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8)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정신이 들어?”

제가 눈을 떴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흐릿한 시야에 커다란 실루엣이 걸렸다.

“얼마나 잤어?”

“10시간쯤.”

어쩐지 몸이 물먹은 듯 무거웠다. 큰 손이 이마 가까이 왔다. 아서가 하얀 물수건을 걷어 낸 다음에야 엘리엇은 제가 단순히 잔 게 아니라 열이 났음을 알았다.

테이블 위 법랑 물그릇에 수건을 다시 적시고 짠 아서는 그걸 가져왔다.

“괜찮아.”

사양하자, 아서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치운 후 부축받으려 팔을 뻗는 엘리엇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계속 누워 있는 편이 좋을 텐데.”

“답답해.”

거친 음성으로 계속 도울 것을 요구했다. 굵은 팔이 푹신한 베개와 어깨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까지 둔탁했던 감각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으윽!”

“거봐.”

“그래도 앉을 거야.”

“고집부리긴.”

고작 상체를 세우는 것뿐인데도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질렀다. 아서는 다른 베개 두어 개로 엘리엇의 등을 단단하게 받혔다. 거위 털로 만든 고급스러운 베개는 한없이 부드럽고 푹신했다. 그러나 등의 통증은 무시무시해서 엘리엇은 당장 죽을 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타박상 때문에 등에 멍이 엄청나.”

“그래?”

“자는 사이 급하게 부른 의사가 진찰 후에 타박상 외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더군. 타박상 연고를 발랐고 일어나면 진통제를 먹이라고 했지만.”

그러면서 아서는 보조 테이블에 놓여 있는 갈색 병을 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아편 팅크지.”

“사양할게.”

“그럴 줄 알았어.”

“물 부탁해도 될까?”

“물론.”

이미 주전자와 물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엘리엇은 미지근한 물을 달게 마신 다음 잔을 침대 옆 보조 테이블에 두려고 팔을 뻗었다.

“내가 할지.”

그것이 대단히 무리한 행동이라도 되는 듯이 아서가 황급히 다가와 가벼운 잔을 대신 들었다.

“그렇게 노약자 취급하지 않아도 돼.”

머쓱함에 한마디 하자, 아서는 꽤 엄한 눈길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너, 기절했어.”

“뭐?”

“하다가 기절했다고.”

“아. 어쩐지 기억이 없더라니.”

멍하게 답하면서도 엘리엇은 괜히 뺨이 화끈거렸다.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그랬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쉬었어야지. 말을 타다가 낙마하다니. 이만하길 천만다행으로 여겨.”

“낙마하긴 했지만, 기절은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거기선 좀 곤란하다고 한 것 같은데.”

기절한 것 자체에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으나, 사실은 적시하고 싶었다. 아서는 머쓱한 태도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허리를 살짝 굽혀 허벅지에 팔뚝을 대고 가벼운 깍지를 낀 자세로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엘리엇을 곁눈질했다.

“미안해. 마음이 앞서서 자제할 수 없었어.”

순순히 사과하는 아서의 머리 어딘가에 시무룩하게 꺾인 늑대 귀가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열이 아직 안 떨어졌나?’

어처구니없는 상상에 엘리엇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굳건한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래. 비웃을 권한을 주지.”

“네가 허락하든 말든, 난 얼마든지 널 비웃을 수 있어.”

다시 한번 사실을 지적하자 아서는 물끄러미 엘리엇을 봤다. 여전히 맹수같이 형형한 눈매임에도 이상하게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짙은 동공 안에서 이글이글 들끓는 감정이 원망이 아닌, 순수한 관심에서 나온 집착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직접 날 간호했나?”

“그래. 내 책임이자 권리니까.”

책임이자 권리. 딱딱한 용어가 무척이나 다정하게 들리긴 또 처음이었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럼 내게도 너에 대한 책임과 권리가 있단 말이군.”

“당연해. 내 모든 것은 네가 결정할 수 있어.”

“자유 의지를 내게 맡긴단 건가?”

그 말에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올바른 선택이 아닐 경우 내 의사를 강력히 피력하겠지만. 어쨌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다.”

“오. 그거 굉장히 으쓱하게 하는 약속이로군.”

아서가 허리를 똑바로 폈다. 다정한 시선으로 엘리엇을 바라보며 그는 차분하게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어?”

아무런 생각 없이 괜찮다는 말을 뱉으려다가 멈췄다. 전 같으면 정말로 괜찮았고 혹은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만 했던 일을 지금은 꺼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마.”

“그래. 하지만 난 투자가이자 광산주야. 사람을 많이 만나지. 그 모두와 교류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줘.”

“그러니까 내가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과 단둘이 속삭이지 말아.”

“노스필드 백작이나 찰리라도?”

“아니 그게 아니라.”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엘리엇은 이마를 짚었다. 엘리엇이 진정 원하는 건 단순한 절교가 아니었다. 좀 더 치졸한 질투를 자극하는 종류였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쳤다. 지금에서 망설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불을 꾹 쥐면서 엘리엇은 제가 가장 원하는 바람을 가감 없이 늘어놓았다.

“다른 여자를 에스코트하지 마. 그게 설사 사업상 이유라 할지라도 안 돼. 레이디 클레어와의 계약은 파기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 그리고 제인과도. 사업상 만남이 필요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 해. 그리고….”

“그리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요구에도 아서는 싫지 않은지 표정이 좀 더 풀어진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쩐지 얼굴에 열이 더 오르는 기분이었다.

“릴리벳과도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 나는 윌리엄과 적당히 거리를 두니까 말이야.”

“좋아. 그렇게 하지.”

조금쯤은 화를 낼 법도 한데 아서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수긍했다.

“대신 너도 내가 없는 곳에서 찰리 윔즈나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거나, 혹은 여자와 함께 춤을 추지 않기 원한다면 그대로 할 건가?”

“좋아. 받아들이지.”

합의를 기념하여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한 터지만, 손목을 붙잡은 아서는 악수하는 대신 허리를 굽혀 입을 맞췄다. 혀끝으로 입술을 살짝 핥기에 깊은 키스로 이어지는 줄 알았으나, 그는 금방 떨어져 나갔다. 짧은 순간에도 심장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렸다. 가슴이 벅차도록 아파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뜨자 아서가 빙그레 웃었다.

“왜?”

“믿어지지 않아서.”

“무엇이?”

사실 묻지 않아도 알았다. 아서가 느끼는 경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엘리엇 자신도 똑같기 때문이었다.

“너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엇 데일이라니.”

“마치 한탄처럼 들리는데?”

“그렇다면 네 오해야. 난 경탄을 했을 뿐이라고.”

아서가 좀 더 다가와 입술을 다시 겹쳤다. 묵직하게 누르는 힘 덕분에 엘리엇은 저절로 베개 속으로 푹 꺼졌다. 등의 통증도 포근함 덕분에 한결 덜했다. 누군가와 얽혀 있는 일이, 그것도 남자라는 점이, 그중에서도 아서 글래스턴이라는 점이 엘리엇을 경이감에 휩싸이게 했다.

매끄러운 혀가 거리낌 없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혀끝이 혀끝을 더듬다가 더 깊이 들어와 안쪽 잇몸과 천장을 더듬었다. 치열을 훑으면서 빠져나갔다가 더 당당한 기세로 침범한 혀의 기세는 마치 흡혈귀처럼 집요했다.

“흐음.”

열심히 환영하는 움직임도 입 안을 거침없이 누비는 혀를 진정시키기엔 모자랐다. 숨이 가쁘고, 감은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팔을 뻗어 아서의 목과 어깨를 감쌌다.

“으음.”

아서로부터 낮은 비음이 흘러나왔다. 살짝 뜬 눈 사이로 찡그린 눈썹이 보였다. 애원하듯 입을 맞추는 그에게 엘리엇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아서의 손이 어깨를 더듬어 등까지 내려갔다. 허리를 꿈틀대며 엘리엇은 그가 좀 더 바른 자세로 제 위에 올라오도록 했다. 묵직한 남자의 무게가 너무 달가웠다.

추웁.

“하아.”

“허억. 허억.”

한참 만에 입술을 뗀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코끝을 비비고 이마를 맞댔다. 입술을 비죽 내밀어 아이처럼 입술을 쪼기도 했다.

얼굴이 거의 맞닿아 있어 아서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뺨을 간지럽혔다. 심장을 겹친 채로 손가락을 가닥가닥 엮은 아서는 천천히 엘리엇의 목에 코를 묻었다, 실컷 내음을 들이마신 그는 뜨거운 한숨으로 엘리엇의 피부에 화인을 남겼다.

몸을 겹치지 않은 채로 이런 뿌듯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니. 엘리엇은 새벽에 일어났던 소동이 마치 신의 장난 같았다.

“레이디 클레어는 뭐라고 해?”

“뭐?”

물음에 아서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까 호수에서 그녀를 버리고 내게로 왔잖아. 기분 나빴을 텐데.”

“반대편에서도 네가 말에서 떨어진 것은 똑똑히 볼 수 있었어. 그 상황에서 기분이 나쁘다면 레이디라는 경칭을 가질 자격이 없어.”

단호한 대답에 엘리엇은 위안받으면서도 괜한 도발을 멈출 수 없었다.

“단둘이서 호숫가를 달렸던 건 뭔가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얘기잖아. 사업에 지장이 있을 텐데.”

“레이디 클레어와의 거래를 끝내라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대단한 명사와의 교류를 일방적으로 끊으면 손해가 막심할 테니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그 정도로 휘청거릴 내가 아니야. 게다가 네가 사고를 당하기 전에 이미 거래를 끝내고 싶다고 말했어.”

“뭐?”

이번에는 엘리엇이 반문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뺨에 키스를 남긴 아서가 그윽한 시선으로 엘리엇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무리 좋은 거래라도 나는 당장 대륙을 떠날 수 없어.”

“대륙을 떠나?”

“그래. 레이디 클레어가 배표를 두 개 준비해서 같이 가자고 하더군.”

“아.”

제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레이디 클레어는 네가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야. 같이 떠나고 싶을 만큼.”

“레이디 클레어가 나를?”

갑자기 아서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그녀와 나 사이를 이상하게 오해했다면 이제 그런 짓은 그만둬. 내 심장의 주인이 누군지 이젠 너도 알잖아.”

긴 검지가 광대를 언뜻 스쳤다. 가벼운 접촉으로 인한 열기가 금세 귓바퀴까지 번졌다.

“알아. 하지만 레이디 클레어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잖아. 상처받을 거야.”

“누가 상처받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레이디 클레어가 내게 동행을 권한 건 단순히… 이다음은 본인에게 들어.”

도중에 말을 끊은 아서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가 난 줄 알았지만, 그는 다시 허리를 숙여 엘리엇의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이제 수프를 데워 올게. 조금만 기다려.”

하루 만에 사람이 변했다. 아서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엘리엇 또한 변했다. 아서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자신임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무수히 갈라졌던 심장이 단번에 단단한 덩어리로 변했다. 힘차게 피를 뿜고 열기를 손끝, 발끝까지 전하는 맥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심각한 타박상을 입은 등이 쿵쿵 울렸고 동시에 갈비뼈가 찌르르 진동했다.

“이런 것으로도 아플 수 있군.”

이것은 기쁨의 고통이었다.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느끼는 가슴의 아픔. 엘리엇은 손을 제 왼쪽 가슴에 대었다. 손바닥 아래, 오래전부터 제 소유가 아니게 된 심장의 기운이 닿았다.

‘왜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새삼 돌이켜보니 자신의 착각이 너무 우스웠다. 물론 미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어느 남자가 단순히 복수를 위해서 동성애를 시도한단 말인가.

‘그것도 직접.’

설사 변태적 가학 성향이 충만하여 동성애를 그런 방식으로 이용한다손 치더라도 본인이 직접, 그것도 도구도 없이 아주 친밀한 방식으로 행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한심하기는.”

그간 저질렀던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엘리엇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대부분 거칠고 난폭한 섹스였다. 때로는 진저리 칠 정도로 집요했고 무리한 장소에서 무리한 요구로 인해 정신적 압박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엘리엇은 그것을 다만 형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부단히 죗값을 치르는 중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면서도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나는 환희와 쾌락에 떨었다.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아서가 못된 장난을 칠 때마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몸은 기쁘게 날뛰기도 했다.

처음 접했던 아편 효과에 대해 전혀 몰랐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제 안에 도사린 음란한 욕망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것을 일깨운 것은 다름 아닌 아서였다. 그리고 자신은 아마도 어느 순간부터 그 사실이 즐거웠다.

어디서고 들러붙는 진득한 시선. 분노에 들끓는 음성. 난폭하게 끌어당기는 손, 하반신을 구속하는 탄탄한 허벅지.

모든 것이 유혹이었다. 그리고 원초부터 쾌락에 나약했던 자신은 멍청한 짐승처럼 맹수의 함정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더불어 그의 관심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싫었다.

‘질투할 자격도 없지만.’

그래서 끝끝내 자신의 저열한 감정을 무시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쾌락의 함정에 빠진 건 자신뿐만이 아닌 덕분이었다.

어느새 입매가 긴 호를 그렸다. 문을 바라보며 아서를 기다렸다. 15년간 그 없이 살아왔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한순간도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등의 상처가 심각하지만 않았어도 엘리엇은 그를 찾아 별장을 헤맸을 것이다.

한참 귀를 기울이자,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묵직하고 자신감에 찬 발걸음은 아서의 것이었다. 차분히 가라앉았던 호흡이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면 그리웠노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또각또각!

깊은 울림을 가진 남성의 발걸음과 달리 아주 경쾌하고 발랄한 발걸음이 들렸다. 두 소리는 엘리엇의 방문 앞에서 동시에 멈췄다.

“오빠가 깨어났으면 말을 했어야지.”

“늦은 밤이라 네 휴식을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휴식이라니. 내 쌍둥이 오빠가 낙마해서 크게 다쳤는데, 나는 그의 얼굴을 지금껏 보지도 못했단 말이야. 네가 막아섰기 때문에.”

“내가 막아선 게 아니라 절대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의사의 진단 때문이야.”

“그래도 약을 바르고 동태를 살필 사람은 필요하잖아.”

“내가 하고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내가 아니라 왜 아서, 당신인 거지?”

실랑이가 길어졌다. 엘리엇은 그제야 별장에 릴리벳을 비롯한 다른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간호한 사람이 아서인 줄은 알았지만, 늦은 밤이라 그가 릴리벳의 순서를 바꿔 준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을 아예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줄은 몰랐다.

밖에서 다투는 음성이 점점 커졌다. 다른 사람을 방해하기도 싫고 무엇보다 괜한 구설이 퍼지는 게 싫었다. 엘리엇은 힘을 짜내 소리쳤다.

“싸우지 말고 둘 다 들어와.”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벌컥 연 사람은 릴리벳이었다. 아직도 승마용 드레스 차림인 동생은 황급히 들어와 두 손으로 엘리엇의 뺨을 감쌌다.

“괜찮아?”

“음. 등이 많이 쑤시지만 사지는 멀쩡해.”

“말에서 떨어졌다고 들어서 놀랐어.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말이 사나웠어?”

“아니. 내가 딴생각을 하다가. 내 실수야. 조련사의 잘못이 아니니 찰리에게 너무 꾸짖지 말라고 해.”

“그건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약은 발랐어?”

“아마도.”

그러면서 엘리엇은 수프 그릇을 담은 베드 테이블을 들고 들어온 아서에게 시선을 던졌다. 엘리엇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릴리벳의 표정이 아주 차가웠다. 화가 났음이 분명했다.

“네 오빠는 지금 수프를 먹고 다시 자야 해. 그러니 호들갑 그만 떨고 돌아가.”

“내가 있을 테니 당신이나 돌아가.”

자신이 기절한 사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분위기가 아주 험악했다.

“넌 윌리엄과 결혼했어. 그러니까 네 남편이나 신경 써.”

“내가 윌리엄과 결혼을 하든 말든 우리가 피를 나눈 쌍둥이란 건 변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아니라고 한들 왜 아서, 당신이 나서는 거야?”

“그럴 자격이 내겐 있으니까.”

“무슨 자격?”

릴리벳이 이상하게 따지고 들었다. 아서의 기세도 만만찮았다. 몸 상태가 아주 별론데 둘이서 말다툼을 벌이고 있으니 두통이 일었다.

“둘 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엘리엇을 결정을 기다렸다.

“릴리벳. 아서는 낙마한 나를 걱정해서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이야. 의사도 불렀고 나를 간호했지. 그러니까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

아서가 득의만만한 듯이 수프 테이블을 들어 엘리엇의 발치에 놓았다. 릴리벳이 놀란 듯 입을 벙끗 벌리며 뭐라고 따지고 들려는 걸 엘리엇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아서, 고마워. 하지만 수프는 나 혼자 먹을 수 있어. 그러니 자리 좀 비켜 주겠어?”

“뭐? 내가?”

득의만만한 표정이 순식간에 충격으로 바뀌었다. 그는 손끝으로 제 가슴을 짚으면서 믿을 수 없다는 자세를 취했다. 반면 릴리벳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양손을 허리에 척 올렸다.

“릴리벳과 둘이 있게 해 줘.”

당혹감에 안색이 굳은 아서는 말없이 문으로 향했다. 보란 듯이 그를 배웅한 릴리벳이 문을 탁 닫고 의기양양하게 걸어왔다. 베드 테이블을 들어 엘리엇의 다리 위로 옮겼다.

그릇 뚜껑을 열자 먹음직스러운 수프의 향이 물씬 풍겼다.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고 빵과 치즈를 올린 수프를 보자 갑자기 입맛이 돌았다.

“수프가 식기 전에 먹어.”

엘리엇이 수프를 떠먹는 사이, 릴리벳은 방을 돌아다녔다.

“진통제가 어디에 있지?”

테이블 위를 살펴보고 작은 서랍장을 열어 보던 그녀는 금방 아편 팅크를 찾아냈다. 그걸 본 엘리엇이 입에 든 수프를 반쯤 뱉었다.

“흠. 지시 사항에는 성인 남성 1회에 두 숟갈이라고 적혀 있네. 수프 다 먹고 먹으면 되겠지?”

“그건 먹지 않을 거야.”

“왜?”

“아편은 내게 아주 안 맞아. 부작용이 아주 커.”

손바닥으로 공중을 그으며 단호하게 아니라고 외쳤다. 그러자 릴리벳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아플 텐데.”

“아파도 돼. 부작용보다 나아.”

“무슨 부작용이 있는데?”

“말할 수 없어.”

그러자 릴리벳이 아까 했던 것처럼 허리에 척 손을 올렸다.

“설마 약을 먹기 싫어서 꾀를 부리는 건 아니지?”

“절대로 아니야.”

공중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이 치열한 싸움을 거듭했다. 먼저 물러선 사람은 릴리벳이었다.

“억지로 먹일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약을 보조 테이블에 올린 릴리벳은 침대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까 아서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계속 수프를 떠먹는 엘리엇을 관찰하면서 릴리벳이 물었다.

“너무 아파서 움직이기 힘들면 어떻게 하지? 화장실도 가고 몸도 씻어야 하잖아. 난 그렇게 힘이 세지 못한데.”

“아서가 있으니 괜찮아.”

이후로 묵묵히 수프를 떠먹던 엘리엇은 문득 릴리벳이 입을 꾹 다물었음을 눈치챘다. 시선을 슬쩍 돌리자 릴리벳이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엘리엇을 노려보았다.

“릴리벳.”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동생은 드레스 자락이 흔들리도록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러다가 몸을 홱 돌리더니 따지고 물었다.

“왜 하필 아서야?”

“아서가 힘이 세니까? 이미 날 돌보는 중이고.”

“그런 의미가 아니야.”

동생의 대답에 엘리엇은 당황했다.

그럼 무슨 의미일까? 어느새 남매 사이에 비밀이 많아졌다. 릴리벳의 결혼으로 시작해서 아서의 귀환으로 본격적으로 하지 못한 말이 많이 쌓였다.

‘설마.’

아서와 밀접한 만남을 이어 왔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평범한 교류였다. 게다가 릴리벳은 아서와 엘리엇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여겨 둘을 화해시키려 애를 쓰기도 했다.

“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조심스럽게 반문하자, 원망을 담은 날카로운 눈빛이 엘리엇에게 날아와 꽂혔다.

“끝까지 발뺌할 셈이야?”

엘리엇이 아는 한 릴리벳은 부상자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열을 올릴 성격은 아니었다. 걱정을 앞서는 배신감에 떠는 모습이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엇이 듣고 싶은데?”

“뭐든.”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아니 지금 해. 지금 해야겠어.”

도주로가 바로 차단되었다. 열을 내면서도 릴리벳은 닦달까진 하지 않았다. 그저 수프가 점점 식어 가는 내내 묵묵히 기다렸을 뿐이었다.

입맛이 금방 사라졌다. 엘리엇은 베드 테이블 위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릴리벳이 말없이 테이블을 치웠다.

아직도 승마복을 입고 있는 동생의 등을 보며 엘리엇은 제가 상상 이상으로 쌍둥이 동생을 사랑함을 새삼 깨달았다. 릴리벳에게 경멸을 받는다면, 그로 인한 상처는 아마 영원히 회복하지 못할 터였다.

“릴리… 벳.”

음성이 갈라졌다. 조금은 실망한 듯,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조금은 미운 듯, 조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릴리벳을 마주하자 엘리엇은 입이 턱 막혔다.

무시무시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릴리벳이었다.

“언제부터야?”

“지난 초여름.”

“내 결혼식 이후? 곧바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벳은 기막힌 듯 입을 벙긋 벌렸다가 천장을 보며 낮게 신음했다. 그러면서 하얀 손으로 제 동그란 이마를 짚었다.

“누가 먼저?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도리질 치던 릴리벳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지해?”

“그래.”

담담한 대답에 이번엔 릴리벳의 말문이 막혔다. 동생이 눈을 깜빡이며 충격을 소화하는 사이 엘리엇은 용기를 냈다.

“아서를 사랑해.”

“맙소사.”

손으로 입을 막은 릴리벳은 다시 방 안을 서성였다. 신경증 환자처럼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다가 엘리엇을 응시했다가 다시 신음하며 돌아섰다. 주인의 혼란한 움직임 때문에 드레스 자락이 이리저리 쏠릴 때마다 엘리엇의 심장 또한 급격하게 울렁였다.

돌아선 채 고개를 숙인 릴리벳이 말했다.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어. 내 오해라고 화를 낼 줄 알았다고.”

그렇게 원망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해.”

서글픈 음성으로 사과했다. 그러자 릴리벳의 어깨가 떨렸다. 젖은 물소리가 이어지나 싶더니 이내 몸을 홱 돌린 그녀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푸른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운 눈물이 가득했다.

“내 잘못이야. 아서를 두둔하는 게 아니었어.”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내가 아서를 사랑하는 점에도 어떤 문제가 없어.”

눈물 젖은 동공이 충격에 떨렸다. 입술을 꾹 깨물다가 푼 릴리벳은 음울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아서도 오빠가, 그러니까… 알아?”

“물론.”

아서 얘기가 나오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자 릴리벳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뭔가 위로가 되는 말을 하고 싶은데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성은 잘잘못을 따질 일도 아니거니와 위로를 주고받을 일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늘 함께 살아온 아리따운 쌍둥이 동생을 보는 마음을 그렇지 않았다. 엘리엇은 릴리벳의 혼란과 좌절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작년 초, 릴리벳이 윌리엄과 갑자기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리고 그 몰래 둘이서 만나는 걸 우연히 알았을 때, 그리고 너무나도 빛이 나는 모습으로 나타나 청혼을 받았으니 축복을 해 달라 말했을 때.

엘리엇이 느낀 혼란과 충격은 지금 릴리벳이 느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상실감과 분노, 그리고 이상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신의 축복을 받고 세상의 상식을 따르는 훌륭한 부부의 탄생임에도 그런 아픔을 느꼈는데 하물며 세상에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운 관계라면?

엘리엇은 삐거덕거리는 몸을 억지로라도 일으켰다. 지금 자신의 분신에게 다가가 꼭 안아 주고 싶었다.

“으윽.”

신음을 억누르며 침대 곁에 비틀비틀 서자 릴리벳이 다가와 부축하듯 마주 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신비한 힘. 그것이 다른 쌍둥이 사이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엘리엇와 릴리벳 사이에는 존재했다.

“축복… 하고 싶은… 데 잘 안… 돼. 미… 안.”

훌쩍이며 사과하는 동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쉬쉬. 괜찮아. 네가 나를 경멸하며 저주를 퍼붓지 않아서 고마워.”

“내… 가 어떻… 게 오빠를… 경… 멸….”

울음에 헐떡이면서 띄엄띄엄 말을 잇는 릴리벳이 꼭 어린 시절 보던 꼬마 같아서 작은 실소가 나왔다.

“지금… 웃음이 나와?”

부아가 치밀었는지 릴리벳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눈을 흘겼다.

“옛날 생각이 나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로 엘리엇은 눈물에 젖은 동생의 붉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릴리벳이 입을 삐죽였다. 체셔 부인이 된 지금도 가끔 드러내는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오로지 엘리엇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그때도 아서가 나를 자주 괴롭혔지. 그러면 오빠가 와서 대신 화를 내고 복수해 줬는데. 이젠 오빠마저 아서 편이 되어 버렸잖아.”

“대신에 앞으로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못 괴롭히는 게 아니라 안 괴롭히는 거겠지.”

언제 서글프게 울었느냐는 듯이 릴리벳은 화가 잔뜩 났다. 엘리엇을 꼭 붙든 채로 아서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오빠에게 직접 말을 걸면 된다고 했는데 매번 일부러 나를 괴롭혔어.”

“뭐?”

느닷없는 얘기였다. 엘리엇이 멈칫하자 릴리벳이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도 말했잖아. 당시엔 어린애라 눈치를 못 챘지만. 아서는 말이야, 오빠가 근처에 있을 때만 나를 괴롭혔다고.”

전에 말다툼할 때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아서의 진심을 오해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상 까맣게 잊고 있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릴리벳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꼭 오빠가 가까운 곳에 있을 때만 내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인형을 빼앗았어. 오빠가 없으면 나를 본 척도 안 했어. 매번 마주치면 너랑 똑같이 생긴 못난이는 어디 있어? 라고 시비를 걸고 말이야.”

“그랬단 말이야?”

듣고 보니 정말로 그랬던 것 같았다. 어쩐지 릴리벳을 괴롭히는 아서에게 화를 내는 기억만 잔뜩 있더라니. 실제로 일부러 엘리엇을 노리고 일부러 릴리벳을 괴롭힌 게 분명했다.

어처구니없어서 헛바람이 튀어 나갔다. 그 덕에 등이 찌르르 울렸다. 고통에 찌푸린 눈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릴리벳은 재빨리 고자질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다 같이 친하게 지내거나 나를 아주 심하게 괴롭힐 이유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어. 혼자 있는 어린 여자애를 괴롭히는 건 진짜 치사하다고 따진 적 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러면서 릴리벳은 “아서가 생각보다 훨씬 유치하고 덜 자란 거였어. 성숙한 외모에 속아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라며 한탄했다.

“그날도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서는 분명 오빠 이름을 불렀어. 내가 아니라. 만약 나를 정말로 그렇게 하려 들었다면 이름을 부를 일도 없거니와 그게 오빠 이름이면 안 되잖아.”

“그렇지.”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무척 충격을 받았었다. 순전히 릴리벳에게만 관심이 있는 줄로 오해했다. 그래서 쪽지도 릴리벳이 보낸 것으로 생각한 아서가 릴리벳이 있는 방으로 갔다고 여겼다. 실제로는 아서는 쪽지의 주인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엘리엇을 찾아 그 방으로 갔다. 아서가 몰랐던 건 하나뿐이었다.

“방을 바꾼 걸 전혀 몰랐군.”

“그래.”

릴리벳은 약간 머쓱한 듯 엘리엇에게서 떨어져 돌아섰다. 두 팔로 제 몸을 감싼 그녀는 주변을 다시 서성였다.

“아서는 그럴 의도가 없었어. 내가 그 사실을 바로 떠올리고 외숙부에게 말했다면 아서가 그런 벌을 받진 않았겠지. 단순히 실수로 끝날 수 있었어.”

담담한 목소리에서 짙은 씁쓸함이 묻어났다.

“내내 마음에 걸렸어. 언젠가 아서를 만나게 되면 그때 단순한 실수였다고, 편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어.”

“그래서… 아서와 화해를 시키려고?”

릴리벳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걸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다시 다가온 릴리벳은 한 손으로 엘리엇의 뺨을 감쌌다. 엘리엇을 천천히 부축하여 다시 침대에 앉혔다. 엉덩이가 침대 위로 털썩 떨어지면서 꽤 큰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으나, 엘리엇은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아서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 슬펐다.

“아주 불행한 일이야.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아. 그저 아서가 안타까웠어. 그런데 아직도 궁금한 건 말이야. 그날 갑자기 아서가 오빠를 왜 찾아왔을까? 당시엔 둘이 굉장한 앙숙이었잖아.”

“그건.”

엘리엇은 쌍둥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사실을 말할 때였다.

“내가 쪽지를 썼기 때문이야. 찾아오라고.”

“왜? 아니, 쪽지를 썼으면 방은 왜 바꾼 거야?”

“너인 척 쪽지를 썼거든. 네 방에 들어오면 그것으로 약점을 잡으려고 했지.”

이번엔 릴리벳이 우뚝 굳었다. 충격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을 말을 하지 못했다.

“설마 나를 이용한 거야?”

이윽고 움직인 릴리벳의 물음에 엘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사악하고 어리석은 시절의 잘못을 드디어 동생에게 고백하고야 말았다. 제 행동이 불러온 참사가 아서를 끔찍한 고통 속에, 그리고 릴리벳을 오랜 죄책감 속에 밀어 넣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넌 난 비난할 자격이 있어.”

“물론이지! 이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평생 오빠를 원망할 거라고!”

단단히 화가 난 릴리벳이 드디어 노성을 터트렸다. 창백하게 질린 엘리엇은 부아가 치밀어 씩씩거리는 귀부인을 멍한 눈길로 봤다.

“오빠의 어리석은 짓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어. 아서는 물론이고 외숙부도 굉장히 괴로워하셨다고. 자신이 양자를 잘못 키웠다면서 내내 후회하셨지. 그걸 알고 있는 거야?”

순간 엘리엇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가 화끈하고 뒤통수가 서늘했다. 외숙부. 그 불쌍한 분은 아끼던 양아들을 쫓아내고 한층 딱딱한 성격이 되었다.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웃는 일이 극히 드물기도 했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리고 아서가 들어왔다. 그는 저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런 얘긴 그만둬. 엘리엇은 부상자야. 안정이 필요해.”

“엿들었어?”

“그래. 네가 그랬던 것처럼.”

분명 비난인데도 아서는 릴리벳을 향해 뻔뻔하게 대꾸했다. 엘리엇의 창백한 낯을 본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정이 뭔지 몰라?”

릴리벳을 향한 낮은 음성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아… 서.”

“아무 말도 하지 마. 일단 쉬고 나중에 얘기해.”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아니. 그렇지 않아.”

어느새 커다란 두 손이 엘리엇의 얼굴을 감쌌다. 굵은 엄지가 부드럽게 뺨을 훑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뭐?”

쌍둥이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놀랐다. 아서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내가 쪽지를 썼는데?”

“물론 네가 썼지. 심지어 릴리벳인 척하고 말이야.”

그 말에 남매가 다시 놀랐다. 아서는 엘리엇과 릴리벳을 번갈아 봤다.

“아니 그럼 왜?”

“무슨 소리야? 그럼 왜 오빠 방으로 온 거야?”

동시에 터지는 질문에 아서는 다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모든 게 비슷하지만 딱 하나 전혀 다른 점이 있어.”

“그게 뭔데?”

“필체. 릴리벳, 넌 a를 두 번에 나눠서 쓰지. 하지만 엘리엇은 한 번에 써.”

사람마다 필체는 독특했다. 어른이 되어서 필체를 알아보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그런 차이에 대해 깨달은 사람이 있을까?

“처음부터 엘리엇이 쓴 걸 알았어. 속아 넘어갈 생각도 없었지.”

“아.”

“내가 릴리벳을 찾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방을 바꾼 거야. 물론 나는 그걸 몰랐고.”

아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조금은 쓰게. 그리고 조금은 즐겁다는 듯이.

“난 네가 방을 바꾼 걸 알고 릴리벳이 있는 내 방으로 간 줄 알았어.”

엘리엇의 말에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랐어. 릴리벳이 휘말린 건 결과적으로 필체를 알아본 내 탓이야. 그건 사고였어.”

엘리엇의 발치에 무릎을 대고 몸을 낮춘 릴리벳은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으면 방을 바꾸지도 않았겠지. 화내서 미안해.”

“사과하지 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사실은 나도 그런 줄 알았으니까. 늘 미안했어.”

“이젠 그러지 않아도 돼. 서로 엇갈린 오해였을 뿐이야.”

십수 년을 쌓아 온 죄책감이 두둥실 떠올라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신은 사랑하는 동생을 더러운 방식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그건 드문드문 사라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가져온 오해였다.

“그렇다면 나인 줄 알면서 왜 찾아갔던 거지?”

“그야… 화해하고 싶었거든.”

“뭐?”

아서는 머쓱한 듯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둘 다 기억에 없는 모양인데. 그날 낮에 내가 유달리 릴리벳을 괴롭혔어. 엘리엇이 굉장히 화를 냈고 싸움이 아주 크게 번졌지. 그때 내가 양부에게 나이트스톤을 물려받으면 제일 먼저 엘리엇을 쫓아내 버릴 거라고 윽박질렀거든.”

“뭐?”

릴리벳과 엘리엇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서는 대단히 미안한 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날 엘리엇이 굉장히 분한 나머지 눈물을 좀 흘렸어. 그때 입을 닥쳤어야 했는데 나는 신나서 더 놀려댔어. 엘리엇이 도망가면서 싸움이 끝나긴 했는데. 저녁 내내 네가 아무 말 없이 시무룩해서 마음에 걸렸지. 쪽지가 왔기에 당연히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는데.”

“이런 치사하고 유치한 자식! 고아가 된 쌍둥이를 갈라놓겠다고 협박하다니! 넌 쫓겨나야 마땅했어!”

릴리벳이 벌떡 일어서서 아서에게 소리쳤다. 아서는 할 말이 없는지 쏟아지는 비난을 조용히 감내했다. 엘리엇은 그런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했다. 아마도 그날 밤에 있었던 소동이 너무 충격으로 남아 그날 낮의 기억을 깡그리 잊은 듯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의문이 남았다.

“그럼 그날 외숙부에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내가 쓴 쪽지를 보여 드렸다면 믿으셨을 텐데.”

그 질문에도 아서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릴리벳이 아서를 올려다봤다.

“이젠 진실을 말해도 되잖아. 오해를 만들지 마.”

어린 동생이자 유일한 여성이 물기 어린 얼굴을 삐죽이며 바른대로 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모습에 약한 건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자질했다면 난 괜찮았겠지. 대신 엘리엇이 매질 당했을 거야.”

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엇을 지긋이 보았다.

“나는 제법 큰 소년이었고 매질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어. 물론 아프긴 했지만. 엘리엇이 맞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 내가 지은 잘못도 컸고.”

그러면서 그는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깨를 으쓱했다.

“쫓겨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맙소사. 아서.”

멍청한 세 사람의 오해와 잘못이 겹쳐 서로 간에 긴 고통을 주었다. 쑥스럽고 어색한 분위기가 서로에 대한 연민 섞인 헛웃음으로 물들 때, 쌍둥이는 동시에 옛 의붓형제에게 몸을 던졌다.

“바보같이 왜 그랬어?”

“사실대로 말했으면 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었잖아.”

양팔로 금발 남녀를 동시에 지탱하던 아서는 옅게 웃었다.

“너희를 계속 괴롭혔잖아. 그 벌이라고 생각했지.”

“아서는 정말… 바보야.”

릴리벳이 기쁨과 연민을 동시에 담아 비난했다.

“그래도 그날 기억과 직접 쓴 쪽지 내용을 잊어버린 누구만큼은 아닌데.”

“아니. 멍청하게 누가 누굴 대신해서 매질을 당해. 그 일만 없었다면 외숙부에게 버림받을 일도 없었는데. 전부 내가 꾸민 일이잖아. 내가 벌을 받았어야 마땅해.”

엘리엇은 두 손으로 아서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한탄했다. 릴리벳이 놓아주자 아서는 엘리엇을 감싸 안았다.

“너는 그냥 나를 골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릴리벳의 방에 내가 찾아오면 약점을 잡아서 앞으로 동생을 못 괴롭히게 할 셈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가 정당화되진 않아. 게다가 난 네가 끔찍한 처벌을 받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어렸으니까. 그리고 동생과 떨어질 수 없었으니까.”

아서는 흐느끼는 엘리엇의 정수리에 코와 입술을 묻었다.

“누군가가 혼이 나고 누군가가 쫓겨나야 한다면 그건 나라고 생각했어. 처음엔 화가 나고 고통스러웠지만, 나중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쫓겨난 이상 우린 의붓형제도 뭐도 아니니까.”

“그게 좋은 일이야? 넌 나 때문에 지독한 고난을 겪었어. 그런데 우리가 형제가 아니어서 좋다는 거야?”

“형제라면 이런 짓은 하지 못하니까.”

아서는 고개를 숙여 엘리엇의 떨리는 입술에 살짝 입술을 덧댔다. 옆에 있던 릴리벳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린 그녀가 짧은 경탄을 뱉는 사이, 엘리엇은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닿은 키스가 끝나고서야 제가 눈을 감았다는 걸 알았다.

아서를 향한 애정이 끓어올랐다. 당장 그를 껴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두 팔로 단단히 끌어안은 이는 제 것이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 울컥 올라오는 기운이 허락질 않았다.

“이제 왜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인지 알겠지?”

엘리엇은 꼭 끌어안은 아서는 곁에선 릴리벳을 향해서 득의만만하게 선언했다.

“허. 그게 지금 할 말이야?”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야. 엘리엇에겐 내가 있어. 앞으로 참견하고 싶을 때는 내 허락을 맡아.”

“우리 피를 나눈 남매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에 대한 대답은 엘리엇이 대신했다.

“나도 네게 참견할 때는 윌리엄의 허락을 구하잖아. 그와 똑같은 거야.”

“윌리엄은 내 남편이야.”

“그럼 나는 엘리엇의 뭐라고 생각해?”

뻔뻔하게 되묻는 아서를 향해 릴리벳은 뭔가 따지고 들려고 입을 벌렸지만, 딱히 뭔 말을 하진 못했다. 공중에 세운 검지는 아서의 미간을 거쳐 엘리엇의 미간으로 향했다.

“일단 오늘은 물러나겠어. 하지만 나중에 이 일에 관해서는 똑바로 다시 얘기해. 난 절대로 둘의 결혼… 아앗! 아니야! 어쨌든 찬성 못 해! 안 해! 무조건 반대야!”

“중증 브라더 콤플렉스 같으니.”

“망할 아서 렌튼! 돌아오지 말지 그랬어!”

멸칭이 동생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아서가 나서기 전에 엘리엇의 눈에서 불똥이 먼저 튀었다.

“글래스턴이야!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못된 입을 회초리로 때려줄 테다!”

“나를 변호해 줘서 고마워, 내 사랑.”

그러면서 아서는 득의만만하게 덧붙였다.

“이미 돌아온 걸 어떻게 하나?”

건들거리면서 약을 올리는 아서와 부아가 치밀어 콩콩 뛰는 릴리벳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똑똑.

느닷없는 노크에 셋이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엘리엇, 몸은 괜찮나? 말소리가 들려서 말이야. 혹시 릴리벳이 거기에 있나?”

“아. 그래. 이젠 괜찮아.”

엘리엇은 아서의 가슴을 슬쩍 밀쳤다. 아서는 놓아주지 않으려고 버텼으나 엘리엇이 흘기자 어쩔 수 없이 팔의 힘을 풀었다. 그사이 릴리벳이 문을 열었다.

“여보.”

뭐가 억울한지 릴리벳은 윌리엄에게 와락 안겼다. 윌리엄은 영문도 모른 채 아내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 등을 토닥였다.

“일어나도 괜찮나?”

“등이 아프긴 해도 사지는 멀쩡해.”

“그거 다행이야.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네. 절대 안정이 중요하다고 해서 이제야 와 보게 되었네. 미안해.”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리고 아직도 승마복을 입고 있는 동생을 날 대신해서 좀 돌봐 줘. 많이 걱정했더군.”

“그래. 늦은 밤이니 돌아갑시다. 여보.”

못마땅한 채 얼굴을 흐린 릴리벳은 엘리엇과 아서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오빠를 부탁해.”

“걱정하지 마.”

“오빠.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나도 사랑해.”

잠시 두 사람을 보던 릴리벳은 이내 싱긋 웃어 보였다. 부상으로 인한 걱정과 연이은 진실 폭로로 충격을 많이 받은 듯했지만, 아마 별일 없을 터였다. 릴리벳의 곁에는 윌리엄이 있으니까.

“릴리벳은 네가 나와 어떻게 시작한 건지 모르고 있군.”

둘이 남자 아서가 말했다.

“물론이지.”

“내게 돈을 빌렸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잖아.”

“그럼 어떻게 갚았느냐고 묻겠지. 꼼꼼하게 따지고 들 애야. 그때 쓴 돈은 이미 로우드 남작 부인이 갚았어. 그러니까 그 얘긴 절대로 릴리벳에게 하지 마. 만약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한 반년 정도는 혼자 편안하게 자는 건 어때? 경망스러운 입을 반성하면서 말이야.”

마치 목에 칼이 겨눠진 사람처럼 아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시에 짙은 눈동자엔 비난이 서렸다.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할 수 있냐는 듯이.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엘리엇은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그걸 눈치챈 아서는 엘리엇을 침대까지 부축했다.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침대에 도로 눕혔다. 아서는 아까 릴리벳이 그랬던 대로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엘리엇이 덮은 이불을 정리 정돈한 후에 그는 방 안을 밝히는 가스 등불을 작게 줄였다.

은은한 빛이 아서를 비췄다. 엘리엇은 벅찬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마주 잡은 아서는 허리를 숙여 엘리엇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잠들 때까지 있을 거지?”

“물론. 네가 잠들어도 곁에 있을 거야.”

새벽부터 간호하느라 매우 피곤할 테니 가서 쉬라고 해야 했건만, 엘리엇은 도무지 그런 성숙한 배려를 할 수 없었다. 대신에 제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어? 정말로?”

“그래.”

“믿을 수가 없군.”

“믿을 때까지 질리도록 말해 주지. 난 처음부터 널 좋아했어. 엘리엇 데일.”

빙그레 웃자 아서가 입술을 손등에 댄 채로 마주 웃었다.

“망할 자식.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다시 만났을 때, 친하게 지내길 원한다고 얘기했어.”

“그게 그거랑 같아?”

“다를 건 또 뭐야?”

“넌 진짜 나쁜 자식이야.”

“너만 하겠어, 엘리엇?”

그러면서 아서는 상체를 일으켜 세워 입술을 맞췄다. 부드러운 연인과의 키스는 언제든 달가웠다. 엘리엇은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게도 몸이 더는 피로를 버티지 못했다. 많은 걱정과 오해가 날아간 후에 찾아온 안도와 기쁨이 온몸을 녹이는 바람에 눈이 자꾸 가물가물 감겼다.

“네 못된 장난 때문에 난 사랑하는 사람과 15년간이나 떨어져 있었거든. 앞으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테니 지금은 일단 자.”

“기대하지.”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 해.”

엘리엇은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꿈일까 두려운 순간에 마주 잡은 단단한 손에서 연인의 체온이 느껴졌다.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지고, 평안과 행복을 실은 무의식의 물결 속에 엘리엇은 거리낌 없이 풍덩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엘리엇은 나이트스톤을 막 나섰다. 폴리벳 부인과 벳시, 그리고 콥스의 배웅을 받아 가벼운 걸음으로 나이트스톤의 장원에서 나온 뒤, 엘리엇은 멀리 보이는 언덕을 향해 걸었다.

가시나무로 휩싸인 낡은 성채로 향하는 길은 작년과 달랐다. 가시마다 노란 꽃망울이 맺혀 사방이 노란빛의 바다였다.

머리 위로 바람이 살랑였다. 멀리 푸른 들판 위로 보이지 않는 짐승이 휘달렸다. 옷자락을 들쑤시는 간지러운 바람을 헤치며 천천히 언덕으로 올라갔다.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성채에 도착했을 때, 길퍼드가 딱딱하지만 정중한 태도로 맞았다.

황량한 앞뜰은 소담스러운 화분이 빼곡했다. 그 안에는 고장에서만 나는 들국화, 들장미, 나리 등 야생화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돋아났다.

어느 틈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달아나는 제인과 그를 쫓는 찰리, 그리고 다정하게 정원을 거니는 릴리벳과 윌리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

엘리엇은 들뜬 마음으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분 아래서 뭔가를 다독이는 남자의 커다란 등을 발견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이 그의 셔츠에 닿아 한층 눈이 부셨다.

아서.

화분을 다듬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편안하게 단추를 풀어 헤친 그는 엘리엇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단단한 입매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바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건강하고 따뜻한 손. 그에서 느껴지는 온기. 꿈인 걸 알면서도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감.

엘리엇은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