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22
면회까지 잘 다녀오고 오늘은 오랜만에 페어리즈 팀원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앞에 앉은 권재영이 음료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이 추운 계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을 가득 담은 아메리카노 원샷이었다.
“성아, 크리스마스 끝나고 사이판 갈 건데 같이 갈래?”
비시즌 개인 훈련에 함께 가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선배가 그쪽이랑 왜 같이 갑니까?”
임성이 입을 떼기도 전에 김희도가 치고 들어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경계 섞인 눈빛으로 권재영을 노려봤다. 임성은 제 옆에 앉은 김희도의 다리를 툭 치며 그만하라는 뜻을 전했다.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랑 하는 게 좋잖아. 예준이도 오기로 했어.”
조예준 주머니 사정으론 비행깃값과 현지 훈련 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아무래도 권재영이 도와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조예준은 포수니까 투수와 함께 훈련하는 건 큰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자신 또한 베테랑 투수에게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테고.
“저는 1월 초에 가려고요. 형 먼저 다녀오세요.”
하지만 임성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혼자 무슨 비밀 훈련을 하려고? 아무튼 알았어.”
권재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성은 하하, 멋쩍게 웃으면서 숨을 들이켰다. 잔뜩 예민해졌던 공기가 그제야 살짝 누그러들었다.
권재영이 페로몬에 둔감한 베타여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단번에 험악해진 분위기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김희도. 적당히 좀 해. 페로몬으로 왜 위협하는 거야. 다시 한번 곁눈질로 말했지만 당사자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대화는 주로 권재영과 임성이 했다. 김희도는 임성 옆에 얌전히 앉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성이 얼굴 뚫어지겠다.”
권재영의 농담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나오던 중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이 “어?” 하고 소리를 냈다. 젖은 손을 탈탈 털며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임성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이설 선배님.”
“야, 됐어. 90도 인사 하니까 괜히 나이 들어 보이잖아.”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구만. 김이설이 손사래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소년처럼 개구진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 후 다음에 밥 한번 먹자, 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 시즌 때 봐. 다음엔 꼭 이길 거다.”
“선배님, 저 상대로 4할 넘지 않으십니까?”
“나 욕심 엄청 많은 거 모르냐? 게다가 홈런왕 타이틀도 너희 팀 애기한테 뺏겼잖아.”
애기는 아마 김희도를 말하는 거겠지?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임성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치부심 준비 중이다. 너희 팀 애기뿐 아니라 너도 벼르고 있으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깨를 짚으며 옆을 스쳐 지나가던 김이설이 문득 임성을 불렀다.
“임성.”
“네. 선배님.”
“이런 말 내가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그라운드 밖에서만큼은 늘 유쾌한 남자가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궁금했지만 다그치지 않고 기다렸다. 김이설은 콧등을 몇 번 찡긋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뗐다.
“너 알파였냐?”
“네? 아니요. 아닙니다.”
괜히 뜨끔해 대답이 빨리 나갔다.
“아니라고? 음. 으으음.”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김이설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지금 너한테서 알파 페로몬 진동하거든. 근데 알파가 아니라니까 답은 하나네. 페로몬 샤워.”
“페로몬 샤워요? 저한테요?”
알파가 자신의 짝에게 제 페로몬을 뒤집어씌우는 거? 속된 말로 마킹이라고 하는 그거?
“아예 대놓고 광고하는 수준이야. 아무도 이 사람 건드리지 마. 이렇게?”
김이설이 손끝으로 임성의 목 옆쪽을 툭 건드렸다. 평소와 딱히 다른 느낌은 나지 않아 눈을 멀뚱멀뚱 떴다. 대신 김이설이 미간을 와락 구기며 손가락을 감쌌다.
“주인 지키는 개도 이것보단 덜 사납겠어. 손가락이 아주 찌릿찌릿하네.”
당황스러웠다.
“알고 있었어?”
“아…….”
몰랐다고 말하면 이상하려나? 아무 말도 못 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김이설은 놓치지 않았다.
당사자 모르게 저 짓거리를 한단 말이지. 김이설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 페로몬인지는 묻지 않을게. 근데, 제정신은 아닌 것 같으니까 조심해야겠다. ……안 그러냐, 김희도?”
김이설이 임성의 어깨 너머를 보며 말했다. 언제 왔는지 모를 김희도가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임성의 앞을 막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전혀 안녕하지 않은 얼굴로 인사하니까 웃기네. 임성,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 얕봤다간 진짜 큰일 난다.”
“관심 끄고 갈 길이나 가시죠.”
고저 없던 목소리가 확연히 낮아졌다.
김이설은 임성 대신 대답하는 김희도를 보며 기가 찬 듯 웃었다. 그리곤 다음에 보잔 말과 함께 화장실로 걸어갔다.
“돌아가요. 선배.”
“응. 그래.”
페로몬 샤워에 관해 물어봐야 하나. 머뭇대는 사이 자리에 도착했다. 어느새 도착한 조예준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예준이 오랜만이네. 얼마 전에 선유고 다녀왔다며? 감독님께서 연락 왔더라.”
“네. 글러브 기부하고 왔어요. 주장…… 형은 글러브에 배트, 장학금까지 주고 갔다면서요.”
“자자, 인사 다 했으면 자리 이동하자.”
오늘은 권재영이 직접 마련한 자리로 이른바 「유니콘즈 선유고 동문회」였다.
권재영은 선배님이 크게 한턱 쏜다며 대게 전문점으로 데려왔다. 얇고 흰 비닐이 깔린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면에 조예준, 그 옆에 권재영, 제 옆엔 김희도가 앉았다.
곧 주황빛이 감도는 커다란 대게를 담은 접시가 여섯 개 놓였다. 그 외에도 감자샐러드와 콘치즈, 삶은 메추리알, 오이와 당근 스틱 등 밑반찬이 세팅됐다.
“먹기엔 좀 불편해도 진짜 맛있어. 희탁이 형이 인정했다니까. 너희 그 형이 얼마나 입맛 까다로운지 알지?”
요샌 살을 다 바르고 그 위에 껍질을 데코 형식으로 올리는 곳도 많은데 여기는 게가 통째로 나왔다. 껍질을 까는 게 좀 귀찮긴 하지만, 팀 내 최고 미식가인 최희탁이 인정한 곳이라니 기대가 됐다.
비닐장갑을 끼고 만반의 준비 중인 임성의 접시에 통통한 게살이 툭 얹혔다.
김희도였다.
김희도가 요령 있게 게살을 발라 임성의 접시에 놔 주고 있었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탱탱한 살이 무척 맛있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권재영이 “나도. 나도 까 줘.” 하고 말했다.
“내가 왜요?”
시비조는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그쪽은 손 없습니까?”
“그러는 성이는 손 없냐? 두 개 다 멀쩡히 달려 있잖아.”
권재영이 억울한 얼굴로 임성을 가리켰다. 비닐장갑을 낀 손이 머쓱했다.
“성이 선배는 투수잖아요. 게 껍데기에 찔리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야. 나도 투수거든. 쟤보다 내가 마운드에 오른 횟수가 더 많다고.”
어이없다는 듯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순수하게 마운드에 선 횟수로만 비교하면 마무리인 권재영이 훨씬 많았다.
김희도는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뚝딱뚝딱 게살을 잘도 발라 임성의 그릇에 부지런히 쌓았다.
와, 저 새끼 사람 차별 하는 것 좀 봐. 권재영이 투덜거렸다.
“재, 재영이 형. 제가 까 드릴게요.”
더는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집게 다리를 집는 임성의 손을 김희도가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제가 깐 게살을 권재영의 접시에 툭 던졌다.
임성이 다른 남자를 위해 살 바르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작은 소동이 지나가고 다들 식사에 집중했다.
임성도 나름 열심히 살을 발라 김희도에게 줬지만, 그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잠시 후 주인이 내장 볶음밥을 만들겠다며 등껍질을 갖고 갔다. 잠시 뒤 초록빛이 도는 등딱지 볶음밥이 고소한 향을 풍기며 들어왔다. 군침이 돌았다.
“야구 선수들 맞죠? 어휴, 다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네요. 권재영 선수, 김희도 선수, 임성 선수, 또…….”
아직 1군 등판 기회가 적은 조예준은 알아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조예준은 “조예준입니다. 포수예요.” 하고 당당하게 제 이름을 밝혔다. 호탕하게 웃은 사장은 서비스라며 꽤 비싼 막걸리를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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