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11화 (11/18)

쏜힐 ; 가시나무 성 3권

5. 로드니안 시즌 (2)

언제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눈을 떴을 때 엘리엇은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물론 아서의 침대였다.

“으으.”

전신 근육이 녹아 버린 듯 힘이 빠졌다. 눈꺼풀을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의 빛깔과 각도로 보아 늦은 오후였다.

‘릴리벳이 걱정하겠군.’

화를 내면서도 걱정할 게 분명했다. 번번이 동생에게 실망을 선사하다니. 자신은 오빠 자격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었다.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를 간신히 끌어모았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한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무릎이 꺾였다.

털썩.

“젠장.”

짧은 욕에도 목이 따가웠다. 바짝 마른 입 안에서 억지로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침대에 손을 짚었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제야 엘리엇은 손목이 쑤신다는 걸 알았다. 내내 벨트에 매달려 무너지는 몸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깨와 팔꿈치도 쑤셨다.

반대로 하체는 아예 감각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제게 다리가 달렸다는 걸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일어서기 위해서 의식을 억지로 무릎에 집중했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며 옷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옷은 침대 발치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길퍼드인가.”

그냥 한 말이었다. 아서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 중에 아는 이름이 그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뜻밖에도 부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서가 있었다. 그가 거기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부터?”

“계속.”

꽤 난잡하고 긴 섹스였기에 흔적이 전혀 없을 수가 없는데 몸이 깨끗했다. 몸을 살피는 엘리엇의 궁금증을 알아챘는지, 아서가 묻지 않은 말에 답을 들려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네 모습을 보일 순 없잖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엇은 바지를 집어 들었다. 선 채로 다리를 끼워 넣으려다가 다시 쓰러질 뻔했다. 하는 수 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느릿느릿 바지에 다리를 끼웠다.

“하루 쉬었다 가지?”

“괜찮아.”

머리도 멍하고 어지러웠다. 이대로 익숙한 침대에 쓰려져 저녁 내내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기에 아서의 제안은 무척 구미가 당겼다. 이미 몇 번 묵어 간 적이 있으므로 거리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계속 옷을 입었다.

“로우드 가에 미리 연락해 뒀어.”

“매번.”

매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려다 말았다. 더는 일일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 엘리엇은 입꼬리를 간신히 올리면서 답했다.

“고마워.”

침실 한쪽에 있는 대형 서랍장에 어깨를 기대고 삐딱하게 선 아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던 팔이 위로 올라가더니 단단한 팔짱을 만들었다. 팽팽한 근육 때문에 흰 셔츠 주름이 짙어졌다. 미묘한 불편함이 발산되었다.

“어제 무슨 일로 다시 찾아왔는지 물어봐도 되겠어?”

“그 얘기는 끝났잖아.”

“시작한 적도 없는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셔츠 단추를 잠그던 엘리엇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몸으로 대화하자면서.”

“그렇긴 하지.”

말끝이 살짝 길게 빠졌다. 덧붙일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굳이 들을 까닭이 없었다.

“섹스를 위해서 습관처럼 던진 말이라고 발뺌하지는 마.”

지친 기색으로 답했다. 윽박지르면서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 있는데도 아서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꽉 낀 팔짱이 더 단단해졌다.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계속 끌어가도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내면에 자리 잡은 죄책감의 불씨가 확고한 선언을 종용했다.

“네가 원할 때까지 섹스는 얼마든지 해도 좋아.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일도 없을 거야.”

“갑자기 정숙한 척할 필요 있나. 다른 여자 얼마든지 만나도 좋아. 물론 제인 플레커는 제외하고. 약혼녀는 아니지만 어쨌든 얽혀서 기분이 썩 좋은 상대는 아니니.”

“아니. 너로 충분해.”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서의 팔이 약간 움직였다. 전에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솔직한 편일지도 몰랐다. 물론 혀가 아닌 몸 말이었다.

“왜지?”

굳이 물어 올 줄 알았다.

“체력이 모자라기도 하고. 다른 데 신경 쓰기도 지쳤어.”

솔직한 심정이었다. 연회에서부터 시작된 잇따른 소동과 언쟁 끝에 고문에 가까운 부드러운 섹스에 시달리고 났더니 더는 생각하기 싫었다.

“뭐든 네 기분이 풀릴 때까지 원하는 대로 하겠어.”

“기분이 풀려? 애초에 꼬인 적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고?”

아마도 분풀이 겸 릴리벳에 대한 보상. 하지만 그걸 제 입으로 내뱉기는 어려웠다. 혹시나 아서를 자극할까 두려웠고 또 두 사람 간에 벌어지는 상스럽고 지저분한 일에 ‘릴리벳’이라는 이름을 거론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동생이 관여하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오해를 피하고 싶다면, 지금 말해.”

“뭐를? 내가 원하는 것을?”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엘리엇은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원하는 바를 어떻게 아느냐고 추궁해 놓고도 아서는 막상 엘리엇이 순순히 귀를 기울일 자세를 갖추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군.”

“수작이 아니야. 지금껏 네게 옳지 않은 편견을 가졌어. 내가 함부로 던졌던 욕설과 비난에 관해….”

그래서 사과를 하고 싶다고 해야 했다. 어제 아서를 찾은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약혼녀의 출현으로 그러질 못했다. 물론 약혼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때 느꼈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했다.

영원히 대용품 취급을 받으리라는 사실도.

“욕설과 비난에 관해서?”

아서는 뒷말을 채근했다. 사과해야 했지만. 옹졸하게도 미안하다는 말이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철회하도록 하지.”

“철회라.”

“또한… 후. 앞으로 네게 부당한 비난을 삼가겠어. 너는 그럴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야.”

조심스럽게 건넨 말을 아서는 듣고만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로 딱딱한 표정과 태도로 엘리엇의 진의를 가늠했다. 침묵이 불편해질 무렵, 그가 보인 최초의 반응은 낮은 헛웃음이었다.

“심경의 변화가 대단히 극적이군. 어제부터 갑자기 이상해졌어. 릴리벳과 말다툼을 벌인 모양이던데. 무슨 얘기를 했기에 이러는 거지?”

“그날 일에 대해서.”

“호오.”

짐짓 흥미롭다는 듯이 아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팔짱은 아까보다 더 꽉 조였다. 그처럼 엘리엇도 입술을 깨물었다가 풀었다. 시선을 바로 들고 아서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내가 그 쪽지만 네게 주지 않았더라도 넌 쫓겨나지도 않았고 돌아가신 외숙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을 거야.”

“그래서?”

되묻는 아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너른 어깨가 꿈틀거렸고 전신에서는 사나운 기운이 뻗쳤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상처와 증오에 직결되는 예민한 주제임에도 아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엘리엇의 뒷말을 기다렸다.

“내가 보상할 수 있는 건 하려고.”

“풋.”

보상이라는 음절을 내뱉었을 때 아서는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트렸다.

“쿡쿡쿡.”

어렵게 꺼낸 진심인데 그는 이 상황이 웃긴 것 같았다. 웃음이 점점 번졌다. 어깨까지 들썩이는 모습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진지해.”

“미안. 크흠.”

목을 가다듬은 아서는 웃음기를 지웠다. 무표정을 가장했으나 눈꼬리와 입매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렸다.

“진심이야.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게.”

“구체적으로 어떤?”

침을 꿀꺽 삼키며 의지를 다진 엘리엇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나이트스톤을 원한다면 네게 넘기겠어.”

“풋.”

아서는 기어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끅끅 웃어 댔다. 그러다가 엘리엇이 온통 인상을 찡그리는 걸 발견하곤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팔짱을 반쯤 푼 채로 입을 뭉그러뜨리는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엇은 모욕감을 넘어선 비참함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지?”

“미안해. 네가 너무 진지해서.”

“진지할 문제잖아.”

“그렇긴 한데.”

두 번의 심호흡 후에도 아서의 음성은 평소보다 들뜬 티가 났다.

“그날 일은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어. 이후에 죽을 고비도 무수히 넘겼지.”

“…….”

“하지만 그건 벌써 십오 년 전의 일이야. 게다가 내가 바라는 건 양부의 인정인데 그건 네가 신이 아닌 이상 보상할 수 없잖아.”

“그렇지.”

엘리엇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탄식했다. 손끝이 떨렸다.

“너무 가벼이 여겼군. 보상도 유치한 발상에 불과해.”

“그렇지.”

아서는 뼈아픈 지적을 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이트스톤이라도.”

“다시 말하는데 난 나이트스톤에 관심 없어.”

“하지만 전에는….”

엘리엇의 반문에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네 억측일 뿐이야. 그때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네가 일방적으로 나를 약탈자로 규정하고 비난했기 때문이지. 나이트스톤과는 관계없어. 준다고 해도 그런 작은 장원 따위 귀찮기만 할 뿐이고.”

“그렇군.”

좌절에 좌절을 거듭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알량한 보상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자신이 어리석었다. 낭패감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고민할 문제야.”

무거운 돌이 가슴을 눌렀다.

“그런데 굳이 뭔가를 해야 하나?”

아서가 되물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데.”

영원한 대용품이 되라는 뜻이었다. 순간 심장 언저리가 쿡 쑤셨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명치를 만졌다. 단도로 생살을 헤집는 듯한 고통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릴리벳의 대용으로 살라는 말이 맞느냐고 되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물끄러미 이쪽을 응시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엘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이젠 제대로 된 대접도 해 줘.”

“물론.”

작은 농장주의 대접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엇은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러자 아서는 대단히 만족스러운지 한껏 미소를 지으며 똑바로 섰다. 내내 끼고 있던 팔짱을 푼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엘리엇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뒤이어 고개가 다가왔다.

초옵촉.

아서는 부드럽고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탄력적인 입술과 매끄러운 혀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전신에 휘감긴 그의 몸도. 하지만 차디차게 얼어 가는 엘리엇의 심장부를 녹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팔을 들어 올려 상대의 굵은 목에 감았다. 신체를 밀착하고 입을 열어 그의 혀를 안으로 초대했다. 그것이 엘리엇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아서의 집을 떠나 로우드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의 티타임이 지난 애매한 시각이었다. 내심 소동이 일어날까 걱정했다. 그러나 엘리엇을 맞이한 집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데일 씨.”

“늦어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은?”

“큰 마님께서는 늦은 낮잠을 주무시고 두 분은 작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도착을 알릴까요?”

작은 응접실은 신혼부부가 사용하는 개인실이었다. 두 사람의 정다운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코트와 모자를 넘기고 천천히 계단으로 향하던 엘리엇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저녁 식사엔 누가 참석하지?”

“세 분 다 남작님의 돌아가신 사촌이신 스트링스 부인 댁 만찬에 가실 겁니다.”

“아. 그렇군.”

다행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세 사람을, 특히 릴리벳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내심 안도한 엘리엇은 느린 걸음으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는 엘리엇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늦잠을 잤다.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하녀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저택에 있는 두 귀부인이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남작 부인은 오랜만의 외출이 버거웠는지 내내 방에서 휴식했다. 릴리벳과 윌리엄은 느린 준비 끝에 가족용 응접실로 나왔다. 곧 차와 간단한 간식이 차려졌다.

“안녕, 릴리벳.”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엘리엇은 실내복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은 릴리벳에게 다가갔다. 냉랭하게 맞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동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었다. 허리를 굽혀 뺨에 입을 맞추었다.

“어제 만찬이 매우 즐거웠나 보구나. 아주 늦게 온 모양인데?”

“응. 무척 재미있었어. 스트링스 부인이 굉장한 재담가셨거든. 남작 부인께서 스트링스 부인과 가까이 지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무척 좋으신 분이야.”

“스트링스 부인께서도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셨어. 굉장히 환영받았지. 다음 모임에도 초대하셨고 말이야.”

엘리엇과 눈빛으로 인사를 나눈 윌리엄이 대답했다.

“둘이서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다행이다.”

웃으면서 윌리엄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집사가 향긋한 차를 준비하고 나서 조용히 사라졌다. 따뜻한 차향에 휩싸이자 마음이 편안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깨트린 건 윌리엄이었다.

“그런데 자네, 어제 내내 어디에 있었나?”

반드시 설명해야 할 얘기긴 하지만 막상 답하려니 뭐부터 꺼내야 할지 알지 어려웠다. 차를 음미하며 단어를 고르는 사이, 찻잔을 내려 둔 릴리벳이 조금 엄한 눈길로 엘리엇을 쳐다봤다.

“아서에게 갔었지?”

“평생 널 속일 순 없겠어.”

희미하게 웃었다.

달깍.

찻잔을 내려 둔 엘리엇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아서를 찾아갔었어. 네 말을 듣고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중간에 일이 좀 있었지.”

두 사람은 조용히 들었다.

“내가 그를 오해했어. 네 말대로 아서는 그저… 소년에 불과했어. 그날에 말이야.”

“그걸 알았다면 다행이야. 그건 정말로 사고였고, 실제로 나도 조금 놀랐을 뿐 아무런 피해가 없었어.”

릴리벳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설명한 모양이었다. 윌리엄은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잡아 한껏 입을 맞추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어?”

“아서의 감정은 순수했어. 그리고 지금은 지나갔지. 그뿐이야.”

“알아. 그가 불순한 마음을 먹지 않은 것에 나는 감사할 따름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이 다른 남자의 곁에 있었을 수도 있잖아.”

“당신이 질투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지?”

두 사람의 다정한 대화를 듣는 사이 엘리엇은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긴 바늘이 질긴 근육을 뚫는 감각이 선명했다. 엘리엇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차 맛이 바뀌었다. 좀 전엔 분명히 향기로웠는데 지금은 물약처럼 썼다.

“그래서 아서에게 사과했어?”

“지난날의 잘못을 후회한다고 말했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보상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그자가 뭐라고 하던가? 나이트스톤을 내놓으라고 했나?”

엘리엇은 윌리엄을 봤다. 윌리엄이 아서였다면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서는 그보다는 릴리벳에 더 가까웠다. 그걸 증명하듯 릴리벳은 눈살을 찌푸리며 남편을 탓했다.

“아서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물질적인 것보다는 조금 더 명예로운 것을 원할 거야. 그렇지?”

“너는 아서를 잘 아는구나.”

“같이 살았잖아.”

엘리엇의 말에 릴리벳은 당연하다는 듯이 응수했다. 그 당연한 일이 왜 엘리엇은 어려웠을까. 어린 릴리벳도 아는 것을 엘리엇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비슷해. 과거는 과거로 넘기라더군.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신이 아닌 이상 들어줄 수 없다고. 대신 지금의 자신을 똑바로 보고 존중해 주길 원했어.”

“보기보다 인격자군.”

윌리엄이 감탄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지끈거렸다. 아무런 편견 없이 보았더라면 윌리엄보다 더 빨리 알았을 텐데. 씁쓸함이 밀려왔다.

“앞으로는 잘 지낼 거지?”

“그래.”

대답을 들은 릴리벳은 기쁘게 웃었다.

“나중에 다 같이 만났으면 좋겠어.”

“언젠가 모두 함께 나이트스톤에서 명절을 보내는 건 어때?”

“좋은 생각이야, 윌. 오빠도 찬성이지?”

“그럼.”

뛸 듯이 기뻐하며 방글방글 웃은 릴리벳을 향해 엘리엇은 언제든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릴리벳과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윌리엄과도, 남작 부인과도 잘 지냈다. 이상하게도 엘리엇은 때때로 숨이 막혔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릴리벳을 전과 같이 사랑스럽게 보지 못하는 자신. 여전히 사랑스럽고 소중한 동생이지만, 때때로 씁쓸함이 밀려와서 가슴을 짓눌렀다.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건만, 엘리엇은 제 감정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직시를 거부했다. 모호한 감정이 뚜렷한 색채를 띠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무저갱으로 빠져들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디 가?”

막 계단을 내려가는 엘리엇을 발견한 릴리벳이 물었다.

“산책.”

“요즘 산책이 잦네.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감기 걸리지 않게 오늘은 집에 있는 게 어때?”

“집에만 있으면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더 감기에 걸릴걸?”

짐짓 웃으면서 엘리엇은 현관을 지키는 하인에게 도움을 받아 코트와 실크해트를 걸치고 나섰다.

사실 산책하기에는 으슬으슬했다. 하지만 추운 날씨라 릴리벳과 윌리엄이 내내 저택에 머물렀다. 릴리벳은 같이 게임도 하고 차도 마시자고 했으나, 엘리엇은 독서를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다가 못 참을 것 같으면 긴 산책을 나섰다.

낯선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비강과 폐를 채우자 답답함이 조금 가셨다. 구두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에 발가락 감각이 없어질 때쯤, 가까운 찻집에 들러 뜨거운 차를 한잔 마셨다. 그러고 나서 또 걸었다.

산책 도중에 만난 가는 비는 진눈깨비가 되었다가 말길 반복했다. 비와 눈, 진흙과 먼지가 뒤엉켜 거리가 질척거렸다. 굳이 구두와 바지를 버려 저택 하인의 일감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실내 산책로가 있으면 좋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되도록 깨끗한 길을 모색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걷지 않는 거리로 접어들었다. 그 끝에는 왕궁처럼 화려한 부조 장식을 단 거대한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있는 그곳은 로드니아에서 손꼽히는 고급 백화점이었다. 릴리벳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백화점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겠군.’

나이트스톤에 있는 폴리벳 부인에게 전해 줄 선물을 사야 했다. 릴리벳을 시중드느라 고생인 벳시 물건도 사고, 무엇보다 동생에게 뭔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 애에게 향하는 불우한 마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백화점 입구에는 코트와 모자를 맡아 주는 직원이 있었다. 홀가분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아치형 지붕엔 최신 최고급 유리를 덮어 겨울에도 빛이 쏟아졌다.

뻥 뚫린 중앙 공간을 에워싼 건물 내벽을 따라 대리석 복도가 빙글빙글 돌았다. 상점은 복도를 따라 쭉 나 있었는데, 여느 가게처럼 벽이나 문이 달려 있지 않고 구분을 위한 간단한 벽만 있어서 걸으면서 구경하기 좋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대리석 복도를 따라 천천히 5층까지 올라갔다. 꼭대기 구석에 있는 찻집 겸 휴게실에서 무료로 차를 제공했다. 거기서 차를 마시고 천천히 내려오면서 쇼핑하는 게 많은 상류층의 취미였다.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 자리에 앉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직원이 다가왔다.

“일행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알겠습니다.”

직후 직원은 혼자 마시기에 좋은 포트와 찻잔을 가져왔다. 첫 잔을 따라서 내민 다음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춥고 궂은 날씨인데도 외출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손님들이 제법 들어왔다.

최신식 드레스를 곱게 입은 부인은 제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떼를 쓰는 소년에게 엄한 눈길로 주의 주었다.

“엄마아.”

“안 돼. 저번에도 사 줬잖아. 망가뜨린 건 네 잘못이야.”

졸린 소녀는 아버지 같은 신사의 손을 잡고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품에 안겼다.

정다운 웃음을 지으며 들어온 여자 둘은 자매 같았다.

“올해 이딸리에서 유행하는 새 레이스가 들어왔대.”

“나도 같이 살래.”

“물론 네 몫까지 주문했지.”

비슷한 눈매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들은 차를 마시면서 너무나도 행복하게 수다를 떨었다.

묘하게 어색한 듯 살짝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걷던 남녀도 자리를 잡았다.

“차가… 향긋해요.”

“네? 네네. 그렇습니다. 정말로 향기롭습니다. 마치 당신처럼.”

서로 눈길을 마주치다가도 괜히 딴청 부리며 차에 집중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서툰 연인이었다.

모두가 따뜻한 광경이었다. 진눈깨비에 얼어붙은 마음과 몸이 천천히 녹으면서 훈훈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카페 가장자리에서는 반대편 아래층 복도가 보였다. 모자와 스카프를 취급하는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모진 날씨에도 손님이 계속 들어가는 걸 보니 꽤 인기 있는 곳 같았다.

실내용 장식 모자를 아주 세련되게 쓴 사람은 아무래도 점원 같았다. 그녀는 화려한 모자와는 달리 아주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드레스와 대비되어 모자가 매우 눈길을 끌었다. 아주 실력 있는 점원이었다.

그녀가 막 커다란 모자 상자에 리본을 매어 물건을 나르는 제복 직원에게 맡긴 후, 갑자기 아주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점원의 시선 끝에는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겨울용 드레스는 보통 짙은 색이기 마련이었다. 그쪽이 보기에도 푸근할 뿐만 아니라 벨벳이나 두꺼운 모직 같은 겨울용 천은 세탁이 어려워 밝은 염색을 하면 손질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막 모자 상점에 들어간 사람은 고급 드레스가 망가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사교계를 휘어잡는 굉장한 멋쟁이임이 분명했다. 혹은 둘 다거나.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뒤에는 고급 상표가 커다랗게 새겨진 상자를 든 제복 직원이 따라다녔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은 비단 엘리엇뿐만이 아니었다. 백화점 곳곳에서 그녀를 의식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고, 또한 카페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레이디 클레어야.”

“저런 최신식 드레스를 입을 사람은 레이디 클레어뿐이지.”

자매 중 하나가 말했다.

“가서 인사할까?”

“그래. 오늘 백화점에서 만나다니 운이 좋아.”

자매는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종종걸음으로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사라졌다.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소년이 엄마에게 물었다.

“누구야?”

“유제니아 공주님의 손녀야. 레이디지.”

“그럼 공주잖아.”

“그건 아니야.”

공주의 손녀가 공주가 아니라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지 소년은 인상을 찡그렸다.

***

“아서. 시간에 맞춰 오셨군요.”

“물론입니다. 레이디 클레어.”

아서는 고귀한 숙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손은 차가웠다. 보통 그러듯이 입술을 대는 흉내만 내려고 했다. 그러나 아서가 허리를 가장 아래로 굽혔을 때, 상대가 손을 움직여 그의 입술에 대었다가 내렸다. 깜짝 놀랐으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행세했다.

“어려운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레이디 클레어에게 도움이 되어서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커다란 모자 상자가 셋이었다. 상점 주인은 가죽으로 마감한 판과 만년필을 준비한 다음 웃으면서 눈을 마주쳤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클레어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상점 주인에게로 갔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펜을 아서에게 내밀었다.

“배송해 드릴까요?”

“마차에 실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아서가 수표에 사인하는 동안 상점 주인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복 직원을 불렀다. 그들은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는 상자를 가득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표를 상점 주인에게 건넨 아서가 밖으로 나오자 레이디 클레어가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좋습니다. 새로운 도자기와 레이스가 들어왔다고 하던데 같이 보러 가시겠습니까?”

“좋아요.”

새침하게 웃은 그녀는 아서가 내민 팔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어딜 봐도 의미심장한 관계를 암시하는 태도였다.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것이야말로 레이디 클레어가 바라는 바였다. 일부러 이런 궂은 날에 백화점을 방문하겠다고 한 사람도 그녀였다. 비가 오는 추운 날에는 굉장히 활동적이거나 사교적인 사람만이 백화점까지 나온다는 점을 특별히 노렸다.

“단골 상점이 있습니까?”

“음. 특별히 염두에 둔 곳은 없어요. 추천해 주실 가게가 있나요?”

“주로 거래하는 상점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지요.”

레이디 클레어는 입꼬리를 올렸다. 온화하고 다감한 태도와 말씨를 쓰면서도 눈은 웃지 않는 점이 대단했다. 황가 특유의 냉정한 태도는 분명 조모이신 유제니아 황녀에게 물려받은 듯했다. 냉정한 겉모습과 달리 불타는 심장을 가진 점도 여걸로 유명한 유제니아와 판박이라는 소문이었다.

도자기 상점이 있는 쪽으로 향하면서 아서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주위 시선이 날아드는 건 익히 알고 있으나 그것과는 좀 다른 감각이었다. 사방에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기에 자연히 시선이 위로 향했다.

반대편 지붕 바로 아래 자리 잡은 카페. 가장자리 테이블을 사용하던 남자가 막 등을 돌려 사라지고 직원이 남은 찻잔을 정리했다. 자리를 뜬 그의 뒷모습을 한눈에 알아봤다. 화려한 금발이 아니라도 아마 손끝이나 발끝, 혹은 한 올 남은 머리카락을 보고서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이라고, 아서는 확실했다.

“아는 사람이 있나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레이디 클레어가 같은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엘리엇은 벌써 사라졌다. 아서는 그가 어느 쪽으로 간 건지 추측했다. 아무래도 카페 뒤편 계단 같았다.

“곤란하신가요?”

“음. 약간.”

아서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을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간의 일은 당분간 비밀이 아니었던가요?”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서요.”

그러자 레이디 클레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와 사이가 나빠지면 곤란할 텐데요. 그걸 감수하더라도요?”

“네. 제 인생을 걸어서라도요.”

옅은 미소와 함께 확신에 찬 답을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레이디 클레어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아서의 팔에서 손을 빼냈다.

“어쩔 수 없군요. 어려운 부탁을 한 사람은 저니까요.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알지 않게 해 줘요.”

“물론입니다.”

“지금 가야 하는가요?”

“그러고 싶습니다.”

마침 도자기 상점 앞에 도착했다.

“도자기 상점에서 기다리지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마침 도자기 상점 앞에 도착했다. 레이디 클레어를 발견한 상점 주인이 환한 웃음과 함께 다가왔다. 아서는 그에게 눈짓으로 그녀를 부탁한 다음, 서둘러 반대편 계단으로 향했다. 전에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면서 묵은 오해를 해소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신뢰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아서는 엘리엇을 믿었다. 그러나 엘리엇이라면 아무래도 벌써 쓸데없는 오해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반쯤은 뛰듯이 걸었다. 사실 백화점만 아니었으면 전력으로 질주했을 터였다. 그나마 백화점 구조에 대해 잘 알기에 동선을 익히 알았고, 덕분에 기대보다 상당히 빠르게 뒤편 계단 입구로 진입했다. 서늘한 계단을 따라 익숙한 콜로뉴의 잔향이 감돌았다. 역시 엘리엇이었다.

탁탁탁.

발걸음이 아래에서 들려왔다. 아서는 즉시 아래로 향했다. 한 번에 서너 계단씩 훌쩍훌쩍 뛰어넘었기에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졌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아서는 엘리엇의 정수리를 볼 수 있었다.

“엘리엇.”

목소리가 위아래로 뻥 뚫린 공간에 울렸다.

탁.

앞서가던 구두 소리가 멈췄다. 안도하며 아서는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엘리엇은 막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 칸 내려간 지점에 서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계단 세 개를 내려간 뒤 돌아본 아서는 웃던 낯 그대로 살짝 굳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피부가 흰 편인 엘리엇의 낯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푸른 호수같이 맑은 눈동자는 먹구름이 낀 바다색이었다. 번들거리는 안구를 둘러싼 가장자리 점막은 대조적으로 붉은 앵두색이었다.

“엘리엇?”

엘리엇은 아서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파란색 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떨리는 입술이 이내 슬며시 호를 그렸다.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창백한 낯을 조금 움찔거렸다. 의례적인 웃음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우… 연이군.”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오늘 백화점에 올 줄 알았다면 같이 올 걸 그랬어.”

“일행이… 있잖아.”

“너보다 중요한 사람은 아니거든.”

예상대로 엘리엇은 할 필요가 없는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혼란스러운 듯 금색 눈썹을 찌푸렸다.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답고 세련된 숙녀분이시던데. 저명인사 같았고.”

“너도 아는 사람이야. 레이디 클레어.”

“내가?”

“노스필드 백작의 연회에서 같이 춤을 췄잖아. 군무라서 기억이 안 나나?”

“아.”

그제야 떠올랐는지 엘리엇은 작은 탄성을 뱉었다. 아서는 웃으면서 두 계단 올라섰다. 계단 하나 차이를 두고 마주 서자 가슴이 거의 겹칠 듯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어. 네게 밝혔지.”

“그래도 엿들었잖아.”

그러자 엘리엇은 똑같은 높이에 있는 아서의 눈을 피했다.

“어쨌든 레이디 클레어가 너를 좋… 호의를 가진 것 같군.”

“내게 바라는 것이 있거든. 우린 모종의… 사업상 거래를 진행 중이야.”

“그런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

“어떻게 보이는데?”

좋아한다고 하지 못해 호의라고 급하게 정정한 엘리엇은 이번에도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의 눈시울이 시시각각 붉어졌다.

당황하는 것 자체가 아서를 무척 의식한다는 반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지만, 엘리엇이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서는 즐거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때로는 매서운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그날 나이트스톤에서 쫓겨난 이유도 정확하게는 자신이 엘리엇을 한계에까지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제풀에 찔려 어설픈 쪽지처럼 빤히 보이는 술수에도 넘어갈 만큼.

“레이디 클레어와 내가 어떻게 보였는데?”

혼란과 당혹감이 번져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는 보복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고개를 쳐들며 그를 종용했다. 시선을 회피하기 위해 살짝 내리깐 금색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그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언제 맡아도 감미로운 숨을 음미하면서 아서는 입술을 그의 귓가에 바싹 가져다 댔다.

“엘리엇?”

낮게 부르는 동시에 겨울용 정장이 가리지 못한 목과 턱이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펄떡 뛰었다.

“무슨!”

주변을 의식하면서 그는 아서의 입술이 닿은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반보 물러나고도 불편했는지, 그는 비켜선 다음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얘기 안 끝났잖아.”

“난… 할 얘기 없어.”

목을 감추는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곤 위협하듯 바싹 다가갔다. 엘리엇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돌렸다. 미간은 내내 찡그러진 채였다.

“숙녀를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야.”

“몸을 겹치는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를 하는 것도 좋은 습관은 아니야.”

밖에서 쓸 표현은 아니라고 여겼는지, 엘리엇은 또 찡그린 표정으로 주변을 의식했다. 입 좀 다물라는 무언의 눈빛에 아서는 씩 웃어 보였다.

“레이디 클레어는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어서 내게 특별한 일을 부탁했어. 그 대가로 무엇을 받을지는 결정하지 못했어. 하지만 레이디 클레어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거고 또한 황가와도 연결 고리가 있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사업상 큰 이득이 될 거야.”

“지금 사업, 그러니까 돈 때문에 레이디 클레어와 교제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평민 중에서도 하급인 내가 고귀한 황족과 함께 다닐 이유가 뭐겠어.”

“저열해.”

“늘 듣는 말이지.”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면서 수치라고는 모르는 인간.”

“네 앞에서는 그렇지.”

“레이디 클레어도 네가 사실은 돈만 생각하는 악덕한 자본가인 걸 아나?”

“물론. 그래서 나를 찾아온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지켜야 할 명예가 대단하지 않은 악덕 자본가니까.”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서 가볍게 맞받아쳤다. 오히려 레이디 클레어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찾아와서 큰 행운이라고 여겼다. 그녀가 가진 인맥과 막대한 재산, 그리고 널리 퍼진 사교계의 평판까지. 모두가 사업을 확장할 기회였다.

누군가는 그런 자신을 냉정하고 뻔뻔하다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아서와 면을 마주할 때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거짓된 경의라도 표시해야 했다. 그렇기에 남들이 뭐라 하든지 무관심했다.

중요한 건 눈앞에 서 있는 미치도록 귀여운 남자의 견해였다. 엘리엇은 아서의 객관적 자기비판에 조금 놀란 듯했다.

“그렇게 자학할 만큼 형편없진 않아.”

“누가?”

알면서 굳이 모르는 척했다. 엘리엇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서 글래스턴을 칭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못내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모습에 아서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랬다가는 엘리엇이 참지 않고 손을 휘두를 것이고, 커다란 타격음은 이 고요한 계단을 타고 온 백화점에 쩌렁쩌렁 울릴 터였다.

“사업상 만남이더라도 내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엘리엇은 짐짓 어떤 오해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굴었다.

“진심이야?”

그 질문에 엘리엇은 끝끝내 대답하길 거부했다. 일행을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얼른 자리를 뜨려고도 했다. 수없이 몸을 겹쳐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 입술이 정말로 얄미웠다. 그를 그냥 보내 주기엔, 아서는 그 입술을 너무 좋아했다.

팔을 잡아당겼다. 가까이 있었기에 엘리엇에겐 저항할 여유가 없었다.

“흡.”

입을 살짝 벌려 엘리엇의 입술과 교차시켰다. 혀끝으로 틈을 파고들어 앞니를 살짝 긁으면서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딱 한 스푼만 떠먹는 느낌이었다.

“무슨. 비켜.”

놀란 엘리엇이 어깨를 밀어냈다. 아서는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꽉 잡았다가 놓았다.

“밤에 늘 기다리던 데서 기다릴게.”

탁탁탁.

입을 다문 채로 엘리엇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아서는 그가 나타날 것을 알았다.

그날 밤, 아서는 로우드 저택에서 대각선으로 한 블록 떨어진 가로등 밑에 서 있는 엘리엇을 발견하고 제 예상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덜컹. 덜컹.

고르지 않은 노면을 지날 때마다 마차가 흔들렸고 그럴 때마다 자지를 물고 있는 구멍이 수축했다. 역방향 좌석을 붙잡은 엘리엇은 곤혹스러운 신음성을 내질렀다.

“아… 헉!”

어느 때보다 구멍 깊숙이 파고들던 자지의 끝이 매끄러운 살덩이에 막혔다. 그러자 구멍이 다시 한번 세게 수축했고, 아찔한 조임에 엘리엇의 허리에 감긴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큭.”

아서는 탄탄한 등에 얼굴을 묻었다. 하얀 셔츠 아래서 매끈한 등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아… 너무 깊….”

엘리엇은 벌어진 엉덩이를 어쩔 줄 모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서의 굵은 허벅지 위에 걸쳐진 바람에 발끝이 마차 바닥에 닿지 않았다. 힘을 주어 뻗어도 발끝만 간신히 표면을 긁는 정도였다.

“어디까지… 들어갔지?”

허리를 붙잡은 커다란 손 중 하나가 배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난 자지가 내장을 쑤시는 곳을 누르는 바람에 엘리엇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으….”

몸을 뒤틀면서 발작하듯 신음하는 동안 상체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러는 중에도 마차는 덜컹덜컹 움직였고, 엘리엇을 지탱하는 건 허리를 조이는 강한 두 팔뿐이었다.

“여기인가.”

“앗!”

엘리엇은 본능적으로 배꼽 아래를 꾹 누르는 손등을 세게 할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덜컹. 덜컹.

특별히 힘을 주지 않아도 마차가 알아서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아서의 손을 떼어 내려고 겹친 손에 문득 강한 진동이 가해졌다.

“느껴져?”

“으읏.”

느끼고 싶지 않아도 너무 잘 느껴져서 곤란했다. 손바닥까지 전해지는 딱딱한 존재감에 엘리엇은 배가 찢어질까 두려웠다.

“큭!”

중세 시대, 간음죄를 지은 자는 땅에 세운 기름 바른 말뚝에 꽂아 제 체중을 못 이기고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져 꿰여 죽도록 하는 끔찍한 형벌이 있었다. 제 몸을 꿰뚫은 자지도 그에 못지않았다. 기름 대신 정액으로 뒤범벅된 거대한 성기가 언젠가는 목구멍까지 치솟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통을 동반한 쾌락에 휘둘린 뇌는 빠르게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엘리엇의 깊숙한 내부에 존재하던 마지막 거부는 아서에게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큿.”

낯선 감각이 아서와 엘리엇을 동시에 지배했다. 분명히 입구를 뚫었는데 미지의 문을 다시 연 감각이었다. 엘리엇은 제 모든 것이 아서에게 꿰뚫렸음을 직감했다.

“우우… 아.”

영문 모를 서러움이 엘리엇을 뒤흔들었다. 낮은 흐느낌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고개를 떨어뜨리자 아서가 목을 잡아 뒤로 끌었다. 상체가 뒤로 휘면서 뒷덜미가 너른 어깨에 닿았다.

“아파?”

“흐으윽.”

아픈 것과는 달랐다. 물론 고관절이 찢어질 지경이었고 구멍은 당장 밑이 빠질 것처럼 벌어졌다. 그래도 무수히 겪었던 일인 만큼 익숙했다. 하지만 내부가 벌어지는 선연한 느낌은 엘리엇을 공황에 빠트렸다.

“아… 서.”

몸서리치며 손으로 공중을 할퀴었다. 허우적대는 손은 이내 아서에게 잡혀 배 위에 닿았다. 꾹 누르는 압력이 더해졌다. 꿈틀거리는 자지의 움직임은 마치 태동 같았다.

“으… 앗… 큭.”

신음과 뒤섞인 숨을 몰아쉬며 아서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단단히 사로잡힌 덕에 무위로 돌아갔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내장과 복근 안쪽을 두드리는 자지의 기세가 더했다.

퉁퉁.

마차 바퀴가 리드미컬하게 튀었고 그럴 때마다 딱딱한 귀두가 미지의 영역을 두드렸다. 엘리엇의 자지는 스스로 절정에 닿아 미끈한 정액을 쿨쩍쿨쩍 토해 바닥을 더럽혔다.

“도망… 가지 마.”

귓바퀴를 잘게 씹는 남자의 음성은 녹슨 칼날처럼 거칠었다. 끝까지 파헤쳐진 몸이 오싹 오그라들었다. 구멍이 경련하면서 제 안에 있는 자지를 조였다.

“으음.”

아서는 색정적으로 신음했다. 낮은 한숨이 엘리엇의 전신을 떨게 했다.

덜컹덜컹.

마차는 한없이 길을 달렸다. 외부에서 전해지는 잔잔한 충격은 결합을 더욱 부추겼고 엘리엇은 아서의 위에서 낱낱이 파헤쳐진 채로 사지를 덜렁거렸다.

“엘리엇.”

조심스럽게 보듬는 손길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다. 단단한 어깨에 기댄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다.

“힘들어?”

“…….”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눈을 감으며 지독한 남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짧게 맞붙였다가 떨어지자, 자석에 이끌린 듯 단단한 입술이 엘리엇의 부푼 입술을 살짝 물었다.

추웁. 쪽. 초옵.

짧고 얕게, 혹은 길고 깊게. 키스가 이어졌다. 시큰거리는 명치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뻐근한 관절도, 팽팽한 허벅지 근육도, 쓰라린 구멍도. 모두 안도했다.

“안쪽에… 더 들어간 것 같은데.”

키스 도중 아서가 손바닥으로 엘리엇의 배꼽 언저리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힘이 다 빠진 손으로 그가 짚는 부근을 어루만졌다.

“뭐가 걸렸던 거지?”

“나도… 몰라.”

엘리엇은 나른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

“정말 아프진 않아?”

“아프다면? 뺄 거야?”

잠시 배를 더듬던 아서는 곧 씩 웃었다.

“아니.”

“그럼 괜한 소리 말고 키스나 해.”

배 위에서 열 개의 손가락이 얽히는 동안 다시 두 덩이의 혀가 얽혔다. 아서 글래스턴을 구성하는 신체 기관 중 가장 따뜻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부위가 바로 혀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어떤 짓을 당해도 키스하는 사이에 응어리가 스르르 풀려 버렸다. 뒤에서 전신을 감아 오는 사람과의 키스는 무리한 자세를 요구했다. 고개를 너무 돌려 목과 어깨가 뻐근했으나 보상과도 같은 키스를 포기하긴 싫었다.

아서의 저택이 가깝진 않아도 이렇게 오래 걸릴 만큼 멀지도 않았다. 마차에서 불편한 자세로 실컷 시달린 엘리엇이 완전 녹초가 되어 반쯤 혼절할 무렵, 아서는 멀쩡한 낯짝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넉넉한 코트로 엘리엇을 둘둘 말아 안았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찬 바람이 습기 찬 마차 안으로 들이닥쳤다. 숨이 뻥 뚫림과 동시에 정신이 들었다. 가물가물한 시야에도 가까이 보이는 저택이 아서의 집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서.”

놀란 나머지 엘리엇은 둘둘 말린 코트 사이로 손을 빼내 아서의 옷깃을 잡았다.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미… 쳤어?”

당혹감이 혼몽한 눈을 부릅뜨게 했다. 누가 볼까 두려운 나머지 엘리엇은 고개를 아서의 목덜미에 숨겼다.

“못 걷겠으면 직접 침대까지 옮겨 주지.”

“닥치고 얼른 네 집으로 가.”

“요즘은 내 침대에서 자기 싫어했잖아.”

최근 아서와 몸을 겹칠 때마다 굳이 피곤한 몸을 일으켜 로우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걸 이런 방식으로 끄집어내서 불만을 토로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이럴 필욘 없어.”

“그렇다면 어디로 가고 싶지?”

알면서 굳이 캐묻는 낯짝이 몹시도 얄미웠다. 그는 정말로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눈꼬리를 접었다.

“응? 엘리엇? 어디로 가길 바라?”

“네 집.”

“내 집이라. 로드니아에서도 여러 군데가 있어서 말이지.”

로드니아에 다른 집이 있는 걸 엘리엇이 알 턱이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서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좋겠는데. 기왕이면 내가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낯선 마차가 길 앞에 계속 서 있는 걸 발견한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밤 당번을 서는 하인 같았다. 등불이 1층 창문을 지나 점점 현관 가까이 왔다. 이 꼴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네 집. 네가 나를 안았던 거기.”

“서재? 아니면 응접실? 혹은 침실?”

“침실. 침실로 가.”

“금방 돌아갈 거면 여기서 내리는 게 낫지 않을까?”

“자고 갈 거야.”

“아, 그래?”

어두운 그림자 진 현관문이 삐걱 열리면서 등불이 불쑥 나왔다.

“거기 누구십니까?”

익숙한 하인의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란 엘리엇은 아서의 품에서 온몸을 떨었다. 마치 천둥에 놀란 개처럼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닫혔다. 아서가 곁에 둔 지팡이를 들어 지붕을 두 번 쿵쿵 치자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덜컹.

제법 속도를 낸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로우드 저택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간 뒤에야 엘리엇은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되도록 아서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어금니를 바득바득 깨물면서 욕설을 딱 한마디 뱉었다.

“이 개자식아.”

“기운이 남아도는군. 두 번쯤은 거뜬하겠는데?”

“뭐?”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놈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엘리엇을 내려다보는 장난기 가득한 눈에는 욕정이 금세 덧씌워졌다.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벌었으니 즐겨야지.”

“더는 못… 흣!”

어느 틈엔가 아서의 손이 파고들어 엘리엇의 음경을 거머쥐었다. 엄지와 검지를 모아 뿌리를 조였다가 살살 풀어내면서 다른 세 손가락으로는 음낭을 툭툭 건드렸다.

“흐읏.”

입술을 씹었다. 불편한 마차 안에서 해치운 정사가 가져온 피로는 상당했다. 두 번이나 더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피곤함에 겨운 나머지 쾌감이 슬슬 고통의 영역으로 번졌다.

“그렇게 기뻤어?”

“읏… 뭐가?”

“남에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말이야.”

무슨 개소리인지. 엘리엇은 황당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아서는 고개를 내려 입술을 맞댄 채로 속삭였다.

“설마 몰랐던 거야? 아까 로우드 저택을 보자마자 힘이 들어갔는데.”

“거짓말이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지?”

“네가 만져서 그런… 헛!”

“솔직해져, 엘리엇. 넌 마차에서 벌이는 정사도 몹시 즐겼어.”

자지를 주무르는 손길이 점점 대답하고 거칠어졌다. 엘리엇은 숨을 몰아쉬며 아서에게 매달렸다.

“평소보다 훨씬 아찔하게 조이더군. 아주 깊은 곳으로 나를 초대하면서 말이야.”

“그야 불편하고 긴장… 아!”

“그래? 불편함이 긴장을 불러일으켰군. 그래서 네가 더욱 느꼈고. 그렇다면 앞으로도 종종 불편하게 해야겠군.”

미쳤냐는 반문은 아서에게 먹히고 말았다.

마차가 도착하자 아서는 로우드 저택에서 그러겠다고 위협할 때와 같이 엘리엇을 안아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반복되었던 만남으로 인해 아서의 하인들은 그들 주인과 엘리엇의 관계를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흐트러진 차림으로 안긴 모습을 보이는 게 /당당할 순 없었다.

저벅저벅.

아서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 침실로 가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혹은 일부러 천천히 들어간 걸지도 몰랐다. 익숙한 문 앞에 섰을 때 엘리엇은 안도하며 고개를 들려고 했다.

“길퍼드. 대신 문을 열어 주겠나.”

“네. 주인님.”

곁에 길퍼드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리엇은 거의 발작하듯 아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쿵.

“큭. 얌전하게 굴어. 떨어뜨릴지도 몰라.”

‘빌어먹을 개자식이.’

엘리엇은 손으로 아서의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탁.

드디어 문이 닫혔다. 하지만 엘리엇은 감히 아서에게서 고개를 떨어뜨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등불을 켠다거나 혹은 침대를 준비하겠답시고 길퍼드가 방까지 들어왔을지 누가 알겠는가.

털썩.

서늘한 침대 위에 엉덩이가 닿자, 엘리엇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방 안에는 아서뿐이었다. 침대 기둥에 어깨를 기댄 채로 싱긋 웃고 있는 놈을 보자마자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무엇부터 따지고 들어야 할지 궁리할 때였다, 아서는 타이와 조끼 단추를 풀어냈다.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엘리엇을 응시하면서 옷을 하나하나 벗어 내자 그의 몸이 천천히 드러났다.

눈앞에 있는 나신은 거장이 용맹함과 야생성을 주제로 깎아 낸 조각 같았다.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분노를 잊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서가 불 질러 놓은 사타구니가 뻐근해졌고, 배 깊은 곳 어딘가가 허기에 뒤틀렸다.

삐걱.

한쪽 무릎부터 침대에 올린 아서가 맹수처럼 서서히 엘리엇의 위로 다가왔다.

“네가 그렇게 볼 때마다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

위험한 미소와 함께 그가 속삭였다. 오싹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아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을 괴롭히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엘리엇은 이유도 없이 헐떡이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보는데?”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잖아.”

제 안에 있는 사악한 습성을 엘리엇의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짓도 잘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조금 달라.”

엘리엇의 위를 점유한 아서는 숨겨 둔 사탕을 꺼내 먹는 사내아이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엘리엇의 몸을 가린 코트 자락을 천천히 펼쳤다.

“나는 지금부터 정말로 너를 잡아먹을 거니까.”

뜨거운 나신이 엘리엇의 하복부를 압박했다. 거친 숨을 토하면서 엘리엇은 제게 내려앉은 남자가 올바른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다리를 벌렸다. 그리곤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리곤 아서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어디 한번 해 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서의 도발에 매번 발끈하며 달려드는 습성을, 엘리엇 또한 버리지 못했다.

***

사교 시즌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유력한 로드니아 거주 상류층만이 참가하는 의회 활동이 슬슬 진저리나는 감정싸움으로 번질 무렵, 귀족 후계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뻔질나게 의회에 드나들던 찰리는 완연히 지친 기색이었다.

“정말이지, 세금을 왜 창문 개수에 따라 부과하냐고! 음침한 소굴에서 어둠의 세력이나 기를 셈인가?”

“다른 대안이라도 있나?”

“얼마든지 있지! 재산을 신고한 다음, 그 재산에 따라 부과하면 돼.”

“정직하게 신고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러기 위해서 조세 감독관이 있는 거지.”

찰스는 가난한 사람도 빛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창문에 따라 보유세와 거주세를 내는 방식이 부당하다는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지만, 변화를 꺼리는 보수 세력의 반발이 만만찮았다. 물론 그 보수 세력은 창문이 수십, 수백 개나 달린 거대한 성채를 가진 대귀족으로서 세금을 더 내겠다는 태도라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부자가 돈을 내는 방법은 창문 개수를 세는 일 말고도 다른 방식이 있어. 문제는 저소득 계층에게 빛을 돌려주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데 빛까지 보지 못해서 다들 허옇게 떴다고.”

“그래서 구휼 기금을 더 내겠다고 하지 않나.”

엘리엇이 지적하자 찰리는 버럭 역정 냈다.

“자네는 누구 편인가?”

“누구 편도 아니야. 나는 로드니아 세법과는 관계없는 시골 출신이거든.”

“나도 일단 판단 보류일세. 아직 뭐가 옳은지 모르겠어.”

곁에 있던 윌리엄이 손을 들어 엘리엇에게 동감을 표시했다.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하자, 찰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찾은 윔즈 저택의 응접실은 아주 정갈하고 포근했다. 찰리의 초대로 엘리엇, 아서, 윌리엄까지 모였다. 느긋하게 근황 얘기나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정치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누구에게도 관계없는 법률은 없어. 결국은 로드니아를 벗어나 전국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새로 증설한 철도를 따라서 도시가 빠르게 발달하고 있어. 그런데 새로 지은 건물은 하나같이 창문이 없거나 작거든. 마치 벽에 숨구멍만 틔워 놓은 형국이야. 빈민가로 갈수록 더하지. 있던 창문도 폐쇄하니까 실내 공기가 탁해지고 감기와 폐병이 도는 거야.”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세금을 매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왜 반대하는 거지? 대부분 귀족은 창문이 많은 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니 바꾸는 게 더 이득이지 않나.”

엘리엇이 묻기 전에 윌리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대화 주제에 관한 의견은 찰리와 아서 그리고 엘리엇과 윌리엄으로 갈라졌다. 대자본가와 거대한 가문의 후계자인 가진 두 사람에 비해 엘리엇과 윌리엄은 아직 대단한 재산도 책임도 없었다. 윌리엄은 앞으로 로우드 남작가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은 군인 출신의 순진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찰리는 팔짱을 끼면서 아서를 돌아봤다.

“아서, 자네에게 설명할 기회를 양보하겠네.”

“갑자기?”

“은밀한 자본가니 설득력이 있지 않겠나.”

냉소적 농담에 아서는 피식 웃었다. 반격하는 대신에 아서는 긴 다리를 느긋이 꼬았다.

“상류층은 재산 등록법이 싫은 거야.”

“왜?”

“재산 등록은 장부 공개와 같아. 장부에는 가문의 가장 사적인 내용까지 모조리 다 적혀 있기 마련이야. 돈의 흐름이란 결국 사생활의 흔적이거든.”

“그래 봤자 가계 활동에 불과하잖아. 하인에게 지급한 주급이나 식료품, 혹은 집안 관리 비용 등.”

“그게 다가 아니지. 도박 빚이 있다든가, 혹은 혼외자식이나 정부에게 증여한 부동산이 있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가난해진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아서의 말에 엘리엇은 얼굴을 구겼다.

“빚이 있다면 오히려 밝히고 탕감을 받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혼외자식에 정부라니. 비겁한 놈들 천지로군.”

비웃음 섞은 촌평에 아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순간 엘리엇은 눈에 힘을 주고 아서를 노려봤다. 더불어 도박이라는 단어는 윌리엄을 입 닥치게 했다. 엘리엇이 어금니를 아득 물고 보낸 헛소리 집어치우라는 무언의 신호를 분명히 알아챘으면서도 아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찻잔을 기울였다. 다행히도 찰리는 제 생각에 빠져 청자 세 사람 간의 묘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머리가 복잡해. 하여간 로드니아는 내 성질에 맞지 않아.”

“단시간에 성과를 얻기는 힘들어. 장기적으로 생각하라고.”

방을 서성이던 찰리는 문득 몸을 돌렸다.

“로드니아에서 가까운 곳에 우리 가문의 별장이 있는데. 어떤가? 아직 겨울 기운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선한 바람을 쐬러 같이 갈 텐가?”

“셋 다?”

엘리엇의 물음에 아서가 시선을 맞춰 왔다. 싫지는 않은지 아서는 즐거운 듯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엘리엇은 심장이 철렁했다. 낯선 곳에 아서와 함께 간다면 아주 곤란한 짓을 당할 것만 같았다. 동생 핑계를 대고 거절하려는데, 윌리엄이 눈치 없이 선수 쳤다.

“기왕 나들이 가는 김에 내 아내도 같이 가도 되겠나?”

“물론이지. 아리따운 체셔 부인은 언제든 환영일세. 다른 사람도 초대하겠네.”

“며칠이나 예상하나? 이틀, 삼 일?”

하루 나들이를 단숨에 긴 여행으로 바꾼 건 아서였다. 엘리엇이 그럴 시간이 있냐고 묻기도 전에 찰리가 기분 좋게 찬성했다.

“삼 일도 좋고 더 머물러도 좋지.”

“그렇다면 짐을 꾸려야겠군.”

“하인을 미리 보내서 별장을 정리하라고 해야겠어. 다른 손님에게 초대장도 보내고 말이야.”

“날짜는?”

윌리엄까지 합세해서 세 사람은 당장 이 주 주말부터 다음 주까지 별장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별장이 서던베리 경마장에서 가까워. 당장 경마 시즌은 아니지만, 말을 구경할 수 있지. 그리고 근처에 호수가 있어서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기도 좋아.”

거기까지 듣자 엘리엇도 결국 합세하고 말았다.

“썰매라니 릴리벳이 좋아하겠군.”

“릴리벳이 썰매를 타?”

윌리엄이 깜짝 놀랐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그것도 몰랐나? 내 동생은 운동 만능이야. 테니스는 수준급이지.”

“테니스라니. 편을 나누어 시합도 좋겠군. 숙녀분을 더 초대해야겠어.”

찰리가 신나서 집사를 불러 편지지와 펜을 가져오게 했다.

***

정오에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다.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춰 하인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글래스턴 가문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나가도록 하지.”

엘리엇은 하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릴리벳을 신경 쓰느라 어정쩡하게 서서 기다리는 대신에 성큼성큼 앞장섰다. 릴리벳은 당연하게도 남편 윌리엄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아서가 사용하는 마차에는 작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 가문의 문장은 보통 지체 높은 귀족의 출현을 알려서 주변이 대비할 시간을 주거나 혹은 연회같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검정 일색인 마차를 구별하기 위한 표식이었다.

‘전에는 없었는데.’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구성원이 아서 하나뿐이라 가문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마 최근 표식이 필요할 만큼 거대한 행사에 참석할 필요가 생겼거나 혹은 명성이 커져서 문장을 사용해도 눈꼴시지 않게 된 것 같았다.

‘맨날 침대에서만 뒹구는 줄 알았는데. 언제 또 명성이 커진 거지?’

궁금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현관을 나서는 세 사람을 발견한 아서가 마차에서 내렸다.

“좋은 아침이야.”

그는 실크해트를 살짝 들어 아는 척했다.

“오늘도 멋지네, 아서.”

“고마워, 릴리벳. 너도 눈부셔. 늘 생각하고 있지만, 넌 윌리엄에게 과분해.”

“갑자기 내게 시비인가?”

아서는 모피 코트를 걸친 릴리벳이 내민 손에 입맞춤하는 시늉을 한 뒤에, 짐직 역정내는 윌리엄과 악수했다. 하지만 엘리엇에게는 별다른 인사 없이 씩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

엘리엇도 인사를 건넬 생각이 없었다.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나치게 가까운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기란 생각보다 어색했다. 그저 눈짓으로 충분했다.

로우드 남작 가문의 마차는 4인승에 좁게 타면 6명까지도 이용했다. 큰 짐은 마차 지붕에 싣고 가방 한두 개쯤은 빈 좌석에 놓으면 된다. 어른 세 명이 이용하기에는 넉넉한 마차였다.

“역시 부부는 짐이 많군그래.”

아서가 지붕 위에 쌓인 짐을 가리켰다. 부유한 상류층 부부를 위한 여행 가방치고는 적은 편이었다. 심지어 빈 좌석에 싣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아주 무거운 짐은 미리 다른 사람을 시켜 먼저 옮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절대로 많다고 칭할 규모가 아니었다.

“네 사람에 마차 두 대는 너무 과해.”

“하지만 한쪽은 부부잖아. 방해할 순 없지.”

“고작 한 시간 거리의 여행일 뿐이야. 무엇보다 낮이고 말이야. 올바른 성인이라면 그 정도는 절제해야지.”

“나는 올바른 성인이 아닌 것 같군.”

아서는 씩 웃으면서 엘리엇에게 탑승 순서를 양보했다. 아서는 짐을 핑계로 혼자인 자신이 마차를 엘리엇과 함께 사용하겠다고 굳이 제안했다.

시커먼 속이 고스란히 보였기에 바로 거절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윌리엄이 냉큼 그러자고 하고 말았다.

‘단둘이서 마차 안이라니.’

최근 아서는 절제와 이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상실했다. 양심과 정숙을 깨달으라는 바람은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체면과 명예 정도는 알아줬으면 하는데. 그것마저 점점 어려워졌다.

“좀 떨어져 앉지?”

엘리엇은 넓은 마차에서 굳이 바싹 붙어 앉은 아서를 향해 표정을 구겼다. 옆으로 살짝 옮기려고 했으나, 어느 틈엔가 허리에 걸쳐진 팔 때문에 불가능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양 허벅지와 앞섶이 맞닿은 골 속으로 뱀처럼 기어들어 왔다. 얼른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관자놀이에 실크해트의 챙이 닿았다. 뜨거운 입술이 귓불을 빨아들이는 동안 실크해트가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이틀 전에도 자지가 흐물흐물해지고 고환이 텅 빌 때까지 시달렸다. 이러다가 아래가 빠지고 말리라는 참담한 애원까지 한 끝에 그에게서 풀려났다. 물론 완전히 녹아 버린 몸이 천천히 회복되는 동안 계속된 진득한 후희는 덤이었다.

“아직 출발도 안 했어.”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엘리엇을 곤란케 하기엔 충분했다. 아서 글래스턴이 선사한 달콤하고 씁쓰레한 쾌락의 기억이 옅은 불길에 연신 풀무질을 해 댔다.

“둘뿐이야.”

실크헤트가 떨어지면서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을 살짝 흩트렸다. 번뜩이는 안구 위로 살랑거리는 몇 가닥 머리카락에 엘리엇은 괜스레 철렁했다.

“엘리엇.”

거슬거슬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진동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마치 저주에 빠진 사람처럼, 엘리엇은 그 목소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아서.”

부름에 응답하여 고개를 기울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이 포개졌다. 살짝 벌어져 접촉한 덕에 처음부터 안쪽 매끄러운 점막이 닿았고 혀가 바로 입 안으로 들어왔다.

“흐음.”

누구랄 것이 없이 낮은 비음을 흘렸다. 두 사람 간의 키스는 생물이 숨을 쉬는 것과 같았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당장 숨이 막히는 것. 때로는 너무 몰두하여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

아서가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엘리엇은 고막에 닿기도 전에 그 음성을 먹어 버렸다. 무척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아….”

더 말해 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혀를 움직일 때마다 아서의 혀가 걸렸다. 매끄럽고 뜨거운 혀가 닿을 때면 중추신경이 이따금 마비되곤 했다. 눈을 감고 아서의 초대에 따라 그의 입 안을 넘나들었다. 타인의 치열을 훑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짜릿하고 즐거웠다. 키스할 때가 아니면 어떻게 대담하게 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추욱. 춥.

네 개의 입술과 두 개의 혀가 엇갈리면 질척거렸다. 엘리엇은 자연스럽게 아서를 통해 호흡했다. 아서는 엘리엇을 마셔 버리려는 듯 달려들어 그를 뒤로 쓰러트렸다.

“아.”

저절로 손이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두 사람의 심장이 포개져 맥박이 동시에 울렸다. 아찔한 무게감에 엘리엇은 나른한 한숨을 토했다. 키스가 달가웠다. 누구보다도 아서와 나누는 키스가 좋았다.

쫍. 추웁. 촉.

눈을 감은 세상은 온통 어둠이고 가장 예민한 감각 기관은 오로지 아서만을 감지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를 온전히 독식할 수 있었다.

통통.

움찔. 밖에서 누군가 마차 벽을 두드렸다.

“출발해도 될까요?”

작은 창문에 달린 커튼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그걸 깨달은 엘리엇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출발하지.”

대답하고서도 아서는 뻔뻔하게 몸을 포개고 있었다. 불편하게 접힌 다리가 저렸다.

덜컹덜컹.

마차가 출발했다.

“이제 그만해.”

“왜?”

“마차 안이잖아.”

“둘밖에 없어.”

아까 했던 대화가 다시 반복되었다. 아서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본격적으로 엘리엇을 더듬었다. 무릎이 다리를 가르고 들어와 국부를 압박했다.

“한 시간이면 도착해.”

“그래도 하는 덴 문제 없어.”

“장님이 아니라면 밖을 좀 내다보지 그래?”

살짝 비꼬자 아서는 상체를 들어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 뼘 정도 벌어져 있던 작은 커튼을 끌어당겨 밖을 내다봤다. 그 바람에 틈이 더 벌어졌다.

“낮이고 로드니아 한복판을 지나고 있군.”

뻔뻔하게도 그는 원래 자세로 돌아오면서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라고 되물었다.

“미쳤어? 릴리벳과 윌리엄이 바로 따라오고 있단 말이야.”

“그들은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느라 바쁠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하면….”

엘리엇은 아서의 가슴을 밀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하면 뭐?”

바위처럼 단단한 가슴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서가 반문했다. 찰나의 침묵이 영원처럼 길었다. 엘리엇은 차마 뱉지 못해 머뭇거리던 말은 더듬더듬했다.

“홍… 조가… 남을 거란… 말이야.”

목 아래에 남은 흔적이나 여운은 어떻게든 감출 수 있었다. 아서에게 시달려 삐걱거리는 신체를 이끌고 귀가하다가 로우드 가의 하인과 마주치는 일은 일상이었다. 때로는 연회에 갔다가 늦게 귀가하는 릴리벳과 윌리엄을 마주하는 일도 있었다. 아침엔 노곤함을 이기지 못한 채로 로우드 남작 부인과 차도 마셨다. 그러니까 섹스의 흔적을 감추는 데는 이력이 났단 소리였다. 그런데도 하나 감추지 못하는 건 홍조였다.

“홍조 정도야. 아무 핑계나 대면 되잖아.”

“릴리벳을 속이는 일은 쉽지 않아. 게다가 마차 안이고. 찬바람을 많이 맞아서 얼굴이 얼었단 얘기는 소용없어.”

“이미 말해 봤다는 투로군.”

곁눈으로 아서를 흘겼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더는 안돼.”

“그렇게 말하니 더 하고 싶어지는데.”

욕망의 화신인 아서는 도리어 본격적으로 나왔다. 엘리엇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 안에 제 묵직한 욕망을 얹었다. 모직 두 겹은 부푼 정욕 덩어리를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서!”

난감함에 그를 다그쳤지만, 들을 리 만무했다.

“한 번만 하겠어. 그러니 너도 한 번은 양보해.”

말도 안 되는 협상은 집어치우라는 말은 깨물린 입술 덕분에 하지 못했다. 아서는 이를 세워 턱 끝을 물었다가 다시 목을 잘근 씹었다. 옷으로 가리지 못하는 부위에 가해지는 애무는 조용한 협박이었다.

마차는 빠르게 이동했다.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별장에 도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리엇은 하는 수 없이 다리를 벌렸다.

“훗.”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린 아서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이렇게 엘리엇을 몰아넣고 곤혹스러운 반응을 즐겼다. 이마를 구기거나 입술을 비틀기라도 하면 눈을 반짝거리면서 더욱 심한 짓을 하려 들었다.

“빨리 끝내.”

“그렇다면 협조해.”

엘리엇의 옷을 벗기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는 빠르게 바지를 끌어 내렸다. 두 다리를 들어 그의 어깨에 걸쳤다. 짐승처럼 엉덩이만 내놓은 채였다. 마찬가지로 사타구니만 드러낸 아서가 몸을 내렸다.

그는 벌겋게 발기한 제 자지를 아직 덜 풀린 구멍에 막무가내로 쑤셔 넣었다. 잦은 성교 덕분에 제법 수월하게 들어가긴 했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크읏.”

굵고 큰 자지가 뻑뻑하고 비좁은 구멍 깊숙이 파고드는 동안 저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아서의 팔을 붙잡았다. 어깨에 걸쳐진 무릎 위로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비쳤다. 로우드 가의 솜씨 좋은 하인이 열심히 닦은 구두가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이지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수치심이 남아 있는 게 놀라웠다.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고 구멍이 움찔거렸다. 아서는 그 경련을 즐기면서 낮게 비강을 울렸다.

커다란 손이 앞으로 넘어왔다. 반쯤 일어선 자지를 만지려기에 엘리엇은 황급하게 밀어냈다.

“거긴 만지지 마.”

“왜?”

“흔적이 남으면 곤란해. 바지에 튀기라도 하면.”

“손수건으로 닦으면 되잖아.”

“닦아도 티가 나. 그리고 냄새도.”

“그렇다면 넣기만 하고 끝까지 하지 말라는 거야?”

무슨 개소리를 들은 것처럼 아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리한 짓을 하자고 든 주제에 왜 억울한 척인지 모를 일이었다.

“넌 해도 돼.”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지를 느끼면서 엘리엇이 속삭였다.

“어차피 내 안에 쌀 거잖아.”

“하.”

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위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변태적 가학심을 자극받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불이 붙었는지 짐작 가지 않았다.

“왜… 큭!”

왜 그러냐는 질문은 아찔한 신음 속으로 사라졌다. 마부에게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엘리엇은 황급하게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윽! 큭!”

억지로 숨을 죽이는데도 아서는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일부러 쾌감이 강한 부위만을 노렸다. 순식간에 열기가 전신을 잠식했다.

철퍽. 철퍽.

거친 몸놀림에 이리저리 쓸려 가면서 엘리엇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다. 아니 갑자기 불이 붙을 줄은 몰랐지만, 결국은 이렇게 난처한 곳에서 난처한 짓을 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도 이 여행을 끝끝내 거절치 못한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아서. 큭.”

“엘리엇.”

사나운 눈이 엘리엇을 응시했다. 짙은 눈동자에서 장난기가 가시고 오로지 탐욕과 집착만이 들끓었다. 심장이 뚝뚝 떨어졌다.

거친 욕정이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하는 순간은 무엇보다도 짜릿했다. 얇은 마차 벽에 의지한 채로 훤한 거리를 관통하면서 몸을 겹치는 순간이. 동생과 제부가 바로 뒤 마차에 있는 순간이. 마부가 엿들을지도 모르는 순간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서 글래스턴이 자신에게 집착하여 달려드는 지금이.

결국, 엘리엇 자신도 못 말리는 피학성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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