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8)

3. 노스필드

와인 병과 꽃바구니를 박살 낸 것이 주효했을까. 이후로 아서의 끈덕진 선물이 뚝 끊겼다. 한 방 먹인 것 같아 속이 시원하면서도 때때로 심심하기도 했다.

그때쯤 사냥철이 돌아왔다. 뇌조 사냥 금지령이 풀리는 날짜를 기점으로 로드니아의 타운 하우스에서 기거하는 많은 최상류층이 컨트리 하우스로 찾아들었다.

나이트스톤에서 마차를 타고 반나절 정도 거리에 있는 노스필드 저택은 노스필드 백작의 본성으로, 그는 사냥철 동안 인근 상류층을 모아 거대한 사냥 대회를 열었다.

한가로운 전원생활 중에 가장 사람이 북적거리고 활발한 시즌이므로 많은 사람이 노스필드로 향했다. 초대 명단에는 엘리엇의 이름도 있었다. 사냥철 내내 노스필드에서 머물 예정이었므로 여행 짐이 꽤 되었기에 마차로 이동했다.

노스필드 저택의 광활한 정원을 돈 마차가 현관 계단 앞에 섰다. 엄숙한 하인의 접대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엘리엇을 불렀다.

“여. 친구.”

넓은 현관 포치를 둘러싼 대리석 난간에 걸터앉은 남자는 다름 아닌 찰리 윔즈이었다. 그의 조부는 노스필드 백작의 친구인 윔즈 자작으로 그는 사냥철마다 조부에게 걸려 여기까지 끌려오곤 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사냥철마다 만났고 꽤 친한 친구가 되었다.

“찰리.”

엘리엇은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면서 찰리는 엘리엇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전히 잘생겼는걸. 이번 시즌에는 얼마나 많은 아가씨를 설레게 할 셈인가?”

“어디 자네만 하겠나? 작년에도 여성들의 관심을 모조리 끌어갔으면서.”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건 그냥 내가 재미있는 괴짜기 때문이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실제로 손수건을 가장 많이 받은 건 엘리엇, 너잖아.”

“알고 있었어?”

“물론. 네게 날아드는 손수건이 어마어마해서 대형 범선의 마스트 돛까지 만들 지경이던데.”

“다 실속 없는 짓이야. 내가 그럭저럭 사는 농장 지주인 걸 알면 못된 바람의 실수니 바로 돌려달라고 하는걸.”

“그만하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는 문제가 없잖아.”

“모두 로드니아의 타운 하우스를 꿈꾸니 그게 문제지.”

“더럽고 시끄럽고 날마다 흉악한 범죄가 신문에 나는 그곳? 할 수만 있다면 타운 하우스를 불태우고 싶어. 망할 만찬과 모임도.”

“진심인가?”

“못 할 것 같아?”

“그러니 아직도 자네 조부께서 정정하신 게 아닌가.”

“들켰군.”

찰리는 로드니아에서 태어나서 로드니아에서 자란 전형적인 상류층이지만 사람을 사귀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특히 조용한 전원을 좋아해서 가끔 직접 엘리엇의 장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뇌조를 살해할 셈인가, 친구?”

“한 백 마리쯤?”

“피의 살육자로군. 짐승 피에 푹 절은 미남이라니, 여러 사람이 좋아하겠어.”

엘리엇의 허풍에 찰리가 독설로 받아쳤다. 그는 독특하게도 귀족 문화인 사냥을 끔찍하게 여겼다. 불쌍한 짐승을 먹을 것도 아니면서 재미로 죽여 대는 습성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괴짜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표를 다 채우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왜?”

“몸이 좋지 않아. 초여름에 많이 앓았어.”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군. 아, 물론 병환은 슬픈 얘기지만. 적어도 자네가 총을 쾅쾅 쏴 대는 대신에 내 말벗이 되어 주면 내겐 큰 행운이겠어.”

“뭐 엽총을 가져오긴 했지만. 자네랑 못 어울릴 것도 없지.”

“나도 엽총은 있어. 장전은 안 했지만.”

“그냥 몽둥이로군.”

“토끼 궁둥이를 한 대 때려 줄 수 있겠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둘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거주하는 공간에서도 둘의 방은 가까웠다.

많은 손님이 도착했고 사냥 대회 개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에서 노스필드 백작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제외하면 사냥 대회가 이루어지는 일주일 동안 모든 참가자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서로 친한 사이면 같이 몰려다니고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축은 혼자 다녔다.

남자들이 불쌍한 동물을 죽이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무렵, 여자들은 오랜만에 햇살과 바람을 즐기며 저들끼리 어울렸다. 마음에 든 여자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겠다고 희귀한 사냥감을 쫓는 한심한 놈이 있는가 하면, 점찍은 신랑감 후보에게 어떻게 신호를 보낼까 고심하며 전전긍긍하는 여자도 있었다. 사냥철은 다른 의미로 인간 사냥철이기도 했다.

“다들 기세등등하군.”

“그러게 말이야. 빨리 피하자고.”

찰리와 엘리엇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둘이서만 사냥을 빙자한 소풍에 나섰다. 노스필드에서 제공하는 야외 만찬에도 참석할 생각이 없어 하인에게 미리 부탁해 와인 한 병과 샌드위치도 따로 챙겼다.

노스필드가 소유한 막대한 영지 한쪽은 빽빽한 숲이었다. 기름진 땅에 뿌리를 박은 으리으리한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었고 땅에는 나무가 놓친 햇살을 받아먹는 풀들로 가득했다.

“언제 와도 훌륭한 숲이야.”

“그래.”

찰리는 신나서 말에서 내렸다. 숲에서 말을 달리다가 귀한 말의 발목이 상하면 안 되므로 근처 나뭇가지에 말고삐를 걸어 두었다. 그 뒤를 엘리엇도 따랐다. 찰리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찰리는 와인 병과 샌드위치가 든 봉투를 집어 든 대신에 엘리엇은 엽총을 들었다는 점이었다.

“굳이 그 흉악한 것을 들고 와야겠나?”

“혹시라도 우리가 있는지 모르고 사냥감을 몰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표시는 내야지. 안 그럼 우리가 사냥당할 수도 있거든.”

“그거… 일리 있네.”

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천장이 뚫린 돔처럼 햇살이 쏟아지는 부분이 나왔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하얀 꽃이 잔뜩 피어 있어 곳곳에 나비와 벌이 많이 날아다녔다. 그것들을 점심으로 삼을 생각인 새들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여기가 좋겠군.”

썩은 나무 그루터기에 턱 앉은 찰리는 사냥용 외출복 상의 안쪽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곤충 관찰을 아직도 하고 있나?”

“물론. 평생 할 거야.”

“자네가 로드니아 태생인 게 믿을 수가 없군.”

“생명이라고는 시궁쥐와 바퀴벌레, 그리고 그들 둘의 특성을 다 뒤섞은 인간밖에 없는 도시 출생이나 도리어 이런 것에 매력을 느끼는 거야.”

“그거… 일리 있군.”

찰리가 나비와 벌을 쫓아서 정신 나간 놈처럼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는 사이 엘리엇은 그의 모습을 구경했다.

***

며칠을 둘이서만 숲으로 돌아다녔더니 기어이 노스필드 백작의 전갈이 전해졌다.

찰리, 나를 봐서라도 제발 벌레 꽁무니만 쫓지 말고 만찬에 얼굴 내밀게!

그리고 엘리엇! 자네도 말이야!

휘갈겨 쓴 메모에선 백작의 노고가 드러났다. 분명히 미혼 남성 중에 가장 중요한 손님이면서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찰리 덕분에 골머리를 앓았을 터였다.

“네 덕분에 백작에게 나도 한 소리 듣게 생겼어.”

엘리엇이 탓하자 찰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쪽지를 가져온 늙은 하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오늘 야외 만찬에 두 분 다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도망친다면 다음 사냥감은 두 분이 되실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물론 뒷말은 농담이셨습니다만.”

“망할. 농담으로라도 실제 사냥을 하실 분이야, 그분은. 아마 쇠공을 헝겊으로 감싼 무기를 만들고 새총과 투석기를 동원해서 나를 쫓아오시겠지.”

“그거… 훌륭한 생각이군요. 백작님께 전달해 드리도록 하지요.”

“찰리.”

엘리엇이 친구의 치명적인 실수를 지적하는 사이 하인은 빙긋 살짝 웃으면서 나갔다.

“망했군.”

“엘리엇, 이제 내겐 자네뿐이야.”

“뭐?”

절실하게 붙잡는 찰리의 손을 뿌리치며 엘리엇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매우 엉뚱하고 매우 이상한 짓일 게 분명했다.

야외 만찬에 모습을 드러내자 허연 수염을 아주 맵시 있게 기른 노스필드 백작이 만면의 웃음으로 찰리와 엘리엇을 맞았다.

“오, 찰리. 드디어 왔구나.”

“안녕하세요, 백작님.”

“조라고 부르래도.”

“아니요. 어떻게 백작님을 조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찰리는 한사코 그의 옆자리인 상석을 거부하고 다른 자리로 갔다. 찰리는 자신이 엉뚱해서 인기를 끈다고 생각하지만 틀린 말이었다. 물론 그 덕이 아주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주 미남은 아니라도 장난기 어린 생기 있는 얼굴에 훤칠한 체격, 그리고 어마어마할 유산과 조부의 후광 덕분이었다.

야외에 차려진 만찬 테이블에 앉은 부인들과 아가씨들의 눈길이 노골적으로 찰리를 향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이었다. 정작 본인은 질색하지만.

“이젠 잘생긴 청년이 되었구먼.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지 않을까?”

뼈가 담긴 농이자, 모든 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화제가 느닷없이 던져졌다. 백작은 아주 작정한 듯 보였다.

“전 독신주의자입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바뀌겠지. 그리고 혼자 살면 외로워. 집은 밝고 건강해야지. 현명하고 아리따운 사람이 곁에 있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지, 안 그렇나?”

백작의 물음에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찰리만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엘리엇을 흘끗 봤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같이 살고 싶은 후보를 하나 정해 두긴 했습니다.”

“그래? 누군가? 혹시 이 자리에 있나?”

“네.”

“오.”

백작의 탄성과 함께 엘리엇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질 않았다.

“엘리엇 데일. 나와 평생을 함께해 주겠지?”

“풋.”

몇몇이 마시던 음료를 뿜었다. 하인들이 무표정하게 다가와 냅킨을 내밀었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귀엣말이 커졌다.

“농담하지 마. 찰리. 내가 왜?”

“넌 밝고 현명하고 건강하고. 내가 같이 살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내 의사는 없는 건가? 난 남자보단 여자가 더 좋은데. 남자랑 뒹구는 건… 좀… 혐오스럽거든.”

너무 세게도 그렇다고 너무 나약하게도 칭하고 싶지 않아 말을 고르다가 혐오를 꺼냈다. 그러자 다른 남자들이 같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허어. 꼭 육체적 사랑이 전부는 아니지. 깊은 정신적 교감으로 육체의 불만족을 다 채울 수 있어.”

“아니 그렇다고 한들. 난 자네와 정신적 교감으로 육체적 욕구를 채우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거든.”

“차갑군, 미인이여.”

“난 기왕이면 좀 더 야성적인 쪽이 취향이거든.”

고약한 농담을 맞받아치자 찰리가 두 손을 들었다. 그러면서 기가 찬 듯 광경을 지켜보던 백작을 향해 울상을 지었다.

“보셨죠? 저는 방금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차였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네요. 평생 다른 사람은 눈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쯧쯧. 아직 철이 들지 않았군. 엘리엇에게 궁둥이를 뻥 차인 너를 어느 아가씨가 좋다고 데려가겠느냐.”

백작이 한심한 듯이 혀를 찼다.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다. 결혼 얘기가 쏙 들어가자 찰리는 개의치 않고 웃었다. 고작 그런 농담으로 기분이 상할 위인이 아니었다.

슬슬 만찬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식사 동안 주위에 앉은 사람들과 자잘한 농담을 나눴고 찰리는 백작을 상대했다. 엘리엇 또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통성명하고 사냥터와 날씨로 잡담을 나눴다.

와인을 졸인 소스를 덧바른 사슴 고기 스테이크를 막 한 조각 썰어서 입에 넣는 순간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또 시작이군.’

이런 자리에서 이목을 받는 건 익숙했으므로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어느 댁 아가씨가 또 손수건을 던졌다가 도로 낚아채 갈지 궁금함이 더 앞섰기에 슬며시 웃으면서 시선을 그쪽으로 던졌다.

시선을 던진 상대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비슷비슷한 사냥용 외투를 입은 남자들 사이에서 유달리 큰 체격과 구릿빛 피부가 눈에 띄는 그는 다름 아닌 아서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그가 소리 없이 ‘엘리엇’이라고 불렀다.

“헉.”

너무 놀라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놓쳤다.

쨍그랑.

묵직한 식기가 얇은 도자기 접시를 두드리자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봤다.

“왜 그러나?”

백작의 물음에 엘리엇은 얼른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벌레 때문에요.”

“벌레 전문가라면 여기 있지. 찰리에게 구충을 부탁하게.”

“백작님. 저는 곤충을 관찰하는 전문가지 죽이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엘리엇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식사를 이어 갔다. 아직 상석에 앉은 분들이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일어설 순 없었다.

뺨에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저 망할 놈은 여기 왜?’

아무리 백작이 관대하기로서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말 뼈다귀인지도 모를 놈을 만찬 식탁에 앉힐 리는 없었다. 누군가를 속이거나 혹은 협박으로 초대장을 뜯어낸 게 분명했다.

“여기 새로운 손님이 또 한 분 계시지.”

마치 엘리엇의 의문을 들었다는 듯이 백작이 아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서 글래스턴일세. 우리 곤충 전문가와 비슷한 또래지만 훨씬 사내답고 다부진 사람이지.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내 친구의 유복자를 드디어 찾아냈네.”

“그 글래스턴 씨의?”

누군가 안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여기 계신 분들이 자네의 잘생긴 용모를 잘 볼 수 있게 일어서서 자신을 소개할 수 있겠나?”

“예.”

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고 다부진 체격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끝이 하필이면 엘리엇의 손까지 닿았다. 태양을 등진 그는 잔뜩 찌푸린 엘리엇을 보고 씩 웃었다.

“노스필드 백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 아버지는 해군 대령 제임스 글래스턴입니다. 제 어머니와는 단둘이서만 결혼식을 올리셨기 때문에 글래스턴 가문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사망하신 이후로 글래스턴 가문은 맥이 끊겼죠.”

굵게 울리는 음성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다. 사냥용 외출복보다는 군용 제복을 입었다면 훨씬 잘 어울렸을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덕분에 존재감이 다소 과했다. 그만큼 야외 만찬장에 앉은 사람은 모조리 아서에게 빠져들었다. 단 한 명, 엘리엇을 제외하고.

“저도 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자랐습니다만, 어머니께 물려받은 증표를 우연히 백작님께서 보고 알아주셨습니다. 만약 백작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제가 사생아인 줄 알았을 겁니다.”

그쯤에서 놈은 일부러 말을 끊고 연회에 참석한 모두를 쭉 둘러보았다. 사생아라는 말에 사람들이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들이 안타까움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걸 보고 엘리엇은 아니꼬움에 배알이 뒤틀렸다.

‘어딘가에서 어쭙잖은 웅변 방법을 배웠군.’

“저는 글래스턴 가를 다시 이어 갈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해 주신 백작님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성을 되찾고 다시 망한 가문을 다시 열었다는 부분에서 박수가 터졌다. 업적을 칭송받은 백작도 흐뭇한 미소로 손을 들어 감사에 답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난 후 만찬의 주인공은 단연 아서 글래스턴이었다. 평생 사생아일 줄 알았던 사내가 사실은 꽤 명망 있는 가문의 마지막 유복자라는 점이 대단히 낭만적으로 들렸을뿐더러, 사생아 시절도 역경과 고난의 범벅이라는 백작의 말에 모두가 호기심을 가졌다.

상류층의 삶은 틀에 박혔다. 2월에 열리는 사교 시즌에는 로드니아에서 연일 정치 싸움과 쇼핑, 만찬으로만 시간을 보내다가 여름엔 경마와 조정을 즐기고 늦여름에는 각자 컨트리 하우스로 흩어져 사냥철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잠시 가을을 본가에서 보내다가 다시 겨울이 되면 로드니아의 타운 하우스로 가는 것이다. 변수라고 해 봐야 해외여행이 다였다. 그것도 뻔히 정해진 코스에 늘 보던 지인과 함께 가기 일쑤였다.

그런 중에 만난 사람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가문을 되찾은 사생아 출신의 거부라니. 얼마나 흥미로운 얘기인가. 무료한 생활에 지친 노인들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낭만을 꿈꾸는 젊은이 모두 아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대륙에서 무슨 방법으로 부를 쌓으셨나요?”

“어쩌다가 내기 포커로 광산 지도를 얻었습니다. 상대는 반쯤 미치광이였는데 그걸 일 실링에 팔았죠. 당시 저에게는 거금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산을 파러 갔습니까?”

“네. 혼자서 광산을 찾으러 갔지요. 식량과 곡괭이. 그리고 약간의 화약과 삽이 제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만약 광맥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대로 갱도를 터트려서 제 무덤으로 삼으려고 했죠.”

“휴우. 잘되셨으니 이렇게 글래스턴 씨를 만날 수 있었겠지요?”

“네.”

놈의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어서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귀에 쏙쏙 박혔다. 심지어 찰리마저 그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만찬 자리인데 정작 만찬에 집중하는 사람은 엘리엇뿐이었다.

“네. 한 달하고도 열흘 되는 날. 첫 광맥을 캤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슨 광산인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금인가요? 아니면 은?”

“루비와 다이아몬드입니다.”

“오오오.”

탄성이 터졌다. 백작이 그 말을 거들었다.

“글래스턴은 대단한 거부일세. 로드니아에 근거지를 둔 은행 여럿을 쥐락펴락하지. 게다가 다른 광산도 있다면서?”

“예. 금강석을 팔아서 번 돈을 계속 다른 광산에 투자했지요. 실패도 있었지만 수익을 충분히 내는 광산도 있습니다. 금광이나 은광 같은 귀금속도 좋지만, 요즘은 석탄과 철광석도 꽤 팔립니다. 얼마 전엔 광물을 운반할 선박 회사와 철도 회사에 투자를 했습니다.”

“광산주에 은행가, 그리고 선주에 이젠 철도까지 소유했다니!”

누군가 감명을 받았는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였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요즘 같은 시절엔 돈을 무시할 수 없었다. 상류층의 우아한 생활을 보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돈이었다.

집안에 딸만 있는 그저 그런 귀족 방계에게는 아서 글래스턴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그걸 알기에 백작도 자랑스럽게 그를 사냥 대회에 초대하고 만찬 자리를 내어 주었으리라.

“지금은 어디서 사시나요? 글래스턴 본가를 도로 찾으셨어요?”

“글래스턴 본가는 불타 버렸고 흔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 부지는 구매하여 제 소유입니다만 다시 짓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죠. 그동안은 쏜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쏜힐이라면?”

그 말에 찰리가 괜히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자네 장원 근처가 아닌가?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인상적인 요새 말이야.”

“그랬나?”

“전에 같이 말을 타고 구경 간 적도 있는데. 거기에 글래스턴 씨가 살다니. 굉장한 우연인걸.”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입니다. 윔즈 경. 제가 자란 고향이 바로 거기니까요.”

“그래요? 그렇다면 엘리엇과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찰리.”

엘리엇이 주의를 주었지만 호기심이 강한 친구는 멈추지 않았다.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었다. 이쪽에 던져진 의뭉스러운 시선이 매우 불쾌했지만 엘리엇은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놈을 마주 쏘아봤다.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데일 씨?”

빌어먹을. 아서 놈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사실을 밝히려고 들었다. 놈에게 설명을 맡기느니 자신이 먼저 입을 여는 게 나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여기 계신 아서 글래스턴 씨는 원래 아서 렌튼이라는 이름으로 저희 장원에서 지내셨습니다. 물론 부도덕한 사건에 연루되어 안타깝게 떠나야 했지만 말입니다.”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그 여파는 전혀 간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시선이 이젠 엘리엇을 향해 따갑게 꽂혔다.

“두 분이서 같은 곳에서 살았다고요?”

“부도덕한 일이라면?”

“그게 무슨 소린가? 자세히 설명해 보게.”

백작도 궁금했는지 재촉했다. 엘리엇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아서를 향해 비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호기심 가득한 주변 사람들과 백작을 쭉 둘러봤다.

“아서 렌튼 씨, 아니 이젠 글래스턴 씨가 된 분의 유달리 발달한 신체와 조숙함이 불러온 참사였지요. 그 이상은 제 가문의 명예를 위해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뉘앙스인지 알아들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아서에게 꽂혔다. 엘리엇 덕분에 그는 신비로운 부자에서 약간 추잡하고 신비로운 부자가 되었다.

“함정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아서는 은근한 미소와 함께 되받아쳤다. 하지만 엘리엇을 노려보는 눈빛에서 불똥이 튀었다.

“저는 쌍둥이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쌍둥이는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함께 자란 만큼 서로를 향한 집착이 유다른 점이 있다고들 하더군요. 특히나 그 쌍둥이가 무척이나 예쁜 소녀였다면 저라도 바늘에 찔린 살쾡이처럼 날뛰었을 겁니다. 그 덕에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저는 안락한 집에서 쫓겨나 불행한 길을 걷게 되었지만.”

다시 맥을 끊은 아서는 꽤 애수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사기꾼다운 연기력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전 이렇게 부자가 되었고 그로 인한 인연으로 제 친부의 성함을 찾았지요. 그래서 어린 소년의 치기 어린 장난이 불러온 불행에 감사합니다.”

“오, 모든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는 역경이 있지. 글래스턴 씨의 역경은 여기 있는 바로 내 친구였군요. 동생을 향한 자네의 집착이 좀 다른 점이 있다곤 생각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대단했군그래.”

“찰리!”

“역경치고는 꽤 매력적인 점이 이야기의 흥미를 더해 주죠.”

아서가 놓치지 않고 찰리의 말을 받았다. 거기에 백작까지 끼어들었다.

“맞아. 엘리엇이라면 훌륭한 악당 역이 될 수 있지. 훌륭한 용모에 가정 교육, 가슴 아픈 어둠이 공존하니까 말이야.”

찰리와 백작이 갑자기 너스레를 떨었다. 엘리엇은 대화의 흐름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지만 즐거운 만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억지로 웃었다.

“지나간 일입니다. 물론 돌아가신 양부께 실망을 끼친 데 용서를 빌 기회가 영영 오지 않겠지만, 후회와 슬픔은 제가 감당할 몫이지요.”

그 말에 찰리가 참지 못하고 또 끼어들었다. 망할 자식. 사냥 대회 내내 같이 어울려 준 대가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 엘리엇이 매서운 눈초리로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찰리는 참지 않았다.

“엘리엇. 아서에게 외숙부가 묻힌 묘지로 안내하지 그러나?”

“가족 묘지야.”

“아서도 가족이잖아.”

“글래스턴 씨가 언제부터 자네 친구가 되었나? 아서라니.”

“지금부터죠.”

그 말에 아서가 와인 잔을 들어 찰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찰리는 좋다고 일어섰다.

“자자, 우리의 멋진 탕아 아서 글래스턴이 돌아온 것을 환영합시다. 건배.”

“건배!”

모두가 즐거이 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엘리엇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붉은 와인은 들이켜면서 아서는 즐거운 듯이 엘리엇을 관찰했다.

빌어먹을 자식.

***

만찬이 끝나자마자 엘리엇은 바로 자리를 피했다. 마침 새로운 등장 인물에게 흥미가 대단하신 찰리와 다른 젊은이들이 달려들었다. 엘리엇이 어디로 가든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개자식.”

찰리와 함께 찾았던 그루터기가 있는 공터까지 간 엘리엇은 발로 썩은 나무 둥치를 냅다 찼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언제부터 백작과 친분이 있었단 말이야.”

“몇 년 됐어. 은행 주주로서 만났으니까 말이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분명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놈이 몇 걸음 거리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게다가 그런 속 보이는 거짓말은 뭐지? 넌 빈민가 세탁부의 자식이잖아. 아비는 옆 골목인 매음굴을 찾던 술주정뱅이였고!”

“목소리를 낮춰, 엘리엇 데일.”

한순간에 다가온 아서가 엘리엇의 팔을 낚아채 비틀면서 으르렁댔다. 일그러진 짙은 눈썹에선 아까와 같은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홱.

팔을 뿌리친 엘리엇은 마침 들고 있던 엽총의 개머리판을 놈의 명치에 대었다.

“내게 함부로 손대지 마.”

“너야말로 그 독사 같은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지 마시지. 내 어머니는 원래 평범한 목사의 딸로 가정 교사로 일했어. 웬 외지 놈의 꼬임에 빠져 도시로 무작정 도망치는 바람에 비참하게 사셨지만.”

“모든 매춘부는 그럴싸한 사연이 있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아서는 제 가슴에 닿은 엽총을 팍 쳐 내고 손을 내밀어 엘리엇의 멱살을 잡았다.

“기어이 혓바닥이 잘려야 입을 닥칠 건가?”

“너야말로 대가리에 바람구멍이 나기 전에 손 떼.”

엘리엇은 엽총 총구를 놈의 턱 아래 대었다.

“어디 쏴 봐.”

“못 할 줄 알고?”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지만 적어도 장전을 하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레버가 당겨지지 않았다. 놈에게 멱살이 잡혀 들린 채라 고개를 내릴 수 없어 눈만 최대한 아래로 내리떴다. 그러자 어느 틈에 레버를 꽉 누르고 있는 놈의 손이 보였다.

“난 총에 익숙하다고 전에 말했잖아. 어설픈 사냥꾼 제압하는 건 쉬워.”

“그래? 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가르쳐 주던가?”

“빌어먹을 엘리엇! 네 혓바닥은 사탄의 혀보다 더 사악할 거다.”

서로의 이마가 거의 닿을 지경이었다. 아서는 분노에 활활 불타는 눈으로 쏘아봤다. 좁은 동공과 짙은 홍채 안에 엘리엇이 비쳤다. 아서의 자존심을 긁는 데 열중하는 악의 가득한 얼굴이.

“술주정뱅이가 아니라고?”

“그래. 술주정뱅이였어. 술로 도박으로 가산을 모조리 탕진한 퇴역 대령이었지. 글래스턴이라는 성은 거짓이 아니야.”

“아하.”

엘리엇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이젠 사생아라 부르지 못하겠군. 대신에 주정뱅이의 아들이라고 불러야 하나?”

“구두를 신은 발로 자지와 구멍을 혼내 달라고 애원하는 매춘부 놈에게 그런 말을 들어 봤자 별로 기분 상할 것도 없어.”

“네놈이 먹인 아편 때문이잖아!”

“아편을 먹는다고 모두가 다 그렇게 음탕해지진 않아.”

아서가 이죽거렸다.

“거짓말이야. 네놈의 말은 모조리 다 위선이고 거짓말이야.”

“못 믿겠으면 네 친구 찰리 윔즈에게 물어보시지. 로드니아에서 산다고 하니 아편의 효능 정도는 잘 알 거다.”

“찰리에게 떠넘기지 마. 그를 내버려 둬.”

“이젠 릴리벳도, 너도 아닌 찰리까지 내버려 둬야 하나? 왜?”

“내 친구에게 더러운 짓거리를 하면….”

멱살을 떨치려 몸을 비틀면서 동시에 엽총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서의 힘은 무지막지해서 엘리엇이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힘의 차이는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 순간 엘리엇은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응징이 떠올랐다.

“찰리는 날 친구라고 부르던걸? 네 친구만은 아니란 거… 큭!”

퍽!

뒤로 힘껏 뺀 발을 그대로 놈의 정강이에 처박았다.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놈은 멱살을 계속 잡고 있었다.

퍽!

두 번의 발길질로 드디어 놈이 나가떨어졌다. 몹시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찡그린 놈의 손아귀에 힘이 풀리자마자 엘리엇은 멱살을 뿌리치고 엽총까지 온전히 쥘 수 있었다.

철컥.

레버를 당겨 탄약을 제대로 장전한 엘리엇은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금방이라도 쏠 자세를 잡았다.

“아서. 네놈이 렌튼이 아니라 글래스턴이 되었다고 해도 내게는 여전히 개자식이야. 그건 잊지 마.”

“빌어먹을. 엘리엇. 넌 성질 좀 죽여.”

“흥. 네놈은 음흉한 짓거리부터 집어치우시지.”

“내가 뭘?”

“하찮은 물건을 더는 보내지 않아서 무슨 꿍꿍이인가 했더니 사냥 대회를 노리고 있었나?”

다리를 털고 제대로 일어선 아서는 밀쳐지면서 구겨진 옷을 툭툭 털었다.

“나름 호의의 표현이었는데 그걸 썩은 퇴비로 만든 건 너야. 다른 것도 값이 나갔지. 특히 인도산 향신료는 굉장히 귀해서 같은 양의 금이랑 값이 동일해. 그것마저 벌레 먹이로 뿌리다니. 미친 자식.”

“네가 준 건 천상의 향료라도 내겐 쓰레기야.”

“이번에 잘 알았어. 어쨌든 사냥 대회에 초대받은 건 술수가 아니다. 네가 순순히 나를 만났다면 그 자리에서 얘기했겠지.”

“하. 찾아온 적도 초대한 적도 없으면서 뭔 개소리를 해.”

그 말에 아서는 불퉁하게 답했다.

“찾아가면 바로 쫓아냈겠지. 그래서 초대장을 보냈는데.”

“초대장? 거짓말 마. 쪽지는 봤어. 물론 버렸지.”

“보낸 선물이 바로 초대장이었어.”

“뭐?”

“네가 분명히 화가 나서 쏜힐로 달려오리라 여겼어.”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다니.”

억지로 비웃음을 지었지만 아서의 지적은 분명히 타당했다. 몇 번이나 쏜힐로 달려갈 뻔했다. 그를 직접 상대하기 껄끄럽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랬을 텐데.

“넌 항상 예상 밖이야. 그래서 골칫덩이지.”

“누가 할 소릴.”

“어쨌든 여기서 싸우고 싶진 않으니 그만 돌아가겠다.”

총구를 아직 겨눈 중인데도 아서는 두렵지도 않은지 몸을 돌렸다. 무방비한 놈을 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오인 사격이나 총기 사고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은 꽤 일어나는 편이었다. 여기서 아서를 쏜다고 해도 엘리엇에겐 변명의 여지가 많았다.

그는 장신의 남성이 커다란 나무 몇 그루를 지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끝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젠장.”

방아쇠에 얹은 검지가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아까 만찬 중에 놈이 늘어놓았던 가식적인 연설이 엘리엇의 미약한 죄책감을 자극했다.

아마 훗날 오늘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총구를 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확연히 기울었을 무렵 엘리엇은 빨리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늦더위가 한창이지만 그래도 사냥 대회가 시작된 때인 만큼 밤에는 약간 쌀쌀했다. 오늘따라 괜히 식은땀이 나고 속이 좋지 않았다.

“저는 이만 쉬겠습니다.”

“왜 그러나? 이 즐거운 날에?”

“총성을 잔뜩 들었더니 머리가 아파서요.”

“자네도 우리 친애하는 찰리 윔즈처럼 괴짜로군. 사내가 총성이 싫다니.”

“찰리와 어울리다가 물들었나 봅니다.”

백작에게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찰리는 아서와 함께 다른 사람들과 열띤 대화 중이었다. 막 자리를 벗어날 때 언제 눈치챘는지 찰리가 따라붙었다.

“엘리엇? 벌써 들어가려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그럼 나도 같이 돌아가지.”

“윔즈 경. 뭇 사람들을 홀려 놓고 이렇게 내빼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자넨 즐거운 광대 노릇을 해야지.”

“사랑하는 자네가 없으면 재미없어. 매정해.”

찰리는 짐짓 어깨에 머리를 대면서 징그러운 짓거리를 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엘리엇 데일에게 반한 독신주의자 찰리 윔즈 노릇을 계속할 모양인 듯싶었다. 괜한 만남 주선을 피하기 위한 농담이자 방패였지만,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방해꾼 취급 당하는 입장에선 살짝 짜증도 났다.

“그래? 그럼 이거면 되겠나?”

엘리엇은 그런 그의 허리를 잡고 뒤로 확 꺾었다.

“어?”

반사적으로 엘리엇의 어깨에 두 팔을 둘러 매달린 찰리를 향해 과감하게 고개를 숙인 엘리엇은 머리카락이 찰리의 이마에 닿을 거리에서 입술로 쪽 소리를 일부러 냈다. 입술이 닿진 않았지만 멀리서 보면 대단히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 터다.

연극배우처럼 과장스러운 동작 끝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찰리를 벌떡 일으켜 주었다. 깜짝 놀란 친구의 등을 툭툭 치며 사람들 앞에 내세웠다.

“자, 사랑의 키스를 받았으니 괜찮지? 제가 쉬는 동안 제 외롭고 겁 많은 남자 친구를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놀란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남자 친구 놀이의 우위가 엘리엇에게 넘어왔다.

“당했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찰리는 황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엘리엇을 툭 쳤다. 엘리엇은 그를 향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가서 광대 노릇이나 열심히 하라고.”

“이 복수는 나중에 톡톡히 할 거야.”

“얼마든지.”

손을 올리면서 엘리엇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찰리가 무리에 합류하자 사람들은 “엘리엇이 주도하는 관계였나?”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저는 제가 주도하는 줄 알았는데요. 음,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윔즈 경에게 웨딩 가운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코르셋 만들 때 여자 것보다 고래 뼈가 여럿 더 들어가겠죠. 돈이 많이 들겠어요.”

“배처럼 큰 슬리퍼는 어떻고.”

짓궂은 농담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유독 한 사람만은 순수하게 웃지 못했다. 찰리를 향했던 그의 시선은 이윽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엘리엇의 등에 꽂혔다.

***

숙소는 별관 1층 끝에 있었다. 엽총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총기 관리 하인에게 넘겼다. 숙소에서 총기 휴대는 금지였다. 아주 옛날 막돼먹은 놈이 우글거리던 시절에는 불의의 사고를 빙자한 살인이 흔했다. 그 때문에 대단한 저택에선 모두 총기를 따로 맡아 보관했다. 덕분에 엘리엇도 아서 놈에 대한 걱정을 아주 약간 덜기는 했다. 문만 잠가도 놈이 나타날 일은 없을 테니.

슬슬 잠자리 준비가 시작된 즈음이라 새 시트와 베개를 들고 나르는 하인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엘리엇을 보고 정중히 고개 숙였다.

방은 적당히 크고 안락했다. 향을 먹인 침대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사냥터와 반대쪽에 있는 방이라 바깥 소음이 없었다. 들리는 건 간간이 오가는 하인들의 구두 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울림뿐이었다.

사냥용 외출복을 벗자마자 욕실에 들어가 몸을 닦았다. 식은땀이 제법 났다. 개운하게 씻은 후에 실내용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소파에 몸을 구겨 넣었다.

샤워를 하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지만 오산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아무래도 아까 먹은 사슴 고기가 문제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스테이크를 먹을 때 느닷없이 튀어나온 그 자식 때문이겠지.’

위장이 꽤 놀란 듯 명치가 답답했다. 소화제, 그게 없으면 두통약이라도 필요했다.

종을 울려 하인을 불렀다.

“혹시 소화제나 두통약이 있나?”

“네. 둘 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하인이 나가고 난 뒤에 엘리엇은 쾅쾅 울리는 관자놀이를 지긋하게 누른 채로 기다렸다.

똑똑.

“들어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문이 열리고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앉은 자리에서 손이 닿을 거리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에 쟁반을 놓는 소리가 났다.

“소화제를 먼저 주게.”

약병을 따는 소리와 함께 잔에 물이 따라졌다. 뒤이어 가루약이 스르륵 부어졌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내밀자 유리잔이 닿았다. 그걸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한 번에 끝까지 마신 뒤에 도로 내밀었다.

“두통약과 물은 두고 가게.”

그만 가라는 손짓을 했는데도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엘리엇이 앉아 있는 커다란 1인용 소파에 가까워졌다. 고급 벨벳으로 푹신하게 감싼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엘리엇은 짜증이 치솟아 눈을 번쩍 떴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계속 있는 거냐는 질문은 뒤이은 “아서.”라는 이름 속으로 사라졌다.

“네가 왜?”

“위장병인가? 안색이 좋지 않아.”

무례하게도 아서는 손으로 엘리엇의 턱을 만지려 들었다. 닿기도 싫어서 고개를 홱 돌리며 거리를 벌렸다. 공중에 뜬 손이 갈 곳을 잃더니 이내 의자 팔걸이를 짚었다.

“여긴 왜… 설마!”

눈에 약병과 하얀 가루가 조금 묻은 유리잔이 걸리는 순간, 엘리엇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서를 확 밀친 다음 제가 마신 잔의 냄새를 맡았다.

“무슨 약을 먹인 거지? 또 아편인가?”

“아니. 하인이 가져오던 위장약이야.”

“그걸 믿을 것 같아?”

“물어보든가.”

“얼마든지.”

엘리엇은 종을 흔들었다. 그러고도 하인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해 문을 벌컥 열고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방으로 오던 하인과 마주쳤다.

“이게 뭐지?”

“음, 유리잔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얀 가루약 말이야. 뭐냐고?”

“저희 백작님께서 사용하시는 특제 위장약입니다. 로드니아에 있는 주치의에게 특별히 지어 온 것으로, 백작님의 분부에 따라 손님께도 같은 약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직접 들고 오지 않았지?”

“글래스턴 씨가 문 앞에 계시기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직접 가져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문설주에 어깨를 기댄 아서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마치 광대놀음을 구경하는 태도였다.

“아니 됐네. 사람을 확인하지 않고 무턱대고 받아먹은 내가 잘못이지.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 없네.”

“감사합니다.”

하인의 실수도 덮어 두겠다는 뜻이었다. 하인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비켜.”

방문을 막고 선 놈을 밀치면서 들어온 엘리엇은 쟁반 위에 잔을 도로 놓았다. 주전자와 막 딴 것으로 보이는 작은 일회용 유리병을 제외하고 다른 갈색 병 하나가 더 있었다. 백작이 사용하는 두통약 같았다.

백작이 사용하는 특제 위장약의 놀라운 효과 탓인지 혹은 개자식의 등장으로 놀라서 위장이 갑자기 운동을 시작한 탓인지 명치의 답답함은 한결 나았다. 하지만 머리는 더욱 아팠다. 특히나 금방 떠날 기세가 아닌 놈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갈색 약병을 집어 들었다. 그걸 본 아서가 입을 열었다.

“나라면 그건 마시지 않을 텐데.”

“네 불쾌한 낯짝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머리가 아파서 말이야.”

“흠. 난 경고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엘리엇은 두통약이 든 병을 열어서 단숨에 털어 넣었다. 가루 형태인 위장약과는 달리 쓴 액체 제형인 두통약은 상당히 익숙한 맛이 났다.

익숙하다고 해서 고약한 약 맛이 달갑지는 않으므로 엘리엇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손에 든 약병을 쏘아봤다. 잔에 물을 따라 입을 헹군 다음에 아서에게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큰 탈이라도 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군.”

“네가 바로 내 상황을 악화시키는 병균이니 정말로 내 건강이 걱정되거든 썩 꺼져 줘.”

“그러도록 하지.”

막 걸음을 떼던 아서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내 방은 반대쪽 복도 끝이야. 혹시 필요하면 찾아와.”

“그럴 일 없어. 아니, 알려 줬으니 그쪽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을 거야.”

“그래.”

뭐가 재미있는지 아서는 씩 웃었다. 막 문을 지나려는 놈에게 문을 닫고 가라고 하자 순순히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혐오스러운 낯짝의 주인공은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다시 돌아봤다.

“혹시 찰리 윔즈와 정말 그런 관계는 아니겠지?”

“뭐?”

“분명히 장난 같긴 한데. 그렇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잖아. 게다가 넌 아주 음탕하고 외설스러운 취향을 가지고 있고.”

“닥쳐! 조만간 네놈의 입 안에 엽총으로 바람구멍을 내 주지. 그래야 그따위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지 못하겠지.”

성큼성큼 다가간 엘리엇은 문을 잡고 쾅 닿았다. 놈의 손가락이 살짝 끼인 것 같긴 했지만, 그야 엘리엇이 알 바가 아니었다. 만약 끼었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었다.

문밖에서 느껴지는 아서의 기척이 점점 멀어졌다. 방이 복도 반대편이라더니 틀린 소리가 아닌 듯싶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놈이 정직해서가 아니라 지나가는 하인 누구에게 물어봐도 방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찾아가긴. 말도 안 되는 소리.”

엘리엇은 코웃음을 치면서 소파에 도로 앉았다. 속은 한결 편안해졌지만 머리를 여전히 지끈거렸다. 빨리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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