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IF 외전(오메가버스 ver.) 14 (30/41)

#IF 외전(오메가버스 ver.) 14

“야. 나 쟤 내보낸단 말 안 했거든.”

“저도 만약의 상황을 말한 것뿐입니다.”

고저 없는 무덤덤한 억양으로 김희도가 대답했다.

“네가 이렇게 말 잘하는 놈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누가 권재영이가 입 잘 턴댔냐? 내가 보기엔 저 자식이 1등 먹겠구만.”

콧방귀를 낀 단장은 다시 한번 상의 주머니를 더듬다가 테이블에 놓인 목캔디를 집었다. 바스락. 네모난 사탕을 입 안으로 던지고 혀끝으로 사탕을 몇 번 굴렸다.

“힘들다고 얘기했지, 방출한다는 말은 안 했다고. 앞서 나가지 좀 마라.”

그 말은? 혹시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임성은 김희도를 말리려던 것도 잊고 단장의 말을 기다렸다.

“우선 이 일은 비밀에 부치고, 성이 넌 검사부터 받아 봐라. 그 후에 결론 내도 충분해. 자, 대화 끝. 나 지금부터 뭐 빠지게 일해야 하니까 둘 다 나가.”

단장이 손을 휙휙 저으며 돌아앉았다. 가 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단장실을 나왔다.

“미안해요. 하지만 선배가 자책할 일은 아니에요.”

단장실을 나오자마자 김희도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먼저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폭탄선언에 대해 화낼 기력도 없었다. 저 딴에는 같이 휩쓸린 것 때문에 마음이 쓰인 거겠지.

“됐어. 너나 나나 본능인 걸 어쩌겠어? 그러니까 나 따라 그만둔다는 이상한 소리는 하지도 마.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화낼 거다.”

김희도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곤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다는 걸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단장실 근처에 멀거니 서 있는 김희도가 보였다.

“안 와?”

쫄래쫄래 걸어온 김희도가 옆에 나란히 섰다.

“아니에요. 전.”

“뭐가?”

“어쩔 수 없는 본능 같은 게. 아니, 어느 정도 적용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본능이 먼저가 아니에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좋아해요.”

“…….”

이게 몇 번째 고백이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좋아한단 말이 이젠 무겁게 다가왔다. 그만큼 김희도의 진심이 깊게 느껴졌다.

“선배가 좋아요. 아까 미쳤냐고 물었죠? 네. 미칠 정도로 선배가 좋아요.”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며 청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 사내자식에게 청초하다는 말을 쓸 줄은 몰랐네.

“아직도 동경으로 하는 말 같아요?”

시무룩한 표정과 달리 눈동자엔 번들대는 이채가 돌았다.

단장실을 나온 두 사람은 곧장 팀 닥터를 찾아갔다. 원래는 팀과 함께 원정길에 올라야 했지만, 임성 때문에 사무실에 남은 것이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흰머리가 드문드문 난 팀 닥터는 민망한 얼굴로 인사를 하는 임성을 보다가 그 옆에 선 김희도를 보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안 봐도 알겠다. 이래서 알파 놈들은.

“김희도. 표정 좀 펴라.”

닥터 말을 듣고 김희도를 쳐다봤지만,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오히려 걱정 말라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등을 매만졌다.

임성은 히트 때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가장 은밀한 일을 남에게 털어놓는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행히 닥터는 이런 상황은 익숙하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사무적으로 얘기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성이가 히트, 희도가 러트였다는 거지. 둘 다 처음이면 당연히 노팅은 안 했을 것이고. 수치 검사부터 받자.”

“저, 선생님. ……습니다.”

“어, 뭐라고?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봐.”

임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땅이 꺼지지 않으려나. 아니면 먼지가 되든가.

“노, 노팅 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닥터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 * *

닥터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해 정밀 검사는 뒤로 미루자고 말했다.

혹시 모를 가능성이라니, 어떤 가능성을 말하는 걸까? 머리가 너무 복잡해 오히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구단 사무실을 나와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내 넋을 놨다.

“선배. 괜찮아요?”

“몰라.”

잘 모르겠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니 대답했다.

“책임질게요.”

“뭐라고?”

화들짝 놀라 김희도를 쳐다봤다. 멍한 머릿속을 깨울 작정이었다면 성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확 들었으니까.

“제가 책임진다고요. 선배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게 할 거고,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게요. 저 돈 많아요. 정말이에요.”

그를 알고 난 후로 지금처럼 진지하며, 확신에 찬 모습은 보지 못했다. 결연한 표정과 말투를 보니 상황을 무마하려고 한 소리 같진 않았다. 그래서 더 황당한 거지.

“그런 말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냐? 아직 뭐, 뭔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 오토바이가 옆을 빠르게 지나갔고, 김희도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더니 끌어당겼다. 그리고 본인이 도로 쪽으로 걸었다.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정신이 없기도 했고 워낙 자연스럽게 이뤄진 행동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희도가 이상해졌다는 걸 알아차리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 왔냐?”

그는 그날부터 매일 자신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서.

이걸 어떻게 들고 왔나 싶은 생각이 드는 해신탕을 시작으로 싱싱한 전복구이, 산삼이 든 삼계탕, 장어 등 기력에 좋다는 음식은 모두 먹은 것 같았다.

“선배 집에서 자고 가도 돼요?”

“둘이 자긴 많이 좁을 텐데. 그래도 상관없으면 자고 가든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희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있을 리가 없는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게 보였다.

분명 잘 땐 나란히 누워 잤는데 눈을 떴을 땐 김희도에게 폭 안겨 있었다. 김희도의 살갗에서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냄새가 나 평소보다 더 오래 잘 수 있었다. 운동을 안 해서인지 평소보다 나른하기도 했고.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김희도가 원정을 떠났다. 좀 잠잠해질까 싶은 생각과 달리 거의 30분 단위로 뭘 하고 있는지 연락이 왔다.

‘기분은 좀 어때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밥은 어떤 거 먹었어요?’, ‘누구 만난 건 아니죠? 위험하니까 집에 있어요.’ 등 셀 수도 없었다. 위험하다는 말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마 타인에겐 자신처럼 체격 큰 운동선수가 훨씬 위협적일 텐데. 쟨 날 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 건지.

나중에는 제발 경기에 집중해 달라고 제가 사정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닥을 기던 김희도의 타격 사이클이 반등을 보인다는 점일까?

여전히 더그아웃에선 팀원들과 동떨어져 앉았지만, 얼굴에 반질반질한 생기가 도는 걸 보면 확실히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가끔은 쟤한테만 반사판을 대 주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나치게 잘생겼잖아.

카메라가 장갑의 찍찍이 부분을 뗐다가 붙이고선 양손을 붙여 코에 가져다 대는 김희도를 포착했다. 캐스터와 해설의 멘트가 이어졌다.

「무슨 행동일까요? 언뜻 봐선 장갑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김희도 선수 요새 타격감이 물올랐잖아요. 신들린 타격 중인 손에 감사의 뽀뽀라도 하는 거 아닐까요?」

김희도의 차를 얻어 탄 날, 그에게 줬던 자신의 장갑이었다. 오래돼서 냄새도 안 날 텐데 뭘 저렇게 심각하게 맡고 있나.

“아, 그것도 좀 이상했어.”

갑자기 또 다른 일화가 생각났다. 원정을 떠난 첫날, 뭐 먹고 싶은 거 없냐는 김희도의 질문에 ‘꼬막?’이라고 대답했다. 미친 듯이 먹고 싶다기보다 마침 TV에 꼬막 무침을 만드는 장면이 나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날 11시에 가까운 늦은 밤. 초인종 소리에 놀라 문을 열어 보니 유니폼 차림의 김희도가 서 있었다. 손엔 검은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서.

‘너 원정 간 거 아니었어? 대구에 있어야 할 자식이 왜 우리 집 앞에 있냐?’

‘너무 보고 싶어서 시합 끝나자마자 왔어요.’

‘아니, 지금 원정……’

‘선배는요. 어땠어요?’

‘보, 나도 보고 싶었지.’

기세에 밀려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씩 웃은 김희도가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있는지도 몰랐던 냄비를 꺼내더니 검은 봉지를 뒤집었다. 촤르륵. 돌멩이를 쏟아붓는 듯한 소리의 정체는 바로 꼬막이었다.

‘갑자기 이건 왜?’

‘꼬막 먹고 싶다면서요.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아니면 나중에 엄청 서럽대요.’

찰그락, 찰그락. 꼬막을 깨끗하게 헹군 김희도가 냄비에 물을 올리고, 간장을 꺼냈다. 중간중간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을 슬쩍 확인했다. 레시피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꼬막 껍데기 한쪽만 제거하고 그 위에 쪽파와 마늘을 섞은 양념장을 살살 뿌렸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쌀밥 위에 꼬막을 얹고 입에 넣었다.

‘처음 만들어 보는 건데, 어때요?’

‘맛있어.’

너무 오래 삶아 꼬막 살은 질기고, 양념은 너무 짰다. 하지만 저 덩치 큰 놈이 주방에서 꼼지락대며 요리를 했다는 자체가 귀여웠다.

하루 이틀 이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조금이라도 운동하려는 액션을 취하면 “절대 안정!”을 외쳤다. 다시 침대에 조심히 눕히고 허벅지와 종아리, 발가락까지 꼼꼼하게 주물렀다. 솜씨가 얼마나 기가 막힌지 마사지를 받고 있으면 스르륵 잠들었다.

설거지를 비롯한 집 안 청소도 모두 김희도가 도맡았다. 자신이 청소기라도 드는 시늉을 하면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빼앗았다.

‘내가 할 테니까 선배는 쉬어요.’

임성을 침대에 눕히고 말랑말랑한 인형을 가져와 품에 안겨 줬다.

유난도,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고 할까. 180cm가 넘는 20대 초반의 운동선수를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 취급을 했다. 이쯤 되자 웃기는 걸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무슨 공주님 모시기 하냐?’

‘저한테는 공주님보다 더 귀하거든요. 선배 발이 땅에 닿는 것도 불안하다고요.’

할 말을 잃게 하는 답변이었다.

어휴, 우리 남편이 얼마나 극성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게 한다니까. 출산 휴가를 간 홍보팀 최 대리님의 말이 지금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오. 싹쓸이네. 3위 가는 건가?”

지난 며칠을 회상하는 사이 경기는 페어리즈의 승리로 끝났다. 홈팀을 상대로 세 경기 모두 이겼다. 특히 오늘은 선취점을 내준 후, 타선이 폭발하며 역전승을 거둔 것이었다. 아직 진행 중인 타 구장의 승패에 따라 최대 3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홈이구나. 희도는 새벽쯤에 도착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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