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오메가버스 ver.) 4
몸이 좋아서인가, 자꾸만 시선이 갔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와 너른 등, 움직일 때마다 유연하게 드러나는 근육이 보기 좋았다.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어 지금 어느 부위를 위주로 운동하는지 잘 보였다.
자신도 어디 가서 빠지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김희도는 뭐랄까, 불필요한 부분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허리와 등도 좋지만, 특히 어깨가…….
“진짜 탐나네.”
“그럼 가져요.”
“어?”
“입맛 다실 정도면 가지라고요.”
묘한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에 임성이 손등으로 입가를 슥 닦았다. 다짜고짜 탐난다는 말 한 저도 웃기지만, 뭔지도 모르면서 가져가라는 김희도도 웃겼다. 의외로 농담을 잘하는 성격인가.
“대신 저도 하나 가져갈게요. 등가교환, 어때요?”
“그러자. 뭔지 몰라도 네 어깨보단 싸게 칠 것 같은데?”
팀원들끼리 으레 주고받는 가벼운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김희도가 가져간 것은 임성이 쓰고 온 모자였다. 구단에서 지급하는 모자라 생긴 건 똑같을 텐데. 이런 게 왜 필요하냐는 말에 그는 “여러모로.”라는 알 수 없는 대답을 남겼다. 늘 일자로 굳었던 입매가 슬쩍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글러브를 소중히 껴안은 임성이 그라운드로 나왔다.
“날씨 엄청 좋네.”
원정팀 더그아웃 쪽에서 유니콘즈가 간단한 훈련 중이었다. 중간중간 민트색 유니폼도 보이는 걸 보니 우리 팀 선수들이 놀러 갔나 보다.
품 안의 글러브를 매만지며 걷는 등 뒤로 김희도가 따라붙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팔락대며 뛰어오는 모습 위로 커다란 강아지가 겹쳐졌다.
“선배, 저랑 캐치볼 같이 해요. 공 가져올게요.”
요 며칠 김희도를 겪어 본 결과 싸가지 없다는 느낌은 전혀 못 받았다. 오히려 세심하고 잘 챙겨 주는 쪽에 가까웠지.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 봐야 한다니까.
“성이 오랜만이네. 준비 잘하고 왔나?”
김희도가 공을 가지러 간 사이 타격 코치가 컨디션은 좀 어떠냐며 다가왔다.
“너무 좋습니다. 구장 냄새 맡으니까 설렙니다. 생각 같아선 완투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심장이 빠르게 뛰고 묘하게 흥분됐다. 오랜만에 1군 구장이라 긴장한 건가? 벌써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 쟤랑 무슨 얘기 했냐? 분위기 좋아 보이던데.”
“김희도요? 캐치볼 하자고요.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김희도가 누구한테 말 붙이는 거 처음 봐서. 깜짝 놀랐잖아.”
“에이, 코치님. 오버가 너무 심하십니다. 시즌 개막한 지가 언젠데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에게도 말을 안 붙이는 게 말이 되나. 그건 사회성 없는 걸 넘어섰잖아.
웃으며 건넨 말에 코치는 눈을 크게 뜨며, 진짜라고 지나가는 애들 붙잡고 물어보면 열에 열은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거라며 열변을 토했다.
“쟤 붙임성 엄청 좋던데요? 이번에 콜업 될 때 희도가 데려다줬어요. 이천에서 서울까지 직접요.”
“김희도가 붙임…… 임성, 너 진짜 컨디션 괜찮은 거 맞냐? 아직 몸 덜 올라와서 헛것 보이는 거 아니지?”
“컨디션 좋습니다.”
코치와 서로 투닥대고 있으니 “임성 선배.”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코치님의 팔을 잡은 자세 그대로 뒤를 돌아보자 야구공과 글러브를 쥐고 있는 김희도가 보였다. 그는 임성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뒤늦게 코치를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봐요. 꼬박꼬박 인사도 하고, 얼마나 예의 바르고 착해.”
코치님의 옆구리를 가볍게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허 참, 저놈이 하지도 않던 인사를 갑자기 하네.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코치가 김희도를 힐끔대며 중얼거렸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캐치볼 하고 러닝 해야죠.”
웨이트, 캐치볼, 러닝. 제 루틴을 그대로 읊는 김희도를 보니 왠지 모를 만족감이 느껴졌다. 임성은 여전히 탐나는 어깨에 팔을 걸치며 그의 손에서 공을 가져갔다.
“좋아. 안 봐줄 거야.”
“오히려 환영입니다. 절대 봐주지 마세요.”
김희도의 육체가 탄탄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송구가 정확했다. 파앙. 팡! 붉은 실밥이 감긴 공이 깨끗한 포물선을 그리며 글러브에 기분 좋게 안착했다.
와, 이 정도 어깨면 투수를 했어도 대성했겠다. 이 방향으로도 던질 수 있으려나. 일부러 글러브를 오른쪽으로 옮겼는데도 보란 듯 빨려 들어왔다. 순간적인 판단력도 좋은 듯했다. 센스와 재능, 둘 중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캐치볼 잘하네.”
“이 정도는 해야 선배 앞에 서죠.”
만족스러운 캐치볼을 마치고 김희도와 함께 그라운드를 뛰기 시작했다.
뛰기 직전 스파이크 끈을 다시 조여 매는데, 뽀송뽀송하고 보드라운 것이 목에 닿았다. 허리를 굽힌 채 눈동자만 힐끔 들었다. 제 어깨에 수건을 둘러 주는 김희도가 보였다. 아니, 보였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그의 표정을 가려 잘 모르겠다.
* * *
성공적인 시즌 첫 1군 무대를 마친 임성은 땜빵으로 돌려 막던 5선발로 낙점받았다.
이닝 못 먹고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달리 선발로 제 몫을 다했다. 팬 사이트에선 저렇게 잘하는데 왜 지금 선발 전환 했냐는 소리가 나왔다.
<그깟 공놀이! 한 줄 게시판 4월 26일(수)>
■분류: 이솔 페어리즈
-야구공1: VS BS샤크스 같이 달리자!!!(선발: 임성)
오늘의 라인업은 공지 참조
승리하면 요정. 지면 나방~~~ㅋㅋㅋ
페어리즈 파이팅!!!!!!!!
.
.
-페어리즈 야구공523: 경기 끝!!!! 이겼다!!!!!!!!!!!!!!!
-페어리즈 야구공623: 성이 투구 보고 개안했읍니다,,,
-페어리즈 야구공624: 성아 너땜에 내 잇몸 다 말랐다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팀 복덩이ㅠ
-페어리즈 야구공625: 개지림ㄷㄷㄷ
-페어리즈 야구공626: 이야;; 구위 좀 보소;; 존나 잘하네ㅋㅋ 비시즌에 진ㅉㅏ 이 악물었나보다
-페어리즈 야구공627: 하 씨발.. 진짜 올해는 찐이다ㅠㅠㅠ 페어리즈 우승 간다!!
-페어리즈 야구공628: 임성은 시즌 시작할때마다 변화구 하나씩 달고 오잖아. 몸 만드는거 보면 존나 기특함ㅋ 이 새끼가 우리팀 미래 1선발임. 이태영 백성민 권재영은 좀 배우길
-페어리즈 야구공629: ??가만있는 권재영 머리채는 왜 잡음? 권재영 작년에 세이브 3위인 건 알고 말하냐? 존나 알못티네네ㅋㅋㅋ 별개로 오늘 임성은 잘함
-페어리즈 야구공630: 628번놈 또!또 나만 아는 척!
-페어리즈 야구공631: 성아아아아아악!!!!!!!!!!!! 사랑한다아아아악!!!!!!!!
-페어리즈 야구공632: 최희탁 병살ㅡㅡ;; 존나 찬물;
-페어리즈 야구공633: 하 씨발 시즌전에 우리 팀 꼴지로 뽑았던 놈들아 보고있냐? 이게 킹갓페어리즈다♥♥
-페어리즈 야구공634: 임성 싸랑해ㅠㅠㅠ 너의 존잘 얼굴도, 존잘 실력도
그 후 다른 경기.
임성은 그날도 좋은 투구를 보였다. 젊은 투수의 호투에 타자들의 방망이도 불을 내뿜으며 4, 5회 연속 빅이닝을 만들었다.
임성은 6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관중들의 환호로 달아오른 공기를 깊이 들이켜며 공을 힘껏 뿌렸다.
팡-! 포수 미트에 공이 꽂히는 소리가 무겁고 경쾌하게 울렸다. 화끈대는 어깨만큼이나 기분 좋은 고양감이 느껴졌다. 아드레날린이 펑펑 뿜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상대 팀 선수를 빠르게 돌려세우고 페어리즈의 공격 순서가 다시 돌아왔다.
“김희도. 홈런 치고 와라. 할 수 있지?”
안타 쳐라, 홈런 쳐라. 이런 말은 타석에 나가는 타자들에게 의례상 건네는 격려와 다름없었다.
“믿고 있으니까 잘해. 인마.”
찰싹. 손바닥에 닿는 엉덩이의 감촉은 탱탱볼처럼 유난히 차지고 탄력 있었다. 손으로 누르면 바로 튕겨 나올 것 같았다.
자식, 하체 운동 열심히 하는구나.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김희도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어, 어어? 어! 어! 넘어간다, 넘어갔다! 와, 미친. 진짜 넘어갔어.”
폭죽처럼 좌측 허공을 빠르게 날아간 공이 담장을 가뿐히 넘겼다. 앞서 진루해 있던 두 명의 페어리즈 선수가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점수를 올렸다.
우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구장을 미친 듯 뒤흔들었다. 민트색 깃발과 96번 유니폼이 태풍을 만난 것마냥 여기저기서 흔들렸다.
김희도의 데뷔 첫 홈런이자, 쓰리런이었다.
“저거 완전 미친 새끼네.”
누군가 중얼거렸다. 펜스 밖으로 상체를 쭉 뺀 채 먹이를 발견한 미어캣처럼 그라운드를 보던 팀원들이 일제히 양손을 뻗으며 환호했다. 임성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뻗었으면 장외 홈런이었다.
김희도는 배트를 던지며 베이스를 돌았다.
“음?”
나이스. 나이스! 감탄과 함께 박수를 치던 임성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기분 탓인가, 왠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데.
공작 꽁지깃처럼 길게 빠진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홈런을 치고부터 더그아웃으로 돌아올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때요? 잘했어요?”
어느새 눈앞에 선 김희도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어? 잘, 잘했지. 진짜 잘했어.”
너무 기특해. 살짝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동생들도 숙제 검사받을 때 ‘오빠, 나 잘했지?’ 하고 묻곤 했다.
‘그러엄. 우리 공주님들 너무너무 잘했어.’
그때마다 머리를 쓰다듬다 보니 무심코 나온 행동이었다. 순간 김희도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너무 친한 척했나 싶어 얼른 손을 떼어 내려는 순간, 김희도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콘크리트처럼 굳었던 눈꼬리가 나른하게 풀리고 입술 양쪽이 크게 벌어진, 환하게 쏟아지는 햇볕 아래 물방울이 터지는 것 같은 청량한 미소였다.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과 기다란 눈꺼풀,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마저 풋내가 가득했다.
“…….”
임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