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8)

***

아서가 찰리 윔즈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을 무렵 제인 플레커가 약속 없이 나타났다.

“아서.”

허락도 없이 서재로 들어온 플레커는 아서에게 다가가 뺨에 루주 자국이 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우아한 태도와 달리 무례하고 거침없었다.

붉은 기가 있는 갈색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가진 그녀의 본 생김새는 수수했지만 빨간 루주에 검은색과 보라색이 들어간 드레스와 검은 레이스 모자와 장갑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맹독성 화초가 으레 그렇듯이 가냘픈 외모와 달리 대단히 당찬 성격을 자랑하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여전히 불쑥불쑥 나타나는군. 미리 연락하고 오면 안 되나?”

“여자는 원래 신비로워야 하는 거야.”

대수롭지 않게 아서의 뺨을 툭 친 플레커는 방한 기능이 전혀 없는 화려한 레이스 장갑을 벗으면서 서재 중앙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차려진 찻잔을 묻지도 않고 사용했다.

“갑자기 웬일이야?”

“로드니아에 있으면서 연락도 없는 매정한 남자가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걱정이라니. 내가 죽으면 가장 먼저 웃을 거잖아.”

“어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이래 봬도 울음 연기는 잘한다고.”

플레커가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플레커와의 인연은 신대륙에서부터 이어졌다. 초기 광산을 같이 개발했던 동료이자 믿을 수 있는 동업자였다. 현재까지는.

“아직 몬테로에 있는 줄 알았더니.”

“도박장에는 제대로 된 남자가 없어. 나보다 주사위를 더 사랑하는 머저리뿐이야.”

“애초에 남편을 도박장에서 찾는 자체가 바보짓이야.”

“거긴 신분 높은 부자가 많아서 그랬어.”

“상류층 멍청이를 노린다면 사교 시즌이 최적이지.”

“그래서 로드니아에 돌아왔잖아.”

굳이 결혼할 필요가 있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제인 플레커는 아서만큼 부유했고 동시에 재능이 넘치는 여자였다. 적당히 젊은 애인을 거느리고 삶을 즐기더니 얼마 전부터 결혼, 결혼 노래를 불렀다.

“도대체 왜 그렇게 결혼하고 싶은 건데?”

“결혼보다는 가족이 가지고 싶어.”

“가족은 성가실 뿐이야.”

“그건 있는 사람들의 얘기지. 나처럼 아무도 없으면 일단 가족을 가지고 난 뒤에 그런 불평을 함께 늘어놓고 싶은 거라고.”

아서와 마찬가지로 제인 플레커는 가족이 없었다. 사업상 대륙을 오갈 때 젊은 남녀가 함께 붙어 다니면 눈길을 끌기 때문에 많아 부부나 남매로 가장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약혼자 행세도 했다. 그때마다 플레커는 매우 기뻐했다. 아서가 질색해도 고집스럽게 ‘자기’나 ‘오빠’ 같은 호칭을 마구 사용했다.

신기하게도 둘 사이에 연애 감정이 생기진 않았다. 너무 속속들이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동족 혐오 같은 그런 거리낌이 둘 사이엔 확실히 존재했다. 굳이 정의하자면 사이 나쁜 남매 같았다.

“남편 불평을 하고 싶어서 남편을 만들겠다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아서. 넌 사촌이 있어서 내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해.”

“사촌이 아니라니까. 혈연은 조금도 없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잖아. 그러면 사촌이야.”

“이상한 정의군.”

“나도 돌아갈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어.”

새초롬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플레커를 보며 아서는 편지 쓰기를 포기했다.

“아무 곳이나 네가 정하는 곳이 고향이야.”

“다시 말하지만. 그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야. 난 의미 있는 장소가 필요해. 푸근한 노인이 순박한 미소로 인사하는.”

“고향에 대해 왜곡된 망상을 하는군. 고향이 도리어 더 차갑고 냉정할 수도 있어.”

그 말에 플레커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이번 고향 방문이 즐겁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런 건 아니야.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었어. 하지만 네가 바라는 그런 상냥하고 따뜻한 미소와 환대는 없었단 소리지.”

“넌 내쫓겼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아픈 곳을 후벼 파는군. 그런 소릴 할 거면 내 집에서 썩 나가.”

“매정하긴.”

새침하게 한숨을 쉰 플레커는 차를 마시다가 다시 아서를 쳐다봤다.

“그럼 몬테로의 도박꾼이 아니라 로드니아 살롱을 드나드는 프랑크 출신 귀족은 어때?”

“뭐?”

“아포르의 현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최근 로빈슨 살롱에 드나든다는 얘기를 들었어. 금발에 푸른 눈이 대단히 잘 어울리는 미청년이래.”

“나도 들었어. 그런 놈에게 관심 있어?”

“아름답다잖아. 어차피 쓸모없다면 용모라도 괜찮아야지. 그래야 내 아이도 아름다울 테니까.”

“결혼을 넘어서 아이까지 생각하다니. 아주 대단한 계획자시군.”

“어쨌든 로드니아의 때가 묻기 전에 특별한 계기를 만들고 싶어. 도와줄 거지?”

“알아서 할 수 있잖아.”

“로빈슨 살롱은 남성 전용이야. 가장 유용하고 후환이 없으며 동시에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굳이 복잡하게 다른 사람을 고용할 필요가 없잖아.”

그 말에 아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플레커는 보란 듯이 빈 찻잔에 다시 차를 쪼르륵 따랐다.

“몬테로에서 네 사촌 부부 뒤치다꺼리한 사람이 나란 걸 기억하고 있겠지? 클라크 부부는 둘 다 덩치가 커서 다른 때보다 배는 애를 먹었단 말이야.”

“사촌이 아니라고 했잖아.”

“어쨌든. 이젠 내가 보상을 받을 차례야. 화요일의 변태들이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얼른 가서 그 프랑크 귀족을 데려와.”

플레커는 당당하게 명령했다.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거절했다가 그녀가 나이트스톤까지 찾아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벌린다면 아주 골치 아플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젠장.”

아서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변태 몇 마리가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호신용 무기가 필요했다. 권총은 너무 요란했고 대신 아주 길이 잘 든 지팡이를 집었다.

마차는 살롱까지 질주했다. 도착했을 때는 모임이 시작되고도 한참 지난 시점이었다. 노크를 하는 일도 없이 다짜고짜 살롱 안으로 들이닥치자 깜짝 놀란 지배인이 황급히 다가왔다.

“글래스턴 씨? 화요일에 웬일입니까?”

“변태들, 모여 있지?”

공기 중에 스며든 미향 냄새를 맡은 아서는 대뜸 지배인을 노려봤다. 지배인은 찔끔했지만 그래도 딴에는 배짱 있는 사내랍시고 버텼다.

“네. 새로운 손님과 함께 계시지요.”

“향냄새로 미루어 보아 문학 토론은 아니겠군.”

“아무리 글래스턴 씨라도 방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모자를 그대로 쓴 채로 아서는 무기로 사용하곤 하는 지팡이를 끝으로 지배인의 가슴을 짚었다.

“자네야말로 내 앞길을 방해하면 곤란할 거야. 이 알량한 살롱의 문을 당장 닫고 싶지 않으면 비켜.”

화낼 것도 없이 명확하게 현실만 직시시켰다. 그러자 지배인이 옆으로 물러났다. 아서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뒤에서 따라붙은 지배인이 뭐라고 변명은 늘어놓았다.

“귀족 행세를 하는 평민입니다. 게다가 로우드 남작 부인의 추천장을 위조했다고요.”

“로우드 남작 부인?”

익숙한 이름에 아서는 걸음을 멈췄다. 뭔가 섬뜩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 그분은 아주 엄격하고 고고하신 성미로 유명하셔서 평민을 귀족으로 꾸미는 장난을 치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기꾼이죠.”

“그러니까 로우드 남작 부인이 평민을 귀족으로 대하라는 추천장을 쓰셨다? 그걸 가져온 청년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청년?”

“네.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저희 살롱이 인기가 있다 보니 그런 귀족의 추천장을 거짓으로 꾸면서 드나들려는 놈이 많지요.”

지배인이 아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단편적인 정보가 조합되면서 상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결론을 도출했다.

순간 지배인의 면상에 으깨 주고 싶었다. 그러나 변태들을 막는 게 더 급했다. 막아서는 지배인을 확 밀치고 반쯤 달리다시피 응접실로 뛰어들었다.

쾅!

아서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 안에 모여 있던 놈들이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대단히 추한 놈들 가운데 의자가 있었고 그 위에 이딸리 대성당의 벽화에서 튀어나온 천사 같은 청년이 축 늘어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늘씬한 몸. 음침한 방 안에서도 혼자서만 빛을 머금은 듯 아름답게 빛나는 그는 틀림없이 엘리엇 데일이었다.

“엘리엇.”

그의 타이와 셔츠 단추가 풀어져 있었고 목과 손목에 지저분한 손이 닿아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아서는 이성이 툭 끊겼다.

퍽!

달려들어 한 놈의 면상을 짓밟았다. 다른 놈의 턱을 무릎으로 가격한 다음 다른 놈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후려쳤다.

퍽!

“무슨 짓이야!”

정신을 차린 놈이 하나 대들었지만 아서의 주먹에 바로 나가떨어졌다. 가장 비실비실한 놈은 겁에 질려서 벽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는 약을 쓰면 안 된다고 내가 말했잖아.”

“호오.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단 말인가?”

아서가 그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놈은 마치 다른 자들을 고자질하듯 아서를 향해 지껄였다.

“찰리 윔즈의 친구요. 찰리 윔즈를 아시오?”

“윔즈 자작 가의 후계자 찰리?”

“그렇소. 그는 꽤 멍청하고 순진해서 나 같은 무지렁이도 친구처럼 대해 주지. 저자도 그럴 줄 알고 건드리자고 했지만. 나는 반대했어. 약을 먹이는 걸 반대했단 말이오.”

그게 무슨 대단한 자랑인 것처럼 놈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결국은 먹이긴 했단 얘기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본 아서는 두려움에 떠는 중에도 기고만장한 놈의 뺨을 지팡이 장식으로 내려쳤다.

퍽!

무거운 장식에 정통으로 관자놀이를 맞은 놈은 입과 코에서 피를 뿌리면서 쓰러졌다.

“역겨운 쥐새끼 같으니.”

발로 놈의 배를 세게 찬 아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엇의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이런 엘리엇. 너인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왔을 텐데.”

아서는 정신을 잃은 엘리엇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사색이 되어 광경을 보고 있던 지배인을 향해 살기 어린 어조로 경고했다.

“오늘부터 화요일 모임은 없는 거다. 알겠나? 앞으로 저런 구더기가 내 눈에 띄면 그땐 지배인, 네 목숨도 없어.”

“예에… 알겠습니다, 글래스턴 씨.”

“에뜨와르 드 루이제는 모조리 잊어. 오늘의 일도. 존재 자체도.”

“명심하겠습니다.”

바짝 얼어붙은 지배인을 지나 아서는 엘리엇을 얼른 살롱 바깥으로 옮겼다. 타고 온 마차는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오른 다음 제 타운 하우스로 가자고 했다.

마차가 빠르게 달리는 동안 아서는 엘리엇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창백한 표정이 심상치 않아 귀를 얼른 코에 대 보았다. 다행히 호흡은 골랐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서. 아니 갑자기 에뜨와르 드 루이제는 뭐야.”

황당한 한편 걱정스러웠다. 더불어 엘리엇이 품에 안겨 있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몸은 기억보다 조금 더 가벼웠다. 아무래도 살이 빠진 것 같았다.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고통이 비쳤다. 미간이 살짝 주름졌고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이런 식의 재회를 기대하진 않았는데. 넌 정말 늘 예측 불허야. 엘리엇.”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이건 분명 신의 도우심이었다. 찰리 윔즈나 윌리엄 체셔 같은 귀찮은 놈들을 끼지 않고 이렇게 엘리엇을 얻을 수 있다니. 골치 아픈 제인 플레커는 이번만큼은 고맙게도 행운을 몰고 온 마녀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플레커가 현관까지 나왔다. 그럴 줄 예상했기에 아서는 제 외투를 벗어 엘리엇의 머리부터 덮어씌웠다.

“데려왔어?”

“아니.”

어깨로 플레커를 밀치며 계단으로 곧장 향했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뭐라고? 그럼 그 사람은 누구야?”

“내 사촌.”

“당신 사촌 없잖아.”

“방금 생겼어.”

“그게 무슨 말이야?”

“더는 너를 상대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 그리고 프랑크 귀족은 프랑크에서 찾아.”

따라오는 플레커를 돌아보며 윽박질렀다. 품에 안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서 다가오는 그녀의 손을 팔꿈치로 막았다. 한 손으로 제 침실 문을 열고 따라오는 플레커를 등으로 막아서면서 문을 닫았다.

탁!

“아서 글래스턴!”

밖에서 소리치는 플레커를 무시하고 의식 없는 엘리엇을 제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문을 열라고 소란을 피우는 플레커를 다시 상대하러 갔다.

벌컥!

“에뜨와르 드 루이제는 아직 살롱에 있을 거야. 이렇게 지체하다가는 아마 그 미남의 털끝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걸? 변태들이 축제를 벌이는 모양이니까.”

“멍청이! 이 쓸모없는 남자!”

버럭 고함친 플레커는 서둘러서 집을 나갔다. 그녀가 타운 하우스를 떠난 후에 아서는 하인에게 당분간 누구도 집에 들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특히 플레커를.

방으로 다시 돌아온 아서는 제 외투를 걷어 내고 제가 데려온 사람을 내려다봤다. 무료함이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저릿한 흥분이 자리 잡았다.

***

정신이 들었을 때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구토감이 일어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우욱.”

누군가 다가와 일어나는 걸 도와주었다. 하지만 게워 낸 건 딱히 없었다. 그저 쓴 물이 올라와 목이 지독하게 쓰라렸다.

“물.”

마법처럼 시원한 물이 담긴 잔이 입에 닿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엘리엇은 그 물을 달게 마셨다. 천천히 부축을 받아 몸을 다시 뒤로 넘겼다. 폭신한 베개에 목과 어깨가 닿자 엘리엇은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났다.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

미간을 찌푸리며 간신히 눈을 떴다. 시야가 어른거려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물을 많이 탄 수채화처럼 뿌옇게 흐린 주변 풍경은 분명히 살롱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로우드 저택도 아니었으며 나이트스톤은 더더욱 가능성 없었다.

“정신이 들어?”

먹먹한 고막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음성은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아서 글래스턴.

아아. 엘리엇은 어쩐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운 얘기지만 정신을 잃은 자신을 누군가 발견했고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아서 글래스턴이라는 사실이 기묘하게도 그럴싸했다. 오히려 찰리나 다른 사람이라면 더욱 놀랐을지도 몰랐다.

“여기가… 어디야?

“내 집.”

빌어먹을 살롱을 가득 채웠던 매캐하고 자욱하던 연기가 사라졌다. 대신 약간은 익숙하고 약간은 거북스러운 향기가 났다.

“어떻게 된 거야?”

“로빈슨 살롱에 들렀다가 정신 잃은 너를 발견했어. 속아서 더러운 약을 먹은 것 같아.”

그제야 엘리엇은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들어가서 남은 차를 마셨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놀라울 정도로 분노가 생기지 않았다.

왜냐면 아서 집에 있음을 알게 된 엘리엇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이 안도감이기 때문이었다.

이 안도감은 그들이 먹인 약의 부작용 탓인가? 그럴지도 몰랐다. 다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쩐지 아서와 이런 극적인 만남을 위해서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엘리엇이 공중을 향해 뱉은 욕설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화요일은 더러운 놈들의 소굴이야.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야?”

“말하자면 복잡해. 넌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우연히.”

비밀스러운 남자가 모호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살롱에도 아서의 힘이 미친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피할 수 있는 여지를 무시하고 제 발로 들어갔다. 누굴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괜히 더 의심스러운데.”

본심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면서 눈을 깜빡였다. 점점 초점이 돌아와서 상대의 윤곽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오만한 실루엣은 틀림없이 아서 글래스턴이었다.

“좀 일으켜 줘.”

“계속 누워 있는 편이 좋을 텐데.”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고 싶어.”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엘리엇은 내친김에 더 요구했다.

“두통약 있어?”

“진통제는 아편 팅크뿐이야. 안 마시는 편이 좋을걸.”

“오.”

왜 경고하는지 충분히 알았다. 엘리엇은 실망감을 감추질 못했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두통이 시시각각 심해졌다.

“그냥 쉬어. 두통 좀 있다고 죽진 않아.”

친절하게도 아서는 엘리엇에게 미지근한 물을 내밀었다. 물을 계속 마셔도 두통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화난 심장이 뇌까지 쳐들어갔는지 맥박을 따라 뇌가 쾅쾅 울렸다. 망치로 머리를 부수는 듯한 고통이었다.

“아편이라도… 괜찮아. 머리가… 너무 아파.”

“억지로라도 참아.”

“아… 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서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선 채로 엘리엇을 내려다봤다.

“당장 두통은 가라앉겠지만, 평소와 같은 부작용이 오면 어떻게 할 거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정수리에 바로 벼락이 내리치는 고통이 이어지는 중에 부작용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엘리엇은 양손으로 머리를 쥐고 끔찍한 고통을 호소했다. 이 고통만 당장 없애준다면 아편이든 혹은 그보다 더한 마약이든 몇 병이라도 마셔 버릴 수도 있었다.

“빨… 리.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변태들이 쓰는 약이 조잡해서 그래.”

“아서… 제발.”

“정말 참을성 없는 놈이군.”

이걸 어떻게 참으라는 건가. 당장 두개골을 열고 뇌를 꺼내 물에 씻어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뇌에 드릴로 구멍을 내고 얼음물을 퍼붓든가.

“차라리… 때려서 기절이라도… 시켜 줘.”

과격한 요구에 아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는 잠시 어디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는 갈색 병이 들려 있었다.

엘리엇이 내민 손에 아편 팅크를 막 건네던 손이 도로 뒤로 물러났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로 그를 바라보자 아서가 갑자기 냉랭한 어투로 물었다.

“부작용이 생기면? 음,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네게 부탁하진 않을 테니 다른 놈을 들여보내. 아무나.”

당장 약이 필요해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아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는 딱딱하고 냉랭한 어투로 경고했다.

“내 집에, 그것도 내 침대에 아무나 끌어들여 뒹구는 꼴은 용납 못 해.”

“그럼 혼자 할 테니… 빌어먹을 약 좀 내놔.”

“혼자서? 네가?”

비웃음이 돌아왔다.

“구둣발로 구멍을 혼내 달라고 애원하던 엘리엇 데일이?”

“듣기 싫으면 날 묶어 두고 방을 나가면 되잖아.”

아프다 못해 이제 슬슬 짜증이 났다. 말장난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엘리엇은 아서를 노려봤다.

“빌어먹을. 원하는 게 뭐야?”

“네가 필요한 때에 편리하게 굴기를 원한다면, 너도 내가 필요할 때 편리하게 굴어. 그게 조건이야.”

“머리가 안 돌아가니까 좀 쉽게 얘기해.”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공평하게 너도 날 상대하라는 거지. 달리 말하자면 비밀스러운 애인이 되라는 뜻이야. 정부 같은?”

머리가 폭발할 지경임에도 순간 엘리엇은 기가 막혀 고통을 잠시 잊었다.

“왜 그런 걸 요구하는지 모르겠군. 정부는 비밀스럽지도 않고 또 불륜 상대야. 넌 결혼하지… 아… 약혼자가 있는 모양이군.”

엘리엇의 탄식에 아서는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배덕의 끝을 모르는 아서에게 느낀 건 혐오보다는 옅은 실망감이었다. 부유하고 매력적인 독신남에게 약혼자가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한 느낌인 걸까. 아니, 장난감 취급 받는 것이 비참하고 슬펐다.

“실망스럽겠지만, 아직 특정 상대는 없어. 하지만 너와 내가 서로에 관해 소유를 주장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맞는 얘기군.”

당장 약혼자가 없다고 해도 저조한 기분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갔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상처였다. 도대체 아서 글래스턴이 뭔데. 자신처럼 그가 자신을 생각하며 몸이 달아 자위라도 하길 바랐던가. 엘리엇은 자조했다.

“누구든 결혼할 상대가 생기면 그땐 끝내는 조건이라면 받아들이지. 내가 용인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어. 머리가 박살 나면 그때는 이 끔찍한 고통도 사라지겠지.”

“좋아. 대신 나도 조건을 덧붙이지.”

“뭐?”

“앞으로 나와 잘 때 아편 팅크는 안 돼.”

너무나도 멍청한 요구였다. 아편 팅크 한 병을 얻겠다고 지금 외설적인 협상을 하는 중에 가장 중요한 보상을 안 주겠다니?

멍한 엘리엇의 표정에서 의문을 읽어 내린 아서는 “오늘은 물론 주지. 하지만 앞으로는 안 돼.”라고 선을 그은 다음 다시 덧붙였다.

“제정신으로 날 받아들여야 할 거야. 엘리엇.”

“날 미쳐 버리게 할 작정이군.”

“싫으면 창밖으로 뛰어내려도 좋고. 마침 여긴 3층이니까 말이야. 단번에 죽을 확률은 높지 않아. 대신 불구로 평생 고생할 길은 훤히 열리겠지.”

“저열한 저주를 퍼부을 시간 있으면 얼른 병이나 내놔.”

“좋은 선택이야. 엘리엇.”

재수 없는 미소와 함께 아서가 엘리엇에게 아편 팅크를 내밀었다. 전에 노스필드에서 마셨던 두통약보다 병이 약간 컸다. 단숨에 꿀꺽 삼켰음에도 고약한 맛이 훨씬 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후우.”

약을 마셨다는 안도감에 어쩐지 끔찍한 두통이 약간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정사 중에 옷을 버려 제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로우드의 하인들에게 알리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 과정을 아서는 아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끼와 바지를 벗어 근처에 있는 의자에 가지런히 걸고 구두와 양말도 잘 벗어 근처에 정리했다. 그러나 길게 늘어진 셔츠만은 도저히 벗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침대로 올라가려 하자 아서가 다가와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벼운 접촉인데도 이미 어지러운 엘리엇은 휘청거렸다. 든든한 가슴이 등을 받쳐 주었다.

“셔츠도 벗어. 네 나신을 제대로 보고 싶어.”

“귀찮게 구는군.”

“정부는 성적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관계야. 네겐 내 성감을 충족시킬 의무가 있다고.”

“그렇다면 네게도 그런 의무가 있을 테지?”

“물론.”

대답과 동시에 아서의 손이 엘리엇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얇은 셔츠로 간신히 가린 엉덩이 굴곡 사이에 딱딱한 덩어리가 닿았다. 숱한 경험으로 그것이 아서의 음경임을 알았다. 대단한 쾌락을 선사하는, 아서 글래스턴이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장기 중에 가장 달갑고 반가운 부위이기도 했다.

“흐음.”

아편 팅크의 효능은 빠르게 번졌다. 두통은 서서히 누그러지고 대신에 몸에 열이 돌았다. 발끝과 손끝이 노곤해졌고 어쩐지 여유로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엘리엇은 제 허벅지를 쓰다듬는 아서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그것을 제 다리 안쪽 음지로 가져갔다.

커다란 손바닥에 가랑이 안쪽 민감한 살이 스치고 강인한 손가락이 옷자락에 숨은 고환과 음경을 건드렸다. 기대감에 엘리엇은 제 뒤에 밀착한 아서에게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를 비벼 댔다.

“엘리엇.”

어느새 어깨에 내려앉은 아서의 입술에서 입김이 새어 나와 얇은 셔츠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가랑이에 자리 잡고 음탕한 자지와 고환을 제대로 건드리는 대신에 아서는 아주 안쪽에 있는 회음을 손끝으로 건드리더니 강한 힘으로 아주 천천히 위로 쓸어 올렸다. 고환이 먼저 미끄러지고 그다음 점점 딱딱해지는 자지가 손바닥에 쓸려 엘리엇의 배에 밀착했다.

“아서.”

한숨과도 같은 부름이 공중으로 번졌다. 엘리엇은 고개를 젖히고 고개를 돌렸다. 아서의 턱을 혀로 훑었다가 이를 세워 뺨을 살짝 깨물었다.

“후우.”

살짝 찡그린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기어이 엘리엇의 셔츠를 끌어 올렸다. 어느새 겨드랑이 아래까지 올라온 셔츠 아래로 바짝 솟은 유두가 드러났다. 아서는 양 검지와 중지 사이에 유두를 끼운 채로 제 뺨을 물어뜯고 있는 엘리엇에게 제 혀를 물려 주었다.

“흐응.”

혀가 먼저 닿으면서 시작된 키스가 이어지는 사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음이 흘렀다. 이미 훌렁 올라온 셔츠의 소매 아래로 엘리엇의 두 팔이 빠졌다. 순간 아서가 먼저 입술을 뗐다.

목에 걸린 셔츠를 휙 들어 올린 아서는 엘리엇의 셔츠를 뭉쳐 의자로 집어 던졌다. 엘리엇은 이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만족해?”

몸을 돌려 아서와 마주 선 엘리엇이 물었다. 아서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발끝에서 정수리 끝까지 훑어 올라오는 동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해 성사 때조차도 함부로 뱉을 수 없는 음험한 종류임은 분명했다.

“넌 정말… 최고야, 엘리엇.”

뭐가 최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서는 무척이나 흡족해 보였다. 기쁨과 정욕이 넘치는 열정적인 눈빛으로 엘리엇을 감상하던 그는 천천히 엘리엇을 침대로 밀었다.

털썩.

침대 위에 주저앉았던 엘리엇은 몸을 돌려 제대로 기어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엉덩이에 뜨거운 입김이 닿자 멈추고 말았다. 놀랄 겨를도 없이 곧 아서가 이를 세워 엉덩이를 깨물었다.

“큭.”

찌릿찌릿한 아픔에 엘리엇은 손으로 베개를 움켜쥐었다. 아서는 엉덩이 살을 당장 씹어 먹을 것처럼 깨물어 댔다. 선명한 잇자국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엘리엇의 자지가 바짝바짝 긴장을 더했다.

아서의 손이 천천히 가랑이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숙이자 고환과 음경을 떠받치는 네 손가락의 끝이 시야에 걸렸다. 저 크고 강한 손이 그대로 제 음욕의 덩어리를 으깰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엘리엇은 전신을 떨었다. 하지만 아서는 순순히 그런 쾌락을 선사하는 신사가 아니었다.

“윽.”

두껍고 딱딱한 뭔가가 엘리엇의 마른 구멍을 긁었다. 아서의 엄지손가락이었다. 가장 힘이 세고 강한 손가락은 여린 구멍의 주변부를 압박했다. 순간 두 팔로 지탱하던 엘리엇의 상체가 바로 무너졌다.

“그러고 보니 연고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 말에 놀란 엘리엇은 눈을 크게 뜨고 아서를 돌아봤다. 아서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이럴 줄은 몰라서 말이야.”

“다른 건?”

“없어.”

분명히 없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아서는 뭐든 적당한 물건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굉장히 아플 테지만 말이야. 넌 분명히 그쪽을 더 좋아하겠지?”

이미 답을 알고 하는 질문이었다. 항의를 위해 입을 열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는지 무릎으로 기어 온 아서는 엘리엇의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철퍽. 철퍽. 철퍽.

젖은 살이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엘리엇은 전신을 내달리는 충격과도 같은 쾌락에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큭. 엘리엇.”

등을 점령한 아서는 간간이 엘리엇의 두 견갑골이 마주 보는 위치에 이마를 떨어뜨렸다. 그럴 때마다 엘리엇은 침대 헤드를 단단히 쥐고 폭풍 같은 정사에 제가 쓸려 가지 않도록 버텨야 했다.

“흐윽, 윽! 아! 아서! 큭.”

여느 때보다 붉게 부풀어 오른 엘리엇의 구멍은 게걸스럽게 아서의 자지를 빨아들였다.

연고나 허브 오일을 바르지 않고 시도한 첫 번째 결합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찰과상을 입고 말았다. 약간의 피가 비치자 아서는 인상을 찡그리고 결국은 소독 효과가 있는 허브 오일을 가져왔다. 처음 아편 팅크를 마셨을 때, 엘리엇이 한 병을 모조리 쓰는 바람에 종일 바지 없이 지내게 만든 그 허브 오일이었다.

“불타는 것… 같아… 아서… 아!”

“…엘리엇… 젠장.”

첩첩 달라붙는 철처럼 단단한 아서의 허벅지 살에 부딪히는 엘리엇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제 색깔을 유지할지도 문제지만, 그보다 결합 부위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통증이 당장 문제였다. 단순한 쓰라림은 문제가 아니었다.

미세한 상처를 비집고 살 속으로 파고든 허브의 약효는 구멍을 거친 솔로 긁고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소양증을 불러왔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건 오로지 아서의 자지뿐이었다.

“아흑, 흑! 더! 더 세게! 큭! 어윽! 아서!”

어금니를 꽉 물고 엘리엇은 아서를 재촉했다. 성난 짐승처럼 몰아치던 아서가 몸부림치며 팔을 긁어 대는 엘리엇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큭!”

그대로 살점을 물어뜯기는 줄 알았다. 몸을 흠칫 떨면서 밭은 숨을 뱉었다.

철썩!

어느새 몸짓을 멈춘 아서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세게 후려쳤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원한 아픔에 구멍의 간지러움도 살짝 잦아들었다.

철썩!

“아.”

“음탕한 매춘부 같으니. 얼마든지 쑤셔 줄 테니 재촉하지 마.”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던 엘리엇은 그대로 무너져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서가 다시 거칠게 몸속을 헤집을 때는 저도 모르게 베개를 부여잡고 붉은 뺨을 문질렀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철썩!

“앗!”

“맞으면서 느끼다니. 못 말리는 변태로군.”

“아흑… 누가?”

“네 음탕한 엉덩이를 후려칠 때마다 천박한 구멍이 내 자지에 더 들러붙잖아.”

“아니… 큭… 야.”

“아니긴 무슨.”

철썩!

“앗!”

무너졌던 상체가 다시 일어났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아무리 쑤셔도 가실 생각을 않던 가려움이 매를 맞을 때마다 조금씩 무뎌졌다.

커다란 손이 후끈하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매만졌다. 어릿한 통증이 쾌락을 한층 달콤하게 변화시켰다. 도착적인 희열이야말로 엘리엇을 기쁘게 했다.

“아서… 좋아… 더.”

엘리엇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엉덩이를 더욱 내밀었다. 맞아서 예민해진 피부에 짙은 음모가 닿았고 불쾌한 까슬까슬함이 야릇한 성감을 더했다.

“천사처럼 순수하게 생긴 주제에 정말로 천박해. 그 간극이 나를 즐겁게 만들어.”

“흐응… 큭!”

욕설과 함께 아서는 움직임을 멈추고 대신에 두꺼운 귀두로 내장을 뒤척였다. 한껏 벌어진 구멍이 자지 뿌리에 휩쓸려 이지러졌다. 엘리엇은 아찔함을 견디느라 꽉 물었던 턱에서 힘을 간신히 뺐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젖혀 눈꼬리로 아서를 흘끔 봤다.

“그래서? …싫어?”

“아니.”

갑자기 아서가 엘리엇의 오른쪽 팔을 잡고 등 반대편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오른쪽 다리도 젖혔다.

“엇?”

순식간에 몸이 뒤집힌 엘리엇은 깔린 왼쪽 다리를 빼 편안하게 펴면서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구멍에 아서의 물건이 꽂힌 채로 몸을 돌리는 바람에 발생한 기묘한 감촉을 음미했다. 썩 괜찮았다.

무릎을 접어서 앉는 바람에 훨씬 두꺼운 근육을 과시하는 아서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가 올라가 허리가 뻐근했다. 내장을 꿰뚫던 자지의 깊이가 약간 얕아졌다. 무의식적으로 구멍을 조이면서 뭉툭하고 굵은 귀두마저 빠져 버리지 않도록 열심히 쪽쪽 빨았다.

“뭘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약간은 신경질적인 어투로 아서가 물었다. 엘리엇과 똑같이 땀에 젖은 그의 이마에는 못마땅한 듯 주름이 새겨졌다.

제게 열을 올리는 남자의 존재가 새삼 묘하고 낯설었다. 같은 남자, 그것도 15년 전 자신이 정강이를 걷어차고 후추통으로 복수하고 결국엔 함정에 빠트려서 쫓아 버린 남자에게 기꺼이 다리를 벌리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일어났고 결국 어처구니없는 관계에까지 이르렀다.

왠지 모르지만 이로 제 검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엘리엇은 아서를 곁눈질했다. 그러면서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후… 아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불쾌한 듯 얼굴을 구기고 있는 아서를 보자 그러고 싶었다. 다른 손으로 제 유두를 어루만지며 동시에 구멍을 바짝 조였다.

“큭.”

훤한 이마에 잡힌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머리카락만큼이나 어두운 빛깔을 한 눈썹이 꿈틀거리고 그 아래 자리 잡은 날카로운 눈동자에 무시무시한 야욕이 깃들기 시작했다.

“엘리엇.”

깊게 울리는 상대의 음성이 가닥가닥 갈라졌다. 그러면서 엘리엇 위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한층 짙어졌다.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상체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대충 늘어져 있던 엘리엇의 다리가 완전히 열리고 반쯤 걸쳤던 굵은 음경이 서서히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윽.”

압박감에 엘리엇은 얕은 숨을 뱉었다. 검지를 아프게 씹던 입술 언저리에 아서의 혀가 닿았다. 아서는 엘리엇의 손목을 잡아 천천히 빼면서 검지 대신 제 혀를 넣었다.

쪼옥. 촉. 추웁.

아랫도리의 움직임만큼 난잡한 키스가 이어졌다. 아서와의 키스는 정사에 더하는 달콤한 상이었다. 가시덩굴이 심장을 옭아매는 듯이 저릿한 고통이 성감을 더욱 부추겼다.

“흐응.”

팔이 저절로 아서의 목과 어깨에 감겼다. 그러자 화답하듯 아서의 팔 또한 엘리엇의 등과 허리를 휘감았다. 곧 상체가 떠올랐다. 아서와 마주 안은 자세가 되자 체중 때문에 결합이 더욱 깊어졌다.

“큭.”

“흐읏. 후.”

길게 숨을 내쉰 아서는 제 배에 닿은 엘리엇의 자지를 움켜쥐었다.

“핫.”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시자 아서는 빠끔 벌어진 엘리엇의 입가를 혀로 핥았다. 그리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스스로 움직여.”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엇은 엉덩이를 돌렸다. 아서에게 워낙 혹사당한 허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힘을 더해 가며 제 안에 든 자지를 힘껏 빨아들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후우.”

엘리엇은 제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아래를 봤다. 제 자지를 쥔 손이 심술궂게도 요도 끝을 꽉 막고 있는 게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엉덩이에 더욱 힘을 주었다.

슬금슬금 움직일 때마다 아서의 손에 잡힌 자지가 아팠고 커다란 자지에 꿰뚫린 구멍이 안타까웠다. 어느 쪽도 만족할 만큼 즐겁진 않았다.

“아서… 후우.”

고개를 숙여 아서의 어깨에 대고 비음을 흘렀다. 어떻게든 해 보라는 재촉이지만 요도를 막은 손만큼이나 심술궂은 작자는 제삼자인 것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어떻게든 해 봐. 정부는 서로의 성욕에 책임이 있다면서. 첫날부터 직무 유기를 할 셈이야?”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세게 쑤셔 줘.”

“무엇으로?”

“수말의 것처럼 우람하고 큰 네 자지로.”

“어디를?”

“내 천하고 상스러운 구멍을.”

일부러 더욱 천박하게 꾸며 말했다. 그러자 아서의 딱딱한 눈가에 즐거움이 서렸다.

“내 자지로 네 천박한 구멍을 쑤셔 달라고?”

“그래.”

엘리엇은 애원하듯 아서의 입술을 핥았다. 처음부터 거리낄 것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서 앞에서는 스스로 놀라울 만큼 문란해졌다. 겉으로는 아편의 탓이라고 치부하지만, 사실 아서가 몇 번 지적했던 바대로 천성 탓일지도 몰랐다.

“넌 좀 혼날 필요가 있어, 엘리엇 데일. 이렇게 매달릴 거면서 전에는 왜 그렇게 차갑게 굴었지?”

“그때는… 아!”

아서가 자지를 꽉 비틀어 짠 덕분에 엘리엇은 허리를 퍼뜩 튕겼다. 고개를 젖히고 바르르 떨다가 급히 아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애원했다.

“나중에… 나중에 얼마든지 혼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빨리… 빨리 상을 줘.”

“무엇 때문에?”

엘리엇은 고개를 들어 아서의 입술을 다시 핥았다. 여전히 그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로 고개를 젖혔다. 눈을 살포시 감았다가 살짝 내리떴다.

“이렇게 귀엽게 굴고 있잖아. 아서 글래스턴, 바로 네게.”

“약은 자식.”

즐거운 감탄사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엘리엇의 등이 침대에 다시 닿았다.

퍽. 퍽. 퍽.

“아윽! 큭! 흑!”

엘리엇의 두 다리를 들쳐 올린 아서가 이를 꽉 깨물고 하체를 쳐올렸다. 마치 말뚝을 박는 듯이 단단한 자지의 끝이 엘리엇의 약점을 두들겼다. 그럴 때마다 충격이 정수리까지 이어졌다. 눈앞에 크고 작은 별이 튀었다.

“빌어먹을.”

얼마나 깊고 빠르게 쳤는지 벌어진 구멍을 드나들던 자지가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새삼스러운 침입을 느끼고서야 빠졌던 것을 인식했다.

“으… 아.”

음경은 아서의 손에서 찌부러지기 직전이었다. 그와 함께 엘리엇의 이성도 점점 제 모양을 잃었다. 세상엔 온통 아찔한 아픔과 함께 어우러진 쾌락만이 가득했다. 바로 아서가 쏟아붓는 죽음과도 같은 쾌락.

음탕하고 가련한 엘리엇은 그 안에서 허우적댈 뿐이었다.

***

깊은 새벽.

빌어먹을 놈들이 먹인 수상한 약의 효과도, 또 아편 팅크의 효과도 거의 사라졌을 무렵 엘리엇은 아서와 함께 로우드 저택에 도착했다. 마치 나이가 들어 걸음이 불편한 노부인을 에스코트하듯 아서는 매 계단마다 엘리엇에게 손을 내밀었다. 됐다고 하고 싶지만, 실제로 다리에 힘이 없어 마차 계단을 내려오는 일도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부축을 받았다.

“이제 돌아가.”

“네가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로우드 가의 하인에게 들킬 셈이야?”

“당장 네게 키스하지 않는 이상 타인에게는 몸이 불편한 친구를 배웅하는 신사로밖에 보이지 않아.”

“제 입으로 친구와 신사를 운운하면 좀 창피하지 않아?”

“네 앞에서? 설마.”

굳이 엘리엇의 허리에 손을 대고 도보를 지나 로우드 저택의 대문 앞 계단까지 함께 오른 아서는 나직하고 짧은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침대에서 얼마나 외설스럽고 야한지 알아. 네 앞에서 부끄러울 말은 없어.”

“그거참 대단히 고맙군.”

빈정거리자 아서가 씩 웃었다. 그는 대답하게도 고개를 숙여 엘리엇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깜짝 놀란 엘리엇이 그를 노려보는 사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청동 노커를 두드렸다.

탕탕.

잠시 후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다음에 연락하지.”

낮게 속삭인 아서는 문이 열리기 전에 마차에 올라탔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엘리엇은 그가 사라지는 방향을 멍하니 볼 뿐이었다.

철컥.

“데일 씨.”

문을 지키는 하인이 나왔다.

“늦어서 미안하네.”

“늦을 거라는 쪽지를 주셨지 않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락을 한 적은 분명히 없었다. 아마 아서의 짓일 터였다. 엘리엇은 그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하인이 비켜선 현관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엘리엇은 오찬 시간을 훨씬 지나 늦게 눈을 떴다. 로우드 남작 부인에게 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부끄러워 엘리엇은 자는 동안 굳은 몸이 조금이라도 풀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동안 지난밤 있었던 일이 멍한 머릿속을 스쳤다.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공평하게 너도 날 상대하라는 거지. 달리 말하자면 비밀스러운 애인이 되라는 뜻이야. 정부 같은?’

그만큼 정사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런 것이라면 수긍할 수 있었다. 그와 나누는 뜨거운 정사는 쾌락 그 자체라 엘리엇도 내심 관계가 이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여전히 남았다.

‘특별한 취급을 바라지 않는 단순한 육체관계뿐이라면 굳이 아편의 도움을 받지 않을 필요가 있나?’

아편 자체를 향한 거부감은 둘째 칠 일이었다. 아편은 엘리엇의 도착적인 성욕에 불을 붙이고 음탕한 행위를 부추겼다. 그걸 아서도 알고 즐기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엘리엇에게 아편 팅크가 얼마나 편리한 진통제인지 알려 준 장본인이 바로 아서였다.

아편은 기분을 좋게 만들지언정 기억에 손상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성의 빗장이 느슨해지고 변태적인 성욕에 젖은 제 언행이 너무 잘 기억나서 난처했다. 새삼스럽게 아편은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과연?

‘혹은 아편의 도움 없이 순수한 의지로만 이루어진 성행위라고 하고 싶은 건가? 짐승과 같은 욕구가 아닌 순전히 서로의 매력에 기대는?’

제가 생각하고도 엘리엇은 어처구니없어서 풋 웃었다. 너무 순진하고 유치한 발상이었다. 풋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소년이나 바라는 그런 무구한 애정을 그 아서 글래스턴이?

“말도 안 돼. 푸흐.”

제가 생각하기에도 웃긴 상상이었다. 너털웃음을 터트린 덕에 긴장이 풀렸는지 등과 허리의 통증이 조금 가셨다. 팔로 상체를 지탱해 일어나면서 엘리엇은 남은 웃음을 털어 냈다.

사냥 대회 때 사소한 도발에 넘어가 스스로 아편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것이 아서와의 육체적 관계를 향한 달가운 인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비록 끔찍한 두통에 내몰린 탓도 있었지만, 어젯밤만 해도 엘리엇은 스스로 아편 팅크를 마셨다. 지금에 이르러 순수한 애정을 바라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는가.

당장은 환희와 쾌락에 빠져들어도 둘의 관계는 축복받을 수 없는 종류였다. 그건 아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정부는 서로의 성욕에 의무가 있다고?’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으며 밖을 내다봤다.

나이트스톤에서 보았던 광활한 들판과 아주 희미한 산맥으로 이루어진 한가로운 풍경과는 전혀 다른, 빽빽한 건물과 뿌연 하늘이 가득한 대도시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수한 군상과 별별 희한한 사건이 줄을 잇는 이 로드니아 안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탐한다고 해서 대단한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변태들이 득시글대는 살롱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으니까. 아서가 지적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정부라니. 아서, 넌 너무 구식이야.’

정부는 불륜을 전제로 한 개념이었다. 결국 엘리엇에게 결혼할 상대가 생겨도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 가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응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괴짜와 성격 파탄자의 수만큼이나 독신자도 많은 로드니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본가인 아서에게는 배우자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농장주인 엘리엇은 아니었다.

함께 나이트스톤을 꾸려 갈 사람이 필요했다. 릴리벳이 결혼하기 전까지 같이 장원을 관리했지만, 지금은 엘리엇 혼자였다. 혹여 살림을 꾸리는 일이야 폴리벳 부인과 콥스의 도움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엘리엇의 가족이 될 순 없었다.

어디까지나 하인인 그들과는 교류에 한계가 있었고, 그들이 엘리엇을 존경할지언정 깊은 사랑으로 평생 함께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기쁨과 슬픔, 찬란한 여름과 쓸쓸한 겨울을 함께 보낼 가족, 즉 배우자가 필요했다.

만약 정말로 마음을 빼앗긴 상대가 나타난다면 엘리엇은 아서에게 단호한 결별을 선언할 터였다. 그게 자신을 위해서도, 미래의 아내를 위해서도, 무엇보다 이 피상적이고 파괴적인 관계에 몰두하는 아서를 위해서도 나은 길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서는 위기의 순간에 엘리엇을 도운 장본인이었다. 원치 않았지만, 신세를 졌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만 했다. 하필이면 그것이 대단히 외설스러운 방식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정말이지 꼭 이런 식이어야 하나.’

엘리엇은 얼굴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아서는 절대로 순순히 물러설 작자가 아니었다. 정부라고 통보했으니 정말로 정부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아주 곤란하고 난처한 방식으로 요구할 게 뻔했다.

더불어 미지의 상대를 만나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라고 확정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당분간 아서와 어울려도 괜찮지 않을까.

“실컷 하다 보면 언젠가는 질리겠지. 나도, 그리고 아서도.”

괜히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해 봐야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엘리엇의 늦은 하루는 후련한 정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

오후 늦게 방을 나선 엘리엇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마침 남작 부인과 마주쳤다. 늦은 기상에 부끄러워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 살롱에서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군.”

“네. 좀… 난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고귀하신 귀부인의 귀에 더러운 오물을 끼얹는 격이라… 아주 천박한 작자들의 소굴이었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화요일 모임마저? 그거 실망스럽군.”

한숨을 쉰 남작 부인은 더는 살롱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에스코트를 바라듯 손을 내밀었다.

“마침 차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함께 들겠나?”

“영광입니다.”

남작 부인이 애용하는 작은 응접실은 우아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작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은 집사가 훌륭한 솜씨로 준비한 차를 받아 그윽한 향기를 음미했다.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남자 하인이 나타났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데일 씨의 친구, 찰리 윔즈 씨라고 합니다.”

“음?”

남작 부인과 시선이 마주친 엘리엇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듣고 왔을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꺼낼지 몰라도 남작 부인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건 금물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윔즈 씨가 괜찮다면 차를 같이 마셔도 좋아요.”

평소라면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겠지만, 엘리엇은 선뜻 그럴 수 없었다.

“초대를 대신 전하지요.”

하인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갔다. 예상이 영 틀린 건 아닌 듯, 찰리는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걱정스러운 티를 내며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 괜찮아? 어제 살롱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었어.”

“목소리 낮춰.”

차분한 태도로 그의 손을 먼저 잡아 악수한 뒤에 엘리엇은 그를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현관 옆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마차가 도착하기 전에 잠시 대기실로 쓰는 방은 낮에는 대부분 비어 있어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 좋았다.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온 거지?”

엘리엇은 매서운 눈빛으로 찰리를 노려보았다. 찰리는 긴장이 서린 태도로 두 손을 들었다.

“랭. 그 망할 놈이 새벽에 나타났어. 얼굴을 얻어터져서 엉망이더군. 난 또 술을 마시다가 주정뱅이들끼리 싸움이 난 줄 알았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술은 마신 적이 없지.”

“정말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나? 랭 말로는 제 추잡스러운 동료들이 이상한 약을 먹였다고 하던데.”

“몹시 더러운 약이었고 그 덕에 난 꽤 험한 꼴을 당했어. 그런데 랭, 그놈은 본인은 가담하지 않았다고 잡아뗐나 보지?”

“랭도 한패인가?”

찰리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는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가 침울한 신음과 함께 턱을 쭉 쓸어내렸다. 엘리엇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아주 잘 어울리는 패거리였어.”

“더러운 약이라면? 혹시 자네의 미모를 보고?”

“그런 얘기는 하지 말지. 입에 올리기도 싫으니까. 자네는 정말 모르고 있었나?”

“정말 몰랐어. 알았다면 내가 어떻게 널 혼자 거기에 보냈겠어? 전에 내가 갔을 때는 정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문학 토론회였어.”

“그럴싸한 인물 앞에서는 본색을 감춘 건가. 찰리, 너는 랭의 유력한 지인이어서 아무런 짓을 하지 않은 거겠지.”

찰리가 더욱 미안한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네. 잘 알고 소개해야 했는데.”

“네 잘못이 아니야. 어차피 화요일에는 갈 생각이었어. 역시 지배인 놈도 한통속인 것 같아. 제 단골손님의 성향을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야. 일부러 나에게 화요일을 권한 거지.”

“로빈슨 살롱이 그런 추잡스러운 곳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군.”

한숨과 함께 찰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히 묻는 건 오히려 네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겠지. 묻지 않겠어. 다만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거기서 혼자 나온 거야?”

“랭 그놈이 아서 얘기는 안 했어?”

“아서 글래스턴? 그가 왜?”

찰리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얘기를 안 했다면 나도 자세히 말하지 않겠어. 우연히 아서가 나를 도왔어.”

“그래?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에서 아서는 분명히 쏜힐에서 이번 겨울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말이지. 그가 로드니아에 있었군.”

이번에는 엘리엇이 미간을 구겼다.

“그가?”

“그래. 네가 로우드 가에 머무르는 걸 안 이후에 서로 엇갈려 지내기로 했나 보다 생각했지. 워낙 사이가 나빠서 가까이에 있는 것도 싫은 줄 알았어.”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렇게는 안 해. 그리고 이젠 사이가 그렇게 나쁜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도와줬겠지? 여러모로 다행이야.”

찰리가 엘리엇의 어깨를 잡으며 기쁨의 포옹을 하려던 때였다.

“오빠?”

밖에서 릴리벳이 엘리엇을 찾고 있었다. 늦은 오후라 그런지 신혼부부도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했다.

“릴리벳.”

엘리엇은 찰리를 떨치고 나갔다. 현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릴리벳은 엘리엇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듯이 다가와 와락 안겼다.

“오빠.”

“이제 남편이 있는 부인이 아무리 오빠지만 다른 사람에게 덥석덥석 안기고 그래도 되나?”

동생의 발그레한 양 뺨에 번갈아 키스하면서 엘리엇은 핀잔을 주었다.

“엘리엇.”

“윌리엄.”

아내의 그림자를 자청하는 남편 윌리엄도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고 나서 엘리엇은 찰리를 떠올렸다. 한쪽 팔로 릴리벳을 가볍게 안은 채로 다른 팔로 찰리를 가리켰다.

“이쪽은 내 친구 찰리 윔즈. 이쪽은 내 동생을 낚아채 간 도둑 윌리엄 체셔.”

“안녕하십니까. 저는 윌리엄 체셔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 동생은 알지?”

윌리엄과 악수를 하면서 가볍게 인사한 찰리는 기쁜 듯이 웃으며 릴리벳이 내민 손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릴리벳. 이제는 체셔 부인인가.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서 눈이 부실 지경이야.”

“찰리도 여전하네요.”

“나야 늘 외로운 독신자 신세지.”

“저 몰래 둘이서만 의기투합하자고 몰래 숨어서 속닥거렸나요?”

릴리벳이 엘리엇과 찰리를 번갈아 보며 눈을 흘겼다.

“네가 윌리엄과 즐거운 한때를 보낼 때 이 외로운 오빠는 거대한 도시 로드니아의 매서운 차가움을 맛보고 있었단다. 찰리와 단둘이 의기투합을 한 건 일정 부분 네 잘못이야. 네가 우리를 끼워 주지 않았잖아.”

엘리엇이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탓하자 저와 가장 비슷한 용모를 가진 쌍둥이 동생은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말한다면 못 끼워 줄 것도 없지.”

릴리벳은 엘리엇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다른 팔로는 곁에 선 윌리엄의 허리를 잡았다. 그러자 찰리가 몹시 서운한 듯이 말했다.

“나는? 난 버리는 건가?”

“제 팔은 두 개니까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찰리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분이 계세요.”

“누구?”

그 말에 대답한 건 윌리엄이었다.

“제 고모님께서 윔즈 씨가 티타임을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이죠. 그리고 찰리라고 부르십시오.”

“저는 윌리엄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이쪽입니다.”

윌리엄이 움직이자 릴리벳은 자연스럽게 엘리엇을 잡았던 팔에 힘을 빼고 대신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부부가 앞장서고 찰리가 뒤를 따랐다. 엘리엇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속삭였다.

“살롱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몰라.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마.”

“알겠어.”

“만약 내 동생이 그 일을 알게 된다면 랭은 내 손에 죽는 거고 자네와도 절교할 거야.”

“절교는 접어 둬. 대신 랭은 내가 죽여 놓으면 안 될까?”

“내가 먼저니 순서 지켜.”

고개를 빳빳하게 든 엘리엇은 시선만 제 옆에 선 찰리에게 보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찰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즉석에서 만들어진 차 모임은 굉장히 화기애애했다. 찰리와 릴리벳은 원래 안면이 있었고 엘리엇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아주 재미있군. 내 생에 쇠똥구리 얘기를 이렇게 즐겁게 듣긴 처음이야.”

“감사합니다. 남작 부인.”

“윔즈 가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유명하지. 자네는 정말로 윔즈가 맞군.”

“제 아버지는 비록 뾰족하게 솟아오른 염소수염으로 더욱 유명하시긴 하지만요. 조부께서는 대단한 입담가시죠.”

“알고 있다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윔즈 자작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들었네. 덕분에 지루한 회의가 즐거워지거든.”

로우드 남작 부인이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어 가며 웃어 댔다. 릴리벳도 윌리엄도 배꼽을 잡았다. 찰리가 매번 늘어놓는 바람에 진력이 나지만 않았어도 엘리엇도 죽도록 웃어 댔을 터였다.

찰리의 재능 덕에 엘리엇은 살롱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되었다. 남작 부인은 지저분한 얘기보다는 찰리 윔즈의 얘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

“시간이 이미 늦었군. 만찬에 초대하고 싶네만.”

“갑자기 들러서 맛있는 차를 얻어 마셨는데 염치도 없이 귀한 음식까지 축낼 수는 없지요.”

“다음 주에 다시 들르지 않겠나? 자네 시간이 허락한다면 말일세.”

남작 부인의 부탁에 찰리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다음 주에 꼭 들르겠습니다.”

“자작께도 안부 전해 주게.”

“네.”

귀족 자제로서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예법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며 안녕을 고한 찰리가 떠난 후에 집사가 들어와 사용한 찻잔과 스콘 부스러기가 남은 접시를 치웠다.

“아주 훌륭한 청년이야. 마음에 들어.”

“모두 찰리를 좋아하죠.”

“윌리엄, 너와도 뜻이 잘 맞는 것 같지 않니?”

“네. 고모님. 재미있는 사람이라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군요.”

“윔즈 자작가는 정치계에서도 꽤 힘을 쓰는 명문가란다.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이 없어.”

“꼭 가문이 아니라도 찰리라면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을 겁니다.”

“이제 그만 쉬어야겠구나. 너무 웃어서 피곤해.”

남작 부인이 종을 흔들자 그녀를 보필하는 하녀가 나타났다.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일어서서 배웅한 후에 도로 자리에 앉은 윌리엄이 문득 물었다.

“엘리엇. 살롱에 갔었다지? 고모님께 들었어. 어땠나?”

“아주 별로야.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아.”

혐오감을 듬뿍 담아 눈살을 찌푸리자 릴리벳이 안타까워했다.

“내일 가구점에 들르기로 했어. 괜찮다면 오빠도 같이 갈래?”

“아니. 부부 사이에 끼어든 눈치 없는 멍청이가 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살롱이 별로라며. 거기가 그나마 가장 좋은 곳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곳도 오빠 마음에 안 들거야.”

상냥한 릴리벳은 엘리엇이 심심할까 걱정했다.

“독서를 하거나 산책을 하면 되지. 그리고 찰리도 있고 말이야.”

“내가 친구가 많아서 좀 소개해 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내 친구들은 거의 군인이라 지금 로드니아에 없어. 본격적인 사교 시즌이 되면 몇몇은 돌아오겠지.”

“걱정하지 마, 윌리엄. 난 애가 아니야. 시간을 보내는 나름의 방법 정도는 있다고. 혹시 독서도 산책도 지루해지면 그때는 알아서 친구를 사귀어 보겠네.”

“물론 자네라면 누구든 금방 친구가 될 테지.”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릴리벳은 뭔가 걸리는 듯이 잠자코 있었다.

“무슨 걱정이 있어?”

“아니야. 그냥.”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넘기는 태도에 엘리엇은 적잖이 실망했다. 결혼 전에는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모조리 다 털어놓던 사이였다. 이제 그 상대는 윌리엄일 터였다. 서운함을 계속 안고 갈 순 없었다.

“이따가 만찬 때 봐. 이브닝드레스를 새로 샀어. 아주 예뻐.”

“그래. 기대할게.”

방긋 웃으면서 릴리벳은 저쪽에서 기다리는 윌리엄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금색 깃털을 가진 작은 새 같은 동생이 제게서 멀어질수록 참기 힘든 사랑스러움에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더했다. 더불어 아서와의 기묘한 관계를 끝낼 계기도 필요했다.

‘내게도 누군가가 필요해.’

엘리엇은 제 방으로 돌아가며 남작 부인에게 남성 전용 살롱 대신 무도회나 만찬 자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신이 몹시 지쳤으므로 이틀 정도 저택에서 남작 부인과 동생 부부와 시간을 보내며 쉬었다. 삼 일째 되던 날, 남작 부인이 기꺼이 출입을 허락한 서재에서 마침 마음에 드는 최신 농장 관리 지침서를 찾아냈다.

“흐음. 이런 책이 다 있군.”

외국 농장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요즘 상류층의 만찬에서 많이 소비하는 인기 작물 소개와 키우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 완전히 빠져들던 중이었다.

똑똑. 철컥.

“데일 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차를 마시고 난 이튿날 찰리가 하인을 시켜 쪽지를 보냈다. 랭을 찾고 있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제일 먼저 알려 주겠다고 했다.

“찰리인가.”

책을 덮고 일어선 엘리엇에게 하인은 말없이 명함을 내밀었다. 찰리라면 이미 로우드 가의 하인들이 잘 알고 있으므로 굳이 명함을 내밀 필요가 없었다.

아주 비싼 종이로 만든 명함에는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서 글래스턴

‘연락할 때가 되긴 했지.’

조금은 은밀한 방식을 택할 줄 알았다. 정확하게 무슨 방법일지는 엘리엇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대낮에 대문을 두드려 명함을 내미는 정석적인 방법은 아닐 줄 알았다.

“모실까요?”

“아니. 내가 나가도록 하지.”

하인을 보내고 아서는 혼자서 현관으로 내려갔다. 닫힌 문을 열자 외출용 코트와 실크해트를 걸친 아서가 보였다. 그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엘리엇이 선수 쳤다.

“길에서 기다려.”

한마디 던진 다음 도로 문을 닫았다. 그리곤 외투 보관실에 직접 들어가 모자와 외투를 꺼냈다. 그걸 본 집사가 황급히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데일 씨. 외출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집사는 외투 보관실에 엘리엇이 직접 들어갔다 온 것을 사과했다.

“신경 쓰지 말게.”

“데일 씨는 마님의 손님이십니다. 식구처럼 모시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남작 부인께 감사하고 있다네. 사소한 외출 준비쯤이야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어. 다음에는 자네의 도움을 받도록 하지.”

집사가 문은 직접 열어 주려고 얼른 문고리를 잡았다.

철컹.

열리자 계단에서 조금 떨어진 도보에 서 있는 아서가 보였다. 엘리엇은 그에게 아는 척하기 전에 집사를 돌아봤다.

“늦을 것 같으니 저녁 식사에 내 자리를 만들 필요는 없네.”

“알겠습니다.”

집사의 배웅을 받으며 계단을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온 엘리엇은 여전히 아서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로 타운 하우스의 좁은 앞마당을 빠져나갔다.

탁.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엘리엇은 제 뒤를 바싹 따라붙은 아서를 향해 빠르게 속삭였다.

“굳이 명함을 줄 필요까진 없잖아.”

“앞으로 자주 찾아뵐 댁이니 예법에 맞게 행동했을 뿐이야.”

“내 집이 아니니 인사하지 않아도 돼.”

“내 생각은 다른데.”

“비밀스러운 관계를 원한 사람이 바로 너잖아.”

“남자 둘의 사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러니 수상하게 굴지 마.”

엘리엇이 멈추자 아서도 따라서 곁에 섰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바로 몸이 닿을 거리라 불편했지만, 아서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엘리엇도 반 발짝이나마 아서에게서 물러나 줄 마음은 전무했다.

남자 둘 사이의 거리라기엔 비정상적인 거리였으나 도보가 워낙 좁고 길거리에 가까이 서서 비밀스러운 얘기를 속닥거리는 행인이 드문드문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다.

찌푸린 채 빤히 응시하는 엘리엇에게 아서가 먼저 물었다.

“왜?”

“너야말로 왜 그렇게 표시를 내지 못해 안달인 거지?”

“뭘.”

“능청스럽게 굴지 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거래를 파기하겠어.”

“이제는 없는 일로 못 해, 엘리엇.”

아서가 한 뼘도 안 되는 간격을 마저 좁혔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약간 뒤로 젖힌 엘리엇은 슬슬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렇다면 내 개인 생활에 끼어들지 마. 정부는 정부답게 굴어.”

짙은 눈썹이 실룩댔다. 최근에 안 깨달았지만, 아서는 속이 뒤틀릴 때 눈썹을 움찔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좋아. 하지만 내 성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는 잊지 말길.”

“물론. 그러니까 따라 나온 거잖아.”

얕은 한숨을 쉰 엘리엇은 다시 몸을 돌렸다.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엘리엇은 제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빨라진 맥박이 제 속도를 찾을 수 있게 나직하게 숨을 골랐다.

아서 글래스턴은 여러모로 심신에 해로웠다. 마치 아편이 듬뿍 든 약처럼. 성적으로 위험하며 시도 때도 없이 기대감에 몸이 들끓게 했다.

‘후우. 아편이 없어도 당장 침대에 뛰어들 수 있겠는걸.’

제 문란함에 대한 자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아서가 가까워진 정도로 사타구니에 힘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금방 가라앉힐 수 있을 만큼 미약한 열기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빨리 어디론가 들어가는 편이 안전했다.

“마차는?”

“몸이 특별히 불편한 게 아니라면 좀 걷지. 오늘은 모처럼 날씨가 화창해서 산책하기 좋거든.”

“산책이라니.”

세상에. 다른 누구도 아닌 아서가 엘리엇에게 산책을 권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왜 그렇게 놀라? 산책 못 할 이유라도 있어?”

“독설, 드잡이질, 가랑이 접붙이기가 아닌 권유를 네 입을 통해 들을 줄은 몰랐거든.”

엘리엇의 말에 아서는 미간을 구겼다. 그러면서 눈썹을 약간 꿈틀거렸다. 심사가 뒤틀렸군.

“오해하지 말길. 순수하게 놀랐을 뿐이야.”

“나야말로 놀랐어. 길바닥에서 가랑이 접붙이기 같은 표현을 쓰다니. 도대체 넌 얼마나 몰염치한 거야?”

“네 앞에서야 얼마든지 파렴치해질 수 있지. 너처럼 말이야.”

그러면서 엘리엇은 보란 듯이 손을 뻗어 아서의 허리 아래, 하체로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을 슬쩍 쓸어내렸다. 그 즉시 득달같이 내려꽂히는 아서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척 앞장을 섰다.

“미쳤… 엘리엇.”

“날씨가 정말 좋긴 하군. 적당히 쌀쌀하고 말이야.”

품위 있는 신사라면 으레 사용하는 지팡이를 살짝 흔들면서 엘리엇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서가 뭔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우뚝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엇은 저를 노려보는 시선에 정욕이 깃들었음을 바로 눈치챘다.

“산책하자더니?”

“…빌어먹을.”

어금니를 꽉 깨문 아서는 도발을 간신히 넘긴 맹수처럼 긴 한숨을 뱉었다. 그리곤 엘리엇에게서 약간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귀엽긴.’

몇 달 전만 해도 아서 ‘렌튼’ 글래스턴을 두고 귀엽다는 생각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 엘리엇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우스웠다. 눈꼬리를 접으며 조소를 머금자 함께 산책하는 남자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어쩐지 즐거운 산책이 될 것 같았다.

***

로드니아를 관통하는 강 근처에 쭉 이어진 차와 커피를 파는 상점가는 날씨가 좋을 때는 차양 아래 야외 탁자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초겨울을 바라보는 시점이라 야외 탁자는 인기가 없었다. 덕분에 산책하기에는 편했다.

낮은 겨울 태양이 묵묵히 흘러가는 강물 표면을 어루만졌다. 적잖이 눈부셨다. 로드니아의 상징인 백조 떼가 유유히 강을 떠다녔다. 여름에는 2인용 보트나 다인용 보트가 그 백조 사이를 갈랐겠지만, 지금은 배를 빌려주는 상점도 노천카페처럼 휴점 상태였다.

앙상한 가로수와 함께 희미한 석조 건물만 계속 이어졌다. 평소라면 쓸쓸한 풍광으로 여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서와 말없이 걷고 있으니 어쩐지 낯간지럽고 문득문득 이유도 없이 머쓱했다.

“한가롭군. 대도시라 길거리에 행인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 시기는 그나마 조용하지. 사교 시즌이 되면 사람으로 넘쳐나거든. 지체 높으신 분들을 태운 마차가 끝없이 이어져서 제대로 걷지 못해.”

“그중에 네 마차도 있고?”

“물론. 사교 시즌엔 여기저기 초대가 많이 오거든. 걸어서 다니다간 금방 늙어 버릴걸.”

다른 사람과는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시시한 대화에 불과한데도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뭔가 내밀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아서는 다른 사람보다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타인에게는 무척이나 친밀한 친구 관계로 보일 터였다.

“주로 뭘 해?”

“음?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

“여유가 생기면 뭘 하냐고.”

“아, 취미 말이군.”

사교술의 기본인 대화 중 가장 기초적인 질문임에도 엘리엇과 아서는 멍청이처럼 네 마디나 주고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얘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전에는 아침을 먹으면서 신문을 읽고 장부를 정리하지. 사업 관련 약속이 없으면 말이야.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오후에는 우편물을 정리하고 필요한 답장을 써서 부치고 난 뒤에는 자유야. 대부분 무수한 초대장 중에 몇 개를 골라서 방문하지. 대부분 그렇게 보내. 사교 시즌이 아닐 때는 광산을 직접 방문하거나 거래처 공장을 방문하느라 오래 여행을 떠날 때도 있어. 이제는 쏜힐도 있고.”

취미를 물었는데 아서는 어쩐지 자신의 일상을 늘어놓았다. 질문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대신에 엘리엇은 제 일상을 들려주었다.

“농장은 대부분 소작을 주었어. 작황이 나쁘지 않도록 자주 둘러보며 소작인들과 얘기를 나누지. 소작농의 농기구를 모아 수리를 의뢰하거나 농사 방법을 연구하기도 해. 그 외에는 온실에서 지내는 편이야. 원래는 릴리벳과 함께 가꿨지만, 이젠 혼자니까 일이 많아졌어.”

“그렇군.”

뒤이은 침묵이 이상하게도 어색했다. 엘리엇은 간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때문에 릴리벳은 빨리 결혼하라고 난리야. 혼자서 장원을 꾸리긴 힘들다고. 정작 나를 버리고 간 게 누군데.”

농담이었다. 살짝 웃으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서의 표정은 아주 딱딱했다. 양 눈썹 끝이 사납게 올라간 것을 보니 심사가 뒤틀린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나 보였다.

“결혼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

“이르다니. 대부분 내 나이에 결혼해. 농장주치고는 오히려 늦은 편이지.”

“나이트스톤이 대단한 대농장도 아니잖아. 손바닥 반절도 안 되는 것 가지고 쩔쩔매다니 네 노력이 부족한 탓이야.”

아서가 난데없이 시비였다. 순간 기분이 나빠진 엘리엇의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위대하신 자본가인 아서 글래스턴 씨의 광산에 비하면 손바닥 반절도 안 되는 작은 장원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습게 볼 이유는 없어. 난 충분히 노력하고 있어.”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서는 약간 뜨끔했는지 시선을 잠시 멀리 던졌다가 다시 엘리엇에게로 돌렸다.

“전문 관리인을 고용하는 건 어때? 결혼보다는 덜 귀찮을 텐데.”

“덜 귀찮은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문 관리인에게 지급해야 할 급료가 상당할 거라는 확신은 드는군.”

“그 정도도 감당이 안 되면 장원을, 아니 애초에 고작 도박 대금 약간도 없어서 세간을 팔아야 하는 거라면 진작 팔아 치우고 다른 일을 하는 게 어때?”

이번엔 상당히 신선한 막말이었다. 물론 로드니아에 자리 잡은 대형 은행도 벌벌 떠는 자산가의 입장에서는 볼품없는 장원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부유했다. 그저 릴리벳의 결혼식을 화려하게 치르느라 저금을 털어 버린 게 문제였을 뿐.

“고향을 등지란 말인가?”

“거기가 진짜 고향도 아니잖아. 넌 로드니아 태생으로 아는데.”

“닥쳐. 내가 어디를 고향으로 여기든 네 알 바가 아니야. 너야말로 고향도 아닌데 쏜힐까지 굳이 기어들어 온 이유가 뭐야?”

오랜만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익숙한 분노가 전신을 잠식하자 그간 서로를 탐했던 혓바닥이 제멋대로 독설을 퍼부었다.

“아, 역시 그건가? 볼품없이 쫓겨난 렌튼이 아니라 대단하신 글래스턴 씨가 되었으니 성공을 뽐내려고? 그래서 알량한 장원 따위로 으스대는 내 콧대를 눌러 주고 싶어서?”

“아주 아니라고는 못 하지.”

렌튼이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아서의 눈에 사나운 불똥이 튀었다.

“솔직하게 나와서 고마울 지경이군. 가족의 도박 빚 때문에 네게 순순히 다리를 벌린 내 꼴을 보고 아주 통쾌했겠어. 어때? 손쉬운 매춘부로 만들어 놓으니 이젠 속이 시원한가?”

“넌 결코 순순히 다리를 벌리지도 않았고 손쉬운 매춘부도 아니었어. 수시로 영혼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독설을 뱉었고 내 목을 졸랐으며 또 총구도 들이댔지.”

“총은 네가 먼저 들었어.”

“그래. 하지만 네 비수 같은 혓바닥으로 나를 난도질했잖아.”

“그게 싫었으면 처음부터 내 집에 얼굴을 내밀면 안 되었어.”

“거긴 너만의 집이 아니야. 내 집이기도 해.”

그제야 엘리엇은 아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눈치챘다.

“아하. 이제야 알겠어. 나이트스톤을 원하는 거군. 내가 부당하게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돌려받을 셈이야. 그렇지?”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거짓말하지 마.”

엘리엇은 검지를 세워 아서의 가슴 가운데를 푹푹 찌르면서 경고했다.

“나이트스톤은 내놓지 않을 거야. 가지고 싶다면 내가 죽은 후에 릴리벳을 통해 사들이든가. 하지만 그 애도 순순히 내놓지는 않을걸?”

“그렇게 할 생각 없다고 말했어.”

“그렇지 않으면 왜 내 호의를 사려고 드는 거지? 왜 무언가를 호시탐탐 노리는 듯이 내 주변을 맴도는 거야?”

“그건.”

갑자기 말문이 막한 듯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엇은 제 말이 옳음을 확신했다. 그리곤 아주 효과적인 대응법을 떠올렸다.

“이번 사교 시즌 동안 배우자를 찾겠어. 내년 봄에 결혼할 수 있도록 말이야. 사교 시즌에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 만큼 많은 마차가 오간다니, 그 말은 그만큼 사람도, 모임도 많다는 뜻이겠지? 로드니아 어딘가에 내 반쪽이 있겠지. 얼른 결혼해서 자식을 적어도 셋, 아니 다섯은 낳으면 네 손에 나이트스톤이 순순히 들어가는 걸 지연시키고 아마도 훨씬 성가시게 만들겠지. 어때, 내 계획이?”

“엘리엇!”

“그렇게 역정 낼 거 없어. 그때까지 약속대로 네 정부 노릇은 충실히 하겠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리 벌려 주지.”

분노 때문에 시야가 흔들렸다.

“어린 네가 그런 식으로 외숙부에게 쫓겨나서 죽을 만큼 고생하게 된 데에는 내 탓도 있으니까. 어떤 행위든 얼마든지 받아 주겠어. 하지만 그걸로 끝이야. 영원히 이어지지도 않아. 전에 합의했던 것처럼 배우자를 발견하고 약혼하는 순간에 너와 나는 끝이야. 알겠어?”

불같은 분노에 도취되어 마구 지껄이느라 엘리엇은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넌 정말 개자식이야, 엘리엇 데일.”

“그거 기분 좋은 칭찬이군.”

씩 웃은 다음에 엘리엇은 먼저 걸어가 버렸다. 아서가 따라오든 말든 무시했다. 하지만 아서는 순순히 물러날 작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어이 엘리엇을 붙잡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건 곤란한데. 정부로서 내 성욕을 책임지셔야 하니까.”

사납게 놈을 노려보자 아서는 비열하게 이죽거렸다.

“좋아. 마차를 잡도록 하지. 네 집?”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뭐?”

엘리엇의 반문에 아서는 바싹 다가왔다.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목소리에서 악의가 철철 흘러넘쳤다.

“지금 여기서 해.”

충격적인 요구를 받은 엘리엇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아서는 몹시도 재미있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원한대로 네게 일절 손을 대지 않겠어. 난 내 성욕만 풀면 되니까.”

“무슨.”

“내 자지를 빠는 것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을 테지.”

순간 엘리엇은 제 귀를 의심했다. 너무 놀라 눈과 입을 멍하게 벌린 채로 아서를 쳐다봤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아는 태도였다.

“으슥한 골목 정도는 내가 찾아 주지. 그때까지 천박하게 벌어진 입을 닫고 네 못된 혓바닥이나 적셔 놔.”

그러면서 그는 엘리엇의 팔을 꽉 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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