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41)

#3

“오빠. 어서 와.”

“오빠!”

“이림이, 세림이. 저녁 먹었어?”

현관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거실에서 인형 놀이를 하던 여동생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허리를 껴안았다. 임성은 동생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은 뒤 양팔에 한 명씩 안고 걸음을 옮겼다.

“형 왔어? 목에 밴드는 뭔데, 한 판 떴어?”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인사하던 소년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저 얘기네.

“싸움은 당연히 이겼겠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임설은 어디 갔냐? 저녁은 먹었고?”

“임설 새끼는 PC방. 10시 지났으니까 곧 오겠네. 밥은 아까 다 같이 먹었어.”

“잘 했다.”

거실 한가운데까지 걸어간 임성은 여동생들을 소파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대체 목이 어떻다고 다들…… 헉. 이게 뭐야. 왜 이래.”

아무 생각 없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임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변에서 호들갑 떤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한 장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붙였던 반창고 주변 살갗이 잇자국으로 가득했다.

아직도 빨갛잖아. 되게 아파 보이네. 임성은 거울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불에 덴 듯 뜨겁던 열기와 뺨을 간지럽히던 숨, 시선, 표정, 그리고 살을 짓씹던 감각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상했지. 정상이 아니었어.

“냄새라…….”

거울 속의 자신과 눈싸움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찬물을 끼얹었다.

* * *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일찍 부실에 도착한 임성은 저보다 먼저 와 있는 김희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네. 이번에도 코치님이 열어 주셨어?”

“안녕하세요.”

평소라면 못 들은 척 무시했을 남자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소리 내 인사했다.

“그래. 좋은 아침이다.”

새 학기에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살짝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가방에서 글러브를 꺼냈다. 부실에 공용으로 비치된 게 아닌 임성의 개인 물건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사서 벌써 6년째 사용 중이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헤지고 낡았지만, 투수로 전환하고 처음 산 글러브라 유난히 애착이 갔다. 일종의 승리 토템이랄까.

이리저리 돌려가며 아무 이상 없는 것을 확인하고 연습복을 꺼냈다.

“……목은 괜찮아요?”

인사한 이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김희도가 임성의 목덜미를 곁눈질했다.

“아, 이거? 괜찮아.”

어제 김희도가 붙여 줬던 반창고는 오늘 아침에 떼고 면적이 넓은 거즈를 새로 붙였다. 다친 부위가 낯설어서 자꾸 신경 쓰였다. 거즈에 희미하게 밴 붉은 기운을 좇던 김희도가 종이 가방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이게 뭔데?”

말려 올라간 상의를 내리고 종이 가방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기 무섭게 김희도에게 돌려줬다.

“사과 선물이라기엔 너무 과해. 금방 아물 텐데 신경 쓰지 마. 훈련하다가 다치는 거 흔하잖아.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안 낀다.”

김희도가 준 것은 유니폼 안에 입는 검은색 언더 티였다. 그것도 덥석 받기엔 꽤 고가의.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주는 거면 이러지 않아도 됐다.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놀랐지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사고에 불과했다. 쟤라고 좋아서 남자 목을 물었겠냐. 게다가 김희도의 근육을 만져 보는 것으로 이미 협상을 끝냈지 않나.

“오늘 언더 안 입었죠?”

“아. 빨았어. 사러 가야 하는데 도통 시간이 없네.”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머쓱하게 웃자, 김희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종이 가방에서 언더 티를 꺼내 직접 손에 쥐어 줬다.

“그쪽이 아니라 날 위해서 주는 겁니다.”

“응?”

“어제 일을 겪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세탁했으니까 바로 입으면 됩니다.”

언더 티는 연습복이나 유니폼 안에 입는 얇은 셔츠로 살이 타는 것을 방지하고 땀 흡수를 도왔다. 그 말인즉슨, 언더 티를 입지 않으면 땀이 그대로 흐른다는 뜻이었다. 체취에 민감한 김희도에게는 쥐약, 아니 눈앞에서 치즈를 흔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비싸. 저렴한 건 3만원도 안 하는데 이건 거의 10만 원…….”

“날 위해서라니까요. 받아요. 어서.”

김희도는 한 번 더 강조했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날 서 있었다.

“……그래. 고맙다. 잘 입고 돌려줄게.”

거부는 거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에 떠밀린 임성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김희도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부실을 나갔다.

어째 묘하네. 묘해. 중얼거리며 셔츠를 만지작댔다.

* * *

“감독님. 임성입니다. 부르셨습니까?”

임성이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방 안에 갇혀 있던 메케한 담배 연기가 목구멍을 탁 쏘아 댔다.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기침을 삼키며 감독 앞에 섰다. 그는 임성이 들어온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쪽 다리를 꼰 채 휴대폰 게임에 빠져 있었다. 대면할 때면 늘 들리곤 하는 게임 소리가 오늘도 울렸다.

“아, 씨발. 여기서 뒈지네.”

감독은 플레이하던 캐릭터가 죽고 나서야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임성을 삐뚜름하게 쳐다봤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와 축 처진 입매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드러냈다.

“너 내가 뭐라고 했어? 김희도 기초 훈련 열외라고 말했냐, 안 했냐?”

“하셨습니다.”

“하셨습니다?”

감독은 임성의 말을 따라 하더니 허, 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때 프로 선수로 활약했던 사람답게 50살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덩치가 좋았다. 물론 근육질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움직이는 대로 살이 출렁였지만.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새끼야.”

“무슨 말씀인지 알았다는 뜻이지, 하겠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쭈, 이것 봐라. 너 지금 나랑 말장난하냐?”

“죄송합니다.”

임성은 감독의 말을 듣지 않고 꼼수를 썼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애초에 단체에서 특정 인물만 다르게 대하는 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야구는 철저한 팀플레이였다. 특히 수비는 선수들 간의 연계와 호흡이 무척 중요한데, 티 나게 편애하라는 건 말이 안 됐다. 선유고 야구부를 위해서도, 김희도 본인을 위해서도.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마음대로 조정하고 지랄이야. 넌 내가 허수아비로 보이냐?”

“그 부분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 김희도도 훈련 참여…….”

“이게 완장 달았다고 꼬박꼬박 말대답하네? 그래서 네가 지금 잘했다는 거지, 어?”

“죄송합니다.”

감독은 아예 임성의 말을 들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제 분에 못 이겨 삿대질을 해 댔다. 여기서 더 얘기해 봤자 화만 돋울 뿐이라는 건 지난 1년 반 동안 숱하게 경험했다. 당장 야구 빠다로 엉덩이를 안 맞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감독의 말에 불복한 건 잘못이니까. 임성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감독의 화가 풀리길 기다렸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네가 감독 해라. 너 혼자 애들 훈련 시키고, 시합에 나가라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 받고 싶지도 않다. 야, 고개 들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감독이 점퍼를 벗어 임성에게 냅다 집어 던졌다. 허공을 휙 나른 점퍼는 임성의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모멸감을 주려는 행동이었다. 임성은 입술 안쪽 살을 꽉 깨물며 바닥을 나뒹구는 점퍼를 주웠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했다간 시합에 못 나가는 줄 알아. 민성이 오라고 하고 넌 나가 봐.”

“가보겠습니다.”

구십 도에 가깝게 인사를 한 임성이 감독실을 나왔다.

* * *

고교리그는 보통 전반기 주말리그와 왕중왕전인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후반기 왕중왕전인 대통령배와 협회장기로 나뉘었다. 그 외에도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나 전국 명문고 야구열전 등 크고 작은 대회가 있지만, 보통 빅게임은 저 4개를 꼽았다.

4월 초 즈음 시작되는 전반기 주말리그는 지역별로 조를 나뉘어 약 두 달간 진행됐다. 그리고 그 순위를 토대로 왕중왕전를 치르기 때문에 꾸준한 성적을 내는 게 중요했다.

올해 선유고등학교는 1, 2학년 때 팀 에이스로 활약한 투수 임성과 그의 오랜 파트너인 안방마님 조예준, 그리고 중학 리그를 씹어 먹은 루키 김희도의 합류로 전력이 소폭 증가했다는 평이 많았다.

선유고 외에도, 전국 1차 지명으로 유력한 투수 이치연이 이끄는 주강고등학교와 프로를 여럿 배출했으며 발군의 팀워크를 보이는 야성고등학교, 올해 야수 최대어로 꼽히는 백도경을 보유한 신라고등학교 등이 우승 후보로 꼽혔다.

저 멀리, 해가 어스름히 떠오르며 하늘을 주황빛 섞인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입춘이 지난 지 한참 됐는데도 아침저녁엔 서늘한 기운이 묻어났다.

해가 다 뜨지 않은 이른 아침, 남색 유니폼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잡담을 하거나 잠을 자는 등 다소 여유로운 연습 경기와 달리 말이 없었다.

어둠을 헤친 버스가 마침내 경기장에 도착하고, 아이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버스에 내렸다.

오늘은 전반기 주말리그의 첫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대결 상대는 상왕고등학교로 전국 대회 우승 경험은 없지만, 선수층이 꽤 탄탄해 높은 평가를 받는 학교 중 하나였다.

대부분 선유고의 승리를 점쳤지만, 스포츠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지 않나.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그라운드에서 죽는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오늘 시합 지면 학교까지 뛰어서 간다. 다들 알았냐?”

각 학년별로 반응이 나뉘었다. 아직 감독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신입생들은 설마 그러겠어? 라는 표정이었고, 학교까지 정말 뛰어간 경험이 있는 2, 3학년들은 군기가 바짝 든 채였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 하자. 그동안 연습 많이 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자, 다들 어깨동무하고. 내가 ‘선유고’ 선창하면, 다 같이 ‘화이팅’”

주장에 말에 따라 아이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임성은 김희도의 어깨를 감쌌지만, 반대편에 있던 부원은 호기롭게 팔을 뻗었다가 김희도의 살벌한 눈빛을 극복하지 못하고 허공에 엉거주춤 멈췄다. 결국, 한 군데가 끊어진 어깨동무가 완성됐다.

“선유고!”

“화이팅!”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그라운드를 우렁차게 울렸다.

임성은 글러브를 끼며 하늘을 올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마치 한여름의 바다처럼 새파랬다. 기분 좋은 날씨였다.

“조예준. 침착하게, 침착하게. 알지?”

주심이 걸어오는 걸 확인하고 조예준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주장이 제일 긴장한 것 같은데요.”

“티 나냐?”

“엄청요.”

“첫 공식 경기는 항상 떨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심장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이것 봐.”

임성은 조예준의 팔을 끌어 제 심장 부근에 갖다 댔다. 그는 “저도요.” 하고 말하더니 임성의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에 댔다.

쿵쿵쿵. 자신 못지않게 긴장하는 조예준을 보니 아주 살짝 마음이 놓였다.

“예준아. 올해도 잘 부탁한다. 잘해 보자.”

“프로까지 보필해야 진정한 배터리 아닙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따라와야지, 너도.”

“일단 이 경기부터 이기고 말하죠. 전 전투력 만땅입니다.”

“나도 왼팔이 근질근질한 것이 슬슬 흑염룡이 깨어나려다 보다.”

“크크큭, 이 몸은 이미 각성 완료했습니다. 오늘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쓸어 버리죠? 그것이 우리가 이 세계에 온 이유니까.”

김희도는 본인 수비 자리로 걸어가며 임성과 조예준을 힐끔 쳐다봤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어 주는 모습에선 오랜 시간 함께한 안정감과 굳은 신뢰가 가득했다.

“……배터리란 말이지.”

작은 중얼거림은 주변의 소음에 묻혔다.

그라운드 한쪽, 우뚝 솟은 커다란 전광판에 학교명과 선발 선수, 등 번호와 포지션이 떴다. 대부분 2, 3학년으로 구성된 양 팀 선수 중 1학년은 김희도가 유일했다.

라인업에 포함되지 못한 부원들은 더그아웃에 옹기종기 모여 열띤 응원을 펼쳤다. 목동 구장이 처음인 신입생들은 처음으로 신기한 얼굴로 경기장 곳곳을 둘러봤다.

“중학교 때랑 완전 다르지? 기백이 장난 아니란 말이야.”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던 2학년 투수 하수영이 말했다. 여유로운 척 말하는 그의 뺨에도 옅은 긴장이 어려 있었다.

구장 곳곳에 드문드문 자리한 관중은 대부분 선수 가족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선수 기량을 살피기 위한 프로리그 스카우터 정도일까? 그나마도 시즌 초반이라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스카우터가 선수들에게 얼마나 많은 동기를 부여하는지 모른다.

꼭 눈에 들어서 반드시 프로 리그에 진출을……!

전광판 시간이 14:00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경기가 시작됐다.

임성은 흙 범벅이 된 투수판을 한 발로 밟았다. 마운드 높이는 약 25cm. 그것을 밟고 선 선수가 그라운드 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고등학교 3학년 첫 시합의 투수로 마운드에 서는 것이었다.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몸을 빠듯하게 채웠다. 익숙한 글러브를 매만지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후우. 깊게 들이마신 숨 속에 찬바람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이 쌀쌀한 공기가 뜨겁게 변하고, 또 서늘해질 때까지 계속 마운드에 설 것이다.

임성은 글러브 속에 숨긴 공을 손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공 표면에 난 솔기 자국을 만질 때마다 심장이 빠듯하게 부풀었다. 쿵, 쿵, 쿵. 귓속에서 북이 울리는 듯했다.

대결 상대인 상왕고 1번 타자 서주환이 타석에 섰다. 지난 2년간 자주 맞붙으며 서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무게감 있게 배트를 휘두르는 선수라 특히 장타를 조심해야 했다.

한참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은 조예준이 손가락 엄지와 검지를 폈다가 중지를 하나 더하며 사인을 보냈다.

타자 바깥쪽을 파고드는 직구.

좋아. 임성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두 사람은 중고등학교로 갈렸던 1년을 제외하고 지난 4년간 계속 호흡을 맞춰왔다. 플레이 방식과 선호하는 구종, 버릇 등 야구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지금 직구 사인 역시 임성이 예상한 대로였다.

스흡. 임성은 숨을 한 번 더 깊게 마시면서 오른쪽 무릎을 허리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디딤 발로 삼으로 뒤쪽으로 꺾었던 팔을 최대한 앞으로 내던졌다. 손끝을 스치며 빠져나간 공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스트라이크!”

서주환은 움직이지 못했고 전광판에는 스트라이크를 뜻하는 노란 불이 떴다. 구속은 그리 빠르지 않았으나 정확한 제구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후우. 한껏 치솟았던 임성의 어깨가 살짝 내려앉았다.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빠른 템포로 1번 타자를 돌려세운 뒤, 나머지 타자도 삼자범퇴(*공격 팀의 타자 3명이 진루나 득점을 하지 못하고 모두 아웃되는 경우)로 처리하며 실점 없이 이닝을 종료했다.

“주장님. 엄청 멋져요.”

모자를 벗으며 더그아웃에 들어가자 부원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컨디션 좋네. 오늘 긁히는 날인가보다.”

“지난가을부터 통째로 날렸잖아, 그동안 공 던지고 싶어서 근질근질했거든. 그런 의미에서 박종열 안타, 아니 홈런 쳐라?”

“야. 말 안 해도 치려고 했거든? 아주 장타로 쭉쭉 뽑아 주마.”

뼈 있는 농담에 임성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소리 내 웃었다. 땀을 훔치며 벤치에 걸터앉자 1학년이 냉큼 물과 수건을 건넸다.

“주장. 드세요.”

“어. 고맙다. 잘 마실게.”

습관적으로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자, 어깨를 들썩이며 부끄러워했다. 풋풋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조예준. 프레이밍 더 늘었더라. 덕분에 편히 던졌다.”

“지옥의 훈련을 한 보람이 있네요.”

조예준이 마스크와 보호대를 차례대로 벗으며 말했다. 3kg 가까이 되는 장비를 쓰고 걸친 채 앉았다가 일어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포수 중에 치질이나 무릎 관절염 등을 앓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모든 포지션 중 오직 포수만이 그라운드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임성이 투수를 좋아하는 만큼 조예준도 자신의 포지션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잘 먹히는 것 같네요.”

“뭐가?”

“애들 홀리는 거요. 그래도 작년에는 세 경기쯤 걸렸는데, 이번엔 첫 게임에 바로 넘어갔네요.”

“하하, 홀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도통 알 수 없는 말에 임성이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웃었다.

임성은 대부분의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지만, 특히 후배들이 그를 열렬하게 따랐다. 후배들을 종 부리듯 하거나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잦은 운동계에서 임성처럼 다정한 선배는 드물기 때문이었다.

당사자는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조예준 또한 ‘홀린 애들’ 중 한 명이었고.

“거기 그만 떠들고 경기 집중해라!”

감독의 말에 다들 입 다물고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칼을 간 건 임성만이 아닌 듯 상왕고 투수 역시 빠르게 아웃 카운트를 채웠다.

선유고의 공격이 순식간에 끝나고, 임성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공을 던지고, 타자를 돌려세우고, 혹은 안타를 맞고, 잡고. 두 학교는 번갈아 가며 공격과 수비를 했다.

장타를 칠 거라고 선언했던 박종열은 정말 안타를 때리며 선취점을 획득했다. 귀중한 득점에 힘입은 임성은 상대 타자들을 차례대로 처리했다.

다시 선유고의 공격 차례가 됐다. 실투를 놓치지 않은 윤재하가 내야 안타를 치며 1루 베이스를 밟았다. 그리고 이 순간.

“김희도 나왔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김희도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배트를 잡고 상체를 살짝 물리며 타격 자세를 취했다. 시큰둥한 얼굴엔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임성은 그 모습을 보며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처음 마운드에 올랐을 땐 하도 손을 떨어서 공이 포수의 머리를 훌쩍 넘겼던 기억이 났다. 그때 포수 선배가 배를 잡고 웃었는데.

그에 비하면 역시 김희도는 배짱 있었다. 잘하는 애는 역시 남다르구나.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김희도는 세 개의 공이 포수 미트에 빨려 들어가는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 초구를 팡팡 때리던 것답지 않게 두 손으로 배트를 쥔 채 지켜보고만 있을 뿐.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여기서 공 하나만 더 들어가면 아웃되는, 김희도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카운트였다.

“뭐냐? 쟤 왜 가만히 있어?”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지켜보던 애들이 비아냥댔다. 특히, 양민성은 “저 새끼 쫀 게 틀림없다.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저럴 줄 알았다. 저런 애들치고 실전에서 제대로 하는 새끼 없다.” 하며 다 들리게 빈정거렸다.

주의를 주려고 임성이 막 입을 뗀 것과 동시에 상왕고 투수가 공을 던졌다. 언뜻 봐도 스피드가 꽤 빨랐다. 살짝 물러나 있던 김희도가 순식간에 상체를 당기며 배트를 휘둘렀다.

깡! 높게 떠오른 공이 펜스를 훌쩍 넘어가며 고교리그의 시작을 알렸다.

“어어? 계속 가네. 어? ……헐, 야. 홈런이다, 홈런!”

실망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아이들은 잔뜩 흥분해서 고함을 내질렀다. 같은 신입생들은 두 손을 번쩍 들거나, 펜스를 북처럼 두드리며 김희도의 홈런을 기뻐했고, 평소 그를 아니꼽게 여기던 이들도 입을 떡 벌렸다.

김희도는 흥분도, 기쁨도 드러내지 않은 무표정으로 베이스를 밟았다. 헐떡임조차 없어 표정만 보면 홈런을 친 건지 아웃을 당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선유고등학교 2 : 0 상왕고등학교]

첫 공식 경기부터 1학년에게 투런을 맞은 상왕고 투수가 시무룩하게 모자챙을 매만졌다. 모자 아래 드러난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아, 저 기분 잘 알지. 황당하고 어이없고, 또 분하기도 하고.

문득 3년 전, 김희도에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났다. 그땐 망할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같은 팀에서 뛰고 있다니 참 모를 일이었다.

“야, 김희도. 완전 나이스. 나이스.”

부원들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김희도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몇몇은 그의 어깨나 허리 등을 치려고 시도했지만, 김희도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하이파이브를 무시했다. 그리고 무리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져 앉았다. 투런에 들떴던 분위기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썰렁해졌다.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완전 소명중 더그아웃을 빼다 박았잖아. 임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 수분 보충해. 꼼짝없이 아웃당하는 줄 알았는데, 거기서 어떻게 각도를 바꿨냐?”

“공이 안쪽으로 휘길래.”

거의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는데, 수능 만점 받았어요.’ 급의 대답이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대응한 게 대단하단 거지. 원래 잘하는 놈인 줄 알았지만, 새삼 놀랐다.”

임성이 활짝 웃으며 서슴없이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빡빡이에 가까운 다른 애들과 다르게 풍성한 머리카락이 손끝에 스르륵 감겼다. 곧바로 정색하거나 쳐 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김희도는 의외로 얌전히 손길을 받았다.

이 정도는 괜찮나. 오케이라는 거지?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를 대하듯 계속 살피게 됐다.

“……이 정도면 쉽게 통하는 겁니까?”

“뭐?”

뭐가 통해? 되물어봤지만, 김희도는 대답 대신 물통으로 뒷 목을 툭 건드렸다.

헉, 차가워. 맨 살갗에 닿는 축축하고 차가운 느낌에 목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갑자기 뭐냐?”

“그냥요.”

그냥? 시큰둥한 표정을 보니 장난친 건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에 빠진 사이 선유고의 공격이 끝났다. 글러브를 챙긴 임성이 그라운드로 나갔다.

“이번에도 잘 막자.”

아직 4월도 안 됐는데, 태양이 미친 듯이 작열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눈을 뜨기 힘들 만큼 햇볕이 따가울 것이다. 하지만 여름, 야구라는 느낌이 나서 썩 나쁘지 않았다.

임성은 손가락 사이에 공을 끼우며 손바닥으로 둥근 면을 감쌌다. 구속은 여전히 잘 나오지 않았지만, 대신 원하는 곳에 공이 딱딱 들어가 기분이 좋았다.

1학년이 홈런까지 쳐 줬는데 선배로서 힘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글러브를 낀 손을 들어 올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최종 스코어는 [선유고등학교 6 : 3 상왕고등학교]으로 선유고의 승리로 끝났다.

6점 중 투런을 포함한 3점은 김희도가, 나머지는 박종열을 포함한 3학년들이 선배다운 면모를 보였다. 선발로 출전했던 임성은 5이닝까지 책임지며 승리투수로 기록됐고, 후반에 계투로 나왔던 양민성은 수비 실책 및 본인 폭투로 2점을 잃었다.

“학교까지 뛰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네. 대신 뛰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훈련해 보자. 얼른 짐 싸고, 돌아가서 반성회 한다.”

코치의 농담 섞인 진담에 안도한 얼굴로 숨을 내쉬던 아이들은 이어지는 말에 사색이 됐다.

글러브와 장갑을 가방에 넣은 임성이 손등으로 턱 끝에 매달린 땀을 닦았다. 오랜만에 공식 경기에서 던져서인지 어깨와 팔 전체가 후끈후끈했다.

거칠게 들썩이는 숨과 여전히 남은 흥분의 잔재. 역시 이 맛에 경기하지.

가방을 먼저 싸고 더그아웃에 곳곳에 남은 빈 물통과 배트, 그리고 에너지바 껍질 등을 치우는데 김희도가 슬그머니 와 옆에 섰다.

도와주려는 건가? 하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 김희도는 멀뚱히 서 있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도와주는 게 아니면…….

“혹시 할 말 있어?”

“아니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하시죠.”

“음? 그래.”

앞 벤치 정리를 끝내고 뒤로 이동해서 쓰레기를 줍는데, 어느새 또 김희도가 근처에 와 있었다.

“…….”

혹시 정리 잘하는지 감시하는 건가? 무뚝뚝한 표정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공식 경기가 있는 날엔 추가 훈련 없이 일찍 끝날 때가 많았다. 경기 내내 최대치로 끌어올렸던 근육 회복을 위해 쉬는 선수, 실전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보강 운동을 하는 선수 등 각자 컨디션에 맞춰 움직이곤 했다.

저녁 10시가 넘어가자 아이들로 가득하던 훈련장이 한산해졌다. 임성은 부원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부실을 지켰다.

“주장. 저 먼저 씻고 올게요.”

“어.”

땀과 흙으로 엉망이 된 유니폼을 품에 안은 조예준까지 나가자 부실엔 임성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노트를 정리하다가 엎어 놓은 휴대폰을 집어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프로 야구 탭 끄트머리에 「전국 고등학교 전반기 주말 리그 시작」이라는 제목을 클릭했다. 한 줄 남짓한 기사 내용은 제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프로 야구와 달리 고교야구는 관심 있는 사람이 적어 전국 대회 결승전쯤 돼야 겨우 기사가 났다. 어쩌다 제 이름이 실리는 아이들은 좋든 싫든 영향을 받곤 했고.

“오늘 경기 끝났으려나?”

프로 야구 각 구장 현황을 살폈다. 아직 8회인 곳도 있고 이미 끝난 경기도 더러 있었다. 임성이 응원하는 유니콘즈는 대전에서 한창 시합 중이었다.

『김이설, 유격수 앞 떨어지는 안타. 아, 지금 닉스 엘리펀츠 김성철 감독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습니다. 세이프 전에 태그 했다고 어필하네요. 해당 장면,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심판에게 어필 중인 엘리펀츠 감독이 보이더니, 곧 유니콘즈 김이설이 1루 베이스를 향해 발을 뻗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나왔다. 발이 먼저 닿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전에 터치 당한 것 같기도 했다.

헷갈리는 건 해설과 캐스터도 마찬가지인지 다각도로 보여 주며 『거의 동시에 닿은 것 같죠? 판별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심판진들의 대화가 길어집니다.』 하고 코멘트를 했다.

베이스를 먼저 밟았나?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 갖다 대며 집중하고 있을 때, 부실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인기척이 들렸다.

“예준이냐? 빨리 씻었네.”

시선은 여전히 휴대폰에 고정한 채 말했다.

당연히 들려야 할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가 조예준이 아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발견했다.

“집에 안 갔어?”

“…….”

“일단 들어와.”

꾸벅. 고개를 가볍게 숙인 김희도가 부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목 끝까지 꽉 채운 교복 차림은 으레 저 나이대의 남자애들과 다르게 주름 하나 없이 깔끔했다. 피부도 하얘서 좀처럼 운동하는 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왜 돌아왔…….”

『판독 결과 세이프로 인정됐습니다. 김이설 선수 보호구를 풉니다. 수긍할 수 없는지 김성철 감독이 다시 심판에게 말합니다. 계속 강하게 어필 중입니다.』

해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야구 보고 있었거든. 여기 앉아.”

임성은 얼른 영상을 끄고 턱으로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김희도는 마주 보는 게 아닌 임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왜 옆에 앉지. 살짝 의아했지만,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고 그러려니 했다.

“놔두고 간 물건 있냐?”

“없습니다.”

딱딱하게 대답한 김희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가 살짝 흔들리며 머리카락이 팔락이다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꼭 풀씨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임성은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침에 같이 훈련한 적은 많아도 이 시간에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예.”

늘 그렇듯 돌아오는 대답이 짧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김희도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대답했다는 자체가 의미 있었다.

“오늘 잘해 줘서 고마웠다. 내일은 오전 경기라 일찍 일어나야 해.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오늘 김희도는 고교리그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수비에선 서툰 부분도 있으나 실수 없이 대담하고 침착하게 했다. 물론 너무 침착해서 팀 분위기에 살짝 찬물을 끼얹은 감도 있지만, 그건 차차 고치면 되니까.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어떤 플레이를 보일지 기대되는 동시에 더욱 그와 맞붙고 싶어졌다. 저 담담한 표정이 깨지는 걸 보고 싶어.

“약속은 이미 끝난 거 아닙니까?”

일부러 피했던 얘기를 기어코 김희도가 꺼냈다. 이대로 모른 척 넘기려던 임성은 순간 뜨끔한 표정을 짓다가 작게 웃었다.

“첫 공식 경기까지였잖아요.”

당연히 김희도는 넘어가지 않았지만.

“……타 학교에서 아직 너에 대해 분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 다음엔 다를 수도 있어. 고교 야구는 네 생각보다 만만치 않거든.”

임성은 무조건적인 칭찬 대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도전 의식이라도 좋으니까 김희도가 계속 야구부에 있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므로.

김희도는 햇볕을 받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임성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꿰뚫는 듯한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턱 밑을 긁적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지금 엄청 티 나는 거 알아요? 저번에도 느꼈지만, 진짜 거짓말 못 하네.”

아, 그래? 임성이 어색하게 웃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괜히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 너 잘해. 지금도 엄청 잘하고, 앞으로는 더 잘할 거다.”

“추켜세워 봤자 나오는 거 없어요.”

“나오는 게 없는데도 하고 있잖아. 그게 무슨 뜻이겠냐? 진심이라는 거지.”

이러니까 꼭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네. 괜히 목구멍이 간질거려 목을 몇 번 쓸었다.

“홈런 쳤을 때 기분 좋지 않았어? 고교 첫 홈런이었잖아.”

“딱히.”

김희도는 홈런을 쳤을 때처럼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켜보는 쪽은 완전 열광했는데, 당사자는 별로 감흥이 없었나 보다.

“그래. 이제 와서 뭘 숨기겠냐. 솔직히 말할게. 계속 야구부에 남아 줬으면 좋겠다. 이번엔 어쭙잖은 조건 같은 거 안 붙여.”

말을 하고 그를 보는데, 뭔가 불쾌한 것을 떠올린 듯 김희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 이거 전조가 좋지 못한데. 내가 뭔가 거슬리는 말을 했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니 대응도 잘 못 하겠네.

“불쾌한 냄새를 맡으면서까지 야구부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너 야구 좋아하잖아. 아니야?”

“별로. 야구를 하면서 느끼는 재미보다 불쾌감이 더 커졌다는 말 못 들었어요?”

짐짓 단호한 말에 임성이 입을 다물었다.

여태 지켜본 김희도는 즐기는 게 아니라 꾸역꾸역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의 경기를 보러 다닌 2년 동안 한 번도 열광하거나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불쾌감이 더 컸을 수도 있지.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물러설 거였다면 처음부터 그를 쫓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너 재능 있어.”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 쪽에게 중요하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생각보다 강경한 대답에 모습을 들은 임성은 몸을 완전히 옆으로 틀었다. 이제 두 사람은 마치 대치하는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게 됐다.

“오늘 시합에서 아무것도 못 느꼈어? 타석에 들어섰을 때, 홈런 쳤을 때, 그라운드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았을 때. 그중에 하나도? 훈련은? 연습 때는? 단 한 번도 없었어?”

김희도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뭔지 몰라도 멈칫할 정도의 기억은 있구나. 여기서 쐐기를 박아야겠다. 임성은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김희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걸 봤지만, 임성의 머릿속은 김희도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있는 거 맞지?”

“…….”

임성은 매끄러운 입술을 빤히 보며 목구멍에 걸린 타액을 꿀꺽 삼켰다. 빨리 대답해. 야구 계속하겠다고.

지난 2년간 선유고 투수로서 전국 대회를 비롯한 여러 경기에 출전했지만,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베스트 8강, 4강. 준우승. 모두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았지만, 스포츠는 결국 기록과 결과로 평가됐다. 언뜻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이 그랬다.

중학교 때의 김희도 성적이면 선유고보다 지원이 빵빵한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학교에 온 것도, 마지막 고교 야구에서 김희도를 만난 것 모두, 모두다…….

“운명이라고.”

“네? 지금, 무슨…….”

“그러니까 도와줘.”

임성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김희도의 양손을 덥석 감쌌다. 손바닥에 감기는 손은 살짝 차가웠지만, 감촉이 무척 부드러웠다.

“……미쳤어요?”

김희도는 다짜고짜 자신의 손을 잡는 임성에게 퍽 놀란 것 같았다. 뿌리칠 생각도 못 하고 당황해하는 그를 빤히 주시하며 임성은,

“네가 필요해.”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김희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물렸다. 물론, 여전히 손이 붙잡힌 채라 딱 한 뼘밖에 멀어지지 못했지만.

임성은 그제야 다급한 마음에 ‘우리 팀에’라는 말을 빼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임성, 미쳤냐?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김희도 표정 썩은 것 좀 봐라. 기껏 설득했는데 망하게 생겼잖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팀에.”

“…….”

“우리 팀에 너 필요하다고. 아예 없었으면 몰라도 이제는 못 놔주지.”

오해할까 싶어서 급하게 덧붙였지만, 어째 수습할수록 더 꼬이는 느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어붙이자. 임성은 더욱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뻔뻔해지려는 시도는 새빨개진 얼굴과 귀, 그리고 목 때문에 실패했다.

김희도의 시선이 임성의 목으로 향했다. 반듯한 목은 자신이 엉망으로 헤집어 놨던 상처가 모두 아물어 깨끗했으며, 땀에 젖어 반들반들 빛났다.

“……그쪽은 어떤데요?”

크게 움직이는 울대뼈를 보던 김희도는 임성이 고개를 들자,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시선을 거뒀다.

임성은 임성대로 김희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쪽 생각은 어떠냐고요.”

“나? 아, 어. 나한테도 필요하지. 계속 같이 했으면 좋겠다.”

“좋습니다.”

“어?”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하고 다음 설득을 준비 중이던 임성이 깜짝 놀랐다.

“날 원한단 거잖아요.”

“어?”

어, 어? 만 반복하는 제 모습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김희도는 임성에게서 손을 빼낸 뒤 되레 그의 손등을 덮었다. 퍽 부드러운 손등과 달리 커다란 손바닥은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 단단했다.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배트를 휘두르며 물집이 터지고 아물길 반복해 생긴 것이었다.

“아닙니까?”

원한다는 말을 한 건 맞지만, 상대방에게 들으니 뭔가 미묘했다. 기분 탓인지 붙들린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김희도가 원한다면 까짓것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었다.

“맞아. 아주, 무척, 완전, 미치도록 원한다.”

임성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김희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좋아요. 하지만 야구부에 있는 대신.”

‘대신’이란 말은 보통 ‘나는 이것을 해 줄 테니 넌 그것을 해 달라.’ 하는 뜻의 등가 교환을 의미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쪽이, 그쪽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예상대로 김희도는 조건이라는 단어로 임성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그 와중에 임성만 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혹시 모를 퇴로를 확실하게 차단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조건이라…… 임성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아.”

김희도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가 뭘 말할 줄 알고요.”

“뭐든 상관없어. 나만 할 수 있는 거라고 했으니까, 돈 빌려 달라는 말은 아닐 것 같고.”

나 돈 없거든. 임성이 농담처럼 덧붙이며 웃었다.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열일곱 살짜리 남자애가 거는 조건은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앞으로 3년간 팀의 주축이 될 선수를 얻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범위의 일은 모두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그렇게 쉽게…… 경계심이 없는 건지.”

김희도는 그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늠하는 것처럼 임성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마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임성을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그래서 뭔데?”

“……일주일에 네 번, 냄새를 맡게 해 주세요.”

“어? 뭘 하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 조건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또다시 되묻자 김희도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드러나게 시선을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치켜떴다. 꽤 도발적인 시선이었다.

“그쪽이요.”

냄새와 그쪽.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연결고리를 생각하던 임성은 혹시나,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내 냄새…… 맡게 해 달라는 거야? 내가 이해를 한 게 맞나 싶어서.”

도발적인 시선이 언제였냐는 듯이 김희도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쏟아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귓등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에 보이는 뒷 목덜미는 더 새빨갰다.

때로는 말보다 표정과 행동이 진심을 더 드러날 때가 많았다. 바로 지금, 김희도처럼.

“내 냄새를?”

헐. 임성은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여전히 김희도에게 붙들린 채라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입 좀 닫아요.”

진짜구나.

임성은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는 김희도를 내려다봤다. 양호실에서의 일을 제외하곤 항상 뭘 해도 덤덤하던 애가 지금은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고양이였다고 할까? 아니면, 호랑이도 결국엔 고양잇과였다는 걸 깨달았다고 할까.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제 나이처럼 보였다.

임성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에 힘을 줬다. 그럼에도 양쪽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김희도가 고개를 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면 바로 말해. 그러니까, 네 조건은 일주일에 네 번 내, 냄새를 맡는 거지?”

“…….”

“야구부에 있는 조건으로.”

“……그쪽도 알다시피 나는 남들에 비해 후각이 예민해요. 그쪽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 자체가 참기 힘들다고요. 훈련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참는지 알면…….”

“알지, 알지. 기특해.”

그 말인즉슨, 임성이 있다면 괜찮다는 뜻이었지만,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

진짜 아는 거 맞아? 김희도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임성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살짝 팔을 비틀어 손을 빼내고선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너 뒤통수 되게 동글동글하다.”

손바닥에 감기는 뒤통수는 동그랗고 감촉이 꽤 좋았다. 왜, 촉감 놀이 할 때 무의식중에 계속 만지게 되는 거 있잖아.

“잘 생각하고 대답해요.”

김희도는 제 머리에 올려진 임성의 팔목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한번 대답하면 물릴 수 없으니까.”

발그레하던 기운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제법 진지한 얼굴이 드러났다. 도발적인 시선이었다.

“잘 생각하고 대답한 거야.”

임성이 씩 웃었다. 좀 놀라긴 했지만, 같은 남자끼리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강아지라고 생각하면 나름 귀엽기도 했고. 아, 강아지보단 고양이에 가까우려나.

“개 취급하지 마세요. 고양이도 아닙니다.”

김희도는 임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안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늘따라 표정이 잘 드러나 보고 있으면 재밌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굴면 오해하지 않을 텐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희도가 자신의 체취만 다르게 느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아주 잘 알지. 몸소 겪었으니까. 임성은 무의식중에 제 목덜미를 더듬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편으론 김희도 성격상 지금 이 얘기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생각하니 짠했다.

“즐거워 보이네요.”

“응? 아니야.”

빙그레 웃고 있던 표정을 급히 수습했다. 재밌어하는 걸 보여 주면 안 될 것 같은데, 벌써 들킨 것 같다.

“일주일에 네 번은 좀 많은 것 같은데. 두 번으로 하자.”

“세 번. 그 이하는 안 됩니다. 훈련이 매일 있는 걸 생각하면 세 번도 많이 양보 한 거예요.”

일주일에 세 번, 세 번. 잠시 생각하던 임성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물면 안 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목에 난 상처 물어봤다고.”

“안 뭅니다. 그때는 내가 좀…… 당황해서…….”

김희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농담이니까 굳이 대답 안 해도 돼.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한다.”

벼랑 끝에서 이뤄진 극적 타결이었다.

김희도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붙잡거나 붙잡히는 게 아니라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는 악수였다.

“아, 내 번호 모르지? 알려 줄까?”

“아니요.”

굳이? 라는 감정이 드러난 표정을 보며 임성이 머쓱하게 뺨을 쓸었다.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인 걸까? 나름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김희도에겐 아니었나 보다.

“뭐야, 둘이 뭐 해요? 싸가지는 왜 여기 있어요?”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깬 것은 물을 뚝뚝 흘리는 조예준이었다. 그는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탈탈 털어 내며 들어오다가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주장. 뭔데요?”

“뭐긴 뭐야. 얼른 가방이나 챙겨. 또또 분식 가야지. 지금 나가야 안 늦겠다.”

임성은 손을 내리며 가방을 챙겼다. 벽에 걸린 시계는 막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또 분식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슬아슬했다.

“또 매운맛 떡볶이 시키려고요? 그럴 거면 안 가요.”

“안 시킬게. 그리고 오늘 볼 배합 기억하지?”

“다는 아니고 반쯤요. 애매한 것도 꽤 많더라고요. 정확한 건 촬영본 봐야 알겠던데요.”

“나도. 잊어버리기 전에 정리해 두자.”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배터리로 활동 중인 두 사람은, 경기가 끝난 후 상대 팀에 관해 이것저것 기록을 했다. 코치가 기록하는 공식적인 기록지와는 다른, 전지적 투수와 포수 시점에서 보는 개인적인 전력분석이었다.

그날 본인의 플레이를 되짚어 보고 장단점 등을 파악할 수 있어 은근히 도움 됐다.

“알았어요. ……어, 칫솔 두고 왔다. 금방 다녀올게요.”

“천천히 빨리 와라.”

네. 큰소리로 대답한 조예준이 샤워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저 사람이랑 어디 가요?”

“누구, 예준이? 경기 끝나면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회의 얘기하거든. 중학교 때부터 이어 온 거라 지금은 거의 습관이야, 습관.”

“매 경기마다요?”

“별일 없으면?”

김희도는 알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할 말이 있나 싶어 입을 달싹이는 순간, 칫솔 통을 번쩍 든 조예준이 요란하게 돌아왔다.

“주장, 이제 가요.”

조예준은 김희도를 보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하더니 임성의 팔을 잡아끌며 부실을 나가려 했다.

“어, 그래. ……김희도, 너도 갈래?”

“형!”

조예준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던 임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는 김희도에게 물었다. 생각에 잠긴 듯하던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조예준은 예상보다 더 격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예준아. 의견은 많을수록 좋잖아. 쟤 오늘 홈런 친 거 너도 봤으면서.”

출루율이나 타율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무 당연하게도 공을 잘 치는 것이었다.

공을 잘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지만, 투수의 버릇이나 선호하는 구종. 그리고 실제로 던지는 공을 빠르게 파악하고 배트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김희도는 굉장히 공을 잘 보고, 또 잘 쳤다. 분명 도움 될 것이다.

임성의 말속에는 김희도를 향한 믿음이 가득했다. 당사자 역시 어렵지 않게 깨달았을 것이다.

“아, 진짜. 존나 싫은데. 아악!”

조예준은 덜 마른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리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하지만 조예준의 반응이 어떻든지 결국, 세 사람은 사이좋게 또또 분식으로 향했다.

학교 근처에 자리한 분식집이라 주말, 그것도 늦은 시간엔 한산했다. 지난 3년간 뺀질나게 드나든 효과가 있는지 사장님 내외가 둘을 반갑게 맞았다. 김희도는 두 사람보다 한발 늦게 가게 문턱을 넘었다.

“오늘 시합 어떻게 됐는데. 이겼나?”

“당연하죠. 사장님 우리 시합 보셨으면, 따봉 날리셨을걸요?”

“성이 잘 덨졌나 보네. 예준이는 오늘 공 안 흘렸고?”

“예준이 오늘 도루저지까지 했어요.”

넉살 좋게 대답한 임성이 에어컨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았다. 다른 자리의 테이블보다 크기가 조금 더 작고 구석진 곳에 있어 얘기를 나누기 좋았다. 그들이 하는 얘기의 90%는 야구에 관한 것이었다.

“옆에 친구는 오늘 처음 보네. 쟈도 야구부가? 남자애가 엄청 예쁘장하게 생겼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이에요. 사장님, 여기 떡볶이 5인분이랑 순대 5인분, 튀김 3인분, 김밥 다섯 줄 주시고요. 우동…… 김희도 너도 우동 먹을래? 여기 우동 엄청 양 많고 맛있거든. 내가 보장한다.”

김희도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연한 듯 임성 옆에 앉았다.

“우동 3개 주세요. 왕 곱빼기로요.”

임성이 주문하는 사이 조예준이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놨다. 각자 할 일을 하는 걸 보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맞다, 성아. 오늘 그거 다 떨어졌는데 괜찮나? 대신 떡 많이 넣어 줄게.”

부산 사투리가 섞인 사장의 말에 임성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 다셨다.

“진짜요? 할 수 없죠. 아, 사장님. 떡볶이는 1단계로 주세요.”

“니가 웬일로 1단계 시키노?”

“왜겠어요. 조예준 때문이죠. 최대한 순하게 부탁드려요.”

알겠다. 최대한 순하게. 사장이 주방으로 향하며 대답했다.

“그거 못 먹어서 아쉽겠어요.”

조예준이 그를 위로했다. 여기서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김희도밖에 없었다. 김희도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

“여기 우동 국물 꽃게로 우려서 엄청 시원해. 한번 맛보면 맨날 오자고…… 음, 너 무슨 기분 나쁜 일 있냐?”

임성은 물을 따르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보던 표정인데도 왠지 기분 나빠 보였다.

“내가 왜요?”

“그렇지? 역시 착각이었나 보다.”

하긴, 쟤가 갑자기 기분 나쁠 이유는 없지. 임성은 김희도의 대답에 금세 수긍했다.

“한번 먹어 보면 맨날 오자고 할걸?”

“형. 저 결벽증 새끼가 이런 분식집에 오겠어요?”

일부러 배배 꼬아 한 말에도 김희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예 조예준이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로 임성이 건네준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입 안을 점령하던 갈증은 사라졌지만, 간질간질한 감각은 여전히 목구멍에 머물러 있었다.

“얘 결벽증 아니야.”

김희도는 땀에 전 옷을 부실 곳곳에 막 던져 놓지도, 물건을 흐트러트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서 파생하는 냄새를 피하기 위해서였지 결벽증과는 결이 달랐다.

임성의 변명, 아니 변호에 조예준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했다.

“주장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 뭐……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아서. 딱 봐도 그렇잖아.”

여기서 김희도가 자신의 목을 물어뜯었다는 말을 할 순 없기에 얼버무렸다. 평소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목소리가 살짝 경직됐었다. 어설픈 반응에도 다행히 조예준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 저 새끼 분명히 결벽증인데.”

“내 말 맞지? 희도야.”

“예.”

조예준에겐 대꾸도 안 하던 김희도는 임성의 말에 입을 열었다. 노골적인 차별에 조예준이 저 싸가지 좀 보라며 황당한 숨을 내뱉었다.

또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조짐이 보이자 임성이 얼른 노트와 스코어북을 꺼냈다. 노트는 귀퉁이가 닳았고 스코어북 또한 표지가 변색 돼 오래된 느낌이 났다. 어느새 집어 든 샤프로 오늘 날짜와 상대 학교 이름과 투수 등 정보를 적었다.

“첫 번째 공 직구였지? 그다음이 체인지업, 슬라이더, 직구…….”

임성은 더그아웃에서 주의 깊게 봤던 구종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영풍고 선발 투수 이름 옆에 구종이 하나씩 적혔다.

“재하 첫 타석 땐 뭐 던졌지?”

“포수가 살짝 옆으로 빼던데요. 슬라이더 아니었어요?”

“음…… 이 방향으로 꺾였나?”

“아뇨, 그것보다 좀 더 비껴간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그 구린 미트질이 먹혔겠죠. 심판 완전 동태 눈깔이었다니까요.”

임성이 4분할 된 칸 중 하나에 동그라미를 치자, 조예준이 고개를 저으며 좀 더 바깥쪽을 가리켰다. 둘 다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팔꿈치가 맞닿고 얼굴 또한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보면 퍽 사이좋아 보일 것이고, 가까이서 보면 더욱 친밀한 거리였다.

“더그아웃에서 봐선 헷갈리더라. 나중에 비디오 찍어 놓은 거 봐야겠지?”

“이따 확인해 볼게요. 그다음 공은 이렇게 들어간 것 같은데.”

조예준이 고개를 쭉 빼며 임성의 손끝을 툭 건드렸다.

“커브 볼, 아웃 코스로 떨어지는 직구, 슬라이더 볼……인데, 스트라이크로 판정.”

임성과 조예준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투수의 구종을 줄줄 읊은 김희도가 입을 다물었다.

저걸 어떻게 다 기억해, 가능한 건가? 스코어북과 김희도를 번갈아 보던 임성은 입을 살짝 벌렸으며 조예준도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모두 놀란 와중 정작 당사자만 평온하게 물을 들이켰다.

“봤으니까요.”

물론, 보긴 봤지. 너도 보고 나도 보고, 그날 구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봤을 것이다. 하지만 한 회에 최소 3개, 많게는 10개까지 넘어가는 구종을 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지간히 시야가 넓고 또, 머리가 좋지 않고서야.

문득, 김희도가 중학교 때 전교권에서 놀았다는 신입의 말이 떠올랐다.

임성의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였고, 조예준은 성적을 바닥에 깔아 주다시피 하는 운둥부 중에선 그나마 나았지만, 그래도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다.

“너 기억력 되게 좋다. 커브, 직구, 슬라이더…….”

혹시라도 잊을세라 얼른 받아 적었다. 샤프를 쥔 손이 노트 위를 바삐 움직였다.

사실, 김희도는 둘의 대화에 동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부러 숨기진 않았지만, 묻지도 않은 걸 먼저 꺼낼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머리를 맞붙인 채 얘기하는 걸 보니 입이 멋대로 벌어졌다.

그러니까, 왜? 김희도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임성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다가 물컵에 시선을 뒀을 뿐.

“우선 떡볶이랑 순대부터 묵고 있어라.”

그때 사장이 양손 가득 접시를 내려놨다. 시킨 게 워낙 많아 두어 번 더 왕복해야 했다. 어느새 떡볶이, 순대, 튀김 등으로 좁은 테이블이 꽉 찼다.

샤프를 내려놓고 집게를 든 임성은 제일 먼저 김희도에게 떡볶이를 덜어 주고, 그다음 조예준, 마지막으로 제 접시에 담았다.

조예준은 여러 종류의 튀김 중 오징어튀김을 골라 임성의 접시에 옮기고 그 위에 떡볶이 소스를 부었다.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를 때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사장님. 여기 쿨피스 하나 주세요.”

손을 번쩍 들었던 조예준은 반응이 없자, 알아서 냉장고로 향했다.

“식기 전에 먹어.”

임성은 떡볶이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으며 김희도에게 권했다.

그 모습을 보던 김희도는 잠시 머뭇대다가 김이 펄펄 나는 떡을 집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걸쭉한 붉은 색과 콧등을 찡긋하게 하는 냄새는 먹지 않았음에도 맛을 짐작게 했다. 제일 순한 게 이 정도란 말이야?

“주장. 여기 쿨피스요.”

다시 돌아온 조예준의 손엔 큰 용량의 쿨피스가 들려 있었다. 양쪽 날개를 펴고 힘을 주자 입구가 세모꼴로 벌어졌다. 컵을 가득 채우는 인공 복숭아 향에 김희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뜨거운 척하지 말고, 마셔요.”

아무렇지 않게 떡볶이를 집어 먹던 임성이 머쓱하게 웃으며 컵을 건네받았다.

“예준아, 1단계는 너무 심심하지 않냐? 최소 3단계는 돼야 맛이 느껴지던데.”

“주장은 미각이 고장 난 게 틀림없어요. 저 저번에 주장 따라 4단계 먹었다가 피똥 싼 거 몰라요?”

으엑. 조예준이 단번에 질색 했다. 임성에게 꾀여 4단계 떡볶이를 먹은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몸 안에 있는 모든 걸 다 쏟아 내야 했다. 몸무게가 1kg 가까이 빠졌으니 말 다했지 뭐.

질색하는 조예준을 보며 임성은 소리 내 웃고선 하나밖에 없는 계란을 김희도 접시에 덜었다.

“반으로 갈라서 노른자에 국물 부어 먹으면 맛있어.”

“그냥 지가 알아서 먹게 놔둬요. 어? 쌈장이 없네. 주장, 순대 쌈장에 찍어 먹을 거죠?”

“어.”

“사장님. 저희 쌈장 주세요.”

조예준이 주방을 향해 외쳤다. 사장이 작은 종지를 내려놓으며 “쌈장이 아니라 막장이라니까. 두 개 완전히 다른 거 모르나?” 하고 걸쭉하게 말했다.

시합이 끝난 후 학교 근처 분식집에 와서 묻지도 않고 메뉴를 시킨다. 쿨피스와 오징어튀김, 막장. 서로의 식성과 습관을 챙기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 * *

“새삼스럽지만 다시 소개할게. 자, 인사해.”

“김희도.”

거기까지만 말한 김희도는 임성의 시선을 느끼고 “……입니다.” 하고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잘했어. 임성이 그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이걸로 선유고 야구부 전원 다 모였네. 다들 앞으로 잘해 보자. 우선 최우선 목표는 주말리그 우승이다.”

김희도에 인사에 2, 3학년들은 여전히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고, 1학년은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첫 타석에 홈런을 친 것이나 상급생을 상대로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한 것 같았다. 동급생에게 인정받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나갔다 들어왔다, 완전 지 마음대로구만. 언제부터 우리 야구부가 구멍가게가 됐냐?”

툭 튀어나온 못만큼이나 날카로운 말이었다. 임성의 말을 경청하던 부원들의 시선이 양민성에게로 향했다.

“선배를 상대로 역겹니 뭐니 한 새끼를 받아 주겠다고? 야. 임성. 네가 그러니까 후배 새끼들이 선배 알기를 좆같이 알잖아.”

“아무도 좆같이 생각 안 해. 그리고 잘하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잖아. 팀에도 도움 되고 서로 건강한 자극도 될 거고.”

“그건 네 생각 아냐? 저 새끼 때문에 분위기 개 같아진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양민성이 대놓고 시비를 걸자 박종열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가볍게 치며 말렸다. 하지만 양민성은 그만둘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민성아. 진정 좀 해라.”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박종열 너도 저 자식이랑 싸웠잖아. 우리 보고 냄새난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냐?”

양민성은 임성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박종열에게 말했다. 제 얘기에 동조하라는 듯한 말투였다.

“기억나. 그래도 김희도가 잘하는 건 사실이잖냐. 잘하는 놈 들어와서 점수 내고 이기는 게 훨씬 낫다. 그리고 임성이 알아서 주의 주겠지.”

“내가 총대 메 봤자네. 어차피 다들 저 자식 말만 들을 건데. 야, 쫄따구 많아서 좋겠다.”

퉤. 침 뱉는 시늉을 한 양민성이 문을 쾅 닫고 나가자 부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이고. 침묵 속에서 박종열이 혀를 찼다.

“임성. 네가 이해해라. 민성이 새끼 요새 예민하잖아.”

“민성이에게는 내가 다시 말할게.”

“됐다. 네가 말하면 더 난리 칠 거다.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 그냥 모른 척해.”

“그래. 부탁한다.”

복잡하구만. 한숨을 푹 내쉰 박종열은 저 때문에 이 소란이 났는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김희도를 힐끔 쳐다보곤 양민성의 뒤를 쫓아갔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음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후배들 앞에서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이제 팀 완성됐으니까,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힘들거나 어려운 부분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 줘.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조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미팅이 마무리됐다.

* * *

팀에 완전히 합류한 김희도는 타자로서 제 몫을 충분히 해냈다. 부원들과 살갑게 지내지는 않아도 첫날처럼 눈에 띄는 트러블은 일으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아예 말을 섞지 않으니 다툼도 없을 수밖에.

처음엔 그와 잘 지내보려던 1학년들도 계속되는 무반응에 말을 걸지 않은 지 오래였다.

김희도는 마치 야구부에 임성과 본인, 단둘밖에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와중에도 주말리그는 이어졌다. 리그 초반인 걸 감안해도 선유고는 순항 중이었고, 오늘도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

7회부터 투입된 임성은 9회 말까지 1실점을 기록했으며, 김희도는 홈런보다 힘들다는 3루타를 때리며 팀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아이들은 버스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 오늘 경기에 관한 이야기나, 어제 본 드라마, 게임 등 잡다한 이야기를 했다.

“좀 크게 만들어 주지. 간에 기별도 안 가네.”

오늘 경기에서 홈런 하나를 기록한 박종열이 초코파이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종열 선배. 주장 어디 갔어요? 안 보이네요.”

조예준이 주변을 살폈다. 와글와글 떠드는 부원들을 통제하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몰라. 똥 싸러 갔나 보지.”

박종열은 조예준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신입생들을 향해 어깨를 쫙 펴면서 오늘 자신이 때린 홈런에 관해 떠들었다. 이제 야구부에 막 적응하기 시작한 신입생들은 3학년의 자랑에 열렬한 환호로 답했다.

박종열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정의영이 끼어들었다.

“아까 타구 잡은 거 봤냐? 나 아니었으면 바로 빠져나갔을걸.”

조예준은 자기 자랑을 쏟아 내는 선배들을 뒤로하고 라커룸을 둘러봤다. 하지만 결국 임성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야 했다.

진짜 큰일 보러 갔나? 버스 출발 전에는 오겠지.

조예준이 한참 임성을 찾고 있는 시각, 당사자는 사방이 막힌 공간 안에서 벽을 등지고 있었다.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

“저번처럼 갑자기 물지는 마라.”

“하지 말라면서요. 그리고 그때도 딱히 목을 빨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야. 표현이…… 아니다.”

‘목을 빤다’는 표현을 지적하려다가 의미 없이 내뱉은 말에 과민 반응하는 것도 이상해 입을 다물었다.

의문 어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김희도의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러트렸다. 땀에 젖었는데도 좋은 냄새가 났다. 달큼하면서도 묘하게 상쾌한 것이, 꼭 초봄에 부는 바람 같았다.

체취로 따지면 자신보다 김희도 쪽이 더 좋지 않나?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

“예?”

“이러면 되나? 자, 이리 와.”

임성이 미소를 띤 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행동에 김희도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렸다.

“지금 뭐 합니까?”

“안아 주려고. 냄새 맡으려면 이게 제일 빠를 것 같아서. 아니야?”

“…….”

어린 애, 혹은 개 취급하는 게 기분 나쁜데도 김희도는 뭔가에 홀린 듯 한 발짝 다가섰다. 가뜩이나 좁은 화장실이라 스파이크 앞코가 서로 맞닿았다. 동시에 입 안에 고인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느리게 넘어갔다.

김희도는 제 목 넘김 소리에 제가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 냥 옷…….”

비어져 나오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게 낯설었다.

“옷? 아, 옷 벗으라고? 생각보다 화끈하네. 뭐, 좋아.”

옷이면 됩니다, 라는 뜻을 임성은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체취를 더 잘 맡을 수 있게 옷을 벗으라는 것으로.

양팔을 교차시켜 상의를 훌렁 벗는 것도 모자라 언더 티까지 거침없이 벗었다. 넓은 어깨와 팔, 그리고 복근에 보기 탄탄하게 달라붙은 붙은 근육은 전등 아래에서 번들번들 빛났다.

머리카락 끝에 맺힌 땀방울이 옷가지에 쓸리며 후두두 떨어졌다.

“곧 버스 도착할 시간이야. 빨리하고 가자.”

빠르게 말한 임성은 옷을 잡지 않은 손으로 김희도의 팔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며, 상체가 밀착됐다. 김희도의 뺨이 임성의 목 부근에 닿았다. 더운 기운이 확 끼쳤다.

대타로 출전해 평소보다 덜 움직인 김희도와 다르게 임성은 경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김희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남자 것인가? 아니면…….

김희도는 눈을 내리깐 채 아랫입술을 핥았다.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체온 낮아서 기분 좋네.”

웃음 띤 목소리가 머리 위에 떨어졌다. 김희도는 가슴이 크게 부풀 정도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무의식중에 그를 끌어안으려다가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물러섰다. 마치 코피라도 나는 것처럼 코점막이 뜨거웠다.

“다 됐어? 생각보다 짧네.”

더운 기운이 아직 가지 않은 듯 임성은 손에 쥐고 있던 유니폼으로 얼굴과 가슴 부근을 닦아 냈다.

“왜 닦아요, 아깝게.”

“어? 뭐라고 했어?”

“……아닙니다.”

무심코 그를 말리려던 김희도가 한 발짝 물러섰다.

“후, 덥다. 경기 직후가 가장 더운 것 같아. 마무리로 던지는 날이면 평소보다 조금 더 힘들거든.”

마무리할 땐 힘이 엄청 들어간다니까. 중얼거린 임성이 늘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털어 내다가 쓸어 넘겼다. 김희도의 시선이 훤히 드러난 이마에 닿았다. 평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되게 못돼 보이지? 막 애들한테 돈 뺏을 것 같고?”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임성은 꽤 잘생겼지만,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편이라 빈말로도 부드러운 느낌은 나지 않았다. 날 티 난달까, 잘 놀게 생겼다고 할까. 입 다물고 있으면 세 보이지만, 실제론 남을 잘 챙기고 다정했다.

아직 어린 동생들이 있어서인지 남들과의 스킨십에도 스스럼없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두드리고,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툭 치거나 손을 잡는 등. 본인이 아무렇지 않아 하니까 상대방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애들 기다리겠네. 슬슬 나가자.”

어느새 유니폼을 다시 꿰어 입은 임성이 김희도의 어깨를 짚었다. 아직 뜨거운 기운이 남았는지 그의 손이 닿은 곳이 간지러웠다.

“어디 갔다 와요?”

“화장실. 오래 기다렸냐?”

사라진 자신을 대신해 부주장인 조예준이 부원을 모아 두고 있었다. 임성은 그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안함을 전했다.

오래 기다린 건 안고요. 조예준의 눈동자가 임성의 뒤에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쟤는 왜 주장이랑 같이 오는 걸까. 분명히 조예준의 시선을 느꼈을 김희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먼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예준아. 감독님은?”

“감독, 코치님 다 먼저 돌아가셨어요. 오늘은 집에 바로 가도 된대요. 종열 선배랑 양민성 선배는 먼저 가셨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인원이 적다 했더니, 3학년 중 일부는 먼저 간 모양이다. 아무리 부주장이라도 후배인 조예준이 그들을 잡진 못했을 테고. 대충 상황이 이해됐다.

“다들 컨디션 관리 잘하고. 집에 갈 애들은 어디 새지 말고 바로 가라. 학교 갈 거면 5분 뒤에 도착하는 버스 기다리고.”

“수고하셨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전반기 주말리그가 시작되고 반 정도가 지난 시점, 선유고등학교는 3승 1패로 상위권 다툼 중이었다. 총 네 번의 시합 중 임성은 선발로 한 번, 불펜(*선발 투수를 제외한 모든 투수, 중간 계투와 마무리 투수)으로 한 번, 마무리 한 번으로 총 세 경기에 출전했다.

구속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지만, 고등학생답지 않은 제구와 노련함으로 착실히 아웃을 잡았다.

날이 조금 풀리자 아이들은 경기가 끝나고도 학교로 돌아와 훈련을 소화했다.

그 사이 매일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훈련 양을 이기지 못한 신입생 3명이 탈주를 했다. 개중 2명은 다시 돌아왔지만, 1명은 아예 야구를 그만둔다고 했다. 조금만 더 해 보자고 설득하러 갔던 임성은 단호한 표정을 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먼저 야구부를 그만둘 것 같았던 김희도는 놀랍게도 아직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시큰둥해하면서도 훈련을 소화했다.

새벽에 임성과 함께 운동장을 달리는 것도 여전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여느 때처럼 훈련이 있는 날. 임성은 운동장이 아닌 부실에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빠진 사람 없지? 거기, 조용히 하고. 지금부터 짝꿍 뽑기를 시작한다.”

“하아.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임성이 택배 상자로 어설프게 만든 상자를 내려놓자, 상급생 중 누군가가 탄식을 내뱉었다.

“선배님. 질문 있습니다. 짝…… 꿍 뽑기가 뭡니까?”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신입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유치원 때 이후 짝꿍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임성은 좋은 질문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2인 1조, 간단하게 전우 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공개 마니또라고 생각해도 좋고.”

임성은 아직 주민등록증도 안 나온 어린 애들에게 전우를 들먹였다.

선유고등학교 야구부에선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짝꿍’이라 불리는 시스템으로 쉽게 말하면 멘토링이었다.

2, 3학년 중 한 명과 신입생 한 명이 조를 이뤄 야구부 적응이나 고민 상담, 훈련 등 자잘한 일을 함께했다. 이런 유치한 걸 누가 하냐고 질색하던 아이들도 나중엔 은근히 즐겼다. 자신과 짝이 된 후배에게만 에너지바나 바나나 같은 간식을 몰래 주기도 할 만큼.

참 쓸데없다 싶으면서도 많은 도움 돼 졸업한 선배들도 종종 짝꿍 얘기를 하곤 했다.

임성 역시 신입생 때 3학년 투수와 같은 조가 돼서 이것저것 많이 배웠었다. 비록 그 선배는 프로 진출에 실패하고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지금도 종종 연락하곤 했다.

“그나저나 짝꿍이라는 말은 매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나만 그래?”

어우, 징그러. 박종열이 양쪽 어깨를 감싸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커먼 남자 둘이 붙여 놓고 저런 깜찍한 호칭을 붙이다니 소름이 돋잖아. 박종열의 말에 대놓고 호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내심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냥 대충하고 끝내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3학년과 달리 처음으로 후배가 생긴 2학년들은 나름 기대 하는 듯 시선이 힐끔힐끔 돌아갔다. 신입생들 또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선배들을 곁눈질했다.

꼭 미팅하기 직전의 어색한 분위기 같네. 귀여운 것들.

크흠, 흠. 임성은 목을 가다듬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하며 박스를 흔들었다. 박스 안에서 가벼운 종이들이 뒤섞이는 소리가 났다.

방식은 단순했다. 1학년이 상자에서 표를 뽑아 거기 나오는 선배와 한 팀이 되는 것이었다.

“호명하는 사람 나와. 권명진부터.”

“예.”

큰 소리로 대답하며 앞으로 나간 권명진은 마른 입술을 핥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지 모르겠네. 권명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박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상자 안의 종이를 신중하게 고르다가 손끝에 딱 걸리는 것을 뽑아 임성에게 건넸다.

“누가 나왔을라나. ……서찬규. 찬규.”

임성이 종이 안에 적힌 이름을 부르자 부주장이자 오늘의 서기 담당 조예준이 화이트보드에 받아 적었다.

1학년 권명진 ↔ 2학년 서찬규.

사랑의 작대기처럼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혔다.

권명진을 시작으로 신입생들이 차례대로 나와 종이를 뽑았다.

“어, 저는, 임성 선배님입니다.”

네 번째로 나온 박영빈이 쑥스럽게 말했다. 평소 동경하던 선배와 짝꿍이 된 게 퍽 기쁜 듯 뺨을 살짝 붉히고 수줍게 웃었다. 임성과 조를 이루고 싶어 했던 1학년들이 아쉬운 표정을 했다. 박영빈을 보는 시선이 꼭 덕질에 성공한 팬을 보는 듯했다.

“영빈이. 투수 맞지?”

“가끔 내야수도 보지만, 주 포지션은 투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장님.”

“부탁은 내가 해야지. 잘해 보자. 영빈아.”

임성이 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자, 박영빈이 살짝 목을 움츠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귀찮다고 노래를 부르던 박종열 또한 1학년에게 선택됐고, 조예준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뽑았던 김희도는 양민성과 같은 조가 됐다. 첫날 박종열과 함께 김희도의 멱살을 잡았으며, 그가 야구부에 복귀했을 때 노골적으로 불평했던 사람.

임성은 김희도와 양민성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둘이 됐지. 괜찮으려나?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민성아, 희도 잘 부탁한다.”

“둘이 사귀냐?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말고 너나 잘해.”

웃으며 건넨 말에 날카로운 반응이 돌아왔다. 양민성은 씨발, 쌍욕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고, 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적당히 좀 하지. 분위기 다 흐리네.”

조예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현재 2, 3학년들 중에 양민성이 임성에게 열등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신입생들조차 이상하게 생각할까.

임성과 양민성.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중학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1학년 때부터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예민하게 굴었지만, 2학년 가을부터 심해졌다. 양민성은 자신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가 임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성이 조금이라도 활약을 하는 날엔, 기분 안 좋은 티를 팍팍 내며 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면전에 대고 비아냥거리는 일도 많았다.

보다 못한 조예준이 “더는 못 봐주겠다. 주장, 제발 멱살이라도 잡아라.” 하고 말했지만, 임성은 3학년들끼리 싸우면 팀에 영향이 간다며 그냥 넘기곤 했다. 조예준은 그런 임성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논란의 조 정하기가 끝나고 아이들은 곧장 운동장으로 모였다.

약 1시간가량의 지겨운 워밍업이 끝나고 곧바로 캐치볼이 시작됐다. 서로 짝을 지어 처음엔 거리를 좁혔다가 점점 늘리고, 다시 좁히며 공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에는 스피드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임성은 짝꿍이 된 박영빈과 공을 주고받았다.

그 후엔 전체 수비 훈련 및 펑고를 하고 투수 야수 조로 나뉘어 세부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야, 한 줄로 정렬해. 1학년이 배팅하고 나머지가 친다. 시작.”

1학년이 티 바에 야구공을 내려놓자, 2, 3학년 야수가 공을 때렸다. 티 바뿐만 아니라 손으로 토스하는 공을 치기도 했다.

야, 집중 안 하냐?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코치가 매섭게 다그쳤다.

야수들이 한창 티 배팅과 롱티에 집중할 즈음, 투수들은 토스 위주로 연습하다가 피칭에 들어갔다.

임성은 허리에 중심을 둔 채 최대한 구속을 끌어올렸다. 직구, 직구, 변화구. 파앙! 팡! 팡! 그물망이 출렁이며 매서운 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땀을 닦아도 다시 흠뻑 젖기 일쑤였다. 중간부터는 아예 땀 닦는 것을 포기하고 훈련에 집중하다가 옷이 무거워졌다 싶을 즈음 상의를 훌렁 벗었다. 양쪽을 잡고 그대로 비틀자 땀이 비처럼 후두둑 쏟아졌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쭈글쭈글해진 옷을 다시 걸쳐 입는데 눈앞에 불쑥 그늘이 졌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임성은 김희도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헉. 깜짝 놀랐네. 왜 그러고 서 있어?”

김희도는 갑자기 다가왔던 것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지나갔다.

“……?”

대체 뭐야.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폭풍 같은 훈련 시간이 지나고, 저녁 식사와 함께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아직 고강도 훈련이 익숙하지 않은 신입들은 입맛이 없는지 밥을 조금 펐다가 선배들에게 잔소리를 듣고 울며 겨자 먹기로 고봉밥을 쌓아야 했다.

“밥 먹는 것도 일이네요. 속에서 안 받아요.”

“나도 처음엔 힘들었어. 밥 먹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거든. 잘 먹어 놔야 중간에 안 쓰러진다.”

임성은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박영빈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다. 눈썹을 팔자로 내린 박영빈이 수저를 들었다.

“밥 먹고 웨이트실로 와. 같이 운동하자.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꼭꼭 씹어.”

“네. 주장님.”

임성은 식사를 끝내고 느긋하게 웨이트실로 향했다. 이미 몇몇이 운동 중이었다.

박영빈을 기다리며 몸을 가볍게 풀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허벅지도 풀고 바닥에 누워 하체를 옆으로 틀며 스트레칭을 할 때도 박영빈은 오지 않았다.

좀 늦네. 밥 먹는 게 많이 힘든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두어 번쯤 호흡을 했을까, 드디어 머리맡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던 임성은 저를 멀뚱히 내려다보는 김희도를 보고 인사를 했다.

“너도 웨이트 하러 왔냐? 애들 더 몰려오기 전에 얼른 자리 잡아.”

“잘 부탁합니다.”

김희도가 뜬금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뭘 잘 부탁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정식으로 야구부에 들어 온 것? 그 인사라고 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김희도가 의문 어린 표정을 한 임성과 시선을 마주쳤다.

“선배랑 저, 짝꿍이거든요.”

“우리 둘이? 아니, 나는 분명히…….”

제가 당분간 챙겨야 할 후배는 박영빈인데?

임성이 옆으로 비틀었던 몸을 바로 하며 자리에 앉자 김희도가 일어섰다. 시선이 다시 훌쩍 높아졌다.

김희도는 저를 올려다보는 임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먼저 손을 내민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뜻 맞잡지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더니 김희도가 손을 살짝 움직였다. 길고 곧은 손가락과 커다란 손바닥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계속 앉아 있을 겁니까? 운동 안 해요?”

당연히 해야지……. 잠시 망설이던 임성이 그의 손을 천천히 맞잡았다. 손끝이 닿기 무섭게 손바닥이 꽉 감싸 왔다.

“박영빈이 다른 사람한테 배우고 싶다고 바꿔 달라고 해서요.”

“윽!”

김희도는 75kg가 훌쩍 넘는 남자를 마치 무를 뽑듯 가뿐하게 당겼다. 예상치 못하게 가해지는 힘을 방비하지 못하고 임성이 비틀대자 김희도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맙다. 여전히 힘 되게 세구나.”

“근력 운동이 취미거든요.”

“야, 근력 운동은 나도 매일 해.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임성이 웃으며 물러서자, 김희도는 텅 빈 제 손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쌩쌩한 거 보니까 젊은 게 좋긴 하네.”

“2살 차입니다.”

김희도의 말 앞에는 ‘겨우’ 혹은 ‘고작’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었다. 그러니까 ‘겨우, 고작 2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치기 어린 대답에 임성이 소리 내 웃었다.

“적어도 지금은 네 생각보다 큰 차이일걸. 그것보다 영빈이가 바꿔 달라고 했다고?”

임성은 조금 전 김희도가 내뱉었던 다시 했다. 그런 기미는 없었는데,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때마침 타이밍 좋게 박영빈이 트레이닝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생수를 들고 동기와 웃으며 들어오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눈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영빈…….”

“맞잖아, 박영빈?”

영빈아, 임성이 그의 이름을 모두 부르기도 전에 김희도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아, 어. 응. 맞아.”

“맞다고?”

“네, 주장님. 김희도 말이 맞아요.”

뭐가 맞는지 듣지도 않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임성은 김희도가 박영빈을 괴롭히거나 압박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생각보다 아주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제가 파악한 김희도는 그럴 만한 성향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의욕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으니.

“저는 우완이라 민성 선배님이 더 잘 맞을 것 같아서요. 그럼 저는 민성 선배님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어? 영빈아, 잠깐만.”

꾸벅 인사하고 사라지는 뒷모습엔 조급함까지 묻어 있었다.

“펑고 안 합니까?”

재빠르게 사라지는 박영빈의 뒷모습을 쫓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배트와 공을 든 김희도가 운동장을 가리켰다.

“펑고는 이따 예준이랑 하려고.”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다시 말할게요.”

성큼성큼 다가온 김희도는 고개를 살짝 들고 임성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선배 짝은 난데 왜 다른 사람이랑 해요?”

목소리 사이사이 섞인 날숨이 귀를 달궜다. 임성은 양손으로 귀를 감싸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귀가 뜨거운지, 손바닥이 뜨거운지 모르겠다.

“짝은 운명 공동체 아닙니까? 적응할 때까지 돕는다면서요. 그러니까 펑고도 나랑 해야죠.”

운명 공동체.

만약 박종열이나 조예준이 했다면 농담으로 웃어넘겼을 말이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뭐든 다.”

그는 드물게 대답하지 못하는 임성을 보며, 남은 말을 내뱉었다.

결국 운동장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는 식사를 끝낸 아이들이 펑고를 치거나 캐치볼을 주고받고 있었다. 물론, 쉬는 시간엔 확실히 쉬어야 한다며 휴대폰을 하는 애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주어진 훈련 양은 모두 채울 걸 알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김희도가 공이 담긴 카트를 끌고 나왔다. 마트에서 사용할 법한 커다란 카트 안에는 몇 번이고 재사용해 손때가 묻은 공이 가득 쌓여 있었다.

“우선 한 박스 먼저 해 봐요. 제가 먼저 던지겠습니다.”

“한 박스면 250갠데 괜찮겠어? 100개씩 교대로 해도 상관없어.”

“아니요. 한쪽이 지칠 때까지 하죠. 던질게요.”

오늘따라 적극적이네. 이렇게 연습에 적극적인 김희도는 처음 봤다. 막상 리그가 시작되니까 흥미가 생긴 건가? 어느 쪽이든 환영이었다.

“바라던 바야.”

임성이 씩 웃으며 자세를 취했다.

펑고란 한 사람이 공을 쳐서 보내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잡는 수비 연습 중 하나였다. 원래 야수들이 많이 하는 훈련이지만, 수비수에게 송구할 일이 많은 투수들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다.

글러브를 안쪽을 주먹으로 툭툭 친 임성이 멀찍이 떨어졌다.

“시작하자.”

김희도는 공을 낮게 던진 뒤 배트를 휘둘러 빈 공간으로 보냈다. 타악. 바운드 된 공이 임성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잘 치네. 워낙 어깨가 좋아서 투수도 잘하겠다.”

김희도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기왕이면 포수가 좋을 것 같은데요.”

김희도는 입을 달싹이며 연속해서 배트를 휘둘렀고, 임성은 몇 번이나 공을 잡았다.

……근데, 범위가 지나치게 넓지 않나?

김희도는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때려서 그것을 따라가려면 발바닥이 불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심지어 스핀이 걸린 강타구라 쉴 틈이 없었다.

타악. 타악. 김희도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연속으로 공을 날렸다. 가볍게 시작했던 훈련은 어느새 진지해져 숨이 가빠왔다.

헉, 허억. 임성은 목구멍을 꽉 메운 숨을 거칠게 뱉어냈다.

몇 개쯤 했을까. 100개는 훨씬 넘은 것 같고, 체감은 200개쯤 된 같은데? 어느새 숫자 세는 걸 잊었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다.

“후우, 후. 자, 잠깐 좀 쉬다 하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임성이었다.

“아으으, 힘들다.”

무릎을 짚고 상체를 숙이자 얼굴에 맺혔던 땀이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턱 끝까지 걸린 숨을 조급하게 쏟아 내는 그의 눈앞에 그늘이 졌다.

“……음?”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뻗어 나온 손이 이마와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강압적이진 않았지만, 약한 힘 또한 아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머리는 왜 누르는 건데. 하지만 김희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보려고 해도 뒤통수를 누르는 손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바닥을 더듬던 시야는 깔끔하게 매듭을 묶은 운동화에 닿았다. 매일 아침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것치고 무척 깨끗했다.

“생각보다 더.”

한참이나 늦게 김희도가 말했다. 그마저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보통 펑고는 공을 잡는 사람의 움직임이 더 많지만, 공을 날려 주는 쪽 또한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하지만 김희도의 목소리에는 얕은 숨 한 자락도 묻어 있지 않았다. 일상을 말하듯 담담하게, 그러나 조금 뜨거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보기 좋네요.”

기분 탓일까, 묘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 * *

프로 야구는 비시즌인 초봄에 항상 해가 떠 있고, 기후가 좋은 나라로 전지 훈련을 떠났다.

적당히 따뜻한 몸의 근육을 유연하게 하고 부상 위험이 적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이 훈련이나 경기를 하기 전에 몸을 데우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대표적으로 오키나와와 미국 애리조나가 있고, 요즘엔 대만과 호주도 훈련 장소로 각광 받았다.

구단 자체가 대기업인 프로와 달리 이렇다 할 스폰서가 없는 고교 야구에서 해외 전지 훈련은 먼 나라의 얘기였다. 요즘엔 학생들의 자비와 부모님의 도움으로 해외로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선유고등학교는 해외 전지 훈련 대신 전반기 주말리그가 끝나는 주에 교내에서 합숙을 실시했다. 오전 오후 정규 훈련이 끝난 뒤에도 집이나 기숙사에 돌아가지 않고 새벽까지 운동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예외 없이 모두 참석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합숙 기간이 다가왔다.

“흐음…….”

볼펜 끝이 연신 노트를 툭툭 두드렸다.

<선유 고등학교 강화 훈련 명단 1학년 23명>

학년 이름 참가여부

1 권명진 O

1 김일주 O

1 김희도

1 남정원 O

1 도연우 O

1 박영빈 O

1 박희수 O

1 서지용 O

1 심태일 O

2, 3학년은 물어볼 것도 없이 전원 참석에 체크를 하고, 신입생들의 참석 여부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니, 가장 강력하고 어려운 상대가 딱 한 명이 남았다.

잠시 고민하던 임성은 결심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거절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순 없지. 가자, 임성.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1학년 교실로 향했다. 고작 한 달 반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초반에는 조금의 어색함과 서로를 향한 탐색이 있었다면, 지금은 무리를 지어 복도에서 소리를 지르고 뛰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임성이 복도에 들어서자 1학년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힐끔힐끔 쳐다봤다.

야구부, 3학년, 투수, 잘생겼다, 같은 단어가 간간이 들으며 3반으로 향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도 지금도 임성의 목적은 하나였다.

“김희도.”

김희도를 만나는 것.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창문을 보고 있던 김희도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제게 닿은 걸 확인한 임성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희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교실 뒤에서 장난치고 있던 애들이 양옆으로 주춤주춤 비켜섰다.

그동안 몇 번이나 김희도를 찾는 동안 반 아이들과 얘기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야구부 애들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 가급적 타인과 접점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본인이 주변을 따돌리는 것 같다 할까.

그럼에도 주변의 이목을 단번에 끌었다. 참 이상한 아이였다.

“뭡니까?”

임성은 금세 제 앞까지 다가온 김희도를 보며 손에 든 것을 들었다.

“밥 같이 먹자고.”

깜찍한 곰돌이 도시락 통이 커다란 손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교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운동장을 조금 걸어 부실 앞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김희도가 도시락 통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게 느껴졌다.

“아, 이거……? 여동생들이 골라 준 거야. 나랑 완전 찰떡이래.”

여동생들이 집에서 쓸 식판 사러 갔다가 ‘큰오빠도 우리랑 같은 거 써. 응? 오빠랑 같은 거 쓰고 싶어! 이거 사, 이거!’ 하고 떼를 썼다.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둘 다. 다정한 오빠는 여동생들의 부탁을 거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 손바닥만 한 식판을 살 순 없는 노릇이라 식판과 같은 무늬의 도시락 통을 사는 것으로 합의했다. 분홍색 고깔모자를 쓰고 북을 치는 곰돌이가 뚜껑에 붙어 있는 것을.

“우산도 여동생들 거라면서요.”

“걔들 말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고 싶어서. 참, 너는 급식 신청 안 했어?”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김희도가 오히려 되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 보던 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어터질 만큼 많은 사람들 틈에 낀 김희도는 확실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 10분 전부터 아이들은 한쪽 발을 책상 옆으로 내밀고 궁둥이를 들썩였다. 땡,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먹이를 낚는 치타처럼 빠르게 달려 나가곤 했다. 가끔 복잡한 걸 피한답시고 늦게 가는 애들이 있는데, 음식 냄새에 체취까지 섞여서 더 최악이었다.

“너 지금 창백하다.”

상상만으로도 기분 나쁜지 김희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다고 굶어? 밥은 먹어야지.”

“알아서 먹습니다.”

김희도는 가져온 봉지를 부스럭대더니 빵을 꺼냈다. 심지어 우유나 다른 음료도 없이 빵만 3개였다. 무쇠도 씹어 먹을 나이에 빵 쪼가리로 감당이 되나?

“그걸로 배가 차냐? 그것만 먹고 훈련 소화하는 게 대단하다.”

빵 모퉁이를 살짝 베어 먹는 김희도를 보다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당근 감자채볶음, 당근과 파가 들어간 달걀말이, 견과류 멸치볶음 등 직접 만든 티가 팍팍 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생활비를 버느라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임성이 집안일을 도맡았다. 장남이라는 책임감도 있었고, 본인이 나서서 동생들 챙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성의 손재주는 공 던지는 것에 몰빵 되었다. 한마디로 요리 실력이 더럽게 없다는 뜻이었다.

“직접 만들었습니까?”

“어차피 아버지랑 동생들 밥 챙겨야 하니까 겸사겸사 내 도시락도 만들었어.”

“급식은 어쩌고요?”

“급식이야 진작 먹고 왔지. 근데, 급식으로 배가 차겠냐? 이따 훈련 소화하려면 이것도 모자라. 5교시 끝나고 매점에서 빵 사 먹을 거다.”

점심 급식은 일찌감치 먹고 왔다. 지금 이 도시락은 일종의 2차전인 셈이었다.

“새벽에 등교하면서 가족 밥까지 챙겨요?”

“아버지는 늦게 들어오시고, 애들은 아직 어려서 할 사람이 나밖에 없거든.”

“남동생이 나랑 같은 나이라면서요.”

“걔들은 학원 다니고…….”

“늦게 들어가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오히려 이쪽은 흙이고 땀이고 다 뒤집어쓰면서. 훈련 끝나고 기진맥진하는 주제에 집안일까지 한다?”

김희도는 빵까지 내려놓고 말했다. 이렇게 길고 빠르게 말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살짝 놀랐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뭘 기진맥진까지 하냐. 과장이 심하네.”

“동생이란 사람들이 하는 게 맞지 않나요?”

“내가 하는 게 편해.”

마치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은 기분은 뭘까. 임성이 눈치를 보듯이 우물쭈물 말하며 감자채를 집었다.

그는 썩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더 말하지 않고 다시 빵을 베어 먹었다. 아무 표정 없이 입만 오물대는 게 참 맛없게 먹는다 싶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어?”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닙니까? 볼일 끝나면 안 찾아오잖아요.”

그쪽 말이에요. 하지도 않은 말이 들리는 듯했다.

용건이 있어서 온 건 맞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찾아오지 않아서 섭섭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밥부터 먹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희도가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임성은 고슬고슬한 밥에 멸치볶음을 얹어 입 안에 넣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식사에 집중했다. 빵 하나를 해치운 김희도는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 내고 새것을 꺼내 또다시 표정 없이 먹었다. 그사이 임성은 꽉꽉 눌러 담은 도시락을 다 비웠다.

“……음. 올해는 5월 초에 합숙 훈련하거든. 일정이랑 명단 나왔어.”

임성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며 김희도를 곁눈질했다.

그는 두 번째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다. 테두리까지 노릇하게 구운 빵 사이에 겹겹이 쌓인 양상추도, 달걀과 베이컨, 그사이에 낀 토마토까지 싱싱해 보였다. 학교 매점에 파는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빵집에서 사 오지 않았을까? 어딘지 몰라도 재료를 팍팍 넣어 주네. 맛있겠다.

한입 베어 물려던 김희도가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란 임성이 눈을 끔뻑였다.

“뭘 그렇게 봅니까. 줘요?”

“어? 난 괜찮아. 너 먹어.”

너무 빤히 보고 있었나 싶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겨우 샌드위치 3개로 점심을 때우는 애한테서 하나를 뺏는 잔인한 짓을 할 순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거절하지 말고 먹어요.

김희도가 하나 남은 샌드위치를 슥 내밀었다.

크흠. 진짜 안 먹어도 괜찮은데. 괜히 헛기침을 하다가 머뭇머뭇 샌드위치를 받았다.

“고맙다. 사실 샌드위치 되게 좋아하거든. ……아무튼, 다음 주 화수목금, 토요일 경기까지 합숙하니까 꼭 와라? 참석에 체크 해 놓을게.”

좋아, 아주 자연스러웠어.

“합숙이요? 지금 나보고 그 사람들과 같이 자라고?”

그걸 내가 할 것 같아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싸늘한 시선으로 충분히 전해졌다.

임성이 아니었다면 김희도가 야구부에 들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가 자리를 비우면 기분이 최악으로 가라앉는데, 기타 등등과 나흘씩이나 지내라니.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싫습니다.”

“그렇게 단정 짓지 말고 수학여행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우리 수학여행도 못 가는데, 그 대신 추억 쌓기 좋잖아? 선배들 말론 나중에 합숙이 제일 기억에 남는대.”

“추억 쌓기 같은 소리 하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생각만 해도 입맛이 뚝 떨어지는지 김희도가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내려놨다.

“강요가 아니라 권유니까 싫으면 안 해도 돼. 다만, 한번 생각해 달라는 거지.”

아, 맞다. 임성은 도시락통과 함께 갖고 온 것을 내밀었다.

“목 막히지 않냐? 이거, 너 마시라고 사 왔다.”

“지금 이걸 뇌물이라고…….”

바나나 우유를 슬쩍 내려놓자 김희도가 기막힌 얼굴을 했다. 너무 속 보였나 싶으면서도 속이라도 보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 모른 척 웃었다.

그리고 김희도가 준 샌드위치를 네 입 만에 다 먹고선 제 몫의 바나나 우유를 들이켰다.

“며칠 동안 같이 훈련하고, 밥 먹고, 씻고 자면 의외로 많은 걸 알 수 있거든. 나도 그랬고.”

“그쪽도 참가해요?”

“나? 내가 주장인데 당연하지. 인원이 많으니까 교내 체육관이랑 강당에 나눠서 잘 거야.”

강화 훈련 합숙 기간엔 기숙사 생활하는 부원들도 교내 강당과 체육관에서 함께 잤다.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 해도 무방했다. 훈련 시간이 늘어나는 셈이니 몸은 힘들지만, 기억에 남는 일이 많이 생긴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작년에는 박종열과 정의영이 미래의 신부 얼굴을 본답시고 새벽 두 시에 화장실에서 커터 칼을 입에 물고 있는 걸 들켜서 단체 기합받았다.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운동장을 달리는데, 미래의 신부는커녕 눈앞에 별이 보였더랬다.

“잔단 말이지, 잔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김희도를 두고 빈 도시락 통을 정리했다. 어차피 한 번에 수락할 거란 생각도 안 했으니 내일 다시 오자.

“알았어요. 참여할게요.”

“좀 더 생각…… 음, 참여한다고? 나중에 다른 말 하면 안 된다?”

바나나 우유가 먹힌 건가? 좀 더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난 누구처럼 어쭙잖게 말 안 바꿉니다.”

어쭙잖게 말을 바꿨던 당사자인 임성이 소리 내 웃었다.

그때, 봄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이 나풀나풀 흔들리다가 김희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눈으로 좇던 임성이 손을 뻗자 김희도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응?”

“머리 쓰다듬는 줄 알…… 아니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설마 머리 쓰다듬는 줄 알고 고개를 숙였어? 평정을 가장하려 애썼지만, 이미 임성의 광대는 슬금슬금 올라가는 중이었다.

김희도의 표정은 시큰둥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등이 발갛게 익었다. 양호실에서도 그러더니, 아무래도 김희도는 감정이 귀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맞아. 그러려고 했어.”

임성이 씩 웃으며 김희도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듯 쓰다듬었다. 봄 햇살이 내려앉은 머리카락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마치 털이 몽실몽실한 고양이 배를 매만지는 것 같았다. 아, 감촉 좋다.

“되게 귀엽네.”

만약 조예준이 들었다면 진심으로 기겁했을 말을 진심으로 했다. 김희도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정색을 하거나 손을 쳐 내진 않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둘 다 알지 못했다.

“그래도 빵 말고 밥 먹어. 그것만 먹고 지금까지 훈련 따라온 것도 대단할 지경이다. 성장기에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지 신체 밸런스도 좋아져. 점점 더워지면 살도 쭉쭉 빠질 텐데, 그러다가 뼈만 남겠다.”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임성이 김희도를 봤다. 음.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입을 떼는 순간까지 헷갈렸다.

“급식실에 못 가겠으면, ……내가 도시락 싸 줄까? 내 거 싸는 김에 하나 더 싸는 거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 물론, 이것도 강요는 아니다.”

“원래 도시락 같은 거 막 싸 주고 그래요?”

“내 거만 싸는데? 거절해도 돼.”

“아니요. 내일 이 시간 여기서 보죠.”

이번에도 김희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그쪽과 같이 밥 먹냐 같은 대답을 상상했던 임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웃었다.

* * *

아침 해가 채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모두가 잠든 조용한 집, 주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 나왔다.

“큰오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당근과 파를 섞은 알록달록한 달걀 물을 프라이팬에 붓던 임성이 뒤를 돌았다. 쌍둥이 여동생 중 첫째인 임이림이 눈을 반쯤 감은 채 서 있었다. 머리끈에서부터 잠옷과 슬리퍼까지 온통 분홍색 일색에다 손에 쥔 인형마저 핑크 토끼였다.

“이림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

벽에 걸린 시계는 4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린애가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라 달래듯 말했다.

“화장실 가려고. 근데, 오빠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으응. 임이림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살짝 쳐진 눈꼬리에 무거운 잠기운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다.

“기분 좋아 보여서.”

“내가?”

“지금도 노래 불렀잖아. 혹시 여자 친구 생겼어?”

“뭐?”

여자 친구? 생각지도 못한 말에 웃던 임성은 코끝에 스미는 탄내에 급하게 달걀을 돌돌 말았다. 휴, 자칫 했다간 홀라당 태울 뻔했네.

김희도에게 도시락을 싸 주겠다고 말한 이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점심을 함께 먹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 건 처음이라 생각보다 더 긴장됐다.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김희도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게 됐다.

김희도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교실에 가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주로 말하는 건 임성이었고, 김희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대화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야구였다. 주로 하는 운동이라든가, 변화구 대처 방법, 또 어떤 코스로 들어오는 공이 까다로운지, 앞으로 맞붙을 팀 분석 및 대안 방안 등 얘기를 해도 해도 모자랐다.

훈련이나 시합 때의 김희도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이었다면, 점심시간의 그는 흰색을 잔뜩, 아주 잔뜩 섞은 하늘색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물으면, 정확히 설명하기 힘드나 평소보다 풀어진 느낌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김희도와 대화가 즐거웠다.

“오빠?”

대답이 없는 임성이 의아한 듯 임이림이 고개를 갸웃댔다.

“이림아, 오빠 요리 맛있어?”

“아니.”

임이림은 자타공인 큰오빠의 껌 딱지였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줄 아는 똑 부러지고 당찬 여성이었다. 큰오빠가 열심히 노력한다는 건 알지만, 그것과 별개로 맛은 으음…….

“오빠는 요리하고는 안 맞는 것 같아.”

“어? 임우랑 임설은 잘 먹던데?”

“작은오빠들은 똥도 맛있다고 먹을걸? 오빠 나 화장실 갈래.”

귀여운 여동생의 냉정하리만큼 단호한 대답에 임성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 * *

“그러더라니까. 진짜 맛없냐?”

“먹을 만합니다.”

하소연 아닌 하소연에도 김희도는 큰 반응이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만든 거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여동생들도 할머니 댁에서 먹을 때가 많고. 그래도 밥을 아예 안 할 순 없잖아?”

임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감자볶음을 집어 먹었다. 두껍게 썰었는지 식감이 생생하다 못해 생감자를 씹는 것 같았다.

헉. 돌덩이 같잖아. 김희도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곁눈질로 확인한 김희도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어서 헷갈렸다. 의외로 입맛이 무난한가? 보통 후각이 예민하면 미각도 따라가던데.

“감자 덜 익지 않았냐? 내 것만 이래?”

“먹을 만해요.”

벌써 두 번째 같은 말이었다.

“음식 안 가려? 후각이 예민하면 미각도 마찬가지 아니야?”

“짜고 달고 이런 건 잘 느끼죠. 근데 그게 맛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 기초 체력이 얼마나 좋은 거야. 러닝이랑 웨이트 위주로 한다고 했…… 잠깐만.”

임성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사이 알림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조예준: 교실에 없네요ㅠㅠㅠㅠ 어디예요?

-조예준: 오랜만에 캐치볼하려고 했는데ㅜㅜ

-조예준: 부실에 있어요?

임성은 답장 대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신호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예준이 전화를 받았다.

‘야, 공을 거기로 차면 어떻게 해. 미친놈아, 발로 하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보니 운동장인 것 같았다.

[주장!]

“미안. 밥 먹고 있어서 이제 봤다. 교실에 갔었냐?”

[네. 밥 먹고 있다고요? 급식실? 아니면 매점? 지금 갈게요.]

“그건 아니고…….”

임성은 말끝을 흐리며 무표정하게 전방을 응시하는 김희도를 슬쩍 봤다.

김희도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조예준은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도 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새끼라며 어찌나 욕을 하던지. 임성이 두둔이라도 하면 더 길길이 날뛰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전후 사정없이 둘이 만나게 했다간 어떤 결과 나올지 뻔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합숙 명단 코치님께 드렸냐? 별다른 말씀 없으시지?”

[아, 맞다. 지금 제출할게요.]

“어. 이따 훈련 때 보자.”

자연스럽게 전화를 끊고, 김희도에게 “예준이.” 하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꾹꾹 눌러 담아 제법 양이 많은데도 남기지 않은 걸 보면, 배가 작은 것 같진 않은데.

“잘 먹었습니다.”

잊지 않고 인사하는 것도 기특했다.

또다시 조예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코치에게 명단을 제출했다는 조예준에게 잘했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옆얼굴에 시선이 닿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김희도가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무 얘기도.”

그랬나. 머쓱하게 웃는데, 김희도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보고만 있자 무심한 눈동자가 휴대폰을 가리켰다.

“번호.”

“내 거? 됐다고 하지 않았냐?”

“그땐 그때고. 명색이 짝인데 번호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임성의 손에서 휴대폰을 자연스럽게 가져간 김희도가 키패드를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신입생들 번호는 모두 저장해 놨던 터라 번호를 다 찍기도 전에 김희도의 이름이 떴다. 그는 제 이름을 보더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 소리는커녕 진동도 울리지 않았다.

휴대폰을 안 들고 왔나? 의문은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무음?”

고개를 끄덕인 김희도가 액정 위에 뜬 낯선 번호를 저장했다. 아, 임성이 생각났다는 듯 김희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예준이 것도 알려 줄까? 내가 연락 안 받으면 걔한테 하면 되거든.”

“필요 없습니다.”

넌지시 건넨 말에 김희도가 바로 거절했다. 됐다거나 괜찮다도 아닌 필요 없다는 말이 너무 김희도다워서 웃음이 터졌다.

* * *

5월 첫째 주 화요일은 전반기 주말리그가 있는 마지막 주이자 합숙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했다. 평소였다면 집이나 기숙사에 돌아갔어야 할 시각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운동장에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유니폼엔 운동장을 구른 흔적으로 더러웠다.

“아, 씨발. 죽겠다. 정의영 넌 어떠냐?”

“난 이미 죽었어. 지금은 영혼이 대답하는 중.”

헉헉,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와 거친 숨이 함께 쏟아졌다.

가만히 있어도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릴 즈음 저녁 훈련이 겨우 끝났다. 하지만 감독과 코치가 떠나기 전까진 쉴 수 없었던 아이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저녁 훈련은 여기까지 한다. 11시부터 야간 훈련 시작이니까 시간 맞춰서 대기해라. 농땡이 피우다가 걸리면 가만 안 둔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알았냐?”

“네. 감독님!”

감독, 코치가 자리를 비우자 아이들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들썩였다. 몇몇은 아예 드러누운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작년에 경험했던 학년도, 올해 처음인 신입생도 모두 힘들어했다.

“감독 말이야. 일요일 경기 졌다고 화풀이하는 것 같지 않냐?”

누군가 중얼거렸다. 4월 초부터 치러진 주말리그는 이제 단 두 경기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초반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던 선유고등학교는 지난 주말 2연패를 했다. 같은 조인 신라고가 현재 전승 중이니, 그 팀이 나머지 경기를 모두 지지 않는 이상 1위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감독과 신라고 감독이 친분 있다는 소문이 있더니 내심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원래 성격이 불같고 말이 험한 사람인 걸 감안해도 요즘 과도하게 화내는 일이 잦았다.

그대로 그라운드에 남은 아이들과 트레이닝실로 향하는 아이들, 그리고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하기 위한 아이들로 나뉘었다.

개중 임성은 그라운드에 남아 그물망을 향해 공을 던졌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어깨와 팔 근육이 뭉쳐 땅땅하고, 후끈거렸다.

물 좀 마실까. 뒤를 도는 것과 동시에 차갑고 축축한 것이 뺨에 닿았다. 헉. 어깨를 움츠리며 돌아보자, 생수병을 든 김희도가 보였다.

“마침 목말랐는데 고맙다.”

웃으며 손을 뻗었던 임성은 생수병을 놓지 않는 김희도와 뜻하지 않게 대립하게 됐다. 매번 느끼지만, 악력이 상당하단 말이야. 이 손으로 공을 던지면 150km/h도 불가능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물 주는 거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하다가 상체를 살짝 물리는데, 축축한 손끝이 뺨에 닿았다.

“어?”

“마셔요.”

찰나일 정도로 짧은 순간이라 다소 얼떨떨하게 물을 받았다.

생수는 아이스박스에 내내 담아 뒀던 거라 시원했다. 목을 태우는 지독한 갈증을 해소하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이제야 정신이 드네. ……고맙다.”

별로. 퉁명스레 대답한 김희도는 생수에 이어 수건까지 친히 건네줬다.

“짝꿍이잖아요.”

“하하.”

무뚝뚝한 것 같은데, 의외로 저런 낯간지러운 말은 서슴없이 하는구나.

이제 5월인데 마치 한여름처럼 땀이 줄줄 흘렀다. 매년 여름엔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애들이 몇 명씩 꼭 나왔다. 체격으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박종열조차 1학년 때 펑고를 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올해는 무사히 지나가야 할 텐데.

흠뻑 젖은 얼굴과 목덜미, 손바닥을 닦던 임성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에 김희도가 있었지만, 그는 다른 곳을 보며 스트레칭 중이었다.

으음.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수건을 한쪽 어깨에 걸쳤다.

“다들 모여. 이것들이, 빨리빨리 안 움직이냐? 다들 느려져 가지고! 어이, 임성!”

딱히 쉰 것 같지도 않건만 눈 깜빡할 새 야간 훈련이 시작됐다. 어두운 그라운드 여기저기에 정승처럼 우뚝 솟은 라이트가 켜지며 한낮을 방불케 할 정도로 훤해졌다.

감독의 호통에 아이들이 후다닥 움직였다.

“감독님. 부르셨습니까?”

“주장인 네가 대충대충 하니까 애들도 해이해졌잖아. 알아서 하면 될 걸 꼭 이렇게 소리치게 해야겠냐? 정신 안 차리지?”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좀 보여라. 허접한 새끼야. 가서 라바콘이나 갖고 와.”

금세 정렬했음에도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감독은 임성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꾹꾹 밀었다. 아픈 것보다 자존심 상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임성은 손을 뒤로 돌린 열중쉬어 자세를 하며 시선을 바닥에 뒀다. 감독은 한껏 임성에게 분풀이하고 나서 코치와 훈련 내용에 관해 상의했다.

“다들 기대해라. 이제부터 진정한 지옥이 시작되니까.”

“어, 어떤 지옥 말씀입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3학년을 본 신입생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서 지옥이 더 있다고?

신입생들의 반응이 재밌는지 박종열과 정의영이 킬킬대며 웃었다. 그러다가 금세 정색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보면 알아. 탈진 안 하고선 버티지 못하는 레전드라고 할까. 구토는 필수고 심하면 기절도 하니까 조심해야 한다.”

재작년 기절했던 사람 중 한 명인 박종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이 신입생들을 한창 겁주고 있을 때, 임성은 라바콘을 찾으러 창고로 향하는 중이었다. 라이트를 켜 환한 운동장과 달리 창고는 깜깜한 어둠이 잠식해 식별이 어려웠다.

“으음.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아, 저깄네.”

임성은 잡동사니로 점령된 창고를 둘러보다가 선반 맨 위에 형광색 라바콘이 겹겹이 쌓인 것을 보고 반색했다.

박종열이 기겁했던 훈련은 이 라바콘을 이용한 폴앤폴이었다. 라바콘 두 개를 일정 간격으로 놓고 번갈아 가며 빠르게 터치하는 것으로 순발력과 하체 힘을 기르는데 탁월했다. 단순한 동작이라 쉬울 거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해 보면 급격히 호흡이 달려 머리가 띵해지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괜히 지옥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으음.”

팔을 뻗어 봤지만, 선반 위의 라바콘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발 앞쪽에 힘을 주고 뒤꿈치를 드는데 뒤에서 손이 쑥 뻗어 나왔다.

헉.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대는 등을 누군가가 받쳤다.

“조심해야죠.”

낮은 체온과 함께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본능적인 소름이 돋아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임성은 한껏 목을 움츠린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언제 왔어? 훈련은?”

자세가 좀……. 어째 뒤에서 끌어안긴 모양새라 김희도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허리를 감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희도가 내뱉은 숨이 목덜미에 그대로 흩어졌다.

“자요. 이거 꺼내려고 한 거죠?”

어느새 한 발짝 물러선 김희도가 무심한 얼굴로 라바콘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라비콘을 품에 안으며 눈을 깜빡였다.

“너 키 컸냐?”

“모르겠습니다.”

김희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부실에서 봤을 땐 고개를 제법 숙였어야 했다면 지금은 시선을 살짝 내리면 될 정도였다. 고작 두 달 남짓한 사이에 자란 것 같았다.

임성은 181.8cm로 대한민국 남성 키 평균을 훨씬 웃돌았지만, 투수로서 그리 큰 키는 아니었다. 물론, 좋은 공을 던지는 데 키가 다는 아니지만, 장신일수록 위에서부터 내리꽂는 변화구의 위력이 커져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쉬웠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큰 신장을 바랐고, 그건 임성 역시 마찬가지라 어릴 때부터 우유나 멸치, 콩나물처럼 키 크는 데 좋다는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었다. 비록 흰 우유는 비려서 마시지 못하고 바나나 우유로 대체했지만.

임성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새삼 훑었다.

김희도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중학교 1학년 땐 또래보다 체구가 조금 작나 싶더니,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갈 즈음 눈에 띌 정도로 컸다. 아마 매일 아침 뼈마디가 아팠을 것이다.

혹시 비결이 따로 있는 건가, 한번 물어볼까?

“왜요?”

“어?”

“왜 그렇게 봅니까?”

자신도 모르게 김희도를 빤히 보던 임성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으로 라바콘을 가리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거 꺼내 줘서 고맙다.”

“아니요.”

제법 친절한 행동과 다르게 무심하게 대답한 김희도가 먼저 나가고, 그를 따라가던 임성은 앞서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가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근데, 쟨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찾은 거야?”

* * *

“진짜 끝났다. 와 씨, 이걸 앞으로 3일 동안 어떻게 하냐?”

박종열이 바닥에 털썩 눕자 하나둘 따라 누웠다. 밤늦게까지 훈련하는 건 처음인 신입들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댔다. 몇몇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다급히 공터로 뛰어갔다. 우웨엑. 구토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래. 이걸 들어야 합숙 시작이라는 느낌이지.”

정의영이 땀을 줄줄 흘리며 킬킬댔다.

“박영빈. 여기, 물. 급하게 들이켜지 말고 천천히 마셔.”

주변에 맞추려고 무리하거나 자신의 체력을 간과하는 애들이 많아 잘 살펴봐야 했다.

널브러진 아이들을 둘러보던 임성은 유난히 창백한 얼굴로 숨을 내뱉는 신입생을 발견하고 생수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급하게 물을 들이켜던 박영빈은 임성의 말을 듣고 입 안에 물을 머금었다가 느리게 삼켰다.

“잘했어. 갑자기 마시면 사레 걸릴 수 있으니까 조심해라.”

임성이 박영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자 박영빈이 콧등을 찡긋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자, 다들 부실로 이동.”

한 발짝도 못 움직여요. 주장, 몸이 안 움직여요. 앓는 소리를 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부실로 이동했다.

“합숙 기간 동안 담당 정하자. 먼저 아침밥 하고 싶은 사람?”

화이트보드 앞에 선 임성은 테이블에 눌어붙다시피 한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원래 야구부는 아침 6시 30분부터 약 두 시간 동안 훈련을 한 뒤 급식실에서 아침을 먹고, 오후 훈련을 끝내고 저녁을 먹었다. 이때 저녁은 학교가 제공해 주는 게 아닌 학부모들이 당번을 정해 만들곤 했다.

합숙 땐 새벽과 야간 훈련이 추가돼 밥 먹는 일이 두 번 더 늘어났다. 이렇게 많이 먹어도 연습량 하도 많아 살이 쭉쭉 빠지는 애들이 허다했다.

“지원자 없어?”

새벽과 야간 식사는 아이들이 해결해야 했는데, 예상대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고강도 훈련으로 가뜩이나 피곤한 와중에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하라니? 절대 피하고 싶었다.

“야, 진짜 없냐? 아무도?”

아이들은 외롭게 외치는 임성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임성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고선 쓸쓸하게 매직 뚜껑을 열었다.

“알았어. 아침은 내가 할게.”

<당번 정하기>

1.아침: 임성

“아. 저 자식 요리 존나 맛없는데. 꼭 먹어야 해?”

이름을 쓰자마자 여기저기서 원성이 쏟아졌다.

“그러면 박종열 네가 할래?”

“그냥 주는 대로 얌전히 처먹겠습니다. 넵.”

부원들 중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은 대부분 임성의 차지였고, 그런 이유로 밥 담당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가 맡게 됐다.

이미 두 번이나 겪었던 3학년은 대놓고 야유를 했으며 2학년은 뭐라 말하진 않았지만, 떨떠름한 감정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럼에도 손드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어지간히 귀찮은 듯했다.

“인원이 많아서 혼자 하긴 무린데, 도와줄 사람? ……도 없냐? 이 의리 없는 자식들아.”

이번에도 아이들은 침묵했다.

“좋다. 가산점 줄게.”

“어떤 가산점이요? 구체적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영빈이 손을 번쩍 들었다.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줄게. 유효 기간 없음. 만 원을 넘지 않는 범위로 내가 가능한 일. 연습 상대 대환영이다.”

에이, 그게 뭐야. 존나 필요 없거든. 3학년 무리가 일제히 엄지를 아래로 뒤집으며 야유했다. 말을 내뱉은 당사자 역시 장난으로 던진 것이었다.

“저요.”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손을 들고 있었다. 야, 지금 손든 거 김희도 맞아? 웅성대는 주변 반응을 무시한 김희도가 한 사람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싸가지가 웬일이냐? 나 잘못 본 줄 알았잖아.”

“내 말이. 너무 힘들어서 헛것이 보이나 했다. 나 여태까지 쟤 홀로그램인 줄 알았다. 하도 말 안 해서.”

박종열과 정의영이 만담을 시작하자 몇몇 애들이 “선배님, 저도요.”, “나도.” 하며 동조를 했다. 그만큼 김희도가 손을 든 건 충격적이었다.

“야야, 거기 둘. 칭찬은 못해 줄망정 초 치지 마. 고맙다. 김희도.”

임성은 제 이름 옆에 김희도의 이름을 빠르게 적었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제 이름과 달리 퍽 신경 썼다.

1.아침: 임성, 김희도.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혔다.

식사와 청소 그리고 빨래 담당 등을 다 정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자정에 가까웠다. 내일은 5시에 새벽 훈련 시작이니까 지금 자도 네 시간 남짓밖에 못 잔다. 씻는 시간을 포함하면 그것도 잘까 말까였다.

“조예준이 야식 사러 갔는데, 피곤한 애들은 들어가서 자도 돼. 먹을 사람만 씻고 나와.”

다 녹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던 아이들은 야식이라는 소리에 책상을 마구 두드리며 흥분했다. 그리고 이내 좀비처럼 비틀대며 사워실로 향했다.

* * *

임성은 훈련에 쓴 도구를 양손 가득 들고 창고로 향했다. 물건만 넣어 놓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라 따로 불을 켜지 않았다. 원래 자리에 잘 정리해 놓고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돌렸던 임성은 눈앞에 우뚝 선 사람을 보고 순간 흠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소리 없이 오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지금 할게요. 세 번 중 두 번째.”

뽀얗고 고운 얼굴과 다르게 낮은 목소리가 창고를 울렸다.

“좋아. 이리 와.”

임성이 양팔을 활짝 벌리고 상체를 내밀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희도가 임성의 등과 허리를 빈틈없이 껴안으며 몸을 붙여 왔다. 콧날이 서로 부딪힐 듯 가까워졌다. 밀어붙이는 무게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임성이 허리에 힘을 주며 뒷걸음질 쳤다. 김희도는 딱 그만큼,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이 다가왔다.

“아, 잠깐만. 문 열려…….”

아무리 늦은 시각이고 학교에 야구부밖에 없다 한들 언제 누가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였다. 누군가 지나가면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볼 것이다.

애틋한 감정을 품은 것도,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남들 눈엔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임성이 작게 속삭이는 것을 들은 김희도는 그를 껴안지 않은 손으로 문을 밀었다.

끼익. 타악.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온통 검게 물들었다.

생각보다 더 조용하고 어둡잖아.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몸에 힘을 풀고 김희도를 마주 안았다. 호흡이 부족한 사람처럼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을 때마다 김희도가 말했던 체취라는 것이 실체화됐다. 이렇게 후각이 예민한데 여태 야구는 어떻게 했대.

“훈련하느라 고생했다.”

등을 토닥이자 맞닿은 상체가 움찔하며 작게 움직였다. 동시에 더운 숨이 목과 귓속으로 말려 들어왔다. 아. 이번에는 임성의 어깨가 위로 살짝 치솟았다.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귀가 약한가 봐요.”

그걸 알면 귓가에 속삭이지나 말든가.

* * *

합숙 첫날. 모든 훈련이 끝난, 밤보다 새벽에 가까운 늦은 시각이었다.

“어디 갔습니까?”

주변을 살펴보던 김희도가 박종열에게 물었다.

“어? 씻으러 간 거 아냐? 누구 임성 본 사람 있냐?”

딱히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는데도 용케 알아들은 박종열은 옹기종기 모인 채 야식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방금 샤워하러 가셨습니다.”

“들었지? 아, 악! 이걸 놓치네.”

박종열은 고개를 까닥하더니 다시 휴대폰에 집중했다. 오늘 있었던 프로 야구 하이라이트가 나오고 있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김희도는 금세 박종열에게 관심을 거두고 문을 쳐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금 샤워할걸. 무의식중에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씻으면 냄새도 사라질 텐데 같이 들어가서 뭐 해. 그냥 잠이나 자자.

김희도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부원들을 스쳐 지나갔다. 저기에 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야, 싸가지. 너도 와서 앉아. 기절할 정도로 피곤한 게 아니면 구색 좀 맞춰.”

정의영이 김희도를 불러 세웠다. 당연히 김희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임성도 곧 올 거다.”

무시하고 지나가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한참이나 바닥을 쏘아보며 고민하던 김희도가 빈자리에 앉았다.

마스크 가져올걸. 급한 대로 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상체를 뒤로 젖혀 최대한 옆 사람과 거리를 뒀다.

김희도까지 자리에 앉자, 씻으러 간 임성을 제외한 야구부 전원이 모였다. 둥글게 둘러앉은 한 가운데엔 검은 봉지가 가득 모여 있었다. 조예준이 조달한 야식이었다.

2학년 하수영이 무릎으로 걸어가 몇 번이나 꽉 묶은 매듭을 풀었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봉지가 벌어지며 떡볶이와 순대, 튀김 기름 냄새가 확 퍼졌다. 예상치 못한 냄새에 김희도는 코를 막은 손에 힘을 줬지만, 기분은 이미 곤두박질친 뒤였다.

“존나 배고프네. 종이컵이랑 젓가락은 알아서 가져가라. 그리고 많이 먹으려 하지 말고 양심껏 먹어, 양심껏.”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낸 김희도를 제외한 부원들은 한껏 기대감을 품은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운동 후 야식, 그것도 여럿이 먹는 분식은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하수영이 봉지 입구를 조금 더 벌렸고, 2학년들은 종이컵을 돌리고 아이스박스에서 음료수와 물을 가져왔다.

“종열 선배님. 저 물컹물컹한 건 뭡니까?”

극심한 배고픔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살피던 박영빈이 물었다. 떡볶이 안에 떡볶이인 척하는 뭔가가 섞여 있었다.

“어, 이거? 곤약……? 조예준, 맞냐?”

“네. 곤약 맞습니다. ……아, 이거 왜 이렇게 안 따져.”

조예준은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페트병 음료 뚜껑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잘 안 따지는지 인상을 팍 썼다.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보란 듯 불거졌다.

“곤약?”

조예준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음료수 뚜껑을 돌리다 말고 김희도를 쳐다봤다. 저 싸가지가 웬일로 말을 걸지? 서로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 아니 사나웠다.

“칼로리도 영양도, 심지어 아무 맛까지 안 나는 걸 좋다고 먹네.”

“지금 뭐라고 씨부렸냐? 어떻게 저 자식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재수 없지?”

“화내는 거 보니까 찔리나 보네.”

“야!”

반대쪽 옷소매도 걷어붙인 조예준이 씩씩대며 일어섰다. 내내 거슬렸는데 이번에야말로 손 좀 봐야겠다.

“음, 곤약 맛있는데.”

흐르는 물처럼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약간의 곤란함이 섞여 있었다. 김희도는 코와 입을 감쌌던 수건을 조금 내리며 무의식중에 향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앞머리가 살짝 젖은 임성이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채 닦지 못한 물방울은 턱 끝에서 떨어져 목을 타고 독수리 티셔츠 안으로 흘러내렸다.

금방이라도 싸울 듯 인상을 쓰고 있던 조예준이 주장 왔느냐며 반색했다.

“여기 앉아요.”

양옆에 두세 명은 앉아도 될 정도로 무리와 동떨어져 있던 김희도가 제 옆을 가리켰다. 임성은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앉았고, 뒤늦게 조예준은 당했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저 자식이 저번 버스 때부터 계속!

“곤약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예준이가 일부러 넣은 거야.”

“아…….”

당연히 조예준이 멋대로 사 왔다고 생각했던 김희도가 작게 소리를 내뱉었다. 표정은 평소처럼 시큰둥한데 뺨이 살짝 상기돼 있다.

임성은 물기가 남은 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날리며 싸다고 잔뜩 사 놨던 대용량 샴푸 냄새가 풍겼다.

“많이 별론가?”

임성이 젓가락을 반으로 쪼개 김희도에게 건네줬다. 뿐만 아니라 종이컵과 생수까지 살뜰히 챙겼다. 딱히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취향이 갈릴 것 같네. 어차피 가격은 똑같으니까 다음에는 떡볶이랑 어묵만 사 오는 게 낫겠다.”

“딱히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이라는 걸까? 임성은 종이컵에 떡볶이를 덜어 내면서 김희도를 쳐다봤다. 가로로 길게 뻗어 차가운 느낌이 나는 눈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간 걸 보니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김희도가 곤란해한다고?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그를 보는 사이 김희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좋은 선택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곤약은 식감이 좋고 칼로리도 적어서 운동선수에게는 적격이라고 들었거든요.”

조금 전까지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 취급당했던 조예준이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하는 표정을 했다. 다른 부원들 역시 퍽 놀란 듯 보였는데, 두 달 남짓 김희도와 함께 훈련하면서 지금처럼 말을 길게 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저도 곤약 좋아해요. 엄청.”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쟤도 거짓말 잘 못 하는구나. 누가 봐도 곤약에 관심 없어 보이는데 필사적으로 수습하는 게 귀여웠다. 임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희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래 봤자 여전히 말 붙이기 어려운 무뚝뚝한 인상이었지만.

“김희도 저 새끼, 방금까지 존나 정색하지 않았냐? 나만 그렇게 느꼈어?”

“몰라.”

조예준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자 하수영이 관심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김희도가 뭘 어쨌든 지금은 떡볶이를 먹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희도, 많이 먹어라.”

하지만 임성이 김희도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엔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야구부 전원은 김희도가 임성의 손을 쳐내는 모습을 예상했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움찔할 정도로 차갑게 쏘아보며 불쾌하다느니, 역겹다느니 말하겠지. 그것이 그들이 여태껏 보고 겪은 김희도였다.

“헐.”

다수의 예상과 달리 김희도는 목을 살짝 숙인 채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쟤 김희도 맞아? 다른 놈이 김희도 행세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드디어 미쳐 버렸다든가.

“다들 뭐해? 안 먹냐? 급하게 먹다가 체하지 말고 꼭꼭 씹어 먹어라.”

“네. 잘 먹겠습니다!”

아이들의 관심은 금세 먹을 것으로 넘어갔다.

단 한 사람, 조예준만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두 사람을 응시할 뿐.

그 많던 야식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간에 기별도 안 가네. 진짜 맛만 봤다.”

정의영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인원이 많아 한곳에 모여 자지는 못하고, 강당과 체육관 팀으로 나뉘었다. 집에서 베개와 이불을 갖고 온 사람부터 시작해 1인용 침낭 등 가지각색이었다.

야식 잔재들을 치운 조예준은 어렵지 않게 임성의 이불을 찾았다.

꽃분홍색 바탕에 별 모양의 요술 봉을 든 공주가 그려진 알록달록 화려한 이불. 자신이 아는 한 저 이불을 덮는 남고생은 임성밖에 없었다. 그 옆에 자리를 잡으려던 조예준은 낯선 침낭이 있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또? 아니겠지. 다른 사람일 거야.

“비켜.”

하지만 그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조예준을 지나친 김희도가 침낭을 펼쳤다.

“야. 여기 내 자리야. 좋은 말 할 때 꺼져.”

“내 자리 네 자리가 어딨어.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 그리고 이 사람은 나랑 같은 조고.”

조예준은 어쩌라는 듯한 얼굴로 말하는 김희도에게 베개를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난 작년에도 주장 옆에서 잤어.”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쪽은 그쪽 짝꿍 찾아서 가든가.”

돌돌 말린 침낭을 끝까지 펼친 김희도가 조예준을 똑바로 보며 남은 말을 내뱉었다.

“이제 남의 사람은 신경 꺼.”

나, 남의 사람? 진짜 미친놈인가? 야구부에 멘토 시스템이 있는 건 맞지만, 그건 단지 신입생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서비스에 불과했다. 그걸 김희도는 임성과 아주 친밀한 관계인 것처럼 지껄이는 것이었다.

“주장 보고 토한 새끼가 잘도 지껄이네.”

“당사자도 별말 안 하는 걸 왜 난리지. 관계없는 사람은 닥치는 게 좋지 않을까?”

쾌활하고 장난기가 많아 선후배 사이에 교두보 역할을 하는 조예준도, 다른 사람은 아예 없는 취급하면서 유독 조예준에게만 날을 세우는 김희도도 본인답지 않았다.

“거기 둘, 그만 좀 싸워라. 그리고 조예준 너는 강당에서 자.”

얘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네. 개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임성이 끼어들었다.

“주장!”

“예준아. 내가 너 말고 누굴 믿겠냐. 종열이에게 맡겼다간 잠은커녕 애들 데리고 밤새 게임 할 거다. 너도 잘 알잖아.”

“그래도…… 왜 나만 맨날…….”

“부탁할게. 응?”

조예준은 동생에게 엄마를 뺏긴 것처럼 억울하게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차마 임성의 부탁을 거부할 순 없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강당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새벽 5시부터 훈련이니까, 다들 딴짓하지 말고 얌전히 자라.”

탁. 불을 끄자 금세 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후부터 이어진 훈련이 힘들었는지 아이들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휴대폰을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임성은 아이들이 모두 자리에 누운 것을 확인하고 몸을 뉘었다. 높다랗게 올라붙은 강당의 천장은 익숙하고 낯설었다.

이 광경을 보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려나.

벌써 섭섭한 걸 보니 야구부가 좋긴 한가 보다. 뭐, 이제 리그 시작이니까 감상은 뒤로 미루고 잠부터 자야지.

“음?”

얕은 잠에 빠져 있던 임성이 흐리게 눈을 떴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펄럭이더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닥치고, 곧장 따뜻한 기운이 늘어진 육체를 감쌌다.

“……아요.”

임성은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뒤에서 꽉 껴안은 남자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임성은 반쯤 잠에 취한 채 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분명 각자의 자리에 누웠는데, 대체 어느 틈에 온 거야.

“너 지금 뭐 해?”

“쉿. 다른 사람들 깨겠어요.”

임성은 지금도 남동생들과 한 방에서 생활하며 같이 자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딱 붙어서 자는 건 어릴 때 말고 없었다. 등에 닿은 타인의 온기에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따뜻하네요.”

그러는 너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것 같은데.

“네 자리로 가.”

“제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여기 바닥 차갑잖아요.”

그는 혹여 누가 들을세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체육관엔 난방 안 되니까. 추우면 내 이불 줄까, 덮을래?”

“……아니요. 됐습니다.”

여차하면 김희도에게 넘겨주려고 이불 끄트머리를 쥐었던 임성은 그의 대답을 듣고 멈췄다.

“일주일에 세 번. 이것까지 칠게요. 그리고 내일은 목욕하지 마세요. 피곤하잖아요.”

김희도는 여전히 임성의 등을 꽉 껴안은 채 말했다.

“땀에 전 채로 그냥 자라고? 애들이 피할걸.”

“그럼 더 좋고.”

걱정인지,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인지 모르겠네.

거친 숨이 뒷 목과 어깨 부근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얕은 잠기운이 달아나며 김희도에게 물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순간, 발끝에서 돋은 소름이 머리끝까지 쫙 번졌다. 임성의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안 뭅니다. 그냥 냄새를 맡을 뿐이에요.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여차하면 개라고 생각해도 상관없고.”

언제는 개 취급하지 말라고 하더니, 말 바꾸기는. 하지만 오죽하면 저런 말까지 할까 싶어 오늘은 그냥 봐주기로 했다.

“훈련하느라 고생 많았다. 잘 자라.”

“…….”

임성은 결국 제 등에 달라붙은 남자를 떼어 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말처럼 치대는 대형견, 혹은 큰 인형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비록 개나 인형은 이렇게 숨 막힐 정도로 껴안진 않겠지만.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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