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15/41)

#외전 2

프로야구.

야구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로 구성된 팀들이 펼치는 구기 종목. 한국에서는 통칭 KBO로 불린다. 1982년에 창단해 약 40여 년간 크고 작은 일들을 거치며 원년 팀은 총 세 팀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하나인 이솔 페어리즈의 통산 우승 횟수는 3회였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총 세 번밖에 우승하지 못했다는 말로 강산이 한 번 바뀌는 시간보다 길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가을 야구 진출은 무려 10여 년 전, 신인왕 배출은 10년도 훨씬 전. 심지어 최근엔 중하위권만 맴돌았으니 팬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공을 던지는 놈들도 지들이고, 치는 것도 지들이고, 연봉을 받는 것도 지들인데 왜 팬이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게다가 티켓값까지 꼬박꼬박 받으면서. 팬들에게 죄가 있다면 어쩌다, 하필이면 그 팀의 팬이 됐다는 것뿐.

가끔 신규 유입된 팬들이 “페어리즈 8위 아니에요? 꼴찌라더니 뒤에 두 팀이나 더 있잖아요.” 하고 순진무구하게 질문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으니, 지금은 신생 팀이 생겨 구단 수가 총 10개지만, 과거엔 8개 팀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 8위를 했다? 결국 꼴찌라는 말과 같았다.

온갖 조롱과 고통을 받았던 페어리즈 팬들은 올 시즌 우승이라는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커뮤니티를 통해서도 쉽게 드러났다.

<그깟 공놀이! 자유 게시판>

■분류: 전체

[잡담] 이솔 페어리즈:: 오늘 피부과 갔다가 문전박대 당함 (댓글14)

(내용)

얼굴에 광이 난다고 안 받아준다함..

이게 바로 우승 테라피인가?

(댓글)

1.야구공: ㅅㅂㅋㅋㅋㅋ 이런건 어떻게 생각하는 거임ㅋㅋㅋ

2.야구공: 누가 보면 지가 우승한 줄ㅋ

↳4.야구공: 원래 팀과 팬은 한 몸인 거 모름? 팀승리=내승리

3.야구공: ㅋㅋㅋㅋㅋ

↳8.야구공:??

5.야구공: 심판 편파하는 거 존나 티 나더만ㅋㅋㅋ

↳10.야구공: 넹~ 열폭 오지고요. 꼬우면 너희팀도 우승하든가^^

↳11(=5).야구공: ???우리팀 우승 많이 했는데?ㅎㅎㅎㅎ

↳12.야구공: 그래서 어쩌라고?????

↳14.야구공: 여기 누가 물어 본사람?ㅎㅎ

6.야구공: 우승 테라피ㅋㅋㅋ

7.야구공: 응원 팀 우승과 내 삶은 밀접하다. 왜냐면 내 기분이 좋기 때문에

↳13.야구공: ㄹㅇ

[잡담] 전체:: 아... 페어리즈 팬들 존나 나대네ㅡㅡ (댓글 3)

(내용)

응. 더 나댈거야^^ㅎㅎ

(댓글)

1.야구공: 제목 어그로ㄷㄷㄷㄷ

2.야구공: 욕 박으러 왔다가 인정하고 감;;;

3.야구공: ㅇㅇ 내년 우승 팀 나올 때까지 나댐 인정

[잡담] 이솔 페어리즈:: 김희도vs권재영vs임성 (댓글 17)

(내용)

(댓글)

1.야구공: ???? 어쩔?

2.야구공: 같은 팀끼리 대체 VS는 왜 붙이는 건데? 어그로임?

↳5.야구공: 걍 재미지 뭐ㅋㅋ 난 김희도

3.야구공: 재영아. 중간에 너 이름 넣으면 안 들킬 줄 알았냐?

↳4.야구공: 뭔 말이야?

↳6.야구공: 존잘남들 이름 중에 뜬금없이 재영이가 나오니까??

↳7.야구공: 아... ㅇㅋ 합리적 의심ㅋㅋㅋㅋ

0.야구공: 얼굴 말하는 거였음... 내 취향은 임성~~~~~~~

8.야구공: 김희도 진심...잘생김

↳9.야구공: 22222

↳11.야구공: 3333

↳14.야구공: 3333

10.야구공: 임성!

↳12.야구공: 나도

↳13.야구공: 333내취향도ㅋㅋㅋㅋ 존잘

↳15.야구공: 존잘4444 유니폼 잘 받음

16.야구공: 권재영 이름 없는 거 실화임?ㅠㅠㅠ 하지만 나도 임성

한국 시리즈가 끝나고 두 달이 조금 안 된 12월 둘째 주 화요일, 포지션별로 뛰어난 선수를 선별하여 상을 수여하는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열렸다.

수상자 선정은 그 해 KBO리그 담당 취재기자 및 해설위원, 중계 방송사 PD 등 미디어 관계자들의 투표로 이뤄졌다.

현장을 잘 아는 취재기자야 그렇다 치고, 방송사 PD와 아나운서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일각에선 공정치 못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실력보다 인기 있는 선수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는 건 선수에게 큰 영광이었다.

“어? 임성이다. 임성. 여기요, 사인해 주세요!”

시상식 장소에 도착 후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귓가를 파고드는 함성 소리에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많은 취재진과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에 1차로 놀랐고 영화 시상식처럼 빨간색 카펫이 깔린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환대에 어색하게 서 있던 임성은 제게 내밀어진 야구공을 얼떨결에 받았다.

그 외에도 종이와 휴대폰, 유니폼 등이 눈앞에서 마구 흔들렸다. 모두 사인 요청이었다.

“저도요! 저도 해 주세요. 페어리즈 응원했어요. 모태 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인을 해 주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장소와 시간이 제한적이었다. 임성은 어린 팬 위주로 빠르게 사인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늙은 것도 서러운데 사인도 못 받네. 늙은 팬도 팬이다!”

어린이들만 사인해 준 걸 눈치챈 팬이 한탄을 했다. 장소가 꽤 크고 넓은데도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통제하던 경호원들마저 입꼬리를 씰룩댔다.

임성은 소리 내 웃으며 자칭 늙은 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해 주세요. 신지원. 이름도 써 주세요.”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팬이 내민 건 페어리즈의 69번 유니폼이었다. 제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보는 건 여전히 쑥스러웠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고 사인을 했다.

팬들은 부끄러워하는 임성을 연신 찍어 댔다. 아마 각종 해시태그와 함께 곧 SNS에 업로드 될 것이다.

“어? 김희도다. 김희도 왔나 봐.”

와글와글하던 관심은 한 남자의 등장과 함께 그에게 순식간에 옮겨갔다. 사람들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임성은 무표정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 입을 살짝 벌렸다.

지금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헷갈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안녕하세요. 선배.”

“너 옷이…….”

“왜요?”

김희도가 뭐가 잘못됐냐는 듯한 표정으로 제 옷을 내려다봤다.

일정 기준을 넘기면 누구나 골든글러브 후보가 될 수 있지만, 당연히 성적이 좋을수록 수상 가능성이 높았다. 김희도처럼 인상적인 활약을 보인 경우엔 거의 이름을 새겼다 볼 수 있었다.

후보자들은 모두 정장을 갖춰 입고 왔다. 규정으로 정해진 것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기사도 나고 사진이 찍히기도 해 최대한 멀끔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불문율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김희도는…….

“이상해요?”

제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을 헤치며 걸어 온 김희도가 고개를 바싹 들이밀며 물었다.

이상하냐고? 아니. 임성이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젓자 살짝 어두웠던 표정이 풀어졌다. 김희도가 빙그레 웃는 순간, 잦아들었던 웅성임이 커지며 “존나 잘생겼다.” “미친.” 같은 뜻이 분명한 감탄이 터졌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당사자를 대신해 임성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만큼이나 찰칵찰칵 소리가 쏟아졌다.

“화장실에 좀 들렀다 가자.”

임성은 포토존에 서기 앞서 화장실에 들러 반쯤 열린 김희도의 코트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제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그의 목에 감았다. 김희도는 제 목을 부드럽게 감싼 남색 목도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임성, 김희도. 여기다, 이리 와.”

시상식장에 들어가자마자 권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큰 소리였다. 양팔을 마구 흔들고 있는 권재영뿐 아니라 후보에 오른 페어리즈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성이 너 입구에서 팬 사인회 열었다며? 벌써 소문 쫙 났더라.”

“안녕하십니까. 팬 사인회까지는 아니었어요.”

“아니긴. 팬 서비스 좋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기특한 자식, 앞으로 더 잘해라.”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권재영이 별안간 눈을 깜빡였다.

“너 벌써 몸 만드냐?”

“몸이요?”

뭔가 달라 보이나? 임성이 무의식중에 제 가슴팍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약간 슬림해진 것 같아서. 야, 누누이 말하지만 쉬는 것도 관리야. 벌써부터 달리다간 시즌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다?”

“저 살 빠졌어요?”

남는 시간을 운동에 쏟아붓던 과거와 달리 요새는 아침저녁 두 타임씩밖에 하지 않았다. 그 후엔 주로 김희도가 데려가는 보양식 위주의 음식점에서 배가 터져라 먹고, 드라이브를 즐긴 후 야식까지 먹고 헤어졌다. 한창 몸 만들 때와 비교하면 펑펑 노는 수준에 가까웠다.

“어휴, 이것 좀 봐라. 볼살이 쏙 빠…… 어, 그래 희도. 왔냐?”

임성의 얼굴을 향해 뻗어 가던 손은 예상치 못한 사람과의 악수로 끝을 맺었다. 중간에 끼어든 김희도가 대뜸 권재영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던 것이다.

김희도가 먼저 손을 잡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권재영 또한 놀랐는지 순간 흠칫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악수를 했다. 페어리즈 선수들이 경악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희도는 바로 손을 놓고는 바지에 비벼 닦았다. 다소 무례한 행동에도 권재영은 개의치 않고 양팔을 벌리고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희도야. 나 오늘 어떠냐? 신경 좀 썼는데.”

“별…….”

야, 인마. 무슨 대답을 하려고. 김희도의 대답을 어렵지 않게 예상한 임성이 그의 앞을 황급히 막아서며 권재영을 향해 엄지를 치켜올렸다. 처음엔 하나만 올렸다가 나머지 엄지도 세워 쌍따봉을 만들어 흔들었다.

“재, 재영이 형! 엄청 멋있어요. 특히, 넥타이가 너무 멋져요. 완벽 그 자쳅니다.”

두서없이 날린 칭찬에 권재영이 멋쩍은 표정으로 나비넥타이를 고쳐 맸다. 살짝 과한 차림이었으나 권재영은 충분히 수상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이해됐다.

“여기 온다고 일부러 양복 하나 했잖아.”

“각이 딱 잡힌 게 형을 위해 만든 것 같습니다. 역시 재영이 형. 안 어울리는 옷이 없네요.”

“하, 임성 이거 이 자식. 그렇게 솔직해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래? 사람이 거짓말도 좀 할 줄 알아야지.”

크게 웃은 권재영이 임성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는 칭찬이 있으면 가는 칭찬 또한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너도 멋…… 음, 어…… 아, 우림이 형! 왜 이제 와요. 다들 기다렸잖아요.”

미간을 좁힌 채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던 권재영이 송우림을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갔다.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 같은 건, 자격지심인 걸까? 임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제 옷을 살폈다. 셔츠 깃에 포인트가 살짝 있는 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였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지 않나?

“성이는 오늘도 이상하게 입었네.”

권재영의 빈자리를 메꾼 건 주장 최희탁이었다.

“네? 이상하다고요?”

“셔츠 깃에 그거, 고사리무늬야? 그런 옷은 대체 어디서 구하냐? 누가 보면 벌칙 게임인 줄 알겠다.”

최희탁은 자신이 폭탄을 떨어트린 줄도 모르고 다른 팀 선수와 태연히 대화 하러 갔다. 나름 신경 써서 입었다고 생각했고, 자신 있던 터라 충격이 컸다.

“하나도 안 이상해요.”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김희도가 대답했다. 채 물어보기도 전에 대답했다는 게 살짝 자존심 상했다.

“어디서 보니까 네가 내 패션 칭찬하는 거 멕이는 거래. 우리 불화설 돌았더라.”

김희도는 뭔 개소리야, 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팀원끼리 불화설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

“우리 친밀한 사이라고 기자회견이라도 할까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너 이따 행여 수상소감에 그런 소리 했다간 봐.”

김희도라면 폭탄 발언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아 거듭 강조했다.

에이. 김희도는 마지못한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선배가 제일 멋있어요. 다른 사람은 눈에도 안 들어오는걸요.”

“……너 그걸 세간에선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뭐라고 부르는데요?”

“콩깍지.”

자신 또한 ‘김희도 귀엽다’를 입에 달고 산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콩깍지가 왜 나와요? 난 진심인데.”

그래, 그래. 임성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자리에 앉았다.

단상 바로 앞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즐비해 있었는데, 벌써 노트북을 두드리며 기사를 쓰는 기자가 많았다. 그리고 대본으로 보이는 종이를 빠르게 넘기며 중계를 준비 중인 아나운서도 있었고, PD와 카메라 감독 등 수많은 사람들이 시상식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입구에서는 팬들이 계속해서 입장하고 있었다. 오늘 시상식에 온 팬 숫자만 약 300명가량이라더니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임성. 오랜만이다. 시즌 끝나고 처음 보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시즌 끝나고 처음입니다.”

임성이 일어서려는 기미를 보이자 김이설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으며 올해도 유력 후보답게 정장을 쫙 빼입었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늘씬해 정장 차림이 곧잘 어울렸다. 살짝 탄 피부까지 건강미를 더했다.

“야, 근데 코시 엄청 힘들었나 보다. 살이 쪽 빠졌네?”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가며 임성을 살펴보던 김이설이 툭 내뱉었다. 권재영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지적이었다. 평소보다 운동 시간은 짧고, 밥은 많이 먹는데 살이 왜 빠질까?

“인사했으니까 간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

“골글 기대하겠습니다. 선배님.”

“그 말은 네 옆에서 도끼눈 뜨고 있는 애한테 해.”

김이설이 어깨를 으쓱이며 김희도를 턱짓했다. 도끼눈을 떴다는 말에 얼른 옆을 봤지만,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표정 변화 빠르네. 아무튼 나보다 걔가 더 가능성 있지. 진짜 간다.”

농담 섞인 진담을 내뱉은 김이설이 유니콘즈 선수들이 모인 자리로 돌아갔다.

팟. 다소 어둡던 강당이 밝아지며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됐다.

* * *

“외야수 부분, 이솔 페어리즈 김희도.”

당연히 받을 거라고 예상했음에도 막상 이름이 불리자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벅차올랐다. 주먹으로 무릎을 퍽 치며 김희도를 돌아봤다. 아마 그도 감격스러워 할…….

“다녀올게요.”

놀랍도록 평소랑 똑같구나.

“희도야. 코트 벗고 가.”

감격은커녕 집 앞 분리수거함에 가는 듯 무심하게 일어나는 김희도의 옷깃을 붙잡았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김희도가 몸을 감싼 감색 코트를 벗었다. 목도리는 풀기 싫은지 머뭇거렸지만, 임성의 눈빛을 읽고 천천히 풀었다. 짙은 코트에 감춰져 있던 잘빠진 육체가 드러났다.

“진심으로 축하해. 상 잘 받고 와.”

네.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웃은 김희도가 조명이 쏟아지는 시상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질서 없이 늘어져 있던 카메라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를 찍었다.

“김희……, 김희도 선수는 올해 데뷔한 선수로 골든글러브 수상은 처음입니다. 신인 같지 않은 실력으로 팀이 우승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신인왕에 이어 골든글러브까지 품에 안습니다.”

단상에 오른 김희도를 보고 살짝 당황했던 사회자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멘트를 이어 나갔다. 노련미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객석에선 여전히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쟤 지금 우리 유니폼 입고 온 거 맞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송우림이 막 단상에 올라가는 김희도를 손가락질했다.

“잘 어울리잖아요.”

임성이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서프라이즈가 따로 없었다. 화장실에서 옷을 여미고 목도리로 꽁꽁 숨기길 잘했어.

“어울리기야 잘 어울……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시상식에서 유니폼을 입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대담한 새끼. 사람들의 시선 따윈 가뿐히 무시하는 결단력, 진짜 존경스럽다.”

와. 와아. 송우림이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존경은 하지만 제정신이 아니란 뜻이었다.

“쟤 진짜 신인 맞냐? 알고 보면 20년 차 베테랑 아니야?”

운동선수가 유니폼을 입는 게 뭐 그리 특이하겠냐마는 앞서 말했다시피 시상식엔 정장을 걸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저렇게 대단한 애가 바로 제 애인입니다! 대나무 숲에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꽃다발을 건네러 갔다.

상을 받는지 벌을 받는 건지 도통 가늠이 안 되던 김희도는 활짝 웃으며 임성이 주는 꽃을 받아 들었다. 주는 보람이 있는 모습에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넌 늘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전 한 번도 선배를 예상하지 못했는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임성 말고도 코치진 몇 명과 최희탁, 권재영 등이 그에게 꽃다발을 줬다. 김희도의 착장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송우림도 후배에게서 꽃다발을 강탈해 김희도에게 턱 안겼다. 평소 팀원들에게 데면데면하게 구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장면이었다. 저렇게 조금씩 팀에 융합돼 가겠지.

“페어리즈 김희도 선수.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많은 꽃 중 임성이 준 것만 들고 나머지는 내려놓은 김희도가 마이크 앞에 섰다. 불꽃처럼 터지는 플래시 속에서 김희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구를 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야구를 조금 더 좋아하고 즐길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김희도는 찬란하고, 빛이 났다.

강하다는 건 여유롭다는 거구나.

여태 임성은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건 한 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오래 마운드에 서기 위한 조건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트로피를 품에 안고 당당하게 선 김희도를 보니 욕심이 났다. 자신도 저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자리로 돌아온 김희도가 황금색 트로피를 무릎에 내려놨다. 생각보다 크고 모양이 세밀했다.

“야구 잘한다는 티가 팍팍 나는 트로피네.”

“줄까요?”

벌써 몇 번째 저 말을 듣더라. 언뜻 기억나는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였다.

나 김희도에게 받을 거 많구나.

“손도 주고 얼굴도 주고 이제 트로피까지 주게?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냐?”

“그럼 하나만 줄게요.”

셋 중에 고르라는 말인가? 실행 불가능한 농담인 걸 알면서도 고민에 빠졌다. 재능이 집결된 손이냐, 잘난 얼굴이냐, 황금 트로피냐. ……손 말고 어깨로 할까. 쟤 어깨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단 말이야.

“나.”

“뭐?”

“나 가지면 나머지도 다 갖는 거잖아요.”

여태 고민하던 것을 무색하게 하는 당황스러운 답변이었다. 대체 저런 말은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학원이라도 다니나?

그 언젠가 ‘김희도는 싸가지 없는 로봇’ 같다던 조예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고맙게 받을게.”

“네?”

본인이 가지라고 했으면서 오히려 김희도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가로로 길게 뻗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신 깜빡였다. 귀엽기 짝이 없었으며 동시에 놀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냥 한 말이었어? 그럼 뭐 없던 일로 하고.”

“아니요! 아니요! 그냥 한 말 아니에요. 저 지금 완전 진심입니다. 저 갖고 가요. 줄게요.”

김희도는 머리카락이 붕붕 흩날릴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의지를 보이겠다는 듯 트로피를 임성의 무릎 위로 옮기기까지 했다.

이것 보라니까, 이런 귀여운 애가 로봇은 무슨. 슬쩍 웃다가 이내 웃음을 거두고 황금색 장갑 트로피를 응시했다.

글러브는 각 포지션마다 모양이 달랐고, 트로피 역시 포지션에 맞게 제작됐다. 아마 투수용 트로피는 이것과 다르게 생겼겠지.

“마음은 고맙지만, 트로피는 안 줘도 돼. 내년에 직접 받을 거라서.”

트로피에 향한 눈이 호기롭게 빛났다. 야구를 향한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던 임성이 오랜만에 드러낸 감정이었다.

“잘됐네요. 나도 받을 거거든요.”

선배 옆에 다른 놈을 세울 순 없잖아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그는 정말로 내년에 임성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내년에 메이저로 진출하겠다고 해도 김희도는 수긍하겠지. 선배가 간다는데 KBO 규정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고 말할지도. 자신도 따라가겠다며 깽판 칠 김희도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말릴 틈도 없이 미소가 흘렀다.

“같이 받자.”

무릎 위에 얌전히 올라간 손을 잡으며 씩 웃었다.

“선배…….”

“왜?”

“왜 그렇게 귀엽게 웃어요? 깜짝 놀랐잖아요.”

“…….”

잊을 만하면 나오는 ‘귀여워’ 공격은 ‘좋아해요’만큼 심장이 철렁이진 않았지만, 대신 손끝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졌다. 당장 공을 던지고 싶은 것처럼.

* * *

수상자들은 후속 인터뷰를 위해 남고, 팬과 다른 선수들은 시상식장을 떴다. 김희도는 “인터뷰 쨀까요? 그냥 가죠.” 하고 말하며 정말로 함께 나가려 했다. 깜짝 놀란 임성이 기다릴 테니까 인터뷰하고 오라고 겨우 말린 참이었다.

관계자들이 빠져나간 건물은 사뭇 조용했다. 달리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우선 걸었다.

인터뷰하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한 시간쯤 잡으면 될까. 들어올 때 보니 1층에 카페가 있던데 거기서 기다리면 되겠지.

금세 카페에 도착해 음료를 주문하고 구석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은 골든글러브 시상식 관련 기사가 점령했다.

[현장 스케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희도 “야구 할 수 있어서 다행.”

[기사] 팀 유니폼 입고 파격 등장한 김희도.

[사진] 페어리즈 김희도 “난 남들과 달라.”

[기사] 골든 글러브 영광의 수상자들

[포토] “연예인 뺨치는 외모” 김희도 등장에 장내 술렁~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려 가며 기사를 훑다가 메인 기사를 눌렀다. 꽃다발과 트로피를 품에 안은 수상자들의 단체 사진이 보였다. 번듯한 정장들 사이에 흰색 유니폼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가뜩이나 사람의 시선을 잘 끄는데, 하필이면 자리도 중간이라 김희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사람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관종이라느니, 때와 장소도 제대로 구분 못 한다느니, 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축하 댓글이 많았다.

임성은 베스트 댓글 「phr85:야구 선수가 본인 유니폼 입은 게 어때서? 멋있기만 함」에 공감을 꾹 누르고 화장실로 향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젖은 손을 닦으며 막 나가는데, 입구에서 남자 한 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임성이 멈칫했다. 상대방 역시 자신을 보고 놀란 듯 자리에 우뚝 섰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봐, 좋아 보인다. 이치연.”

마지막으로 본 게 유니콘즈와의 홈 경기였으니 대략 석 달이 좀 안 됐다. 그사이 두 사람 사이엔 단 한 번의 만남도 없었다. 하지만 알고 지낸 세월 덕인지, 잊을 만하면 걸어오는 이치연의 시비 덕인지 딱히 어색하진 않았다.

저쪽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 임성과 달리 이치연은 입을 꾹 다문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이젠 대답도 안 하네. 뭐, 딱히 상관없나.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가는 순간, 이치연이 “야.” 하고 불렀다. 그래. 이번엔 웬일로 그냥 넘어가나 했다.

“그 싸가지 없는 새끼가 상 받은 거 자존심 안 상하냐? 꼴에 네가 선배잖아.”

“뭐?”

“학교 직속 후배는 어쩌다 뽀록으로 신인왕에 골글까지 싹 쓸었는데…… 누군 꾸역꾸역 와선 쪽팔리게 박수나 치고 앉았잖아.”

“내가 왜 자존심이 상해야 하지? 그리고 뽀록이라도 타이틀 못 얻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여태 이치연이 어떤 시비를 걸든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임성답지 않은 거친 반응이었다.

“네가 뭘 안다고 마음대로 지껄여.”

김희도가 얼마나, 어떤 식으로 노력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웬 개소리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이치연과 대치하듯 마주 보고 섰다.

이치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마 제 얼굴도 그와 별반 바르지 않을 것이다.

“야. 이치연. 이렇게 된 김에 툭 까놓고 얘기해 보자. 내 어떤 점이 그렇게 꼴 보기 싫냐? 이유가 있을 거 아냐.”

“…….”

이치연 덕에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과 별개로 그의 적의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치연에게 잘못한 게 없었으므로.

이치연이 늘 입에 달고 사는 투수로서 자질이 없는 것? 그래서 우리 팀이 지는 것? 그거야말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결과가 어떤지 봐라. 이치연과 자신 중 누가 더 마운드에 오래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가 거슬려? 그런 거면 피곤하게 이러지 말고 서로 무시하자.”

말을 끝낸 임성이 가슴을 들썩이며 남은 호흡을 뱉어 냈다. 입맛이 썼다.

“뭘 모르는 건 너야. 네가 나에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뭘 모르는데.”

“넌 네가 약속을 깼다는 사실도 모르잖아. 지금.”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임성은 그를 쏘아보던 시선을 잠시 거두고 눈을 깜빡였다.

“무슨 약속?”

되묻는 말에 이치연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구겨졌다.

“코시에 나가면 내가 선발로 던지고 네가 치겠다는 약속.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도 무시하자는 말을 하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야구를 막 시작했을 때엔 재밌어 미칠 것 같았다. 소풍이나 운동회보다 야구단에 가는 날을 더 손꼽아 기다렸고,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에 튀어 나가 이치연과 야구를 했으니까. 야구 중계를 본 다음 날엔 나름 분석을 한답시고 둘이서 이상한 소리도 많이 했다.

그즈음 머릿속엔 온통 공놀이밖에 없었다. 잘못 던진 공에 맞아 몸에 멍이 들어도 훈장으로 생각했다.

‘야. 우리 나중에 꼭 같은 팀에 가서 우승하자. 선발은 당연히 나고, 넌 4번 타자해.’

임성은 지금보다 훨씬 어린 이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시리즈 우승. 그때도 지금도 가슴 뛰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 내 방어율은 0점대일걸?’

‘아마 난 6할…… 아니 7할 타자일 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며 킬킬대며 웃었지. 그래, 그랬어. 비록 그때 이치연이 한 말 중에 지켜진 건 하나도 없지만.

“표정 보니 이제 기억났나 보네? 내가 말하고 나서야 겨우.”

잊은 건 잘못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10년 넘게 시비 걸 일인가. 그렇게 물으려다가 이치연의 표정을 보고 말을 흐렸다. 제 생각이 어쨌든 적어도 이치연에게는 꽤 중요해 보여서.

“그랬으면서 투수 한다질 않나.”

“투수가 어때서? 라이벌이 될 것 같아서 그래?”

“웃기지 마. 지금 그 얘기 하는 거 아니니까.”

이치연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투수라서 너한테 피해 주는 거 있냐?”

“야. 네가 투수면…… 그라운드에 함께 못 서잖아. 내 뒤를 지키지도 못하고.”

“초…….”

초딩이냐?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겨우 삼켰다. 실제로 초딩 때 한 약속이 맞기도 했고.

자신과 같은 그라운드에 서는 게 그 정도로 중요했나. 이제껏 타자 어쩌고 타령 하던 것도 모두 다? ……도대체.

“왜?”

“뭐?”

“굳이 같이 그라운드에 서야 하는 이유가 있어?”

설마 반문이 돌아올 줄 몰랐는지 이치연의 어깨가 덜컹 흔들렸다. 짙게 난 눈썹 앞머리를 모으고 끝부분은 치켜 올린 채 인상을 썼다.

“약속이었잖아.”

“그래. 약속이었지. 하지만 그라운드에 함께 서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잖아. 오히려 같은 포지션인 게 대화가 더 잘 통하고.”

지금 자신은 투수였고, 김희도는 타자였다. 이치연과 어릴 때 했던 약속처럼 두 사람은 같은 그라운드에 섰고, 그 사실이 더없이 뿌듯하고 기뻤다.

하지만 설사 둘 다 투수였더라도, 그래서 한 명이 마운드에 서면 다른 한 명은 지켜볼 수밖에 없어도 함께하는 자체가 기쁘지 않나.

“네 생각을 내게 대입하지 마. 나는 꼭 같이 서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네 나름대로의 이유가 뭔데?”

이치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미간을 수놓은 잔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할 말을 고르는 중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임성은 다그치지 않고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건 내가…….”

머뭇머뭇 이치연의 입이 열린 건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마저도 문장이 완전히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내가. 그다음은? 그동안 타자 타령 하던 이유는 대략 알겠으니까 다음 챕터가 필요했다.

“내가.”

그래, 네가. 시선이 자연스레 이치연의 입술로 향했다.

이치연의 입이 다시금 열리는 것과 동시에 인기척이 들렸다. 한 손엔 휴대폰을 든 채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어오던 남자는 두 사람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소변기가 아닌 맨 뒤 칸으로 들어갔다.

임성은 그제야 여기가 화장실, 그것도 입구라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훌쩍 큰 데다가 체격까지 만만찮은 남자 둘이 떡 하고 버티고 있으니 놀랄 만하지.

“장소가 좀 그러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자.”

넌지시 건넨 제의에도 이치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페가 싫으면 적어도 사람 없는 곳에서 얘기하자고 말하려는데, 이치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가뜩이나 싸늘하던 분위기는 이제 누구 한 명 잡을 것처럼 흉흉했다.

설마 여기서 한판 뜨자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면서 한 발짝 다가섰다.

“이치연? 너 괜찮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사람 싫은 데 이유 있겠냐?”

임성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이치연 쪽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 들며 바닥을 쏘아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무의식중에 입을 벌리고 소리를 냈다.

잔뜩 찌푸린 눈과 굳은 입매. 지금 이치연은 누가 봐도 화가 나 보였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과 다르게 눈가가 미묘하게 달아올랐다.

분노와는 다른, 내가 이걸 언제 봤더라? 분명 처음은 아닌데.

“왜 같은 그라운드에 서고 싶었는지 꼭 듣고 싶냐?”

단 몇 분 사이에 이치연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임성과 눈을 맞췄다. 알 수 없는 눈빛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지. 상체를 물리는 순간, 강한 아귀힘으로 오른쪽 어깨가 붙잡혔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난 멱살을 잡아야 하나? 사정없이 구겨지는 코트를 곁눈질하는 사이 온갖 생각이 지나갔다.

“당장 손 떼.”

하지만 임성이 이치연의 멱살을 잡기도 전에 너른 등이 임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는 이치연의 손목을 비틀듯이 거칠게 잡아떼고 임성을 제 뒤로 숨겼다.

“희도야.”

아직 인터뷰할 시간 아닌가? 막내라서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평소라면 어떤 반응이든 보였을 김희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일그러진 이치연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 화났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는 듯 분노를 넘어선 살벌함이 느껴졌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 김희도의 표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경고했지. 선배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낮게 뱉어 낸 목소리에 이치연이 가소롭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경고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나 몰래 둘이 만난 적 있냐.

“경고? 지랄하네. 너야말로 상관하지 말고 꺼져. 이건 임성이랑 내 문제야.”

감색 코드에 감싸인 어깨 너머로 주먹을 치켜드는 이치연이 보였다. 아마 위협용에 가깝겠지만, 분위기는 더 나빠졌다.

“때려도 상관없는데, 그다음 벌어질 일은 나도 장담 못 한다. 어떻게 해서든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테니까.”

양쪽 다 활 사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듯 분위기가 사나웠다. 누구 한 명이라도 손을 놓으면 활은 주저 없이 날아갈 것이고, 손쓸 새도 없이 난장판이 될 게 뻔했다.

좀 진정하라는 뜻으로 김희도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때마침 화장실 칸에서 나온 남자가 손을 씻으며 힐끔 곁눈질했다. 그리고 젖은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친구에게 연락하는 척하며 카메라가 드러나게 세웠다.

누군지 알아보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도 눈치 챘을 텐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마 기자인가? 시상식이 막 끝났으니 아직 돌아가지 않은 기자가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임성은 얼른 김희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희도야. 나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잠깐만요, 선배. 저 아직 얘기 다 못 끝냈어요.”

평소엔 얌전히 따라올 애가 왜 이럴까.

“나중에 해, 나중에. 어차피 너희 내년에 맞붙게 돼 있어. 뭘 벌써부터 조바심 내냐? 이치연. 다음에 보자.”

“선배. 할 말이 남았……”

“김희도. 가자는 말 못 들었어?”

임성의 팔을 차마 뿌리칠 순 없었는지, 아니면 제 이름을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서 다른 걸 느꼈는지 김희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꽁무니 빼냐? 사람 기분 좆같이 만들고 도망가는 건 여전하네.”

이치연 저 자식은 왜 또 저래. 지금 분위기 안 읽히나? 임성이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빨리 상황을 마무리 해야겠어.

“저기요. 사인해 드릴까요?”

임성은 이치연의 말을 맞받아치는 대신 멀뚱히 선 이름 모를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네? 저, 저요?”

“알아보신 거 아닙니까? 페어리즈 팬 아니시면 여기 유니콘즈 투수도 있습니다. 휴대폰 케이스에 해 드릴게요. 주세요.”

빙그레 웃으며 건넨 말에 남자는 우물쭈물하더니 휴대폰 뒷면이 보이게 내밀었다. 하는 행동을 보니 다행히 기자는 아닌 것 같았다.

임성은 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 휴대폰 케이스에 사인을 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이치연이 어이없게 쳐다보는 걸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임성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남자를 웃으며 배웅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거 왠지 고등학교 부 활동 때 자주 보던 상황 아니냐. 이치연을 조예준으로 바꾸면 딱이겠구나.

“희도야. 나 오늘 아침 못 먹어서 진짜 배고파.”

“진짜요? 밥 안 먹고 뭐 했어요.”

“이림이 세림이가 돈가스 먹고 싶대서 아침부터 그거 만든다고 바빴거든.”

임성이 배 부근을 문지르자 싸늘하게 굳혔던 김희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저 배가 얼마나 탄력적인지 떠올린 덕이었다.

“가자.”

정말 기자에게 들키기 전에 자리를 벗어나야 함을 느끼고 여전히 어깨동무를 한 채 입구로 향했다.

“꽁무니 빼냐고. 말하다 말고 어디 가?”

“꽁무니가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의 퇴장이야. 시즌 준비 건강하게 잘 하고 내년에 보자. 참고로 난 투수로서의 너 좋아했어.”

임성에게 거의 끌려가듯 나가던 김희도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짐작됐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대는 것을 느끼며 잔뜩 성난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약속 못 지켜서 미안. 앞으로도 못 지킬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다.”

“…….”

무언가를 말하려던 이치연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임성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치연의 옆모습을 한 번 더 보고 화장실을 나왔다. 묘하게 후련하면서도 씁쓸했다,

“저녁 뭐 먹지. 먹고 싶은 거 있어?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으려나.”

“더 안 들어도 돼요?”

“뭘?”

“이치연 말이에요.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대답했을 거예요.”

“내가 들었으면 좋겠어?”

“……잘 모르겠어요.”

김희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진짜, 너무, 미치도록 인정하기 싫지만 저 새끼, 선배한테 특별하잖아요.”

“어떤 면에선 그렇지. 이치연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그 새끼가 지껄이는 말에 선배가 동요할까 봐. 싫어요.”

바닥으로 향한 김희도의 시선이 조금 더 방황했다. 불과 몇 분 전엔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맹수처럼 사납더니 이제는 비를 잔뜩 맞은 고양이처럼 가련해 보였다.

김희도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인 착각을 하고 있었다.

“너 혹시 우선순위라는 말 알아? 가족, 연인, 동료…… 누구나 각자만의 순위가 있을 거야.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중요도에 따라 받아들이는 무게가 다르겠지. 이치연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난 네 말을 따를 거야. 나에게 중요한 건 너니까.”

이치연과의 기억은 과거였다. 한때는 그와의 관계 회복을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치연은 자신을 피했고, 김희도는 온몸으로 부딪혔다. 얼마든지 부서져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계속.

둘 중 누가 더 중요한지는 고려 대상 따위도 안됐다.

무엇보다 이치연은 친구 언저리쯤이었고, 김희도는 애인이잖아.

“절대 그럴 리 없지만, 설사 이치연이 날 좋아한대도 난 네가 첫 번째야.”

그럴 리 없다라……. 김희도가 작게 중얼거렸다. 측은하다는 표정이 찰나에 스쳤다. 아마 이치연에게 갖는 처음이자 마지막 동정심일 것이다.

“그럼 야구는요? 이제 야구는 내가 이겨요?”

김희도는 임성이 의아해하기 전 화제를 바꿨다.

“또 물어봐? 저번에도 네가 더 중요하다고 했잖아.”

“그땐 영혼이 안 담겼었잖아요. 완전 먹고 떨어지라는 표정이었다고요.”

지금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임성은 무심코 제 얼굴을 더듬었다.

“어떻게 해야 영혼이 담겨?”

“뽀뽀해 주면서 말하면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임성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저를 보는 남자를 외면하며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돌아볼 것도 없이 금세 김희도가 따라붙는 기색이 느껴졌다. 어디 따라붙다뿐이랴, 어깨에 팔을 턱 얹고 제 쪽으로 당기기까지 했다.

“이치연이 무슨 말 할지 넌 알고 있었어?”

“네?”

“그놈의 타자 타령 하는 이유 말이야.”

“좆같은 새끼 생각 따위 알게 뭐예요. 선배도 알 생각하지 마세요.”

조금 전까진 궁금하지 않으냐 물었으면서 이제는 알 생각도 하지 말란다. 이건 뭐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라는 건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김희도가 원하는 쪽에 맞춰 줄 예정이니 상관없으려나.

“지하 2층에 차 대 놨어요. 오늘은 떡볶이 말고 다른 거 먹어요.”

“어떤 거?”

“음식점 예약해 놨는데 스테이크 종류가 괜찮아요. 야경도 꽤 볼 만하고요. 밥 먹고 자동차 극장에서 선배가 보고 싶다던 영화 봐요. 영화가 별로 안 내키면 드라이브도 좋아요.”

“그거 완전히…….”

“완전히?”

“데이트 코스잖아.”

“그게 아니면 뭐라고 생각한 건데요.”

뚱한 대답이 이어졌다.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곁눈질해 본 김희도의 옆얼굴은 광대가 살짝 솟아 있었다. 아쉽게 귀는 머리카락과 목도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살짝 들춰 보면 귀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으려나. 궁금했다.

“데이트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요?”

“누구와 함께 있느냐. 난 너만 있으면 맛있는 레스토랑도 빛나는 야경도 필요 없어.”

김희도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지하 주차장 불빛에 반사된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젖은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다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덩달아 가슴께 깊은 곳이 묵직해졌다.

“아직도 그런 반응이네. 대체 언제쯤 익숙해질래?”

“평생이요. 평생 걸려도 익숙해지지 않을걸요.”

평생 걸린다니. 이걸 아쉬워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두 사람의 관계에 평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단 것이었다.

“금방 익숙해질 거야. 매일 말할 생각이거든.”

임성이 웃으며 차문을 열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할게.”

선배 피곤하다며 말리는 김희도를 되레 말리며 억지로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벨트 맨 것을 확인한 후 시동을 걸었다. 부릉. 차가 작게 진동했다.

막 출발하려는 순간 김희도가 “선배, 잠깐만요. 잊은 게 있어요.” 하고 말했다. 꽤 다급한 목소리라 임성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돌아봤다.

잊은 거? 시상식장에 뭘 놔두고 왔단 뜻인가? 아직 열려 있으려나?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두고 온 게 뭐야? 내가 찾아올게.”

“그게요…….”

그때 김희도가 별안간 임성의 목덜미를 잡아채며 상체를 숙였다. 그 와중에도 왼쪽 어깨와 팔꿈치가 차 내부에 부딪히지 않을 각도였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지만, 설사 누가 차 앞을 지나가더라도 보이지 않을 높이였다.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의아해하는 입술 위로 뜨거운 온기가 닿았다.

처음에는 어린 애들이 하는 것처럼 가벼운 뽀뽀가, 뒤이어 입술이 뭉개지는 짙은 키스로 이어졌다. 보드라운 감촉과 다르게 거칠게 들어온 혀는 다짜고짜 입천장을 쓸고 혀뿌리를 휘감았다. 목만 당겨진 채라 금세 숨이 모자라고 입 안에 타액이 고였다. 치열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쓸어간 김희도의 혀끝이 목구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후, 으음.”

밀폐된 차 안은 서로의 점막이 엉긴 채 비벼지는 소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목 뒤로 소름이 쭈뼛 돋는 소리였다. 임성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자 혀 뒷부분 여린 살점을 훑았다.

헐떡대며 저절로 숙이는 얼굴을 따라 입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질 즈음에야 김희도가 물러났다. 그는 제 아랫입술에 남은 임성의 타액까지 핥으며 눈매를 가늘게 휘었다.

“잊은 거 했으니까 이제 출발하죠.”

눈에 익을 만하면 새로운 변화구를 던지는 투수를 보는 타자의 심정이 지금 같을까? 그렇다면 얼마든 새로운 변화구를 갈고닦을 가치가 충분했다. 정신을 못 차리겠거든.

“안 가요? 한 번 더 할래요?”

그리고 조금 전 한 말 취소한다. 평생 익숙해지지 않은 건 어쩌면 김희도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희도에게라면 스트라이크를 계속 맞아도 상관없으니까.

* * *

『V4』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고통받은 페어리즈 팬들을 위한 소중한 단어 V4. 기나긴 프로야구 역사에 기록된 소중한 4번째 우승.

우승 구단이 할 일은 생각 외로 많았다. 각종 매체의 인터뷰는 당연하고, 홍보자료 뿌리기, 구단 자체 행사를 열어 팬들의 관심을 이어 갔다.

페어리즈의 모기업인 이솔 그룹은 선수를 포함한 구단 내 모든 직원에게 소정의 격려금을 전달했다. 가을 야구에 한 번이라도 뛰었던 선수들에겐 특별 보너스가 지급됐다.

그리고 마치 나간 돈을 회수하겠다는 듯 마케팅 팀에선 우승 기념 유니폼, 엠블럼과 배지 세트, 마스코트 인형, 달력, 차량용 방향제 등 온갖 굿즈를 냈다. 페어리즈 팬들은 구단이 돈독 올랐다고 욕을 하면서도 연신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요정들의 작은 날갯짓」이라는 이름의 팬 페스티벌을 열었다. 처음 페스티벌 이름을 들은 선수들은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추첨을 통한 현장 관객 3000여 명, 아쉽게 오지 못한 팬들을 위해 구단 채널인 요정 TV를 통해 현장을 동시 송출했다.

우승 소감, 당시 소감, 재밌는 댓글 읽기, 하이라이트 상영과 그에 관한 코멘트 등 이벤트가 끝나고 간단한 질의응답이 시작됐다.

마이크를 잡지 않은 손을 상자에 넣고 젓던 사회자가 네모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다음 질문은…… 닉네임 최강요정들님 「우승 공약은 어떻게 됐나요?」입니다. 시즌 초 우승 공약 걸었었죠? 페어리즈 공약은 뭐였습니까? 아시는 분?”

노련한 마이크 넘기기에 관객석 여기저기서 “팅커벨 분장이요!”, “요정 분장하고 노래 부르기요.”, “등에 날개 달고 노래!” 등 고함에 가까운 대답이 터졌다.

팅커벨 분장? 우승 공약이 있었다는 건 대충 알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처음 들었던 임성이 속으로 경악을 했다.

“아. 지금 분장할 게 없어서…….”

최희탁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 흐리기를 시전했다.

“그럴 줄 알고! 저희가 준비해 놨습니다. 자, 지금 갖다 주세요.”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가 빠르게 나와 뭔가를 건네고 후다닥 사라졌다. 무대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던 페어리즈 선수들의 시선이 사회자 손에 집중됐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경악했다.

“헉.”

“켁. 저게 뭐야.”

사회자가 웃으며 손에 든 것을 하나하나씩 공개했다. 어깨에 둘러멜 수 있는 무지개 색 요정 날개와 뾰롱뾰롱 별 모양 요술 봉, 꿀벌 더듬이처럼 끝이 동그랗게 말린 머리띠까지.

관객석에선 웃음이, 선수들 사이에선 웅성거림이 터졌다.

“소품은 준비됐으니 노래 부르실 선수만 뽑으면 되겠네요. 지원자 있습니까?”

저걸 입고 어떻게 노래를 불러. 입자마자 100% 기사 뜰 게 뻔한데. 그뿐이면 몰라. 유튜브 댓글이나 SNS에 박제될 각이고.

주장은 하필 해도 저런 공약을 거냐? 원망 섞인 시선이 최희탁에게 향했다. 최희탁은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지원자를 찾았다. 하나같이 시선을 딴 곳에 둔 채 외면 중이었다.

임성 또한 최희탁과 눈이 마주칠까 봐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페페 탈을 쓰는 게 낫지 저건 도저히 못 하겠다.

“아무도 없으신가요? 그럼 공평하게 팬 분들의 선택으로 하겠습니다. 자, 여러분. 노래 듣고 싶은 선수의 이름이 나오면 환호성을 질러 주세요. 그럼 주장 최희탁 선수부터.”

선수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크고 작은 함성이 터졌다. 대부분 엇비슷하던 함성은 권재영의 차례에서 유난히 커졌다.

하, 이거 안 되겠네. 자리에서 일어선 권재영이 마치 출마하는 후보처럼 한 손을 든 채 인사를 했다.

“이놈의 인기는 어쩔 수가 없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 하겠습니다.”

“네. 이상 권재영 선수였습니다. 이번엔 임성 선수.”

와아아아아!

권재영보다 훨씬 큰 호응이었다.

“와, 이분들 바로 배신 때리시네. 어떻게 바로 변합니까? 우리 사이가 고작 이 정도예요?”

사회자의 마이크를 뺏은 권재영이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이면 잘생긴 사람이 좋아요! 관객석에서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임성이 마이크를 자연스럽게 건네받았다.

“충분히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선택,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이상 기호 69번 임성이었습니다.”

어색해하거나 우물쭈물하면 재미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농담으로 받아쳤다. 다른 것도 아니고 팬 페스티벌이지 않나. 물론 요, 요정 날개는 지나치게 귀엽긴 해도 팬들이 좋아한다면야.

“보셨습니까. 저게 임성의 실체입니다. 저 권재영에게 한 표를!”

“워워. 진정들 하시고요. 아직 한 사람 더 남았습니다.”

두 사람을 중재하는 척하던 사회자가 마지막 남은 선수의 이름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김희도 선수. 다들 박수 쳐 주세요.”

와아아아아아악! 실로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큰 목소리였다. 목에서 나오는 게 아닌 단전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플래카드가 흔들리는 걸 보니 팬들의 선택은 말할 것도 없이 김희도였다. 아무렴, 유망주들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뚫고 부활한 신인왕님이 아니신가.

“이야. 김희도 선수의 인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압도적인 지지네요. 소감이 어떠…….”

한껏 웃으며 오늘의 주인공 쪽으로 몸을 틀었던 사회자는 무표정한 남자를 보고 살짝 멈칫했다. 무뚝뚝하다는 것쯤은 관계자들에게 전달받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저건 너무 차가웠다.

“아, 지금 실시간 시청자 수가 4만 명이 넘어갔다는 소식입니다. 김희도 선수 노래 부른다는 소문이 퍼졌나 봅니다. 김희도 선수, 준비할 시간 드릴까요?”

그래도 팬들 요청인데 거부하겠어?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필요 없습니다.”

“네?”

깜짝 놀란 사회자만큼이나 옆에 있던 임성도 당황했다.

“내가 왜 해야……”

“이, 이거 되게 귀엽네요. 특히 머리띠가. 희도 너랑 엄청 잘 어울린다.”

내가 왜 해야 합니까. 라는 김희도의 말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묻혔다. 어느새 벌떡 일어선 임성이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외친 것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희도야…… 이거 생방송이야. 빼도 박도 못하고 유튜브로 나가는 중이라고.

아마 기자들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기사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칫하다간 「프로야구 K 인성 논란. “내가 왜 팬 위해서 노래 불러야 하나?”」 「선수가 상전? 프로야구 고질병 팬서비스 논란. 김OO 신인도 예외 없어.」 같은 자극적인 기사가 뜰 가능성이 컸다.

정작 당사자는 신경 안 쓸 테지만 없겠지만, 내가 싫다고.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임성이 사회자의 손에서 머리띠를 빼앗듯이 가져왔다. 김희도가 하지 않겠다면 기꺼이 내가 쓰겠다. 여차하면 권재영을 끌어들여도 되고.

뾰롱뾰롱한 더듬이가 그의 손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

“잘 어울린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희도가 그의 손에 들린 꿀벌 머리띠와 임성을 번갈아 응시했다.

“저런 취향이에요?”

“뭐?”

저런 취향이 뭔데.

아주 짧은 정적이 지나가고, 눈을 질끈 감은 김희도가 임성을 향해 순순히 목을 늘어트렸다.

씌워 달라는 건가? 곧고 흰 목덜미를 잠시 보던 임성이 타액을 꿀꺽 삼키며 머리띠를 천천히 씌웠다.

“선배가 원하면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죠.”

김희도는 살짝 흘러나온 옆머리를 귀 뒤에 꽂으며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거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모습에 오히려 이쪽이 당황스러웠다.

“잘생겼다. 멋있다.”, “역시 잠실 아이돌! 김희도.”, “야구 미남, 진짜 미남.”

팬들이 열정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움찔. 정신을 차린 임성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땀으로 축축했다.

“와우. 반응이 엄청납니다.”

채팅창은 아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올라갔다.

김희도가 머리띠를 하겠냐는 부정적인 의견에서 ‘김희도가 머리띠를? 심지어 페페보다 잘 어울리잖아ㅋㅋㅋㅋㅋㅋㅋㅋ’로 도배됐다.

사회자의 손에서 요술 봉을 무심히 갖고 간 김희도가 음악을 틀어 달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그대 모습은 민트 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귀여운 별 모양의 요술 봉이 여러 색으로 반짝이며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선곡은 현장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정작 당사자는 건조한 표정으로 노래를 이어 갈 뿐이었지만.

분위기가 하도 열광적이라 “사랑을 건네준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요술 봉으로 임성을 지목한 건 자연스럽게 묻혔다.

<그깟 공놀이!> 자유게시판

■분류: 전체

[이솔 페어리즈] :: ㅅㅂ 방금 뭘 본거여ㅋㅋㅋㅋㅋㅋ(댓글 3)

[전체] :: 지금 페어리즈 채널 보는 사람? (댓글 53)

[이솔 페어리즈] :: 96번이 노래 부르는데 69번은 뭐함??????? (댓글 5)

[이솔 페어리즈] :: 69번은 후배의 노래에 감동해서 오열중 ㅜㅜㅜㅜㅜ (댓글1)

[LE 레전드스]:: 패배... 깨끗이 인정하겠음ㅇㅇ (댓글 2)

[MK 엠퍼러즈] :: 시발 왜저래ㅋㅋㅋㅋ 미쳤냐고ㅋㅋㅋㅋㅋㅋㅋ(댓글 10)

[이솔 페어리즈] :: 노래부르는 희도 요뎡님(스압주의) (댓글 36)

[이솔 페어리즈] :: 김희도 미쳤나ㅋㅋㅋㅋㅋ (댓글 12)

(내용)

ㅋㅋㅋㅋㅋ

(댓글)

1.야구공: 무덤덤한 눈빛에서 맑은 광기가 느껴짐

2.야구공: 김희도 저런 캐였음?ㅋㅋㅋㅋㅋㅋㅋㅋ

⤷4.야구공: 싸가지 없다고 욕하던 놈들 다 어디감?ㅋ

⤷6.야구공: ㄹㅇ시키는 거 다 하는구만

3.야구공: 다짜고짜 까는 애들 존나 많음ㅡㅡ

⤷5.야구공: 뭐래;;싸가지 없는 건 사실이잖아ㅋㅋㅋㅋㅋ 야구실력이랑 별개로

⤷7.야구공: 싸인하기 싫어서 도망 다니는 애보단 나음

0.야구공: ㅆㅂ 내 글 댓망 만들지 말고 딴데서 싸우라고

8.야구공: 신인왕의 패기ㅋㅋㅋㅋㅋㅋㅋ 시합 보다 재밌네ㅋㅋㅋㅋㅋㅋ

⤷10.야구공: 그건 아님

9.야구공: 권재영 궁디 들썩이는 중인 듯

11.야구공: 임성 충격 받은 거 같은데?ㅋㅋㅋㅋ

⤷12.야구공: 충격받았다기엔 광대가 올라감

* * *

바람이 더욱 건조하고 차가운 계절, 겨울. FA와 방출, 연봉 협상 등 스토브리그가 한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겨울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길고 혹독한 겨울이 될 것이다.

올해 두 번째 FA를 맞이한 페어리즈 주장 최희탁은 일찌감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는 “은퇴를 할지언정 페어리즈가 아닌 팀은 생각해 본 적 없다. 난 영원한 요정맨.”이라는 감동적인 인터뷰와 함께 FA 1호 계약을 달성했다.

해당 인터뷰가 나간 날 <그깟 공놀이!> 게시판엔 ‘최희탁. 종신 요정ㅠㅠㅠㅠㅠㅠㅠ’하고 눈물 흘리는 팬들로 가득했다.

“인터뷰 봤어? 희탁 선배 진짜 멋있더라.”

임성과 김희도는 비시즌 동안 적절한 훈련과 휴식을 반복했다.

시즌 중엔 일주일 일곱 번 하던 훈련을 다섯 번으로 줄이고, 나머지 이틀은 김희도와 뒹굴었다. 어떨 땐 5일치 훈련과 레슨보다 김희도와 보내는 하루가 더 체력이 부치기도 했다.

훈련이 없는 월요일과 목요일이 절정이었다. 일요일 훈련을 끝내자마자 김희도의 집에 끌려가 다음 날 아침까지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잠깐 쉬자고 말하려고 하면 “선배. 왜 이렇게 연약해요. 이래서 다음 시즌 풀로 뛰겠어요?” 하고 도발했다. 그러면 임성은 보란 듯 이를 악물고 버텼다. 김희도의 성기가 몸 안쪽을 찌르고 또 찔러 스치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때까지 계속.

늘씬한 육체를 가진 김희도는 괴물 같은 체력을 보였다. 너덜너덜해진 임성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깐 잠들었다 깼을 때도 여전히 김희도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 붙들고 그러고 싶냐 물었더니, 상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얄궂은 미소에 넋을 잃다 보면 묵직한 것이 안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입구 근처에서 얕게 긁을 때도, 몸 가장 깊숙한 곳을 뭉개듯 쳐 댈 때도 있었다.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 내면 이마와 눈두덩, 뺨, 쇄골, 젖꼭지 할 것 없이 입맞춤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제가 꼭 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임성은 김희도를 한껏 껴안으며 몸을 붙였다. 좀 천천히 해 달라는 뜻이었는데 더욱 단단해진 성기가 안을 빠르게 찔러 댔다. 나중에는 껴안을 힘도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온종일 섹스하는 게 가능하구나. 놀라움과 경악이 공존하는 날들이었다.

“뭐. 그럭저럭.”

“어? 뭐가?”

“최희탁 선배요. 무슨 생각 했길래 넋 놓고 있어요.”

너랑 뒹군 거 생각했다. 차마 그렇게 대답하진 못하고 얼버무렸다.

“웬일로 네가 다른 사람 칭찬을 다 하네.”

임성이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쌍심지부터 켜고 보는 김희도 답지 않은 유한 반응이었다.

“유부남에 애가 둘이잖아요. 제가 아무리 선배에게 미쳤어도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합니다.”

“그럼 재영이 형은? 재영이 형이 이번에 개인훈련 같이 가자던데…….”

탕. 김희도가 덤벨을 내려놨다. 가로로 기다란 바 양쪽에 달려 있던 쇳덩이들이 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뭐해. 위험하잖아.”

“가려고?”

뭐? 임성이 눈을 끔뻑끔뻑 떴다.

“뭐라고 대답했어요. 간다고 한 건 아니죠?”

“재영이 형이 너도 같이 가재. 대신 네 훈련비용은 네가 내래. 1차 지명은 그래도 된다나?”

“선배 훈련 비용은요?”

“재영이 형이 내준다더라.”

“권재영이 뭔데요?”

김희도가 대놓고 정색을 했다. 나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는지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휴대폰은 왜? 뭐 하게?”

“권재영에게 전화하려고. 내 애인 훈련비를 그쪽이 왜 내주냐고 물어보게요.”

“하지 마. 처음부터 형한테 신세 질 생각 없었어.”

임성이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제 바지 주머니에 숨겼다. 얘 앞에선 농담도 제대로 못 하겠네.

“어차피 올해는 국내에서 할 거야. 네가 소개해준 레슨 학원도 엄청 도움 되고. 내년 초엔 스캠도 갈 거…… 음, 희도야. 나 명단에 포함되겠지?”

“네.”

‘그럴 거예요.’나 ‘걱정 마세요.’ 같은 말보다 ‘네’라는 확신에 찬 한마디가 위안을 안겼다. 휴우. 속으로 안도를 하며 김희도가 내려놨던 덤벨을 제자리에 옮겼다.

그걸로 얘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임성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듯했다.

* * *

“아, 아흐. 야, 자, 잠깐…….”

축축하고 뜨거운 점막이 빠듯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빈틈없이 감쌌다. 예민한 살갗을 긁고 귀두 끝을 세게 빨았다. 쾌감에 몸부림치다 발끝에 밀린 시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헉. 숨이 목구멍에서 턱 막혔다.

“이런 거 안 해도…… 후, 으읏, 하악!”

무의식중에 몸을 웅크리며 다리를 닫았지만, 곧 커다란 손이 억센 힘으로 벌렸다. 근육이 탄탄하게 올라붙은 허벅지가 힘없이 열렸다.

김희도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임성의 성기를 빨아 댔다. 때로는 얕고 간지럽게, 때로는 힘주어 세게.

분별없이 가해지는 자극은 임성을 구석으로 몰아갔다. 바닥을 긁던 손이 허공에서 부들대다가 이내 김희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손끝에 올라붙은 열기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저었다. 어쩌면 무릎을 꿇은 채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자신의 것을 빠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아찔했다.

“이거요. 앞으로 쓸 일 없을 텐데, 불쌍하잖아요.”

“마, 말…… 물고 말하지 마.”

김희도가 입을 열 때마다 치아 끝이 성기를 미묘하게 긁어 댔다.

임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김희도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 힘을 풀었다. 뿌리 끝을 자극하던 힘이 살짝 약해졌다.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리던 손이 간지럽히듯 내려와 임성의 음낭을 쥐었다. 남자치고도 현저히 큰 손이 음낭을 간지럽히듯 살살 매만지면서 끝을 살짝 깨물었다.

“아학!”

임성의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쿵. 바닥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잡아챈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김희도의 고개가 들리며 그에게 물린 덩달아 성기 역시 솟구쳤다. 꿇었던 무릎을 편 김희도가 임성의 앞무릎을 바닥에 누르며 고개를 끝까지 숙였다. 발기한 성기가 입안을 지나 목구멍까지 처넣어졌다. 김희도의 흰자위가 금세 붉어지는 것을 본 임성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뭐야.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자신의 것을 빨고 있는 건 김희도인데 그에게 쑤셔지는 것처럼 배 안쪽이 욱신거렸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들어 다시 한번 김희도의 얼굴을 밀었다. 하지만 애처롭게 뺨을 스치며 그의 어깨에 툭 떨어졌다. 반달처럼 눈을 휘어 얄궂게 웃은 김희도가 입을 크게 벌렸다가 오므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다 못해 엉덩이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학, 싸, 쌀 것 같아. 비, 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육체만큼이나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으니까 그냥 싸요. 싸고 싶다면서요.”

“싫, 으니까 얼굴 치워.”

“그럼 버텨 보든가.”

김희도가 목구멍을 열어 성기를 깊게 삼켰다. 삼키지 못한 타액은 그의 입가를 흥건히 적시고 성기를 적셨다. 붉은 입술은 키스할 때와 다른 느낌으로 부풀어 야하게 움직였다.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게 제 성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알이 뜨겁고 물속에 있는 것처럼 코 점막이 따끔거렸다.

임성이 고개를 젖혔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김희도가 도발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깊게 삼켰던 성기를 조금 뱉어 내며 혀끝으로 할짝였다. 마치 이래도 네가 참을 수 있겠냐는 듯이.

배를 꽉 조인 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친, 미쳤어. 임성은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했다.

“으, 흐읏, 으…….”

집요하게 희롱당하던 성기가 끝내 사정을 시작했다. 귀두에 혀가 닿고 괴로울 정도로 짙은 쾌감과 묘한 수치심에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임성이 사정하는 동안 김희도는 그의 허벅지 뒤쪽을 짚고 위로 밀었다. 허리가 들리며 상체가 둥글게 말렸다.

아직 아래를 풀지도 않았는데, 이 체위는 버거웠다.

“희도야, 젤…… 어, 어헉. 너 뭐 해!”

조금 전까지 임성의 성기를 삼켰던 입술이 잘게 주름진 구멍을 핥고 있었다.

“헉, 김희…… 야, 싫, 하지, 씨, 흐으. 윽.”

뾰족한 혀가 주름을 핥고 뻐끔대는 곳을 게걸스럽게 빨아 댔다.

“지금 욕한 거예요? 진짜 귀엽네.”

임성의 엉덩이 골을 타고 흐른 땀이 김희도의 속눈썹 위로 떨어졌다. 그 모습이 충격적인데 이상하게 몸뚱이가 달아올랐다. 사정 후 탈력감에 젖을 여운도 없이 금세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임성은 의식적으로 아래에 힘을 줬다. 거부하려는 의도였는데 오히려 혀끝이 안을 파고드는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데. 좋을 대로 해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 김희도가 임성의 엉덩이를 터질 듯 움켜쥐고 잡아 벌렸다. 그리고 굶주린 얼굴로 구멍을 빨았다. 물컹한 혀끝이 주름을 사정없이 가르며 들어왔다. 오늘따라 집요하게, 제가 부끄러워할 체위만 골라서 했다.

“흐, 흐으. 윽…… 읏.”

“울어요? 왜? 내가 뭘 했다고.”

아래가 흥건하게 젖을 즈음에야 얼굴을 떼어 낸 김희도가 물었다.

“안, 울어. 그냥 숨이 차서…….”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지금 울면 아깝잖아요.”

김희도는 임성의 양쪽 발목을 붙잡고 넓게 벌렸다. 그리고 제 혀로 열심히 풀어 둔 아래가 움찔대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귀두를 갖다 댔다. 흉포하게 박아 넣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주변을 뭉근하게 문지르기만 했다. 이미 잔뜩 예민해진 곳은 조금의 움직임으로도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제 아래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 임성이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 몸인데 통제가 잘 안 됐다.

차라리 그냥 넣든가.

“뭐라고요? 뭐라고 했어?”

“뭐, 무슨 소리야. 아무 말도 안 했어.”

“했잖아요. 차라리, 어떻게 해 달라고요?”

설마 소리 내서 말했나? 임성이 입을 다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다고.”

앞과 뒤가 빨린 충격이 아직 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미끌거리는 귀두는 금방이라도 들어올 듯 아래를 슬쩍슬쩍 눌러 댔다. 임성이 한쪽 팔꿈치로 바닥을 디디며 몸을 물렸다. 겨우 한 뼘 벗어나는가 싶었던 때, 김희도가 허벅지 발목을 잡아당기며 귀두를 넣었다. 겨우 한 마디 정도만 넣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그의 것을 꽉 문 아래쪽이 뻐끔대며 움직임을 반복했다. 앞으로 다가올 쾌락을 기대하는 듯.

“아, 희도야. 김희도.”

겨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선배.”

“그러고 가만히 있을 거야?”

“선배도 힘들어하는 것 같고, 오늘은 이렇게만 할게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순간적으로 욕이 치밀어 올랐다. 귀두만 들어왔는데도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진 거나 욕망이 노골적으로 번들대는 눈을 보면 그 역시 흥분한 것 같은데 참는 이유를 모르겠다.

“오늘따라 왜 이래?”

“제가 뭘요? 저 선배 힘든 거 싫어요.”

그런 놈이 평소엔 사람을 잡다 못해 기절 직전까지 몰고 가냐?

“맨날 나만 선배 원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김희도가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런 것도 귀여워 보이면 역시 갈 데까지 간 건가.

임성은 바닥에 늘어져 있는 다리 한쪽을 들어 그의 허리에 감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입구에 걸쳐진 귀두가 꿈틀거리며 흥분했다. 이럴 거면서 참기는.

“너, 넣어…….”

막상 입을 뗐지만, 한 번에 나오지 않아 몇 번이고 달싹이기만 했다. 얕은 숨을 내쉬며 무심코 김희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입이 저절로 열렸다.

“너랑 하고 싶어.”

예고도 없이 성기가 박혔다. 귀두로 입구를 열고 있었는데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 흐! 윽! 아아.”

임성의 눈동자가 방황하다가 곧 뿌옇게 흐려졌다.

“……하아. 선배가 바라는 대로 넣었잖아. 그러니까 얼굴 좀 보여 줘요.”

김희도가 얼굴을 가린 임성의 팔을 내리며 집요하게 응시했다. 구기듯 꾹 감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헉헉대는 숨을 삼키듯 들이마셨다. 성기와 구멍을 빨던 입술로 키스하면 싫어하려나?

임성의 아랫입술을 핥는 것 대신 울대뼈를 삼켰다.

“야, 잠깐, 이, 이따가 넣어.”

“뭔 소리예요. 넣어 달라고 한 지 1분도 안 지났어.”

“너무, 갑자기 넣으, 어으……, 아니, 천천히, 야! 아아. 흣, 하아.”

“나한테 박힌 채 밤새고 싶으면 그러든가요. 난 그것도 좋거든요.”

다정한 목소리인데, 그래서 더 이질적이었다. 지금 활짝 웃고 있는 김희도의 얼굴처럼.

그럼 울대뼈나 좀 빨지 말든가. 마치 날짐승에게 목덜미를 물린 초식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사이 김희도의 성기가 안쪽을 완전히 파고들었다. 온몸을 압박하던 긴장감도 천천히 누그러들고 근지럽고 뭉근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쾌감의 전조였다.

하아, 하아. 임성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뱉어 내며 김희도를 올려다봤다. 위치 때문인가, 묘하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왜?”

“선배 운동 빡세게 하면 얼굴 빨개지는 거 알아요?”

그 얘길 지금 하는 이유가 뭘까.

“권재영 훈련에 따라가면 또 얼굴 시뻘게질 정도로 운동할 거잖아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야.”

“권재영이랑 훈련 갈 거예요? 대답해요.”

“아, 안…… 안 간다고.”

“여차하면 가려고 했으면서. 작년에도 같이 가려고 했던 거 모를 줄 알아?”

김희도가 무릎을 딛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말릴 틈도 없이 김희도의 성기가 위에서부터 꽂혔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였다. 닿아선 안 될 곳까지 들어온 성기가 안쪽을 마구 찔러 댔다. 얕게 피어오르던 쾌감이 한 번에 터지며 머릿속을 휘저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김희도는 임성의 옆구리를 힘주어 잡았다. 손에 닿는 모든 곳이 근육으로 잡혀 있었다. 모든 곳이 단단하게 이뤄진 육체 중 유일하게 연약한 곳을 쑤시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김희도의 허리 짓이 점점 빨라지며 아래를 거칠게 쑤셔 댔다. 이미 뿌리까지 모두 들어갔음에도 계속 처넣었다.

임성이 조금 덜 느끼는 곳, 가장 잘 느끼는 곳을 번갈아 가며 박아 댔다.

살갗이 스치며 쩔걱대는 소리가 야했다. 쩔걱거리는 소리만큼 묵직한 배 속이 참기 힘든 쾌감으로 가득 찼다.

“하, 으, 미친, 으. 읏, 흐.”

신음이 끊겨 나왔다. 배 안쪽은 자꾸만 간질거려 참기 힘들었다. 그곳을 좀 더 세게 박아 줬으면 했다. 임성은 신음을 토해 내며 굼지럭대던 발을 들어 김희도의 옆구리를 감고 허리를 앞으로 튕겼다. 깊게 들어와 있던 귀두가 예민한 곳을 찔러 댔다. 임성의 몸에 힘이 들어가며 김희도의 것을 조였다.

“좀, 아. 거기, 좋아.”

“씨발. ……봐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흐, 읏. 희도야. 좀 더, 으읏, 좋…….”

“선배가 자초한 거예요.”

뱉어 내듯 사납게 중얼거린 김희도가 체중을 한껏 실어 박았다. 80kg이 넘는 체중이 그대로 몸에 꽂혔다. 임성은 신음도 지르지 못한 채 사지를 벌벌 떨어 댔다. 지나친 쾌감은 두려움을 동반했다.

성기는 본격적으로 그곳만 쳐 댔다. 아마 보드라운 속살이 아닌 단단한 무엇이었다면 진작 뭉개졌을 것이다.

“흐, 으윽. 희도야, 으, 읏. 하, 좋으, 아. 너무.”

“여기서 이름 부르면, 내가, 하…… 하아.”

“희도야, 희, 희도야.”

“진짜 사람 돌게 하는 데 뭐 있네요.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나 좆 돼 보라고?”

미친 듯이 박아 대던 김희도가 허리 짓을 멈춘 채 머리를 쓸어 올렸다. 흥분에 잠식된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엉망이 된 채 허리를 흔드는 남자를 찬찬히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만 좆 된 건 아닌 것 같네요.”

성이 형. 임성의 귓가에 낮게 속삭인 김희도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이성 따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더 닿기 위해 부둥켜 안은 채 박고, 조였다.

타액을 넘길 여유도 없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곧추선 임성의 성기는 김희도의 복근에 눌린 채 비벼졌다. 잘게 쪼개진 근육이 생각지도 못한 자극을 안겼다.

온몸의 감각이 붕 뜨다 못해 낭떠러지에 선 것 같았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임성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만, 허억. 억! 아흐, 읏!”

비명에 가까운 높은 신음이 터졌다.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이 이내 녹아내렸다. 이건 위험해.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리는 걸 알면서도 김희도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단단한 성기가 또다시 몸을 꿰뚫었다. 임성은 그의 등을 필사적으로 껴안으며 몸을 붙였다. 땀과 정액에 흠뻑 젖은 몸뚱이들이 음란한 소리를 내며 겹쳐졌다.

“그만, 그만해…….”

“응. 이것만 하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혀가 눈두덩을 핥았다.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기어코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동시에 짓눌려 있던 그의 성기가 정액을 울컥 토해 냈다. 제가 사정한다는 걸 알 텐데도 김희도는 멈추지 않고 느끼는 곳만 골라 박았다. 덕분에 임성은 박힌 채로 사정을 줄줄 해야 했다.

수치스러웠다. 미치도록 수치스러운데, 여전히 흥분하는 자신이 있었다.

“하, 씨…… 김희도.”

거친 것으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남자들이 우글우글한 운동부에서도 임성이 욕을 한 건 손에 꼽혔다. 고등학교 감독에게 지독하리만큼 심하게 갈굼을 당하면서도 넘기던 남자가 벌써 두 번이나 욕을 내뱉었다. 정작 욕먹은 당사자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지만.

“선배, 하아, 아.”

곧 김희도가 사정을 시작했다.

서로가 뱉어 낸 숨이 뒤섞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 * *

12월의 큰 이벤트인 크리스마스이브. 그동안 임성에겐 크리스마스는 딱히 의미가 없는 날이었다. 중고등학생 땐 땀범벅이 되도록 훈련을 했으며, 프로 입단 후에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냈으니까.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무려 애인과 함께 처음으로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이야. 여기 진짜 좋다.”

원정을 다닐 땐 그 지역 호텔을 이용하는 편이라 나름 익숙했지만, 별 다섯 개짜리 최고급 호텔, 그것도 스위트룸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다.

딱 봐도 비쌀 것 같은 느낌에 방 가격을 넌지시 물었더니 지인 찬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믿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직접 프런트에 전화해 확인을 시켜 줬다.

“고객 정보는 비밀이라 새 나갈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상관없지만, 선배가 곤란할 테니까.”

눈 돌아가게 고급스러운 방도 방이지만, 헬스장과 수영장, 라운지 바 등 부대시설이 많았다. 공짜든 뭐든 기왕 왔으니 뽕은 뽑아야지.

하지만 1박 2일 동안 임성이 방을 나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햇볕이 환히 쏟아지는 거실에서, 비싸 보이는 식탁에서, 이태리 가죽 어쩌고 하는 소파에서 뒹구는 게 다였다.

“나 몰래 챙겨 먹는 거 있지? 좋은 거 있으면 공유 좀 하자.”

누가 들어도 진심인 목소리에 김희도가 피식 웃으며 임성을 번쩍 들어 욕실로 옮겼다. 그가 옮겨 주지 않았더라면 네발로 기어가야 했을지도 몰라 얌전히 부축을 받았다.

“산삼 같은 거라도 먹어? 농담이 아니라 볼 때마다 진심으로 놀랍다.”

“내가 뭘 먹는지 궁금해요?”

궁금하다마다. 아무리 비시즌에 몸을 잘 만들어도 시즌 끝 무렵엔 체력이 거의 떨어지기 마련인데, 김희도는 1년 차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페이스 조절이 뛰어났다. 체력을 유지하는 데 특별한 방도가 있다면 얼마든 따라 할 의향이 있었다.

“제가 신경 써서 챙기는 건 선배밖에 없어요.”

“나? 여기서 내 얘기가 왜…… 헐. 미쳤네. 진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다.”

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임성은 뭔가를 떠올리고 헛숨을 터트렸다. 요새 애들은 다 이런가? 아니면 김희도가 특이한 거야? 한동안 “헐”과 “와”를 내뱉다가 그대로 뻗었다.

애정과 욕망으로 가득 찬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오랜만에 구단의 부름을 받았다. 매일 출근하는 이천이 아닌 서울 사무실로 호출이었다.

“임성 선수, 오랜만에 얼굴 보네요. 그동안 벌크업 했어요?”

비시즌에도 구단 소속 직원들은 쉬지 않고 꼬박꼬박 출근을 했다. 오히려 내년 시즌을 준비하는 스토브리그 기간에 더 바쁘게 뛰어다니곤 했는데, 마케팅 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 붙은 것 같습니까? 그동안 많이 먹긴 했어요.”

“아니, 어깨가 더 넓어진 것 같아서요. 아주 태평양이야. 임성 선수 어깨에서 수영해도 되겠어요.”

팀장이 농담을 건네며 하하 웃었다.

“근데…….”

한참 웃으며 말하던 팀장이 갑자기 말을 흐리며 시선을 뒤로 넘겼다.

뒤에 누가 있나? 팀장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임성은 복도 모퉁이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김희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싸웠어요?”

“희도랑 저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아니. 아까부터 이쪽 엄청 노려보잖아요. 그래서 둘이 싸웠나 하고.”

그 말에 임성은 다시 김희도를 돌아봤다. 무표정이 꽤 쌀쌀맞아 보이지만, 그건 원래 그랬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노려본 게 맞으면 그건 제가 아닌 팀장일 가능성이 컸다.

“안 싸웠어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두 분 사이좋은 건 워낙 유명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아니라면 다행이고요.”

남들 눈엔 우리 둘이 사이좋은 걸로 보이겠구나. 살짝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우승하고 유니폼 엄청 팔렸던 거 알죠? 인센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제 것도 많이 팔렸습니까?”

“어휴, 당연하죠. 우승 당일엔 일시적인 사이트 마비까지 됐는걸요. 그 뒤로도 입고만 되면 바로 품절 뜨고. 우리 팀 팬들 화끈한 걸로 유명하잖아요. 오랜만에 우승했으니까 이해는 합니다. 임 선수 것도 엄청, 엄청 팔렸어요. 저 판매량으로 줄 세우는 거 진짜 안 좋아하는데 많이 팔렸어요.”

팀장의 말을 들으니 문득 69번 유니폼이 빽빽하게 정렬돼 있던 방이 떠올랐다. 몇 장인지 정확히 세 보진 않았지만 언뜻 봐도 굉장히 많아 보였지.

유니폼을 사는 팬들은 보통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의 번호와 이름을 마킹 하곤 했다. 그리고 구단은 해당 선수에게 판매 수익금 일부분을 돌려줬다. 그런 면에서 김희도는 상당한 도움을 줬을 것이다.

일주일 내내 밥 사도 모자라겠네.

임성이 피식 웃자 모퉁이에 서서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김희도가 걸어왔다.

“계속 복도에 있을 거예요? 사무실 안 들어가요?”

“들어가야지.”

사무실 안 들어가냐는 말에 덩달아 찔끔한 팀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김희도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팀장이 주먹을 불끈 쥐어 파이팅을 외치고선 멀어졌다.

“트레이닝 룸에 가있어.”

누가 운동선수 아니랄까 봐 카페가 아닌 트레이닝 룸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김희도는 복도 벽에 기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상했던 대로 임성을 부른 목적은 연봉 협상이었다. 사실 협상이라 하는 것도 뭣한 게 FA선수나 팀 내 핵심 선수쯤 돼야 협상 테이블을 차리지, 임성 같은 신인급은 구단에서 제시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꾸준히 마운드에 오른 덕에 조금씩이나마 인상됐지만.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어, 성이 왔냐? 오랜만이네. 계약서 확인해 봐라.”

임성은 조금 긴장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연봉에 관한건 다들 생각이 다르겠지만 임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승과 그 우승을 김희도와 함께 이뤘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희미한 기대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줄어들진 않았을 거야. 우승도 했잖아.

괜히 목을 한번 가다듬고 계약서를 확인했던 임성이 곧 눈을 크게 떴다.

“단장님. 이거 제 계약서 맞습니까? 아무래도 선배님들 것 잘못 주신 거 같습니다.”

“거기 네 이름 적힌 거 안 보여?”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임성이 제 이름이 적힌 계약서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숫자가 잘못 찍혔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인마, 너 올 시즌 선발로 돌았어. 그 정도도 못 줄 정도로 우리 구단이 쪼잔하겠냐? 불만이면 수정해 달라고 말할까?”

단장이 계약서를 가져가는 시늉을 하자, 임성이 얼른 서명을 했다.

“성아.”

인사를 꾸벅 하고 나가려다가 단장의 부름을 듣고 멈췄다.

“마운드에서 표출하지 않는다고 욕심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넌 좀 더 표현해도 좋지만. 남은 시간 동안 준비 잘해라. 다음 시즌 기대하고 있다.”

“올해 코시엔 불펜이 아니라 선발로 서겠습니다.”

“올해 코시? 대답 좋네. 가봐.”

웃으며 손을 흔드는 단장에게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팔짱을 낀 채 기다리는 김희도의 모습도 더는 낯설지 않았다.

“나 연봉 사인하고 왔어.”

“어떻게 됐어요?”

“…….”

임성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김희도가 눈치를 힐끔 살폈다. 표정이 좋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것 같았다. 당당하다 못해 어쩔 땐 뻔뻔하기까지 한 남자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우리 단 거 먹으러 갈래요? 여기서 조금만 가면 디저트 맛집 있어요.”

“나 고3때 데려갔던 거기?”

“거기도 좋고요.”

김희도가 차 키를 눌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삑 소리가 울리며 헤드라이트가 깜빡였다. 임성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아한 시선이 뺨에 꽂혔다.

“디저트는 다음에 먹고 오늘은 소고기 먹자. 내가 쏠게.”

“선배가 무슨 돈으로요. 제가 낼게요.”

김희도가 기겁을 했다.

무슨 돈이냐니. 김희도가 받은 계약금이나 올해 상향될 연봉엔 한참 못 미치겠지만, 소고기에 냉면을 추가할 정도는 됐다. 그것도 비빔이랑 물, 둘 다.

아직 대학생이거나 군대에 간 또래에 비하면 훨씬 잘 버는 편이었고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 연봉 올랐다. 작년 대비 194%.”

임성은 입꼬리를 또렷하게 말아 올리며 브이를 그렸다. 어안이 벙벙하게 서 있던 김희도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쪼그리고 앉았다.

하아. 한숨을 뱉으며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는 모습이 어째 자신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선배 표정 안 좋아서 걱정했잖아요.”

“미안. 이렇게 놀랄 줄 몰랐다. 대신 배 터질 때까지 소고기 사 줄게.”

아직도 쪼그리고 앉은 김희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는 제게 뻗어진 손을 잠시 보다가 손바닥을 완전히 겹쳐 잡고 일어섰다.

* * *

해가 바뀌고, 페어리즈 선수들은 추운 한국을 피해 따뜻한 나라로 스프링 캠프를 떠났다.

그사이 조예준은 군대에 입대했다. 군 문제를 빨리 해결했으면 하는 구단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군대 스포츠단인 상무에 지원했으나, 아쉽게 탈락하고 현역 입대를 결정했다.

하필이면 입대일이 스프링 캠프 일정과 맞물려 제대로 배웅도 못 했다. 대신 출국 전날 조예준을 만나 조촐한 송별회를 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임성을 보며 좋아하던 조예준은 함께 온 김희도를 보더니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껌 딱지도 너보단 덜 지독하겠다는 말에 당사자는 같잖은 비웃음으로 대신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지도 않은 테이블엔 싸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둘이 오랜만에 만나서 왜 그러냐? 예준아, 자. 이거 받아.”

임성은 서둘러 두 사람을 중재하며 종이봉투를 조예준에게 건넸다.

“웬 글러브예요? 포수용이잖아요.”

조예준은 사용한 티가 물씬 나는 글러브를 이리저리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거 우림 선배 거야. 코시 2차전에서 사용했던 거.”

“네? 송우림 선배님 글러브요? 심지어 코시에서 실제로 썼다고요? 미친. 지이이이인짜 미쳤다.”

조예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쳤다를 연발하다가 글러브를 품에 꼭 껴안았다.

“주장, 지금 꿈 아니죠? 볼 한번 꼬집어 주세요. 진짜 안 믿겨서 그래요.”

한동안은 안 부르던 호칭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듯했다. 조예준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도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드물었다. 한참이나 글러브를 내려다보던 조예준이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대더니 양팔을 벌렸다.

흐뭇한 얼굴로 마주 안으려는 임성을 제지한 건 김희도였다. 그는 임성의 뒷 목을 부드럽게, 그러나 결코 약하지 않은 악력으로 감싸 쥐고 제 쪽으로 당겼다.

“또 너냐? 하아. 존나 지겨운 새끼.”

졸지에 허공과 포옹을 한 조예준이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얘기했다.

“손에 든 거 뺏기기 싫으면 그냥 찌그러져 있어.”

손에 든 거라니? 김희도의 시선이 글러브로 향한 것을 본 조예준이 도끼눈을 뜨며 상체를 돌렸다. 거의 등이 보일 지경이었다.

“네가 뭔데 뺏는다 만다 지랄해? 버르장머리 없는 건 진작 알았지만 눈치까지 없어? 제발 우리 사이에 끼지 마라.”

우리? 제 앞에서 우리라고? 김희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서로 한마디를 그냥 못 넘기는구나. 어휴,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예준아. 그거 받는 데 희도가 많이 도와줬어. 얘 사이클링 히트 쳤던 배트랑 바꿨거든.”

처음 송우림에게 글러브를 부탁했을 땐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본인에게도 뜻깊을 물건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몇 번을 더 시도하다 반쯤 포기했던 분위기가 반전된 건 김희도가 제 배트를 송우림에게 건네고 나서였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김희도라나?

‘아빠보다 희도 네가 좋단다. 빠따에 사인하는 거 잊지 마라. ‘최성연에게’라고 꼭 적어 줘.’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하는 가장의 씁쓸한 웃음과 함께 극적인 물물교환이 완성됐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조예준이 분하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알았으면 그거나 먹고 떨어져.”

“에이씨.”

김희도의 말에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진짜 글러브를 뺏길까 봐 참는 게 훤히 보였다.

이걸 안 싸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

“주장은 아겜 노리죠?”

아예상대하지 않기로 했는지 조예준이 주제를 돌렸다.

“어. 코치님이 아겜 노려보고 안 되면 상무 지원해 보자시네.”

“주장 정도면 직행 아니에요? 무려 코시에서 뛴 투수잖아요.”

“그건 작년이지. 올 시즌은 아직 시작도 안 했고, 알다시피 투수 풀이 워낙 좋잖아. 나보단 희도가 확정 아닐까?”

눈으로 김희도를 가리키는 것을 본 조예준이 으엑, 소리를 내며 질색했다. 하지만 차마 반박할 말은 안 떠오르는지 글러브를 안고 끙끙 앓았다.

그때 김희도가 입을 열었다.

“선배가 가면 저도 가고요. 아니면 말고.”

마치 집 앞 놀이터에 따라간다는 듯한 김희도의 말투에 두 사람 다 고개를 갸웃했다. 대표 팀은 나라를 대표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인 동시에 군 면제가 걸려 있어 미필 선수는 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만약 내가 상무에 가면?”

“바로 상무 지원이죠. 고민할 거 있나요.”

임성은 내가 현역에 지원하면 어쩔 거냐고 물으려다가 포기했다. 같은 날 빡빡머리로 입대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아주 생생하게 그려진 것이었다.

조예준은 미친놈 보듯이 김희도를 향해 “공 좀 친다고 존나 건방지네.” 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난 ‘좀’이 아닌데?”

“와, 인성 뭐냐. 재수 없어.”

다시 분위기가 싸늘해지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안주가 나왔다.

“예준아. 군대 조심히 잘 다녀오고 휴가 나오면 꼭 연락해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책임진다.”

“편지지 왕창 가져가려고요. 요새는 휴대폰도 되지만, 역시 군대는 손 편지죠.”

조예준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받는 즉시 찢을 거다.”

“지랄. 누가 너한테 보낸대?”

김희도의 말에 조예준이 비웃음으로 받아쳤다.

“둘은 아예 말 까기로 했나 봐. 아주 친근하다, 친근해.”

아무리 김희도가 선배들에게 예의 없기로서니 저렇게 대놓고 싸가지 없게 구는 건 조예준밖에 없었다.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오히려 좋아 보인단 말이야.

두 사람은 임성이 툭 내뱉은 말을 두고 또다시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젠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고 안주로 나온 달걀말이를 집어 먹었다. 이 집 음식 잘하네.

그렇게 조예준이 군대로 떠나고, 두 사람을 태운 비행기도 저 멀리 호주로 떠났다.

임성은 코치 및 베테랑들의 도움을 얻어 시즌 준비를 착실히 했다. 잔류 대신 메이저로 복귀를 선택하고 돌아간 용병과도 꾸준히 연락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받았다.

비시즌 동안 김희도에게 시달리면서 자신의 체력에 회의감을 느꼈던 터라 이를 악물고 몸을 만들었다. 만약 올 시즌 끝까지 버틴다면 100% 김희도의 덕이리라.

김희도에게 농담 삼아 말했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남는 체력 나한테 써요! 내가 상대해 줄게요.” 하고 대답했다.

김희도의 목소리가 이렇게 발랄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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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페어리즈를 맡은 감독은 물론 주장 최희탁, 마무리 투수 권재영 외 김희도에게도 인터뷰가 쇄도했다.

특히 김희도는 데뷔 첫해에 상당히 높은 타율과 그 힘들다는 사이클링 히트까지 때려 냈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외모가 남다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김희도는 기자 비슷한 사람만 봐도 도망 다니기 바빴다. 어쩔 땐 순식간에 사라져 옆에 있던 임성이 얼떨결에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저렇게 싫어하면서 고등학생 땐 어떻게 인터뷰했는지 모르겠네.

임성 또한 유망주였기에 언론과 접촉할 일이 많아졌다. 올해는 아시안 게임이 있어 주목도가 더욱 높았다. 아시안 게임 감독을 맡은 최종원은 눈여겨보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임성을 뽑기도 해 좋은 모습을 보이면 최종원 호에 탑승할 가능성이 높았다.

* * *

오늘은 페어리즈 팀 내 세 번째 청백전이 있는 날이었다. 임성은 홈팀 선발로, 김희도는 어웨이팀 스타팅 멤버로 각각 출전했다.

비록 공식전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맞대결을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됐다. 처음과 두 번째 청백전에서 김희도의 컨디션이 눈에 띌 정도로 좋았기 때문에 더욱 기대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대는 곧 미묘한 의문과 걱정으로 바뀌었다.

“스윙.”

흐음. 임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공을 던졌다. 휭, 이번에도 김희도의 배트는 어이없는 타이밍에 나와서 허공을 허무하게 갈랐다.

“아웃.”

‘고양이가 방망이를 휘둘러도 저보다 나을 것 같대요.’

몇 년 전에 들었던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김희도의 스윙보다 고양이가 솜뭉치를 휘두르는 게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공 3개, 헛스윙 삼진. 원하던 대로 돌려세웠는데도 상당히 찜찜했다. 꼭 영혼 없이 삐걱대는 목각인형과 싸운 것 같다 할까.

“일부러 져 주려는 거냐? 그런 거면 당장 그만둬.”

제가 들어도 경직된 말투였다. 무표정으로 글러브를 끼던 김희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다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이길 생각도 없지만, 질 생각도 없어요. 전 그냥 평소처럼 하는데요.”

표정과 내용을 보아하니, 노리고 헛스윙을 한 것 같진 않았다.

하기야 자신의 성격을 알면 일부러 져 준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겠지. 하지만 원래 실력도 아니잖아.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수비하고 올게요.”

덤덤하게 대답한 김희도는 햇볕이 따가운지 글러브로 눈 앞머리를 가리며 그라운드로 걸어 나갔다.

어이없는 스윙을 하며 삼진으로 물러났던 김희도는 다이빙 캐치라는 호수비를 선보였다. 공이 글러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슈퍼 플레이였다.

순발력 합격, 유연성 합격. 깔끔한 마무리까지 합격. 임성은 어려운 타구를 너무도 쉽게 처리하는 남자를 눈으로 좇았다.

공수가 교체되며 다시 임성이 마운드를 향해 걸어갔다. 각자 위치로 가기 직전, 김희도를 불러 세우고 옆구리에 낀 배트를 눈으로 가리켰다.

“다음에도 아까처럼 칠 거야?”

“아까처럼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전 칠 수 있을 것 같을 때 휘둘러요.”

“……희도야. 우리 내기 하나 할래?”

“내기요?”

“이기는 사람 말 들어주기로. 안타 쳐서 나가면 네가 이기는 거고, 아웃이면 내가 이기는 거야. 어때?”

나름 생각하고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바람이 불지 않은 바다처럼 잔잔하던 김희도의 얼굴에 선명한 투쟁심이 번졌다. 말을 꺼낸 자신조차 순간 흠칫하게 만드는 변화였다.

“무슨 요구를 해도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임성을 김희도가 빤히 쳐다봤다. 대답을 종용하는 시선이었다.

“……해도.”

잘한 걸까? 입 밖에 내는 순간까지 후회, 아니 걱정이 됐다.

대답을 들은 김희도는 글러브를 끼지 않은 손으로 임성의 뒷 목을 감싸고 당겼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다. 서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며 벌어진 잇새로 흐른 숨이 아랫입술에 닿았다.

“지금 그 말 분명히 후회할걸.”

탁. 손을 놓은 김희도가 빙그레 웃으며 수비 자리로 걸어갔다.

“빨리 타순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맹랑한 대답을 남기며.

잘한 거 맞겠지? 적어도 조금 전보다 의욕이 생긴 것 같으니. 발끝으론 흙을 고르며 머릿속으론 김희도가 무슨 요구를 할지 가늠해 봤다.

고등학교 유니폼을 입은 채로 박히는 것보다 창피한 건 없지 않을까? 아니지, 임성. 정신 차려. 인마. 어차피 이기면 다 해결될 일이야. 좀 전에도 3개의 공으로 돌려세웠잖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 다 교체되지 않고 두 번째 맞대결이 성사됐다. 임성은 비장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서는 김희도를 다소 당황스럽게 응시했다.

쟤 한국 시리즈 때도 저 표정 아니었나? 첫 대결에선 느껴 보지 못한 묘한 압박감에 손바닥이 찌릿찌릿 울렸다.

그렇지. 저게 김희도지. 심드렁한 얼굴로 홈런을 턱턱 날려 대던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이 더 취향이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심장이 빠르게 뛰며 긴장감이 고조되는 게 느껴졌다. 숨이 살짝 가빠지는 기분 좋은 자극.

마운드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마음껏 누리며 공을 쥔 팔을 앞으로 쏟아 냈다. 휭, 오늘 밤 운명을 가를 공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 * *

“다들 청백전 수고했고 이따 저녁 회식은 전원 필참이다. 안 가는 사람은 배신자로 간주한다. 다들 알겠냐?”

최희탁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엔 한쪽에서 장어를, 다른 쪽에선 소고기를 외쳤다. 열렬한 장어 파 중 한 명인 권재영은 임성에게 헤드록을 걸며 “너희들도 당연히 장어지? 대 선유고는 언제나 한 몸이거든.” 하고 농담 섞인 진담을 건넸다.

“장어 좋죠. 잘게 채 썬 생강과 두툼한 장어 한 점을 먹으면 없던 기력도 생길 것 같습니다.”

소고기는 얼마 전에 먹었던 터라 기왕이면 장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권재영은 눈에 띄게 좋아하며 상체를 임성 쪽으로 기울였다. 누가 봐도 친밀한 거리였다.

“역시 성이가 뭘 좀 아네. 희도 너는?”

회식 메뉴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표정을 한 김희도가 임성의 어깨를 두른 팔을 떼어 냈다. 그리고 이 팔을 어떻게 할지 잠시 갈등하다가 제 어깨 위로 올렸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제가 권재영과 닿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낸 것 같았다.

“신인들 합류했나? 애들 모였으면 오늘 회식에 오라고 해야겠다. 시간이랑 장소는 단톡방에 남길 테니까, 각자 알아서 찾아와. 정말, 진짜로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사람은 따로 연락해라.”

할 말을 끝낸 최희탁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로커 룸을 나갔다. 주장이 자리를 비우길 기다렸다는 듯 로커 룸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권재영이 김희도의 목을 끌어당기며 상체를 더듬었다. 하필이면 외투 없이 운동복만 입고 있어 손바닥의 감촉과 온기가 그대로 전달됐다.

“새끼, 운동 열심히 했나 보네. 몸 더 좋아졌다?”

근육을 더듬는 손길에 김희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뿌리쳐? 말아? 고민하는 게 그대로 보였다. 이를 얼마나 꽉 깨물었는지 턱 끝이 잘게 떨렸다.

“재영이 형. 훈련장에 갈래요? 제 공 좀 봐 주세요.”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간 하극상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 임성이 다급히 권재영을 불렀다. 권재영은 눈을 굴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성이 너 선발 확정됐냐?” 하고 물었다.

“일단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형도 아시다시피 마운드에 오르기 전까지 모르잖아요.”

“너 몸 엄청 유연해졌다고 코치님이 감탄하더라. 비결이 뭐냐?”

그냥 석 달 동안 사지를 한계까지 벌리고 당기면 돼요. ……저도 몰랐는데 되더라고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마세요.

“열심히 운동했어요. 진짜 열심히요.”

“교과서만으로 서울대 합격했다는 급의 답변이네. 너 지금 변화구 몇 개야?”

“직구 빼고 세 갭니다. 하나는 아직 완벽하게 못 써요. 제구가 잘 되는 날도 있고, 엉망인 날도 있고요.”

“뭐가 제일 어려운데?”

회식 시간 전까지 운동하기로 결정한 세 사람이 로커 룸을 나왔다. 평소보다 복도가 복작복작하고 어수선했다.

고개를 쭉 빼고 앞을 살피던 임성은 날개 스티커가 붙은 요정TV 카메라를 발견했다. 비시즌 콘텐츠를 찍으러 온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세 사람을 발견한 PD가 후다닥 달려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세 분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저 임성 선수, 그동안 뭘 하셨나요?”

“안녕하십니까. 이솔 페어리즈 투수 임성입니다. 푹 쉬다가 얼마 전부터 슬슬 운동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시즌 준비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쉬었나요? 여행을 갔다든가, 영화를 봤다든가.”

뭘 하긴요, 침대에서 뒹굴었죠. 임성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석 달 동안 거의 반년 치 섹스를 몰아서 했다. 세상에 이런 체위도 있구나. 이런 장소에서도 할 수 있구나. 내 몸이 이렇게까지 유연해질 수 있구나. 같은 것들을 알게 한 시간이랄까.

“알차게 보냈습니다. 여러모로.”

차마 말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임성을 대신해 김희도가 대답했다.

어떤 여러모로? 대박 콘텐츠를 발견했을 때처럼 PD의 눈이 반짝였다.

“알차게 어떻게요? 비시즌에 뭘 하시는지 궁금해하는 팬 분들이 많거든요. 두 분 다 SNS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임성이 힐끔 곁눈질해 김희도를 봤다.

이상한 소릴 하진 않겠지? 찔리는 게 있어서일까, 심장이 빠른 속도로 쿵쾅거렸다. 여차하면 김희도의 입을 틀어막을 생각으로 손을 반쯤 들었다.

“맛있는 거 먹고,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했습니다. 선배랑 이런저런 운동도 했고요.”

걱정과 다르게 무난한 답변이 나왔다. 별다를 것 없는 대답에 PD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휴대폰 액정을 움직였다. 화면엔 선수별 질문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마침 적당한 질문을 찾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 입단 예정인 신인들 중 벌써 두 분을 롤 모델로 삼은 선수가 있습니다. 두 선수의 인기가 실감되는 순간인데요.”

“누굽니까?”

PD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김희도가 따지듯이 물었다. 눈을 살짝 찌푸린 데다 말투까지 차가워서 순간 PD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 고민했다.

“김희도 선수는 두 명이나 말했어요. 박성빈 선수, 홍영……”

“선배 말한 사람.”

“아, 임성 선수를 롤 모델로 얘기한 사람은…… 장호경 선수입니다. 주강고 투수네요.”

장호경, 장호경. 김희도가 되새김질을 하듯 이름을 두어 번 중얼거렸다.

“PD님. 희도 이름 부른 선수는 누구예요? 두 명이나 된다면서요.”

임성이 김희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PD에게 물었다.

“박성빈, 홍영환 선수요. 김희도 선수가 지난 시즌 신인왕이었잖아요. 꼭 뒤를 따라서 페어리즈를 빛내 보겠답니다.”

“이야, 바로 위 선배 말하는 거 보니까 사회생활 잘하겠네요. 근데 재영이 형 이름은 안 나왔어요?”

임성의 농담에 PD가 소리 내 웃었다. 살짝 경직될 뻔한 분위기가 풀렸다.

“그러게. 진짜 내 이름 없어요?”

“네. 한 사람도 없어요.”

권재영이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합류 하며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훈련장으로 가려던 목적도 어느 사이엔가 흐지부지돼 권재영과 헤어지고 김희도와 둘이서 훈련장으로 향했다.

“혹시 장호경 선수 알아?”

김희도 바로 아래 학년에 주강고면 주말리그나 전국 대회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컸다.

“조금 전부터 아주 잘 알게 됐어요. 앞으로 주시할 것 같고요.”

주시할 것 같다는 말엔 후배를 향한 걱정이나 애정 같은 건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희미한 경계가 섞여 있다면 모를까.

예상대로라고 할지. 연애 쪽에 있어서 그리 눈치가 빠르지 않은 본인조차도 지금 김희도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알 것 같았다.

흠. 모자를 벗고 옆머리를 긁적이다가 머뭇머뭇 입을 뗐다.

“희도야. 넌 날 너무, 으음…… 마, 마성의 남자로 보는 것 같다.”

제 입으로 마성의 남자라는 단어를 내뱉으려니 혀가 간지럽고 몸이 배배 꼬였다.

“맞잖아요.”

“어?”

“선배 마성의 남자 맞다고요.”

“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해.”

브레이크 없다더니 진짜 미친 듯 액셀을 밟아 대잖아.

임성은 누가 들을세라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살폈다. 훈련장엔 몇 명의 선수가 있었는데, 다행히 공을 팡팡 던지는 소리에 묻혔다.

“선배가 한 말 그대로 한 건데 표정이 왜 그래요? 얼굴 엄청 빨개.”

물론 자신이 꺼낸 말은 맞지만, 스스로 하는 것과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듣는 건 느낌이 달랐다. 김희도는 제 입을 막은 손바닥에 쪽 하고 뽀뽀를 한 뒤 천천히 내렸다.

“하다 하다 이젠 신인까지 껄떡대잖아요.”

지금 그 말 장호경이 들으면 황당해하지 않을까. 보통 롤 모델은 같은 구단 선수를 꼽기 마련이니까 진짜 닮고 싶은 선수는 따로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지금 김희도에게 그 말을 해 봤자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네 논리면 내가 더 불안해해야지. 이번에 신인 두 명에게 지목받았잖아.”

“무슨 두 명이요?”

“롤 모델.”

“그게 왜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정말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김희도는 임성 주변에 일어난 일엔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정작 제 일엔 무관심했다. 아마 저를 찍은 신인들 이름도 기억 못 할걸.

“아무튼 난 마성의 남자가 절대 아니고 너 말고 그런 쪽으로 내게 관심 있는 사람도 없어. 나 좀 믿어 주라.”

“당연히 선배는 믿죠. 날 못 믿을 뿐이지. 선배만 관련되면 여기가 회까닥하잖아요.”

그걸 그렇게 상큼한 얼굴로 할 말이야? 임성은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검지로 제 옆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남자를 응시했다.

쟬 대체 어떻게 하면 좋냐.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내가 책임져야지.”

제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며 짐짓 비장하게 김희도의 어깨를 짚었다.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게. 걱정 마.”

김희도는 갑자기 많이 벌겠다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들까지 합류한 대규모 회식이 끝난 후, 최대한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가려는 임성을 김희도가 붙잡았다.

“사람을 있는 대로 도발해 놓고 어딜 튀어요?”

하도 부어라 마셔라 하는 선배들 덕에 적지 않은 술을 마셨는데도 발음이 또렷했다. 그의 몸에 밴 쌉싸름한 냄새만 아니었다면 술을 마셨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아직 안 튀었어.”

“앞으로도 안 되고요.”

임성은 김희도에게 거의 떠밀리듯 택시에 올라탔다.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안전벨트가 상체를 가로지르고, 택시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말할 것도 없이 김희도의 집이었다.

결론만 말하면, 그날 밤 임성은 고등학교 야구 유니폼을 입고 박혔던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을 겪어야 했다.

* * *

3월 말, 드디어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비시즌 동안 심심해 미치겠다며 개막일만 손꼽아 기다리던 팬들은 다시 달릴 준비를 했다.

각 구단 팬들은 늘 그렇듯 “올해는 진짜, 정말로 다르다.”고 말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앞으로 야구를 보면 사람이 아니고 개다, 개.”라고 하던 팬도 “딱 한 번만 더 속아 본다. 멍멍”을 외쳤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정상적인 경기를 좀 보자.’ ‘질 때 지더라도 사람답게 지라고.’ 등 여러 반응이 존재했다. 이제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온갖 희로애락이 쏟아질 것이다.

페어리즈의 개막 첫 경기는 홈구장에서 열렸다.

경기 시작에 앞서 페어리즈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위아 더 챔피언스 데이」로 우승 반지 공개 및 선수에게 증정하는 것이었다. 이날 입장하는 팬들에게 선착순으로 우승 엠블럼이 프린팅된 티셔츠와 동일한 디자인의 배지 세트 등을 배부했다. 페어리즈 유니폼을 입고 온 팬은 선수 포토카드를 랜덤으로 추가 증정했다.

선수들에겐 우승 반지가 미리 지급됐다. 받자마자 난리 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꼭 게임에 나오는 아이템 같네요. 어린애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같기도 하고.”

“그러게. 손가락에 들어가려나?”

임성은 상패와 그 옆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 반지는 사람들이 흔히 끼고 다니는 반지보다 몇 배는 두껍고 디자인 또한 부담스러웠다. 반지 중앙엔 금테로 F와 날개가 함께 새겨져 있었는데, 그 안에 청록색 에메랄드를 촘촘히 박아 넣었다. 위에는 ‘KOREAN’이 아래쪽엔 ‘CHAMPIONS’라는 글이 각인돼 있었다. 반지 안쪽에는 역대 우승 날짜와 반지 주인 이름을 새겼다. 그 외에도 다이아몬드가 장식돼 상당히 공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당히 화려한 모양새라 김희도 말처럼 게임 아이템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낸 임성이 요리조리 살펴봤다. 우승을 확정 짓던 때의 벅찬 기분이 다시금 살아났다.

“음?”

그때 김희도가 임성의 손에서 반지를 가져갔다. 그리고 제 몫의 반지를 꺼내 임성의 손끝을 살짝 잡고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의도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왼쪽 약지였다.

“뭐 해?”

“예쁜 짓이요.”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김희도가 눈꼬리를 접으며 순하게 웃었다. 다 큰 사내놈이 대놓고 예쁜 척해 봐야 얼마나 예쁘겠냐마는…… 예뻤다.

희도에게 콩깍지 운운할 게 아니었어. 갈 데까지 간 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왼손에 자리한 반지를 내려다봤다. 평소에 끼고 다니진 못하겠지만, 기분이 묘했다. 김희도가 주섬주섬 반지를 꺼내 본인의 손가락에 끼우는 동안 임성은 주변을 둘러봤다.

진짜 보석이냐며 놀라는 사람, 반지를 이로 깨무는 사람, 사진을 찍거나 영상 통화로 자랑하는 사람, 또 자신들처럼 직접 껴 보는 사람 등 각자 바빴다.

무관심에서 조금 용기를 얻은 임성이 팔을 뻗어 김희도와 손을 나란히 했다. 김희도의 손은 제 것보다 조금 더 희었다. 이런 걸 섬섬옥수라고 하던가.

“커플 반지 같네요.”

김희도가 눈을 내리깔고 속삭이듯 말했다.

“다 같은 반지 받았으니까.”

“…….”

임성의 말이라면 야구공으로 축구를 한다 해도 고개를 끄덕일 김희도가 드물게 정색했다. 좀 전까지 그의 얼굴에 가득하던 수줍음이 사라진 걸 본 후에야 임성은 자신의 실언을 인정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미친 발언이었네.

“그……렇지만, 역시 이건 특별하지.”

“그러네요. 비록 다들 갖고 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가 냉랭했다. 예상했지만, 수습 실패구나.

“아무리 선배라도 지금은 너무했던 거 알죠?”

“진짜 미안하다.”

할 말이 없었다. 임성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며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까지 내보이는 사과였다.

“미안해요?”

“어. 내가 생각해도 방금은 좀 아닌 것 같아.”

“그럼 진짜 커플링 하면 되겠네.”

정수리를 내보이고 있던 임성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김희도가 그의 손을 잡아 약지에서 우승 반지를 빼냈다. 엄지손가락 끝이 조금 전까지 반지가 머물렀던 부분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면 되잖아……요.”

언뜻 멋대로 밀어붙이는 것 같아도 착실히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쩌면 언제 말할까 내내 눈치를 보다가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의혹을 뒷받침했다. 살짝 시무룩해 보이는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고양이 귀가 축 늘어진 것 같았다.

“당연……”

“다들 대충 정리하고 경기 준비해라. 아무 데나 놔두고 잃어버리지 말고, 알아서 잘 챙겨.”

임성이 입을 떼는 순간, 로커 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최희탁이 크게 외쳤다. 시끄럽게 떠드는 애들을 통솔하는 선생님 같은 모습이었다.

주섬주섬 정리하는 팀원들을 따라 임성도 그라운드로 나갈 준비를 했다.

시즌 개막에다가 이벤트까지 있는 날이라 평소보다 준비 시간이 부족해 얼른 나가야 했다. 마운드에 오르진 않지만 오랜만에 팬들을 만날 생각하니 설렘이 밀려왔다.

“경기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 너 인터뷰 있다며?”

김희도는 더 말하고 싶은 듯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이 각자 몸을 푸는 사이 김희도는 더그아웃 근처에서 인터뷰를 했다. 야구 전문 기자 및 캐스터, 해설 등 관계자들이 뽑은 「포지션별 올해 주목하는 선수」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희도 선수. 작년에 워낙 화려하게 데뷔해서 올해는 부담이 크실 것 같은데요.”

“없습니다.”

김희도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센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부담이 없는 것이었다. 작년 그의 인터뷰 스킬을 호되게 겪었던 기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몸을 풀던 임성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성아, 얘기 들었냐? 우리 우승 반지 개당 400만 원 넘는대. 배당금 받은 거 반지 만드는 데 다 썼나 봐. 대박이지?”

어느새 다가온 온 박태영이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은밀하게 속삭였다.

“400만 원이요?”

순금과 에메랄드에 다이아몬드까지. 비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입이 떡 벌어졌다. 연봉 협상 때 만난 단장이 우승 반지 기대해도 좋다고 자신만만해하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원래 이렇게 비싸요? 처음 받아 봐서 잘 모르겠어요.”

“나도 처음이야, 인마. 아마 역대 최고가일걸? 무려 12년 만에 한 우승이잖아. ……오, 헤이 맨. 하우 두 유 필?”

박태영이 말하다 말고 한 손을 들며 새로 합류한 용병 멜 홀리슨에게 인사했다. 홀리슨은 “Good, so good.” 하고 말하며 두 사람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씩 웃은 임성이 쌍 엄지를 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You’re so handsome.”

멜 홀리슨은 뜬금없이 임성에게 잘생겼다는 칭찬을 했다. 임성이 미? 하고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자 홀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이고 외국이고 사람 눈은 다 똑같구만. 야, 그래도 야구는 내가 더 잘한다?”

임성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한 박태영을 지나쳐 아직 인터뷰 중인 김희도를 눈으로 가리켰다. 내가 뭐가 잘생겨, 미남은 저런 애한테 하는 말이지.

“노노. 아임 쏘 노멀. 핸섬 이즈 김희도. 오케이?”

“희도? He’s beautiful.”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What do you think? 임성?”

그리고 오히려 질문이 돌아왔다. 그리 어렵지 않은 문장을 바로 알아들은 박태영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상대 팀까지 힐끔힐끔 쳐다봤다. 불과 몇 미터 앞에 있던 김희도의 시선도 이쪽을 향해 있었다.

오늘은 홈 개막이라 흰 바탕에 민트색 유니폼을 입었다. 하얀 옷감은 마치 반사판 같아 가뜩이나 화려한 김희도의 얼굴을 더욱 화사하게 그려 냈다.

홀리슨이 예쁘다고 한 이유를 새삼 알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무슨 얘기 했어요?”

언제 인터뷰를 끝냈는지 어느새 김희도가 가까이 와 있었다. 뒷담화를 한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면 칭찬인데도 괜히 뜨끔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보는 김희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본 경기에 앞서 우승 기념 이벤트가 시작됐다. 우승 당시 펼쳤던 현수막과 깃발이 다시 한번 당당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전광판에선 정규시즌부터 한국 시리즈까지 플레이했던 사진들이 하나씩 나오며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진 하나하나 볼 때마다 그때의 상황과 기분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마침 홈런을 치고 배트를 던지는 김희도의 모습이 전광판에 떴다. 소리를 지르거나 흥분하지 않은 덤덤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돌고 있었다.

“사이클링 히트 쳤을 때 생각나? 아마 너보다 내가 더 흥분했을 거다.”

임성은 제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올해도 치면요. 더 흥분해 주나?”

“네 자신감은 언제 봐도 대단하다. 말 나온 김에 내기 한 번 더 할래? 이번에는 시즌 통틀어서.”

“달성 조건은요?”

“음…… 나는 10승으로 할게.”

이번에는 임성이 한국 시리즈에서 상대 타자를 돌려세우는 장면이 전광판에 떴다. 주먹을 불끈 쥔 채 포효하는 임성과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너는?”

“글쎄요. 뭐가 좋을까요?”

김희도가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달성할 수 있을 만한 것…….

“홈런 35개 이상 어때? 너 작년에 32개 쳤잖아. 조건이 너무 빡센가?”

“안 빡세요.”

고개를 저은 김희도는 뭔가를 생각하듯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홈런 1위 하면 가산점 얹어 줍니까?”

가산점?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웃음이 터졌다. 왼쪽에 서 있던 팀원은 갑자기 소리 내 웃는 임성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차.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바로 입을 다물고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막 구단 사장이 나와 최희탁에게 우승 반지와 상패를 건네는 중이었다.

와아아아!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지더니 페어리즈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응원 단장이 MR을 튼 것도 아닌데, 팬들이 자발적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팬들이 그동안 얼마나 우승을 바랐는지, 또 얼마나 기뻐했는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래. 대신 나도 10승 외에 개인 타이틀 얻으면 가산점 받는다.”

임성은 응원 소리에 묻어 가며 말했다.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려는 김희도의 옆구리를 찔러 정면을 보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요. 반년 걸고 내기하는 거니까 소원도 크게 하죠. 저번처럼 고작 하룻밤 따위로는 성이 안 차니까.”

우리 희도, 양심이 없구나. 사람 체력을 아작 내놓고 고작 하룻밤 따위래.

“안 봐줄 거니까 각오해.”

“얼마든지요. 기대할게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구단주와 최희탁이 악수하는 것으로 이벤트가 마무리됐다. 임성은 글러브를 옆구리에 끼우고 박수를 쳤다.

뒤이어 시구와 시타가 끝나고, 경기가 시작됐다. 4선발로 낙점받은 임성은 오늘 더그아웃 1열 직관 확정이었다.

“손잡아 주세요.”

그라운드에 나가기 직전 김희도가 임성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동안 많은 위안을 받았으며, 이제는 없어선 안 될 손이 눈앞에 있었다.

“첫 경기라서 긴장돼?”

“별로. 선배 손잡으니까 떨려요.”

임성은 두 손으로 완전히 감싸고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높게 떠오른 햇빛이 경기장 곳곳에 아른아른 내려앉았다. 새파란 잔디 위에도 봉긋하게 솟은 마운드 위에도, 커다란 전광판 위에도 빠짐없이 환하게.

[BS 샤크스 0 : 0 이솔 페어리즈]

아직 찬 기운이 남은 봄바람과 함께 감출 수 없는 설렘이 임성의 몸을 감쌌다. 세포가 한껏 고양되는 기분은 이곳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늘 좋을 수만은 없는지라 때로는 연속 볼넷을 내준 것처럼 곤란할 일도, 만루 홈런을 맞은 듯 허탈할 때도 많겠지.

하지만 임성은 알고 있었다.

볼넷이든 만루 홈런을 맞든 얼마든지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걸. 김희도와 함께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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