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힐 ; 가시나무 성 2권
4. 로드니아
늦더위가 가시더니 추수철이 훌쩍 다가왔다. 이번 작황은 매우 좋았다.
나이트스톤 장원 자체의 수입이 늘었을뿐더러, 로우드 남작가에서 우편환을 보내왔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엘리엇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매우 정중하게 쓴 사과 및 감사를 전하는 편지가 함께 도착했다.
윌리엄에게 뒤늦게 사정을 들었다는 로우드 남작 부인은 조카의 불찰로 데일 가에 신세를 진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내다 판 물건을 다시 사들이는 데 보태라고 했다. 귀족가의 씀씀이는 굉장해서 엘리엇이 실제로 동생 부부에게 들인 돈보다 두 배는 더 많았다.
또한 겨울 동안 윌리엄을 타운 하우스로 불러들여 아주 따끔하게 충고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과정을 엘리엇이 함께해 주면 무척 기쁠 거라고도 적혀 있었다.
“조카 교육을 거들라는 뜻일까? 아니면 조카에게 도박할 돈을 대 준 나도 같이 혼내고 싶다는 뜻일까?”
편지에 답장을 쓰면서 엘리엇은 잠시 고민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우드 남작 부인의 초청이었다. 게다가 릴리벳도 바로 로드니아에 있는 로우드 남작 부인의 타운 하우스로 향할 예정이었다. 윌리엄이 혼날 때 곁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군.”
로우드 남작 부인에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답장을 썼다.
눈이 내려서 여행이 어려워지기 전에 엘리엇은 서둘러 로드니아로 갈 준비를 했다. 짐을 꾸리고 기차표를 샀다. 집안을 단속하고 자리를 비우는 동안 별일이 없도록 온실을 다시 손보았다.
그때쯤 드디어 폴리벳 부인과 콥스가 돌아왔다.
“주인님.”
대륙 남부의 햇살이 꽤 좋았는지 폴리벳 부인은 살짝 탄 뺨을 한껏 부풀리며 웃었다. 여행 가방을 옮기는 콥스도 여전했다.
“건강해서 다행이야. 여행은 어땠어?”
“기차 여행이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즐거웠어요.”
폴리벳 부인이 주름 잡힌 외출용 모자를 벗으면서 엘리엇의 양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정말 오랜만이야. 콥스.”
“주인님.”
악수하고 나자 콥스은 한결 편안한 태도로 긴 한숨을 쉬었다. 신난 폴리벳 부인과 달리 과묵한 그는 여행 내내 많이 시달린 듯 보였다.
“릴리벳과 윌리엄은?”
“두 분 다 건강하세요. 특히 아씨는 프랑크 남부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식사도 잘하시고 산책도 오래 하셨고 무엇보다 몬테로에 계셨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어요.”
“아무렴 도박판 사기꾼들에게 협박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니 어쩌다가 윌리엄은 그 지경에 내 동생을, 본인의 아내를 끌어들인 거야?”
엘리엇이 화를 내자 폴리벳 부인도 덩달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누군가 일부러 끌어들인 것 같대요. 그렇지 않나, 콥스?”
“예.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영 석연치 않습니다. 몬테로에서 만났다는 신혼부부의 거처를 찾아보니 그런 사람은 어느 호텔에도 묵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사근사근한 로드니아 말투를 쓰면서… 조 클라크?”
“조너선 클라크, 메리 클라크.”
콥스가 명확하게 기억했다.
“맞아요. 클라크 부부가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면서 데리고 갔는데 도박장이었대요. 나오려고 했는데 구경만 해도 좋다고 해서 일단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휘말렸다고 하더군요.”
“체셔 경 말씀으로는 처음에는 그저 동전 몇 개만 재미 삼아 걸어 보라고 했답니다. 초반에 몇 번 따자 계속 부추기면서 판돈을 올렸고 그렇게 이틀 정도 돈을 따다가 삼 일째 한 번에 크게 잃었다고 하더군요.”
엘리엇은 쓴웃음을 지었다. 클라크 부부가 바로 아서가 말한 끄나풀이었다.
“전형적인 수법이군.”
“알면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문제야. 처음 잃은 걸 바로 포기했으면 문제가 커지지 않았겠지. 되찾으려는 욕심에 결국 더욱더 깊이 빠져든 거지.”
엘리엇 또한 섣부르게 자존심을 세운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도 충고할 입장이 아니었다.
“어쨌든 긴 여행을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내일까지 쉬게.”
“주인님은 곧 로드니아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로우드 남작 부인께 초대받았지. 내일 자세하게 얘기할 테지만 로드니아 여행은 벳시가 동행할 거야. 아무래도 경험이 많은 두 사람이 나이트스톤을 지켜 줘야 안심되거든. 그리고 벳시가 있으면 릴리벳에게도 좋을 테니까 말이야.”
“훌륭하신 결정입니다. 사실은 로드니아가 궁금하지만요. 애석하게도 프랑크 남부까지 여행을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지쳤어요. 겨울 동안은 안락한 나이트스톤에서 쉬고 싶군요.”
“전 여기가 좋습니다.”
폴리넷 부인에 이어 제 속을 털어놓는 성격이 못 되는 콥스도 드물게 한마디 거들었다. 콥스에겐 따로 많은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잘되었군. 어쨌든 오늘 오후부터 내일 오후까지는 쉬게. 여독을 풀고 더 얘기 나누지.”
“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두 사람이 제 방으로 쉬러 간 동안 엘리엇은 직접 벳시를 찾아 뜨거운 차를 온실로 가져오도록 했다. 차를 준비한 벳시는 로드니아에 가게 되어서 기쁜 나머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폴리넷 부인에게 여행 때 필요한 걸 물어서 미리 준비해. 릴리벳이 따로 시킨 일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네, 주인님.”
명랑하게 인사한 벳시는 치맛자락을 폴폴 날리면서 가벼운 걸음으로 폴리넷 부인을 찾아 저택으로 돌아갔다.
온실에는 이제 엘리엇뿐이었다. 릴리벳이 결혼하기 전에는 늘 공유했던 공간과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는 경우가 더 흔했다. 결혼 직후 반쪽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쓸쓸함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기우였다.
갑자기 나타난 아서 글래스턴이라는 거대한 풍랑에 휘말려서 사상 최고로 정신없는 여름을 보냈다. 사냥 시즌이 끝나기까지 엘리엇은 우울함을 음미하거나 릴리벳의 부재를 느낄 틈이 없었다. 매번 놈의 수작에 화를 내거나 혹은 사소한 복수를 곱씹으며 고소해하거나 혹은 멱살을 잡으며 드잡이질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뜨거운 숨과 체온을 공유하며 헐떡였다.
달깍.
찻잔을 놓고 멍하니 온실을 바라보았다. 여름 내내 다른 곳에 정신을 파느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온실 안 화초와 꽃나무는 온통 웃자라 엉망이었다. 빨리 전정을 하지 않으면 낮은 온실 천장을 꿰뚫어 버릴지도 몰랐다. 더 늦기 전에 잘못된 가지를 잘라 내야 했다.
“후우.”
사냥 대회 마지막 날 은근히 관계를 이어가길 원하던 아서를 단칼에 끊어낸 일도 이와 비슷한 의미였다. 단순히 아서가 엘리엇의 친분에 참견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도발했다고 겁도 없이 아편 섞인 두통약을 마셔 버리는 제가 두려웠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순 없잖아. 동성 간 항문 성교는 용인받지 못해. 게다가 릴리벳은? 이런 몸으로 순수한 애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릴리벳이 알게 되면 나를 끔찍하게 여기겠지.’
하필이면 다른 남자도 아닌 아서 ‘렌튼’ 글래스턴이었다. 릴리벳을 욕보이려고 했던 더러운 놈. 그에게 돈을 빌리고도 모자라 괜한 술수에까지 말렸다. 제게 있는 줄도 몰랐던 말 못 할 성벽은 평생 모르고 사는 편이 더 나았다.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뒤에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예용 가죽 장갑을 끼고 큰 전정가위를 들었다. 콥스의 도움을 받아 함께 하려고 했으나 내일 오후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서걱. 툭. 우직. 툭.
온실 유리 벽에 조금이라도 닿을 것 같은 가지는 가차 없이 쳐 냈다. 개중에는 질기게 버티는 놈도 있어 작은 톱과 손도끼도 동원했다.
툭! 툭! 서걱서걱!
풀썩.
곧은 심지를 믿고 빳빳하게 고개 세우던 가지들이 기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흥. 네놈들은 내 허락하에서만 자랄 수 있어. 멋대로 굴지 말란 말이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엘리엇은 떨어진 가지를 장화로 짓뭉갰다. 풀물이 번지면서 씁쓸한 향기가 올라왔다.
마구 잘라 내느라 나무의 형태가 영 볼품없었다. 그래도 속은 후련했다. 장갑을 끼고 전정가위를 든 채로 테이블로 간 엘리엇은 미지근해진 차를 마저 훌쩍 마셨다.
“땀 흘리면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혼자서 차를 마시는 일은 어차피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와 느긋한 대화를 나누면서 마실 수 없는 대신, 이젠 하고픈 일을 얼마든지 하면서 아무렇게나 차를 마실 수 있었다.
혼자도 괜찮았다.
늦은 저녁을 먹고 책을 좀 읽다가 잠이 들었다. 낮에 전정 작업을 하느라 진을 빼서 그런지 몸이 무척 노곤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후우.”
몸을 뒤척이며 한숨을 쉬었다. 요사이 한숨이 부쩍 늘었다. 뭔가 묘하게 답답했다. 웃자란 가지를 썰어 낼 때와 같은 통쾌함은 잠시뿐, 하루의 대부분 묘하게 불편한 감각이 이어졌다.
‘왜?’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엘리엇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잠옷을 대신하는 긴 실내 셔츠만 걸친 몸이 자꾸 뭔가 보챘다. 뜨겁고 강렬하고 못 견디게 짜릿한 뭔가를.
무언의 요구를 애써 무시하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자정이 지났을 무렵 엘리엇은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젠장.”
정말로 젠장맞을 일이었다. 실내화를 걷어차고 맨발로 방을 가로질러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 달린 작은 약장 서랍에서 양은으로 만든 연고 통을 꺼냈다.
먼 들판을 향해서 난 욕실 창을 통해 달빛이 쏟아졌다. 눈은 금세 어둠에 익숙해졌고 흰 도기 세면대와 도기 욕조, 똑같이 백색 도기로 바닥을 깐 화장실은 푸르스름한 달빛을 최대로 증폭시켰다.
쨍그랑.
양은 연고 뚜껑이 세면대에 떨어졌다. 이미 한차례 사용한 흔적이 있는 연고를 손으로 듬뿍 떠서 양손 바닥에 비벼 발랐다.
허벅지 중간까지 길게 늘어지는 셔츠 자락을 들어 올리고 한 손은 음경에 대었다. 아직 덜 녹은 연고의 차가운 기운이 음경에 닿았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흐윽.”
세게 잡아 문질렀다. 전처럼 평범한 자위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엘리엇은 이제 이런 단순한 행위로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제 음경을 쥐어짜면서 다리를 들어 올렸다.
발을 욕조 가장자리에 걸치고 다른 손을 엉덩이에 가져갔다. 이미 기대에 찬 구멍은 연고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아주 게걸스럽게 삼켰다.
추욱. 추욱. 추욱.
미간이 찌푸려지고 앙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만져서는 전혀 효과가 없음을 지난번 수음 때 이미 깨달았다. 엘리엇은 엄지손톱으로 귀두 표면을 긁으면서 구멍에 손가락 세 개를 집어넣었다. 꽤 성급했기에 아팠고 그러자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후우.”
이걸로도 한참 모자랐다. 자지를 쥔 쪽 검지 손톱을 세워 예민한 요도 입구를 긁었다. 연고에 미끄러진 손톱이 제법 아프게 살을 파고들었다.
“큭.”
짜릿함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자지 쪽은 그게 꽤 마음에 들었는지 금방 단단해졌다. 꽉 잡은 손아귀를 험악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동시에 엉덩이 구멍에 든 손가락을 마구 휘저었다.
“흐윽.”
금방 절정에 오를 것 같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제 손으로는 무자비함을 흉내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뭔가 도구를 쓰기에는 아직 두려웠다.
“빌어먹을.”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엘리엇은 가지 못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욕조에 걸터앉았다. 둥글게 빛은 차갑고 딱딱한 도기 모서리에 고환과 회음을 치대고 엉덩이 구멍을 마구 문질렀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제 자지를 으깨듯이 욕조 모서리에 문질렀다.
“크흑. 흣.”
체중을 고스란히 회음과 구멍에 떠넘기고 나서야 슬슬 제대로 된 느낌이 왔다. 그 감각이 끊길세라 엘리엇은 최선을 다해 허리를 놀렸다.
덜컥. 덜컥.
무거운 욕조가 흔들렸다. 온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자지의 뿌리부터 꽉 눌러 위로 밀어 올렸다. 제 손바닥의 두꺼운 부분이 귀두를 짓이길 무렵 드디어 저릿한 쾌락의 순간을 맞았다.
풋.
“허억. 허억.”
얼마 되지 않은 적은 양의 정액을 뿜어낸 자지는 곧 힘을 잃었다. 시야가 아찔했다. 숨을 몰아쉬며 엘리엇은 천천히 욕조 곁에 주저앉았다.
“후우.”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드디어 미약한 해방감을 느낀 덕이었다. 사정한 음경은 곧 제 주장을 한 발 물렀지만, 구멍은 여전히 간질간질했다. 도기 욕조는 너무 매끄럽고 상냥해서 불만인 것 같았다.
“미쳤어. 이건 정말 미쳤어.”
엘리엇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아편을 먹으면 조금 나아질까 고민했지만, 혹시나 약 기운에 눈이 돌아가서 집 안에 있는 다른 하인을 덮칠 가능성도 컸다.
혹은 지금이라도 쏜힐에 가서 아양을 떨어 보는 수도.
꽤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대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을 연신 얼굴에 끼얹었다. 수건을 적셔 음부를 닦은 뒤 터벅터벅 침대로 돌아왔다.
‘그 자식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침대로 가자고 하겠지.’
안 봐도 뻔했다. 단순히 질 수 없기도 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서는 아니었다. 그와는 잘될 수가 없다.
그 자식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언제나 엘리엇의 가장 소중한 대상을 인질로 삼았다.
‘내가 이 집을 물려받으면 넌 릴리벳을 만나지 못할 거야. 릴리벳은 아주 착하고 내 말을 잘 들어서 이 집에 있도록 허락하겠지만 너처럼 성질 고약한 꼬맹이 따위는 물려받는 그날 바로 내쫓아 버릴 거니까!’
어린 아서가 악에 받쳐서 외쳤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절대 정말로 그럴 수 없다는 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로드니아를 향해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기차를 몇 번 갈아탄 끝에 다음 날 새벽에 가까운 아주 늦은 밤에야 로우드 남작 부인의 타운 하우스에 도착했다. 등불이 켜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달려왔다.
“오빠.”
거의 반년 만에 본 릴리벳은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엘리엇을 기다렸다.
“릴리벳.”
품에 와락 달려드는 릴리벳을 번쩍 들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사랑스러운 동생을 품에 안자 세상이 갑자기 환해 보이고 모든 근심이 일시에 사라졌다.
“보고 싶었어. 오빠.”
“나도 보고 싶었다.”
릴리벳을 내려 준 다음 급하게 얼굴과 사지를 살폈다. 어디 하나 나빠진 곳이 보일세라 엘리엇의 시선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건강은 어떠니? 이젠 아프지 않아?”
“응. 휴양했더니 아주 괜찮아졌어. 이젠 외투 없이 들판을 뛰어다녀도 될 만큼 건강해.”
“다행이구나. 네가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네가 무사하고 건강해서 다행이야.”
엘리엇은 진심으로 안도하며 릴리벳의 이마와 정수리에 키스했다. 그사이 윌리엄이 다가왔다.
“엘리엇.”
“이 망할 자식.”
품에 안았던 릴리벳을 놓아주자마자 엘리엇은 그에게 다가가 주먹을 내질렀다.
퍽.
힘껏 친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은 윌리엄은 잠시 휘청했다. 짐을 옮기던 하인이나 릴리벳, 그리고 엘리엇과 함께 로드니아까지 동행한 벳시마저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
“릴리벳을 위험하게 만들다니!”
“반성하는 중이네.”
제법 시큰거리는지 윌리엄은 제 턱과 뺨을 어루만졌다.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 반격은 하지 않았다. 제 하인들 앞에서 굉장히 창피한 일이었는데도 그는 순순하게 사과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그만 용서해 주게. 아픈 아내에게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네.”
“그래 맞아. 오빠. 이번에는 함정에 빠진 거야.”
“그런 뻔한 함정에 걸린 것부터 문제야.”
“윌리엄도 반성하고 있어.”
릴리벳이 제 남편 옆에 붙어서 걱정스럽게 뺨을 쓰다듬어 주는 광경을 보니 성질이 끝까지 뻗쳤다. 하지만 여기서 더 화를 내고 싸움을 벌이면 오빠와 남편 사이에 낀 릴리벳이 굉장히 곤란해질 터였다. 무엇보다 엘리엇은 로우드 남작 부인에게 초대받은 손님이기도 했다.
“앞으로 두고 보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동생을 데리고 돌아가 버릴 테니까 말이야.”
“죽이겠다는 말보다 무서운 협박이로군.”
“내 의사도 생각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난 윌리엄과 헤어지지 않을 거야.”
릴리벳이 미간을 찌푸리며 윌리엄을 두둔했다. 아내가 자신을 보호하듯 안아 주자 윌리엄이 감격한 듯 릴리벳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휴우. 너도 문제구나.”
엘리엇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망할 벌레 한 쌍이 반갑고 무사해서 다행이고, 또 서로를 부둥켜안고 쪽쪽대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짜증 나고 골치도 아팠다.
“늦었으니 쉬고 내일 다시 얘기하지.”
“그래. 벳시도 피곤할 거야.”
애정을 실컷 과시한 뒤에야 둘은 로우드 저택의 작은 주인 행세를 시작했다. 하인들이 짐을 빨리 방으로 옮기게 하고 엘리엇을 방으로 안내했다. 윌리엄이 앞장서는 사이 릴리벳은 조용히 서 있던 벳시를 돌아봤다.
벳시는 릴리벳을 다시 만나서 기쁜지 그녀의 곁에 바싹 붙었다.
“아씨. 다시 뵈어서 기뻐요.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벳시. 오느라 고생했어. 우리 할 얘기가 많아.”
릴리벳은 스스럼없이 하녀인 벳시의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갔다.
***
다음 날 아침 엘리엇은 오찬 자리에서 로우드 남작 부인을 뵈었다. 로우드 남작은 건강이 매우 나빠 예전부터 시골의 한적한 저택에서 요양 중이었고 남작가를 실질적으로 꾸리는 사람은 남작 부인이었다. 풍채가 돋보이는 남작 부인은 엘리엇을 맞아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로군, 엘리엇.”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 부인.”
내민 부인의 손등에 정중하게 키스를 한 뒤에 손길을 따라 남작 부인에 뺨에도 번갈아 키스했다.
“여전히 매력적인 청년이야, 자네는. 쌍둥이가 모이니 갑자기 저택이 환해지지 않았나, 집사?”
“네. 그렇습니다. 마님.”
귀족 저택에 오랫동안 봉사한 집사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검은 연미복을 입은 노신사 그 자체였다. 그는 오찬을 위한 차를 준비했다.
“과찬이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작 부인의 고상하고 우아한 존재감에 비견되겠습니까?”
“호호. 재치도 제법 갖추었어.”
남작 부인이 웃으면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하얀 대리석 테이블에는 샌드위치와 스콘 등 오찬에 맞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 애들은 일어났는가?”
“아직이십니다.”
“젊은 부부라 그런지 오찬이 늘 늦어. 아주 옛날 귀족식 하루를 보내고 있다네. 오후에 일어나서 새벽에 잠자리에 들지. 요즘 누가 그렇게 게으른 생활을 한다고. 꾸지람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소용없어.”
남작 부인은 크림을 부은 차를 작은 은수저로 저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고급스러운 찻잔을 받아 든 엘리엇은 그윽한 향기에 감탄했다.
“신혼부부니까요.”
“내 자식같이 아끼는 조카지만 말이야. 가끔은 놀라워. 아주 사랑꾼이지 뭐야. 결혼으로 그렇게 바뀔 줄은 몰랐네.”
남작 부인은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내내 뿌듯함과 애정이 넘쳤다. 너스레를 떨면서 조카 내외의 금슬을 자랑하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소동이 있었다지?”
“죄송합니다. 제가 화를 참지 못하고 윌리엄을 한 대 때렸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하자 남작 부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손짓했다.
“자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회초리를 들었을 거네.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게다가 연약한 아내까지 동반한 여행에서 말이야.”
“제가 빨리 손을 썼어야 하는데. 또 릴리벳도 말리지 못한 잘못이 있지요.”
“아닐세. 자네 덕분에 그래도 애들이 무사하게 돌아온 것이 아닌가. 본가를 수리하느라 자금유통이 어려워도 여행비 정도는 못 대 줄 것이 아닌데 말이야. 절약하라고 그런 척했더니 부끄럽게도 자네에게 손을 벌리다니. 정말로 창피한 일일세.”
“아닙니다.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요.”
“여행비도 넉넉히 주었는데 어떻게 그걸 그렇게 다 탕진할 수 있는가 말일세.”
“전문적인 도박꾼들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몬테로에는 그런 자들이 많으니까요.”
“평생 그런 사기꾼들을 대해 본 일이 없는지라 당했다고 생각하네. 이번에 제대로 배웠겠지.”
남작 부인은 은근슬쩍 윌리엄 편을 들었다. 그러면서 차를 호록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어리숙한 윌리엄에게 사람 공부를 좀 시켜야겠어. 자네를 초청한 것은 그 때문일세.”
“그렇군요.”
“로드니아에는 많은 연회와 젠틀맨 클럽이 있어.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모임이야 내가 같이 가면 되지만 젠틀맨 클럽은 남성만 출입 가능하니까 말이야. 자네가 윌리엄과 동행해 준다면 안심이야.”
“제가요? 비록 로드니아 태생이긴 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이트스톤에서 자랐습니다. 지금의 로드니아는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도 인맥을 넓힐 좋은 기회가 아닌가? 엘리엇. 자네는 매우 총명하고 기지가 넘치는 청년일세.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평생 로드니아와 본가를 오가며 자란 우리 윌리엄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있네.”
남작 부인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제가 생각해도 뻔한 수법에 넘어간 윌리엄보다야 잘 적응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누군가의 보모 노릇을 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그 속내를 단번에 알아본 남작 부인이 정중하게 덧붙였다.
“부탁일세.”
귀족 부인일뿐더러 앞으로 릴리벳과 함께 살아갈 어른이었다. 엘리엇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처음부터 한 가지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오늘 저녁부터 모임이 있다네.”
남작 부인이 손짓하자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봉투를 담은 은색 쟁반을 내밀었다.
“보게.”
엘리엇은 찻잔을 놓고 봉투를 집었다. 이미 개봉된 봉투 안에서는 어느 남성 전용 살롱을 소개하는 글과 초대장이 나왔다.
“로빈슨 문학 살롱?”
“시인 로빈슨 경을 기리는 신사들의 모임일세. 구성원이 모두 젊고 영향력 있는 가문 출신이라 요즘 굉장히 인기가 많은 살롱이지. 귀족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 있고, 기본적으로 신분 제한은 없네.”
두 번째 찻잔을 받은 남작 부인이 소개장을 꼼꼼히 읽어 보는 엘리엇을 향해 계속 설명했다.
“자네가 먼저 들어가서 분위기를 봐 줄 수 있겠는가? 내가 추천장을 써 주겠네.”
“네. 그러지요.”
“고맙네. 아무래도 윌리엄이 이상한 친구를 사귈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너무 엄격한 처사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네. 나도 내 장성한 조카가 고작 전문 도박꾼에게 홀랑 넘어가 여행비를 모조리 다 탕진할 줄 알았겠는가.”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리엇은 그저 웃었다. 다른 사람, 다른 상황이라면 이런 부탁을 하는 남작 부인을 별난 고모로 여기고 그런 고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윌리엄을 한심하게 여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릴리벳의 남편인 윌리엄이 조금 더 빨리 영악해지고 굳건해질 수 있다면 이런 은밀한 술수에 얼마든지 동참할 마음이 있었다. 로드니아에 온 이상 좋은 살롱을 오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굳이 포기할 이유도 없었다. 남작 부인이 초대장을 써 준다면 엘리엇이 스스로 얻어 낼 수 있는 것 이상의 좋은 인맥을 다질 수도 있었다.
“오늘 로빈슨 경의 시집을 다시 읽어 보도록 하지요.”
“고맙네. 집사. 오찬이 끝나면 엘리엇을 서재로 안내하게.”
“네. 마님.”
오찬은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남작 부인은 제 조카며느리의 미모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엘리엇이 저택에 머물러서 더욱 기뻐했다.
비록 엘리엇과 릴리벳은 귀족이 아닌 평범한 지주 가문 출신이고 또한 재산도 굉장하지는 않았으나 탁월한 미모를 가졌기에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재산과 명예를 쌓을 수 있으리라 남작 부인이 말했다.
“자네에게 들러붙는 자들이 많을 거야.”
“흠. 기뻐해야 하는 걸까요?”
“이상한 변태들도 많겠지. 그걸 어떻게 이용하든 자네의 마음 아니겠나? 하지만 되도록 멀쩡한 가문의 아가씨와 교제하기를 바라네.”
“로드니아의 지체 높은 가문의 아가씨가 저 같은 촌뜨기 지주를 좋아할까요?”
“촌뜨기 지주라니. 호호호호.”
갑자기 남작 부인이 소리 높여 웃었다. 아주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한참 웃던 부인은 이내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누가 그렇게 생각할까. 자네는 말투며 행동거지며 외모까지 모조리 당장 왕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돌세.”
“설마요.”
“못 믿겠으면 오늘 살롱에 가서 대륙에 있는 작은 왕국에서 온 귀족이라고 거짓말해 보게. 누구든 의심하지 않을 거야.”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남작 부인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내가 소개장에 그렇게 쓰도록 하지. 그리고 자네는 대륙에서 온 귀족 행세를 하는 거야. 마침 내 외가가 프랑크 왕가와 이어져 있으니 내 말을 의심하진 않겠지.”
“나중에 들통나면 망신당할 게 아닙니까?”
“놀이였다고 하면 되네. 살롱의 운영자에게는 말해 놓도록 하지.”
“아니, 그래도 거짓말은 곤란합니다.”
“유흥일세.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는 미리 말을 해 놓을 테니.”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남작 부인은 엘리엇의 우려를 물리치고 밀어붙였다.
그날 저녁 엘리엇은 남작 부인이 시키는 대로 굉장한 고급 정장을 입고 가문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고 로빈슨 살롱으로 향했다. 남작 부인이 서명한 추천장에는 엘리엇의 이름이 프랑크 왕가의 방계 출신인 귀족 에뜨와르 드 루이제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엘리엇은 왁스를 발라 잘 넘긴 금발을 하얀 장갑 낀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살롱은 로드니아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주택가에 있었다. 건물 하나를 통으로 빌린 것이 인기가 대단한 듯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인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여느 집 집사처럼 잘 차려입은 신사가 엘리엇을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루이제 경. 제가 지배인입니다. 로우드 남작 부인께 말씀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
모자와 코트를 넘겨받은 그는 어색함을 못내 감추지 못한 엘리엇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데일 씨. 들키지 않을 겁니다.”
“고맙네. 이게 무슨 소동인지 모르겠어.”
“로드니아의 귀족분들은 늘 심심하셔서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시거든요.”
익숙한 듯이 지배인이 씩 웃었다. 약간 떨리는 심정을 누르면서 지배인을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이었는데 벌써 몇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 손님인가?”
“잠시 소개해 드리지요. 프랑크 왕국에서 오신 에뜨와르 드 루이제 경입니다. 로우드 남작 부인의 소개로 저희 살롱을 방문하셨습니다.”
“만나서 반갑소.”
여송연을 물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엘리엇도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비어 있는 가죽 소파에 앉았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전신을 몰래 훑는 그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차를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
“…진한 커피가 좋겠군.”
가짜지만 프랑크 왕국 출신답게 커피를 시켰다. 지배인이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주변에서 프랑크 왕국어로 한마디씩 던졌다.
평소에 프랑크어는 열심히 배워 두었으므로 쉽게 대답했다. 여름마다 만난 찰리 덕분에 프랑크 계통 상류층의 발음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진짜 프랑크 출신이군.”
“프리아 아님 마르셀?”
“마르셀.”
딴에는 지역까지 물어 오기에 엘리엇은 대충 남부 지역을 찍었다. 그들은 정말로 믿는 기색이었다. 거짓말이 가져온 긴장이 슬슬 풀리고 느긋해졌다.
슬쩍 미소를 짓자 살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그들은 엘리엇을 중심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남작 부인의 말이 옳았다. 살롱에서 만난 누구도 엘리엇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귀족을 선망하고 관심을 가졌다.
사람이 모이고 대화가 무르익자 그들은 꽤 혁신적인 논리를 설파했다.
“로빈슨 경의 시는 아주 퇴폐적이야. 겉으로는 자연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속내를 면면히 들여다보면 변태적이지.”
“그가 숭배한 대상은 아주 아름다운 소년이지. 순진한 작자들은 그걸 신의 사자를 향한 경외, 즉 자연을 향한 찬양이라고 하지만 결국 사내일세. 게다가 로빈슨 경은 말년에 시동에 둘러싸여 있기로 유명했어.”
“그렇지. 그건 굳이 파헤칠 필요가 없어. 쓰인 그대로니까. 봄처럼 싱그러운 소년을 사랑했다는 뜻이야.”
어쩐지 대화 내용이 이상했다. 신입인 엘리엇은 그저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남성 전용 살롱에서 온갖 퇴폐적이고 외설적인 얘기가 오간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런 주제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명화에 나오는 헐벗은 여신을 찬양하는 자리일 줄 알았는데.
“루이제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지?”
“음. 거기까지 생각해 본 일이 없는데. 아무리 시동이 있다고 했지만, 당시에 지체 높은 남성을 시중드는 일은 대부분 다른 가문에서 나온 남성들의 몫이니까 시동이 늘 곁에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게다가 로빈슨 경은 신실했어. 신이 금지한 그런 이상 성욕에 관대할 사람은 아니야.”
“이상 성욕이라. 요즘에도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군.”
“그러게. 루이제 경이야말로 그런 성애를 찬양할 줄 알았더니.”
놈들의 말씨가 이상했고 눈빛은 더욱 괴상했다. 엘리엇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반박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그런 용모를 가지고 한 번도 남성의 구애를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잖아. 특히 성적으로 자유로운 프랑크에서 말이야.”
“도대체 내 고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퇴폐적인 상상은 거둬 주게. 로드니아의 신사 모임은 이게 처음이라 혼란이 조금 생기는데 말이야. 다른 곳도 다 이러나?”
“대체로 이렇지.”
낄낄거리던 놈들은 독한 위스키를 훌쩍 마셨다. 얼굴이 붉어진 놈들은 노골적으로 성적인 농담을 이어 갔다. 동성애는 그중에 하나였다. 이제는 로빈슨을 비롯한 각종 시인들이 어떤 매춘부와 잠을 자다가 끔찍한 성병에 걸려서 죽어 갔는지를 노골적인 상상을 덧붙여 지껄여 댔다.
말이 문학 살롱이지 결국은 문학을 핑계로 음담패설이나 늘어놓는 저질 모임이었다. 남작 부인의 걱정은 역시나 마땅했다. 이런 곳에 순진한 윌리엄을 던져 놓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루이제 경은 이런 얘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별로. 관심 없네.”
“자네 같은 미청년이 성애에 관심이 없다니. 통탄할 노릇이군. 로드니아의 많은 탕아가 울겠어.”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렇다면 어떤 즐거움을 즐기는가? 술? 경마? 아니면 도박?”
“모두 다 사절이네. 나는 약간의 독서와 원예를 즐기는 편이야.”
그러자 한 놈이 과장스럽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원예라니. 그건 하인에게 시키고 좀 더 직설적인 걸 즐기게. 바야흐로 유물론의 시대 아닌가.”
“그래. 이제 엄격한 철학과 규율의 시대에서 탈출했는데 시대를 즐기세.”
“그럼 자네는 아편도 안 하나?”
시끄러운 잡담 속에서도 유독 아편이라는 단어가 크게 들렸다. 엘리엇은 단번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편이라. 아주 끔찍하고 혐오스러워.”
“이런 양귀비의 매력을 모르다니. 도대체 뭘 즐긴단 말인가. 기껏 젊고 아름답고 지체 높고 부유한데. 정말이지 도덕 따위 약간만 벗어 내면 최고의 천국이 기다려.”
“사양하겠다고 했어. 그따위 천국은 죽은 뒤에 누리겠네.”
엘리엇이 딱 잘라 선을 긋자 놈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꽉 막힌 사람이로군.”
“로빈슨 살롱에는 어울리지 않아. 다른 살롱을 소개해 주겠네. 같이 가겠나?”
그렇게 말하는 놈들의 눈빛이 음흉했다. 어느 살롱을 소개하든 이보다 끔찍하면 끔찍했지 나을 것 같진 않았다.
“오늘은 피곤해서. 다음 기회에.”
엘리엇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놈들이 대놓고 실망한 티를 냈다.
“다음에는 좀 더 긴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네.”
“기회가 되면.”
두 번 다시 여기엔 발을 들여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리엇은 나가면서 지배인에게 모자와 코트를 받았다. 그는 마차가 도착하기 전에 엘리엇에게 물었다.
“오늘 대화는 어떠셨습니까?”
“굉장히… 즉물적이어서 조금 실망했네.”
“그렇다면 다음 주 화요일에 방문해 주십시오. 그때는 분위기가 다를 겁니다.”
“그런가?”
“네. 저희 살롱을 찾아 주시는 신사분들은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오늘의 모임은 꽤… 농밀하고 성숙한 편이지요.”
난잡하고 너저분한 걸 그렇게 설명하는 것도 대단한 재주였다.
“그럼 다음 주 화요일에 오겠네.”
“네. 기다리겠습니다. 로우드 남작 부인께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엘리엇은 살롱을 떠나 로우드 남작 저택으로 돌아왔다. 여송연 냄새와 커피 냄새, 그리고 신사용 콜로뉴 냄새에 듬뿍 절은 채로 도착하자 집사가 엘리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내일 오찬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윌리엄과 릴리벳은?”
“친척인 엘리아스 가의 만찬에 가셨습니다.”
“그래? 즐거운 시간이 되겠군.”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대신 따뜻한 우유 한 잔 부탁하지. 조금 순수한 걸 마셔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코트와 모자를 받아 든 집사가 사라지고 엘리엇은 제 방으로 돌아왔다. 남작 부인이 제공한 방은 매우 크고 화려했다. 그래도 충분히 안락했다.
불편한 정장을 벗으면서 엘리엇은 불쾌감을 떨쳐 냈다. 로드니아에 거주하는 신사들의 첫인상은 매우 별로였다.
‘찰리 같은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인기 많은 찰리가 로드니아 출신의 상류층과 어울리길 질색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계속 엘리엇에게 로드니아로 오라고 권유한 이유도.
집사가 가져다준 뜨거운 우유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면서 엘리엇은 내일 오후는 찰리를 깜짝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
초겨울 태양은 금방 자취를 감췄다. 길거리에 가스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는 시간, 아서는 서재에 앉아 다 정리한 장부와 서류를 뒤적거렸다.
무료했다. 도시 곳곳에서 초대장이 날아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늘 보던 얼굴, 늘 하던 대화는 지겨웠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귀찮았다.
겨울 로드니아에선 시간이 쏜살처럼 흘렀다. 그런데 올해는 너무나도 느린 거북이 속도였다. 아서는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작년은 어떻게 보냈지?’
지난해 쓴 기록장을 뒤져 보았다. 연일 이어지는 만찬에 사업상 지인과 함께 나눈 티타임. 은행장들과의 약속.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의 대화. 올해와 똑같았다. 그 전해도 또 그 전해도. 그런데 갑자기 올해 들어서 이렇게 고통스러울 만큼 지루한 이유가 무엇인가.
“사냥 시즌은 빠르게 지나갔는데 말이지.”
컨트리 하우스에 처박혀 총을 쏴 대는 일은 다른 일에 비해 귀찮았는데 올해 사냥철은 노스필드 저택에서 너무나도 즐겁게 보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순간 어설픈 제 물음에 아서는 자조했다.
‘엘리엇 데일.’
차이는 그뿐이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사람을 미치게 몰아갔던 열기와 방탕함 가운데 그가 있었다.
‘생각보다 여운이 오래가는군.’
처음부터 엘리엇 데일에게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고자 쏜힐을 사들였다. 일부러 릴리벳의 결혼에 들이닥치려고도 계획했다. 유치한 복수였다. 거부가 되어 나타난 자신을 보고 엘리엇 데일이 비굴하게 나오리라 예상했다. 곁에 머무르면서 조금씩 파멸시키려고 했는데. 엘리엇 데일은 만만치 않았다. 아서 안에 자리 잡은 선명한 복수심만큼 그가 아서에게 느끼는 혐오감도 여전히 생생했다.
‘늘 예측을 불허하는군.’
그래서 더 아서를 부추기는 면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협박과 강간으로 이어지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물론 전적으로 엘리엇 데일의 탓만도 아니었다.
‘그렇게 이성을 잃은 건 오랜만이었어.’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엘리엇과 유치하게 툭탁거릴 줄은 차마 몰랐다. 어이없게도 그걸 떠올리면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래서 더욱 문제였다.
‘우리가 특별한 사이는 아니잖아.’
엘리엇의 독설 중 유일하게 동감하는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계산도 얼추 끝났다. 15년을 보상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싶지만, 이성은 엘리엇의 남성적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충분하다고 얘기했다. 그 이상은 위험하다고.
서재에 앉아 망할 자식을 떠올리면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바짝 긴장해서 대화를 주도해야 하는 만찬 자리는 사양이었다. 적당히 늘어져서 술을 마시면서 시시덕댈 수 있는 곳을 떠올렸다.
로빈슨 살롱.
아서는 그대로 로빈슨 살롱으로 발을 옮겼다. 가끔 방문하는 살롱은 오늘따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아서를 맞은 지배인은 아주 정중한 태도로 외투와 모자를 받아 들었다. 살롱 운영이 어려울 당시, 지배인은 아서의 도움을 받아 운영 자금을 확보했다. 이후로 지배인은 누구보다도 아서에게 정중했다.
살롱에 관여한 이유는 이곳에 드나드는 방문객과 적절한 인맥을 만들거나, 혹은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잡담에서 여러 가지 소문을 듣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로드니아에 자리를 잡던 초반의 얘기였고, 지금은 훨씬 권위 있고 영향력이 큰 상류층과 직접 교류하면서 살롱을 방문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런데도 지배인은 아서가 나타나자마자 흥미로운 새 인물의 등장을 어김없이 귀띔했다.
“오늘 새로운 방문객이 있었습니다.”
“그래?”
응접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지배인이 늘 마시던 위스키 잔과 애용하는 여송연을 가져왔다. 그러면서 아서에게 또 말을 붙였다.
“굉장히 매력적인 분이셨지요.”
그러자 이쪽을 의식하던 몇 명이 시키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였다.
“글래스턴. 프랑크에서 온 굉장한 미인이었어.”
“그래 봤자 여기에 들어왔다는 걸 보면 남자 아닌가.”
아서가 심드렁하게 받아치자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미인에게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 아름답고 매력적이면 그만일걸. 그게 우리 로빈슨 모임의 핵심 강령이잖아.”
“나는 빼 줘. 이런 한심한 모임의 주축 멤버가 될 생각은 없다고 예전부터 말했어. 가끔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충분해.”
아서가 선을 딱 긋자, 그의 부와 외모를 노리고 멤버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놈들은 지치지도 않고 수다를 떨어 댔다. 정말이지 여인들을 수다쟁이로 부른 인간은 사내의 본성을 하나도 모르는 얼간이가 분명했다. 쪼그라든 방울 두 쪽과 한심한 작대기 하나를 믿고 저렇게 으스대고 싶어 혓바닥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는 멍청이들이란 걸 알았다면 그런 소린 못했을 터다.
“모르는 소리. 글래스턴. 자네는 진정한 남자의 매력을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시큰둥하게 대답한 아서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여기 모여드는 얼간이들과 달리 위스키 맛은 무척 훌륭했다.
“때로는 남자가 더 매력적이지. 배덕하면서도 자유롭거든. 같은 남자로서 욕망을 잘 이해하고 배려심도 깊고. 적당히 즐기고 쉽게 헤어질 수 있지 않나.”
아서는 놈들의 헛소리에 실소했다. 물론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남자는 자극적이고 음란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야.”
놈들의 맹점을 지적했다. 문제는 그 상대의 성별이 아니라 누구냐에 달렸다.
“상대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갑옷을 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타구니를 세우는 게 가능해. 문제는 과연 어떤 점에 매료되냐는 거지.”
아서의 말을 놈들은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걸 이해하는 자라면 여기서 이렇게 무가치한 주제로 시시덕대고 있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 점에서는 아서 자신도 비난받아야 하겠지만.
“자네는 여전히 부정적이야.”
“그래서야 미인을 쟁취할 수 있겠나?”
“손끝도 만져 보지 못하고 패배할 테지. 멀쩡한 물건을 달고서 말이야.”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낄낄대든 말든 아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왕 앞에서 무례한 농담을 던져 대는 광대나 마찬가지였다. 아서가 진심을 비치는 순간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눈치 볼, 하찮은 놈들이었다.
이런 놈들을 상대로 초여름의 뜨거운 나날에 관해 떠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미인이라 한들 데일 가 쌍둥이만 할까?’
그중에서도 남성이라 더욱 희귀한 미인과 몇 차례 몸을 겹쳤기에, 지금 놈들이 하는 얘기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우쭐한 속내를 모르는 그들은 오늘의 방문객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그 얘기를 꺼냈다.
“에뜨와르 드 루이제. 프랑크에서 온 귀족인데. 혹시 아는 이름인가?”
“처음 들어 본 이름이군.”
그때 지배인이 빈 잔을 채우고 재떨이를 갈러 들어왔다. 한 놈이 못마땅한 듯이 아서에게 지배인 흉을 봤다.
“어디에 사는지 물어봐도 도통 대답하지 않는다니까. 누구의 추천인지도 말이야.”
“그게 저희 살롱의 규칙이니까요. 저희는 유력한 분인 사실만 확인하면 다른 건 묻지 않습니다. 사생활도 밝히지 않습니다.”
“지배인의 입이 무겁기에 이 살롱이 오래가는 게 아닌가.”
다른 자가 지배인을 칭찬했다. 지배인의 성향을 잘 아는 놈들이 그렇게까지 물고 늘어지지는 않을 텐데. 오늘은 유달리 집요했다. 또 다른 놈이 또 질문을 던졌다.
“다음에 언제 오는지 정도는 알려 주겠지.”
“그 정도는 말해도 되잖아.”
난감한 듯 옅은 미소를 지은 지배인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음. 화요일 방문을 부탁드렸지만 오실지는 그분에게 달려 있지요.”
“화요일? 그 샌님들 모임이 있는 날 말인가? 미인 다시 한번 보겠다고 끔찍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다른 요일을 권하지 그랬나.”
원성을 듣고서도 지배인은 씩 웃을 뿐이었다.
아서는 지배인의 말에 내심 불쾌했다. 화요일 모임은 처음에는 정말로 문학을 추구하는 창작자의 건전한 토론회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딴에는 권위적인 상류층 문화에 반발한 예술계 새바람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엄격한 기존 예술계에서 밀려나 오갈 데 없는 한심한 패배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변태적인 망상을 늘어놓는 역겨운 모임이었다.
전에 무대와 극장 투자에 관심이 있어서 한번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문학가라는 놈들이 웬 젊은 배우를 하나 데려다가 약을 먹여 기절시킨 다음 토악질 나오는 엽기적이고 무참한 변태 행위를 가하는 걸 보고 발걸음을 딱 끊었다. 멍청한 놈들은 그놈들을 샌님이라고 불렀지만, 아서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샌님은 오히려 화요일 모임의 실체를 모르는 놈들이었다.
‘더러운 놈들.’
화요일의 변태들이 로빈슨 살롱에 드나드는 사실 자체가 역겨웠고 그 때문에 로빈슨에서 뭔가 그럴싸한 놈을 건지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렸다. 그나마 오늘 모인 멍청이들이 가장 건전하다는 점이 우스웠다. 술을 마실 다른 곳을 슬슬 찾아야 할 시점이었다.
‘찰리 윔즈가 모임을 만들자고 했었지.’
위스키를 마시면서 아서는 전에 찰리가 했던 제안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찰리에게 영문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적당히 안면만 유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드니아가 이렇게 무료하다면 그와 모임을 만드는 방법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대신 위스키 모임이었으면 좋겠군. 제안해 볼까.’
아서가 합류하면 찰리는 분명히 다른 사람을 더 모을 것이었다. 엘리엇 데일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물론 평범한 사교라고 그가 호의적일 리 없었다. 찰리 윔즈와 어울린다면 화가 나서 당장 친우 곁에서 꺼지라고 달려들 가능성이 더 컸다.
‘엘리엇과는 특별한 관계가 절대 아니지. 그렇다고 해서 찰리 윔즈와의 평범한 사교까지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 그를 의식하는 시점에서 특별함을 인정하는 거야.’
그 말은 약간 합리와 궤변 사이를 맴돌아 어중간했다. 찰리 윔즈와의 사교가 어떤 장점이 있는지 골몰했다. 최근 그가 교류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짚자 의외의 인물이 떠올랐다.
‘윔즈가 윌리엄 체셔와도 교류하든가.’
체셔 자체는 평범하지만, 그의 고모인 로우드 남작 부인은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명사였다. 윔즈를 통해 로우드 가와도 친교를 맺는 일은 사업상 매우 유리한 점이 분명 있었다.
릴리벳의 남편이 자신이 있는 모임에 있다면 엘리엇은 폭주하는 기관차 같은 속도로 달려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업상 중요한 역할을 할 사교인 만큼 훼방을 받더라도 굳이 시도할 가치는 충분했다.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할 인맥을 고작 시골 농장주 때문에 포기할 순 없지.’
어린 시절 엘리엇이 보이지 않을 때 아서는 릴리벳에게 다가가 야무지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당기곤 했다. 그러면 어린 소녀는 울상을 지었고 거짓말처럼 엘리엇이 나타나 소리 질렀다.
‘내 동생에게 손대지 마!’
화가 난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찌르듯이 쏘아볼 때면 아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저릿했다. 그때 느꼈던 짜릿한 희열은 지금도 유효했다.
‘이번엔 릴리벳의 머리카락을 일부러 당긴 건 아니니. 뭐 화를 내도 상관없지만.’
남은 위스키를 훌렁 털어 넣은 다음 아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 미인에 관해 열띤 토론을 늘어놓는 놈들을 내버려 두고 나오자 지배인이 외투와 실크해트를 꺼내 왔다.
“벌써 가십니까?”
외투 입는 것을 거들어 주는 지배인을 아서는 무감각한 시선으로 봤다. 아무리 관심 없어도 프랑크 귀족 출신이 로드니아에서 나쁜 짓을 당하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화요일 모임. 적당히 하라고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배인이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였다. 뱀 같은 놈이었다. 아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살롱을 나섰다.
오찬 자리에서 남작 부인에게 로빈슨 살롱에서 보고 들은 것을 더도 덜도 없이 딱 그대로 전달했다.
“부유하고 심심한 독신 남자 중에는 그런 저질스러운 자들이 많지. 그래서 미리 알아보고 싶었던 거야.”
남작 부인의 우려는 타당했다. 그런 자들 사이에 윌리엄을 던져 놓는다니. 그렇지 않아도 남에게 휘둘리길 좋아하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자네가 미리 가 봐서 다행이야. 명성 있는 살롱도 그럴 줄 몰랐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배인 말로는 늘 그런 분위기는 아니고 요일마다 다르니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방문해 달라고 하더군요. 한 번 더 가 볼 생각입니다.”
“그것도 괜찮지. 오늘 오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제 친구 찰리 윔즈를 방문할까 합니다.”
“윔즈라면 윔즈 자작 댁의 찰리 말인가?”
“네.”
그 말에 남작 부인이 반색했다.
“아주 매력적인 괴짜 청년이라고 들었네만. 자네 친구인지는 몰랐는걸.”
“노스필드 백작가에서 사냥 시즌마다 붙어 다니곤 했습니다. 로드니아가 너무 심심하고 마땅히 어울릴 사람이 없다며 몇 번이나 저를 초대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만.”
차를 호록 마신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찰리처럼 인기 있는 사람이 심심하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어제 살롱에 가 보고 무슨 얘긴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찰리 윔즈도 자네와 비슷한 부류인가 보군.”
“아마도요.”
“잘되었네.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 가문의 만찬에도 초대해야겠어.”
“아마 기뻐할 겁니다.”
엘리엇이 긍정적으로 답하자 남작 부인은 흡족하게 웃었다.
오후 3시. 약속 없이 다른 집을 방문하기 좋은 시간. 엘리엇은 윔즈 자작 댁을 찾았다.
탕탕.
여느 타운 하우스가 그렇듯이 길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았고 계단 위 검은 대문을 가진 5층짜리 석조 건물이었다. 대문에 달린 황동 노커를 두드리자 집사가 나왔다.
“안녕하신가, 찰리 윔즈를 만나러 왔네.”
“약속하셨습니까?”
“아니. 내 이름은 엘리엇 데일이라고 하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을 닫고 집사가 사라진 얼마 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엘리엇!”
문을 열고 나온 찰리가 와락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모자가 머리에서 흘러내릴 뻔했다. 급하게 모자를 잡으면서 엘리엇은 찰리의 체중을 지탱했다.
“넘어지겠어.”
“미안, 미안.”
찰리가 똑바로 서자 엘리엇은 그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단속한 집사가 엘리엇의 외투와 모자를 받아 들었다.
“자네가 로드니아에 올 줄 몰랐어.”
“당분간 로우드 남작 댁에서 신세 지게 되었네.”
“로우드 남작 부인의 조카가 윌리엄 체셔, 자네 동생의 남편이지?”
“그래. 남작 부인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더군.”
“내 초대는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제일 처음 널 찾아온 거잖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찰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엘리엇을 제가 주로 사용한다는 응접실로 초대했다. 대단한 귀족가라 응접실도 몇 개나 되고 용도에 따라 꾸밈새도 다르다고 했다. 찰리가 이용하는 작은 응접실은 짙은 색 벨벳으로 꾸민 서재 겸 티 룸으로 찰리 친구들이 종종 모이는 장소였다.
안에 들어가자 방문객이 한 명 더 있었다.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엘리엇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개하지. 이쪽은 내 가장 친한 친구 엘리엇 데일일세. 이쪽은 내 또 다른 친구 샤를 랭.”
“안녕하십니까?”
엘리엇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샤를 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갑자기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닦더니 악수했다.
“저는 샤를 랭입니다.”
“프랑크 출신이신가요?”
“네.”
“랭은 극작가 겸 시인이야. 최근 무대에 올린 소품이 찬사를 받고 있지.”
“오호.”
엘리엇이 감탄하자 랭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볼품없는 연극에 불과하죠.”
“그래도 극작가 겸 시인이라니.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랭은 아주 재능 있는 친구야. 하지만 수줍음이 많아서 아무나 만나질 못하지. 그나마 나는 편한지 가끔 내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작품 얘기를 한다네.”
“윔즈 씨는 음악과 미술에 식견이 넓으시고 또 세상을 독특하면서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셔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깨닫고 배우죠. 영감을 주십니다.”
“그거야말로 과찬이야.”
말은 곧잘 하면서도 랭은 수줍은지 눈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찰리가 직접 준비한 찻잔을 받아 든 엘리엇은 랭의 과하게 겸손한 모습을 약간 어색하긴 해도 나쁘지 않게 보았다. 전날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작자들에게 시달린 탓일지도 몰랐다.
“저는 평범한 지주여서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게 느껴집니다만.”
“네? 저는 데일 씨가 분명히 대단한 무용수나 음악가라고 생각했는데요.”
“하하. 무용에도 음악에도 재능이 없습니다. 할 줄 아는 건 온실에서 꽃을 가꾸는 정도지요.”
“그것도 외모와 잘 어울리십니다. 온실의 꽃이라니.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미청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 죄송합니다.”
뭔가 칭찬이 묘했다. 엘리엇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눈을 깜빡이자 찰리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엘리엇. 자네가 순진한 사람을 홀렸군그래.”
“내가 뭘?”
“우리 랭은 시인이라 감수성이 예민하거든.”
“그게 무슨?”
“시인은 감수성이 예민한 만큼 아름다움에 연약하지. 랭이 자네에게 첫눈에 반한 모양인데?”
“그런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랭 씨. 찰리의 농담을 무시해 주세요. 매번 여러 사람이 있는 만찬 자리에서 나에게 구애하면서 남자 친구 운운하는 짓궂은 친구니까.”
“엘리엇은 이렇게 보여도 아주 차가운 얼음 심장을 가졌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엘리엇은 남자에게 가차 없지. 저 자식에게 몇 번이고 차여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내가 보증할게.”
찰리가 심장 언저리를 부여잡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랭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웃는 입매와 달리 눈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엘리엇을 내내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몰래 훔쳐봤다. 이런 사람은 여럿 겪었기에 엘리엇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뭘 할 셈인가?”
“로우드 남작 부인이 상당히 곤란한 부탁을 하신 참이라.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그게 뭔데?”
엘리엇은 랭을 잠시 쳐다봤다. 잠시 어리둥절한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제가 빠져 드리지요.”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랭은 입이 무거운 자라네. 수줍어서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
“뭐 대단한 비밀이라 감출 얘기도 아니니.”
찰리가 일어선 랭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 직후 엘리엇은 남작 부인의 꾀와 로빈슨 살롱 방문 얘기를 털어놓았다.
“로빈슨 살롱? 거긴 랭, 자네가 자주 나가는 살롱 아닌가?”
“예. 주로 화요일에. 요일마다 방문객이 다르고 대화 주제도 좀 다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그 정도로 노골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랭에게 찰스가 동의했다.
“맞아. 나도 화요일에 두어 번 가 본 적 있는데 아주 지루한 문학 토론이었어. 얼마나 어려운 얘기들을 하는지 두통이 생기더군. 그래서 더는 가지 않았지. 다른 요일에 한번 가 볼까?”
“그런 무리와 어울리면 더는 나와 얼굴 대할 생각을 접어야 할걸.”
엘리엇이 미간을 찌푸렸다.
“흠. 로빈슨 살롱보다야 엘리엇 데일이지. 알았네. 앞으로도 로빈슨 살롱에는 가지 않겠어.”
찰리가 손을 들고 선서식으로 말했다. 그러자 랭이 다시 끼어들었다.
“화요일은 괜찮습니다. 참석자 대부분 순수한 문학가들이에요.”
“지배인도 화요일은 괜찮다고 했지만.”
“꼭 방문해 주십시오. 요즘 영감을 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동료들이 많은데 데일 씨가 왕림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 왕림까지는.”
“꼭요.”
원래부터 화요일에 한 번 더 방문할 생각이었지만 랭이 열정적으로 나오자 이상하게도 꺼림칙했다. 그렇다고 해서 화요일 모임에 가지 않을 이유까진 되지 않았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
화요일이 되었을 때 엘리엇은 찰리가 로빈슨 살롱에 같이 가길 기대했다. 하지만 오전에 윔즈 가의 하인이 찰리의 쪽지를 가져왔다.
미안하네. 오늘 살롱에는 같이 못 가겠어. 조부께서 지루한 정치 모임에 같이 참석하지 않으면 내 엉덩이를 걷어차겠다고 엄포를 놓으시지 뭔가. 미안하네. 다음 주에는 꼭 같이 가겠네. 사랑하는 너의 찰리.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엘리엇은 쪽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오빠. 오늘도 살롱에 간다면서?”
“그래. 너희는?”
“오늘 윌리엄과 함께 쇼핑하러 갈 거야. 벳시도 같이. 폴리벳 부인이 부탁한 물건을 사야 한대.”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릴리벳이 기쁜 듯이 웃었다. 윌리엄이 기사처럼 제 아내의 뒤를 지켰다.
“백화점에 가려고.”
“백화점 좋지.”
최근 로드니아의 상류층은 백화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차와 과자를 즐기면서 느긋하게 최고급 물품을 쇼핑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보통은 귀부인과 하녀만 다니곤 하는데 꽤 큰돈을 쓸 때는 부군도 함께 갔다. 윌리엄은 보란 듯이 제 지갑이 든 가슴께를 툭툭 쳤다.
“잘 다녀오게.”
“선물 사 올게.”
“됐어. 내 선물을 살 돈으로 네 것을 사렴.”
엘리엇은 동생의 뺨에 키스하고 윌리엄과 악수했다. 벳시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고 즐거운 듯이 릴리벳 뒤를 쫓아갔다.
잠시 후 남작 부인이 친구와 차를 마시기 위해 외출했고 뒤이어 엘리엇이 나섰다. 좀 일찍 살롱에 들렀다가 분위기가 별로면 빨리 돌아올 속셈이었다.
로빈슨 살롱에 들어섰을 때 엘리엇은 묘하게 무거운 공기를 느꼈다. 전처럼 눈이 매운 담배 연기가 아니라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전에 들렀던 응접실에 들어서자 랭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이제 경.”
전에 얘기했던 바를 기억하는지 그는 엘리엇을 루이제라고 불렀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엘리엇은 그와 악수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에는 반들반들하고 재수 없는 면면이었다면 지금은 랭과 비슷하게 자유분방하면서도 어딘지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기운이 흐르는 부류가 주를 이루었다. 척 보기에도 문학가 같긴 했다.
“안녕하십니까?”
엘리엇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상한 빛이 깃든 눈동자로 엘리엇을 쳐다보기만 했다. 굉장히 짙은 눈빛들이라 묘하게 섬뜩했다.
“앉으시지요.”
“정말 태양신 아포르의 화신 같군요.”
“대단한 아름다움이야.”
그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일전의 한량들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다들 약간 제멋대로입니다. 아무래도 개성이 강한 창작자뿐이다 보니. 그래도 나쁜 자들은 아닙니다. 루이제 경의 미모에 놀란 것뿐이에요.”
“아, 예.”
랭이 별로 달갑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배인은 화요일이 괜찮다고 하더니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태양신이라는 화두에서부터 갖은 문학적 논쟁거리를 들먹였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무의미하고 현학적이어서 머리가 다 아팠다. 게다가 응접실에 자욱한 이상한 운무 때문에 답답했다.
“공기가 이상하게 무겁군요. 독특한 향기가 나지 않습니까?”
“향입니다. 이국에서 들여온 물건이지요. 피우면 긴장이 풀리고 영감을 주곤 해서 화요일마다 피웁니다.”
찰리가 느꼈던 두통의 반은 아마 이 연기가 원인일 것 같았다. 둔한 친구 같으니라고.
“잠시 바람을 좀 쐬어야겠군요.”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을 드시는 편이.”
“아닙니다. 로드니아산 두통약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요.”
엘리엇은 랭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로 나가서 조금 숨을 돌린 다음 엘리엇은 더는 여기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응접실에 들어가서 그만 일어서겠다고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차라도 다 마시고 가시지요.”
진득한 눈빛을 가진 놈들이 그렇게 권하기에 엘리엇은 다 식은 차를 그 자리에서 훌렁 마셨다.
“앞으로 또 오실 겁니까?”
“기회가 닿으면 다음에 또 뵙지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엘리엇은 의례상 인사했다. 그리고 응접실을 나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어?”
살롱 응접실이 빙글빙글 돌더니 갑자기 위아래가 뒤집혔다. 어느새 바닥 카펫이 눈앞으로 훅 다가오더니 쿵 하고 꽤 큰 충격이 엘리엇의 전신을 덮쳤다.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