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으… 음.”
바윗덩이에 짓눌려 몸이 산산조각이 난 게 분명했다. 목 아래가 무감각했다. 분명히 숨은 쉬고 몸은 움직이는데 너무 나른해서 꼼짝도 못 했다.
마른 모래알처럼 자꾸 흐트러지는 정신을 억지로 끌어모았다. 입 안이 바싹 말랐고 목이 아팠다.
“무… 물.”
인기척이 다가왔다. 눈을 다 뜨지 못한 채 엘리엇은 심한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타인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켰다. 입가에 차가운 물이 닿았다.
꿀꺽꿀꺽.
신선한 물을 아주 달게 마셨다. 목과 머리에 남은 열기와 반대로 사지는 으슬으슬했다. 무감각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맨다리에 휘감기는 천의 감촉이 낯설었다.
“몇… 시?”
“곧 자정이다.”
대답하는 음성이 무척 낯설었다. 벳시는 아니고 콥스도 아니었다. 아니, 콥스는 아직 나이트스톤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끼가 낀 돌멩이처럼 굳은 뇌가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여… 긴?”
침대의 낯선 감촉. 달갑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 힘이 아예 빠져 버린 알몸. 순간 엘리엇은 제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떠올랐다.
벌떡.
딴에는 벌떡이었다. 완전히 풀려 버린 근육이 주인의 명령을 완수했다면 그대로 침대 아래로 펄쩍 뛰어내렸을 터다. 하지만 게을러 빠진 신체는 그저 한 번 꿈틀했을 뿐이었다.
“지금 일어나는 건 무리야. 아편 효과가 다 가시지 않았어.”
“아… 편….”
불쾌한 설명을 듣고서야 엘리엇은 현 상태의 원인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동시에 지독한 두통을 가져왔다.
“빌어… 먹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놈은 물 잔을 다시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많이 탔기 때문에 엘리엇은 얌전히 잔을 받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때문에 주변에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반나체로 그 난동을 피우니 감기 기운이 들지.”
“난동?”
“기억이 안 나나? 미친 사람처럼 세 번 연속으로 빼더니 기름을 허벅지와 엉덩이에 문지르면서 헐떡였잖아. 회음을 누르는 데 고환이 거슬린다면서 잘라 버리고 싶다는 걸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켜서 말렸지.”
물을 마시다가 풋 뱉었다. 입을 벌린 그대로 얼어붙었다.
“개… 소리.”
“왼쪽 뺨.”
아서가 오른손 검지로 제 뺨을 톡톡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따라서 손끝을 들어 왼쪽 광대뼈 언저리를 더듬었다. 무딘 손끝이 닿자 욱신거렸다. 피부가 살짝 도톰한 것이 부은 게 분명했다.
“완전 미친놈이더군.”
“네가 강제로 먹인 아편 때문이야!”
“고작 한 번 세 방울로?”
아서가 대놓고 비웃었다.
“원래는 기분이 좋아지고 빠르게 잠에 빠질 뿐이야. 평소에 흉측한 욕망을 품고 있었으니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거지. 추잡하고 더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거짓… 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물이 반 남은 잔을 보조 탁자에 놓으려다가 놓쳤다.
쨍그랑.
법랑을 바른 잔이 바닥을 뒹굴었다. 물이 침대 밑에 깐 카펫을 적시자 아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엇은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꽤 애쓴 끝에 굴러떨어지듯 침대 아래로 내려오는 데 성공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뭐 하는 거야?”
“돌아가겠어. 이 빌어먹을 가시나무 성에 조금도 더 있기 싫어.”
“나는 마차나 마부를 내어 주지 않을 거야.”
“내 말. 내 말을 탈 거다.”
침대 기둥을 잡고 벌벌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슬렀다. 셔츠가 밑으로 쏟아지면서 국부를 스쳤다. 헛바람을 들이킬 정도로 쓰라렸다. 이를 꽉 깨물고 끙끙 앓았다.
“껍질이 벗겨지도록 문지르고 짜 댔으니 아플 만도 하지. 그 상태로 용케도 말을 타시겠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상스러운 욕을 억지로 삼켰다. 걷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 발짝도 떼어 보지 못하고 엘리엇은 침대에 도로 엉덩이를 걸쳤다. 음경보다 덜해도 엉덩이도 쓰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내가 물수건으로 닦아서 그 정도야. 도대체 수음에 허브 오일을 한 병 다 쓰는 미친 새끼가 어디 있나.”
물수건질을 했다는 부분을 애써 무시했다. 시선을 회피하면서 입술을 비틀었다.
“저따위 흉악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놈도 말이지.”
“어쨌든 네 덕분에 흥이 다 날아갔어. 침대는 빌려줄 테니 며칠 쉬었다가 가. 그 꼴로 마차든 말이든 탔다가는 지옥을 맛보겠지.”
“아주 친절하시군. 혹시라도 내게 감사 인사를 받을 심산이라면 집어치워. 그 망할 대가를 치르느라 이렇게 되었으니까.”
그 말에 아서가 곁눈질했다.
“뭔가 착각하나 본 데 너는 제대로 값을 치르지 않았어. 혼자서 즐긴 게 다였지. 난 오히려 네 수발을 들어야 했고.”
“뭐? 네 요구를 따라 치욕스러운 짓을 그렇게 했는데도?”
“예쁘장한 머리통은 역시나 장식품에 불과한 것 같군. 우리 거래를 떠올려 봐. 나는 널 범할 거라고 했어. 그런데 내가 네게 손끝 하나라도 댔던가?”
“그건….”
말이 턱 막혔다.
“난 경험 없는 남자의 뻑뻑한 틈에 성기를 집어넣어 스스로를 고문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흥분해서 날뛰는 짐승과 몸을 겹치기도 싫어. 그러니 네놈이 매음굴의 프리마 돈나처럼 음탕해진 뒤로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더러운 돼지 새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베개를 집어 놈에게 던졌다. 하지만 힘이 모자라 베개는 침대 끝에 툭 떨어졌다.
“쉬어. 쏜힐의 아침은 이르니까 지금부터 자야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을 거다.”
“이 악마의 소굴에서 편히 쉬라니? 불가능한 걸 원하는군.”
“그럼 뜬눈으로 지새우든가. 나는 자러 가겠다.”
무거운 커튼은 이미 드리워져 있었다. 아서는 탁자 위에 놓인 등불을 들었다.
“나이트스톤에는 네가 여기서 며칠 머문다고 미리 연락했어.”
불편한 친절이 끝까지 이어졌다. 문에 박힌 단검을 빼 든 아서는 다시 한번 치욕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엘리엇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등불을 들고 방을 나가자 사방이 껌껌해졌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주먹으로 침대를 내려치며 욕설을 뱉었다.
“더러운 새끼.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혼자 남자 꾹꾹 참았던 울분이 차올랐다. 눈시울이 금방 뜨끈해졌다. 손바닥으로 양 눈을 문지르면서 얼굴을 베개에 처박고 떨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갑자기 신세 질 외숙부의 낯선 얼굴을 봤을 때도, 외숙부의 건방진 양아들이 괄시했을 때도. 이렇게 비참하고 서럽지는 않았다.
“개자식. 지옥에 떨어져.”
차디찬 눈물이 흘러나와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에 스며들었다. 자존심이 박살 나고 자랑스러웠던 남성성이 진창에 뒹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사랑하는 릴리벳의 안녕을 위해서 엘리엇은 앞으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그것도 증오하는 아서의 손에.
기분은 밤새 뜬눈으로 울분을 토하며 빌어먹을 사생아 놈에게 어떻게 앙갚음을 할지 궁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친 몸은 수마를 거부하지 못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피로가 한결 가셨다. 가랑이는 여전히 쓰리고 몸에 힘이 없긴 했지만, 산산조각 난 사지의 감각이 살아 있긴 했다.
닫힌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백색인 것으로 보아 해가 뜬 지 오래된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리엇이 있는 방은 잠들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하고 정적이 감돌았다.
“쏜힐의 아침은 이르다더니.”
잠을 잔 자신이 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지만, 사사건건 거짓과 위선을 늘어놓는 쏜힐의 주인을 생각하니 저절로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욕을 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딴에는 예의를 차리는 꼴이 더욱 역겨웠다.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았건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야 아서 ‘저주받을’ 렌튼이지. 아, 이젠 글래스턴이라고 했나?
“드디어 일어났군. 이 게으름뱅이야.”
“아픈 사람은 늦잠을 자도 괜찮아.”
아서는 들고 온 커다란 은색 덮개를 씌운 쟁반을 방 안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창가로 가서 무거운 커튼을 홱 걷었다.
“눈이 아파.”
갑자기 빛이 쏟아지자 안구가 욱신거렸다. 손으로 빛을 가리면서 오만상을 찌푸리자 아서는 고소한지 낮게 조소했다. 하여간 재수 없는 새끼였다.
“수프와 빵, 그리고 설탕을 뿌린 달걀 요리다. 삐진 어린애처럼 자존심 세우느라 굶어 뒈지겠다는 유치한 짓거리는 삼가길 바란다.”
“여기서 유치한 게 누군지.”
받아치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아서는 쟁반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조끼 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갑을 꺼냈다.
“연고야. 알아서 바를 수 있지?”
“아주 고맙군그래. 감동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비아냥거리자 아서는 엘리엇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음탕하기 짝이 없는 미친놈이 스스로 제 자지를 망가뜨리고는 그 탓을 내게 돌릴까 봐 겁나서 그런 거니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뺨과 귀가 뜨끈해졌다.
“닥치고 꺼져.”
유치한 말싸움이 더는 싫어서 베개를 집어 던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날아가서 놈의 가슴에 닿았다.
턱.
손쉽게 받아 낸 아서는 똑같은 빠르기로 그걸 도로 엘리엇에게 던졌다.
퍽.
난폭한 짓에 베갯잇이 망가졌는지 하얀 깃털이 몇 개 삐져 나왔다.
“물건을 망가뜨린다면 철저히 비용을 청구할 거야. 식사비에 약값도.”
즐거운 듯이 놈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눈에는 장난기도 비쳤다. 엘리엇은 더욱 분통이 터졌다.
“더러운 수전노 새끼.”
“얌전히 있으라는 뜻이다.”
반목은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타인에게는 호감으로 비칠 행동이 서로 간에는 비아냥에 불과했다. 엘리엇은 아직 지난밤의 처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일시적으로 약해진 상대를 맞아 악마의 낫 같은 혓바닥을 실컷 놀리던 비겁자는 이내 사라졌다.
쏜힐에서 제공하는 것은 어느 것도 취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미 놈의 침대를 한껏 누리고 있던 참이었다.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신화에 나오는 마왕의 아내와 같은 저주를 받아 여기에 발이 묶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탁자로 갔다. 가랑이가 여전히 쓰라렸다. 그래도 어젯밤처럼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은색 덮개를 열자 수증기가 물씬 올라왔다. 금방 만든 음식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좋은 우유와 치즈, 고기를 푹 끓여 만든 수프에서 맛있는 향이 풍겼고 빵은 부드러워 보였다. 달걀도 아주 알맞게 조리되었다.
“설탕을 뿌리다니.”
달걀에는 보통 후추나 소금을 뿌린다. 잼이나 허브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데일 가에서는 설탕을 뿌렸다.
아주 어린 시절, 위장이 약한 아기였던 엘리엇이 상한 마멀레이드를 잘못 먹고 토한 이후로 잼을 못 먹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해 주셨던 별난 요리였다. 이후 건강해지고 잼을 마음껏 먹게 된 후에도 가끔 설탕을 뿌려서 먹을 때가 있었다. 갑자기 울적하거나 괜히 으슬으슬한 기분이 들 때 그랬다.
“설탕을 뿌려 먹는 이상한 입맛이라고 놀릴 때는 언제고.”
잊고 있었던 사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설탕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달걀 요리에 얹었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놈이 웩 토하는 시늉을 했었다. 젖도 못 뗀 아기라고 입 모양으로만 얘기하면서 제 달걀 요리에는 자랑스럽게 검은 후추를 뿌렸다.
“약을 올리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반응하는 자체가 치욕임을 잘 알지만, 발가락 사이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짜증 나는 도발에 몸서리를 쳤다.
어제저녁부터 굶은 터라 몹시 허기졌다. 음식 거부는 옳지 않았다. 먹지 않으면 이 망할 개새끼에게 한 방 먹일 방법을 궁리할 체력이 모자라지 않겠는가.
의자에 앉은 엘리엇은 준비된 식사를 기꺼이 먹어 치웠다. 아서가 놓고 간 연고도 사용했다. 정제한 고래기름을 굳힌 것과 비슷한 제형의 연고에서는 은은한 약 냄새가 났다.
아직 셔츠만 입은 상태였기에 한쪽 발을 의자 위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밑이 휑하게 열렸다.
“빌어먹을.”
망할 변태 놈 때문에 별난 곳에 별난 연고까지 발라야 한다니. 혼자 있는데도 수치심이 차올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듬뿍 떠서 항문에서부터 음경까지 처덕처덕 발랐다. 제법 쓰라렸지만 그렇다고 너무 조심스럽게 바르기도 민망했다.
진득한 연고 때문에 저절로 어기적대며 걸었다. 침대에 계속 누워 있기도 답답했고 바지도 못 입는 상황에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엘리엇은 자연스럽게 창가로 향했다.
고장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수처럼 파란 하늘에는 군데군데 하얀 적운이 피어올랐고 햇살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투명 커튼처럼 살랑였다.
멀리 나이트스톤이 보였다. 이 방에서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날마다 노려보며 치졸하고 불쾌한 복수나 꾀하고 있었나 보군.”
이 방을 사용하는 의도가 너무 명확해서 실소가 터졌다. 제가 저지른 갖은 악행은 생각지도 않고 마땅한 벌을 억울하게 여기는 꼴이라니.
“더러운 사생아 새끼.”
똑같이 고아였다. 똑같이 자식 없는 외숙부의 집에서 더부살이했다. 그런데 아서 놈은 고작 몇 년 먼저 외숙부와 살았다는 이유로 친자식 행세를 하려 들었고, 실질적으로 외숙부의 유일한 혈육인 엘리엇과 릴리벳을 침입자 취급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 감히 양부를 운운했으리라.
저주를 퍼붓기 무섭게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이 아니라 엘리엇이 서 있는 창문 바로 아래에서 불쑥 나타났다. 창문이 현관 위에 있는 듯했다.
아서는 모자도 없이 셔츠와 조끼 차림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흰 자갈을 깐 드라이브 웨이 외에는 볼품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황량한 정원이었다. 토질이 나빠 아주 튼튼한 토착 식물만 살아남을 수 있는데, 이곳을 고향이라고 여기는 놈이 그런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웬 모종순을 들고서 가당찮은 작은 삽으로 정원 주변을 파고 나약한 식물을 심는 꼴을 보고 조소했다.
지주의 근본은 농업이었다. 요즘은 금융업이나 제조업을 한다고도 하지만 돈이나 물건을 만드는 천한 행위는 지주의 몫이 아닌 상민의 몫이었다. 지주는 어디까지나 영지를 가꾸며 위대한 자연으로부터 성과를 얻어야 했다. 그건 수십 명의 종을 부리는 대귀족에서부터 제가 직접 곡괭이질을 해야 하는 가난한 신사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소유한 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신성한 의무였다.
대단위의 농토는 영지 내에 거주하는 노동자층에게 소작을 주고 또 전문적인 정원사를 고용하여 넓은 정원을 관리했다. 그래도 농업과 원예의 근간은 지주로서 꼭 쌓아야 하는 필수 교양이었다. 사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서 ‘망할’ 글래스턴 놈은 그런 걸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계절에 저 꽃을 심으면 당장 말라 죽을 텐데.”
그가 무엇을 심는지 빤히 보였다. 여름에 심는 꽃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른 봄에 심어야 했고, 본래 가을이 적기였다. 흔한 원예서를 하나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저런 짓은 안 할 터였다.
“천박한 놈.”
알량한 돈놀이로 재산을 불린 천박한 벼락부자면서 지주 행세를 하려고 드는 게 우습고 하찮았다. 반쯤 썩어 가는 정원이야말로 아서 ‘뒈져 버릴’ 글래스턴에게 잘 맞는 풍경이었다.
정원에서 시답잖은 헛짓거리를 해 대더니 아서는 다시 사라졌다. 이내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났다.
똑똑.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아서가 들어왔다.
“식사는? 다 했군.”
도로 덮어 놓은 은색 뚜껑을 굳이 열어서 빈 접시를 확인한 아서는 뭐가 좋은지 빙긋 웃었다.
“설탕 뿌린 달걀 요리는 마음에 들었나? 특별히 신경 써서 요리사에게 지시한 건데.”
“너도 먹어 보지그래? 또다시 시커먼 후추 덩어리에 절인 달걀을 삼키려다가 기도에 후추가 튀면 폐를 토해야 할걸.”
어린 시절 설탕 친 달걀로 놀림을 받았을 때 다음 식사 자리에서 놈의 후추 병을 손봤다. 와륵 쏟아진 후추로 범벅이 된 달걀을 삼키느라 놈은 죽을 만큼 기침을 해 댔다.
“후추라니? 달걀엔 소금 약간이면 충분해.”
아서는 미간을 찡그렸다. 반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정말로 후추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달걀 후추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 건가?”
“무슨 멍청한 짓을 했던 모양인데. 하찮은 앙갚음을 일일이 기억하는 건 불알이 작은 놈만 하는 바보짓이야.”
“뭐?”
“뭐 네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니 화낼 거 없어. 네 가랑이 사이에 달린 두 알이 얼마나 크게 부풀어 올랐는지 똑똑하게 봤거든.”
“더러운 입 닥쳐! 사소한 앙갚음을 잊지 않고 일일이 끌고 나오는 건 너잖아! 아서!”
버럭 고함쳐도 아서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창가에 선 엘리엇을 향해 다가왔다.
“생각난 김에 보여 주지 그래. 연고가 제대로 듣지 않으면 정말로 의사를 불러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럴 일은 없어. 그리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네 몸뚱이, 특히 구멍은 현재 내게 저당 잡혀 있을 텐데?”
“역겨운 말 좀 그만할 수 없어? 아무리 천박한 태생이라도 이제는 한 저택의 주인이 되었는데 말이지. 교양 수준이 미미해도 천박한 습성은 뻔뻔한 허세 뒤로 숨길 수 있잖아. 그렇게까지 저질스럽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어?”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건데 아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을 심술궂게 뒤튼 놈이 위협하듯 지껄였다.
“네놈 앞에서는 부호에 저택 주인이 아니라 한낱 사생아가 아니었나?”
그러더니 바싹 다가와 엘리엇의 위쪽 팔뚝을 잡았다. 떨치기 전에 아서가 먼저 힘을 썼다.
휙.
거칠게 돌려세운 덕분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두 팔로 창틀을 짚었다. 동시에 커다란 상대의 양손이 엘리엇의 장골에 닿았다. 헛바람을 들이키자마자 놈이 엘리엇의 엉덩이를 뒤로 뺐다.
“개자식! 놔!”
이대로 강간당할 거라는 생각에 엘리엇이 발작하듯 제자리에서 튀었다.
“가만히 있어. 부은 곳이 제대로 가라앉았는지 확인해야겠으니, 꽁지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날뛰지 좀 마.”
“누굴 망아지라고!”
“듣기 그러면 반 거세마라고 불러 줄까?”
놈의 혓바닥은 정말로 악마도 저주를 퍼부을 만큼 저열했다. 차마 맞받아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놈은 빠르게 움직였다. 들썩이는 엘리엇의 뒷머리를 꾹 눌러 상체를 굽힌 다음에 한 손으로 늘어진 셔츠 자락을 등허리로 끌어 올렸다.
“다리 벌려.”
맨발 사이로 들어온 구둣발이 안쪽 복숭아뼈를 제법 아프게 쳤다. 반사적으로 발을 옆으로 옮겼고 그러면서 가랑이가 공중에 드러났다. 휑한 곳에 공기가 들이닥치자 저도 모르게 엉덩이 옆이 움푹 파이도록 힘을 주었다.
“아직 새빨개. 약을 더 발라야겠어.”
“직접 하겠다.”
“안 보이니까 제대로 안 발랐잖아. 엉덩이 밑 부분도 온통 발진이라고. 짓물러서 고름이 나는 구멍 따위는 사양이야.”
막말을 퍼부은 아서는 약통을 가져왔다. 잠시 풀려난 사이에 놈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여전히 난폭한 아서는 엘리엇을 완전히 제압했다.
턱.
창틀에 엎드린 자세로 매달린 엘리엇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서는 그사이 엉덩이를 벌리고 약을 발랐다. 스스로 바를 때보다 훨씬 덜 아팠지만, 차라리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픈 편이 나았다.
“빌어먹을.”
저절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놈의 손가락이 엉덩이를 스치고 허벅지 뒤쪽을 꼼꼼히 더듬더니 이내 은밀한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아서!”
다급하게 외쳤지만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끈끈한 연고가 부어오른 주름과 회음, 그리고 고환까지 발렸다. 머리를 창틀에 처박은 자세 덕분에 밑으로 늘어진 음경 뒤로 구릿빛 피부를 가진 커다란 손이 움직이는 광경이 보였다.
‘젠장. 젠장!’
이를 꽉 깨물었다. 낯이 뜨거워 당장 터질 것만 같았다.
“네 물건에는 네가 직접 발라. 손이 닿지 않는 뒤쪽은 내가 발라 주지. 값을 치를 때까지 내 소유니까 말이야. 약을 하루 세 번. 듬뿍. 약이 떨어지면 새 약을 주겠다.”
마치 암소의 뒷구멍에 팔을 넣어 제대로 새끼를 배었는지 확인하는 수의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턴 아서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엘리엇은 놈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지옥에나 떨어져.”
“흥.”
그는 쟁반을 챙겨서 문을 나서면서 잠시 엘리엇을 뒤돌아봤다. 엘리엇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고 씩씩댔다. 당장 놈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밤에 다시 오지.”
탁.
문이 닫히고 엘리엇은 다시 혼자 남았다.
“죽어! 미친 변태 자식!”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악을 썼지만 빌어먹게도 아무것도 던질 만한 것이 없었다. 통나무를 깎아 만든 묵직한 의자나 침대를 박살 내기에는 아직 하체가 아직 온전치 못했다.
잘게 떨리는 눈가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꽉 쥔 주먹이 부들거렸다. 계약에는 의연하게 대처하려 했다. 하지만 방금 당한 치욕까지 넘어갈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개자식. 반드시…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핏발이 선 채로 이를 꽉 깨물었다. 훗날을 기약할 필요도 없었다. 이 차가운 쏜힐이 그에게 어울리는 무덤이 되리라. 엘리엇은 치욕과 울분을 삼키면서 제 손을 내려다봤다.
맑은 하늘에 주황빛 노을이 번져 갈 무렵이었다. 남쪽에서부터 비구름이 몰려왔다. 스산한 바람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밤에 비가 오겠군. 창문 단속을 잘하게. 마구간에도 알리고 말이야.”
“네, 주인님.”
서재에 등불을 켜기 위해 온 길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간 뒤에 아서는 노을과 아직 여린 등불 빛에 의지해 장부를 보았다.
갓 사춘기에 들어설 무렵. 고향에서 쫓겨나자마자 아서는 무작정 로드니아로 향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생각난 김에 옛날 어머니와 살던 빈민가를 돌아보기로 했었다. 거기서 우연히 선원을 모집하는 무리를 만났고 그들을 따라 대륙을 오가는 상선을 탔다.
구토와 멀미와 쥐와 괴혈병으로 점철된 지옥 같은 나날이 끝난 후 새로운 대륙에 닿았다. 거기서도 풍토병과 벌레, 그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다. 기회의 땅은 조금만 멈추거나 게으름을 피워도 바로 죽어 나자빠지는 생지옥이었다.
빨리 뒈져 버릴 거라는 저주와도 같은 주변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아서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광산주가 되었다.
퀸 메리 산에 있는 금광석 광산의 생산량이 꽤 늘었습니다.
원래 거래하던 곳에 여유분을 다 보낼까요? 아니면 다른 곳으로 보내길 원하십니까?
세인트 로렐에 있는 금광이 예측대로 점점 맥이 마릅니다. 지금은 흑자지만 곧 적자로 돌아설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신대륙에 있는 회사의 관리인이 보내온 정산서와 보고서를 꼼꼼히 훑은 다음 그 숫자를 장부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고갈을 앞둔 광산을 돈 많은 얼뜨기에게 비싼 값에 팔아 버리고, 금광석 광산에서 나온 다이아몬드 여유분은 로드니아에 근거지를 둔 유명한 보석 회사로 보내라고 했다. 얼마 전에 긴 줄다리기 끝에 좋은 가격에 판매 협상을 끝낸 보석 회사였다.
정리하고 보니 요 반년 사이에 자산이 또 훌쩍 불었다. 투자한 다른 회사들도 성과를 보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손해가 날 것 같으면 빠르게 채권을 팔아 치웠다.
영리한 투자를 위해서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의 면면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덕분에 낮보다는 밤이 더 익숙하며 정면에서 당당하게 인사하기보다는 그림자에 숨어 사람을 관찰하는 은밀한 조직과 깊은 연이 있었다.
조직의 편지도 도착했다. 프랑크의 남부 휴양지에서부터 보내온 새로운 소식을 빠르게 훑었다. 놀란 신혼부부가 평화롭고 한가로운 휴양지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는 내용이었다.
“흐음.”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
엘리자베스 ‘릴리벳’ 데일에게는 좋은 기억만 있었다. 그 아이는 정말로 상냥하고 착했다. 처음 만난 날이 아직도 생생했다.
릴리벳은 꼭 도자기로 빚은 인형 같았다. 예쁜 금발 고수머리에 고운 리본을 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드레스 위에 하얀 앞치마를 한 채로 돌아다니는 작은 아가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멍청한 짓을 거듭했다.
괜히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고 드레스를 들춰 보기도 했다. 풍성하게 부푼 치마 아래 뭘 받쳐 입은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내 동생에게서 냄새나는 손, 치워!’
난데없이 나타난 다른 애가 바락바락 성질을 부렸다. 릴리벳과 거의 비슷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금발 고수머리를 짧게 깎았고 또 아서처럼 반바지를 입은 아이였다.
‘넌 못 말리는 말괄량이인가 보지? 사내아이처럼 구는구나.’
‘이 망할 자식이!’
멍청한 오해였다. 쌍둥이라고만 알고 있었기에 둘 다 여자애인 줄 알았다. 그 덕분에 엘리엇에게 손을 깨물리고 머리카락을 한 움큼 뜯겼다. 달콤한 꿀처럼 생겼으면서 보통 사나운 놈이 아니었다.
이후로 아서와 엘리엇은 앙숙이 되어 사사건건 싸워 댔다.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군.”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자신도 변한 줄 알았는데. 엘리엇 데일 앞에 서기만 하면 아서는 늘 10대 소년으로 돌아갔다. 아니, 좀 바뀌었나? 그때는 순수한 호기심과 악의뿐이었는데 지금은 야릇한 희열이 더해졌다.
다른 이는 어떤지 몰라도 아서에게 승자로서의 희열은 성욕과 직결되었다. 오랫동안 이를 갈아 온 상대에게서 느끼는 승리감은 최상의 최음제였다. 보통은 적당한 상대를 찾아서 해결하지만, 이번에는 그 상대가 엘리엇 데일이 될 터였다.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역겹기보다는 즐거웠다.
낮에 잔뜩 부은 엘리엇의 가랑이를 억지로 만졌다. 약을 바른다는 핑계로. 사실 약은 엉덩이와 허벅지 뒷부분에도 충분히 발려 있었다. 하지만 얇은 셔츠만 입은 그가 창가에 선 채로 창백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걸 알아차린 순간, 창틀에 가린 음란한 하체의 자태를 떠올리고 말았다.
붉게 부푼 하얀 피부 위로 제가 뿌린 허연 정액이 미끄러지던 그 허벅지를. 생각만으로도 사타구니가 뻐근해졌다.
턱.
펼친 문서와 편지, 장부를 정리했다. 일어서서 등 뒤에 있는 책장 한가운데를 툭 쳤다. 비밀 장치가 작동해서 스프링을 튕겼다. 아래위로 나란히 붙은 책장 두 칸이 스르륵 옆으로 열렸다.
안에는 금고가 있었다. 묵직한 검은 문을 당기자 수표 뭉치와 금화, 그리고 권총이 보였다. 그 안에 장부와 중요한 서류를 넣은 다음 금고를 잠그고 다시 책장 문을 밀어 닫았다.
조끼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를 꺼냈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친애하는 엘리엇 데일 씨와의 식사 시간이군.”
이미 요리장에게 저녁 식사는 2인분으로 따로 쟁반에 차리라고 했다. 이제 슬슬 저녁을 같이 먹어도 좋은 사이가 아닌가.
물론 엘리엇은 유치하게 스푼을 지렛대 삼아 빵 조각을 아서 쪽으로 튕기겠지만. 엉덩이에 뿔이 난 망아지를 길들이는 작업도 이 황량한 저택에선 굉장히 재미있는 유희에 속했다.
부드럽게 풀어지도록 푹 삶은 고기에 데친 채소와 으깬 감자, 그리고 설탕을 듬뿍 뿌린 달걀 요리를 담은 쟁반을 건네받은 아서는 무거운 쟁반을 가뿐히 들고 2층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하는 이유는 순전히 엘리엇이 부적절한 모습으로 있다가 자신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사전에 기척을 내기 위함이었다.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녁이다.”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쟁반을 방 중앙 탁자에 놓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엘리엇이 보이지 않았다. 빈방을 확인한 순간 철렁했다.
“엘리엇?”
혹시나 침대 뒤에 숨어 있을까 싶어서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음?”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뭔가 두꺼운 밧줄 같은 것이 휙 날아와 아서의 목을 낚아챘다.
“컥!”
반사적으로 손으로 목에 감긴 걸 뜯었다. 하지만 뒤에서 무시무시한 힘으로 잡아당겨 그러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줄의 조임을 느슨하게 만들려고 저절로 등과 허리가 점점 뒤로 꺾였고 덩달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눈을 부릅뜨자 줄을 쥔 채로 안간힘을 쓰는 엘리엇이 보였다.
“뒈져.”
“커… 커억.”
단순히 못된 장난을 넘어선 행위였다. 목을 조이는 줄을 교차해 당기는 엘리엇의 일그러진 눈매와 꽉 깨문 입술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엘리엇은 정말로 살인을 저지를 태세였다.
공중을 휘젓던 아서는 교살의 위기를 느끼고 무시무시한 힘을 냈다. 지옥 같은 신대륙에서 목숨을 부지하도록 해 주었던 삶을 향한 집착. 그것이 아서를 움직였다.
“큭.”
벌어진 턱을 꽉 닫았다. 제 손톱에 목이 화끈하게 긁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손가락을 꽉 조인 줄 사이에 집어넣었다. 줄을 단단히 잡은 후 아서는 상체를 힘껏 앞으로 숙였다.
들썩.
얼마나 악을 썼는지 엘리엇은 아서의 등에 업힌 채로 계속 줄을 잡아당겼다. 그 상태로 아서는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쿵!
“헉!”
아서와 벽 사이에 끼인 엘리엇은 큰 헛바람 소리를 냈다. 동시에 줄을 잡아당기던 손에 힘이 살짝 빠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서는 얼른 공간을 벌려 고개를 빼냈다.
“허억. 허억. 허억.”
“개새끼!”
버둥거리는 놈의 사지를 등으로 꽉 누른 뒤에 줄을 확인했다. 보통 배에서 쓰는 밧줄보다 굵은 줄은 엘리엇의 바지를 빙글빙글 꼬아 만든 듯 보였다.
“놔! 떨어져!”
엘리엇은 약간 움직이는 발로는 아서의 종아리를 차고 한 손으로는 뒷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잡아 뜯었다. 손톱이 피부를 드륵드륵 긁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겨 목이 꺾이게 한 다음 드러난 쪽에 이를 박아 넣었다.
“큭!”
등 뒤로 팔을 뻗어 무시무시한 기세로 목을 물어뜯는 놈의 머리채를 꽉 잡은 다음에 바닥으로 확 패대기를 쳤다.
“억.”
쿵!
바닥에 넘어진 놈은 아서가 손으로 물어뜯긴 자국을 확인하는 사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완전히 악령에 씐 놈 같았다.
“뒈져!”
푸른 눈에 붉은 핏발을 세우고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놈의 멱살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그리곤 다른 쪽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내리쳤다.
퍽!
한 번 더.
퍽!
“커억.”
입술이 터져 침과 함께 붉은 피가 흘렀다. 아서의 주먹에도 묻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놈을 질질 끌어 침대가로 데려갔다.
쿠당.
창문과 가까운 침대 끝 판자를 향해 엘리엇을 집어 던진 아서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발길질을 했다.
퍽!
“커어억.”
배를 제대로 얻어맞은 엘리엇은 눈을 뒤집으며 뒹굴었다. 그사이 아서는 기습으로 인한 충격과 물어뜯긴 통증이 불러오는 분노에 휩싸여 엘리엇이 바지로 만든 밧줄을 집어 왔다.
“네겐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군.”
아직 힘을 쓰지 못하는 놈의 양팔을 잡아 밧줄로 침대 기둥에 묶었다. 교묘하게 교차해 단단히 묶은 매듭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풀리지 않을 터였다. 신대륙에서 범죄자를 묶어 독충이 우글거리는 숲에 버릴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무…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엘리엇은 피가 섞인 침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아서를 노려봤다. 아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놈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이 미친 새끼야. 얼마나 두들겨 맞아야 네 처지를 깨달을 거지?”
“죽을 만큼 패도 네놈에게 굴복할 일은 없어.”
제 팔을 몇 번 당겨 매듭의 단단함을 깨달았는지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화가 난 모습으로 입 안에 고인 침과 혈액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뱉었다.
퉤.
제 뺨에 튄 뜨끈한 액체가 아래로 스르륵 떨어지는 걸 느끼는 순간 아서의 마지막 이성이 툭 끊겼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제가 사용하는 방에서 아편 팅크를 가져왔다. 익숙한 갈색 병을 본 엘리엇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갑자기 황망하게 바뀌었다.
“더러운… 읍읍!”
철썩.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놈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그래도 저항의 눈빛은 생생했다. 아서는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철썩.
“푸.”
벌어진 입에서 피가 튀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으로 턱관절을 꽉 잡은 다음 아편 팅크 뚜껑을 깨물어 열었다.
“우웁! 웁!”
저항하는 놈의 목구멍으로 병째 들이부었다. 대부분은 턱을 따라서 흘러내렸다. 그래도 적지 않은 양이 목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아편 팅크를 반병쯤 소진한 다음에야 아서는 놈을 놓아주었다.
쿨럭쿨럭.
놈이 시커먼 액체를 토했다. 기도에 들어갔는지 미친 듯이 기침을 하는 모습을 아서는 냉정한 눈길로 지켜봤다. 이윽고 기침이 멎자 엘리엇은 핏발 선 눈으로 아서를 노려봤다.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 언젠가 내가 산 채로 불에 태워 버릴 테니까.”
“기대하지.”
이죽거리자 엘리엇은 그나마 자유로운 양발로 아서를 향해 발길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몸부림은 아까보다 훨씬 느렸다.
발기한 음경이 공중을 향해 힘차게 솟아올랐다. 아직 약간의 붉은 기가 남은 그것은 엘리엇이 허리를 뒤틀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흔들흔들했다.
“흐윽… 큭….”
손찌검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뺨은 음경 끝을 덮은 매끈한 귀두처럼 새빨갰다. 단순히 얻어맞은 탓만은 아니었다. 열이 올랐는지 송골송골 솟아오른 땀방울이 흐르는 관자놀이와 양 귓불도 온통 양귀비 색이었다.
“자지가 너무 가려워… 뜨겁고… 뒷구멍에…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아.”
탄탄한 허벅다리를 끌어모아 음경을 비벼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엘리엇은 등을 침대 판자에 기댄 채로 두 팔이 기둥에 묶인 무리한 자세 덕분에 종종 균형을 잃었다.
“큭. 손… 손을 풀어… 아… 죽을 것 같아.”
“안 뒈져.”
“아서… 제발….”
눈가에 물기가 어려 촉촉했다. 핏기와 열기가 오른 엘리엇은 부드러운 금발 고수머리를 제 어깨와 팔뚝에 비비면서 몸을 꼬았다. 주먹에 맞아 터진 입술을 깨물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수음하고 싶어. 손으로 만지고 싶어. 제발… 아서.”
애처로운 애원이 이어졌다. 절절한 교태를 보자니 아서의 분노를 비집고 욕정이 슬슬 차올랐다.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더니 꽉 조인 사타구니에 갇힌 음경이 압박 때문에 한층 뻐근하고 아팠다. 하지만 아서의 분노는 욕정에 뒤지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매서운 눈으로 음탕하게 엉덩이를 조였다가 풀며 어떻게든 성욕을 해소하려고 애를 쓰는 엘리엇을 노려봤다.
쿠당. 덜썩. 퉁. 쿵.
발꿈치를 들었다가 힘없이 바닥을 내려치거나 무릎으로 어떻게든 허벅다리 안쪽을 비벼 보려 하면서 때때로 엘리엇은 뒷머리를 침대 판자에 찧었다.
탄탄한 다리가 경련하기를 여러 번, 엘리엇은 온통 흐트러진 표정으로 아서를 보며 다시 애원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서를 향한 분노가 사라지고 이상한 욕망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아편 팅크에 완전히 취해 푸른 눈이 완전히 흐려졌다.
“풀어 주지 않을 거면… 네가 어떻게 해 봐.”
“내가? 내가 뭘?”
“네가… 내 자지를 잡고 위로 아래로 문질러 줘. 불알을 비틀어 잡고 꼬집어도 좋아. 제발. 나한테 화가 났잖아. 그러니까 마음껏 괴롭혀도 좋아.”
“완전히… 돌아 버렸군.”
덩달아 아서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붉은 혀로 제 입술을 핥던 엘리엇은 발을 억지로 뻗어 발가락 끝으로 아서의 발목을 간지럽혔다.
“제발… 아서… 내가 밉잖아… 그러니 마음껏 해… 구두를 신은 발로 내 자지를 밟아도 좋아. 구멍을 차도 좋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해 줘. 제발… 제발… 아서.”
분홍색이었다가 힘을 주는 바람에 하얗게 변한 엄지발톱이 아서의 바지 아래로 들어와 발목 살을 긁어 댔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면서 사타구니가 비명을 지를 참이었다.
“아서….”
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뒤로 넘어간 의자가 쿵! 하고 사납게 넘어졌다.
“흣.”
놀랐는지 음란한 촉수 같은 두 다리가 흠칫하면서 물러났다. 반쯤 누운 자세로 다리를 접는 바람에 국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혼자서 흘린 선액과 땀에 젖은 붉은 계곡을 보는 순간, 아서는 인내라 칭하던 자학을 멈췄다.
음탕하게 몸부림치는 엘리엇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렇게 유혹했으면서 막상 다가가자 무서웠는지 엘리엇은 흠칫 떨면서 뺨에 닿으려는 손을 피했다.
아서는 순간 명치에 보이지 않는 찬바람의 칼날이 꽂힌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검지를 살짝 굽힌 다음 툭 튀어나온 관절 끝으로 엘리엇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으음.”
엘리엇은 불안한 시선으로 아서를 관찰했다. 천천히 손등 전체로 부푼 뺨을 쓸어내렸다.
“후우.”
엘리엇은 불안한 호흡을 연거푸 뱉었다. 셔츠 아래 배가 크게 들썩였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뺨을 시작으로 아서는 그의 턱과 목을 쓰다듬었다. 무릎을 꿇고 앉느라 부풀어 오른 아서의 허벅다리에 엘리엇의 안쪽 복숭아뼈가 조심스럽게 닿았다. 불길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치솟았다.
“더는… 때리지 않을 텐가?”
“얌전히 군다면.”
“그럼 내 자지를 만져 준다고 약속하면… 얌전히 있겠어.”
“약속하지.”
“그러니까… 좀 아프게 말이야.”
매음굴의 오랜 유령도 하지 않을 만큼 외설적인 요구에 아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리고 손으로 꺼떡거리는 엘리엇의 음경을 거머쥐고 꾹 쥐어짰다.
“악!”
쿵.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엘리엇은 정수리를 침대 판에 박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음경에 가해지는 압박이 더욱 급했는지 허벅지를 꽉 닫아 아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파… 서 기분 좋아… 더….”
조심스럽게 쓰다듬어도 모자랄 만큼 흥분한 성기를 거친 손바닥으로 마구 주무를 때마다 엘리엇은 이미 붉은 뺨을 더욱 붉히면서 허리를 뒤틀었다. 손목을 누르는 허벅지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얌전히 있겠다고 했잖아.”
다급함에 으르렁대면서 자유로운 손으로 엘리엇의 발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구부러진 무릎이 엘리엇의 가슴팍에 닿았다. 가위처럼 벌어진 가랑이 아래 고환이 보였다.
“허억허억.”
무릎이 가슴을 압박하자 엘리엇은 숨이 차는지 헐떡였다. 발목을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어 그것을 아서는 제 어깨 위에 올렸다. 탄탄한 근육이 붙은 늘씬한 종아리가 저절로 뺨 언저리에 왔다. 이를 박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서… 빨리….”
“기다려. 이 음탕한 놈아.”
음경을 쥐어짜면서 다른 손으로 고환을 꼬집고 비틀었다. 다른 남자라면 으레 비명을 지를 법한 짓인데도 아편에 취한 엘리엇은 좋다고 난리였다.
“윽! 더! 크윽! 좋아! 그렇게!”
바란 적도 없는 요란한 응원이 터졌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엘리엇의 일그러진 얼굴에 환희가 비쳤다.
퓻.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엘리엇은 몇 번 주물렀을 뿐인데 사정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쉬운 듯이 눈썹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뜨린 그는 아서의 눈치를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전혀 죽지 않은 음경 덕분에 빨리 끝나리라는 생각은 진즉에 버렸다. 하지만 아서는 엘리엇의 붉은 욕망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얌전하게 있었잖아!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당황한 듯이 다급하게 따라붙는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아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빌어먹을! 아서 렌튼! 돼지 똥밭에 뒹굴면서 네 썩어 문드러진 알량한 자지를 욕해! 쪼그라든 버섯 같은 자지를 단 수퇘지! 그런 배알로 무슨 일을 하겠어! 썩어 빠진 시궁창 생쥐도 너를 사내로 빨아 주지 않을 거다!”
방치당한다고 여겼는지 엘리엇은 꽥꽥 고함을 질러 댔다. 아서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어금니를 사리물고 무시무시한 눈길로 엘리엇을 노려봤다. 약에 절은 놈은 제가 무슨 도발을 하는지도 모르고 빨간 혓바닥을 계속 놀려 댔다.
“어디 또 때려 보시지! 응? 멍청하고 비겁하고 성냥개비만도 못한 물건을 달고 있는 옹졸한 작자야.”
“닥쳐.”
탁자를 살핀 아서는 침대 옆 보조 탁자를 살폈다. 거기서 찾던 것을 발견했다. 연고가 든 약통. 허브 오일보다 뻑뻑하긴 하지만 활활 불타는 놈의 구멍에 처박으면 금세 녹을 터였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아서는 발길질까지 해 대는 놈을 짓눌렀다. 약통을 열어 반쯤 남은 연고를 듬뿍 떠서 그대로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처박았다.
“컥!”
놀란 엘리엇은 눈을 부릅떴다. 벌어진 입 안에 선 혀가 바들바들 떨렸다.
“무… 뭐… 아서?”
“그만하라고 애원해도 거칠고 아프게 박아 줄 테니… 그러니까 제발… 그 망할 입 좀 닥쳐.”
단숨에 검지와 중지를 구멍에 찔러 넣은 채로 우악스럽게 안을 더듬었다.
“아니… 거긴… 괜찮아… 자지만으로도… 흐익!”
항문을 침범당한 느낌이 이상했는지 엘리엇은 어깨에 힘을 주며 흠칫 떨었다. 날뛰던 혓바닥이 꽉 다물린 입 사이로 사라졌다. 눈가를 찡그린 그는 아서가 성급하게 세 번째 손가락을 집어넣자 곁눈질했다.
“아파….”
“기분 좋잖아.”
“…그래도.”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그는 드디어 내면 깊은 곳에 숨겨 둔 부끄러움 한 조각을 발견했는지 입을 도로 다물었다. 하지만 아래 구멍은 점차 열리고 있었다.
아편으로 인해 근육이 이완된 데다 아서의 능란한 솜씨가 더해지자 엘리엇의 좁은 입구는 금방 풀렸다. 하지만 아서의 굵고 흉악한 자지를 수월히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새 연고가 녹아 미끈거렸다. 아서는 얼른 바지 단추를 풀었다. 아까부터 폭발 직전에 몰렸던 성기가 단숨에 튀어나왔다. 손에 흥건하게 묻은 연고를 그 기둥에 치덕치덕 발랐다.
“오. 맙소사.”
아서의 물건을 제대로 본 엘리엇이 멍하게 감탄사를 뱉었다. 푸른 눈이 커졌고 입이 벌어졌다.
“가랑이에 황소를 키우는 줄은 미처 몰랐는걸.”
“이제 잘 알게 될 거야, 엘리엇 데일.”
대충 연고를 바른 아서는 엘리엇의 두 다리 벌리고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굵고 뭉툭한 귀두가 구멍 입구에 닿자 엘리엇이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큰 건, 안 들어가.”
“들어가.”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힘을 주자 엘리엇이 다급하게 다시 외쳤다.
“찢어져… 안 돼.”
“아픈 게 좋잖아, 안 그래?”
괜히 빼는 놈의 엉덩이를 꽉 잡아 제 사타구니에 맞물렸다. 아편에 절은 중에도 두려움이 들었는지 엘리엇은 밭은 숨을 거듭 뱉었다.
“아서… 으윽… 윽!”
세 살짜리 아이의 주먹만큼 큰 귀두가 기어이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중간에 미끄러지는 일도 없이 딱딱하게 발기한 자지가 좁은 길을 넓히며 천천히 전진했다.
“아… 아서… 천천… 흐읏.”
엘리엇은 단어 끝을 뭉개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허리가 둥글게 말린 덕분에 시선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제 뒷구멍을 파고드는 짙은 기둥을 볼 수 있었다. 생리적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제… 거의 들어갔어.”
“거짓말… 아직도 반은 남았… 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서가 나머지를 한꺼번에 처박았다. 몽둥이가 내장을 짓이기는 선연한 감각에 엘리엇은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충격에 목구멍이 조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래 구멍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아서가 고개를 아래로 꺾으며 떨었다.
“크윽… 힘 빼….”
“아… 으….”
도대체 힘을 어떻게 빼란 말인가. 괴물 같은 자지가 제 뒷구멍에 처박힌다면 아서 ‘쳐 죽일’ 렌튼 놈은 과연 힘을 뺄 수 있단 말인가.
맥박이 결합 부위에서부터 느껴졌다. 본디 달고 있던 심장과 난데없이 생긴 구멍의 심장, 두 개가 한 번에 날뛰었다.
“후우.”
경악성을 내지르지도 못하는 엘리엇과 달리 아서는 금세 안정을 찾았는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여전히 찡그린 시선을 엘리엇에게 던졌다.
“움직일 거다.”
“아… 아직은 안 돼… 제발… 아서.”
“안 돼.”
애원과도 같은 부탁을 단번에 거절한 빌어먹을 놈이 엘리엇의 엉덩이와 허리를 꽉 붙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흐… 큭.”
그렇지 않아도 소양증이 인 듯 간질거리던 구멍이 거대한 성기의 움직임에 밀리자 저릿한 통증이 일었다. 이미 한 번 절정을 맞았으나 여전히 딱딱하게 발기한 음경이 아서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면서 붉은 선단으로 배를 툭툭 쳤다.
찌걱찌걱.
처음에는 고기에 칼집을 넣는 것처럼 천천히 비비면서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던 아서는 이내 속도를 높였다. 짜릿한 통증이 허리를 타고 퍼졌다.
철퍽철퍽.
“컥… 큭… 윽… 아….”
고통이 슬금슬금 커졌다. 빌어먹게도 엘리엇에겐 통증을 쾌감으로 느끼는 특별난 재주가 있었다. 더불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자지가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미약한 쾌락을 좇았다.
쿵쿵.
목과 어깨가 이어진 부분이 침대 판에 부딪혔다.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아서 때문에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아서… 아서….”
손을 묶은 줄을 풀어 달라고 하고 싶지만 입을 열어 그를 부를 때마다 치받는 힘에 혀가 흠칫흠칫 굳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습한 방 안의 공기가 들어왔다.
“아윽… 아!”
항문 성교는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은 온몸의 털이 바짝 솟을 만큼 강렬한 환희에 휩싸였다. 빌어먹을 아편의 축복이었다. 아편을 마시지도 않은 아서는 자지를 엘리엇의 구멍에 처넣고 움직이는 행위 자체로 기분이 좋은 듯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는 엘리엇의 귓가에 더운 숨을 뱉었다.
“손을… 제발 손을… 어깨가 빠질 것 같… 아….”
철퍽철퍽철퍽.
가랑이를 찢어발길 기세로 들이닥치는 자지에 밀려서 엘리엇은 죽을 것만 같았다. 자꾸 박는 뒤통수보다 매달린 팔이 너무 아팠다. 저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졌다.
“아서… 제발… 흑.”
울 것처럼 애원하자 미친 기세로 자지를 처박던 아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속도를 늦췄다. 엘리엇의 허리를 꽉 잡고 있던 손이 침대 기둥에 닿았다.
“빌… 어먹을.”
얼마나 흥분했는지 아서는 손을 떨었다. 단단히 묶은 매듭이 잘 풀리지 않자 욕설을 뱉으면서 애를 쓰던 그가 드디어 줄을 풀어냈다.
“아으….”
내내 들려서 혹사당했던 팔과 어깨 관절은 칼이 파고드는 듯이 아팠다. 아래로 내리지도 못하고 들고 있자, 아서가 몸을 가까이 붙여 제 어깨에 두르도록 했다.
“흐으….”
마주 앉은 자세로 바짝 붙자 결합이 한층 깊어졌다. 고통과 어우러진 쾌락에 몸부림을 치고 싶지만 엘리엇은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지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팔이 아파서 못 하겠으니 네가 내 자지를 만져 줘.”
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낮게 속삭였다. 아서는 움찔하더니 이내 한 팔로 엘리엇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방치당한 음경을 잡았다.
“흐으….”
양쪽에서 가해지는 찌릿함에 엘리엇은 전신을 떨었다. 구멍에 힘이 들어갔고 그러자 덩달아 아서의 자지도 내장 속에서 꿈틀거렸다.
철퍽철퍽.
아서는 엘리엇을 안은 채로 위로 쳐올렸다. 허릿심이 대단했다. 어깨에 걸친 팔은 그때마다 공중을 헤맸고 아서의 고관절 너머 뒤로 뻗은 엘리엇의 다리 또한 들썩거렸다.
“후… 흐….”
두 사람이 뱉은 숨결이 방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투둑. 투둑.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사방에서 차가운 기운이 들어왔다. 그러나 엘리엇과 아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헉… 크으….”
“젠장… 엘리엇….”
벽난로도 필요 없었다. 음탕하고 난잡하게 얽힌 부위에서 올라오는 열기만으로도 당장 타 죽을 지경이었다. 두 사람을 휩싼 욕정은 불꽃과도 같았다.
사나운 빗줄기가 세차게 창문을 때렸다. 다른 사람들이 부지런히 벽난로 불씨를 뒤적거리는 사이 아서와 엘리엇은 서로의 체온을 탐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을 피해 침대 위로 올라온 지 꽤 되었다. 푹신한 매트 위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몰아치고 출렁였다.
“하윽… 좀… 천천히…!”
“엘리엇… 후우… 불가능한 걸 요구하지… 마.”
철퍽철퍽철퍽.
거대한 성기가 내장을 짓이겼다. 바짝 달아오른 입구는 울퉁불퉁한 혈관에 쓸려서 화끈거렸다. 혹사당한 엘리엇의 음경은 힘겹게 흔들렸다. 아서는 손자국이 진하게 남은 음경 대신 이젠 고환을 으깨려고 들었다.
“큭! 앗! 아서! 아!”
눈물이 쏙 빠질 만한 아픔과 동시에 머리가 완전히 곤죽이 되어 버렸다. 시야가 점멸했다. 아래 구멍만큼 벌어진 입술 안에서 혀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 아서! 아서!”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이유 따위는 알 수 없었다. 공중을 헤집은 손으로 그의 실체를 붙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작렬하는 환희 속에서 그대로 타 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후.”
깊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몸 위로 아서가 내려왔다. 뜨거운 열기를 발하는 어깨에 팔을 두르고 엘리엇은 허리 중심 근육을 딱딱하게 굳혔다.
“큭!”
“아… 기분 좋아.”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자 아서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축축한 날숨이 귓구멍에 스며들었다. 환희의 파도가 계속 밀려들었다.
퍽퍽퍽.
살이 부딪히면서 외설적인 소리가 크게 울렸다. 상체를 포갠 채로 고환을 비틀기 어려웠기에 아서는 금방 고환을 놓았다. 대신에 쥐기 쉬운 젖꼭지를 꼬집었다. 굳센 엄지와 검지에 힘이 들어갔다. 여린 살점을 쥐어뜯으려는 기세에 엘리엇은 몸부림쳤다.
“앗! 아파! 큭! …아서!”
제 흉측하고 큰 자지만큼이나 아서는 성난 황소 같았다. 욕정에 들뜬 그는 한 손으로 엘리엇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꺾었다. 그는 땀에 젖은 목을 아프게 깨물었다.
“컥.”
아서의 입술이 목젖을 세게 빨았다. 멍이 들 게 분명했다. 그러면 자국이 남을 테고 앞으로 엘리엇은 그 멍이 사라질 때까지 목을 꽁꽁 감싸야 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였다.
죽이고 싶은 개자식과 한 난잡한 항문 성교의 흔적을 숨겨야 한다니. 그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역겨웠다. 이상한 점은 분명히 화가 날 일인데 동시에 야릇하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아편 기운은 그에 기대감을 더하고 말았다.
“흐응.”
입맛을 다시면서 가는 눈으로 아서를 바라봤다. 땀에 젖은 그는 셔츠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우람한 상체가 드러났다. 엘리엇 또한 오랜 원예 취미로 체격이 꽤 다부졌다. 하지만 아서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냉랭하고 사악한 외모와 대조를 이루는 구릿빛 살갗에서는 바닷바람의 흔적이 느껴졌다. 엘리엇은 마냥 그를 붙잡았던 손으로 청동으로 빚은 것 같은 근육의 이음매를 더듬었다.
추룩. 첩. 축. 턱.
가랑이에 꽂힌 성기가 여전히 거센 속도로 출입을 반복했기에 손끝도 그리고 턱도 흔들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우연히 땀방울이 떨어졌다. 짭짜름한 맛이 정말로 바닷물 같았다.
“아… 서… 윽.”
그를 탓하면서 입술을 닫아 비틀었다. 혀를 내어 바깥을 핥다가 제 턱에 들러붙은 땀방울의 맛까지 느낀 다음 다시 입을 닫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서… 입에….”
신음을 대신하는 부름과는 확연히 다른 뉘앙스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서는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움직임이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눈빛으로 왜 멈추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더운 숨을 뱉는 입술이 다가왔다.
“아.”
입술이 닿기 전에 엘리엇은 고개를 돌렸다.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만큼 빠르지 못했다. 단단한 입술이 엘리엇의 입가를 스치고 뺨에 안착했다.
“…후.”
아서가 뱉은 짧은 한숨에 조롱과 동시에 깊은 실망감이 배어 있었다. 뇌가 녹는 중에도 키스는 하기 싫다는 생각을 먼저 한 자신에게도 조금 놀랐다. 하지만 좋아서 몸을 겹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게 아편의 효과임은 쾌락의 절정 속에서도 떠올릴 수 있었다.
“개자식.”
이로 광대뼈 언저리를 살짝 긁은 아서가 자조하듯 웃었다. 눈알을 굴려 곁눈질하자 가늘게 휘어진 눈매를 볼 수 있었다. 욕정에 들끓는 홍채 안에 뭔가 시커멓고 음흉하면서도 동시에 섬세한 뭔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순간 내장이 쑥 꺼졌다.
철퍽철퍽철퍽!
구멍을 짓이기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갑자기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아서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앗! 아서!”
“긴장을 풀어… 내 걸 끊어먹겠군.”
“그게 말처럼 쉬… 허억!”
정신이 어지러운 중에도 구멍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대단한 의사도 없는 지역에서 그런 부상은 끔찍한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의 기분을 풀어야 했다. 격렬한 정사 중에 상대에게 통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아서… 천천히… 흐윽.”
스스로 수치스러울 정도로 비음이 많이 섞였는데도 아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시했다. 애가 닳아 손끝으로 놈의 어깨를 덧그리며 턱을 매만졌다. 뒤늦게 입맞춤을 종용했다.
“…아서.”
그의 목을 감싸 당기면서 턱을 조금 들었다. 이미 충분히 가까이에 있어서 행동의 의도는 명확했다.
모발과 비슷한 색을 가진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짙은 눈동자는 엘리엇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더니 이내 외면했다.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이 가슴을 후벼팠다.
“왜….”
고작 키스였다. 그것도 달갑지 않은 아서 렌튼과의 어쩔 수 없는 행위에 불과한데 예상치 못한 거절은 꽤 시렸다. 심장 언저리가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반대로 맞붙은 몸은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이렇게 서로를 붙잡고 쾌락을 좇는 중에도 일일이 맞받아치는 놈에겐 진작 이골이 났지만, 새삼스레 밉살스러웠다.
그런데도 정사는 계속 이어졌다. 침묵 속에서 살이 부딪히는 난잡한 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만이 들렸다. 아편이 지배하는 게걸스러운 구멍과 음경,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꼿꼿이 솟은 유두를 비롯한 전신의 피부는 아직도 만족할 기미가 없었다.
턱턱 밀어붙이는 힘에 밀려나지 않게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아서에게 매달렸다. 이마가 딱딱한 어깨에 닿았다. 코끝에 땀이 흘렀다.
“아서… 윽.”
“…후… 왜?”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엘리엇은 심장 언저리에 얼음덩어리가 번지는 감각을 비웃음으로 억지로 눌렀다. 다행스럽게도 무지막지한 놈의 자지가 때마침 기분이 좋은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엘리엇은 한껏 더운 숨을 터트리며 놈에게 허겁지겁 매달렸다.
“하윽… 혹시… 네게서 바다… 냄새가 나.”
“그래? …식민지로 가는… 후… 배를 탔거든.”
“으음… 읏.”
구릿빛 거친 피부는 분명히 강한 태양에 그을린 탓이었다. 게다가 손목을 묶었던 매듭 방식은 매우 단단하고 효율적이었다. 뱃사람은 으레 밧줄을 잘 다루곤 했다. 게다가 권총 명사수라니.
위험천만한 신대륙에 쳐들어가 착취와 살육을 반복하며 금과 보석을 쫓았을 터다. 무수한 목숨을 빼앗고 어딘가에서 대단한 재물을 탈취한 다음에 그걸로 천박한 고리대금업을 시작했겠지.
아서 ‘옹졸한 수퇘지’ 글래스턴의 막대한 부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한 엘리엇은 속으로 조소했다. 그런 악독하고 힘겨운 방식으로 재산을 모으면서 얼마나 복수심을 갈고닦았겠는가. 그런데 고작 하는 짓이라고는 아편을 강제로 먹이고 가랑이에 제 좆을 처박으면서 헐떡이는 것이 다였다.
“아서… 오… 아서.”
이 천박하고 저열하고 한심하고 제 몰골 값도 제대로 못 하는 멍청이 같으니.
“엘리엇.”
가늘어진 놈의 눈동자에선 만만찮은 반감과 비웃음이 느껴졌다. 분명히 제 아래 깔려서 신음하는 자신을 비웃고 있으리라. 아서와 엘리엇은 그런 관계였다.
***
정사는 계속 이어졌다. 키스를 완전히 포기한 이후로 둘은 아랫도리 사정에만 몰두했다. 서로 낯짝을 보기도 지쳐서 엘리엇은 허리를 옆으로 틀며 한 손으로 베개를 붙잡았다.
“후. 다리 들어.”
제 엉덩이 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아서가 엘리엇의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제 오른쪽 어깨에 걸친 그는, 옆으로 누운 바람에 아래에 깔린 엘리엇의 다른 다리를 제 다리 사이에 놓았다. 그러자 결합 부위가 90도 틀어졌다.
“흐큭.”
안에 든 커다란 음경이 회전하면서 입구를 간질였다. 엘리엇은 새삼스러운 존재감에 허리를 흠칫 떨었다. 열십자로 다리를 교차한 외설스러운 자세 덕분에 잔뜩 벌어진 가랑이에 아서의 음모와 함께 음낭이 닿았다.
“흐응.”
아주 기분이 묘했다. 까끌까끌한 털에 예민한 피부가 쓸리는 것도, 비틀리고 꼬집히고 쥐어 짜이는 바람에 부은 제 고환에 딱딱한 심지를 품은 상대의 고환이 닿는 것도. 묘하고 낯설면서 동시에 짜릿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데.”
“덕분에.”
“이쪽에 대단히 재능이 있어. 이참에 본격적으로 남첩으로 진출해 보는 게 어때? 로드니아엔 남색가가 득시글대거든. 너라면 금방 후원자를 여럿 거느릴 수 있을 텐데.”
“닥치고 쑤시기나 해.”
빙긋 웃으면서 놈의 팔을 쓰다듬었다. 놈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었다. 그와 함께 엘리엇의 얼굴에도 차가운 냉소가 번졌다. 놈의 승리감을 조금이라도 깎아내리기 위한 허세였다.
이쪽에 재능이 있다느니, 로드니아에 남색가가 득시글거린다느니. 사소한 빈정거림에 불과했다. 일일이 화를 내 봤자 놈에게 휘말릴 뿐이었다. 그런데도 명치가 시큰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런 건 아닐까. 아서가 일깨운 제 욕정의 본색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제 본성에 깊은 회의감이 들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고민의 순간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고 엘리엇은 아서의 아래에서 이미 희열을 생생하게 맛보았다. 수치심 따위는 아편이 삼켜 버렸다.
얼음 같은 시선과는 반대로 침대 속 온도는 더욱 올라갔다. 습하고 차가운 비 기운이 공중을 휘젓는 엘리엇의 발가락 끝을 식혀도 내장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조금도 추운 줄을 몰랐다.
삐걱. 삐걱. 삐걱.
첩, 첩, 첩.
요란한 침대 소리와 살이 들붙는 소리. 그리고 낮고 긴 신음성과 더운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반감을 향신료 삼아 듬뿍 뿌린 섹스는 너무 만족스러웠다. 현재로선 그걸로 충분했다.
***
긴 정사가 끝나고 정신을 잃었다. 무지막지한 체력을 자랑하던 아서도 지쳤는지 엘리엇의 곁에서 곯아떨어졌다. 달뜬 몸이 서서히 식으면서 추위가 엄습했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담요 아래서 나체를 딱 붙였다.
“후우.”
얼마나 잤을까. 노곤한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을 때.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새벽은 벌써 지난 것 같았다. 밖에선 스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비의 기척이 느껴졌다.
사위가 조용했다. 고요함으로 미루어 보아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여전히 공기는 축축했고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살갗에는 냉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었다.
“흐응.”
물에 불은 종이처럼 축축 처졌지만 그래도 아직 죽진 않아서 어느 정도 움직였다. 비록 갓난아이 배냇짓 같은 움직임이지만 저를 감싼 남자의 종아리 위에 제 차가운 발을 올릴 순 있었다.
“음.”
냉기를 느꼈는지 아서가 꿈틀거렸다. 엘리엇은 그의 가슴과 배에 들러붙은 등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잠결인 그는 엘리엇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리를 움직여 담요를 골고루 폈다.
따뜻한 천이 열기를 보호하는 사이 엘리엇은 시린 코끝을 푹신한 베개에 묻었다. 덩달아 다가온 아서의 코가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엘리… 엇.”
잠긴 목소리가 거칠게 긁혔다. 나른한 한숨이 귓가에 닿았다. 빌어먹을 개자식은 너무나도 따끈했고 엘리엇은 그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찰나의 평화를 조금 더 즐겨도 좋으리라.
이 안락한 침대에서 일어나 이 차가운 방을, 그리고 빌어먹을 가시나무 성을 떠나는 순간, 엘리엇은 두 번 다시 아서의 역겨운 낯짝을 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늦은 오후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엇은 아서가 제게 두른 팔을 휙 집어 던졌다. 저질렀다는 생각에 딱 죽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죽어봐야 저만 손해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빨리 흘려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후 배운 교훈이었다.
“후우.”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머리도 어지러웠고 두들겨 맞은 듯 전신이 아프고 나른했다. 가장 끔찍한 통증은 아무래도 가랑이와 사타구니였다. 얼마나 거칠게 다루었는지. 엘리엇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상체를 일으키는 아서 놈의 빌어먹을 자지를 난도질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빌어먹을 쏜힐에서 벗어나는 게 더 급했다.
“…….”
엘리엇은 조용히 쌍욕을 삼켰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괜히 몸싸움을 벌여 봐야 불리했고, 아편을 강제로 먹이고 게걸스럽게 구멍을 벌려 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간신히 가누면서 비비 꼬인 바지를 털어 입었다. 셔츠는 엉망이었지만 대체할 것이 없었고 구석에 팽개친 조끼와 상의를 덧입으면 대충 가려질 것도 같았다.
“그런 몸으로 말을 탈 수 있겠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지 허리춤을 만지면서 엘리엇은 놈을 흘끗 돌아봤다. 빙긋한 미소가 여전히 재수 없었다.
“마차 내 달라는 소리 안 할 테니 닥쳐.”
엘리엇이 힘이 빠진 제 손가락을 저주하며 옷을 꾸역꾸역 입는 사이 놈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커튼을 살짝 젖혀 밖을 내다본 아서가 몸을 돌렸다.
“아직 부슬비가 내려.”
수치라고는 모르는 놈은 알몸 그대로였다. 아편 기운이 가신 제정신으로 보자 놈의 자지는 그야말로 흉악, 그 자체였다. 저런 게 제 구멍을 드나들었다니. 내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길쭉하고 굵은 음경에는 허연 자국도 남아 있었다. 아마도 엘리엇 안에서 녹은 연고 같았다.
갑자기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이번에는 아편이 기억을 가져가는 행운도 누리지 못했다. 제가 어떤 모습으로 아서를 유혹했는지 너무 생생했다. 괴롭히고 때려 달라고.
‘빌어먹을. 이제 천국 가기는 아예 글렀군.’
가빠지는 숨을 몰래 고르면서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길 바랐건만. 인생이 수퇘지의 더러운 좆같이 비비 꼬였다.
“치를 것은 다 치렀으니 앞으로 괜한 시비 걸지 마.”
손끝에 억지로 힘을 주고 조끼 단추를 잠그기에 성공했다. 삐걱거리는 허리와 고관절을 무시하면서 장화에 발을 꿰느라 몇 번이고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아서가 비웃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지겠군. 목도 완전히 가라앉았잖아. 고집을 꺾는 편이 좋을 텐데. 독감에 걸렸다간 폐렴으로 이어지기 쉬워.”
“네놈 낯짝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내 물건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 돌려보내.”
“돈은?”
그 말에 엘리엇은 놈을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수표는 이미 릴리벳에게 보냈다. 불쾌할 만큼 눈치가 빠른 놈이 비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네 구멍은 네 편의를 봐준 대가고. 물품을 되돌려 받기를 원하면 내 돈을 돌려줘야지. 네 구멍 값이 그렇게 대단치는 않거든.”
눈가가 화끈 달아올랐다. 주먹을 쥘 수만 있다면 저 면상을 짓이겨 놨을 텐데. 엘리엇은 이를 꽉 깨물고 부들부들 떨었다. 상의를 홱 낚아챈 다음 채찍을 들었다. 그리고 초인적인 참을성을 발휘하여 제 몸의 비명을 무시한 채로 빠른 속도로 방을 떠났다.
아서는 그런 엘리엇을 바라볼 뿐이었다.
계단을 내려오자 길퍼드 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스쳐 지나갔다.
엘리엇이 직접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길퍼드에게 전갈을 받은 마부가 엘리엇의 말을 준비했다. 이틀 사이에 굶기거나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말의 털에서 윤기가 흘렀다.
안장에 발을 올리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고 힘을 주어 말 등에 올라타자 차라리 제 가랑이를 도려내고 싶을 만큼 끔찍하게 아팠다.
“크윽.”
엘리엇은 고삐를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마부와 길퍼드가 이상한 눈빛으로 보기 전에 이를 악물고 채찍질을 했다. 말이 나이트스톤을 향해 달려갔다.
퉁퉁.
말이 달리자 자연히 엉덩이가 안장에 부딪혔다. 그때마다 눈앞에 별이 터지고 시야가 까맣게 가라앉았다가 하얗게 변하기도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뺨을 후려치지 않았다면 엘리엇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저주받은 놈. 배에서 떨어져 상어에 살점이 뜯기거나 식민지에서 더러운 병에 걸려 뒈져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더욱이 소름 끼치는 것은 말을 달리는 사이 제 구멍 어딘가에서 스르륵 흘러나오는 액이었다. 연고치고는 상당히 축축했다. 잠시 후 불현듯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엘리엇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젠장.”
분하고 비참했다. 눈시울이 뜨끈했다. 엘리엇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일부러 고개를 쳐들고 비를 맞았다. 주인을 맞이하는 하인들이 제 끔찍한 몰골을 이상하게 보지 않도록. 일그러지는 얼굴을 식혀야 했다.
***
집에 돌아온 후로 엘리엇은 바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식욕이 별로 없어서 간단한 수프를 조금 먹은 후에 다시 곯아떨어졌는데, 그때부터 일주일을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똑똑.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들어와.”
벳시였다. 그녀는 쟁반에 부드럽게 간 고기 수프와 삶은 채소 약간, 그리고 말랑한 빵을 담아 왔다. 그걸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엘리엇의 무릎 위에 올려 주었다.
“고마워.”
“다 드시고 나면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져오겠습니다. 새 셔츠와 바지도요. 옷을 입으시는 동안 침대 시트와 베갯잇도 갈까요?”
“음. 그렇게 해.”
“두통약을 드시지 않았는데도 큰 병환 없이 회복하셔서 다행이에요. 신의 보살핌입니다.”
“애초에 신의 저주겠지.”
수프에 빵을 찍던 엘리엇이 차갑게 이죽거리자 벳시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열이 펄펄 끓는데 한사코 해열제와 두통약을 먹지 않겠다고 버틴 덕에 그녀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엘리엇도 잘 아는 바였다. 하지만 독감의 원인을 모르는 그녀는 독한 약 성분이 엘리엇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알 일이 없을 터였다.
“간호해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주인님. 당연한 일인걸요.”
그러면서 벳시는 우물쭈물했다. 스푼을 든 채로 엘리엇이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나?”
“저, 쏜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무리 내막을 모른다고 해도 나이트스톤의 주인이 쏜힐의 주인과 사이가 무척 나쁜 건 하인 모두가 알았다. 이틀간 거기에서 무슨 심각한 일이 있었고 후에 돌아온 엘리엇이 초죽음 상태로 일주일을 내내 앓았다. 눈치 빠른 벳시가 엘리엇의 기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우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엇의 감정은 그렇게까지 순순히 이성을 따르지 않았다. 순간 눈에 힘이 들어갔고 벳시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누가 와서 뭘 바랐지?”
“길퍼드가 왔는데 뭘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뭐?”
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파악한 벳시가 죄송스러운 듯이 말을 이었다.
“상처에 좋은 연고와 함께 꿀과 말린 과일, 질 좋은 베이컨을 들고 왔어요. 버터와 치즈도 있었습니다. 위문품이라고 하는데요. 주인님께 여쭤보지 않고 사용할 수 없어서 일단 창고에 두었습니다.”
“뭐.”
연고에 음식이라.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대면하지 않고도 수치심을 주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개자식.”
화가 단단히 났다. 당장 들고 가 놈의 면상에 물건을 집어 던지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놈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되도록 얼굴을 안 보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그걸 길가에 내놓아. 쏜힐에서 마을로 가는 길목에 말이야.”
“그럼 금방 상할 텐데요.”
“그러라고.”
딱 잘라 말한 다음에 엘리엇은 나머지 수프를 떠먹고 빵을 해치웠다. 결정을 내리고 나자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엘리엇의 의도를 어렵사리 알아먹은 벳시는 그러겠노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몸을 닦을 더운물과 수건을 준비한 뒤에 벳시는 다른 하인을 불러 지시대로 받은 물건을 밖에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양동이에 든 많은 음식을 들고 밖으로 가는 하인들을 위에서 지켜보며 엘리엇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림없는 개수작이지. 누굴 거지로 알아.”
알량한 친절을 가장한 도발 따위는 이쪽이 사양이었다.
***
위문품을 내다 버렸다는 소식이 금방 전해지지 않은 건지 혹은 알고도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 건지, 길퍼드라는 놈은 뻔질나게 나이트스톤을 드나들었다.
“오늘은 뭘 가져왔지?”
“고약과 양털 담요에 달걀 두 묶음, 그리고 설탕 세 통입니다.”
“하. 갈수록 더 하는군.”
달걀과 설탕이라는 말에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날달걀을 놈의 면상에 던지고 덕지덕지 흐르는 달걀 파편 위로 설탕을 치는 장면을 상상했다.
“전부 길에 내다 버려.”
“네.”
벳시가 냉큼 나갔다. 처음에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도 다음번엔 어떤 걸 내다 버리게 될지 궁금한 투였다.
뒤이어 결이 좋은 옷감이나 꽤 값이 나가는 가죽, 혹은 희귀한 향료 등이 배달되었다. 그때마다 무엇을 받았는지 확인한 엘리엇의 지시대로 벳시가 그걸 가져다 버렸다.
슬슬 무엇을 가져올지 기대되는 찰나에 선물 공세가 뚝 끊겼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엘리엇은 멀리 자욱한 연무에 싸인 쏜힐을 보며 버릇처럼 저주를 퍼부었다.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싱그러운 풀이 비를 먹고 바짝 기를 세워 자라나는 때가 되자 고통받은 심신의 여파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슬슬 집 안에 있는 것이 지루해졌고 좀이 쑤셨다.
“오늘은 산책할 거야.”
“네.”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리엇을 보고 벳시가 더욱 기뻐했다. 아무래도 승마는 아직 조금 꺼려졌다. 가벼운 아침을 먹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후 장원 가장자리를 직접 걸어서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아직 해가 하늘 중간에 오기 전이라 걸을 만했다. 숙성된 퇴비의 냄새가 곳곳에서 올라왔고 걸음을 뗄 때마다 인기척에 놀란 풀벌레가 찌르륵찌르륵 이리저리 튀었다. 평화롭고 목가적이었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검은 돌을 매만지면서 담이 허술한 곳이 있지는 않은가 확인했다. 천천히 장원의 모든 정경을 눈에 담으면서 걷는 동안 불쾌한 냄새가 코에 걸렸다.
“음?”
어느 틈에 쏜힐로 향하는 길목 어귀까지 이르렀다. 벳시가 명령을 잘 이행한 흔적이 역력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꿀을 사방에 뿌리고 버터를 땅바닥에 짓이기고 달걀은 일부러 깬 흔적이 보였다. 누가 봐도 심술궂은 행태였다. 심지어 천은 갈기갈기 찢겨 있기도 했다. 그 쓰레기 더미에서 썩은 내가 풀풀 올라왔다.
“이런… 벳시.”
어쩐지 우스웠다. 실소가 터졌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저렇게 적나라하게 전시를 해 두었으니 아서가 직접 보지 않더라도 나이트스톤을 드나드는 길퍼드가 봤을 테고 길퍼드가 보지 못했더라도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 소문을 냈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놈의 귀에 이 소식이 전해졌을 터였다. 이 고장은 좁은 곳이었다.
저런 꼬락서니를 보고도 선물을 계속 가져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무슨 고집인지.”
이만큼이나 나쁜 사이에 굳이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아서 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랐다.
그날 오후. 선선한 바람이 부는 뒤뜰 테라스 그늘에 앉아 한가로이 레모네이드를 즐기는 참이었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길퍼드가 또 찾아왔다. 벳시가 그를 맞으러 갔다가 왔다.
“저, 주인님.”
풍경을 감상하는데 벳시가 돌아왔다.
“이번엔 뭘 가져왔어?”
“여기.”
고개를 돌리자 벳시가 웬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붉은 리본으로 장식된 그 안에는 와인과 치즈, 그리고 꽃다발이 꽂혀 있었다. 꽃다발은 쏜힐의 척박한 정원에서 혹사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썩은 꽃잎을 얼마나 뗐는지 보통 꽃보다 훨씬 빈약했고 그나마 멀쩡한 잎도 시들시들했다.
‘딴에는 직접 가꾼 꽃이라는 건가.’
심지어 카드도 있었다.
내가 보인 선의의 선물을 그렇게 내다 버리다니 마음이 아프군.
이제 그만하고 이웃끼리 잘 지내보는 게 어때?
“이걸 카드라고 보냈나?”
기가 찼다. 차라리 도끼나 엽총, 혹은 협박을 담은 결투장을 보냈다면 나았을 텐데. 선의라니. 차라리 저주하는 편이 신뢰 갔다.
눈살을 찌푸리자 벳시가 난처한 태도로 “이것도 버릴까요?”라고 물었다.
“물론.”
냉정하게 끊어 내자 벳시는 뭔가 안심한 듯이 한숨을 쉬더니 바구니를 밖으로 가져갔다.
퍽.
얼마 뒤 묵직한 병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벳시가 아마 돌담에 와인 병을 처박은 모양이었다. 더운 기운이 한층 가셨다. 엘리엇은 얼음을 듬뿍 넣은 레모네이드를 기쁜 마음으로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