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링 히트> 외전
#외전 1
『한국 시리즈 제 6차전, 페어리즈 세 번째 투수 임성이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로써 현재까지 양 팀에서 나온 투수의 수는 무려 8명. 총력전의 총력전을 펼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레전드스는 벼랑 끝이거든요. 뭐라도 해야합니다.』
10월 31일, 한국시리즈 제 6차전. 광주 레전드스 필드.
임성은 가슴 속 깊은 곳에 고인 숨을 깊게 뱉어 냈다. 귀가 터질 듯이 쏟아 내는 관중들의 함성도, 응원가도 들리지 않았다. 쿵, 쿵, 쿵. 오로지 제 심장 소리만 고요히, 아니 미친 듯이 울릴 뿐이었다.
후우, 임성. 천천히, 편하게, 평소처럼, 하던 대로. 할 수 있어. 아니, 해. 하라고.
제 가슴을 가득 채운 긴장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되뇌어 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결국 없애는 대신 안고 가기로 마음먹고 긴장마저 즐기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것도 딱히 효과는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게 2만 명이 훌쩍 넘는 관중 앞에서 공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고, 오늘 승패 여부에 따라 페어리즈가 우승을 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니까.
눈앞에는 쭈그리고 앉아 미트를 벌린 송우림과 비장한 얼굴로 노려보듯이 서 있는 레전드스 타자가 보였다. 지금 긴장한 건 저 타자도 마찬가지일 테니, 조건은 같았다.
괜찮아. 쫄지 말자. 임성.
『1, 2, 4차전 페어리즈의 짜릿한 승리. 특히 2차전은 김희도가 끝내기를 치며 극적인 승리를 거뒀죠. 괴물 신인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활약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득점권 타율은 어마어마해요.』
『만약 페어리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다면 최희탁과 오성연 등 베테랑은 물론, 김희도의 지분도 상당하지 않을까요?』
『페어리즈가 오늘 이 경기를 이기면 V4를 달성합니다. 반면 레전드스는 오늘 경기를 꼭 잡아야 우승을 향한 길이 이어집니다. 절벽 끝에 선 레전드스와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 두고 있는 페어리즈. 그라운드엔 전운마저 감돌고 있습니다.』
임성은 깊이 심호흡을 하며 흙을 골랐다.
『페어리즈의 임성. 올해 3년 차 신인 선숩니다. 3차전 6회에 등판해 0.1이닝을 깔끔하게 틀어막았죠.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마운드에 섰습니다. 초구, 던졌습니다. 몸 안쪽으로 파고드는 강한 직구. 박소환 크게 휘둘러 봅니다만, 닿지 못하고 헛스윙 합니다. 원 스크라이크.』
제 손에서 빠져나간 공이 송우림의 글러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본 후에야 참았던 숨을 뱉어 낼 수 있었다.
시간을 끌었다간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 빨리 던졌는데, 다행히 잘 먹혔다. 문제는 공을 던진 후에 긴장이 심해졌다는 점일까.
후, 후우. 와, 미치겠네. 나 숨 제대로 쉬고 있는 거 맞겠지? 이상한 의심까지 들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러다가 폭투라도 던지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이럴 땐 역시…….
임성은 1루에 나가 있는 레전드스 타자를 견제하는 척하며 김희도를 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찡긋, 김희도가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감았다가 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평한 모습에 맥이 탁 풀렸다.
쟨 진짜 평소랑 똑같구나. 오늘 이 경기도 수많은 경기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 우승 같은 신경도 안 할 거야. 아무튼 대단하다니까.
다들 나보고 멘탈 강하다는데, 김희도에 비하면
임성은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정면을 봤다. 포수 마스크 사이로 번뜩이는 송우림의 눈과 마주쳤다.
네. 던질게요.
고개를 살짝 끄덕인 임성은 와인드업 없이 간결한 폼으로 공을 던졌다.
하나, 둘, 셋.
끈질긴 승부 끝에 아웃 카운트 불이 하나 더 들어왔다. 레전드스 타자의 배트가 돌아감과 동시에 임성이 고개를 위로 젖히고 하! 소리 내 숨을 뱉었다.
좋아, 해냈다. 타자를 잡았다고.
『스윙. 아웃, 박소환의 배트가 또다시 허무하게 돌아갑니다. 임성, 중요한 순간에 귀중한 삼진을 잡습니다. 전광판을 보고 있네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플레이오프 때 선발로 나선 게 큰 경험이 됐을 겁니다. 평소보다 직구 구속이 빠른 걸 보니 컨디션이 좋아 보여요. 배정우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가을의 남자라고 불리죠? 별명에 걸맞게 한 건 해 줘야 하는데요.』
타자 한 명을 돌려세웠음에도 교체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공이 나쁘지 않다는 뜻일까? 임성은 조금 자신감을 가지고 공을 던졌다.
『배정우 잘 때렸습니다! 유격수 오원학, 오원학이 몸을 날려 받아 냅니다. 슈우퍼어어 캐치. 임성 주먹을 불끈 쥡니다. 투 아웃.』
하나의 아웃카운트를 더 따내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물속에 가라앉은 듯 멍하던 귀가 뻥 뚫리며 우레와 같은 함성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목구멍을 채우는 긴장감은 여전히 숨 막혔지만, 처음보다는 살 만했다.
“임성. 오늘 공 엄청 좋다. 이대로 가자. 파이팅.”
“아직 더 할 수 있다. 임성, 파이팅!”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앞뒤에서 정신없이 울렸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페어리즈 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깨동무를 한 채 응원가를 불렀다. 여기저기서 민트색 깃발이 한여름 파도처럼 나부꼈다. 한껏 고조되는 열기와 이미 잔뜩 흥분한 얼굴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긴장을 넘어선 전율이 지르르 울렸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게 이거였어. 상상만 하던 광경이 현실이 되는 건 짜릿했다.
임성은 글러브 낀 손을 가슴께로 올리며 달뜬 숨을 삼켰다. 가슴이 점점 벅차올랐다.
“선배. 맞아도 상관없으니까 마음대로 던져요. 나만 믿어요!”
김희도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지금 이 소란 통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임성이 픽 웃으며 공을 쥐었다.
미안하지만, 맞을 생각 전혀 없……
“……거든!”
얼굴을 흠뻑 적신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한껏 젖혔던 어깨와 팔을 휘둘렀다.
* * *
『마지막 타구가, 타구가 잡힙니다! 아웃,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올라갑니다! 경기 끄으으으으읕―! 끝났습니다. 페어리즈의 수문장 권재영이 제 손으로 직접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그간 무수히 쏟아지던 우려와 불신을 씻고 오랜 시간 페어리즈의 우승을 기다리던 팬들의 염원을 이룹니다. 이솔 페어리즈.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기나긴 여정, 수없이 흘린 값진 땀방울이 오늘, 이 자리에서 결실을 맺습니다. 작디작은 날개를 가진 요정들이 마침내, 기어코, 드디어 결국 정상에 올라섭니다!』
권재영의 손에서 공이 빠져나간 공이 송우림의 미트에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는 순간, 커다란 함성이 구장을 무너트릴 듯 흔들었다.
“우아아아아아악!!!!!”
5회가 넘어가면서부터 펜스 밖으로 몸을 반쯤 빼내고 있던 페어리즈 선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라운드로 튀어 나갔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고 양팔을 들고 있던 권재영은 제게 달려오는 송우림을 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선수들은 그런 두 사람을 겹겹이 둘러싼 채 방방 뛰었다. 금세 한 덩어리가 되어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팡! 팡! 흰색과 민트색이 섞인 종이 꽃가루가 마치 눈송이처럼 흩날렸고, 그라운드에는 물통이 날아다녔다. 축제의 현장이었다.
두 손을 겹쳐 잡고 조마조마하게 그라운드를 보던 임성 역시 포효에 가까운 함성을 내질렀다. 매사 덤덤한 김희도마저 살짝 상기된 채였다.
“희도야. 우리 우승했어.”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여전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네. 우승했어요. 선배가 기뻐하니까 저도 좋아요. 잘 던졌어요.”
억지로 버티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희도는 무릎을 꿇은 임성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머리를 껴안았고, 팀원들은 그런 김희도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희도야, 분위기 파악 잘하고 있지?”
혹여 팀원들의 손을 뿌리칠까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리 저라도 여기서 꺼지라고 할까 봐요? 물론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긴 해요.”
김희도는 제 몸에 손이 닿을수록 임성의 머리를 더 강하게 껴안았다.
“성이도 고생했다. 안 쫄고 멋있더라.”
흥분한 권재영의 격려가 머리맡에서 울렸다.
“감사합니다.”
김희도는 임성에게 파묻히다시피 한 채 대답했다.
「최강 페어리즈, 우리는 최강, 무적의 이솔 페어리즈, 언제나 승리한다. 페어리즈! 다 함께 소리 높여 부르자. 페!어!리!즈!」
페어리즈 팬들이 깃발을 흔들며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그동안 다들 애썼다. 우리가 최고다. 지금 이 기분, 마음껏 만끽해라.”
선수들을 격려한 최희탁이 곧 응원석으로 걸어갔고, 다들 그의 뒤를 따라가 일렬로 죽 섰다. 선수들이 다가오자 팬들은 더욱 큰 환호와 박수로 맞이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은 팬도, 오열하는 팬도 모두 눈에 가득 담았다. 겨우 가라앉았던 뜨거운 무언가가 다시금 목구멍을 울컥 차올랐다.
그저 공놀이일 뿐이었다. 그깟 공놀이. 심지어 팬들은 그저 지켜보고 응원하는 입장이 아닌가. 그럼에도 제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아마 여기 있는 선수 모두 다 같은 마음일 테지.
“팬들께 큰절 한번 하자.”
최희탁의 말에 따라 다들 모자를 벗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덩달아 몸을 구부리던 임성은 저 혼자 뻣뻣하게 서 있는 김희도의 뒤통수를 가볍게 눌러 억지로 절을 시켰다. 외국인 감독도 하는 큰절을 혼자 안 하게 뒀다간 100% 무슨 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대신 그의 머리 옆으로 쓸어 넘기고 이마에 묻은 흙을 손끝으로 살살 털어 주었다. 금세 얼굴을 푼 김희도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열기를 품은 손바닥이 맞닿고 손가락이 얽혔다.
“야, 지금…….”
“이 정도는 완전 약과거든요. 다른 사람들 좀 봐요. 우리가 제일 건전해.”
손깍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김희도의 말에 주변을 둘러봤다.
어부바를 한 채 그라운드를 돌아다니는 선수, 흥에 못 이겨 코치 뺨에 뽀뽀하는 선수, 서로를 껴안은 채 우는 선수도 있었다. 진짜 손깍지가 제일 건전한 것 같네.
임성은 아직 열기가 남은 김희도의 옆모습을 보다가 상체를 슬쩍 기울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숙이는 남자의 귓가에 입술을 딱 붙였다.
“그러면 좀 이따 좀 덜 건전한 거 할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 탓에 조금 쉰 목소리가 흘렀다. 김희도는 예상치 못했단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엽긴. 임성은 김희도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남은 손으로 홍조가 번진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얼굴이 수줍게 물들었다.
* * *
“후, 흐읏.”
뜨거운 혀가 진득하게 얽혔다. 혀끝이 격렬하게 감기고 혀뿌리가 뽑혀 나가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임성은 저를 거칠게 밀어붙이는 김희도를 피하거나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양 뺨을 붙잡고 고개를 틀었다. 이미 틈 없이 겹쳐져 있던 입술이 더욱 깊게 맞붙었다. 젖은 살결이 빨리고 맞물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머리가 단숨에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김희도의 무릎이 임성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어 다리를 벌렸다. 서로의 발끝이 엇갈리고, 무릎 끝이 허벅지 안쪽을 뭉근하게 불시에 위로 쳐올렸다.
“윽.”
임성의 허리가 흠칫 떨렸다.
“섰어요? 선배 이렇게 자극하는 거 좋아하잖아.”
꽉 잠긴 목소리가 맞붙은 입 안으로 뱀처럼 흘러들어 왔다. 늘 덤덤하던 눈동자는 알 수 없는, 아니 노골적인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임성은 하체를 딱 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김희도의 성기가 옷 위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흥분한 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김희도가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맞붙은 육체도 함께 흔들리며 발기한 채 눌린 성기들이 잘게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로, 곧 양어깨가 붙잡히고 등이 현관문에 쿵 부딪혔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고개가 빠듯하게 쳐들리며 다시 한번 혀가 깊게 섞였다. 입 안을 더듬고 혀 아래쪽과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샅샅이 핥아졌다. 입 안에 고인 타액이나 목구멍에서 흩어진 숨까지 가져갈 듯 집요한 키스였다. 자신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미묘한 부분이 건드려질 때마다 열이 올랐다.
공을 던지면서, 우승 후 남아 있던 흥분에 흥분이 더해져 머릿속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좀 천천히 해.”
김희도는 제 뺨을 잡은 임성의 손목을 붙들며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모양 좋은 입술은 이미 몇 번이나 빨아 댄 탓에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니 묘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더, 더 원했다.
두 사람은 마치 주도권 싸움을 하는 것처럼 거칠게 입술을 비볐다. 발기한 성기가 옷 위로 눌리고 스쳐 지나갔다. 어깨를 짚었던 손은 어느새 허리를 감고 임성의 엉덩이를 터질 듯 쥐고 있었다. 둘 사이는 아무런 대화도 흐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거친 숨소리와 맞붙은 입술이 뭉개지며 그 사이로 혀가 섞이는 소리만 음란하게 울릴 뿐.
김희도의 입 안을 정신없이 더듬어 대던 임성이 문득 고개를 물렸다. 벌어진 만큼 따라와 기어코 키스를 퍼붓던 김희도 역시 어느 순간 멈췄다.
두 사람은 적나라한 욕망이 드러난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누가 봐도 욕망이 번져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고 보라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숨조차 내뱉지 않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잔뜩 예민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피하지 마, 눈 돌리지 마, 그 순간 더는 물러나지 못해.
꿀꺽. 누구 것인지 모를 목 넘김 소리가 신호탄이 된 듯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다급하게 벗기기 시작했다. 이미 흥분이 머릿속을 꽉 채운 탓에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 벗겨져. 임성은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면서 겨우 유니폼 단추를 풀어 냈다. 김희도는 아예 벗기기 포기했는지 임성의 유니폼 양쪽을 잡고 그대로 잡아 벌렸다.
투두둑. 뜯겨 나간 단추가 사방에 튀었다.
헉, 뭐야. 놀랄 사이도 없이 쇄골에 더운 숨이 닿더니 따끔한 고통이 번졌다.
“윽!”
단단한 치아가 살갗을 콱 깨물고 혀로 쓸었다가 다시 짓씹기 반복했다.
아파. 평소보다 훨씬 더 세게 깨무는 느낌에 임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를 뒤로 뺐다. 그러자 곧장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살짝 벌어졌던 공간이 다시금 겹쳐졌다.
“어딜 가요.”
마른 나뭇가지처럼 뾰족한 목소리였다.
“아무 데도 안가. 너랑 있을 거야.”
임성은 목구멍에 걸린 타액을 꿀꺽 삼키며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둥근 귓바퀴를 혀로 쓸고 말랑한 귓불을 깨물었다. 배고픈 짐승이 먹이를 먹는 것처럼 사나운 김희도와 다르게 다정한, 그러나 명백한 욕구가 담긴 행동이었다.
난 지금부터 널 어떻게 할 것이라는.
“평소엔 잘 안아 주지도 않더니 오늘따라 적극적이네요.”
“그동안 참은 게 너뿐인 줄 알아?”
두 사람, 아니 임성은 시즌 중엔 되도록 섹스를 기피했다. 가을 야구 확정 후에는 서로 비비지도 않고 각자 해결하는 날들을 보냈다. 김희도는 못내 불만스러운 듯하면서도 그 사실을 착실히 지켰다.
가끔 화장실에서 해결하고 나온 임성을 빤히 보다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참았던 것까지 모두 받아 낼 거예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하고 말했다.
섣불리 손댔다가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꺼릴 게 없으니까. 이자까지 받아낼 생각이었다.
“몸 사리느라 못했던 거 오늘 거 다 하자.”
“잘 생각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후회? 그따위 걸 할 리가 있나. 지금 당장에라도 김희도와 뒹굴고 싶어 죽겠는데.
경기가 끝난 직후라 평소보다 기분이 붕 뜨고 흥분됐다. 뭐라도 좋으니까, 빨리. 빨리 그와 닿고 싶었다. 몸속을 잠식한 열기를 뿜길 바랐다.
“중간에 싫다고 해도 안 봐줄 거예요.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할 거라고요.”
“네가 그만하고 싶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놔줄 생각 없어.”
임성이 미소 지으며 김희도의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옷 위로도 무서운 존재감을 뿜어내던 것이 기다렸다는 듯 툭 튀어나왔다. 핏줄이 잔뜩 불거진 성기가 위로 무섭게 솟구쳐 있었다.
“음.”
묘한 위압감에 입술이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언제 봐도 적응 안 되는 크기와 모양이었다.
“내가 그만하고 싶어 할 거라고?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네.”
얼굴이 발갛게 물든 김희도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어 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제 이마를 덮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이 쓸려 올라갔다.
잘생긴 애들은 땀에 절어도 멋있구나. 새삼 눈앞에 있는 남자의 외모에 감탄하는 사이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김희도는 길게 뻗은 눈꼬리를 살짝 휘며 조용히 웃었다. 사람을 홀리게 하는 미소였다.
“희도야. 이리 와 봐.”
미묘하게 올라간 입매를 보던 임성이 그의 뒷 목을 감싸며 제게 당겼다. 그리고 ‘6’과 ‘9’가 적힌 아이패치에 차례대로 입술을 맞췄다. 쌉쌀한 흙 맛이 혓바닥에 감겼다.
임성이 아이패치 핥는 것에 집착하고 있을 때, 옆구리를 조용히 쓸던 손이 몸에 착 달라붙은 언더티 안을 파고들었다. 늘씬한 허리를 더듬고 탄탄하게 잘 짜인 근육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매만지며 올라가다가 젖꼭지를 강하게 꼬집었다.
불시에 가해지는 자극에 임성이 어깨를 굽히며 허리를 비틀었다. 김희도는 늘 손톱을 짧게 깎는 편이라 손톱으로 찍히진 않았지만, 충분히 아팠다. 임성이 미간을 찌푸리자 김희도의 혀가 마치 달래듯 젖꼭지를 핥았다.
“아파요?”
아니.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입 안에 고인 숨을 내뱉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하의 안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헉.”
평소보다 흥분한 몸은 김희도의 손에 쉽사리 반응을 보였다. 그는 반쯤 일어선 임성의 것을 힘주어 잡으며 귀두를 엄지로 살살 쓸었다.
처음부터 단단했던 성기는 몇 번의 움직임으로 금세 부풀어 올랐다. 거침없는 손길에 배 안쪽에서부터 쾌감이 징징 번지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푸들푸들 떨리고 발끝이 들썩이는 감각이었다.
“나도 해 줄게…….”
임성은 입술 안쪽 살점을 질근 깨물며 김희도의 하체로 손을 뻗었지만, 그 순간 김희도가 손에 힘을 줬다.
어흑. 허리가 저절로 구부려지고 허공을 짚던 손등에 핏줄이 쫙 돋아났다. 임성은 허리를 굽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지금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 김희도가 성기를 잡고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임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배트를 휘두르며 몇 번이고 터졌다가 아물었던 김희도의 손바닥은 곧고 예쁜 손등과 다르게 굳은살이 박여 울퉁불퉁했다. 그 손으로 성기를 훑자 자극이 배가 됐다.
“으, 흐으.”
흥분에 젖은 숨이 목구멍에서 비어져 나왔다. 임성은 고개를 젖혔다가 다시 옆으로 틀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 바지, 바지 좀 벗고.”
발기한 귀두가 부드러운 속옷에 쓸리는 느낌이 이상했다. 바지라도 벗고 싶은데 김희도는 허락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성기를 터질 듯 잡았다.
허벅지를 타고 온 쾌감들이 배 속을 저릿저릿 울리다가 성기로 빠르게 몰렸다. 무의식중에 허리가 움직이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아, 왜 이렇게 좋지.
김희도는 명백히 흥분한 얼굴을 뚫어지라 보며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단정한 손이 음란하게 움직이고, 그때마다 임성의 호흡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들썩이던 발바닥은 이제 완전히 떨어져 발꿈치로만 무게를 지탱 중이었다.
“희도야, 응, 바지만이라도…….”
“바지만요.”
애원을 섞어 말하고 나서야 바지와 속옷을 벗을 수 있었다. 하체를 감싼 옷가지가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한쪽 허벅지 안쪽이 잡혀 그대로 들려졌다.
“아, 야. 이러다 넘어져.”
지금 두 사람은 아직 현관에 서 있는 채였고, 한쪽 다리만으로 지탱하기엔 너무 버거운 자세였다.
하지만 김희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성기를 잡은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임성이 다급히 그의 목을 껴안으며 몸을 붙였다. 귀두를 문지르고 꼬집고 쓸면서 끊임없이 자극했다. 급소가 쥐어짜이는 묘한 두려움과 통증, 그리고 그 통증을 상회하는 쾌감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손…… 나, 나올, 것 같아.”
요의와 닮은 간지럽고 무거운 감각이 피어올랐다. 그만 분출하고 싶은데 귀두는 여전히 김희도의 손에 막힌 채라 어쩔 줄 모르겠다. 풀지 못한 상태에서 쌓이기만 하는 자극이 고통스러웠다.
“손, 좀…… 으, 놓으라고!”
“아직.”
한참을 헐떡이다 겨우 내뱉은 말에 간결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다리라도 좀 놔주든가. 그의 어깨를 퍽퍽 쳐 봤지만 반응이 없자 도드라진 쇄골을 콱 깨물었다. 제법 힘주어 물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젖히고 목덜미를 드러냈다.
“어디 마음껏 해 봐요.”
김희도가 제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가까이에서 본 김희도의 얼굴엔 노골적인 흥분이 가득했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쭈뼛 돋았다.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며 달뜬 숨을 내뱉었다. 온몸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음모가 쓸리는 것조차 자극적이었다. 벗어나려 해도 앞은 김희도가 있고 뒤는 문이라서 도망갈 곳도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무슨 대답을 원하는데. 물어보려고 벌린 입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다시 혀뿌리가 감기고 타액이 빼앗겼다. 눈두덩이 훅 달아올랐다.
그 순간 성기를 꽉 쥐고 있던 손에 한순간 힘이 풀렸다. 빳빳하게 서 있던 발뒤꿈치가 풀썩 내려앉으며 힘이 풀렸다. 늘어지는 육체와 달리 임성의 성기는 곧추선 채로 정액을 줄줄 토해 냈다. 헉, 허억. 김희도는 손바닥을 오목하게 만들어 정액을 받으며 임성의 귓가에 뽀뽀를 퍼부었다.
“선배. 되게 기분 좋아 보여요.”
“뭐…… 아, 흐. 읏!”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 하나가 아래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임성은 입을 벌렸던 그대로 숨을 토해 냈다. 꾹, 꾹. 잘게 주름져 있던 아래가 열리며 손가락을 집어삼켰다.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은 안쪽 깊은 곳을 거칠게 헤집다가 빠져나갔다.
쩔걱쩔걱. 임성은 김희도의 손이 제 안을 드나드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아파요?”
김희도는 당장에라도 임성에게 자신의 것을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착실히 아래를 늘렸다. 임성이 제 손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를 내리기까지 계속.
쪽. 보드라운 입술이 달래듯 임성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달아오른 얼굴보다 더욱 뜨거운 입술에 임성이 턱을 살짝 내렸다.
“이제 괜찮, 아.”
쪽. 임성의 눈가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하던 김희도가 제 것을 밀어 넣었다. 다정한 입술과 달리 무자비한 것이 아래를 열고 들어갔다. 손가락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안 될 것 같…….”
“도망가지 말랬잖아요.”
무의식적으로 물러나는 임성의 허리를 잡아챈 김희도가 제게 당겼다. 반쯤 들어갔던 성기가 단번에 박혔다.
“……아, 아. 으읏.”
자비 없이 들어온 성기는 처음부터 임성이 느끼는 곳을 집중적으로 쳐 댔다. 쩌억. 쩍. 땀으로 범벅된 등이 연신 현관문을 쳐 대며 젖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어찌나 야릇하게 들리는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사정 후 늘어져 있던 성기가 다시 크게 튀어 올랐다. 김희도가 체중을 실으며 밀어붙이자 벽과 그의 배 사이에서 성기가 짜부러질 듯 눌렸다.
“앗, 잠, 잠깐, 눌렸……는, 데. 흣. 읏.”
“응. 알고 있어요.”
나직이 웃은 김희도가 허리를 슬쩍 밀었다. 꾸욱. 이미 뿌리 끝까지 들어왔는데도 계속 밀어붙였다. 기어코 음낭이 엉덩이를 꾹 누르고 나서야 숨을 내뱉었다. 날것처럼 거칠고 뜨거운 숨이 귓가에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몸속을 꽉 채운 성기가 더욱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더 커지는 게 가능하다고? 경악스러웠다.
김희도는 저를 끝까지 밀어 넣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덕에 제 몸을 파고든 성기의 크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하아, 선배…….”
후욱, 후. 귓가에 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덩달아 기분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임성, 선배.”
제 이름이 흘러들어 올 때마다 임성의 어깨가 움찔대며 반응했다. 몸 안쪽 깊은 곳에서 묵직한 간지러움이 좀 더 짙어졌다.
“희도, 희도야.”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던 김희도가 허리 짓을 시작했다. 여태 가만히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거친 움직임이었다. 몸 안을 파고들었던 성기가 어느 곳을 강하게 찍어 댔다.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이 크게 튀어 오르는, 미칠 것 같은 감각. 꼬리뼈에 고였던 쾌감이 팍 터지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헉, 아, 아흐……!”
몸속을 채운 쾌감이 쭈뼛 섰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임성이 호흡을 불규칙하게 뱉어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마, 눈두덩, 눈가, 코끝, 뺨, 입술을 핥듯이 응시하며 허리를 물렸다. 밀려 올라갔던 속살이 김희도의 것을 꽉 무는 게 느껴졌다. 팽팽하게 늘어났던 주름이 다시금 닫히며 이제 귀두 끝부분만 간신히 걸친 채였다.
몸을 꽉 채우는 압박감이 사라졌는데도 요동치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끌어안은 것처럼 더욱 빠르게 뛰었다.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묘한 기분이었다.
어, 지금 웃었……?
멍하니 생각할 즈음 끝까지 빠져나갔던 것이 안을 거칠게 쑤시며 들어왔다. 퍽, 강한 마찰음과 함께 입구가 다시금 한계까지 벌어지며 성기를 삼켰다.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아, 거기……, 으흑, 흣!”
싫은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 쾌감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또 다른 쾌감이 쏟아졌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으로 휘저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떨림이 허벅지를 지나 엉덩이, 팔, 그리고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성기가 안을 푹푹 꽂을 때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임성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숨을 들이켰다.
겨우 버티고 있던 한쪽 무릎이 꺾였다. 주저앉고 싶은데 다른 쪽 다리가 김희도의 팔에 걸쳐진 채라 완전히 무너질 수도 없었다.
“선배, 나 잡아요. 나 좀 봐 주세요.”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따라 허겁지겁 김희도의 목을 껴안았다.
“제발 천천히 좀, 해. 왜 이렇, 아…….”
“부추기지 마세요. 난 아직도 참고 있거든.”
애원은 오히려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김희도는 흥분과 눈물에 범벅된 얼굴을 뚫어지라 보면서 성기를 쳐 댔다.
견디지 못한 임성이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고 해도 결코 놔주지 않았다.
“밤새도록 나랑 어울려 줘야죠. 불건전하게, 응?”
얕고, 깊게, 빠르고 강하게 쳐 대는 것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사정했던 성기는 다시 발기한 지 오래였다. 김희도의 눈동자가 곧추선 성기로 향했다.
쾌감을 견디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창피함이 몰려와 허벅지를 닫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보란 듯 제 팔에 걸쳐진 무릎 안쪽을 잡아 벌렸다. 다리가 훤히 벌어지고 발기한 채 번들대는 성기와 김희도의 것을 삼키고 있는 입구가 보였다.
“왜 숨겨요, 보기 좋은데. 더 보여줘요.”
“흐. 아, 거기, 아.”
“선배의 가장 밑바닥까지요.”
“악. 아앗. 아흣. 잠, 잠깐!”
더 하는 건 위험하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어설픈 거절에 김희도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시즌 끝났잖아. 지금부터 선배는 내 거예요.”
그는 진득한 독점욕과 욕망이 담긴 말을 고스란히 내뱉으며 다시금 허리를 추어올렸다.
아래가 헤집어질수록 점점 이성이 사라졌다. 아, 아직 정신 놓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날아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쓸모없는 것이었지만.
“아흐, 흣. …희도, 너, 다…….”
임성이 힘겹게 입술을 떼어 내자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숙여 귀를 가져다 댔다. 임성은 자꾸만 넘어가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네, 거 맞, 맞아. 맞으니까 다…… 다 가져, 가.”
힘겹게 뱉어 낸 말에 거칠게 움직이던 김희도가 멈췄다. 헉, 허억. 임성은 그의 어깨에 턱을 대고 반쯤 넋을 놓은 채 숨을 뱉어 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김희도가 원하면, 그게 뭐든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다 가져가.
“희도야?”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 다리도 들렸다. 순식간에 두 다리가 허공에 떴다. 놀란 임성이 본능적으로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지금, 뭐…… 잠깐, 아, 악!”
그는 임성을 번쩍 들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래는 아직 연결된 채라 김희도가 걸을 때마다 성기가 미묘한 각도로 안쪽을 찔러 댔다. 평소보다 높은 시선도, 몸 안쪽에서 번지는 뭉근한 쾌감도 당황스러웠다.
“선배 혹시 일부러 그래요?”
딱딱하고 차가운 벽 대신 푹신한 감촉이 등에 닿았다. 임성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김희도가 한 겹 남은 티를 벗어 던지며 얇은 천에 가려졌던 육체가 드러났다. 굵고 널찍한 어깨, 탄탄한 가슴, 그리고 복근엔 과하지 않은 근육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단련된 몸이었다.
김희도는 옷에 쓸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다시금 넘겼다. 임성은 반쯤 넋이 나간 채 그를 올려 보다가 곧추선 제 아랫도리를 손으로 가렸다.
“쓸데없는 짓 하네.”
눈을 깜빡인 김희도가 임성의 손을 치워 내고 옆구리를 꽉 잡았다. 땀에 젖어 미끄러울 텐데도 개의치 않았다. 내일쯤이면 옆구리에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멈췄던 허리 짓이 다시 시작됐다.
얕게 이어지던 쾌감이 다시금 깊고 빠르게 퍼졌다. 임성의 가슴이 붕 뜨고 허리가 꺾였다.
“아, 거기……, 거기 좋아, 희도야.”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이 모조리 날아가고 짐승 같은 본능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배 속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벌벌 떨렸다. 제 몸이 제 게 아닌 것처럼 통제가 불가능했다. 숨이 길게 나왔다가 짧게 뱉어지고 나중에는 그마저도 버거워 헉헉대기만 했다. 절정으로 치닫던 쾌감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어지러웠다. 진짜 미친 것 같아.
임성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울음 섞인 신음을 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짧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손 꽉 잡지 마요. 그러다 다치잖아.”
둥글게 말린 손가락을 하나하나 편 김희도가 제 손을 겹치고 깍지를 꼈다. 땀이 끈끈하게 밴 손바닥이 맞물렸다.
끼익, 끽.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침대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걱댔다.
“으, 으읏. 아, 하아……좀, 너무, 조금만, 천천히, 아, 아!”
“알았어요.”
얌전히 대답한 것과 달리 움직임은 정신이 없었고 거칠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도 양손이 붙잡힌 채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저 김희도가 쏟아 내는 쾌감을 견디고, 또 견디고, 견디다가 휩쓸려갔다.
“으. 읏.”
“하아.”
미친 듯 박아 대던 김희도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멈추고, 사정을 시작했다. 동시에 임성의 귀두에서도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렀다.
그것을 본 김희도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 쏟아 내기 무섭게 다시 단단해진 성기로 내벽을 쑤시고 찔러 넣었다. 설마 지금 또 한다고? 방금 쌌잖아.
“으, 허억.”
한껏 예민해진 몸뚱이가 크게 튀어 올랐다. 김희도는 제 뺨에 튄 정액을 손가락으로 슥 닦았다. 확연히 묽어진 게 보였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에 묻은 정액을 혀로 핥았다.
퍽, 음낭이 엉덩이에 부딪혔다. 임성이 고개를 젖혔다. 시야는 이미 흐려진 지 오래였다. 두 번이나 사정한 성기가 빠듯하게 조여 왔다. 김희도는 무릎을 바닥에 디딘 채 상체를 일으켰다.
“아…… 싫, 흐.”
닿으면 안 될 곳까지 닿을 것 같아 무섭고 두려웠다.
“선배가 싫어하는 건 안 한다니까. 금방 좋아질 거예요.”
더없이 다정하게 속삭인 김희도가 임성의 젖은 뺨을 쓸었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뽀뽀를 퍼부으며 체중을 실어 박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고스란히 실리며 성기가 임성의 안을 사납게 꿰뚫었다.
“……!”
허리와 가슴이 위로 쭉 끌어 올려졌다. 평소와 다른 각도로 깊게 들어오는 것에 갑자기 절정이 찾아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소리를 참는다든가 쾌감을 견디는 것 따위는 불가능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앞의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선배 우는 거 누구누구 봤어요? 조예준? 권재영?”
“너, 아, 없…… 아으으읏! 아, 아!”
너 말고 본 사람 없어. 대답하고 싶은데 억눌린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젖은 숨을 훌쩍이면서 팔을 벌렸다.
“안아 달라고?”
미친 사람처럼 박아 대던 김희도가 눈을 깜빡이더니 상체를 숙여 임성을 끌어안았다. 수직으로 꽂히던 성기가 새로운 곳을 찔렀다.
“흐, 으. 아흣.”
귀가 간지러워지는 야릇한 신음이었다.
* * *
지금 몇 시지, 며칠이나 지난 걸까. 잘 모르겠다. 아주 오래된 것 같기도, 찰나 같기도 했다. 임성은 벌써 몇 번인지 모르는 사정을 또다시 했다. 더는 뱉어 낼 게 없는 귀두에선 묽은 정액만 질금질금 맺힐 뿐이었다.
분출하지 못한 쾌감에 사지가 덜덜 떨렸다. 발끝, 성기, 머리카락 끝까지 저릿저릿한 감각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살갗을 스치는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조차 진저리가 쳐졌다.
“선배, 벌써 지친 거예요? 자신만만해하더니.”
김희도가 임성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미 온몸의 힘은 빠진 상태라 엉덩이만 높게 솟아올랐다. 그마저도 물리고 씹힌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안에 싸 놓은 정액 덕분에 무리 없이 성기가 왕복했다. 어쩌면 김희도가 쑤셔 놓은 대로 길들었는지도 모르지.
임성은 시트에 고개를 박고 숨을 몰아쉬다가 늘어진 손을 앞으로 뻗으며 기어갔다.
김희도에게서 벗어난다든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을 뿐. 그마저도 그 자리에서 바르작거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하지만 김희도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억센 손으로 뒷 목이 잡히고 동시에 허리가 당겨졌다. 퍽. 한껏 예민해진 속살이 움찔대며 발갛게 부어오른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직 안 끝났어. 형.”
곧 뒷 목을 눌렀던 손이 떨어지고 맨 가슴이 등에 닿았다. 그대로 엉덩이가 양쪽으로 벌려지고 뜨거운 성기가 몸을 쑤셨다.
허윽. 헉. 임성이 시트를 움켜잡으며 날개 뼈를 젖혔다. 등에 고여 있던 땀이 주륵 떨어졌다. 김희도는 몸을 딱 겹친 채 귀를 빨았다.
쿵.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침대 다리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기어코 무너졌다.
하지만 김희도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임성은 반쯤 기울어진 침대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하악. 흐. 앗! 아!”
힘들어 미칠 것 같은데, 미칠 정도로 좋았다. 미치, 미치게.
“네. 김희도입니다.”
“……?”
쾌감에 허우적대던 임성이 눈을 홉 뜨고 고개를 돌렸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자신의 휴대폰을 든 김희도가 아른아른 보였다.
쟤가 왜 내 전화를 받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만 끔뻑끔뻑 떴다.
[왜 네가 받냐? 성이는 어디 가고?]
권재영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제야 멍하던 정신이 번쩍 들며 당혹스러움이 찾아왔다.
“선배는 자고 있습니다.”
김희도는 임성을 힐끔 보고선 대답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아 권재영은 별다른 의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꿰뚫린 임성은 혹시 소리라도 샐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아직 9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자? 어디 아프냐?]
“피로가 많이 쌓였나 봅니다.”
뺨과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끼워 고정시킨 김희도가 임성의 옆구리를 움켜잡고 돌렸다. 엎어져 있던 몸뚱이가 예고 없이 돌아가며 마주 본 상태가 됐다.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이 보였다. 김희도는 입맛을 다시며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왜 전화했습니까?”
[뒤풀이에도 안 오고 연락도 없어서 무슨 일 있나 하고.]
“뒤풀이요? 둘이 만나기로 했어요?”
김희도는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임성의 얼굴 옆을 짚었다. 상체를 덮치듯 누르자 임성의 허리가 위로 더욱 들렸다.
흐. 임성은 목 끝까지 치민 신음을 겨우 삼켰다. 권재영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조예준? 아, 조예준도 거기 있구나.”
김희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허리를 처넣었다. 내벽이 움찔 경련하며 그의 것을 꽉 물었다. 흣, 김희도가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을 작게 뱉어 냈다.
“한번 깨워 보라고요? 음. 어쩔까.”
또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임성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희도야, 제발…….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땀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깼는지 볼게요.”
임성은 팔을 허우적대다가 김희도의 목을 끌어안았다. 둥글게 말렸던 허리는 이제 완전히 젖혔다. 핏줄이 불거진 발목이 위로 들린 채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강인하게 마운드를 디디던 다리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웠다.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크게 경련하는 내벽을 깊게 파고들었다.
“으, 아으. 학!”
잔뜩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두려움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정에 머리가 핑 돌았다. 임성이 허리를 세우며 아래를 꽉 조였다.
“재, 권재…… 아, 아읏. 아. 재영이 형.”
“지금 딴 남자 이름 부르는 건 반칙이지. 안 그래요?”
“그게 아니라…… 전화, 희도야, 흐으.”
정말 모르는 건지,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희도의 혀로 핥아 올려졌다.
“전화는 아까 끊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배 목소리를 들려줄 것 같아요?
그의 말처럼 어느새 꺼진 휴대폰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까 선배가 내가 뭘 하든 다 괜찮다고 말했었죠?”
그는 제가 핥았던 부분에 다시 입술을 맞췄다.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된 얼굴이 지독히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때때로, 사실은 꽤 자주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딴 사람들이 선배 이름 부르는 거 싫어요. 머리 쓰다듬는 것도 어깨 두드리는 것도 화가 나요. 이것도 괜찮아요? 역시 좀 이상한가?”
괜찮아. 너라면 다 좋아. 말하고 싶은데 비명에 가까운 신음밖에 뱉을 수 없었다. 결국 대답 대신 목을 껴안은 손에 힘을 줬다.
부디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미쳤…… 하아, 아, 아!”
“네. 선배가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던 입술이 열리며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 *
“으으…….”
작렬하는 햇볕을 맞는 것처럼 몸이 뜨겁고, 목이 지글지글 탔다. 입 안의 타액을 그러모아 삼켜 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여전히 목구멍에 모래를 쏟아붓는 것처럼 깔깔하기만 했다. 눈두덩은 돌덩이로 짓누르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만 색색 뱉어 내는 사이, 목 뒤로 손이 들어와 고개를 살짝 젖혔다. 딱 붙어 있던 입술이 힘겹게 벌어지며 그 안으로 미지근한 물이 흘러 들어왔다.
으으. 눈꺼풀에 한껏 힘을 줬지만, 여전히 꽉 닫힌 채 바르르 떨리기만 했다. 끙, 잇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조금 더 자요. 해 뜨려면 아직 멀었어요.”
젖혔던 얼굴을 바로 해 준 손이 뺨을 쓰다듬고 내려가 가슴을 천천히 두드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손길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토닥임을 받는 건 오랜만인데, 누가 해 주는 걸까.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반쯤 떠올랐던 의식은 이미 저 깊이 가라앉은 뒤였다.
“아…….”
가장 먼저 마주한 건 평소보다 조금 높아 보이는, 아무 무늬도 없는 천장이었다. 흰색보다는 아이보리에 가까운 천장은 매일 밤 보던 것이었다.
숙소구나.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임성은 문득 답답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한쪽 팔은 팔베개로 내어 주고 다른 쪽 팔로 자신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김희도가 보였다.
임성은 저를 끌어안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어깨를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등허리를 옥죈 힘이 강해졌다. 팔을 움직여도, 엉덩이를 뒤로 빼 봐도 마찬가지였다.
자는 게 아니라 자는 척만 하는 거 아니야? 임성은 얼굴에 맺힌 식은땀이 뺨을 타고 떨어져 내릴 때가 돼서야 김희도의 품을 벗어나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타자의 팔을 계속 베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머리를 밑으로 내렸다.
깰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몸에 힘을 풀고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시즌 중에는 잠에서 깨자마자 씻고 러닝을 뛰러 나갔다. 그 후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오전 운동을 하다가 구장으로 출근했었다. 원정 갔을 때도 ‘밥-운동-밥-운동’ 스케줄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아침잠이 많은 김희도는 퉁퉁 부은 눈을 채 뜨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았다.
“그냥 자도 되는데.”
꼭 따라온단 말이야.
임성의 시선이 곤히 잠든 남자에게 향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찬찬히 뜯어보듯이 김희도를 감상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땐 차가워 보이는 남자는 지금 앳된 티가 물씬 풍겼다. 실제로 어리니까 당연하지만, 뭔가 묘하달까.
여백 없이 꽉 차 있는 이목구비는 눈을 감았음에도 날카롭고 화려했다. 어디에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겠다.
“속눈썹 되게 기네.”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 속 쌍꺼풀에 눈매는 가로로 길고, 콧날은 높으며 끝이 날렵했다. 흰 피부는 진주 가루를 바른 것처럼 은은한 광택이 흘렀고, 눈가와 뺨에는 홍조가 옅게 피어 있었다. 일부러 저런 색을 내라고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예쁜 색이었다. 개중 제일 매력적인 건 끝이 살짝 올라간 도톰한 입술이었다. 유난히 붉은 입술은 입을 열 때마다 육감적으로 움직여 저절로 시선을 끌었다.
아무리 이벤트성이라도 연예인조차 잘 안 해 주는 햄버거 세트 표지 모델로 나설 만했다. 팀장님에게 듣기론 고작 열흘 만에 예상 판매량을 모두 채웠다지.
임성은 제 지갑 깊숙이 넣어 놓은 포토 사진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만약 누군가 제게 야구 실력과 외모 중 하나를 준다고 하면 예전에도 지금도 당연히 전자였지만, 김희도는 잘생기고 야구도 잘하니까.
“누구 애인인지 참 잘생겼다. 봐도 봐도 안 질리네.”
“선배 애인이요.”
어느새 눈을 뜬 김희도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혼잣말, 그것도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 걸린 게 못내 창피했다. 달아오른 얼굴로 뻐끔대던 임성이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 일어났어?”
“그냥 자도 된다고 했을 때부터요.”
김희도는 임성의 손에 깍지를 끼고선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거의 처음부터 깨 있었다는 거잖아.
“……깼으면 일어나지. 사람 민망하게 가만히 있냐.”
“선배가 날 보는 게 좋아서요.”
말이나 못 하면. 임성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둥실둥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꽤 기분 좋아 한참이나 매만지다가 귀 뒤로 꽂아 넘기고 뺨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좀 더 누워 있어요. 어제 무리해서 움직이기 힘들걸요?”
“가만 있으면 더 피곤해. 이럴 때일수록 운동으로 풀어야지.”
호기롭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던 임성은 온몸을 강타하는 고통에 비틀댔다. 소주 10병은 쉬지 않고 마신 것처럼 시야가 핑 돌더니 무릎이 꺾였다.
“헉.”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한 육체를 받친 것은 단단한 손이었다.
“괜찮아요? 이것 봐. 내가 좀 더 누워 있으라고 했잖아요.”
빈말로도 괜찮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가만히 숨만 헐떡였다.
멍한 머릿속으로 민트 색 깃발이 흩날리던 그라운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터질 것처럼 긴장된 마음으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 전광판에 뜬 우승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짜릿한 감각이 벅차올랐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이 전신을 감싸고 아드레날린이 붕붕 날렸다.
흥분이 채 식지 않은 상태로 김희도와 함께 숙소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옷가지를 벗겨 내고 맨살을 껴안았다.
발정기 때 짐승이 이런 기분일까. 눈앞에 있는 상대를 어떻게 하고 싶은, 흉포하기까지 한 감정.
체면이나 위신 따위는 버리고 오로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달뜬 숨과 함께 낯부끄러운 말이 귓가로 쏟아지고, 그만큼 또 제 입에서 뱉어졌다.
김희도와의 섹스는 꽤 길고 집요하다는 건 그간 경험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시즌도 마쳤겠다, 충분히,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두 살 형으로서 여유로운 리드를 보여 줄 작정이었다. 그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걸 아는 덴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동안 김희도가 섹스에서 저를 많이 봐주고 있었다는 슬픈 진실도 함께 깨달았다.
미쳤어, 임성. 짐승 새끼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도 뜨겁고, 얼굴도 터질 것 같고, 내뱉는 숨도 더웠다. 한마디로 얼굴을 들 낯이 없었다.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러긴 창피해서잖아.
“선배. 고개 좀 들어 봐요.”
“…….”
“내가 마음대로 해서 싫었어요? 나한테 정떨어져서, 그래서 보기 싫은 거예요?”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냐?”
“이제야 나 보네.”
침울해하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김희도의 얼굴엔 초승달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또 속았구나. 뺨이라도 꼬집어 줘야지 안 되겠네. 성큼 뻗었던 손은 그의 얼굴 위에서 방황했다. 보는 것도 아까운 놈의 뺨을 어떻게 꼬집겠는가. 결국엔 꼬집기 대신 뺨을 가만히 쓸었다. 김희도는 제 얼굴을 만지는 손에 뺨을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미소 한 번에 마음이 풀리는 제 모습이 상당히 어이없으면서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몇 시야? 휴대폰은 어디…… 헉, 침대는 왜 저래? 나 자는 사이에 전쟁이라도 났냐?”
휴대폰을 찾으며 주변을 돌아보던 임성은 다리가 박살 나 기울어진 침대를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어쩐지 잠에서 깼을 때 묘하게 시야가 높더라니, 바닥에 자서였구나.
망가진 침대뿐 아니라 걸레짝이 된 유니폼과 허물처럼 벗어 놓은 양말, 바닥에서 나뒹구는 글러브 등 방 안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글러브를 내팽개칠 만큼 정신이 나갔다는 건데.
왠지 모를 충격을 느끼며 한 걸음 내딛자 옆에 있던 남자가 얼른 부축했다.
“괜찮아. 그냥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것뿐이야.”
둥그런 뺨에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게 엊그제 건만, 창피하고 부끄럽고, 아무튼 복잡한 감정으로 망가진 침대를 향해 걸었다.
침대는 총 4개의 다리 중 오른쪽 다리 하나가 완전히 박살 나 비스듬히 기울어졌고, 매트리스 한가운데는 움푹 꺼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누가 바위라도 집어 던졌어? 완전 폭삭 주저앉았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기억 안 나요? 내가 위에서 선배한테 박다가…….”
“아! 마, 맞다. 기억나. 기억났으니까 더 말하지 마.”
그의 입에서 박는다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기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은 야한 영상에서나 연출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야, 침대가 낡아서 지지대가 약해졌겠지. 다소 착잡한 시선으로 운명을 달리한 침대를 응시하다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침대 옆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어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배터리가 다 닳았는지 켜지지 않았다. 충전기를 꽂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휴대폰을 켰다. 까맣게 죽어 있던 액정이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진동이 끊이지 않고 울려 댔다.
“부재중 전화 엄청 많이 왔네. 하루 사이에 뭔 일…… 어, 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날짜를 확인하던 임성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실제로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11월 2일 화요일이요.”
멍하니 액정을 보던 고개를 돌려 김희도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날짜요. 궁금한 거 아니었어요?”
한국 시리즈 6차전은 10월 31일에 끝났다. 날짜와 요일, 시작과 끝난 시간, 가을치고 조금은 후텁지근하던 공기와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신 땀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11월 2일이고. 그 말인즉슨 숙소에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기억이 반쯤은 날아간 이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혼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우선 부재중 연락을 확인했다.
조예준, 권재영, 최희탁…… 팀원들부터 아버지, 동생들, 중고등학교 선후배와 리틀 시절 잠시 스쳤던 코치까지 무수한 연락이 와 있었다.
무려 일곱 개나 되는 300+ 단톡방 중에 맨 위의 것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휴대폰이 울렸다. 깜짝 놀라 떨어트릴 뻔한 것을 겨우 붙잡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임성입니다.”
[나다. 많이 아프냐? 얼마나 긴장했으면 시합 끝나자마자 쓰러지냐?]
걱정스러운 권재영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울렸다.
“네?”
쓰려져? 누가?
[희도에게 들었다. 지독한 감기 몸살이라며. 야, 목소리 완전 맛탱이 갔다.]
임성은 여전히 제 어깨를 감싼 남자를 힐끔 곁눈질했다. 왜요?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아, 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인마. 웬만하면 회식에 와. 장소랑 시간은 희도에게 듣고.]
“저기, 재영이 형.”
엉망으로 뒤엉킨 기억 사이로 권재영이 전화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머뭇머뭇 입을 뗐다.
“저번에 전화했을 때요.”
[어. 너 자고 있을 때? 인마, 스트레스 받으면 그럴 수도 있지.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다행히 권재영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따 사무실에서 뵐게요.”
몸조리 잘하라는 말과 함께 권재영이 전화를 끊었다. 숨 돌리기가 무섭게 이번엔 조예준의 이름이 액정에 떴다. 크흠. 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성이 형!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약 들고 갈까요?]
“어. 예준아.”
[재영 선배가 그러던데 독감 걸렸다면서요? 전화도 안 받고……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이놈의 독감 얘기는 안 퍼진 곳이 없구나. 하지만 섹스하다가 정신을 잃은 거란 말을 할 수도 없어 침묵을 택했다.
조예준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대화 주제를 돌렸다. 내년엔 꼭 자신이 형의 공을 받겠다는 포부였다.
“그래. 내년에는 너도 그라운드에 있어야지. 그럼, 당연히 예준이 너한테 던지고 싶지. 왼팔 흑염룡 봉인 아직 안 풀었어.”
임성이 한창 조예준과의 통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즈음 뒷 목에 입술이 닿았다. 방심하고 있던 몸이 움찔 떨렸다.
“아.”
[성이 형?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아직 이천이냐?”
[아니요. 이틀 전에 서울 왔어요. 우선 몸만 왔고 이따 짐 가지러 가려고요.]
뒷 목에 입술을 뭉개듯 맞춘 김희도가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짧게 난 머리카락이 위로 쓸리는 느낌이 묘했다.
그만해. 휘휘 내젓던 손은 곧장 김희도에게 붙잡혔다. 등 뒤에 온기가 겹쳐지며 어깨가 묵직해졌다.
임성의 어깨에 턱을 올린 김희도는 입술 대신 뺨을 비볐다. 애교를 부리는지 방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 애교 부려서 방해하는 건가? 그런 거면 완전 잘 먹혔고.
임성은 어깨를 비틀어 그에게 붙잡힌 팔을 빼었다. 자유로워진 손을 뒤로 뻗어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헝클이듯 가득 쓰다듬었다. 이걸로 좀 참아 주라.
“그래. 조만간 보자. 어, 그래. 밥 잘 챙겨 먹어. 또 연락할게.”
조예준과 통화를 끝내고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속옷 차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신이 없구만.
“뭘 또 연락해요. 하지 마.”
뚱하게 말하는 남자의 뺨을 살짝 잡아당겼다. 결 좋은 흰 뺨이 탱탱하게 늘어났다.
“너나 앞으로 그러지 마.”
“뭘요? 아, 혹시 권재영 전화? 안 받으면 숙소에 찾아올 기세였다고요. 우리 하는 거 권재영이 봐도 괜찮아요?”
맹랑한 대답이었다. 계속 얘기 해봤자 말려들 게 뻔했다.
“그것보다 이틀이나 지났다는 게 안 믿긴다. 가능한 얘기냐?”
“선배 24시간은 잤을걸요? 덕분에 이쪽은 하루 동안 독수공방했어요.”
그러고 보니 격하게 뒹군 것치고는 몸이 가뿐했다. 극한으로 치달았던 긴장이 잠으로 풀린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설마 이틀 동안 기절했겠어? 묘하게 안도가 됐다.
“그래. 착하네.”
“이자까지 쳐서 받아 낼 거예요.”
“알았어. 이자까지 낼 테니까, 우선 밥부터 먹자.”
주방으로 향하는 임성의 등에는 여전히 김희도가 딱 달라붙은 채였다.
그리고 며칠 후, 임성은 이자까지 낸다고 했던 말을 사무치게 후회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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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성이 구단에 모습을 드러낸 건 한국 시리즈가 끝나고 약 사흘 뒤였다.
“안녕하십니까.”
머쓱한 표정으로 사무실d[ 들어서자 다른 사람과 대화 중이던 권재영이 잠시 양해를 구하더니 곧장 다가왔다.
“성이 왔냐? 하도 연락이 안 돼서 무슨 큰일 난 줄 알았잖아.”
“죄송합니다.”
임성이 모자를 벗으며 권재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임성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김희도를 힐끔 쳐다봤다. 얼굴을 뻣뻣이 들고 서 있던 남자는 마지못해 한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희도가 간호했다며? 건방진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착해.”
“아, 네…… 희도가 간호요.”
아무래도 권재영은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은 못 하고, 다소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긴 했다. 문제는 간호해 준 만큼 털어 먹었다는 걸까. 방금 전까지 뒹굴다가 왔다고 말하면 믿으려나.
빠르게 권재영을 지나쳐 다른 선배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나흘 만에 나타난 임성의 안부를 물었다. 사심 없는 순수한 걱정이 양심을 콕콕 찔러 댔다.
“성아.”
구석에서 통화 중이던 최희탁이 임성을 발견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병원은 가 봤어?”
“아무렇지 않습니다. 건강합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다 못해 땅굴을 파고들었다.
“마음고생 있을 만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잘 막았어. 이따 뒤풀이 때 많이 먹어라.”
사복 차림을 한 선수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대부분 한 체격 하는 데다, 2군 선수까지 모두 소집이라 사무실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선수들은 자리를 옮겨 강당으로 이동했다.
“형! 성이 형. 오랜만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오던 조예준이 임성을 발견하고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간 통화는 여러 번 했지만,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덩달아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우렁찬지 몇몇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봤다. 조예준은 주변의 시선이 퍽 민망한 듯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고선 빨리 걸어왔다.
“형, 우승 축하드려요. 저 진짜 형 공 던질 때 무릎 꿇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기도했잖아요. 지금 생각해도 떨리네.”
조예준은 한껏 격양된 채 빠르게 내뱉으며 마치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았다.
“우리 예준이 기도가 통했나 보다. 고마워. 그리고 너도 우승 축하해.”
“네? 저요?”
“너도 페어리즈 선수잖아. 열심히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조예준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있어. 너도 종열이도. 모두 다.”
“더 열심히 할게요. 내년에는 꼭 형이랑 같은 그라운드에 설 거예요.”
자그맣게 말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눈두덩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영락없이 울음을 참는 어린 애였다. 우리 예준이 아직도 어리네. 어려. 그 모습이 짠하고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채 닿기도 전에 손목을 붙든 손에 가로막혔다.
목을 늘어트리고 얌전히 쓰다듬을 받을 준비를 하던 조예준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쯤이면 주장, 아니 성이 형 손이 닿았어야 하는데.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했다. 또 너냐.
“야. 개싸가지.”
조예준의 부름을 가볍게 무시한 김희도는 허공에 어정쩡하게 있는 임성의 손을 움직여 제 머리에 턱 하니 올려놨다.
조예준이 헛웃음을 쳤다. 쟤 지금 뭐 하냐? 미친놈인 줄은 진작 알았다만 나날이 이상해지는구나.
당황스러운 건 타의로 정수리를 만지게 된 임성도 마찬가지였다. 셋 중 제일 아무렇지 않은 건 현재 상황을 만든 당사자였다. 심지어 그는 제 머리 위에 올려진 임성의 손을 움직여 스스로 쓰다듬기까지 했다. 손바닥에 감기는 머리카락 감촉이 부드……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또라이 새끼. 여름도 아닌데 더위를 처먹었나?”
조예준이 막 욕설을 내뱉었을 때, 앞문이 벌컥 열리며 감독을 비롯한 단장, 코치 등 구단 관계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여기저기 흩어져 얘기 중이던 선수들이 하나둘 앉기 시작했고, 조예준 또한 금세 표정을 바꿨다.
“우리도 앉아요. 형.”
조예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김희도가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그에게 팔이 잡혀 있었던 임성은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어, 성이 형? 어디 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어디로 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저를 부르는 조예준에게 이렇다 할 대답도 못 하고 김희도를 따라서 걸었다. 그는 앞에 앉은 조예준과 완전 극과 극인 뒷자리에 멈춰 서서 안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들어가란 뜻인가? 임성은 마치 영화관에서 늦게 도착했을 때처럼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듯이 허리를 구부리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사이 구단 직원들은 현장에서 썼던 우승기와 현수막 등을 차례대로 걸기 시작했다. 고작 며칠 전 일인데도 아주 오래된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아마 그 며칠 동안 차마 말 못 할 엄청난 일이 있어서겠지.
기울어진 침대 위에서 했던…… 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냐? 임성은 금세 머릿속을 잠식하는 기억들을 억지로 떨쳐 내며 무대를 응시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구단 관계자들이 옆으로 빠지며 구단 점퍼를 입은 사장이 앞에 섰다.
“우리 선수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올 시즌 고생 많으셨습니다.”
흰색과 민트색이 어우러진 유니폼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여러모로 화제였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홈 유니폼은 흰색 바탕에 민트색 로고, 원정은 민트색 베이스에 흰색 로고였는데, 모자와 팔 소매에 붙는 스폰서 패치도 옅은 색이 대부분이었다. 구단 사장이 일부러 유니폼과 어울리는 스폰서를 선정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요정 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굿즈도 아기자기해, 아직 프로와 다소 거리가 있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선수들은 코스프레 의상 같다며 싫어했다. 실제로 햇볕에 그을려 칙칙한 얼굴색을 부각시켰으니까.
하지만 그 묘하고 어려운 유니폼을 김희도는 기가 막히게 소화했다. 소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맞춘 듯이 어울려 신인임에도 유니폼 모델로 여러 번 선정됐다. 정작 당사자는 끝까지 거절했지만.
“너 유니폼 엄청 잘 어울려. 멋있어.”
뜬금없는 칭찬에 김희도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만약 물음표가 눈에 보인다면 그의 머리 위에 뿅 하고 떠 있지 않을까. 임성은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을 무시한 채 구단주의 자화자찬을 들었다.
소감을 끝낸 구단주의 마이크는 리베르트 감독에게로 넘어갔다. 선수 생활을 합쳐 팀 우승은 처음이라는 감독은 어설픈 한국어로 소감을 말하다가 이내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선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크게 외쳤다. 선수들의 격려가 오히려 자극이 됐는지, 감독은 아예 마이크를 통역에게 넘기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우와, 감독님 우는 거 처음 본다. 앞줄에 앉은 선수가 중얼거렸다.
“나가자. 감독님께 한국 헹가래 맛 보여 드려야지.”
최희탁과 권재영을 필두로 선수들이 우르르 강당으로 나가 헹가래를 시작했다.
“희도야. 우리도 나가자.”
“뽀뽀해 주면 갈게요.”
“뭐?”
그게 대체 무슨 대답이야.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받은 임성이 당황한 사이 김희도는 아무 말도 안 한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이나 낮았던 시선은 턱을 아주 조금 들어야 할 정도로 높아졌다.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펼친 김희도가 임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언제 봐도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잡아요. 지금은 이걸로 봐줄게요.”
“여기서 봐준다는 말이 왜 나오냐. 웃긴 놈일세.”
임성은 제 눈앞에 있는 손을 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맞잡았다. 혹시 누가 보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다들 헹가래에 정신이 팔려 이쪽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선배는 너무 걱정이 많아요. 사람은 의외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네가 너무 대범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나쁜 짓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팬들은 야구 잘하는 남남커플을 응원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듣고 보니 묘하게 그럴싸했다.
“게다가 저쪽은 더하고요.”
김희도가 맞잡은 손을 들어 서로 끌어안고 입술을 쭉 내밀고 뽀뽀하는 시늉 중인 박태영과 권재영을 가리켰다. 그들을 둘러싼 주변 선수들이 “뽀뽀해, 뽀뽀해!”를 연호했다. 우승했을 땐 송우림과 어부바를 하고 그라운드를 돌더니 역시 페어리즈 최고 인기인다웠다.
확실히 저 선배들에 비하면 손잡는 거나 포옹은 건 스킨십에도 안 꼈다.
희도 말처럼 내가 너무 신경 쓰는 건가? 하지만 마음을 놓았다간 김희도는 물론이고 나도 자제가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우리도 할래요? 참된 후배로서 선배의 뒤를 따라야죠.”
김희도의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참된 후배? 평소엔 임성을 제외한 사람은 선배 취급도 안 하던 남자답지 않은 말이었다.
* * *
우승 축하 현장은 요정TV 카메라에 담겨 약간의 편집을 거친 뒤 구단 채널에 업로드 되었다. 임성은 업데이트된 줄도 몰랐다가 쌍둥이 2의 연락을 받고 영상을 재생했다.
행가래를 치는 와중 손을 잡고 있는 자신과 김희도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물론 껴안고 팔짱 끼고 온갖 난리를 치는 박태영과 권재영 덕분에 크게 눈에 띄진 않았고.
두 사람이 붙어 있는 영상 자막엔 「오늘도 사이좋은 선유고즈♥」 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걸 본 쌍둥이2가 다짜고짜 전화해 소리를 버럭 지른 것이었다.
[형. 그 싸가지랑 아직도 친하게 지내? 사이좋은 선유고즈 좋아하네. 존나 가식적.]
인마. 그 싸가지가 형 애인이거든. 내 애인 욕하지 말아줄래.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전화를 끊고, 댓글을 확인했다. 축하와 응원 댓글이 대부분이었지만, 찔리는 것도 더러 있었다.
[요정TV] 챔피언 페어리즈, 흥분의 축승 현장! (감독님 울지마! 울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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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원S2】 다들 감독 헹가래 중인데 둘이 뭐함?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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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기름스멜】 8:23 임성 김희도 꽁냥꽁냥ㅋㅋㅋ
【V페어리즈우승4】 이런 콘텐츠 너무 좋아요ㅠㅠㅠ 우승팀의 특권!!!
【오OH!】 8:21 잘생긴 애들끼리 친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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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5팅커벨】 5:34 권재영 박태영은 또 저러네... 권재영 존나 인싸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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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댓글 몇 개를 읽다가,
【원포인트!】 사실 임성 김희도 둘이 사이 ㅈㄴ안좋음. 내가 보기엔 김희도가 임성 개싫어함;;; 증거도 있음. 오늘 영상에서도 보듯이 임성...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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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댓글에 시선이 멈췄다.
희도가 날 싫어해? 대체 뭘 얼마나 길게 적었길래 내용이 중간에 잘렸을까. 의아해하며 자세히 보기를 눌렀다.
「【원포인트!】사실 임성 김희도 둘이 사이 ㅈㄴ안좋음. 내가 보기엔 김희도가 임성 개싫어함;;; 증거도 있음. 오늘 영상에서도 보듯이 임성 옷 꼬라지보고도 아무 지적도 안함. 저번 패션왕 물었을 때도 임성을 꼽음. 사회생활 어쩌고 하는데.... 솔직히 김희도가 사회생활 할 성격은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임성 좆되라고 하는 말 같음. 옷 잘입는다고 은근히 치켜세워주는 척 멕이는거지ㅋㅋㅋㅋ 존나 싫어하는거 아닌이상 임성을 패션왕으로 꼽을 리가 없다. 임성은 유니폼 박제 해야해. 평생 그것만 입게.」
“…….”
줄바꿈 하나 없이 계속 이어지는 글을 모두 읽은 임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댓글을 눌렀다. 대부분 ‘ㅋㅋㅋㅋㅋㅋ’나 ‘인정’한다는 내용밖에 없었다.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내가 옷을 못 입는다고? 새삼 충격에 빠져 있는데, 불화설 당사자가 마스크를 코끝까지 끌어 올리며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희도야. 잠깐 이리 와 봐.”
“왜 그렇게 심각하게 불러요. 괜히 긴장되게.”
웃으며 다가왔던 김희도는 임성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마스크를 조금 내렸다. 임성은 의아해하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넌 나 옷 입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갑자기 그건 왜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어떤데?”
“엄청 귀여워요.”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니까.”
“귀엽다고요. 못 믿겠으면 다음 인터뷰 때 말할까요? 선배 존나 귀엽다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말 하지 마.”
빠르게 대답한 임성은 물 좀 마셔야겠다고 말하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물을 꺼내다가 문득 질문에 대한 답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패션 어떠냐는 대답이 왜 귀엽다가 됐을까? 설마 회피한 건가?
정말 김희도가 소위 말하는 ‘멕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은 가실 줄 몰랐다.
* * *
페어리즈의 우승으로 한국 시리즈가 끝나며 모든 일정이 종료됐다. 각종 시상식과 골든 글러브라는 큰 행사가 있지만, 특정 선수만 참여했기 때문에 대부분 선수들은 비시즌에 돌입했다. 마무리 캠프까지 끝나자 정말로 할 일이 없어졌다.
구단이 주최하는 팬 페스티벌이나 봉사활동 등의 일정은 급하지 않았기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렇다 해서 마냥 쉬는 건 아니었고, 재활이나 개인 레슨 등 할 게 많았다. 하지만 시즌 때처럼 빡빡한 일정은 아니라 본인이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했다.
그리고 임성은 매일 훈련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심지어 ‘앞으로 일주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로 했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 11살부터 오늘까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쉬는 것이었다.
모든 중심엔 단연 김희도가 있었다.
* * *
“너희 집 되게 오랜만이다. 여전히 깔끔하네.”
양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식탁 아래에 조심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집들이 선물의 대명사인 두루마리 휴지와 갑 티슈, 물티슈 등 휴지란 휴지는 모두 쓸어 왔다. 아마 1년은 거뜬히 쓰고도 남으리라.
“이걸 왜 사 와요?”
“집들이 선물로 휴지는 너무 구식인가?”
“그건 아니고요. 애초에 집들이도 아니잖아요. 뭐, 기왕 사 온 거, 같이 잘 써요.”
“응? 그래.”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내가 쓸 일이 있겠나 싶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김희도는 각 티슈와 물티슈 각각 하나씩을 꺼내 식탁에 올려놨다.
“하지만 다음엔 진짜 몸만 오세요. 수저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하하. 프러포…….”
프러포즈 같은 멘트는 뭐냐. 짧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던 임성은 저를 뚫어지라 보는 김희도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얼굴을 구기거나 노려보는 건 아닌데,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눈빛이었다.
“왜, 왜? 내가 뭐 실수했어?”
“눈치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거요.”
그게 실수예요.
“그게 뭔데?”
“모르면 됐고요.”
김희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휴지를 들고 방으로 옮겼다.
김희도의 뒷모습을 보다가 패딩을 벗었다.
그나저나 이 집은 언제 와도 덥구나. 여름엔 전기세 아끼려고 에어컨을 잘 안 트는 줄 알았는데, 겨울에도 이렇게 더운 걸 보면 그냥 따뜻한 걸 좋아하나 보다.
“그 패딩은 질리지도 않나봐요.”
“너도 한번 입어 봐. 엄청 따뜻해.”
“다음에요. 그거 이리 주세요.”
김희도는 가슴팍에 구단 로고가 찍힌 패딩을 챙기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100% 입을 생각이 없구나. 이젠 표정만 봐도 대충 알겠다.
김희도는 제 손안의 패딩을 잠시 보더니 천천히 코를 묻었다. 둥그런 눈꺼풀 끝에 촘촘히 매달린 속눈썹이 옅게 떨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지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패딩이 흰색이라 반사판을 댄 것처럼 피부가 빛이 났다. 동시에 그의 얼굴을 물들인 홍조가 점점 진해지는 게 눈에 잘 보였다.
옷 냄새를 맡는 건 쟨데, 왜 내가 덥냐? 임성은 손부채를 만들어 위아래로 파닥거리며 얼굴을 식혔다.
김희도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또 부풀고, 더 부풀고…….
“들이마시기만 하면 큰일 난다. 너.”
“뱉기 좀 아까워서.”
김희도는 몇 번의 깊은 호흡을 하고 나서야 입맛을 다시며 패딩을 옷걸이에 걸었다.
“밥 먹었어요?”
“그냥 오라고 해서 안 먹었어. 뭐 시켜 먹을까?”
“제가 만들게요. 재료 준비 다 해 놨어요.”
“너 피곤하잖아. 그냥 시켜 먹자.”
다시 한번 배달을 권했지만, 김희도는 오래 안 걸리니까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주방으로 사라졌다.
뭐라도 도와줘야지. 그를 쫓아 주방으로 향하는데 어떻게 알아챘는지 김희도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주방에 들어오지 마세요.”
“들어오지 말라고? 왜?”
“아무튼요. 오래 안 걸리니까 쉬고 있어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김희도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혼자 남은 임성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맨날 옆에 있으란 말만 들었지, 오지 말라는 말은 처음이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곧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싶어 뒷머리를 긁던 손을 내려 허리에 얹었다.
주방도 출입 금지 당했겠다, 남는 시간 동안 영상이나 볼까? 황용철, 박재이 투구 분석 말고도 보물 같은 영상이 가득할 텐데.
“희도야. 나 야구 영상 봐도 되지?”
네. 보세요. 주방에서 김희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방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옆에서 팔이 뻗어 나와 손등을 덮었다.
“헉.”
갑자기 닿는 온기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한 손에 국자를 든 김희도가 문고리를 쥔 제 손을 제지하고 있었다. 뭔가 다급해 보이는 모습에 덩달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제가 갖고 올게요. 뭐 보려고 했어요?”
“어? 딱 원하는 영상이 있는 건 아닌데…… 그럼, 박재이 선배 커브 영상? 그거 있어?”
“있을걸요. 거실에 가 있어요. 금방 갈게요.”
문고리를 잡고 있는 임성의 손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떼어 낸 김희도가 임성의 등을 밀었다. 힘주어 밀어낸 건 아니지만, 충분히 다리가 움직일 만했다. 얼떨결에 거실로 쫓겨난 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희도에게 거부당한 건 오랜만이네.
야구부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엔 떠밀리기도 하고, 제 얼굴을 보고 토까지 했지만 벌써 4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방금은 거부라는 단어를 쓰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황사 필터를 씌운 듯 노란빛이 도는 화면 안에서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가 공을 던졌다. 파앙! 허공을 빠르게 가른 공은 타자의 배트 앞에서 휘어져 포수의 글러브 안으로 힘차게 안착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환상적인 변화구였다.
무릎 위에 얹고 있던 임성의 손가락이 벌어지며 공을 쥔 것 같은 모양으로 변했다.
박재이 하면 대부분 체인지업을 최고로 꼽지만, 커브 역시 만만찮게 좋았다. 은퇴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회자되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다음에 또 박재이 선수를 만날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커브에 관해 물어보리라.
“그렇게 좋아요?”
꼼짝도 않고 화면을 보던 임성은 머리맡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 다소 삐딱하게 서 있던 김희도가 콧방귀를 뀌었다.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얼마나 집중했으면 몇 번을 불러도 못 들어요?”
“불렀어? 미안.”
“박재이 엄청 좋아하네. 대체 이유가 뭡니까?”
“멋있잖아. 난 언제 저렇게 되겠나 싶다. 재이 선배님 반만 따라가도 좋을 것 같아.”
“굳이? 박재이보다 선배가 훨씬 잘하잖아요.”
“지금 그 말 다른 사람에게 하면 난리 날걸? 콩깍지는 이해하지만 왜곡은 하지 말자.”
임성은 여전히 삐딱하게 서 있는 김희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구 좀 본다 하는 사람에게 저 말을 했다간 뭇매를 맞을 게 뻔했다.
“박재이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건 군대에 다녀오고부터예요. 스물다섯 살이요. 같은 스물두 살로 놓고 보면 오히려 박재이가 선배를 따라와야 할걸요?”
답지 않게 길고 빠르게 말한 김희도가 TV 전원을 껐다. 살짝 엇나간 것처럼 지지직거리던 화면이 까맣게 변한 것을 보고 일어났다.
구색뿐인 위로가 아닌, 진심인 걸 아니까 더욱 고마웠다.
“오.”
주방으로 향했던 임성은 식탁 한가운데 놓인 냄비를 보고 화색을 띠었다.
“떡볶이 만들었네. ……어, 음. 고맙다. 잘 앉을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던 임성은 대신 의자를 빼 주는 김희도의 행동에 어색하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 나름의 배려라는 걸 알면서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어 크흠. 흠.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또또 분식 문 닫은 거 아쉽단 말이야. 안 그래?”
떡볶이를 가득 퍼 담은 접시를 김희도 앞에 내려놓으며 몇 번째인지 모를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국 시리즈를 치르기 전에 들렸을 때도 닫혀 있던 또또 분식집은 아예 곱창 가게로 탈바꿈했다.
자칭 타칭 정보통 조예준 말로는 사장님 내외가 부산에 있는 딸과 함께 살게 되어 완전 장사를 접으셨다고 했다. 몇십 년 만에 고향 살게 돼서 엄청 기뻐하신다고. 앞으로도 또또 분식이 서울에서 문을 열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 끝나고 맨날 갔는데. 엄청 섭섭해요.’
사장님을 생각하면 너무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조예준의 말처럼 추억 한 부분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한 달 내내, 하루 세끼 또또 떡볶이만 먹어도 좋다는 건 농담이 아니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가게 문 닫기 전에 많이 먹어 놓을 걸 그랬네.
쩝. 아무리 빨라도 늦은 후회를 하며 포크로 떡볶이를 찍었다.
“메추리알이랑 곤약까지 넣었네. 잘 먹을게.”
흰 부분이 아예 안 보일 정도로 양념을 듬뿍 묻힌 뒤 중간에 자르지 않고 통째로 입에 넣었다.
“어?”
어, 어어? 임성의 눈이 점점 커졌다.
잠깐만, 이거 맛이……? 입 안의 떡을 꿀꺽 삼키고 바로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맛이 왜 이래?”
평소보다 살짝 높고 흥분이 담긴 목소리였다. 실제로 다소 흥분한 상태기도 했고.
처음부터 임성의 반응 살피던 김희도가 한쪽 팔꿈치로 식탁을 디디며 상체를 쭈욱 내밀었다.
“맛이 왜요? 별로예요?”
별로라니. 그럴 리가. 이건 오히려……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떡볶이를 눈으로 가리켰다.
“사 온 거야?”
“아니요. 만들었어요.”
“누가?”
“내가.”
“네가? 또또 떡볶이랑 완전 똑같은 맛인데?”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김희도는 임성의 손에서 포크를 가져가더니 떡볶이를 찍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임성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검은색에 가까운 빨간 양념이 입술에 툭 떨어졌다.
먹어 보라니까 먹여 주네.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임성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하지만 입 안으로 들어온 건 떡볶이가 아닌 혀였다. 예고 없이 들어온 혀는 입 안쪽 여린 살을 쓸고 혀뿌리를 휘감아 당겼다. 얼얼한 입 안을 이리저리 헤집는 느낌이 묘했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키스는 입술에 묻은 양념을 모두 핥고, 발갛게 부풀어 오를 때쯤에야 끝났다.
“그러게. 똑같네요.”
이렇게 먹어 보란 뜻은 아니었는데.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사실 김희도는 연애 고수가 아닐까? 그게 아니면 이 자연스러운 스킨십은 대체 뭐란 말인가. 처음 그가 고백한 게 열일곱 살 가을이었으니, 다른 사람과 만날 시간은 충분했다. 중학교 3년 동안은 어떻게 지냈는지 아예 모르고. 요새 애들은 교제도 빠르니까.
“사장님에게 배웠어요.”
“그 사장님이 설마 또또분식 사장님은 아니지?”
김희도의 과거를 생각하던 것도 잊게 하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에이, 아니지. 아닐 거야.
“맞는데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희도를 보고 있노라니, 말문이 턱 막혔다.
“부산에 있는 따님 집에 가신 지 한 달도 더 넘었다던데, 어떻게 알고?”
“세 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라잖아요.”
물론 그런 말이 있긴 해도 우연히 만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엊그제 만나고 왔습니다. 사직이나 광안리가 아닌 동네는 처음 가 봤어요.”
“만날 사람 있다는 게 사장님이었어? 심지어 직접 부산까지 갔다고?”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던 임성이 검은색에 가까운 떡볶이를 쳐다봤다. 조예준은 입에서 불을 뿜었고, 무쇠도 씹어 먹는 쌍둥이 1, 2조차 아무래도 형 미각은 미친 것 같다며 진저리를 치던 것이었다.
“왜 그랬어?”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김희도가 굳이 부산까지 간 이유는 뭘까. 입맛이 예민하고, 사천 짜장면도 맵다고 안 먹는 애가 본인을 위해 배웠을 리도 없는데.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김희도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질문으로 했다. 또렷한 시선이 발갛게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배회하다가 매끈한 콧등을 타고 올라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굴에 번진 열기가 좀 더 진해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예상한 그 이유가 맞는 것 같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괜히 미안하네.”
“신경 쓰지 마세요. 겸사겸사 내 미래에도 투자한 거니까.”
김희도는 임성의 손에 다시 포크를 쥐어 주곤 씩 웃었다. 할 말을 잃게 하는 미소였다.
“진짜 맛있었다. 이거 봐, 거의 다 먹었어.”
처음엔 이렇게 많은 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나도 남김없이 텅 비어 있었다. 양념까지 싹싹 비운 임성과 달리 김희도는 몇 개 깨작거리다 말았다.
보통 운동선수가 밥 먹는 모습을 빗대어 ‘음식을 찢는다.’라고 표현하는데, 김희도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겨우 샌드위치 세 개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과 비교하면 잘 챙겨 먹지만, 먹는 것에 딱히 비중을 두는 것 같진 않았다. 어쩔 땐 쌍둥이 1, 2가 더 많이 먹는 것 같기도 했으니.
“너 거의 물로 배 채웠지?”
“선배, 시즌 초보다 살 빠졌죠? 지금 몇kg예요?”
“78kg. 초보다 4kg 정도 빠졌는데, 코시 기간에만 3kg 넘게 줄었다. 누가 보면 1선발인 줄 알겠어.”
임성이 판판한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실제로 선발로 출전했잖아요. 아무튼 더 부지런히 먹여야겠네요.”
먹‘어’가 아닌 먹‘여’였다. 그리고 선발에 출전한 건 코리안 시리즈가 아니라 플레이 오프거든.
“떡볶이 한 대접 다 먹은 거 안 보여? 나보다 네가 더 걱정이다. 그래서 힘은 쓰겠냐?”
“글쎄요.”
모호하게 대답한 김희도가 양념만 남은 그릇을 개수대에 내려놨다. 떡볶이도 모자라 설거지까지 시킬 순 없는 노릇이라 두 손을 걷어붙이며 의욕을 내비쳤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거실로 쫓겨난 임성은 조금 전 보다 만 박재이 영상을 틀었다. 그사이 김희도는 설거지를 모두 끝내고 어린 애 주먹만 한 망고와 포도를 접시에 가득 담아 왔다.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다 못 먹어.”
그 말과 달리 임성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매운 음식 뒤에 먹는 상큼한 과일은 감탄이 나올 만큼 맛있었다. 다 못 먹을 것 같은 망고를 다섯 개나 해치우고 포도 두 송이도 혼자 먹었다.
“진짜 배부르다. 진짜 더는 안 들어간다.”
마지막 포도 알갱이를 목구멍으로 넘기곤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댔다. 배가 부르다 못해 살짝 아플 정도였다.
눈에 힘을 주고 다시 영상에 집중하는데, 희미한 온기와 함께 어깨가 묵직해졌다.
혹시라도 부딪힐까 시선만 옆으로 돌렸다. 동글동글한 정수리와 풍성하게 뻗은 속눈썹이 보였다. 얘는 이런 부분까지 곱고 예쁘구나. 또다시 감탄을 하며 부슬부슬한 머리를 간지럽혔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생 딸기 알갱이가 들어 있대요.”
“먹을래.”
더는 못 먹겠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대답에 김희도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맵고 상큼한 것 다음엔 단 거라니. 이건 누구라도 거부하지 못할걸. 임성은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열심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망고 껍질이 수북이 쌓인 쟁반을 든 김희도가 주방으로 향했고, 때마침 박재이의 손이 줌아웃 되면서 영상이 끝났다.
“희도야. CD 갖다 놓을게.”
“네.”
주방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행여 CD가 부서질까 케이스 안에 조심스럽게 넣고 김희도의 방 앞에 섰다.
문득, 자신을 제지하던 김희도의 얼굴이 떠오르며 문고리 잡은 손이 멈칫했다. 고개를 살짝 물려 주방 쪽을 힐끔 쳐다봤지만, 이번에는 아무 소식 없이 잠잠했다.
들어가도 되나? 방을 보여 주기 싫은 거 아닌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문고리를 돌렸다. 틈 하나 없이 꽉 닫혔던 문이 조금씩 벌어지며 방 안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선배! 잠깐… 아…….”
뒤늦게 뛰어온 김희도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못 들어오게 한 이유가 이거였냐?”
한발 늦었어. 이미 다 봤거든.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틀어 김희도와 마주 보고 섰다.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려 있었다.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손에 들린 분홍색 아이스크림 통을 보자 의심은 확신이 됐다. 저걸 그대로 들고 올 정도로 급했다는 말이었으니까.
“……깜짝 놀랐어. 너 진짜 대단하다.”
“기분 나쁘죠? 미안해요.”
김희도는 상대가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저를 굽히지 않고 당당했다. 강한 사람에게도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도 강한, 강강약강. 오죽하면 팬들이 ‘예의 있는 싸가지.’ ‘재수 없고, 예쁜 내 새끼’라고 부를까.
그런 남자가 잔뜩 풀이 죽은 채 시무룩한 얼굴로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조금 우쭐해지면서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임성은 오히려 기분 나쁜 건 자신일지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하지만 이런 건…….”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내가 또 이런 광경을 어디서 보겠어?”
김희도가 그토록 감추려 했던 비밀의 방. 임성은 온통 제 얼굴로 도배된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벽에는 신문 기사와 사진 등이 하나하나 붙어 있었고, 책상 옆에 자리한 행거에는 눈으로 언뜻 세 봐도 수십 장에 달하는 유니폼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우승 기념 유니폼은 아직 안 나왔으니 홈과 원정이 전부일 텐데, 왜 저렇게 많아.
잠깐만, 맨 앞에 걸린 건 아동용 아니야? 팔뚝 하나도 제대로 안 들어갈 사이즈를 왜 갖고 있어? 그리고 저건…….
“이벤트 유니폼이잖아. 맞지?”
아동용 바로 뒤에 걸린 유니폼은 얼마 전 자선 경매에 내놨던 것이었다. 등번호 밑에 ‘V4 팅커벨. 임성’ 하고 멘트를 적어 놨던 거라 헷갈릴 수가 없었다.
경매 첫날에 마케팅 팀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대박. 임성 선수. 완전 대박이에요. 임성 선수 유니폼 300만 원에 낙찰됐어요. 3경매 진행하자마자 1명이 낙찰했어요.”하고 잔뜩 흥분해서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좋은 일에 쓰이니까 감사하면서도 누가 그렇게 비싸게 샀나 했는데 그 ‘누가’가 너였구나.
유니폼이야 언제든 받을 수 있으면서 굳이 경매에 참여한 이유는 뭐야.
“그럼 딴 놈이 사게 둬요? 선배가 직접 입었던 유니폼을요?”
오히려 뻔뻔하게 되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자기 돈 자기가 쓴다잖아. 누가 뭐라고 하겠어.
최대한 이해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 임성은 책장 위에 고이 놓인 케이스를 집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내가 준 공이지? 신줏단지 모셔 놓은 줄 알았잖아.”
“선배 첫 아웃카운트 공이잖아요. 저한텐 신줏단지보다 귀하거든요.”
살짝 뚱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케이스를 제자리에 올려놨다. 무심코 시선을 올린 곳에는 「이솔 페어리즈 신인 특집 #임성(선유고등학교·19)」이라는 기사가 붙어 있었다. 인터넷 기사를 출력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시선을 두는 곳마다 ‘임성’의 이름이 보여 ‘임성 전용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도 이 정도로 열정적이진 않을 거야.
“페어리즈 건 그렇다 치고 이 기사들은 대체 왜?”
『문일 중학교 추계리그 석패(惜敗) 팀원들을 다독이는 주장 (임성·15)』
『“우승” 서울 송파구리틀야구 (사진 제공=송파구리틀야구단)』
이런 게 남아 있었다고? 당사자조차 갸웃거릴 만큼 가물가물한 과거였다.
“찾다 보니까…… 나오더라고요.”
아무리 김희도라도 이건 민망한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현저히 느렸다.
“기분은 하나도 안 나쁘지만, 조금 부끄럽긴 하네.”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김희도의 애정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다 할까. 혀 아래에 타액이 고이고 단맛이 나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거 알아요? 선배로 가득한 방에 선배가 있으니까요.”
방금 전만 해도 방 밖에 서 있더니, 언제 들어온 걸까.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등에 무게감이 느껴지며 잔근육으로 뒤덮인 탄탄한 팔이 목을 옥죄듯이 끌어안았다. 예고 없이 들어온 백허그에 순간 심장이 덜컹 했다.
“엄청 흥분돼요.”
적나라한 욕망이 담긴 목소리였다. 기분 나쁘지 않으냐고 시무룩하게 묻던 남자는 어딜 갔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쪽, 일부러 소리 나게 뽀뽀를 한 김희도가 귓바퀴를 혀로 쓸었다. 바짝 선 솜털을 핥고 귓불을 깨물었다.
아마도 김희도와는 다른 의미겠지만,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숨을 흡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리던 임성이 뭔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거 우리 학교 유니폼이네.”
“…….”
김희도는 분위기를 깨는 애인의 옆모습을 잠시 보다가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흰색과 민트 색밖에 없는 옷 사이에서 유난히 튀는 짙은 남색 옷. 바로 선유고등학교 야구부 유니폼이었다.
“이야, 진짜 오랜만에 본다.”
임성이 들뜬 발걸음을 떼어 내자 김희도는 그의 목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야구 영상 틀어 놓고 투구 폼 분석에, 유니폼 감상에…… 그냥 말로만 ‘일주일 동안 야구 안 하기’잖아. 애인 집이 아니라 동료 집에 온 것 같네. 김희도의 시선이 임성의 뒤통수로 향했다.
김희도의 표정이 미묘해진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임성이 해맑게 웃으며 유니폼을 꺼냈다.
“보관하고 있었구나.”
“뭘 당연한 말을 해요. 어떻게 얻은 건데 당연히 갖고 있죠.”
“옛날 번호 보니까 기분이 묘하다.”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유니폼은 등 번호가 바뀌기 전인, 1학년 때 입던 것이었다. 자신이 졸업한 후 김희도가 한창 죽 쑤며 바닥인 경기력을 보일 때 잘하라는 의미로 준 것이기도 했다. 김희도의 성격상 보관하고 있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막상 보니까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이때 운 좋게 32번이 남아 있어서 냉큼 찜했거든.”
“찜했다고요? 일부러 32번 택한 거예요?”
“응. 32번 박재이 선수 등 번호잖아. 유니폼 입을 때마다 나도 박재이 선수처럼 돼야지. 꼭 코시 마운드에 서야겠다. 하고 혼자 다짐했거든. 1학년 때 성적 좋았던 것도 이 유니폼이 한몫했을 거야.”
박재이처럼. 지금 생각하면 건방진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다.
“또 박재이야?”
“뭐?”
그리운 얼굴로 유니폼을 만지작대던 임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거 한번 입어 볼래요?”
금세 주제가 돌아갔기 때문에 결국 김희도가 중얼거린 말은 끝까지 알아듣지 못했다.
“입어 보라고? 여기서?”
김희도는 살짝 미소 띤 채 고개를 끄덕이며 임성의 손에서 유니폼을 가져가 옷걸이를 빼내고 다시 건네줬다.
“32번 유니폼 입은 선배는 한 번도 못 봐서 궁금해요. 입어 봐요. 네?”
김희도가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양쪽 눈꼬리가 보드랍게 내려앉고, 도톰한 입술이 예쁜 모양으로 올라가는 미소였다. 가만히 있어도 예쁜 놈이 작정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권유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임성은 유니폼을 쥐고선 두어 발짝 물러섰다. 김희도는 멀어진 거리를 고요한 시선으로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걸린 미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옷 갈아입는 게 부끄러우면 뒤돌아 있을게요.”
“됐어. 안 돌아도 괜찮아.”
벗은 몸이야 고등학생 때나 시즌 중에 지겨울 만큼 보여 줬는데, 이제 와 새삼 부끄러워하는 것도 웃겼다. 그냥 옛날 유니폼 입는 게 쪽팔려서 그렇지.
하지만 김희도가 원한다면 굳이 하지 못할 것도 없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김희도의 눈동자가 단추를 푸는 손끝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하필 오늘따라 셔츠를 입고 올 게 뭐람. 맨투맨 티를 입고 왔다면 단번에 훌렁 벗었을 걸 괜히 더 신경 쓰이잖아.
아무런 대화도 없이 조용한 공기는 플라스틱 단추가 옷 구멍을 힘겹게 통과하는 소리까지 잡아냈다. 툭, 투툭. 임성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단추를 푸는 일에 집중했다. 기어코 마지막 단추까지 풀고 어깨를 비틀어 셔츠를 벗었다.
방 안 온도는 훈훈하다 못해 살짝 더울 정돈데 맨살 위에는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아 있었다.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이 정적 좀 안 깨 주려나.
“선배.”
“어, 어? 왜.”
조금 전까지 먼저 말을 꺼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김희도가 입을 열자 흠칫 놀랐다. 제가 생각해도 과도하게 놀란 것 같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여기 이너요. 기왕 입는 거 제대로 입어야죠.”
“아, 이너. 그래. 제대로 입어야지.”
임성은 김희도가 건네는 이너를 주섬주섬 받았다.
이건 또 언제 준비했대. 벗은 상체 위에 검은색 이너를 껴입고 유니폼 상의를 걸쳤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힐끔 곁눈질하던 임성은 제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바지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것도 입으라고?”
결국 바지도 갈아입고 허리띠까지 착용했다. 열일고여덟 살 때 입던 유니폼은 살짝 작아져 어깨 봉제선이 올라가고 팔목이 댕강 드러났다. 바지는 원래도 타이트하게 입는 편이라 지금은 허벅지가 터질 것같이 땡땡했다.
“꽉 끼네.”
마지막으로 ‘S’가 새겨진 남색 모자까지 푹 눌러쓰자 정말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임성은 공을 쥐듯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펴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아, 이상해? 이 나이에 고등학교 유니폼은 안 어울리지? 그래서 안 입는댔잖아.”
“스물세 살이 나이가 들긴 뭐가 들어요. 권재영이나 최희탁 선배가 들으면 화낼걸요?”
“그런가?”
“선배는 할아버지가 돼도 귀여울 거라고요.”
하하. 콩깍지가 다분히 쓰인 말에 임성이 멋쩍게 웃었다.
“밖에 나가 볼래요? 내일 아침 반찬 재료 사러 가야 하거든요.”
“이러고 밖에? ‘F구단 임 모 선수 고등학교 유니폼 입은 채 길거리 돌아다녀, 안구 테러. 제정신인가?’ 이런 기사 마구 쏟아질걸.”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려 손사래를 쳤다.
“교복 입고 클럽 가는 영화도 있는데, 뭐. 그리고 차에 타면 아무도 모를걸요.”
“그래도 싫어. 쪽팔린다고.”
“팬이 엄청 좋아할 텐데도?”
으음. 그건 좀 고민되네. 팬 얘기에 살짝 흔들리기도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구단 이벤트도 아닌데 뜬금없이 이러고 나가는 건 웃기잖아. 심지어 옷이 작아서 분명히 눈에 띌 거라고.
“알았어요. 그럼 나가지 말고 여기 있죠.”
내심 김희도가 밀어붙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임성은 안도하며 바구니에 가득 쌓인 공을 집었다. 엄지로 공 아래쪽을 받치고 중지와 검지를 모아 실밥에 걸쳐지게 쥐었다. 박재이 선수가 이런 식으로 던졌었나? 시즌 전까지 지금 배우는 변화구 완벽하게 장착 하고 싶은데. 코치님과도 상의하고 재영이 형한테도 물어봐야지.
“희도야. 아까 영상에서 박재이 선배 커브…….”
공을 쥔 채 몸을 틀었던 임성은 바로 앞에 서 있는 김희도를 보고 흠칫 놀랐다. 조금만 상체를 움직였다면 부딪쳤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인마, 위험하잖아.”
부딪혀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걱정돼서 한 말에 김희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까부터 박재이, 박재이. 박재이가 그렇게 좋아요?”
“당연히 좋…… 조, 존경하는 선배니까.”
인간의 본능이란 뭘까? 김희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좋지’라는 말이 ‘존경’으로 바뀌었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이 생각도 전에 입을 마음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아니, 잠깐. 위험하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희도가 제게 위협을 가할 리 없잖아.
가느스름하게 뜬 시선이 고개를 갸웃하는 임성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선배. 오늘 내 이름보다 박재이를 더 많이 부른 거 알아요?”
싸늘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얕은 웃음기가 담겨 귤을 씹는 것처럼 달고 상큼했다.
“그랬었나? 아하하. 그랬구나.”
제가 들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인데 김희도는 오죽할까.
임성이 한 발짝 물러서자 딱 그만큼, 하고 반보 더 김희도가 다가왔다. 그렇게 몇 번 물러나다가 어느 순간 턱과 뺨이 붙잡혔다. 손이 커서인지 잡는 면적도 넓었다. 더는 물러나거나 고개를 돌리진 못하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선배 입에서 다른 놈들 이름 나올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무슨 생각 했는데? 차마 묻지 못한 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짐작해서였다.
“뭐. 좋아요.”
턱을 빈 틈 없이 감싼 억센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손에 쥔 턱을 아래로 당겨 시선을 맞춘 김희도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빙그레 웃었다.
“지금부턴 내 이름밖에 말 못 할 테니까요.”
눈꺼풀을 감았다 뜨는 찰나, 뺨에서 떨어져 나간 팔이 순식간에 허리를 휘감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 들며 두 사람의 발끝이 살짝 겹쳐졌다.
“잠…….”
잠깐만. 말하려고 벌린 입으로 혀가 들어왔다. 놀라 굳은 혀끝을 건드리다가 바로 혀뿌리를 강하게 감고 깊게 맞물렸다. 보드라운 입술이 마구잡이로 뭉개진 채 비벼졌다.
“우, 으음.”
문장은커녕 단어조차 되지 못한 소리들이 김희도의 입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입천장을 훑고, 혀 아래 여린 살점을 자극하듯 건드렸다. 이따금 혀끝이 깨물리기도 했는데,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다시 빨려 간지러움만 짙어졌다. 점점 머리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호흡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코로 숨 쉬라니까 왜 삼키기만 하지. 언제쯤 고칠 거예요.”
코로 숨 쉬는 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알고 있지만, 김희도와 키스를 할 때면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자꾸만 잊게 되니까. 임성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차라리 쉬지 않고 공을 던지는 게 덜 힘 들겠어.
“헉, 허억.”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서 목구멍에 걸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사이 김희도가 임성의 허리띠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엉덩이 부분이 당겨지며 바짓단이 발목까지 들렸다.
“야, 야. 희도야.”
“한 번.”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손을 놓은 김희도가 허리띠를 풀고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맨살을 만지는 게 아니라 이너 위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배꼽 주변을 매만지다가 점점 더듬으며 올라가 젖꼭지를 꾹 눌렀다.
“읏.”
직접 만져지는 것과 달랐다. 젖꼭지를 묵직하게 누르는 힘과 얇은 셔츠의 감촉이 생소하면서도…… 야릇했다.
느낌이 이상해. 임성이 허리를 바짝 세우며 허벅지에 힘을 줬다. 가뜩이나 팽팽했던 허벅지가 긴장하며 더욱 단단해졌다.
“아!”
김희도가 손가락 끝을 세우고 젖꼭지를 강하게 비틀자 어깨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허리가 튀어 올랐다. 임성은 앞으로 꺾이려는 무릎에 힘을 준 채 버텼지만,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무릎이 성기를 퍽 쳐올리자 무릎을 꿇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어나려는 시도는 가슴을 떠미는 손 때문에 무산됐다. 버둥대는 임성의 몸 위에 순식간에 올라탄 김희도가 당황해하는 얼굴을 내려다봤다.
“뭐하게?”
“궁금해요? 그럼 직접 겪어 봐요. 내가 뭘 하는지.”
상체를 숙인 김희도가 유니폼을 이로 물었다. 그리고 임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위로 천천히 말아 올렸다. 그 단순한 행동이 심장을 터질 듯 두드려 댔다.
쿵쾅쿵쾅. 혹 김희도에게 들리는 건 아니겠지.
유니폼을 가슴께까지 말아 올린 김희도가 입술을 떼어 냈다. 후우. 겨우 한 숨을 돌리려는 찰나, 몸에 달라붙은 이너티를 죽 잡아당겼다.
벗기려는 건가? 차라리 내가 벗는 게 낫겠어. 양팔을 교차시켜 이너를 벗으려던 임성은 김희의 머리가 이너 속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굳었다.
“이거, 무, 너 지금 뭐…….”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경악으로 커진 눈이 불룩하게 솟은 이너, 아마도 김희도의 머리일 것을 넋 놓고 응시했다. 얇고 탄력적인 티는 김희도의 고개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더 잘 드러냈다.
복근에 따뜻한 느낌이 퍼졌다. 그 감각은 배꼽 주변을 훑고 갈라진 근육을 강하게 빨아 댔다. “유, 유니폼은 벗고…….”
“싫은데?”
여전히 웃으며 거절한 김희도가 양손으로 임성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젖꼭지를 어금니로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도 자극당하던 살덩이는 작은 움직임에도 뾰족하게 솟았다.
“유니, 유니폼만 좀 벗자. 응?”
“왜요, 지금도 예쁜데.”
그가 말할 때마다 입술이 살갗을 뭉근하게 문질러 댔다. 크게 입을 벌렸을 땐 치아가 맨살을 긁으며 등허리가 허리가 쭈뼛 섰다.
“희도야. 그만해.”
당황한 임성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하자 젖꼭지를 빨던 입술이 멈췄다. 그리고 제 얼굴을 덮고 있는 티를 위쪽으로 말아 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맨살이 드러난 게 눈물 나도록 반가웠다. 안도한 것도 잠시, 지퍼가 반쯤 내려간 바지 안으로 손이 들어와 성기를 단번에 움켜잡았다.
“싫다면서 여긴 왜 세워요?”
손으론 발기한 성기를 주무르고 입술은 다시 가슴을 핥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자연스럽게 허벅지도 닫혔다.
하지만 김희도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양 허벅지에 눌린 성기를 위로 긁었다. 젖꼭지는 게걸스럽게 빨리고, 아래는 자극당하는 게, 그것도 고등학교 유니폼을 입은 채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아, 앗.”
김희도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음낭을 굴리다가 때론 성기를 터뜨릴 듯 잡기도 했다. 그때마다 임성은 허벅지가 움찔움찔 튀어 오르고 저릿저릿한 자극이 몰리는 걸 느꼈다.
김희도는 발갛게 부풀어 오른 젖꼭지에 쪽 하고 뽀뽀를 한 뒤 유니폼 상의를 내렸다. 가슴까지 드러났던 상체는 다시 반듯한 유니폼 차림이 됐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예전에 선배가 내 단추 달아 줬잖아요. 기억나요?”
꽉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상황에서 굳이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끄러움에 입술이 달달 떨렸다.
하지만 그 감정은 김희도의 손이 귀두 끝을 꽉 옥죄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데, 그만큼의 뜨거운 흥분이 목구멍을 채웠다. 젖꼭지를 자극당할 때부터 쌓이던 쾌감이 이번엔 성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아플 정도로 꽉 감싸 쥔 손이 성기를 위로 잡아당겼다. 이러다 끊어질지도 몰라. 본능적으로 허리와 엉덩이를 함께 들어 올렸다.
“되게 사랑스러운데, 열 받는 거 알아요? 딴 새끼들에게도 같은 거 해 줬다고 생각하면 좆같아서.”
김희도는 여전히 임성의 성기를 주무르며 속옷과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바지 버클도 풀었다. 속옷을 내리기 무섭게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튀어나왔다. 예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성기는 만져 주지 않았음에도 위로 솟구쳐 꺼떡거리고 있었다.
얕은 숨을 내쉰 김희도가 성기 두 개를 겹쳐 쥐었다. 손바닥과는 비교가 안 되는 뜨거운 감각에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헉. 허억. 희, 도야.”
“두 번 불렀네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부를까?”
김희도는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성기 두 개를 비벼 대기 시작했다. 발기한 성기 두 개가 꿈틀대며 비벼지는 모습은 상당히 외설적이었다. 임성의 귀두에서 질금질금 흐른 정액 때문에 끈적이는 소리가 더욱 선명했다.
임성은 엉덩이를 튕기듯 흔들며 아랫배에 힘을 줬다.
“이제 선배가 해 봐요.”
김희도는 손가락을 쫙 벌린 채 바닥을 짚고 있는 임성의 손을 끌어와 성기를 잡게 했다. 손이 델 듯한 뜨거움에 얼른 떼어 내려 했지만, 김희도의 손바닥이 손등을 덮치듯 눌렀다.
“잘 좀 만져 봐요. 밤새 비비고 있을 거 아니면요.”
임성은 아래턱에 힘을 준 채 손을 움직여 성기를 비비기 시작했다. 잘못 세운 손톱이 기둥을 세게 긁었다. 헉, 임성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큿.”
김희도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숨을 뱉어 냈다.
이미 한계까지 치솟았던 자극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서로의 성기를 비비는 이 행위가 너무 좋았다. 점점 절정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더. 이제 곧…….
벌어진 발가락들이 점점 위로 솟구쳤다. 아, 조금만, 더!
임성이 눈을 꾹 감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희도는 쾌감을 느끼는 얼굴을 뚫어지라 보다가 무릎으로 바닥을 디디고 상체를 일으켰다.
“허억. 하아, 하, 아…….”
사정을 끝낸 임성과 달리 김희도의 것은 여전히 곧추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진 채로.
“야…… 김희도.”
당황한 얼굴을 본 김희도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토해 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눈앞의 성기가 입술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임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으로 해 주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수치스러웠다.
“겁먹었어요? 설마 선배보고 빨라고 할까 봐?”
“…….”
“걱정 마세요. 갑자기 입에 넣거나 하지 않을 거니까.”
보조개까지 드러내며 애교 있게 웃은 김희도가 제 성기를 양손으로 잡고 사정을 시작했다. 희뿌연 액체는 임성의 얼굴이 아닌 그의 유니폼 위에 흩뿌려졌다. 짙은 남색 옷이라 정액이 뿌려지는 게 바로 티가 났다.
임성은 반쯤 넋을 놓고선 숫자 32에 집중적으로 사정하는 김희도를 쳐다봤다. 그 역시 임성을 똑바로 보며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었다.
“이제 박재이 말고 내 생각 나겠다. 그렇죠?”
탐욕스러운 얼굴을 한 김희도가 빙그레 웃었다.
* * *
“희, 희도야. 천, 천천히 좀, 해. ……나 힘들어.”
“힘들어요? 알았어요.”
미친 듯 박아 대던 김희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격하게 쳐 대던 것을 멈추고 서로의 몸에 밴 땀이 스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박히던 내벽이 뭉근하게 짓이겨졌다. 빠르진 않지만, 그래서 김희도의 성기가 제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디를 쑤시는지 잘 느껴졌다. 날카롭고 숨 가쁜 쾌감 대신 묵직한 감각이 몸 안을 메웠다. 배꼽 아래가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조, 좀 이상…….”
기분이 이상했다.
“천천히 해 달라면서요?”
김희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양옆을 짚었다. 전등이 가려지며 임성의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벗은 몸이야 지금까지 질리도록 봤고, 지금도 보고 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 커 보였다. 김희도가 팔을 벌리면서 어깨 각도가 커진 이유도 있고, 바로 옆에 보이는 팔이 굵은 덕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내려 보는 위치라 은근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때 김희도가 팔을 굽혀 팔꿈치로 지탱하며 체중을 실었다. 몸을 짓누르는 감각에 임성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윽!”
“목소리 진짜 좋다. 좀 더 들려줘요. 선배.”
“이상한, 소리, 흐으.”
하지만 몸을 깊게 치대는 쾌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할 여유도 없었다.
끝도 없이 쳐올려질 때마다 임성의 몸이 비틀거렸다. 꾹, 꾸욱. 까슬까슬한 음모가 궁둥이를 살살 간지럽혔다. 집요한 움직임이었다. 이런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참기 힘들었다.
임성이 턱에 힘주어 입을 다물며 팔로 눈을 가렸다. 눈두덩이 뜨거웠다.
“아직도 빨라요? 더 천천히 할까?”
김희도가 웃으며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쩌억, 땀에 젖은 허벅지가 바닥에 쓸리며 쩍 소리가 울렸다. 깊고 묵직한 쾌감 뒤에 이어지는 약한 쾌감은 몸 안쪽 깊은 곳을 달아오르게 했다.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희, 희도야…….”
울음을 참는 듯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말해요. 나 선배 말 잘 듣잖아요.”
사탕으로 어린 애를 꾀는 듯 다정하게 말하면서도 그의 성기는 임성이 약한 부분만 눌러 왔다. 그곳이 짓이겨질 때마다 호흡이 멈췄다가 엉망으로 이어졌다.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게 뭐든.”
진짜 느낌이 이상하다고. 차라리 세게 하는 게 낫겠어. 평소처럼 빠르게 박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을 텐데도 김희도는 여전히 지독히 느리게 움직였다. 이미 물렁물렁해진 곳을 누르고 임성이 진저리를 치며 헐떡대는 모습을 쳐다봤다.
“너 진짜, ……성격, 나쁘, 흐읏.”
“내가요? 선배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요.”
“흐, 읏.”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까 팔 내리란 말도 안 하잖아요. 선배 얼굴 보고 싶은데.”
걱정해 주는 것 같지만, 지금 임성에겐 얼굴을 가린 손을 얼른 내리란 협박처럼 들렸다.
“이런데도 내가 성격이 나빠요? 눈꺼풀 핥고 싶은 것도 참는데도요?”
협박‘처럼’이 아니라 협박이 맞았다.
임성은 젖은 숨을 삼키며 손을 내렸다. 코가 새빨간, 눈물이 범벅된 얼굴이 드러났다.
“야, ……지, 지금 더 커졌잖아.”
“이미 넣어서 다행이네. 하마터면 안 들어갈 뻔했어요.”
지금 참고 있는 건 김희도 마찬가지였다. 몸속을 빠듯하게 채우고 더 커지는 걸 보면 그 역시 버티는 중이라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말이 듣고 싶냐? 꽉 막힌 목구멍으로 타액을 집어삼키고 입을 열었다.
“해, 해 줘. 아까처럼.”
“아까처럼?”
“……네 거 세게 넣어 달라고.”
차마 박아 달라는 말까진 못하고 대충 타협을 했다.
지금 내 얼굴 멀쩡할까? 터지진 않았을까?
끈질긴 참을성으로 기어코 원하는 말을 얻은 김희도가 반쯤 넣었던 성기를 한 번에 퍽 쳐올렸다. 주름졌던 곳이 팽팽해지며 뿌리까지 삼켰다.
“!”
허억. 입을 벌린 임성이 소리 없는 신음을 내질렀다. 눈앞에 전기가 튀었다. 아, 미치겠다. 죽겠어.
지독한 쾌감이 몸을 구석구석에 번졌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고 사정한 탓에 늘어진 귀두는 움찔 반응을 보이고 말 뿐이었다. 머릿속은 쾌락에 허덕이는데, 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더 힘들었다.
“그,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면……아흐.”
핏줄이 파랗게 일어선 손이 바닥을 더듬었다. 뭐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마땅한 게 없어 손톱을 세웠다.
“그러다 어깨 상해요. 나 잡아요, 응?”
다정한 목소리가 충격과 쾌감으로 엉망이 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임성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김희도의 목을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상체가 살짝 들리며 진득한 소리가 났다.
임성이 저를 껴안은 것을 확인한 김희도는 그의 옆구리를 잡고 아래로 내렸다. 몇 번이고 박았던 덕에 보들보들해진 곳이 다시 한번 세게 눌렸다.
“헉, 죽, 이러다……, 너무 힘들, 하악. 아……! 아!”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좋긴 해요.”
김희도가 탐욕스럽게 제 성기를 쳐 대며 말했다.
“선배, 눈 좀 떠 봐요. 나 좀 봐.”
임성은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눈가와 뺨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모습이 보였다. 흥분한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의 낮은 체온이 델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김희도가 흥분했다는 사실이 임성의 흥분을 더욱 부추겼다.
임성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의 턱 끝에 입술을 맞췄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좀 봐주라. 아마 그런 의도인 것 같은데, 잘못 짚었다. 오히려 부추겼으면 몰라. 김희도는 그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뿌리 끝까지 처넣었다.
오랫동안 단련한 탄탄한 육체가 자신 때문에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닿는 부분 그 어디에도 약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자신을 충동질하는 걸 이 남자는 알까? 뭐, 몰라도 상관없지만.
짐승처럼 박기만 하던 김희도가 어느 순간 허리를 물렸다. 달아오른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서울 정도로 팽팽한 성기에 핏줄이 돋아 있었다.
“희, 희……도야. 희도야. 흐으.”
울먹이는 목소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선배. 성이 형. 성아, 임성.”
기묘한 흥분이 담긴 이름이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성기가 꿈틀거렸다.
“…….”
“…….”
반쯤 정신이 나간 상황에서도 제 반응을 알아차린 임성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다 쏟아 낸 탓에 아무리 만져도 반응이 없더니, 겨우 이름 한 번에 다시 반응을 보인다고?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아, 희, 희도야. 잠깐, 이건 ……윽!”
입구까지 겨우 빠져나갔던 성기가 안을 무자비하게 치고 들어왔다. 임성은 발뒤꿈치로 바닥을 디디며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통제를 벗어난 육체가 미친 듯이 뒤틀렸다.
아, 젠장. 미쳤어. 임성.
“지금 이름 듣고 선 거예요? 우리 형 완전 변태네.”
누가 누구보고 변태라는 거야. 유니폼에 정액을 싸지른 놈이 할 말은 아니잖아. 반박하고 싶은데, 벌어진 입에선 높은 야릇한 신음만 터졌다.
“성이 형. 좋아해요.”
낮은 고백에 성기가 또다시 움찔댔다. 조금씩 일어서는 걸 보니 변태라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흣.”
“지금 되게 좋나 봐? 성이 형. 성아.”
너 지금 일부러 이러지? 원망을 담고 쏘아보자 김희도가 색색거리며 웃었다.
“아, 왜 이렇게 귀엽지. 미치겠다.”
내가 몇 번을 말했냐. 귀여운 건 너라고. 이번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앞 안 만져 줄 거야. 잘해 봐요.”
사람을 부추겨 놓고선 이제 와서 내빼겠다고?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와 김희도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이 와중에도 차마 왼쪽은 못 물고 굳이 고개를 틀어 오른쪽 어깨에 이를 박았다. 물론 그마저도 허리를 추어올리는 것에 움찔하며 얼굴을 들었지만.
“흣. 아, 거기, 조, 좋아. 아!”
임성의 발가락이 안쪽으로 오므라들며 발등에 핏줄이 쫙 돋았다. 발끝에서 시작된 쾌감이 허벅지를 타고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모든 감각이 김희도와 이어진 부분으로 모여드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단단한 성기가 아래를 쑤시고 헤집을수록 더 짙어졌다.
“아, 으……, 흐으.”
잔뜩 좁아진 목구멍에서 달뜬 숨이 터졌다. 임성은 엉덩이를 바닥에 누르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 상태로 미친 듯이 쑤셔졌다. 형용할 수 없는, 폭발적인 쾌감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고, 눈앞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지금 임성의 머릿속을 꽉 채운 건 미친 듯한 쾌감이 전부였다. 하지만, 더, 원해.
“으, 흐읏. 으, 읏. 희도야.”
임성은 김희도에게 짓눌린 채 끊임없이 흔들렸다. 너덜너덜한 젖꼭지가 솟은 붙은 가슴도, 손자국이 발갛게 올라온 옆구리도 탄력적으로 튀어 올랐다. 무의식중에 엉덩이를 내리며 무릎 안쪽과 종아리를 이용해 김희도의 허리를 휘감았다.
“더, 좀 더 세게 해 줘. 으, 거기…….”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좀 더, 조금이라도 김희도와 더 깊이 연결되기 위해 발뒤꿈치로 그의 엉덩이를 누르며 성기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희도, 허, 허윽! 윽!”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조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김희도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 비슷한 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희도는 제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임성에게 모두 쏟아부었다.
퍽. 묵직한 음낭과 음모가 엉덩이를 누르며 자비 없이 쳐 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임성의 육체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김희도의 손이 임성의 무릎 안쪽을 붙잡더니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허리가 붕 뜨며 몸이 거의 반으로 접혔다. 귀두 끝이 김희도가 뿌려 놓은 정액 위에 닿았다.
“야, 이 자세는 싫어.”
“왜요? 선배 좆이 내 정액에 닿아서요? 선배가 안 세우면 되잖아요.”
심술궂게 말한 김희도가 임성의 허벅지 뒤를 밀어 허리가 더욱 접히게 만들었다. 귀두에만 살짝 닿았던 정액이 기둥까지 범벅이 됐다.
임성이 숨을 크게 뱉어 냈다. 진짜 미칠,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으흐, 앗. 희도야, ……그만, 좋아, 더 세게 박, 흐.”
“아, 씨발.”
잇새로 짓씹듯 욕을 내뱉은 김희도가 미친 듯이 쳐 대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는 검붉은 성기를 꾸역꾸역 삼켰다. 뜨겁고 부드러운 내벽이 제 안을 쑤시는 성기를 꽉 조였다. 성기가 끊어질 것 같은 압박감이 밀려왔다.
“하.”
숨을 뱉어 낸 김희도는 임성의 입술을 정신없이 삼키고 입 안을 더듬었다. 자신의 체온도 높아졌을 텐데 임성은 몸 전체가 불덩어리 같았다.
진짜 사람 돌게 하네.
김희도는 정신이 반쯤 날아간 채 헐떡이는 남자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좀 더 깊이 끌어안았다. 절정이 휘몰아친 듯 임성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쾌감에 무너지고 짐승 같은 본능만 남은 남자를 하나도 남김없이 삼키고 싶었다.
* * *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냐?”
“음. 아니요.”
짐짓 머쓱한 말투로 대답한 김희도가 바닥에 널브러진 임성에게 물통을 건넸다.
“솔직해서 좋네. 물 마시고 싶었는데 고마워.”
실온에 미리 내놓은 걸 갖고 왔는지 미지근했다. 생각 같아선 얼음을 동동 띄운 찬물을 마시고 싶은데 안 주겠지. 섹스 후에는 늘 미지근한 물을 마시게 했으니까. 급한 대로 목을 축이자 싶어 뚜껑을 돌리는데 자꾸 헛돌기만 했다.
이게 왜 안 열려. 손을 가볍게 털어 내고 좀 더 진지하게 뚜껑을 돌렸다.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목이 겨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툭툭 떨어졌다.
“와…… 이걸 못 돌리네. 어디 가서 운동한다는 말도 못 하겠다.”
진짜 안 되겠네. 허탈하게 중얼거리던 임성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뚜껑을 못 열 정도로 해 댄 김희도의 지분이 상당히 컸다.
“여기요. 천천히 마셔요.”
더 자존심 상하는 건 이렇게 힘들어하는 자신과 달리 김희도는 생생하다는 것이었다. 생생한 게 다 뭐냐, 피부가 반질반질한 것이 개운해 보이기까지 하잖아.
“왜 그렇게 봐요. 허리 아파요? 주물러 줘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젊은 게 좋다 싶어서.”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서 받은 물을 들이켰다.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 댔던 목구멍은 물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따끔거렸다.
“스무 살이나 스물두 살이나. 겨우 두 살 차이로 무슨 젊음 타령이에요.”
“너 그거 은근히 차이 크다? 나중에 내 나이 돼 보면 알 거다.”
갈증을 대충 해소하고 나서야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니폼이 가지런히 걸려 있던 행거는 태풍을 맞은 나무처럼 바닥에 쓰러져 나뒹구는 중이었고, 책상에 올려놨던 야구공 케이스도 열린 채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중 제일 엉망인 건 정액 범벅이 된 유니폼을 입은 자신이었고.
원래도 비시즌에 체력을 끌어 올리려고 계획했지만, 진짜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해야겠다.
다음에는 꼭 김희도 먼저 지치게 하겠어. 더는 못하겠다는 말을 듣고야 말겠다고.
임성은 김희도가 알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결심을 하며 일어섰다. 온몸의 근육이 쑤셨는데, 특히 허벅지와 무릎 안쪽은 작은 움직임에도 미친 듯 욱신거렸다.
보통 운동장 수십 바퀴를 달린 뒤 계단 뛰기를 반복하고 나면 이렇게 아프던데. 체감은 운동장 100바퀴를 쉬지 않고 뛴 것과 비슷,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임성이 걸음을 디디자 대기하고 있던 김희도가 얼른 다가와 허리를 껴안았다. 힘이 빠진 육체가 김희도에게 안기듯 기대어졌다.
“체력이 왜 이렇게 약해요. 운동한 거 다 어디 갔어요.”
“……내가 운동을 게을리했나 보다. 더 노력할게.”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많이 힘들어요? 병원 갈래요?”
어쩔 줄 몰라 하며 걱정하는 모습은 제발 그만 좀 하라던 애원을 모른 척하던 남자와 동일 인물 같지 않았다.
임성은 양 눈썹을 한껏 내린 채 시무룩해하는 김희도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참을 만해. 그것보다 나 좀 씻어야겠다.”
“욕실까지 데려다줄게요.”
“괜찮아. 여기서 몇 발짝이나 한다고. 내가 갈 수 있…… 윽!”
괜찮다는 말은 헛숨과 함께 목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김희도에게 잡힌 오른쪽 어깨가 살짝 기운다 싶더니 무릎 안쪽으로 팔이 쑥 들어왔다. 옆으로 흐르던 시야가 순식간에 높아지고 조금 전까지 바닥을 디디고 있던 발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이게 벌써 몇 번째더라.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하나도 안 이상한데요. 평범하지 않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김희도가 제 품에 안긴 남자를 추어올렸다.
180cm가 넘는 남자를 공주님 안기로 옮기는 게 평범해? 내가 생각하는 평범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창피하다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숨을 얕게 쉬었다. 얼굴이 불타오른 채로 욕실까지 옮겨졌다.
“물 틀게요. 뜨거우면 말해요.”
임성을 욕조 안에 얌전히 내려놓은 김희도는 땀과 정액이 엉겨 붙은 유니폼을 벗겨 내고,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씻겼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다.’ 같은 발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건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찰랑이는 물도 따뜻하고, 머리카락을 천천히 헤집는 손가락도 다정했다. 중간에 은근슬쩍 엉덩이에 손가락을 넣으려던 시도만 없었다면 더 평화로웠겠지.
임성은 팔을 욕조에 걸치며 고개를 젖혔다. 끔뻑끔뻑 천천히 움직이던 눈꺼풀이 이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임성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잠기운을 쫓아냈다.
“피곤하면 좀 자요. 깨워 줄게요.”
임성을 제 허벅지 사이에 앉히고 그의 어깨를 주무르던 김희도가 조용히 말했다. 습기로 가득 찬 욕실 벽과 부딪힌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댔다.
“괜찮아…… 그것보다, 너 말이야.”
반쯤 감긴 눈을 기어코 들어 올리고 김희도를 쳐다봤다. 뺨도 턱도 아직 앳된 기운이 남은 남자는 시선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미소였다.
“코는 좀 괜찮아졌어? 사람들 많은 데 힘들어했잖아.”
“똑같아요. 그냥 예전보다 잘 참게 된 거지.”
“병원에선 뭐래? 정기적으로 다니는 곳.”
“그것도 똑같죠. 특별한 이상은 없고 남들보다 후각이 발달한 것뿐이다. 10년 넘게 들었던 말을 또 듣는 게 다예요.”
두피가 간질간질해지고 달큼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삼푸를 하는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김희도가 “눈 감아요. 따가울지도 몰라요.” 하며 뒤통수를 부드럽게 눌렀다.
임성은 조금 더 짙어진 단내를 쫓아 코끝을 찡긋댔다.
“샴푸 바꿨어? 처음 맡는 냄새네.”
“선배 전용이에요. 마트에서 보자마자 선배 생각 나더라고요.”
김희도가 슬쩍 웃으며 바나나를 연상케 하는 노란 샴푸 용기를 흔들었다.
“이 냄새는 어때? 달달한 거 싫어하잖아.”
“선배한테서 나는 거면 다 좋아요.”
후각이 유달리 예민해서일까, 김희도는 샴푸고 바디 워시고 모두 무향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그에게선 상큼한 풋내가 나서 신기해하곤 했다.
본인이 쓰지 않을 물건을 자신 때문에 샀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뭐라고 딱 꼬집긴 어렵지만, 입술이 안쪽으로 말리고 손바닥이 간지러운 것이…….
거기까지 생각하던 임성은 여태 잊고 있던 중요한 기억을 떠올렸다. 샴푸, 물건. 짐. 기적의 연계법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 맞다. 나 이번 달 말까지 숙소 짐 빼야 해.”
“숙소요?”
갑자기? 라는 투로 김희도가 말했다.
“1군 숙소 제공은 3년 차까지거든. 집이 서울인데 받아 준 것만 해도 감사하지. ……게다가 침대까지 부쉈으니까.”
크흠. 큼. 임성이 헛기침을 뱉으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 난리를 치며 침대를 망가트린 다음 날, 들키기 전에 자진 신고를 하자 싶어 매니저를 찾아갔다. 처음엔 그까짓 거 그냥 고치면 된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매니저는 침대가 아예 폭삭 내려앉은 참담한 현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임성은 침묵하는 매니저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지 생각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녹아내릴 것처럼 창피했다.
‘완전 박살 났네. 왜 이렇게 됐어?’
‘코, 코시 우승한 게 너무 기뻐서 침대에서 뛰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성이 너 감기 걸려서 이틀 꼬박 앓았다며. 근데 침대에서 뛰어?’
탓하거나 의심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한 것 같았다. 순수한 의문이 임성을 더욱 쪼그라들게 했다.
‘……나중에요. 방방 뛸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졌습니다.’
겨울에 가까운 늦가을임에도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임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침대 물어내래요? 얼만데요, 제가 낼게요.”
“내 숙소 내 침대를 네가 왜 물어 줘, 인마.”
“내 지분이 크잖아. 아니에요?”
김희도는 눈꺼풀을 내리깔며 새침하게 물었다. 쟤는 요즘 따라 왜 저렇게 예쁜 척이지. 아니, 원래 예쁘니까 예쁜 척은 아닌가? 만약 조예준이 들었다면 기함할 생각을 태연히 했다.
“무슨 구단이 그렇게 쪼잔하대요. 그까짓 침대 제일 좋은 걸로 산다고 해요.”
바나나 향기가 나는 손가락이 귓불과 뒤쪽을 살짝 건드리고 목 뒤에 짧게 돋은 머리카락도 쓸어 올렸다. 타인의 손이 잘 닿지 않은 곳이자, 임성이 유난히 약한 부위기도 했다.
“구단에서 뭐라고 한 건 아니고. 나 혼자 찔려서…….”
우물쭈물 대답하다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의아해하는 시선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임성은 목구멍에 남은 웃음을 뱉으며 손으로 첨벙첨벙 물장구를 쳤다.
“왜 웃어요? 재밌는 건 공유 합시다.”
결국 못 참겠는지 김희도가 이유를 물어 왔다.
“아니, 그거 하다가 침대가 부서지다니. 생각하니까 어이없어서. 별일 다 있다 싶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일도, 생각도 전혀 없지만, 설사 하더라도 허풍 섞인 농담으로 생각할 것이다. 직접 겪었음에도 믿기 힘들었으니까.
“희도야, 고개 좀 숙여 볼래?”
“이렇게요?”
“응. 그렇게.”
양 팔꿈치로 욕조를 짚은 임성이 고개를 젖히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제 쪽으로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입술을 갖다 댔다. 쪽, 가벼운 뽀뽀를 했다가 혀를 살짝 내어 김희도의 아랫입술을 핥고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바로 하며 욕조에 등을 기댔다.
“뭐, 뭐예요. 방금 뭐 한 거예요?”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는 끝이 뒤집힌 것도 모자라 살짝 떨리고 있었다. 되레 이쪽이 당황스러워지는 반응이었다.
“어……? 싫었어?”
갑자기 뽀뽀해서 싫었나? 어쩌면 입술 핥은 게 별로였을 수도. 깨물진 말 걸 그랬어. 별별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던 임성은 김희도의 얼굴을 보고 입을 벌렸다.
“김희도, 너, 너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 심지어 머리를 감기고 있는 팔까지 온통 붉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빨개질 수 있구나. 순수한 감탄이 터졌다.
임성은 덩달아 달아올라 젖은 손으로 열심히 손바람을 만들었다. 손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이 얼굴을 적셨지만, 애초에 따뜻한 물이라 열기를 식히진 못했다. 결국 손부채는 그만두고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로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침묵이 길어졌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하고 싶은 말 없어?”
“어, 선배가, 갑자기, 말도 없이 뽀뽀를…….”
“알았어. 다음에는 미리 물어보고 할게. 너도 예고해라.”
“네에…….”
방금 전까지 짐승 같은 섹스를 한 두 사람은 차마 서로를 보지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머리 헹굴게요.”
“어.”
미지근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머리에서 흐른 거품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스르륵 녹았다.
“머리 헹구고 뽀뽀도 할 거예요.”
“알았어.”
“머리 헹구고 뽀뽀도 하고 섹스도 할 거예요. 내일까지 안 놔줄 거야.”
뭐라고? 거품이 휘날릴 정도로 임성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풋내 나던 표정은 온데간데 찾을 수 없고, 적나라한 흥분이 담긴 눈동자와 맞닿았다. 왠지 여기서 시선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눈에 힘을 줬다.
미묘한 긴장을 깨트린 것은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줄기였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세찬 물방울이 넘실대는 물 위로 거세게 떨어졌다. 토독토독 터지는 물소리에 긴장된 숨을 흘려보내고 입을 열었다.
“뽀뽀는 좋아. 하지만 마지막은 기각한다.”
“왜요? 선배 말대로 예고했잖아요.”
이 귀엽고 양심 없는 놈을 봤나. 임성이 손을 뻗자 김희도가 이번에도 고개를 살짝 늘어트렸다.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자연스러웠다. 자신을 씻기느라 덩달아 젖은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감쌌다.
“여기서 더 하면 나 진짜 못 움직여. 내일 우리 출근하잖아. 너 혼자 갈래?”
“……알았어요.”
혼자 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의외로 쉽게 물러났다. 그리고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다시 샤워기를 들어 남은 거품을 모두 씻겼다.
샤워가 모두 끝나자 김희도는 욕실 찬장을 열어 꺼낸 타월로 임성의 몸을 감쌌다. 해변가에서 쓸 법한 대형 타월은 안타깝게도 임성의 허벅지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그마저도 옆 통은 다 감싸지 못해 탄탄한 옆구리가 살짝 드러나는 민망한 상황이었다.
이럴 바엔 그냥 옷 입는 게 낫지 않나.
“선배, 여기요.”
어느새 거실 소파에 앉은 김희도가 활짝 벌어진 제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드라이기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머리를 말려 주겠다는 뜻 같았다.
임성은 타월 끝을 조심스레 말아 쥐고서 천천히 걸어갔다. 정면에 보이는 새까만 유리창은 밤이 찾아왔다는 걸 알려 줬다.
이번에는 몇 시간이나 했을까. 한번 시작하면 서너 시간은 기본인데, 섹스를 한 건 쟤가 처음이라 평균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원.
“선배. 여기 앉으세요.”
“괜찮아. 그거 나 주고 젖은 옷이나 갈아입어라. 겸사겸사 내가 입을 것도 좀 빌려줘.”
흠뻑 젖다 못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김희도의 바짓단을 보며 말했다.
“……?”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손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드라이기 안 주나? 젖은 옷에 향했던 고개를 바로 하며 김희도를 쳐다봤다. 그는 임성을 빤히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드라이기 들 힘도 없게 해 줘요?”
“뭐?”
“내가 말려 주고 싶어서 그래요. 기분 좋게 해 줄게요.”
방금 드라이기를 뭐 어쩌고 했잖아. 임성은 그에게 어깨를 붙들린 채 다리 사이에 앉혀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뜨거운 바람은 두피에 안 좋다고 해서요. 조금 차가울 거예요.”
그의 말처럼 조금 찬 바람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임성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자 김희도가 타월을 살짝 당겨 드러난 살을 가렸다. 하지만 타월 자체가 작은 탓에 이번엔 반대쪽이 휑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옷 입는 게 낫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목과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에 기분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시즌 내내 열심히 애써 주신 재활 코치님껜 정말 죄송하지만, 어깻죽지와 팔 근육을 푸는 건 김희도가 좀 더 나았다. 다양한 선수와 맞춰야 하는 재활 코치와 달리 김희도는 제 몸 구석구석까지 파악하고, 그에 맞췄으니까.
“아, 시원하다. 피로가 쫙 풀리네.”
“내가 기분 좋을 거라고 했잖아.”
딱딱하던 근육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확인한 김희도는 잠시 멈췄던 머리 말리기를 다시 했다.
윙, 위잉.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백색소음처럼 들렸다. 따뜻한 욕조에서 버텼던 졸음이 조금 더 깊고 무겁게 쏟아졌다. 반쯤 눈꺼풀을 내린 채 꾸벅꾸벅 졸던 임성이 불현듯 눈을 부릅떴다.
“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어떤 거?”
시끄럽게 돌아가는 드라이기 소음 속에서도 김희도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결코 크거나 높은 목소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제가 그에게 집중하고 있단 뜻이겠지,
김희도는 잠시 드라이기를 끄고 임성의 등에 제 가슴을 붙여 왔다. 평소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텁텁한 바나나 향도 임성의 체취와 섞이자 달큼하게 느껴졌다.
김희도는 상체를 조금 더 숙이며 제가 조금 전까지 물고 빨았던 입술이 열리는 것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배 속이 찌릿했다.
“너 아까 내 이름 불렀지?”
“네?”
“임성, 성이라고 했잖아.”
“어…… 반말한 게 아니고요.”
아무래도 이름만 부른 건 좀 그랬나. 김희도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봤다.
“반말하는 것도 귀엽단 말이야. 왜지, 왤까?”
임성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질문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김희도를 좋아하니까.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었다.
왠지 손바닥이 간지럽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감정이었다.
“반말은 상관없지만 이름만 덜렁 부르는 건 조심해. 버릇되면 무의식중에 나와. 둘이 있을 땐 뭐라고 해도 괜찮지만, 선배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 생각은 관심 없어요. 난 그냥…… 그냥 선배만 중요해요. 선배만 날 좋아해 주면 세상 모든 사람이 욕해도 괜찮아요.”
아마 욕하는지도 모를걸요.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임성은 시즌을 치르는 동안 훌쩍 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으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임성은 부디 김희도가 잘 알아듣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욕먹으면 좋겠어?”
“누가 선배 욕해요? 누굽니까?”
이것 봐. 무슨 말을 못 하겠잖아.
임성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낼 것처럼 살벌한 표정을 한 김희도를 보다가 양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움찔 떨리는 손등을 천천히 다독였다.
“싫지? 나도 마찬가지야. 좋아하는 사람이 욕먹는 거 반기는 사람이 어딨냐?”
그래도요. 김희도의 입술이 튀어나왔다.
“넌 엄청 귀여우니까 웬만한 건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남들 앞에선 조심하자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완전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요.”
김희도는 여전히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랑 말 놓고 싶어? 난 전혀 상관없으니까 너 좋을 대로 해.”
“아니요. 이대로 괜찮아요.”
바로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래? 그럼 머리 마저 말릴까?”
고개를 끄덕인 김희도가 소파에 내려놨던 드라이기를 다시 들고 남은 물기마저 모두 없앴다. 머리를 살짝 흔들자 머리카락에 스몄던 단내가 폴폴 퍼졌다.
“지금 선배한테서 엄청 맛있는 냄새 나요. 배고파요.”
과일 향 샴푸니까 달큼한 냄새가 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어쩐지 야릇하게 들리는 건 자신의 머릿속이 썩어서일까. 나만 쓰레기야? 나만 쓰레기냐고. 임성은 애써 태연한 척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김희도의 손을 곁눈질했다.
“지금 네 손에도 똑같은 냄새 날걸.”
“장담하건대 완전히 다를 겁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김희도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게 오후 1시가 막 넘어서였다. 물론 그 뒤에 망고와 포도를 먹었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칼로리를 소비했으니 당연히 배가 고플 것이다.
선배는 뭐든 잘 먹으니까. 위로든 아래든.
김희도는 난잡한 머릿속을 드러내지 않고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며 임성에게 물었다.
“저녁 뭐 먹을래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떡볶이 재료 남았냐?”
“재료는 남았지만, 매운 거 먹으면 속 버려요. 그냥 밥할게요.”
“그럼 난 달걀말이 만들어야겠다. 옥수수나 팽이버섯 있어? 명란도 괜찮고.”
“치즈까지 있습니다. 선배가 좋아하는 재료는 일단 다 사 놨거든요.”
김희도가 먼저 일어섰고, 뒤이어 임성이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움직이면 근육통처럼 온 몸이 욱신거려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그냥 여기 있어요. 달걀말이 내가 할게요. 맛은 그리 보장 못 하지만요.”
임성이 허리를 짚으며 일어서자 깜짝 놀란 김희도가 아프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어깨를 눌러 앉혔다.
“맛 보장 못 한다기엔 떡볶이 엄청 맛있던데?”
“3년 내내 그것만 만들면 누구라도 늘지 않을까요?”
“3년? 이틀 전에 배운 게 아니고?”
“또또 레시피를 받은 건 이틀 전이지만, 그전까지 혼자서 이것저것 시도해 봤거든요.”
아. 불현듯 손가락을 썰었을 때 집에 와서 주야장천 떡볶이만 만들던 김희도가 떠올랐다. 설마 그때부터 시작이었나?
“선배에게 가게 얘기 들은 후부터는 진지하게 메뉴 개발 했고요. 레시피 노트도 있어요.”
메뉴 개발한다는 말이 진담이었다니. 또 그놈의 떡볶이 가게 얘기냐며 가볍게 웃고 넘겼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가게 열려면 열심히 벌어야겠구나. 야구 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내가 언제 선배에게 농담한 적 있어요?”
아니. 없지. 김희도는 고등학생 때도 지금도 무거울 만큼 진심이었다. 제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하던 때조차도.
“난 뭘 해 줘야 하나. 뭐 갖고 싶어?”
너무 비싼 건 안 된다. 웃으며 덧붙인 말에 김희도는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선배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임성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선배만 주면 돼요. 다른 건 아무것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말문도, 숨도 막히게 하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자.”
“깜빡이 켜면 눈치채고 피할 거잖아요. 지금 나한텐 액셀밖에 없는데, 한번 밟아 볼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가늠이 안 되는 말이었다. 지금도 정신 못 차릴 지경인데, 여기서 액셀을 밟는다니, 감당할 수 있을까?
“액셀은 나중에 같이 밟고 우선 배부터 채우자.”
네에.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대답한 김희도가 임성이 앉아 있는 소파 옆을 팡팡 두드렸다.
“밥 다 되면 깨울 테니까 좀 자요. 아까부터 꾸벅꾸벅 조는 거 보니까 피곤한 것 같은데.”
그의 말처럼 피곤하고 졸리지만, 지금은 잠을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부끄럽지만 말해야겠지? 옆 이마를 긁적이던 임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가지런한 발톱에 시선을 고정했다. 쟤는 어떻게 발톱까지 예쁠까. 거시기만 빼면 다 사랑스러워.
“나보고 눈치 없다더니 넌 더 없잖아.”
“네?”
제가요? 라는 듯한 목소리가 머리맡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을까. 그 표정 되게 귀여운데.
“너랑 같이 있고 싶단 뜻이잖아. 나 지금 소파에 누울까……?”
말을 살짝 흐리며 누우려는 시늉을 하자 김희도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머리가 어지럽진 않을까 걱정되는 속도였다. 그걸로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임성의 팔뚝을 다급하게 잡으며 앉지 말라고 말렸다.
잘 몰랐는데,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 달걀말이 진짜 잘해. 기대해도 좋을걸.”
임성은 그의 어깨에 팔을 턱 하니 얹고 주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발뒤꿈치를 살짝, 아주 살짝 들어야 했다는 건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