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링 히트> 3권
#7
감독은 선발 투수를 또다시 양민성으로 밀어붙였다. 혹여 감독의 눈 밖에 날까 봐 선수와 부모들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이용해 대놓고 양민성만 편애를 했다. 그러면서도 감독은 위기 상황에는 임성이나 하수영을 올리는 모순을 보였다.
양민성은 이번에도 위협적인 볼 스피드와 그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제구를 선보였다. 초반엔 강속구에 고전하던 상대 팀도 곧 빠르게 적응하고 안타를 때렸다.
양민성은 매회 주자를 등지고 공을 던지다가 누상에 두 명의 주자를 남겨 두고 3회에서 내려왔다.
뒤이어 마운드를 넘겨받은 건 임성이었다. 그는 조예준에게 공을 던지며 가볍게 몸을 풀다가 자세를 잡았다.
“주장. 믿습니다.”
“삼진 잡고 오세요. 선배님.”
“주장, 파이팅! 우리 팀의 희망.”
후배들의 격려가 어렴풋이 들렸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가쁜 숨을 뱉어 냈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불안함을 일깨우고 시야를 좁혔다. 지난 경기에서 강판됐던 기억이 떠올라 타액을 삼켰다.
괜찮아. 흔들리지 말자, 임성.
불안을 잠재우며 몇 번이고 다짐하는 사이 누군가의 손이 임성의 손을 잡았다.
남들보다 살짝 낮은 온도의, 운동선수 같지 않은 하얀 손등과 피아노를 쳐도 어울릴 것 같은 곧은 손가락이 다소 투박한 손을 온전히 감쌌다.
김희도였다.
저번부터 뭐 하는 거야? 눈으로 물었지만, 그는 모른 척 깍지를 꼈다.
임성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김희도를 당황스럽게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희도는 아무 말 없이 깍지 낀 손을 살짝 힘주어 잡고선 외야로 돌아갔다.
“준비됐어요?”
아. 어. 임성은 조예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모자 아래에 드러난 그의 뺨은 여전히 파랗게 멍든 채였다. 턱에 힘을 주고 입을 굳게 다물자 겨우 아물었던 상처가 터지며 피 맛이 났다.
욱신거리는 통증보다 조금 전 김희도의 행동이 더 신경 쓰였다.
뭐였을까, 나도 모르는 무슨 의미가 있나? 의문에 휩싸인 채 공을 밀어내듯 던졌다.
첫 구는 변화구였다. 허공을 가르며 곧게 뻗어 나간 공이 타자 근처에서 꺾였다. 배트가 크게 헛돌며 노란 불 하나가 올라갔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임성은 착실하게 주자를 처리했다.
그리고 8회 초, 김희도가 싹쓸이 3루타를 치며 선유고는 역전승을 거뒀다.
“나이스. 싹쓸이! 이겼다.”
선유고 선수들은 양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초반에 민성이가 빠른 볼로 기선 제압한 게 컸다. 희도 너도 잘 쳤고. 감독은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감독은 야구부에 기부를 많이 하는 아이들 위주로 칭찬했다. 당연히 임성의 이름은 쏙 빠졌다.
저렇게 대놓고 차별해도 되나 싶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프로판에서도 심판이나 선수에게 돈을 주고 승부 조작을 하는데 고등학교야 말할 것도 없이 감독의 입맛대로 움직였다.
김희도는 오늘 3안타, 장타만 두 개인 알짜배기 플레이를 보였다.
꼭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는 이번 대회에 내내 압도적인 실력을 보였다.
“잘했어. 사람들이 눈여겨보겠다.”
“보든 말든 관심 없어요.”
전국 대회는 스포츠 전문 채널과 유튜브에서 중계가 돼서 보는 사람도 많았다.
김희도가 타석에 들어설 때면 그에 대한 질문으로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출중한 실력도 실력이지만, 헬멧이나 모자로도 가려지지 않는 외모가 한몫했다.
방송 관계자들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매번 김희도에게 인터뷰 제의를 했다.
됐습니다. 안 합니다. 내가 왜 해야 합니까.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냉정하게 거절하던 김희도가 오늘은 웬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거 생방송입니까?”
PD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먼저 질문했다.
“아, 내일 나가요.”
내일. PD의 말에 김희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카메라 앞에 섰다. 물론 마스크를 끼는 것도 잊지 않았고.
선유고 아이들은 돌아갈 짐을 꾸리면서 김희도가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거리가 제법 멀어 정확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마스크에 가려지지 않은 눈은 보였다.
“쟨 떨리지도 않나 보다. 어쩜 저렇게 무덤덤하지?”
“내 말이. 그나저나 진짜 연예인 같네. 얼굴을 주든가 야구 실력을 주든가, 둘 중 하나만 하지. 존나 불공평해.”
여전히 인터뷰 중인 김희도를 지나치며 아이들이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투덜거렸다.
그러게. 불공평하네. 임성은 슬쩍 웃으며 글러브와 수건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녁. 정규 훈련이 끝나고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임성은 요 며칠 연속으로 던졌던 어깨에서 살짝 뻐근함을 느끼고 일찍 부실을 나섰다. 돌아가기 직전 김희도를 찾았지만, 먼저 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자라도 보내 볼까 하다가 조예준과 마주쳤다.
“벌써 집에 가요? 또또는요?”
“오늘은 좀 피곤하네. 내일 가자. 예준아 애들 잘 부탁한다.”
“네. 조심히 들어가십쇼.”
그래. 적당히 하고 들어가라. 조예준에게 손을 팔락팔락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제법 멀지만, 생각 정리도 할 겸 걸어가기로 했다.
살짝 텁텁한 바람 속에 무성한 나무가 빚어낸 풋내가 섞였다. 한여름의 냄새였다.
리그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8월이었다. 계절은 여름의 한가운데였고, 해가 지고 나서도 여전히 덥고 습했다.
조용히 걷던 임성은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끼고 휴대폰을 꺼냈다.
“어. 예준아.”
[주장, 주장. 지금 어디예요? 인터넷 좀 보세요. 포털 메인 화면이요.]
“갑자기 인터넷은 왜? 우리 애들이 사고라도 쳤어?”
[그게 아니고요. 우리 팀 감독이요, 한호찬! 학부형한테 뇌물 받았다고 기사 대문짝만하게 났어요. 최근 대통령배에 출전한 S고등학교라는데요. 이거 제목만 이니셜이지 실명 깐 거랑 똑같잖아요. ‘선출 출신 H 감독. 야구 명문 S고등학교에 취임한 지 올해로 2년째, 금품 제공자는 3학년 Y군 부모.’ 이거 양민성 얘기 맞죠?]
“잠깐만. 일단 끊어 봐.”
재빨리 전화를 끊고 포털을 열었다. 스포츠란 메인에 「돈으로 사는 선발 출전? S고등학교 H감독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 의혹」이라는 기사가 걸려 있었다.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링크를 눌렀다.
「S고등학교 감독이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 의혹에 휩싸였다. 서울시교육청 감사관실은 “S고등학교 야구부에 작년 중순경 부임한 H감독과 K코치가 학부모로부터 약 3천만 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받고 해당 학생에게 특혜를 준다는 의혹을 제보받았다.” 하고 말했다.
H감독 부임 이후, 해당 선수는 갑자기 선발로 등판하는 등 의심을 샀다.
-오! 마이 베이스볼. 배정호 기자([email protected]) 무단복제 및 전제 금지」
감독과 코치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됐지만, 선유고 야구부와 그들을 아는 사람이면 모를 수 없었다.
해당 기사 밑에 「S고등학교 현역 야구부원, 청탁 의혹 제시」라는 링크가 연달아 떠 있었다. 현역 야구부……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클릭하자 동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초록색 그물과 그라운드를 배경으로 유난히 흰 얼굴의 소년이 보였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최근 감독이 학부모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설마 감독님께서 공평하지 못한 방법으로 특정 선수를 편애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의혹을 풀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 해당 발언에 책임지겠습니다. 그게 서로에게 가장 확실할 것 같습니다.』
“……김희도.”
임성은 앓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구장 배경이나 날씨 등을 볼 때 얼마 전에 했던 인터뷰가 틀림없었다.
갑자기 부정 청탁 의혹이 불거진 게 이 인터뷰 때문인가.
임성은 학교로 거의 뛰듯이, 아니 뛰어가며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김희도입니다.]
뚜르르. 통화음이 한 번을 채 넘어가기도 전에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 희…… 허억, 헉. 김희도. 너 지금, 어…… 디야.”
[왜 그렇게 헐떡거려요. 지금 누구랑 있는데?]
“어디냐고.”
[집이요. 이제 선배가 대답할 차례예요. 옆에 누구 있어요?]
“없어.”
원하는 대답을 듣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김희도의 집 쪽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더운 공기가 뺨을 마구잡이로 스치며 땀이 맺혔다.
“헉. 허억. 후우.”
순식간에 김희도의 집 앞까지 도착한 임성은 공동 현관문 앞에서 머뭇댔다. 현관 비밀번호 모르는데. 다시 김희도에게 연락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 당사자가 등장했다. 아무 무늬 없는 검은색 라운드 티에 같은 색의 바지, 운동화까지 갖춘 깔끔한 차림새였다.
“땀 흘린 거 보니 뛰어왔나 보네요.”
훌쩍 다가온 김희도가 슬쩍 웃으며 임성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것도 잠시, 그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네가 했어?” 하고 물었다.
“네.”
본론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폭탄을 터트린 사람답지 않은 덤덤한 표정으로.
“왜 그랬어?”
“기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에요.”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대회 중간에 터트리는 게 말이 돼? 우리 당장 내일모레 준결승이야!”
“중간에 터트려야 주목받을 수 있으니까요. ……설마,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친다고 말하고 싶어요?”
김희도의 목소리에 짜증이 스몄다.
“아니요. 선유고 야구부는 지금 감독이 입맛대로 휘둘리고 있어요. 그 중심엔 학부모 회장이라는 여자가 있고요. 경기는 감독에게 돈을 준 놈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을 내보내는 게 정상입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어요. 선배도 알잖아요.”
임성이 침묵했다.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 모두에게 느슨하면서 스스로에겐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요? 본인에게 좀 상냥해져요.”
왜 그러냐고? 그래야만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었으니까.
나 힘들다고, 조금 쉬고 싶다고 말했을 때 돌아올 아버지의 반응이 두려웠다.
거봐라 내 진작 그만두라고 했잖아, 그 시간에 공부했으면 좀 좋았겠냐, 네가 힘든 소리 하면 동생들도 불안해해.
물론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장남이니까, 주장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늘 존재했다.
* * *
인터뷰가 나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김희도의 말처럼 전국 대회 중인데다 곧 신인 드래프트를 앞두고 있어 주목도가 높았던 것이었다.
H감독과 S고등학교의 실명과 신상은 금세 까발려졌다.
감독의 기사를 본 옛 제자들이 감독의 폭언과 폭력, 노골적인 차별 의혹 등을 폭로하며 기름을 부었다.
기사가 터진 다음 날엔 모른 척 나왔던 감독도 자신을 고발하는 인터넷 글이 늘어나자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감독을 대신해 코치가 어떻게든 연습을 꾸려 나갔지만, 그 역시 금품 수수 의혹을 받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결국 코치도 야구부에 나오지 않았다.
청탁을 한 학부모가 양민성의 어머니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었다.
양민성은 자신의 어머니가 참고인으로 경찰에 불려 갔다는 소문이 파다한 와중에도 야구부에 나왔다. 3학년이라 전학 가기도 늦었고, 어차피 곧 드래프트니 버티자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레 찔렸는지 작은 일에도 과하게 반응하며 팀 분위기에 악영향을 끼쳤다. 경기에 지고 나서 축 처진 분위기와 다른 묘한 긴장감이 야구부에 감돌았다.
취재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학교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대는 일도 잦았다.
“감독의 폭력 의혹이 있는데 평소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감독에게 직접 맞은 선수 있습니까?”
대부분 작은 언론사였지만,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매체도 몇 군데 있었다. 심지어 교내까지 몰래 침입해 사진을 찍다가 걸려 불안감을 조성했다.
아이들의 신경은 당연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달은 임성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 감독 문제로 학생 주임, 교감과 면담하고 야구부에 복귀했을 때, 양민성이 서찬규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야야, 민성아 그만해. 가뜩이나 상황도 안 좋은데 이러다 진짜 큰일 난다.”
양민성은 박종열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발끈했다. 임성은 그 모습을 싸늘하게 쳐다보다가 빠르게 걸어갔다.
“양민성.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서찬규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민성을 노려봤다. 예민한 시기인 건 알겠다. 하지만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아니, 씨발. 어이가 없네. 네가 뭔데 봐주고 말고 하냐? 야, 너희들. 뒤에서 개소리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내 앞에서 쳐 해! 기분 좆같으니까.”
양민성은 쌍욕을 내뱉으며 거친 몸짓으로 바닥을 퍽퍽 찼다. 야구부 아이들은 양민성의 행태에 경악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다들 닥치고 있냐? 아까처럼 지껄여 보지?”
도저히 분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다시 씨발, 씨발 욕을 퍼부으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반격할까? 아니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상황에서 폭력 사건까지 일으킬 순 없었다. 그렇다고 찬규를 때리게 둘 수도 없고. 그냥 내가 맞을까? 그래서 이 상황이 수습된다면…….
그래도 어깨나 팔은 안 된다. 차라리 얼굴을 맞자 싶어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
분명 지금쯤 주먹이 날아와야 하는데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임성이 실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시야에 꽉 들어찬 넓은 등이었고, 그다음엔 바닥에 나뒹군 채 배를 감싸고 있는 양민성이었다.
“김희도. 너 지금……?”
눈앞의 남자와 양민성을 번갈아 보던 임성이 그를 불렀다.
“저쪽이 먼저 때렸어요. 전 정당방위입니다.”
여기 좀 보세요. 김희도가 오른쪽 뺨을 슬쩍 내밀었다. 희고 보드라운 뺨 어디에도 맞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주장, 김희도 말이 맞아요. 양민성 선배가 먼저 때렸어요.”
때린 것보다 살짝 스친 것에 가까웠지만. 조예준은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리곤 다리를 슬쩍 들어 김희도가 양민성의 배를 걷어찼다고 설명했다.
저 덩치를 걷어차? 김희도를 쳐다보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씨발, 임성 네가 시킨…… 큭.”
퍽. 징이 박인 스파이크가 양민성의 배를 다시금 걷어찼다. 양민성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아, 실수. 발이 미끄러져서. 고소하려면 해. 나는 오히려 환영이니까. 누가 더 망하는지 끝까지 가보자.”
고저 없이 냉랭한 목소리가 양민성에게 향했다.
양민성은 이를 꽉 깨물더니, 이내 벌떡 일어나 부실을 나갔다. 아이들이 주춤주춤 비켜서며 길을 텄다.
“좆같은 새끼들.”
퉤, 그가 뱉은 침이 바닥을 더럽혔다.
“찬규야. 어디 다친 곳은 없냐?”
임성은 서찬규의 어깨를 잡고 혹여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봤다.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게 안쓰러워 그를 꽉 껴안았다.
서찬규를 다독이며 도중에 누군가의 손이 임성의 뒷 목을 붙잡았다. 헉. 갑작스러운 온기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놀랐잖아. 말도 없이 잡고 그러냐?”
“맞은 사람은 걔가 아니라 나거든요. 날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김희도가 다소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넌 완전 멀쩡해 보이는데.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김희도의 뺨을 손등으로 슬쩍 눌렸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옅게 떨렸다.
잔 떨림이 되게 예뻤다. 이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웃겨서 헛웃음을 터트렸더니, 김희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웃은 거 아니야. 그냥 귀…… 음, 아무튼.”
손등을 뒤집어 김희도의 뺨을 살짝 두드렸다.
그리고 임성은 겹겹이 둘러싼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어수선한 건 알겠지만, 훈련하자. 내일 준결승이잖아. 이겨야지.”
아이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흩어졌다.
“진짜 양민성이 진짜 고소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성질머리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제발 그냥 안 넘기길 바라고 있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김희도는 양민성이 박차고 나간 입구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불안함이나 분노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정말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예 야구판에 발도 못 붙이게 매장 시킬까요? 눈에 안 보이게 치워줘요? 말 만해요.”
분명 농담일 텐데, 장난기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진지한 목소리였다. 임성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양민성을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아쉽네.”
김희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 *
한호찬 감독과 코치가 학부모에게 돈을 받고 특정 선수를 밀어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현재 프로 리그에서 뛰는 선수 중에도 연루된 사람이 나와 H감독 게이트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쪽은 한창 가을 야구 순위 싸움 중이라 더욱 시끄러웠다.
심지어 몇 년 전에 금지 약물을 써서 선수들의 실력을 끌어올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아직은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 정확히 밝혀 봐야 알겠지만, 단순 청탁으로만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프로 야구 팬들 사이에서도 H감독 이름이 계속 오르내렸다.
<그깟 공놀이! 자유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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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HR유니콘즈:: 우리 팀에 한호찬 학교 출신 있냐? 없다고 할 때까지 숨 참는다. 흡! (댓글 3)
[잡담] SS폭스:: H감독 있었던 학교 리스트. ㅁㅊ우리 팀 얼라도 있음ㅜㅜㅜㅜ (댓글 32)
[잡담] 이솔페어리즈:: 약물썰은 그냥 썰이지???? (댓글 18)
[잡담] HR유니콘즈 :: 섣부른 추측하지 말자. 기사 뜨는 거 보면 알겠지. (댓글 1)
[잡담] 이솔페어리즈:: 미친... 약쟁이들 좀 퇴출해라. (댓글 2)
[잡담] LE레전드스:: 가뜩이나 망해가는 크보에.....;;; (댓글 0)」
[잡담] BS샤크스:: 씨발 밑 글 미쳤나? 팀 이름 달고 지랄하지마라 (댓글 14)
[잡담] BS샤크스:: 솔직히 약이든 뭐든 잘하면 장땡 아님? (댓글 68)
관련 글만 해도 10페이지가 훌쩍 넘어갔다. 대부분 H감독을 욕하며 혹여 제가 응원하는 팀에 불똥이 튈까 봐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모두 심각한 와중에 「선유 고 인터뷰한 애 봤음? 개잘생겼던데ㅋㅋㅋㅋㅋ (댓글 23)」 등 김희도의 이름도 종종 언급됐다.
* * *
학교 측은 의혹이 일자마자 감독과 코치를 퇴출했다. 감독은 두문불출한 게 아니라 잘린 것이었다.
문제는 당장 내일이 대통령배 준결승이란 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한창 시즌을 치르는 중이라 다른 감독을 구할 틈이 없었다. 급하게 체육 선생을 대리로 내세우긴 했지만 결국, 선유고는 감독, 코치 없이 선수들끼리 출전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고교 야구 역사상 한 번도 없던 전대미문의 사건에 야구인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H감독 게이트가 선유고 야구부에서 나왔단 점에서 흥미를 느낀 것이었다.
관심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김희도는 너무나 태연했다.
쟨 떨리지도 않나. 아무렇지 않게 티 배팅을 하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준결승전 당일.
더그아웃 한쪽에 임성을 중심으로 한 아이들이 둥그렇게 모였다.
감독 없이 치르는 준결승전, 상대는 이미 몇 번이나 맞붙었던 신라고였다. 신라고를 상대로 승률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다소 어이없는 얼굴로 서로를 봤다.
“진짜 감독 없이 경기 하냐. 연습 경기 같은 게 아니라 전국 대회에서? 누가 몰래카메라라고 말 좀 해 줘라.”
자조적인 내뱉은 박종열의 농담에 누구도 웃지 않았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감독’이라는 존재가 주는 안정감은 무시 못 했다. 특히 경험이 적은데다 여러모로 위태롭고 불안한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임성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목구멍 안에 가두며 아이들을 둘러봤다. 하나같이 뻣뻣한 표정으로 입을 꽉 닫고 있었다.
“야, 됐어. 까짓것 수능 치면 되지. 갑자기 천재가 돼서 1등급 받을지 누가 야냐? 그럼 난 S대 의대 갈래.”
“미친놈아. 네가 생각해도 개소리 같지 않냐?”
박종열과 정의영이 갑자기 만담을 시작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 우리도 3학년이니까, 가련하게 여긴 찍기 신께서 강림하지 않을까? 야, 그래서 넌 S대 안 갈 거냐?”
“저 새끼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야, 임성. 주장으로서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왜? 나름 일리 있는 말 같은데. 나도 열심히 찍어야겠다.”
“와, 씨. 임성까지 제정신이 아니네. 아, 그래. 차라리 미치자. 안 미치고 못 배길 상황이긴 해.”
선배들의 노력이 통한 것인지 후배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경직됐던 분위기가 살짝 풀렸다. 임성이 박종열을 힐끔 보자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엄지를 슬쩍 치켜세웠다.
하여튼 변죽도 좋아.
픽 웃다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며 진지하게 아이들을 응시했다. 파이팅을 외치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자 옆에서 쑥 뻗어 나온 팔이 임성의 어깨를 감쌌다.
“파이팅 할 거 아니에요? 지금 하죠.”
매사 심드렁하고 소극적이던 김희도가 처음으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김희도 오른쪽에 섰던 박영빈은 그에게 손을 뻗다가 살벌한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닿기라도 했다간 손을 비틀어 버릴 기세였다. 차마 닿지 못한 손이 허공을 어색하게 더듬었다.
* * *
신라고 더그아웃에는 학교 이름이 찍힌 유니폼을 입은 감독과 코치가 선수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격려, 혹은 조언이겠지. 그에 비해 이쪽은 어수선하고 불안한 공기가 감돌았다.
괜찮을까? ……아니야, 임성. 네가 쫄면 안 되지.
임성은 “해 보자!” 하고 외치며 아이들을 다독였다.
선공은 신라고였다.
선유고에선 3학년 투수 김영산, 조예준 배터리가 선발로 출전했다. 그리고 임성은 오늘 투수가 아닌 타자로 이름을 올렸다.
선유고 배터리는 다행히 1회를 깔끔하게 막으며 좋은 출발을 알렸다.
더그아웃에서 조마조마한 심장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임성은 아웃 카운트 세 개가 올라가자마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건 뭐, 거의 선발 등판 급으로 긴장되잖아.
선유고 타자들은 감독의 부재를 의식한 듯 초반부터 힘을 냈다.
평소라면 당연히 잡혔을 타구가 상대팀이 실책을 범하거나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등 운도 뒤따랐다.
특히, 김희도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타석에 서는 족족 안타를 때려 냈다.
선유고 투수 김영산은 볼넷을 내주는 등 흔들리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수비의 도움을 받아 가며 최소한의 실점을 이어 갔다.
“안타! 또 때렸어.”
또다시 안타를 때린 김희도가 1루 베이스를 가뿐히 밟았다.
“나이스! 김희도 쟤는 오늘 미쳤네. 개쩐다. 진짜.”
선유고 아이들이 더그아웃 펜스를 마구 두드리고 천장을 쿵쿵 치며 소리쳤다. 김희도는 보호 장비를 풀고선 한쪽 발을 베이스에 올린 채 임성을 힐끔 쳐다봤다.
칠 수 있겠어요? 마치 도발하는 듯한 시선에 임성은 배트를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주장 나왔다. 오늘 사고 한번 칩시다. 저력을 보여 주세요.”
“한 방 제대로 부탁드립니다. 안타! 안타! 임성, 안타!”
임성이 타석에 들어서자 더그아웃에서 걸걸한 환호가 쏟아졌다. 임성은 부원들의 우렁찬 응원을 들으며 장갑 찍찍이를 떼었다 붙이며 긴장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장갑 김희도가 준 거구나. 장갑뿐만 아니라 지금 쥐고 있는 배트, 유니폼 안에 입은 이너와 스파이크까지 다 김희도에게 받은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30분짜리 과외치고 과했다. 참 모를 놈이란 말이야.
“스트라이크!”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 공이 얼굴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임성, 경기 중에 뭔 딴 생각이냐? 정신 바짝 차려. 임성은 힘주어 배트를 쥐며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았다.
신라고 투수는 듣던 대로 스플리터와 슬라이더 등 다양한 변화구를 수준급으로 던졌다. 그러나 임성은 끈질기게 공을 따라가며 어떻게든 파울을 만들었다.
깡, 깡, 깡. 소리가 연달아 울렸고, 임성에게 또다시 컷트 당한 신라고 투수가 살짝 짜증을 냈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니까 빨리 승부를 내고 싶겠지. 현재 저 투수의 심정이 어떨지는 같은 투수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무척 초조할 것이다.
후, 시뻘건 얼굴로 한숨을 쉰 신라고 투수가 다시 공을 던졌다. 얼른 끝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인지 공이 날아오는 각도가 이상했다.
어, 이거 잘하면 가운데로 몰리겠는데? 칠 수 있겠다. 임성은 꽉 잡은 배트를 크게 휘둘렀다.
따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이 유격수 옆에 툭 떨어졌다. 배트를 바로 내던지며 1루 베이스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타악. 플레이트를 밟고 고개를 들었다.
역시 손맛 좋네. 투수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손이 저릿저릿했다. 임성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숨을 골랐다.
뒤이어 나온 타자들이 연속으로 안타를 치며 마침내 임성이 홈을 밟았다. 와아아. 더그아웃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만세를 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이야. 한 건 했네, 임성.”
임성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자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이 그의 머리와 어깨, 등을 쳐 댔다. 박종열은 역시 주장은 주장이라며 잘 하지도 않은 칭찬을 건넸다.
“생각보다 공 잘 보네요.”
“내가 또 왕년의 4번 타자였잖아. 너도 치던데? 초구에 스윙하는 것도 놀라운데, 맞히는 게 더 신기하단 말이야.”
동글동글한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기분이 들뜨는 게 느껴졌다.
[신라고등학교 3 : 7 선유고등학교]
선유고가 4점 앞서고 있는 6회 초, 투수 교체가 이뤄지며 김영산이 내려오고 2학년 하수영이 마운드에 올랐다. 하수영은 글러브 낀 손을 가슴께에 올린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3회만 막으면 경기 끝나잖아. 우리 이러다가 진짜 이기는 거 아냐? 왠지 느낌이 오지 않냐?”
“‘이러다가’가 아니고 당연히 이겨야지.”
그렇지. 임성의 말에 정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난하게 이어지던 경기 흐름이 뒤바뀐 건 8회였다. 신라고 타자가 휘두른 배트에 맞고 튄 공이 바로 뒤에 있던 조예준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아악!”
조예준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예준아, 깜짝 놀란 임성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다.
“조예준, 예준아.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냥 스친 거예요.”
가까스로 일어선 조예준이 창백한 얼굴로 앓듯이 대답했다. 임성은 다시 포수석에 앉으려는 그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스치긴 뭘 스쳐, 더그아웃에서 봐도 세게 맞은 것 같던데.
“빨리 병원 가라. 너 이대로 공 못 받아.”
“지금요? 저 없으면 포수는 누가 보고요. 지용우도 없잖아요.”
창백한 얼굴을 한 조예준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조예준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는 채로 계속 포수를 맡기는 건 말이 안 됐다.
“주장.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진짜예요.”
조예준은 앉았다 일어나며 제가 괜찮다는 걸 어필했지만, 임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지금 안 괜찮아.”
임성은 제가 ‘괜찮다’고 할 때마다 화를 내던 김희도를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했다. 누가 봐도 무리하고 있으면서 말로만 괜찮다고 해 봤자.
“예준아. 지금 우리 팀 케어해 줄 사람도 없는데, 괜한 고집 피우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너 야구 하루 이틀 하다 말 거 아니잖아. 당장 병원 가. 가서 아무 이상 없다는 거 확인하고 와도 안 늦어.”
“하지만 지금 제가 빠지면…….”
“조예준. 내 말 들어라.”
단호한 목소리에 조예준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더그아웃으로 걸어갔다.
주전 포수의 갑작스러운 이탈로 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지용우는 오늘 양민성과 함께 구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3학년 포수는 현재 부상으로 출전이 어려웠다.
미치겠다. 어떻게 하지. 임성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민하다가 1학년 포수를 불렀다.
“네? 저, 제, 제가요?”
이름이 불린 1학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전국 대회에 처음 출전하는 것도 모자라 결승행이 걸린 중요한 시합이었다. 망하기라도 하면 바로 역적 행이었다.
딸꾹. 한껏 당황한 1학년이 딸꾹질을 하는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깨는 계속 들썩였다. 임성은 그에게 물을 건네주며 말을 걸었다.
“점수 내줘도 되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 학교에서 많이 했잖아.”
1학년을 다독였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예상대로 1학년은 하얗게 질린 채 삐걱대며 포수 장비를 걸쳤다.
요행을 간절히 바랐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치 너희들에게 내려 주는 행운은 여기까지라는 듯 선유고의 새로운 배터리는 계속 얻어맞았다. 투수 중에서도 예민한 편인 하수영은 좀처럼 1학년과 합을 맞추지 못하고 공을 날렸다. 주자가 한 명도 없던 베이스에는 어느새 세 명으로 꽉 차 있었다.
“아. 또 안타 맞았다.”
4점 차로 앞서가던 선유고는 어느새 2점 차로 바짝 쫓기는 중이었다. 분명 이쪽이 이기고 있는데 팀 분위기는 벌써 패배한 것처럼 칙칙했다.
어느 스포츠든 흐름, 즉 분위기가 중요한데, 지금은 명백히 신라고에 주도권을 내주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건데. 왜 저걸 놓쳐.”
1학년 포수의 어설픈 블로킹에 공이 흐르며 신라고 타자가 다시 한번 홈을 파고들었다.
아, 아악. 선유고 선수들이 다들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했다.
점수 차는 이제 고작 1점. 주자는 여전히 득점권에 있었다. 안타 하나면 동점, 장타라도 때리면 바로 역전당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수영은 괜찮나? 임성은 초조하게 턱을 쓸며 마운드에 서 있는 하수영의 상태를 살폈다. 멀리서 봐도 가슴이 거칠게 들썩이는 게 보였다.
포수의 사인에 하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더, 또, 또. 벌써 네 번째 고개를 젓자 포수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했다. 임성은 급히 타임을 외치며 마운드로 올라갔다.
“하수영. 수영아, 괜찮아? 더 할 수 있겠어?”
“잘 모르겠습니다.”
하수영은 솔직히 대답했다.
여기서 더 던지게 하는 건 투수에게도 포수에게도 가혹한 상황이라 둘 다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1학년 포수마저 내려가면 포수 마스크를 쓸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은 건 아웃 카운트 하나와 9회 3이닝.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임성은 저를 보는 부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벽에 붙은 라인업지를 아무리 훑어봐도 올릴 사람이 없었다.
“임성. 네가 던지는 게 좋지 않겠냐? 1회면 투구 제한도 안 걸리잖아. 아니, 제한이고 뭐고 우선 오늘 이겨야 내일 결승전에 가지.”
공은 자신이 던진다 해도 그걸 받을 사람이 없었다. 허공에 던질 수도 없잖은가.
임성은 입을 떼지 못했고, 부원들은 눈치만 볼 뿐 나서지 못했다. 감독의 부재가 처음으로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할게요.”
말없이 눈치만 보던 아이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불쑥 올라온 손의 주인에게 향했다.
김희도는 높게 들었던 팔을 내리며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포수 내가 한다고요. 장비 어디 있어요?”
“네가 어떻게 포수를 봐. 공식 경기 뛴 적 한 번도 없잖아.”
“여기 처음 아닌 사람 있습니까? 그렇다고 쟤를 다시 내보낼 순 없잖아요. 아니면 다른 방도가 있어요?”
김희도가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1학년 포수를 눈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래도. 임성은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못 할 거였다면 손 들었을 것 같아요. 내가?”
아니. 자신이 아는 김희도라면 절대 그럴 리 없다. 오히려 하겠다고 손을 든 게 의외라고 할까.
“임성 선배.”
임성은 저를 부르는 김희도의 목소리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말대로 방도가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학교에서 연습 삼아 하던 것과는 압박감이 다를 거다.”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습니까?”
무심하게 대답한 김희도는 조예준이 벗어 놓고 간, 땀범벅이 된 가슴 보호대를 집더니 “음, 안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하고 중얼거렸다.
“포수는 김희도로 간다. 포수 해본 적 있으니까 너무 걱정들 마.”
임성의 결정에 다들 놀란 듯했지만, 별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박종열이 별안간 아악! 하고 괴성을 내질렀다.
“그래. 까짓것 해 보자. 뭐 최악의 경우 지기밖에 더 하겠냐?”
“돌빡아. 그게 제일 최악이거든.”
“그러니까, 멍청아.”
박종열과 정의영의 말을 흘려들으며 임성은 김희도가 보호 장비를 차는 걸 도왔다. 프로텍터, 레드가드, 포수용 미트, 마지막으로 포수 마스크를 건넸다. 그는 마스크를 끼기 전 콧등을 찡그렸다가 이내 결심한 듯 한 번에 푹 눌러썼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다.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얘기해. 괜히 타격 사이클 내려가면 더 손해니까.”
“두고 봐요. 분명 조예준보다 잘할 걸.”
대단하다고 할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모를 자신감이었다. 아니, 둘 다인가.
너무 덤덤한 김희도를 보니,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역시 대단하고 놀랍다니까. 임성이 슬쩍 웃자 김희도가 한 발짝 다가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체격이 크고 단단해 보였다.
“그 대신.”
김희도가 양손을 임성의 어깨에 올린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
“대가는 꼭 받을 겁니다.”
무슨 대가? 뒤늦게 김희도를 봤지만, 그는 이미 그라운드를 향해 걷고 있었다.
타자였던 임성이 투수로 전향하며, 그 자리는 1학년 박영빈이 채웠다.
봉긋하게 솟은 마운드에 올라선 임성이 숨을 고르며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경기가 시작된 지 벌써 1시간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엄청 길게 느껴졌는데 생각보다 얼마 안 됐구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높게 뜬 태양이 작열했다. 어찌나 뜨거운지 포수가 앉아 있는 흙바닥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이 패치라도 붙일 걸 그랬나. 하도 급하게 올라와서 생각도 못 했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눈앞에 있는 포수와 눈을 맞췄다. 조예준이 아닌 포수와 합을 맞춘 적은 많지만, 야수에게 공을 던지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희도에게 말이야.
던지고 받는다. 이 단순한 행위는 서로 간에 신뢰가 있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배터리가 특별하다는 것이고.
김희도가 손가락을 움직여 사인을 보냈다. 정규 훈련을 마치고 장난으로 주고받았던 사인을 이렇게 써먹을 줄 몰랐네.
한가운데로 꽂아 넣는 직구.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공을 손바닥으로 굴렸다.
안 괜찮아도 지금은 어쩔 수 없지.
휭, 더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공이 미트에 빨려가듯이 안착했다.
스트라이크였다.
공을 받은 김희도는 곧장 무릎을 펴며 2루수 박종열에게 공을 던졌다. 어설픈 포수라고 깔봤는지, 도루를 시도하던 상대팀 타자는 물론, 박종열 역시 깜짝 놀랐다가 허둥지둥 태그를 했다.
“아웃!”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도루 저지였다. 하나 남은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며 순식간에 8회가 종료됐다.
어, 어어?
임성은 얼떨떨한 상태로 제게 걸어오는 김희도를 쳐다봤다.
“이닝 종료됐는데, 안 들어가요?”
임성은 그에게 떠밀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씨발, 미친. 어떻게 거기서 송구를 하냐? 나 진짜 존나 놀랐잖아.”
직접 그의 송구를 받았던 박종열이 잔뜩 흥분해 외쳤다. 그만큼 조금 전 김희도가 했던 플레이는 단순한 아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대단한 플레이를 한 김희도는 더그아웃 구석에서 임성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포수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임성을 꽉 끌어안았다.
입술이 귓가에 눌리며 숨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귓속을 파고드는 거친 숨과 평소보다 더운 온기에 소름이 일었다. 어깨를 살짝 움츠렸던 임성이 머뭇머뭇 팔을 들어 김희도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그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도 지친다. 멋있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살짝 갈라진 목소리 속에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째 목소리가 좀 이상한데. 임성은 상체를 살짝 물리며 김희도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꽉 끌어안을 뿐 아니라 어깨에 턱을 올렸다. 임성은 옴짝달싹도 못 한 채 김희도가 타액을 넘기는 소리를 들었다.
이미 흠뻑 젖은 등 뒤로 땀이 주륵 흘렀고, 김희도의 손끝이 그것을 훑듯이 움직였다.
“누가 보면 어쩌…….”
조금 버거운 공기 속에서 말했다. 목이 눌려 웅얼대는 것처럼 목소리가 뭉개졌다.
“아무도 안 봐요.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보든지 말든지.”
상관없고.
“와아. 와! 박영빈! 기특한 새끼!”
대타로 나간 박영빈이 안타를 쳤는지 아이들은 더그아웃 천장을 미친 듯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임성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김희도의 손이 떨어져 나가며 벽을 짚었다. 어느새 벽과 김희도 사이에 갇히게 된 임성이 턱을 살짝 내렸다. 그새 또 키가 컸나. 시선이 엇비슷한 게 이렇게 민망할 일인가.
“선배한테서 좋은 냄새 나요…….”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에 목구멍이 바짝 타올랐다. 물러서려 해도 어차피 등 뒤는 벽이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퍼들거리며 떨렸다.
“임성 어디 갔냐? 우리 수비 이닝이야.”
제 이름을 들은 임성이 깜짝 놀라며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김희도는 허겁지겁 글러브를 끼는 남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마지막 이닝일지도 모르는 9회 초, 임성과 김희도가 그라운드로 나갔다.
그는 포수석에 앉기 직전에 임성의 손을 감쌌다. 땀에 젖어 끈적끈적한 손바닥이 맞닿고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얽혔다.
이게 벌써 몇 번째지, 두 번? 세 번? 벌써 몇 번이나 겪은 일임에도 늘 멈칫하게 됐다.
“음. 좋아요.”
대체 뭐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김희도는 명쾌히 고개를 끄덕이고선 자리에 앉았다.
임성은 콧등을 긁으며 발끝으로 흙을 골랐다.
신라고 공격은 2번 타자부터 시작됐다. 2, 3, 4번. 테이블세터와 클린업 트리오가 한 번에 포진한 중심 타선 중 중심 타선이었다.
이거 완전 산 넘어 산이잖아. 하지만 등산이야말로 우리 야구부의 특기였다.
로진백을 쥐었다가 떨어트리며 손끝에 묻은 가루를 허벅지에 비벼 닦았다.
김희도는 초구부터 변화구를 주문했다.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덥다. 미친 듯 작열하는 여름 공기를 한껏 끌어 마시며 공을 던졌다. 공과 함께 땀방울도 흩날렸다.
“스트-라이크!”
좋아.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첫 타자를 삼진으로 가뿐히 돌려세운 임성이 두 번째 타자와 대결을 이어갔다.
현재 볼 카운트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여기서 아웃시켜야 해.
공은 예리한 각도를 그리며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진짜 잘 들어갔다. 완벽했어.
“볼.”
하지만 심판은 볼을 선언하며 임성의 카운트는 불리하게 변했다. 당연히 아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타자를 상대할 준비를 하던 임성이 눈을 찌푸렸다.
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이런 판정이 나올 때마다 맥이 탁 풀렸다. 던지지 않아도 될 공을 몇 개나 더 던지게 될지. 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큰 소리로 외친 김희도는 곧장 직구를 주문했다. 깡. 파울. 깡, 파울. 힘껏 던진 공이 몇 번이나 커트 당했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자꾸 볼 판정을 받았던 게 떠올랐다.
제대로 판정했다면, 진작 타자를 잡았을 거잖아.
“볼.”
끝내 포볼이 되며 신라고 타자가 출루했다. 찜찜한 결과였다.
그리고 양 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 신라고 에이스 백도경이 타석에 들어섰다.
190cm를 넘는 거구에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를 도맡았을 정도로 타격감이 뛰어났으며 프로 구단에 일찌감치 1차 지명을 받은 선수.
모든 변화구에 잘 대응했지만, 특히 슬라이더에 강했다. 한마디로 임성과는 상극 중 상극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번에 맞붙었을 때도 탈탈 털렸지.
“볼.”
하아. 안 속네. 제발 좀 속아라. 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직구를 한 번 더 던질까? 아니면 변화구?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땅볼을 유도 후 병살 처리하는 건데. 어떻게 해야 배트가 나오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깐만요.”
김희도가 타임을 요청했다. 심판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김희도가 마운드로 걸어왔다. 그때까지도 임성은 무슨 공으로 기선을 제압할지 끊임없이 생각 중이었다.
상대방에게 ‘가위’를 낼 것이라고 미리 말한 뒤, 그가 낼 것을 예상하고, 또 의도를 파악해 뭘 내야 이길지 수 싸움을 하는 기분이었다.
“선배.”
“김희도. 아무래도 변화구로…….”
“이러니까 꼭 그라운드에 둘만 있는 것 같네요.”
“어?”
“끝나고 뭐 먹을지 생각해 봐요. 곤약 잔뜩 넣은 4단계, 아니 5단계 또또 떡볶이라든가, 우동 곱빼기, 오징어튀김, 돼지 목살 김치찌개 같은 거.”
“갑자기 그게 무슨…… 그보다 다음 공 뭐로 할 거야?”
“내 생각 하면 더 좋고요.”
그는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미련 없이 되돌아갔다. 잠시 넋 놓고 있던 임성은 “선배.” 하고 외치는 김희도를 쳐다봤다. 그는 손가락을 접었다가 다시 펼치더니 미트를 가운데에 고정했다.
1단계도 매워서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던 놈이 5단계? 이번에도 입술이 퉁퉁 붓게?
좀 알겠다 싶으면 역시 모르겠단 말이지. 요즘 애들은 다 저런가? 임성은 김희도의 말을 곱씹으며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백도경의 방망이가 헛돌며 노란 불 하나가 올라갔다. 복잡하게 생각했던 게 무색할 만큼 깔끔했다.
그렇게 공 하나가 더 김희도의 미트 안으로 들어갔다. 어, 벌써 투 스트라이크야? 김희도를 슬쩍 보자 마스크 안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웃고 있는 건가?
웃는 김희도라니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모습이었다.
“좋아, 좋아. 임성! 마지막 아웃 카운트다. 다들 집중하자, 집중. 오늘 여기서 이기고 우리 학교가 결승 간다아아아악!”
등 뒤에서 정의영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임성은 김희도에게서 시선을 떼고 모자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리고 불시에 1루로 견제구를 던졌다.
“세이프.”
반쯤 나갔던 상대팀 타자가 후다닥 1루로 돌아갔다.
쩝. 아웃시킬 수 있었는데 아깝다.
공을 다시 글러브에 감추며 김희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그의 말처럼 그라운드에 단둘이 남은 기분이었다. 그때 눈이 마주쳤고 이유 모를 목마름을 느꼈다.
김희도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짙은 땀 냄새가 콧속을 스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평범한 땀 냄새일 뿐인데 뭐가 그렇게 좋을까.
궁금하단 말이지. 임성이 속으로 생각하며 젖혔던 팔을 앞으로 뻗었다. 손가락을 긁으며 떠난 둥근 공이 포수 미트를 향해 뻗어 가다가 배트 앞에서 속도가 떨어지며 휘어졌다.
백도경의 상체와 다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배트를 비스듬히 쳐올렸다.
“스트라이크.”
쓰리 아웃! 타자 체인지.
쯧. 자칫 무너질 뻔한 몸을 바로 한 백도경이 혀를 차며 돌아섰고, 세 번째 타자가 들어섰다. 이번 타자만 잡으면 돼. 이제 선유고는 승리까지 단 하나의 아웃 카운트만 남겨 두고 있었다.
따악! 배트를 맞고 튕긴 공은 크게 바운드 되며 이쪽으로 왔다. 글러브를 높이 들어 공을 잡은 임성은 직접 타자에게 태그를 했다. 어떻게든 피해 보려던 신라고 타자가 허탈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최종 스코어.
[신라고등학교 6 : 7 선유고등학교]
임성의 글러브가 상대 타자의 어깨에 닿으며 태그업을 하는 순간, 선유고 더그아웃에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누가 보면 우승이라도 한 줄 알 정도였다.
“와아아아악! 이겼다. 아, 씨발. 우리 이겼다고!”
누가 들으면 절규라고 생각할 만큼 큰 목소리가 그라운드를 울렸다. 헐, 미쳤다. 개쩔어, 등등 흥분이 섞인 욕설도 난무했다.
카메라 감독이 얼른 현장 소리를 줄이며 해설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투수 정면으로 향한 공. 마지막 아웃 카운트는 에이스인 임성이 직접 마무리합니다. 정말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작열하는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운 선유고 선수들이 신라고를 격파하며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임성은 자신의 어깨며 등을 마구잡이로 쳐 대는 아이들 틈에서 김희도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금세 평소처럼 되돌아갔다. 그리고 현재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임성은 자신을 얼싸안은 아이들을 헤치며 김희도에게 걸어갔다.
“희도야.”
“직접 끝낸 느낌은 어땠습니까?”
“재밌었어.”
엄청. 엄청 재밌었어. 뭔가 말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에 울컥 차올랐다.
한쪽에선 박종열을 포함한 아이들이 결승에서 승리라도 한 것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감독과 코치 없이, 선수들로만 치른 경기의 승리는 숨 막힐 정도의 짜릿한 고양감을 안겨 줬다.
뒤늦게 전광판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씩 실감이 났다.
한참을 전광판을 보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이 자식들이.”
임성이 고함을 질렀을 땐, 아이들은 이미 빈 물통을 집어 던지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들 귓구멍 열고 잘 들어라. 내일도 잠실구장이다! 우리가 이겼다고. 알겠냐?”
정의영의 말에 다들 주먹을 위로 치켜들며 “잠실! 잠실! 잠실!” 하고 따라 외쳤다.
“각 팀 정렬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선유고 부원들은 하도 소리를 질러 잔뜩 목이 쉰 상태로 신라고 선수들과 인사를 나눴다.
“임성. 마지막에 던진 공 체인지업이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던 임성이 고개를 돌렸다. 헬멧을 벗은 백도경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신 못지않게 굳은살이 박인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맞잡았다.
“맞아.”
“언제 달았냐? 너 3년 내내 슬라이더만 던졌잖아. 폼 보고 당연히 직구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느려져서 깜짝 놀랐다.”
바로 알아차리는 걸 보니 역시 1차에 뽑힐 만한 실력이었다.
“실전에서 쓴 건 나도 처음이야.”
그 말에 백도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소 허탈하게 웃었다.
“하필이면 오늘, 그것도 9회에 나한테 던져? 너무한 거 아니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주말리그 때 우리 학교 너희한테 한 번도 못 이긴 건 알지?”
“그럼 쌤쌤인 건가? 어쨌든 공 좋더라. 내가 본 체인지업 중에서 직구랑 폼이 제일 비슷했어. 좀 더 갈고닦으면 결정구로 써도 되겠다.”
백도경이 맞잡은 손을 크게 흔들며 칭찬했다. 이렇게 솔직한 칭찬을 받은 게 언제였더라. 머쓱하면서도 가슴이 몽실몽실해졌다.
“손은 놓고 말하지?”
시큰둥한 표정에 퉁명스러운 말투는 누가 봐도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모를 김희도가 삐딱하게 선 채 이쪽을 보다가 임성의 앞에 섰다. 마치 주인을 위협에서 지키는 개라도 된 듯한 행동이었다.
“너 김희도지? 네 스탯이 그렇게 뛰어나다며? 홈런도 꽤 많이 쳤던데, 곱상한 얼굴이랑 다르게 힘은 좀 있나 보다?”
두 살이나 어린 1학년에게 홈런 개수가 밀린 것이 퍽 억울했는지 백도경이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김희도에게 악수를 청했지만, 그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임성을 데리고 돌아갔다.
“듣던 대로 진짜 싸가지 없네…….”
허공에 뻘쭘하게 뻗은 손을 내리며 백도경이 중얼거렸다.
선유고 야구부원들이 짐 정리를 하고 나왔을 땐, 그라운드에선 다음 준결승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일상업고등학교 대 주강고등학교였다. 이 경기에서 이기는 팀과 내일 결승에서 맞붙는다.
애들을 먼저 보내고 경기를 보려는데 그만 가요, 하고 말하며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김희도에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조예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단순 타박상으로 결승전엔 무리 없이 출전 가능하다고 했다.
하아. 진짜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쉬는 임성을 가만히 보던 김희도가 “나도 다치면 그렇게 걱정해 주나?”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인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당장 취소해.”
농담이라는 걸 아는데도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드물게 정색하는 임성을 본 김희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소리 없이 웃었다. 기다란 눈매가 햇볕 아래의 고양이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지금 화내는 거예요?”
“화 안 나게 생겼냐? 다시 한번 그런 말 해 봐. 그리고 얼른 취소하라니까.”
“취소할게요. 전 선배 출전하는 경기엔 무조건 나갈 생각이거든요.”
확답을 듣고 나서야 임성은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학교에 도착한 아이들은 한 명도 집에 가지 않고 각자 흩어져 훈련을 했다. 준결승전에서 승리한 것도 모자라 상대 전적 열세였던 신라고를 이긴 흥분이 아직 남은 탓이었다.
아무도 말을 꺼낸 사람은 없지만, 다들 불안했을 것이다. 감독과 코치 없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본인들조차 의아해했는데,
“하지만 이겼어.”
임성은 공이 수북이 쌓인 카트를 옆에 놓고 그물을 향해 공을 던졌다. 오늘 느꼈던 체인지업의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았다.
“음?”
하체에 한껏 힘을 주고 어깨를 위로 뒤틀었다가 앞으로 쭉 뻗는 순간, 날갯죽지 부분에서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기분 탓인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한번 공을 던졌다. 역시 같은 부위가 약하게 욱신거렸다.
“선배.”
“어? 왜?”
“뭘 그렇게 놀라요. 뭐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갑자기 뒤에서 부르니까 놀라지. 집에 가게?”
임성은 살짝 들었던 팔을 내리며 웃었다. 벌써 집에 가려는지 김희도는 연습복 대신 교복을 입고 있었다. 흰 반팔 교복 셔츠와 짙은 남색 바지, 같은 색의 넥타이. 가뜩이나 운동선수 같지 않던 김희도는 교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달라 보였다.
“집에 일이 있어서요. 매운 떡볶이는 내일 먹어요.”
“매운 건 됐다니까. 아무튼, 오늘 진짜 고생했다. 푹 쉬고 내일 보자.”
“선배도 갈 건데요?”
“나?”
내가 간다고 말했었나? 임성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김희도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면 오버 워크 할 게 뻔하니까. 체인지업 다듬는다고 계속 던질 거잖아요.”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보든가. 딱 그런 표정으로 김희도가 얘기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뜨끔한 표정이 티가 났는지 김희도가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한테 쉬라는 말 하기 전에 본인부터 좀 쉬어요.”
김희도는 임성이 가지 않으면 저도 가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말했다. 결국 그에게 떠밀리다시피 가방을 챙겼다.
벌써 집에 가냐는 박종열의 말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부실 밖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김희도는 임성을 발견하고 등을 뗐다.
“진짜 이대로 가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직 8시밖에 안 됐는데.”
“돼요.”
어이없을 정도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김희도에게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니 버스 정류장까지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몇 번 타는데?”
“선배 먼저 타세요. 집에 가면 연락하고요.”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해 어쩔 수 없이 임성이 먼저 올라탔다. 창가 옆 빈자리에 앉아서 무심코 돌아보자,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김희도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쟨 어디서나 눈에 띄는구나. 찾기 쉬워서 좋다. 씩 웃으며 손을 흔들자 김희도가 몸을 획 돌렸다.
인사도 안 해 주냐. 매정한 자식 같으니. 허공에 떠 있는 손을 머쓱하게 내리며 뒷 목을 주물렀다. 경기 내내 긴장해서인지 근육이 딱딱하게 뭉쳤다. 집에서 스트레칭 꼼꼼하게 해야겠네.
막 출발하려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더니 칙 소리와 함께 앞문이 열렸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임성은 생각지 못한 사람을 발견했다.
“일 있다고 안 했냐?”
“네. 근데 더 급한 일이 있더라고요. 까딱했으면 놓칠 뻔했네요.”
더 급한 일? 살짝 의아해하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앉아.”
됐어요. 임성이 일어나려는 기미를 본 김희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어깨를 눌렀다. 그리고 버스 의자를 양손으로 짚으며 상체를 숙였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와 위치에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괜찮으니까 그냥 가죠.”
이번엔 진짜 버스가 출발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김희도는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떡볶이 말고 어떤 음식 좋아합니까? 기분 안 좋을 땐 어떻게 풀어요? 쉬는 날엔 주로 뭐 하면서 지내요?
심드렁한 표정이라 진짜 궁금한 게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하나하나 대답해 주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 정류장이었다.
“나 이번에 내린다. 내일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절대 오버 워크 하지 마시고요. 절대.”
“알았어. 인마.”
임성은 김희도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듯 쓰다듬고선 버스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