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4권) (11/41)

<사이클링 히트> 4권

#11

조예준에게서 전화가 온 건 새해가 된 지 1주일하고 사흘이 더 지난 어느 토요일이었다.

[주장.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너도 많이 받아라.”

[넵. 주장 이번 스캠에 포함됐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올해 스프링 캠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게 며칠 전이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자신의 이름이 맞았다.

기존 주전 선수들은 당연히 포함됐고 이례적으로 신인 김희도가 합류했다.

일각에선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김희도는 역대 신인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계약금을 받았다. 그만큼 구단 측에서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곧바로 1군에 올릴 거라는 썰도 돌았다. 야구를 주제로 하는 유튜브 채널에선 벌써부터 신인왕과 김희도의 이름을 함께 언급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캠프에 함께 가지 못하는 조예준이 마음에 걸렸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선물 사 오는 것 잊지 마시고요. 저는 여기서 ‘타도 김희도’를 외치며 열심히 훈련할게요. 올해는 꼭 1군 마운드에서 당당하게 주장 공 받겠습니다.]

정작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씩씩한 반응을 보였다.

“같은 팀인데 타도를 외치면 어쩌냐?”

농담 같은 진담을 하며 조예준과 통화를 끝냈다.

* * *

지난 시즌 불펜으로 처음 1군 마운드에 올랐던 임성은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즌 막판에 체력이 저하되며 아쉬운 모습도 보였지만,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다. 특히 체인지업은 레전드 선수 중 한 명인 박재이를 떠올리게 한다는 과분한 칭찬까지 받았다. 물론 당사자는 과한 칭찬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만족하지 않았지만.

구장 주변을 걷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났고, 얼마 전엔 어린이 팬으로부터 막대 사탕도 받았다.

고작 이 정도 관심에도 신기해하는 임성과 달리, 김희도는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번뿐 아니라 그는 사람들의 관심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칭찬이든 욕이든 그러려니, 아니 아예 뭐라 얘기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팬 서비스도 연봉에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는 임성으로선 김희도가 조금 걱정됐다.

시즌 개막을 얼마 앞둔 오늘은 구단 홈페이지 및 전광판에 올라갈 프로필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사이에서 임성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글러브를 만지작거렸다.

“성이는 얼굴이 왜 그러냐. 잠 설쳤어?”

우람한 어깨와 그에 못지않은 팔뚝으로 팬들 사이에서 ‘요정 곰’으로 불리는 주장 최희탁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그의 손에선 벤티 사이즈 컵도 작은 종이컵으로 보였다.

“프로필 찍는 건 처음이라 긴장됩니다.”

“작년에 안 찍었어?”

“등장할 때 나오는 것만요.”

“아아, 그거. 뭐, 자다 일어나서 찍어도 한껏 꾸민 권재영보다 훨씬 잘생겼을걸. 걱정 마.”

최희탁이 임성의 등을 퍽 치며 웃었다. 멀리서도 용케 알아들었는지 모자챙을 잡으며 폼을 잡던 권재영이 눈을 부라렸다.

“와, 그래도 형보단 제가 훨씬 낫죠. 어디 비교할 걸 비교하십니까? 자존심 상하네.”

권재영이 가소로운 표정으로 최희탁을 봤고, 최희탁은 배트를 손바닥에 탁탁 치며 응수했다.

“권재영. 많이 컸네.”

“저 원래 크잖습니까.”

서로 농담하며 여유로운 선배들과 다르게 임성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한쪽에선 구단 채널 담당 PD가 선수들에게 이것저것 질문 중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임성은 PD와 눈이 마주쳤고, PD는 마침 잘 걸렸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대뜸 카메라를 들이댔다.

“안녕하세요. 임성 선수. 지난 시즌 불펜으로 합류했는데요. 기분은 어떠세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이뤄진 인터뷰였다.

“TV에서만 보던 선배님들과 같은 자리에 있어서 무척 떨립니다.”

“선배들이 괴롭혀서 떨리는 건 아니고요?”

“그 부분은 우선 노코멘트 하고, 선배님들 안 계실 때 다시 대답하겠습니다.”

장난스러운 대답에 PD가 눈을 반짝이며 마이크를 가까이 갖다 댔다.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스타일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면 다른 질문 하겠습니다. ‘이 사람보단 내가 잘생겼다!’ 자, 3초 안에 대답하세요. 3, 2…….”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다 실력은 저보다 훨씬 잘생겼습니다.”

“아아, 실력은요?”

임성은 일부러 ‘실력은’이라는 문장을 힘주어 말했다. 본인 몫의 촬영을 다 끝내고 느긋하게 구경하던 선배가 어이없어했다.

“점마 저거 머고. 뺀질뺀질한 놈 한 명 들어왔네. 권재영이랑 같은 고등학교 맞제? 역시 권재영 직속 후배답다. 그 학교는 터가 이상하다니까. 터가.”

부산 사투리가 그대로 묻어나는 말투였다.

“역시 대 선유고 다운 대답이다. 장하다. 우리 후배.”

권재영이 킬킬대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임성은 쌍따봉으로 응수하며 뺀질뺀질한 놈이라는 말에 부응했다.

“임성 투수. 촬영하겠습니다.”

“네! 갑니다.”

임성은 공과 글러브를 양손에 들고 후다닥 뛰어갔다. 그리고 누가 봐도 신인 티가 나는 어색한 얼굴로 뻣뻣하게 포즈를 취했다.

“이번엔 팔짱 끼고 찍어 볼게요. 웃지 말고 최대한 카리스마 있게. 오, 좋다. 그대로 잠깐 멈출게요.”

사진 감독의 말에 임성은 얼른 글러브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차라리 인터뷰가 낫지, 이런 촬영은 영 어색했다.

임성이 잔뜩 긴장한 채 프로필 사진을 찍는 사이, 일명 ‘요정 랜드’라 불리는 페어리즈 매장에 한 남자가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기계적으로 인사 후 고개를 들었던 직원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콧등까지 덮은 남자를 보고 흠칫했다.

아무리 봐도 일반인 체격은 아닌데, 선수인가?

보통 야구 선수는 TV나 휴대폰 등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실물이 훨씬 더 크고 거대했다. 매체로 볼 땐 물렁살로 보이는 것도 대부분 근육이라 걸어 다니는 냉장고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저 남자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데다가 마스크로 가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잘생겼다는 느낌이 강하게 났다.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분위기 같은 거랄까.

오늘 연예인 시구가 있었나? 순간 생각했지만, 아직 개막 전인데 벌써 시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 그냥 손님? 역시, 선수?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네, 네?”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곁눈질하던 직원은 그가 고개를 돌리자 깜짝 놀랐다. 훔쳐보다가 걸렸다는 꽤 민망한 상황임에도 남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이거 달라고요.”

“거기 있는 것 다요?”

언뜻 세도 50장은 넘어 보이는 걸 다?

“사이즈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사이즈 상관없고 69번 마킹된 거 모두.”

……사기꾼인가. 미심쩍은 시선에도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는 남자를 보니 줄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뭐지. 떨떠름하게 걸어 나온 직원이 유니폼이 가득 걸린 행거 앞에 섰다. 보통 선수별로 유니폼을 모아 놓는데, 남자가 지목한 건 ‘69번 임성’이 마킹된 것이었다.

얼굴이 바로 생각나지 않는 데다 유니폼 종류가 두 개밖에 없는 걸 보면 신인이거나 최근 1군에 올라왔을 가능성이 컸다.

“유니폼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모자라든가 폰 케이스, 키링,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잠깐만요. 찾아보겠습니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간 직원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임성 선수는 현재 유니폼만 입고됐습니다.”

“계산해 주십시오.”

쯧, 혀를 찬 남자가 미련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네. 고객님.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띠딕, 띠딕. 영수증이 쉬지 않고 올라갔다.

매장에 걸린 것과 재고품을 포함해 수십 장에 달하는 유니폼을 포장했다. 이게 다 얼마야. 페어리즈 숍에서 일한 지 3년이 넘어가지만, 단일 품목을 이렇게 많이 판 적은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69번 선수 엄청 팬인가 보네. 그나저나 임성이 누구야?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보다가 휴대폰으로 페어리즈 69번을 검색했다.

* * *

“진짜 신인 왔다.”

“쟤는 완전 연예인이네. 곱상한 게 완전 배우야. 역시 전국 1차 지명답네.”

홈 유니폼을 입은 김희도가 등장하자 선배들이 박수를 치며 장난 섞인 농담을 퍼부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쑥스럽게 웃거나 어색해하기 마련인데 김희도는 무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했다.

거, 되게 낯가리는 놈이라며 선배들이 김희도를 포장했다.

그리고 되게 낯가리는 놈은 세상 어색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선 임성을 힐끔 보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찰칵, 찰칵, 찰칵.

묵직한 사진기 소리에 다소 가벼운 소리가 섞였다.

김희도는 선배들이 저를 황당하게 보든 말든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 가며 사진을 찍어 댔다. 급기야 촤라라라락 연사 소리가 울렸다.

오죽하면 권재영이 “인마, 뭘 그렇게 많이 찍어. 임성이 찍어 달라고 했냐?” 하고 물을 정도였다.

“개인 소장이요.”

무뚝뚝하게 내뱉은 김희도는 어리둥절해하는 권재영을 뒤로한 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촬영을 마친 임성이 숨을 내뱉으며 나오자 물을 건넸다.

“왔냐?”

“네. 역시 페어리즈에 오길 잘했네요.”

김희도가 슬쩍 웃었다.

“다음엔…… 김희도 선수 프로필 촬영하겠습니다.”

김희도는 살짝 젖은 임성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고 땀에 젖은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배트를 가볍게 앞으로 뻗으며 스윙하는 기본자세를 취했다. 흰 바탕에 민트색으로 포인트를 준 유니폼은 너른 어깨와 늘씬한 팔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다소 난해한 색상도 그에게는 맞춘 듯 어울렸다.

봐도 봐도 잘생겼단 말이야.

그때 카메라를 보고 있던 김희도가 불시에 고개를 돌렸고, 시선이 딱 마주쳤다.

왜, 할 말 있어? 뜻하지 않게 그와 마주 보게 된 임성이 입을 벙긋댔다. 대답 대신 씩 웃은 김희도가 배트를 이쪽으로 뻗었다.

꽤나 노골적인 표현에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옆에 있던 권재영은 김희도를 보며 지금 선전 포고하는 거냐며 웃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이거 작품 하나 나오겠는데요.”

카메라 감독은 연신 ‘좋습니다’를 외치며 셔터를 눌렀다. 다른 선수들보다 촬영 시간이 긴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윽고 촬영을 끝낸 김희도가 자리에서 벗어나자 요정TV의 PD가 김희도를 향해 마이크를 뻗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김희도는 PD를 피해 임성에게 걸어갔다.

“사진 확인 안 해도 돼?”

“어떻게 나오든 관심 없어요. 그것보다 선배, 아까 저 보고 있었죠?”

“어.”

임성은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인 PD를 힐끔 쳐다보고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김희도의 눈꼬리가 얄궂게 휘어졌다. 스무 살이 된 그는 예전보다 조금 더 건방지고 귀여워졌다.

“내 얼굴 마음에 들어요? 줄까요?”

“저번엔 손 준다고 안 했냐?”

“손도 주고 얼굴도 주려고요.”

귓가에 입술을 딱 붙이고 속삭이듯 말한 김희도가 그대로 임성의 어깨를 감싸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어? 인터뷰 따야 하는데. 김희도 선수, 잠깐만요!”

뒤에서 인터뷰 따야 한다는 외침이 들렸으나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탕! 철컥. 곧이어 문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에 앉은 김희도는 임성의 허리와 옆구리를 단단히 잡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어어, 야!”

아무리 앉은 자세라 해도 80kg이 넘는 성인 남성이었다. 무겁지 않을 리 없을 텐데 김희도는 전혀 힘든 기색 없이 뒤로 물러나는 등을 껴안았다. 그 상태로 턱을 살짝 들어 올리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쪽. 하고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얌마. 여기 구단이다. 장소 구분은 좀 하자.”

“장소 구분해서 이 정돈데요? 문 잠갔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싫어요? 난 선배가 싫어하는 건 안 해요.”

시선을 살짝 내렸던 김희도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올라가고,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임성은 그 속에서 당황하는 제 얼굴을 마주했다.

약은 놈. 저 얼굴로 싫냐고 묻는 건 반칙 아니냐?

“싫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말꼬리가 기어 들어갔다.

“그럼 좋은 거네.”

활짝 웃으며 다시 한번 입술을 부딪치는 데 도무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포기 선언을 하고 엉거주춤 그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간지럽게 맞닿았던 입술이 이내 깊게 맞물렸고,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 안으로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던 키스는 급하고 거칠어졌다. 입 안을 온통 집요하게 휘젓고 혀 아래 타액을 삼켰다.

김희도는 임성이 움직이지 못하게 뒷 목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비틀었다. 콧날이 스치며 입술이 더욱 깊게 맞붙었다. 아랫입술이 혀로 쓸리고 깨물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임성은 김희도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바짝 붙였다.

한참이나 물고 빨던 김희도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물렸다.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인 키스에 가슴이 들썩였다. 임성은 그대로 김희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쪽, 쪽. 짧게 입 맞추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

“뭘요, 키스? 어디 만족할 때까지 해 볼까요?”

“감당할 수 있겠어?”

“내가? 아니면 선배가?”

“당연히 너지.”

임성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턱과 뺨을 다시 감쌌다.

* * *

최근 몇 년간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던 페어리즈 감독은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경질됐다. 팬들의 원성은 극에 달했고, 구단주는 메이저리그 출신의 외국인 감독을 새로 영입했다. 피엘로 리베르 감독은 메이저에서 유행하는 훈련 방식을 그대로 도입해 선수들에게 전파했다.

임성을 비롯한 몇몇 투수들은 구속 향상 및 밸런스 잡는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으며 새 시즌을 준비했다.

스프링 캠프를 비롯한 청백전, 연습 경기 등 여러 데이터를 통해 얼추 4선발까지 윤곽이 나왔고, 마지막 5선발 자리를 놓고 몇 명의 선수들이 경쟁했다. 임성 또한 경쟁자 중 한 명이었다.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떤 보직이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1군에서 시작을 한다는 자체가 고무적이지 않은가.

오전 훈련을 끝내고 식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피곤한 얼굴의 마케팅 팀장이 임성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봐도 잘생긴 얼굴은 여전하네요. 시즌 준비는 잘 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팀장께선 요새 야근 좀 줄었습니까?”

팀장은 손사래를 치더니,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속삭였다.

“말도 마세요. 우린 비시즌에 더 바빠요. 작년에 굿즈 매출 하락해서 위에서 엄청 쪼거든요. 누가 보면 딱따구린 줄.”

사실 스포츠 구단은 수익을 내기 힘든 구조였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구단을 운영하는 이유는 기업의 홍보 및 이미지 향상을 위해서였다. 만년 적자인 와중에도 어떻게든 수익을 뽑아야 하는 게 마케팅팀의 슬픈 현실이었고.

“아! 임성 선수 유니폼 매진된 거 알아요?”

“제 유니폼이요? 아직 개막도 안 했는데, 벌써 나왔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유니폼이 나왔다는 소식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매진이라니?

“네. 숍에 입고되자마자 누가 싹 쓸어 갔대요. 온라인도 마찬가지고.”

“5장 정도 뽑았습니까?”

“설마요. 뭐, 신인이라 수량을 좀 적게 뽑긴 했는데, 하루 만에 매진 될 정도는 아니고요.”

“그게 아니면 이유가 뭐예요?”

“글쎄요. 당연히 팬 아닐까요?”

마케팅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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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시즌이 점차 다가오자 여기저기서 야구 관련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3은 프랜차이즈 선수나 최근 FA로 이적해 온 선수에 대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1군에 합류한 김희도였다.

그에겐 하루에도 몇 개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대부분 거절하다가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엔 “예.” 혹은 “아니요.”처럼 짧게 대답해 싸가지 없다는 말이 살짝 돌았다. 그런 김희도가 유독 한 가지 질문에만 표정이 달라졌다. 차가운 말투 역시 부드럽게 변해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변화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요정TV입니다. 먼저 팬분들께 인사 부탁드려요.』

『김희도입니다.』

『많은 팬분들이 인터뷰 요청해 주셨던 김희도 선수입니다. 김희도 선수, 팀에는 적응하셨을까요? 제일 잘해 주는 선배는 누굽니까?』

『임성 선배입니다.』

『임성 선수와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죠? 권재영 선수, 현재 2군에 있는 조예준 선수까지 같은 선유고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소 임성 선배에게 많은 조언을 받았습니다. 선배님 덕분에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희도는 권재영이나 조예준 이름을 아예 듣지 못한 사람처럼 대답했다. 별것 아닌 말에도 요정TV의 PD는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영상 조회 수가 잘 나오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만 들어도 두 분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 알겠습니다. 같은 팀이 돼서 기쁘겠어요?』

『무척 기쁩니다.』

웃음이라곤 전혀 모르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던 눈매가 풀어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부담스러울 만큼 깊숙이 들어온 카메라가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찍었다.

『만약 페어리즈에 지명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적 없습니다.』

표정과 말투 모두 자신만만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존경하는 임성 선수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좋아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영상을 접한 당사자는 김희도의 인터뷰를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게 틀림없다니까요? 개또라이. 조만간 1군에 찾아가서 손 좀 봐 줘야겠어요.]

놀란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는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조예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임성은 씩씩대는 그를 달래면서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했다.

[아, 맞다. 주장. 양민성 이번에 방출됐대요. 들었어요?]

“벌써? 입단한 지 얼마나 됐다고…….”

[들리는 소문으론 거기서도 문제 일으킨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애초에 뽑힌 게 기적이잖아요. 고등학교 때야 자기 엄마 빽으로 해결했다지만, 프로에서 그게 통하겠어요?]

졸업한 지 햇수로 3년째, 아직 두 개의 시즌밖에 치르지 않았다. 양민성은 한 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방출된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가며 아득바득 군것치곤 너무나도 초라한 퇴장이었다.

그 새끼. 성격 파탄 마마보이 새끼. 조예준은 그 뒤로 한참이나 더 양민성의 욕을 퍼부었다.

[재수 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저 지금 엄청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내 몸 안의 야수의 피가 들끓는다니까요. 주장은요?]

“나도 마구(魔球) 연습 중이다. 매일 밤마다 왼팔의 흑염룡이 날뛰어. 이걸 얼른 쏟아내…… 아, 예준아. 이제 끊어야겠다. 또 연락할게.”

임성은 훈련장에 들어오는 김희도를 발견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인적 드문 장소로 데려가 팔을 놓았다.

김희도가 한 발짝 다가왔다. 무의식중에 물러서던 임성은 곧 뒤가 벽이라는 걸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뽀뽀해도 돼요?”

“갑자기 뭔 이상한 소리야. 그나저나 그거 뭐냐?”

“뽀뽀가 이상한 소린가? 그리고 어떤 ‘그거’를 말하는 거예요?”

“오늘 구단 유튜브에 올라온 인터뷰.”

그는 임성의 말을 되새기는 것처럼 눈을 좁혀 뜨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거. 선배가 내 마음을 의심하니까 보여 주려고요.”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혹시 들키면 어쩌려고.”

“그럼 더 좋고요.”

임성은 무심한 목소리를 들으며 착잡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설마 2년 전 얘기를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냐?”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요? 난생처음 고백했더니, 착각이라잖아.”

“갑자기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당황했지.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이해해요. 하지만 내 감정을 부정하는 건 잘못이잖아요. 아닙니까?”

“맞……지.”

분명 김희도에게 자중하라는 말을 하러 왔는데, 오히려 그에게 추궁당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물론, 그의 마음을 멋대로 단정 지은 건 잘못이었지만, 두 살 어린 동성 후배가 갑자기 고백하는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네 마음은 아주 잘 알겠으니까 조금만 자제하자. 응?”

“저 지금 엄청 자제하고 있거든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 속에 들끓는 열기가 낯설었다. 임성은 숨을 짧게 내뱉고선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에는 살짝만 뻗어도 됐던 팔은 이젠 제법 높게 들어야 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감기는 보드라운 머리카락과 달큼한 냄새는 그대로였다.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발갛게 물드는 귓등까지.

“앞으로 천천히 알려 줘. 내 앞에서만. 응?”

“아, 완전 치사해. 내가 선배한테 약한 거 알면서 그런 말 하는 거죠?”

“인마. 솔직히 그건 나지. 어딜 봐도 내가 너한테 약하잖아.”

“좀 더 약해지면 안 돼요? 이 정도론 한참 부족한데.”

김희도는 제 어깨를 임성에게 가까이 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 자식은 왜 자꾸 귀여운 척이야. 아니, 뭐, 그래. 지나칠 정도로 예쁘고 귀엽긴 해.

순순히 인정한 임성이 그의 뺨을 한가득 감싸고 꾸욱 눌렀다. 부드럽고 탱글탱글한 뺨이 가볍게 눌리며 입술이 뚱하게 튀어나왔다. 임성은 오리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곤 후다닥 떨어졌다.

“난 간다. 푹 자고 내일 보자.”

“어? 어. 선배! 잠시만요. 잠깐 거기 서 봐요!”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척 서둘러 자리를 떴다.

* * *

아직은 공기에 찬 기운이 서린 3월의 마지막 주, 드디어 프로 야구가 개막했다. 총 10개의 팀이 오늘부터 가을까지 우승을 놓고 치열한 승부를 가리게 됐다. 임성에겐 3번째 맞이하는 시즌이자 김희도와 함께 치르는 첫 시즌이기도 했다.

비시즌 동안 정말 토 나올 정도로 운동했다. 지난 시즌 막판에 체력이 달린 게 못내 분했던 탓이었다. 임성을 졸졸 쫓아다녔던 김희도 역시 얼떨결에 트레이닝 룸과 체육관, 레슨실에 살다시피 했다.

조예준은 여전히 2군에서 열심히 트레이닝을 받고 있으며, 올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김희도는 아쉽게 5선발을 확정받진 못했지만,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팬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1군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페어리즈는 오늘 개막 경기가 열리는 샤크스 파크에서 몸을 풀었다.

“개막 경기를 1군에서 보는 건 처음이야. 원정이라서 더 떨리는 것 같아.”

임성은 김희도와 캐치볼을 하며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경기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응원 도구와 음식 등을 든 관중들이 입장했다. 보통 잠실이나 고척엔 원정 팬도 만만찮게 많은데, 지방 구장은 해당 연고지 팀 팬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샤크스 팬들이 좌석을 모두 메웠다. 구장이 샤크스 팀 컬러인 보라색으로 뒤덮인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커다란 전광판에 선발 라인업이 떴다.

「9. 김희도 (RF*우익수)」

임성은 라인업에서 김희도의 이름을 발견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작년 불펜으로 처음 마운드를 밟았을 때만큼이나 긴장됐다. 입단하자마자 선발 포함이니 김희도 역시 못지않게 긴장하고 있겠…….

“저녁 뭐 먹을까요? 오랜만에 김치찌개 어때요? 요 근처에 김치찌개 맛집 찾아 놨어요.”

김장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말투였다.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아.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 곳곳을 살펴봤지만,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한 시선만 받았을 뿐이었다.

“넌 긴장 안 되냐?”

“긴장할 게 뭐 있어요. 경기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그는 천천히 날아오는 공을 잡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은 척이 아니라, 정말 괜찮은 것이었다.

“프로 무대는 처음이잖아. 그리고 오늘 매진이래. 관중 꽉 찼다고.”

“관중이 꽉 찬 게 왜요?”

그는 짙은 보라색으로 출렁이는 관중석을 힐끔 쳐다보고선 다시 공을 던졌다. 임성이 긴장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원래도 강심장인 건 알았지만, 만원 관중 앞에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진짜 멘탈 대단해. 한편으론 신기하고 부럽기까지 했다.

그라운드 한쪽에선 샤크스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몸을 풀고 있었다. 임성은 보라색 군단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팔을 위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던 백도경 역시 임성을 보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야. 임성이잖아. 이게 얼마 만이냐. 1군에서 보니까 감개무량하네.”

“그러게나 말이다. 너 오늘 선발 출전이라며? 축하한다.”

“원래 내가 좀 하잖냐. 뭐, 아직은 하위타순이지만 곧 치고 올라갈 거다.”

“자신감은 여전하네.”

백도경이 씩 웃었다. 재작년 대통령배 준결승 이후 백도경과 만나는 건 처음이라 더욱 반가웠다. 가뜩이나 거대했던 백도경은 그새 더 컸는지 고개를 뒤로 꺾어야 했다. 설마 2m 넘는 건 아니겠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볼 때마다 쑥쑥 자라는구만.

“넌 불펜으로 나오냐?”

“경기 들어가 봐야 알겠지?”

“치사하게 안 알려 주네. 아무튼, 다음엔 네 공 꼭 칠 거다. 그때도 꼭 체인지업 던져라.”

“쉽지 않을걸. 고등학교 때 보다 훨씬 강력해졌거든.”

“그동안 나도 뭐 빠지게 했거든?”

두 사람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짙은 보라색 점퍼를 입은 샤크스 코치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백도경은 서로 잘해 보자는 말을 남기며 뛰어갔다.

혹시 모르니까 나도 어깨 좀 데워 놓을까.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손이 불쑥 뻗어 나왔다. 강하지 않은, 그러나 결코 약하지도 않은 힘이 각진 어깨를 촘촘히 덮고 살짝 당겼다. 어깨동무보다 포옹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임성은 그대로 고개를 살짝 틀어 김희도를 올려다봤다.

“왜?”

“열받고, 속이 막 뒤틀리는데, 이게 긴장이에요?”

“그건 짜증 아니야?”

그의 미간에 굵게 저리한 주름을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김희도가 임성의 옆머리에 이마를 기댔다.

“그래봤자 땀 냄새밖에 안 날 텐데?”

“그거 맡으려고요. 알잖아요.”

깊은 들숨과 얕은 날숨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임성은 글러브를 낀 손으로 김희도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오늘 경기 잘해.”

“네. 그럴게요.”

경기가 시작되기 몇 분 전, 페어리즈 점퍼와 모자를 푹 눌러쓴 리베르트 감독이 선수들을 둘러봤다. 10년 넘는 베테랑도 개막전은 긴장되는지 최희탁이 연신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퓨처스 때와는 또 다른 결연한 분위기에 임성은 숨소리를 죽였다.

다들 긴장한 와중, 외야수 굳이 투수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임성의 옆에 선 타자 한명이 있었으니.

“……!”

한껏 집중한 얼굴로 감독의 말을 경청하던 임성이 순간 움찔했다. 고개는 그대로 감독에게 고정한 채 눈동자만 아래로 내렸다. 김희도의 손이 제 손등을 툭툭 치고 있었다.

뭐 하냐? 소리 없이 시선으로 묻자, 그는 살짝 웃더니 곧장 손을 돌려 손바닥을 겹쳐왔다. 커다란 손바닥이 틈 없이 맞붙고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손등을 꽉 움켜잡았다.

헉,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왜 이래. 김희도 옆에 바짝 붙으며 잡고 있는 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감췄다.

사내 비밀 연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아니, 물론 사내 연애도 맞고, 비밀 연애도 맞지만 이건 너무 대담하잖아.

얼른 손 놔. 열심히 곁눈질했지만, 김희도는 모른 척 감독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임성은 자꾸만 맞잡은 손으로 향하는 신경을 애써 바로잡았다.

“오늘은 우승을 향한 첫걸음이다. 고작 한 게임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마지막처럼 열심히 해라. 언제까지 팬들이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가 계속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면 실망하고 떠날 것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기는 것이야말로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이다.”

통역이 감독의 말을 동시에 번역했다.

뒤이어 주장 최희탁이 파이팅을 외치며 선수의 기운을 북돋아 줬다.

곧 애국가가 울렸고,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가슴에 한 손을 얹었다. 선수들 역시 양 팀 깃발 사이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응시했다.

카메라 감독이 빠르게 움직이며 선수들을 잡았다. 카메라는 유난히 김희도 차례에서 오래 머물렀다.

“파이팅, 페어리즈 파이팅! 보여 주자고.”

페어리즈 1번 타자 차성연이 타석으로 걸어갔고, 나머지 선수들은 더그아웃에 옹기종기 모여 목이 터져라 파이팅을 외쳤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임성은 그라운드가 가장 잘 보이는 더그아웃 1열에 자리를 잡았다.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 김희도가 어깨에 팔을 얹으며 귓불을 만지작댔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간지러움에 목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김희도. 까불지?”

“긴장돼서 그래요. 저 오늘 첫 출전이잖아요.”

긴장은 무슨. 덤덤하다 못해 심드렁하던 자식이 어디의 누구더라.

개막 경기답게 양 팀 에이스들이 호투를 펼치며, 어느덧 김희도의 차례가 다가왔다.

“곧 네 타석이다. 잘하고 와라.”

“그럼요. 누구랑 같이 뛰는 건데요.”

그는 장난스럽게 웃고선 대기 타석으로 걸어갔다. 흔들림 없이 믿음직한 뒷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라인업을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던 심장은 김희도의 순서가 가까워질수록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이대로라면 금방 터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어째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더 떨려 하냐.

“임성, 표정이 왜 그리 심각해. 쫄았냐?”

“헉.”

한껏 몰입하고 있던 임성은 제 어깨에 무게가 가해지자 깜짝 놀라며 몸을 틀었다.

“악. 깜짝이야! 인마, 내가 더 놀랐다.”

권재영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임성은 그제야 제가 과도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몸에 힘을 풀었다. 권재영이 다시금 임성의 오른쪽 어깨에 제 팔을 얹었다.

“너도 작년에 뛰어 봐서 알겠지만, 퓨처스랑 똑같아. 관중이 몇만 배 더 많고, 내 공이 얻어맞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만 빼면.”

“……진짜 똑같은 거 맞습니까?”

“진짜라니까. 선배 말 못 믿냐?”

“1, 2점 차에 신인을 내보낼 리 없다는 말은 기억합니다.”

“짜식. 결국 잘 막았잖냐. 그럼 됐지.”

권재영이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등을 두드렸다. 우스갯소리에 나름 긴장을 풀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던 김희도가 어느새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막상 타석에 서니까 역시 떨리는 걸까. 힘내라. 임성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어, 어어? 여기로 오면 어떡해. 대기해야지. 대기.”

임성은 제게 걸어오는 김희도를 보며 기겁했다. 하지만 그는 임성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그아웃으로 와선 임성의 어깨에서 권재영의 손을 자연스럽게 떼어 내고 눈을 맞췄다.

“치고 올게요. 선배.”

손끝의 온기는 뺨을 툭 건드리며 떨어져 나갔고, 배트를 든 김희도가 그라운드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야. 점마 깡다구 제대로네. 약간 또라이 같은 게 마음에 든다.”

김희도에게서 밀려난 권재영이 양팔을 펜스에 얹으며 감탄을 터트렸다.

샤크스의 1선발은 메이저에서 뛰던 투수로 낙폭이 큰 변화구가 주특기였다. 작년 샤크스가 좋은 성적을 거둔 데엔 이 선수의 활약이 컸다.

타석에 선 김희도는 늘 그렇듯 배트를 잡으며 곧바로 타격 자세를 취했다.

김희도! 김희도!

원정 팬이 모인 3루 쪽에서 그의 이름을 열렬히 연호했다.

“치고 와. 네가 누군지 보여주라고.”

임성이 양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공이 스트라이크 존 부근에서 확 꺾였다. 김희도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고,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역시 1선발은 1선발이구나. 어떻게 저 속도로 변화구를 던지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샤크스 투수가 다시 공을 던졌고, 처음 자세를 유지하던 김희도는 배트를 돌렸다. 상·하체가 완전히 돌아가는 풀 스윙이었다.

따앙!

잘 맞은 타구가 좌중간을 정확히 갈랐다. 배트를 툭 내려놓은 김희도가 1루 베이스를 밟고, 무려 2루까지 진출했다.

우아아아. 페어리즈 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오, 대박. 데뷔 첫 타석에 안타. 그것도 2루타.”

페어리즈 선수들이 오오, 감탄을 터트렸다. 임성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상체를 내밀고 있다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역시 해낼 줄 알았다니까.

“스윙 폼 엄청 부드럽네. 쟤 고등학교 때도 저랬어?”

“네. 네. 오늘은 좀 얌전한 편이에요.”

아직 제대로 안 보여 줬다고요. 임성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구단에서 유니폼 바로 내놓겠는데?”

“그렇죠? 인기 많겠죠?”

“어째 네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너무 직속 선배 티 내는 거 아니냐?”

“재영 선배 후배도 되잖아요.”

“아, 그러네. 역시 대 선유고등학교 야구부다. 선유고 만세.”

가볍게 던진 농담에 권재영이 특유의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불펜으로 이동했다.

김희도의 출루 이후 안타가 연달아 터지며 김희도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이솔 페어리즈 1 : 0 BS 샤크스]

그는 선취점을 올린 사람답지 않은 담담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팀원들은 첫 경기에서 점수를 뽑아낸 신인을 환영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임성은 김희도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만큼 긴장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김희도. 제발 선배들 무시하거나 피하지 마라. 특히 토하면 절대 안 된다. 하다못해 고개라도 끄덕여.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김희도는 자신의 헬멧과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으나 대놓고 정색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치고 온다더니 진짜 치고 왔네. 첫 득점 축하한다. 이따 공 챙겨.”

임성은 그를 끌어안고 뒷머리를 헝클이듯 거칠게 쓰다듬었다. 김희도는 평소처럼 임성의 허리를 감싸려다가 멈칫했다.

장소 좀 가리자던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제멋대로 굴면서도 은근히 말 잘 듣는다니까. 그게 또 기특해 웃으면서 그의 양쪽 뺨을 꾹 눌렀다.

“헉. 나도 모르게 너무 힘줬나 보다. 빨개졌다.”

“더 해도 괜찮아요. 자국 남으면 더 좋고요.”

김희도는 임성의 손을 다시 제 뺨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리고 그날 페어리즈는 무려 5년 만에 개막 경기에서 승리했다.

* * *

KBO 내 인기 구단을 꼽으라면 대부분 이솔 페어리즈와 HR 유니콘즈, BS 샤크스를 말할 것이다. 세 팀 다 홈, 원정 할 것 없이 관중 동원력이 좋으며 열성 팬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팬들의 명암은 확실히 갈렸는데, 불과 몇 년 전에 한국 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유니콘즈나 3년 전 정규리그 1위에 빛나는 샤크스와 다르게 페어리즈는 몇 년째 하위권에 머무는 중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신인왕은 무려 17년 전이라는 기록 아닌 기록을 세우는 중이었다.

세 팀 중에서도 페어리즈와 유니콘즈의 경기는 「판타지 더비」라고 불리며 특히 주목도가 높았다. ‘요정’과 ‘유니콘’이라는 다소 깜찍한 구단명 덕에 생긴 명칭이었다.

그리고 오늘 유니콘즈와 페어리즈의 첫 번째 판타지 더비가 시작됐다.

“나 1군에서 김이설 선배님 만나는 거 처음이야. 헐, 비시즌 때 운동 엄청 하셨나 봐. 몸 되게 좋으시네. 엄청 탄탄하셔.”

“…….”

“그치, 희도야.”

임성은 잔디밭에 앉아 스트레칭 중인 김이설을 연신 살펴보며 작게 속삭였다. 지난 시즌에도 자신은 1군에 있었지만 김이설이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팬이었던 터라 꼭 연예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따 경기 마치고 사인받으려고 유니폼까지 챙겨왔다.

“운동선수면 저 정도는 당연하지 않아요?”

김희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기분이 안 좋나? 물어보려는 찰나, 코치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곧 경기가 시작되고, 양 팀의 선발 모두 좋은 공을 던지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균형을 이어 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천천히 타석으로 들어섰고, 동시에 웅장한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김이설 나왔다. 이야, 홈런을 얼마나 더 치려고 벌크업 했냐.”

김이설은 배트를 바닥에 닿을 듯 툭툭 치고 어깨에 걸친 뒤 앞으로 쭉 뻗는 특유의 루틴을 마치고 타격 자세를 취했다.

임성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배트를 쥔 남자를 주시했다. 햇볕 좋은 곳에서 훈련을 하다 왔는지 살짝 그을린 피부가 건강해 보였다.

저 남자를 상대로 과연 제 공이 통할 것인가.

따악!

호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가 허공을 가르며 멀리 뻗어 갔다.

와, 이건 진짜 잘 맞았다. 적어도 2루타, 아니, 어쩌면 3루타까지 갈지도.

……라는 생각은 어디선가 튀어나온 김희도가 몸을 날려 공을 잡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는 앞으로 달려가며 글러브 낀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어, 뭐야?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서로를 보며 웅성댔다.

『김희도가 중앙으로 달려오면서, 달려오면서어어어! 아! 잡습니다. 페어리즈 김희도. 김희도가 귀중한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아냅니다. 이야, 정말 멋진 수비였어요. 1루로 뛰어가던 김이설이 허탈한 표정을 짓습니다.』

흥분했는지 캐스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고등학교 때 수비 범위가 좁다는 말이 많았죠? 우려를 말끔하게 씻어 내는 슈퍼 캐치였습니다.』

김희도는 가슴팍을 툭툭 털어내며 아웃된 공을 포수에게 던졌다.

“쟤 수비 못 한다지 않았냐?”

임성은 선수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펜스를 꽉 움켜쥐었다.

김희도의 실력은 대체 어디까지 발전할까. 확실한 건 이제 시작이란 것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연신 대박을 외치던 권재영은 김희도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두툼한 팔로 그의 목을 휘감으며 “야, 잘했어. 방금 수비는 안타랑 동급이었다.” 하고 말했다. 김희도는 제 몸에 닿은 손을 반사적으로 쳐 내려다가 임성을 쳐다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참고 있구나. 쟤도 나름대로 노력 중이야.

“재영이 형. 더그아웃 뒤에 과자 있는 거 봤어요? 신상 초코칩이요.”

“어, 진짜? 신상?”

금세 헤드록을 푼 권재영이 신난 얼굴로 더그아웃 뒤로 걸어갔고, 임성은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김희도에게 물을 건넸다.

“잘 참았다.”

그는 물통을 손에 쥐고 임성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땀 냄새 섞인 체취가 희미하게 풍겼다.

그리곤 임성의 품을 파고들 듯이 껴안으며 어깨와 목덜미에 뺨을 가볍게 비볐다.

“기분 나쁘니까 꺼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어요.”

임성은 김희도의 귀와 옆머리를 감싸 안으며 더그아웃 사람들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경기에 집중하고 있어 이쪽은 관심도 없었다.

“잘했어. 앞으로도 절대 하지 마.”

“선배만 나한테 안 떨어지면요.”

“불안해서 떨어지겠냐?”

임성이 웃으며 그의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최희탁의 천금 같은 2루타. 오원학, 강찬수가 차례대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페어리즈가 2점을 추가하며 멀리 달아납니다. 7회 초 현재 스코어는 6 대 2. HR 유니콘즈 투수 교체가 있습니다.』

페어리즈의 방망이는 불을 내뿜으며 7회에만 무려 4점을 뽑아냈다.

대량 실점을 한 유니콘즈 투수는 그 후로도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내려가고, 젊은 선수가 마운드를 넘겨받았다. 제게도 무척 익숙한 남자가.

“……이치연.”

임성은 그의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이치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모자를 벗었다가 살짝 옆으로 눌러썼다. 그리고 흰 가루 범벅인 손을 후 불고 공을 움켜잡았다.

마침 김희도의 타석이 돌아왔다.

『김희도와 이치연의 시즌 첫 대결입니다. 두 선수의 인연은 참 깊은데요. 2년 전,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맞붙은 전적이 있죠. 그때 김희도가 이치연을 상대로 역전 투런을 때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선발 투수였던 임성 선수와 포수 조예준까지 페어리즈에 입단했네요.』

이치연과 김희도가 마주 보고 섰다. 배트를 쥔 김희도는 평소보다 더 차가웠고, 이치연은 노골적으로 김희도를 쏘아봤다.

왜 저렇게 사이가 안 좋아 보이냐. 자신이 알기에 둘이 직접 대결한 건 대통령배가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자신이 모르는 뭔가 있는 걸까.

이치연이 공을 글로브에 감추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땅에 디디면서 젖혔던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무려 150km가 넘는 빠른 직구였다.

깡! 김희도의 배트에 정확히 맞은 공이 글러브를 뻗는 수비수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유니콘즈 외야수가 뒤늦게 공을 잡았지만, 먼저 진루해 있던 페어리즈 타자들이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추가점을 냈다.

“오, 나이스. 김희도! 왜 저렇게 잘하냐?”

관중석과 더그아웃에서 기쁨의 환호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점수를 내준 이치연이 인상을 팍 쓰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결코 좋은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계속 2루에 공을 던지는 모션을 취하며 김희도를 견제했다. 김희도 또한 그답지 않게 적극적인 도루 자세를 취했다. 보이지 않는, 아니 눈에 빤히 보이는 신경전이었다.

저러다 갑자기 멱살 잡고 싸우진 않겠지? 왠지 금방이라도 그럴 것 같은 예감에 임성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하지만 이치연은 얼마 못 가 교체되고, 그 후 큰 변수 없이 페어리즈의 승리로 끝났다.

오늘의 MVP는 1실점밖에 하지 않은 선발 투수 노현우와 환상적인 수비를 보인 것도 모자라 득점까지 한 김희도였다.

노현우가 먼저 인터뷰를 하는 사이 더그아웃 펜스 앞까지 걸어온 김희도가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자칫하면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임성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물렸다.

“김이설은 오늘 무득점이었어요. 저는 이치연 상대로 안타 때리고 득점도 했고요.”

가늘게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눈썹을 덮고, 양 볼에 홍조를 발갛게 띤 김희도가 말했다. 살짝 들어 올린 턱이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뿌듯함이 드러났다.

호승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구나. 귀여운 자식 같으니.

“그래. 엄청 잘 쳤어. 상대 선발이 좌타에 강한데, 안타 두 개나 쳤잖아. 이치연 공도 치고.”

“이 정도면 내가 더 멋있지 않나?”

마치 들으라는 듯한 중얼거림에 임성이 얼떨떨하게 그를 봤다. 평소엔 홈런을 쳐도 덤덤하던 애가 오늘따라 묘하게 상기된 것 같았다.

김이설, 이치연. 익숙한 이름을 되뇌던 임성이 문득 눈매를 가늘게 좁혀 떴다. 설마 자신이 했던 말 때문은 아니겠지 싶어서.

“야, 너…….”

“김희도 선수.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저 인터뷰하고 올게요. 어디 가지 마세요. 유니폼 갈아입지도 말고요.”

다급히 입을 떼려 했지만, 이미 김희도는 그라운드로 뛰어간 후였다.

* * *

홈경기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선수도 있었고, 남아서 개인 운동을 하는 선수도 있었다.

그리고 임성과 김희도는…….

“후, 으. 희……, 음.”

김희도는 임성의 어깨를 붙잡고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혹 뒤통수가 부딪칠까 봐 다른 손으론 뒷머리를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방비한 입술을 가르며 들어온 혀가 입 안을 샅샅이 헤집었다. 치아 끝에 아랫입술이 씹히고 혀 아래 고인 타액이 흘러넘쳤다. 평소 느긋한 성격답지 않은, 갈증을 해소하는 듯한 갈급한 키스였다. 아니, 김희도의 키스는 늘 끈질겼다.

김희도는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임성의 입가로 흐른 타액을 핥았다. 숨이 벅차다 못해 눈앞이 핑 돌았다.

“진정 좀…….”

“불가능한 거 알면서.”

김희도는 어느새 임성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쪽, 쪼옥. 살갗이 씹히고 빨리는 감각이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흐으. 임성은 허리를 바짝 세우며 등을 벽에 붙었다.

다리 사이를 가르며 들어온 김희도의 무릎이 허벅지 안쪽을 야릇하게 쓸었다. 계속되는 자극과 노골적인 욕망에 몸이 움찔대며 멋대로 떨렸다.

“선배한테서 지금 엄청 좋은 냄새 나요.”

아니 지금뿐만이 아니라 항상. 평소보다 뜨거운 숨이 살갗에 내려앉았다. 임성은 목을 움츠리며 숨을 들이켰다.

김희도는 자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지만, 오히려 좋은 향을 풍기는 건 그였다. 본연의 체취와 땀 냄새가 미묘하게 섞여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발뒤꿈치를 들썩이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임성의 충동을 부추겼다. 하지만 여긴 밖이었다.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은 거 알아요? 선배.”

쿵쿵 뛰는 가슴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귓가에 입술을 딱 붙이며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머릿속이 녹아내렸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안 들키면 되잖아. 잠시 고민하던 임성은 눈을 질끈 감고 김희도를 마주 안았다.

“알아.”

나도 그러니까.

물어뜯을 것처럼 거칠던 키스가 곧 농밀하게 변했다. 입술이 뭉개지고, 떨어졌다가 비비기를 반복했다. 뜨거운 혀가 서로의 입 안을 헤집었다.

뒤통수를 감싼 손은 머리카락을 헤집다가 긴장한 등을 타고 내려왔다. 땀에 젖은 손가락이 달아오른 살갗 위를 끈적하게 덧그렸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겨우 뱉어 낸 말은 곧 김희도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임성을 통째로 삼키고 싶은 사람처럼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 혀, 타액.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후으. 희도야.”

그리고 임성은 목구멍을 꽉 막은 숨을 뱉어 내며 고개를 젖혔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입술이 이번엔 턱 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제 흔적을 남겼다.

“하아, 선배가 내 이름 부를 때마다 흥분되는 건요? 그것도 알아요?”

풋풋한 홍조가 아닌 열띤 흥분이 김희도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흘러넘칠 정도로 입 안의 타액이 흥건한데도 목이 탔다. 임성은 등을 떼어 내며 고개를 들었다가 김희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김희도는 임성의 귓불을 만지작대다가 다시금 그의 턱을 감쌌다. 숨 막히는 긴장감, 흥분, 알 수 없는 열기가 엉망으로 머릿속을 휘저었다. 임성은 그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며 윗입술을 진득하게 빨았다.

“지금 화장실 왔다. 아니, 음료수 쏟아서 완전 끈적끈적해. 어, 지금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어디로 가면 되냐?”

거친 숨소리와 혀가 엉기는 소리만 가득하던 공간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누, 누가 들어왔어. 임성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깜짝 놀란 임성과 달리 김희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성의 귀를 삼키고 혀로 귓바퀴를 쓸었다.

혹시 화장실 밖에 있는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김희도의 어깨를 짚은 채 터져 나오는 숨을 삼켰다. 눈앞이 핑 돌다 못해 흐려졌다.

“애들 다 왔어? 지금 나간다. 출발할 때 다시 연락할게.”

남자는 바로 나가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거울을 보며 머리 정리라도 하는 모양이지.

콸콸 쏟아지던 물소리가 멎은 화장실은 더욱 조용해져 작은 소리도 울릴 것 같았다. 임성은 겨우 김희도를 밀어내며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헉, 허억.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타액이 달고 뜨거웠다. 하지만 김희도는 양손으로 임성의 뒷 목을 받치며 고개를 내렸다. 다시금 입술이 맞붙고 혀가 뒤엉겼다.

흠, 흐음. 콧노래와 함께 화장실을 나가는 발소리가 울렸다.

“숨 쉬어요.”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김희도는 주저앉으려는 임성의 옆구리를 꽉 붙잡아 고정하고선 귀 뒤에 입술을 묻었다. 쿵쾅대는 심장과 달리 몸은 착실하게 반응했다.

“야, 거기 문지르지…… 나중에! 나중에 숙소에 가서. 응?”

지금 상태론 키스보다 더한 걸 할 것 같아 다급히 말렸다.

“네.”

그는 흥분한 게 언제였냐는 듯 말끔한 얼굴로 물러났다. 임성은 반쯤 말려 올라간 유니폼을 내리며 입을 닦았다. 얼마나 빨아 댔는지 손등에 쓸리는 입술이 따가웠다.

“숙소에 가요. 지금 당장.”

팔을 뻗은 김희도가 거의 목을 휘감다시피 어깨동무를 했다. 화려하고 예쁜 얼굴과 다르게 억센 손힘이 마치 옥죄듯 임성의 어깨를 감쌌다.

대부분의 구단은 1군 숙소가 없지만, 페어리즈는 소수의 신청자에 한해 별도의 숙소를 제공했다. 집이 지방이거나 구장 근처에 머물러야 하는 선수를 최소한으로 배려한 것이었다.

임성은 다행히 구장과 가까운 숙소에 머무를 수 있었고, 한 번도 2군에 내려간 적 없는 김희도는 집에서 출퇴근 중이었다.

“희도야, 배고프지 않냐? 우선 밥부터…….”

왠지 이대로 숙소에 가면 위험할 것 같은데.

“수작 부리지 마세요.”

어설픈 제의는 단호한 거절과 함께 금방 사라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것 같아 반쯤 포기하고 그에게 연행되듯 걸어갔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 물론 죽을 만큼 힘들면서 좋긴 하겠지.

“어, 안녕하세요! 거기 두 선수! 아직 집에 안 가셨네요. 보강 훈련 하셨나 봐요?”

요정TV의 PD가 저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카메라를 들고 뛰어왔다. PD는 조금 전까지 찔리는 짓을 하고 온 터라 살짝 당황하는 임성에게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퇴근길 질문입니다.”

대 미디어 시대. 구단을 홍보하는 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접근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구단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었다. 선수들의 출퇴근이나 시합 중의 더그아웃 상황, 또는 숙소 습격 등 영상을 통해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태어나 보니 해당 연고라 팀 선택권이 없었다든가, 부모님이 특정 팀 팬이라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됐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미디어로 유입되는 팬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요정TV’로 불리는 페어리즈 채널의 고정 콘텐츠 중 하나가 출퇴근길이었다. 홈경기에 승리한 날 선수들에게 공통 질문을 던지며 짧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었다.

“질문 잘 읽어 보시고, 성의 있는 대답 부탁드립니다.”

임성은 생글생글 웃는 PD를 보다가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친해지고 싶은 동료는? (딱 한 명만!)」

“먼저 임성 선수부터.”

“우리 선수단 분위기가 워낙 좋고, 다들 친해서…….”

“여기 괄호 보이시죠? 굳이 한 명을 뽑아야 합니다.”

으음. 임성은 턱을 긁으며 생각하다가 손을 내리며 씩 미소 지었다.

“구단주님이요. 구단주님도 페어리즈 소속 아닙니까? 동료 중 한 명이죠.”

넉살 좋은 대답에 PD와 카메라 감독이 소리 내어 웃었다. 덕분에 카메라가 들썩이며 초점이 마구 흔들렸다.

“이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어요. 부디 구단주님께서 이 영상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임성 선수가 친해지고 싶다고 하네요. 그럼 이번에는 김희도 선수……”

“임성 선배요.”

PD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희도가 대답했다.

나? 임성이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봤고, PD는 의아한 듯 “지금 두 분 같이 나오신 거 아니에요?” 하고 물었다.

김희도의 얼굴을 줌 인 하는지 카메라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김희도는 임성의 어깨를 감싼 손을 내려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임성과 팔짱을 꼈다. 더운 기운과 함께 단단한 팔 근육이 느껴졌다.

“더 친해지고 싶습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마지막 말을 내뱉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뜨고 거칠었다. 팔 사이를 파고든 커다란 손이 팔 안쪽의 여린 살갗을 은근히 긁었다. 덤덤하게 카메라를 보는 표정과 다르게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야, 김희도. 너, 너 누가 이렇게…….

하지 못한 말이 숨과 함께 목구멍을 콱 막았다.

“아하. 더 친해지고 싶단 말이군요. 김희도 선수. 오늘 활약 축하드립니다. 팬 분들이 거는 기대가 커요.”

아무것도 모르는 PD가 김희도에게 축하를 건넸다.

김희도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와 팔짱을 끼고 있던 임성은 그의 보폭에 맞춰 끌려가듯 빠르게 걸었다.

“권재영 선수! 퇴근길 질문입니다.”

뒤에서 PD의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인마…….”

“어서 친해지러 가죠.”

김희도가 눈꼬리를 휘며 샐쭉 웃었다.

그 후, 홈에서 승리할 때마다 요정TV의 퇴근길 질문이 이어졌고, 임성은 항상 김희도와 함께 퇴근길 질문을 건네는 요정 팀과 마주쳤다.

「원정 때 꼭 가져가야 하는 것은?」

“임성 선배요.”

「퇴근 후에 하는 일은?」

“임성 선배와 밥 먹거나 운동.”

「나의 최애 유니폼은 이거다!」

“69번 마킹된 모든 유니폼.”

「금목걸이 vs 클러치 백.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임성 선배가 싫어하는 거.”

「이상형은?」

“임성.”

대답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이름만 덜렁 나오는 지경이 이르렀다.

“네. 김희도 선수 대답 잘 들었습니다. 임성 선수의 이상형은 어떻게 돼요?”

“딱히 이상형이랄 건 없는데…… 음, 야구 잘하는 사람?”

“야구 잘 아는 사람이요? 아무래도 관심사가 비슷하면 말이 잘 통하죠.”

임성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PD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임성은 굳이 PD의 말을 정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팀 내 베스트 드레서는?」

“……으음. 음. 임성 선배.”

이게 열 번 정도 이어지자 퇴근길 영상에는 ‘김희도는 무조건 임성 선배네ㅋㅋㅋㅋㅋㅋ’ 하는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오늘 질문은…….”

“임성.”

이젠 질문조차 보지 않고 대답했다. 언뜻 무성의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표정과 목소리가 진지해 PD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질문일 줄 알고 대답 먼저 해요?”

“무슨 질문이든 내 대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 참. 저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거냐. 다른 인터뷰 요청은 정색하면서 유독 구단 채널엔 적극 참여하네. 임성이 살짝 어이없는 시선으로 김희도를 쳐다봤다.

오늘 퇴근길 질문은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이었다. 클러치를 옆구리에 낀 권재영이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배고픔? 새벽에 배고프면 등골이 오싹하거든요. 나만 그래요?” 하고 오히려 질문을 했다.

“야식은 주로 뭘 드세요?”

“무조건 치킨이죠. 아주 가끔가다가 불족발?”

“그럼 양념치킨과 프라이드 중엔?”

“둘 다요.”

“아, 반반 시켜서?”

“아이고. 뭘 모르시네. 반반으로 누구 코에 붙입니까. 1인 2닭이 기본이잖아요. 개중 제일 맛있는 건 희탁이 형이 사 주는 치킨이고.”

“지금 발언 최희탁 선수는 동의한 겁니까?”

“척하면 척이지. 지금도 희탁이 형이랑 밥 먹으러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짐짓 진지하게 대답한 권재영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권재영이 구장을 나가자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던 팬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PD는 오늘도 함께 나오는 임성과 김희도를 발견하고 빠르게 뛰어갔다. 이 둘이 함께 나오는 영상은 유독 조회 수가 높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는 편이었다. 다른 인터뷰는 대놓고 거부하는 김희도도 고등학교 선배 옆에선 대답하는 시늉이라도 하니까.

“임성 선수, 김희도 선수. 퇴근길 질문입니다. 뭐가 가장 무서우세요?”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라. 임성은 그 자리에 서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음. 저는…… 무사 만루요. 무사 만루인데, 다음 타자가 4번 타자일 때?”

“헉. 그거 진짜 오싹한데요. 저 지금 상상해 봤는데 완전 소름 돋았어요.”

임성의 대답에 PD가 질색한 얼굴로 팔뚝을 쓸었다. 무사 만루도 끔찍한데, 4번 타자를 상대해? 투수는 물론이고 팀, 그리고 팬들까지 아찔한 상황이었다.

마이크는 이제 김희도에게 넘어갔다.

“김희도 선수는요?”

질문이 질문이니만큼 오늘은 자신의 이름이 안 나오겠지. 김희도는 뭘 무서워하려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임성 선배요.”

내가 무서워? PD는 물론이고 임성까지 놀라 김희도를 쳐다봤다.

“오. 생각지도 못한 대답입니다. 임성 선수가 꽤 무서운 선배인가 봐요?”

“네.”

야, 그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무섭습니다. 많이.”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김희도가 다시 한번 말했다.

* * *

프로 야구 개막 후 한 달이 넘어가자 순위가 슬슬 갈렸다.

이솔 페어리즈는 현재 5할의 승률을 기록 중이었다. 아직 시즌 초반이라도 작년 이 시기에는 하위권 다툼 중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중심엔 김희도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현재 무려 4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 중이었으며, 그중 주자가 있을 때 득점율은 모든 베테랑을 제치고 팀에서 가장 높았다. 시즌 초라는 걸 적용해도 고무적이었다.

김희도의 활약이 도드라질수록 페어리즈 마케팅팀은 속된 말로 입이 찢어지게 좋아했다. 고교 때 날리던 선수도 페어리즈에만 입단하면 감감무소식이라고, 유망주 무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말까지 나돌던 팀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가 큰 활약을 하고 있으니까.

어쩌다 페어리즈가 허무한 경기력을 보여도 팬들은 ‘신인 보고 참는다.’ 하고 분노를 삭이곤 했다.

마케팅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희도를 이용한 마케팅을 시작했다. 평범하게 구단 SNS에 그의 사진을 올리는 것부터 시작해 유니폼, 머리띠, 부채, 타월 등 굿즈를 끊임없이 만들었다.

그리고 모기업이 유통업을 하는 것을 적극 활용해 ‘김희도 햄버거 세트’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전국 지점에서 하는 건 아니고, 구장 안과 근처 지점에서만 진행하는 이벤트성 기획이었다.

“와. 나는 4년 차 돼서야 겨우 나왔는데, 김희도는 벌써 햄버거 세트가 나오네. 나 지금 완전 배신감 느껴.”

“걔랑 너랑 같냐? 완전 하늘과 땅 차이잖아.”

박태영의 말을 들은 권재영은 옷소매를 어깨까지 둘둘 말아 올리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팔뚝에 한껏 힘을 주며 탱탱한 근육을 드러냈다.

“여기, 근육 안 보입니까? 완전 땅땅하거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차이 말이야. 완전 레벨이 다르잖냐.”

쯧, 혀를 찬 박태영이 손으로 얼굴을 위아래로 빠르게 휘적대며 말했다.

“그건 더 차이 안 나는데요?”

“야, 민기야. 지금 권재영이 한 말 SNS에 올려라. 사람들 반응 좀 보자.”

박태영은 납득하지 못하는 권재영의 모습에 더욱 어이없어했다.

김민기가 잽싸게 휴대폰을 꺼냈고, 권재영은 뭐 하는 짓이냐며 김민기의 휴대폰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뺏고 뺏기는 소란 속에서 임성은 묵묵히 등 운동을 이어 갔다. 견갑골이 좁혀 들었다 벌어지며 주변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운동복이 땀에 흠뻑 젖어 갈 즈음, 화제의 당사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등장했다.

“오. 햄버거 왕자님 오셨네.”

임성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쪽을 향해 걷던 김희도는 권재영을 향해 뒤늦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고 곧바로 임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더 할 거예요?”

“어. 두 세트 더 해야 해.”

고개를 끄덕인 김희도는 임성의 옆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해당 부위를 다 끝낸 임성이 다른 운동 기구로 옮기면 그 역시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웨이트실을 나왔다.

에어컨을 틀고 운동했는데도 워낙 덥다 보니 땀이 줄줄 흘렀다.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으려 하자 김희도가 수건 끝을 잡아당겼다.

“땀 닦지 말고 그냥 가요. 숙소랑 가깝잖아요.”

김희도가 옆에 바짝 붙어서 속삭였다. 의도가 빤히 보여 어이없으면서도 오히려 너무 뻔해 귀여웠다. 그래. 가자.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김희도 햄버거 세트라. 네 이름이 붙은 게 나오다니, 신기하지 않냐?”

“글쎄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이름만 바꾼다고 판매량이 올라갈까요? 누가 기획했는지 몰라도 쓸데없는 짓 같아요.”

한껏 들떠서 말한 게 민망해지는 반응이었다.

내가 당사자면 엄청 신기할 것 같은데, 아닌가? 임성은 아무 감흥 없는 옆모습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침에 마케팅 팀장님 잠깐 봤는데, 포토 카드 같은 것도 끼워 준대. 선수 중에선 최초라고 하더라.”

“마케팅 팀장이랑 만났다고요?”

대화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부분에서 반응이 왔다. 그는 걸음까지 멈추고 “만나서 뭐 했는데요?” 하고 추궁하듯 물었다. 말투 만큼이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뭘 하긴, 사무실 가다가 잠깐 스친 게 다지. 그때 포토 카드 준다는 말도 들었고.”

오해하지 마. 임성이 치켜 올라간 그의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포토 카드는 뭐데요?”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지만, 구장 안에 포토 카드 뽑는 기계 있잖아. 그거랑 비슷할 것 같은데. 아무튼 굿즈래. 네 팬분들은 아마 좋아하시지 않을까?”

그래요. 김희도는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김희도가 팬들의 사랑과 화제의 중심에 서는 동안 임성은 단 한 번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새로 바뀐 용병들이 꾸준히 이닝을 먹어 주기도 했고, 다른 선발과 불펜도 안정적으로 운용되어 등판할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하필 등판하기로 한 날 비가 내리며 우천 취소가 됐다. 로테이션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고, 임성은 또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주말 원정은 1승 2패의 루징 시리즈로 마무리 짓고 다시 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기가 없는 월요일, 선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휴일을 보냈다.

일찌감치 오전 훈련을 끝낸 임성은 잠시 외출 후 숙소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매일 붙어있다 못해 거의 한 몸이던 김희도는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웠다. 하루를 온전히 혼자서 보내는 건 김희도가 페어리즈에 입단한 후 처음이었다.

“허전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기분 묘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숙소로 걸어가던 임성이 문득 민트색 간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E’SOLSOL 버거」 -잠실 지점-

“……으음.”

페어리즈 모구단인 이솔 그룹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 햄버거 가게였다.

흠. 매장 입구에서 한참을 머뭇대던 임성은 이내 결심한 얼굴로 들어갔다. 월요일 오후, 애매한 시간대라 사람이 그리 많진 않았다.

“기…… 김희도 홈런 버거 세트 하나, 아니 세 개 부탁합니다.”

매일매일 부르는 이름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고 목소리가 어설프게 뒤집어졌다. 단지 메뉴를 말했을 뿐인데, 왜인지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임성은 짧은 숨을 여러 번 쉬며 카드를 내밀었다.

“테이크아웃 하시나요? 음료는 어떤 걸로 해 드릴까요?”

“콜라 대신 생수로 바꿀 수 있습니까? 먹고 갈 겁니다.”

“주문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김희도 홈런 버거 세트 세 개. 음료는 생수로 변경, 드시고 가시는 것 맞으세요?”

“맞습니다.”

임성은 가급적 마시지 않는 탄산음료 대신 생수로 바꾸고 매장 구석에 앉아 햄버거를 기다렸다.

휴대폰을 켜 제일 먼저 페어리즈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김희도의 스윙 폼 분석이었고, 페어리즈의 순위는 현재 5위로 1위와 6게임 차이었다. 아직 일정이 많이 남아 있으니 치고 올라갈 기회는 얼마든 있었다. 문제는…….

“나도 등판하고 싶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화면에 노란 말풍선이 떴다.

-김희도: 어디예요? 숙소?

앞발을 앙증맞게 모으고 귀를 쫑긋거리는 고양이 이모티콘도 함께였다. 본인이랑 똑같은 이모티콘이네. 희미하게 웃으며 타자를 꾹꾹 눌렀다.

-나: 아니. 잠깐 외출했다가 점심 먹으러 왔어. 너는?

-김희도: 아직 할아버지 댁이에요.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이번엔 눈물을 펑펑 흘리는 고양이였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깜찍한 이모티콘을 골랐을 김희도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상한 데서 묘하게 웃긴다니까.

-나: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 보니까 좋지?

-김희도: ?

-김희도: 좋아요? 누가요?

-김희도: 당장에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거 참고 있는데요.

-나: 그러지 마.

전송 버튼을 누르고 턱을 가만히 쓸었다.

“차를 한 대 살까.”

자동차가 있으면 데리러 갔을 텐데. 기다렸다가 같이 타고 올 수도 있고. 면허는 있으니까 우선 중고차라도…….

“133번 고객님. 주문하신 김희도 홈런 버거 세트 3개 나왔습니다.”

임성은 차 보험료와 기름값 등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김희도 홈런 버거 세트 구성품은 체다 치즈 치킨 버거와 감자튀김, 탄산음료가 한 세트였다. 추가금을 내면 양념 감자로, 음료는 에이드로 업그레이드도 가능했다. 음식 외에도 은박지 같은 포장지로 싼 손바닥만 한 물건이 있었다.

이게 한정판에만 포함된다는 포토 카드라는 건가? 내용물은 뜯어 봐야 알 수 있는 게, 꼭 쌍둥이 1, 2가 게임팩을 살 때 어깨너머로 본 랜덤 굿즈와 비슷했다.

임성은 망설이지 않고 햄버거 대신 포토 카드 포장부터 뜯었다. 혹시 내용물까지 찢을까 봐 제법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팩 하나당 세 개의 카드가 들어 있어, 총 9개의 포토 카드를 얻을 수 있었다. 개중 똑같은 포즈의 사진이 4개였고, 나머지는 다른 것이었다.

새로 찍은 건 아니고, 경기 중이나 인터뷰 때 찍힌 것이었다. 홀로그램을 입힌 앞면은 각도에 따라 색색으로 빛나 김희도의 팬이라면 탐낼 만 했다.

“잘생겼네.”

띠링.

-김희도: 선배. 보고 싶어요.

김희도의 포토 카드를 보는 중이라는 걸 알았는지 당사자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완벽한 타이밍이네. 포토 카드와 메신저를 번갈아 보던 임성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구겨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포토 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본격적으로 햄버거 포장을 벗겼다.

햄버거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평소 패스트푸드를 그리 즐기지 않는데도 그 자리에서 한 번에 해치울 정도로.

별로 배가 안 부른데, 한 세트 더 시킬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숙소로 향했다.

“성이 운동 다녀오냐?”

편한 복장에 금목걸이, 명품 클러치를 옆구리에 낀 권재영이 임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왔습니다. 월요일인데 형은 어쩐 일이십니까?”

“코치님이 불러서. 지금 희탁이 형 만나러 가는데, 너도 같이 갈래? 고기 먹을 거다.”

“저도 가도 됩니까?”

이미 햄버거 세트 3개를 먹었지만, 마치 식전인 것처럼 물었다.

“어. 희탁이 형한테 전화하고 갈 테니까, 너 먼저 차에 타고 있어라. 저기 빨간 차 보이지? 끝자리 3667.”

권재영에게 차 키를 받아 빨간 차를 향해 걸었다.

* * *

“저기요, 페어리즈 팬인데 사인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여자가 권재영을 향해 종이와 볼펜을 쭈뼛쭈뼛 내밀었다. 권재영은 몇 년째 마무리 투수를 맡고 있는 선수답게 타 팀 팬까지 알아보곤 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권재영이 손을 내밀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다은이요, 박다은.”

“네. 박다은님.”

슥슥. 거침없이 사인한 권재영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종이를 돌려줬다. 사인을 받은 팬이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었고, 권재영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권재영은 앉은 채였는데도 키가 워낙 크다 보니 서 있는 여자와 눈높이가 거의 비슷했다.

“감사합니다. 가을 야구 응원할게요. 페어리즈 파이팅!”

주먹을 불끈 쥐고 수줍게 파이팅을 외친 팬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희탁이 형, 성아. 우리도 사진 찍자.”

“갑자기 사진은 무슨 얼어 죽을. 됐어. 귀찮아.”

“아. 거, 참. 노친네. 협조 좀 합시다.”

권재영의 제의에 최희탁이 대놓고 귀찮은 티를 냈다. 그러나 권재영은 굴하지 않고 꿋꿋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팔이 워낙 길어 조금만 뻗어도 금세 프레임에 잡혔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임성은 한 손엔 젓가락을 쥐고, 다른 손으로 브이를 만들며 포즈를 취했고, 찍기 싫다며 질색하던 최희탁도 막상 카메라를 켜자 턱을 비스듬히 들며 멋있는 척을 했다.

“오, 잘 나왔네. 특히 내가.”

권재영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랄. 성이가 제일 잘 나왔잖아. 우린 아무리 해도 쟤한테 안 돼.”

“그건 형이겠지. 나야 성이에게 비벼도 완전 안 꿀리지.”

최희탁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둘 사이에 낀 임성은 모른 척 고기만 집어 먹었다.

이제는 익숙한 투닥임이 지나고 세 사람은 다시금 고기에 집중했다. 셋 다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만만찮게 먹어야 하다 보니, 10인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장님. 여기 10인분 추가요. 쌈무랑 상추도 더 주세요.”

“야, 쪼잔하게 10인분이 뭐야. 15인분 시켜.”

최희탁의 의견으로 고기 15인분이 추가됐다.

KBO 선수 중에서도 고참에 속하는 최희탁과의 대화는 유익하고 얻을 게 많았다. 이제 갓 3년 차인 임성은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지.”

최희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재영이 끼어들었다. 이내 두 사람은 별것도 아닌 일로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대화 내용은 유치한데 둘 다 목소리와 덩치가 커서 꼭 싸우는 것 같았다.

“야구는 센스라니까. 안 그렇냐, 성아?”

“재능이 최고죠. 재능 없는 센스가 무슨 소용입니까. 내 말 맞지? 선유고 후배 임성.”

“인마, 치사하게 학연을 들이밀어?”

“센스에서 재능이 나오고, 재능 있는 사람이 결국 센스도 있잖아요. 선배님 두 분 다 맞습니다.”

임성은 두 사람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니까 연락을 받지 못한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화장실을 핑계로 나와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했을 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함께 읽지 못한 문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김희도, 김희도, 김희도. 액정을 꽉 채우고도 한참이나 더 스크롤을 내려야 했다.

뭔 일 있나. 살짝 당황하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차가운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

으음, 안 받네. 이마를 긁적이며 메신저를 열었다. 난리 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김희도: 선배는 나 안 보고 싶어요?

-김희도: 뭐 해요?

-김희도: 어디서 뭘 하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김희도: 선배. 지금 어디예요?

-김희도: 선배?

-김희도: 임성

마지막 문자는 마침표조차 찍히지 않은 채 이름만 덜렁 떠 있었다. 임성은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누르며 테이블로 돌아갔다.

“……어?”

그리고 조금 전까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안녕하세요. 임성 선배.”

김희도가 임성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니, 미소가 맞나?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

“여기엔 어떻게 왔어?”

“구단 가는 길에 선배님이 보여서 들렀습니다.”

“보였다고?”

“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희도를 보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김희도가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라는 것까진 알겠다. 그래. 구단 근처니까 봤을 수도 있지. 하지만 안주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인 고깃집에 들어오는 건 예상 밖이었다. 그것도 평소엔 선배들이 먼저 알은척해야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하는 애가?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사회성이 조금, 아주 조금 부족한 그 김희도가 말이지.

“둘 다 멀뚱히 서서 뭐 해. 앉아. 희도랑은 처음 술자리 갖는 건가?”

의문은 해소하지 못했지만, 우선 최희탁의 말을 듣고 자리에 앉았다.

“말도 마십쇼. 얘 맨날 성이만 졸졸 쫓아다니잖아요.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어.”

그때 권재영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과연 마무리 투수다운 묵직한 한 방이랄까.

임성은 대답 대신 소주를 들이켜는 것을 택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쓴맛에 미간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자 최희탁이 곧바로 소주를 채웠다.

“이야. 잘 마시네. 흔치 않은 조합으로 모인 김에 건배 한번 할까?”

으음. 가급적 술은 마시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선배의 제의이기도 하고,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라 아무 말 없이 잔을 쥐었다.

“최희탁 선배. 레이먼 알레그로는 어떻게 공략하면 됩니까? 특히 포크볼 타이밍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음? 너 알레그로 공 잘 치지 않냐?”

“선배님보단 못 칩니다.”

“아, 그랬냐?”

최희탁이 소주잔을 내려놓고 레이먼 알레그로의 공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거기에 투수 권재영이 말을 덧붙이면서 건배 제의는 흐지부지됐다.

김희도는 두 사람의 말에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임성의 소주잔을 들어 물컵에 버렸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눈치채지 못했다. 당사자인 임성을 제외하면.

“우리 팀 이번에는 진짜 가을 야구 가야 한다. 올해도 못 가면 욕 먹을 각오해라.”

“욕은 이미 많이 먹고 있잖아요. 저 며칠 전에 식당에서 발로 야구 하냐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때 일이 생각나는지 권재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페어리즈는 열정적인 팬을 보유한 만큼 칭찬도 비판도 거셌다. 연패가 이어지면 심한 욕설이, 연승을 달리는 중 음식점에 들어가면 서비스는 물론이고 밥값을 안 받는 곳도 많았다. 물론 억지로라도 돈을 쥐여 주지만.

얼굴이 덜 알려진 임성은 아직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

“갑자기?”

“마침 TV에서 지난 일요일 경기 하이라이트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아. 만루 홈런 맞고 역전패당했을 때? 솔직히 너 그 경기 발로 한 거 아니냐?”

“와, 희탁이 형님. 이러면 저도 형님이 다리 사이로 알 깐 거 말합니다? 그거 3루타 돼서 역전당했잖아요. 우리 누가 더 쪽팔리는지 해 볼까요?”

최희탁과 권재영이 서로의 치부를 떠벌렸다. 한참을 내가 잘하고 네가 못했네 하다가 금세 또 진지하게 팀의 방향성을 얘기했다.

그 사이 김희도는 열심히 고기를 구워 임성의 앞 접시에 올려놨다. 소주를 들이켠 최희탁이 불판을 쳐다봤지만, 이미 텅 빈 뒤였다.

“슬슬 정리하자.”

권재영이 계산서를 최희탁에게 넘겨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로 요 앞 곱창 가게 갈 건데, 둘 다 같이 갈 거지?”

방금 셋이서 삼겹살 25인분을 해치웠지만 권재영은 해맑은 얼굴로 곱창 가게를 가리켰다.

“저는 속이 안 좋아서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임성 선배가 데려다주신답니다.”

임성이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김희도가 선수를 쳤다. 낯빛도 창백하고 정말 표정이 안 좋았기에 최희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데려다줘라. 많이 안 좋으면 참지 말고 병원 꼭 가. 내일 보자.”

최희탁의 허락을 받은 두 사람은 숙소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후텁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속은 좀 어때?”

“조금만 더 있었으면 무슨 일 났을 거예요.”

“그러니까 거길 왜 들어와.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렸다는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

“연락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몇 시간째 대답이 없는데, 눈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보통은 그렇게 눈 돌아가진 않지.

“그래서 어떻게 찾았는데?”

“잘.”

다그쳐 봐야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테이블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김희도를 보고 좀 놀라긴 했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보고 싶었다고 할까.

“아까 알레그로 얘기 일부러 꺼냈지? 너 알레그로 전적 4할 2푼이잖아.”

최희탁도 알레그로에게 강했지만, 김희도가 그보다 더 알레그로의 공을 잘 쳤다. 변화구까지 포함해서.

“선배 술 안 마시잖아요. 그러게 왜 혼자서 쫄래쫄래 따라가래요?”

쫄래쫄래…… 깜찍한 단어에 임성이 어이없어하다가 픽 웃었다.

“다음엔 저랑 같이, 아니 가지 마세요.”

“그냥 같이 가는 걸로 하자.”

두 사람은 밤공기를 맞으며 느긋하게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엄밀히 말하면 임성 혼자 쓰는 숙소인데, 지금은 거의 김희도와 함께 살다시피 했다.

휴대폰을 책상에 올려놓고 화장실로 걸어가는 순간, 뭔가가 후두두 떨어졌다. 어?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바닥으로 향했다.

헉, 저게 왜.

“……!”

“…….”

둘 중 먼저 움직인 건 임성이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것을 빛보다 빠르게 집어 등 뒤로 감췄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 사진이에요? 나 맞죠?”

모른 척해 주길 바랐지만, 김희도는 결코 넘어가 주지 않았다.

“맞잖아요. 아니면 보여 줘 봐요.”

내가 왜 보여줘야 하는데. 임성은 김희도에게서 손을 더욱 뒤로 감추며 모른 척했다. 주륵. 옆얼굴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동자가 얼굴 곳곳을 핥듯이 응시했다.

내가 졌다. 졌어.

“……가,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가게에 갔는데, 마침 홈런 세트 팔잖아. 수익 일부분을 유소년 야구단에 기부한다고도 하고. 겸사겸사.”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다 못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으아, 창피해 죽겠네.

“아. 겸사겸사 내 사진도 챙기고?”

김희도의 눈이 짓궂게 빛났다. 임성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 될걸, 괜히 말을 더듬어선.

“사진 따위가 아니라 실물이 바로 앞에 있잖아요. 마음껏 만져도 돼요.”

그는 임성의 손을 잡아 제 머리 위에 올렸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보드라운 느낌에 임성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어서요.”

임성이 아무것도 하지 않자, 그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창피해서 못 하겠다고 말하려던 임성은 발갛게 달아오른 귓등을 보고 멈칫했다. 부끄러운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우습게도 부끄러워하는 김희도를 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 실물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렇게 귀여운 김희도는 아마 자신밖에 모를 것이다.

그리고 9장의 포토 카드 중 엄선된 한 장이 임성의 지갑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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