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로드니안 시즌 (1)
아서는 엘리엇을 사람이 없는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갔다. 그를 제 발치에 무릎을 꿇리고 당황으로 인해 벌어진 입술에 제 음경을 갖다 댔다.
“아… 으음….”
상당히 난감한 표정으로 아서의 물건을 지켜보던 엘리엇은 재차 강요하기 전에 순순히 입을 열었다. 꽤 난동을 부릴 줄 알았던지라 오히려 내심 놀랐다.
“흐음.”
붉은 입술이 제 음경 주변을 감쌌다. 이가 표피를 긁어 살짝 소름이 끼쳤다. 일부러 깨문 건 아니었다. 그저 엘리엇이 익숙지 않았을 뿐.
“혀를 빼고 목구멍을 열어. 천천히. 코로 숨을 쉬면서.”
황금색 고수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명령하자, 엘리엇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들은 대로 얌전히 따라 했다. 아서의 허벅지를 짚은 두 손이 점점 뜨거워졌다.
추웁. 축. 춥.
야한 입술 사이에 제 음경이 들어가 있는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붉고 연약한 살점을 짓이기면서 저 못된 혓바닥을 후려치고 목구멍에 제 성기를 욱여넣고 싶었다. 하지만 찡그린 푸른 눈동자에 서린 곤혹감과 낮게 울리는 신음성, 그리고 무엇보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보고 있자니 사타구니보다 심장 언저리가 더 욱신댔다.
“으응… 아… 더.”
뭉개진 발음이 이어졌다. 엘리엇의 턱이 덜덜 떨렸고 맑은 타액이 흘렀다. 그저 벌리고만 있는데도 힘겨웠는지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촉촉했다.
“이 세우지 말고 그대로 있어.”
“우응.”
아서는 엘리엇의 뒷덜미를 단단히 틀어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끝이 입천장의 말랑한 부분에 닿았다. 구역질이 일었는지 엘리엇의 목구멍이 심하게 경련했다. 이가 기둥의 피부를 긁었지만, 그로 인한 불쾌함보다는 매끄러운 목구멍에 닿는 귀두에서 느껴지는 기쁨이 더욱 컸다. 제 허벅지를 짚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바지를 구겨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큭.”
“음… 으.”
몇 번 푹푹 쑤신 끝에 아서는 쉽게 절정에 닿았다. 짙은 정액은 엘리엇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끝났음을 모를 리 없는 엘리엇은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음경을 뱉으며 그는 동시에 바닥에 대고 구역질했다.
웩.
맑은 침만 조금 뱉어 낸 그는 이윽고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차림을 바로 한 아서는 손수건을 꺼내 엘리엇에게 내밀었다. 거칠게 낚아챈 엘리엇은 그걸로 입을 닦은 후에 아서에게 던졌다. 물기 어린 눈가에 혐오감과 고통이 어려 있었다.
“이제 만족해?”
그때 아서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 짧은 질문 하나가 모든 걸 뒤엎었다. 희열이 사라지고 파렴치한 짓을 한 데에 미안함이 슬그머니 양심을 비집고 들어왔다.
“엘리엇.”
“놔.”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엘리엇은 아서를 똑바로 보지 않고 외면했다. 아서를 뿌리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완전한 타인처럼 전혀 돌아보지 않는 냉정한 뒷모습이 아서의 명치에 묘한 불길을 지폈다.
‘그래 봤자 넌 내 정부야. 그건 변하지 않아. 엘리엇.’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이상한 욕구가 치솟았다. 허기를 채우려는 짐승의 본능 같은 그것은 소유욕과 닮아 있었다.
***
무르익은 겨울, 본격적인 사교 시즌이 시작되었다. 제국 전역에서, 또 외국에서도 무수한 사람이 로드니아를 향해 앞다투어 발걸음을 옮겼다.
진눈깨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아침, 창문에 하얀 성애가 내려앉았다. 슬금슬금 피부를 어루만지는 찬 공기가 얽힌 두 나신의 온도를 낮추려고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흐읏. 큭. 하앗.”
엘리엇은 두 다리를 어쩌지 못했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어깨에 걸린 사실은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허벅지 안쪽 여린 살을 깨물고 있는 남자의 이가 문제였다.
“아서… 도대체….”
어제 죽음과도 같은 정사 이후에 아서의 곁에서 잠들었다. 아무리 늦은 새벽이라도 꼬박꼬박 저택으로 돌아갔지만, 아서 글래스턴이 기어이 엘리엇을 기절시키는 바람에 어젯밤은 그러지 못했다.
뼈가 흐물흐물할 만큼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이대로 요양을 이틀 정도 해야 할 것 같은데도, 아서는 아침부터 엘리엇을 괴롭혀 댔다. 음경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혀의 움직임에 문득 잠을 깨자,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세워 주변 살갗을 짓씹어 댔다.
“아앗. 아.”
추웁. 춥,
어제 마지막으로 절정을 느낄 때 구멍이 너무 아프다고 호소했던 것을 기억하는지 그는 화끈거리는 입구는 가만히 둔 채 고환과 음경만 괴롭혔다.
“아서… 그만.”
일어나자마자 강제로 절정에 달하는 건 너무 괴로웠다. 지금껏 고통이 쾌락이 됨을 몇 번이고 깨달았지만, 쾌락이 고통이 된 적은 처음이었다.
춥. 쪽. 쪼옥. 추웁.
두 팔을 가랑이로 내려 아서의 머리를 밀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다 빠진 손가락이 빽빽한 머리카락에 조금 걸리는 게 다였다. 다리는 두툼한 목에 둘렀다.
“흣!”
목이 완전히 가라앉은 덕에 신음성도 모래를 삼킨 것처럼 갈라졌다. 끔찍하리만큼 기분이 좋았다. 허리가 들뜨고 저도 모르게 구멍을 조였다. 털어놓을 것이 없는 자지를 부추기는 혀와 예민한 귀두를 긁는 이 때문에 정신이 하얗게 부서졌다.
아서의 목에 두른 다리가 저절로 교차되었다. 목을 뒤로 꺾으면서 정수리가 침대를 누를 때쯤, 엘리엇은 기어이 절정에 달했다.
“아….”
그저 끝났다는 안도감에 긴 탄식을 내뱉었다. 무엇을 내어놓았는지는 몰랐다. 정신이 깜빡거리는 중에도 아서의 입술이 여전히 제 자지를 물고 있음을 알았다.
쪽. 쪽.
뜨거운 입술은 구음 이후에도 계속 엘리엇의 허벅지와 회음, 그리고 엉덩이 언저리에 머물렀다. 너무 지친 나머지 귀찮음을 표현할 기력도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는 게 최선이었다.
“기분 좋았어?”
“…흐응.”
굳이 따진다면 기분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그렇다고 한들 단잠을 방해받고 또 남은 한 방울까지 놈에게 빨려 버리고 녹초가 된 터라 마냥 좋다고도 하기 싫었다.
미미한 짜증을 느꼈는지 아서가 득의만만한 표정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엘리엇의 등 뒤를 점령했다. 둘 다 나신이었다. 덕분에 엘리엇은 제 엉덩이 골 사이에 닿은 아서의 거대한 성기를 느낄 수 있었다.
“피곤할 테니 더 자.”
누구 덕에 더 피곤한데. 엘리엇은 뒤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뺨에 내려앉은 입맞춤뿐이었다.
쾌락은 아편이 가져온 효과인 줄 알았다. 아편이 배제된다면 고통과 역겨움이 더 클 것이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엘리엇은 아편이 없는데도 해일처럼 들이닥치는 쾌락에 휩쓸려 이성을 잃어버리곤 했다.
‘너무 익숙해진 걸까.’
그뿐만은 아니었다. 몸이 익숙해져 고통이 현저히 줄었다는 걸로 광기와도 같은 행위가 가져오는 환희를 전부 설명하긴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는 변태인가.’
그쪽이 더 타당했다. 남성과의 섹스에 몰두하는 이상 성욕자. 예전이었으면 벌떡 일어나 총을 집어 들고 그런 말을 하는 놈에게 바람구멍을 냈을 터였다. 예를 들자면 제 관자놀이에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혐오와 분노 대신에 그저 ‘그렇구나’ 하는 담담한 인정이 먼저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변한 모양이었다.
방 안에 들어오는 빛을 가늠했다. 벌써 늦은 아침이었다.
‘곧 오찬인데.’
로우드 남작 저택에 머무른 이후로 매일 남작 부인 혹은 동생 부부와 함께 오찬을 했다. 말도 없이 빠지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터였다.
“저택에는 네가 늦는다고 전달했어.”
“네 멋… 대로?”
“성인 남성이 밖에서 자고 온다면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겠지만. 틀린 건 아니잖아.”
아서는 그저 재미있어했다. 여자와 잤다는 거짓말을 꾸며 내야 하는 엘리엇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망할 자식.’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아서는 둘의 관계를 감추는 데 무관심했다. 아니, 오히려 드러내고 싶어 하나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엘리엇이 릴리벳과 윌리엄, 그리고 찰리를 의식할 때마다 보란 듯이 이런 짓을 벌이곤 했다.
화를 내야 했건만, 혹여 그랬다가는 아서가 로우드 저택으로 쳐들어올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대충 맞춰 주는데도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딱딱한 근육질로 뒤덮인 팔이 엘리엇의 몸을 감쌌다. 부드럽기보다는 질기고 포근하기보다는 딱딱한 품에 잠이 드는 일도 이젠 이력이 났다. 등을 두툼한 흉근에 대고 있자면 발끝까지 열기가 돌았다.
으레 가지곤 했던 긴장도 가신 지 오래였다. 너무 깊은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서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건 결과적으로 섹스에 준하는 뭔가였다.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익숙해서 편안했고 편안해서 더 어색했다. 영원히 이럴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이 타성에 젖는다면 영원히 이대로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곤란했다.
‘빨리… 빨리 결혼 상대를 찾아야겠어.’
엘리엇은 제게 감겨드는 남자의 다리에 제 다리를 얹으면서 눈을 감았다. 달콤한 잠이 쏟아졌다.
***
똑똑.
아서는 차와 티 푸드를 담은 쟁반을 들고 제 방문을 두들겼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간 그는 침대에 늘어진 제 애인의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엘리엇은 거기에 없었다.
“아서.”
대신 그는 욕실로 향하는 길목에 세운 병풍 뒤에서 나타났다. 언제 씻었는지 셔츠와 바지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몸에서는 비누 냄새가 났다.
“준비가 빠르군.”
“이미 늦었어.”
아서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차를 보지도 않은 채 엘리엇은 조끼를 걸치고 양말을 신은 다음 구두에 발을 끼웠다. 의자에 발을 올린 다음 구두끈을 매면서 차를 흘끗 보았다.
“미안하지만 차는 다음에 마시지.”
“늘 그렇게 말했잖아.”
팔짱을 낀 아서는 침대 기둥에 어깨를 기댔다. 딱히 빈정거릴 생각은 없었는데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엘리엇이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빙긋 웃었다.
“그랬었나?”
딱히 보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여지를 남기지 않는 물음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차라니. 차라리 술이면 몰라도.”
“아직 해가 지지도 않은 오후야.”
“아침부터 사람을 괴롭히던 남자가 할 말은 아닌데.”
뭐가 그렇게 기꺼운지 엘리엇은 소매 단추를 여민 뒤에 상의를 가볍게 둘러 입었다. 아서가 아무리 지치게 해도 그는 다음 날이면 생생해졌다. 창백한 얼굴엔 약간 피로감이 비친 적도 있었으나, 그게 다였다.
“마차를 준비시키지.”
“됐어. 누군가의 마차를 타고 가면 더 눈에 띄니까. 대여 마차를 잡도록 하지.”
그러면서 엘리엇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화려한 금발이 빛났다.
“배웅은 됐어. 며칠 쉬어야겠으니 다음엔 내가 먼저 연락하지.”
다음에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은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멀쩡해 보여도 엘리엇은 충분히 지쳐 있었다. 지독했던 정사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확인한 아서의 입매가 슬쩍 늘어났다.
“그럼.”
단정한 눈인사를 마지막으로 엘리엇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떠났다. 3층 침실 창가에 서서 그가 마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저릿했다.
“엘리엇.”
나이트스톤에서 나온 뒤로 아서는 거리낌이 없었다. 폭력과 협박, 속임수를 삶의 수단으로 삼았고 그를 이용해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졌다.
하지만 엘리엇 데일은 매번 제 올가미를 빠져나갔다. 그게 문제였다.
“빌어먹을.”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아서는 못마땅함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창틀을 내려쳤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저 빌어먹은 개자식이 제 곁에 기꺼이 머물도록. 시린 보석 같은 눈동자가 제게만 향하도록.
***
“후우.”
억지로 일으켜 세운 몸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 엘리엇은 마차에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덜컹덜컹.
대여한 마차의 의자는 냉정하리만큼 딱딱했다. 같은 단단함이라도 은근한 안락함을 주는 아서의 품과는 전혀 달랐다. 혹사당한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차는 같이 마실 걸 그랬나.’
힘에 부쳐서 괜히 마음도 약해졌다. 저를 가지고 놀려는 함정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괜히 걸렸다. 기분이 조금 상한 듯한 그의 반응이 내내 찜찜했다.
단순히 아서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걱정이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뿐만은 아니었다. 묵직한 돌을 얹은 듯한 기분은 망할 자식의 끈질긴 수작에 제 심리적 방어선이 서서히 무너지는 탓이었다.
복수를 위해서 일부러 본성과 자존심을 숨기고 사근사근하게 구는 비열한 놈에게 물들어선 곤란했다. 진심으로 빠져드는 순간, 아서 글래스턴은 기다렸다는 듯이 잔인한 본심을 드러내리라.
휙휙 지나가는 무채색의 도시 풍광을 보면서 엘리엇은 저 또한 저것처럼 무감하기를 바랐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가슴에 스며들어 뜨거운 남자의 흔적을 지워 내기를.
이틀 뒤, 릴리벳이 들뜬 모습으로 서재에서 농업 관련 서적을 보는 엘리엇을 찾아왔다. 같은 저택에서 지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동생을 보는 일은 오랜만이었으므로 엘리엇은 읽던 책을 흔쾌히 덮었다.
“드디어 첫 무도회가 열린대.”
“그래?”
“나와 윌리엄, 그리고 오빠까지 모두에게 초대장이 도착했어.”
의외였다. 자신에게 초대장을 보낼 사람이 있던가? 릴리벳이 뿌듯하게 내민 초대장을 받아 열어 보았다.
노스필드 백작
익숙한 이름에 엘리엇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릴리벳도 기쁜 기색이었다.
“드디어 로드니아로 오셨구나.”
“백작 가문의 타운 하우스에서 열리는 데다가 올해 사교 시즌 첫 무도회라 성대할 거래. 사람도 굉장히 많이 올 거야. 새 드레스를 손질해야겠어.”
“드디어 네 백화점 나들이가 의미 있겠구나.”
“원래부터 의미 있었다고. 윌리엄과 둘이서 지낼 저택을 꾸미느라 가구며, 식기며, 장식품이며 하나하나 골라야 했다고. 오늘 오후에도 손님 침실에 둘 의자를 사러 가기로 했는데.”
“정말이지 지치질 않는구나.”
약간 질려서 눈살을 찌푸리자 릴리벳이 양손을 허리에 척 얹었다.
“평생 함께 살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 집이고, 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키울 집이기도 해. 정성을 들여서 신중하게 선택하는 건 당연하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내가 사용할지도 모르는 침실에는 너무 과한 장식을 하지 말아 줘. 예를 들자면 꽃무늬 커튼이나 요란한 술이 달린 쿠션이나.”
“흥. 하얀 프릴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방으로 준비해 주지. 새 신부처럼 말이야. 그리고 오빠가 그렇게 좋아해 마지않는 사람과 방을 같이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하겠어.”
“진심이야?”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서 엘리엇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릴리벳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상대는 좋아해 마지않는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 거야. 늦게 들어오다 못해 전에는 아예 다음 날 오후에 왔지. 그렇게 깊은 사이면 누군지 알려 줄 수 있잖아.”
“내 사생활이야.”
릴리벳에게 알리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아니, 릴리벳이든 누구든. 그녀의 하나뿐인 쌍둥이 오빠가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고 다닌 걸 알면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닐 터였다. 게다가 소문이라도 난다면 릴리벳은 로드니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터였다. 동생의 행복을 망치는 일은 절대로 하기 싫었다. 그런데 망할 아서 놈이 훼방만 놓고 있으니. 그걸 모르는 릴리벳은 화를 냈다.
“난 오빠의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오빠가 누구와 사귀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어.”
그 말에 엘리엇은 릴리벳을 빤히 쳐다봤다.
“네가 윌리엄과 비밀스러운 연애를 할 때 내가 언제 참견한 적이 있었어?”
“아… 그건.”
“난 네가 스스로 밝힐 때까지 기다렸어. 궁금해서 미칠 뻔했을 때도 말이야. 어느 놈팡이가 내 동생을 꾀어 부도덕한 짓을 가르치고 있지나 않을까 너무 걱정해서 사격 연습도 했다고. 혹시라도 나의 릴리벳을 울린다면 바로 쏴 버릴 생각으로 말이야.”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나 릴리벳에게 다가갔다. 약간 멈칫하는 동생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나는 너를 믿었어. 그런데 너는 나를 믿지 못해?”
“믿었다면서 사격 연습은 왜 했는데?”
“믿음과 별개로 최악의 경우는 대비해야지.”
“그렇다면야.”
한숨을 쉰 릴리벳은 쿡쿡 웃는 엘리엇을 흘겨보았다. 약간 탐색하듯 살핀 그녀는 이내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혹시 유부녀야?”
“말도 안 돼.”
엉뚱한 상상력에 엘리엇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릴리벳은 심각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럼 왜 몰래 만나는 건데? 아니면 신분 차가 너무 나서?”
“아무리 지주라도 난 평민이야. 신분 차가 연애를 방해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럼 왜?”
끝까지 추궁할 기세라 엘리엇은 하는 수 없이 약간의 힌트를 주기로 했다.
“불량한 사람이야. 어쩌면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매우 위험해.”
“아니, 그런 여자와 어떻게? 위험하잖아. 그런 사람과는 만나지 마. 당장 관둬!”
호들갑을 떠는 릴리벳을 안심시키듯 살짝 껴안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하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말아.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곧 헤어져.”
아마도. 그러면서 엘리엇은 두려운 듯 매달리는 릴리벳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으스러지도록 꽉 안았다가 놓아주면서 다시 이마 언저리에 키스했다.
“너는 모르는 편이 나아. 그래야지만 더 안전해.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얌전히 도와줄 거지?”
“물론 오빠를 믿어.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도울 거야. 그렇지만 범죄자는 안 된다고. 빨리 헤어져.”
“그래. 그럴게.”
“다 끝나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거지?”
“물론.”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엘리엇은 사랑스러운 동생을 향해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내 걱정이 어린 표정이 아주 조금 펴졌다.
“아무리 내가 결혼했어도, 오빠는 내 혈육인 것을 잊지 마.”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는 유일한 혈육 자리도 양보하겠지.”
“내가 아이를 낳으면 오빠도 아이의 혈육이 되잖아. 가족이 느는 거야. 윌리엄도 오빠의 가족이고 윌리엄의 고모님도 오빠의 가족이야. 알겠어?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울 테니까. 오빠가 우릴 도왔던 것처럼 말이야.”
“든든한걸.”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는지 릴리벳은 눈을 흘기며 주먹으로 엘리엇의 어깨를 몹시 아프게 한 대 쳤다. 그리곤 드레스 자락이 휘날리도록 경쾌하게 돌아섰다.
“무도회 때 멋지게 보이도록 해. 불량한 비밀 애인보다 훨씬 멋있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아가씨들이 많이 참석할 테니까 말이야. 그들에게 잘 보여야지.”
“분부대로 하지요, 체셔 부인.”
“기대에 부응하길 바랍니다.”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여 절을 하자 릴리벳은 콧대를 세우더니 홱 돌아서서 서재를 나갔다. 혼자 남은 엘리엇은 다시 책상으로 가서 책을 폈다. 제 손에 들린 초대장을 흘끗 보다가 옆에 두고 다시 독서에 빠져들었다.
***
노스필드 백작이 여는 첫 무도회는 기대 이상으로 성대했다. 마차가 얼마나 많이 도착하는지, 저택 현관에 도착하기까지 길가에서 한참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체셔 경. 체셔 부인. 데일 씨.”
집사는 정중하게 세 사람을 맞았다. 조용히 내미는 하인의 손에 두꺼운 겨울 코트를 맡기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위쪽입니다.”
집사는 계단을 가리켰다. 윌리엄이 릴리엣을 에스코트해서 올라가고 그 뒤를 엘리엇이 따랐다.
2층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홀엔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 검은 신사복을 입은 근엄한 남자와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자 사이를 요령껏 지나다니는 하인들 손 위에는 향긋한 샴페인과 앙증맞은 핑거 푸드를 담은 은빛 쟁반이 놓여 있었다.
“와아.”
“대단하군.”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다니.”
“노스필드 백작께서는 로드니아 사교계의 중심이거든.”
“어서 들어가요.”
릴리벳은 홀의 광경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한껏 상기된 뺨에 손을 얹었다. 작은 부채가 대롱대롱 달린 다른 쪽 손은 가슴에 얹었다. 하얀 실크 장갑 위에는 윌리엄이 선물한 다이아몬드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에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귀걸이에 남작 부인이 대여해 준 화려한 목걸이를 걸친 릴리벳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물결치는 짙은 금발에 어울리는 물빛 드레스를 입은 릴리벳은 제 남편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마침 무도곡이 막 시작될 참이었다.
“부인.”
윌리엄이 손을 내밀자, 릴리벳은 기쁜 듯이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홀 중앙으로 나갔다. 그러자 홀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두 사람, 정확하게는 릴리벳에게로.
“오.”
“체셔 경과 그 부인이군요.”
“미인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저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부부예요.”
놀라운 미모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여인은 다부진 체격을 가진 멋진 신사와 함께 나비처럼 푸른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춤추는 동안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릴리벳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동생은 윌리엄과 함께 로드니아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이제 보이지도 않는군.”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금세 미소로 바뀌었다. 사랑스럽게 웃는 릴리벳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애정 어린 웃음을 지었다. 아주 작은 서운함은 곧 가실 터였다.
‘그래도 쓸쓸한 건 변함없지.’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추운 겨울 함께 난롯가에 앉아서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실 수 있는 가족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했다.
엘리엇은 홀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했다. 입구에만 서 있어서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어려웠다. 적당히 중앙쯤에 이르렀을 때 엘리엇은 둥둥 떠다니는 은빛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들었다. 향긋한 술이 용기를 고양하고 태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리라.
연신 샴페인을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색색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미혼 여성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고루한 사교계 예법에 맞게 남성이 먼저 말을 걸어 주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릴리벳은 용감하게 윌리엄에게 돌진했지만. 그런 말괄량이를 여기서 찾긴 힘들겠지.’
진취적인 성격을 가진 용감한 여성이 좋았다. 보수적인 상류층 출신이라면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제 본성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뭔가 신나는 모험을 기다리면서 아주 지루한 눈빛으로 홀을 지켜보리라.
생기 넘치는 밤색 머리카락을 세련되게 틀어 올린 젊은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는 대담하게 보라색에 붉은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너무 가장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에 확 띄지도 않는 기둥 뒤 의자에 앉아 권태롭게 홀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무도회일 줄 알았다면 참석을 다시 생각해 봤을 텐데.”
“맞아요. 춤이 서툰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대화하기에도 불편해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옆에 선 엘리엇을 올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붉은 루주를 빈틈없이 바른 입술엔 금세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춤을 무척 잘 추실 것처럼 보이는데요.”
“대단한 실력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 앞에 나서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군요.”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 용기는 있고요?”
“새침한 미인에게 말을 걸어 보기 위해 제가 가진 용기를 모조리 짜냈습니다.”
찬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곤 실크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엘리엇은 허리를 숙여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인 플레커라고 해요. 당신의 이름은요?”
기대한 대로 그녀는 얌전히 듣기보다는 먼저 묻는 쪽이었다.
“엘리엇 데일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녀가 살짝 놀랐다. 작은 얼굴의 반은 차지하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옅은 미소와 함께 물었다.
“아니요. 엘리엇 데일. 멋진 이름이군요.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려요.”
“제인 플레커라는 이름도 플레커 양께 무척 잘 어울립니다.”
“제인이라고 부르세요.”
“저를 엘리엇이라고 불러 주신다면.”
“엘리엇.”
이름을 주고받는 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막 하인이 지나가기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쟁반에 올려놨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선율이 바뀌었다.
“춤은 서툰데.”
“저도 능숙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망신도 같이 당한다면 덜 부끄러울 것 같은데요.”
“어머. 제가 들은 것 중에 가장 한심하고 귀여운 말이군요.”
제인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손을 뿌리치는 대신 그녀는 엘리엇을 따라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야 서툰 춤이라도 추는 게 낫겠어요.”
“혼자 오셨습니까?”
“일행이 있지만, 상관없어요. 나를 혼자 내버려 두었으니까요.”
“그분의 실수가 제 행운이 되었군요.”
엘리엇은 제인의 잘록한 허리에 가볍게 팔을 둘렀다. 그리곤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여러 남녀 사이로 들어갔다.
적당한 빠르기의 선율에 맞춰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제인은 우아하게 몸을 움직였다. 서투르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박자가 조금 느렸고 가끔 한 박자를 놓치기도 했다. 그녀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엘리엇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막았다.
“앗.”
“제게 기대세요.”
엘리엇이 능란하게 리드하자, 제인은 금방 박자를 되찾았다. 어깨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엘리엇의 동작을 따라오던 제인이 속삭였다.
“거짓말하셨네요.”
“제가요?”
“춤이 서툴다고 하셨으면서 너무 능숙하시잖아요.”
“대단하진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제 발에 밟히지 않는 것만으로 이미 대단해요.”
“이런. 희생양이 많았습니까?”
“그렇게 많진 않았답니다. 춤을 즐기기에 전 수줍음이 많거든요.”
제인은 새초롬하게 웃었다. 수줍음 많은 사람치고 제인은 너무나도 신나 보였다.
“거짓말쟁이는 저뿐만이 아니군요.”
“어머. 들켰나요?”
가까워졌다가 조금 멀어졌다가 빙글빙글 돌면서 충분히 음악과 춤을 즐겼다. 제인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무엇보다 생기 넘치는 표정과 당당한 어투가 좋았다.
한 곡이 끝났다. 연거푸 다음 곡까지 계속 춤을 추었다. 멀리서 엘리엇을 발견한 릴리벳이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윌리엄이 크게 웃으며 손짓했다. 마치 얼간이 형제를 응원하는 투였다.
‘창피하게 하는군.’
엘리엇은 두 사람을 외면하고 제인에게 집중했다. 다행스럽게도 제인은 두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경쾌한 미뉴에트 선율이 이어졌다. 검은 신사복 자락과 함께 꽃잎 같은 드레스 자락이 휘날렸다. 두 쌍의 발은 완벽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에 머리를 비우고 오로지 선율과 아름다운 여인에게만 몰두할 수 있었다. 기쁨이 온 얼굴에 번졌다. 그건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곡이 끝났다.
“브라보!”
짝짝짝.
춤을 추던 사람은 파트너에게 정중하게 인사했고 구경꾼들은 손에 불이 나도록 박수갈채를 보냈다. 춤곡이 아닌 차분한 선율이 이어졌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곧 백작께서 인사하러 오시려나 봅니다.”
“노스필드 백작을 잘 아시나요?”
“네. 조금.”
“그럼 잘되었네요. 저도 그분을 알거든요. 당장 바쁘게 인사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노리는 사람이 아주 많거든요.”
그러면서 제인은 주변을 가리켰다. 처음 초대받은 손님들은 저택의 주인이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학수고대했다. 그 행렬에 끼인다고 해도 백작에게 인사하기까진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나중에 오는 편이 좋겠군요.”
“동감이에요.”
몇 걸음 앞서가던 제인은 문득 멈춰 섰다.
“샴페인을 좋아하세요?”
“물론이죠.”
“그럴 줄 알았어요.”
방긋 웃으며 그녀는 근처에 있는 하인에게 갔다. 엘리엇과 동시에 새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다.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제가 알아요.”
제인을 막 따라나섰을 무렵, 웅성거림이 커졌다.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제인이 팔짱을 끼는 바람에 백작의 모습을 제대로 보진 못했다. 풍채 좋은 백작 근처에 젊은 남자가 서 있었던 것만 알 수 있었다.
“이쪽이에요.”
백작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엘리엇이 아니라도 많은 손님에 둘러싸일 터였다. 그보다는 생기 넘치는 제인에게 더 관심이 갔다. 엘리엇은 웃으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곧 있을 로드니아 중앙은행 주주 회의에서 행사할 표의 행방을 잠시 의논하느라 아서는 노스필드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서재에서 노스필드 백작을 만났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노스필드 백작은 아서와 한뜻이었다.
“연회에 초대해 놓고 일 얘기만 해서 미안한걸.”
“아직 초저녁입니다. 시간은 많지요.”
“오늘 멋진 젊은이들을 초대했다네. 찰리 윔즈는 도망갔지만 말이야.”
“이런 자리를 달가워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게 말이야.”
백작은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제가 아끼는 대자를 흉봤다.
“언제 결혼해서 가문을 이을 건지. 원.”
“결혼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남자는 빨리 결혼해서 양어깨에 가정을 올려놓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가볍게 행동하면서 책임감과 의무 따위는 나 몰라라 하거든.”
“책임감 때문에 한 결혼은 불행할 가능성이 크지요. 더구나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결합은 아내가 될 사람에게도 실례고요.”
“여자에게도 가정의 책임감이 있다면 문제없어. 안정과 행복을 찾으면 사랑은 저절로 깃드는 법일세. 내 아내와 나는 결혼식을 올리기 바로 전날 처음 만났지만, 늘 사랑이 넘치는 부부였어.”
백작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백작 부인은 몇 해 전 병환으로 죽었다. 사람들은 둘을 사랑스러운 부부로 기억했다. 비록 아이는 없었지만, 대신에 도움이 필요한 재능 있는 젊은이를 제 자식처럼 돌보았다. 백작은 부인과 사별한 후에도 부인의 뜻을 기려 많은 젊은이를 후원했다. 물론 그 후원이 버거워 도망치는 찰리 윔즈 같은 놈도 있지만.
“아서. 너도 나이가 찼으니 슬슬 배필을 구할 때야.”
“벌써요?”
“젊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지. 얼른 누구라도 잡아서 곁에 두지 않는다면 아주 쓸쓸하고 외로운 말로가 기다리겠지. 늙어서 돈만 끌어안고 있다고 행복할 것 같나? 늘 곁에 있는 한 사람이 더 중요한 법이야.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허전할 뿐이지.”
걱정이 지나쳐 저주 같았다. 백작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아서를 짙은 눈길로 응시했다.
“사랑을 해 보고 그 사랑을 먼저 보낸 슬픈 노인이 하는 말이니 명심하게.”
백작은 진심이었다. 아서는 그 진심을 존중해 최대한 정중하게 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운명의 상대가 이 아래 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혹시라도 굼뜬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
“그것 또한 가슴에 새기도록 하지요.”
그때 홀에 다다랐다. 하인이 열어 주는 문을 통과하여 환한 빛과 향긋한 샴페인이 가득한,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화려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백작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와 백작에게 인사했다. 개중에는 아서와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안부를 묻고 악수했다. 그러면서 아서는 홀을 훑어보았다. 함께 온 제인이 보이지 않았다. 연한 색상의 드레스를 선호하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제인은 늘 화려한 색을 즐기기에 금방 눈에 띄었다. 보이지 않는 건 어디 구석진 자리에 있거나 홀에 없다는 얘기였다.
‘어디 간 거야. 벌써 멍청이를 하나 낚았나?’
제인은 에뜨와르 드 루이제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후로 매번 아서를 찾아와 들볶았다. 그가 실제로 프랑크 출신 귀족이 아니라 그럴 거라는 아서의 진심 어린 충고도 귓등으로 흘렸다.
어쨌든 점찍었던 미남을 잃었으니 책임지라는 투였다. 이후 아서가 노스필드 백작의 연회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안 제인은 자신을 데려가지 않으면 끔찍한 보복을 감행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어느 순진한 멍청이가 남편감을 노리는 암사자의 발톱에 걸렸을까.’
제인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흥미에 밀려 금방 뒷전으로 사라졌다. 인사를 건네는 인파 속에서 엘리자베스 데일 체셔를 발견한 탓이었다.
“오! 릴리벳! 너도 왔구나.”
“안녕하세요, 백작님.”
“결혼식에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릴리벳이 꽃 같은 미소와 함께 인사하자 백작은 무척이나 반가운 기색으로 맞이했다.
“괜찮아요. 멋진 선물을 보내 주셨잖아요.”
“너를 보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구나. 먼저 간 네 외숙부가 아주 기뻐할 거다. 자네가 우리 릴리벳을 채 간 도둑놈이군.”
“네. 윌리엄 체셔라고 합니다.”
“로우드 남작 부인과 잘 아는 사이네.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제 흉을 보신 게 아니고요?”
“조금은. 허허.”
윌리엄과도 반가운 악수가 이어졌다. 부부의 시선은 곧 백작 옆에 있는 아서에게로 쏠렸다.
“릴리벳.”
“아.”
“엘리엇과 아는 사이니 당연히 릴리벳과도 아는 사이일 텐데. 그 생각을 못 했군.”
뒤늦게 두 사람이 구면임을 깨달은 백작이 허허 웃었다. 아서를 제대로 알아본 릴리벳이 살짝 굳었다. 아서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자 릴리벳은 거절하지 않고 제 손을 내밀었다. 작고 고운 손을 잡아 손등에 살짝 키스했다.
“오랜만이야.”
“아서… 렌튼?”
묵은 이름을 듣자 저절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엘리엇과는 달리 릴리벳에게는 분노가 생기지 않았다. 이상해도 사실이 그러했다.
“이젠 아서 글래스턴이야. 생부를 찾았거든.”
단순히 변경 사실을 정정했다. 릴리벳은 약간 당혹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사르르 웃었다.
“나도 이젠 체셔가 되었어. 남편이 생기는 바람에 말이야.”
“그래. 그런 것 같다.”
순수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내를 보호하듯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섰던 윌리엄이 시선을 마주치며 손을 내밀었다. 악의 없는 악수가 오갔다.
“듣던 것과 인상이 다르시군요.”
“누구를 통해 들었느냐에 따라 다른 편입니다.”
“엘리엇 데일은 어떻습니까?”
윌리엄의 대답에 아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시궁창에서 뒹구는 개뼈다귀와 비슷한 취급일 겁니다.”
“하하하. 아주 다르진 않습니다.”
윌리엄이 무람없이 웃었다.
“엘리엇과는 이상하게도 아주 앙숙이란 말이지. 내가 보기엔 둘 다 훌륭한 청년인데 말일세.”
백작이 아서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런데 엘리엇은 오지 않았나?”
“오빠도 함께 왔어요. 그런데 지금 보이지 않아요.”
“이런.”
백작은 그러면서 아서를 슬쩍 봤다. 당연히 아서가 엘리엇의 행방을 알리라는 눈치였다. 사냥 대회 때 말싸움이 꽤 인상 깊은 모양이었다.
“엘리엇이 오는 줄 몰랐습니다.”
“오빠도 그럴 거예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릴리벳도 거들었다.
“곧 나타나겠지요.”
윌리엄이 릴리벳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백작이 릴리벳에게 춤을 신청하면서 흐름이 끊겼다.
악단이 다시 무곡을 연주했다. 나이만큼 경륜이 대단한 백작은 능숙하게 발랄한 여인을 리드했다. 릴리벳은 마치 아버지와 첫 춤을 추는 신부처럼 편안해 보였다. 윌리엄이 그 광경을 뿌듯하게 지켜봤다.
“실례.”
아서는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윌리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출입구까지 거리가 좀 있었다. 사람들이 홀 중앙을 차지한 백작과 릴리벳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아서는 빠르게 다시 면면을 훑었다. 어디에도 엘리엇이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도회가 한창일 때 분명 참석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경우는 대개 몇 가지 이유로 귀결되었다.
첫째, 몸이 아파 잠시 휴게실에서 쉰다. 유달리 허약하거나 나이 든 노인이 이 경우로 엘리엇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둘째, 생리 현상. 휴식 시간은 무도회 중간에 충분히 주어진다. 자리를 오래 비울 일도 아니었다.
아주 드물게 혼자서 고독을 즐기는 괴짜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귀찮게 연미복을 차려입고 백작의 무도회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로드니아 시즌에 열리는 연회와 만찬, 그리고 무도회의 궁극적 목표인 사교 활동에 딱 들어맞는 유일한 이유. 무도회에서 특정 사람이 보이지 않는 셋째 이유였다. 누군가와 친분을 쌓는 중이다. 그를 위해 무도회가 열리는 거대한 홀 주변에 작은 방은 다 열려 있어 누구나 사용 가능했다.
문제는 그 친분이 어떤 종류인가 하는 점이었다. 백작과 아서가 사전에 서재에서 만난 것처럼 사업 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아니면 가까운 지인과 오랜만에 반가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아서가 아는 한 엘리엇은 로드니아 최고의 연회에서 누군가를 만나 사업 얘기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또한 그의 가까운 지인은 지금 무도회장 한중간에서 춤을 추는 중이었다.
‘찰리 윔즈는 오지 않았고… 여잔가?’
생각이 자연스럽게 거기까지 이어졌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이번 사교 시즌 동안 배우자를 찾겠어.’
전에 엘리엇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발끈하는 성미로 미루어 보건대 벌써 행동에 들어간 게 뻔했다.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엘리엇은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쉽게 각인될 만큼 화려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어떤 여자가 그의 관심을 마다하겠는가. 그는 의지만 있으면 로드니아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렬히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게 만들 터였다.
‘……젠장.’
엘리엇이 여자 혹은 남자와 뒹구는 상상을 하는 순간 심장이 뻐근해졌다. 광산 갱도가 무너졌다는 전보를 받았을 때처럼 뒷덜미가 뻣뻣해지며 턱관절에 힘이 들어갔다. 무의식중에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직 꾸역꾸역 쌓아 온 응어리를 다 덜어 내지 못했다. 엘리엇은 아직 자신에게 치를 대가가 많았다. 계약은 어디까지나 아서, 자신이 허용하는 범주 내에서 작용해야 바람직했다. 엘리엇 데일에게 주도권을 줄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사업상 거래에서 누구도 내 뒤통수를 치고 무사히 넘어간 바가 없지.’
나이트스톤에서만 자란 엘리엇은 감상적인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 덕에 서로 오간 구두 합의 어디에도 서로를 방해하지 말라는 조항을 넣지 않았다. 아서는 그것을 십분 활용할 생각이었다.
복도로 나가자 손님의 사소한 심부름을 도맡기 위해 대기하던 하인이 다가왔다. 주인의 주요한 사업 파트너를 익히 알아본 하인의 태도는 무척 정중했다.
“사람을 찾고 있어. 금발에 키가 크고 슬림한, 잘생긴 신사분 말이야.”
“그분은 아까 어느 레이디와 함께 저쪽 개인실로 가셨습니다. 정확한 방은 모릅니다만,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 됐네.”
하인이 아무리 과묵하고 믿음직스럽다 하더라도 아서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남의 집 식구였다. 사생활은 덜 드러나면 덜 드러날수록 좋은 일이었으며, 더군다나 엘리엇과의 치정에 관한 힌트를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과묵해 보여도 저들만의 공간으로 돌아간 하인과 하녀는 대개 수다쟁이여서 불필요한 소문의 근원이 되었다. 그걸 엘리엇이 과연 알고 있을까.
‘모르니까 하인이 빤히 보는데 다정한 태도로 여자와 거닐었겠지.’
실제로 다정하게 거닐었는지는 미지수지만, 엘리엇에게 로드니아에 거점을 둔 상류층의 용의주도한 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허술한 말싸움에 사사건건 넘어가고 감정적 도발에 발끈하는 순수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 터였다.
백작의 타운 하우스는 사생활 보장을 위해 푹신한 카펫을 복도마다 깔아 두었다. 그 덕에 일부러 노크하지 않는 이상 인기척을 느끼기 어려웠다. 서로 민망한 상황을 피하라고 빈방은 대부분 살짝 열려 있었다. 반대로 굳게 닫힌 문은 사용 중이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무도회를 위해서 준비된 개인실은 대부분 열려 있었고, 딱 하나만 닫혀 있었다.
무도회 초반인 지금 손님들은 주인인 백작과 인사를 하기 위해 모조리 홀에 있어서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닫힌 문을 목도하자 아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티를 내서야. 촌뜨기 같으니.’
입꼬리를 심술궂게 비틀면서 아서는 닫힌 문 앞에 섰다. 벌컥 열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예의 바르게 노크하는 쪽을 택했다. 엘리엇보다는 그와 함께 있는 미지의 숙녀를 위해서였다.
똑똑.
잠시 후 문고리가 돌아갔다. 묵직한 문이 서서히 열렸다. 예상대로 익숙한 금발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빨리… 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한껏 즐거운 표정으로 문을 열던 엘리엇은 아서를 발견하자마자 우뚝 굳었다.
“안녕, 엘리엇.”
“네가 여기 어떻게?”
“나도 노스필드 백작과 친분이 있거든.”
중의적인 질문에 일부러 그렇게 답한 아서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엘리엇은 저지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뒤로 밀려났다.
탁.
묵직한 문이 닫혔다. 뒤이어 아서는 문고리 아래 있는 잠금장치를 걸었다. 세간의 눈을 피해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는 젊은 연인이나 혹은 비도덕적인 관계에 몰두하는 불륜 남녀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였다.
“무슨… 나는 나가겠어.”
“안 돼.”
문을 막아서며 검은 정장 상의를 두른 그의 팔을 잡았다. 포마드를 꼼꼼히 발라 넘긴 빛나는 금발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던 흰 뺨의 장미색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대신에 푸른 눈에는 노기와 함께 창백한 분노가 떠올랐다.
“놔.”
팔을 잡은 아서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엘리엇은 일단 거리를 두고 섰다.
방에는 엘리엇뿐이었다. 하지만 방 가운데 있는 소파와 테이블에는 명백히 다른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혼자 썼다기에는 쿠션이 많이 흐트러졌고 무엇보다 테이블 위의 샴페인 잔이 두 개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입술이 살짝 부풀었다. 평소보다 붉기도 했고, 살짝 부르튼 표면엔 촉촉함이 남아 있었다.
“혹시 내가 방해했나?”
누구랑 입을 맞추었냐고 묻는 대신에 아서는 일부러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알 바가 아니야.”
늘 그렇듯이 엘리엇의 태도는 차가웠다. 그는 아서를 노려보며 용건을 물었다.
“용건이 뭐야.”
“내가 널 찾아온 용건이 달리 뭐가 있겠어?”
“뭐?”
감을 잡지 못한 엘리엇이 눈썹을 찌푸렸다. 순수하기 짝이 없는 그 찡그린 얼굴이 충격과 당혹감으로 바뀔 것을 상상하자 아서는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입꼬리가 양쪽으로 길게 올라갔다.
“이런 방은 은밀한 만남을 위해 준비된 것이거든.”
“나도 알아.”
“우린 모종의 합의가 있는 사이고 말이야.”
드디어 의도를 알아챈 엘리엇은 살짝 입을 벌리고 반박하려 들었다. 파렴치한. 혹은 개자식. 그것도 아니면 미친 변태라고 부를 작정이었을까.
“흡.”
무엇이 정답이든 아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팔로 엘리엇의 매끈한 허리를 단숨에 끌어당겨 남의 타액이 남았을지도 모르는 입술에 제 흔적을 남기는 게 급선무였다.
휙.
턱.
뺨을 후려치려던 엘리엇의 주먹은 아서에게 쉽게 잡혔다. 손목을 비틀어 꺾자 고통스러운지 딱딱하게 굳은 엘리엇의 턱관절이 풀렸다. 동시에 아서는 혀를 그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추웁. 쪽. 촉. 추웁.
혀를 깨무는 촌스러운 짓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아서의 험악한 기세에 밀린 엘리엇의 허리가 뒤로 꺾이며 균형을 잃었다.
“으음.”
따뜻한 점막을 더듬고 고른 치아의 모양을 섬세하게 탐색하는 동안 품 안에 있는 뻣뻣한 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엘리엇의 손목을 쥔 아서의 손아귀도 힘을 잃었다. 자유로워진 엘리엇의 두 팔이 아서의 어깨와 목에 감겼다.
“흐음.”
혀가 얽히고 입천장의 모양을 낱낱이 탐색하는 동안 여러 번 고개의 각도가 바뀌었다. 숨이 차서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어느 순간 새파란 눈동자에 깃든 노기 위에 정욕이 덧칠되었다.
그럴 마음이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화가 난 모습이 너무나도 엘리엇 데일다워서 명치가 찌르르 울렸다. 섬세한 금색 속눈썹 사이로 사나운 눈초리를 마주하자 당장 사타구니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서는 엘리엇의 옷깃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기겁했다.
“무슨 짓이야!”
“문은 잠갔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여긴 네 집이 아니야.”
“그리고 네 집도 아니지.”
“내 일행이 곧 올 거야.”
“그래서 문을 잠갔다니까.”
“미쳤어?”
아서가 밀친 탓에 소파에 쓰러지면서도 엘리엇은 진저리를 쳤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체중을 실어 눌렀다. 쿠션이 푹 가라앉았다. 아서에게 눌린 엘리엇은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여기서라니. 돌았군.”
“원래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방이야.”
“상황을 좀 가리지그래? 아무리 합의가 있다고 해도 내 사생활을 방해하진 마.”
“그래? 여자랑 있었나 보지?”
그러면서 아서는 가까이에 있는 샴페인 잔을 흘끔 봤다. 한쪽 잔에 흐린 루주 자국이 남았다.
“그렇다면?”
“누군지 알려 주면 비켜 주지.”
“내가 왜?”
“그야 내 비밀스러운 정부의 여자는 내 관심사기도 하니까?”
푸른 눈이 조용히 아서를 응시했다. 적의가 선명했다. 방금 아서와 열렬한 키스를 나누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보다는 어느 여잔지 궁금했으나, 당장은 그보다 다른 쪽 용무가 더 급하기에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단단해진 사타구니를 엘리엇의 허벅지에 문질렸다. 그러자 냉랭한 표정이 살짝 꿈틀거렸다. 동시에 엘리엇의 물건도 부풀어 올랐다. 거칠고 난잡한 섹스를 좋아하는 그가 손님이 가득한 타인의 저택에서 몰래 하는 섹스를 얼마나 황홀하게 받아들일까. 자못 궁금했다.
“기대되나?”
“…닥치고 할 거면 빨리해.”
속삭임이 닿은 귓가가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혀끝으로 귓바퀴를 천천히 핥자 못된 입술에서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서는 입술로 엘리엇의 턱선을 그리면서 검은 상의를 벗었다.
툭.
상의를 소파 등받이 너머로 던지자마자 엘리엇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손을 미끄러뜨려 종아리를 지나고 발목까지 더듬었다. 엘리엇의 구두는 쉽게 벗겨졌다.
그러는 사이 엘리엇이 아서의 타이를 풀었다. 뒤이어 빳빳한 드레스 셔츠 칼라 단추를 끄르고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뱀처럼 차가운 손이 꿈틀거리는 근육을 어루만졌다.
엘리엇의 하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음탕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성기가 바짝 열이 올라 꺼떡거렸다. 그와 반대로 아서는 흐트러졌을지언정 옷은 대체로 입고 있었다.
아서의 뒤로 황금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천장이 보였다.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저택이라 실내 장식도 묵직하고 중후했다. 압도적인 상류층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도 아서는 전혀 가려지지 않은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허리 들어.”
거만한 명령에 따르자 아서는 두툼한 쿠션을 잡아 엘리엇의 허리 밑에 깔았다. 엉덩이와 허리가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을 쿠션이 떠받친 덕분에 다리가 더 벌어졌다. 그사이에 아서가 자리 잡았다. 흐트러진 바지 앞섶 사이로 우람한 성기가 위용을 드러냈다. 주인의 움직일 때마다 그 거대한 기둥은 엘리엇의 고환과 회음을 찔렀다.
“흣.”
“아무래도 소파는 불편하군.”
못마땅한지 아서가 불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큰 소파라도 엘리엇과 아서를 감당하긴 버거웠다. 엘리엇도 작지 않은 체구였으며 아서는 유달리 컸다. 좁은 소파 위에서 사타구니를 겹치는 것도 일이었다. 감질나게 살짝 스치는 성기 덕분에 더욱 야릇한 감각이 이어졌다.
“흣.”
엘리엇은 상체를 일으켰다. 공중을 향해 꼿꼿하게 솟은 성기 위에 앉았다. 오일이 없는지라 입구는 메말랐고, 덕분에 두꺼운 귀두는 구멍을 세게 두드리다 결국 회음을 찌르며 위로 미끄러졌다. 두 성기가 교차하는 걸 보면서 엘리엇은 너른 어깨에 매달렸다.
“애태워 죽일 작정이야? 하겠다고 덤빈 쪽이 오일을 가져왔어야지.”
그러면서 엘리엇은 아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굳건한 어깨와 너른 등, 그리고 오만한 태도가 잘 어울리는 남성적인 마스크 덕에 대귀족이라고 해도 깜빡 속을 것만 같았다. 그에 비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자신이 마치 대귀족에게 봉사하는 미동이나 다름없었다.
마른 행위라도 충분히 성감을 충족시켰다. 무엇보다 풀어 헤친 제 셔츠 안을 더듬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길이 기분 좋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끝까지 하기란 불가능했다.
“후으… 읏!”
빗장뼈 언저리를 더듬던 아서가 어느새 젖꼭지를 잡고 비틀었다. 짜릿한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뜨거운 혀가 작은 돌기를 핥았다. 화인에 찍히는 듯한 뜨거움에 허리가 저릿했다. 입술을 모아 유륜부터 세게 빨아들인 아서는 다른 손으로 남은 유두를 퉁겼다.
“흣.”
춥. 쪽.
남자의 작은 유두를 빨아들이는 입술 사이로 젖은 마찰음이 났다. 엘리엇은 두 팔로 아서의 목과 머리를 끌어안고 저릿함에 몰입했다.
“아서… 아.”
가슴을 희롱하던 입술과 손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딱딱한 가슴뼈에 부드러운 키스가 떨어지는 동안 엘리엇은 일으켰던 상체를 서서히 뒤로 도로 뉘었다. 푹신한 쿠션이 등을 떠받친 덕에 아서는 조금만 숙여도 수월하게 엘리엇의 나신에 닿을 수 있었다. 아서는 남국의 태양과 같았다. 그가 만지는 곳마다 불길이 일었다. 이성의 끈이 녹아내리는 것도 금방이었다.
똑똑.
별안간 들린 노크에 엘리엇은 그야말로 꽁지에 불이 붙은 고양이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퍽.
그 바람에 발끝이 어딘가에 크게 부딪혔다. 하지만 발이 좀 아픈 건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온 일행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팽개친 바지를 냉큼 집어 들었다.
똑똑.
다시 울리는 노크에 기겁하며 바지를 치켜 입고 단추를 잠그면서 구두를 찾았다. 그때였다. 소파에 고꾸라져서 끙끙 앓던 아서가 고개를 듦과 동시에 엘리엇의 팔을 잡아당겼다.
쿵.
얼마나 세게 당겼는지 엘리엇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소파 위로 무너졌다. 허겁지겁 걸쳤던 바지는 아서의 손길에 의해 도로 휙 벗겨져 방구석으로 날아갔다.
툭.
경악을 금치 못한 채로 입만 뻐끔거렸다. 아서는 어디에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한 손으로 제 턱을 문지르면서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그를 밀치고 다시 일어나려던 엘리엇은 다시 소파에 내리꽂혔다. 두 팔목은 아서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였다. 비키라고 으르렁대려는 찰나.
철컥.
문고리가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엘리엇의 목구멍이 바짝 얼어붙었다.
한동안 움직이던 문고리는 이내 잠잠해졌다.
제인은 샴페인을 마시고 나서 잠시 여성용 휴게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다른 곳이라면 에스코트를 했겠지만, 보통 화장을 고치거나 옷차림을 고치고 싶을 때 찾는 여성용 휴게실까지 쫓아가는 건 못난이나 하는 실례였다. 그래서 엘리엇은 방에서 기다렸고, 그사이 아서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사위가 너무나도 고요했다. 심장이 맥박치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밖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구체적인 말까지는 분간하기 힘들어도 목소리는 제인이 확실했다.
“흠.”
이름을 부를 법도 한데 제인은 잠시 후 조용히 사라졌다. 경악성을 삼키느라 굳은 엘리엇을 향해 아서가 히죽댔다.
“여자를 꼬셔 놓고 다른 놈과 뒹구는 파렴치한이 되었군.”
“뭐?”
그녀를 향한 미안함과 동시에 아서를 향한 짜증이 솟구쳤다. 이 자식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제인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최악의 파렴치한은 너잖아.”
“대외적으로는 아니지. 난 네 앞에서만 파렴치할 뿐이거든.”
상당히 의미심장한 답이었다. 자신에게만 유달리 고약하게 구는 태도는 일견 짜증 나고 유치하다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조금은 특별하지 않나 싶었다. 다른 때, 다른 자가 그런다면 순수한 악의에 가까워도 막 몸을 겹치는 상대가 그런다면 조금은 야릇하게 해석될 여지가 분명히 있었다.
‘설마… 날?’
서로가 목구멍의 생선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그가 엘리엇에게만 거친 성적 충동이 든다면… 조금쯤은… 기뻐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여자를 바람맞혔으니 넌 곧 여성용 휴게실 내에서 최악의 남자가 되겠군. 오늘 무도회에서 결혼 상대를 구하기는 그른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칼날이 헐떡이는 가슴을 푹 찔렀다. 아서는 순전히 엘리엇의 결혼을 막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래서 나이트스톤을 차지하려고. 섣불리 제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건 정말로 잘한 짓이었다.
얼음물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아서와 살갗을 맞대면서 피어오른 열기가 단숨에 식어 버렸다. 즐거움과 짜릿함은 사라지고 대신 냉랭함과 혐오감이 나타났다.
아서 글래스턴 같은 작자가 제게만 성적 충동을 느끼더라도 조금도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악의와 조롱에 가까웠다.
‘멍청하게.’
엘리엇은 스스로 너무 수치스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렇게까지 속상해할 필요는 없어. 꾸준히 얼굴을 내밀면… 어느 얼빠진 여자가 네게 빠져들지도 모르지.”
“닥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엘리엇은 아서를 확 밀치고 일어났다. 그가 아무리 팔을 잡아당기더라도 허망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손을 뿌리치며 다시 바지를 주워 입었다. 셔츠 단추를 재빠르게 잠그는 동안 아서가 다가왔다.
“날 버려두고 이대로 떠날 거야?”
그는 다정한 연인처럼 엘리엇의 목덜미에 입술을 얹었다. 다정하게 굴면 굴수록 굴욕감은 더 해졌다.
“거래했잖아.”
“일일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기억하고 있어.”
바지를 제대로 입은 엘리엇은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곤 풀어 헤친 셔츠 사이로 드러난 아서의 대흉근에 손을 댔다. 질기고 두꺼운 살갗은 보기보다 훨씬 매끄러웠다. 이 감촉을 아는 사람이 자신만은 아닐 터였다.
아무 생각 없이 손톱을 세웠다. 바싹 깎은 덕에 아서의 피부에 생채기를 남기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에 하얗고 붉게 변할 만큼 꾹 눌렀다.
“엘리엇?”
아픔보다는 의아함에 모인 눈썹을 흘끗 보면서 엘리엇은 그를 뒤로 밀었다. 서서히 밀려난 아서의 종아리에 이윽고 소파가 걸렸다.
털썩.
주저앉느라 굽은 그의 다리 사이에 선 엘리엇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슴에서부터 탄탄한 복근을 훑은 손으로 이윽고 그의 사타구니를 헤쳤다. 이미 흐트러진 채였기에 두툼한 자지를 꺼내는 건 쉬웠다.
“뭘 하려고?”
혀를 꺼내 딱딱한 귀두를 크림을 핥을 때처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아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한층 깊어진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엘리엇을 바닥에 쓰러트릴 기세였다.
“입으로 해 줄게. 오늘은 이걸로 끝내.”
아서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엘리엇은 두 손으로 그의 자지를 꽉 쥐었다. 대단한 부피와 딱딱함을 자랑하는, 부도덕한 에고를 붙잡힌 아서는 살짝 흥분한 채로 꿈틀 움직였다.
처음에는 할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가볍게 핥다가 이내 자지를 입에 머금자 아서는 낮게 목을 울렸다.
츄웁. 추룩.
“으음.”
커다란 손이 엘리엇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손가락이 귓바퀴를 건드리고 이윽고 머리카락이 끝나는 목덜미에 닿았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체온이 살짝 올랐다.
추웁.
골목에서 구음한 이후로 엘리엇은 종종 아서의 자지를 빨았다. 처음에는 역겹고 힘들기만 했으나 곧 행위 자체가 주는 쾌감을 깨달았다. 입 안에 머금고 세게 빨아들였다가 혀끝으로 간지럽히면 상대의 굳건한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후.”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타까운 듯, 못 견디겠다는 듯. 하지만 아서는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간간이 낮은 신음이 꽉 다문 잇새를 뚫고 흘러나왔다. 우람한 수말처럼 탄탄한 허벅지가 경련할 때마다 엘리엇은 승리감에 휩싸였다. 이 빌어먹을 개자식도 결국은 제 안에서 쾌락을 느낄 뿐이라는 뒤틀린 우월감에 심장이 떨렸다.
츄읍. 쪽. 쪽.
이를 세워서 살짝 깨물었다가 입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목구멍을 열고 두꺼운 귀두가 연구개에 닿도록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자극받은 목구멍은 자연스럽게 수축했고 그때마다 엘리엇의 머리카락을 더듬는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츄욱. 추욱.
목구멍으로 자지를 빠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입을 다물기도 어려웠으며 생리적 거부감으로 인해 눈물과 침이 한꺼번에 흘렸다. 분명히 지저분한 모습일 텐데도 종종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들 때마다 아서는 황홀한 눈빛으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쓱쓱쓱.
손으로 뿌리 언저리를 훑으면서 목구멍으로 귀두를 조였다. 다소 고통스러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서를 절정으로 이끌기 어려웠다. 조금 속도를 더한 엘리엇의 고개가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아서가 뒤통수를 잡았다.
“엘리… 엇.”
그는 금방이라도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었다. 손으로 엘리엇의 머리를 꽉 잡고 열린 입 속에 자지를 쑤셔 넣으면서 엘리엇의 목구멍을 무참히 강간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런 충동을 억제하기라도 하듯 엘리엇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목구멍의 자극이 심해 더는 행위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딱딱한 자지도 곧 폭발할 조짐이 보였다. 엘리엇은 마지막 고비를 넘기 위해 악력을 더하고 동시에 혀뿌리로 입 안 가득한 자지 끝을 꾹 밀어 올렸다. 그러자 자극받은 목구멍이 크게 수축했다. 동시에 아서가 절정에 올랐다.
“큭.”
끈끈한 점액이 목구멍 안으로 튀었다. 생리적 구역질 덕분에 더욱 요란하게 떨리는 입 속 점막은 자지에 여진을 일으켰다. 그 덕에 완벽한 절정에 오른 자지는 정액을 모조리 쏟아 놓았다.
춥.
두꺼운 살덩어리와 붉은 동굴의 결합이 끝났다.
쿨럭.
엘리엇이 고개를 돌리며 낮게 기침했다. 침과 뒤섞인 정액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후우.”
그저 구음을 받았을 뿐인 주제에 제법 힘겨웠는지 아서는 긴 한숨을 공중으로 토해 냈다. 나른한 손동작으로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쿨럭. 쿨럭.
무릎을 꿇은 채로 목구멍에 찬 정액을 토해 내는 엘리엇에게 아서가 다가온 때는 옷을 제대로 추스르고 나서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엘리엇에게 내밀었다.
“고개 들어 봐.”
눈물이 찬 얼굴을 들어 보이자 아서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흡족한 듯 입매에는 은은한 호를 그렸다. 그는 먼저 엘리엇의 눈물부터 닦았다. 손수건으로 입과 턱 주변을 문질렀다. 꼼꼼히 매만지는 동작이 마치 후희처럼 느껴졌다. 문득 화가 났다. 계약 관계에 다정함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놔.”
엘리엇은 손수건을 낚아챘다. 그리고 깨끗한 부분으로 뒤집어 제대로 닦았다. 입 안을 헹구고 싶어도 방에는 욕실이 없었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아서에게 도로 툭 던진 다음 떨어진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난 먼저 가겠어.”
아서가 잡기 전에 엘리엇은 빠르게 방을 나섰다. 복도에 사람이 드문드문 보였다. 수치스럽지만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이면서 얼른 화장실을 찾았다.
새하얀 타일로 꾸민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엘리엇은 수도꼭지를 틀어 물로 입을 헹궜다. 그것도 모자라 입과 턱 주변까지 씻어 냈다. 한참 찬물을 끼얹은 후에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에 제 모습이 비쳤다.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은 물기를 깨끗이 닦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하며 거울에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쳐 보았다. 어디에도 정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후우.”
숨을 고른 다음 평상시와 똑같은 걸음걸이로 홀로 돌아갔다. 문을 열어 주는 하인의 시선을 깨달은 엘리엇은 제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살짝 미소 짓자 하인이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군.’
하인이 허겁지겁 연 문을 통해 홀로 들어선 엘리엇은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인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어떻게 사과할지 골똘히 궁리했다. 덕분에 달라붙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