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5
프로 야구 시즌 중 구단에선 여러 행사를 열었다. 꼬마 요정들을 위한 어린이날 사인회도 개중 하나였다.
사인회에는 보통 2명의 선수가 나오는데, 구단 홈페이지와 예매 앱, SNS를 통한 투표로 뽑았다.
사실상 인기 투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대부분 프랜차이즈 선수가 뽑히곤 했다. 페어리즈 부동의 주장 최희탁은 거의 내정 수준이었고,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다퉜다. 약 1주일간 이어진 투표 결과 올해 1위는 권재영, 2위 최희탁이었다.
3위는 예상외라고 할지, 예상대로라고 할지 김희도가 뽑혔다. 마케팅 팀장 말론 요새 김희도 인기가 심상치 않다나?
올해 데뷔한 선수가 벌써 유니폼과 응원 문구를 적은 스케치북이 보이는 걸 보면 맞는 말 같았다.
데뷔 첫 쓰리런을 기점으로 김희도는 그야말로 ‘전국 최대어’, ‘괴물 신인’ ‘맡겨놓은 신인왕을 찾으러 가는 루키’의 면모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요즘 득점권 타율은 거의 미친 수준이었다. 팬들이 우리 복덩이라며 어화둥둥 예뻐하는 게 당연했다. 숫제 인간 가마라도 태워줄 분위기였다.
“희탁 선배랑 근소한 차이였다며? 아깝네.”
“뭐가요?”
“팬 사인회 말이야. 주장이랑 몇십 표 차이였다더라.”
“전혀요.”
하나도 아쉽지 않은 얼굴로 김희도가 대답했다.
“저 사람 많은 곳 싫어하거든요. 남들보다 후각이 좀…… 많이 예민해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야구는 팀 스포츠잖아. 고등학교 땐 지금보다 더 폐쇄적인 환경이었을 텐데 그건 어떻게 참았어?”
김희도는 입을 다물고 임성을 빤히 쳐다봤다. 베테랑 형사가 범인을 취조할 때 저런 눈빛이 아닐까 할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었다. 뭐 잘못한 거 있나? 괜히 손바닥이 축축해져 바지에 비벼 닦게 되잖아.
드디어 시선을 거둔 김희도는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축였다.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그걸 위해서라면 역겨운 냄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죠.”
목적이라면…….
“프로에서 뛰는 거?”
“글쎄요.”
김희도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슬슬 그라운드로 나가자고 했다.
임성은 이틀 전에 선발로 나갔던 터라 오늘은 더그아웃 1열 확정이었고, 김희도는 오늘도 선발 라인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경기 직전 김희도가 선배, 하고 손짓해 불렀다.
“이리 와요.”
아, 그 루틴을 할 시간인가.
임성은 익숙하게 김희도의 양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언젠가부터 김희도는 긴장을 풀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다. 뭘 어떻게 해달라고? 설마 손잡아 달라는 건 아니겠지?
눈으로 묻자 고개를 김희도가 끄덕였다. 살짝 당황한 것도 잠시, 닳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라 손을 꽉 잡았다. 제 손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닌데, 손바닥이고 손가락이고 김희도가 조금씩 더 컸다. 이럴 때마다 6년 전 그 꼬맹이가 맞나 의심된다니까. 아무리 남의 집 애는 빨리 큰대도 얜 심하게 컸잖아.
“이러니까 꼭 쎄쎄쎄 하는 것 같네. 동생들이랑 자주 하거든.”
“전 선배 동생 아닌데요. 할 생각도 없고요.”
왠지 목소리가 뚱하게 들렸다. 발갛고 도톰한 아랫입술도 평소보다 살짝 튀어나왔다. 지금 삐친 거야? 나 참. 저 귀여운 표정은 대체 뭔데.
김희도의 손을 놓으며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뚱한 표정을 풀고 씩 웃은 김희도가 제 뺨을 매만지는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 이번엔 제가 임성의 손을 감싸 쥐었다.
“경기 준비해야지.”
“네.”
엄지손가락이 손등을 간지럽히듯 미묘하게 쓸고선 떨어졌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임성은 목을 살짝 움츠렸다가 김희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올 때 떡볶이 사 올게요. 선배 좋아하는 곤약 많이 넣어서요.”
마치 회사에 다녀오겠다는 듯한 말투에 웃음이 터졌다.
* * *
5월 5일 어린이날. 재작년과 작년, 2년 연속 원정이었던 페어리즈는 올해 홈에서 치르게 됐다. 요새 페어리즈의 성적이 워낙 좋은 덕인지 바로 매진됐단다.
<그깟 공놀이!> 역시 우려의 글들로 가득했다.
-우리 꼬꼬마요정들 절대 울리지 마. 빠따들아 일해라. 그러라고 연봉 주는 거야.
-양심이 있다면 이번엔 꼭 이겨.
-올해 7세 우리 아들. 작년 12:0으로 지는 거 보고 이게 인생의 쓴맛이냐고 묻더라ㅋㅋㅋ
비슷한 내용의 글이 도배되다시피 했다. 지난 5년간 어린이날에 패배했으니 팬들의 걱정도 이해됐다.
임성은 원래도 일찍 출근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구장에 도착했다. 라커룸에 짐을 갖다 놓고 복도로 나왔다. 웬 남자가 라커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지난 2년간 이리저리 오가며 안면을 익힌 마케팅 팀 직원, 홍윤현이었다.
“누구 찾는 사람 있어요? 안에 아무도 없는데.”
“어, 김희도 선수 없어요? 아까 이 근처에서 만났거든요.”
“그래요? 웨이트실이나 훈련장에 있나 봐요. 급한 일이면 전화해 볼까요?”
“급한 건 아니고, 아니 급한 게 맞긴 한데…….”
홍윤현은 누가 봐도 급해 보이는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역시 할 말 있나 보네. 휴대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는 임성을 홍윤현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임성 선수. 혹시 오늘 사인회 있는 거 아세요?”
“희탁 선배랑 재영이 형이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출근할 때 현수막 붙어 있는 거 봤어요.”
“그게, 사실은 우리 팀 직원 중 한 명이 실수해서요…….”
굳이 저 말을 꺼낸다는 건 준비한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임성은 휴대폰을 하던 손을 멈추고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윤현의 말인즉슨, 사인회에 관한 내용을 오전에 SNS에 기재했는데, 어느 팬이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홈페이지 득표수가 누락 됐고, 이 표수를 적용하면 최희탁이 아닌 권재영과 김희도가 뽑히는 것이었다.
김희도를 뽑았던 팬들은 ‘구단이 무슨 좆소도 아니고 일을 이렇게 처리하냐.’ ‘마케팅 팀 일 똑바로 처리 안 하냐. 이럴 거면 때려치워’ 하며 난리가 났다. 김희도가 MVP 인터뷰 등을 제외하면 잘 볼 수 없는 선수라 원성이 더욱 자자했다.
급히 SNS 피드를 내리고 최희탁에게 죄송하단 말과 함께 사정을 설명했다. 최희탁은 전혀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젊은 선수가 뽑히는 게 더 좋지 않으냐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였다.
자, 여기까진 문제가 없다.
“김희도 선수에게도 말했거든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사인회에 참여하실 수 있겠냐고요.”
“그럼 다 해결된 거 아닙니까?”
임성의 질문에 홍윤현이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사인회는 12시에 시작해서 한 시간쯤 걸릴 거예요. 참여하실 수 있으시죠?’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들은 홍윤현은 제대로 된 대꾸도 못 하고 네, 네? 만 내뱉었다. 농담하는 건가 싶었는데 김희도의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참여 안 하시게요?’
‘팬 사인회를 여는 목적이 뭐죠?’
‘팬들이 좋아하니까요. 정식 사인회는 그리 많이 열리지 않잖아요.’
‘반응 없는 선수에게 사인을 받는다고 과연 팬이 좋아할까요?’
난 아닐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김희도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김희도 선수 컨디션이 안 좋으셨나 봐요.”
홍윤현은 김희도와 주고받은 대화를 임성에게 조심스레 전달했다. 그 말을 들은 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것도 아닌 팬 사인회잖아. 김희도가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평소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살짝 부풀려서 말했을지도 모르지.
“그 후에 김세현 코치님이 물어봤는데도 거절했대요. 혹시…… 괜찮으시면 임성 선수가 한번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두 분 친하시잖아요.”
“코치님 말을 거절한 애가 제 말은 듣겠어요?”
다른 사람 눈엔 자신과 김희도랑 친해 보이는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최근엔 운동도 식사도 모두 김희도와 함께했던 것 같다. 원정 룸메이트기도 했고. 뭘 하고 있으면 어느새 김희도가 옆에 서 있었다. 이 정도면 친한 거 맞네. 얼떨떨하게 수긍했다.
하지만 저를 잘 따르는 편이라도 마음을 돌릴 것 같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 없는 일에 홍윤현은 두 손까지 모아 가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진짜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은혜랄 것까지야.”
오죽하면 제게 부탁했을까 싶어 받아들였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임성은 의무실에서 테이핑 중인 김희도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세상 관심 없는 표정으로 테이프를 손목에 감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입매가 미세한 호선을 그리고 뺨이 살짝 솟아올랐다.
“테이핑 하고 있네. 내가 해 줄…… 헉.”
김희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반쯤 감았던 테이프를 완전히 풀어 버렸다. 꼼꼼하게 잘 감은 것 같던데, 아깝게.
안타까워하는 임성에게 스포츠 테이프를 건네곤 곧이어 손을 내밀었다.
의자를 끌어 그의 옆에 앉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이번 팬 투표 1위 했다며. 올해 데뷔한 신인이 벌써 1위라니, 팬분들이 힘내 주셨네. 되게 감사하겠어.”
“네. 감사하네요.”
전혀 감사하지 않은 얼굴로 기계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럴수록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짙어졌다.
“그만큼 널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잖아. 널 좋아하는 사람들이 네 사인을 받고 싶어 한다고.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나도 팬 투표 1위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김희도는 의무실 벽에 붙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직원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직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후다닥 몸을 숨겼다.
갑자기 왜 찾아왔나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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