마자 짜증스럽게 물었다.

“처음 뵙는 분입니다만.”

“모르는 작자를 일일이 다 받아 주라고 너를 집사로 고용한 줄 알아?”

“일단 이걸 받으십시오.”

길퍼드가 화난 주인을 향해 작은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얼마나 구겨졌는지 각 모퉁이가 전부 해져서 너덜거리는 더러운 종이는 명함이었다. 그것도 아서 글래스턴의 명함. 앞뒤로 휙휙 돌려 보던 아서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누가 가져왔지?”

“내려가 보시죠.”

길퍼드가 앞장섰다. 호기심이 동한 엘리엇도 아서의 뒤를 따랐다.

1층 현관에 서 있는 자는 우체부였다. 그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는 모자를 손에 쥐고 아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는 어린아이 둘이 있었다. 열 살 남짓한 큰 쪽이 여자애였고 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는 여자애 치맛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여자애는 긴장한 모습이지만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었고 남자애는 불안한 듯 눈을 굴리면서 누이 뒤로 숨으려 들었다.

“이 명함을 가져온 사람이 당신이오?”

“아닙니다. 이 댁에 우편물을 나르는 사람이라 대신 주소를 찾아 준 것뿐입니다.”

아서의 물음에 우체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옆에 선 여자아이를 돌아봤다.

“제, 제가 가져왔어요.”

“네가?”

“안녕하세요, 글래스턴 씨.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나탈리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생 니콜라스.”

니콜라스는 아서를 흘끔 보더니 무서운지 나탈리 뒤에 고개를 숨겼다.

“누가 네게 이 명함을 줬지.”

“어머니요.”

“어머니 이름은?”

“레베카 터너.”

“전혀 모르겠는걸.”

아서가 나탈리를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봤다. 그러자 우체부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렇지요? 명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부 아는 사람은 아니야. 이분은 지위가 아주 높은 명사시라고. 너희들 같은 고아와 아는 사이일 리가 없다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가자, 보육원으로 데려다주마.”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건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소중히 간직하셨던 거라고요.”

나탈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아서를 향해 간절하게 애원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레베카 터너. 우리 엄마예요.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그걸 남겨 주셨어요. 기억해 내셔야 해요. 반드시.”

“무엇을?”

“그러니까 아저씨는 분명히… 분명히….”

겁을 먹은 채로 벌어진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 둘이 입고 있는 옷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낡고 더러웠다. 구두도 해져서 곧 구멍이 뚫릴 지경이었다. 얼굴과 머리는 아주 단정했는데 세수를 어떻게든 한 모양이었다.

“내가 뭐?”

아서가 화를 내거나 쌀쌀맞게 군 건 아니었다. 애들 앞이라 오히려 말끝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이미 잔뜩 겁을 먹은 나탈리는 말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툭 흘러내렸다. 누이가 울자 등 뒤에 숨었던 니콜라스마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애를 울리다니.”

“울린 게 아니야.”

엘리엇은 당황하는 아서를 뒤로하고 나탈리에게 다가갔다. 몸을 낮추어 나탈리와 니콜라스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깡마른 몸에 창백한 뺨. 피부도 머리카락도 윤기가 없이 푸석했다. 영양 상태가 무척 나빠 보였다.

“너희 집은 어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나탈리가 황급하게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없어요.”

“없어?”

“원래 있었는데. 팔아서 기차표를 샀어요.”

“기차표? 여기로 오기 위해서?”

나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를 의식하면서도 엘리엇이 묻는 말에는 잘 대답했다.

로드니아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작은 도시에 살았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집을 남겨 주었다. 하지만 둘이서 살 수는 없기에 집을 팔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순전히 아서 글래스턴을 찾아서.

“왜 아서를 찾아온 거지?”

“저기… 귓속말로 해도 돼요?”

“그래.”

엘리엇이 한쪽 귀를 내어 주자 나탈리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글래스턴 씨가 우리 아버지니까요.”

“뭐?!”

깜짝 놀란 엘리엇은 그 자리에서 벌떡 뛰었다. 나탈리는 놀라서 멈칫했고 니콜라스는 갑자기 큰 울음을 터트렸다.

아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엘리엇에게 물었다.

“왜? 뭐라고 한 건데?”

꼭지가 돌아 버린 나머지 등이 아픈 것도 잊었다. 전신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여자가 있었겠지. 왜 없었겠어. 저렇게 매력적이고 부유한데. 제인 플레커와도 유들유들한 관계를 유지하잖아. 레이디 클레어? 말은 그럴싸하게 하면서 뒤에서 무슨 짓으로 숙녀를 구워삶은 건지도 모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서 글래스턴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릴리벳과 윌리엄을 함정에 빠트리고도 뻔뻔하게 엘리엇의 자존심을 박살 내고 다리를 벌리게 했으니까. 그런 비열한 협잡꾼에게 숨겨 둔 자식이 있을 만도 했다. 그것도 고아원 한 개쯤은 무리 없이 채울 만큼 잔뜩!

사랑한다고? 빌어먹을. 사랑하겠지. 여전히 아서가 좋다.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별개로 그를 온전히 신뢰하기란 어렵다. 그러기엔 아서 글래스턴의 과거에 대해 엘리엇은 아무것도 모른다.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하는데?”

아서가 초조한 어조로 물었다.

“이 쓰레기만도 못한 개자식아!”

쥐는 줄도 몰랐던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가 개자식의 얼굴에 꽂혔다. 아니, 꽂으려고 했다. 너무 흥분한 바람에 주먹은 아무렇게나 허공을 갈랐다. 도리어 아서에게 주먹이 잡혔다.

“무슨 짓이야.”

엘리엇은 아서에게 잡힌 주먹을 홱 뿌리쳤다.

“이 개자식! 난봉꾼 주제에 어디서!”

“으아아앙!”

버럭 고함을 치자 뒤에서 커다란 울음이 터졌다. 내내 불안에 떨던 니콜라스가 입을 크게 벌리곤 엉엉 울어 댔다. 눈을 휘둥그레 뜬 나탈리가 황급히 다가와 아서를 등지고는 엘리엇의 앞을 가로막았다.

“화내지 말아요! 아버지는 우리의 존재를 몰랐던 것뿐이라고요!”

“모르는 것 자체가 지옥에 처박힐 죄야!”

“안 돼!”

달려드는 엘리엇의 다리에 나탈리가 매달렸다. 니콜라스의 울음이 한층 커졌다.

아버지라는 소리에 아서가 기겁했다.

“아니 무슨 개소리야! 내가 왜 아버지야, 이 망할 꼬맹아!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지껄이는 거야? 엘리엇, 난 이런 애들 모른다고!”

“입 다물어! 빌어먹을 개자식아!”

“정말이야! 세상에! 이 망할 녀석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 너희, 누가 보내서 온 거야! 어느 망할 자식이 나를 상대로 이런 사기 행각을 벌인 거냐고!”

아서가 엘리엇의 주먹을 피하면서 나탈리를 윽박질렀다. 니콜라스는 세상이 떠나가도록 우는 중이고 나탈리의 놀란 눈에서도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불쌍한 아이들을 감싸면서 엘리엇은 쓰레기 놈을 향해 고함쳤다.

“애한테 왜 소리를 쳐!”

“너도 소리를 치고 있잖아!”

“네가 먼저 소리를 치니까!”

“그럼 이게 내 잘못이란 얘기야?”

“썩은 쓰레기만도 못한 짐승 같은 짓을 저질러 놓은 네 잘못이 아니면 뭐야!”

목이 쉴 정도로 언성이 커졌다. 아서도 지지 않고 되받아치기에 집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나만 항상 개자식이지! 너는 내 말은 전혀 듣질 않아!”

“그래!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개자식!”

한심하고 저열한 입을 뭉개 버릴 심산으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손에 총이 들리지 않은 게 한이었다. 난봉꾼 주제에 화가 난 아서도 흉흉한 기세로 드잡이질에 맞섰다. 저택 현관 앞이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때리지 말아요!”

나탈리가 비명을 질렀다. 보다 못한 길퍼드가 나서서 씩씩대는 아서를 말렸고 우체부가 엘리엇을 붙잡았다. 나탈리는 오열하는 니콜라스를 꼭 감쌌다.

억지로 떨어진 아서는 주먹을 꾹 말아 쥐면서 차갑게 명령했다.

“저런 애들 모르니까 당장 내쫓아.”

“이 냉혈한에 악독한 자식아. 어떻게 네 아이를 버린단 말이야!”

엘리엇이 항변했다.

“내 아이가 아니라니까! 명함 하나만 덜렁 가지고 나타난 꼬맹이 말을 어떻게 믿어!”

버럭버럭하는 아서의 모습에 엘리엇은 심장이 식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추레한 몰골로 나타난 불쌍한 애들을 쫓아내겠다고? 그것도 제 명함을 들고 작은 희망을 찾아 여기까지 고생하며 온 고아 남매를?

실망감이 넘쳐나다 못해 증오심마저 깃들려고 했다.

“네 아이인지 아닌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고아 남매를 쫓아내려고? 예전에 네가 나와 릴리벳에게 했던 것처럼?”

혐오를 잔뜩 담아 읊조렸다. 그제야 먼 친척에게 의탁하러 온 고아 남매에게 못되게 군 과거를 떠올렸는지, 아서는 멈칫했다. 그러곤 일그러뜨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던지며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것과는 다른 얘기야. 너는 양부의 조카였고. 얘들은 정말로 누군지 모른다고.”

한결 차분해진 대답이 돌아왔다.

“기억해 보려는 노력조차 안 했잖아.”

“내 기억력에는 문제가 없어.”

“어쨌든 확실해질 때까진 내쫓지 마. 내쫓는 순간 나와도 절교야. 영원히.”

엘리엇은 특별히 ‘영원히’ 에 강세를 넣었다. 흥분으로 일그러졌던 아서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심은 아니겠지?”

“나는 레이디 클레어 문제도 한 번은 참았어.”

“젠장.”

언쟁의 승패가 갈라졌다. 이번에는 아서가 물러섰다.

“저, 어떻게 할까요? 제가 아는 보육원이 있습니다만.”

우체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서는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엘리엇이 나섰다.

“아이들을 여기까지 데려와 주어 감사하네. 집사가 사례금을 줄 거야. 사정이 복잡하니 침묵을 지켜 주길 바라네.”

“아, 예.”

길퍼드가 아서를 봤다. ‘시키는 대로 할까요?’ 라는 물음을 담고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아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길퍼드는 우체부에게는 사례금을 주어 보냈다.

뒤이어 엘리엇은 현관에서 서성이는 아이들을 일단 데리고 가서 따뜻한 음식을 내어 주게 지시했다. 길퍼드는 아서의 의향을 묻지 않고 순순히 지시를 따랐다.

아이들이 사라지자마자 엘리엇은 아서를 향해 경고했다.

“당장 레베카 터너를 떠올리는 것이 좋을 거야.”

“모른다니까. 빌어먹을.”

“그럼 네 명함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야? 그걸 아무에게나 막 줬을 리가 없잖아.”

사교계에서는 명함을 주고받는 관습이 있다. 사교계에 막 발을 들인 사람은 명함 한 상자를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기도 했다. 명함을 단순한 자기소개 용도로 건네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신용과 신뢰의 의미로 서명을 하여 주기도 한다. 또는 방문 시 집주인이 부재한 경우, 들렀다는 표시로써 명함을 남기기도 한다.

아서 글래스턴만큼 부유하고 매력적인 젊은 독신남에게는, 적령기에 이른 딸과의 혼인 의사를 타진하는 가문들의 관심이 이어지기에 더더욱 명함이 쇄도한다. 재력으로 아서에게는 도무지 견줄 수 없는 엘리엇도 젊고 매력적인 독신남이라는 이유에서 연회나 티파티 자리에서 명함을 제법 많이 받았다. 하지만 명함 교환이 쉬운 것은 어디까지나 사교계 내에서만이었다.

사교계는 대단히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누군가의 소개 없이 제대로 발을 들일 수 없기에 소개 시에 명함을 교환하는 관습이 생겼다. 다시 말해 사교계에 연이 없는 사람은 다른 이의 명함을 받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사교계 출신이 아닌데 명함을 가지고 있는 계층은 사교계층을 직접 응대하며 사치품이나 소모품을 판매하는 고급 상점 주인뿐이다.

부유한 상점주의 자식으로 보이지도 않는 나탈리와 니콜라스 남매가 아서 글래스턴의 명함을 손에 넣은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다시 말해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알아볼 이유가 생긴다.

“자네와 사귄 여자 중에 저 애들의 모친이 있겠지.”

“그런 여자는 없어.”

“없어? 너무 많아서 잊어버린 거 아니고?”

엘리엇은 비비 꼬인 채로 응수했다.

“네 말이 옳다면 레베카 터너는 내가 대략 10여 년 전 신대륙 항구에서 각종 잔심부름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갔던 시기에 만난 여자겠군. 20살도 채 되기 전이나 갓 20살이 되었거나. 그때쯤 애 아빠가 되다니. 나도 제법 대단한걸?”

마찬가지로 아서도 싸늘하게 비꼬았다.

“10년 전이 아닐 수도 있잖아.”

“여자애 키가 이만했던가. 저 키에 5살은 아니겠지.”

듣고 보니 그랬다.

“더불어 남자애는 어떻고. 아마도 로드니아를 드나들 때쯤 생겼을 것 같은데. 분명히 여자애도 제법 컸을 테고 말이야.”

“…그건.”

거기까지 계산해 보진 못했다. 나탈리와 니콜라스는 대단히 닮았다. 남매가 분명했다. 혹시 모친만 빼닮았을까.

“나는 악독한 개자식이라 대단한 재산을 쌓고도 고작 얼마 되지도 않을 생활비를 주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자식을 모르는 척하는 놈이지.”

“그건 아마도… 아니, 혼외 자식이라….”

“사생아라서? 그럴 수도 있지. 사생아가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은혜를 모르는 종자인 줄은 내가 더 잘 아니까.”

냉랭한 비꼼에 엘리엇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아서는 할 말을 잊은 채로 그를 바라보는 엘리엇을 물끄러미 마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엘리엇의 심장이 쩍 갈라졌다.

사생아.

아서에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려고 한 얘기는 아니라고 해도 너무 무신경하고 경솔했다.

“너를 상처 입히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

“미안해, 아서.”

“…….”

거듭 사과해도 아서는 계속 돌아선 채였다.

엘리엇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힘이 들어간 근육이 느껴졌다. 가장 깊은 상처를 헤집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엘리엇을 깊이 사랑하기에 억지로 화를 참는 중이었다.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네가… 네가 내가 모르는 곳, 내가 없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과 사귀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미안해.”

“그 말은…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질투한 거야?”

“그래.”

시무룩한 채로 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제야 아서는 할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엘리엇을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지?”

“나는 촌뜨기에 그다지 부자도 아니라서 말이야.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사교계에 이름을 날리지도 못하고. 흔한 시골 농장주에 불과한데. 그에 비하면 너는 너무 멋지고 잘났잖아.”

“그래서?”

그는 엘리엇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여전히 딱딱하고 무뚝뚝했다.

“자연히 여자가 많을 수밖에. 잘 알고 있어. 나는 남자라서 공식적으로 네 옆에 설 수도 없어. 숨은 연인이라고 해도… 어떤 결실도 생기지 않아. 내게 있는 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부야.”

찬찬히 현실을 직시하자 불안이 엄습했다. 엘리엇은 아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얄밉게도 아서는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웃었다. 약간 쓴웃음이긴 하지만.

“잘 알고 있군.”

“그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그렇게 걱정하고 질투하면서 왜 그렇게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거야. 조금 더 믿을 수 있잖아.”

“반대야. 내가 너무 부족해서 너를 믿을 수가 없어. 네 마음이 변한다면 나는 너를 잡을 구실이 전혀 없으니까.”

“갑자기 약한 척을 하다니.”

아서가 두 팔로 엘리엇을 껴안았다. 엘리엇은 상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가만히 안겼다. 큰 손이 뒤통수에 닿았다. 뒤이어 아서의 뺨이 머리 언저리를 꾹 눌렀다.

“나를 잃고 싶지 않으면 좀 더 고분고분하게 구는 건 어때?”

“그것도 어려워. 네가 곁에 있으면 이성을 쉽게 잃는 습관이 있어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

“거기다가 내가 고분고분해지길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잖아.”

“맞아.”

따뜻한 손이 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아이 취급이라 민망했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네게 신뢰를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평생 안도하지 못할 거야.”

“어째서.”

“네겐 내가 모르는 과거가 있으니까.”

집을 나가서 새로운 세상에서 정착하기까지. 아서는 무수한 사람을 만나고 무수한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아서는 소설과도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늘 똑같은 공간에서 늘 똑같은 삶을 살아온 시골 출신은 전신을 던져도 아서가 지닌 삶의 호수에 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다.

“모험과 위험이 가득한 세상에서 얼마나 멋지고 재미있는 사람을 많이 봤겠어? 당장은 몰라도 평화에 익숙해지면 금방 내게 싫증 날걸.”

“엘리엇 데일이 약한 소리를 하니까 너무 이상한걸? 나라면 오히려 그런 역경과 고난, 모험과 위험을 겪으면서까지 너를 잊지 않고 굳이 고향으로 돌아간 의지를 높게 평가할 텐데.”

“…….”

엘리엇은 고개를 들어 아서를 봤다. 아서는 엷게 미소 지었다.

“네가 질투하니까 기분은 좋은데 말이야. 자칫하다간 자는 중에 총이라도 쏠 기세라서 말이야. 적당히 해 줘. 과거 얘기는 네가 궁금한 거라면 무엇이든 다 털어놓을게.”

“여자, 사귀었던 여자가 궁금해. 아, 물론 남자도.”

냉큼 대답했다. 그러자 아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귄 여자는 없어. 일시적으로 가볍게 만난 여자는 있어도. 네가 걱정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절대로 아니었어.”

“있긴 있단 말이군.”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할 말이 없었다. 아서만큼 깊은 육체관계를 맺은 사람이 없다고 순순히 말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피가 식는데도 완전히 따지고 들 수가 없어서 더 못마땅했다.

“일단 위로 올라갈까. 말로만 해서는 못 믿을 테니 일지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장부까지. 전부 짚어 가며 얘기하도록 하지. 또 저 아이들의 모친인 레베카 터너가 누군지 살펴보기도 하고. 네 말대로 내 명함을 가지고 여기까지 고생하며 온 성의가 있으니 말이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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