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1)

#8

늘 그렇듯 결승전 당일은 유난히 눈이 일찍 뜨였다.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겠는데.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후우.”

벌써부터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지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붕붕 떴다. 이대로 잡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방을 나왔다.

“어?”

캄캄할 줄 알았던 거실에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어제 안 끄고 잤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으로 향했던 임성은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임우?”

“헉, 까, 깜짝이야! ……형.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 아직 5시도 안 됐잖아.”

한 손에 뒤집개를 든 임우가 티 나게 당황했다.

“나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 그것보다 너 지금 뭐 하냐?”

“보면 몰라? 밥하잖아.”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도 임우는 뚱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밥은 왜? 배가 많이 고팠나? 하지만 쌍둥이 1, 2는 어제도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뒤집개 이리 줘.”

“됐어. 밥 거의 다 차렸으니까 자리에 앉기나 해.”

임우는 멀뚱히 서 있는 제 형을 데려와 직접 의자에 앉혔다. 얼떨결에 자리에 앉은 임성은 새카맣게 탄 달걀 프라이와 딱 봐도 덜 익은 감자조림, 그리고 죽에 가까울 정도로 끈적대는 밥을 차례대로 훑었다.

“네가 만든 거냐?”

“…….”

“무슨 사고 쳤어? 지금 말하면 용서해 준다. 이실직고해.”

대놓고 미심쩍은 시선을 받은 임우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리곤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연신 입을 뗐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보는 임성의 시선이 더욱 가늘어졌다.

“야. 임우.”

“아, 뭐! 오늘 결승전이라며. 저번처럼 요리하다가 손가락 잘라 먹으면 어쩌려고.”

“인마. 그건 실수였거든. 중학교 이후로는 처음이었어.”

“한 번 한 실수 두 번은 못 하냐? 밥은 그냥 하고 싶어서 했다. 왜!”

혼자 버럭 소리치다가 몸을 휙 돌린 임우는 소시지를 접시에 쏟아부었다. 탁, 소리 나게 케첩을 내려놨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임성은 동생의 뒷모습을 보다가 수저를 들었다.

밥은 질었고, 콩나물국은 싱겁다 못해 맹물이었으며 다른 반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맨날 요리 못 한다고 타박하더니 본인은 더 심하잖아. 하지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밥을 삭삭 비웠다. 음, 더럽게 맛없으면서 맛있네.

“……S고 H감독 형네 학교 맞지?”

“봤냐?”

괜히 걱정할까 봐 일부러 가족에겐 말하지 않았는데, 역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긴 공중파 뉴스까지 떠들어 댔으니 모를 리 없겠지.

임성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임우는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또다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에이씨.” 하고 입을 뗐다.

“형. 형 알아서 잘하는 거 알아. 우리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근데.”

임우는 거기까지 말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른침을 삼키는 듯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형이 모든 걸 끌어안을 필요는 없어. 나도 임설도 이제 고등학생이고, 꼬맹이들도 어린애 아니야. 거기, 새카맣게 탄 감자볶음도 이림이 세림이가 어제 만든 거다. 형 준다고 하니까 둘 다 신나서 만들더라니까. 걔들은 형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아니, 이게 아니고. 어쨌든, 밥 정도는 우리가 챙겨 먹을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학원은 진짜 필요 없어. 학원보다 우리 반 반장이 더 잘 알려준단 말이야. 나 걔랑 매일 1시간씩 공부해. 하, 손발이 오그라든다. 진짜 개쪽팔리네.”

결국 참지 못한 임우가 욕설과 함께 팔을 벅벅 긁었다. 다소 거친 목소리와 달리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새빨갰다.

임성은 밥 수저를 든 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생이 저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다. 학원 안 간다고 깽판 친 게 반장이랑 공부 하려던 거였어? 생각도 못 한 상황이 못내 당황스럽고 놀라웠지만, 한편으로 뭉클했다.

“아, 뭐라고 말 좀…… 아니다. 그냥 하지 마라.”

“우야. 형은 한 번도 너희 안 믿은 적 없어. 이리 와 봐.”

임성은 수저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임우를 불렀다. 임우는 기겁하면서도 결국 순순히 다가왔다.

“갑자기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냐? 사춘기 다 지나갔어?”

“내 나이가 몇인데 무슨 사춘기야. 그리고 갑자기가 아니라 계속 생각했거든? 형도 겨우 열아홉 살밖에 안 됐잖아.”

임우는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제가 생각해 낸 양 내뱉었다.

“아이고, 기특하다. 키운 보람이 있네.”

임성은 다소 과장스럽게 말하며 임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임우는 어릴 때처럼 얌전히 손길을 받았다.

“아, 형. 형 후배 중에 희멀건한 놈 있잖아. 왜 저번에 우리 집에 왔던.”

“희도?”

“희돈지 나발인지 그 새끼랑 상종하지 마. 싸가지 없고 재수도 없더라.”

희멀건한 놈이라는 말에 생각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이 떠올랐다. 김희도 정도면 아주 예의 바르고 성실하지 않나? 왜 다들 싸가지 없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

“걔는 싸가지 없는 게 아니라 차분한 거야. 엄청 착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임우의 표정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형 미쳤어? 한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표정을 본 임성이 밥을 먹다 말고 소리 내 웃었다.

* * *

오늘은 아침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후텁지근한 여름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걷다가 몸도 풀 겸 가볍게 학교까지 뛰어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에 운동장을 홀로 걷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오래된 부실 문을 열자 밤새 묵은 먼지와 새벽 공기가 콧속으로 스몄다.

교복 셔츠를 벗어 의자에 비스듬히 걸어 놓고선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세수라도 할 겸 화장실에 갔다가 부실로 돌아왔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기에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실에 누군가 있었다. 그것도 제가 벗어 놓은 교복 셔츠에 코를 깊이 박고서.

“어?”

근육이 촘촘하게 붙은 팔엔 핏줄이 눈에 띄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만큼 셔츠를 꽉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희고 곧은 팔뚝과는 다르게 얼굴, 특히 눈가와 뺨, 귓등은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가슴팍은 거칠게 들썩이고 있었다.

“일찍 왔네요.”

“아, 어. 눈이 일찍 떠져서…… 그것보다 지금…….”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임성이었다.

그는 임성의 교복 셔츠를 내려놓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임성을 끌어안고 목에 입술을 묻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살갗을 누르는 감촉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짧게 들이켜는 숨소리에는 조금도 여유가 없었다.

“방금 좀 변태 같았던 건 알지?”

임성은 품에 파고드는 남자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변태 하고 말죠. 역시 실물하곤 비교가 안 되네요.”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 정도로 자신의 냄새가 좋은가? 가늠이 되질 않으니 이해가 잘 안 됐다.

“미칠 정도로 좋아요.”

“혹시 내가 소리 내서 말 했냐?”

“아니요.”

그게 아니면 드디어 독심술까지 익힌 건가? 역시 김희도는 대단한 놈이었어.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에 닿는 살갗은 뜨겁고 보드라웠다. 엄지로 눈가를 천천히 쓸자 김희도는 살짝 흠칫하더니 곧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꼭 햇볕 아래에서 골골대는 고양이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귀엽네.

김희도는 여전히 임성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비면서 눈을 치켜떴다. 이채가 도는 눈동자에서 제 모습을 본 임성이 손을 내리려고 하자 김희도가 붙잡았다. 슬며시 내려갔던 손은 다시금 그의 뺨에 달라붙듯이 고정됐다.

“눈이 일찍 떠졌다고요? 몇 시간 잤는데요. 컨디션은 어때요? 아침은 든든하게 먹었어요?”

“누구 덕분에 일찍 집에 들어가서 일찍 잤다. 한 7시간쯤 잔 것 같아. 컨디션도 괜찮고. 너는?”

“누구 덕분에 방금 좋아졌어요. 6시간 잤고, 아침은 대충 때웠는데, 선배 보니까 배고파요.”

아랫입술을 살짝 내민 모습이 꼭 밥투정하는 어린 애 같았다. 고양이에 이어 밥투정하는 김희도라. 머릿속이 알아서 상상을 해 댔다.

유기농 채소에 투쁠 한우만 먹을 것 같은 인상과 달리 김희도는 뭐든 잘 먹었다. 여동생들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자신의 도시락조차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지.

“왜 웃어요?”

“귀여워서. 아, 희도야. 잠깐 비켜 봐.”

그냥 모른 척 안고 있을까, 잠깐 고민하던 김희도는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아직 급할 건 없었다. 하나씩 천천히 하면 된다.

임성은 가방을 뒤적여 꺼낸 바나나 우유를 내밀었다.

“마실래?”

김희도는 임성에게서 받은 빨대가 꽂힌 우유를 만지작댔고, 임성은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오늘 아침 동생과 나눴던 얘기를 들려줬다.

싸가지 없고 희멀건 놈과 상종하지 말라는 말은 빼고. 김희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의도치 않게 상담 아닌 상담이 됐다.

“기특하고, 고마운데…….”

“서운해요?”

“어떻게 알았어? 너 진짜 독심술 하냐?”

내내 만지작대던 우유를 순식간에 비운 김희도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달착지근한 맛이 혀끝에 감겼다.

“그런 표정이니까.”

그런 표정이 어떤 표정인데.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봤지만, 별다른 건 찾지 못했다.

늘 어리게만 보이던 동생의 성장이 기쁘고 감사한 한편, 묘하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아니, 정정. 동생들에게 서운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텼다가, 갑자기 갈피를 못 잡겠다고 할까.

“이런 생각 하는 거 이상하지? 나도 몰랐는데 브라더 콤플렉스였나 봐.”

“선배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이라니, 어째 어감이 좀 그렇다?”

임성이 픽 웃었다. 김희도는 따라 웃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배 동생도 야구부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가 아니에요. 선배가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겁니다. 어쩌면 그게 그들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알아서 잘한다.

김희도야말로 그 말에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 애초에 그가 누군가의 조언을 받거나 의지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겉모습만 그럴듯한 자신과 달리 내면까지 단단한 사람. 어쩌면 그래서 더 눈길이 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아니에요.”

희미한 웃음이 밴 목소리에 테이블 귀퉁이를 보던 임성이 고개를 들었다. 예상과 다르게 김희도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입매를 살짝 내린 사뭇 무거운 표정이었다.

고요한 공기는 그의 목소리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나는 선배가 아니면 안 돼요.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따위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요.”

김희도가 양손으로 임성의 손을 덥석 쥐었다. 살짝 뜨거운 손바닥이 제 손등을 감싸는 순간, 불현듯 그 언젠가의 기억이 겹쳐졌다.

‘김희도. 네가 필요해.’

“임성, 선배가 필요해요.”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셔츠 안쪽, 살갗 아래 배어 있던 체취가 훅 끼쳤다. 더운 공기가 섞인 냄새는 달큼하고 풋풋했다.

김희도가 자신의 냄새를 맡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괜히 손가락 사이가 간질간질해지고.

“그러니까 나만 봐 주세요.”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조금 숨이 막히는 기분.

“할 수 있죠?”

다른 새끼들에게 눈 돌리지 마요.

속삭임에 가까운 마지막 말은 시끄러운 문소리에 파묻혔다. 쾅, 소리가 난 곳으로 임성이 고개를 돌렸다.

목을 벅벅 긁으며 들어오던 정의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은 두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이 손잡고 뭐하냐? 아침부터 기도라도 해? 헉, 임성. 너 머리는 또 왜 그래?”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밀도 높은 공기도 흩어졌다.

임성이 벌떡 일어서자 맞잡고 있던, 아니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붙잡고 있던 손이 풀어졌다.

쯧, 하필이면. 혀를 찬 김희도는 손바닥에 코를 대고 남은 체취를 핥듯이 들이마셨다.

“너야말로 이 시간에 웬일이야? 매일 아슬아슬하게 오더니.”

임성은 발갛게 달아오른 손을 다른 손으로 감추며 물었다.

정의영이 들어와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말도 마라. 나 어제 한숨도 못 자고 밤 꼴딱 샜잖아. 오늘 경기 우리 가족 다 보러 온대. 아빠는 이것 땜에 연차도 냈다더라. 으아, 미친. 벌써 떨려!”

“가족들 오면 더 잘해야겠네. 최소 멀티는 쳐야지?”

“우리 결승전 전국에 방송되잖아. 내 상태 좀 어떠냐, 괜찮아? 근데, 너는 왜 갑자기 머리를 밀었냐? 조폭인 줄 알았네.”

정의영의 지적을 받은 임성이 다소 머쓱하게 제 머리를 매만졌다. 덜 익은 밤송이를 만지는 것처럼 까슬까슬한 감촉이 어색했다.

어제 김희도와 헤어진 임성은 집 대신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밀었다. 1학년들처럼 완전한 빡빡이는 아니었지만, 그에 상응할 만큼 짧게 밀어 두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고 동그랗고, 볼록한 예쁜 머리통이었다.

“기분 전환 겸 잘랐다. 그리고 네 상태 어제랑 똑같아.”

“쓰읍, 이상하네. 어제랑 똑같다는데, 왜 욕먹은 것 같지.”

벌써부터 안절부절못하는 정의영을 시작으로 조예준, 박종열, 김영산 등 부원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용우 왔냐?”

양민성 일이 있고 난 뒤 보이지 않던 지용우가 머뭇머뭇 모습을 드러냈다. 임성은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대는 지용우를 데리고 서찬규에게 갔다. 서찬규는 지용우를 보고 흠칫 놀랐지만, 눈물까지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을 받아들였다.

“찬규야, 억지로 사과받을 필욘 없어. 네 마음이 아니면 아닌 거다.”

“진심인 거 느껴졌어요. 솔직히 다 풀린 건 아니지만요. 감사합니다. 주장.”

마지막까지 오지 않는 양민성을 제외한 부원들 모두가 버스에 올라타며 구장으로 출발했다.

“오늘의 날씨. 강한 자외선이 예상되니 외출 자제 요망. 오후 12시 평균 기온 32도, 강수확률 약 15%.”

박종열이 큰 소리로 오늘 날씨를 알렸다.

“‘고교리그 해설 및 각 프로 구단 스카우터에게 결승전 예상 결과를 물었다. 주강고가 몰표를 받으며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했다. A심판 ‘올해 주강고는 약점이 전혀 없다. 괴물 투수 이치연을 필두로 외내야진의 견고한 수비가 돋보인다.’, B스카우터 ‘작년 2학년들이 3학년이 되면서 실력에 물이 올랐다. 선유고의 전력도 나쁜 편은 아니나, 최근 불거진 감독 이슈 등 불안 요소가 있다. 감독의 부재는 생각보다 선수들에게 강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하신다. 다들 자알 들었지?”

박종열은 ‘잘’을 길게 늘여 말했다.

“헐, 우리 팀 뽑은 사람 한 명도 없어요? 10대 빵? 진짜로요?”

“아무도 우리한테 기대 안 한단다. 기분 존나 더럽다. 그치?”

처음에는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며 긴장을 풀어 보려던 아이들도 곧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버스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구장에 도착한 임성은 부원들을 이끌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막상 여기까지 오자 오히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들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결국, “하던 대로 하자.”라는 말밖에 못 하고 그라운드로 나왔다.

관객이 입장 중이었다.

고교야구가 한창 인기 있던 70년대 초중반에는 무려 60만 명이 넘는 관중이 야구장을 찾아 열띤 응원을 펼쳤다. 그 열정은 프로 야구의 출범과 함께 고스란히 옮겨가 지금 고교야구를 찾는 사람은 소수의 마니아와 같은 학교 학생들, 선수 학부모 등 관계자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전국 대회 결승전쯤 되면 일반 관중도 꽤 있었다.

반대쪽 더그아웃 앞에서 주강고 선수들이 스트레칭과 캐치볼 등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경기 시작 전에 진 빼지 말고 적당히 몸 풀자.”

“네. 주장.”

한곳에 모여 있던 주강고 선수들 중에 누군가가 선유고 더그아웃 쪽으로 걸어왔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체격이었다.

“저 재수 없는 놈. 또 오네. 진짜 왜 저래.”

다 들리게 중얼거리는 조예준을 향해 임성은 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임성. 못 본 사이 너희 학교 엄청 유명해졌더라. 스포츠란 들어갈 때마다 ‘S고 H감독’ 하고 어찌나 떠드는지.”

“1차 지명 축하한다. 이치연.”

임성의 축하에 이치연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재수 없어. 조예준이 비아냥댔다.

“예상했던 일이라서 크게 놀랍지는 않네. 아, 참. 네 소식은 들었다. 그나마 자랑하던 제구도 완전히 망했다며? 걱정돼서 잠도 못 잤지 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타자로 전향해.”

“못 자서 어쩌냐? 엄청 피곤하겠네. 공은 제대로 던지길 바랄게.”

웃는 낯으로 받아치자 이치연의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그는 이를 뿌득 갈며 애써 유쾌한 척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에 걸친 배트가 퉁퉁 위아래로 흔들렸다.

“너 아직도 직구랑 슬라이더만 던지지? 내가 커브 알려 줘? 아, 워낙 제구가 중요한 변화구라서 너는 좀 어렵겠다. 그러니까 괜히 용쓰지 말고 방망이…….”

“그러게. 제구 좀 잡히면 좋겠다.”

임성은 다시 한번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간 감독에게 워낙 많이 당해서인가, 이렇게 일차원적인 도발은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살짝 지루하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짜증 나네. 1차에 뽑혔으면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시합엔 왜 기어 나오고 지랄이야. 그리고 배트는 대체 왜 들고 있는 건데.”

말릴 새도 없이 박종열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좀 전까진 멀리서 스트레칭 중이더니, 언제 왔대. 적당히 무시할 생각이었던 임성은 상황이 복잡해질 것을 직감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오랜만? 미안한데, 넌 누구야? 난 못하는 사람은 기억 안 해서.”

봐봐. 저 유치한 도발. 다 티 나는 도발에 누가 넘어가겠어.

“이 씨발 새끼가.”

그렇게 생각한 건 임성뿐이었는지, 박종열이 쌍욕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아까부터 연신 이쪽을 힐끔대던 주강고 선수들이 무리를 지어 다가왔다.

두 학교 다 운동부 애들이라 180cm는 기본이었고, 그보다 훨씬 큰 애들도 많았다. 한 덩치 하는 애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예전부터 라이벌로 꼽히던 두 학교는 이치연이 에이스로 실권을 잡은 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선유고가 주강고에 전패하면서 만났다 하면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하지만 정작 임성은 이치연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아니, 굳이 따지면 고마운 쪽에 가까우려나.

“잘하면 한 대 치겠다? 하긴, 감독 밑에서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겠지.”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말에 박종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었다.

“심지어 타자 중에 1학년 스탯이 제일 좋다며? 야, 3학년이나 돼서 1학년 덕 보는 거 쪽팔리지 않냐?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치연은 가만히 있는 임성의 어깨를 툭툭 쳐 대며 시비를 걸었다.

“덕 볼 신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구린 건 그쪽 학교 타자들도 마찬가지 같은데. 같잖은 애들 데리고 대장 노릇 하니까 기분 째지나 봐.”

한숨을 내쉬다가 막 입을 떼는 임성을 대신해 나선 건 김희도였다. 내내 조용히 있던 남자는 임성의 앞을 막아서며 이치연을 공격했다. 욕설 하나 섞여 있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망치기엔 충분했다.

예상대로 이치연이 곧장 반응을 보였다.

“지금 나보고 한 말이냐?”

“그만. 역겨우니까 가까이 오진 말고.”

이치연이 괜히 손목을 돌리며 다가오자 김희도가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일부러 도발하려는 게 아닌 순도 100% 감정이라 더 기분이 더러울 것이다.

그리고 임성은 반년 전, 자신의 앞에서 구역질을 하던 김희도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장족의 발전이지. 음, 그래. 진짜 발전했어.

“똥에는 설사로 대응하라는 옛말이 있듯 싸가지엔 개싸가지로 맞서야지. 선유고 최고 싸가지 김희도. 출격해라!”

“가까이 오지 마세요.”

오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박종열은 기분 나빠 하기는커녕 싱글벙글 웃었다. 김희도는 살짝 질린 얼굴로 박종열을 보더니 다시 이치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겨우 1차 지명으로 뭐라도 된 것처럼 뻐기는 꼴을 보니 미래가 불 보듯 뻔하다. 프로에서 깔짝대다가 후드려 맞고 2군을 전전, 그나마도 안 돼서 빌빌거리다가 방출되겠지. 그리고 ‘한때 내가 프로 야구 선수였는데’ 하며 추억 팔이 할 거고. 그래. 지금 많이 즐겨 놔.”

헐. 김희도 말 되게 잘하네. 임성은 현재 심각한 상황도 잊고 말을 줄줄 쏟아 내는 김희도에게 감탄했다.

“미친 새끼야. 개소리 하지 마.”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치연이 커다란 주먹을 꽉 쥐며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김희도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로 대치하고 있던 두 학교 아이들이 각자 한 발짝씩 움직였다. 사소한 것으로도 빵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거기, 너희들 뭐 해? 잡담하지 말고 몸 다 풀었으면 장비 점검해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주강고 코치가 저 멀리서 선수들을 불렀다. 주강고 아이들은 이쪽을 째려보면서 돌아갔다.

“야. 오늘 시합 진짜 기대된다. 우리한테 발리고 질질 짜는 거 볼 생각 하니까 신나.”

“유치하긴. 요즘은 자기 소개하는 게 유행인가 봐.”

김희도는 이치연의 마지막 도발까지 비꼬았다.

저 어린 새끼가. 이치연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코치가 다시 부르자 욕설을 내뱉으며 더그아웃으로 뛰어갔다.

“우리 편일 때는 진짜 최고네. 오늘부터 넌 착한 싸가지다.”

“다시 봤다. 김희도.”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잠시 침묵하던 선유고 아이들은 너도나도 김희도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게 뭐라고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다들 열광했다.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덜덜 떨던 아이들도 하나같이 ‘타도 주강고’를 외쳤다. 1학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잘…… 음, 잘했어. 덕분에 사기 올라간 것 같다.”

한껏 흥분한 분위기 속에서 임성은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선 두 사람을 매몰차게 내치던 남자는 주인 앞의 개처럼 얌전히 머리를 내줬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귓등은 옅은 붉은 빛을 띠었다.

“원래 보자마자 시비 걸어요?”

어느새 고개를 든 김희도가 물었다.

“이치연? 예전엔 잘 지냈어.”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까?”

임성은 제 어깨를 짚은 손을 힐끔 곁눈질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대답할 때까지 계속 캐물을 기세였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고, 알 만한 애들은 다 아니까.

“사이가 틀어진 후부턴 대부분 이런 식이야.”

“틀어져요? 왜요?”

“걘 내가 투수 하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 나처럼 허접한 투수는 보기만 해도 힘 빠진다나 뭐라나. ……야, 김희도. 거기 서. 어디 가려고.”

“힘없이 공 던지게 만들어 주려고요.”

덤덤하게 내뱉는 모습에 살짝 멈칫했다. 힘없이 공 던지게 만들겠다니, 이치연 어깨라도 때리게?

“이치연이 일방적으로 그러는 거고, 난 걔 별로 안 싫어. 무엇보다 이치연 덕분에 야구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너도 만났잖아.”

이쯤이면 대답이 됐을까?

“흐음.”

김희도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수긍한 것 같았다.

“1차 지명 후엔 전국 대회 안 나오죠?”

“음……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한데, 보통은 그렇지. 아무래도 경기 뛸 때마다 어깨에 부담 가니까. 애지중지 갓차님 아니냐.”

“그럼 이치연이 경기에 나온 건 본인 의지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 대통령배에 나온 건 오늘이 처음이네.”

“그동안 한 번도 안 나오다가 굳이 오늘?”

하필? 김희도가 중얼거렸다.

“결승전이니까.”

이치연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남의 이목 끄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었다.

아마 결승이라 나왔겠지. 어차피 적당히 던지다가 내려가지 않을까. 그보다 김희도가 이치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더 신기했다.

적당히 몸을 풀면서 시간을 확인하자 경기 시작까지 고작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전광판엔 이미 라인업이 떴고, 선유고 쪽 응원석에 앉은 아이들이 누가 봐도 끌려온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심드렁한 반응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게, 오늘은 주말이었다. 이틀밖에 없는 귀한 주말 중 하루를 잘 알지도 못하는 야구부 응원으로 소비하는 게 짜증이 날 수밖에.

하지만 지금 임성은 저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정도로 침착하지 못했다. 경기 시간이 다가올수록 요란하게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니까.

“예준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웬일로 긴장했나 봐. 똥 시원하게 때리고 와라.”

조예준을 대신해 윤재하가 한쪽 눈을 찡긋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똥 얘기가 재밌냐. 이 귀여운 자식들아.

희미한 웃음을 띤 임성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 아닌 라커룸이었다. 그의 얼굴에 걸려있던 희미한 미소는 어느새 씻은 듯 사라진 후였다.

모두 그라운드로 나가 아무도 없이 텅 빈 라커룸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열어 깊숙이 넣어 놨던 것을 꺼내고, 누가 볼 새라 손에 꼭 쥐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하고 나가야겠다.

“휴우.”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던 임성은 바로 눈앞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보고 헛숨을 들이켜며 물러섰다. 반사적으로 물건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김희도.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소리 좀 내고 다니라니까.”

저 키로 어떻게 매번 조용히 다니지. 저것도 빠따를 잘 치는 거랑 관련 있나? 가령 무게 중심을 하체로 옮겼다든가.

“소리 냈어요. 선배가 못 들었을 뿐이지.”

“뭐 가지러 왔냐? 곧 경기 시작하니까 얼른 챙겨.”

임성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나가려 했지만, 곧장 그에게 가로막혔다. 체격에 비해 유난히 커다란 손이 마치 옭아매듯 임성의 팔을 붙잡았다.

“그거 뭡니까?”

김희도의 시선이 임성의 손으로 향했다.

“테이핑. 어깨에 하려고.”

감출까 하다가,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압박용 붕대를 흔들었다. 테이핑을 하고 경기에 뛰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 김희도 역시 수긍할 거라고 생각하며.

알았으면 손 좀 놔. 임성은 제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눈짓했다.

“누굴 속이려고요? 선배 말을 무조건 믿는 저기 저 멍청이들은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나는 아니에요.”

“내가 널 왜 속여. 이건 진짜 부상 방지용이니까…….”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 선배 어깨 정상 아니죠?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김희도는 그 말과 함께 팔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임성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목구멍으로 넘기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잇새로 흘렸다.

“으. 야, 김희도. ……좀, 놔!”

그는 임성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다급히 힘을 풀었다. 그러나 완전히 떼 내진 않고 약한 힘으로 여전히 팔을 붙잡은 채였다.

“인마. 너 때문에 더 악화되겠다. 그렇게 세게 쥐면 멀쩡한 사람도 아프겠어.”

“그냥 넘어가려 하지 말고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해. 임성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저릿한 정도고, 그나마도 며칠 안 됐어. 견딜 만하니까 말 안 한 거야.”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선배 말버릇이잖아요. 누굴 바보로 압니까?”

마치 분노를 억누르는 듯 김희도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벌써 몇 번째지. 알아듣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가? 대체 언제쯤이면 솔직해지는 거야.

김희도는 임성을 볼 때마다 칼날이 숨겨진 신발을 신고 가느다란 줄 위를 걷는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꼈다.

저렇게 참기만 하는 사람은 언제 무너질지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괜찮은 줄 아니까.

임성이 아니었다면 팔이 아프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눈앞에서 팔이 부러진다 해도 무시했겠지. 그 말인즉슨, 임성은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희도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메마른 타액을 삼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뒤틀린 속이 기어코 뾰족한 말을 쏟아 낼 것 같아서.

“왜 그렇게 몸을 막 대합니까? 사디스트예요?”

“사디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막말로 이 정도 안 하는 운동선수가 어디 있어? 걱정해 주는 건 알겠지만, 선은 넘지 말자.”

임성은 드물게 정색하며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김희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무리하는 이유가 뭐예요? 돈이에요? 내가 원하는 만큼 주면 몸 챙길 겁니까?”

“뭐?”

불편함 드러내던 임성은 잠시 침묵하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원하는 만큼 준다니, 꼭 드라마 대사 같잖아.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였다면 대성공이었다. 김희도와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조차 갑자기 우스웠으니까.

“내가 얼마 말할 줄 알고. 얼마 줄 수 있는데?”

김희도의 장단에 못 맞출 이유도 없었다. 누가 들어도 농담인 듯 가벼운 말투에 김희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무의식중에 주먹을 쥐었다 펴는 임성을 쳐다봤다.

“평생 선배 한 명 먹여 살릴 정도는 됩니다.”

“그래. 나 망하면 네가 먹여 살려 줘라.”

조심스럽게 김희도의 손을 떼어 낸 임성이 자신의 어깨와 팔을 더듬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아직 저릿저릿했다.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

“네 말처럼 ‘괜찮아’가 내 습관이긴 하지만, 이번엔 정말이야. 던질 수 있어. 던져야 해.”

당연히 우승을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할 거지만 꼭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왠지 이 시합을 끝내고 나면 무언가 남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고 할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야구 재밌냐고 물었지? 어, 재밌어. 난 이 재밌는 야구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마지막 불꽃 투혼 같은 거 절대 아니야. 치명적인 부상이었으면 내가 먼저 안 던지겠다고 했을걸.”

“선배가 의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판단합니까? 치명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요.”

김희도는 쉽게 의심을 풀지 않고 눈을 좁혀 뜬 채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게.”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그러다가 여전히 웃고 있는 임성에게 물었다.

“아니. 귀엽잖아.”

먹여 살릴 능력이 된다니. 이 얼마나 뜬금없으며, 웃기고 귀엽냐. 이 맛에 드라마 보는 건가?

“그렇게 웃으면 내가 넘어갈 줄…… 후우. 조금이라도 이상해 보이면 바로 교체 요청할 겁니다.”

말과 다르게 웃는 얼굴 한 방에 넘어간 김희도가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확답이라도 꼭 받아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였다.

“알았어. 그땐 군말 없이 내려갈게. 걱정해 줘서 고맙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마저도 임성다워서 한숨이 나왔다. 생각 같아선 지금 당장 병원으로 끌고 가 검사부터 받게 하고 싶었다.

여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김희도에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아니, 타인을 신경 쓴 자체가 처음인가.

거슬렸다.

“그거 이리 줘요. 내가 해 줄게요.”

“그럴래?”

붕대를 김희도에게 건네주고 상의를 훌러덩 깠다. 평소엔 머리카락이 땀에 쓸려 간지러웠는데, 빡빡이가 된 지금은 걸리는 것 없이 슥 벗겨져서 좋았다.

김희도의 눈동자가 등에 닿았다.

햇볕에 그을려 살짝 붉어진 목과 곧은 어깨, 너른 등엔 섬세한 근육들이 마치 과시하듯 붙어 있었다. 꽉 짜인 옆구리와 반듯하게 선 기립근은 오랜 운동으로 다졌다는 것을 드러냈다. 남자가 봐도 감탄할 정도로 좋은 몸이었다. 끈질기게 훑던 시선이 다시 한번 육체를 더듬으며 느리게 떠올랐다.

“뭐해, 안 붙여?”

그리고 임성이 돌아봤을 땐 언제였냐는 듯 무심하게 돌아가 있었다.

“팔 내밀어요.”

뚱한 말투와 달리 테이핑을 하는 손은 무척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선배 은근히 손 많이 가는 거 알아요?”

“내가?”

‘너라면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다.’, ‘너만 믿는다.’라는 말을 항상 들어왔던 임성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여기 선배 말고 누가 있어요. 보고 있으면 위태위태하다니까. ……끝났습니다. 불편하면 말해요.”

“좋아, 좋아. 훨씬 편해졌다.”

임성이 꼼꼼하게 테이핑 된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체크했다.

마사지도 잘하더니 테이핑 솜씨도 전문가 못지않네.

조금 저리긴 해도 평소처럼 던질 수 있을 정도였다. 맨몸에 언더 티를 입고 그 위에 유니폼을 걸쳤다. 모자까지 푹 눌러쓰자 영락없이 믿음직한 주장으로 되돌아갔다.

“경기 시작하겠다. 돌아가자.”

“선배.”

문으로 걸어가던 임성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여전히 파스와 테이프를 손에 쥔 김희도가 보였다.

“조예준 대신 포수 마스크 썼을 때 대가 받는다고 했잖아요. 그거 지금 받아도 됩니까?”

“여기서? 무슨 대가를 받는…… 어? 너 또 컸어?”

성큼성큼 다가온 김희도가 바로 앞에 섰다. 살짝 낮았다고 생각했던 시선은 이제는 확실히 수평이었다. 아무리 성장기라 해도 너무할 정도로 크는 거 아닌가? 이러다가 금방 추월당하겠네.

“내 키 따위는 관심이 없어요. 음, 눈높이가 딱 맞아서 좋긴 하네요.”

손날로 자신과 임성의 키를 가늠하던 김희도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희미한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 정신을 뺏긴 사이, 귀 바로 옆 뺨에 말랑한 뜨거운 뭔가가 닿았다 떨어졌다.

“방금…… 뭐, 뭐…….”

반쯤 넋을 놓고 눈만 깜빡이던 임성이 뒤늦게 물러서며 귀를 감쌌다. 손바닥이 뜨거운 건지 얼굴이 뜨거운 건지 모르겠지만, 등 뒤로 땀이 주륵 흘렀다.

“당황한 것 좀 봐. 귀엽네요.”

아, 진짜 귀엽다. 바짝 얼어붙었던 임성은 중얼거리는 김희도를 보고 입을 벌렸다. 그를 일방적으로 지켜본 지 약 2년, 알고 지낸 지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주장. 여기 있어요?”

숨 막히는 정적을 깨트린 건 노크 소리였다. 임성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곧 시합 시작인데 여기서 뭐 해요? 애들 다 기다려요.”

문고리를 잡은 조예준이 임성과 김희도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지금 가려고 했어.”

“뭐 했어요? 잠깐, 이게 무슨 냄새야. 주장, 혹시…….”

“예준아. 애들 기다리겠다. 얼른 가자.”

임성은 조예준의 말을 끊으며 방을 나왔다. 라커룸에 희미하게 감도는 파스 냄새로 상황을 눈치챈 조예준은 복잡한 얼굴을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갔다.

그리고 김희도는 문가에 비스듬히 기댄 채 두 사람, 정확히는 임성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먹여 살린다는 말 농담인 줄 아나 보네.”

아직도 날 모르고.

* * *

웅장한 애국가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양 팀 선수를 비롯한 관중 대부분이 가슴에 한쪽 손을 얹고 태극기를 바라봤다. 1분이 조금 넘는 애국가가 끝나고, 박수를 치며 본격적인 경기 시작을 알렸다.

그라운드에 나가기 직전,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둥그렇게 모여 섰다. 이치연의 도발 때문일까, 다들 의욕이 넘쳤다.

“저 새끼들이 우리 박살 낸다니까, 우리는 쟤들 개박살 내 주자.”

3학년의 파이팅에 1, 2학년들이 큰 소리로 화답했다. 임성은 양옆에 선 조예준과 김희도의 어깨에 팔을 얹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배에 힘을 주고서 “선유고!” 하고 외치자 아이들이 “파이팅” 하고 답했다.

잘하자. 후회 없이 하자. 무조건 이기자. 오늘 우승 못 하면 집에 안 간다. 등등 저마다의 각오가 뒤섞였다.

선발 멤버가 그라운드로 향하고 남은 선수 중 벤치에 앉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더그아웃에 다닥다닥 붙어 벌써 목 터져라 응원했다.

“선유고 파이팅!”

“이기자. 이길 수 있다.”

선공은 주강고로 임성이 먼저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흙을 밟자 호흡이 가빠지며 쿵, 쿵. 크고 빠른 심장 고동이 귓가를 사정없이 때렸다.

진정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후우, 후우. 호흡을 길게 뱉으면서 손에 낀 글러브를 내려다봤다.

잘할 수 있겠지? 아니. 질문 따위가 아니라 잘해야 한다.

“주장.”

포수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조예준의 얼굴은 긴장을 넘어 금방이라도 토할 듯 하얗게 질렸다. 예준이 너도 긴장했구나. 임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벌써부터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예준아. 우리가 최고 배터리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알지?”

“물론이죠. 제가 주장 프로 갈 때까지 보필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바로 오늘이네요.”

포수 자리로 걸어가는 조예준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살짝 쌉쌀한 흙냄새와 짙은 여름 냄새가 가득 스몄다.

모자챙을 살짝 올리며 본 하늘은 드문드문 구름이 껴 있긴 해도 제법 새파랬다.

“우승하기 좋은 날씨네.”

터질 것 같은 긴장을 농담으로 감추며 글러브를 들어 올렸다. 무조건 넣는다.

첫 공은 직구. 휭. 더운 공기를 가른 공이 포수 미트에 정확히 꽂혔다. 주강고 타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어깨가 젖히는 느낌이나 팔이 뻗어 나가는 감각이 썩 나쁘지 않았다. 긁히는 날인가? 제발 그래야 할 텐데. 공을 쥔 손등으로 콧잔등의 땀을 훔쳤다.

원 아웃, 투 아웃, 마지막 아웃은 내야 땅볼로 처리.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마무리였다.

고작 세 명의 타자를 상대했을 뿐인데, 벌써 유니폼이 흠뻑 젖었다. 임성은 축축한 손을 바지에 닦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주장, 여기 물이요.”

“어. 고맙다.”

박영빈에게 건네받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주말에 야구장이 웬 말이냐. 진짜 개짜증 난다.”

“내 말이. 우리 학교 지금 붙는 학교에 맨날 진대. 어차피 질 경기를 봐서 뭐 하냐. 시간만 아깝지. 대충 보는 척하다가 나가자.”

더그아웃과 관중석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특히 관중이 그리 많지 않은 날에는 하는 말이 고스란히 들릴 정도로.

임성은 반쯤 남은 물통을 내려놓고 마운드에 서 있는 이치연을 응시했다.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과 그에 상응하는 힘 있는 공으로 선유고 타자들을 차례대로 제압했다.

1번 타자로 나섰던 김희도는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를 필두로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 세 개가 올라가며 공수 교체가 빠르게 이뤄졌다.

“수비 나가자.”

물 한 통을 다 비우기도 전에 공수가 바뀌었다.

4회가 끝날 때까지 양 팀 선수 중 그 누구도 베이스를 밟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원 아웃, 투 아웃, 쓰리 아웃 체인지.

『예상과 다르게 초반부터 치열한 투수전이 펼쳐집니다. 선유고 선발 임성은 날카로운 제구로, 주강고 선발 이치연은 압도적인 구위로 타자들을 압박합니다. 5회 말, 선유고 정의영이 내야 안타를 치며 처음으로 진루했지만, 병살이 나오며 무득점으로 물러났습니다.』

5회가 지나면서 안타를 치고 나가는 선수가 늘어났지만, 홈플레이트는 여전히 깨끗했다.

임성도 이치연도 질 수 없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한 지리멸렬한 투수전이 이어졌다.

『이번 이닝도 득점 없이 마무리됩니다. 임성과 이치연. 두 선수 다 고등학생답지 않은 깔끔한 투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프로 야구와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네요. 오히려 한 명의 주자도 내지 않겠다는 열정은 프로 선수들이 배워야 할 정돕니다. 보세요. 둘 다 이를 악물었잖아요.』

캐스터의 목소리에 살짝 흥분이 묻어났다.

누가 내보낼 줄 알고. 임성은 어깻죽지가 화끈거릴 정도로 세게 공을 던졌다.

땅! 공이 미트로 빨려 들어가며 마치 총을 쏘는 듯 굵고 딱딱한 소리가 울렸다.

후.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치연이야 원래 잘할 거라 예상했지만, 임성이 생각보다 잘 버텨 줍니다. 투수 수도 여유 있습니다. 제구가 흔들린다는 말을 비웃듯이 한가운데로 꽂아 넣습니다. 쓰리 아웃 체인지. 마운드는 이제 이치연에게 넘어갑니다.』

마운드에 선 이치연이 선유고 타자들을 돌려세웠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균형이 깨진 것은 7회 초, 베이스에 아무도 없는, 노 주자 1아웃의 상황이었다.

임성은 주특기인 슬라이더를 던졌고, 상대 타자는 순간적으로 상체를 젖히며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임성의 고개가 공을 따라 돌아갔다. 제법 멀리 날아가긴 했어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뜬공이었다.

아웃 카운트 하나 더 추가하겠네. 공이 떨어지는 위치를 가늠하던 박종열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공을 잡기 위해 고개를 쳐드는 순간,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드러나지만 않았어도.

작열하는 햇볕이 순간 눈을 찔러 댔고, 그 사이 공은 한껏 뻗은 글러브를 스쳐 무심하게 떨어졌다.

뭐야. 공 어디 갔어. 잠시 얼어 있던 박종열이 제 옆에 떨어진 공을 다급히 주우며 1루를 봤지만, 발 빠른 주자는 이미 2루까지 도착한 뒤였다.

평범한 뜬공이 실책으로 장타가 되는 순간이었다. 전광판 ‘E’(Error)에 1이 떴다.

“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관중들이 웅성댔다. 야구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은 잘 아는 사람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고, 아는 사람은 “미친. 저걸 놓치냐. 눈이 어디 달렸어. 야수가 등신이네.” 등등 박종열에게 욕설 섞인 야유를 퍼부었다.

안타까운 탄식이 흐르는 선유고 응원석과 달리 주강고 학생들은 환호를 하다가 ‘용화산의 정기’로 시작하는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북소리도 점점 소리를 키웠다.

선유고 선수들은 퍽 당황한 눈치였다. 박종열은 자신의 실책이 어이없는 듯 글러브로 얼굴을 가렸다. 만약 경기 도중이 아니었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결정적인 실책이 발생합니다. 백야 현상으로 순간 타구 판단을 못 한 것 같습니다. 참 운이 안 따라 주는 상황이었어요.』

한여름의 태양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녹여 버리겠다는 듯 무섭게 타올랐다. 아무리 구장 잔디가 천연이라 한들 더위를 이기지 못했다. 흙과 잔디에서 올라온 열기에 숨이 턱 막혔다.

“저기. 타임 요청하겠습니다.”

타임 요청을 한 조예준이 마스크를 들어 올리며 임성에게 다가갔다.

“주장. 다음 타자는 처음부터 변화구로 갈게요. 최근에 타격 폼을 바꿨는지 다리가 먼저 나가더라고요.”

“알았어.”

임성은 조예준이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로진백을 만지작댔다.

실책 같은 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순식간에 벌어지는 게 실책이었으니까.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단순한 위기 상황으로 끝날 일이었다.

임성은 손안의 로진백을 몇 번 더 굴리다가 툭 내려놨다. 흰 가루로 범벅이 된 손끝을 불고 남은 것은 바깥쪽 허벅지에 닦았다.

이제 4, 5, 6번 타자를 상대할 차례였다.

땀에 미끄러진 모자를 고쳐 쓴 임성은 손가락을 최대한 공에 붙인 뒤 어깨가 덜컹거릴 정도로 세게 던졌다.

따악. 잘 맞은 공이 장타로 이어지며 2루 주자가 홈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0의 행렬 속 드디어 다른 모양의 숫자가 떴다.

『실책 하나가 경기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강고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선유고는 뼈아픈 실수를 합니다. 대통령배 결승전이 펼쳐지는 잠실구장, 현재 스코어 1대 0. 주강고가 한 점 앞서고 있습니다.』

7회 초 현재 스코어.

[주강고등학교 1 : 0 선유고등학교]

임성은 득점을 뽑고 흥분하는 주강고 타자를 보다가 턱 아래 흥건하게 고인 땀을 훔쳤다.

실책을 신경 쓸 필요 없듯이 실점 또한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을 던지는 게임인 야구에서 얻어맞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으므로.

“괜찮아. 여유 갖고 한 명씩 처리하자.”

임성이 말 없는 박종열을 대신해 큰 소리로 아이들을 다독였다. 1점, 겨우 1점이었다.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

“스트라이크. 쓰리 아웃 체인지.”

다행히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심판의 아웃 사인을 확인하고 더그아웃으로 걸어갔다. 점수를 더 내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후우. 진짜 덥네. 1회부터 줄줄 흐르던 땀 때문에 온몸이 젖었다. 임성은 더그아웃 구석에서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려웠지만, 굳이 꼽자면 어색함? 허전함? 이게 뭐지. 뭘까. 고개를 갸웃했다.

벤치로 돌아가 수건을 둥글게 뭉쳐 정수리에 얹었다.

“머리 괜히 밀었나 봐. 어째 더 더운 것 같냐.”

보통 이런 농담을 뱉으면 신나서 놀렸을 박종열이 아무 말도 없었다. 평소의 장난기는 어딜 가고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심각한 얼굴로 바닥을 쏘아 보고 있었다.

실책으로 시작된 실점이니 아마 지독한 자괴감을 느끼는 중이겠지.

“야. 박종열.”

박종열을 부르자 축 처져 있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미안하다. 순간 햇빛 때문에 타구가 안 보였어. 신경 못 쓴 내 잘못이다. 모처럼 주강고랑 막상막하로 경기 중이었는데…….”

임성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박종열이 대뜸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지난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이렇게 풀죽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박종열도 어차피 질 경기라는 관중의 대화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얻어맞은 건 난데 네가 왜 죽상이냐. 살다 살다 박종열이 사과하는 모습을 다 보네. 오늘 기념일로 지정하자. 박종열 사과 데이.”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으헉. 차가워.”

임성은 박종열 옆에 털썩 앉으며 그의 목을 휘감아 당겼다. 그리고 얼음물을 그의 뺨에 마구 문지르자 박종열이 팔을 휘두르며 질색했다.

“냉수 마시고 열 좀 식혀라. 그리고 진짜 미안하면 홈런 쳐. 주강고 박살 낼 거라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박종열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옆에 세워 놨던 배트를 들어 붕붕 휘둘렀다.

“두고 봐. 내가 만루 홈런 치고 만다.”

“선배님. 파이팅입니다.”

후배들이 타이밍 좋게 박수를 치며 박종열의 기를 북돋웠다. 역시 사회…… 아니, 운동부 생활하면서 느는 건 눈치밖에 없다니까.

자칫 가라앉을 뻔했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자, 임성이 숨을 얕게 내쉬었다.

“당한 건 두 배로 갚는다. 다음 이닝에 바로 역전하자.”

안도했다는 게 언제였냐는 듯 금세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주강고는 역시 강했고, 이치연은 그 강한 고등학교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에이스였다.

전국 최대어. 고등학생이면서 프로 야구 팬들에게도 익숙한 선수. 유니콘즈가 지명하면서 ‘우리 팀이 누구 뽑을지 다들 예상하셨죠?’ 하고 말했던 그 투수.

승부가 치열하게 이어지는 7회 말, 김희도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헬멧을 조금 뒤로 넘기며 고쳐 쓴 뒤 배트를 쥔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임성은 더그아웃에서 두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응시했다.

이치연이 유독 김희도 타석에 공을 세게 던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예상대로 전광판에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직구가 연속으로 꽂혔다.

강철 팔도 아니고 7회에 저 구속이 가능하냐?

그때 이치연이 던진 공이 김희도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갔다. 다행히 공에 맞기 직전, 김희도가 상체를 젖혔고, 공은 팔꿈치 바로 아랫부분을 스치며 포수 미트에 꽂혔다.

전광판에 151km/h라는 숫자가 찍혔다. 만약 제대로 맞았다면 상당한 통증이 있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골절 등의 부상을 입었을 수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열이 확 올라왔다. 골이 지끈지끈할 정도의 분노가 임성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이치연 저 씨발 새끼!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에 올려놨던 물통이 툭 떨어지며 물이 줄줄 흘렀다.

그라운드로 튀어 나가려는 임성을 붙잡은 건 눈을 휘둥그레 뜬 조예준이었다. 그는 살벌한 임성의 표정을 보고 주춤하면서도 팔을 놓지 않았다.

“가서 뭐 하게요?”

“예준아. 이치연 저 개새끼가 지금 희도에게 공 던진 거 못 봤냐?”

“봤어요. 실투예요. 빈볼 아니고 손에서 빠진 거라고요.”

“알았으니까, 우선 놔 봐.”

전혀 안 것 같지 않은데요. 조예준이 식겁하며 임성의 한쪽 팔을 껴안다시피 했다.

“놓으면 나갈 거잖아요. 지금 나가면 바로 퇴장이에요. 형. 여기서 형까지 퇴장당하면 우리 진짜 큰일 나요. 네?”

앞뒤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그라운드로 돌진하려던 임성이 드디어 멈칫했다.

정신 차린 건가? 조예준은 여전히 임성의 팔을 잡은 채 그라운드를 눈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이치연 성격상 진짜 빈볼 던진 거면 사과 안 할걸요?”

조예준의 말처럼 이치연이 똥 씹은 표정으로 모자 끝을 살짝 잡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걸 보면 일부러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이치연이라도 대놓고 빈볼을 던지는 쓰레기는 아니니까.

하지만 고의든 아니든 빡치는 걸 어떻게 하라고.

“씨발 새끼.”

선유고 야구부원들은 평소와 다른 주장의 모습을 보고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금품 수수 혐의로 수사 중인 전 감독이 대놓고 자존심을 짓뭉개는 발언을 해도 묵묵히 참던 게 주장 아니었나? 뭘 해도 그저 ‘잘했다.’가 기본인 사람이 저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정작 공을 맞을 뻔한 당사자는 더그아웃에서 난리가 난 것도 모르고 배트를 휘둘렀다.

투웅. 미묘한 타이밍에 나간 배트에 맞은 공은 느리게 굴러가 1루수가 쉽게 잡았다.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임성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김희도의 어깨를 짚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공에 맞은 거 아니지?”

“네? 무슨 공, 아…… 음, 안 괜찮은 것 같아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무표정하게 걸어오던 김희도는 임성의 질문에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 옆구리를 더듬었다.

“안 괜찮다고? 맞았냐? 잠깐 기다려 봐. 이치연 족치고 올게.”

“아니요. 선배 안고 있으면 괜찮아질 것도 같고. 이치연 말고 날 신경 써 줬으면 좋겠는데요.”

김희도는 이치연을 노려보는 임성의 턱을 잡아 제게로 돌렸다. 자신 때문에 분노하는 임성을 보는 게 만족스러웠다. 눈이 가늘게 휘어지자 임성의 표정이 더더욱 심각해졌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선배가 할 말은 아니네요. 어깨는 어때요?”

아무리 투구 수가 적다 한들 계속 공을 던졌던 팔이었다.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 진짜 할 만해.”

습관처럼 나온 괜찮다는 말에 김희도가 눈을 번뜩였다. 임성은 금세 말을 바꾸며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김희도는 선유고의 공격이 끝나고, 임성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갈 때까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임성이 조금이라도 자리를 뜨려고 하면 ‘옆구리가 욱신거린다.’며 붙잡았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야구팬들 사이에선 ‘약속의 8회’로 불리는 8회 역시 양 팀 무득점으로 끝났다.

지금까지 점수라고는 선유고 실책으로 얻어 낸 주강고의 1점이 유일했다. 프로에서도 1-0은 잘 나오지 않는 점수였고, 고교야구가 보통 난타전인 걸 감안하면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선발 투수 둘 다 상대 팀 타자들을 빠르게 아웃시켜 투구 수도 넉넉했다. 이대로라면 9회까지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이닝은 단 하나.

만약 이치연이 9회까지 실점 없이 막으면 영봉승이자 완봉승을 하게 되는 것이고 선유고는 한 점도 내지 못하는 영봉패를 당하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치욕적이었다.

『여기는 대통령배 결승전이 펼쳐지고 있는 잠실구장입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9회만 남겨 두고 있습니다. 사실 선유고 임성이 이렇게 좋은 투구를 보여 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경원 해설위원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임성 선수는 기세 좋던 1학년 때와 달리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족한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사실 1학년 때 두 선수 평가는 엇비슷했어요. 임성의 구속이 떨어지면서 격차가 벌어졌지요. 근데 지난 경기부터 구속과 제구가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최근 들어 페이스가 가장 좋고요.』

9회 초 수비에 들어가기 직전, 임성은 출전 선수는 물론이고 내내 벤치만 지키던 신입까지 모두 불러 모았다.

그들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어깨동무를 했다. 물론, 김희도 차례에선 자비 없이 뚝 끊겼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결승까지 온 것도 기적이다. 다들 고생했다.”

임성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여러모로 부족한 주장을 믿고 따라 줘서 고맙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회 안 해. 너희들이랑 같이 야구 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즐거웠어.”

담담하게 이어지는 말에 신입생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이 실룩대는 걸 보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뭐합니까. 지금 청춘 드라마 찍어요?”

울컥 차오르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아이들은 낄 데 못 낄 데 구분 못 하고 분위기를 망치는 김희도를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누가 싸가지 아니랄까 봐 끝까지 저러네.”

“그래도 첫날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 역겹다는 말은 안 하잖아.”

조예준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서찬규가 자연스럽게 받았다.

“캐릭터 하나는 확실해서 좋다. 어차피 싸가지면 우리 싸가지가 낫지. 아까 이치연 표정 존나 썩은 거 봤지? 속이 뻥 뚫리더라니까.”

“맞아요.”

이번엔 박종열의 말에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김희도는 반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부원들 사이에서 겉돌았지만, 초반에 감돌던 날카로운 배척이 아니라 나름 농담까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김희도는 청춘 드라마 찍냐고 비꼬았지만, 그들은 청춘이 맞았고 지금 드라마를 쓰는 것도 맞았다. 먼 훗날에 돌아보면 오글거린다고 말할지는 몰라도 지금은 낯간지러워도 좋을 나이지 않나.

“희도 말이 맞아. 아직 경기 안 끝났는데 청승 떨었네. 마지막 작전은 죽도록 치고, 달리는 거다. 자, 선유고!”

“파이팅!”

임성을 필두로 각자의 파이팅이 쏟아졌다.

“가자.”

임성은 그라운드로 걸어 나가며 덕지덕지 테이핑이 감긴 어깨를 더듬었다. 나름 체력을 배분한다고 했는데도 슬슬 뻐근했다.

앞으로 1회, 1회만 버텨 주면 좋겠는데. 불안과 걱정, 그리고 긴장감과 흥분까지 더해진 심장은 금방이라도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후우. 후우. 깊은 심호흡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 주진 못했다. 공을 쥔 손은 이미 땀범벅이었고, 그마저도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되냐?

“선배.”

“어, 왜?”

“손…….”

“손? 완전 괜찮아. 앞으로 100구는 더 던질 수 있어.”

“……손 달라고요. 그리고 내가 100구 던지는 거 보고만 있을 것 같아요?”

어설픈 농담에 김희도는 정색을 하다가 곧 임성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젖은 손바닥이 서로 딱 붙으며 미묘한 간지러움이 일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웠다.

“내 말 기억하죠? 맞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잡을 테니까 선배는 마음대로 던져요.”

김희도는 그 말을 건네고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와 임성을 세게 껴안고서는 물러났다. 겹쳤던 상체가 떨어지며 손가락이 임성의 귓불을 살짝 건드렸다.

“주장?”

멀뚱멀뚱 서 있던 임성은 자신을 부르는 조예준의 목소리를 듣고 마운드에 올랐다.

『현재 스코어는 1 대 0. 여전히 주강고가 앞서고 있습니다. 선유고는 투수 교체 없이 임성이 그대로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완투가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대단하네요. 감독이 없으니 아마 본인 의지가 아닐까 합니다.』

네. 제 의지입니다. 만약 해설의 목소리가 들렸다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미친 듯이 커지던 불안감이 어느새 잦아들며 주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18M 남짓한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미트를 벌린 조예준이 보였다.

잘 풀려서 프로에 지명되든, 다른 길을 가든 공식전에서 선유고등학교 이름을 달고 공을 던지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자신의 10대 시절은 야구가 전부였다. 어떻게 해야 잘 던질까, 오랫동안 마운드에 설 수 있을까.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즐거웠다.

임성은 글로브로 얼굴을 가리며 피식 웃었다.

결승이라 이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청승인지. 아쉬움이든 후련함이든 경기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게 아니라 집중이 필요했다.

주강고의 타순은 1번 타자부터였다. 한 명이라도 내보내면 바로 중심 타선으로 연결되는 순서였다.

타석에 들어선 1번 타자가 배트를 어깨에 걸쳤다. 이 선수는 김희도처럼 초구에 배트가 나가는 버릇이 있어 직구보단 변화구가 상대하기 쉬웠다.

조예준 또한 같은 생각인 듯 슬라이더를 주문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을 쥐었다. 눈싸움을 하듯 타자를 쏘아보다가 어느 순간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공 다섯 개로 첫 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한 임성은 로진백을 내려놓고 허벅지에 닦았다. 그다음 모자챙 안쪽을 매만지며 심호흡을 했다. 딱히 루틴은 아니었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그 사이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동그란 얼굴에 광대가 살짝 도드라진 2번 타자는 배트를 양손에 번갈아 쥐었다가 몸을 흔드는 행동을 했다. 흔하진 않지만, 투수의 집중력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상한 루틴을 하는 일도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몇 년 전 국제 경기 때, 한국은 일본에 3점을 뒤지고 있었다. 패색이 짙은 9회 말, 대타로 나온 한국 선수가 기묘한 루틴으로 일본 투수의 신경을 긁었다. 꼭 그것 때문이라고 단정할 순 없어도 그 선수의 안타를 시작으로 한국의 반격이 시작돼 결국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당시 이치연의 가족과 함께 TV로 보던 임성은 역전타가 나오는 순간 벌떡 일어섰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돌려 보는 경기였다.

루틴이 계속 이어지자 조예준이 주강고 타자를 힐끔 곁눈질했다. 거, 적당히 좀 하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장갑 찍찍이를 뗐다 붙이던 타자가 드디어 타격 자세를 잡았다.

따악. 비켜 맞은 타구를 정의영이 잡아 1루로 뿌리며 아웃 카운트 하나를 더 올렸다.

“후우.”

투 아웃,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였다.

휴. 엄청 덥네. 공기도 습한 것 같아. 이젠 어깨가 아픈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준비를 하던 임성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좀 끼긴 했어도 화창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흐려지며 비가 쏟아졌다.

“어, 어? 비 온다.”

한두 방울씩 천천히 떨어지는 게 아닌 소나기였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에 주심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모여 대화를 했다. 이내 경기를 중단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 이닝밖에 남지 않아서인지 속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임성은 모자를 고쳐 쓰고선 처음부터 결정구를 뿌렸다.

비를 맞은 공은 평소보다 휘는 각도가 무뎠다. 평소였다면 헛스윙이었을 타구는 운 나쁘게 내야 안타가 됐다.

“괜찮아요. 다음 타자 잡읍시다. 주장 파이팅!”

더그아웃에서 후배, 동기들의 응원 소리가 들렸다.

“주강고 이기자! 이선재! 홈런, 홈런! 이선재, 홈런!”

목에 핏대를 세우며 타자의 이름을 부르짖는 주강고 응원 소리도 귀에 꽂혔다.

임성은 주자를 등진 채 4번 타자와 승부에 들어갔다.

주강고에서 제일 유명한 선수를 꼽으라면 대부분 투수 이치연을 택하겠지만, 임성은 이선재도 높게 평가했다. 파울성 타구도 힘으로 밀어붙여 홈런을 만드는 타입이라고 할까? 여러모로 대결하기 까다로운 선수였다.

하지만 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따위가 아니라 해내야 했다.

젖은 흙을 발끝으로 고르고 공을 꽉 잡았다.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상대가 4번 타자라서일까, 아니면 마지막 카운트이기 때문일까. 겨우 억눌렀던 긴장이 다시금 퍼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러다 심장이 튀어나오겠네.

쿵, 쿵, 쿵. 쿵쾅쿵쾅!

임성은 손등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세게 쥔 공을 힘껏 뿌렸다.

스트라이크, 높은 볼, 파울, 볼. 다섯 번째로 던진 공이 높게 뜨자 조예준이 고개를 한껏 젖히며 따라갔지만, 공은 파울 지역으로 떨어졌다.

어떻게든 아웃 카운트를 잡아 주려고 노력하는 게 고마워 눈으로 인사를 했다.

여섯 번째 공은 스트라이크 존에 살짝 걸치며 떨어졌다.

“볼.”

심판의 볼 선언에 조예준이 벌떡 일어서며 양팔을 벌리고 어필했다. 이게 어떻게 볼이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심판은 단호하게 볼을 외치며 되레 조예준에게 경고를 했다.

와 씨, 눈이 장식으로 달렸냐? 이치연 새끼가 던진 애매한 공은 다 스트로 잡아 주더니, 우린 왜 다 볼이야. 이거 완전 승부 조작 아니냐고. AI 심판 도입이 시급하네. 조예준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이미 판정받은 건 어쩔 수 없지. 털어 버려. 임성은 조예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완전 거짓말이고. 하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 않기로 했다.

지금 몇 구를 던졌더라. 투구 제한에 걸리는 건 아니겠지? 여기까지 와서 마운드를 넘겨줄 순 없었다.

“후우. 비가 내려도 덥네.”

눈을 따갑게 찔러 대는 빗물을 슥 닦으며 전광판을 확인했다. 초록색 불 3개와 노란 불 2개가 들어와 있었다.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의 풀카운트.

타자도 투수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고, 어깨는 아예 감각이 없었으며 팔꿈치와 손목은 시큰댔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재밌었다.

얻어맞아도 잡을 테니까 마음껏 던지라고 했었나? 아, 먹여 살려 준다는 말도 했던 것 같다.

문득 김희도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도 시큰둥한 표정이려나. 쟤도 뭔가에 간절해 본 적이 있을까? 간절한 김희도라.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야, 임성 좀 봐라. 저 새끼 지금 웃고 있어.”

더그아웃 펜스에 달라붙어 있던 3학년 중 누군가가 임성을 가리켰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쭉 빼고 임성을 살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임성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아마 모자에 가려진 눈도 휘어지지 않았을까.

“헐. 웃고 계신 것 맞는 것 같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은데? 끌고 내려와야 하는 거 아냐?”

후배의 말에 또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조예준 또한 임성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며 거칠게 들썩이는 가슴.

괜찮은 거 맞지……? 컨디션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모르겠네. 그나저나 비는 왜 이렇게 내리는 거야. 조예준은 임성의 기분을 파악하려 애쓰며 사인을 냈다. 고개를 끄덕인 임성이 팔을 들어 올렸다.

이제 막거나 맞거나 둘 중 하나였다.

“후우.”

아드레날린과는 조금 다른, 마치 팽창하는 풍선 안에 갇힌 것 같았다.

“편하게, 해요. 편하게!”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김희도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쟤는 어째 지금도 평소랑 목소리가 똑같냐. 아니지, 저렇게 크게 외치는 건 처음 본다. 역시 너도 흥분했잖아.

입성은 더욱 크게 웃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주강고 타자의 배트가 헛돌며 관성을 이기지 못한 몸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댔다.

배트가 돌아가는 것을 본 임성이 주먹을 불끈 쥔 채로 크게 포효했다. 몸 안의 모든 감정들이 크게 흥분하여 날뛰었다.

“좋았어어어어어!”

해냈다. 잡았어.

임성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젖혔다. 발끝에서부터 저릿저릿 돋아난 소름이 전신을 감쌌다. 4번 타자를 헛스윙으로 돌려세우는 게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몰랐다.

재밌어. 역시 투수하길 잘했다.

『이선재, 스윙! 끈질긴 승부는 이선재의 아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마지막 공 대단했죠?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공이었습니다. 이제 승부는 9회 말로 넘어갑니다.』

“저 자식도 은근 정상 아니라니까. 한가운데에 직구를 꽂아 버리네.”

포효하는 임성의 뒷모습을 보며 박종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유고 임성, 주강고 강타선을 상대로 9이닝, 단 1실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구 난조를 겪은 선수답지 않은 아주 대담한 투구였습니다. 조금 민감한 얘기입니다만, 선유고가 지금 안팎으로 시끄럽잖아요? 하지만 선수들은 오히려 더욱 단단했습니다. 의지가 엿보였어요. 이경원 해설위원님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좋았습니다. 초반 페이스도 좋았고 투구 관리도 잘됐습니다.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은 모습을 보였어요. 임성 선수 오늘 최고 구속이 143km/h예요. 작년 여름부터 꾸준히 지적받던 구속 문제도 어느 정도 올라왔습니다.』

『이제 주강고 투수 이치연이 마운드를 건네받았습니다. 스코어는 1 대 0. 한 점, 단 한 점 차. 주강고가 왕좌를 지킬지, 선유고가 창단 후 첫 대통령배 우승 깃발을 들지, 승과 패를 가를 마지막 승부가 시작됩니다.』

임성은 더그아웃 앞까지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차례대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1점 차로 지고 있는데, 마치 이긴 것처럼 다들 상기된 채였다. 흥분한 건 임성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아이들을 다독이던 침착함은 어디로 갔는지 한껏 붉어진 얼굴로 가쁜 숨을 토했다.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데도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잘했어요.”

김희도는 제일 마지막에 다가와 임성의 모자를 들어 올리고선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선배가 왜 자꾸 머리 만지는지 알겠네요. 동글동글한 게 꼭 깐 감자 같아요.”

“까분다.”

흔치 않은 김희도의 농담에 웃으며 더그아웃 뒤쪽으로 향했다. 막 물을 꺼내는데, 커다란 팔이 뒤에서부터 뻗어 나와 임성의 등을 단단히 감쌌다.

“왜?”

이젠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라운드를 보느라 정신없는 아이들 중 혼자만 평소와 똑같은 남자.

게다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끌어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기회를 놓칠 순 없잖아요.”

속삭이듯 말한 김희도가 상체를 조금 더 밀착시켰다. 방금 마운드에서 내려온 남자의 몸은 뜨거워 배 속이 간지러웠다.

아, 미치겠네. 이번에는 임성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허리를 안지 않은 손으로 뚜껑을 따는 걸 도왔다.

“거기서 승부 안 났으면 억지로 끌고 내려왔을 거예요.”

“승부 나서 다행이네. 어후, 너무 덥지 않냐.”

비가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더운지 임성이 연신 유니폼을 펄럭였다. 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살짝 더운 공기와 빗물이 섞인 흙냄새, 그리고 땀 냄새가 더 짙어졌다.

“희도야?”

살짝 멈칫했던 김희도는 몸을 떼어 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어깨 대요.”

“아이싱 해 주게? 고맙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임성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감에 눈을 깜빡였다. 왠지 김희도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뭐가 이상하냐고 물으면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위화감이 느껴진달까.

“너 괜찮냐?”

“괜찮습니다.”

“꼭 감기라도 걸린 사람처럼 얼굴이…….”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을 쳤고, 김희도는 시선을 내렸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혀 뜬 것이 마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임성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선배.”

임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애써 벌렸던 거리가 다시금 가까워져 있었다. 임성은 또다시 물러서다가 등이 벽에 닿는 것을 느끼고 턱을 내리며 목을 움츠렸다.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할 건데, 그렇게 경계하면 뭔가 하고 싶잖아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임성 옆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열어 얼음을 꺼냈다.

아, 깜짝 놀랐네. 아무래도 양호실에서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나 보다. 김희도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 같으면 목부터 보호하게 된다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벤치로 돌아갔다. 첫 타순이었던 서찬규가 더그아웃에 들어오지 않고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찬규는 왜 저러고 있어?”

“삼진 당했거든요. 배트 한 번 못 휘두르고 그대로 루킹 삼진.”

다른 후배의 말에 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웃당해서 더그아웃에 못 들어온다는 게 말이 되나?

“쟤가 저러면 공 놓친 나는 뭐냐? 나 때문에 실점했잖아. 야. 서찬규 지금 당장 안 들어오면 오리걸음으로 운동장 20바퀴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농담 같으면서도 진지한 박종열의 엄포에 서찬규가 헬멧을 벗으며 쭈뼛쭈뼛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임성은 더욱 의문에 빠졌다. 여태 타자들에게 득점 지원 안 한다고 한 번도 뭐라고 한 적 없었는데, 무의식중에 압박이라도 줬나?

“인마. 사과할 일 전혀 아니야.”

임성이 서찬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거봐라. 선발 투수가 아니라잖아. 그리고 솔직히 감코 없이 결승에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니냐?”

배트 스윙! 아웃!

박종열의 말에 대답한 것과 동시에 두 번째 아웃 콜이 울렸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윤재하 뒤로 공을 쥔 채 땀을 닦는 이치연이 보였다.

오늘 컨디션이 좋은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9회에도 이치연의 구위는 조금도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묵직했다.

임성은 무의식중에 제 왼쪽 어깨를 더듬으며 타석에 들어서는 조예준을 바라봤다. 기도라도 하는 모양인지 조예준의 입이 달싹였다. 이제 조예준이 아웃되면 끝나는 거구나.

“무슨 생각 해요?”

어느새 다가온 김희도가 임성의 모자를 벗겨 제 머리에 썼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너 야구부로 꼬실 생각.”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임성에게 얼음주머니를 건네주고 배트를 챙기며 다음 타석을 준비하던 김희도가 고개를 들었다. 서늘하게 뻗은 눈꼬리가 내려앉으며 마치 딴 사람처럼 변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아? 임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네요. 꼬시는 거.”

김희도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게 새삼 신기했다.

배트를 옆구리에 낀 김희도가 임성에게 걸어왔고, 그사이 이치연은 스트라이크 하나와 볼 하나를 더 넣었다.

“난 선유고 야구부 주장이 아닌 선배의 생각이 궁금해요. 임성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 나는…….”

누구도 제게 묻지 않았던, 심지어 본인 스스로도 떠올리지 않던 것을 눈앞의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때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시선을 내려 굳은살이 박인 제 손바닥을 봤다. 지난 10년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감독 없이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라 했던가, 배우는 게 있다면 패배조차 값지다고? 지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무엇도 승리의 성취감에 비할 순 없었다.

“이기고 싶어.”

사실은 정말, 미치도록 이기고 싶었다. 지금만큼은 신인 드래프트고 뭐고 상관없이 선유고 야구부 애들과 이기고 싶다고. 이토록 승리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나?

“알았어요.”

김희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배트를 어깨에 걸쳤다. 평소처럼 심드렁하거나 시큰둥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리 진지해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한테 맡겨요.”

다른 사람이 했다면 허세로 넘겼을 말도 김희도가 내뱉으니 제법 그럴싸했다.

게다가 ‘우리’라잖아. 항상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애가.

임성은 조금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손등의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 풀어요. 팔에 힘주지 말랬잖아.”

깡. 공을 쳐 내는 소리에 임성은 더그아웃 펜스를 짚으며 상체를 내밀었다.

뭐지, 조예준이 뭐 한 거야, 파울인가? 하지만 곧 김희도가 오른쪽 어깨를 잡아채 다시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우리한테 맡기라는 말 취소할게요.”

임성의 모자를 다시 돌려주고 헬멧과 장갑을 낀 김희도가 타자 대기석으로 걸어갔다.

“내가 다 할 거니까, 나만 믿어요.”

김희도의 입꼬리가 조금 짓궂게 올라갔다.

“안타 조예준, 안타 조예준! 조예준!”

타석에 선 조예준은 커다랗게 울리는 응원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긴장 중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3학년들이 참여하는 시합은 오늘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또 언제 주장이랑 배터리를 이룰 수 있을지 몰라. 아니, 아니. 방금 한 말 취소. 1년 뒤에야 주장의 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조예준은 터질 것처럼 폭주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해 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꼭 뭍에 올라온 생선이 된 기분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치지 못하면 경기는 종료된다.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조예준은 눈에 힘을 주며 이치연을 쏘아 보았다. 평소엔 주장만 보면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인 놈이 마운드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머릿속에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김희도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무조건 진루해, 볼넷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나가라고. 만약 못 나가면…….’

못 나가면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렇게 묻지 않았던 이유는 돌아올 대답이 그리 좋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무조건 진루하라고? 씨발. 누군 안 나가고 싶겠냐고. 마음 같아서야 이미 홈런을 쳐도 다섯 번은 더 쳤겠다. 그러는 지도 오늘 한 번도 출루 못 했으면서 누가 누굴 가르쳐. 김희도나 이치연이나 사람 열받게 하는 데 뭐 있는 놈들이라니까.

조예준은 속으로 두 사람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조예준. 생각이라는 걸 해 보자.

지금 주강고 포수인 박명호는 공 배합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블로킹이 약하다는 평이 많았다. 공이 뒤로 흐를 가능성이 있단 뜻이었다. 현재 상황은 투 스트라이크에 원 볼. 그리고 이치연은 직구와 변화구 비율이 6 대 4였고.

내가 박명호라면 어떤 사인을 내릴까?

9회 말, 투 아웃에서 상대는 하위타순인 9번 타자였다.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완벽한 승리, 우승이라는 거지. 당연히 포수든 투수든 빨리 끝내고 싶을 것이다. 으음, 이럴 땐 보통…… 헉. 아직 생각 중인데 왜 벌써 던지고 지랄이야!

“미친.”

생각을 다 끝내기도 전에 뿌옇게 흩날리는 빗물을 가르며 공이 날아왔다. 에이씨,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조예준은 이를 악물며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퉁! 그다지 묵직하진 않았지만 제법 손맛이 있었다. 배트를 집어 던진 조예준은 무작정 1루로 달리며 눈으로 공을 쫓았다. 아직 날아가고 있었다.

“제발 잡지 마라, 잡지 마라. 제발, 제발…… 떨어져, 떨어져!”

염불을 외운 효과인지, 아니면 척척하게 젖은 땅 때문에 거리 가늠이 안 됐는지 주강고 수비수가 허공을 헛손질했다.

“으아아악!”

자칫하면 바로 아웃이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다.

온몸이 흙탕물로 뒤범벅된 조예준이 베이스를 밟은 것과 1루수가 공을 받은 건 동시였다.

누가 먼저야? 양 팀의 시선이 1루심에게 향했다. 순간적인 침묵이 감돌았다.

1루심이 양팔을 옆으로 쭉 뻗으며 세이프를 선언했다.

“헉, 하아. 씨발. 아웃인 줄 알았잖아.”

조예준은 참았던 숨을 뱉으며 다리 보호대를 풀었다. 후들대는 무릎에 힘을 주며 더그아웃을 힐끔 보자 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고 있었다.

“미쳤네. 조예준 사랑한다! 이 새끼야, 사랑한다고!”

거의 반쯤 펜스를 넘어가다시피 상체를 내민 정의영이 힘껏 소리쳤다.

나도, 나도 사랑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이어지는 사랑 고백 속에서 이제 기회는 1번 타자에게 돌아갔다.

타기 타석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라운드를 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김희도.

3학년을 제치고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 중인, 올해 가장 핫한 루키. 벌써부터 천재라는 타이틀이 붙은 1학년.

화제의 중심에 선 남자는 그라운드에 나가기 직전, 임성을 돌아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눈이 마주쳐 깜짝 놀랐던 임성이 곧 웃었다.

“여기서 안타 하나 치면 완전 스타 되겠다. 어쩌면 메이저에서 눈여겨볼지도 모르겠어.”

긴장을 풀기 위해 일부러 농담을 건넸다.

“스타든 뭐든 관심 없어요.”

김희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임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게 ‘고교에서 통할 줄 아느냐?’고 물은 적 있죠?”

“야, 그때는…….”

그때는 어떻게든 김희도를 야구부에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에 도발과 도박을 했었다.

그래서 도박의 결과가 어떠냐고?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그 얘기를 지금 왜 꺼내는 걸까?

“잘 봐요.”

임성의 시선이 제 어깨를 짚는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운동선수 것 같지 않게 곧고 예뻤다. 하지만 이 예쁜 손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선배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드리죠.”

김희도는 살짝 웃고선 가늘게 내리는 빗속을 걸어갔다.

“야, 김희도 우선 진루부터 하자. 하나만 쳐 주라, 제발. 제발!”

누군지 모를 팀원의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선유고의 더그아웃은 간절함으로 가득 찼다. 평소 그를 다소 못마땅하게 여기던 부원들조차 양손을 맞잡아 깍지를 낀 채 김희도를 지켜봤다.

타석에 성큼성큼 들어선 김희도는 헬멧을 만진다든가 배트를 까딱거리는 등의 루틴 없이 바로 타격 자세를 취했다.

이치연이 던진 첫 공은 변화구였다. 공이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훅 꺾이며 포수 미트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동안, 김희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 조금 높은 볼에 배트가 헛돌았다. 평소 선구안이 뛰어난 그답지 않은 배드 플레이였다. 맨 앞자리에 앉은 임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 공에 빠따를 돌리냐? 완전 똥 눈이잖아, 저 자식.”

1루에 선 조예준은 제 맘대로 배트를 휘두른다며 분통을 터트렸고, 더그아웃에서도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이치연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치연이 한 구 한 구 던질 때마다 양쪽 더그아웃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주강고 선수들은 벌써 승리를 예감했는지 한쪽 다리를 더그아웃 펜스에 올려 담을 넘을 준비를 했고, 선유고 선수들은 침울한 얼굴로 기도를 했다.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 신이란 신 이름은 죄다 나왔다.

“김희도. 제발 하나만 쳐라. 싸가지 없다고 안 할 테니까 쳐 달라고.”

“장타는 바라지도 않는다. 포볼이든 뭐든 나가는 것부터 하자. ……와, 씨발. 심장 떨려서 못 보겠다.”

펜스에 다닥다닥 붙은 아이들이 김희도를 향해 응원을 퍼부었다. 몇몇은 차마 못 보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주강고 포수 사인에 이치연이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또다시.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살짝 끄덕였다. 이치연의 무릎이 높게 올라갔다.

언제라도 도루할 수 있도록 허리를 낮추고 있던 조예준은 순간, 이치연의 어깨 너머 김희도와 눈이 마주쳤다.

“……!”

동시에 가슴께까지 올라갔던 이치연의 발이 바닥을 디디며 팔을 앞으로 뻗었다.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가던 공은,

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좌측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스타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다던 소년은 누구보다 화려하게 홈런을 때리며 경기를 끝냈다.

“아……!”

임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깊게 끌어당긴 타구. 잘 맞았습니다. 높게 뜬 공이 좌측 담장을, 담장을! 담장으으으을…… 넘어갑니다. 넘어갔어요! 끝내기 투런! 1학년이 경기를 뒤집으며 선유고에 승리를 안깁니다! 완벽한 공에, 더 완벽한 플레이였습니다.』

『이야, 여기서 홈런이 나오네요. 허허,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놀랍습니다.』

『최종 스코어 1 대 2로 우승 트로피는 선유고가 거머쥡니다. 불안한 상황에서 완벽한 승리를 따냈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성장하나 봅니다. 선유고 창단 후 첫 대통령배 우승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캐스터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끝 즈음에는 거의 샤우팅에 가까워졌다. 선유고 야구부가 감독, 코치 없이 아이들만 나온 건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그만큼 오늘 우승이 극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끝내기 홈런을 맞은 이치연은 글러브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떨궜다.

“우아악! 아아아아아아!!”

초조하게 김희도를 응시하던 선유고 야구부원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뛰쳐나갔다. 마구잡이로 돌진 중인 몇 명의 손에는 생수가 들려 있기도 했다.

와아아아아! 와아악! 와, 와! 단어가 되지 못한 고함 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렸다.

“저 또라이 새끼 존나 변태잖아. 완전 미친놈이네.”

조예준이 욕설을 내뱉으며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일단 뛰어나오긴 했지만, 차마 김희도에게 물을 뿌리진 못하겠는지 아이들은 조예준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악. 뭐야!”

“조예준 수고했다. 잘 쳤어.”

기겁하며 도망가는 조예준을 기어코 따라가 물을 콸콸 쏟아부었다.

박종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자신의 실책으로 실점한 것이 내내 걸린 모양이었다.

극적인 홈런을 친 사람답지 않게 덤덤히 홈플레이트를 밟은 김희도는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윽고 더그아웃에 홀로 남아 있는 임성을 발견했다.

임성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김희도가 헬멧을 벗으며 천천히, 아니 빠르게 걸어왔다 비와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멋대로 휘날렸다.

“봤어요?”

순식간에 다가온 김희도가 임성을 꽉 끌어안았다.

뜨겁고 축축한 온기가 맞닿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마치 젖은 손으로 전기를 만지는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하아, 하.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올라 몇 번이고 숨을 삼키며 김희도를 마주 안았다.

앞으로 언제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야구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어, 봤, 대단…… 김희도, 너 진짜…….”

어. 봤어. 대단하다. 김희도 너 진짜 멋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지금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마주 안은 손에 힘을 주었을 뿐.

그라운드로 뛰쳐나간 아이들은 여전히 승리를 만끽 중이었다. 준결승을 앞두고 감독 경질, 팀원의 무단 이탈. 주전 포수의 부상 등 얼마나 다사다난했던가.

“주장…….”

흠뻑 젖은 조예준이 물을 뚝뚝 흘리며 임성에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충혈된 눈을 보니까 덩달아 울컥했다.

“예준아. 진짜 고생 많았…… 억!”

두 사람의 포옹은 임성을 뒤에서 덮치듯 끌어안는 김희도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힘껏 무게를 실었는지 임성의 허리가 뒤로 꺾이며 몸이 휘청거렸다. 김희도는 한 팔로 그의 허리 감아 지탱하며 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빗물과 함께 뜨거운 숨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홈런을 친 건 나잖아요. ‘뜨거운 우정’ 따위를 내가 용납할 것 같아요?”

임성은 김희도를 뒤에 매달고 나서야 조예준과 악수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겨우 스쳤다가 떨어지는 수준으로 짧았다.

“고생 많았다. 조예준.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콧물을 마시며 끝까지 버티던 조예준은 나지막이 건네는 위로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포수답게 듬직한 어깨가 요란하게 들썩였다.

매사 시니컬하던 부주장의 새로운 모습을 본 1학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2, 3학년들은 킬킬 웃으며 그를 놀렸다.

“조예준.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 나는 거 모르냐?”

“닥쳐 이 새끼들아. 지들도 존나 울었으면서.”

유쾌한 농담이 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임성은 여전히 가쁜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가슴을 꽉 채운 벅찬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끝없이 파도쳤다. 미치도록 짜릿하고, 좋아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요?”

“응?”

“난 고생 안 했어요?”

어느새 옆에 선 김희도가 물었다.

“당연히 최고지. 널 데려온 게 내가 제일 잘한 일인 것 같다.”

임성이 씩 웃자 김희도가 눈가의 보조개를 드러내며 따라 웃었다. 기특한 자식.

“주장.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번 타깃은 임성으로 잡았는지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이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다. 누군가 “헹가래 하자, 헹가래.” 하고 외치자 너도나도 임성의 팔다리를 붙잡고 공중으로 던졌다.

조금 전까지 독식하고 있던 임성을 뺏긴 김희도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네. 열 받게.

“김희도. 나 좀 보자.”

김희도는 제 이름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전히 임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공을 볼 때보다 더 진지한 눈동자는 누가 그를 어떤 식으로 만지는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이 형.”

무관심하던 김희도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물에 흠뻑 젖다 못해 뚝뚝 흘리고 있는 조예준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너 오늘 일부러 출루 안 했지?”

절대,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희도는 야구를 꽤 했다. 아주, 매우, 상당히, 잘.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짜리가 내로라하는 3학년들을 제치고 두 번이나 MVP를 탄 것이나 세 경기 연속 멀티 히트(*multi hit를:타자가 한 경기에서 두 개 이상의 안타를 치는 것) 친 것만 봐도 확실했다. 타고난 사람 중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이었다.

아무리 오늘 이치연의 투구가 대단했다 한들, 안타 하나도 못 치는 건 말이 안 됐다. 게다가 홈런 직전에 그 허접한 배트 플레이는 뭐란 말인가.

“눈치가 아예 없진 않네.”

9회 말, 홈런을 치기 직전에 봤던 김희도의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가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순간 ‘설마?’였던 의심은 ‘설마!’ 하는 확신이 됐다.

그러니까, 김희도가 오늘 출루하지 않았던 건 마지막 홈런을 위해서라고.

결승전에서 역전 투런이라니, 인상에 안 남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웅 놀이라도 하고 싶었냐?”

“내가? 그딴 것 해서 뭐하게.”

반말 같은 건 이제 신경도 안 쓰였다.

“그게 아니면 이유가 뭔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그래야 내가 필요할 테니까.”

뭐? 조예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봤지만, 이미 김희도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여전히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활짝 웃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른 새끼들은 생각도 안 날걸.”

김희도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걸 왜 주장을 보면서 말하는데.

“만약 내가 출루 못 했으면 그대로 경기 끝나는 건 알고 하는 말이지?”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이치연과 전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마지막 안타도 운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 수비가 좀 더 빨리 움직였다면 충분히 잡혔을 공.

그대로 아웃됐으면 투런이고 뭐고 경기 종료란 뜻이었다.

“상관없어. 다른 방법을 쓰면 되니까.”

김희도는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라고 딱히 꼬집긴 힘들지만,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야, 너. 조예준이 입을 달싹이며 김희도에게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팀원에게서 겨우 벗어난 임성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웬일로 둘이 얘기 중이냐. 이제야 사이좋게 지낼 마음 들었나 보네? 잘 생각했다.”

임성은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이 퍽 신기한 듯 빙그레 웃었다. 부드럽게 내려간 눈꼬리와 한껏 벌어진 입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은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사람처럼 홀가분했다.

“얘랑 제가요? 설마요!”

드디어 떨쳐 냈구나. 슬럼프. 조예준은 속으로 안도하며 겉으로 툴툴댔고, 김희도는 드물게 정색했다.

“양 팀 정렬해 주세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선유고 아이들은 진행위원의 말을 듣고 나란히 정렬했다. 맞은편에는 주강고 선수들이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개중 몇몇은 아직 눈물이 나는지 팔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거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양 팀 선수들은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했다.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왜 주말에 끌려와야 하냐고 하던 사람도, 어차피 질 경기 왜 보냐고 투덜대던 사람도 혼신의 힘을 다한 선수들을 향해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5분 뒤에 수여식 있습니다. 유니폼 그대로 입고 모이세요.”

관계자가 주장 임성에게 다음 일정을 전달했다.

“야. 임성.”

더그아웃으로 가던 임성은 제 이름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누가 불렀는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임성은 이쪽을 보는 조예준과 김희도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먼저 가라고 전했다.

“그래. 이치연.”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이치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좋은 얼굴은 아닐 테지.

“나 너한테 진 거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이치연은 차라리 열일곱 살짜리에게 홈런을 맞은 걸 택한 듯했다. 뭐, 처음부터 누가 더 잘 던지는지 대결한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만. 게다가 결국 이긴 건 우리들이고.

바닥을 쏘아보던 이치연이 고개를 들었다. 침울해할 거란 예상과 달리 깔보는 듯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넌 타자가 더 잘 맞아. 어울리지도 않는 투수는 얼른 때려치우고 배트나 잡아라.”

역시나 대화의 끝은 ‘기승전타자’구나. 오늘은 웬일로 그 소리 안 하나 했네.

할 말 끝났다는 듯 젖은 머리를 헝클이며 돌아서는 이치연의 뒷모습을 보다가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부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평소 분위기 브레이커인 감독과 코치가 없어서 더욱 통제가 불가능했다. 사실은 통제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곧 수여식 있으니까, 화장실 갈 사람은 갔다가 그라운드로 나와.”

“네. 주장!”

임성은 흠뻑 젖은 머리와 얼굴을 대충 닦고, 다시 그라운드로 나갔다.

우승컵과 우승 깃발이 선유고에 차례대로 주어졌다. 항아리 모양의 금색 우승컵은 양손을 다 사용해야 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트로피 든 선수가 가운데, 양쪽 맨 끝에 선 선수들이 현수막 펼치면 됩니다. 깃발은 현수막 바로 뒤에 들고요. 포즈는 각자 알아서 해 주세요. 헹가래도 좋고, 브이도 좋습니다. 최대한 기쁜 듯이, 활동적으로. 셋에 찍겠습니다.”

관계자가 우승기를 자연스레 김희도에게 건네며 말했다. 역전 투런포를 터트린 주역이 들었으면 하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지만, 당사자는 근처에 있던 정의영에게 미련 없이 넘기고 임성 옆으로 갔다.

저걸 바로 넘겨? 우승컵이든 우승 깃발이든 여태 자신이 들겠다고 하던 애들만 보던 사진 기사가 어이없다는 듯 김희도를 쳐다봤다.

가운데 자리한 임성을 중심으로 선유고 야구부원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아이들은 모자를 허공으로 던지는 세리머니를 했다. 다들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나도 우승컵 한번 만져 보자.”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종열이 손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무겁다고 말하며 우승컵을 건네자 아이들이 너도나도 만져 보겠다며 또 우르르 몰려들었다.

라커룸에 도착하고 나서도 아이들은 우승컵과 우승기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나 하는 애들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신났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수습하곤 입을 열었다.

“버스 지금 대기 중이다. 다들 빠트리는 것 없이 짐 잘 챙겨. 오늘 진짜 고생 많았고, 집에 가서 푹 쉬어.”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댔는지 목소리가 갈라지고 목이 따끔따끔했다.

“집에 가라고? 오늘처럼 역사적인 날에 아무것도 없이?”

뒤풀이는? 하지도 않은 말이 들렸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고, 따로 날 잡자.”

“그래도 우승이잖아. 선유고 야구부 창단 이래 대통령배 첫 우승. 이대로 돌아가기엔 아쉽지 않아?”

박종열이 다시 한번 건의 했지만, 임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통제할 사람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어쩌려고. 과도한 걱정이라는 건 알면서도 작은 불씨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정 하고 싶으면 학교 가서 해. 안전하게 부실에서.”

“와, 독한 것 좀 보소. 누가 주장 아니랄까 봐. 알았다, 알았어. 대신 뒤풀이 꼭 잡아라. 폭죽도 터트리고 케이크 불도 붙이자고.”

“알았어. 3단 케이크로 준비하마.”

3학년들이 장비를 챙기기 시작하자 다른 아이들도 주섬주섬 짐을 꾸렸다.

“뒤풀이는 나중에 따로 한다니까 오늘은 간단하게 밥이나 먹자. 이 정돈 괜찮죠, 주장님?”

“PC방이나 오락실 같은 데 가지 말고, 얌전히 밥만 먹고 헤어져. 박종열.”

“잔소리하기는. 같이 먹을 애들은 버스 타지 말고 구장 앞에서 보자. 참고로 내가 쏘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제 몸통만 한 가방을 둘러멘 박종열과 정의영의 뒤를 아이들이 우르르 쫓았다. 시끄럽던 라커룸이 순식간에 텅 비자 임성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남아 있던 조예준이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주장. 오늘 진짜 멋있었어요. 항상 그랬지만요. 그리고…….”

“어. 예준아. 너도 멋있었다. 볼 배합 좋았어.”

조예준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임성에게서 조급함을 느꼈다. 왠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다고 할까? 평소답지 않았다.

또또 분식에도 안 갈 것 같지? 조예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의문을 다시 삼키며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내가 더 고맙지.”

조예준의 안타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경기 종료였을 테니 오히려 고마운 건 자신이었다.

임성이 씩 웃으며 조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함이 담뿍 담긴 손길에 조예준이 살짝 눈을 내리뜨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저도 이만 가 볼게요. 내일 봬요.”

“어. 밥 잘 챙겨 먹고 푹 쉬어. 내일 보자.”

조예준까지 보내고 혼자 남은 임성은 글러브와 공, 장갑 등을 다소 급하게 가방에 넣었다.

먼저 간다는 말 없었는데, 벌써 돌아갔나. 전화해 볼까.

임성이 문고리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당겼다. 확 가해지는 힘에 상체가 급격하게 딸려 가며 균형이 흐트러졌다.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 누군가의 손이 그의 허리를 낚아채듯 휘감았다. 곧 단단한 가슴팍이 뺨에 닿았다.

“어디 갔었냐?”

“선배야말로 그렇게 급하게 어딜 갑니까? 누구 만나러 가요?”

임성의 양어깨를 가볍게 잡은 김희도는 그가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짝 밀었다. 임성의 막 나가려던 라커룸으로 다시 들어갔다.

달칵. 문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김희도가 눈앞에 서 있었다. 너무 순식간이라 쫓아갈 틈도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의 허리를 감쌌던 손이 이번에는 뒤통수를 휘감았다. 임성은 김희도에게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뒷걸음질 쳤다. 주춤주춤 이어지던 걸음은 곧 테이블에 가로막혀 멈췄다. 임성의 시선이 제 몸을 가로막은 테이블에 힐끔 향했다가 다시 올라왔다.

뒷머리를 감쌌던 커다란 손은 이내 땀에 젖은 목덜미를 급하게 타고 내려와 등을 꽉 쥐었다. 잡을 곳이 마땅치 않음에도 모두 움켜잡고 싶은 듯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어? 어, 김희, 야. 어디까지 가.”

테이블에 가로막혀 더 갈 수 없음에도 김희도는 계속 임성을 몰아붙였다. 젖은 팔다리가 엉키고 겹쳐진 살갗에 열기가 번졌다. 임성의 허리가 점점 꺾이더니 이윽고 테이블 위에 반쯤 누운 자세가 됐다. 김희도는 등을 껴안고 있던 손을 빼내어 테이블 옆을 짚었다.

어째 자세가 좀…… 묘하지 않나?

뺨과 목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얕은 소름이 돋아났다. 귀가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임성은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며 김희도의 눈을 쳐다봤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리 승리의 여운이 남았다 한들 너무 흥분한 것 같았다.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김희도. 있잖아.”

“네. 있어요. 선배랑 같이.”

나름 힘주어 밀었는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체를 더욱 내리며 얼굴을 바짝 붙였다. 코끝이 닿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거리. 비와 희미한 땀 냄새가 섞인 체취가 물씬 풍겼다. 임성은 눈을 질끈 감으며 테이블 끝을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등뼈가 허옇게 불거지고, 핏줄이 도드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더운 숨결이 목덜미에 내려앉는 간지러움, 뜨겁고 말랑말랑한 감촉. 손끝이 바짝 서는 자극이었다.

마치 짐승이 색색대는 것 같은 가쁜 숨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는 계속 나는데 뱉어 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목에 닿은 김희도의 뺨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또 과호흡인가? 고개를 살짝 물리며 그의 턱과 뺨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괜찮으니까 천천히 호흡해.”

“난 멀쩡해요.”

전혀 멀쩡하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 김희도는 제 얼굴을 감싼 임성의 손등을 덮었다. 결코 작지 않은 제 손을 다 덮고도 살짝 남았다.

“정말이에요. 그때처럼 흥분하지 않았어요.”

확실히 양호실 때와 비교하면 시선도 목소리도 또렷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김희도가 자신의 손끝에 입맞춤을 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쪽, 쪽. 발갛고 보드라운 입술이 단단한 손끝에 닿았다. 임성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어, 저기. ……이런 건 나중에 여자 친구한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갑자기 무슨 개소리예요?”

김희도는 자신도 모르게 임성의 팔목을 꽉 잡았다가 그가 눈을 살짝 찡그리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나는지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삐딱하게 쳐다봤다.

“여태 내 행동을 뭐라고 생각했으면, 그런 말이 나와요?”

“어? 고맙고, 기특한 후배……?”

말이 이어질수록 김희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임성은 김희도가 원하는 대답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하. 이거 웃기네. 김희도는 아마도 어이없음에 가까운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잘못한 게 없음에도 잘못한 것 같아 괜히 눈치가 보였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은 당장 다른 말을 뱉어 내라고 압박을 가했다.

임성은 여태 김희도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 봤다.

사람을 앞에 두고 토하나 싶더니, 체취가 너무 좋아서 그랬단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체질이라니까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야구 용품을 골라 주자 고마움의 표시라며 글러브를 비롯한 온갖 선물을 안겼다. 아, 투수가 손가락을 다치면 어쩌냐고 화를 내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대신 저녁도 차려줬지.

준결승전에서 백도경에게 던졌던 체인지업도 사실은 김희도와 함께 연구한 것이었다. 조예준마저 집에 간 텅 빈 훈련장에 단둘이 남아 여러 그립을 쥐어가며 최적의 각도를 찾았다. 박재이 체인지업을 자세히 찍은 영상이 큰 도움이 됐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희도가 했다는 것은…….

“김희도. 혹시 너 나 좋…… 하하.”

설마. 아니겠지. 하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좋아해요.”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던진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정작 말을 꺼냈던 임성은 그대로 굳은 채 눈을 끔뻑댔다.

“좋아해요.”

조, 좋…… 임성은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생각하는 그런 좋아함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선배를 향한 동경을 잘못 알아들었겠지.

“미리 말하지만, 동경이나 존경심 같은 개소리는 할 생각도 마세요.”

김희도는 임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겠다는 듯 쐐기를 박았다. 흥분과는 다른 선명하고 뜨거운 시선이 얼굴 곳곳에 닿았다.

“그, 어, ……그러니까. 나를.”

“좋아해요. 임성 선배.”

벌써 세 번째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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