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2권) (4/41)

<사이클링 히트> 2권

#4

“……으음.”

몇 시야, 아침 준비해야 하는데. 기름칠을 하지 않아 녹슨 쇠처럼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머리맡을 더듬어 찾은 휴대폰 액정을 두어 번 두드리자, 네 눈알을 조져 버리겠다는 듯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AM 03:50. 자정을 훌쩍 넘어서 잤으니 3시간 좀 덜 잤구나. 짧게 잔 것치고는 상당히 개운했다.

어제 이림이가 장조림 해 달라고 했지. 곤약도 넣을까. 무심코 생각하던 임성은 평소보다 유난히 높은 천장을 보고 합숙 중이라는 걸 떠올렸다.

맞다. 어제부터 학교에서 잤지. 이만 슬슬 일어나야 식사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

눈두덩을 꾹 누르며 일어서던 임성은 뭔가가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양 옆구리를 파고든 손은 복근을 지나 배꼽 위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어쩐지 유난히 따뜻한 이유가 있었군.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반듯한 이마와 기다란 속눈썹이 보였다. 눈동자를 조금 더 굴리자 자신의 어깨에 턱을 얹고 있는 흰 얼굴이 드러났다.

설마, 밤새 이러고 잔 건가? 의외로 인형 같은 걸 안아야 잘 수 있는 성향인가. 아직 30분 정도 여유 있으니까 좀 더 자게 내버려 둬야겠다.

임성은 옥죄듯이 자신을 꽉 끌어안은 김희도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대신 공주님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를 안겼다. 그리고 그의 머리맡에 앉아 입을 살짝 벌린 채 색색 숨을 내뱉는 모습을 지켜봤다.

기본적으로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아 차가워 보이는 평소 모습과 다르게 자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특히 희고 말랑말랑한 뺨은 손가락으로 한번 눌러 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게 했다.

입꼬리를 슬쩍 올린 채 잠든 김희도를 보다가 일어서는 순간, 당사자가 눈을 번쩍 떴다.

“깼어? 더 자도 되는데.”

“어디 가요? 또 조예준 만나러 갑니까?”

“응? 조예준? 예준이한테 뭐 할 말 있냐?”

일어나자마자 조예준을 찾는 게 이상해 물었더니, 김희도가 인상을 썼다.

“걔 아침잠 많아서 아직 잘걸? 급한 거 아니면 이따 말해. 난 먼저 간다.”

“나도 갈게요.”

“좀 더 이따가 나와도 돼.”

“아니요. 잠 다 깼습니다. 더 올 것 같지도 않고.”

이건 왜 여깄어. 김희도는 제 품에 있는 분홍색 베개를 의아하게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김희도를 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하던 임성이 소리 없이 웃었다. 눈꼬리가 풀리고 입술이 크게 벌어지는 시원한 미소였다.

“…….”

임성이 시선이 어딜 향했는지 눈치챈 김희도는 강렬하게 자기 주장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눈가와 광대 부근에 옅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

“자다 깬 거 되게 귀엽네. 아침에 잘 붓는 편인가 봐.”

날렵한 선을 그리는 눈매 역시 갓 찐 떡을 얹어 놓은 것처럼 도톰하게 부어올랐다. 자는 모습도 귀엽더니 막 잠에서 깬 건 더 귀엽다.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번엔 소리 내 웃었다.

“애 취급하지 마세요.”

“17살인데 애 취급이 아니라 애지.”

김희도의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잘생긴 애는 자고 일어나도 잘생겼구나.”

김희도는 누가 봐도 화려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키까지 커 어딜 가도 이목을 끌었지만, 쉽게 말 붙이기 어려운 느낌이 났다.

“나중에 인기 많아지겠다. 아, 지금도 많나?”

지난번 교실에 찾아갔을 때 반 아이들 대부분이 그를 보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후자가 맞겠다.

“……그쪽도 귀엽잖아요.”

까치집이 된 머리를 마저 정리하며 김희도가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귀엽다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좀 귀엽지. 음.”

박종열을 비롯한 다른 애들이 듣는다면 미쳤다고 할 얘기를 태연하게 하며 체육관을 나갔다.

진짠데. 중얼거린 김희도가 그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아직 해도 채 뜨지 않은 학교는 거대한 새벽에 파묻혀 있었다. 강당은 여전히 불이 꺼진 걸 보니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조예준에게 부탁하긴 했지만, 박종열이 얌전히 잠들었을 리 없다. 새벽까지 버티고 버티다 겨우 잤겠지. 그리곤 온종일 피곤하다고 노래를 부를 게 분명했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건 오랜만이네.”

새파란 나무들 너머로 짙은 하늘이 어스름히 걸려 있었다. 해가 뜨지 않은 운동장은 늘 그렇듯 고요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두 사람은 운동장을 달리는 대신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머릿속은 전에 없이 개운한 데 비해 육체는 근육이 눌린 것처럼 여기저기 찌뿌둥했다.

목을 좌우로 까딱이고 팔을 위로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던 중 뒷 목을 움켜잡혔다.

“헉.”

“가만히 있어요. 풀어 줄 테니까.”

“알겠는데, 예고는 좀 하고 들어와라.”

깜짝 놀랐잖아. 몸에 힘을 빼며 어깨를 늘어트리자 김희도가 목덜미를 감싼 손을 움직이며 엄지로 뭉친 근육을 세게 눌렀다.

“아!”

밤새 눌려 있던 근육이 천천히 풀어졌다. 지난겨울 비싼 돈을 들여가며 재활 전문 트레이너에게 받은 것과 비견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아, 시원하다.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벌어졌다.

“되게 잘하네. 전문적으로 배웠어?”

“기본적인 건요. 몸 관리쯤은 알아서 해야 한다면서요.”

“누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사람 다 야구광이거든요. 야구광.”

김희도는 임성의 목과 어깨를 천천히 주무르며 야구광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야구 좋아하시는구나. 타인의 체취를 비롯한 온갖 냄새에 취약한 김희도가 야구를 한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 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 턱을 아래쪽으로 당기며 입을 열었다.

“본인 냄새는 괜찮아?”

“저요? 다행히 그것까지 영향받진 않아요. 신경 안 쓰인다는 쪽이 맞겠네요.”

“다행이네. 어, 거기…… 후우. 엄청 개운하다.”

“스트레칭 제대로 하는 거 맞아요? 근육이 많이 뭉쳤는데요.”

그는 목 뒤에 난 짧게 난 머리카락을 반대 방향으로 쓸었다. 헉. 임성은 무의식중에 뒷 목을 손으로 덮으며 돌아봤다.

끝났어요. 어느새 한 발짝 물러선 김희도가 양손을 가볍게 비볐다.

“고맙다. 이번엔 내가 해 줄게.”

“다음에요. 마사지 필요하면 내가 해 줄 테니까 다른 사람한테 받지 마세요.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김희도는 확인하듯 다시 한번 말했지만, 임성은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짧은 시곗바늘이 4, 긴 바늘이 6을 가리키는 4시 30분.

아이들이 하나둘 비척대며 일어났다. 대부분 잠을 털어 내지 못하고 하품을 쩍 하거나 눈을 비볐다. 어젯밤 야식을 먹은 걸 티라도 내듯 다들 얼굴이 팅팅 부었다.

“어후. 5월에 왜 이리 춥냐.”

잘 때 입었던 옷 그대로 나온 윤재하가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몸을 떨었다.

“곧 더워질 테니까 걱정 마라. 야, 저거 임성 맞지? 이 꼭두새벽부터 러닝 하고 있네. 힘들지도 않나 보다.”

마찬가지로 자다 일어난 모습 그대로 나온 박종열이 최대한 운동장 면적을 크게 활용하며 도는 임성을 가리켰다.

“어우. 저 독한 놈.”

질색하는 팀원들과 달리 정작 당사자는 전혀 힘들지 않은 얼굴로 옹기종기 모이는 부원들 쪽으로 뛰어왔다.

“감독, 코치님 오시기 전까지 자율 훈련해. 박종열…… 말고, 예준아. 네가 야수들 좀 봐줘. 그리고 투수 조는…… 부탁한다. 민성아.”

“예. 주장.”

아직 잠이 덜 깬 조예준은 목 막힌 목소리로 느릿느릿 대답했고, 양민성은 “감투가 좋긴 좋네. 아무나 막 지목하고.” 하며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시비를 걸어 댔다.

냉랭한 반응에 임성은 쓰게 웃으며 김희도를 찾았다. 하지만 따로 찾을 것도 없이 그는 이미 등 뒤에 서 있었다.

“우린 밥하러 가자.”

임성이 먼저 급식실로 향하고, 김희도는 무성의하게 귀를 후비는 양민성을 말없이 쳐다봤다. 표정이야 원래 시큰둥했으니 별다를 것 없는데도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뭘 봐?”

위협이 섞인 목소리가 김희도에게 향했다. 김희도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시선을 휙 돌리고선 이내 저만큼 멀어진 임성의 뒤를 따랐다.

학교 급식실은 합숙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학교 측에 미리 허락을 받아 놨던 터라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약 50명에 달하는 부원들의 밥을 만들려면 두 손에 모터를 달아도 모자랐다. 임성은 10kg이라고 적힌 쌀 포대를 대용량 밥솥에 부었다. 밥 한 공기 기준으로 약 100인분에 달하는 양이었지만, 한창 먹을 나이의 운동부 남자애들에겐 이것도 모자랐다.

“뭐 하면 됩니까?”

“채소 좀 썰어 줄래? 거기 양파랑 당근 보이지? 가늘게 채 썰면 돼.”

임성이 밥을 안치는 사이 김희도는 양파와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크기도 두께도 제각각인 채소들은 대충 손질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도 대충하는 중이었고.

“그거 괜찮은 거 맞냐?”

“아마도요.”

못내 걱정스럽게 던진 질문에 무심한 대답이 날아왔다. 그래. 대충이든 뭐든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되지.

“그 사람들이 먹을 걸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억지로 하는 거야?”

텅! 반으로 자른 감자 중 한쪽이 도마를 벗어났다. 김희도의 손이 어설프게 움직이며 감자가 산산조각 났다. 임성은 개수대를 향해 데굴데굴 굴러가는 감자를 잡아 다시 도마 위에 올려놨다.

“누가 떠민 건 아니지만, 비슷하다고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김희도는 스스로가 이해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왜 자신이 여기서 밥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정 안 되면 조예준이랑 하면 되니까. 엄청 싫어해도 결국 도와줄걸? 작년에도 그랬거든.”

가뜩이나 후각도 예민한 애가 요리를 하려면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혹시 이것 때문에 컨디션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닐지 내심 걱정됐다.

당장 지난 일요일 경기에서도 김희도가 타점을 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영봉 패였다. 득점이 난무하는 고교 야구에서 영봉 패는 일부러 하려고 해도 잘 나오지 않는 것이라 당한 팀은 상당히 치욕스러워했다.

“아니요. 제 일이니까요.”

“괜찮겠어? 무리하지 마라. ……어어, 그만. 그렇게 많이 넣으면 짜서 못 먹어.”

식칼을 잡아 본 게 처음이라는 김희도는 간장을 아주 콸콸콸 들이부었다. 저러다간 콩나물국이 아니라 간장국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다급히 그를 말리고, 달걀 깨는 일을 맡겼다. 이 정돈 할 수 있겠지.

“시간만 많았어도 떡볶이 만드는 건데. 아쉽다.”

“떡볶이요?”

“나 떡볶이 엄청 좋아하거든. 쌀떡 밀떡 가리지 않고 잘 먹어. 삼시 세끼, 24시간, 일 년 내내 떡볶이만 먹으라고 해도 가능. 기름 떡볶이, 간장 떡볶이 다 좋아해. 넌 뭐 좋아하냐?”

콩나물국은 이대로 끓이기만 하면 될 것 같고, 밑반찬은 학부모회에서 보내 주신 게 있으니까 그거 내놓자.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만에 김희도가 말했다.

임성은 순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밥솥이 칙- 소리를 냈다.

“좋아하는 음식 없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선호하는 음악이나 책은?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 같은 건 해?”

김희도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민하던 임성이 “그러면 야구는?” 하고 물었다.

“야구 재밌지 않냐?”

“저번에도 대답했지만, 딱히.”

그런 것치곤 훈련에 꼬박꼬박 나오면서. 임성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밥솥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재밌어질 일만 남았겠네.”

김희도는 씩 웃는 임성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재밌어질 날이 올까?

겨우겨우 시간에 맞춰 식사 준비가 끝났다. 벌써 땀범벅인 아이들은 “배고파. 밥 줘, 밥! 밥!” 하고 노래를 부르며 들어왔다.

둘이서 열심히 준비한 아침밥 평가는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쇠도 씹어 먹는 나이대의 아이들은 그 맛없는 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다 못해 리필까지 했다.

존나 더럽게 맛없는데, 이상하게 계속 들어간다. 정의영의 말에 너도나도 공감했다.

첫 번째 아침을 먹고 훈련을 한창 하고 있을 즈음, 저 멀리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아침부터 달리기 중인 야구부원들을 봤고, 야구부원들은 그 시선을 의식이라도 하듯 “하나둘, 하나둘.” 목소리를 키웠다.

그 후, 학부모가 준비한 두 번째 아침을 먹고 각자 교실로 복귀했다.

쏟아지는 졸음을 겨우 참으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빠르게 급식을 해치운 임성은 자연스럽게 벤치로 향했다. 항상 먼저 와 있던 김희도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빈 벤치에 앉아 까만 봉지를 옆에 내려놨다.

합숙 기간엔 따로 도시락을 싸 오지도 않는데 여길 올 이유는 없지. 이러니까 꼭 김희도랑 만나는 게 목적 같잖아. 그나저나 날씨 한번 좋네. 이런 날은 공도 좋은 소리를 내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생각이나 하며 양팔을 뻗어 벤치 등받이에 걸쳤다. 그대로 고개를 젖히자 풍성한 이파리들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틈으로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햇볕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졸음이 쏟아졌다.

막 선잠이 들었을 무렵, 눈을 감고 있음에도 시야가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누구야. 눈을 뜨기도 전에 낮은 체온의 손이 목을 감싸고 뒤로 당겼다. 임성의 고개가 위로 쳐들리며 호흡이 살짝 버거워졌다.

번쩍 뜬 시야 너머로 하얀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도 예쁘더니 얜 더 예쁘네.

“일찍 왔네요.”

김희도가 고개를 조금 더 숙이자, 쏟아진 머리카락이 임성의 이마와 뺨을 간지럽혔다.

“도시락도 없는데 왜 왔냐?”

“그러는 그쪽은 왜 여기 있어요?”

“그러게.”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픽 웃자 김희도가 목을 잡은 손을 천천히 놓고선 옆에 앉았다.

“점심 먹었냐?”

“아니요.”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부족하겠지만, 우선 이거라도 먹어.”

까만 봉지를 뒤집자 매점용 빵을 비롯한 삼각 김밥, 핫바 같은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한눈에 봐도 꽤 많은 양이었다. 이것들을 사기 위해 임성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야 했다.

“네가 먹는 비싼 샌드위치는 아니지만, 굶는 것보단 나을 거다.”

뽁.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김희도는 바로 받지 않고 우유와 임성을 번갈아 봤다.

“왜?”

“원래 이렇게…….”

“어?”

“아닙니다. 잘 먹을게요.”

다른 사람한테도 원래 이렇게 잘해 줘요? 김희도는 그 말을 삼키며 노란 우유를 받았다.

* * *

화요일부터 시작된 합숙 훈련은 금요일까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새벽 훈련-밥-아침 훈련-밥-수업-오후 훈련-밥-야간 훈련-밥-취침. 아니, 기절. 딴짓은 전혀 할 수 없는 빡센 일정이었다.

마냥 평화롭기만 합숙은 한 건 아니었고, 중간중간 아이들 틈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큰 탈 없는 쪽에 속했다.

재작년 합숙 때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부원들이 새벽에 단체로 탈출을 감행, 근처 24시간 국밥집에 쳐들어갔던 적도 있으니까. 당시 신입생이었던 임성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선배에게 끌려갔다가 나중에 감독님께 걸려서 크게 혼났다. 지금도 종종 회자되는 얘깃거리였다.

합숙 기간 내내 임성은 김희도와 같이 잤다. 음, 같이 잤다니까 말이 좀 이상하네.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 아, 이건 더 이상한가.

김희도는 몇 번이나 “어차피 아침에 샤워하는데, 저녁까지 씻을 필요 있냐. 그냥 자도 된다.” 하며 구슬렸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꼬박꼬박 씻었다.

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깨끗해진 임성을 껴안고 잠을 청했다. 처음엔 살짝 의아했으나 애착 인형을 껴안고 자는 여동생을 떠올리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목요일에는 어쩌다가 강당에서 자게 됐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옆에 누워 있는 김희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체육관 두고 왜 여기서 자냐는 말에 그는 “그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고 덤덤해서 정말 ‘그냥’인 것 같았다.

합숙 마지막 날인 오늘은 목동 구장에서 경기가 있었다. 현재 서울 A조 승률 1위이자 전승 중인 신라고와 맞붙는 빅게임이었다.

만약, 시드 제도가 있었다면 두 학교 다 시드로 배정받았을 정도의 강팀이라 아마 야구 취재진과 스카우터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그들은 훈련 중인 선수들을 주의 깊게 보다가 수첩에 뭔가를 끼적이곤 했다.

3학년은 그들을 의식해서 스윙이나 송구 동작을 평소보다 크게 했다. 그것은 임성도 마찬가지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였다. 팡! 가죽 미트에 거칠게 내리꽂히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경기 직전, 감독이 부원들을 불러 모았다.

“민성이가 선발이다. 선발이 이닝을 잘 먹어야 시합도 제대로 풀리는 거 알지? 다들 정신 차리고 수비해라. 알겠냐?”

감독이 양민성의 어깨를 짚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잘 치라는 게 아니라 수비를 잘하라는 말이 조금, 아니 사실은 꽤 어이없었다. 어떻게든 양민성이 패전 투수가 되는 걸 막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으므로.

[선유고등학교 0 : 0 신라고등학교]

전광판에 양 학교 이름과 포지션이 뜨며 경기가 시작됐다.

양민성은 2회까지 단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는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이 유난히 넓어 평소라면 당연히 볼로 판정됐을 공도 스트라이크로 잡히고, 안타성 타구를 잡는 등 수비의 도움을 받았다.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아, 씨발.”

다만, 투구 내용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4회부터 급격히 드러났다.

양민성은 제구가 잘 먹히지 않고 자꾸 비껴가자 아예 가운데를 노리고 던졌다.

아, 저건 너무 정면으로 가는데. 아예 대놓고 치라는 수준이잖아. 걱정하기가 무섭게 기회를 놓치지 않은 상대 팀 타자가 장타를 때려내며 3루까지 빠르게 진루했다.

“아악. 3루타야.”

박영빈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안타까워했다.

임성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제발 실점 없이 무사히 잘 넘겨야 할 텐데.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타자가 희생플라이를 날리며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아싸! 선취점!”

“파이팅 신라고. 이대로 한 점 더 따자.”

[선유고등학교 0 : 1 신라고등학교]

마치 그것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초반의 좋은 기세는 어딜 가고 양민성은 연속으로 볼넷 두 개를 냈다. 순식간에 1, 2루에 주자가 들어찼다. 이를 악문 양민성은 뒤이어 나온 타자를 투 스트라이크로 몰아넣었지만, 연달아 볼 세 개를 던지며 어려운 승부로 이어 갔다.

포수 지용우의 사인에 양민성은 거듭 고개를 젓다가 한참 만에 공을 던졌다.

“어, 됐다. 땅볼이다.”

평범한 3루 땅볼이었고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공이었다. 하지만 3루수 서찬규는 허공을 더듬으며 공을 뒤로 흘렸다. 뒤늦게 공을 잡았을 땐 이미 모든 베이스에 주자가 들어찬 후였다. 득점까지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명백한 실책이었다.

1사 만루.

“씨발.”

양민성이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벗으며 3루수 서찬규를 쏘아보았고, 서찬규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멀리서도 얼굴이 시뻘게진 게 보였다.

수비 실책 때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걸 감안해도 다들 지나치게 경직됐다. 투수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임성. 준비해라.”

“예. 감독님.”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임성은 감독의 지시를 받고 급히 몸을 풀었다.

『선유고등학교 투수 교체를 알립니다.』

임성이 글러브를 끼며 마운드로 뛰어갔다. 그가 상대할 타순은 3, 4, 5번으로 팀 내에서 가장 공격력이 강한 선수들이었다.

심지어 신라고 선수들은 연속 출루로 한껏 기세가 올라간 상황이었다.

신라고 파이팅! 한 점 더 내자. 홈런 때려. 상대 더그아웃 쪽에서 쏟아진 응원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동요할 필요 없다. 마운드에 선 이상 타자를 잡으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어.

임성은 흰 가루로 범벅된 손을 불고 모자챙을 살짝 매만진 뒤 공을 쥐었다. 실밥 위에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붙이고 엄지손가락으로 공 아랫부분을 감쌌다.

급하게 풀어서인지 평소보다 뻣뻣한 어깨를 최대한 앞으로 뻗으며 세웠던 손목을 당겼다. 손가락 사이를 긁으며 빠져나가는 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실밥이 스치는 감각이 얼마나 좋은지.

“스트라이크!”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심판이 총 모양으로 쥔 손을 앞으로 찌르며 본인만의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오늘 긁히는 날인가? 느낌이 좋은데.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연속으로 변화구를 던지다가 아웃 코스에 걸치는 공을 힘껏 던졌다. 변화구라고 생각했는지 타자가 뒤늦게 배트를 휘둘렀고, 배트 끝에 빗맞은 타구는 외야로 떴다. 김희도가 어렵지 않게 잡으며 아웃 처리가 됐다.

남은 2개의 아웃 카운트 중 하나를 잡았다.

투 아웃, 하지만 세 개의 베이스가 꽉 차 있는, 여전히 임성이 불리한 상황에서 현재 서울 A조에서 홈런 개수가 많은 4번 타자 백도경이 배트를 돌리며 등장했다.

백도경은 고등학생임에도 프로선수 못지않은 피지컬을 지녔다. 양쪽으로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팔에서 나오는 힘이 상당해 공을 살짝만 건드려도 장타로 이어졌다.

“백도경! 홈런 못 치면 더그아웃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

팀 내 분위기 메이커인 백도경이 타석에 들어서면 응원 소리가 눈에 띄게 커졌다.

하지만 임성이 할 일은 여전히 하나 밖에 없었다.

“스트라이-크!”

눈앞의 타자를 잡는 것.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좋은 공은 매서운 소리와 함께 미트를 파고들었다. 하나 더. 연속 두 개의 스트라이크를 넣고 손을 허벅지에 비벼 닦았다.

카운트는 내가 더 유리하니까, 변화구로 헛스윙을 유도해 볼까?

곧바로 그립을 바꿔 잡은 임성이 공을 던졌다. 하지만 포수 지용우는 블로킹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공이 뒤로 빠지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용우. 공! 빨리 잡아서 태그 해.”

“고! 홈, 홈. 홈!”

임성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신라고 주루코치가 팔을 크게 돌렸다. 당황한 지용우가 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3루에 있던 타자가 홈을 파고들며 신라고에 1점이 더 추가됐다.

아. 몇 명 없는 관중석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렀다. 선유고 선수들의 부모님이었다.

아마 당사자들은 모르겠지만, 상대 학교의 응원이나 야유보다 같은 팀의 실망 어린 목소리가 더 힘 빠지게 했다.

임성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지용우에게 눈빛을 보냈다. 괜찮아. 다음에 잡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임성!”

팔짱을 낀 채 그라운드를 주시하던 감독이 노성을 내질렀다. 분노가 실린 목소리에 몇몇 아이들이 움찔했고, 임성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추가 실점 없이 해당 이닝을 마무리했지만, 4회의 실책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어 결국 선유고는 패배를 했다.

경기에 지는 날엔 팀 분위기가 가라앉는 걸 감안해도 오늘은 유독 험악했다. 교체 이후 양민성이 벤치에서 내내 악을 썼기 때문이다.

“민성아. 오늘은 운이 좀 안 따랐던 것 같다.”

같은 투수로서 그의 심정이 이해됐기에 최대한 좋게 얘기했다. 하지만 양민성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S자가 새겨진 모자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씨발, 타자라는 새끼들이 공 하나 제대로 못 칠 거면 타석에 왜 서냐? 쟤네들은 하는 걸 왜 너희들은 못 하냐고.”

신라고 투수에게서 한 점밖에 뽑아내지 못한 타자들이 바닥을 보며 침묵했다.

“3루수 새끼 어디 있어? 서찬규. 이 병신 새끼야. 공 하나도 제대로 못 잡고 흘리냐?”

“……죄송합니다. 선배님.”

손을 뒤로 모으고 열중쉬어 자세를 한 서찬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민성아. 애들 다 있는데 그만하자. 욕 하지 마.”

“임성. 넌 좀 빠져. 야, 서찬규. 너 내 평자(*평균 자책점) 어떻게 책임질 거냐? 어?”

서찬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만해. 보다 못한 임성이 양민성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거칠게 뿌리쳤다. 그에게 밀쳐진 임성이 뒤로 물러섰고, 보호 장비를 벗던 조예준이 벌떡 일어섰다.

하, 양민성은 서찬규를 쏘아보던 시선을 두 사람에게 돌렸다.

“조예준. 그러다 한 대 치겠다? 부하 하나 잘 뒀네. 이야, 부럽다. 임성.”

“부하라니, 말조심해.”

“내가 못 할 말 했냐? 따지고 보면 네가 제대로 틀어막았으면 내 평자 지킬 수 있었어. 나 망하라고 일부러 주자 불러들인 거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임성의 표정이 굳었다.

“그만들 해라! 너희들은 감독님이랑 나는 보이지도 않아? 다들 정신머리 어디다 두고 있냐. 정신 안 차릴래, 어?”

사태는 보다 못한 코치가 나서고 나서야 겨우 진정됐다. 양민성은 씨발, 하고 다 들리게 욕을 내뱉으며 벤치에 앉았다.

“민성이 초반 페이스 좋았으니까,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야수들은 수비가 그게 뭐냐? 합숙 때 너무 편했지? 앞으로 실수하는 놈은 당장 엔트리에서 뺄 거니까 밀려나기 싫으면 잘해라. 스타팅 멤버 수는 한정돼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뒤이어 감독이 피드백만 하고 자리를 떴다.

“좆같네.”

양민성은 벤치를 발로 퍽퍽 쳐 대다가 먼저 갔다. 지용우는 임성을 비롯한 3학년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양민성의 글러브를 챙겨 뒤따라갔다.

경기에는 필히 승패가 나뉘었다. 그리고 이기더라도 형편없는 내용일 때도 있으며 지더라도 배울 점이 있는 경기가 있었다.

오늘은 결과도 내용도 최악이었다.

이런 게임은 머릿속에 박히기 전에 얼른 털어 버려야 했다.

“이겼으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되, 패배한 기분은 잊었으면 좋겠다. 돌아가서 반성회 하고 내일 경기 준비하자.”

패배의 여파는 그날 저녁 훈련까지 이어졌다. 평소였다면 중간중간 농담도 하고 장난쳤을 애들은 굳은 얼굴로 말없이 훈련만 했다. 내일 경기에 영향을 받으면 곤란한데.

“다들 이리 와. 간식 먹고 하자.”

박수를 쳐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뒤이어 목소리를 키우자 연습 중이던 아이들이 임성을 쳐다봤다. 그는 씩 웃으며 양손 가득 들고 있는 봉지를 흔들었다.

“헉, 선배님. 갑자기 웬 통닭입니까?”

진짜 통닭이다. 냄새 봐, 미친. 개쩔어. 시무룩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달려왔다.

“나도 모르겠다. 주장님이 하자시니까 그냥 따르는 거지. 5명당 한 마리다. 더 사랑하는 놈이 덜 사랑하는 놈에게 날개랑 닭 다리 양보해라.”

임성과 함께 치킨 수급에 동참했던 박종열이 말했지만,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이미 통닭 봉투를 찢기 바빴다. 땀 냄새로 칙칙하던 훈련장에 갓 튀긴 통닭 냄새가 진동했다.

역시 애들은 먹을 걸로 꼬시는 게 최고라니까. 단순해서 다행이야. 임성은 신나게 통닭을 뜯는 아이들을 보다가 뜀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간식은 부실 운영비가 아닌 3학년 몇 명이 사비를 모은 것이었다. 당분간은 허리띠를 졸라매다 못해 매점은 꿈도 못 꾸겠지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전혀 아깝지 않았다.

흐뭇한 표정을 한 채 아이들을 보는 임성의 곁에 어느새 마스크를 코끝까지 끌어올린 김희도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안 먹습니까?”

그는 임성과 어깨가 맞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선 다음에야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뜀틀에 앉은 채라 고개를 돌리면 김희도의 목덜미가 바로 보였다.

“너는?”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임성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김희도를 보고 상체를 살짝 물렸다.

“저 틈에서 먹을 자신 없어요. 그리고 분위기 망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수습은 다른 사람이 합니까?”

덤덤한 표정으로 뱉어 내는 불편한 진실에 잠시 멈칫했던 임성은 모른 척 웃었다. 김희도의 시선이 좀 더 뾰족해진 걸 느꼈지만, 이번에도 못 본 척했다.

“중요한 시기라서 민성이가 많이 예민해졌나 봐. 이해해 줘. 3학년이잖아.”

“마찬가지잖아요. 3학년인 거.”

“…….”

그쪽도. 김희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뭇대는 임성을 보며 “중요한 시기인 것도 마찬가지고.” 하고 뒤이어 말했다.

* * *

선유고등학교의 전반기 주말리그 최종 순위는 3위였다.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나갔던 임성은 초반부터 헤매며 4실점을 했다. 그전까지 낮았던 평균 자책점이 훌쩍 뛰며 주말리그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한 달 넘게 치러진 전반기 주말리그가 모두 끝나고, 왕중왕전인 황금사자기와 청룡기를 앞두고 있었다.

리그 1위 팀은 황사기와 청룡기 모두 출전 가능한 반면, 3위인 선유고등학교는 황사기만 출전 가능했다. 지역별로 치렀던 주말리그와 달리 황사기는 전국 각지의 강호 고교와 맞붙을 수 있었다.

그 와중 학교는 중간고사 기간에 접어들었다. 야구부 아이들 대부분은 시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심지어 언제 치러지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심지어 교과서를 잃어버린 애들도 여럿이었다.

반에서 꾸준히 중위권을 유지 중인 임성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공부했다. 시험 기간엔 아침 러닝 시간을 줄이고 문제집을 풀었다. 동생들 자는 데 방해될까 봐 집 대신 부실에서 공부했다.

오늘도 야구부 중 가장 먼저 도착해 문을 열었다. 언제든지 훈련에 나갈 수 있게 연습복을 교복 안에 입고 교과서를 펼쳤다.

“시험 범위가 여기까지였나? 으음, 생각보다 꽤 되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교과서를 촤라락 넘겼다. 수업 시간에 나름 열심히 듣는데도 어려운 부분이 꽤 많았다.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겠네.

한 시간 남짓 집중해서 공부하던 임성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가방을 비스듬히 멘 조예준이 하품을 쩍 하고 있었다.

“조예준. 일찍 왔네.”

“누나가 깨워서요.”

짜증스럽게 대답한 조예준은 뒤늦게 “좋은 아침입니다. 주장. 아침부터 열심히 하네요.” 하고 꾸벅 인사했다. 그리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앉아 고개를 젖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예영이 누나? 자취한다더니 다시 집에 들어왔어?”

“회사 그만뒀대요. 공시 준비한다나 뭐라나.”

“얼마 전에 제주도로 워크숍 다녀왔다며?”

약 한달 전쯤 조예준은 ‘누나가 워크숍 갔다가 사 온 것’이라며 돌하르방 모양의 초콜릿과 감귤 맛, 백련초 맛 크런치를 한가득 안겨 줬다. 집에 있는 동생들에게 넘겼더니, 하루도 안 돼서 먹어 치우고 또 달라고 졸랐었다.

“몰라요. 자취방 정리하고 어제 갑자기 짐 싸 들고 쳐들어왔어요. 그것 때문에 엄마랑 대판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다른 말은 없고?”

“없고요. 아무튼 어제 집에 가니까 누나가 제 방에 있더라고요. 아니, 방 주인도 없는데 자기 마음대로 들어오는 게 어딨어. 화나서 따졌더니, 보쌈이나 처먹고 닥치라는 거 있죠? 내가 그걸로 넘어갈 줄 아나? 날 뭘로 보고…….”

“그래서 안 먹었냐?”

“먹긴 먹었죠. 음식은 죄가 없잖아요.”

조예준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누나랑 사이좋네.”

“헐? 이것 좀 보세요. 소름 돋은 거 보이죠?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소름 끼치는 말이다.”

몸을 부르르 떨던 조예준이 옷소매를 걷어 좁쌀이 오돌토돌 올라온 제 팔을 보여 줬다. 임성은 설핏 웃으며 샤프를 고쳐 쥐었다.

“진짜 사이좋은 건 누나랑 제가 아니라 주장이죠.”

“나? 그냥 평범하지 않나?”

“그게 어디가 평범해요.”

임성은 다섯 남매 중 맏이로 두 쌍의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올해 열일곱 살인 남자 쌍둥이 둘과 초등학교 1학년 여자 쌍둥이 둘. 특히 여동생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제가 업어 키우다시피 해 지금도 죽고 못 살았다. 남동생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반찬 때문에 싸웠다. 요즘 쌍둥이 1, 2가 반항기인지 도통 말을 안 듣네.”

“그래도 누나랑 저처럼 주먹다짐하진 않잖아요. 우린 어제 진짜 멱살 잡고 싸웠다고요. 그게 아닌 것만 해도 엄청 사이좋은 거죠. 주장은 대체로 사람들이랑 잘 지내지만.”

누가 자신에게 아는 사람 중 가장 성격이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임성을 선택할 것이다.

눈매가 날카로워 무표정하게 있으면 제법 세 보였지만, 그라운드 밖에선 대부분 웃고 있어서 두드러지진 않았다.

남들이 귀찮아할 법한 일도 솔선수범하고, 고민도 잘 들어 줘서 그에게 상담하는 후배가 많았다. 워크 에씩(*work ethic)도 좋고 멘탈도 뛰어나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

후배들은 특히 그를 거의 신처럼 모셨다. 올해 신입생들도 벌써 주장, 주장님 하며 그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나.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실제로 겪어 보니 소문을 능가하는 개싸가지 김희도마저 임성 앞에서는 얌전했으니까. 그래, 임성 앞에서만. 그를 제외한 부원들은 여전히 무시한다는 게 문제였다.

“저기, 주장…….”

“어, 왜?”

“김희도 말이에요.”

조예준이 막 입을 떼는 순간, 마치 노린 듯 당사자가 들어왔다.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왠지 뒷담화 하다가 걸린 것처럼 뜨끔해 입을 다물었다. 정작 김희도는 조예준을 본체만체 지나쳤다.

“희도, 좋은 아침이다. 잘 잤어?”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 김희도는 임성의 옆에 앉더니 교과서를 꺼냈다.

“시험공부 하게?”

부실에서 누군가 교과서를 꺼낸 건 자신을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제법 기특한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더니 김희도가 목을 살짝 늘어트렸다. 야구공처럼 동글동글하고 반듯한 뒤통수를 쓰다듬자 무표정한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열심히 해라.”

흐뭇한 얼굴로 김희도를 격려한 임성은 조예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까 하려던 말 뭐야?”

조예준은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해괴한 표정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아니고요. 연습 경기 일정 받았는데 보실래요? 대전고도 있던데.”

“평일은 아니지? 당장 다음 주에 중간고사잖아.”

“다음 주 토요일부터요. 그리고 이건 저도 주워들었는데, 인천상고 신효원이요. 어깨 미세 골절됐대요. 두 달 넘게 쉬어야 한다더라고요.”

“두 달이나? 그러면 황사기엔 못 나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그대로 올라오면 우리랑 준준결승에서 만날 예정인데. 아, 삼원고 고민혁 커브 단 건요?”

“그건 나도 들었어. 가뜩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새 변화구까지 장착했네. 그 학교 1번 타자, 작년보다 더 빠르다며?”

“새로 부임한 감독 모토가 발야구라잖아요. 런 앤 히트. 주강고랑 1차에서 붙던데, 아무래도 주강고 쪽이 유리하지 않을까요?”

조예준은 임성의 앞자리, 김희도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임성은 교과서를 옆으로 밀고 황사기에 붙을 상대 학교 전력 분석에 몰두했다. 어딜 봐도 만만한 학교가 없었다.

황사기 시작 전까지 구속이 5km만 늘면 좋겠는데, 마땅한 방도를 못 찾겠다. 뭐가 문젤까, 웨이트를 좀 더 늘려야 하나?

고개를 숙인 채 교과서를 보던 김희도의 시선이 천천히 떠오르더니 임성과 조예준에게 향했다.

야구부 주장과 부주장, 투수와 포수. 배터리. 여러모로 밀접한 관계의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의견을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배터리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둘 사이엔 다른 사람은 쉽게 끼어들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

“……웃기네.”

“방금 무슨 말 했어?”

가까이 붙은 두 사람을 보며 중얼거리던 김희도는 임성이 고개를 돌리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 * *

“주장.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어. 다들 조심히 가라. 사고 치지 말고, 차 조심해.”

임성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훈련이 제법 빡셌는데도 아직 힘이 남았는지 와아아아아 하고 함성을 지르며 뛰어가는 게 들렸다.

자식들. 아직 힘이 남아 있구나. 더 굴려도 되겠는데?

임성은 후배들이 알면 경악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어질러진 부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도 이만 갈게요. 빨리 안 가면 누나가 또 내 방 뒤집어 놓을 것 같아요.”

“그래, 내일 보자.”

보통 임성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조예준이 결연한 표정으로 부실을 나섰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김희도?”

훈련이 끝나면 가장 먼저 집에 가던 애가 오늘따라 남아 있었다. 예의 그 약속 때문이면 이미 세 번 다 채웠으니, 그건 아닐 테고.

“넌 집에 안 가냐?”

“그쪽은요?”

“난 조금만 조금 더 있다가.”

“저도요.”

“혹시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임성이 웃으며 말했다.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야. 나 지금 조금 상처받았다.”

김희도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장난인데 뭘 저렇게까지 정색하나. 머쓱하게 웃은 임성이 보다 만 교과서를 펼치며 샤프를 들었다.

집에 가면 놀아 줄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여동생들 때문에 공부할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너무 늦으면 걱정할 테니까 딱 한 챕터만 끝내고 가야지.

결심한 분량을 모두 채우고 고개를 들었다. 벌써 집에 간 줄 알았던 김희도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고민 있어? 너랑 나 둘밖에 없으니까 편히 말해도 돼.”

평소와 같은 무표정임에도 묘하게 복잡해 보이는 김희도에게 물었다. 그는 시선을 옆으로 뜨며 머리를 옆으로 쓸어 올렸다. 가늘고 검은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흩어지며 단내가 희미하게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냄새가 좋은 건 자신이 아닌 김희도 같은데. 본인 체취는 좋지도 싫지도 않다고 했던가.

“……공부 좀 알려 주세요.”

“어?”

뭘 해줘? 잠깐 딴생각하던 임성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자신만이 아니었는지 김희도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본인의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수습하며 임성의 맞은편에 앉더니 냅다 교과서를 펼쳤다.

“너 공부 잘한다며?”

1학년 중 누군가가 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랐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전교 상위 등수라고 했었지.

“그냥 평범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다를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는 언젠가 임성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며 빤히 쳐다봤다. 발칙한 시선과 태도. 그러나 임성은 화내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가르치는 일 자체야 별거 아니지만, 문제는 내 실력이 그 정도가 안돼. 평자 10점 대 급이거든.”

모양 좋은 눈썹이 아래로 내리며 다소 민망하게 웃었다. 누가 투수 아니랄까 봐 평균 자책점으로 자신의 성적을 빗댔다.

“상관없습니다.”

“성적 안 나온다고 탓하지 마라.”

“안 합니다.”

“뭐가 잘 안되는데? 참고로 수학과는 서로 내외 중이니까 묻지 마. 그나마 국어나 영어 쪽이 나아. 정말 그나마.”

“괜찮습니다.”

벌써 세 번째 긍정이었다.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던 임성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그날부터 아침저녁으로 30분가량 함께 공부했다.

그라운드에 내에선 엄격한 주장인 임성은 선생으로서 꽤 좋은 자질을 갖췄다. 그는 약속한 다음 날에 시험 범위를 세 장으로 요약해 김희도에게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김희도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신경 쓰지 마. 버릇이거든, 버릇.”

중고교 6년 동안 상대 학교 투수와 타자에 관해 분석하고, 자료로 남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요약하는 버릇이 생겼다.

뭐든 문서로 남겨 놔야 마음이 편하다고 할까.

“……이렇게 풀면 돼. 저번에 말했다시피 수학은 내외하는 과목이라 설명 잘했는지 모르겠다. 헷갈리면 선생님께 꼭 물어봐.”

“예.”

사실, 김희도는 방금 그가 설명한 문제의 답쯤은 진작 파악했다. 수학 같은 건 공식을 대입하면 결과가 도출되는 단순한 과목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침묵했다. 임성이 알려 주는 건 처음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내 글씨 알아보겠냐?”

임성의 말꼬리가 살짝 늘어졌다. 노트에는 연필로 쓴 숫자와 공식이 제멋대로 날아다녔다. 뭐든 정석대로 반듯하게 할 것 같은 남자의 글씨는, 의외로 악필이었다. 본인도 본인 글씨가 심하다는 걸 아는지 머쓱하게 웃으며 뒷 목을 쓸었다.

“으음, 동생들 말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 어렵네. 분명 2년 전에 배웠는데도 가물가물하다.”

임성은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가 펴는 행동을 반복했다. 글러브를 끼고 있을 때 버릇이 평소에도 나오는 것이었다. 김희도는 아기들이 잼잼하는 것 같은 손동작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조예준은…… 조예준에겐 알려 준 적 없어요?”

“조예준? 걘 시험 범위도 모를걸. 교과서 갖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일 지경이니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임성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제 마지막 문제다.”

임성은 팔꿈치로 책상을 디디며 김희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나는 묘한 체취는 목구멍을 꽉 채우며 지나 김희도의 배 속을 묵직하게 채웠다. 처음처럼 충격적이진 않아도 여전히 자극적인 냄새는 책상 위에 얌전히 내려놨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뻗게 만들었다.

“김희도, 괜찮냐? 너 지금 얼굴 엄청 빨개. 감기 걸린 거 아냐?”

김희도는 황급히 손을 내리며 상체를 물렸다. 임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그냥?”

중간고사가 끝나면 곧바로 타 학교와 연습 시합과 황금사자기가 연달아 열렸다. 한참 실력과 체력을 끌어올려야 할 시점에 감기 걸리는 건 당사자와 팀 모두에게 극심한 손해였다.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김희도를 살펴보자 그답지 않게 시선을 피했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임성은 자신과 김희도의 이마를 번갈아 짚으며 체온을 확인했다. 확실히 평소보다 조금 높은 것 같았다.

“잘 때 배 드러내고 자는 건 아니지? 아직 밤에는 쌀쌀해. 이럴 때일수록 관리 잘해야 한다. 알지?”

“감기 아니에요. 아픈 것도 아니고.”

여전히 시선을 옆으로 돌린 김희도가 중얼거렸다.

“진짜 아니야? 열나는 것 같은데?”

손바닥에 닿은 이마가 점점 뜨거워졌다.

“더워서 그래요. 놔두면 알아서 괜찮아지니까 더 말하지 마세요.”

김희도는 임성의 손목을 붙잡아 내리며 대답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감기는 아닌 것 같고, 다른 이유가 있겠지 싶어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다른 주제를 꺼냈다.

“박서윤 선생님이 1학년 수학 담당 맞나?”

“모르겠는데요.”

“아마 맞을 거야. 그 선생님 되게 재밌지 않아? 나도 1학년 때 서윤 쌤한테 배웠는데 그땐 성적 나름 잘 나왔거든.”

그 흔한 문제집 한 권 없이 오직 교과서로만 공부하는 임성을 보며 박서윤 선생은 ‘내 평생 선생 일 하면서 너처럼 열심히 하는 운동부 놈은 처음 본다.’ 하며 문제집 몇 권을 던져 줬었다. 그 문제집들은 아직도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 선생 때문에요?”

“어느 정도 영향은 있지. 왜, 잘 보이고 싶으면 잘하고 싶은 그런 거 있잖아.”

“잘 모르겠습니다.”

참 김희도다운 대답이었다. 임성은 웃으며 마지막 하나 남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30분이 지나고, 부원들이 하나둘 부실에 모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걸로 끝. 고생했다.”

임성은 김희도의 정수리를 거칠게 쓰다듬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부원들의 컨디션을 물으며 훈련 도구들을 챙기러 갔다.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잠시 움직이지 않던 김희도는 얕은 숨을 내쉬며 노트를 챙겼다. 공식이 한가득 적힌 노트 맨 귀퉁이 끝에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참 잘했어요.^^★

김희도의 시선이 휘갈기듯 쓴 글씨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 * *

일반 학생이든, 혹은 운동부든 ‘시험’이라는 단어는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켰다. 늘 그렇듯 어수선한 시험 기간이 지나가고, 어느새 5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담임의 심부름을 하느라 평소보다 늦게 부실에 도착한 임성은 문밖에서부터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놈들 또 싸우고 있는 거 아냐? 다급히 문을 열었던 임성은 잔뜩 흥분한 신입생들을 얼떨떨하게 응시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오셨습니까, 주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등등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신입생들이 일제히 임성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어. 다들 안녕.”

임성은 손을 휘휘 내젓고선 무슨 일인지 다시 한번 물었다.

“희도가 성적 잘 받아서요.”

박영빈은 마치 제가 성적을 잘 받은 것처럼 한껏 신나 하며 말했다.

“그래 봤자 운동부가 거기서 거기지.”

‘거기서 거기’ 중 한 명을 맡은 게 확실한 조예준이 못마땅한 투로 내뱉었다.

“잘 쳤대?”

가르쳤다는 말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며칠 같이 공부했다고 성적 잘 받았단 말에 솔깃해졌다.

“5등이요!”

하지만 김희도는 성적은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뒤에서 5등은 많이 들었어도 앞에서 5은 생전 처음 듣는 숫자라 입이 떡 벌어졌다.

“김희도가 반에서 5등이나 했어? 뒤에서 5등을 잘못 말한 건 아니지?”

코웃음을 치며 아니꼬운 반응을 보이던 조예준마저 장비를 닦던 손을 멈췄다.

“복도에 대자보 붙었어요. 그리고 반에서 5등이 아니라 전교요.”

“구라도 적당히 쳐라.”

불법이다,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반발이 있음에도 선유고등학교는 매번 전교 1등에서 50등까지 등수가 적힌 대자보를 학년 복도에 전시했다. 인권 침해 등의 의견은 무시하고, 학생들의 건강한 경쟁심을 키운다는 헛소리를 덧붙이며.

조예준이 대놓고 의심하자 다른 1학년이 “저도 봤어요.” 하고 박영빈의 말을 지지했다.

“전교 5등? 우리가 아는 그 전교?”

박종열이 “헐”을 남발하며 놀라고 있을 즈음, 부실 문이 열리며 당사자가 등장했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온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마스크를 코끝까지 올려 쓴 남자는 제게 쏠린 시선이 궁금하지도 않는지 임성에게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야, 싸가지. 너 전교 5등 했다는 거 진짜냐?”

조예준의 질문을 무시한 김희도가 가방을 내려놨다. 반듯한 눈썹,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담담한 눈매 그 어디에도 뿌듯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열심히 하더니 대단하네. 잘했어.”

오히려 임성이 더 좋아하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덕분에요.”

“덕분은 무슨. 나야 그냥 지문을 읊는 수준이었었지.”

“그거면 됐어요.”

김희도의 말에 임성이 눈꼬리를 휘며 활짝 웃었다. 인사치레도 하는구나. 어째 보면 볼수록 기특하네.

“야구 잘하지, 잘생겼지, 공부도 잘하고 말도 예쁘게 해. 넌 부족한 게 뭐냐?”

“싸가지요.”

농담처럼 던진 말에 조예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동안 쌓인 게 많은지 평소답지 않게 임성의 말에 대놓고 반박했다.

“싸가지가 없잖아요. 저 새끼.”

“인사 꼬박꼬박하잖아. 훈련이랑 연습도 착실히 하고. 그 정도면 싸가지 만땅이지.”

“쟤가요?”

조예준은 이번에야말로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김희도를 손가락질했다.

김희도가 착해? 주장 말이라면 콩으로 팥을 쑨대도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이건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할 수 없었다.

“저 자식은 위아래가 없어요. 선배고 뭐고 지 좆대로 군다고요.”

“낯가려서 그래. 그리고 예준아, 후배들 앞에서 좆이 뭐냐?”

“낯 두 번 가렸다가는 아예 반말하겠네요. 아니, 생각해 보니 존댓말을 들은 적이 없네. 와, 여태 맞먹고 있었잖아.”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생각하던 조예준이 어이없는 얼굴로 김희도를 쏘아봤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변명을 하든 맞서 싸우든 반응이 있을 법한데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 사실이 조예준을 더욱 분통 터지게 했다.

“다들 그만하고, 옷 갈아입어. 곧 감독님 나올 시간이다.”

그제야 아이들은 시간을 확인하고 허겁지겁 연습복으로 갈아입었다. 임성 역시 교복 상의 단추를 하나둘 풀며 옷 갈아입을 채비를 했다. 바로 맨살이 드러난 것을 본 김희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어요?”

“요새 바빠서 빨래 돌리는 걸 잊었거든. 오늘은 그냥 하려고.”

“미쳤어요?”

나 보고 한 말이야?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임성은 단추를 풀다 말고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한여름이나 땡볕에선 땀 흡수와 살이 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언더 티가 필수였지만, 지금은 5월 중순이었다. 입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냥 넘어갈 정도의 계절.

마치 자신을 헐벗은 사람 취급을 하는 김희도의 반응에 되레 이쪽 당황스러웠다.

“야, 뭘 그렇게 과민 반응 해?”

“그럼 안 하게 생겼습니까?”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김희도는 조금 신경질적인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더니 반듯하게 접힌 흰색 티 하나를 건넸다. 받으라는 듯이 내미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더니, 손목을 쥐고 직접 손 위에 올려놨다.

“그냥 이대로 괜찮…….”

“입읍시다.”

입지 않으면 비키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말한 김희도가 팔짱을 꼈다.

아니, 뭘 저렇게까지……. 할 수 없이 남은 단추를 모두 풀고 티를 껴입었다. 둘 다 체격이 엇비슷하다 보니 다른 곳은 다 잘 맞았는데 소매가 아주, 아주 조금 남았다.

자신 또한 키에 비해 팔이 길다고 자부하건만, 김희도는 그보다 더 길었다.

팔 길이에 따라 공격이나 수비 범위가 달라지는 야구 선수로서 팔이 긴 건 큰 장점이었다. 투수는 팔이 길면 공이 보다 더 앞에 놓여 포수에게 도달하는 거리가 짧아졌다. 타자가 느끼는 체감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뜻이었다.

쟨 체격까지 축복받았구나. ……으음. 연습복이 어디 있더라.

살짝 남는 옷소매를 보다가 상체를 굽히고 가방 안쪽을 더듬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소재의 티는 그의 근육과 움직임을 그대로 드러냈다.

던지는 힘을 좋게 하려고 일부러 체격을 키우는 투수도 있었지만, 임성은 잔 근육 위주로 철저하게 몸 관리를 했다. 덕분에 과하지 않은 근육들이 오밀조밀 모인 탄탄한 몸을 갖고 있었다.

“아, 여기 있네.”

가방 깊숙한 곳에서 연습복을 찾고 고개를 들었다. 무의식중에 몸을 틀다가 김희도와 부딪힐 뻔하고 두어 발짝 물러났다.

“여기, 접혀서요.”

김희도는 쭈글쭈글한 라운드 넥을 손으로 슥 펴더니 부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임성은 연습복을 꼭 쥔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벌써 몇 번째지, 뭔가 처음 생각한 것보다 더…….

“거리감이 없네.”

김희도의 인상이 다시 한번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인마. 타구가 날아오는 걸 보고 팔을 뻗어야지. 미리 스타트를 하면 그게 잡히겠냐? 감으로 움직이지 말고 타구를 잘 보란 말이야. 타구를! 어휴, 원숭이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다음. 박종열! 어깨 안쪽으로 말린다. 그러다 넘어지면 바로 부상이야. 정신 안 차릴래? 너 올해 3학년 아니야? 언제까지 헤맬래? 그대로 자빠지고 싶냐?”

“죄송합니다.”

“하나 더 간다. 자세 제대로 잡아.”

“예. 코치님.”

박종열은 글러브 안의 공을 빠르게 꺼내 홈으로 송구했다. 그렇게 세 개를 더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미친, 개힘들어. 욕설이 혀끝까지 치밀었다.

“좋다, 다음! ……그렇지. 백핸드. 깔끔하게 잘 잡았네. 너희들 방금 김희도 하는 거 봤냐? 괜히 동작 크게 해서 시간 끌지 말고 공 궤적을 보다가 왔다 싶을 때 글러브를 갖다 대라고.”

그게 바로 되면 이 고생을 하겠냐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아이들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지막은 에러 없이 간다. 놓치는 놈은 바닥에 떨어진 공 다 주워라.”

일렬로 선 야수들이 빠르게 날아오는 공을 잡기 위해 팔을 쭉 뻗었다.

그 시각 투수 조는 각자 자리를 잡고 피칭을 했다. 임성은 어깨와 팔에 무리가 가는 야구공 대신 마른 수건을 힘껏 휘둘렀다.

팔을 휘두른다.

이 단순한 동작에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이 각도로 던지면 구속이 좀 더 빨라질까, 효과적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방법은? 손가락을 조금 더 벌려서 공을 잡으면? 어깨를 내릴수록 궤적이 달라지겠지? 볼 끝이 좀 더 지저분했으면 좋겠는데. 머릿속에 가상 타자를 세운 뒤 그를 향해 던졌다.

가벼운 수건에다가 동작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수십, 수백 번을 휘두르면 땀에 흠뻑 젖기 마련이었다. 특히, 몸 근육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 보면 더욱.

어느새 임성의 얼굴을 모두 뒤덮은 땀은 목을 타고 상의 안으로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쉬지 않고 서른 번을 더 휘두르고 수건을 내려놨다.

“후우. 덥다.”

상의 목 부분을 움켜쥐고 턱과 뺨 부근을 훔쳤다. 축축한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으음. 임성은 문득 움켜쥔 옷을 코까지 끌어 올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김희도가 말한 체취라는 걸 찾아보려고 해도 더운 땀 냄새 말고는 잘 모르겠다. 굳이 꼽자면 불쾌한 쪽에 가까운데 말이야.

개별 연습이 끝나면 전체 수비 훈련으로 마무리를 했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야수가 받아 홈으로 던지는 것으로 정확한 송구를 익히기 위한 훈련이었다.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숨이 턱 끝까지 받칠 때쯤 겨우 끝났다.

이번 주 뒷정리 담당을 제외한 아이들은 힘들다를 연발하며 샤워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임성은 뒷정리 조는 아니었지만, 항상 끝까지 남아 정리하는 걸 도왔다.

“어? 찬규. 너 저번 주 당번 아니었냐?”

“아, 그게, 민성 선배가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바꿨어요. 다음에 제 당번 때 해 주신대요.”

“그래? ……찬규야. 저번 일 아직 마음에 두고 있진 않지?”

“제가 못 한걸요. 실책으로 기록되기도 했고요. 그것만 잡았어도 만루까지는 안 갔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서찬규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예상대로 그때 일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임성은 카트 손잡이에 한쪽 팔을 얹고서 서찬규의 표정을 살폈다.

“야, 인마.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나도 실투 자주 하잖아. 당장 저번만 해도 2이닝 4실점 한 거 몰라?”

“아…….”

기운 내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오히려 서찬규가 눈치를 봤다.

“앞으로 같은 실수 안 하면 되지. 그리고 팔 먼저 뻗은 다음 이동하면 잡기 쉬울 거야.”

“예. 감사합니다.”

그래. 서찬규의 어깨를 두드리며 훈련장 여기저기 흩어진 공을 줍기 시작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라…… 지난 경기 때 자신이 했던 것도 포함이겠지.

머릿속은 오늘 처음 시도했던 투구 폼으로 가득했다. 실전에서 써 봐야 정확한 차이점을 알 것 같은데, 이번 주 연습 경기 때 던져 보자.

열심히 공을 줍고 땀에 젖은 옷을 펄럭이며 샤워실로 향했다.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이 젖고, 뺨은 살짝 상기된 김희도가 막 나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뽀얀 것이 꼭 냇가에서 햇볕을 받은 매끈한 조약돌 같았다.

“씻게요?”

“어. 안에 애들 있어?”

“아니요.”

하긴 김희도가 다른 사람과 같이 씻을 리 없지. 금세 수긍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막 지나치는데, 어쩐지 김희도가 따라 들어왔다.

왜? 양팔을 교차해 상의를 막 벗으려는 자세 그대로 물었다.

“티.”

“아아. 근데, 이거 엄청 젖었거든. 깨끗하게 세탁해서 내일 돌려줄게.”

“괜찮으니까 그냥 주세요.”

김희도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커다랗고 예쁜 손 곳곳엔 훈장처럼 박인 굳은살은 하루 이틀 만에 생기는 게 아니었다. 고된 연습의 흔적을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김희도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인지 뒷걸음질 치게 됐다. 김희도는 시선을 내려 벌어진 거리를 가늠하더니 보폭을 크게 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하던 임성은 어느 순간 라커에 가로막혔다.

내가 왜 도망가지? 아니, 도망이라는 말도 이상했다.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김희도의 팔이 얼굴 옆을 스치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남자가 “그냥 달라니까.” 하고 말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탓에 희미한 물 냄새가 섞인 샴푸 향이 그대로 났다.

“난 분명 찜찜하다고 경고했다?”

그의 어깨를 살짝 밀며 말했다.

당장 돌려받을 만큼 급한가? 아끼는 옷을 빌려줬나? 도통 알 수가 없네. 임성은 축축하게 젖은 연습복을 손에 쥐고, 마찬가지로 땀으로 범벅 된 언더 티를 김희도에게 내밀었다.

“진짜 괜찮아? 축축할 텐데.”

“예.”

심드렁한 표정으로 간결하게 대답한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곧장 돌아섰다.

* * *

중고교 운동선수는 쉬는 날이 많지 않았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훈련과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등 일반 학생들이 추억을 쌓을 때도 그들은 꾸역꾸역 운동장에 나와 뛰고,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뛰어야 했다.

취미로 야구를 시작했던 아이들은 힘든 연습을 버티지 못하고 초등학교, 늦어도 중학교 때 그만뒀다. 지금까지 버티는 선수들은 프로를 목표로 삼고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이번 주 일요일은 전반기 시즌 중 한 번밖에 없는 야구부 공식 휴일이자, 황금사자기 시작 전 마지막 휴식이었다.

“여기, 다들 주목! 혹시 일요일에 학교 올 사람 있냐?”

임성의 물음에 드문드문 손을 들었다. 대부분 한시가 급한 3학년으로 곧 다가올 전국 대회에서 뭔가를 보여 줘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그 외에도 휴일에 나오는 아이들 명단을 추려 코치에게 전달하고 나왔다. 언제왔는지 모를 김희도가 꾸벅 인사했다.

“코치님께 볼일 있어? 지금 들어가면 될 거다.”

“볼일은 있는데, 그쪽은 아니고.”

“볼일이 있다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 아무튼, 이따 오후에 보자.”

그대로 김희도를 지나쳐 가는 등 뒤로 발소리가 자박자박 울렸다. 복도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의 등 뒤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교실로 향하던 임성이 뒤를 돌아 김희도를 봤다.

“혹시, 나한테 할 말…….”

“일요일에 뭐 합니까?”

“이번 주 일요일? 나야 뭐, 학교에 나오지. 조예준 티 배팅도 도와줘야 하고, 걔도 내 공 받고. 시간 나면 펑고랑 페퍼도 하고. 바빠.”

쉬는 날은 보통 조예준과 함께 자율 훈련 후 또또 분식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딱히 약속한 건 아니지만, 몇 년째 계속되다 보니 당연시 됐다고 할까.

특히 올해는 ‘임성 주장 프로 야구 보내기 프로젝트’ 라며 조예준이 더욱 적극적으로 굴었다.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열심히 단장 맞추기 중이었다.

“운동화 살 건데, ……같이 갈래요?”

“어? 나는 예준이랑 보기로 했어.”

“약속했어요?”

“약속은 안 했지만, 옛날부터 그런…….”

“원래 그런 게 어딨습니까? 저는 꼭 같이 가 줬으면 좋겠는데요.”

김희도가 드물게 의사 표현을 하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창문을 통과한 5월의 햇볕이 그의 머리카락 위에 춤추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원래도 뽀얗다고 생각 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햇볕에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빤히 쳐다보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하지. 조금의 당황스러움과 곤란함에 괜히 시선을 피하게 됐다.

“임성, 선배.”

얄팍한 고민 따위는 김희도의 입에서 선배라는 말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쪽, 혹은 호칭 없이 목적어만 툭툭 내뱉던 남자가 처음으로 선배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래. 그러자.”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멋대로 벌어졌다.

꼭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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