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1)

#12

현재 2위를 달리는 LE 레전드스와의 경기. 현재 9회 초, 양 팀 점수는 5 대 5 동점이었다. 초반 뒤처지던 점수를 뒤집고, 또 레전드스에게 역전당한 뒤 필사의 노력으로 동점까지 따라 붙은 것이었다.

홈경기라, 9회 말 페어리즈의 공격이 한 번 더 남아 있지만, 연장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9회 말, 1사 1, 3루 상황에서 김희도의 끝내기 안타가 터졌다. 극적이라는 말밖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깊게 잡아당긴 타구가! 오른쪽, 오른쪽으로 떨어집니다! 김희도의 적시타! 끈질긴 컨택 끝에 결국 안타를 뽑아냅니다. 연장 경기를 준비하던 모든 선수들을 허탈하게, 혹은 열광하게 하는 플레이가 펼쳐졌습니다. 김희도의 시즌 첫 끝내기 안타! 젊은 선수가 팀을 승리로 이끕니다.』

배트 끝에서 힘차게 뻗어 나간 공이 우중간을 정확히 가르고, 3루에 있던 페어리즈 타자가 홈을 밟으면서 역전의 역전을 했다.

시즌 첫 끝내기 승리였다.

“헐, 끝내기. 이겼다!”

우아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그라운드로 튀어 나간 선수들이 홈플레이트를 밟은 선수를 에워쌌다. 개중 몇몇은 생수통을 들고 김희도에게 다가가기도 했는데, 그는 몸을 살짝 틀며 사람들의 손길을 피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세리머니를 대놓고 저지한 김희도는 그들 틈에서 임성을 찾아냈다.

“저 끝내기 친 거 봤어요?”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꼭 활짝 핀 꽃 같았다.

“어. 봤어. 엄청 멋있었다.”

기특한 자식. 김희도의 헬멧을 들치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렸다. 그의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인터뷰 중인 김희도를 두고 라커룸으로 돌아온 임성이 휴대폰을 켰다. 스포츠 메인 화면에는 오늘 경기 승패와 함께 각 구장 하이라이트, 기사 등으로 빽빽했다.

『[다이나믹 KBO! 김인혁 기자. [email protected]] 괴물 신인의 등장? 과감한 스윙, 탁월한 선구안. 페어리즈 타자 김희도.

이솔 페어리즈의 피엘로 리베르트 감독은 특급 신인 김희도(18·사진)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전국 1차 지명으로 가장 먼저 페어리즈 유니폼을 입은 그는 고교야구에서 이미 기록을 갈아치운 전적이 있는 타자. 과연 프로에서 통할지 걱정 어린 시선을 잠재우듯 데뷔 첫 경기부터 BS 샤크스의 데니 후웰스에게 안타를 뽑아냈다. 그리고 오늘 경기 LE 레전드스를 상대로 역전 적시타를 때리며 승리를 이끌었다.

현장은 물론,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스카우터 역시 김희도의 남다른 재능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피엘로 레베르트 감독은 “페어리즈가 가을 야구에 가기 위해선 젊은 선수들의 힘이 필요하다. 신인들이 잘하면 팀 분위기가 고무된다.”라고 말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고교에선 수비에서의 단점이 뚜렷한 선수였지만, 최근 유니콘즈와의 경기에서 수준 높은 수비를 선보였다.

페어리즈 팬들은 약 17년 만의 신인왕 탄생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과연 팬들의 오랜 염원을 충족할 수 있을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짜 대단하네…….”

이미 김희도의 실력을 잘 알고, 고등학교 시절을 직접 겪었음에도 매번 감탄이 나왔다. 요새는 고등학교 때보다 더 빛나는 느낌을 받았다.

김희도의 성장이 눈부신 한편, 자신도 얼른 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이미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는 김희도와 달리 자신은 올 시즌 제대로 등판한 적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와 점점 격차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난 지금 뭘 하고 있지.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되나?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선배. 오늘 저녁 뭐 먹을래요? 얼마 전에 해물탕 먹고 싶다면서요, 거기 갈까요?”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임성은 휴대폰을 닫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훈련 좀 더 하고 가려고. 너 먼저 먹어.”

“또요? 요즘 오버 워크 하는 거 아닙니까? 쉴 땐 확실히 쉬고 챙겨 먹어야 한다고 말했으면서.”

“다음에.”

김희도에게 잘못이 없는 걸 알지만, 지금은 대화를 이어 나가기가 껄끄러웠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갈 곳 잃은 시선이 바닥을 무겁게 헤맸다.

“……알았어요. 그럼 저도 운동할래요.”

한 박자 느린 대답이 이어졌다.

“너는 왜? 3시간 넘게 경기 뛰었잖아. 배 안 고프냐?”

“생각 없어요.”

그렇게 말한 김희도는 임성의 옆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씻고 나온 권재영이 둘 다 퇴근하라고 말할 때까지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그 후 이어진 경기에서도 김희도는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안타를 치고, 볼넷을 골라 출루를 하고, 또 상대팀의 까다로운 타구를 처리하는 플레이를 했다.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떼고도 충분히 선배들과 경쟁이 가능했다. 언젠가 최희탁과 권재영이 말했던 재능과 센스를 모두 겸비한 것이었다.

“쟤는 진짜 타고났다. 타고났어.”

팔짱을 끼고 있던 코치는 김희도가 깔끔하게 타구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은 근처에 있던 임성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수비 도움을 받은 페어리즈 투수가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고, 최희탁은 김희도가 정색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의 엉덩이를 발로 툭 차며 친근감을 드러냈다. 임성은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모두 즐거워 보이는 저 자리에 왜 자신은 없는 걸까. 내 자리가 있긴 한 건가. 꽉 맞춘 톱니바퀴를 보는 것처럼 모두 완벽한 것 같았다.

폭스와 페어리즈의 경기는 4점 차로 페어리즈의 승리로 끝났다.

“선배, 선배! 저 수비하는 거 봤어요?”

어느새 더그아웃 김희도가 글러브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어려운 타구였는데, 좋은 판단이었어.”

“저 잘했어요?”

“뭘 물어. 당연하지.”

임성은 확 밝아진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선 라커룸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보폭이 좁고 빠른 발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모처럼 내일 쉬는 날인데, 오랜만에 또또 떡볶이 먹으러 갈래요? 아니다. 제가 사 갈 테니까 선배는 숙소에 있어요. 곤약 잔뜩 넣은 5단계, 어때요?”

“별로 안 당겨. 난 이따 먹을 거니까 너 먼저 먹어라. 떡볶이 같은 거 말고 든든한 걸로.”

“선배. 요새 맨날 나 혼자 먹으라고 하는 거 알아요? 그리고 신경 쓰지 말라니.”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김희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임성은 이마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연습 조금만 하고 먹자.”

이내 훈련장으로 향한 두 사람은 각자 훈련에 몰두했다. 손가락 사이를 긁으며 빠져나가는 단단한 공의 감촉이 좋으면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런 그물망이 아니라, 마운드에서 타자에게 던지고 싶었다.

하나, 둘, 셋. 어느새 수를 세는 걸 잊을 정도로 던지고 또 던졌다. 얼굴을 뒤덮은 땀은 옷까지 흠뻑 적시고 뚝뚝 떨어졌다. 다시 한번 앞으로 뻗는 어깨를 누군가가 강하게 붙들었다. 돌아볼 것도 없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것만 던지고.”

“‘이것만’이 대체 몇 번째예요. 요새 왜 이렇게 무리해요?”

“불안하니까.”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채 말했다.

“불안해할 게 뭐 있어요. 선배는 지금도 잘하고 있잖아요. 폼도 많이 안정됐고, 구속도 오르고.”

임성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등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공을 꽉 쥐었다.

“올시즌 제대로 마운드에 올라간 적도 없는데, 잘하긴 뭘 잘해. 그냥 네 생각이겠지.”

“이제 시즌 시작한 지 한 달 조금 넘었어요. 지금 선배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겠는데, 오버 페이스 하는 건 안 좋…….”

“희도야.”

내내 김희도를 외면하던 임성이 처음으로 그와 마주 보고 섰다. 살피는 듯한 시선이 얼굴 곳곳에 닿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떤 심정인지 알겠다고? 아니. 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절대 모를걸. 미안한데, 지금은 네 위로가 조금 부담스럽다. 혼자 있고 싶어. 이것밖에 안 돼서 미안하다.”

“…….”

김희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성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임성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먼저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요 며칠 답답하던 속이 이제는 아예 콱 틀어 막힌 것 같았다. 무거운 뭔가가 계속 쌓이는 기분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열등감과 닮아 있었다. 하아. 몇 번째일지 모르는 한숨을 또다시 내뱉으며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은 집에서 잘게.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찾아오지 말고 푹 쉬어. 오늘도 고생했다.

-김희도: 지금 선배 집으로 갈게요.

-나: 아니야. 생각 정리되면 연락할게. 귀찮다고 미루지 말고 스트레칭 꼼꼼히 해라. 안타 축하해.

발송하자마자 읽었는지 메신저 앞의 숫자가 바로 사라졌다. 답장을 보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다른 연락 없이 잠잠했다. 하긴, 얘도 질렸겠지.

“…….”

임성은 시즌 시작 후 처음으로 숙소가 아닌 집으로 향했다.

* * *

새벽이 아닌 해가 바짝 떠오른 오후에 눈을 떴다.

헉, 늦잠 잤나. 오전 훈련에 늦진 않았겠지? 이불을 박차며 일어났다가 경기가 없는 월요일이라는 걸 깨닫고 뒷머리를 긁었다. 자다가 몇 번을 뒤척였는지 머리카락이 뻗치다 못해 아주 새둥지였다.

임성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젯밤 충전을 하지 않은 휴대폰은 이미 배터리가 방전돼 까맣게 꺼진 지 오래였다. 아무리 눌러도 아무 반응 없는 액정을 보다가 다시 내려놓고 천장을 보고 벌러덩 누웠다.

희도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어제 많이 놀랐겠지. 아무 잘못도 없는 애한테 화풀이나 하고. 진짜 못났다, 못났어.

김희도 말처럼 요새 오버 워크를 했는지 방금 일어났는데도 또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동안 몰린 잠을 몰아치우듯 온종일 자던 임성이 휴대폰을 켠 것은 밤에 가까운 늦은 오후였다.

지잉- 지잉-. 부재중 전화와 메신저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약 50통에 가까운 부재중 전화는 1시간에서 30분 간격으로, 마지막에는 거의 1분 단위로 찍혀 있었다. 발신인은 모두 동일했다.

김희도.

익숙한 이름을 한참이나 보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액정이 요란하게 번쩍이며 휴대폰이 울렸다.

“네. 임성입니다.”

* * *

“헐, 저 새끼. 왜 저래?”

조예준이 TV를 보며 혀를 찼다. 왜 저러냐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플레이였다.

임성은 삼진, 그것도 배트를 휘두르지도 못한 루킹 삼진으로 물러나는 김희도를 눈으로 좇았다.

전국 최대어라는 화려한 등장과 그것을 넘어서는 행보를 보여 주던 김희도는 지금 네 경기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며 부진에 빠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로라하는 타자들을 제치며 온갖 지표에서 상위권을 찍다가 꼬꾸라진 것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기세가 확 꺾였다.

“방금 그건 누가 봐도 실투였잖아요. 저 좋은 공을 그냥 보내네. 아무래도 정신이 빠진 것 같죠?”

“…….”

“벌써 밑천 다 드러났나. 하긴, 두 달이나 해 먹었으면 많이 해 먹었지. 2군에서 볼 날이 머지않았네.”

오기만 해봐라. 진짜 가만 안 둔다. 조예준은 저녁 메뉴로 나온 닭튀김을 소스에 푹 담그며 말을 이었다.

“아, 참. 저 오늘 홍식이 형에게서 프레이밍 배웠거든요. 결론은 많이 받아 보라는 건데, 대충 느낌은 알 것 같아요. 빨리 1군 올라가서 주장 공 받고 싶다.”

“…….”

“주장? 주장!”

“아, 미안. 예준아, 뭐라고 했어?”

“열심히 할 거라고요. 근데, 김희도는 왜 저런대요? 방금 그 공은 고양이가 빠따를 휘둘렀어도 맞혔겠다.”

『올리 너베너. 빠른 직구로 김희도를 돌려세웠습니다. 이용훈 위원님. 방금 그 플레이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희도가 너베너 공에 속은 거라고 봐도 될까요?』

마치 조예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캐스터가 질문을 했다.

『첫 번째 공은 누가 봐도 가운데로 몰렸는데, 쳐다보기만 했죠. 여태 예상치 못한 공에도 대담한 스윙을 하던 선수답지 않은 플레이였습니다. 네 경기째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요, 혹시, 부상이라도 당한 거 아닐까요? 얼른 본인 페이스를 다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곧이어 해설이 말했다.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김희도의 표정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 원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인 걸 감안해도 지금은 걱정될 정도로 낯빛이 어두웠다.

임성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김희도를 응시했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평소 너답지 않잖아.

“주장, 서울엔 몇 시에 가요?”

“10시쯤.”

“짐은 다 쌌어요?”

“나 완전 맨몸으로 온 거 모르냐? 휴대폰도 없이 지갑만 달랑 들고 왔잖아.”

“아, 그랬지. 언질도 없이 갑자기 와서 깜짝 놀랐어요.”

현재 임성이 있는 곳은 2군이 있는 이천이었다. 월요일 밤, 2군 매니저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바로 집을 나섰다. 급하게 나오느라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왔다는 건 이천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깨달았다.

늦어도 다음 날에는 돌아갈 줄 알고 그냥 있었는데, 벌써 4일째 이천에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휴대폰을 찾으러 가기로 결심한 날, 콜업 소식을 듣고 조예준과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평소랑 다르게 스윙이 엄청 경직됐잖아. 방금은 아예 휘두르지도 않았고.”

“김희도요? 쟤 고등학교 2년 동안 부상 한번 없었던 앤데요. 맨날 마스크 끼고 다녀서인지 감기 걸린 것도 못 봤어요.”

“아픈 게 아니면 왜 저럴까?”

근본적인 물음에 조예준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미간엔 굵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끄응.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휴, 조예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마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딱 2년 전에도 저랬거든요.”

“2년 전?”

“기억 안 나요? 주장 졸업하고 저 자식 주말리그에서 완전 꼬라박았던 때요.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못했잖아요. 뭐, 후반기엔 귀신같이 잘하긴 했지만.”

아, 아아. 그때. 그랬지.

임성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침 카메라가 페어리즈 더그아웃을 비췄고, 벤치 구석에 무표정하게 앉은 김희도가 보였다.

“심리적인 변화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감독, 코치님이나 선배들한테 한 소리 들었다든가…… 아니지, 김희도가 남에게 욕을 들었다고 저럴 애가 아닌데. 그냥 단순한 슬럼픈가?”

조예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금세 관심을 끊고 밥 먹는데 정신이 팔렸다. 하지만 임성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흐음.”

오랜 훈련으로 단단해진 손가락이 식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심리적인 변화, 심리적인…….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설마, 그날 일 때문이겠어? 딱히 싸운 것도 아니고, 김희도가 얼마나 멘탈이 센데.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툭 튀어나온 못처럼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예준아. 나 서울 가야겠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고, 다음엔 꼭 1군에서 보자.”

덜컹.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지금 갑자기요? 이따 매니저님이 데려다주신다면서요.”

“미안. 가서 연락할게. 그리고 이미 인사했지만, 박재이 선배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줘. 아, 계속 나 주장이라고 부르면 희탁 선배한테 혼난다?”

“어어? 주장…… 성이 형. 형!”

임성은 자신을 부르는 조예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버스 터미널로 다급히 향했다.

가장 빠른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술렁대는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몇 번이나 숨을 뱉어 냈다.

임성이 서울에 도착했을 땐, 밤 11시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다.

“택시! 잠실 파크 아파트로 가 주세요.”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도로를 꽉 메운 택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숙소 근처에 내려서 뛰기 시작했다.

헉, 허억. 유난히 숨이 거친 이유는 호흡을 제대로 하지 않고 무작정 달린 탓이었다. 그만큼 조급하단 뜻이었다.

숙소 현관 앞에 도착한 임성은 다급히 도어록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혔다.

쾅!

“김희도! 있어?”

컴컴한 방 안엔 싸늘한 침묵만 감돌았다.

어딜 갔지, 훈련장에 있나? 사람의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을 보다가 돌아선 순간,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검은 인영이 보였다.

“김희도……?”

입을 굳게 다문, 싸늘한 얼굴로 걸어오던 남자, 김희도가 임성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일 정도로 찰나의 순간, 김희도가 순식간에 눈앞에 서 있었다.

마침 복도에 조명이 켜지며 그의 얼굴을 고요하게 드러냈다.

“생각은 다 했어요?”

“너 무슨 일……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생각을 어떻게 했는데요? 나한테 말하러 온 거예요? 해 봐요. 아니, 그냥 하지 마. 나도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으니까.”

목소리는 고요한데,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사나운 표정과 다르게 불빛 아래에 드러난 얼굴은 무척 수척했다. 여전히 공들여 그린 듯 화려한 얼굴이지만, 볼을 발갛게 물들이던 생기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인마. 얼굴이 왜 이렇게 거칠어, 못 잤어?”

“하, 며칠 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겁니까?”

“어디 아프냐? 아니면 피로 누적이야?”

“지금 그게 중요…… 후, 감기 같은 거 아니에요.”

그는 딱딱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면 뭔데, 설마 나 때문이야?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순간 그를 둘러싼 흉포한 기운이 누그러들었다. 김희도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턱을 살짝 틀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덕분에 그의 옆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아, 위태로워 보인다. 며칠 사이 살이 내린 남자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이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보드랍던 피부가 까칠했다.

“선배 때문…… 아니에요. 선배 때문 아니니까…….”

저런 표정으로 ‘선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 봤자 누가 믿을까.

그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자 김희도가 무의식중에 한 발짝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임성이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나랑 상관없어?”

“선배만큼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선배가 얼마나 노력하고, 잘하는지 아니까 곧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내가…….”

“…….”

“누구보다 선배를 잘 안다고 생각했고, 알고 싶은데. 모른다는 말을 들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절박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대답해 줘요.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김희도의 얼굴을 다시금 감쌌다. 목소리는 담담한데, 왜 꼭 울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선배랑 헤어질 생각 없어요. 절대.”

“……어?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

“못 헤어진다고.”

목소리 한번 살벌하네. 임성은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머릿속은 아직 복잡하지만, 지금 꼭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 좀, 뭐랄까…… 나 혼자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초조했던 것 같다. 너는 잘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는데, 나는 전혀 그러지 못하잖아. 프로에 와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니, 내게 실망하진 않았을까 걱정도 되고. 이래저래 좀 복잡했어. 이게 다…….”

“선배.”

고저 없는 목소리가 임성의 말을 끊었다. 김희도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손목을 옭아매듯 움켜잡고서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다르게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한 얼굴이 보였다.

“선배가 없던 사흘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슈퍼 루키? 대형 신인? 신인왕?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인데요. 선배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난 퇴근길 인터뷰에서 ‘임성 선배가 무섭다.’라고 말했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고작 나흘 남짓 동안 상한 얼굴과 희미하게 떨리는 손끝이 그의 감정을 대신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늘 당당하던 김희도답지 않게.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어.”

단순히 저 자신이 답답해서 던진 말에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항상 선배가 하는 말은 내게 절대적이었어요. 그러니까 나 밀어내지 마세요. 알잖아요. 선배는…….”

대체 내가 뭐라고.

“내 전부예요.”

속삭이듯 말한 김희도가 눈을 감았다.

“혹시 내가 소리 내서 말했냐?”

“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면 말해 주세요. 지금도 불안해 죽을 것 같으니까.”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그냥. 뭐든지 다요.”

얼마나 날 좋아하는 거야. 대체 널 어쩌면 좋냐. 임성은 숨을 낮게 내쉬며 그의 입술을 쓸었다. 도톰하고 매끈하던 입술이 한여름 나무껍질처럼 메말랐다.

“선배가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어쩌면 벌써 미쳤는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나도 모르겠어요.”

김희도가 입을 열 때마다 그의 입술을 누른 손가락이 덩달아 움직이며 손끝에 혀가 닿았다. 임성이 움찔하자 김희도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사뿐 올라가며 그 아래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또렷한 시선이 얼굴 곳곳을 핥듯이 응시했다.

“야…….”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손가락이 삼켜졌다. 뜨겁고 축축한 느낌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여의찮았다. 처음엔 손끝, 그다음엔 한 마디, 마지막으로 손가락 전체를 감쌌다. 그는 혀끝으로 임성의 손톱을 핥다가 손가락을 깊게 빨았다.

차마 볼 수 없어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 특히 눈두덩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달싹이는 숨을 알아챈 김희도가 손가락을 뱉어 내고 임성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받쳤다.

“키스해도 돼요? 이번엔 입술만 붙였다 떼진 않을 거예요.”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임성은 그의 아랫입술을 핥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음.”

입술을 가르고 다급히 들어온 혀가 혀뿌리를 진득하게 휘감았다. 거칠게 엮이는 호흡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임성은 김희도의 옷이 주름질 정도로 꽉 움켜잡고 숨을 뱉어 냈다.

“희도야. 내일…….”

하지 못한 말이 김희도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잡아먹을 것처럼 거칠게 겹쳐지는 입술과 다르게 입 속을 헤집는 혀는 다정하고 집요했다.

“얌전히 기다렸잖아요. 상 주세요.”

“후, 으.”

김희도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임성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숨을 빠르게 뱉어 내며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크게 들썩이는 등을 커다란 손이 위로하듯 쓸었다.

“김희도.”

“네, 선배. 말해요.”

귓가에 속삭이듯 내려앉는 목소리는 짙고 달큼했다.

“안타 쳐. 안타도 치고 홈런도 쳐라.”

“……이 와중에 안타 치라는 말이 나와요?”

김희도가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쪽도 중요하다고.

“나 오늘 콜업됐단 말이야. 너 내일도 죽 쓰면 바로 2군행일걸. 그러면 우리 다시 갈리는 거 알지?”

“그건 안 되죠.”

“그렇지?”

“하지만 그 말을 지금 하는 것도 안 돼요.”

음, 키스하면서 할 말은 아니긴 했어. 그제야 좀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듯 쓰다듬었다. 김희도는 아랫입술을 뚱하게 내밀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

“미안한 거 알면 앞으론 그러지 마요. 폰은 꺼져 있지, 숙소에도 안 돌아와, 본가에도 없어. 그런 말 하고 다음 날 이천에 갔다는데 내가 어땠을 것 같아요.”

“너 우리 집에 찾아왔었냐?”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물어보자 김희도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입술을 삐죽이는 걸 보니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안 찾아갔어요. 그냥 선배네 집 주변을 산책했을 뿐이지.”

그놈의 산책 레퍼토리는 어째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냐.

아무리 자신이 눈치가 없다 해도 지금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알겠다. 아무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쳐다보자 김희도가 숨을 탁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걱정되고,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는데.”

임성은 쓰게 웃으며 그늘이 거멓게 내려온 눈 밑을 쓸었다. 얼굴 살이 내린 걸 보니 역시 속상했다.

“진짜 나 보기 싫어서 이천 간 거예요? 코치 말로는 선배가 자처했다던데.”

“아, 내가 말씀드렸어. 1군에선 좀처럼 등판 기회가 없으니까 퓨처스에서라도 뛰고 싶어서. 근데, 마침 박재이 선수가 이천에 오셨다잖냐. 김성철 감독님이 겸사겸사 배려해 주신 거지.”

“박재이?”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김희도의 목소리 끝이 날카로웠다.

“어. 박재이 선배님.”

“유니콘즈 영결이 거긴 왜 갔대요?”

분명 토요일에 온다고 들었는데. 뒷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김성철 감독님 중학교 후배래. 박재이 선수에게 이것저것 도움받았어. 매일 동영상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까 역시 다르더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도 알려주시고. 은퇴한 지 오래되셨는데도 구속 그대로더라.”

박재이 앞에서 체인지업을 선보이고 조언을 받은 것과 경기를 할 때의 마음가짐 등등 이천에서 있던 일을 얘기했다.

“박재이 조언 듣는다고 날 까맣게 잊으셨다? 나는 야구도 모자라 박재이에게도 밀린 거네요?”

“뭔 소리야. 그것보다 너 밥은 먹었냐?”

“……네.”

고작 사흘 사이에 이렇게 핼쑥해진 걸 보면 챙겨 먹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예상대로 한 박자 느린 대답이 이어졌다.

“나중에 영양사님에게 물어볼 거니까 똑바로 대답해라. 지금 솔직히 말하면 정상 참작 해 줄게.”

“바나나 우유 마셨어요.”

“바나나 우유? 설마, 그것만 먹은 건 아니지?”

임성이 그의 어깨를 꽉 쥐며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금세 상황이 역전됐다.

“뭐, 가끔 바나나나 토마토 같은 것도 먹고. 솔직하게 말하면 정상 참작 해 준다면서요.”

저도 잘못한 걸 아는지 시선을 피하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하지만 귀여운 척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사흘, 아니지. 김희도와 헤어진 게 일요일 저녁이었으니까 그때부터 안 챙겨 먹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애가 비실비실하더라니.

“인마. 운동한다는 놈이 어디서 바나나 토마토 같은 걸로 끼니를 때워? 몸 망칠 일 있냐?”

오랜만에 ‘주장 모드’로 돌아간 임성이 엄격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누가 나 내버려 두래요?”

아이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헛숨이 났다.

김희도는 그에 그치지 않고 되레 제 어깨를 짚은 손을 붙들고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척하던 얼굴에 기묘한 열기가 번져 있었다.

“‘없으면 말고.’ 따위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말했잖아. 이제 좀 알겠어요?”

지금 얼굴 위로 앳된 모습의 김희도가 겹쳐졌다. 어쩌면 김희도의 마음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떠냐고?

“나도…….”

한참이나 대답을 못 하다가 머뭇머뭇 입을 떼는 순간, 어디선가 벨 소리가 울렸다. 휴대폰보다 조금 더 투박하고 느린 숙소 전화였다.

이쪽으로 오는 전화는 대부분 구단 관계자들이라 김희도에게서 손을 빼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발소리가 자박자박 울렸다.

“임성입니다. 네, 방금 도착했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았다. 자칫했다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김희도가 정승처럼 서 있었다.

“누구예요?”

“김세현 코치님. 잠깐 코치님께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나도 같이 갈래요.”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냥 쉬어. 뭐라도 좀 챙겨 먹고.”

“선배랑 같이 있는 게 쉬는 거예요. 어서 가요.”

김희도는 임성의 옆구리와 팔 사이로 제 손을 끼우고선 바짝 붙어 섰다. 차마 떼어 내지 못한 임성이 그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 * *

원정 경기 동안 단 하나의 안타조차 때리지 못하며 시즌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던 김희도는 그간의 부진을 만회하듯 무서운 기세로 몰아쳤다.

홈 3연전 동안 멀티 히트는 물론, 홈런까지 야무지게 뽑았다.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던 득점 생산력 역시 가파르게 상승했다. 슈퍼 루키의 부활에 구단과 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누가 뭐래도 김희도는 무려 17년 만의 신인왕 후보님이 아닌가.

“오늘 사람들 봤냐? 내년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교복됐더라. 미리 사인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최희탁이 배트를 점검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말처럼 직관 팬 중 김희도의 등 번호인 96번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민트색 수건을 열정적으로 흔들며 김희도의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만원 관중일 때는 구장 전체가 울릴 정도로 응원 소리가 컸다.

「오! 페어리즈의 김희도. 안타 안타 김희도. 오, 오오오오♬♪ 페어리즈 김희도♬」

“응원가 들으면 타자 하고 싶지 않냐? 오직 날 위한 노래라고 생각하면 엄청 흥분되잖아.”

구장을 울리는 응원가를 흥얼거리며 권재영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다음에도 투수하려고요.”

“인마.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이 요망한 자식.”

권재영은 배신자라고 말하며 임성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위치상 왼팔이 더 편할 텐데도 굳이 오른손을 사용하는 것은 본능이었다.

“권재영. 뭐하냐?”

“네. 지금 갑니다.”

투수 코치가 권재영에게 슬슬 몸을 풀라고 말했고, 그는 임성의 머리를 흐트러트리곤 불펜으로 향했다.

페어리즈는 그날 경기에 아쉬운 역전패를 했다. 1점 차이로 리드 중 마무리로 등판해 역전 투런을 맞은 권재영이 고개를 떨구고 시무룩하게 걸어왔다.

홈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원정을 떠날 차례였다. 창원과 대전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빡센 일정이었다.

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임에도 구장 밖에는 선수들을 보기 위한 팬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김희도와 함께 나가자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함성이 울렸다.

“김희도 선수. 사인 좀 해 주세요! 여기요!”

페어리즈 유니폼을 입은 중년 남성이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딸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캐리어는 내가 맡고 있을 테니까 사인하고 와.”

“내가 왜요, 귀찮은…… 알겠어요.”

심드렁한 얼굴로 무심히 지나가던 김희도를 멈춘 건 임성이었다. 그는 당장 안 하고 뭐 하냐는 임성의 눈빛을 받고 부녀 쪽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말했듯, 팬들이 없는 야구는 생산성 없는 공놀이일 뿐이었다. 때문에 팬서비스는 필수였다.

특히 어린 팬들에겐 아주 오랫동안 남을 기억이기도 했다. 김희도를 팬서비스 구린 선수로 만들 순 없었다.

“종이요.”

보통의 야구 선수들은 TV나 멀리서 볼 때보다 확실히 체격이 크기 때문에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게다가 김희도는 표정까지 차가운 편이라 더욱 위압적일 것이다. 아빠 팬은 살짝 멈칫하더니 아이의 등이 보이게 내려놨다.

“여기에 사인해 주시면 되고, 펜은 여기 있습니다.”

김희도는 무표정으로 펜 뚜껑을 열더니 아이가 입은 유니폼에 사인을 했다. 정작 사인을 받은 딸은 딱히 야구에 흥미가 없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페어리즈 마스코트 인형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김희도를 기다리던 임성은 고개를 돌린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귀엽네. 집에 있는 여동생들이 생각나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저기, 사진 한 장만…….”

그사이 아버지는 쭈뼛쭈뼛 말을 꺼냈다가 김희도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거 되게 차갑네. 웬만하면 좀 웃어 주지. 속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아빠. 나 이 오빠 말고 저 오빠랑 찍을래.”

그때 딸이 임성을 보며 말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임성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 하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땋은 딸이 앙증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생겼어.”

거침없는 대답이 꽤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잘 생겼다니. 얼굴은 김희도가 훨씬 더 잘생겼지 않나.

“어, 저, 그러니까…….”

“임성입니다. 1군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실 겁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이고, 네네. 제가 더 잘 부탁드리죠. 사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임성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 아빠에게 웃으며 제 소개를 했다. 살짝 무뚝뚝한 얼굴과 다르게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겨울 살얼음판처럼 썰렁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임성은 아이 옆에 서서 무릎을 굽히고 키를 맞췄다. 아이 아버지가 휴대폰을 꺼내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멀뚱히 보고만 있던 김희도가 끼어들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말릴 틈도 없었다. 결국, 셋이 찍혔다.

“너 사진 찍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감사합니다. 응원할게요. 임성 선수! 크게 소리치는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하며 구단 버스를 향해 걸었다.

“그렇다고 선배랑 단둘이 찍게 놔둘 순 없고요.”

“초등학생도 안 된 애한테 질투했냐?”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임성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민 불만 어린 표정의 김희도를 볼 수 있었다.

“질투하면 안 돼요? 어린 애든 뭐든 전 선배를 나눌 생각 없어요. 웃기면 웃어도 돼요.”

“어? ……어, 어. 난 이쪽 버스다. 이따 숙소에서 보자.”

임성은 입을 뻐끔대다가 버스에 후다닥 올라탔다. 그리고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와, 거기서 직구를 꽂아 버리네.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랐어. 연신 손부채질을 해 봐도 얼굴에 번진 열기는 식지 않았다.

“임성. 이 형님이 진짜 맛있는 국밥집 데려가 줄게. 기대해도 좋다.”

권재영이 아이스박스 바로 뒷좌석에 앉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네. 완전 기대 중입니다.”

그를 필두로 이번 원정에 이름을 올린 투수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투수 조장까지 버스에 탔다. 고참들 대부분은 앞 좌석에 몰렸고, 연차가 낮은 선수들은 뒤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뒤에 앉은 임성이 휴대폰과 이어폰을 꺼내며 출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버스 앞쪽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 있나? 고개를 쭉 빼고 앞을 보던 임성은 생각지도 못한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버스 타러 왔어요.”

당황한 임성과 달리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 투수 버슨데?”

보통 원정을 떠날 땐 감독, 코칭 스태프를 포함한 구단 관계자들, 내외야수, 투수와 포수로 나뉘어 탔다. 딱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같은 포지션끼리 타는 것이 할 말도 많고 여러모로 편했으니까.

“참다 참다가 왔어요.”

고등학생 때 그 짧은 원정 거리도 힘들어하던 김희도가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하긴 했다. 그동안 원정 버스를 탈 때마다 엄청 힘들었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투수 선배들이…….

“그냥 타. 쟤가 너 졸졸 쫓아다니는 게 하루 이틀이냐?”

“꼭 같은 포지션끼리 앉아야 하는 건 아냐.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야, 김희도. 참고로 아이스박스 물 마시려면 나한테 돈 내야 한다. 학연(學緣) 할인 500원 해 줄게.”

투수 조장 박태영에 이어 권재영이 농담으로 지원 사격했다. 물론, 김희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맨 뒷좌석을 가리켰다.

“선배. 우리 여기 앉아요.”

얼떨결에 그와 나란히 앉게 된 임성이 뺨을 긁적였다.

뭐, 이대로도 상관없으려나.

요란하게 떠들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버스 안은 썰렁할 정도로 조용했다. 휴대폰을 하는 사람이 절반, 이어폰을 끼고 음악 듣는 사람이 그의 반, 나머지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자는 중이었다.

상대팀 경기 영상을 보던 임성은 문득 손등을 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김희도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잘못 스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영상에 집중하는데, 다시금 뭔가가 손에 닿았다. 아무래도 잘못 스친 건 아닌 것 같지?

임성은 모른 척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쪽을 보고 있는 김희도와 눈이 마주쳤다.

뭐 하냐.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질문을 하자 김희도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뭐긴, 손 달라고요. 그 역시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참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깍지를 꼈다.

김희도는 가끔, 아니 늘 대담했다.

“야, 이건 좀…….”

“아무도 안 봐요. 뒷좌석이잖아요”

혹시 이러려고 뒷좌석에 앉았냐? 눈으로 물었지만, 그는 모른 척 눈꼬리를 접고 순하게 웃을 뿐이었다.

페어리즈의 원정 숙소는 구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텔이었다. 페어리즈 로고로 범벅된 버스가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밤이라 바로 방 배정이 시작됐다.

야수는 야수끼리 투수는 투수끼리, 연차가 높은 선배와 신인이 같은 방으로 묶었다. 구단 생활 및 프로 야구 생태에 관해 이것저것 배우라는 배려 차원이었다. 두루두루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도 있었고.

임성은 퓨처스에 이어 이번에도 권재영과 룸메이트가 됐다.

임성이 캐리어를 끌고 방에 도착했을 때 권재영은 다른 방에 놀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짐도 안 갖다 놓고 가셨네. 임성은 현관 쪽 침대 근처에 짐을 풀고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좁은 버스에 몸을 구기고 왔더니 몸이 뻐근했다.

띠띠띠. 띠리릭.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샤워하는 중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재영이 형이 돌아왔나 보다. 오늘도 야식 시키려나. 진짜 맛있다던 국밥집에 가자고 할까? 희도도 데려가고 싶은데, 냄새가 많이 나려나.

“재영이 형. 야식 먹으러…….”

수건을 목에 걸고 나오던 임성은 방 안에 우두커니 선 하얗고 예쁜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그 예쁜 남자는 금세 임성의 앞까지 다가와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그의 손등 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씻었어요?”

“응. 방금.”

“최대한 빨리 왔는데 놓쳤네. 아깝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너 올 줄 알았으면 그냥 있을 걸 그랬다.”

임성이 픽 웃으며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얌전히 머리를 맡기고 있다가 임성의 손목을 잡고 손끝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그리곤 슬쩍 웃으며 임성의 목에 걸린 수건을 잡아당겨 코를 묻었다.

“이걸로 참을게요.”

살짝 뺨이 상기된 김희도가 말했다.

“너 내일도 선발 출장이지? 올해 신인 중에서 1군에 남아 있는 건 너 혼자 아냐?”

“그래요?”

김희도는 마치 남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무심한 반응을 보였다.

“그거 엄청 대단한 거야.”

“선배가 잘하라고 했으니까요.”

“그래, 그래. 앞으로도 많이 쳐 줘. 그것보다 슬슬 재영이 형 올 것 같은데…….”

임성은 문을 힐끔 보며 대화를 마무리를 알렸다.

“내일 시간 맞으면 같이 훈련하자. 난 5시쯤에 갈 것 같아.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고.”

“좋아요.”

“…….”

이쯤이면 방을 나갈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 널브러진 임성의 가방을 들어 창가 쪽 침대로 옮기기까지 했다.

“어? 거기 재영이 형 자리야. 창가 침대가 형 지정석이거든.”

“이제부턴 선배 자리예요. 이쪽 더 좋아하잖아요.”

창문 근처를 더 선호하는 건 사실이지만, 하늘 같은 선배 자리를 뺏을 순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말도 없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김희도의 손에서 캐리어를 뺏으려 했으나 그는 어깨를 살짝 틀며 피했다. 임성이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넘어지려고 하자 김희도가 캐리어를 바닥에 내던지고선 허리를 감쌌다.

훅 가까워진 거리에 임성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물렸고, 김희도는 그런 임성의 눈두덩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보드라운 입술이 눌리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하여튼 사람 불안하게 한다니까.”

“갑자기 몸을 비트니까 그렇지. 아무튼, 마음대로 자리 바꾸면 안 돼.”

“자리 주인이 허락해도요?”

“재영이 형이 그러래?”

“침대 주인이 권재영이라고 누가 그래요?”

“야.”

임성은 다급히 김희도의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살펴봤다. 아무리 권재영의 성격이 좋다 한들 까마득한 후배가 이름을 막 부르는 것을 좋게 보진 않을 것이다. 살갑게 지내라는 말까진 못 해도 눈 밖에 나지 않았으면 했다.

“헉.”

그러다가 축축한 것이 손바닥에 닿는 걸 느끼고 다급히 손을 떼어 냈다.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힌 김희도가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붉은 혀가 더 붉은 입술을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권재영이랑 방 바꿨어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여기가 선배 자리예요.”

“재영이 형은 아무 말도 안 하던데. 언제 바꿨어?”

임성은 그의 혀끝이 닿았던 손을 말아 쥐며 물었다.

“선배 화장실 갔을 때요. 커피 쿠폰 준다니까 바로 바꿔 주더라고요.”

헐. 포크볼 알려 준다더니, 고작 커피 쿠폰에 홀랑 방을 바꿔? 권재영에게 진한 배신감을 느꼈다.

“선배가 다른 놈이랑 자는 꼴을 어떻게 더 봅니까? 고등학교 2년간 참은 것도 기적이에요.”

“야, 너는 말을 해도 꼭…….”

다른 놈이랑 같이 자다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뭔가 필요 이상으로 친밀해 보이잖아.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며 침대에 올라갔다. 새로운 침대 주인이 괜찮다고 하니까 상관없겠지.

임성은 호텔 특유의 높은 베개를 다리 쪽으로 옮기고 대신 수건을 둥글게 감아 뒷 목을 받쳤다. 그러자 뒤통수와 어깨 높이가 같아졌다. 권재영에게 배운 것으로 확실히 어깨의 부담이 덜했다.

“씻고 올게요. 자지 말고 기다려요.”

“어.”

아무리 권재영이 허물없이 대해 준대도 결국 직속 선배라 은근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김희도와 방을 쓰는 건 확실히 편했다.

게다가 그렇게 안 생겨선 은근히 잘 챙겨 준단 말이야.

임성은 휴대폰 충전기를 꽂으며 포털 사이트를 켰다. 축구, 배구, 야구 등 주요 장면이 스포츠 메인에 걸려 있었다. 개중 김희도의 이름이 걸린 기사를 눌렀다.

『[다이나믹 KBO! 김인혁 기자. [email protected]] 김희도 “흔들림을 딛고 일어선 슈퍼 루키! 다시 한번 보여 줄 수 있을까?”

이솔 페어리즈 김희도(18·사진)

전국 최대어라는 말을 입증하듯 김희도는 개막 첫 경기부터 멀티 히트를 기록하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력을 쏟아 낸 탓일까. 한올 돌핀스와의 경기에서 단 하나의 안타도 치지 못하며 그대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뀐 듯 달라진 모습이었다.

부상 의혹까지 불거지는 심각한 플레이에 구단은 물론, 팬들도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어진 바이킹스와의 3연전에서 멀티 히트를 때려 내며 4할로 복귀했다. 이는 유니콘즈 김이설, 레전드스 박성하의 뒤를 잇는 높은 타율이다.

페어리즈는 현재 IN 스파이스, 닉스 엘리펀츠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기사와 함께 돌핀스의 경기 중 찍힌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더그아웃에 무표정하게 앉은 그는 사진상으로도 수척해진 게 보였다.

임성은 욕실 문을 힐끔 쳐다보고, 자신이 없었을 때의 기사를 찾았다.

[기사] 이솔 페어리즈 김희도. 지독한 부진.

[기사] 페어리즈 김희도. 4경기 연속 무안타 대 굴욕. 초심자의 행운이었나!

[기사] “침묵하는 김희도의 방망이” 드러난 본 실력?

[기사] 유망주 무덤 페어리즈?! 결국 김희도도 피해 가지 못했다.

어떻게든 조회 수를 올려 보려는 자극적인 제목이 주를 이뤘다. 이제 스무 살짜리에게 굴욕이니 뭐니. 기사를 발로 쓰나.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화나요’를 마구 눌렀다. 다다다다, 분노의 손가락질을 하는 도중 액정 위로 노란 말풍선 하나가 떴다.

-이치연: 야

-이치연: 이번에 합류했다면서???

-이치연: 방출 안 당하고 잘도 붙어 있네ㅋㅋㅋㅋㅋ

잊을만하면 또 나타나는 이치연이었다.

-나: 더 잘 붙어 있으려고.

-이치연: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타자로 전향하지?

-이치연: 넌 그게 어울려

-이치연: 김희도인지 뭔지 하는 나부랭이보다 네가 더 잘 칠 거다.

이건 욕이냐, 칭찬이냐?

투수로 전향한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됐음에도 이치연은 아직도 타자 타령이었다. 이쯤 되니 왜 이렇게 타자에 집착하는지 순수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게 타자가 좋으면 본인이 하면 되잖아.

-나: 넌 왜 그렇게 타자에

“이놈의 개소리는 여전하네요. 멍청이인가?”

넌 왜 그렇게 타자에 집착하냐. 문장을 다 치기도 전에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임성의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문자를 쓰던 자세로 엉거주춤 뒤돌아보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김희도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임성의 시선이 그의 뺨을 타고 내려와 턱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물방울을 주시했다.

“이치연 팀 어디예요? 보직이 뭐였더라.”

“유니콘즈. 저번에 만났잖아. 안타 때렸다고 자랑까지 했으면서.”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임성이 대답했다. 지난번에 맞대결까지 했는데,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다.

“아, 그 등신 새끼?”

등신이라니. 입이 그리 험한 애가 아닌데, 이치연이 어지간히 싫나 보네.

“하도 존재감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요. 먼지보다 못한 새끼잖아요.”

빙그레 웃으며 쌍욕을 내뱉은 김희도는 이치연과의 대화창을 닫았다. 휴대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임성이 덮고 있는 이불을 들췄다. 그리곤 임성에게 상체를 붙여 등과 어깨를 껴안고 귀를 깨물었다. 일련의 과정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저지할 틈이 없었다.

징- 징. 몇 번이고 말풍선을 띄우던 휴대폰은 이제 본격적으로 울려 대기 시작했다.

“희도야, 전화 왔어.”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허리를 감싼 손과 밀착한 몸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뒷 목에서 뭉개지는 입술의 감촉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닫으며 어깨를 안쪽으로 굽혔다.

“아무한테도 안 줘요. 아니, 못 줘.”

“내가 물건도 아니고, 뭘 주냐?”

“날 끌어들였으면,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너 요새 은근히 말 깐다?”

“……요. 했어야지요.”

요. 라는 말을 뱉을 땐 입술이 둥글게 오므라들었다. 쪽. 그는 뒷 목 뼈 부분에 소리 나게 뽀뽀를 했다. 보드라운 입술이 살갗을 깊게 눌렀다가 뭉근하게 비볐다.

“…….”

“선배. 숨 쉬어요.”

김희도의 말이 도화선이 된 듯 임성이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탁 터트렸다. 어쩐지 어지럽더라니 숨을 참고 있었구나.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있나.

한번 의식하고 났더니 김희도와 한방에 있는 지금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아니, 불편한 것보다는 긴장한 쪽에 더 가까웠지만.

임성. 내일 경기 있다. 쟤 내일 선발 출전이야. 참아야 한다. 너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같이 휩쓸리면 되겠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임성은 속으로 애국가를 외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쪽, 쪽. 가볍게 이어지던 입맞춤은 어느새 질척이고 농밀하게 바뀌었다. 축축한 혀가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쓸고 귓바퀴를 깨물었다. 꼬리뼈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이 머리끝까지 울렸다.

참자, 참아야 한다.

“선배, 자요? ……진짜로?”

김희도는 잇자국이 난 살갗을 쓸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마치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지 보겠다는 듯이 임성의 약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럼, 키스해야지.”

필사적으로 앞을 보고 있는 턱이 들리더니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턱을 단단하게 감싼 손 중 검지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입 안으로 들어왔다. 혀끝을 살살 건드리다가 좀 더 깊숙이 넣어 혀 뒤쪽 여린 살점을 자극했다. 타인의 손길이 닿은 적 없던 곳이 매만져지는 느낌이 이상했다. 과도하게 젖혀진 고개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저지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불 밖으로 뻗은 발등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뻣뻣해졌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자극이 허벅지를 지나고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욱신거림이 번졌다.

더는 참지 못하고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을 빤히 보는 김희도와 시선이 마주쳤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왠지 얄궂었다.

“선배.”

사람의 목소리는 맛을 느낄 수 없을 텐데, 왜 이리 달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감정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자도 얼마 못 자.”

“그럼 키스만 할게요. 그것도 싫어요?”

싫을 리가 있겠냐. 속으로 중얼거렸다.

쪽, 윗입술이 빨리고, 뒤이어 입 안쪽을 혀로 쓸었다. 가만히 있는 혀를 깊게 얽으며 그 아래 고인 타액을 훑었다.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지고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임성은 다시 눈을 감으며 속으로 애국가를 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해, 말아? 어떻게 하지. 임성이 갈등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김희도가 그의 귀를 삼키고 귓바퀴를 느리게 핥았다. 계속되는 자극에 발가락이 점점 안으로 곱아들었다.

이쯤 되자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 눈을 부릅떴다.

“후회하지 마라? 난 분명히 경고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허락을 받은 김희도가 팔꿈치로 침대를 누르며 임성의 몸 위에 올라탔다. 양쪽 무릎으로 임성의 양옆을 디디고 섰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지며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방 안에 빛이라곤 커튼 틈으로 흘러들어 온 달빛밖에 없었다. 식별이 겨우 가능한 정도의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임성은 타액을 꿀꺽 삼키며 손을 뻗어 김희도의 턱과 뺨을 감쌌다. 당기는 만큼 순순히 내려오는 입술을 핥고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뒤엉키는 혀가 달고 뜨거웠다.

“불 켜도 돼요? 지금 선배 얼굴 보고 싶은데.”

“켜지 마. 켜지 말고 그냥 안아 줘.”

이렇게. 임성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창피하니까 얼굴 보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받아들이는 쪽은 달랐던 것 같다.

하, 짧은 숨소리가 들리더니 침대의 얼굴 양옆 부근이 푹 꺼졌다. 김희도가 한껏 체중을 실은 것이었다.

곧 커다란 육체가 임성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임성도 남성 평균을 훨씬 웃도는, 그리 작은 체격이 아니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아주 조금 더 컸다. 곧 이마와 눈가, 코끝, 입술에 차례대로 입술이 닿았다.

“너 이제 그만 커.”

“이제는 선배 대신 우산 들어도 돼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웬 우산 얘기야.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무는 감각에 어깨를 움츠리던 임성이 어느 순간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아직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어?”

“선배에 관한 건 모두 다. 하나도 빠짐없이.”

“있잖아, 희도야. 내가 왜 그렇게 초조했는지 알아? 갑자기 이천에 간다고 한 것도…….”

“……그게 지금 분위기에서 할 말인가? 저 진짜 진지하게 야구에 질투 나거든요.”

미묘하게 남아 있던 웃음이 모두 사라지고 거친 숨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목을 파고들었다. 김희도는 임성의 살갗을 헤집고 빨고, 또 그 위를 짓씹으며 자신의 흔적을 끈질기게 남겼다. 이미 쾌감을 겪었던 육체는 작은 자극에도 반응했다.

“후으.”

임성은 목을 끌어안은 손에 더 강하게 힘을 줬다.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3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임성이 손을 뒤로 돌린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누가 시키거나 벌 받는 건 아니고, 단순히 편한 자세를 취한 것뿐이었다. 중고등학교 땐 지금 자세가 기본이라 이젠 이쪽이 더 편했다.

“상황이 그렇게 됐다. 어때, 할 수 있겠냐?”

“물론입니다. 모두 쏟아붓겠습니다.”

“모두 쏟아붓진 말고. 다음 경기 할 여력은 남겨 놔야지.”

“네. 알겠습니다.”

아직 미필이지만, 군기가 바짝 들어간 대답에 코치가 피식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 보라며 손을 휙휙 내젓는 코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왔다.

좋았어. 소리 없이 주먹을 불끈 쥐다가 복도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냐?”

이미 예상했다는 말투였다.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남자가 몸을 바로 세웠다.

“방금 왔어요. 무슨 얘기 했어요?”

무슨 얘기 했냐고? 임성은 성큼성큼 걸어가 김희도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물론, 보기와 달리 꽤 무거워서 팔이 조금 당겼지만.

“나 유니콘즈 경기에 등판한다. 이틀 뒤 토요일.”

방금 전 코치로부터 등판 날짜를 확정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1군에 이름을 올렸던 것치곤 다소 늦은 등판이었다. 그마저도 기존 선발이 갑자기 내려가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기회. 하지만 마운드에 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기에 그저 감사하고 기뻤다.

상대할 팀은 하필, 또 유니콘즈였다. 일부터 타이밍을 맞춘 것도 아닌데, 이것도 인연이면 인연이랄지, 자꾸만 부딪혔다.

“그대로 다 날려 버리죠.”

김희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양쪽으로 예쁘게 벌어진 입꼬리와 다르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 * *

운동, 훈련, 삼시 세끼 밥, 운동. 요즘 임성의 하루 일과였다. 물론, 당연히 ‘김희도와 함께’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임성은 들뜨지 않으려 했다. 혹여 과도한 흥분으로 컨디션이 흐트러지지 않게 노력하며 최대한 평소처럼 일상을 이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등판일인 토요일이 다가왔다.

아침보다는 밤에 가까운 새벽, 번쩍 눈을 떴다. 까만 어둠이 점령한 방 안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컨디션이…….

하지만 몇 분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눈을 떴다. 벌써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지 심장이 두근거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달리기라도 해야지, 안 되겠어.

“선배.”

“나 때문에 깼어? 아직 4시밖에 안 됐다. 좀 더 자.”

최대한 조용히 일어난다고 일어났는데, 김희도를 깨웠나 보다. 임성은 자신을 따라 일어나는 남자를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다 잤어요.”

“진짜냐? 괜히 일찍 일어나서 컨디션 망치면 안 된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꽉 안아 주세요. 그러면 바로 홈런 칠걸요?”

말이나 못 하면. 새 둥지처럼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디 가요?”

“좀 뛰려고.”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갈래요.”

눈을 반쯤 감은 김희도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기어코 쫓아왔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운동장을 가볍게 달리고, 곧바로 웨이트실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각임에도 운동 중인 선배들이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양팔을 허벅지에 붙이고, 구십 도로 인사했다.

“선발이라고 너무 기합 들어간 거 아니냐? 인사 소리 엄청 크네.”

“티 났습니까? 진정이 안 됩니다.”

“이번 시즌 첫 등판이지?”

바벨을 든 박태영이 한껏 굽혔던 무릎을 펴며 물었다. 꽤 오래 운동했는지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김희도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네. 작년엔 불펜만 했습니다. 선발은 처음입니다.”

“엄청 떨리겠네. 그냥 우림이 미트만 보고 던지면 돼.”

“감사합니다. 선배님.”

임성은 큰 소리로 대답하고 한쪽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김희도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최소한의 인사를 한 뒤 임성의 뒤를 쫓아갔다.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고 밥을 먹은 뒤, 김희도와 캐치볼을 주고받았다. 보통 그날 선발은 신경이 예민할 때가 많아 라커룸에서 쉬는 게 일반적이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캐치볼을 하는 걸 본 최희탁이 적당히 하라고 했지만, 권재영은 오히려 “그냥 놔둬요. 지금은 뭐라도 해야 진정될걸.” 하고 임성의 마음을 대변했다.

온갖 요란을 떨 것 같던 김희도는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성의 곁을 지켰다.

경기 시작 전, 모든 선수가 그라운드로 나와 몸을 풀었다. 상대팀인 유니콘즈 선수들은 이미 도착해 러닝, 배팅 등 각자 루틴에 맞춰 훈련 중이었다. 임성은 그 속에서 이치연을 찾았으나, 불펜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기 선유고 후배. 오늘 선발이라며?”

“안녕하십니까! 김이설 선배님. 임성입니다.”

임성은 제 어깨를 두드리는 김이설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알지, 임성. 권재영이 네 얘기 많이 했거든. 오늘 살살 부탁한다. 특히, 나한테.”

“최선을 다해 헛스윙 유도하겠습니다.”

떨면서 각오를 내뱉었다. 제법 패기 있는 말을 들은 김이설이 눈을 깜빡이더니 와하하 소리 내 웃었다.

“학교 후배 덕 좀 보자니까. ……어, 너. 김희도 맞지? 네가 요새 그렇게 잘 친다며?”

김희도는 어느새 임성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김이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 곱지 않은 시선임에도 김이설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관심을 보였다. 평소 성격 좋기로 소문난 사람다운 행동이었다.

“스윙 엄청 부드럽던데, 비결이 뭐야? 난 커브 타이밍 맞추는 게 그렇게 힘들더라고.”

“잘.”

“잘?”

“치면 됩니다.”

잘 치면 됩니다. 성의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답에도 김이설은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우문현답이네. 그렇지, 타자가 잘 치면 되지. 희탁 선배. 얘네 완전 대박인데요? 한 명은 살살 해 달라니까 최선을 다해 헛스윙 유도한다지, 한 명은 잘 치면 된다지.”

“인마. 우리 애들한테 시비 걸지 마.”

“에이, 시비는 제가 걸렸거든요. 그리고 얘네 제 후배도 되는걸요?”

“맞다. 너도 선유고 출신이지?”

“넵. 대 선유고요. 아, 나도 슬슬 가야겠다. 이따 서로 잘하자.”

김이설은 배팅 중인 최희탁을 향해 크게 말하고선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고 멀어졌다.

그가 떠난 후, 김희도는 김이설의 손이 닿은 곳을 탁탁 털어 냈다. 임성의 어깨도 털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어깨를 가까이 붙이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아니요. 딱히.”

임성은 제 목을 감은 김희도를 쳐다보다가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경기 시작 10분 전, 관중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와 과자 등을 먹으며 경기를 기다렸다. 오늘 맞붙는 두 팀 다 인기 팀이라 일찌감치 매진이었다. 홈팀은 물론이고, 유니콘즈 유니폼을 입은 팬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경기 시작 직전, 감독을 중심으로 페어리즈 선수들이 둥그렇게 모였다. 감독은 별다른 조언 없이 그저 “릴렉스.”를 주문했다. 따로 통역을 통할 필요도 없었다.

[HR 유니콘즈 0 : 0 이솔 페어리즈]

1번부터 9번까지, 양 팀 타자 이름과 포지션이 떴다. 투수는 맨 마지막 순서였다.

P 임성.

휴우. 릴렉스. 릴렉스. 의연하게, 평소처럼 내 투구를 하면 돼.

숨을 최대한 깊게 들이마시며 양손을 비볐다. 좀 차가운가? 긴장한 탓에 차가운지 아닌지 가늠이 잘 안됐다.

“희도야. 이리 와 봐.”

배트를 정비하던 김희도가 임성의 부름을 받고 빠르게 뛰어와 앞에 섰다. 임성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역시 내 손이 차가웠던 게 맞았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비교군이 김희도라는 걸 깨닫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퓨처스 첫 등판 때도 이 생각 했지 않나?

더 어이없는 건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미칠듯한 긴장이 덜하다는 점이었다. 떨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은 확실히 사라졌다.

운동선수 중엔 자신만의 루틴이나 징크스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보통은 특정 행동 후 성적이 좋으면 다음번에도 쭉 이어 나가는 형식으로 그게 지속되면 루틴 자체에 집착하게 됐다. 임성은 그게 싫어서 일부러 루틴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김희도가 자신의 땀 냄새를 맡고 안심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몰랐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긴 했지만.

하하. 슬쩍 웃자 의문 어린 시선이 옆얼굴에 꽂혔다.

“네 손잡으니까 긴장 풀려.”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달리 대체할 표현이 없었다.

그 말에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배시시 웃었다. 길게 뻗은 눈매가 햇볕을 맞은 눈처럼 내려앉고 흰 뺨이 소복하게 솟았다. 치아는 드러나지 않고, 양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풋풋한 미소였다.

제 손을 부드럽게 빼낸 김희도가 깍지를 꼈다. 손바닥이 틈 없이 맞닿고 손가락이 마치 하나처럼 촘촘하게 얽혔다.

“이러니까 더 안정되죠?”

“어. 기 받아 간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가져가요. 다 줄게요.”

당장에라도 김희도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타이밍 좋게 애국가가 울렸고, 선수들은 일렬로 쭉 선 채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응시했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관중들이 박수를 치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다들 파이팅 하자. 성이 시즌 첫 승 챙겨 줘야지.”

하나, 둘. 페어리즈 파이팅!

글러브를 꽉 쥐며 걸어 나가던 임성은 제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김희도가 자신의 모자를 벗더니 임성의 것과 맞바꿔 썼다.

“선배는 선배 투구만 하면 돼요. 야구는 팀 경기잖아요. 설사 선배의 공이 맞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잡아 줄 거예요. 물론, 그 전에 내가 다 잡을 거지만.”

야구가 두 명이서 하는 게임이면 얼마나 좋아. 김희도가 중얼거리며 본인 수비 자리로 걸어갔다.

평소라면 웃고 넘겼을 위로가 지금은 깊게 와닿았다.

주먹으로 글러브 안을 툭툭 치며 마운드에 섰다. 봉긋하게 솟은 흙을 발끝으로 고르고 숨을 깊게 내쉬며 자세를 잡았다. 정면에는 페어리즈의 주전 포수인 송우림이 미트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후, 하아.

긴장감, 흥분과 떨림. 그리고 조금의 불안까지 즐기자고 다짐했다.

임성은 포수를 전적으로 믿으며 공을 던졌다. 파앙! 손에서 빠르게 날아간 공이 배트를 스치며 포수 미트에 꽂혔다. 묵직한 스트라이크였다.

“스트라이크!”

지금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아 곧바로 다음 공을 던졌다. 유니콘즈 타자의 배트가 다시 한번 시원하게 헛돌았다.

투 스트라이크 노 볼.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였다.

야구는 단순히 던지고 치는 것 외에도 치열한 수 싸움이 오간다. 타자의 특성을 파악하고, 언제 어느 때 어떤 공을 넣어 카운트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볼 배합이나 작전이 바뀌었다. 머리와 육체가 모두 필요한 스포츠였다.

송우림이 사인을 냈다. 카운트가 유리하니 하나쯤은 빼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변화구에 속아 배트를 휘두르기라도 하면 바로 아웃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임성이 글러브 안에 공을 숨기며 다음에 변화구 그립을 쥐었다. 허리까지 올렸던 다리를 다시 앞으로 뻗어 지지대로 삼으며 팔을 최대한 앞으로 내밀었다.

타악!

반동으로 숙인 고개를 얼른 들어 상황을 살폈다. 1루수가 달려오는 유니콘즈 타자를 태그하며 아웃 카운트 하나가 올라갔다.

잡았다! 돌려세웠어. 임성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응원과 환호를 듣는 순간 온몸의 전율이 흘렀다.

그 후 두 명의 타자까지 잡고 공수 교대를 위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와중 최희탁이 글러브 낀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긴장 안 하고 잘했네. 공 챙겨 놓을까?”

“첫 아웃 카운트 공은 작년에 받았습니다. ……만 챙겨 주시면 감사합니다. 선발은 처음이니까요.”

최희탁이 냉장고로 향한 사이 김희도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눈꼬리를 치켜세우고선 물을 들이켜는 최희탁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임성과 눈을 맞췄다.

“엉덩이 두드리게 하지 마요. 이거 내 거잖아요.”

당연히 농담으로 생각하며 김희도를 쳐다봤다가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페어리즈의 공격 차례인 1회 말, 1번 타자 차성연이 타석에 섰다. 팀원들이 차성연을 향해 너도나도 파이팅을 외쳤다.

임성은 벤치 한구석에 앉아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쿵쾅쿵쾅, 손바닥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선배.”

“어. 왜?”

“긴장은 다 풀렸어요? 손 더 잡아 줄까요?”

유난히 뺨이 달아오른 김희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괜찮아. 네 덕분에 긴장 풀렸어.”

“어디 아픈 곳은 없죠? 어깨랑 팔도 괜찮고?”

“어.”

“물도 충분히 마셨죠?”

“어.”

“뽀뽀해도 돼요?”

“어. 헉, 방금 한 말은 취소…….”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임성이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다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누가 들을세라 식겁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이쪽에 관심 없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희도는 보조개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낙장불입. 모릅니까?”

설마 진짜로 하진 않겠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는데, 입술이 아닌 손을 폭 감싸고선 손등에 쪽 뽀뽀를 했다.

아, 이 뽀뽀를 말하는 거였어? 괜히 사람 오해하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을 사발째로 들이켠 민망한 상황이었다. 임성은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잔루 페어리즈. 팬들이 부르는 이솔 페어리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명성을 입증하듯 페어리즈는 한 회에 안타 3개를 치고서도 무득점에 그쳤다.

탄식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도 임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득점은 타자들 몫이고 자신은 주자를 아웃시키는 것만 신경 쓰면 되니까.

임성은 장타로 타자를 3루까지 내보낸 데 이어 기습 번트에 당하며 한 점을 내줬다. 그러나 그다음 이닝에 페어리즈 타선이 갑자기 폭발하며 2점을 냈다.

4회 초 스코어.

[HR 유니콘즈 1 : 2 이솔 페어리즈]

「승리, 승리. 우리는 승리한다. 페!어!리!즈! 이솔 페어리즈. 최강 페어리즈. 승리의 그 이름.♬♪」

커다란 앰프를 통해 팀 응원가가 울리자 팬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따라 불렀다. 흡사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4회 초, 투 아웃 주자 2루. 주자를 등진 임성이 힘껏 공을 던졌다.

따악! 빗맞은 공이 우중간으로 날아갔다. 중견수와 좌익수, 두 사람 중 아무나 잡아도 되는 위치였다. 예상대로 둘 다 공을 쫓아갔다.

저 공 잡으면 쓰리 아웃이지? 유니폼 앞섶으로 턱 끝의 이마를 닦던 임성은 “어어어? 아아.”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두 사람 중 누가 잡아도 됐을 공은 그대로 떨어졌다.

『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집니다. 방금 공은 이우열이 처리했어야죠. 저런 어이없는 플레이가 나오면 투수 입장에서 힘이 쭉 빠져요.』

『그렇습니다. 잡아야 할 카운트를 잡지 못하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던지는 공이 많아지니까 당연히 부담도 가고요. 방금 그 수비는 집중력 저하로밖에 안 보입니다. 젊은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는데, 베테랑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요.』

해설과 캐스트가 공을 놓친 선수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던 임성의 고개가 정면을 향했다. 만루인가.

동요하지 않았다면 완전 거짓말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만루든 뭐든 아직 점수를 내준 게 아니니까. 여기서 무사히 넘기면 될 일이었다.

이를 악물고 던진 보람이 있는지, 다행히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하아.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더그아웃으로 향하는데, 조금 전 공을 떨어트렸던 선배들이 어깨를 쳤다. 나름의 사과였다.

“실점도 안 했고, 아까 빠질 뻔한 공 잡아 주셨잖아요.”

임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길디길었던 수비에 비해 페어리즈의 공격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났다. 삼진 두 개와 내야 땅볼 하나. TV로 시합을 보고 있는 페어리즈 팬들은 욕을 한 바가지로 하고 있을 터였다.

임성은 숨 돌릴 틈 없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김이설, 바깥으로 들어오는 변화구를 받아 때립니다. 강한 타구에요. 아, 아! 이 타구가 담장을, 담장을 넘깁니다. 김이설, 솔로 홈런!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5회 초, 임성은 유니콘즈 부동의 4번 타자 김이설에게 홈런을 얻어맞았다. 수비수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공이 아치형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외야 담장을 넘겼다.

홈런을 친 김이설은 일명 ‘빠던’을 하고 그라운드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가뿐히 밟았다. 임성은 담장을 넘어가는 공의 궤적을 따라가다가 피식 웃었다.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한 홈런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어. 역시 김이설 선배야.

글러브로 입을 가리며 다시 한번 웃는데, 투수 코치와 함께 송우림이 포수 마스크를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임성. 지금 그건 김이설이 잘 친 거다. 김이설이 아니었으면 헛스윙했을 거라고.”

혹여 홈런을 얻어맞고 기죽어 있을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맞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맞은 이상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래. 잘 생각했다. 다음 타자 잡자.”

엉덩이를 두드린 송우림이 자리로 돌아갔다. 슬쩍 뒤를 돌았던 임성은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이쪽을 보는 김희도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김희도. 진정해. 지금 경기 중이야.

임성은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공을 뿌렸다. 파앙! 한가운데에 꽂히는 날카로운 직구였다.

“이야. 홈런 맞고 바로 한가운데로 꽂는 패기 보소.”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던 선수가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보통 홈런을 맞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투수가 많은데 임성은 보란 듯 직구를 찔러 넣었다. 그것도 올 시즌 첫 등판한 어린 투수가.

추가 실점 없이 공수가 교대되고 이번엔 페어리즈의 공격 차례가 됐다.

「페어리즈의 최희탁. 오오, 오오오! 최희탁, 페어리즈의 최! 희! 탁! ♪♬」

최희탁의 응원가가 더그아웃까지 들렸다.

“너 아까 왜 웃었냐?”

“네?”

“홈런 맞았을 때 웃었잖아. 아니야?”

박태영이 슬쩍 물었다. 임성은 얼굴을 흥건히 적신 땀을 닦으며 눈을 굴렸다.

몰래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물어볼 정도로 티가 났나.

“아…… 풀카운트였잖아요. 볼넷으로 주자를 쌓느니 차라리 홈런을 맞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김이설 선배님이 진짜 홈런 때리잖습니까. 역시 대단하다 싶어서요.”

다시 생각해도 웃긴지 임성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갔다.

이놈 봐라. 박태영은 헛웃음을 치다가 임성의 모자 위를 마구 쓰다듬었다. 리그 최고 타자로 꼽히는 선수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은 모습이 썩 마음에 든 것이었다.

“건방져 보였을까요?”

“전혀. 풀 죽어 있는 것보다 훨씬 낫지. 역시 네임드 등 번호를 단 남자답다.”

박태영이 ‘69’번 등 번호를 가리키며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좋은 공 때린 놈이 전적으로 잘못한 거야. 김이설 저 나쁜 자식.”

박태영이 수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이설을 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누가 입단 동기 아니랄까 봐 송우림과 똑같은 말이었다.

“박태영 선배. 여기 물 드시죠.”

“어, 나? 고맙다.”

그때, 김희도가 박태영에게 뜬금없이 물을 건넸다. 박태영이 제 앞에 불쑥 내밀어진 물통을 얼떨결에 받았다. 그가 물을 마시는 사이 김희도는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임성의 옆에 섰다.

박태영에게 일부러 물을 준 것 같단 생각이 들면 자의식 과잉일까?

“선배. 저 안타 치면, 지금 입고 있는 티 주세요. 빨지 말고 그대로.”

“언더 티? 이건 왜?”

김희도는 대답 대신 씩 웃고선 대기 타석으로 걸어갔다.

『투 아웃 1, 2루 상황. 현재 리그에서 가장 핫한 선수죠? 김희도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현재 스코어 2 대 2. 양 팀 동점. 김희도가 주자를 불러들이며 역전할지, 오성림이 틀어막을지 기대되는 이닝입니다. 김희도, 타격 자세 취합니다.』

임성은 김희도가 다시금 바꿔 씌운 모자챙을 매만지며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딱히 타격 루틴이랄 게 없는 김희도는 배트를 고쳐 쥐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루틴이라……. 임성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김희도와 손깍지를 끼자 긴장이 풀렸었지. 으음. 왠지 오늘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깡! 생각에 잠겨 있던 임성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강하게 맞은 타구가 파울 지역으로 떨어졌다.

파울, 파울, 파울.

김희도는 끈질기게 공을 커트했다. 그러면서도 볼은 그대로 보내며 풀카운트까지 이끌었다. 유니콘즈 투수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모자를 들치는 손길에 짜증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깡. 김희도의 배트가 다시 한번 돌아가며 파울을 만들어 냈다.

으아, 진짜 짜증 나겠다. 아무래도 투수다 보니 상대편 투수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됐다. 자신이 저 상황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찔했다. 새삼 김희도와 같은 팀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유니콘즈 투수가 또다시 공을 흩뿌렸고, 김희도는 평소보다 늦은 타이밍에 배트를 휘둘렀다.

깡!!

『오른쪽, 걷어 올렸습니다. 떴어요, 떴어요! 우측으로 뻗어 간 공이 더 멀리 날아갑니다. 아, 아! 전광판을 맞고 떨어집니다. 쓰리러어어어어언! 김희도의 방망이가 오늘도 맹렬히 불을 내뿜습니다. 홈런엔 홈런으로. 1, 2루 주자가 모두 홈으로 들어오며 순식간에 3점을 쓸어 담습니다.』

『저거거든요. 신인 선수가 저런 플레이를 보이면 고참들도 자극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라운드 위에선 선후배가 어딨습니까? 잘하는 사람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럼요. 임성 투수는 이걸로 한시름 놓게 됐네요.』

임성이 소리 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더 티 따위 얼마든지 갖고 가라고 해.

전광판을 맞고 떨어지는 홈런에 관중들이 양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서 고함을 내질렀다. 김희도의 이름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한쪽에선 홈런 공을 서로 갖겠다며 사람들이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오! 페어리즈의 김희도. 안타 안타 김희도. 오, 오오오오♬♪ 페어리즈 김희도♬」

구장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커다란 함성이었다. 제가 홈런을 친 것도 아닌데 쭈뼛 소름이 돋았다. 흥분과 열기가 순식간에 번졌다.

“이 자식. 어떻게 거기서 홈런을 때리냐. 잘했다.”

임성은 가장 먼저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가 홈플레이트를 밟고 돌아오는 김희도에게 달려갔다. 그 역시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임성의 허리를 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내려놔. 아직 경기 중이야.”

“싫은데요. 선배가 먼저 안았잖아요.”

뒤늦게 민망한 자세라는 걸 깨닫고 김희도를 말렸지만, 그는 기어코 더그아웃까지 안고 걸어갔다.

“공주님 안기냐? 둘이 아주 잘 논다.”

선배들이 두 사람을 보고 농담을 내뱉었다. 크흠. 선배들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괜히 뜨끔해 헛기침을 내뱉었다.

임성을 더그아웃 벤치에 조심히 내려놓은 김희도는 다시 한번 서로의 모자를 바꿔 썼다. 희미한 땀 냄새와 후끈한 열기가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김희도는 임성의 모자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지금 엄청 키스하고 싶은데, 모자로 참을게요.”

“나…….”

김희도가 모자 안에 고개를 박은 채로 눈을 치켜떴다. 임성은 땀을 닦는 척하며 얼굴을 가렸다.

“나도 열심히 하겠다고.”

나도 키스하고 싶어. 하마터면 내뱉을 뻔했다.

정신 차려야 하는 건 김희도뿐만이 아니었다.

* * *

6회 초, 스코어.

[HR 유니콘즈 2 : 5 이솔 페어리즈]

임성이 상기된 표정으로 마운드에 섰다. 눈앞에는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유니콘즈 타자가 서 있었고, 그 너머로 미트를 고정한 송우림이 보였다.

임성은 두 손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리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들썩이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수십 번 휘두른 어깨와 팔꿈치가 화끈거렸다. 하지만 힘든 것보다 재밌는 게 더 컸다.

재밌어. 이렇게 재밌는 걸 계속 할 수 있다니, 좋아 죽겠네.

따악!

유니콘즈 타자가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를 때렸다. 바운드 된 공이 3루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라인 밖으로 벗어날 것 같던 공은 바로 직전에 멈추며 안타로 기록됐다.

아, 조금만 더 벗어나면 파울인데, 아깝다. 임성이 이마를 긁적였다.

배트를 내려놓은 타자가 1루로 걸어 나갔고,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치며 1, 2루가 찼다. 다행히 다음 타자는 잡았지만, 공이 포수 뒤로 흐르며 2, 3루가 됐다.

『원 아웃. 주자는 2, 3루. 타석에는 솔로 홈런을 때렸던 김이설이 들어섭니다. 페어리즈 임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임성은 축축한 옷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원 아웃. 현재 주자는 두 명. 타석에는 제게서 홈런을 뽑아낸 4번 타자 김이설.

지금 리그 홈런 1위가 김이설 선수였던가. 이번에도 장타를 노리려나? 진퇴양난이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기묘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이를 악물고 던진 공에 김이설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호흡을 내뱉으며 곧바로 다음 공을 던졌다. 두 번째 공, 스윙.

『3구, 변화구. 낮게 떨어집니다. 김이설 지켜봅니다. 현재 볼카운트 투 앤 원.』

볼카운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김이설이 헬멧을 고쳐 쓰며 상체를 살짝 젖혔다. 그리고 처음 타석에 들어설 때처럼 루틴을 반복하고 두 손으로 배트를 꽉 쥐었다.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내 동경하던 선수에게 공을 던지는 것도, 그 사람이 자신의 공에 집중하는 것도 짜릿했다. 김희도가 쓰리런을 쳤을 때 느꼈던 과도한 흥분이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스-트라이크!”

『스윙! 삼진 아웃! 임성이 김이설을 잡아냅니다. 몸 쪽으로 꽉 찬 직구. 아, 과감합니다. 과감해요. 홈런을 맞아서 위축될 줄 알았는데, 예상과 전혀 다른 투구를 보입니다. 지금 이 경험은 앞으로 임성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심판이 검지로 앞을 가리키며 아웃 콜을 외쳤다. 임성은 아웃 사인을 보자마자 곧장 뒤를 돌았다.

방금 김이설 선수 삼진으로 잡은 거 봤냐?

네. 봤어요. 김희도가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누가 보면 한국 시리즈 7차전인 줄 알겠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국 시리즈 7차전이 부럽지 않았다.

만약 이 경기에서 이기면 프로에 와서 처음으로 김희도와 함께 승리하는 건가?

처음엔 같이 뛰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데, 자꾸만 욕심이 났다. 김희도가 잘하는 만큼, 더, 더 많이 보여 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그와 그라운드에 함께 서고 싶었다. 김희도도 이런 마음일까?

다음 타자를 상대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을 만지작대며 준비하던 중, 코치진이 포수와 함께 올라와 투수 교체를 알렸다.

벌써? 아직 3회하고, 0.1이닝이나 더 남았잖아.

“더 던질 수 있습니다. 코치님, 던지게 해 주십시오.”

“인마. 오늘만 하고 말 거냐? 다음 등판도 준비해야지. 공 좋아서 더 던지고 싶은 건 알겠지만, 길게 봐. 길게.”

“……알겠습니다.”

『이솔 페어리즈의 투수 교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임성이 내려가고 박태영이 올라옵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그의 귓가로 함성이 쏟아졌다. 바닥을 보며 터덜터덜 걷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관중들이 이제 막 비상을 시작한 선수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퍼부었다.

환호 속에 섞인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임성은 벤치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온몸을 빠듯하게 채웠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얼른 수분 보충해. 대충 마시지 말고 충분히 마셔라.”

“네. 코치님.”

코치에게서 건네받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투 아웃 상황에서 마운드를 넘겨받았던 박태영은 1점을 헌납하며 이닝을 매듭지었다.

수비를 마친 페어리즈 선수들이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아.”

아직 잔떨림이 남은 손바닥 위로 익숙한 손이 겹쳐졌다. 못이 단단하게 박인 손바닥과 다르게 곧고 예쁜 손등이었다. 곁눈질로 본 옆얼굴은 덤덤했지만, 새빨개진 귀가 그의 기분을 드러냈다.

어쩐지 숨이 조금 막히는 기분이었다.

홈경기라 더그아웃 구석에 유튜브 업로드용 카메라가 있는 걸 알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거나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찍히면 어쩔 수 없지, 뭐. 오히려 포개진 손을 꽉 잡자 김희도가 고개를 돌렸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 아래 자리한 눈동자가 열기에 들떴다.

아, 당장 껴안고 싶다. 김희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그의 목에 입술을 묻고 숨을 들이켜고 싶었다.

어느덧 경기 막바지에 이른 9회, 현재 스코어는 [HR 유니콘즈 4 : 5 이솔 페어리즈]로 페어리즈가 1점 앞서는 중이었다.

앞선 이닝에서 유니콘즈에게 한 점을 더 내준 페어리즈는 마무리 투수 권재영을 마운드에 올랐다. 권재영은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공을 던졌다.

몇 년 전에 세이브왕을 따낸 남자답게 압도적인 구위로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 두 개를 따냈다.

마지막 하나, 이제 아웃 카운트 한 개만 더 잡으면 페어리즈의 승리였다.

하지만 유니콘즈 하위 타자들에게 연달아 안타를 맞으며 역전 주자가 나갔다. 후우, 얼굴이 달아오른 권재영이 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리고 송우림의 사인에 고개를 몇 번 젓다가 드디어 끄덕였다.

빠르게 날아간 공은 허공을 가르며 송우림의 미트에 안착했다. 파앙!

“볼!”

아악. 심판의 볼 선언에 그라운드로 뛰어나갈 준비를 하던 선수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제발, 제발! 어디선가 관중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치라는 유니콘즈의 팬인지 제발 막아 달라는 페어리즈의 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임성은 권재영을 보다가 그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자를 푹 눌러 쓴 김희도가 언제라도 이동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야. 권재영 또 시뻘게졌다. 저러다 불타겠네. 누가 저놈한테 가서 물 좀 뿌리고 와.”

박태영의 말처럼 권재영은 멀리서 봐도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설사 여기서 역전당한다 해도 페어리즈의 공격 기회가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임성의 선발 승리는 날아간다. 권재영도 그걸 아니까 자꾸 팔에 힘이 들어가고, 존에서 벗어나는 거겠지.

“권재영. 쫄지 말고 이번에 끝내자.”

펜스를 두드리며 응원하는 선수 무리에 임성도 끼어 있었다.

“재영 선배. 파이팅!”

김희도 너도 잘해. 뒷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권재영이 글러브 낀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내리며 고개를 돌려 주자를 확인했다. 도루 가능성이 낮다는 걸 확인한 다음 공을 던졌다. 실투까진 아니었지만, 썩 좋은 코스의 공은 아니었고, 유니콘즈 타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딱! 소리와 함께 공이 아치형을 그리며 날아갔다. 타자는 물론, 1, 2루 주자가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3루타? 아니면 홈런? 양 팀 선수와 관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최소 2루타네. 아직 9회 말이 남아서 다행이다. 임성마저 그렇게 생각할 만큼 비거리가 길었다.

그때, 김희도가 뒷걸음질 치며 팔을 위로 뻗었다. 그대로 뛰어올랐던 몸은 퉁, 보호 펜스에 부딪혀 앞으로 튕겨 나갔다.

“……!”

펜스에 몸을 반쯤 걸치고 있던 임성이 벌떡 일어섰다.

“공은 어떻게 됐어? 잡았나?”

주변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임성은 공보다 김희도의 상태가 더 궁금했다. 괜찮은 건가, 어디 다친 건 아니겠지.

순간 정적이 흐르고, 고개를 바닥에 박고 엎어져 있던 김희도가 팔을 쳐들었다. 가죽 글러브가 양쪽으로 벌어지며 둥근 공이 드러났다.

“야, 잡았어, 잡았어! 으아아!”

『슈퍼 캐치! 김희도가 온몸을 날려 공을 잡았습니다. 기가 막힌 호수비! 순간적인 판단과 움직임이 팀을 승리로 이끕니다. 최종 스코어 4 대 5. 이솔 페어리즈가 승리를 가져갑니다.』

캐스터의 흥분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경기 종료. 최종 스코어.

[HR 유니콘즈 4 : 5 이솔 페어리즈] 승: 임성

“아.”

홈을 향해 달리던 유니콘즈 선수가 허탈한 표정으로 멈춰 섰고, 권재영이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임성은 팀 동료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그라운드로 튀어 나갔다. 마찬가지로 뛰어온 김희도가 모자를 벗어 던지고, 임성을 껴안았다. 아직 더운 기운이 남은 뺨 위로 젖은 머리카락이 마구 비벼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임성의 상체가 뒤로 넘어갈 듯 꺾이자, 김희도가 허리를 감싸 안으며 지탱했다. 땀이 밴 살갗이 겹쳐지며 끈적끈적한 열기가 번졌다.

“시즌 첫 승리, 축하해요. 선배.”

“승리 안 해도 되니까 위험한 플레이는 하지 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선배랑 같이 경기 뛰는 건 오랜만이잖아요. 무리해서라도 꼭 이기고 싶었어요.”

김희도가 활짝 웃었다. 임성은 주저 없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기분 좋아요?”

“엄청 좋아.”

“네. 저도 좋아요.”

『오늘 시합은 젊은 선수들이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담이 컸을 텐데 6회까지 호투를 펼친 임성과 쓰리런에 이어 환상적인 수비를 보인 김희도. 앞으로 페어리즈를 이끌어 갈 미래들입니다. 지금까지 시청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내일 6시 30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곧이어 베이스볼 러브가 이어집니다.』

“승리, 승리. 우리는 승리한다. 페!어!리!즈! 이솔 페어리즈. 최강 페어리즈. 승리의 그 이름.”

임성은 숨을 멈춘 채 응원가를 부르는 팬들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임성 선수, 김희도 선수.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오늘의 MVP는 공수에 걸쳐 크게 활약한 김희도와 임성이 공동으로 선정됐다.

“임성 선수. 첫 등판에도 긴장하지 않고 좋은 투구를 보였습니다. 먼저, 응원 해주신 팬분들께 소감 한 말씀 부탁합니다.”

올 시즌 통산 첫 인터뷰였다.

“우선 믿어 주신 감독, 코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흔들릴 때마다 진정시켜 준 송우림 선배님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다운 투구를 할 수 있게 힘을 북돋아 준 팀 동료, ……에게 오늘의 승리를 바치고 싶습니다. 사실은 아직 여기 서 있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팬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경기를 보이겠습니다. 많이 찾아와 주세요. 감사합니다.”

임성이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승리투수로 인터뷰하는 게 퍽 어색했지만, 기분 좋은 것이 더 컸다. 가볍게 말아 쥔 손바닥은 아직도 떨렸다.

임성 다음으로 인터뷰 자리에 선 김희도는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호투를 보인 선발 투수 덕입니다. 앞으로 더 좋은 플레이를 하겠습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마이크를 반납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던 임성이 경악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야. 이거 지상파 중계라고. 전국에 다 나간단 말이야. 눈이 마주치자 김희도가 빙그레 웃었다.

차라리 빨리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글러브와 모자를 챙기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거기 혼자 가는 선발 투수님. 같이 가요.”

등 뒤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두 사람의 인터뷰는 페어리즈 팬들 사이에서 소소한 반향을 일으켰다. 베테랑들이 하도 많아 우스갯소리로 노인정이라고 부르던 팀에 만 19세, 21세 타자와 투수가 떡하니 등장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운동선수에게 외모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지만, 본업도 잘하고, 잘생기기까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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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공놀이!>에선 젊은 투수와 야수를 향한 애정 공세가 식을 줄 몰랐다.

* * *

친구들 사이에서, 혹은 좋아하는 연예인 등에게 친근함의 표현으로 별명을 붙이곤 했다. 그것은 야구 선수와 팬 사이도 다르지 않아 선수마다 특색 있는 별명이 붙었다.

HR 유니콘즈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보이며 아주 조심스레 선발 기회를 받은 임성에게도 처음으로 별명이 생겼다. 작년에는 그냥 ‘잘생긴 투수’로 통했다면 이젠 당당히 애칭을 꿰찬 것이었다.

잘 던지는 날엔 ‘임캐슬’, ‘임베르사유궁전’ ‘임샛별’이었고, 볼질을 하거나, 어처구니없는 경기력을 보이다가 강판당할 때면 ‘임판잣집’, ‘임볏짚’ 으로 불렸다. 그 외에도 등 번호 69번에서 딴 ‘임섹시’도 있었다.

김희도는 ‘김희도레미’ 못할 땐 ‘희또라이’ 등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하도 임성 선배 하고 노래를 부르는 탓에 ‘김후배’라고 부르는 팬도 종종 나왔다.

제 별명을 들은 임성은 재밌어했고, 김희도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고 부르던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캐슬과 김희도레미는 오늘도 승리를 거머쥐고 퇴근을 했다.

“김희도, 김희도 선수!”

구장 밖에는 팬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갈라선 채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걸어갈 때마다 쏟아지는 환호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고 여전히 신기했다.

“여기요. 선물 받아 주세요.”

“안 받습니다.”

김희도는 제게 건네는 선물은 죄다 거절했으며 사진도 잘 찍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 겨우 찍게 돼도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인터뷰도 단답형이 전부라 일각에선 성의 없어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상한 점은 사회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와중에도 사인은 관대하단 것이었다. 지난 퇴근길에는 장장 3시간에 걸쳐 기다리고 있던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준 건 유명한 일화였다.

“싸가지 없는데 친절하다.”, “팬서비스가 구리면서 구리지 않다.” “짜증 나는데 실력 좋고 잘 생겼다.” 등 전혀 상반된 말이 나왔다.

그리고 김희도에게 후천적 친절함을 만들어 준 임성은 타 팀 유니폼을 입고 사인을 부탁해도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어린아이들이 요청할 때면 밥 먹는 것까지 멈추고 사인을 해 주곤 했다. 가끔 자신의 등 번호와 이름을 마킹한 팬을 보면 박수까지 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잘생긴 선수가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팬들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기존 좌완 선발이 빠진 자리를 잘 메워 주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아까 내 유니폼 입은 분 봤어. 아직도 신기하네.”

정작 팬보다 본인이 더 들떠서 말했다. 69번 마킹된 유니폼에 사인하는 건 두근두근했다.

“좋긴 한데…….”

“음?”

현재 두 사람은 숙소까지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임성이 돌아봤다. 서너 계단 밑에서 김희도가 따라오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비상구는 제법 어두워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좋은데 짜증 나요.”

“갑자기? 오늘 뭐 잘 안 풀렸냐?”

안 풀렸다고 말하기엔 오늘 그는 첫 시즌 15호 홈런과 타점을 싹쓸이했다. 데뷔 첫해 20홈런 달성도 머지않았다. 이 페이스면 최단기간 달성도 노려 볼 만했다.

시즌 종료까지 아직 한참 남았음에도 김희도의 신인왕이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초대형 신인, 슈퍼 루키……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만 봐도 위상이 짐작됐다.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좀…….”

“그냥 좀?”

“선배 야구 엄청 좋아하잖아요. 요즘은 특히 더 재밌어하고.”

“그렇지. 완전 재밌어.”

임성이 순순히 긍정했다. 요새는 재미있다 못해 등판 날이 기다려질 정도였으니까.

“선배가 좋아하니까 저도 기쁘거든요. 근데, 한편으론 망해서 그만뒀으면 싶기도 하고.”

“뭐?”

난데없는 악담을 들은 임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음.”

김희도는 스스로 잘 모르겠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연신 갸웃거리는 모습이 퍽 이상해 보였다.

애가 더위를 먹었나? 하긴, 한창 더울 때긴 해. 임성은 계단을 완전히 내려와 김희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제 이마와 그의 이마를 번갈아 짚으며 체온을 확인했다. 딱히 열이 오른 것 같진 않지만.

“아무래도 저는…… 선배를 독점하고 싶나 봐요.”

“어?”

“나만 보게.”

어둠 속에서 눈이 번들거렸다.

김희도가 건네는 애정이 익숙해졌다 싶으면 또 깊고 거대한 마음이 쏟아졌다. 지난 이천에 갔던 일 이후, 감히 짐작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으냐고? 오히려 기껍다고 할까.

김희도에게 받는 감정이 너무나 짙고 선명해서 다른 사람은 희미하게 느껴졌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사탕이 입 안에 가득 찬 기분이었다.

큰일이지.

그걸 알면서도 고치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이 가장 큰일 났고.

“그렇다고 굳이 망할 것까지 있냐?”

“지금 당장에라도 그러고 싶으니까요. 이상하죠?”

여전히 주변이 어두워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상계단에 고요히 울리는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을 갖고 있었다.

임성은 그의 이마를 짚었던 손을 움직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들레 홀씨를 매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폭신폭신해 기분이 좋았다.

“하나도 안 이상해. 더 해도 괜찮으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리고 우선 메이저리그부터 갔다 와서 생각해 보자. 망하지 말고 같이 메이저 가자고.”

그동안 혼자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충동적이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정말 김희도와 함께 메이저에 진출하고 싶었다.

“선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요. 따라갈게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러려면 성적부터 내야겠지. 야구 열심히 하자. 임성은 기승전야구로 끝을 맺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떡볶이 가게가 좋겠어.”

임성은 숙소가 있는 층의 비상구 문을 열며 말했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가까이 붙은 김희도가 의문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게 느껴졌다.

이러니까 꼭 호기심 많은 고양이 같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인기척을 감지한 복도 등이 켜지며 빛을 쏟아 냈다.

“나중에 은퇴하면 떡볶이 가게 차리자고. 내가 사장이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먹을 수 있잖아. 매운 떡볶이, 더 매운 떡볶이, 더더더 매운 떡볶이, 곤약 떡볶이. 어때?”

웃음기가 다분히 묻은 말은 농담에 가까웠다.

“선배. 저 떡볶이 잘 만드는 거 알죠? 그때쯤이면 한국, 아니 세계에서 떡볶이로 저를 이길 사람은 없을걸요?”

농담으로 한 말에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임성은 살짝 어이없는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인마. 너 야구 선수야. 그것도 신인왕 후보.”

“저는 신인왕보다 그게 더 중요해요. 떡볶이를 더 맛있게 만드는 방법 같은 거.”

김희도는 숙소에 들어가고 나서도 자신이 얼마나 떡볶이를 잘 만드는지 끊임없이 얘기했다. 듣다 듣다 지친 임성이 알았다, 주방 맡길 테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기 전까지 계속.

* * *

「[이솔 페어리즈 인물 탐구 투수 (6편)]

3년 차 좌완 투수 임성 (21·사진 제공 이솔 페어리즈)

신인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순위 44번으로 페어리즈에 입단.

약 1년 동안 폼 교정을 후 퓨처스 리그에 선발로 출전. 2군에서 착실히 데이터를 쌓다가 지난해 불펜 자원으로 처음 1군 무대를 밟았다. 2점 차라는 다소 가혹한 상황에서 깔끔하게 이닝을 막으며 가능성을 보였다.

올해 감독의 제의로 선발 전환했다.

강속구로 타자를 압박하기보단 칼 같은 제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타입. 최근 유니콘즈 4번 타자 김이설에게 홈런을 맞은 후 웃는 모습이 중계화면에 고스란히 찍혀 화제가 됐다.

“쳐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던졌는데, 진짜 쳐서 깜짝 놀랐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시합 직후 인터뷰=사진 제공 이솔 페어리즈)

첫 선발 등판 이후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팬들 역시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야구 성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야구를 잘하면 콩깍지가 씐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정일원(야구 해설위원, 現한국야구 위원회 고문)은 “페어리즈 김희도나 임성, 샤크스 백도경, 유니콘즈 이치연처럼 젊은 선수들이 잘 커야 한다. 특히, 잘생긴 선수가 잘하면 팬 유입이 용이하다. 팬들이 있어야 프로 야구가 흥한다.”하고 말했다.

후반기에 영건들이 어떤 활약을 보일지 기대된다.

이경원(베이스 볼 미디어 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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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무르익은 시즌만큼이나 무더운 7월 중순, 어느새 올스타전 시기가 다가왔다.

올스타는 100% 팬들 투표라 뽑힌 선수들은 내심 자부심을 가졌다. 설사 뽑히지 않더라도 하루 쉬면서 체력을 보충할 수 있어서 불만은 없었다.

“올해 올스타는 유독 늦게 하네. 누가 뽑히려나.”

박태영의 말을 시작으로 운동을 하던 선수들이 하나둘 말을 보탰다.

“투표 언제부텁니까?”

“투표 시작한 지가 언젠데. 와이프가 나 찍었다고 인증샷 보내 줬어.”

박재영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냈다.

“에이. 형님이 시킨 거 아닙니까? 그거 완전 부정 투표잖아요.”

권재영이 바로 깐족거렸다. 박재영은 휴대폰 모서리로 권재영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고선 사진첩을 열었다.

“인마. 그게 무슨 부정 투표야, 소신 투표지. 너 작년에 뽑혔었냐?”

“아니요. 저 그때 두 경기 연속 블론 중이었잖아요. 투표 대신 욕 배부르게 얻어먹었습니다. 아마 엄청 오래 살걸요?”

“하긴. 그때 맛탱이 갔었지. 두 게임 연속으로 날린 건 심하긴 했어. 무조건 네가 잘못했다.”

“형님. 저 팔꿈치 수술하고 첫 시즌이었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권재영은 왼쪽 팔꿈치를 어깨까지 들어 보이며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구석에서 이리저리 그립을 바꿔 가며 공을 던지는 임성을 불렀다.

“성이 네 생각은 어떠냐? 올해 어떻게 될 것 같아?”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페어리즈 권재영 아닙니까? 당연히 뽑히죠.”

“그렇지. 잘한다. 역시 선유고 출신답네.”

넉살 좋은 대답을 들은 권재영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박태영이 사회생활 잘한다며 농담을 건넸다.

“희도도 뽑히지 않을까요? 쟤 요새 장난 아니잖아요.”

권재영은 임성이 쓰던 수건을 슬그머니 챙기는 김희도를 눈으로 가리켰다. 올해 신인 중에서야 말할 것도 없이 독보적이며 리그를 통틀어도 상위권에 속했다. 만년 유망주 기근에 시달리던 팬들이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우리 팀에도 신인왕이 나오는 거냐며 벌써 설렘을 감추지 못했으니까. 어디 실력뿐이랴, 중계 화면에 잡히기라도 하면 SNS 검색어에도 번번이 올랐다.

“아, 맞네. 희도는 100% 뽑히겠다. 구단 측에서도 벌써 저놈 사진으로 열심히 홍보하더니만. 햄버거 세트도 완판했다며. 역시 잘생긴 게 최고야.”

박태영이 냉장고에서 새로운 물을 꺼내며 권재영에게 동의했다. 정작 당사자는 무표정으로 커틀벨을 들어 올렸다.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것에서 대화에 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였다.

“너는 올스타 관심 없어?”

한창 대화 중인 선배들을 힐끔 곁눈질하며 김희도에게 물었다. 그는 땀이 살짝 나 반질반질한 뺨을 긁다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래? 난 기회 되면 한번 경험해 보고 싶은데. 팬들이 뽑아 주시는 거잖아.”

재작년과 작년 이즈음엔 퓨처스 리그에서 보내서 올스타전과 아예 연이 없었다. 팬들이 어떤 마음으로 투표해 주는지 잘 알기에 언젠가 꼭 나가고 싶었다. 김희도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고.

그날 페어리즈는 불펜의 난조로 SS 폭스에 역전패를 당했다. 선수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내일 경기를 준비했다. 임성 역시 며칠 뒤에 있는 등판을 열심히 대비했다. 지난 등판보다 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 * *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간, 이미 수백 번이나 봤던 본 박재이의 투구 영상을 또다시 보는 임성의 등에 딱 달라붙어 있던 김희도가 벌떡 일어났다. 미동 없이 잔잔하던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헉, 깜짝이야.”

임성은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는 남자를 놀란 시선으로 쳐다봤다. 둘이 있을 때 김희도가 하는 일이라곤 자신의 옆에 붙어서 귓불을 만지작거리거나 드러난 목을 손가락으로 훑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소란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휴대폰을 보는 김희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더 긴장됐다.

무슨 기사라도 터졌나? 고등학교 때 감독 일이 떠올라 덩달아 휴대폰을 열어 스포츠란을 검색했다.

[기사] “아! 8회 4실점……” 고개 떨군 진호성. 페어리즈 뼈아픈 역전패

[기사] MK 페어리즈 박영화 황금 같은 적시타, LE 레전드스와 3연전 싹쓸이.

[기사] 레이먼 알레그로 QS. HR 유니콘즈 파죽의 2연승.

오늘 경기 내용에 관한 기사 및 각 구장 하이라이트 등이 올라와 있었다. 딱히 김희도가 관심을 보일 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은데…….

“후우.”

자못 진지하게 휴대폰을 보던 김희도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각진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였다가 내려앉았다. 임성은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힐끔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큰일이었죠.”

큰일이라니. 웬만한 일엔 꿈쩍도 안 하는 게 김희도가?

“뭔데?”

“하마터면 투표 날릴 뻔했거든요.”

“투표? 무슨 투표?”

“올스타전이요. KBO 홈페이지랑 KBO 어플, 리그 스폰서 어플. 세 개 다 해야 하거든요. 시간 엄청 간당간당했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임성은 눈을 깜빡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올스타 같은 건 흥미 없다더니 내심 가고 싶었나 보네. 한창 그런 거 좋아할 나이긴 해. 그렇다면 당연히 보내 줘야지.

“나도 투표해야겠다.”

임성은 입꼬리에 웃음을 매단 채 KBO 어플을 켰다.

「프로 야구 올스타전 베스트12 선발. (매주 월요일 중간 집계)

나눔 올스타 후보/ 드림 올스타 후보」

손바닥만 한 액정에 KBO 로고와 각 팀 후보들이 포지션별로 쭉 정렬돼 있었다.

김희도의 이름을 찾던 임성은 옆에서 뭔가가 불쑥 다가오자 상체를 살짝 물렸다. 김희도가 제 휴대폰을 들이밀고 있었다.

“어, 나? 난 왜 찍었어?”

그는 같은 팀이고 뭐고, 심지어 본인 포지션까지 가장 첫 번째 사람을 대충 찍어 놓고선 ‘임성’만 제대로 찍었다.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다.

“왜겠어요.”

별 새삼스러운 것을 묻는다는 듯한 덤덤한 말투였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급하게 투표했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김희도는 자정이 지난 걸 확인한 뒤 다시 투표를 시작했다.

“가고 싶다면서요, 올스타전.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해도…….”

김희도는 본인 포지션에서 1위일 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현재 전체 득표수 3위를 기록 중이었다. 임성은 다섯 명의 선발 투수 후보 중 4위로 두 사람이 함께 뽑힐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오히려 후보에 든 것 자체가 의문이라고 할까.

그러나 자신의 말 한마디에 바로 행동하는 모습이 왠지 엄청…… 엄청 감동적이었다.

“김희도. 이리 와 봐.”

임성은 순순히 다가오는 남자의 목을 껴안고 정수리에 뽀뽀를 쪽쪽 퍼부었다. 좋은 냄새와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감촉이 입술을 눌렀다.

“이 귀여운 자식.”

“더 귀여워해 주세요.”

문득 180cm가 훌쩍 넘는 남자 둘이 귀엽다고 말하는 상황이 어이없었다. 하지만 진짜 귀여운 걸 어떻게 하라고.

임성이 소리 없이 웃자 김희도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양손을 뻗어 임성의 턱을 감쌌다. 임성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숙어지며 이번엔 김희도의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이거론 부족한데? 좀 더 내려와 봐요.”

상체를 조금 더 기울인 임성이 김희도의 코끝을 살짝 핥았다. 막 씻고 와서인지 비누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대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입술을 깊게 겹쳤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혀가 조급하게 얽혔다. 어깨에 닿았던 손은 어느새 김희도의 허리와 옆구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늘씬한 몸과 다르게 탄탄하게 올라붙은 근육의 촉감이 좋았다.

누군가는 김희도의 태도가 성의 없다며 지적했지만, 그는 표현이 서툴 뿐이었다.

여태 지켜본 김희도는 그 누구보다 꾸준했다. 꾸준하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어려웠으니까.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콩깍지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숨쉬기 힘들지 않아? 그만할까?”

임성은 과도하게 꺾인 김희도의 뒷 목을 받치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더욱 젖히며 임성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가요.”

다시 한번 혀가 얽히고 숨이 섞였다.

* * *

약 한 달이 좀 안 되게 이어진 올스타 투표에서 김희도는 전체 득표수 2위를 하는 쾌거를 보였다. 페어리즈 팬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사이 선발로 두 번 등판해 1승 1패를 챙긴 임성은 막판에 많이 따라잡으며 투수 부분 최종 2위로 마무리했다. 이 역시 연승에 신 난 페어리즈 팬들의 화력이었다. 김희도 외에 최희탁과 권재영 등이 올스타에 뽑혔다.

올스타 경기 하루 전날.

“안 갈래요.”

본인뿐 아니라 가족 아이디까지 돌려 가며 임성에게 열렬히 투표했던 김희도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팬들이 직접 뽑아 주셨는데 당연히 가야지.”

“선배는 그날 뭐 할 건데요? 누구 만나는 건 아니죠?”

“나? 뭐…… 이것저것 하겠지. 가서 내 몫까지 즐기고 와.”

“선배 없이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임성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남자의 뒤통수를 천천히 쓸었다.

올스타전 당일, 총 열 개의 구단 선수들과 팬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러 색의 유니폼이 섞인 모습이 꽤 장관이었다. 그들은 각자 응원하는 구단과 선수들을 연호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즐겼다.

새파란 그라운드에선 프로생활을 하며 안면을 익힌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했다. 펜스 근처에선 10개 구단의 마스코트가 총출동해 서로 장난을 치는 중이었고, 대포처럼 긴 카메라를 가져온 팬들이 연신 선수들을 찍어댔다.

정규리그가 아닌 이벤트 경기라 팬들도 선수도 부담 없었다.

“어우, 푹푹 찌네. 푹푹 쪄. 오늘 왜 이렇게 덥냐?”

하지만 재미와 휴식,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너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니면 아파?”

그것은 바로 임성 없이 혼자 올스타전에 참가한 김희도였다.

햇볕이 그대로 내리꽂히는 더운 날씨에, 친분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상황이 상당히 귀찮고 못마땅했다. 아니, 날씨고 뭐고 선배가 없으니까 아무 의욕도 나지 않았다. 제겐 그 남자의 존재 여부가 가장 중요했다.

“전체 득표 2위면 엄청난 거다. 뭐, 내 인기엔 조금 못 미치지만.”

“…….”

“내가 한창때 얼마나 대단했냐면 말이야.”

권재영은 김희도에게 어깨에 팔을 얹으며 쾌활하게 말을 이어 갔다. 새파랗다 못해 희게 질리는 낯빛을 권재영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이가 너 좀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김희도는 제 어깨에 닿은 튼실한 팔을 금방이라도 쳐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임성을 떠올리며 겨우 참았다. 선배가 즐기라잖아. 선배 몫까지 즐기고…… 후우.

“김희도 오랜만이다. 성이는 안 보이네. 같이 안 왔냐?”

후배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디론가 가던 김이설이 손을 흔들며 알은 척을 했다. 김이설뿐만 아니라 감독 추천으로 참가한 백도경이나 다른 선유고 출신들, 하다못해 그가 이름도 모르는 선수까지 임성을 찾았다.

‘임성’, ‘성이’, ‘성이 형’.

김희도는 그의 안부를 제게 묻는 것이 만족스러운 한편, 상당한 거슬림을 느꼈다.

선배는 재작년과 작년 중반기까지 퓨처스에서만 있었는데 왜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은 거야? 프로에 오면 좀 괜찮아질까 했더니, 오히려 고등학교 때보다 더 하잖아.

뒤틀리는 속내를 가득 담아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깡!

『초구 타격! 오른쪽으로, 오른쪽, 길게. 안타입니다. 드림팀 김희도의 첫 안타.』

김희도는 평소보다 현저히 느린 속도로 1루 베이스를 밟았다. 바로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백도경이 장타를 때리며 드림팀이 선취점을 따냈다.

김희도는 가끔 말을 거는 최희탁과 권재영에게 겨우 반응하고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피했다. 그리고 어서 이 지독한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아, 선배 보고 싶다.

김희도는 유니폼 앞섶을 한가득 쥐고 코끝에 갖다 댔다. 아침까지만 해도 꽤 짙던 체향이 잘 맡아지지 않았다. 역시 잠옷 대신 입히는 걸론 부족했다. 더한 걸 했어야 해.

뒤늦게 후회하며 조금이라도 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김희도가 한창 임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머리엔 꿀벌 더듬이를, 등엔 반짝이를 바른 무지개색 날개를 매단 마스코트가 다가왔다. 페어리즈 마스코트 둘 중 한 명인 ‘페페’였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귀엽다고 했었나. 페페를 보는 시선이 썩 곱지 않았다.

페페는 자신을 노려보는 김희도의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드림팀 더그아웃으로 걸어갔다.

살갗을 감싸는 텁텁한 느낌이 상당히 불쾌했다. 반사적으로 팔을 뿌리치자 페페가 크고 동그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며 갸웃갸웃했다. 왠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이건 뭔데 친한 척이야. 매몰찬 김희도의 행동에도 페페는 개의치 않고, 다시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김희도는 마스코트를 피해 반대쪽으로 이동했지만, 끝까지 쫓아오는 페페에게 결국 잡히고 말았다.

왜 이렇게 끈질겨. 김희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 김희도다. 사인해 주세요.”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김희도를 데려가던 페페가 관중석에서 들리는 앳된 목소리에 돌연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김희도를 쳐다봤다.

아니, 쳐다보는 게 맞나? 표정이 고정 돼 있어서 잘 모르겠다.

“여기요. 여기에다가 해 주세요.”

페어리즈 유니폼과 모자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은 어린 팬이 종이를 돌돌 말아 매직과 함께 그물망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벤트 경기라 허용 가능한 행동이었다.

“사…….”

사인이요. 잔뜩 신나서 말하던 어린 팬은 김희도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화, 화났나? 무섭게. 괜히 말 걸었어.

“이름.”

“네, 네?”

고저 없이 싸늘한 목소리에 자그마한 등이 흠칫 떨렸다.

“이름 뭡니까?”

“어, 아…… 채현이요. 김채현. 이름 뒤에 하트 그려 주세요.”

“하트는 안 됩니다.”

슥슥, 빠르게 사인을 한 김희도가 어린 팬에게 사인 종이를 건넸다. 하트 대신 별표가 그려진 사인을 받은 팬의 어깨가 위로 치솟았다.

“저 형 유니폼도 있어요. 다음에 또 홈런 쳐 주세요. 아빠랑 보러 올게요.”

무서워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상기된 표정으로 파이팅을 외친 김채현 어린이가 아빠에게 자랑하러 뛰어갔다. 그사이 우르르 몰려온 수십 명의 팬들이 너도나도 김희도에게 사인 요청을 했다.

“…….”

미묘하게 올라간 눈썹 끝은 그가 현재 상황을 얼마나 귀찮아하는지 드러냈다. 김희도는 보호 펜스에 다닥다닥 붙은 팬 중에서 어린이들에게만 사인을 해 주고 돌아섰다.

‘사인은 꼭 해 줘. 특히, 어린 팬들은 무조건이야. 무조건!’

평소에 임성에게서 하도 듣다 보니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 남자를 떠올리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그래. 타석에도 섰고, 할 만큼 했잖아. 돌아가자.

단숨에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페페가 양팔을 벌리며 또다시 김희도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

두 사람, 아니 인형 한 명과 사람 한 명은 더그아웃 뒤쪽으로 향했다.

내가 왜 인형을 따라가고 있는 거지. 김희도는 스스로의 행동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김희도의 팔을 잡고 일방적으로 복도를 걷던 페페가 라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페어리즈 선수들이 홈경기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손 놔.”

삐딱하게 선 자세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페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천천히 뒤를 돌았다. 허공을 향해 길게 뻗은 더듬이와 무지개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진짜 놔도 돼?”

크고 무거운 인형 탈을 쓰고 있어 목소리가 뭉개졌다. 김희도는 잘 들리지 않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팔을 세게 털어 내며 문고리를 잡았다.

빨리 선배에게 가야지. 저 이상한 놈과 어울리는 시간조차 가까웠다.

“어디 가는데?”

“!”

밖으로 반쯤 빠져나갔던 상체가 멈칫하더니,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싸늘하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안 가면 안 돼?”

어느새 인형 탈을 벗어 옆구리에 낀 임성이 김희도를 보며 씩 웃었다. 활짝 휘어진 눈꼬리가 퍽 시원스러웠다.

“선……”

선배. 말을 뱉어 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쾅! 반쯤 열렸던 문을 닫은 김희도가 거의 뛰듯이 빠르게 걸어 임성 앞에 섰다.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어깨와 등을 감쌌다. 인형 탈 때문에 평소처럼 꽉 껴안지 못했지만, 충분히 좋았다.

임성의 옆구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인형 머리가 툭 떨어졌다.

반나절 내내 무거운 인형 탈을 쓰고 있던 남자는 땀범벅이었다. 그를 껴안고 있는 김희도의 팔 안쪽에도 끈적끈적한 땀이 묻었다.

배고프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임성을 더욱 세게 안았다.

“나 지금 냄새 엄청 날 텐데.”

“그러니까. 미치겠잖아요.”

임성에게 말한 건지 혼자 중얼거린 건지 모를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김희도는 임성의, 아니 인형 어깨에 고개를 얹고 그의 목덜미에 뺨과 이마를 붙였다.

크리스마스에 깜짝 선물을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그런 것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지.

“오늘 쉰다면서요. 여긴 어떻게 왔어요?”

“너 보러 왔지. 올스타전 같이 나오기로 했잖아. 살짝 꼼수를 조금 쓰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 으헉!”

조금의 민망함과 쑥스러움을 담아 말하던 임성은 상체에 가해지는 압박에 헛숨을 내뱉었다.

“보고 싶었어요. 경기하는 내내 선배 생각밖에 안 났어요.”

“너 안타 치는 거, 팬들한테 사인해 주는 거 다 봤어. 잘했다.”

“더요.”

“어?”

“잘했으면 더 칭찬해 주세요. 선배한테 칭찬받으려고 한 거니까.”

상체를 살짝 물린 김희도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맞부딪혔다. 땀이 살짝 나 반들거리는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예뻤다. 무거운 인형 탈 속에 몇 시간 동안 갇힌 보람이 있을 정도로.

“너무 잘했어. 엄청 기특해. 진짜 착하다.”

칭찬할 때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홍조가 점점 짙어졌다.

이것 좀 봐. 이렇게 귀여운 남자를 왜 다들 차갑다고 할까.

임성은 다른 사람들이 알면 기함할 생각을 태연히 하며 김희도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 * *

올스타전까지 무사히 치르고 리그 후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재 페어리즈의 순위는 6위로 가을 야구에 진출할 수 있는 5위와 약 3.5 게임 차였다.

3.5 게임 차. 몇 번 이기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큰 차이였다. 아무리 페어리즈가 연승을 해도 상위권 구단이 함께 이기면 승차는 똑같으니까 단순히 숫자로만 볼 건 아니었다.

리그가 중반이 넘어가자 컨디션 난조, 또는 예상치 못한 부상 등으로 각 팀의 전력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저연차 선수들이 혹독한 일정에 지쳐 가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일주일에 여섯 번, 3시간 남짓, 길게는 5시간이 넘는 경기를 소화하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올해 처음 프로 무대를 밟은 김희도는 시즌 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호쾌한 스윙을 보였다. 그리고 임성은 날이 갈수록 좋은 모습을 보였다. 지난 시즌 막판에 체력이 달린다는 걸 깨닫고 비시즌 동안 이를 악물고 운동한 결과였다.

처음엔 임성이 누구냐며 낯설어했던 페어리즈 팬들도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프랜차이즈 선수나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했고, 데뷔 후 더욱 이름을 날린 김희도만큼은 아니더라도 69번 유니폼을 입은 팬이 점점 늘어났다.

<그깟 공놀이!>에서도 임성의 이름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으며 응원 글도 많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 * *

“아웃!”

포수 송우림 뒤에 서 있던 심판이 아웃 콜을 외쳤다. 상체가 확 꺾일 정도로 배트를 크게 헛돌렸던 상대팀 타자가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이번 경기에서만 벌써 7개째 탈삼진이었다.

“오늘 공 죽이네. 아무도 못 치겠다.”

임성은 더그아웃 응원 소리를 들으며 흰 가루가 남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한낮의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한여름, 이미 얼굴은 땀으로 끈적끈적했으며 유니폼 역시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몇 번이고 힘껏 공을 던졌던 어깨와 팔은 불에 덴 듯 후끈거렸다.

숨은 이미 코가 아닌 잇새로 흐른 지 오래였다. 하지만 힘든 것보다 흥분이 더 컸다. 자신의 공을 치기 위해 집중하는 타자와 그 타자를 돌려세웠을 때의 쾌감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역시 야구는 미치게 재밌다.

“음?”

임성은 대타로 타석에 들어서는 백도경을 응시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백도경 역시 임성을 향해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알은 척을 했다.

쪼그리고 앉은 송우림이 임성과 백도경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손가락을 움직여 사인을 보냈다.

슬라이더, 직구, 직구, 슬라이더…….

“스윙!”

체인지업.

“아웃.”

『배트가 돌아갔다는 심판의 판정입니다. 대타로 들어온 백도경,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허무하게 물러납니다. 다음 타석, 배기석이 올라옵니다.』

3년 전과 똑같은 공에 당한 백도경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더그아웃으로 걸어갔다. 속으로 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만만찮을 거라고 저번에 말했잖아.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샤크스 타자가 자세를 취했다.

으음, 배기석 선수구나.

임성과 배기석은 상성이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임성은 찔러 넣는 제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편인데, 배기석은 잘 속지 않고, 끝까지 본인만의 스윙을 했다.

현재 상대 전적이 4할이 조금 넘으니까, 공을 두 번 던지면 한 번은 안타를 맞았단 뜻이었다.

이번에는 잡아야 하는데.

더그아웃 앞에 나와 있던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걸어왔다. 투수 교체를 알리는 신호였다.

“성이 오늘 잘 던졌다. 자식, 점점 더 잘하네. 다음 이닝은 석경이한테 맡기자.”

『페어리즈 투수 교체입니다. 임성이 내려가고 이석경이 올라옵니다. 선발 투수 임성, 5이닝 88구 1실점으로 호투했습니다.』

『아, 예.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날이 더워지니 컨디션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등판할수록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이 페이스라면 신인왕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위원님.』

『자격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현시점에선 같은 팀 김희도가 가장 유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벌써 홈런 20개를 넘기며 역대 고졸 신인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 치웠어요.』

중계 카메라가 두 사람을 차례대로 잡았다.

막 마운드에서 내려온 투수는 구단 로고가 새겨진 타월로 얼굴을 닦는 중이었고, 타자는 그런 투수를 응시하다가 수비 자세를 잡았다.

임성은 축축한 유니폼 대신 아이싱 티로 갈아입고 어깨를 식혔다. 얼음을 둘둘 감고 있는 살갗은 차가운데 속 근육은 화끈거렸다. 입을 살짝 벌려 숨을 뱉어 내며 한창 경기 중인 그라운드를 봤다.

이석경이 병살을 유도하며 순식간에 이닝이 끝났다. 외야에서 수비를 보던 김희도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마셔.”

임성은 얼른 제 옆에 앉는 남자에게 물을 건넸다. 두 손으로 물을 받은 김희도가 고개를 조금 젖히며 물통을 기울였다. 임성은 얼굴을 닦는 척하며 그가 물 마시는 모습을 곁눈질했다. 반쯤 내리뜬 눈꺼풀 끝에는 기다란 속눈썹이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물통 입구 부분이 아랫입술을 살짝 누르며 입이 벌어졌다. 날카롭지만 반듯한 턱 끝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참 오묘했다.

그 순간, 김희도가 고개를 돌렸고, 피할 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임성은 수건을 든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그냥 대놓고 봐요. 몰래 보니까 더 자극적이잖아요.”

길게 뻗은 눈꼬리가 샐쭉 휘어졌다. 누가 봐도 얄궂다고 말할 만한 미소였다. 물론, 임성이 아닌 사람에게 보여 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소리 없이 웃은 남자가 조금 더 바짝 당겨 앉으며 어깨를 붙였다. 땀에 젖어 얇아진 유니폼 너머로 달아오른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괜히 찔린 임성은 양쪽 허벅지를 붙이며 주변을 살폈다. 페어리즈가 공격 중이었고, 감독 코치를 비롯한 선수들 모두 경기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이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필 원정이라 더그아웃 카메라도 없었다.

“선배. 지금 흥분했죠? 목덜미까지 빨개요.”

“내가? 널 말하는 게 아니고?”

“하하.”

애써 담담하게 던진 말에 김희도가 소리 내 웃었다.

“저야 늘 흥분하고 있죠. 선배한테.”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임성은 대답 대신 땀을 닦던 수건을 그의 목에 걸었다. 물통을 내려놓은 김희도가 수건을 한가득 움켜쥐고 코끝으로 갖다 댔다.

“땀 더 닦고 줘도 되는데.”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치고, 베이스를 밟으면서도 무심하던 얼굴이 깨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귀만큼이나 새빨간 목덜미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가 말한 ‘늘 흥분하고 있다’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덩달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만지고 싶어. 임성은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겨우 삼켰다.

4승.

임성은 오늘 경기에서 이기며 4승 투수가 됐다. 시즌 초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상황이었고, 지금도 믿기지 않아 하루에 몇 번이고 승수를 확인하곤 했다.

며칠 전에는 직장 사람들 주게 사인 좀 해 달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쌍둥이 1, 2는 임성과 함께 찍은 사진을 프로필로 바꾸고 「페어리즈 투수, 우리 형 임성과 함께」라는 멘트를 썼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쌍둥이 1, 2가 우리 형이 프로 야구 선수라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닌단다.

아직 그만큼 유명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한참 노력해야 하는데. 과도한 칭찬이 머쓱하고 민망하면서도 가족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각 팀 25세 이하 유망주 투수를 다룬 기사에도 이름이 올라갔다.

「페어리즈 투수 임성(21·좌완): 장단점이 뚜렷하다. 하지만 단점이 오히려 뚜렷해서 보완하기 쉽다. 개인적으로 내년이 더욱 기대되는 선수.」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슬슬 폼이 올라오지 않으면 위험’ 등 고등학교 3학년 때 임성을 저평가했던 그 기자였다.

원래도 재밌던 야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재밌어졌다.

손가락 사이를 긁으며 빠져나가는 공의 감촉이나 참았던 숨을 들이켜는 순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아드레날린이 머리끝까지 솟구치다 못해 뿜어져나오는 기분이었다.

“배고프네.”

“야식 시킬게요. 뭐 먹을래요?”

김희도는 침대에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휴대폰을 들었다. 임성이 말만 하면 바로 주문을 할 태세였다. 최희탁이나 권재영 등 선배들이 어쩌다 심부름을 시키면 못 들은 척하던 남자와 같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마 그들이 이 광경이 본다면 적잖이 충격 받으리라.

“희도야. 또또 분식 기억나? 이상하게 거기 떡볶이가 갑자기 당겨.”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느껴지는 떡의 쫀득함과 입 안이 얼얼해지는 맛. 요새 유난히 또또 떡볶이가 생각났다. 쩝, 임성이 입맛을 다셨다.

“갑자기요? 선배, 설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온 김희도가 손을 뻗어 임성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잘 짜인 딴딴한 복근 위를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뭘 뜻하는지 모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또 까불지?”

“혹시 모르잖아요. 아니면 오늘 확실하게 할까요?”

확실하게는 무슨. 이렇게 어이없고 깜찍한 유혹을 봤나.

임성이 픽 웃으며 그의 이마에 가벼운 꿀밤을 때렸다.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이 살짝 날아올랐다가 다시 이마를 덮었다.

“서울 가면 5단계 떡볶이 먹으러 가요.”

“매운 거 먹지도 못하는 놈이 또 무리하려고?”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완전히 달라졌어요. 두고 보세요.”

김희도가 짐짓 결연한 투로 말했다.

“그래. 기대할게.”

임성은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가 다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3연전 끝나면 대구, 인천인가? 우취 안 됐으면 좋겠다.”

“원정 9연전은 너무하긴 하죠. 확실히 후반기 일정이 빡빡해요.”

시즌 후반이 될수록 우천 취소 등으로 밀렸던 경기 등을 소화하느라 일정이 빽빽했다.

“그래도 야구 하는 거 재밌지 않냐? 어때?”

으음. 김희도는 여전히 임성의 배에서 손을 떼지 않는 채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반듯한 눈썹 중간에 자리한 미간이 좁아진 걸 보니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임성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야구 재밌지 않냐?’

‘딱히.’

‘지금도 재미없어?’

‘네.’

‘지금은 재밌잖아.’

‘별로요.’

심드렁한 표정만큼이나 담담하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몇 번이었더라?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던진 질문에도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선배 때문에 야구를 한다던 때조차도.

“혹시.”

임성의 시선이 김희도의 입술로 향했다. 발갛고 도톰한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듣고 싶은 대답 있어요?”

“있어. 하지만 그것보다 네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어.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렇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김희도가 이내 옅은 숨을 내쉬며 손을 떼고 몸을 바로 했다.

“솔직히 야구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재밌고 아니고를 떠나서 저한테 아무 의미 없었거든요. 근데, 선배 만나고 처음으로 야구를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느새 고개를 든 김희도가 임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손을 맞잡았다. 무의식인지 의도한 것인지 엄지손가락이 거친 손등을 살살 긁었다.

“요즘엔 조금 재밌는 것 같기도 해요.”

김희도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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