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7
무의식중에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던 임성은 귓가를 나직이 때리는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곧 경기 시작하겠다. 이제 그라운드로 나가자.”
김희도의 품을 부드럽게 벗어나며 문으로 걸어갔다.
“저 선배 좋아해요.”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임성의 팔을 김희도가 붙잡았다. 힘주어 잡았다가 임성이 돌아보자 힘을 슬쩍 풀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놓아주진 않았다.
“나도 너 좋아해.”
김희도가 자신을 유난히 잘 따르는 건 이미 사실이라 가볍게 대답했다. 졸랑졸랑 따라붙는 것도 귀엽지.
“좋아한다고요. 분명 말했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똑바로 새겨들어요.”
* * *
좀 웃긴 표현이지만 김희도는 뭐라고 할까, 고양이 같았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도도한 것 같으면서도 막상 손을 뻗으면 배를 발라당 뒤집어 까는 덩치 큰 개냥이. 머리카락이 유난히 까마니까 검은 고양이일까.
콜업을 받고 1군에 합류한 조예준은 임성을 대하는 김희도의 행동을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지금 제가 헛것을 보는 것 같은데요. 주장.”
알파 중엔 정신 나간 놈이 많다더니, 쟤가 지금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정작 미친놈 취급을 받는 당사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의 기분을 살필 땐 표정보다 귀를 봐야 했다. 둥그렇게 잘생긴 귀가 한여름 복숭아처럼 발그스름하면 기분이 좋단 뜻이었다.
웃을 땐 눈꼬리가 뭉개지고 보드라운 뺨이 동그랗게 솟았다. 보는 사람까지 저절로 기분 좋아지게 하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김희도와 매일 아침 훈련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홈뿐만 아니라 원정 가서도 매일 아침에 만나 함께 운동을 했다. 물론 경기 나가기 전 손을 맞잡고 명상 아닌 명상 하는 것도 여전했고.
물이면 물, 수건이면 수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김희도가 불쑥 내밀었다. 가끔은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맨날 선배들 뒤치다꺼리만 했지, 막상 받으려니 미안하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했다.
“내가 예준이랑 알고 지낸 지 올해 7년째인데, 가끔은 예준이보다 너랑 손발이 잘 맞는 것 같아.”
“하, 지금 내 앞에서 조예준 얘기 하는 거예요? 짜증 나네.”
원래도 말투가 다정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가 들어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준이 반응도 그렇고, 고등학교 때 둘이 사이 안 좋았나?
“비교하는 건 아니고. 그냥 네가 날 워낙 잘 챙겨 주잖냐.”
“그건 내가 선배를 오래……”
임성! 김세현 코치님이 부르셔. 타이밍 좋게 저를 부르는 소리 때문에 김희도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네. 재영이 형. 지금 갈게요.”
우선 권재영을 향해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뭐라고 했어?” 하고 물었다.
김희도는 눈꺼풀 끝에 촘촘히 붙은 속눈썹을 치켜뜨더니 갓 딴 사과처럼 풋풋하게 웃었다. 임성이 코를 찡긋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시각의 효과가 엄청난지 싱그러운 냄새까지 나는 기분이었다.
“짜식, 되게 귀엽게 웃네. 그러다 정들겠다.”
“정이요? 고작 그 정도론 만족이 안 되죠.”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눈웃음을 친 김희도가 코치실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따라나섰다.
“인마.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뭘 데려다줘. 버스 정류장을 왕복하는 연애 초기 커플도 아니고 뭐야.”
어차피 그라운드에서 곧 볼 텐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란히 이어지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는 임성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고선 심각한 얼굴로 누구 집에 데려다준 적 있냐고 물었다.
“어?”
“헤어지기 싫어서 버스 정류장 왕복한 적 있냐고요. 똑바로 말해요.”
“없어. 정류장 왕복할 시간에 차라리 러닝을 하면 했지.”
가느스름한 시선이 얼굴 곳곳에 닿았다. 마치 진짜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이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굳은 눈매를 보고 살짝 웃어 보였다.
“선배에 관한 것 중에 귀찮은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말고 나랑만 가요.”
풋풋한 공기 속에 농도 짙은 향이 섞였다.
* * *
사건이 일어난 건, 홈 3연전 중 두 번째 날인 토요일이었다. 의무실에 잠시 들렀다가 훈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음?”
좁은 복도를 꽉 메운 인파가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빠른 걸음으로 인파가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직원으로 보이는 한 명이 주저앉아 있었고 그 주변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직원은 양쪽 어깨를 꽉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거리는 몸이 덜덜 떠는 게 여기까지 보였다.
갑자기 쓰러졌나? 정신을 잃은 것 같진 않은데. 임성이 막 직원 쪽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어디선가 거구 한 명이 쿵쿵대며 뛰어들어 왔다. 그에게 밀린 사람들이 악!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먹이를 잡아채는 짐승처럼 순식간에 달려든 거구가 주저앉은 직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성인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쉽게 들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단히 들어 올렸다.
“흐으.”
제 셔츠 깃을 움켜잡은 손을 떼 내려 바르작거리던 직원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힘없이 달랑거리는 모습이 마치 물에 잔뜩 젖은 종이 인형 같았다. 이마와 뺨에 들러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반쯤 감긴 눈이 보였다.
어? 임성의 눈이 위아래로 크게 벌어졌다. 그제야 저 직원이 누군지 알아챈 것이었다.
마케팅 팀 팀원이자 사인회 일로 더욱 친해진 홍윤현이었다. 그리고 홍윤현에게 달려들었던 거구는 올해 페어리즈와 새로 계약한 용병 투수 쉐먼 잭슨이었다.
영어로 된 거친 욕설이 들렸다. 쉐먼이 흥분할수록 주변의 공기가 압축한 것처럼 무겁고 거칠어졌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매캐한 석탄 가루가 함께 흘러드는 것 같았다. 따끔거리는 목구멍으로 기침이 터졌다.
평소 나이스, 나이스! 를 입에 달고 사는 유쾌한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저것 좀 봐…… 바지.”
구경꾼들 중 누군가 경악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쉐먼의 하체로 몰렸다. 유니폼 바지 앞섶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히트 온 거 아니야? 윤현 씨 오메가잖아.”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히트 사이클. 그제야 쉐먼이 갑자기 흥분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위기감을 느꼈다. 정말 히트면 홍윤현 씨를 저대로 두면 안 되잖아. 쉐먼은 알파라고. 마치 그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쉐먼이 홍윤현의 셔츠를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악력을 이기지 못한 단추가 마구잡이로 튀었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저, 잠깐만요. 좀 지나갈게요.”
무슨 사달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질 것 같아 사람들을 헤치며 홍윤현에게 다가갔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지금도 피부가 따끔따끔하다 못해 타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때마침 달려온 경호원 세 명이 각각 쉐먼의 양팔, 허리를 끌어당겼다. 야구 선수 못지않은 덩치들이 달라붙었음에도 쉐먼은 홍윤현을 놓지 않았다.
“쉐먼. 정신 좀 차려!”
임성은 숨을 참으며 홍윤현의 옷깃을 꽉 잡은 쉐먼의 손을 겨우 떼어 냈다.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던 쉐먼이 바닥에 툭 떨어진 홍윤현을 노려봤다. 흡사 발라먹기라도 할 듯 흉포한 시선이었다. 옆머리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불거진 모습이 기묘했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홍윤현이 무릎걸음으로 구석을 향해 기어갔다. 뜯어진 셔츠 앞섶을 가릴 정신도 없는 듯했다.
“홍윤현 씨, 일어설 수 있겠어요?”
저도 오메가예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흠칫 놀라는 홍윤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어린 짐승처럼 웅크린 채 덜덜 떠는 홍윤현을 부축해 의무실로 이동했다. 홍해처럼 갈라진 사람들 뒤로 쉐먼의 고함이 들렸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였다. 어느새 목덜미에 식은땀이 흥건히 맺혔다.
“괜찮아요? 땀 좀 닦아요.”
홍윤현을 빈 침대에 앉히고 티슈를 통째로 넘겼다. 그는 티슈도 제대로 뽑지 못하고 손을 바르르 떨었다. 몇 번이나 헛손질하다가 결국 팔을 축 늘어트리는 홍윤현에게 티슈를 서너 장 뽑아 건넸다.
“억제제 갖고 있죠? 어딨습니까?”
주기적으로 히트가 오는 오메가라면 억제제가 없을 리 없다.
“채, 책상……, 두 번째 서랍 안경 통 안에 넣어 놨어요.”
책상 서랍, 안경 통. 찾으러 가야겠네.
“금방 다녀올게요. 문 잠그고 누가 와도 절대 열어 주지 말고요. 알겠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홍윤현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돌아섰다.
혼자 두고 가기 걱정되는데. 휴대폰이라도 갖고 올 걸 그랬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의무실을 나가는 순간, 벽과 마주했다. 헉. 뒤로 물러서면서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등을 커다란 손이 받쳤다.
“위험하게 뭐 해요?”
벽, 아니 김희도가 눈썹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부르려고 했는데 선배가 나온 거예요. 그러는 선배야말로 뭐 하고 있었어요?”
“문제가 좀 있…… 야. 너 당장 나가라.”
사정 설명을 하려다 불현듯 김희도의 형질을 깨달았다. 평소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김희도는 알파였다. 발정기가 온 홍윤현과 만나게 할 순 없었다.
“나가라니까. 빨리.”
김희도의 어깨를 붙잡아 돌리곤 등을 밀었다. 하지만 그는 나가기는커녕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바위도 아니고 왜 이렇게 안 움직여.
“왜 자꾸 내보내려고 해요. 의무실에 누구 있어요?”
미간에 주름이 지고 말투에 의심이 살짝 묻어 있었지만, 평소와 큰 차이는 없었다. 음. 이상하네. 얘 알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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