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깊게 가라앉아 있던 의식은 어느 순간 출렁 떠오르며 눈을 번쩍 떴다. 저 멀리서부터 몰려온 짙은 새벽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임성은 까맣게 물든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불현듯 상체를 일으켰다.
으아. 몇 시지, 밥 안쳐야 하는데. 허겁지겁 일어서다가 일요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뒷머리를 긁었다. 그렇지. 오늘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도 되는 날이었다.
다시 주섬주섬 누웠다가 얼마 안 가 몸을 일으켰다. 몇 년 동안 이 시각에 일어났는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 있나. 결국,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방을 나왔다.
밥통에 쌀과 물을 담아 놓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현관문을 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쌀쌀함이 남아 있던 새벽 공기가 이젠 제법 따뜻했다.
혹시라도 밟고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운동화 끈을 꽉 조여 맨 뒤 골목을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다가,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빠르게, 또 속도를 줄이는 인터벌 러닝을 약 한 시간가량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깬 여동생들 밥 먹이고, 인형 놀이 및 역할극까지 빠짐없이 한 뒤 김희도와의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왔다.
“날씨 좋네.”
훈련이나 경기장에 가는 게 아닌 개인적인 일로 주말 낮에 나오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지금이 12시 40분이고 김희도랑 1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20분 정도 남은 건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 MBL 경기 하이라이트를 들으며 약속 장소로 천천히 걸어갔다.
임성의 발걸음이 멈춘 건 김희도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만약 서로 못 찾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카페 벽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렸음에도 화려한 생김새가 드러났다.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머리와 바람이 불 때마다 드러나는 반듯한 이마, 짙은 눈썹과 우뚝 솟은 콧날. 옅게 속 쌍꺼풀이 진 눈꺼풀에 속눈썹이 풍성하게 뻗었다. 단순히 잘생겼다거나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유니폼이나 연습복, 그리고 교복 차림만 보다가 사복을 입은 김희도를 보니 새로웠다. 흰 티와 청바지라는 단순한 차림에도 태가 났다. 저게 바로 귀티란 건가.
그나저나 쟤 엄청 눈에 띄는구나. 멀리서 봐도 단번에 알겠다. 그렇게 생각한 건 자신뿐만이 아닌지 주변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그를 곁눈질 중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김희도가 문득 얼굴을 들었고, 눈이 딱 마주쳤다.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김희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약속 시간을 잘못 알았나? 혹시 1시가 아니라 12시 30분이었어?”
“1시 맞습니다.”
“왜 이렇게 일찍 도착했냐. 몇 시에 왔는데?”
“글쎄요. 대충 12시쯤…….”
“열두……, 40분이나 기다렸다고?”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는 말에 어이없는 게 반, 미안한 것이 반이었다. 20분 일찍 나왔음에도 왠지 엄청 늦은 기분이었다. 정작 기다린 당사자는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점심은 내가 살게. 그나저나 사복 입은 건 처음 보네. 원정 갈 때도 교복 입었으니까. 멋있다.”
“그러는 선배는…….”
그는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하하. 눈에 띄는 옷 아무거나 입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신경 좀 쓸 걸 그랬다. 아, 저쪽에 스포츠웨어 가게 많아. 신발 살 거랬지?”
“뭐, 이것저것.”
“아침은 먹었어?”
여차하면 아침까지 사 줄 요량으로 묻자 김희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가자.”
웃으며 그의 등을 가볍게 쳤다.
아침 먹은 것도 칭찬받을 만한 일인가? 김희도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앞서가는 남자의 뒤를 쫓았다.
“특별히 선호하는 브랜드 있어? 저번에 준 그 브랜드라거나.”
아무래도 기능성 옷이라 선수마다 특히 즐겨 입는 브랜드가 있었다. 임성은 가격과 질을 고려한 무난한 브랜드를 주로 이용했다. 반면에 김희도가 입으라며 준 언더 티는 개중에서도 비싼 축에 속했다.
“딱히 없습니다. 그건 그냥 집에 있는 거였고요.”
“그럼 내가 자주 가는 곳으로 갈래?”
매장은 다행히 약속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일요일 낮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임성이 먼저 들어가고, 미간에 주름을 잔뜩 세운 김희도가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거의 밀착되다시피 한 거리감에 조금 놀랐다가 김희도의 특성을 떠올리곤 수긍했다.
“빨리 고르고 나가자. ……잠깐, 너 마스크 내려갔다.”
임성은 콧등까지 내려간 마스크를 위로 끌어올렸다. 콧잔등 부분을 살짝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트도 살 거야?”
“예.”
“1학년은 보통 스탠다드형을 많이 쓰던데 넌 Y형 쓰더라. 그래서 장타가 잘 나오나. 무게는 어느 정도가 좋아?”
“800g 후반이면 됩니다.”
“800g면……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 모델이 인기 많아. 한 번씩 쥐어 보고 결정해. 나보단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그런 것치곤 선배도 4할 가까이 치잖아요. 팀 내에서도 꽤 높은 편 아닙니까?”
“3할 2푼이랑 4할은 엄청난 차이지. 그리고 난 대타로 가끔 나가서 타율 올리기 쉬운 것뿐이야. 아, 이게 내가 쓰는 배트.”
임성은 배트 한 개를 집어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김희도에게 건넸다.
잘 맞은 타구나 기분 좋게 날아가는 홈런을 보면 묵직한 손맛이 그립기도 하지만 되돌아간다고 해도 투수를 택할 것이다. 게다가 손맛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거든.
두 사람은 배트 두 개와 글러브 등을 사고 다른 스포츠웨어를 가게로 향했다. 노란 간판 입구 앞에는 『여름 맞이 파격! sale. 이월 상품 60~30% 할인』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펄럭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 이거 세일 하네. 가격 대비 괜…… 야, 괜찮아?”
선수용 긴 양말을 들고 뒤를 돌았던 임성은 김희도를 보고 멈칫했다.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나 유난히 창백했고, 미간 사이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눈 밑 그늘이 깊게 내려온, 누가 봐도 피곤한 상태였다. 두꺼운 마스크를 썼음에도 인파가 많은 곳은 힘든 모양이었다.
괜히 데려왔나? 배려를 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임성은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곤 김희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김희도의 시선이 제 어깨를 스치고 내려오는 팔로 향했다.
“이러면 좀 괜찮나? 응, 어때?”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김희도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눈높이가 엇비슷해 자칫하다간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어깨동무면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창백한 안색을 면밀히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김희도는 알 듯 말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임성 쪽으로 바짝 붙였다.
멀리서 보면, 아니 가까이서 봐도 영락없이 사이좋은 선후배였다.
“나갈래?”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 생기를 되찾은 김희도는 세일 코너가 아닌 신상품 코너로 임성을 데리고 갔다. 사람들로 가득하던 입구와 다르게 이쪽은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성 한 명만 느긋하게 구경 중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직원이 한가득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멀끔하니 잘생긴 애들이네.
“찾으시는 상품 있으세요? 이 제품은 올 시즌에 나온 신상입니다. 기존 제품보다 땀 흡수가 훨씬 잘되고 시원해서 많이들 사 가세요. 하나 장만하시면 후회 없으실 겁니다. 프로 구단에 협찬 들어가는 제품으로 선수들이 실제로 입습니다.”
직원은 셔츠를 위아래로 가리키며 술술 설명을 내뱉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어깨동무를 하는 건 이상한 것 같아 임성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하지만 팔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김희도가 임성의 어깨를 감쌌다. 커다란 손바닥이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부분을 꽉 쥐어 어깨동무보다 껴안은 것에 가까웠다.
조금 전 김희도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보다 당황스러운데.
“입어 봐도 됩니까?”
머뭇대는 사이 김희도가 직원에게 무뚝뚝하게 물었다.
“어유, 물론이죠.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105면 됩니다.”
직원에게 옷을 건네받은 김희도가 탈의실로 향했다. 여전히 그와 어깨동무 아닌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임성은 자연스럽게 그의 걸음에 맞췄다.
다행히 탈의실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김희도는 가장 안쪽에 있는 탈의실 문을 열고 임성에게 눈짓을 했다.
“나? 나보고 들어가라고?”
“이거 입어 보세요.”
네 옷을 내가 왜?
“내가 여기서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겠죠?”
표정에 생각이 드러났는지 김희도가 옷을 손에 쥐여 주며 다시 한번 탈의실을 가리켰다. 어차피 체격 차이도 크지 않고, 누가 입든 상관없을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맨몸에 입는 건 좀 그렇겠지? 옷 위에 덧입을 요량으로 라운드 구멍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문 열게요.”
“어? 야, 잠깐…… 나 지금 옷 입는 중……!”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김희도가 코를 틀어막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은 평균 키를 훌쩍 넘는 남자 둘이 들어차자 움직일 틈이 없었다.
“저 지금 죽을 것 같거든요.”
“냄새 때문에?”
“우선 급한 것부터 해결하겠습니다.”
마치 짐승이 먹이를 사냥하듯 순식간에 다가온 김희도가 온몸으로 임성을 껴안으며 어깨에 턱을 얹었다. 후읍, 흡. 다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귓가를 연신 파고들었다. 쇳소리 섞인 거친 숨소리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뜨거운 입술이 귀 뒤에 닿았다가 목 아래 부근을 문대듯이 누르는 감촉에 자꾸 등이 움찔거렸다. 그의 숨이 내려앉은 살갗이 축축하게 젖었다. 어째 부위가 좀…….
그러나 곧 힘들어하는 애를 두고 뭔 생각이냐 싶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엄청 괴로웠나 보네.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데, 상체 전체가 꽉 안겨 있어 옴짝달싹도 못 하겠다.
김희도. 희도야. 몇 번 그의 이름을 불러 봐도 반응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몸에 힘을 빼자 먹이를 조이는 뱀처럼 강하게 옥죄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괜찮냐?”
“아니요.”
“무리한 거야?”
“좀 전까지는요.”
예상보다 후각이 더 예민하구나. 당사자가 아니라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얼마나 힘들까.
김희도는 임성의 귀 옆에 입술을 딱 붙인 채 몇 번을 더 숨을 들이켜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꿀꺽. 목 한가운데 불거진 울대뼈가 크게 움직였지만, 임성은 보지 못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지, 왜 무리하냐? 지금이라도 집에 갈래?”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다행이다. ……근데, 이건 어쩌지?”
임성은 제가 쥐고 있던, 조금 전까지는 빳빳했으나, 지금은 두 사람이 무게에 짓눌려 엉망으로 구겨진 옷을 가리켰다.
“계산하면 되죠.”
김희도는 구겨진 옷을 비롯해 배트, 장갑, 손목과 무릎 보호대, 양말 등을 샀다. 하나같이 신상품으로 영수증은 끝도 없이 내려갔다. 이렇게 비싼 건 누가 사나 했더니, 바로 여기 있구나.
“오랜만에 장비 구경하니까 재밌다.”
두 사람은 양손에 종이 가방을 잔뜩 들고나왔다. 비록 60% 세일 하는 양말 하나밖에 못 샀지만, 새로 나온 상품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신중히 장비를 고르는 김희도가 무척 기특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야구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니까.
머리 위에 바짝 떠 올랐던 해는 여전히 쨍하니 존재감을 드러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참 새파랗고 맑았다.
“이제 점심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선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나? 음. 나는…….”
임성이 입을 달싹였다.
* * *
“사장님. 저 왔습니다!”
“아이고. 우리 천재 투수 주장님 왔나? 아직 훈련할 시간 아니가? 오늘은 어째 일찍 왔네.”
“예. 천재 투수 왔습니다.”
활기찬 목소리가 자그마한 분식집에 울려 퍼졌다. 사장님 내외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임성이 에어컨 앞 지정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오고 싶다던 곳이…….”
“응. 여기.”
모처럼 나갔던 외출의 종착지는 결국 학교 근처 분식점이었다. 뭘 먹고 싶냐는 말에 임성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씩 웃으며 또또 떡볶이를 말했다.
요 며칠 시험공부를 하느라 분식집에 오지 못했더니, 온 몸이 떡볶이를 격렬하게 원했다. 김희도는 그 사실을 퍽 마음에 들지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이 부를까? 지금 학교에 있을 텐데.”
“싫어요.”
감정 표현이 드문 편인 김희도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둘이 사이가 안 좋냐고 물으려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같아 입을 닫았다. 황사기 끝내고 여유가 좀 생기면 진지하게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매운 거 잘 먹어?”
자칫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임성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렸다. 중,고등학교 때 부주장과 주장을 한 짬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잘빠진 눈꼬리를 와락 구기고 있던 김희도가 고개를 들고 슬쩍 웃고 있는 그를 봤다.
“선배는 어떤데요?”
“나?”
조금 전부터 어째 질문에 대한 답이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딱히 비밀도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고 좋아해. 라면 잘 안 먹는데, 매운 볶음면은 세일할 때마다 몇 봉지씩 집에 쌓아 놓거든. 저번에 먹어 봐서 알겠지만, 이 집 떡볶이 진짜 맛있어. 예준이는 매운 거 싫어해서 늘 1단계로만 먹지만.”
“전 잘 먹습니다. ……매운 거 좋아해요.”
“진짜?”
한 박자 늦게 덧붙인 말에 임성이 눈에 띄게 반색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조예준마저 매운 걸 잘 못 먹는 탓에 2단계 이상 떡볶이는 꿈도 못 꿨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동지가 있을 줄이야!
“그럼 4단계 도전해 볼래? 내가 살 테니까 마음껏 먹어라. 사장님, 저희 주문할게요!”
야구 얘기를 제외하고 이렇게 생기 넘치는 임성은 처음이었다.
<지옥의 불 맛(★★★★) 떡볶이.>
1. 한동안 입 안이 얼얼할 수 있음.
2. 배 속은 더 뜨거울 수 있음. (우유, 쿨피스, 얼음 상시 구비)
3. 눈물, 콧물 쏟아짐.
4. 기절 시 절대 책임 안 짐.
※신중히 생각 후 주문해 주세요.※
임성은 김희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잔뜩 신나서 4단계 떡볶이를 주문했다.
합숙 때 치킨 산다고 용돈을 절반 가까이 날리고 오늘로써 나머지도 다 날리게 됐지만, 아깝기는커녕 기대와 설렘이 더 컸다.
빈 컵에 물을 따라 김희도의 앞에 놓고 수저를 챙겼다. 가장 먼저 나온 김밥 두 줄 중 한 줄을 통째로 김희도의 접시에 덜었다.
“부모님께서 야구 좋아하신다고?”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요. 외가 쪽은 대부분 다 좋아해서 큰 외삼촌 아들도 중학교 때까지 야구 했고, 그 동생도 지금 중학교에서 야구 합니다.”
“혹시, 문일중학교야? 할아버지와 아버지 열정이 대단하시네. 혹시 어느 구단 좋아하셔?”
“문일중은 아니고, 유니콘즈 좋아해요.”
“진짜? 사실은 나도 유니콘즈 제일 좋아하거든. 잠실이나 고척 원정 올 때 가끔 직관하러 가. 유니콘즈에 김이설 선수 있잖아. 우리 학교 선배님.”
임성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생기 넘치는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딱히 관심이 없어서.”
임성은 시큰둥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잔뜩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작년 골글 받은 거 봤냐? 직구 변화구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공을 배트 중심에 맞추니까 장타가 많이 나오지. 나도 프로에 가면 김이설 선배님과 맞붙겠지? 후, 생각만 해도 떨린다.”
즐겁게 말하는 쪽과 다르게 듣는 쪽은 관심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영 심드렁했다.
“역시 야구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니까. 아, 떡볶이 나왔다. 얼른 먹자.”
떡볶이는 빨간 것을 넘어 검은색에 가까웠으며 주변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콧등을 찡그리게 했다. 조예준이 기피할 만했다.
임성은 쿨피스 입구를 미리 따 놓고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혀끝에 닿는 뜨거움과 매운맛의 조화가 입 안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맨날 혼자만 먹다가 이렇게 먹으니까 더 맛있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김희도를 살폈다.
“맵지 않아? 예준이는 한 번 먹더니, 입에 얼음 넣고 완전 난리 났었거든.”
“안 매워요. 전혀.”
“그러면 다행이고. 달걀도 먹어. 노른자 먼저 먹고, 흰자는 소스에 푹 담가 먹으면 돼. 저번에 먹어 봤지?”
물도 안 마시고 먹는 걸 보니 진짜 매운 걸 잘 먹나 보다. 비슷한 입맛을 찾았다는 기쁨은 하나밖에 없는 달걀을 또다시 양보하기에 충분했다.
둘 다 말없이 열심히 먹다 보니 순식간에 빈 접시만 덩그러니 남았다.
“괜찮으면 다음 단계도 도전해 볼래?”
“네.”
“사장님, 여기 5단계 1인분, 아니 3인분 주세요.”
“뭐고. 거기서 5단계를 또 먹는다고? 낼 피똥 싸기 싫으면 고마 됐고, 맛만 봐라.”
신나서 주문하는 임성을 오히려 사장이 나서서 말렸다. 임성은 썩 아쉬워하면서 남은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곧 사장이 시커먼 떡볶이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취향 비슷하니까 좋네. 많이 먹어.”
김희도와의 대화는 퍽 즐거웠다. 사실, 대화라기보다 임성이 일방적으로 질문을 퍼붓는 것에 가까웠지만.
대화 도중 느꼈는데, 김희도는 중학교 춘계리그에서 자신을 만났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쉬운 것이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홈런을 맞았단 걸 몰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맛보기 5단계 떡볶이를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문득 김희도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표정은 평소와 같은데…… 뭔가 묘한. 뭐지, 뭘까.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빤히 쳐다보자 김희도가 “왜 그렇게 봐요?” 하고 물었다. 모양 좋은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괜찮아?”
“뭐가요?”
원래도 도톰하고 붉은 편인 김희도의 입술은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가게 조명이 노르스름한 탓에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빨갛다는 것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위화감의 정체는 이거였어. 임성은 그에게 남은 쿨피스를 통째로 건네며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무렇지 않은데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잖아. 지금 입술 터질 것 같은데. 대체 뭐…… 너 설마 매운 거 못 먹냐?”
김희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까지 확인하자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들었다.
“아니요.”
“너 지금 식은땀 뻘뻘 흘리고 있다. 사장님! 여기 우유, 아니 얼음 좀 주…… 내가 가져와야겠다. 급한 대로 찬물이라도 머금고 있어.”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 같으면서 안 맵기는 무슨. 임성은 끝까지 안 맵다고 우기는 김희도에게 물컵을 쥐여 줬다.
김희도는 내키지 않은 표정을 하던 것과 다르게 한 번에 물을 비웠다. 그리고 임성이 냉장고에 간 사이 입을 살짝 벌리고 빨간 혀를 식혔다.
“솔직히 말해 봐. 매운 거 못 먹지?”
임성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모른 척 입을 닫았지만.
“……잘 먹어요. 오늘은 좀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한 것뿐이고. 그리고 먹다 보면 늘 수도 있잖아요.”
“그게 느는 건 줄 알아? 못 먹겠으면 말하지.”
“먹을 만하니까 말 안 한 거예요. 뭐 문제 있습니까?”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기적의 논리에 되레 임성이 당황했다.
“혹시 내가 선배랍시고 무의식중에 널 압박했어?”
그게 아니면 잘 먹지도 못하는 걸 굳이 거절하지 않고 먹을 이유가 없잖아.
“매일 아침 교문에서 기다리거나 교실에 찾아온 거요?”
“어, ……음. 그때 일은 미안하게 됐다. 아무튼, 싫은 건 싫다고 말해. 너 입술 부은 거 보고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
“그럼 야구 그만둬도 돼요?”
“야. 얘기가 왜 그렇게 되냐. 그건 당연히 기각이지.”
양팔을 교차해 엑스 자를 그리다 우유를 건넸다. 이번에는 괜찮다는 말없이 얌전히 받아 마셨다. 그렇게 한참을 진정시키자 새빨갛게 부은 입술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임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급한 불을 끄고 났더니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압박받은 것도 아니면, 대체 왜 그랬냐?”
“그러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대체 왜. 눈으로 물었지만, 김희도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애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 곳곳을 훑듯이 살폈다.
“아직 좀 빨간 것 같다. 얼음 줄까?”
“……됐습니다.”
김희도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다음엔 내가 살게요.”
카운트 입구에 놓인 사탕 바구니에서 자두 맛 사탕 하나와 딸기 맛 사탕 하나를 집었다. 양손에 하나씩 놓고 고민하다가 딸기 맛 사탕을 김희도에게 내밀었다.
“단 거 먹고 입 좀 식혀라.”
“얼른 대답하세요.”
“뭘?”
“다음엔 내가 산다는 거.”
“알았어.”
또또 분식에서 나오자 어느새 붉은 노을로 하늘이 온통 물들어 있었다. 오후 6시 30분. 생각보다 오래 있었네. 시간을 확인하고 김희도를 돌아봤다.
“집에 갈래? 오래 돌아다녀서 피곤할 거 아냐.”
“선배는 뭐 할 건데요?”
“나? 글쎄. 학교 가서 훈련하거나…… 예준이 만나도 되고. 황사기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아직 대진표는 안 나왔지만, 이번 전력 상승한 학교가 꽤 많거든. 올해는 특히 부산이랑 대구 쪽…… 으음?”
한참이나 말하던 임성은 문득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걸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만 해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참 뒤에 우뚝 서 있었다.
혹시 뒤늦게 배가 아픈 건가 싶어 김희도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뭐야, 어디 아파?”
“잘 모르겠어요.”
“집에 데려다줄까?”
예, 아니요. 같은 대답을 예상했던 임성이 살짝 당황하며 다시금 그를 살폈다. 손으로 와락 구긴 종잇장처럼 주름진 미간이나 아직 부은 입술 등이 썩 불편해 보였다.
김희도를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다시금 미안해졌다.
“네.”
김희도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말을 내뱉었다.
“데려다주세요.”
다행히 그의 집은 또또 분식, 그러니까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로 약 2코스 정도? 하지만 김희도에게 사람이 많은 버스를 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걸어갈까 하는 고민도 잠시, 결국 택시를 선택했다.
선유고 주변에는 여고 하나와 쌍둥이 동생 1, 2가 다니는 남고 하나가 더 있었다. 꽤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도 있었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 모인다는 중학교도 있었다.
한마디로 학군이 꽤 좋은 동네였다. 당연히 집값은 말할 것도 없이 천정부지였는데, 김희도의 아파트는 그 천정부지 아파트 중에서도 독보적인 집값을 자랑하는 곳에 있었다.
“학교에서 되게 가깝네. 등하교하기 좋겠다.”
“그런가요?”
덤덤하게 대답한 김희도는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 집에 첫 방문 하면 으레 그렇듯 임성은 살짝 경직된 걸음을 내디뎠다.
현관부터 거실까지 복도가 짧게 이어졌고, 복도 끝에는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거실과 한 면이 통으로 된 유리창이 보였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이라 붉고 노란 물감을 정성 들여 푼 것 같은 노을이 그대로 비쳤다.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사는 거나 몸에 딱 맞춘 듯한 깔끔한 사복을 입는 것 등을 볼 때, 부족함 없이 살지 않을까 예상했어도 이렇게 집이 좋을지 몰랐다. 뭐, 김희도가 잘살든 말든 상관 없지만.
“실례하겠습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집에 대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앞서 복도를 걷던 김희도가 되돌아와 임성과 마주 보고선 “어서 오세요.” 하고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성은 목각 인형처럼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김희도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을 높였다.
“마실 거 줘요?”
“물 있으면 부탁할게.”
집주인은 종이 가방 무더기를 벽 한쪽에 대충 세워 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 한가운데 멀뚱히 서서 주변을 돌아보던 임성은 그에게서 건네받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가족은 다 나갔나 봐? 아무도 안 계신 것 같네.”
“혼자 사니까요.”
“여기에 혼자 산다고? 아무도 없이 너 혼자?”
컥. 사레들릴 뻔한 것을 겨우 넘기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네. 혼자 살아요.”
김희도는 올해 열일곱 살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어린 나이.
보통 지방이나 다른 학교에서 이른바 ‘야구 유학’을 오는 일도 가끔 있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중학교 때의 성적이면 최근 몇 년간 전국 최강으로 꼽히는 주강고에서 장학금이나 주전 보장으로 스카우트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전국 대회 단골이라는 건 그만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많단 뜻이었고. 그럼에도 김희도가 선유고를 택하고, 혼자 사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궁금했지만, 어설프게 파고들어 김희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가족들의 체취를 못 참을 때가 있는데…… 서로 곤란하잖아요.”
머뭇댔던 게 무색하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한 김희도가 임성의 손에 들린 빈 컵을 가져갔다.
“애초에 부모님이 바빠서 같이 살아도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그래도 고등학생이 보호자도 없이 혼자…… 부모님께서 많이 바쁘셔?”
혼자 있는 게 익숙하다니. 현관문을 열자마자 여동생 둘이 각각 다리에 달라붙고, 남동생들과는 한 방에서 부대끼며 싸우는 게 일상인 임성으로선 상상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일을 돕고 있어요. 이것저것 일이 많은지, 두 분 다 날 돌볼 여유까진 없어 보이고, 나도 그게 편하고. 최선의 선택이죠.”
김희도는 빈 물컵을 개수대에 내려놓으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식탁에 내려놨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안쪽을 슥 훑고선 거실에 멀뚱히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딸기 먹을래요? 사과랑 바나나도 있어요.”
“아. 나 딸기 좋아해. 사과랑 바나나도.”
김희도가 딸기를 비롯한 과일 몇 가지를 쟁반에 담아 올 때까지도 임성은 거실에 서 있었다. 늘 시끌벅적하게 살아와서일까, 너른 집에 내려앉은 적막함이 영 어색했다.
김희도는 껍질을 깎는 게 아니라 도려낸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일을 못 깎았다.
“칼 이리 줘. 내가 할게.”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걸 내켜 하지 않을 수 있으니, 가만히 두고 봤는데, 도저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김희도에게 과도를 달라며 손을 내밀자 고개를 젓는다.
“나 손 씻었어.”
“누가 더럽대요? 투수가 칼을 드니까 그렇죠. 다치면 어쩌려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임성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을 깜빡이며 한껏 집중한 채 과일을 깎는 김희도를 봤다. 서걱, 서걱. 사과 껍질이 얇고 가늘게가 아니라 가을 낙엽처럼 뭉텅뭉텅 떨어졌다. 제법 튼실했던 모습에서 1/3 가까이 크기가 줄었다.
“고맙다. 잘 먹을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되게 묘하네. 새콤한 사과를 씹으며 뺨을 긁었다.
분식집에서 이미 배 터지게 먹고 왔지만, 수북한 과일을 금세 비웠다. 딸기도, 키위와 바나나도 맛있었지만, 김희도가 깎은 사과가 제일 맛있었다.
순식간에 과일을 해치우자 김희도가 “케이크 먹을래요? 치즈 케이크 있는데.” 하고 말했다.
“어. 나 치즈 케이크 좋아해.”
눈앞에 치즈 케이크 한 판이 뿅 하고 나타났다. 편의점에서 가끔 사 먹는 퍽퍽한 싸구려 치즈가 아닌 진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라 끝없이 들어갔다.
“야, 이거 되게 맛있다. 맛이…… 굉장히 고급스럽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빈곤한 어휘력은 결국 흔하다 못해 단순한 것밖에 하지 못했다.
“맛있으면 더 먹어요.”
정작 집주인은 진작 포크를 내려놓고 임성이 먹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말도 걸지 않고 빤히 쳐다보다가 임성이 케이크 한 판을 다 비우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혀끝에 치즈 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새 케이크가 마치 처음처럼 등장했다.
“집에 케이크가 왜 이렇게 많냐? 파티라도 했어?”
“부모님께서 보내 준 거예요. 자주 보내는데 전 이런 거 잘 안 먹어서 다 버리거든요.”
과일, 케이크 두 판, 과자까지. 또또 분식에서 먹은 것보다 여기 와서 먹은 게 더 많았다. 평소 배부르다는 생각은 잘 안 하는 편인데도 지금은 확실히 든든했다.
“잘 먹었어. 음…… 심하게 잘 먹은 것 같네.”
“선배는 뭐든 다 잘 먹네요.”
마지막 과자까지 임성에게 남김없이 양보한 김희도가 말했다. 단정하게 뻗은 눈꼬리가 살짝, 아주 살짝 내려앉았으나, 금세 평소처럼 되돌아갔다.
“나 원래 가리는 거 없어. 떡볶이 있으면 또 먹을걸?”
“그렇게 많이 먹고도 살이 안 찌는 거 신기하네요.”
“그만큼 뛰잖아. 오히려 그것밖에 안 먹으면서 체력 유지하는 네가 더 신기하다.”
김희도가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자 얼른 뒤를 쫓았다.
“내가 뭐 도울 일 없어?”
“……이리 오세요. 내 옆으로.”
설거지를 시키려나 싶어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김희도의 옆에 섰다. 그러나 자리를 비켜 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태연히 고무장갑을 꼈다.
“그거 나 줘. 내가 할게.”
“됐습니다.”
“설거지하라고 부른 거 아니었어?”
“내가 언제 설거지하랬어요? 그냥 오라고 했지.”
그럼 왜 불렀는데?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으라고?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해 괜히 그릇을 정리하고 양념 통을 일렬로 세우는 등 잡일을 했다. 그러다가 싱크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설거지하는 김희도를 지켜봤다.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와. 그땐 내가 다 해 줄게.”
설거지를 끝낸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나왔다. 이 집에 와서 먹은 기억밖에 없는데,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학교로 돌아가서 훈련하긴 애매한 시간이었다.
“방 구경해도 되냐? 참고로 강요는 아니다. 불편하면 거절해도 상관없어.”
“저도 상관없습니다.”
조심스럽게 물어본 게 무색할 정도로 흔쾌한 대답이었다. 오히려 김희도는 본인이 앞장서서 임성을 자신의 방까지 안내했다.
썰렁한 거실에서 짐작했듯 그의 방 또한 깔끔하다 못해 삭막한 느낌까지 났다. 하지만 방 안에도 창이 크게 나 있어 그 틈으로 야경이 반짝반짝 빛났다. 방도 주인을 닮는지 분위기가 묘했다.
침대와 책상, 책장밖에 없어 구경할 것도 없었다. 책상은 깔끔하고, 무채색의 침구도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티셔츠, 반바지, 추리닝 등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과자 봉지와 만화책 등으로 엉망인 자신의 방과 비교하면 모델 하우스 수준이었다. 물론, 이쪽은 한창 어지르기 바쁜 열일곱 살 남자애 둘이 있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 얘도 열일곱 살이잖아.
임성은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을 눈으로 훑다가 구석에 꽂힌 것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앞뒤로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봐도 표지 커버가 없이 CD만 덩그러니 있었다.
“뭔가 비밀스러워 보이네.”
요새도 CD로 보나. 뭐,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니 충분히 이해됐다. 다시 책장에 꽂아 넣는 손을 붙잡은 건 김희도였다. 다른 사람에 비해 확실히 서늘한 온도가 손목을 감싸고 아프지 않을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무슨 내용인지 안 궁금해요? 장담하는데, 선배 엄청 흥분할걸요.”
길게 뻗은 속눈썹 위에 내려앉은 전등 불빛이 별 무리처럼 빛났다. 반면 빛이 닿지 않은 반대편은 짙은 음영이 져 뚜렷한 입체감을 자아냈다.
“나 이런 거 잘 안 봐.”
“한번 보면 또 보고 싶다고 할걸요. 엄청나거든요.”
마치 비밀을 말하듯 낮은 목소리는 열아홉 살의 호기심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했다. 네모난 CD 끝부분을 쥐고 있던 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보죠.”
훅 다가왔던 것만큼, 빠르게 물러섰다. 어느새 방에 혼자 남은 임성은 코끝을 머쓱하게 매만지다가 김희도를 따라 거실에 나갔다.
“야, 그래도 거실에서…… TV도 너무 크지 않나? 여기서 보기엔 좀…….”
“좋은 건 크게 봐야죠. 그거 이리 줘요.”
마지못해 그에게 CD를 건넸다.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여전히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임성이 열심히 고민할 때쯤 김희도는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물러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도야. 이건 아닌 것 같…….”
『현재 이곳은 한국시리즈 7차전이 치러지는 잠실구장입니다.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며 3승 3패를 주고받은 두 팀이 마지막 승부를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 지금 이 경기를 잡는 팀이 역대 우승 팀에 이름을 올립니다. 양 팀 팬들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한국 시리즈 7차전, 지금 시작합니다.』
임성이 입을 떼는 것과 동시에 캐스터의 목소리, 유니콘즈와 엠퍼러즈 팀 로고가 화면에 떴다. 우와아아아. 양 팀 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내리꽂혔다.
“야, 이거!”
“뭘 생각한 거예요?”
김희도는 송진 가루가 묻은 손을 털어 내는 투수가 클로즈업된 화면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덤덤한 표정이 왠지 더 민망해 헛기침을 하는 척 입을 가렸다. 귓등이 뜨거웠다.
“별생각 안 했거든.”
야구 동영상을 뭘 그렇게 은밀한 표정으로 말하냐. 괜히 오해하게.
숨을 길게 내쉬며 바닥을 헤맸던 시선을 들어 올리는데, 김희도의 손등이 불시에 뺨에 닿았다. 서늘한 기운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야, 뭐냐? 깜짝 놀랐잖아.”
“아무것도요.”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표정으로 슥 물러나더니 소파 끝에 자리 잡았다. 잠시 그를 보던 임성은 소파 다리를 등받이 삼아 TV에 집중했다.
오래된 컴퓨터나 손바닥만 한 휴대폰 액정으로 보다가 한쪽 벽을 다 차지할 정도로 큰 화면으로 보니 생동감이 넘쳤다.
흥분과 긴장으로 점철된 선수들의 표정, 배트를 휘두르는 방향과 투수의 팔 각도, 손끝. 타자의 눈앞에서 변하는 아름다운 공의 궤적.
“유니콘즈 대 엠퍼러즈. 코시 7차전. 단두대 매치라고 언론에서 한창 떠들었죠.”
알지. 아주 잘 알아. 투수 꿈을 키워 줬던 바로 그 경기거든. 아주 오래전인데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임성은 마치 자신이 TV 속 선발 투수가 된 것처럼 로진백을 찾아 바닥을 더듬었다. 손바닥이 어느새 땀으로 축축했다.
“이제 9회다.”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던 박재이는 9회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현재까지 투구 수는 125구. 분명 팔에 부담이 갈 테지만, 아마 고통을 느끼지 못하겠지.
한껏 줌 인 한 카메라가 박재이를 가까이서 잡았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전체적으로 상기돼 있었다. 팀 고로가 새겨진 유니폼이 크게 들썩였다.
임성은 숨마저 멈춘 채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침내 마지막 아웃 카운트 하나만을 남겨 둔 상황. 공이 박재이의 손을 떠났고, 엠퍼러즈 타자의 배트는 크게 헛돌았다. 반박할 수 없는 시원한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화면 안에서 파도처럼 일어난 관중들이 구장이 떠나가라 유니콘즈를 외쳤다. TV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커다란 함성이었다. 둥, 둥둥! 그에 맞춰 북소리가 신명 나게 울리며 사람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와, 미쳤다. 진짜!”
임성은 주먹을 쥔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주기적으로 돌려보는 장면인데도 볼 때마다 소름이 찌릿찌릿 돋았다.
“저기서 어떻게 타자랑 정면 승부 할 생각을 했지? 배트 나오는 타이밍 보면 체인지업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 직구인데 말이야.”
“저 투수는 직구와 체인지업 폼이 거의 같으니까요. 한 구 정도는 변화구로 뺄 법하다고 생각했겠죠. 심리전의 승리 같습니다.”
“네가 엠퍼러즈 타자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저기랑 똑같이 3루에 주자 있고, 투 아웃, 투 스트 상황이면?”
“저라면. 당연히.”
임성은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상체를 쑥 내민 자세로 옆을 돌아봤다. 김희도의 시선은 어느새 화면이 아닌 제게 향해 있었다. 노을이 내려앉은 눈동자는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붉어 넋 놓고 보게 됐다.
“쳤죠.”
……대단한 자신감이네. 웃긴 점은 근거 없는 자만이 아니라 실력에서 비롯된 가능성이란 것이었다. 김희도는 현재 3학년을 포함한 서울 지역 타자 중 가장 높은 타율과 타점을 기록 중이었으니까. 열일곱,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짜리가.
“야, 황사기에도 꼭 쳐라? 실력으로 증명해 봐.”
웃음기 띤 도발에도 그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가지 없다고 하겠지만,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하고 말 하지 않았다는 자체가 많이 순화된 것이었다.
『마침내 유니콘이 환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구도(球道)의 도시 부산! 그곳에서 태어난 유니콘이 팬들이 보낸 준 사랑과 열정을 받아 정상에 올랐습니다. 환상적인 현실. 창단 여섯 번째 우승. 축하드립니다.』
화면 속에서 유니콘즈 선수들이 더그아웃에서 우르르 튀어나와 환호를 질렀다. 물이 허공에 흩뿌려지고 빈 물통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녔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운드를 책임진 투수 박재이는 흠뻑 젖은 얼굴로 달려오는 팀원을 끌어안고 글러브 낀 손을 높게 들었다. 겹겹이 쌓인 팀원들 덕에 그의 몸이 기우뚱하며 모자가 떨어졌다. 경기를 치르는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엔 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저 모습에 반해서 투수가 되고 싶었다. 화면 속 박재이를 벅차게 보던 임성이 문득 창 너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헉. 벌써 9시가 넘었구나. 시간 되게 빨리 가네.”
“그러네요. 이젠 조예준 못 만나겠네.”
“조예준이 뭐 어쨌다고?”
“저녁 먹고 가라고요.”
“저녁? 으음…….”
임성이 벽 한가운데 걸린 시계를 다시 쳐다봤다. 지금도 밖에 달이 둥실 떴는데, 저녁까지 먹으면 한밤중이 될 게 뻔했다. 머릿속에서 아이스크림 사 오라던 여동생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전 혼자서 밥 잘 안 먹어요.”
때로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돌고 돌아서 도착하는 은유가 더 상대방에게 압박을 줄 때가 있었다. 임성은 지금 자신이 이 집을 나가면 김희도의 저녁도 함께 날아간다는 확신 같은 예감을 느꼈다.
점심도 부실하게 먹는 애가 저녁까지 안 먹고 내일 아침 훈련을 뛴다? 안 될 말이지.
“그럼 저녁만 먹고 갈까? 밥 있어? 없으면 오랜만에 솜씨 발휘해 볼게.”
“오늘은 내가 할게요. 방에 다른 영상도 많으니까, 그거라도 보고 있든가.”
“책장에 꽂혀 있던 CD들 다 야구야?”
“네. 할아버지가 모은 거예요. 실업 야구 시절부터니까 꽤 많을 겁니다.”
헉, 완전 보물 창고잖아. 김희도의 말에 반색하며 얼른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좀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혹은 정체를 의심했던 것들이 여길 좀 보라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에 꽂혀 있는 게 제일 오래된 겁니다. 책장 옆에 초록색 박스 있죠? 그 안에 각 구단별 구종 분석 영상 있어요. 참고로 비매품.”
구종 분석? 주방에서 들리는 말에 다급한 손놀림으로 박스를 열었다. 앞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던 CD와 달리 유니콘즈, 페어리즈, 샤크스 등 원년 구단 이름이 매직으로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야구를 좋아하신다더니, 이건 대단한 수준을 넘어선 박물관이잖아.
뭐, 뭐부터 봐야 하지? 뭘 봐야 잘 봤다는 소문이 날까. 잔뜩 신난 얼굴로 이것저것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고심을 거듭하다가 하나를 택했다.
「박재이 투구 연습 (체인지업·커브)」
금방 골랐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주방엔 이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은 밥솥에 있는 걸 펐고 정갈한 밑반찬 역시 냉장고에 있는 걸 꺼낸 것 같았다.
“미안. 아무것도 못 도와줬네.”
임성이 머쓱해하며 자리에 앉자 김희도가 가스레인지를 끄고 냄비를 식탁 한가운데 내려놨다.
“오, 김치찌개 했어? 나 이것도 되게 좋아하는데.”
“……그래요? 우연이네요.”
꽤 쌀쌀맞은 말투였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화난 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김희도의 손을 붙잡았다.
“갑자기 손은 왜 잡고…….”
숨을 짧게 들이켜는 소리와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걸 모습은 김희도가 당황했다는 걸 보여 줬다. 임성은 그가 놀라든 말든 상관치 않고 고운 손등을 쓰다듬었다.
“신기하단 말이지. 이 손으로 안타도 치고, 홈런도 뽑아내고 밥까지 척척 만드는 게.”
중얼거림을 들은 김희도가 눈을 비스듬히 내리떴다. 지금 이 남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까? 아니, 알면 이러지 않겠지. 김희도는 입술 안쪽 살을 꾹 깨물며 손을 천천히 빼냈다.
아무 생각 없는 임성은 국자로 김치찌개를 퍼 김희도의 앞에 내려놨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먹어라. 비록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고슬고슬한 밥 한술을 먼저 크게 뜨고 뒤이어 김치찌개를 입에 넣었다. 기분 탓…… 아니, 김희도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긴장과 기대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 몇 가지가 뒤엉킨 눈으로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중이었다.
마치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가 모퉁이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자신이 만든 도시락을 받았을 때의 김희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맛있다.”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살짝 누그러진 눈매를 보니 그의 기분이 대략 짐작됐다. 임성은 활짝 웃으며 김희도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이 귀여운 자식.
“너도 얼른 먹어.”
그는 임성을 따라 찌개를 먹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리 맵……, 이게 뭡니까. 왜 먹어요?”
“김치찌개가 당연히 맵지, 싱겁겠어? 당연한 말을 하네.”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됐어요. 버릴 거니까 먹지 마세요.”
냄비째 갖고 가려는 김희도의 팔을 다급히 잡고 냄비를 다시 내려놨다. 그리고 보란 듯 국물을 마시고 뭉텅이로 넣은 김치를 입 안에 넣었다.
“나 매운 거 엄청 좋아해. 아까 떡볶이 먹는 거 못 봤어?”
“그 매운 걸 게 아니잖아요. 맛이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말을 해 줘야죠.”
“내 밥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다. 그리고 생감자 볶음을 먹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잖아?”
설마 그런 말을 들을지 몰랐는지 김희도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그리곤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나 말거나 임성은 맵다 못해 쓴맛이 나는 김치찌개를 거의 다 비웠다.
“잘 먹었다. 설거지는 진짜 내가 할게. 넌 좀 쉬어.”
끝까지 못마땅해하는 김희도를 떠밀듯 거실로 내보내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밥그릇을 싹싹 비운 자신과 다르게 김희도는 밥을 반 넘게 남겼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어 놓곤, 이걸로 되나.
앞으로 날씨는 더워질 테고, 맞붙는 학교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지금부터 체력을 길러 놔야 여름을 잘 버틸 텐데.
“배 안 고파? 볶음밥이라도 해 줄까? 맛은 보장 못 해도 안 먹는 것보단 나을 거야.”
식용유가 어딨지? 이 근처에서 본 것 같은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임성의 눈앞에 어느 순간 그림자가 짙게 지더니, 더운 온기가 확 끼쳤다. 김희도였다.
임성은 식용유를 찾던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김희도에게 안겼다. 곧 목과 어깨 부근에 더운 숨이 내려앉으며 살짝 거친 호흡 소리가 울렸다. 그는 마치 밥을 먹듯이 임성의 목에 코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귓등을 따라 돋아난 솜털이 쭈뼛 섰다. 익숙한 일이지만, 늘 낯설었다.
“이러면 볶음밥 못 만들잖아.”
“안 먹어도 상관없어요. 볶음밥 100그릇을 갖다 줘도 안 바꿔요.”
“채끝살을 넣은 소고기 볶음밥은? 씹을수록 육즙이 좔좔 흐르는 도톰한 부위로 만든 거.”
“지금 장난쳐요?”
“야. 거기다 대고 말하지 마. 간지러워.”
김희도가 일부러 그럴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부위가 부위다 보니 숨결이 닿을 때마다 본능적인 소름이 돋았다. 어깨와 등이 움찔움찔 떨릴수록 어깨를 옥죈 힘이 강해졌다.
얌전히 있어야 빨리 끝난다는 것쯤은 지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하지만 임성은 기어코 김희도의 옆구리 사이로 제 손을 빼내고선 그의 등을 살짝 감쌌다.
앞에서 보면 꽤 늘씬한 체형의 김희도는 갈비뼈와 그 부근 골격이 큰 편인데다 어깨가 넓었다. 타고난 골격이 워낙 좋아서 조금만 더 자라면 최상의 육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낮까지 합치면 이번 주 네 번인 거 알지? 이건 밥해 준 값이다.”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김희도는 대답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코끝에 달라붙은 냄새를 음미라도 하듯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목구멍에 걸린 타액을 삼켰다.
꿀꺽.
“오늘 진짜 잘 놀았다.”
아쉽지만, 볶음밥은 다음 기회에 만들기로 하고 돌아갈 시간이었다. 운동화 끈을 꽉 조여 맨 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상치 못한 일로 김희도 집까지 찾아왔지만, 나쁘지 않…… 솔직히 꽤 재밌었다.
황용철, 박재이 선수 투구 영상을 본 것도 모자라 김희도가 해 준 밥까지 먹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예준이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아마 거짓말하지 말라며 놀라지 않을까.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어?”
“웃었잖아요.”
“아, 잠깐 조예준 생각이 나서. ……이 자식 역시 양반은 못 되네. 잠깐만.”
제 얘기하는 중인 걸 아는지 때마침 조예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예준: 주장. 어디에요? 오늘학교 올 줄 알았더니.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ㅠㅠㅠㅠㅠ
-나: 약속 있어서 이제 집에 감. 가면서 전화할게.
-조예준: 넵!
이모티콘을 폭탄으로 보내는 조예준을 뒤로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방금 시선이 느껴진 것 같은 건 착각이었나?
쳐다볼 사람이라고 해 봤자 김희도밖에 없는데, 그는 종이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 새 물건은 빨리 뜯어 봐야지.
“이만 갈게. 푹 자고, 내일 훈련 늦지 마라.”
“이거 갖고 가요.”
임성은 제 앞에 불쑥 내밀어진 종이 가방을 쳐다봤다. 오늘 함께 샀던 야구 용품이었다.
“이걸 내가 왜 가져가?”
벌어진 입구 사이로 비닐에 포장된 옷과 글러브가 언뜻 보였다.
“선배 주려고 샀습니다. 어차피 투수용이라 나한테 맞지도 않아요.”
“놔뒀다가 연습용으로 써.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받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시험공부 알려 줬잖아요.”
임성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침저녁 30분씩, 겨우 며칠 알려 준 걸로 하나에 몇 만 원이나 하는 걸 몇 개나 덥석 받을 순 없었다.
“그건 네가 잘해서 그렇고. 필요 없으면 가서 환불해. 아직 상표도 안 뜯었잖…… 어어, 야. 김희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희도가 옷에 붙은 상표를 손으로 잡아 뜯었다. 낚싯줄처럼 단단하고 질긴 줄이 뚝 끊어지는 걸 보다가 다급히 그의 손을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손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환불 못 하겠네요, 이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임성을 보는 김희도가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 * *
전국 고교생들의 자웅을 가리는 전반기 주말리그 왕중왕전, 황금사자기의 대진표가 드디어 나왔다. 각 블록에 시드 학교가 배치된 일본 고교 야구와 다르게 한국은 별도의 시드 없이 추첨으로 대진표가 정해져, 매년 태풍의 눈이 등장하곤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전통의 강팀은 존재하기 마련이었고, 선유고등학교 역시 우승 예상 학교 중 하나로 꼽혔다.
선유고의 1회전 상대는 유강고등학교로 전국 급으로 눈에 띄는 선수는 없지만, 견고한 수비와 팀워크가 돋보이는 팀이었다.
“이대로 쭉 이기면 준결승에서 주강고 만나겠네.”
박종열은 여러 사람을 거쳐 이미 너덜너덜해진 대진표를 보며 말했다.
“그 새끼 1차 지명받겠지? 유니콘즈 팬들은 벌써 말치연이라고 그러던데.”
“말치연은 뭡니까. 주강고면 이치연 아니에요?”
“팀 이름이 유니콘즈잖아. 유니콘은 말이니까, 말치연이라고 부르는 거지, 뭐.”
그것도 모르냐는 타박과 다르게 박종열은 퍽 자세하게 후배에게 설명했다.
작년 성적 10위를 기록하며 전국 1차 지명권을 얻은 유니콘즈가 이치연을 뽑을 것이란 소문은 이미 파다했다. 유니콘즈 단장이 최근 주강고 경기에 출석했다니, 헛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국 야구 팬 사이트 중 가장 큰 <그깟 공놀이!>의 유니콘즈 팬들은 벌써 이치연에 거는 기대가 상당했다.
‘우리 갓차. 이치연.’, ‘믿음의 말치연! 기다린다.ㅜㅜ’, ‘치연아 유니콘 타고 천천히 빨리 와.’
임성은 아침 일찍부터 러닝과 스트레칭, 웨이트, 투구 폼 조정 등 개인 연습에 매진했다. 작년 하반기부터 급격히 떨어진 구속은 좀처럼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슬슬 초조함이 느껴져 쉬는 시간에도 공을 던지는 동작을 반복했다.
손가락을 좀 더 벌려야 하나. 아니면 손목을 좀 더 세우고 어깨를 내려 볼까. 당장 내일모레 황사기인데, 그전까지 고칠 순 있을까.
“임성. 영어 숙제했냐?”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임성의 어깨를 누군가 툭 쳤다.
“숙제 좀 보여 주라. 일생일대의 소원이다.”
같은 반 친구 놈이 곤란한 표정으로 양손을 딱 붙인 채 애원했다.
“또? 넌 일생일대의 소원이 벌써 몇 번째냐?”
“오늘 밤부터 야구부 우승하라고 물 떠 놓고 기도할게. 딱 한 번만. 어?”
“기도 안 해도 잘하니까 이따 매점에서 빵이나 사 주든가.”
“그럼, 그럼. 내가 또 임성 전용 빵셔틀 아니겠냐?”
“미친놈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친구의 말에 픽 웃으며 가방을 뒤지던 임성이 서랍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겹겹이 쌓인 노트 중 영어만 없었다. 분명, 아침에 부실에서 숙제 했는…… 아, 거기 놓고 왔나?
“부실에 놓고 온 것 같다. 금방 갖고 올게.”
“빨리 튀어 갔다 와라. 쉬는 시간 다 끝나겠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야구부실을 향해 뛰었다. 점심시간 끝 무렵인데도 복도엔 잡담 중인 아이들로 가득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막 부실에 도착했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이 닫혀 정확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누가 있나? 고개를 갸웃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양민성. 이영해, 지용우. ……서찬규.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 봐라.”
문 입구에 우뚝 선 임성이 싸늘하게 말했다.
불도 켜지 않은 부실 안, 탁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양민성이 벽에 붙어 선 서찬규를 향해 야구공을 던지고 있었다. 서찬규는 턱 아래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양민성. 뭐하고 있냐?”
“오, 정의의 사도 등장.”
임성을 힐끔 쳐다본 양민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손에 쥔 공을 서찬규에게 던졌다. 손목이 뒤로 꺾일 정도의 강속구였다.
뻑! 공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서찬규의 가슴팍에 맞고 떨어졌다. 윽. 서찬규가 허리를 구부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양민성, 너 미쳤냐!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성큼성큼 걸어간 임성은 서찬규 앞을 막아서며 양민성에게 소리쳤다. 머리에 열이 확 올라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이거 지금 선후배 간에 신뢰 쌓는 거야. 장난이라고, 장난. 야, 서찬규. 대단하신 주장님께서 오해하기 전에 네가 설명해 봐.”
양민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임성의 등 뒤에 있는 서찬규에게 눈짓했다. 서찬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껏 몸을 움츠렸다. 창백한 얼굴엔 상대방을 향한 깊은 두려움과 공포가 번져 있었다.
이건 도를 지나친 장난, 아니게 어떻게 장난이야. 임성은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분노를 다스리려 애썼다.
“괜찮아. 말 안 해도 돼. 찬규야.”
“오오. 정의감 넘치는 주장님. 네가 그 새끼 엄마라도 되냐?”
책상에서 내려온 양민성은 건들거리며 다가와 임성과 마주 보고 섰다. 프로 선수와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덩치의 남자가 위협하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 새끼가 내 공 흘려서 내 기록 망했잖아.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교육 시키고 있었다. 선배로서 이 정도도 못 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애를 때려 가면서 교육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리고 공 개같이 던져서 얻어맞은 사람은 너면서 왜 엄한데 화풀이 하냐?”
“자격? 우리 부모님이 야구부에 내는 돈이 얼만데, 이 정도 자격은 되지 않냐? 여기 있는 물건 중 반은 우리 엄마가 낸 돈으로 산 거잖아. 네가 맨날 공을 쳐 던지는 야구공이랑 그물도. 알아 처먹었으면 상관하지 말고 좀 꺼져.”
“찬규한테 사과부터 해라. 추잡하게 굴지 말고 선배면 선배답게 굴어.”
“애들이 주장이라고 떠받드니까 진짜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그래 봤자 넌 야구부 따까리야. 야, 임성. 누구 덕에 네가 여기서 훈련받는데? 회비도 제대로 못 내는 거지새끼 주제에 어딜 나서?”
양민성이 임성의 가슴팍을 툭툭 밀며 비아냥을 뱉었고, 임성은 제게 쏟아지는 모멸스러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너 지원받는 조건으로 야구부 잡일 담당하잖아. 카악. 퉤. 뭐 해, 안 닦고?”
사실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듯 취미와 생업은 무게가 달랐다. 그것은 비단 마음가짐뿐 아니라, 거기에 드는 시간과 돈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공과 글러브만 있으면 될 것 같던 야구 역시 걸치고 움직이며 배우는 모든 것이 돈이었다. 매달 내는 부비를 비롯해 방망이, 글러브, 징이 박힌 스파이크 같은 소모품과 전지 훈련이라도 잡히면 기백은 깨졌다. 그뿐 아니라 아침, 저녁 식대와 구장에 갈 때 대절하는 버스 대절료, 재활 비용 등 많게는 1인당 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그것도 1년이 아닌 한 학기 동안.
아무리 학교와 동문회에서 기부받아도 한계가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부모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더 많이 내는 사람과 덜 내는 사람이 나뉘었다.
대놓고 말하는 애들은 없었지만, 다들 은연중에 누가 어떤 혜택을 받는지 알 것이다.
임성의 집안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한 달에 약 70만 원 남짓한 부비도 못 내는데 학부모 회비를 낼 수 있을 리가.
1학년 땐 당시 감독님의 배려하에 도움을, 2학년부터는 특기생으로 야구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감사한 혜택이라는 건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야구부 일에 더욱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네가 애들을 괴롭힐 이유가 되진 않아. 다수가 한 명을 세워 놓고 이러는 게 말이 되냐? 헛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사과나 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시든가요. 사과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바닥에 침이나 닦아. 흔적 안 남게 박박.”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양민성이 발끝으로 대걸레를 툭 건드렸다. 탁! 걸레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손잡이 부분이 탁한 침으로 범벅됐다.
“깨끗이 닦고 저녁 훈련 때 봅시다. 임성 주장님.”
양민성은 끝까지 비아냥댔다.
그와 함께 있던 아이들은 임성의 눈치를 보다가 주춤주춤 양민성을 쫓아갔다.
후우. 임성은 한숨을 내쉬며 서찬규의 어깨를 짚었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렸다.
“공 맞은 덴 괜찮아? 양호실 가자, 찬규야.”
“괜찮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죄송합니다.”
“피해자는 넌데 네가 왜 죄송해. 언제부터 이랬냐? 오늘이 처음 아니지? 신고할래?”
“전 괜찮아요. 말 하지마세요.”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게 보여 더 묻지 않고 양호실에 꼭 가라는 당부와 함께 그를 보냈다.
그리고 바닥에 구르는 공을 정리하고, 가래가 묻은 바닥을 대걸레로 닦았다. 하아.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 * *
임성은 그 후에도 서찬규에게 그 일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다만, “내가 책임질 테니까 언제든 얘기해라.” 하고 몇 번이나 말했을 뿐이었다.
원래도 임성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양민성은 그날 일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매일같이 시비를 걸어 댔다. 대놓고 쌍욕을 퍼붓거나 따돌리는 건 아니지만, ‘부모님’ ‘회비’ ‘지원’ 누가 들어도 예민한 주제를 입에 올리며 자존심을 건드렸다.
임성은 감독을 찾아가 그날 부실에 있었던 일에 관해 말했다. 서찬규의 이름은 끝까지 함구했으며, 개인적인 감정은 싣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감독은 임성이 말하는 내내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한참 뒤에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육중한 몸매에 눌린 소파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푹 꺼졌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뭐냐? 민성이가 애들 때리기라도 한다는 거야?”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때…….”
“그게 아니면 뭐가 문젠데? 한창때 남자애들끼리 서로 부대낄 수 있는 거고, 지적 좀 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도 요새 기강이 엉망이라 고민이었는데, 민성이가 잘 잡았네.”
“감독님. 그냥 놔두면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냥 두라는 말 못 들었어? 꼴에 팀 에이스라고 오냐오냐해 줬더니 눈에 뵈는 것도 없냐? 아니, 이제 에이스도 아니지. 주강고 이치연이, 걔는 최고 구속 153km/h까지 찍어서 학교 우승까지 턱턱 시켜 주는데. 넌 주장이라는 새끼가 분란을 일으키려 해?”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튀었다.
“임성. 너 이리 가까이 와 봐.”
감독은 꼬았던 다리를 풀며 손가락을 까딱여 임성을 불렀다. 임성은 양손을 등 뒤로 돌린 채 감독에게 앞에 우뚝 섰다.
“저번부터 내 말 안 듣고 뻗대는 걸 보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보네. 전 감독이 예뻐했다고 나도 그럴 것 같냐?”
“아닙니다.”
“그래. 회비도 못 내는 놈이 뭔 빽이 있겠냐. 어휴.”
쯧, 감독이 혀를 찼다.
“앞으로 경기 안 뛰고 싶어? 인생 한번 망쳐 볼래?”
말하면서 더 화가 나는지 감독의 숫제 화난 코뿔소처럼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 탁자를 쿵쿵 치다가 글로브를 임성에게 던졌다.
뻑! 단단한 공을 잡으라고 만든 장갑이라 무게감이 있었다. 예상치 못하고 왼쪽 어깨를 맞은 임성은 순간적으로 비틀댔다가 바로 섰다. 여기서 아픈 티를 냈다간 훈련이 덜 됐다며 더 심하게 굴 것이다.
“성아. 이거 내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프로 선배로서 충고하는 거라고. 모르겠어?”
거멓게 색이 죽은 입 사이로 담배 전 내가 났다.
“지금 학부모회에서 네 얘기 나오는 거 아냐? 다들 불만이 크시다. 내가 그거 막는다고 얼마나 애쓰는 중인데. 눈치라도 챙겨야지 않겠어?”
임성의 고개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말고 공이나 제대로 던져. 고3 새끼가 제대로 된 변화구 하나 없어, 구속도 느려. 저것도 투수라고.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
임성은 양민성에 관한 그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충고를 빙자한 폭언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 * *
「오늘의 고교야구! 주강고등학교
주강고등학교 투수 이치연(18·우투우타)은 최근 신라고등학교와 치러진 연습 경기에서 5이닝 동안 총 7개의 탈삼진과 5개의 피안타를 허용, 2실점(비자책)을 했다. 수비의 실책이 아니었다면, 퍼펙트까지 노려볼 만한 상황이었다.
189cm의 장신에서 내려찍는 패스트볼은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 최근 153km/h까지 찍었다.
작년 10위를 기록하며 전국 지명권을 갖게 된 유니콘즈의 스카우터가 주강고에 방문해 이치연을 체크했다.
현재로선 유니콘즈 지명으로 이치연이 가장 유력한 상태. 같은 전국 지명권을 가진 9위 이솔 페어리즈와 8위 엘화 바이킹스 역시 이치연을 주목하고 있다.
-아마야구’S 고경호 기자. ([email protected])」
“…….”
임성은 휴대폰을 엎어 놓고 뻣뻣한 글러브를 몇 번이나 매만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길들여 놔야 글로브를 벌리고 닫기에 편했다.
“쓸 만해요?”
“쓸 만하다 뿐이냐. 새 글러브인데도 손에 착 감긴다. 완전히 길들면 엄청 편해지겠어.”
어느새 곁에 다가온 김희도를 향해 웃으며 주먹으로 글러브 안을 쳤다.
팍, 팍. 공을 잡을 때와 다른 소리가 울렸다.
“내가 받아도 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루 30분 공부 알려 준 대가치고는 너무 커.”
“대가는 주는 사람이 정하는 겁니다.”
무심히 대답한 김희도는 임성의 앞에 서서 배트를 짧게 쥐었다.
“여기서 스윙 하게?”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보통 훈련이나 정보 교환 등의 이유로 타자와 투수조로 나뉘어 연습했다. 지금 임성이 서 있는 곳 역시 투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물을 향해 공을 던지는 중이었다. 김희도는 타자들 쓰는 넓은 공간을 두고 굳이 여기서 연습하려는 것이었다.
뭐, 어디서 하든지 본인 마음이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글러브 길들이는 것에 집중하는 찰나, 임성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야. 김희도.”
다급한 목소리에 김희도가 배트를 쥔 채로 임성을 쳐다봤다. 임성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에게 빠르게 걸어가 손을 덥석 쥐었다. 툭. 그의 손에서 떨어진 배트가 바닥을 굴렸다.
순식간에 코끝으로 스미는 더운 기운에 김희도는 무의식중에 상체를 젖혔다가 이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허리를 세웠다.
“너 이 자식. 관리 안 하냐?”
훈련장을 울리는 목소리가 제법 크고 거칠었다.
임성이 부원들에게 이런 식으로 화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몇몇 아이들이 연습하다 말고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성은 더욱 미간을 구기며 한 손으로 김희도의 손목을 붙들고 다른 손으론 그의 검지 끝을 살짝 쥐었다.
“나 좀 따라와라.”
나무라듯이 말한 임성이 김희도의 손을 천천히 놓고 훈련장을 벗어나 부실로 향했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김희도의 발소리가 들렸다.
금세 부실에 도착한 임성이 빈 의자를 턱짓했다. 아무 말도, 이유도 묻지 않고 얌전히 앉은 김희도 앞에 의자를 끌어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단추 안 떨어졌는데요.”
“단추 같은 건 100개 더 떨어져도 상관없어. 손톱 깨진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아.”
“넌 야구 선수라는 놈이 손톱이 깨진 것도 몰라?”
“왜 화냅니까?”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임성은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김희도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진 손톱으로 스윙 하는데 화 안 나게 생겼냐? 너 그거 잘못하면 손톱 날아가.”
김희도는 약통에서 소독약과 반창고를 꺼내는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제 손을 내려 봤다. 검지 손톱 끝부분이 조금 깨졌고, 염 틈새로 피가 살짝 배 있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혹은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상처였다. 실제로 아프지도 않았고.
“손 내놔.”
임성은 다시금 목소리를 내리깔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렇지 않은 김희도를 보니 속이 터졌다.
공을 던지고 치려면 손이 중요했다. 야구는 팔 힘이나 손목 각도, 심지어 손톱 길이 때문에 폼이 바뀌곤 했다. 아주 약간의 차이로 공을 맞출 수도, 헛스윙을 할 수도 있다.
꼭 그뿐이 아니라 깨진 손톱에 공을 맞았다간 손톱이 빠지거나 살을 파고드는 일도 허다했다. 그래서 투수들은 투구 연습 전에 다섯 손가락 모두 테이핑을 꼼꼼히 했다. 타자도 크게 다르지 않는데, 알 만한 놈이 이러니까 더 화나고 신경 쓰였다.
임성은 순순히 내미는 손을 조금 거칠게 낚아채며 자세히 살폈다. 굳은살이 곳곳에 박인 단단한 손바닥과 달리 손등은 희고 부드러우며 손가락은 하나같이 길고 곧았다. 거친 야구 배트보다 피아노 건반을 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생김새가 우아했다.
하지만 피아노에 넘겨줄 수 없단 말이지. 앞으로도 공을 뻥뻥 쳐 댈 소중한 손이라고.
“맘에 들어요?”
머리 위로 무심히 떨어진 목소리에 임성은 그제야 자신이 김희도의 손을 지나치게 관찰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크흠. 금세 목을 가다듬고선 깨진 손톱 부분을 조심스레 깎아 냈다. 그리고 손톱에 찔리는 일이 없도록 둥그스름하게 갈았다. 슥슥슥 소리와함께 어긋난 부분이 부드럽게 다듬어져 갔다.
“줄까요?”
“아까부터 뭔 소리냐, 뭘 줘?”
임성은 손톱 다듬는 것에 집중하느라 고개를 숙인 채였다. 동그란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문득 얼굴이 보고 싶었다.
김희도는 망설이지 않고 정수리에 시선을 꽂은 채 입을 열었다.
“내 손.”
그제야 임성이 얼굴을 들었다. 마주친 시선이 퍽 만족스러웠다.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이젠 얘가 농담도 다 하는구나. 무심한 표정에서 나오는 농담은 생각보다 신선해 웃음이 났다.
“그래. 앞으로 안타랑 홈런 많이 쳐 줘.”
미소를 매단 채 손톱 정리를 마저 끝내고 꼼꼼하게 테이핑을 했다.
김희도는 테이핑 된 손가락이 퍽 신기한 듯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폈다. 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도는 모습이 신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러니까 꼭 애 같네. 아니, 애가 맞지. 자꾸 잊는데 쟨 고작 열일곱 살밖에 안 됐다.
* * *
황금사자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선유고등학교 야구부는 훈련 대신 야구장을 찾았다. 프로 야구 경기가 한창 열리는 잠실구장 견학이었다.
“혹시라도 사고 치는 새끼 있으면 단체 기합이니까 알아서들 조심해라. 임성, 조예준. 애들 잘 지켜봐. 무슨 일 있으면 책임은 너희가 진다. 알았냐?”
“예. 조심하겠습니다.”
코치의 말에 임성과 조예준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코치는 잔뜩 신난 아이들을 한 번 더 보고선 감독과 함께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임성은 벌써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부원들을 겨우 수습해 자리에 앉았다.
HR 유니콘즈와 MK 엠퍼러즈, 인기 팀끼리 맞붙는 경기라 평일임에도 관중이 제법 많았다. 여러 종류의 유니폼을 입어 알록달록한 관중들 사이에서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빡빡이들은 유난히 튀었다. 유니폼 상의 한가운데 「선유(先喩)」 하고 떡하니 붙어 있으니, 웬만한 담력이 아니고서야 탈선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애국가가 흐르자 더그아웃 앞에 일렬로 선 선수도, 딴짓하던 관중들도 모두 일어서서 한 손을 반대편 가슴에 얹었다. 카메라 감독이 빠르게 움직이며 선수들을 차례대로 찍었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가 끝나자 다들 박수를 치며 착석했다.
“음료수 사러 갈 건데, 먹고 싶은 거 말해. 말 안 하면 아무거나 사 온다.”
오렌지 주스요, 전 알갱이 톡톡 알로에요, 초코 우유요. 부원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며 두서없이 외쳤다.
쟤는 오렌지 주스, 쟤는 알로에…… 또 쟤는 이온 음료. 손으로 꼽다 보니 헷갈렸다.
“그냥 이온 음료로 통일한다. 이의는 안 받는다.”
그런 게 어딨냐며, 독재 정치라고 불만을 토해 내는 부원들을 모른 척하며 일어섰다.
“주장님. 나는 모카 우유.”
“박종열. 이온 음료로 통일한다는 말 못 들었냐? 뒷북치지 말자.”
“야. 맨날 마시는 그놈의 이온 음료, 지겹지도 않냐? 존나 싫어. 난 모카 우유 사 줘.”
징징대는 박종열을 무시하고 일어서자 조예준이 얼른 따라왔다.
“같이 가요.”
“조예준. 넌 여기서 애들 감시해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임성이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에두른 거절에 조예준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민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성은 구장을 나가기 전 양민성 무리를 힐끔 쳐다봤다. 그들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다소 방만한 자세로 잡담 중이었다. 경기 볼 생각은 있는지, 귀중한 시간에 굳이 야구장에 왜 데려왔는지 모르나?
속으로 한숨을 쉬며 걷는 임성의 뒤로 다른 발소리가 겹쳤다. 일정하고 차분하게 이어지는 발소리는 주인의 성격을 꼭 빼닮았다.
임성은 모른 척 걷다가 편의점 간판이 보이자 불시에 뒤를 돌았다. 시큰둥한 표정의, 주변 일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김희도가 보였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따라온 게 처음은 아니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화장실 가려고?”
“편의점.”
“나도 편의점 가는데, 살 거 있으면 미리 말하지.”
“그래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래서라는 말이 왜 나오는 거지. 김희도는 고개를 갸웃하는 임성을 지나쳐 편의점 문을 열었다가 임성이 들어오고 나서야 문을 잡고 있던 손을 놨다.
외야 쪽엔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이라 술이나 과자, 간편 식품을 사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임성은 김희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얼른 그의 곁에 붙어 섰다.
그러게 그냥 구장에 있지. 거긴 야외라서 좀 나을 텐데.
임성은 감독과 코치에게 줄 커피를 제외하고 판매대에 진열된 이온 음료를 거의 쓸다시피 담았고, 김희도는 바나나 우유와 딸기 우유맛 막대 사탕 하나를 샀다.
직원은 임성과 그 뒤에 있는 김희도를 힐끔 쳐다보고 계산을 시작했다. 삑삑. 봉지에 열심히 담는데, 와아- 저 멀리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홈런이라도 친 건가? 누가 쳤지? 급한 마음에 봉지로 옮겨 담는 손길이 빨라졌다.
“감사합니다.”
직원에게 인사한 임성이 다소 빠르게 구장으로 향했다.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지가 흔들릴 때마다 그 안의 음료들이 부딪히며 잘그락 소리가 났다.
봉지를 고쳐 쥐려고 살짝 손에 힘을 푼 사이, 옆에서 불쑥 나온 손이 두 개 다 빼앗아 갔다. 임성은 순식간에 텅 빈 손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무거워 보여서.”
“전혀 안 무거웠는데. 그리고 이런 건 선배가 하는 거야. 이리 줘.”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본 김희도의 눈썹 끝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못마땅해하는 것이었다.
“이런 건 선배가 아니라 한가한 사람이 하는 거 아닌가요?”
“어?”
“뭐든 다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굳이 모든 일을 도맡을 필요는 없잖아요.”
김희도는 제 할 말만 내뱉고 앞으로 걸어갔다.
나서지 않아도 된다니. 너무 나댄다는 말을 돌려 하는 건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생각하다가 뒤늦게 그를 쫓아갔을 땐, 이미 구장에 도착한 뒤였다.
때마침 이닝이 종료됐는지 공수 교대가 이뤄지고 있었다. 김희도는 박종열에게 음료수가 든 봉지를 던지다시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예를 들어 이런 사람이요.”
복부를 강타하는 묵직함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던 박종열은 이 자식은 뭐냐,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 좀 나눠 주세요. 미지근해지기 전에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치. 미지근한 건 안 되지.”
미지근한 이온 음료가 얼마나 맛없는지 아는 박종열은 얼떨결에 음료수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이들의 손엔 이온 음료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임성은 봉지가 텅 빈 후에야 제 것을 빼고 샀다는 걸 깨달았지만, 다시 사 오는 것도 귀찮아 그냥 자리에 앉아 경기에 집중했다.
“어, 때렸다. 오, 잡았네.”
빠르게 뻗어간 타구는 워닝 트랙 앞에서 우익수에게 잡혔다. 홈런성 타구가 아웃 처리되며 전광판에 스트라이크를 뜻하는 빨간 불이 하나 더 켜졌다.
원정팀 팬들은 뛰어난 수비를 보여 준 선수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사실 선수들의 플레이나 전체적인 흐름은 직관보다 해설이 곁들어진 TV로 보는 게 더 정확했다. 하지만 현장은 현장에서밖에 느끼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 매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그라운드를 눈으면서 느끼는 설렘과 긴장감.
그리고 결정적으로 순식간에 플레이가 지나가기 때문에 열 받을 일이 적다고 할까? 집에서 보면 실책 등이 아주 자세하게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곤 했으니까.
“벌써 이닝 교체네. 스피드 게임이구만.”
홈팀인 엠퍼러즈의 공격이 끝나며, 양 팀 공수가 교체됐다. 임성은 마운드로 천천히 향하는 투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미래를 떠올려 봤다.
자신도 언젠가 저기 서게 될 날이 올까?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아 양손을 턱밑에 댄 채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거요.”
“응? 이게 뭔데?”
복잡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보던 임성이 고개를 돌렸다.
“바나나 우유.”
정말 몰라서 물은 건 아니잖아. 가운데가 뚱뚱한 노란 우유를 보다가 김희도를 쳐다봤다.
이쯤이면 김희도를 대충 파악했겠구나. 싶을 때쯤, 의외성을 보였다. 여전히 모르겠단 말이었다.
“나 마시라고?”
김희도는 대답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임성이 웃으며 손끝으로 김희도의 머리를 헝클이듯이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감촉이 꽤 좋았다.
임성은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고 다시 김희도에게 돌려줬다. 왜 다시 줘요? 의외로운 표정을 하는 그의 뺨을 살짝 두드리며 웃었다.
“고마운데, 너 마셔. 이따 당 떨어지면 말할 테니까, 그때 한 입 줘.”
우와아아! 마지막 말은 관중 함성에 완전히 파묻혔다. 김희도와 대화하던 임성이 목을 쭉 빼고 얼른 그라운드를 살폈다.
따악! 강하게 뻗어간 타구가 포물선을 그리며 절묘한 위치에 떨어졌다. 좌중간을 가르는 안타였다.
3회 초, 양 팀 다 합쳐 처음으로 주자가 베이스를 밟았다.
“저 타자 이번 FA로 바이킹즈에서 이적했지?”
“어. 에이징 커브 온 선수 데려왔다고 난리 났더니만, 역시 짬은 어디 안 가네. 지금 타율도 꽤 높을걸.”
정의영이 1루 베이스를 밟은 선수를 턱으로 가리켰다.
베이스에 주자가 있는 게 신경 쓰였는지 엠퍼러즈 투수가 견제구를 던졌다. 하지만 서로 사인이 안 맞았는지, 제구 난조였는지 공은 1루수의 어깨를 훌쩍 넘었다. 당황한 1루수가 얼른 공을 잡았지만, 주자는 이미 2루로 뛴 후였다.
“헐. 저기서 송구 실책이 나오네. 역시 프로의 벽이 높긴 높다. 저 투수, 고등학생 때 완전 날아다녔잖아. 계약금도 엄청 받았을걸. 우리 저 학교랑 붙어서 쪽도 못 썼었잖아.”
정의영이 이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엠퍼러즈의 투수를 보며 말했다.
고등학교 때 아무리 날고 기었던 선수라도 프로에 와선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나마 저 투수는 고교 성적이 워낙 좋고, 재작년 최대어 중 한 명이라 2년 차에 1군에 올라왔지만.
좀 던진다, 친다 하는 선수들도 1군 무대를 제대로 밟지 못하고 방출되는 게 허다한 게 현실이었다.
임성은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투구 폼을 주의 깊게 봤다.
존에 걸치는 스트라이크, 볼, 볼, 볼. 스트라이크, 볼. 결국 포볼. 압도적인 구위의 빠른 공은, 그러나 포수 미트에 꽂히지 않았다. 조금 전 실책으로 멘탈이 흔들린 것 같다.
“꼭 공부하는 것 같네요.”
경기를 즐기는 부원들과 다르게 심각한 표정을 한 임성을 보며 김희도가 말했다. 임성은 제가 조금 전까지 끼적이던 노트를 내려다봤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글씨는 여전히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순수하게 즐기진 못하지.”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투수의 구종과 구속을 자꾸 살피고 기록하는 건.
『아, 여기서 엠퍼러즈가 투수를 교체합니다. 강주한이 내려가고 이현성이 올라오네요.』
해당 투수는 결국 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에 내려갔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새로 오른 투수가 뿌린 공이 허공을 갈랐다.
“어, 어어. 어? 넘어간다. 헐, 넘어갔다. 대박.”
부원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부원들의 고개가 전광판 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공을 따라 돌아갔다.
원정팀인 유니콘즈 4번 타자가 화려한 홈런포를 터트렸다. 벌떡 일어선 원정팀 팬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4번이 마킹된 유니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선유고 야구부원들 역시 와아, 감탄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의 희로애락이 갈리는 야구란, 참 신기한 스포츠였다.
“비거리 완전 대박.”
5회가 끝나자 그라운드 정비가 시작됐다. TV에서는 지금쯤 하이라이트나 광고 등이 나오겠지만, 실제 구장에서는 여러 이벤트가 벌어졌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혹여 누가 시비 걸어도 무조건 피해라.”
조예준이 일어서자 부원들 몇몇이 그를 따라갔다.
선유고 야구부가 앉은 3루에서 조금 떨어진 홈 응원단석에서 응원단장이 호응을 유도 중이었다.
“오늘도 잠실구장을 찾아 주신 관중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한 이벤트가 준비돼 있으니,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자, 특별한 이벤트가 뭐냐! 바로 우리 팀 박주형 선수의 사인 유니폼과 유니콘즈 김이설 선수의 모자를 받아 갈 있는 기회 입니다. 김이설 선수가 박주형 선수에게 개인적으로 준 걸 주형 선수가 기부해 줬습니다. 자, 그럼 엠퍼러즈 팬분들도 원정 팬분들도 다들 같이 신나게 즐겨 주세요. 댄스 타임! 쉐낏, 쉐낏!”
응원단장의 신나는 목소리와 앰프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조금 전까지 라인업과 시합 상황이 떠 있던 전광판 상단에 『♥Kiss me♥』라는 문구가 뜨며 관중석을 비췄다.
이제 막 교제를 시작했는지, 아니면 단순 친구 사이인지 모를 남녀 둘은 전광판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가 이내 남자의 목을 휘감고 저돌적으로 뽀뽀를 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야, 봤냐? 좋겠다.”
선유고 야구부원들 역시 휘파람을 불고 발을 바닥에 구르는 등 난리가 났다.
그다음엔 엠퍼러즈 마스코트 머리띠를 사이좋게 쓴 중년 부부였다. 남편이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카메라를 향해 흔들었다. 쪽,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번에도 박수가 터졌다.
“어?”
한창 웃으며 보던 중 갑자기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 떴다. 아니, 많이 보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저거 설마 나야?”
짓궂은 카메라 감독은 장난으로 가끔 동성 둘을 잡아 줄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임성은 저와 함께 화면에 비친 김희도를 보곤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당황한 표정이 화면에 그대로 잡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무 반응도 못 하는 사이 옆에서 “뽀뽀해! 뽀뽀해!”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까지 불끈 쥐고 열렬히 외치는 박종열을 본 다른 아이들까지 얼떨결에 호응했다. 관중들 역시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임성이 김희도를 곁눈질했다. 꽉 다문 입매와 무심한 눈동자는 오늘도 무슨 생각 중인지 짐작가지 않았다.
“오, 야구 선수로 보이는 두 사람이 잡혔습니다. 과연 스포츠 소년들의 끈끈한 우정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이벤트 상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응원단장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게 울렸다.
이벤트 상품이 김이설 선수 모자라고 했나? 그냥 모자도 아니고 직접 썼던 것. 이대로 놓치기 너무 아까운 기회였다.
임성은 결심한 듯 숨을 짧게 내쉬며 김희도의 뒤통수를 감싼 후 제 쪽으로 당겼다. 입술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김희도의 입을 가린 마스크를 슬쩍 내렸다. 날렵한 콧날 아래 윗입술과 도톰하고 붉은 아랫입술이 언뜻 드러났다.
기분 탓인가, 주변에서 감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전광판에 김희도와 자신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건 기분 탓이 아닌 것 같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설 순 없었다. 그래도 선밴데 설마 때리겠냐? 모자를 받을 수 있다면 한 대쯤, 아니 세 대 정도는 맞을 용의가 있었다.
“김희도. 나 믿지? 모자 때문이니까, 기분 더러워도 조금만 참아 주라. 진짜 미안.”
서로가 내뱉는 숨이 느껴질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속삭이듯 말한 임성이 그의 손에서 바나나 우유를 빼앗아 와 입술을 가렸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흩어진 숨이 임성의 입술 위에 닿았다.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임성은 숨을 멈춘 채 우유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아주 절묘한 위치라 화면상에서는 마치 뽀뽀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야! 역시 화끈하네요. 관중 여러분, 야구부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 부탁드립니다.”
삑, 삑. 응원단장의 멘트에 박수와 휘파람이 쏟아졌다. 누가 봐도 장난이었고, 농담으로 넘길 만한 분위기였다.
당사자만 빼놓고는.
임성의 노력이 무색하게 경품은 첫 번째 젊은 남녀에게 돌아갔다. 내심 기대하고 있던 임성은 입맛을 쩝 다시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싸가지가 아니라 나랑 했으면, 완전 찐하게 뽀뽀하고 상품 탔을 텐데. 그치, 자기야?”
조예준이 자릴 비운 틈에 냉큼 옆에 앉은 박종열이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미친놈 보듯 하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쭉 내민 입술을 뻐끔대기까지 했다.
“지금이라도 해 볼래? 혹시 아냐, 남는 거라도 줄지. 이리 좀 와 봐. 우리 사이 너무 멀지 않냐?”
“미친놈아.”
웃음 섞인 욕설을 들은 박종열은 상체를 내밀며 임성의 양쪽 뺨을 감쌌다. 그리고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천천히 다가왔다. 이 또한 장난에 지나지 않았고, 선배들의 장난에 후배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야. 여기 누가 카메라 감독 좀 데려 와라.”
“에이, 종열 선배. 고개를 더 꺾으셔야죠. 주장, 종열 선배 좀 받아 주세요.”
모처럼 들뜬 분위기에 임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박종열의 어깨를 짚었다.
어울리지 못할 장난도 아니고, 다들 즐거워한다면 이쯤이야.
어깨를 짚었던 손으로 박종열의 턱을 감싸며 막 얼굴을 드는 순간,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뒷덜미를 콱 움켜잡았다.
“헉!”
반쯤 기울어져 있던 상체가 뒤로 쑥 끌려가며 유니폼 상의가 목을 조였다.
“뭐야, 무슨 짓…… 김희도? 어, 야? 잠깐만.”
무표정한 김희도가 뒷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덩달아 딸려 일어난 임성이 거의 끌려가다시피 뒤로 걸어갔다.
뭔데, 쟤들 뭐하냐. 한창 신나게 떠들던 부원들이 놀란 기색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김희도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장 밖으로 나갔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다가 분위기도 흉흉해 아무도 두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
“종열 선배님. 희도 왜 저래요?”
“난들 아냐. 전광판에 잡혀서 빡친 거겠지. 저 새끼 결벽증이잖아. 그 와중에 사내새끼가 들이댔으니 얼마나 짜증 나겠어. 난 이해해.”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놔둬. 임성이 알아서 하겠지. 1학년이 선배에게 뭘 어쩌겠어.”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박영빈이 조심스레 말했다. 박종열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남은 음료수를 탈탈 털어 마셨다.
때마침 6회가 시작했고, 원정팀의 안타가 터지자 모두의 관심이 그라운드에 쏠렸다. 어느새 아이들은 두 사람을 잊고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역시 야구는 난타전이 재밌었다. 물론, 직접 뛰는 선수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진짜 잘 맞았다. 엄청 멀리 뻗어 가네요.”
타이밍 좋게 돌아온 조예준이 전광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빈자리를 보고 “주장 어디 갔어?” 하고 신입생에게 물었다.
“희도가 데려갔어요.”
“그 새끼가 왜?”
조예준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아까 둘이 카메라에 찍혔거든. 임성이 장난 좀 쳤는데, 열 받았나 봐. 표정 보니까 한 대 치겠더라. 어우, 무서워.”
얼어붙은 후배를 대신해 박종열이 대답했다. 미친, 이 새끼가 또. 조예준은 잇새로 욕을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조예준이 구장을 나가려는 기미를 본 양민성이 고개를 뒤로 쭉 빼며 소리쳤다.
“야, 조예준. 주장이라는 새끼가 자리 이탈했으면 너라도 지켜야지. 직관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지들 맘대로 왔다 갔다. 잘하는 짓이다.”
짜증이 선명히 밴 말투에 조예준이 엉거주춤 다시 앉았다. 양민성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혹시 이 일로 그가 임성에게 지랄할까 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입구를 곁눈질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각, 둘은 구장을 빠져나와 인적 드문 곳에 다다랐다. 키가 제법 큰 두 사람이 동시에 서도 가려지는 굵은 기둥이 보였다.
“김희도. 잠깐 손 좀 놓고 얘기하자.”
임성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성큼성큼 걷던 김희도는 사람이 없는 기둥 뒤에서 멈췄다. 임성은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무의식중에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광판에 뜬 것 때문이면 미안하게 됐다. 굳이 변명해 보자면, 내가 김이설 선수 팬이거든. 실착 모자 준다잖아. 근데 마침, 너랑 잡혀서…….”
널 불쾌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뜻이었는데, 왠지 말할수록 김희도의 얼굴이 점점 더 굳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차가운 느낌이긴 해도 지금은 누가 봐도 기분 나빠 보였다.
“그래서? 카메라에 잡힌 게 나여서 나한테 그랬다? 조예준이랑 잡혔으면 조예준이랑 했겠네요.”
만약 조예준이였다면 정색하는 대신 맞장구를 쳐 줬겠지.
하지만 왠지 그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누가 봐도 뻣뻣한 미소에 길게 뻗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좀 전엔 박종열 선배랑 키스라도 할 것 같던데.”
“뭘 그렇게까지 비약하냐. 당연히 장난이지. 걔랑 하면 서로 입 썩어서 안 돼.”
“무슨 그딴 장난을 해요? 아, 선배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죠. 아무나 만지고 껴안고 쓰다듬고.”
혼잣말처럼 빠르게 내뱉는 말엔 희미한 짜증이 배 있었다.
설마 지금 나 혼나고 있는 건가? 아니다. 김희도가 그럴 이유가 뭐 있겠어. 가뜩이나 기분 나쁜데 다 마음에 안 들어서겠지.
“표현이 너무……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어쨌든, 미안하게 됐다. 앞으론 조심할게.”
임성은 그저 자신의 기분 탓으로 돌리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당연히 조심해야지. 그리고 지금 할게요.”
뭘? 눈으로 묻자 김희도가 한 발짝 다가왔다. 잠시 멀어졌던 거리는 다시 발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며 서로 마주 보는 상태가 됐다.
“약속이요. 이번 주 아직 한 번 남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자신의 말꼬리를 따라 하는 김희도를 보며 콧등을 가볍게 쓸었다. ‘그렇긴 한데.’라는 말이 나올 상황은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임성은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이 살짝 들렸다가 내려가기가 무섭게 김희도가 자신의 마스크를 잡아 내렸다. 손힘을 이기지 못한 마스크 줄이 툭 끊기며 바닥에 떨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뺨을 간지럽히고, 목을 거칠게 파고든 숨이 살갗 위에 뜨겁고, 조금은 빠르게 내려앉았다.
임성은 본능적으로 긴장한 몸에 힘을 풀고 자신의 어깨에 턱을 얹은 김희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난히 동그란 뒤통수와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손끝에 감겼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도, 살짝 거칠게 들이켜는 목 울림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
얼마나 지났을까. 5분, 10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슬슬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애들 기다릴 텐데. 김희도의 등을 두드리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살짝 물려 그를 봤다. 눈가가 발그스름하게 물든 모습이 마치 활짝 핀 꽃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할 만한 얼굴이었다.
“김희도. 정신 차려.”
김희도는 그 어느 날 양호실에서처럼 숨을 뱉어 내지 않고 자꾸 들이켜기만 했다.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해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은 얼굴로 김희도가 말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괜찮은지 물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임성은 끝까지 미심쩍어하면서 입구를 가리켰다.
“그만 가자. 다들 걱정하겠다.”
“걱정하든지 말든지.”
살짝 거친 말소리에 함성 소리가 크게 섞였다. 구장 전체가 둥둥 울리는 걸 보니 역전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 믿냐고 물어봤죠? 아뇨. 안 믿습니다.”
어느새 한 발짝 물러선 김희도가 양손으로 제 코와 입가를 감싸며 말했다. 냄새를 막는다기보다 가두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김희도는 임성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그런 짓 할 땐 각오하세요. 난 선배 장난 따위에 어울릴 생각 없으니까.”
일방적으로 말을 내뱉은 김희도가 혼자 걸어갔다.
“……그렇게 싫었나? 오늘은 땀 안 났는데도 냄새 맡네.”
혼자 남은 임성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 * *
보통 밤 10시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훈련은 컨디션 조절이라는 명목하에 한 시간 일찍 끝났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고, 나머지는 남아서 개인 훈련을 했다.
임성은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열심히 훈련하고 조예준과 함께 황금사자기 1차전에서 맞붙을 학교의 전력 분석을 시작했다.
선발은 당일이 돼 봐야 알겠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선수들 위주로 정리했다.
“오진형이 선발로 제일 유력하겠지? 변화구 하나 더 장착했다며?”
“네. 오진형이 에이스니까요. 무슨 변화구요? 리그에선 안 던졌잖아요.”
“이번에 온 코치한테 커브 배웠다던데? 주 무기는 여전히 슬라이더겠지만, 다른 것도 염두에 두자.”
“요새 너도나도 다 새 변화구네요. 하필이면 우리랑 경기 직전에 변화구 배울 건 뭐래요. 짜증 나게.”
조예준은 한참을 툴툴대다가도 짐짓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머리를 맞댄 채 의견을 나눴다.
“음. 이 정도면 대충 정리된 것 같다. 감독, 코치님껜 내가 말할게.”
“네. 어디 가요?”
조예준이 임성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운동하려고.”
“또요? 요새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에요? 어제도 자정 넘겼다면서요.”
“이걸로 되겠냐? 더 열심히 해야지.”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임성이 웨이트실로 향했다. 운동장에 사람이 없다 했더니 다들 여기 와 있었나 보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걸 보니 오늘은 집에서 운동하라는 계시인가 보다.
할 수 없이 돌아서는데,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김희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여기 자리 없어. 야외에서 하든가 훈련장 가야 해.”
“선배는요?”
“나? 나는 집에 가려고. 이번 주 맨날 늦어서 동생들이 토라졌거든. 슬슬 안 풀어 주면 나랑 말도 안 할걸. 걔들 재우고 놀이터 가서 달리기나 스트레칭 해야지.”
임성은 오늘 아침에도 울고 불며 난리 치던 동생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동생들?”
“어. 쌍둥이 3, 4. 넌 운동 더 하려고? 열심히하고, 나중에 집에 가면 꼭 밥 챙겨 먹어. 내일 보자.”
손을 흔들며 김희도를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요.”
머릿속에서 저녁 메뉴를 떠올리며 걷던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김희도가 숨을 얕게 내쉬고선 빠르게 다가왔다.
“나도 갈게요.”
* * *
“들어와.”
임성이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문밖에서 잠시 머뭇대던 김희도는 누가 봐도 어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뭐가 많지? 집이 좀 어지러워.”
잡동사니 하나 없이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던 김희도의 집과 다르게 소파에 널브러진 아령, 표지가 너덜너덜한 만화책,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색연필. 한쪽 벽에는 여동생들이 그려 놓은 공주 그림이 스케치북에서 그대로 뜯어낸 상태로 붙어 있었다. 어딜 봐도 깔끔하다는 말은 안 나왔다.
“가족이 많아서 치워도 끝이 없네. 하하.”
머쓱하게 웃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었다. 김희도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가방을 내려놨다.
“임우, 임설. 사람이 왔으면 인기척 좀 내자. 어? 이놈들아.”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운동화를 보면, 쌍둥이들 다 집에 있는데 반응이 없었다. 임우, 임설! 임성이 다시 외치자 꽉 닫힌 방문 너머에서 “아, 왜!” 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게임 작작 해라.”
임성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손만 씻고 나와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빈 그릇에 옮겨 담았다. 달걀 두부 부침, 멸치볶음, 깍두기, 메추리알 장조림 등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었다.
“밥 금방 차리니까, 거기 앉아 있어. TV 봐도 되고.”
임성이 저녁을 차리는 동안 김희도는 거실에 멀뚱히 서서 주변을 돌아봤다. 임성의 집이란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그와 한 공간에 있어서일까.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달걀 프라이 두 개 괜찮지?”
김희도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더니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 두 명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세수라도 했는지 뽀얀 얼굴에 물기가 흥건했다.
신난 표정으로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김희도를 보고 멈칫했다.
누구야?, 몰라. 저들끼리 눈으로 얘기하고선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정확한 나이는 가늠되지 않았지만, 아주 어려 보였다.
김희도는 저 아이들이 임성의 쌍둥이 동생 3, 4라는 걸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그에게 딸기 무늬 우산과 곰돌이 도시락 통을 안겼던 애들.
눈이 가로로 길고 쌍꺼풀이 없어 살짝 날카로운 느낌이 나는 임성과 달리 여동생들은 눈동자가 크고 눈꼬리가 둥그스름했다.
“달걀 프라이 별로야? 그러면…… 어, 이림아. 세림아. 씻고 왔어?”
거실로 나왔던 임성은 김희도와 대치 중 여동생들을 발견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여동생들이 김희도를 일방적으로 구경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여자애들의 표정이 확 밝아지며 쪼르르 달려가 임성의 다리 한쪽씩을 붙잡았다.
“큰오빠.”
“이쪽은 오빠 친구야. 인사해야지.”
임성은 제 뒤에 숨는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만, 여전히 바지를 꼭 잡은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낯가림이 없고 활발한 애들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결국, 여동생들을 떼어 내는 데 실패하고 김희도를 향해 물었다.
“달걀 프라이 말고 달걀말이 해 줘? 아니면, 둘 다 별로?”
“아무거나.”
고개를 끄덕인 임성이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쫓던 여동생 둘 중 한 명이 김희도를 힐끔 곁눈질했다.
옆모습은 선배를 살짝 닮았네. 빤히 쳐다보자 쌍둥이 3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금세 다시 눈동자가 굴러갔다. 김희도는 여동생들을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고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몇 번이나 힐끔거리던 여동생 중 한 명이 조심스레 거실로 나왔다. 한 사람이 나오자 나머지도 따라왔다. 이내 똑같은 잠옷을 입은 여자애들이 올망졸망하게 서서 김희도를 올려다봤다.
“우리 큰오빠 친구예요?”
“내가 왜 저 사람 친구야.”
친구 같은 거 아니야.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에 아이들이 목을 움츠리며 발끝을 꼼지락댔다. 하지만 호기심, 혹은 호감이 무서움을 이겼는지 눈을 빛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빠 되게 잘생겼네요. 우리 오빠보다 쪼끔 더 멋있는 것 같아.”
“야, 임이림 우리 오빠가 훨씬 멋있거든?”
임세림의 핀잔에 임이림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통통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더니 저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보며 말했다.
“세림이 너는 이 오빠 안 잘생겼어?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봐.”
“그래도 성이 오빠가 더……!”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당당하게 말하던 임세림은 김희도와 눈이 마주치자 우물쭈물 말꼬리를 흐렸다. 마음은 당연히 큰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잘생겼다고 말하는데, 본능은 눈앞의 남자를 가리켰다.
하아. 임세림이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아, 누구 선택하지? 우리 오빠는 엄청 착하고, 다정하고…… 이 오빠는 얼굴이…….”
두 소녀는 큰오빠와의 의리와 본능 사이에서 심각하게 갈등했다. 김희도는 고민하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양 무릎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혔다. 한참이나 높았던 시선을 딱 맞추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선택할 필요 없어.”
“네?”
“선택 안 해도 된다고. 내가 야구 하는 동안 너희 오빠는…….”
마침 타이밍 좋게 임성이 주방에서 나왔다. 그는 김희도가 여동생들과 나란히 있는 걸 보고 살짝 놀랐다가 흐뭇하게 웃었다. 아마 자신이 동생들과 놀아 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 거거든.”
임이림과 임세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빠르게 깜빡였다.
큰오빠가 야구를 하는 것도, 눈앞에 있는 잘생긴 오빠가 큰오빠랑 같이 야구 하는 것도 알겠다. 근데, 마지막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
“사이좋게 놀고 있었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당연한 사실을 알려 주는 중이었습니다.”
어느새 허리를 편 김희도는 쌍둥이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임성을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애들도 밥 안 먹었을 텐데, 같이 먹어도 돼?”
“선배도 여기 있을 거면 상관없고요.”
임성은 김희도와 쌍둥이 여동생들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여전히 닫힌 문을 두드렸다.
“임우, 임설 저녁 먹어.”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보나 마나 게임 한다고 정신없겠지.
“나 들어간다.”
문을 벌컥 열었던 임성은 예상대로 게임 중인 남동생들을 보고 한숨을 내 쉬었다. 헤드폰을 끼고 있지 않던 놈은 자신을 보고 게임 종료 버튼을 눌렀으며, 다른 놈은 여전히 마우스와 키보드를 현란하게 움직였다.
“씨발. 거기서 궁을 쳐 쓰냐. 뻘궁 쓰지 말고 좀 찌그러져 있든가. 아, 개못하네.”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임성이 귀를 막고 있는 헤드셋을 들추자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임우. 본체 끄기 전에 알아서 나와라.”
쌍둥이 1, 2 중 둘째 임설은 형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금세 파악하고 주섬주섬 일어섰다. 그러나 임우는 하던 것까진 끝내야 하지 않느냐며 되레 신경질을 냈다.
“빨리 끝내.”
다행인지 아닌지, 얼마 안 있어 게임은 임우 팀의 패배로 끝났다. 그는 마우스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임성이 임우와 함께 식탁으로 왔을 땐, 여동생들은 열심히 밥을 먹는 중이었고, 김희도는 마스크를 코끝까지 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맨얼굴이었는데 마스크는 언제 쓴 건지.
“아, 형. 반찬 좀.”
쌍둥이1,2는 제 형이 누군가를 집에 데려오는 것이 퍽 익숙한 듯 김희도를 보고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김희도도 마찬가지라 그들은 서로 없는 사람 취급 중이었다.
임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또 두부 부침이냐. 달걀 프라이 좀 그만해라. 맨날 달걀 프라이, 달걀말이, 달걀 국. 지겨워 죽겠다. 차라리 라면 먹는 게 훨씬 낫겠다.” 등 어린 여동생도 안 하는 반찬 투정을 했다. 임성은 뭔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김희도를 의식하고 달래는 것을 택했다.
“앞으로 신경 쓸 테니까 오늘은 그냥 먹자. 그리고 희도야,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라.”
“네.”
얌전히 대답한 김희도가 수저를 들었다.
우선 일단락된 건가. 속으로 안도하며 밥을 먹으려는 찰나,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남동생들의 휴대폰은 식탁에 엎어 놓은 채였고, 김희도 역시 제 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거네.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 먼저 먹고 있어.”
발신인을 확인한 임성이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걸어갔다.
‘감독님’이라는 말이 드문드문 들리는 걸로 봐선 경기에 관련 일 같았다.
임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김희도는 턱 끝까지 내렸던 마스크를 다시 끌어 올리며 임씨 남매들을 둘러봤다.
이 집에 온 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평소 분위기가 어떤지 대충 짐작됐다.
“형은 맨날 달걀 반찬이야.”
지겨워 죽겠네. 임우가 툴툴거렸다.
“지랄할 거면 처먹질 말든가.”
또렷하게 울린 목소리에 살짝 탄 달걀 프라이를 찢던 임우의 젓가락이 멈췄다.
“지랄? 지금 우리보고 한 말이냐? 임설, 너도 들었지?”
“지랄할 거면 처먹지 말라고 했어.”
임우의 말에 대답한 건 임설이 아닌 김희도였다. 그는 마스크를 내리고 두부 부침을 입에 넣었다. 거친 말을 쏟아 낸 사람 같지 않게 덤덤한 얼굴이었다.
“이건 또 뭐 하는 놈이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난데없는 욕을 먹고 잠시 멍하게 있던 임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가뜩이나 게임을 내리 지고 기분도 더러운데 웬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시비를 털지?
임우는 두툼한 손가락을 뚝뚝 꺾으며 일어섰다. 이 집 남자 형제들은 모두 발육이 좋은지, 쌍둥이 1, 2도 또래에 비해 체격이 좋았다.
김희도는 입 안의 음식물을 모두 삼키고 천천히 일어섰다. 하얗고 곱상하게 생겨 작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시선이 엇비슷했다. 생각보다 큰 키에 잠시 멈칫했던 임우는 가슴을 쭉 펴며 입을 열었다.
“넌 뭔데 갑자기 지랄이야?”
“지랄은 내가 아니라 그 쪽이 했지. 고등학생 새끼가 초딩도 안 하는 반찬 투정을 하는 게 웃기잖아.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주둥이만 살아서.”
팔팔 끓는 주전자처럼 커다란 임우의 목소리와 달리 김희도는 낮고 고요하게 말했다.
임우는 김희도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여동생들을 힐끔 보고선 욕설을 짓씹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야, 임우. 어디가?”
임설 역시 제 쌍둥이 형제를 부르며 따라갔다. 아예 집을 나가는지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 애들 어디 갔어?”
쌍둥이 1,2는 어딜 가고 3,4와 김희도만 있는 걸 보고 물었다.
“이림아, 오빠들은?”
“반찬 투정하다가 갑자기 갔어. 왜 저러는지 몰라.”
임이림은 작은오빠들과 김희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큰오빠가 고생하는 건 생각도 안 하고 날이 갈수록 삐딱하게 나가는 작은오빠들이 못마땅했으니까. 좀 전엔 아주 조금 속 시원하기도 했다. 큰오빠 만든 계란말이가 얼마나 맛…… 음, 큰오빠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그렇게 밥이 싫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왜 나갔대.”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식기 전에 밥 먹어요.” 김희도의 말을 듣고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었습니다. 큰오빠 고마워.”
씩씩하게 밥그릇을 비운 쌍둥이 3,4는 식탁 의자에서 훌쩍 뛰어 내려와 거실을 향해 우다다다 뛰어갔다.
“이림이 세림이, 양말이랑 옷 빨래 통에 넣어 놨지? 이따 세탁기 돌릴 거니까 지금 통에 넣어 놔.”
응! 우렁찬 대답이 거실에서 들려왔다.
중간중간 여동생들을 챙기느라 뚝뚝 끊기던 대화가 이제야 제대로 이어졌다. 임성은 반 정도 남은 김희도의 밥그릇을 힐끔 보고 반찬을 그의 앞에 끌어다 놨다.
“맨날 이렇죠?”
“응?”
“학교에선 야구부 뒤치다꺼리에 힘쓰고, 집에 와선 동생들 챙기고. 듬직한 야구부 주장, 다정한 형 오빠. 임성은 어디 있어요?”
그 많은 사람 중 선배는 어디에 있느냐고. 시비를 걸거나 비아냥대는 게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임성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총을 맞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었다.
* * *
야구부의 구성원은 크게 감독과 코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원으로 나뉘었다.
감독은 야구부를 총괄하는 역할로 특히 중고교 야구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기에 출전하는 엔트리를 짜는 것도 감독의 몫이라 독보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다.
코치는 부원들에게 기술적인 부분을 알려 주고, 상담 등을 통한 멘탈 관리에 힘썼다.
그 외에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는 학부모회나 경기 기록 작성 및 연습 일정 등을 체크하는 매니저 등이 있다.
“종열 선배님. 우리 부는 매니저 없습니까? 제 친구는 배구부인데, 매니저 두 명이나 있대요. 그것도 여자요.”
부러워 죽겠어요. 입술을 오므린 박영빈이 진심으로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풀던 아이들은 박종열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모두의 관심을 받은 박종열은 쓰읍, 하고 혀끝으로 숨을 마시더니 “있었는데 없어졌어.” 하고 말했다.
“있었는데 없어졌다는 게 무슨 소립니까?”
“쟤 때문에 그만뒀거든.”
아이들의 시선이 박종열의 눈빛을 따라 이동했다. 코치와 함께 종이를 내려다보며 심각하게 얘기 중인 주장이 보였다.
저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 괴롭히기라도 했나? 평소 그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은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워낙 장난을 잘 치는 선배라 이번에도 농담이라는 말을 기다렸지만,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진짜야. 임성 때문에 여태 그만둔 매니저가 몇 명이더라?”
오히려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을 한 박종열이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네 개까지 접었다가 “야. 정의영. 4명 맞냐?” 하고 물었다.
“매니저만 치면 4명 맞지. 민성이랑 사이 틀어진 것도 그것 때문이잖아.”
정의영까지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진짜라는 건데. 저 친절한 주장이 정말로? 후배들은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했다.
“종열 선배. 그렇게 말하면 애들 오해하잖아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주장 노리고 매니저 지원했다가 힘들어서 그만두거나, 거절당하고 그만둔 거야.”
“이유야 어쨌든 임성 때문 맞잖아.”
어깨를 으쓱한 박종열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노린다고?”
반응은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왔다. 훈련 중, 아니 평소에도 좀처럼 듣기 힘든 목소리는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박종열에게 모였던 시선이 조예준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희도에게 향했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컸는지 코치와 임성이 동시에 그들을 쳐다봤다. 무슨 일 있느냐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임성은 무리 지어 있는 애들을 의심스럽게 보면서도 더 신경 쓰지 않고 코치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무슨 소리긴 뭐가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지.”
박종열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수건을 집어 목을 닦았다. 김희도가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올해 신입생들은 들어올 때부터 매니저가 없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작년 여름까지는 야구부에도 매니저가 존재했다.
그녀는 경기에 뛰는 선수가 몇 명인지, 이닝이 몇 회까지인지, 어떻게 해야 아웃되는지도 모르는 초보였지만 다들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교내에서 예쁜 걸로 유명한 여자가 매니저를 한다는 것에 기뻐했을 뿐.
당시 부주장이었던 임성은 자연스럽게 그녀와 자주 대화했다. 야구 규칙을 물으면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알려 줬고, 무거운 걸 들고 있으면 달려갔으며 밤늦게 훈련이 끝날 때면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비록 매니저는 들어온 지 한 달이 넘도록 부원들 이름조차 다 외우지 못했지만, 그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연습 경기 시간을 잘못 전달해 상대 학교를 바람맞힌 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감독은 대체 정신머리를 어디에 뒀냐며 크게 화를 냈고, 임성은 그녀의 잘못이 아닌, 최종적으로 챙기지 못한 제 탓으로 돌렸다.
그다음 날 매니저에게 고백받았다. 한 번도 그런 마음을 품은 적 없었던 임성은 바로 거절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며.
그녀는 그다음 날부터 나오지 않았고, 그게 벌써 반년 전이었다.
양민성은 매니저를 좋아했다. 추후 박종열이 말하길, 그녀에게 고백했다가 대차게 차였다고 했다.
미안. 내가 관심 있는 건 성이야.
그러니까 임성은 양민성을 거절한 여자를 거절한 셈이었다. 가뜩이나 팀 에이스였던 임성을 못마땅해했는데, 그 일로 터진 것이었다.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론 나름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저 사람 인기 있습니까?”
시비를 거는 듯한 내용에 조예준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야. 지금 너 인기 많다고 잘난 척하냐?”
“내가 인기 있고 말고 따위는 상관없고, 임성 선배 인기 많냐고 묻잖아.”
임성은 김희도처럼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제법, 아니 대놓고 수요가 많았다. 다소 무뚝뚝한 첫인상과 다르게 학급 일에도 열심히 참여하려고 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또래에 비해 큰 키와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한낱 교복도 모델처럼 잘 소화했다.
동성, 그것도 후배들의 열렬한 지지에 가려지긴 했지만, 여자애들 입에서도 자주 오르내렸다. 밸런타인데이 땐 의리를 가장한 초콜릿을 잔뜩 받을 정도로.
박종열 말처럼 그를 노리고 야구부에 들어온 매니저만 4명이었고, 본인은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지만, 고백도 꽤 많이 받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다고 할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처럼 싸가지 없는 놈도 품을 정도로 대인배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
은근슬쩍 시비를 걸었음에도 김희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몸을 획 돌렸다.
오늘 오후 훈련은 체력 위주로 진행됐다. 기본적인 것부터 허리와 하체 중심의 근력을 키웠다.
이제는 봄보다 여름에 가까운 날씨라 가만히 있어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땀이 났다. 부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러닝이 끝나기 무섭게 자체 청백전이 시작됐다. 지옥의 일정이었다.
“그라운드 A팀 선발 양민성, B팀 선발 김영산. 운동장 C팀 임성, D팀 하수영으로 진행한다. 각자 위치로.”
아이들이 비틀대며 그라운드와 운동장에 흩어졌다.
이미 체력이 너덜너덜한 상태에서 공을 던지고, 치고, 또 송구를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힘든 걸 넘어서 아예 감각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달까.
하지만 감독은 극한의 상황에서 제 기량을 펼쳐야 한다며 아이들을 더욱 몰아붙였다.
임성은 무겁게 늘어지는 팔을 겨우 움직여 공을 던졌다. 눈앞에는 마찬가지로 숨을 헐떡대는 조예준이 앉아 있었다.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도 수비수들도 반쯤 넋이 나간 채였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이래서 1회전이나 돌파하겠냐? 임성, 그렇게 느리게 던지면 타자들이 다 치잖아.”
감독이 호루라기를 불며 소리쳤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와중, 김희도는 덥지도 않은지 마스크를 낀 채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배트 중심에 맞은 공은 바운드 되며 임성에게 굴러왔다. 임성이 1루에 송구하면서 김희도는 아웃으로 처리됐다.
조금만 더 빨리 달렸으면 충분히 세이프였을 상황이었다.
흐음. 임성은 아웃당하고도 미련 없이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턱을 쓸었다.
운동장 팀 최종 스코어는 4대 2로 임성이 속한 C팀의 승리로 끝났다.
“미친, 개힘들다. 황사기 전에 내가 죽겠다.”
정의영은 연신 개힘들다를 외치며 가방을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씻을 힘도 없다며 샤워도 하지 않고 집이나 기숙사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허다했다.
순식간에 부실에 혼자 남은 임성은 테이블에 올려 둔 공을 잡았다.
타자의 가슴팍을 좀 더 빠르게 파고들었으면 좋겠는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뭔가 무거운 게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손가락에 공을 끼우고 손목을 앞뒤로 까딱까딱하면서 고민에 빠졌던 임성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이제 쟤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익숙해졌다.
“집에 안 갑니까?”
“가야지. 그러는 너는 왜 안 갔어?”
“혹시 매니저 구해요?”
질문을 했더니 대답 대신 다른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꽤 뜬금없는 걸로.
매니저라……. 손끝으로 둥글게 난 실밥을 따라 더듬었다.
“있으면 좋지. 혹시 추천할 사람이라도 있어?”
3학년들이야 몇 달 뒤에 은퇴지만, 1, 2학년을 위해선 아무래도 매니저가 있는 게 좋았다.
기왕이면 자신이 있을 때 들어와야 이것저것 많이 알려 줄 수 있고. 그나저나 김희도가 먼저 매니저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네. 야구부에 한층 더 녹아든 것 같아 괜히 흐뭇해졌다.
임성은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얼굴로 김희도를 응시했다.
“내가 하려고요.”
“누구?”
누가 뭘 한다고? 생각하고 내뱉은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만큼 김희도의 말은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부원은 매니저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들어왔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든가?”
없지. 없는데…… 너 애들이랑 대화는 제대로 하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이며 그를 봤다. 형광등 때문일까, 가늘게 뜬 김희도의 눈동자가 묘하게 번들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한동안 임성을 뚫어져라, 정말 빤히 쳐다보면서 한 발짝 다가왔다. 김희도는 서 있고, 임성은 앉은 상태라 자연스럽게 올려다보는 자세가 됐다.
“왜 대답을 안 해요?”
임성은 제 어깨를 짚은 손을 곁눈질하다가 뭘, 하고 소리 없이 물었다.
“다른 사람이 매니저로 들어왔으면 좋겠냐고.”
“좀 들어왔으면 좋겠다. 혼자 하려니까 아주 죽을 맛이거든. 그것보다 약속 이행하려고?”
이렇게 가까이 온 거야? 눈으로 물었다.
“아니요. 지금 쓰기엔 아깝죠.”
김희도는 훌쩍 다가왔던 것만큼이나 갑자기 물러섰다. 눈앞을 가렸던 짙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형광등 불빛이 다시금 눈을 찌를 듯이 쏟아졌다.
요즘 애들은 다 저런가.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