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미약한 열기를 품은 바람, 살짝 건조하면서 텁텁한 공기. 전반기 주말리그 왕중왕전이자 전국 고등학교가 참여하는 황금 사자기가 열리는 첫날의 날씨였다.
선유고 선발 멤버는 대부분 3학년으로, 2학년 세 명이 포함됐고, 1학년 중에선 유일하게 김희도 혼자 출전했다.
선발 투수 임성이 결연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섰다.
충분히 몸을 풀었는데 긴장 때문인지 어깨가 살짝 뻐근했다. 임성은 어깨와 팔을 천천히 주무르다가 글러브를 꼈다.
“주장.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 합시다.”
“어. 잘하자.”
1회전 상대는 대전에서 온 유강고등학교였다. 장타를 때리는 선수도 많고, 다리가 빠른 팀이라 방심은 금물이었다.
임성은 로진 주머니를 바닥에 던지고 마운드 흙을 고르며 심호흡을 했다. 이 경기는 우승으로 향하는 통과점일 뿐이었다.
타자 상태를 좀 볼 겸 몸 안쪽으로 직구를 꽂아 넣었다. 공이 빠져나간 손가락 사이가 얼얼했다. 유강고 타자는 공을 흘려보내며 마찬가지로 임성의 컨디션을 파악했다.
첫 타자를 돌려세운 뒤 상대한 2번 타자는 내야 땅볼, 세 번째 타자는 풀 카운트 승부 끝에 어렵사리 잡았다.
양 팀 득점 없이 1, 2회가 지나고 3회가 됐다.
“이번 이닝도 막읍시다. 선유고 파이팅!”
응원단장을 자처한 2학년이 목청을 높였다.
3회 초 1사 1루 상황. 선유고 수비는 바운드 된 공을 잡지 못하고 뒤로 흘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상대 팀 1루 타자가 2루 베이스를 빠르게 밟고 3루까지 안착했고, 타자 역시 1루에 다다랐다.
전국 대회는 오랜만이라 그런가, 체력이 좀 달리는 것 같네.
이마의 땀을 훔치며 숨을 골랐다. 아직 시합 초반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쉭쉭, 거친 숨이 귓가를 연신 울려 댔다.
임성은 어깨와 팔을 쏟아 내듯 뻗으며 공을 던졌다. 다행히 유강고 타자의 배트가 돌아가며 노란 불 하나가 켜졌다.
“쓰리 아웃, 체인지.”
그렇게 임성은 몇 개의 공을 더 던지고 이닝을 끝냈다.
박종열을 주축으로 한 타자들이 시원하게 점수를 뽑아냈다.
『멀리 뻗어 간 공이 우측 펜스를 맞고 떨어집니다. 김희도의 황금 같은 적시타! 박종열, 정의영에 이어 김희도가 2루타를 때려냅니다. 조금만 더 넘어갔다면, 홈런이 됐을 강타입니다. 선유고가 먼저 2점을 획득하며 유강고를 앞서갑니다.』
2, 3루에서 기회를 엿보던 박종열과 정의영이 차례대로 홈을 밟았다. 김희도는 첫 전국 대회부터 안타를 뽑아내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잘했어. 김희도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초반부터 점수를 펑펑 내주는 타자들과 달리 임성은 다소 어렵게 경기를 끌고 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매 이닝 주자를 등져도 어떻게든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것일까.
사실 주자를 내보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전국 대회는 토너먼트라 한 경기라도 졌다간 바로 탈락이었다. 그 부담감이 작용한 것인지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어깨와 팔이 저렸다.
이번 이닝은 더 꾸역꾸역 막았네.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될까.
왼쪽 어깨를 매만지며 더그아웃으로 걸어가자 김희도가 옆에 슬쩍 섰다.
“넌 전국 대회에서도 뻥뻥 치는구나. 대단한 자식.”
송진과 땀으로 범벅된 손이 김희도의 앞머리를 간지럽히듯 흐트러트렸다. 김희도는 눈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슬쩍 핥다가 임성이 저를 쳐다보자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수습했다.
“배고프네요.”
“아침 안 먹었냐? 이따 시합 끝나고 예준이랑 또또 분식 가자.”
“조예준은 빼고요.”
아침을 챙겨 먹은 김희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경기는 9회에 치달았고, 현재 스코어는 [선유고등학교 6 : 5 유강고등학교]로 1점 차 박빙 승부 중이었다.
현재 투 아웃 2, 3루에 선유고 타자가 들어찬 상태에서 김희도의 타순이 돌아왔다.
유강고는 에이스를 마무리로 세우며 더는 점수를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임성은 마른 숨을 들이마시며 무표정한 얼굴로 타격 자세를 취하는 김희도를 지켜봤다.
허공에 멈춰 있던 배트가 밑에서 위로 가볍게 움직였다. 깡!
『여기서 1학년 김희도가 또다시 안타를 때려냅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어요. 첫 전국 대회에 출전한 선수 같지 않습니다. 스윙이 무척 대담합니다. 잘 치네요.』
캐스터는 이어 김희도의 타격 폼과 선구안 등을 꼽으며 “이번 황금사자기의 최대 수혜자가 될 수도 있다.” 하며 칭찬을 퍼부었다.
3회에 안타를 뽑아낸 김희도는 또다시 달아나는 안타를 때려내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유강고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추격했지만, 최종 승리는 선유고등학교였다.
“으아아! 1회전 돌파다.”
박종열이 배트를 위로 번쩍 들며 외쳤다.
1회전을 통과했다는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곧장 학교로 돌아가 또다시 훈련을 했다. 특히 야수들은 오늘 경기에 나왔던 실책 위주로 반복 연습을 했다. 외야수인 김희도 역시 수비 훈련에 참여했는데, 오늘도 여전히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찬데 마스크까지…… 오히려 당사자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답답해했다.
“진짜 대단한 새끼야.”
박종열은 심드렁한 얼굴로 공을 받는 김희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임성은 오늘 제 플레이를 복기하며 그물망을 향해 공을 던졌다. 팀이 승리한 것과 별개로 투구 내용은 썩 좋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
왜 그렇게밖에 못 던졌지. 점점 구속이 내려가는 이유는 뭐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더 생각했다간 자괴감이 들 것 같아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밤 10시. 모든 훈련이 끝나고 다들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조예준과 학교 언덕을 내려가던 임성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는 김희도를 쳐다봤다.
“주장. 설마 또 저 자식이랑 같이 가게요?”
어느 순간부터 김희도와 또또 분식에 함께 가는 게 당연시됐다. 조예준은 대놓고 못마땅해하면서도 임성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다.
임성의 손짓에 김희도가 빠르게 걸어와 옆에 섰고, 조예준은 매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직속 선후배끼리 사이좋게 지내. 오히려 사이가 좋아서 싸우나?”
김희도와 조예준이 동시에 인상을 쓰며 임성을 쳐다봤다.
“아, 형!”
“그 말 취소하세요.”
동시에 외치는 소리에 임성이 작게 웃었다.
금세 또또 분식에 도착한 세 사람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저녁을 먹은 후였지만,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주문을 많이 했다.
“매운 떡볶이 먹을…….”
“전 절대 안 먹어요. 피똥 싸기 싫다고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예준이 정색했다.
“알았어. 사장님. 떡볶이는…….”
“4단계.”
제일 순한 맛으로 주세요. 하고 말하려던 임성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김희도가 왜요, 라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지난 경험으로 미뤄 봤을 때, 조예준이나 김희도나 매운 거에 약한 건 똑같은데 왜 무리하는지 모르겠다. 열일곱 살의 패기 같은 건가 싶기도 하고.
“너 그러다 속 버려.”
“전 매운 거 잘 먹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곤약이고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줄줄 내뱉는 말에 조예준이 코웃음을 쳤다. 곤약 보고 이딴 걸 먹냐고 지랄하던 게 어디 누구더라. 아, 바로 앞에 있네.
“사장님, 저희 1단계 주세요. 제일 순하게요.”
임성은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사장님을 붙잡아 1단계로 바꿨다. 그러나 김희도가 다시 “4단계 2인분도 같이 주세요.” 하고 말했다. 만류해 봤자 효과도 없을 것 같으니까 내가 다 먹어야겠다.
주문을 모두 마치자 약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요새 양민성 너무 자주 등판 하는 것 같지 않아요?”
“투수가 시합에 자주 나오는 게 뭐가 이상해.”
“아니요. 투구 수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 같잖아요. 하위 타순만 상대하고 내린다든가, 상대적으로 약한 팀 경기 선발로 세운다든가. 꼭 평자 낮추려고 장난질하는 것 같단 말이에요.”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 퍼트리지 마. 그러다 큰일 난다.”
임성의 대답에도 조예준은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양민성에 관해 얘기했다.
“양민성 엄마가 학부모회 회장이라서 봐주는 건 비밀도 아니잖아요. 지금 감독이 부임하고 노골적으로 양민성 편애하는 거 야구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주장 팔꿈치 염증 생긴 것도 작년에 갑자기 선발이 된 양민성 뒤치다꺼리하다가…….”
조예준은 팔꿈치 얘기를 꺼내며 은근슬쩍 임성의 눈치를 봤다.
“한 팀인데 뒤치다꺼리라고 할 것도 없어. 야, 우동 나왔다. 헛소리 그만하고 먹자.”
임성은 타이밍 좋게 나온 우동을 얼른 조예준 앞에 내려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조예준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것보다 다른 일은 없냐? 애들 분위기는 좀 어때?”
“애들 분위기야 똑같죠. 잘해서 스카우트 받고 싶다! 인기 많아지고 싶다! 뭐, 이런 거?”
“다른 일은 없나 해서. 혹시 뭐라도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
“저야 주장에게 다 보고 하죠. 아시면서.”
조예준이 모르는 걸 보니, 양민성 무리가 적어도 티 나게 서찬규를 괴롭히진 않나 보다.
물론 일회성이든 아니든, 티가 나든 나지 않든지 있어서 안 되는 일인데, 당사자도 입을 닫고 감독이고 코치고 모르쇠로 버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찬규에게 피해 안 가게 처리할 순 없나.
떡볶이 순대, 우동 할 것 없이 한가득 입에 넣은 두 사람과 달리 김희도는 떡볶이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전 누구와 달리 매운 것도 잘 먹습니다. 곤약이 쫄깃쫄깃하네요.”
조예준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어필도 빼놓지 않았다. 다소 뻔뻔한 말투와 달리 그의 얼굴은 사뭇 달아올라 있었다. 매운 게 분명했다.
“무리하지 말고 그만 먹어. 그러다 얼굴 터지겠다.”
보다 못한 임성이 그에게 물을 건넸지만, 김희도는 개의치 않고 떡볶이를 모두 먹었다.
조예준이 휴대폰으로 2회전에 맞붙을 학교의 경기 영상을 틀었다. 멀리서 찍었는지 화면이 조잡했지만, 안 보는 것보단 나았다.
심각한 얼굴로 한창 영상에 집중하던 임성은 무언가 어깨에 닿는 느낌에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거의 달라붙다시피 한 김희도의 옆얼굴이 보였다.
“너무 가깝지 않나?”
“타자요? 포수랑 가깝게 서 있긴 하네요.”
김희도가 배트를 휘두르는 장면을 보며 말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이라 임성은 제 기분을 그냥 기분으로만 넘겼다.
세 사람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분식집을 나왔다.
“조심히 들어가라.”
“넵. 주장, 내일 봐요.”
집이 반대 방향이라 먼저 돌아가는 조예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김희도에게도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는 벌써 반팔을 입은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다. 아니, 곧 6월이니 벌써는 아닌 건가?
임성은 동생들에게 이제 들어간다는 전화 후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스포츠란 맨 구석에 「고교야구 열전! 황금 사자기 개막」 이라는 제목과 함께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학교 이름이 나열돼 있고, 바로 밑에 『서울지역 1차 후보 리포팅! (투수 편)』 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잠시 머뭇대던 임성이 링크를 클릭하자 그동안 이리저리 스친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주강고등학교 이치연(18)◆
정통파 우완. 유니콘즈 1차 지명으로 가장 유력.
189cm의 장신에 빠른 스피드를 가진 선수. 사용하는 구종은 직구, 슬라이더, 커브. 결정구는 커브.
작년 전국 명문고 야구열전에 선발 등판, 4이닝 동안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피칭을 선보였다.
이어진 봉황대기 전국 고교 야구 대회 결승전 선발 등판, 6이닝 5피안타 2볼넷 2실점의 호투를 펼쳤다.
주강고는 올해 전반기 주말리그 서울 B조 전승 중이다.
※총평: 말이 필요 없는 전국 최대어!」
“이치연…….”
여전히 잘하는구나. 스크롤을 내리던 임성은 제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기사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과 이대로 화면을 닫고 싶은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액정을 한참이나 보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결국 멈춰선 채 기사를 클릭했다.
「◆선유고등학교 임성(17)◆
뛰어난 제구력을 지닌 좌완투수.
신장 182cm. 유연한 몸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투구가 특징. 투구 폼이 예쁘다. 구종은 직구와 슬라이더, 싱커. 다만 싱커는 잘 던지지 않음.
3할이 넘는 준수한 타격 실력을 보인다.
1학년 때 최고 구속 141km로 그해 신입생 중 최고 기대주로 등극.
2학년 땐 명실상부 에이스로 황금사자기 8강, 청룡기 준우승 등을 이끌었다. 최고 구속 143km까지 치솟으며 이치연과 함께 1차 지명으로 거론.
작년 가을 팔꿈치 부상 후 공식 경기 출전 기록 없음.
올 전반기 주말리그에서 성공적인 복귀를 하는 듯했으나, 평균 구속은 오히려 작년보다 한참 떨어진 130km 중반대를 기록.
구속 저하 요인은 일전 리포팅에도 게시했듯 팔꿈치 염증으로 인한 심리적 위축으로 보인다.
※총평: 1, 2학년 때 워낙 좋은 모습을 보여 현재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선수. 슬슬 폼이 올라오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도태되기 전에 스스로 중심을 잡아야 할 듯.」
“…….”
“개소리를 참 길게도 써 놨네요.”
등 뒤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임성이 흠칫 놀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간 줄 알았던 김희도가 가방을 비스듬히 멘 채 서 있었다.
“기척 없이 오는 건 여전하네.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임성은 기사를 봤냐는 말 대신 다른 주제를 꺼냈다. 자신의 평가가 어떤지 김희도가 알지 않길 바랐으니까.
“불렀는데 못 들었어요?”
듣지 못한 걸 보니 생각보다 집중해서 읽었나 보다.
“그것보다 왜 다시 돌아왔냐, 무슨 일 있어?”
“집에 데려다주려고요.”
누구, 설마 나? 임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를 가리켰다. 김희도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걸어와 옆에 나란히 섰다.
평생 누군가를 데려다주기만 했을 뿐, 반대 상황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나를? 왜?”
“그냥요.”
그냥이라고? 여전히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고 눈만 꿈뻑꿈뻑 뜨는데, 때마침 반대편 달려온 차의 헤드라이트 빛이 김희도에게 쏟아졌다. 살짝 심드렁해 보이는 얼굴은 아무런 의도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냥 걷고 싶은 걸 수도 있지.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좋아. 같이 가자.”
임성은 그의 어깨에 팔을 얹고 큰 보폭으로 걸었다.
* * *
선유고등학교는 상대 학교를 차례대로 격파하며 황금사자기 8강에 올랐다. 오늘 이 경기에서 이기면 준결승, 그다음이 바로 대망의 결승전이었다.
오늘 선발 투수는 양민성으로, 포수 마스크는 조예준이 썼다. 평소 지용우와 배터리를 이뤘던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조합이었다.
여전히 관중은 몇 명 없었지만, 하늘이 맑고 햇볕은 적당히 뜨거운, 좋은 날이었다.
경기 직전, 임성이 파이팅을 외치려 했지만, 양민성은 오늘 선발은 자신이니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조예준이 헛웃음을 터트렸고, 김희도는 드물게 눈을 찌푸렸다.
“둘 다 표정 펴고, 잘해라.”
임성은 양쪽에 선 조예준과 김희도의 등을 두드리며 응원했다.
해설이 따로 없던 주말리그와 다르게 황금사자기는 해설과 캐스터가 존재했다. 게다가 스포츠 전용 채널과 유튜브 생중계로 나가 누구나 시청 가능했다.
더그아웃에 모여 앉은 아이들이 학교 이름을 열창했다.
『황금사자기 8강 경기 시작합니다. 백승고등학교 대 선유고등학교. 선유고 양민성 선수가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이에 맞서는 백승고 1번 타자 황연석이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해운공고와의 경기에서 적시타를 때리며 팀 승리에 크게 기여했죠.』
선공인 백승고 1번 타자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가며 경기 시작을 알렸다.
예년에 비해 올여름은 특히 더울 거라더니, 벌써부터 마운드가 들끓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눈 밑에 아이 패치를 붙여도 눈부실 것 같았다.
양민성은 1회부터 포볼로 주자를 내보내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 비해 계속되는 상대 팀의 맹공, 정의영의 슬라이딩 캐치로 겨우 실점 위기를 넘겼다.
휴우. 놓치는 줄 알았네. 남색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양민성 선배님 파이팅! 공 완전 좋습니다. 자신감 있게 던지십쇼.”
스카우터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압박 때문인지 양민성의 공은 평소보다 거칠었다. 스피드는 올라갔지만, 가뜩이나 위태롭던 제구는 더욱 조잡해져 거의 바닥에 패대기치는 수준이었다.
미트가 땅바닥에 박혔나. 왜 자꾸 아래로 던지고 지랄이야. 조예준은 당장에라도 양민성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참을 인(忍) 자를 몇 번이나 되새겼다.
조예준, 참자. 이제 1회 시작했다. 최소 4회까지 이닝을 먹어줘야 계투도 덜 갈리지.
하지만 그 결심은 포볼로 두 명의 주자를 내보내는 것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네. 어지간해야 넘어가지.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양민성에게로 걸어갔다.
“선배님. 왜 제 사인대로 안 던집니까? 방금 그 타자는 커브에 약하다고요.”
“널 어떻게 믿고? 경기를 뛰어도 내가 너보다 몇 번은 더 뛰었고, 내가 날 더 잘 알아. 나한테 명령하지 마.”
“아니, 선배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개…… 얘깁니까?”
지금 팀 경기 중이잖아. 팀 경기!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팀에게 안 좋은 사인을 내겠냐? 지려고 작정했겠냐고. 사람이 상식적으로 생각해야지.
“잘하면 오늘 최고 구속도 가능하겠는데.”
아이고, 인간아. 지금 무사 2루인 건 안보이냐. 스트라이크 존에나 제대로 꽂고 그런 말 하던가. 이건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 본인 개인기를 뽐내는 거잖아. 아무리 스카우터가 있대도 너무 심하지 않나? 경기에 지면 보여 줄 기회도 없어지는 건데.
조예준은 양민성을 한심하게 응시하다가 가슴팍을 움켜쥐며 더그아웃 쪽을 쳐다봤다. 펜스 가까이 붙어 있던 임성이 진정하라는 듯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진짜 내가 주장 때문에 참는다.
“선배님 말씀처럼 구속은 잘 나오니까 제구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 믿습니다. 선배님.”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내뱉은 조예준은 로봇처럼 뻣뻣하게 양민성을 다독였다.
그 후 양민성은 타자 한 명을 땅볼 처리하며 첫 아웃 카운트를 올렸다.
드디어 정신 차렸나 싶은 생각도 잠시. 양민성의 공은 또다시 민들레 홀씨처럼 이리저리 흩날렸다.
결국 만루…….
기어코 세 개의 베이스가 채워진 것을 본 임성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공은 공대로 던지고 주자는 주자대로 내보내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건 숱한 경험으로 터득했다.
“여기서 잡으면 되지. 처져 있지 말고 응원하자.”
임성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전환하자 침묵하던 후배들이 더그아웃 펜스를 두드리며 “민성 선배님. 파이팅!”, “선유고 이기자.” 등을 외쳤다.
다행히 아웃 카운트를 하나 더 올리고, 이제 타자 한 명만 더 잡으면 이닝 종료였다. 양민성의 성격상 만루를 틀어막으면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제발, 제발 한 명만 더 잡자.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포수의 미트를 크게 벗어나는 폭투가 이어졌다.
“뛰어, 뛰어! 홈! 홈!”
백승고 주루코치가 팔을 마구 휘둘렀고, 각 베이스를 밟고 있던 3루 주자가 홈으로 돌진하며 선취점을 뽑아냈다.
[백승고등학교 1 : 0 선유고등학교]
“괜찮아. 다들 집중하자. 집중!”
임성이 양손을 모아 입가에 대고 외쳤다.
어이없는 폭투로 비록 선취점을 내줬지만, 이제 겨우 1회였다. 역전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었다.
다행히 더는 실점 없이 이닝이 마무리 되고 그리고 이번에는 백승고 야수가 공을 놓치는 실책을 범했다.
정의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루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득점과 연결 짓지 못했다.
여전히 1-0으로 백승고가 앞서는 중이었다.
그리고 결국 조예준 대신 평소 양민성과 주로 배터리를 이뤘던 지용우가 포수 마스크를 썼다. 교체되어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조예준은 보호구를 거칠게 풀며 씩씩댔다.
“아니, 무슨! 내가 지 공 받아 주는 기계도 아니고, 소통 안 할 거면 배터리를 왜 해요? 아까 봤죠? 완전 제멋대로 처넣는 거.”
“민성이 상태는 좀 어때?”
“주장도 봤잖아요. 구속만 잘 나와요. 구속만.”
포수가 바뀌고도 양민성은 또다시 풀 카운트 후 볼넷이라는 어려운 길을 걸었다. 결국 양민성은 4회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민성아 고생했다. 물 마셔.”
임성은 더그아웃에 들어온 양민성에게 물을 건넸지만, 손이 내쳐졌다.
팍, 입구가 열린 물통이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으며 더그아웃의 모든 시선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물통으로 향했다.
“타자 새끼들. 좆도 못하네. 점수 못 낼 거면 빠따는 왜 잡냐? 존나 짜증 나게.”
“야. 볼 질에 폭투까지 해서 위기 상황 만든 게 누군데?”
박종열이 양민성을 향해 얼굴을 디밀었다. 점수가 나올 법한 상황에서 무득점으로 끝나자 다들 예민해진 것이었다.
임성은 감독을 힐끔 곁눈질하며 두 사람을 말렸다. 감독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그라운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박종열, 애들 보고 있다. 손 놔. 그리고 양민성. 저번부터 말했지만, 경기 도중에 네 기분 티 내지 마라. 선배답게 굴어.”
이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해 주변의 분위기를 흐리는 건 본인과 팀, 모두에게 좋지 못했다. 이미 몇 번이나 경고했음에도 또다시 팀 분위기를 망치는 양민성이 어이없고 화가 났다.
“임성. 네 목소리가 제일 크다. 민성이 잘 던졌다. 뒤는 애들한테 맡기고, 좀 쉬어라.”
감독이 양민성을 살살 달랬다. 임성에게 소리치던 것과는 표정도 목소리도 현저히 달랐다.
감독의 위로를 받은 양민성은 유니폼 상의를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임성. 등판 준비해라. 하수영이 내려오면 올라갈 거다.”
“감독님. 주장 어제도 등판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갑자기…….”
“조예준. 네가 정할 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조예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 명의 에이스가 팔을 갈아 가며 학교를 승리로 이끄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프로 데뷔 전에 부상을 입는 선수가 많아져 지금은 투구 수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혹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임성만 해도 투구 수 제한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맞춰 거의 매 경기 마운드에 오르는 중이었다.
그것도 선발, 계투, 마무리할 것 없이.
주로 양민성이 주자를 쌓아 놓고 내려가면 뒤처리용으로 쓰였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바로 실점하는 자리라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독의 말을 거부할 수도 없어 묵묵히 글러브를 잡았다.
임성이 시간에 쫓겨 다급히 어깨를 푸는 사이 양민성의 뒤를 이어 등판한 하수영은 백승고 주자 한 명을 잡고 내려왔다.
“수영이 고생했다. 긴장 안 하고 잘 던졌네.”
임성은 후배의 모자를 가볍게 두드리고선 그라운드로 달려갔다. 본격적인 플레이 전, 지용우에게 공을 몇 개 던지며 전광판을 확인했다.
원 아웃에 주자는 1, 2루.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야수들은 감독의 사인에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오는 전진수비 대형을 갖췄다. 타자를 압박하며 카운트 잡기는 좋았지만, 자칫 타구가 빠져나가기라도 하면 장타로 연결될 위험성이 컸다.
임성, 집중하자.
고양감과는 전혀 다른 긴장이 목구멍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것을 채 뱉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포수와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볼을 한번 빼서 타자의 반응을 살펴볼까? 아니다. 이미 주자가 둘이나 나갔는데, 굳이 불리한 카운트를 만들 필요는 없지. 우선 직구를 넣고, 돌아오는 반응에 따라 대응하자.
변화구 주문에 고개를 살짝 젓자 지용우가 직구 사인을 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힘껏 던진 공은 허공을 가르며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좋아. 이건 스트라이크다.
“볼!”
심판이 큰 소리로 볼을 선언했다.
분명히 스트라이크였다고. 양팔을 벌리며 어필해 봤으나 당연히 번복은 없었다.
“후우.”
어쩔 수 없다. 그냥 털어 버리는 수밖에.
다행히 그 후 연속으로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고, 수비의 도움으로 타자를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득점권에 주자가 나가 있어 방심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무실점으로 잡아야 분위기를 타고 이쪽으로 흐름이 넘어올 텐데. 임성은 로진 가루로 범벅 된 손으로 모자챙을 매만지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저 유니폼은…….
몇 명 없는 썰렁한 관중석에 주강고 유니폼을 입은 야구 애들이 앉아 있었다. 하필 투수 정면이라 보기 싫어도 보였다. 지난 3년간 이리저리 오가며 익힌 얼굴들 사이로 유난히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체격이 좋은 야구부원들 사이에서도 단연 튀어 시선이 한 번 더 갔다.
“이치연.”
생각할 틈도 없이 이름이 튀어나왔다.
굳이 주강고 경기 결과는 찾아보지 않았는데, 저기 와 있는 걸 보니 오늘 경기에서 이긴 모양이었다. 준결승에 진출했겠네.
이치연을 보는 순간, 문득 며칠 전에 본 제 리포팅이 떠올랐다.
선유고등학교 좌완투수 임성.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슬슬 폼이 올라오지 않으면 위험’ ‘도태되기 전에’
아직 제대로 보여 준 것도 없는데, 도태는 무슨!
임성은 이를 악물며 공을 던졌다. 하지만 공은 존을 크게 벗어나며 볼로 판정이 됐다. 스트라이크로 확신했던 공이 볼로 판정됐을 때보다 속이 쓰렸다.
“후.”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손등으로 닦고 다시 한번 공을 던졌다.
“볼.”
세 번 연속 볼 판정을 받자 지용우가 한 손을 들어 타임 요청을 했다. 임성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지용우을 보며 목구멍에 꽉 찬 숨을 들썩였다.
“주장, 이번 이닝 꼭 잡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 진짜 죽어요.”
누구에게? 감독이나 코치? 그게 아니면 양민성? 되묻기도 전에 지용우가 돌아섰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응시했다.
몇 번째인지 모르는 한숨을 또 한 번 뱉어 내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팔이 뻗어 나와 임성의 손을 덥석 쥐었다.
살짝 미지근한 온기가 손등을 감싸고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 김희도? 언제 왔어?”
“손이 차갑네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던지세요. 제가 잡겠습니다.”
표정만큼이나 침착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래. 고맙다.”
‘약속’을 제외하면, 김희도가 먼저 손을 내민 건 처음이었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굳이 꼽자면 고마웠다. 나름 긴장을 풀어 주려는 모습이.
목구멍을 메운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고 숨쉬기가 좀 편해졌다. 임성은 글러브를 끼지 않은 손으로 모자를 눌러쓴 김희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얼른 네 자리로 돌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김희도를 보다가 포수와 마주 보고 섰다.
그래. 최악의 경우 얻어맞기밖에 더 하겠냐.
어금니를 꽉 깨물며 뒤로 젖혔던 팔을 앞으로 쏘듯이 뻗었다.
직구에 가깝게 뻗어 가던 공은 타자가 배트를 내기 직전 옆으로 꺾였다. 퉁. 배트에 정확히 맞은 공이 빠르게 날아갔다.
안타인가, 1루를 향해 뛰는 타자와 공을 번갈아 보는데, 그 순간 김희도가 팔을 높게 뻗어 허공에 뜬 공을 잡았다.
“아웃!”
수비의 슈퍼 캐치가 자칫 만루가 될 뻔한 위기 상황을 넘겼다.
하, 하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김희도를 향해 엄지를 들어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간신히 고비를 넘기나 했더니, 다음 타자는 하필 4번 타자였다. 임성은 배트를 흔들며 등장하는 백승고 4번 타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번 대회 좌완을 상대로 무려 4할이 넘는다고 했던가? 팀 내에서 가장 강한 선수를 잡으면 이번 경기도 무사히 잘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막 공을 쥐는 찰나, 타임을 외친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왔다. 선수나 코치가 아닌 감독이 직접 지시를 내리러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 긴장이 됐다.
감독은 백승고 4번 타자를 힐끔 보더니, 임성에게만 들릴 정도로 얼굴을 바짝 붙였다.
“사구 던져라.”
“예?”
그냥 거르는 고의사구도 아니고, 공을 몸에 맞추라고? 프로 야구에서도 지탄 받을 일을 지금 하라는 건가. 당황스러운 주문에 멍하게 있던 것도 잠시, 임성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감독님. 그건…….”
“가급적이면 옆구리나 허벅지를 노려. 그럼 다음 타순도 못 나오겠지.”
감독은 한쪽 다리를 살짝 들며 자세를 취하는 4번 타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승부 하겠습니다. 잡을 수 있습니다.”
“야, 쟤 좌완 킬러인 거 몰라? 괜히 버팅기다가 홈런이라도 처맞으면 바로 3점 헌납이다. 주장이라는 놈이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면 어쩌냐?”
감독의 검지 끝으로 임성의 옆머리를 툭툭 쳤다. 임성의 고개가 감독의 손짓에 따라 밀렸다.
“내가 중고교 감독만 7년째다. 그동안 너 같은 새끼 얼마나 많이 봤을 것 같냐? 아무것도 아닌 놈이 혼자만의 신념이랍시고 경기를 망친다니까.”
“…….”
“잘하자. 임성.”
감독은 심판을 의식한 듯 웃는 얼굴로 임성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주변에서 본다면 선수를 독려하는 것으로 보일 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운드에 홀로 남은 임성이 이를 꽉 깨물었다. 입술 안쪽 여린 살점이 치아에 짓이겨지며 혀끝에서 비린 쇠 맛이 느껴졌다.
공에 잘못 맞기라도 하면 바로 시즌 아웃이었다. 후반기 주말리그를 비롯한 대통령배, 협회장기 등 전국 대회가 줄줄이 남은 3학년에겐 치명적이었다.
그걸 지금 내 손으로 하라고? 얼마나 감독에게 신뢰를 못 줬으면 저런 말을 하지? 발을 디디고 있는 마운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덜미에서 흐른 땀이 유니폼을 흠뻑 적셨다. 기분 나쁜 끈적임이었다.
임성은 젖혔던 팔을 앞으로 내던지며 힘껏 공을 뿌렸다.
“볼!”
임성은 더그아웃 쪽은 아예 보지 않고 연달아 공을 던졌다. 빨리 타자를 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은 일정하던 팔 각도를 들쑥날쑥하게 만들었다.
볼, 볼. 연이어 던진 공도 포수의 미트를 크게 벗어나며 결국 포볼이 선언됐다.
배트를 던진 4번 타자가 걸어 나갔고, 모든 베이스에 주자가 찼다. 투 아웃 만루였다.
초반에 잠시 흔들렸으나 나름 호쾌하던 투구 리듬은 그것을 기점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혹시라도 선수를 맞힐까 봐 힘을 주고 던지다 보니 어깨와 팔이 무거워졌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작년 경기 도중, 팔꿈치 통증을 느끼고 교체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감독이 부임하고 임성은 매일같이 마운드에 섰었다.
학교 간의 연습 경기에 투구 수 제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임성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연신 공을 던져야 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팔꿈치에 이상이 생긴 뒤였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다. 그때 팔꿈치 후방 염증 진단을 받았다. 뼈나 인대의 문제가 아니라 다행인 한편,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괜찮아. 모두 지난 일이야. 병원에서도 이미 나았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자.”
임성은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하며 공을 던졌다.
아, 실투다. 얻어맞겠구나. 공이 손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따악! 빠르게 날아간 공은 예상대로 훌쩍 날아올라 펜스를 맞고 떨어졌다. 임성은 상대 팀 선수의 스파이크 끝에서 먼지가 날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봤다.
“와아아아!”
더그아웃에 모여 있던 백승고 선수들이 두 손을 번쩍 들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짝. 손바닥이 맞붙는 소리가 울렸다.
만루 홈런을 맞았을 때보다 더한 상실감이 손끝을 무겁게 휘감았다.
“김영산 올라가고 임성 너는 당장 이리 와.”
감독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울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강판당한 임성은 어깨를 식히지도 못하고 벤치에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숨을 뱉어 냈음에도 여전히 가쁘게 흩어졌다.
“형, 신경 쓰지…….”
“괜찮아, 예준아. 신경 안 써.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았나 보다.”
조예준은 경기 도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임성을 형이라고 불렀다. 팀의 에이스이자 주장인 임성에게 지키던 나름의 불문율도 떠올리지 못했을 정도로 그의 상태가 불안해 보였다.
여기서 대화를 더 이어 나갈지,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 할지 고민하던 조예준은 결국 한숨과 함께 자리를 떴다.
얼굴을 덮고 있는 손바닥과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데드볼은 던지지 않는다. 그 행동에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 뒤 연속으로 얻어맞은 건 타격이 있었다. 순식간에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만큼.
선유고는 정의영과 김희도가 안타를 때리며 추격의 기회를 잡았지만, 점수를 내지 못했다. 9회 말, 득점권에 나갔던 주자가 어이없는 주루사를 당하며 그나마 남았던 희망도 사라졌다.
선유고등학교 패배.
우승 전력 중 하나로 꼽히던 선유고는 상대 학교의 맹공에 맥없이 무너지며 8강에서 패퇴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라운드에 일렬로 선 선수들이 악수를 나눴다.
“임성이 마운드에 올라와서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요. 괜히 쫄았어요.”
백승고 선수가 제 팀원에게 말했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본의 아니게 들렸다.
“언제 적 임성이야. 쟤 작년 가을부터 완전 맛탱이 간 거 몰라? 청대에서 개털려서 조기 강판 당했잖아. 구속 떨어진 건 알았는데, 오늘은 제구까지 이상하네.”
“진짜요? 원래 1차로 거론됐잖아요.”
“확실히 2학년 초반엔 이치연이랑 투 탑으로 꼽히긴 했다. 지금은 이치연이랑 비교하는 자체가 이치연에게 미안할 정도로 폼이 떨어졌고.”
“고3병 온 건가? 고3 때 갈피 못 잡고 컨디션 무너지는 거요.”
임성은 등 뒤에서 수군대는 말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관중석을 쳐다봤다. 주강고 야구부원들이 각자 짐을 챙겨 구장을 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이치연이 뒤돌았고, 피할 틈도 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학교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힌 점퍼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반쯤 내리뜬 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종종 있는 패배임에도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공기가 아이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미안하다. 변명할 여지도 없는 투구였어.”
임성은 옆자리에 앉은 김희도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포볼로 주자를 내보낸 것도 모자라 장타까지 허용한 주제에 나만 믿으라고 소리치다니. 창피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늘 안타 못 친 사람 중에 선배에게 사과한 사람 있어요?”
복잡한 얼굴로 창 너머의 풍경을 보던 임성이 고개를 돌렸다.
“없죠? 아무도 안 하는 걸 선배는 왜 합니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설마 위로해 준 건가. 그러고 보니 시합 도중에도 신경 쓰지 말고 던지라는 말도 했었지. 실제로 말이 꽤 도움이 됐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독이 데드볼을 주문하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아니, 이것도 결과론일 뿐이었다. 이겨 내지 못한 건 나니까.
“…….”
임성은 눈을 감은 김희도를 보다가 왼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아프지 않아. 시합 내내 머릿속을 휘젓던 팔꿈치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숨을 길게 내뱉었다.
* * *
감독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날아온 글러브가 광대와 턱을 치고 툭 떨어졌다. 손등으로 따끔한 입술을 닦자 피가 묻어 나왔다. 딱딱한 가죽 부분이 입술을 스치며 찢어진 것이었다.
“너 이 새끼, 내 말이 아주 장난 같지? 어디서 개가 짖나 싶어?”
임성은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감독의 폭언을 묵묵히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긴 했어도 감독의 작전을 무시한 게 맞았으므로.
“오늘 경기 네가 말아먹은 거 알아 몰라? 내 말 안 듣고 멋대로 하다가 점수 내줬잖아. 네가 그러고도 투수냐? 같잖은 새끼.”
감독은 여전히 분노가 가질 않는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임성에게 삿대질을 했다. 두툼한 손가락이 눈을 찌를 듯 다가왔다. 수위 높은 발언은 이내 입에 담지 못할 쌍욕으로 바뀌었다.
“1학년 때 공 좀 던졌다고 벌써 프로라도 된 것 같냐? 인마. 너보다 잘 던지는 애들 널리고 널렸다. 그런 애들도 감독 말은 꼬박꼬박 듣는데, 네가 뭐라고 멋대로 행동해?”
“죄송합니다.”
감독이 왼손으로 임성의 옆머리와 뺨을 툭툭 치다가 냅다 후려쳤다.
뻑! 프로 시절 구속이 빠르기로 유명했던 감독은 은퇴한 지 꽤 됐음에도 여전히 손힘이 좋았다. 제대로 얻어맞은 뺨이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학교에서 지원받아서 하는 놈이 좆대로 굴다가 점수를 내주면 되겠냐. 성아, 넌 민성이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따지고 보면 양민성이 볼 질을 연발하다 주자를 내보낸 것인데도 감독은 교묘하게 임성을 탓했다. 마치 자신 때문에 양민성이 피해를 받은 것처럼.
임성은 시선을 떨군 채 감독의 신발을 응시했다.
털썩. 가죽 소파가 내려앉은 소리가 들리더니 엇비슷하던 눈높이가 한참이나 낮아졌다. 소파에 앉은 감독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더니 불을 붙였다. 따갑고 매캐한 연기가 퍼져 나갔다.
“이번에 민성이 어머님이 에어컨 해 주셨다. 배트랑 글로브도 새로 싹 교체한 거 알지? 너희들이 먹고 생활하는 것도 다 학부모회 도움이 있어서야. 너처럼 회비도 안 내는 애들은 더욱더 감사해야지.”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말곤 할 게 없었다. 감독은 파랗게 멍들기 시작하는 뺨을 보며 혀를 찼다.
1학년과 2학년 초까지 야구부를 맡았던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면서, 지금 감독이 부임했다. 당시 학부모 회장이던 양민성 어머니의 입김이라는 소문이 잠깐 돌았었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성적이 좋지 않던 양민성이 뜬금없이 선발로 등판한 것도, 임성이 시도 때도 없이 갈리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임성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감독에게 쌍욕을 듣고 풀려났다. 감독실 문을 닫으며 나오던 임성은 복도에 서 있는 김희도를 보고 멈칫했다.
“입술 왜 그래요? 다쳤습니까?”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찢긴 게 분명한데 별 게 아니야?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들은 김희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감독님 보러 온 거야? 지금은 많이 예민하시니까 조금 있다가 들어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팔이 붙잡혔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임성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없으면 먼저 간다. 이따 부실에서 보자.”
대답 없는 김희도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미소 지었다.
* * *
황금사자기 우승 트로피는 주강고등학교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주강고는 작년 대통령배부터 시작해 전반기 주말리그 서울 B조 우승, 황금사자기까지 총 3연패(連霸)를 달성했다.
“전국 대회 결승도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시시해요.”
두 사람은 현재 감독의 허락하에 황금사자기 결승전을 보러 왔다.
선발로 등판한 이치연은 6회까지 책임지며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은 호투를 펼쳤다. 스카우터 몇몇은 그의 투구를 주의 깊게 보다가 수첩에 뭔가를 끼적였다.
임성은 경기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느리게 일어섰다. 구장을 나오면서 힐끔 본 이치연은 언론과 인터뷰 중이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 드물게 김희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는 사람이죠? 주강고 선발 투수.”
“어? 으음. 친구…….”
친구라고 할지 친구였다고 하는 게 맞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이치연 덕분에 야구를 시작하게 됐으니 제겐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였다. 모호하게 말을 하는 임성을 김희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쳐다봤다.
“그보다 진짜 지하철 타도 돼? 택시 타는 게 낫지 않을까?”
“괜찮아요. ……아마도.”
김희도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주말 낮, 지하철은 어디론가 외출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사람들 틈에서 학교까지 돌아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안 되겠다. 그냥 택시 타자.”
김희도를 데리고 출입구로 향하던 중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김희도는 임성의 팔을 붙잡고, 지하철 안으로 무작정 밀어 넣었다.
아직 에어컨을 틀지 않은 지하철 내부는 살짝 텁텁하고 후텁지근했다. 게다가 역마다 사람들이 우격다짐으로 들어오는 통에 안간힘을 쓰고 버텨야 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임성은 사람들을 겨우 헤치고 반대쪽 출입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네 표정 장난 아니야. 엄청 살벌해.”
임성은 김희도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마스크를 좀 더 끌어 올리며 콧등 부분을 손으로 꾹 눌렀다. 익숙해지기도 전에 또다시 지하철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왔다. 점점 식은땀이 맺히는 김희도의 이마를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서 토하면 안 돼.”
임성은 김희도를 의자와 문 사이 구석에 몰아넣은 뒤, 그와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한 손으론 지지대를, 다른 손으론 벽을 짚은 채 꾹꾹 미는 사람들을 온몸으로 막았다.
아무리 주말이라 해도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너무 붐비는 거 아닌가? 어디 주변에서 행사라도 열렸나.
“이제 네 코스 남았다. 다 와 가니까 조금만 참아. 정 힘들면…… 양, 양이라도 세라.”
“갑자기 여기서 양이 왜 나와요?”
임성의 키가 조금 더 컸지만, 거의 엇비슷했기에 금방이라도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웠다. 하필 그때 가방을 멘 남자가 몸을 움직였고, 거북이 등딱지처럼 크고 딱딱한 가방이 임성의 등을 퍽 쳤다.
“윽.”
억지로 버티고 있던 팔이 꺾이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임성은 다시 공간을 확보하려 했지만, 이미 사람들로 점령당한 후였다. 의도치 않게 김희도와 마주 안은 자세가 됐다.
웃통 까고 껴안은 적도 많은데, 이쯤은 괜찮겠지? 예상치 못한 사고였잖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입을 떼는데, 문득 붉게 달아오른 귀가 보였다. 다른 부분이 창백하리만큼 하얘서 더욱 도드라졌다.
“다음 역에 내릴래?”
“아니요.”
기분 탓인지 김희도의 목소리가 갈라진 것 같았다.
하긴, 지금 쟤가 제정신이겠냐. 김희도가 뭐라 말하든 이번에야말로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등과 뒷머리를 감싸는데, 갑자기 몸이 휙 돌아갔다.
어어, 어라? 임성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이 구석에 몰린 후였다. 김희도는 양팔로 임성의 얼굴 양옆을 짚으며 공간을 만들었다.
오늘 결승전을 보며 느꼈던 허무함을 날려 버릴 정도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야, 야. 뭐 해?”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안 하기는. 너 지금 다른 사람들이랑 마구마구 닿는 중이라고. 그와 자리를 바꾸려고 몸을 비틀자, 김희도가 상체를 바짝 붙이며 “움직이지 마세요.” 하고 속삭였다.
“어, 그…… 래.”
안 움직일게. 그러니까 너도 말하지 마. 어색하게 대답하고 나서 시선을 허공 어디 쯤에 어색하게 뒀다. 바로 눈앞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척했다.
『여기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안타가 터집니다. 벼랑 끝의 끝에 내몰렸던 유니콘즈. 김이설의 적시타로 기사회생합니다. 경기가 이렇게 돌아가네요. 마지막까지 승부를 알 수 없는 게 야구의 매력이지요. 9회 말 김이설이 번개 같은 적시타를 터트리며 연장전에 돌입합니다.』
지하철 벽에 걸린 한의원 광고를 보던 임성은 소리의 근원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바로 앞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가 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었다. 만원 지하철에서 매너 없게 이어폰도 안 끼고 동영상을 본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선이 자연스럽게 향했다.
9회 말에 동점을 터트리고 시원하게 웃는 김이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화면이 넘어가며, 이번에는 우측 관중석 한가운데 떨어지는 홈런이 나왔다. 끝내기 홈런!
그라운드를 돌아 홈플레이트에 도착한 김이설이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캐스터가 웃으며 멘트를 이어 갔다.
“대단하네.”
실력이든 정신력이든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런 대단한 사람도 예전엔 고민하고, 흔들리기도 했을까.
“딱히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저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거 아니에요?”
저번부터 느꼈지만, 김희도는 김이설 선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같은 좌타자에다가 타격 폼도 비슷해서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나?
“주강고 투수든, 김이설이든. 내가 질 것 같아요?”
그런 뜻으로 쳐다본 건 아닌데, 그렇게 느꼈는지 김희도가 퍽 심각하게 말했다.
하하 웃은 임성은 그의 미간에 진 주름을 장난스럽게 눌렀다.
* * *
황금사자기가 끝났음에도 야구부 아이들은 쉬지 못했다. 당장 열흘 뒤 후반기 주말리그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1차 지명은 거의 물 건너갔다고 해도 9월에 있을 신인 드래프트에 뽑히려면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 올리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보여 줘야 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져 굳은살이 될 때까지 공을 던지고, 또 배트를 휘둘렀다. 이렇게 단조로우면서 힘든 일상이 또 있을까?
지독하리만큼 많은 훈련량을 견디지 못한 1학년 두 명이 더 이탈했다.
미련 없이 떠날 것 같던 김희도는 끈질기게 훈련에 참여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무더운 날에도 여전히 마스크를 끼고.
처음엔 이상한 놈 보듯 하던 아이들도 이젠 익숙해졌는지 아무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 죽겠다. 땀이 줄줄 흐르네.”
주어진 바퀴 수를 다 채우고 나니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리틀 야구단을 시작으로 벌써 몇 년째 하는 일임에도 여전히 힘들었다.
“좀 쉬자.”
맨 앞에서 달리며 아이들을 통솔하던 임성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훈련장으로 향했다.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온 아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힘들다, 토할 것 같다, 미치겠다. 이젠 저런 말이 나오지 않으면 섭섭할 정도였다.
“물 마실래요?”
“부탁할게.”
김희도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 임성이 연습복 상의와 언더 티를 훌렁 벗었다. 얼굴을 비롯한 목, 가슴과 배 할 것 없이 온통 땀으로 젖어 찜찜했다. 뭉쳐 쥔 연습복으로 땀을 대충 닦았다. 수건을 목에 건 조예준이 어슬렁대며 다가왔다.
“이제 스트레칭 할 거죠? 도와줄게요.”
“오케이. 다음은 내가 해 줄게.”
양쪽 다리를 활짝 벌린 임성이 배와 가슴을 바닥에 딱 붙였다. 그 상태로 팔을 앞으로 쭉 뻗자 조예준이 뒤에서 어깨를 누르는 게 느껴졌다.
“으으.”
달릴 때, 보통 하체를 많이 쓴다고 생각하지만, 허리와 팔도 만만치 않게 힘이 들어갔다. 짧은 시간에 근육을 많이 사용한 야구 선수들은 등허리와 어깨를 꼭 풀어야 했다.
“아이고. 힘들다.”
“주장, 요새 빠지신 거 아닙니까? 유연성이 예전만 못하신데요?”
“그러게. 나이 들었나 보다.”
조예준의 농담을 농담으로 맞받아치며 웃었다.
“조금 더 누를게요. 타이밍에 맞춰 천천히 호흡하세요.”
임성 뒤에 선 조예준은 그에게 거의 올라타다시피 하며 양쪽 어깨를 꾹 눌렀다. 가뜩이나 바닥에 눌렸던 상체가 더욱 밀착되며 손이 앞으로 쭉 뻗어 갔다.
“지금 뭐 합니까?”
살살 좀 하라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날 선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임성의 어깨를 풀던 조예준도, 당사자도. 심지어 잡담하던 부원들까지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저 멀리서 심각한 표정을 한 김희도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생수를 바닥에 패대기치듯 내려놓고선 임성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어어?”
마치 잘 익은 무가 뽑히듯 일으켜 세워진 임성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조예준 역시 지금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지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김희도는 두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관심 없는 듯, 혹은 상관없는 것처럼 제 연습복을 벗어 임성의 어깨에 둘렀다. 살짝 뜨거운, 땀에 젖은 축축한 옷이 맨살에 닿았다. 임성은 제 어깨를 덮은 옷과 김희도를 번갈아 봤다.
“옷을 왜 벗어요.”
“어?”
그럼 어디서 벗어야 해? 누가 들으면 상의 탈의가 아니라 홀딱 벗고 돌아다닌 줄 알겠다. 게다가 여긴 야구부 애들밖에 없는 실내 훈련장이잖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는 사이 김희도가 손을 붙잡고 훈련장을 벗어났다.
여러 사람이 내뱉는 숨이 섞인 공간을 벗어나자 여름 공기가 확 끼쳐 왔다. 신선한 공기를 맡자 확실히 쾌적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해소되지 않은 의문은 존재했다.
“지금 왜 이러는지 말해 줄 사람?”
“…….”
“그럼 지금 어디 가는지 알려 줄 사람은?”
“화장실.”
“이야. 우리 화장실도 같이 가는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승격됐네.”
일부러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도 김희도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도대체 어디에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으니 할 말도 없었다.
말없이 걷기를 몇 분, 김희도는 화장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임성을 밀어 넣었다.
입을 열기도 전에 높은 체온이 온몸을 감쌌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김희도의 옷이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우려는 시도는 등과 허리를 휘감은 손 때문에 무산됐다. “네 옷 떨어졌어.”
“그냥 놔둬요.”
훅, 후우.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처음엔 음미하듯이 느리고 천천히, 그러나 점점 빨라지다가 마지막에는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거칠어졌다. 열기를 품은 입술이 목덜미 부근을 비비듯이 꾹 눌러 댔다.
아무 의미 없는 걸 알아도 한 번씩 민망해진단 말이야.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게 좋을지, 마주 안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김희도의 허리를 툭툭 쳤다.
처음엔 단순히 김희도의 기분을 풀 의도였는데 손바닥에 착 감기는 근육 모양이며 감촉의 느낌이 좋아 계속 더듬게 됐다.
임성은 손가락을 미끄러트려 살갗을 천천히 덧그렸다.
동시에 뜨거운 입술이 제 목을 따라 올라오더니 귀 끝을 깨물었다. 아. 이번에는 김희도가 아닌 자신의 숨이 급하게 넘어갔다. 운동화 속의 발가락이 정처 없이 꼼지락 움직였다.
“복수 하는 거야?”
임성이 상체를 비틀며 손을 내리자 김희도가 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했다. 임성은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안고 다른 손으로 옆구리를 문지르듯 훑었다.
하아. 이번에는 목 안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김희도의 근육을 확인하느라 정신없었던 임성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손을 움직였다.
확실히 처음 만졌을 때보다 체격이 단단해졌다. 역시 멋진 몸이야.
“뭐 합니까…….”
“응? 어, 아아. 너 몸 진짜 좋다. 불필요한 근육은 없는 것 같아. 혹시 따로 비결 있냐?”
“아니요. 그냥.”
쭉 뻗은 척추 기립근과 그 주변 근육을 확인하듯 쓰다듬자 김희도가 쭈뼛쭈뼛 물러섰다. 이번에는 임성이 눈을 빛내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건 그냥 만들어진 수준이 아니잖아. 저번에 내 목 물어뜯은 대가로 네 몸 만지게 해 준댔지? 그거 지금 쓸게. 유니폼 좀 벗어 봐.”
“혹시 눈치 없다는 말 안 들어요?”
“나? 눈치 없냐는 말 안 듣냐고?”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오히려 빠르다고 하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김희도의 말뜻을 유추하다가 손을 내렸다.
“오늘은 별로냐? 다음에 할까?”
“누가 지금 그걸 말하는…… 됐습니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뭘 하는 건지. 김희도는 상기된 채 말하는 임성을 빤히 보다가 화장실을 나갔다.
“지금 근육 확인 안 한 거다?”
아직 기회 남았다고. 어필하는 임성을 보며 김희도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없는 척하는 게 아닐까?
“맘대로 생각하세요.”
화장실을 나와 훈련장으로 복귀하자 캐치볼 중인 조예준이 보였다. 그는 나란히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분노의 손가락질을 했다. 제법 거리가 멀었는데도 다 들렸다.
“야, 김희도! 싸가지 없는 새끼야.”
워워. 임성은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오려는 조예준을 진정시키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한 듯이 김희도가 따라와 의자를 가리켰다.
“아까 스트레칭 다 못 했죠? 여기 앉으세요.”
이미 그의 마사지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냉큼 앉았다. 야구 선수치고도 큰 손바닥이 목 뒤를 넉넉히 감싸더니 어깨와 이어지는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흐음. 음.”
“아파요?”
“견딜 만해.”
“힘 빼야 덜 아파요. 천천히 호흡하고. 몸에 힘 풀어요. 그래야 내가 더 세게 해 주죠.”
다소 강한 아귀힘과 다르게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여전히 거침없는, 그러나 섬세한 손길에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여기, 기분 좋죠?”
엄지 손끝이 귀 아래쪽을 꾹 눌렀다. 아으. 시원하다.
“마사지는 내가 해 준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조예준이 만지게 둬요?”
“너만 시키는 것도 미안하고. 원래 예준이랑 서로 해 줬거든.”
“그건 그때고. 지금은 나랑 짝이잖아요.”
“그래. 짜, 짝.”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여전히 낯간지러운 호칭에 임성이 콧등을 찡긋거렸다. 진지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하여튼 신기했다.
“어? 김희도, 마사지할 줄 알아? 그럼 나도 좀 해 주라.”
두 사람 근처에서 스윙을 하던 박종열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김희도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걸 봤음에도 개의치 않고 땀내를 폴폴 풍기며 털썩 주저앉았다.
저리 꺼져. 김희도가 입을 떼려는 순간, 임성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해 줘.”
붙잡고 있는 손이 움찔 떨렸다.
그는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뱉고선 마스크를 귀에 걸었다. 그리고 임성을 제 바로 옆에 세우며 말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세요. 나한테서 떨어지면 어떻게 할지 나도 몰라요.”
묘하게 협박 섞인 목소리에 임성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하여 마사지하는 두 사람을 멀뚱히 지켜보는 묘한 상황이 됐다.
김희도는 끝까지 내켜 하지 않는 얼굴로 마치 더러운 것을 집듯이 엄지와 검지로 박종열의 어깨를 슬쩍 짚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꼬리가 불쾌하게 구겨졌다.
“야야. 간지럽히냐? 힘 빡빡 주고 제대로 좀 해라.”
박종열이 툭 내뱉었다. 김희도는 임성을 힐끔 쳐다보고선 박종열의 어깨를 꽉 잡았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아주 꽈악.
“악, 아악! 야, 김희도. 미친놈아. 소, 손 놔! 빨리. 악!”
방심하고 있던 박종열이 제 어깨를 짚은 손을 마구 쳐 내며 몸을 비틀었다.
으아. 진짜 아프겠다. 박종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김희도는 끝까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뭉친 근육을 풀었…… 아니 쥐어짰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손이 떨어져 나가자 박종열이 숨을 들썩였다. 그의 눈엔 눈물이 찔끔 고여 있었다.
“야. 임성. 내 목 제대로 붙어 있냐? 체감상 떨어져 나간 게 확실한 것 같거든.”
“기대에 어긋나서 미안하지만, 잘 붙어 있어.”
그제야 박종열이 넋 나간 얼굴로 제 목을 더듬었다. 다행히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와. 이 새끼 원래 이상한 놈인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또라이잖아.”
“적당히 풀었습니다. 이제 스스로 주무르면 됩니다.”
“그게 적당히 푼 거냐?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데?”
김희도는 박종열이 경악하든 말든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몇 번이나 벅벅 닦아 내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등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했다. “손 이리 줘.”
임성은 물티슈로 김희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꼼꼼히 닦았다.
“이제 좀 괜찮지?”
김희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야, 임성. 이치연 인터뷰 올라온 거 봤냐?”
남들은 불금이다 뭐다 잔뜩 신났지만, 야구부원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훈련장에 모였다. 후반기 주말리그를 딱 일주일 앞둔, 금요일 저녁이었다.
익숙하지만, 껄끄러운 이름에 임성이 일지를 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정의영이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슥슥 움직이더니 입을 열었다.
“유니콘즈 1차 지명 유력, 주강고 우완투수 이치연. 현재 고등학생 중 가장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선수. 고등학생답지 않은 과감한 투구로 타자를 압도한다. 황사기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본인 적성을 잘 모르는 친구가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못 했다. 만약 그 친구가 이 인터뷰를 본다면 지금이라도 본인의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
“이치연 너랑 같은 리틀 출신 아니냐? 이거 누구 말하는지 알아?”
“글쎄. 연락 안 한 지 오래돼서.”
“주강고 애들이 그러는데 거기 감코가 이치연 엄청 싸고돈대. 벌써부터 플래카드 걸고 난리 났다던데. 투구 수 관리까지 해 준다더라. 지명도 안 했는데 웬 특별 대우냐.”
정의영이 휴대폰을 책상에 휙 내던지며 툴툴댔다. 여기저기서 1차 지명 얘기로 난리 난 걸 보니, 여름이 다가오긴 오나 보다.
“워낙 귀하신 몸이잖아.”
임성은 쓰던 일지를 마무리 지으려 볼펜을 다잡았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펜을 들고 있다가 결국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항상 늦게까지 남아서 훈련하던 임성은 오늘 조예준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집으로 향했다.
“우와아아. 큰오빠다. 큰오빠가 벌써 왔다.”
“큰오빠!”
“우리 공주님들 잘 있었어?”
현관을 열자마자 여동생들이 뛰어와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임성은 한 손에 한 명씩 애들을 안고 거실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넘치게 쌓인 빨래부터 돌리고 밥통을 열었다. 아침에 해 놓은 밥이 하나도 없는 걸 확인하고, 새로 밥을 안쳤다. 그리고 양파와 당근을 꺼내 칼질을 시작했다. 통통통. 나무 도마가 경쾌하게 울렸다.
역시 훈련 좀 하다 올 걸 그랬나? 아니야. 이런 상태로 해 봤자 의미 없는 동작만 반복하다 올 게 뻔했다.
“앗!”
집에서도 정신 사나운 건 똑같네. 임성은 칼에 베여 피가 나기 시작하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 * *
다음 날 아침, 임성은 어제 못한 훈련을 위해 30분 일찍 부실에 도착했다. 하루 사이에 어질러진 부실의 정리를 막 끝냈을 즈음, 김희도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잘 잤냐?”
임성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김희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럭저럭. ……손은 왜 그래요?”
덤덤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튀었다. 문 입구에서 순식간에 임성의 앞까지 온 김희도가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손가락을 슬쩍 구부리자 “좋은 말 할 때 펴요.”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좋은 말이라니, 그럼 안 좋은 말도 있다는 건가? 하릴없는 생각을 하며 반쯤 접었던 손가락을 슬금슬금 펼쳤다.
“다쳤어요?”
김희도의 시선이 반창고가 감긴 손가락에 머물렀다. 왠지 민망한 기분에 손가락 끝을 다시금 구부렸다가 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누르고 펼쳤다.
“별거 아니야.”
“또 별 게 아니라고 말하네요. 선배한테 ‘별일’은 뭐예요, 있긴 합니까?”
딱히 화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자신이 들어도 말투가 꽤 날카로웠다. 김희도는 진정하려 했지만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사실 지금 이것도 많이, 정말 많이 참은 것이었다.
투수에게 손가락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일 잘 아는 건 본인이잖아. 다른 사람 손톱 깨졌을 땐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더니, 정작 자신은 반창고에 피가 밸 정도로 다쳐 놓고선 아무것도 아니래. 김희도는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시며 뒤틀리는 속을 가라앉혔다.
“그건…….”
임성이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됐습니다. 어차피 대답 들을 거라는 생각도 안 했어요. 소독은 했어요?”
“했어.”
“언제요? 제대로 한 거 맞아요? 아니, 여기 앉아 봐요.”
그답지 않게 질문을 빠르게 퍼붓던 김희도는 임성을 끌고 가 자리에 앉혔다. 그 언젠가 임성이 그의 단추를 달아 줬을 때 사용했던 의자였다. 임성의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를 떼어 낸 김희도가 소독약이 묻은 솜을 두드렸다.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라 따갑거나 아프진 않았지만, 벌어진 상처에 뭔가 닿는 느낌이 묘했다. 게다가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김희도라는 것이, 으음. 뭐랄까…….
“그래서 손가락은 왜 이렇게 됐는데요. 별거 아니란 대답 한 번만 더 해 봐요.”
“감자 썰다가 손가락도 같이 썰었어. 요새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선배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김희도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집중하며 대답했다. 훈련이나 경기 도중에도 이 정도로 집중한 표정은 못 본 터라 조금 신기했다. 임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김희도의 얼굴을 관찰했다.
속눈썹이 참 길다. 콧대는 높고 활짝 핀 봉숭아처럼 입술이 발그스름했다. 피부가 어떻게 저렇게 말갛지? 햇볕에 타긴 하나.
그 순간 김희도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눈치를 못 챘는지, 아니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김희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됐어요.”
“고맙다.”
“고마운 거 알면 앞으로 조심해요. 되도록 물에 닿지 말고요.”
시큰둥한 말투 안에는 걱정이 희미하게 배 있어 임성이 살짝 웃었다.
부실에 들어오는 애들마다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를 보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감잔 줄 알고 손가락을 썰었다는 말에 다들 킬킬대며 웃었다.
“손이 재산인 놈이 아주 잘하는 짓이다.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겠냐?”
감독만 빼고.
감독은 임성을 자기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취급을 하며 부원들이 다 있는 곳에서 자존심을 뭉갰다.
“주의하겠습니다.”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내 걱정은 잔소리로 들리나 보다. 훈련 스케줄 정리한 것 갖고 내 방으로 와.”
감독은 한심한 시선으로 임성을 보더니, 다 들리게 혀를 차며 뒤를 돌았다. 김희도는 한숨을 푹 내쉬는 임성을 보다가 점점 멀어지는 감독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 * *
어느새 깊은 어둠으로 물든 밤, 오늘도 고된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평소였다면 러닝 겸 가볍게 뛰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힘도 나지 않아 천천히 걸었다.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공기가 습한 걸 보니 내일 비라도 오려는 모양이다. 네온사인이 내린 거리를 터벅터벅 걷던 임성이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냈다.
「김희도」
번쩍번쩍 빛나는 액정 위에 익숙하고 낯선 이름이 떠 있었다. 그에게 번호를 주긴 했지만, 연락이 오는 건 처음이었다.
[뭐 해요?]
본인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게 너무도 김희도다웠다.
“집에 가고 있지. 거의 다 왔어.”
[그런 것 같네요.]
김희도와의 통화는 처음이라서인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휴대폰이 아니라 직접 말하는 것 같…….
“어?”
깊은 밤이 내려와 어두운 집 앞 화단에 누군가 서 있었다.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는데도 훌쩍 큰 키가 눈에 띄었다.
“왔어요? 생각보다…….”
처음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던 듯 곧장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 “늦었네요.” 하고 말했다. 바로 앞에서 말하는 목소리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여기까진 웬일이냐? 그것보다 용케 찾아왔네.”
김희도가 먼저 전화했단 것도 놀라웠지만, 직접 집까지 찾아온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혹시 긴히 상담할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빠르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면 일이겠죠. 우선 들어가서 말합시다.”
“어딜? 우리 집?”
“여기 선배네 집 말고 뭐가 있습니까? 이대로 돌려보내게요?”
임성은 그에게 떠밀리듯이 현관문을 열어야 했다. 저녁 10시면 꼬박꼬박 잠드는 여동생들은 오늘따라 늦게까지 거실에서 놀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큰오빠아아아아. 온몸으로 반가움을 드러내며 뛰어오던 쌍둥이 3, 4는 임성의 뒤에 선 남자를 보고 살짝 주춤했다. 동글동글 유순한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그때 그 엄청 잘생긴 오빠잖아. 무표정으로 이상한 소릴 하던.
“우리 귀염둥이들. 오늘은 환영 안 해 줘?”
웃음기가 밴 말에 임이림과 임세림이 쭈뼛쭈뼛 다가와 큰오빠의 허리를 수줍게 껴안았다. 역시 큰오빠가 제일 좋아.
“저녁은 먹었어? 작은오빠들은?”
“응. 먹었어.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도 먹고. 작은오빠들은 방에 있어. 그림 같이 그리자니까 게임 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둘이 놀래.”
“작은오빠들 되게 못 됐다. 그치? 숙제는 했어?”
했어! 임이림과 임세림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성은 웃으며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고선 김희도를 돌아봤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전화론 못 할 말이냐?”
가방을 내려놓고 김희도 쪽으로 몸을 트는 것과 동시에 뻗어 나온 손이 임성의 어깨를 감쌌다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집 환영 인사라면서요. 아닙니까?”
허. 김희도의 말뜻을 이해한 것과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어쩐지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목을 쓰다듬는 척 씰룩대는 입을 가렸다.
껴안는 건 여동생들 전용 인사라고. 그리고 환영 인사를 누가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하래.
“어, 그래. 맞아.”
얘는 알면 알수록 귀엽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동생들에게 했던 것처럼 김희도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이제 저녁…… 아니, 내일 아침 만들 거죠?”
“어. 이따 아버지 오셔서 드실 저녁이랑 내일 아침 준비도 해야지.”
임성은 무의식중에 김희도에게 보리차를 내밀었다가, 문득 ‘이런 건 안 마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뒤로 뺐다. 그러나 김희도는 살짝 멀어진 물컵을 가져가 한 번에 들이켰다. 턱이 살짝 들리며 툭 불거진 울대뼈가 두어 번 크게 움직였다.
“야구에 관한 고민이냐, 아니면 개인적인 일?”
난 무엇이든 들어 줄 의향이 있다는 뜻을 담아 팔을 살짝 벌렸다.
“냄비 어디 있어요? 찬장에 있나, 열어 봐도 되죠?”
그러나 김희도는 임성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찬장을 열어 냄비를 꺼냈다. 그리고 물을 반쯤 붓고 가스레인지에 얹은 뒤 불을 켰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뭐해?”
“그 손으로 밥한다고 설치다가 또 손가락 자를까 봐요.”
“할 말 있다고 안했어?
“지금 하고 있잖아요. 김치랑 양파는 어디 있어요? 냉장고 열게요.”
마치 제집처럼, 아니 본인 집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며 김치와 남은 두부를 꺼냈다. 그사이 물이 끓었고, 김희도가 듬성듬성 자른 김치를 냄비 안에 넣었다. 곧 매콤한 냄새가 퍼졌다.
“우리 집 밥을 네가 왜 해? 합숙에서도 질색했으면서.”
“선배네 집 밥하는 거 아닌데. 선배 것만 하고 있어요. 냄비 하나 더 쓸게요.”
그게 그거잖아. 아니, 오히려 이게 더 이상해. 입을 달싹이며 김희도를 봤다. 표정을 보니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알면서 말한 것 같다.
넓적한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린 김희도는 거실에서 가방을 들고 왔다. 검은색 책가방 안쪽을 더듬어다가 마트 로고가 찍힌 봉지를 꺼냈다.
저거 우리 집 근처 마트인데. 놀랄 새도 없이 가래떡과 어묵을 꺼낸 김희도가 냄비에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갑자기 웬 떡이야? 나 오늘따라 엄청 질문하는 것 같네.”
“근처 슈퍼에서 샀습니다. 고추장 어디 있어요?”
“싱크대 옆 선반. 어어, 그거 맞아.”
김희도는 고추장을 크게 푸더니 끓는 물에 살살 풀었다.
좀 도와줄까 싶어 일어섰다가 눌러 앉혀졌다. 결국 임성은 물 한 방울 손에 안 묻히고 김희도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래서 그의 요리 실력이 어땠냐면…… 합숙 때나 김희도의 집에 갔을 때 먹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별로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누군가가 제게 밥을 차려 주는 행동 자체가 처음이었다. 다른 의미로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은혜 갚은 까치? 아니, 까치는 좀 그런가. 그러면 생선을 물어다 준 고양이?
“고맙다. 생각보다 더 감동적이네.”
“네.”
뒷말 없이 한마디로만 답하는 것도 김희도 그 자체였다.
김희도는 답지 않게 머뭇대며 임성의 앞에 앉았다. 팔짱을 낀 팔을 식탁에 올리고 상체를 살짝 내민 모습이 꼭 뭔가를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와, 저번에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다. 너 엄청 실력 늘었구나.”
“지금 국어책 읽어요? 거짓말하는 거 다 티 나거든요.”
“진짜야. 저번 보다 훨씬, 훨씬 괜찮아졌어.”
“그만큼 처음이 최악이었다는 거네요.”
하하. 임성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희도는 밥을 만들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설거지까지 했다. 고무장갑을 끼면 된다고, 내가 하겠다며 만류하는 임성을 거실 소파에 앉혔다.
선배 좋아하는 야구라도 보고 있든가요. 으름장을 놓은 김희도가 주방으로 돌아갔다.
쏴,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에 있는 임성을 주방으로 데려와 옆에 세워 놨다. 승리 토템도 아니고 이게 의미가 있나?
“거기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기만 해요.”
“음. 제자리 뛰기라도 할까?”
땀이라도 나게. 덧붙이며 웃자 반듯하게 뻗은 김희도의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어, 기분 나빴나 보다. 그만 놀려야겠다.
“그러면 더 좋고요.”
김희도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릇을 그냥 놨다가 임성의 말을 듣고 뒤집어엎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집안일에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났다. 남의 귀한 집 아들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나.
“벌써 11시 넘었다. 슬슬 집에 가야지. 너희 집에 가는 버스 11시 30분에 끊겨.”
“……좌완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 의견 좀 듣고 싶어요.”
시계를 곁눈질한 김희도가 뜬금없이 물었다. 여태 야구에 대해 한마디도 않더니,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좌완?”
늘 야구 얘기를 하는 건 자신이었던 터라, 질문이 반갑기만 했다. 임성은 조금 전까지 김희도를 집에 보내려 했다는 것도 잊은 채 잔뜩 신나서 얘기했다.
왼손 투수가 흔치 않아 희소성이 있었던 과거와 다르게 지금은 왼손으로 던지는 선수가 많았다. 얼마 전 리포팅에서도 그 사실을 꼬집지 않았나.
“결국엔 많이 쳐 보는 게 답이지 ……만, 슬라이더는 보통 이렇게 휘어지니까 배트를 더 당기는 게 좋지. 같은 변화구라도 좌타냐 우타냐에 따라 보는 각도가 달라지잖아.”
임성이 손가락으로 휙휙 허공을 그었다. 김희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이 끝날 때 즈음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곤 했다. 하나같이 참신한 질문이라 답변하는 것도 재밌었다.
내친김에 후반기 주말리그에 붙을 학교 주요 투수 특성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이 선수의 구위는 어떻고, 결정구는 이것이다 등등.
“주강고등학교는요?”
“주강고? 음…… 거긴 이번에도 우리랑 찢어졌는데? 그래도 얘기를 해 보면, 아무래도 이치연이 가장 눈에 띄고, 그 외에도 3학년 투수 배성린, 장호윤이 주력이야. 이치연 컨디션 좋을 땐 150도 가뿐히 넘어. 커브가 결정구인데 최근엔 스플리터를 배웠다더라. 솔직히 피지컬도 엄청 좋지. 괜히 올해 전국 최대어겠냐?”
“같은 지역구가 아닌데도 잘 아네요. 친구라고 했었나?”
“이 정도는 누구나 알걸? 아무튼, 후반기도 열심히 해 보자.”
서둘러 이치연 얘기를 마무리하고 시계를 봤다. 어느새 11시 30분이 훌쩍 넘어 자정에 가까웠다. 지금 뛰어가도 버스 막차는 못 타겠다. 아, 김희도는 택시 타고 가려나? “자고 가도 되죠?”
하지만 그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임성은 깜짝 놀라며 김희도를 쳐다봤다.
“상관은 없지만…… 거실에서 자야 하는데? 남자 넷이 잘 만큼 우리 집 방이 넓지 않아.
임성은 여전히 꽉 닫힌 방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선 쌍둥이 1, 2가 게임 중일 것이다. 셋이 자도 좁아서 벽에 붙어 자는 마당에 네 명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동생들과 김희도만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상관없어요. 선배도 거실에서 잘 거잖아요.”
“내가?”
“아니에요?”
“마, 맞아.”
질문이 아닌 확신을 담은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임성이 이불을 펴고 베개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며 잘 곳을 정리하는 사이, 내내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쌍둥이 1, 2가 나왔다. 그들은 김희도를 보고 대뜸 욕설을 내뱉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김희도가 본체만체 무시하자 반대편 손가락도 들어 올렸다.
쟤들이 요새 반항기긴 해도 저렇게 버릇없진 않은데.
“야 이놈들아. 갑자기 욕은 왜 해. 얼른 사과해라. 그리고 양말 아무 데나 벗어 놓지 말고 빨래통에 제대로 넣어 놓으랬잖아.”
“형.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임우가 귀를 후비며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임우. 먹으려면 내일 먹든가.”
“알아서 한다고!”
쾅. 방문이 크게 흔들리며 닫혔다.
남들 다 사춘기라는 중학생 땐 얌전하더니, 최근에 자꾸 부딪혔다. 특히 쌍둥이 1번인 임우와는 거의 하루에 한 번꼴로 싸우는 것 같았다.
임성이 한숨을 내쉬자 김희도가 옆으로 다가와 “황용철 투구 분석 보실래요? 체인지업 그립까지 자세히 설명돼 있어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액정에 ‘U’가 새겨진 모자를 쓴 황용철이 보였다. 오래된 영상이라는 걸 증명하듯 모래를 끼얹은 것처럼 화면 색이 뿌옇게 바랬다.
“유니콘즈 황용철?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오던데 어떻게 구했냐?”
“할아버지가 황용철 팬이거든요. 혹시나 해서 박재이 것도 가져왔어요. 저번에 본 것 말고 새로운 거.”
살살 꼬드기듯이 말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럽고 다정했다. 임성은 눈치채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황용철에게 정신을 빼앗겼다.
황용철은 프로 야구 출범 초기에 활약했던 선수로, 당시엔 지금처럼 매체가 발달하지 않아 영상 몇 개만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 제대로 된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김희도가 보여 주는 건 심지어 공식 경기도 아닌 훈련장에서 개인적으로 찍은 것이었다. 비매품 중의 비매품을 쟤가 어떻게 갖고 있을까.
“할아버님 진짜 대단하시다. 야구 엄청 좋아하시는구나.”
임성이 단번에 반색했다. 조금 전 한숨을 내뱉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 *
비눗방울이 터지듯 의식이 어느 순간 확 떠올랐다. 흐리게 열린 시야 속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천장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더라, 잠시 생각하다가 곧 집 거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래. 어제 새벽까지 김희도랑 야구 얘기하다가 잠들었지. 재밌었어.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던 임성은 제 등에 포개진 온기에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평소보다 덥다고 생각했더니, 거의 이불 수준으로 김희도에게 안겨 있었다. 뜨겁고 보드라운 입술이 뒷 목을 지그시 누르고, 다리가 뒤엉켜 있었다. 살짝 민망하지만, 같은 남자끼리 뭐 어떠냐.
지난 합숙 때도 이러더니 안고 자는 거 진짜 좋아하나 보다. 어쩐지 뒷 목을 쓸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새벽 5시 20분. 평소라면 이미 씻고 아침밥까지 차렸을 시간이었다.
“김희도, 일어나. 학교 가야지.”
이름을 부르자 김희도가 눈을 번쩍 떴다.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친 것도 잠시, 그는 다시금 눈을 감으며 허리를 껴안은 손에 힘을 줬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하긴 어제 늦게 자긴 했다. 조금만 더 자게 둘까?
임성은 그 상태로 10분을 더 있다가 다시 김희도를 흔들어 깨웠다.
“씻고 나와.”
눈을 반쯤 감은 채 꾸벅꾸벅 조는 남자를 화장실에 밀어 넣고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 반찬은 소시지로 할까. 냉장고 문을 열고 재료를 꺼내는 중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벌써 다 씻었나 보다. 예상대로 앞머리가 살짝 젖어 이마를 가리고, 뽀얀 얼굴을 한 김희도가 서 있었다.
“이것만 만들고 학교 갈 거야. 슬슬 교복으로 갈아입어.”
여전히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김희도를 보며 말했다. 그는 내켜 하지 않은 얼굴로 셔츠 앞섶을 잡아 코에 갖다 대고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임성은 그가 뭘 하는지 전혀 모른 소시지 끝에 칼집을 냈다. 그리고 적당히 달궈진 프라이팬에 소시지를 넣었다. 문어 모양이 된 소시지를 그릇에 담고 달걀을 깨트렸다. 팔목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달걀 물을 열심히 휘젓고 있는데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김희도가 “지금 가죠.” 하고 말했다.
“달걀말이 만들고. 5분만 기다려.”
“본인 밥은 알아서 좀 먹으라 해요. 초딩 둘이야 그렇다 쳐도 열일곱 살이 이 정도도 못 하면 문제 있는 거 아닌가?”
김희도는 마치 들으라는 듯 닫힌 문을 향해 크게 말했고, 임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김희도의 뜬금없고 기묘한 방문은 일회성이 아닌 사흘 내내 지속됐다. 마지막엔 아예 집으로 함께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떡볶이냐? 맨날 김치찌개 아니면 떡볶이, 떡볶이, 떡볶이! 지겨워 죽겠네.”
어제, 그제, 엊그제에 이어 오늘 또 등장한 떡볶이를 보며 임우가 질색을 했다.
“맛있기만 한데, 왜. 희도는 갈수록 실력이 느네.”
임우의 도발에도 무반응인 김희도를 대신해 임성이 대답했다.
“형, 진심이야? 미각 고장 난 거 아니고?”
“완전 멀쩡하다.”
김희도가 만든 떡볶이는 빈말로도 맛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떡이 하나도 익지 않은 데다 고추장찌개 같던 첫날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게다가 손가락 다쳤다고 매일 저녁을 차려 주는 자체가 기특하잖아.
“아 참. 임우. 학원비 입금했다.”
“학원 안 간다고 몇 번을 말해? 필요 없다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밥을 먹던 임우가 탁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놨다.
대체 학원을 왜 안 간다는 건지. 쌍둥이 2번에게 넌지시 이유를 물어봐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여기서 더 말해 봤자 싸움만 날 것 같아 임성은 남은 밥을 묵묵히 먹었다.
“아이스크림 사러 갈 건데, 먹을 사람?”
밥풀 하나 없이 깨끗한 그릇을 개수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쌍둥이 1, 2가 손을 번쩍 들며 나, 나 하고 외쳤다. 쌍둥이들의 주문을 다 받은 임성이 김희도를 돌아봤다.
“너는 뭐 먹을래? 바? 아니면 콘? 특별히 너는 컵까지 인정한다.”
와, 형. 사람 차별하네. 쌍둥이 1, 2가 분개하는 모습을 못 본 척하며 김희도를 응시했다.
“안 먹…… 선배랑 같은 거요.”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던 김희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같이 갈래? 야구 얘기도 하고 바람도 쐬자.”
“아니요.”
“어? ……아, 어. 그래.”
거절당할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임성이 어? 하고 되물었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다가 당황하는 제 모습이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언제부터 쟤가 따라오는 게 당연했다고. 첫 만남을 생각하면 우리 집에서 저녁을 만드는 지금이 더 이상하잖아.
왜 당연히 함께 간다고 생각했지.
임성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의점으로 향하는 시각, 김희도는 아직 물기가 남은 고무장갑을 쌍둥이에게 집어던졌다.
탁. 사이좋게 한 짝씩 고무장갑에 맞은 쌍둥이 1, 2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어이없어하는 표정도 똑같았다.
“밥 처먹었으면 설거지라도 좀 해라. 빈대도 너희보다 낯짝이 있을 거다.”
저 새끼가 또 시비 거네? 왜 맨날 집에 오고 난리야. 임우가 눈을 찌푸렸다.
“우리 형도 아무 말도 안 하는 걸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냐?”
“선배가 안 하니까 내가 하잖아. 너희 형도 고작 열아홉 살이다. 겨우 2년 먼저 태어났다고 선배가 똥오줌까지 닦아 줘야 하냐? 염치라는 게 있으면 똑바로 해.”
적나라한 비난을 들은 임우가 김희도를 노려봤다. 표정이 없어서 사람의 기분을 더욱 더럽게 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던 놈이었다. 왠지 느낌이 쎄하다고. 임우가 두툼한 손으로 김희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임우. 그만해. 상대하지 말고 들어가자.”
옆에서 임설이 말렸지만, 진정하기는커녕 임우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김희도는 멱살이 잡혔음에도 여전히 고요했다. 심드렁한 표정은 어쩐지 살짝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 상대방을 더욱 화나게 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모르니까 이 정도지. 더 알게 되면 가만 안 둘 것 같거든.”
너랑 너. 김희도의 시선이 임우와 임설에게 번갈아 향했다. 하, 임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어이없는 건 똥오줌 못 가리는 너희들이고.”
차갑게 내뱉은 김희도가 제 멱살을 잡고 있는 임우의 손목을 감쌌다. 임우 역시 또래에 비해 체격이 월등히 좋았지만, 타자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악력을 가진 김희도를 이길 수 없었다. 허무하리만큼 쉽게 손을 떼어 낸 김희도는 구겨진 셔츠를 탁탁 털었다.
선배 체취가 밴 옷이 오염됐다. 불쾌해.
“이 새끼가!”
기어이 임우가 팔을 치켜들었다. 이번엔 멱살이 아니라 한 대 칠 기세였다.
“너희 거기서 왜 그러고 있냐. 설마 싸우는 건 아니지?”
일촉즉발의 상황을 종식시킨 건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투를 든 임성이었다. 그는 대치하듯 마주 선 세 사람을 번갈아 봤다. 흐르는 분위기를 보니 대충 어떤 말이 오갔을지 짐작됐다. 결코 좋지 않은 쪽이라는 것도.
“임우.”
“별 게 다 지랄하네.”
임우가 욕을 내뱉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저 자식이. 사춘기고 나발이고 정도껏 해야지.
“형. 그냥 놔둬. 지금 가면 더 안 좋아져.”
금방이라도 임우를 쫓아가려는 임성을 만류한 임설이 김희도를 노려보듯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임성이 한숨을 내뱉으며 뒷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지? 미안하다.”
“선배가 왜 사과해요? 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젓던 김희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임성을 불렀다.
“다른 옷 없어요? 이건 더러워서 못 입겠는데.”
* * *
밤늦게까지 이어진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임성은 김희도가 어제 만들어 놓은 떡볶이를 데웠다. 고추장 떡볶이, 곤약 떡볶이, 간장 조랭이 떡볶이, 오징어와 조개가 듬뿍 들어간 해물 떡볶이 등등 그간 만든 떡볶이만 해도 한 손을 넘어갔다.
왜 맨날 떡볶이만 만들어? 나야 좋지만, 궁금해서. 언젠가 김희도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빤히 쳐다보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추장을 물에 풀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웃다가 남은 떡볶이를 마저 먹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거실에 이불을 깔던 임성이 멈칫했다. 이젠 김희도도 없으니까 굳이 거실에서 자지 않아도 되잖아. 펼쳤던 이불을 다시 접으려다가 말았다.
기왕 깔았으니 오늘은 그냥 자자.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몸을 옆으로 돌리며 창문을 쳐다봤다. 이미 깊은 밤이라 까만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더니, 겨우 나흘 남짓 함께 잤을 뿐인데 왜 이리 허전하냐. 희도는 자고 있으려나. 한 번 연락해 볼까? 휴대폰을 막 집은 순간, 액정 위에 노란 말풍선이 떴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김희도: 잘 자요.
-나: 너도 잘 자. 내일 보자.
웃으며 답장을 보내고 눈을 감았다.
경기 전날엔 대부분 잠을 설치곤 했지만, 이번엔 유난히 더 긴장됐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냐면 투수로 전향한 초반, 만루 홈런을 맞고 역전패를 당했던 때와 비슷했다.
밤새 뒤척이다 보니 새벽이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집을 나섰다.
오늘부터 후반기 주말리그 시작이었다.
첫 시합의 선발 투수는 양민성이었다.
선유고등학교는 1점 차로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상대 팀의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패했을 형편없는 경기력이었다. 경기 내내 똥 씹은 표정을 하던 감독은 아이들, 특히 주장인 임성을 크게 다그쳤다.
“처맞은 투수는 놔두고, 경기에 나가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저러냐?”
조예준은 감독의 분노를 묵묵히 듣고만 있는 임성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다음 날 경기는 1점 차이로 패배했다. 어제와 다르게 이번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친 탓에 분위기는 속절없이 처졌다.
한껏 예민해진 공기 속에서 아이들은 말없이 훈련에만 집중했다.
선유고가 죽 쑤는 동안 이치연을 필두로 한 주강고는 승승장구했다. 아마 야구를 다루는 매체에선 그의 인터뷰가 심심찮게 나왔으며 탈고교급 투수라는 수식어까지 덧붙여졌다.
「주강 고등학교 이치연(18) 154km/h를 던지는 특급 고교생. 유니콘즈 행 유력.」
짧은 평가와 함께 공을 던지는 이치연의 사진이 실렸다.
임성은 이치연의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놨다.
‘이래서 프로에 가겠어? 초등학교 애들도 네 공 치겠다. 느려 터져선.’
어제 감독에게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 * *
선유고등학교의 후반기 주말리그 성적은 총 일곱 경기, 2승 5패로 마무리됐다. 임성이 선유고 야구부에 몸을 담은 이후 가장 최악의 성적이었다.
비록 학교는 하위권으로 끝났지만, 김희도는 전반기에 이어 또다시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다.
아마추어 야구, 특히 고교 야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김희도의 실력과 외모를 언급하는 등 꾸준한 관심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임성은 선발 2회, 불펜 3회, 총 5경기에 등판해 다소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주력인 직구가 흔들리며 변화구도 함께 무너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임성은 훈련을 거르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열심히 움직이려고 했다.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공을 던지고 달리고, 또 던지고, 달리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점령해 허튼 생각이 났으니까.
후반기 왕중왕전이 남아 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지치는 느낌이었다. 왠지 자신의 고교 야구는 이미 끝난 기분이랄까. 아쉬움과 허탈함이 뒤섞인,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불편했다.
“혼자 던지지 말고 저랑 어울려 주세요.”
임성은 턱 끝을 타고 떨어지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한 손엔 글러브, 다른 손엔 야구공을 든 김희도가 서 있었다. 임성은 다시 한번 땀을 닦고 허리를 폈다.
“그럴까? 좀 있으면 자정인데, 집에 안 갔어?”
“누가 혼자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요.”
누가 누구인지 알아챈 임성이 쓰게 웃었다.
“요새 오버 워크 하는 거 아닙니까? 쉬는 시간에도 계속 공 던졌잖아요.”
“알아. 나도 아는데 조절이 안 되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자꾸 불안해져.”
“다 잘하려고 하니까 그렇죠. 하나만 해도 힘든 걸 선배는 다 하려니 생각이 많아지지.”
내가 다 잘하려 해?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늘, 지금까지 해 왔던 거라 스스로조차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허를 찔린 임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희도는 “공 내가 받을게요.” 하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그는 부실에 비치된 포수용 마스크와 보호대를 걸치더니 멀찍이 떨어져 쪼그리고 앉았다. 단순한 캐치볼이 아니라 포수 장비를 걸치고 제대로 공을 받겠다는 뜻이었다.
“힘껏 던져 봐요. 의식하지 말고 그냥 논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당황한 건 임성이었다.
“포수를 갑자기 어떻게 해? 야수가 공 받는 거랑 달라.”
“해 본 적 있어요. 어릴 때지만.”
“어릴 때 언제?”
“초등학교 5학년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포지션별로 다 해 봤거든요.”
초등학교 5학년이면 6년이나 지났잖아.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임성이 고개를 저었지만, 김희도는 굴하지 않고 미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선배. 저 지금 다른 사람 보호구 입어서 토할 것 같거든요. 빨리 던져요.”
“토하지 말고 그냥 벗어. 위험하다니까.”
“어울려 준다면서요. 어서요.”
어울려 준다는 말 안 했거든.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김희도의 고집이 은근히 세다는 건 몇 번의 경험으로 터득했다. 포수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정말 창백해서, 차라리 얼른 던지고 끝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몇 개만이야.”
임성은 실밥 위에 검지와 중지를 올려 공을 쥐고 어깨를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내질렀다. 휭, 날아간 공이 정확히 미트에 안착했다.
파앙! 가죽 글러브와 맞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훈련장을 흔들었다.
“공 좋네요. 이번엔 슬라이더 던져 봐요.”
김희도가 다시 자세를 잡으며 변화구를 주문했다. 예상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공을 받는 모습에 솔직히 좀 놀랐다.
예체능은 재능이 9할이라는 말이 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면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게 됐다.
“괜찮겠어? 쉽지 않을 텐데?”
“지금 힘 빼고 던졌잖아요. 평소처럼 해도 됩니다.”
힘 뺀 거 눈치챘구나. 임성은 다시 한번 공을 던졌다. 곧게 뻗어 가던 둥근 공은 미트 근처에서 각도를 바꿨다. 따악! 처음보다 더 단단한 소리가 울렸다.
“좋습니다. 하나 더.”
따악! 팡. 따악! 직구와 슬라이더가 연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힘을 빼고 던졌어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잡는 건 대단했다.
한두 개만 던지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직구, 슬라이더, 슬라이더, 직구. 이쪽이요, 여기로요. 더 세게요. 지금 타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임성은 마치 게임 스테이지를 깨듯 김희도가 말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던졌다.
한동안 이어지던 투구는 까만 연습복이 젖다 못해 땀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상체를 구부린 임성이 양손을 무릎에 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포수 마스크를 내팽개치듯이 벗은 김희도가 성큼성큼 다가와 숨을 들썩이는 임성을 꽉 끌어안았다. 가슴 보호대를 걸치고 있어 평소와 다르게 딱딱했고, 등에 닿은 손은 뜨거웠다.
“괜찮냐?”
“아니요. 죽을 것 같아요.”
거짓말이 아니라, 보호구에 밴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공을 받는 것 보다 장비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던 기분은 임성의 체취를 들이마시자 천천히 가라앉았다.
위험했다. 아니, 이건 이거대로 위험한가. 김희도는 임성을 더 꽉 껴안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공 잘 받더라. 재능 있는 놈이 센스까지 겸비했어.”
“그래요?”
“제대로 배우면 엄청나겠다. 프로에서도 거포 포수는 귀한데.”
“그래요.”
숨 가쁜 칭찬에도 김희도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오히려 내가 더 흥분한 것 같네. 임성은 김희도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려다가 손이 지저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그러자 김희도가 등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임성의 손을 붙잡아 제 머리에 직접 얹었다.
와……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는데. 한껏 털을 부풀리며 경계하던 고양이가 이제 완전히 곁을 내주면 이런 기분일까? 느낌이 묘했다.
“어땠습니까?”
김희도가 물었다.
“재밌었어.”
우울하던 기분이 말끔히 사라지고 뿌듯함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원 없이, 기분 좋게 던진 적이 언제였더라. 1학년 땐 곧잘 이랬던 것 같은데, 최근엔…… 생각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한참이나 연습 하다가 늦게 부실을 나왔다. 이번에는 임성이 김희도의 집까지 데려다줬다.
“잘 가라. 아, 오늘은 특히 허벅지 꼼꼼하게 풀어. 아니면 내일 난리 날 거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이라 데려다줬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김희도의 집 앞에서 헤어지고 걷는데, 등 뒤로 따라 걷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것도 없이 누군지 짐작됐다.
“왜 따라와?”
“늦었잖아요.”
“늦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오늘 내 공 받는다고 힘들었잖아. 귀찮다고 거르지 말고 밥도 꼭 챙겨 먹어.”
“이 근처 가로등 고장 나서 어두워요. 정류장까지 같이 가요.”
“괜찮아. 여기서 정류장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그럼 내가 안 괜찮은 걸로 하죠.”
“…….”
이건 뭐, 헤어지기 싫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연인도 아니고. 서로 데려다주겠다는 이 상황은 뭐지? 어이없는 듯이 쳐다보자 김희도가 뻔뻔한 얼굴로 냉큼 옆에 섰다.
결국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정류장까지 걷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의외로 여자 친구에게 잘할 것 같아.”
“의외? 게다가 겨우 이걸로요?”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그러면 왠지 더 충격…… 으음, 충격은 좀 그런가, 새롭잖아. 이상형이 어떻게 돼?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늘 야구 관련 얘기만 하다가 이런 말랑말랑한 주제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손으로 턱을 쓸며 생각에 잠긴 김희도를 보는 게 새롭고,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바닥을 보던 김희도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눈이 마주쳐 살짝 당황한 임성과 다르게 그는 퍽 덤덤했다.
“선배는 어떤데요?”
“어, 나? 지금은 야구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틈도 없다. 전국 대회 끝나면 그럴 마음이 들려나.”
그렇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김희도가 다시금 빤히 쳐다봤다.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나? 저도 모르게 뺨을 더듬게 되는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저는 눈치 없고 위태로운 사람이 취향인가 봐요.”
“눈치 없고, 위태로운 사람? ……엄청 특이하네.”
“그러게요. 저도 지금 알았어요.”
기껏해야 외모나 성격 등을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답변이었다.
김희도의 여자 친구라…… 좋아하면 체취도 상관없어지려나?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 * *
임성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연습 경기를 보러 온 스카우터들은 임성이 던지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1학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최상위 수준이었고, 2학년 때도 곧잘 했다. 팔꿈치 부상을 입으며 살짝 주춤한 모습을 보였지만 나름 잘 극복한 것 같았다. 주말리그 초반에는 에이스로서 활약도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헤매는 중이었다. 기본 센스와 잠재력이 있는 선수라는 평도 지금으로선 물음표였다. 지금 제대로 잡아 주지 않으면 이상한 버릇 들 텐데, 선유고 감독 코치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선수들을 꼼꼼히 살피며 수첩에 기록하던 스카우터는 무표정하게 배트를 휘두르는 소년을 살폈다.
깡. 가벼운 스윙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강한 타구가 깔끔하게 뻗어 갔다. 연습 경기인데도 비거리가 상당했다.
김희도. 중학생 때도 나름 이름을 날렸지만, 선유고에 들어온 후 눈에 띄게 실력이 늘었다. 몇몇 스카우터들은 3학년보다 낫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으니.
이제 1학년이라 완전히 속단하기 힘들어도 확실히 탐날 만한 인재였다. 이대로만 쭉 큰다면 2년 뒤엔 전국 최대어가 될지도. 각 구단 스카우터들의 수첩에 김희도의 이름이 제일 위에 적혔으리라.
* * *
후반기 주말리그가 한참인 6월엔 프로 야구 1차 지명이 있었다. 유니콘즈는 다수의 예상대로 주강고 투수 이치연을 뽑았다. 그 외 상일공업고등학교 투수 한세인, 신라고등학교 타자 백도경 등 총 10명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이르게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임성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덤덤한 반응을 보인 당사자보다 주변이 더 실망한 눈치였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괜찮으냐고 묻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1차 발표가 있던 날은 집으로 가는 길이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택시를 탈까, 아주 짧게 고민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학교에서 집까지 8천 원은 족히 나올 텐데, 그 돈이면 동생들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몇 개나 살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임성은 집 근처 놀이터에서 멈춰 섰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각이라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오랜만에 그네를 타 보려는 시도는 허벅지 한쪽도 제대로 안 들어갈 것 같은 그네 크기를 보고 조용히 접었다.
완전 장난감 그네네. 괜히 혼자 머쓱하게 웃고선 벤치에 앉았다.
“…….”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실망한 걸 보니 은근히 기대를 했었나 보다.
노란 가로등 빛이 그려 내는 자신의 그림자를 멍하니 보다가 가방 속을 더듬었다. 둥그런 공을 따라 난 솔기를 손끝으로 더듬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지금 몇 시지? 빨리 집에 가서 빨래도 돌리고 애들 아침에 먹을 밥 준비해야 하는데.
* * *
주말리그에 참여한 학교는 성적이 어떻든 전국 대회인 대통령배와 협회장기 중 하나는 무조건 참가였다. 처참한 성적을 받았던 선유고도 순위에 따라 대통령배에 참가하게 됐다.
아직 본격적인 대회는 시작도 안 했건만, 고교 야구 관계자들은 벌써 주강고를 우승 전력으로 꼽았다.
그사이 기말고사를 치렀고, 김희도는 이번에도 대자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전교에서 놀았단 뜻이었다. 반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임성은 중간고사보다 낮은 성적을 받았다.
기말고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학교는 여름 방학에 들어갔다. 올여름은 예년보다 덥다는 예상을 증명하듯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는 도서관과 학원에 있을 때, 야구부는 땡볕에서 흙과 한 몸이 되어 온종일 굴렀다.
타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도 임성은 흔들렸고, 그때마다 감독의 폭언이 쏟아졌다. 대부분 1차 지명된 투수와의 노골적인 비교였다.
임성뿐 아니라 박종열이나 정의영 등 야수에게도 쓴소리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이번에 결과를 내야 감독직이 연장된다는 소문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쪼아 대는 듯 했다. 그렇게 난리 치던 감독은 양민성에게는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좀 더 해 보자.” 하는 격려를 했다.
“슬럼프는 실력이 있는 애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고, 넌 그저 좀 던졌던 것뿐이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기회를 주는지 알아? 다른 학교 3학년들은 시합 내보내 달라고 난리다. 나처럼 잘 밀어주는 감독 만난 걸 행운으로 생각해야지.”
감독은 혹사를 기회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며 제 앞에 선 임성의 가슴을 꾹꾹 밀었다. 그리곤 쥐 죽은 듯이 침묵하는 부원들을 둘러봤다.
“한두 군데 아프다고 훈련에 빠지는 건 기본이 안 됐다는 증거다. 운동하는 놈들 중 안 아픈 사람 찾기가 더 힘들어. 다들 농땡이 필 생각 하지 말고 죽도록 해. 죽도록.”
그렇게 말한 감독은 양민성이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와 면담한다는 핑계를 대며 감독실로 데려갔다.
불쾌할 정도로 후텁지근한 훈련장이 아니라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 감독실로.
* * *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에 대통령배가 시작됐다. 신인 드래프트 전 마지막 전국 대회로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경기 전부터 전운이 묘하게 감돌았다.
선유고는 1, 2회전에 흔들렸지만,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임성은 구속 저하와 제구 난조 등 컨디션이 평소 같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티 내지 않고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할 만합니까?”
“어. 괜찮아.”
웃으며 한 대답에 김희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더 말하지 않고 몸을 휙 돌렸다.
“다들 수박 먹고 하자. 차가울 때 먹어.”
임성은 학부모회에서 제공한 수박을 잘라 아이들에게 나눠 줬다. 아이들은 씨도 뱉지 않고 수박 껍질까지 먹을 기세로 해치웠다.
정신없이 먹는 애들과 달리 김희도는 반듯하게 잘린 수박을 든 채 주장이 왜 이런 일까지 하는지 물었다. 임성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야, 오늘 주강고 13점 냈단다. 얘네 완전 미쳤다. 왜 이렇게 잘하냐?”
휴식 시간을 틈타 감독 코치 몰래 휴대폰을 하던 정의영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우리 올해 주강고랑 붙은 적 없죠?”
1학년 후배가 물었다.
“없지. 붙었으면 개발라 버렸을 텐데. 너희들도 그 학교랑 붙으면 진짜 미친 듯이 해라. 우승은 못 해도 걔들한텐 지면 안 돼.”
정의영이 뚝뚝 소리 나게 손목을 돌리며 살벌하게 말했다.
꼭 이치연이 아니더라도 주강고와는 예전부터 라이벌로 거론된 적이 많아, 다들 대놓고 신경 썼다. 선배들부터 내려온 전통 아닌 전통이랄까.
토요일에도 훈련은 쉬지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진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선수가 학교에 나와 훈련을 했다.
임성은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고 러닝을 뛰면서 체온을 높였다. 그다음 기구를 사용하지 않은 맨몸 근력 운동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임성은 손가락을 서로 붙였다가 벌리고, 어깨 각도를 조금씩 움직이는 등 여러 방법으로 공을 던졌다.
“오늘 공 좋네요. 조금 더 세게 던져 볼까요? 슬라이더 체크해 봐도 될 것 같고. 어느 쪽이 좋아요?”
“슬라이더 던질게.”
“네. 바깥쪽 코스 괜찮아요?”
“응.”
고개를 끄덕이고 공을 쥔 손을 글러브에 감췄다. 막 다리를 들어 올리며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무거운 것이 등을 후려쳤다. 한껏 긴장했던 자세가 흐트러지며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짝-!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화려한 귀걸이에 화장을 짙게 한 여자가 빠르게 다가와 임성의 뺨을 후려쳤다. 보석을 붙인 기다란 손톱이 살갗을 스치며 뺨에 생채기를 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훈련하고 있던 아이들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두 사람을 봤다.
임성은 여전히 무슨 일인지 모른 채 자신을 때린 여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 사람은 누군데 날 때린 거지. 언뜻 낯이 익은 것 같긴 한데,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너구나. 야구부에 기생하는 애가. 어린 게 어디서 눈깔 똑바로 뜨고 봐?”
짝. 여자가 다시 한번 뺨을 후려쳤다. 임성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 때문에 우리 민성이가 피해를 얼마나 받았는지 알아? 우리 애 프로 못 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우리 민성이.’ 그 한마디로 그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선유고등학교 야구부 학부모회 회장이자 양민성의 어머니.
“저는…….”
입을 떼자 비린 피 맛이 났다. 입술이 터진 건가. 두 번이나 얻어맞은 뺨도 화끈거렸다.
하지만 어깨를 맞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회비도 못 내면 팀에 보탬이라도 돼야지. 너 지난번에도 실점해서 우리 애 자책점 올렸다며? 못하면 그만두든가 왜 남의 애 발목을 잡아?”
우승 후보라는 명성에 비해 선유고의 투수층은 썩 두껍지 못했다. 개중 단연 손꼽히던 임성이 부진하자 에이스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 양민성이 본격적으로 선발로 등판하며 투수 전력은 더더욱 엉망으로 꼬였다.
그러나 양민성의 어머니는 그 모든 원망을 야구부에서 ‘공짜로’ ‘지원받는’ 임성에게 돌렸다. 평소 양민성이 그러했듯.
모기업이 있는 프로 리그와 다르게 고교 야구는 학부모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학부모들은 매 경기 관전은 물론, 연습 경기도 빼먹지 않고 출석했다. 당장 야구부원들이 매일 먹는 아침과 저녁도 학부모들이 돌아가며 만드는 것이었다.
쉬쉬하지만, ‘우리 아이 잘 부탁한다.’라든가 ‘경기에 내보내 달라.’ ‘감독님만 믿는다. 약소하지만 성의로 받아 달라.’ 등의 청탁도 존재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그러냐고? 어느 시대든 암암리에 있는 일이었다.
그런 부탁은 칼같이 차단하고 오직 실력으로 선수를 기용하던 전 감독과 달리 지금 감독은 노골적으로 뒷돈을 요구했다.
임성은 편부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일이 바빠 아들의 야구에 깊이 관여하지 못했다. 몇십만 원에 달하는 부비를 매달 낼 형편이 되지 않아, 대신 야구부의 잡다한 일을 맡았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당사자인 임성이었고, 아이들에게 미안해 가능한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중인데.
임성이 고개를 떨궜다.
“아이고, 회장님. 진정하세요.”
“내 아들 앞길 막지 말고 당장 야구부에서 나가.”
양민성의 엄마는 감독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양민성은 제 엄마를 말리기는커녕 멀거니 선 채 사태를 관망 중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숨죽인 채 눈치만 봤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방에 들어가셔서 차라도 드시죠.”
“내가 야구부에 내는 돈이 얼만데. 감독님, 내가 이러라고 감독실 에어컨까지 바꿔 준 줄 아세요?”
“알죠, 알죠.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민성의 어머니는 그제야 감독의 말에 못 이긴 척 돌아섰다. 땀 냄새를 이기는 지독한 향수 냄새를 남기고서.
두 사람이 사라졌음에도 아이들은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휴우, 숨을 내뱉으며 아이들을 둘러봤다.
“아직 연습 시간 남았어. 하던 거 계속하고 끝난 뒤에 스트레칭 하는 거 잊지 마라.”
“주장.”
조예준이 머뭇대며 다가왔다.
“예준아, 애들 연습하는 거 좀 봐줘. 나 세수 좀 해야겠다.”
돌려 말한 거절에 조예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맙다. 갔다 올게.”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보는 조예준을 지나쳐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놓고 쏟아지는 물을 멍하니 보다가 손바닥에 고인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아.”
생각보다 깊게 긁혔는지 뺨이 따끔댔다. 양손으로 개수대를 짚으며 고개를 들자 물때가 덕지덕지 낀 거울에 뺨이 발갛게 부풀고, 눈 밑이 퀭한 남자가 보였다.
“엄청 피곤해 보이네.”
임성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치 제삼자 대하듯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버텨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머릿속을 채운 불안이 임성을 뒤흔들었다.
이게 아닌가, 나 잘못하고 있는 거야? 하긴, 그따위 성적을 받고 잘한다는 말이 나오겠어? 더 노력해야 하면 되나? 얼마큼? 노력한다고 도달할 수는 있나? 재능이 없는 거였다면? 애초에 이 길이 맞긴 한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임성은 주먹을 꽉 쥐고 세면대를 내리쳤다. 쾅, 한 번. 쾅, 두 번.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치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높게 치켜든 팔을 그대로 내리꽂으려는 순간,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어깨를 꽉 붙들었다.
“지금 뭐 합니까?”
“…….”
“뭐 하냐고 묻잖아.”
김희도가 싸늘하게 말했다.
“생각 정리.”
“무슨 생각 정리를 이따위로 해요.”
“이따위가 잘될 때도 있는 거야.”
임성이 손을 비틀어 빼며 말했다.
“선배. 아까 그 여자…….”
“괜찮아.”
“네?”
“그냥 스친 것뿐이야. 아프지도 않고.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하, 참나. 김희도는 헛웃음을 치며 바닥을 봤다가, 세면대를 치느라 벌게진 손을 보고, 멍이 올라오는 뺨을 응시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굳히고 임성을 똑바로 쳐다봤다.
“선배는 항상 괜찮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임성은 김희도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평소엔 날렵한 턱 근육이 살짝 불거진 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분노를 억누르듯이.
임성이 그를 살피는 사이 순식간에 다가온 김희도가 세면대 양쪽을 짚었다. 세면대와 김희도에게 갇힌 꼴이 된 임성이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김희도가 상체를 숙이자 임성의 허리가 점점 뒤로 꺾였다.
“입술 핥아 봐도 돼요? 예전부터 무슨 맛 날지 궁금했거든요.”
“뭐?”
“못 들었어요? 입술 핥아도 되냐고요. 입술이 싫으면 귀나 어깨도 좋고.”
“너는 지금 상황이 우습냐? 농담할 기분 아니야. 비켜.”
“우습게 보는 건 선배겠죠. 전 누구와 달리 한 번도 농담한 적 없습니다.”
김희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양호실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늘 담담하고 건조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깔보는 것처럼 변했다.
그동안 조예준이나 박종열 외 다수에게서 ‘김희도 진짜 개싸가지다. 쟨 위아래가 없다.’ 등의 얘기를 숱하게 들었지만, 자신에게는 그저 얌전하고 기특한 후배였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배는 원래 자신의 기분이나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잖아요. 가족, 야구부, 감독, 코치. 임성에게 임성은 가장 마지막 아니에요? 누가 어떤 말을 하든지 무조건 수용하고 넘어가잖아요. 그래서 나도 입술 좀 핥겠다는데, 문제 있습니까?”
당돌한 발언에 할 말을 잃었다.
임성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인지가 잘되지 않았다. 현실이 아니라 꿈이 아닐까? “왜. 그것까진 못 해 주겠어요? 이번에는 그 잘난 ‘괜찮아.’가 안되나 봐요.”
“너…….”
“다른 사람들은 선배 멘탈 위한답시고 입 다물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아니거든요.”
조예준을 비롯한 야구부원 대부분이 임성을 좋아하고 따르는 건 알겠다. 오늘 일도 괜히 섣부른 위로를 했다간, 무너질까 봐 걱정됐겠지.
하지만 김희도는 임성을 내버려 두는 것 대신 끌어내는 걸 택했다.
뭐든 다 부수고 무너트리고. 망가지면 제가 데려가면 되는 것이었다.
꼭 ‘야구 선수 임성’이 아니어도 좋았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더 좋을 것 같네. 팀플레이 한답시고 어깨동무나 머리 쓰다듬는 꼴을 안 봐도 되니까.
“차라리 잘됐어요. 나도 그만둘 수 있어서.”
“뭐?”
“선배 그만두면 나도 안 하려고요. 이번에는 청백전이고 연습 경기고 안 통합니다.”
내내 김희도의 시선을 피하던 임성이 처음으로 그를 쳐다봤다.
목소리만 들었을 땐 단순히 도발하는구나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눈앞의 남자는 농담 따위가 아니라 진심을 말한다는 것을.
“무슨 헛소리야? 너처럼 재능 있는 애가 왜 그만둬?”
“선배 지금 그만둘지 말지 고민 중이잖아요. 아니에요?”
한 번도 티 낸 적 없는 걸 어떻게 알았지. 임성이 움찔하자 김희도가 다시 한번 어이없는 숨을 내뱉었다. 지금 자신이 누구 때문에 여기 있는 건데.
“너랑 나는 다르지.”
“뭐가 다른데요?”
“나는 지금, 실력이…….”
“뭔 개소리예요. 자기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걸 왜 변명하지? 설마 리그 망친 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내가 부족해서.’ ‘좀 더 잘했다면’ 아무리 호구여도 그건 아닐 거야.”
임성이 입을 다문 것을 본 김희도가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온갖 말로 날 끌어들이고선 이제 와서 혼자 그만둔다고요?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김희도가 엄지 끝으로 임성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찢긴 살갗에 타인의 온기가 닿는 느낌은 생각보다 미묘했다. 임성이 타액을 삼키며 턱을 숙였다.
꿀꺽. 크게 움직이는 울대뼈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김희도가 남은 말을 내뱉었다.
“사람 잘못 봤고.”
* * *
초등학교 4학년에 야구를 시작해서 열아홉,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만약 올해 프로에 지명받지 못한다 해도 대학에서 꾸준히 한다면 연이 닿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자식들을 돌보는 대신 회사를 택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현실을 회피하려는 것도 있을 것이다.
11살 동생 두 명,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동생이 둘. 아버지는 제 어깨를 짚으며, “이제부터 장남인 네가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부모야. 할 수 있지?” 하고 당부하셨다.
당연하죠. 제가 형인걸요.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야구와 집안일을 병행하던 중학교 3학년 가을, 아버지는 야구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으셨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 대신 안정적인 길을 권유한 것이었다. 늘 바쁜 아버지는 제 큰아들이 야구를 하기 위해 얼마나 아등바등하는지 알지 못했다.
임성은 집에 손을 벌리지 않고, 적정선의 성적을 유지하며 프로에 입단하겠다는 조건하에 겨우 야구 하는 걸 허락받았다.
열심히 하면 입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넘지 못할 벽처럼 멀게 느껴졌다.
“주장, 아직 입술에서 피 나요. 연고 바르게 부실로 가요.”
훈련장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던 조예준이 임성을 발견하고 냉큼 다가왔다.
“찬물로 세수했더니 괜찮…… 아무튼, 걱정하지 마.”
습관처럼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려던 임성이 김희도를 곁눈질했다.
괜찮다고 하면 다들 안심하는데, 쟨 왜 화를 낼까. 목구멍이 깔깔했다.
“우리 다 주장 믿는 거 알죠? 주장이 이끌어 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꼭 우승해서 프로 지명받자고요.”
“그래. 최선을 다해 볼게.”
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예준을 지나쳤다. 조예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김희도를 발견하고 눈을 찌푸렸다.
“아,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다녀.”
“조예준.”
“내 이름 알고 있을 줄 몰랐네. 개무시하는 분께서 웬일로 날 부르시나?”
노골적인 비아냥에도 김희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서 공을 만지작대는 임성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사람 상태 엉망인 거 알면서 잘 부탁한다는 둥 개소리로 부담 주는 건 뭔 생각이야? 혹시 뇌가 없나?”
“네가 뭘 알아.”
조예준이 미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포수의 손과 다름없는 미트를 내던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 건방진 놈은 알까? 그만큼 김희도의 참견이 같잖았다.
“잘못하면 주장 바로 입스(YIPS)들어가. 드래프트까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았다. 지금 입스 들어가면 망할 게 뻔한데 자신감 깎을 일 있어? 주장이 얼마나 프로를 꿈꿨는지 네가 아냐?”
조예준이 김희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몰라.”
“뭐?”
“저 남자가 얼마나 프로를 꿈꿨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그는 정말로 상관없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조예준이 잠시 주춤한 사이 김희도는 불쾌한 듯이 그의 손을 탁 털어 냈다.
“지금 선배에게 믿는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부담일 뿐이야. 배터리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둘이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마지막 말에는 희미한 웃음기까지 배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조예준이 황당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와 이런 얘길 하는 상황이 어이없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네 헛소리까지 신경 쓸 여유 없으니까 사람 속 뒤집지 말고 꺼져.”
조예준은 그와의 대화를 완강히 거부하며 훈련장을 벗어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도 그날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소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도 선유고는 상대 학교를 차례대로 격파하며 또다시 8강에 올랐다.
임성은 이번에도 투구 수 제한 규정에 겨우 비껴갈 정도로 등판이 잦았다. 어떤 날은 선발, 또 어떤 날은 불펜, 마무리까지.
공을 던진다는 행위는 같아도 선발과 불펜, 그리고 마무리는 준비 과정이나 루틴, 던질 때 드는 팔 힘이 전혀 달랐다. 보직에 일정치 않으면 컨디션도 오락가락하는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감독은 위기 상황마다 임성을 불렀다. 대부분 까다로운 타자 상대를 상대하거나 1점 차 이내 박빙 승부일 때였다.
당연히 컨디션이 제대로일 리 없었지만, 임성은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공을 던졌다. 마치 그것만이 제 가치를 증명한다는 듯.
“마운드에 서게 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어깨 다 갈릴 일 있냐고요.”
“괜찮아. 예준아.”
조예준은 힘없이 웃는 임성을 못내 불안하게 보면서도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재 그의 심정이 어떨지 어설프게나마 짐작한 이유였다.
저 멀리 새벽빛이 어슴푸레 번지기 시작하는 이른 시각,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열었던 임성은 담벼락에 기대고 있는 남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벽에서 몸을 떼어 낸 남자가 임성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김희도.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산책 중이었어요.”
지금 이 시각에 산책? 그것도 본인 집과 완전 반대 방향인데? 걸어서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하지만 김희도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학교 가는 길이면 같이 가요.”
김희도는 여전히 의아해하는 임성을 힐끔 보고선 먼저 걸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성큼성큼 걸어 나란히 섰다.
“진짜 찾아온 이유가 뭐냐?”
산책 중이었다는 말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김희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동자만 옆으로 살짝 굴려 임성을 쳐다봤다.
“재밌어요, 야구?”
임성의 발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지금 저 말은 항상 자신이 김희도에게 묻던 게 아닌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되돌려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한참이나 혼자 걷던 김희도가 문득 뒤를 돌았다. 제법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 멀리 아침 해가 피어오르며 어둠에 묻혔던 김희도의 얼굴을 완전히 드러냈다.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와 달리 표정이 차가웠다.
“야구 하는 거 재밌어요?”
임성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여 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침묵하며 학교까지 도착했다.
“선배는 뭐 때문에 야구 해요?”
“…….”
“지금 힘들잖아요. 그렇게 힘들어하면서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도 없는 야구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김희도가 물었다.
뭐 때문에 야구를 하냐고? 오늘따라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한다 싶으면서도 임성은 8년 전 야구장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커다란 함성. 마치 자신이 선수인 듯 한껏 몰입한 관중들, 특유의 열기와 공기, 들썩이는 구장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오롯이 대결하던 투수와 타자.
그게 너무 좋아서, 멋있어서 시작했었다. 녹초가 될 정도로 힘든 훈련도 그저 즐겁기만 했다. 온종일 야구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코치님께 혼나 울면서도 야구장에 가길 기다렸다. 지금도, 앞으로도 제 인생에서 야구처럼 순수하게 몰입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았다.
즐거움보다 부담이 커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공을 쥐는 게 괴롭고 힘들지. 내가 날 믿지 못하는 순간부터?
“난 선배 때문이에요.”
돌연 김희도가 돌연 임성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어깨에 가해지는 강한 아귀힘에 본능적으로 몸이 경직됐다.
“내가 말했었죠? 야구를 하면 재미보다 불쾌감이 더 크다고. 그걸 선배가 없애 준 순간부터 나는 선배 때문에, 선배를 위해서 야구를 하는 거예요. 저번에 뭐라고 했지? 재능? 천재? 나는 그딴 거 하나도 안 중요해요.”
부원들이 아무도 오지 않은 조용한 부실, 밤새 겹겹이 쌓인 텁텁한 공기와 오래 묵은 땀 냄새.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줄지은 배트와 야구공이 잔뜩 담긴 바구니. 그 어떤 것도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도망갈 생각 하지 마세요.”
어린 고양이가 사나운 경고를 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