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24
연봉 협상 건으로 만난 단장에게 김희도와 ‘그런 사이’가 됐다는 걸 보고했다. 평범한 교제였다면 굳이 밝히지 않았겠지만, 사내 연애, 그것도 팀 내 연애였다.
타인에게 알리는 일을 혼자 결정할 순 없어 김희도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기자 회견 할까요? 아니면 인터뷰?”
김희도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농담했다.
……농담 맞겠지?
입장문을 올리겠다며 SNS에 가입하려는 걸 겨우 말리고 단장에게만 말하기로 결정했다. 말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리고 땀이 뻘뻘 났다.
“뭐야. 드디어 사귀냐?”
의외로 단장은 그 유난을 떨더니 이제야, 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 더 민망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연애는 둘이 알아서 잘하고, 경기에 지장 가게만 하지 마. 발정기 조절 잘해라. 특히 임신 조심. 알지?”
“임…… 네. 알겠습니다.”
임신. 여전히 어색하고 낯선 단어였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이 아니라 얌전히 새겨들었다.
단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앞서 면담을 마친 김희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하고 왔어요? 얼굴이 빨가네.”
무심한 목소리에 덤덤한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라기엔 살짝 무뚝뚝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꽃망울을 활짝 터트린 것 같은 향기로운 공기가 그의 주변에서 넘실거렸다.
“응. 시즌 준비 잘하자더라. 작년보다 더 발전된 모습 보여 줘야지.”
“조심할게요.”
김희도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던 임성이 고개를 돌렸다.
부상을 조심하자는 건가? 점점 더 열심히 하는구나.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래. 부상 안 당하는 게 최우선……”
“선배 임신 안 하게.”
단장에 이어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몇 번을 들어도 충격적이라 그 자리에 굳어 망부석이 됐다.
“단장이 선배한테 그 말 안 했어요?”
“너, 너한테도…….”
“주의시켰어요. 선배 커리어 잘 쌓고 있으니까 조심하라고요.”
역시 이실직고하기 전부터 알고 계셨던 건가. 그래도 김희도에게 저런 얘기를 꺼낼 줄이야.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선배가 원하지 않는 건 안 한다고 했어요. 제일 중요한 건 선배니까요.”
싱글싱글 웃는 남자를 보며 임성이 입을 열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첫 히트 때 마구잡이로 밀어붙이지 않았냐? 살면서 짓눌린다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야.”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거 인정해요.”
“알면 됐어. 뭐, 나도…… 부추겼으니까.”
본의 아니게 다그친 면이 있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희도와 이런 얘기를 하는 자체가 웃기다고 할지, 머쓱하다고 해야 할지.
“저 밥 꼬들꼬들하게 잘해요. 떡볶이도 매일 연습해서 진짜 맛있게 만들 수 있고요. 우리 집에 가전제품 다 있는 거 봤죠? 선배는 그냥 몸만 오면 돼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외치는 필사적인 어필이었다. 귀여운 자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김희도 씨. 가족 계획 세우긴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10년 뒤에 다시 생각해 봅시다.”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김희도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웃었다. 임성이 좋아하는 우리 똥강아지였다.
“10년 후에도 나랑 있을 미래를 생각한다는 게…… 감동이에요. 물론 선배가 거부해도 떨어져 나갈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러게. 10년 뒤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스스로에게 놀랐다가 이내 김희도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있잖아. 만약 우리가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잠깐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표정 풀어.”
임성은 살짝 따끔해지는 공기를 손으로 휘휘 내저으며 재빠르게 말했다.
“너 나한테 좋은 냄새 난다고 했잖아. 우리가 알파, 오메가가 아니면 어떨지 갑자기 궁금해서.”
의도라곤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김희도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햇살이 내려앉은 얼굴은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페로몬이 나지 않더라도 선배 체취에 환장했을 거예요. 지금이랑 똑같지 않을까?”
풋사과 같은 표정과 달리 목소리에 불꽃 같은 열기가 실려 있었다. 손끝이 찌릿 떨렸다.
후우, 임성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치?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왠지 너랑 내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 같거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고등학교 때 같이 야구 했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 김희도와 같이 야구라니, 얼마나 신날까. 생각만 해도 흥분됐다.
“그러면 더 좋았겠지만, 앞으로 같이 할 거니까 괜찮아.”
“맞아요. 전 선배를 놔줄 생각이 절대 없거든요. 절대.”
김희도가 제 어깨에 얹힌 팔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뽀뽀를 했다. 쪼옥, 입술이 살갗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났다. 임성이 흠칫 놀라자 눈매를 늘어트리며 순하게 웃었다.
“너, 너 이 자식.”
“사실은 키스하고 싶은데 선배가 싫어할까 봐 뽀뽀로 참았어요. 저 잘했죠?”
칭찬해 달라는 듯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잘하긴 뭘 잘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조차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앞으로도 김희도에겐 못 이길 것 같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김희도와 함께 걸음을 맞췄다.
* * *
“페로몬 완전히 안정됐네. 역시 각인 효과가 좋긴 한가 봐. 모든 수치가 최상위에 평온 그 자체야.”
이야. 감탄한 차도현이 서류 뭉치를 책상에 던졌다. 검진 결과를 보라는 뜻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늘 검진도 할아버지 명령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무시했을 게 뻔했다.
“어떤지 안 궁금하냐?”
“별로.”
애송이 새끼가 멋있는 척하긴. 콧방귀를 낀 차도현이 던졌던 종이를 다시 들어 두 장을 한 번에 넘겼다. 바로 본론이 나왔다.
「이름: 김희도 (남성. 20세)
형질/수치: 우성 알파/ 97.85%
상태: 활성/안정(0%)」
“특히 여기 이 부분 말이야.”
차도현이 안정 단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 불안정 87%이라는 게 도무지 안 믿긴다. 너 그대로 일주일…… 아니, 사흘만 더 지났어도 페로몬 쇼크 왔어. 바로 골로 갈 수 있었다고.”
알파나 오메가들이 페로몬을 제대로 발산 못 하면 몸속에서 섞이고 뒤틀리다가 폭주하는 현상이 일이 있었다. 페로몬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었다.
등급이 높을수록 폭주 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페로몬이 불안정할수록 정신적, 육체적 컨디션이 급격히 무너졌다. 돈, 명예, 권력. 어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알파들은 불안정이 30%만 넘어도 오메가와 뒹굴며 쌓인 열을 발산했다. 50%를 넘기면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김희도는 불안정 수치가 무려 87%였다. 여태 버틴 게 용하다고 할까, 독하다고 할까.
아니지. 쟤는 정신 나간 지 오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어. 단단히 회까닥했다고.”
열성 오메가인 짝이 놀랄까 봐 억제제보다 몇 배는 독한 진정제를 먹으며 페로몬을 누른 것만 봐도 정상을 벗어났다.
차도현은 질린다는 얼굴로 검지로 제 옆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자신의 사촌 동생도 그렇고, 김희도도 그렇고 등급 높은 알파들은 다 저렇게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지나 보다.
“짝에게 미치지 않는 알파가 어디 있다고.”
김희도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낙엽이 소낙비처럼 무수하게 쏟아지던 어느 늦은 가을날, 중학 추계 대회가 열리는 작은 야구장. 김희도는 그곳에서 처음 임성을 만났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꼬리가 한껏 처진 남자의 주변에는 동료들이 가득했다. 어깨동무하고 헤드록을 걸고. 팀원들과 장난을 치던 남자는 마운드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표정이 달라졌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순간 심장이 빨리 뛰었다. 쿵쿵쿵. 가슴이 아닌 귓가에 심장이 달라붙은 것 같았다.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렁으로 끝도 없이 추락하는 느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지독한 쾌감.
무심코 확인한 자신의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날 경기는 김희도 학교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희도는 에이스 임성을 상대로 두 개의 홈런을 뽑아냈다.
임성은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리며 얼굴을 흥건히 적신 땀을 닦았다. 그의 체취를 맡으며 김희도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아, 저 남자는 내 거구나.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남자야.
첫 만남 이후 2년 동안 임성의 뒤를 쫓으며 결국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야구부에 이름을 올렸지만, 함께 생활할 생각은 없었다.
김희도는 우성 알파로 태어났고, 나이를 먹을수록 페로몬 수치가 올라갔다. 아직 제대로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의 옆에서 멀쩡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가 졸업하고 나서야 야구부에 얼굴을 비쳤다. 1년간 공식 경기에 나가지 않았음에도 타고난 능력으로 금세 눈에 띄었다.
목적이 있으니, 그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목적 때문에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페어리즈에 입단하고,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를 처음 인식했을 때처럼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온몸의 감각이 기뻐 날뛰는 게 느껴졌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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