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링 히트> 1권
1부.
#1
해당 글은 허구이며, 특정 단체 및 사건과 관련 없습니다.
*사이클링 히트(cycling hit: 한 명의 타자가 한 경기에서 순서 상관없이 단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모두 치는 것)
깡!
둥글고 단단한 공이 배트에 닿는 소리는 묵직하고 경쾌했다.
유난히 푸른 하늘에 그림을 그리듯 시원하게 뻗어 가던 공은 좌측 담장을 넘어 관중석 한가운데 툭 떨어졌다.
홈런.
손끝을 스치는 바람은 제법 쌀쌀한데 온몸은 훈련으로 흘린 땀으로 축축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해 봐도 잘되지 않았다.
임성은 관중석에 떨어진 공을 보다가 그라운드를 천천히 도는 타자를 봤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턱이 둥그스름한 소년이 베이스를 밟으며 걷고 있었다. 땡볕에서 험하게 구르는 운동선수답지 않게 새하얀 소년의 깨끗한 스파이크에서 흙이 날렸다.
앳된 얼굴과 달리 덤덤한 표정은 상대 학교 에이스에게 끝내기 홈런을 뽑아낸 사람 같지 않았다. 임성은 전혀 기뻐 하지 않는 소년을 잠시 보다가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화면에는 5와 4라는 숫자가 선명히 떠 있었다.
최종 스코어.
[소명중학교 4 : 5 문일중학교.]
임성은 소명(昭明)이라는 단어가 적힌 유니폼을 매만졌다. 학교 이름을 더듬을 때마다 손끝에 무게감이 더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은 9회 말에 또 홈런을 맞았다. 그것도 불과 9개월 전까지 초딩이었던 애한테서. 머리로는 이해를 하겠는데 솔직히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짠가. 이렇게 끝난다고? 연습 경기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같은 생각만 들 뿐이었다.
상의를 스치고 툭 떨어진 손은 송진 가루로 범벅이었다. 손뿐 아니라 남색 모자챙과 바짓단에도 하얀 흔적이 가득했다.
“와아아악! 이겼다.”
커다란 함성이 뒤늦게 임성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치 스크롤이 다 올라간 영화를 보는듯 멍한 시야 너머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소명중학교 선수들이 보였다. 그들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홈런을 뽑아낸 선수를 에워싸고 기쁨을 만끽했다.
기뻐하는 팀원들과 달리 정작 당사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간에 굵은 주름을 세기고 입매를 굳히며 불쾌감을 짙게 드러냈다.
시큰둥한 태도에 주변에도 전해져 한껏 들떴던 분위기는 어느새 착 가라앉았다. 저 때문에 서먹서먹해진 공기를 알아차렸을 텐데도 소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달싹여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코를 틀어막은 채 무리를 빠져나왔다.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휴우. 임성은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내며 모자를 벗는 순간,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던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
언뜻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착각이라고 느낄 정도로 찰나라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설사 쳐다봤다 한들 아무 의도도 없을 테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감독이 축 처진 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패배에 얼어 있던 아이들이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어느새 임성 주변을 둘러쌌다.
“고생은요. 저 때문에 졌는걸요. 죄송합니다.”
임성이 허리를 숙이자 뺨을 타고 흐른 땀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슬라이딩을 하느라 유니폼이며 얼굴이며 모두 엉망이 된 팀원들을 보는 순간, 목구멍에서 뜨거운 왈칵 차올랐다. 임성은 그것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꽉 깨물었다. 울지 마. 울면 안 돼.
“인마. 이기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는 거지. 주장이 돼서 언제까지 땅만 볼 거냐? 고개 들어.”
타박하듯이 건넨 감독의 위로에 임성은 눈에 힘을 주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밤톨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아이들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작년과 작년, 중학교 춘계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던 강호 소명중학교는 올해 처음 출전한 무명 학교에 석패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결승까지 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내서 미안하다.”
“주장…….”
아니에요, 괜찮아요, 주장이랑 함께해서 좋았어요. 후배들이 울먹이며 말했다. 임성은 한껏 팔을 벌려 제 품을 파고드는 후배들을 껴안았다. 어린애들처럼 훌쩍이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코끝이 찡했다.
뜨거워진 눈시울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틀었던 임성은 ‘오늘의 주인공’을 또 발견했다.
앳된 기운이 역력한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더그아웃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장갑을 벗고 있었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사람들 속에서 무척 희고 뽀얗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덕분에 재밌었어요.”
“아, 조예준.”
소년을 보던 시선을 거둔 임성은 희미한 미소를 띠우고서 1년 반 동안 제 공을 받은 포수의 이름을 불렀다.
“예준이 너도 이리 와라. 한번 안아 보자.”
“됐어요. 들어갈 틈도 없고요.”
“부끄럽냐? 나중에 섭섭해하지 말고, 어서.”
임성이 다시 한번 손짓하자 조예준이 못 이긴 척 다가왔다. 하지만 마치 견고한 성벽처럼 임성을 둘러싼 시커먼 빡빡이들을 뚫을 자신은 없는지 한 발짝 떨어진 채였다. 임성은 마구잡이로 엉겨 붙은 아이들에게서 겨우 벗어나 조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홈런 두 번이나 맞았어. 정말 면목 없다.”
“사인 낸 건 저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도 블로킹 제대로 못 해서 공 뒤로 빠트렸고, 타자들은 점수 못 낸걸요.”
우. 우. 조예준 물러가라. 점수를 못 낸 타자들이 엄지를 거꾸로 내리며 조예준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제 말 틀렸습니까. 동기, 선배님들? 억울한 분들은 반박 해보세요.”
흥. 콧방귀를 뀐 조예준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평소 팀 분위기가 워낙 좋고 사이가 돈독해서 할 수 있는 진담이 섞인 농담이었다. 차마 선배에겐 못하고 동기와 후배들을 흘겨본 조예준이 다시 임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주장이랑 배터리 짠 거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임성이 양 눈썹을 내리며 쓰게 웃었다.
“진짜 낯간지럽고 쑥스러운데 마지막이니까 할게. 2년 동안 진짜 고마웠다. 신세 많이 졌어.”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조예준은 입을 꾹 다물고 포수 마스크를 만지작댔다. 아래턱뼈가 복숭아씨처럼 울퉁불퉁해진 걸 보니 울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게 웬 청승이냐 싶지만, 마지막이니까.
짝. 이미 눈물바다가 된 아이들을 보던 감독이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자. 시합한다고 고생했다. 오늘은 훈련 없으니까 바로 집에 가서 푹 쉬어라.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동계 훈련 들어가는 건 다들 알지? 운동하다가 토하기 싫으면 알아서 몸 챙겨. 알겠냐?”
추계리그가 끝나자마자 동계 훈련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금세 눈물을 그치고 불만을 터트렸다.
와, 진짜 너무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감독님, 전생에 독사였을 거야. 등이 난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감독은 임성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떠났다. 입을 삐죽대던 아이들은 또다시 우르르 몰려와 임성에게 말을 하소연을 했다.
“주장 없으면 누가 우리 편 들어 줍니까? 맨날 감독, 코치님께 혼날 거라고요.”
“예준이 있잖아. 나보다 훨씬 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임성을 보며 조예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주장만큼 잘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중간에 못 해 먹겠다며 탈주라도 안 하면 다행이게.
“얘들아 그만 정렬하자. 인사해야지.”
임성의 말에 금색으로 소명중이 새겨진 남색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일렬로 죽 섰다.
맞은편에 정렬한 문일중 선수들은 준결승에 진출한 학교답지 않게 분위기가 데면데면하고 썰렁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자를 벗은 빡빡이들이 서로를 향해 인사를 했다.
“……?”
마지막 인사를 하며 꾸벅 숙인 고개를 들었던 임성은, ‘그 타자’와 또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이번에도 별말 없이 돌아섰고, 점점 멀어지던 그 뒷모습을 좇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조한 흙냄새, 손끝에서 뿌옇게 날리는 흰 가루와 부채꼴 모양의 그라운드. 그 주변을 에워싼 푸릇한 잔디. 허공을 가르며 뻗는 공과 얼굴을 뒤덮은 땀, 들썩이는 숨소리, 머리 위로 작열하는 햇볕, 온몸이 저릿저릿한 승리의 기쁨.
열여섯 살의 늦가을, 소명중학교 야구부 주장 임성의 중학 야구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 * *
임성이 야구를 하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어렸을 때 그의 가정 환경은 넉넉한 편이 아니라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가지 못했다. 공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야구를 시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똑같이 공으로 노는 축구나 농구도 있는데 굳이 야구를 선택한 이유는, 마침 그 해 치른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팀이 금메달을 목에 걸어서였다. 그라운드의 흙을 도톰하게 쌓고 그 위에 태극기를 꽂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한눈에 반해 처음으로 아버지를 졸라 싸구려 배트를 샀다.
그때가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배트만 있으면 뭘 하나, 혼자 공을 던지고 혼자 칠 수도 없는걸. 허공에 배트를 휘두르며 노는 임성을 본 어느 아이가 관심을 보였다.
“마. 니 야구 하나? 그거 야구 빠따 맞재? 이 학교는 축구 하는 애들밖에 없던데 반갑네. 이름 뭔데? 나는 이치연이다.”
이치연은 부산에서 전학 온 아이로 아버지가 야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야구장에 함께 다녀서 모르는 게 없다고.
점심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가 축구를 할 때 두 사람은 공을 던지고 쳤다. 당시 이치연이 투수를 선호했기에 임성은 자연스럽게 타자를 하게 됐다.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엔 야구부가 따로 없어서 두 사람은 송파에 있는 리틀 야구단에 가입했다. 이 역시 야구에 관심 많았던 이치연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알아봐 준 것이었다.
해당 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야구단은 초등학교 앞까지 셔틀버스가 데리러 와서 오가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재미로 시작한 공놀이는 점점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다행히 욕심만큼 재능이 있었는지, 어느새 임성은 야구단 내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 중 한 명이 됐다.
그리고 아직 어린 임성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을보다 겨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쌀쌀한 어느 날, 임성은 이치연 부자와 함께 한국 시리즈가 열리는 잠실구장을 찾았다.
리틀 야구단에서 야구장에 견학 가는 일도 많았고, 시간 날 때마다 이치연의 아버지가 경기에 데리고 가 줬던 터라 직관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규리그와 한국 시리즈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특히 승과 패를 번갈아 하다가 7차전에서 맞붙는 지금은 더더욱.
정규리그 1위 팀인 MK 엠퍼러즈 물론이고, 플레이오프(*정규리그 2위 팀과 와일드카드, 준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한 팀이 맞붙는 경기)에서 무난히 이기고 올라온 HR 유니콘즈의 투지도 대단했다. 부산에 기반을 둔 유니콘즈의 팬이었던 이치연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경쟁을 뚫고 결승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덕분에 임성은 운 좋게 한국 시리즈 7차전을 직접 관전하게 됐다.
점수가 난무하는 난타전이던 1-6차 시합과 달리 7차는 처음부터 투수전 양상을 띠었다. 1회부터 무려 4회까지 어느 팀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안타성 타구가 잡히거나 홈런을 방불케 하는 큰 파울이 나올 때마다 관중들이 함성과 탄식을 터트렸다. 열띤 응원과 안타까움, 그리고 환호가 쿵쿵대며 구장을 뒤흔들었다.
아슬아슬한 균형을 깬 것은 유니콘즈였다. 첫 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한 것을 시작으로 뒤 이어 등장한 타자들이 안타를 때려내며 선행 타자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5회 초, ‘0’의 행진이던 전광판에 처음으로 ‘1’이 뜨는 순간 원정석에 모여 있던 유니콘즈 팬들은 물론, 구장 곳곳에 앉아 있던 주황색 유니폼의 관중들이 벌떡 일어나서 고함을 질렀다.
유니콘즈! 유니콘즈! 유니콘즈!!
자리를 박치고 일어난 이치연의 아버지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모태 유니콘즈 팬 이치연과 아저씨의 주입식 교육으로 덩달아 유니콘즈의 팬이 된 임성은 이치연과 껴안고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6, 7, 8회를 거쳐 9회 초 스코어는 [유니콘즈 3 : 2 엠퍼러즈]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9회 말. 선발로 등판했던 유니콘즈의 투수 박재이가 마지막 이닝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시끄럽게 떠들던 게 언제였느냐는 듯 관중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그라운드를 주시했다. 세게 울리던 북소리도 어느새 멈춘 채였다.
『엠퍼러즈 장태석이 1루에 안착 합니다. 높은 공, 송원재가 때립니다. 아, 박재이. 장태석에 이어 이번에도 주자를 내보냅니다. 주자 1, 2루.』
두 명의 주자를 내보내고 흔들렸던 것도 잠시, 박재이는 곧바로 두 명을 잡아냈다.
투 아웃. 야구는 3명의 타자가 아웃되면 해당 이닝이 종료됐다. 이제 박재이에게 남은 건, 단 하나의 아웃 카운트였다.
정규리그 1위답게 엠퍼러즈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대타 카드를 꺼내 들었다. 평소 박재이에게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이던 타자였다.
글러브에 공을 숨긴 박재이가 한쪽 다리를 높게 들어 올리며 공을 쥔 손을 뒤로 젖혔다. 어깨가 수평이 되는 순간, 몸통이 빠르게 회전하며 찍어 내리듯 공을 던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공에 상대 팀 배트가 헛돌았다.
스트라이크-!
“조오오오았어!”
마지막 카운트를 직구로 잡아낸 박재이가 양손을 불끈 움켜쥐고 포효했다. 뒤이어 구장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안면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껴안으며 기쁨을 나누는 동안, 임성은 마운드에 홀로 선 투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등 번호 32번. 눈을 지그시 감은 박재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내뱉었다. 꽉 쥐었던 손을 내린 박재이는 어느새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팀원들에게 파묻혀 사라졌다.
둥둥둥. 신명 나는 북소리가 귓가를 사정없이 때렸다. 쿵쿵쿵. 덩달아 임성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라운드에 서 있는 투수. 경기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투수. 투수가 공을 던지지 않으면 경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손등뼈가 허옇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을 때처럼 찌릿찌릿한 전기가 올랐다.
한국 시리즈 최종 우승 HR 유니콘즈.
한국 시리즈가 끝난 후 며칠이 지났지만, 임성의 머릿속에선 마운드에 서 있던 투수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뒤쪽 공터에서 배트를 휘둘렀다. 휭,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배트 손잡이를 잠시 만지작대다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꽉 말아 쥔 주먹보다 조금 큰, 둥글고 딱딱한 물체는 야구공이었다.
임성은 손바닥으로 공을 감싸고 앞으로 내던지는 시늉을 했다. 쿵쿵쿵. 며칠째 귓가를 떠나지 않는 심장 소리가 좀 더 격하고 빠르게 요동쳤다. 숨을 깊이 몰아쉬며 허공을 노려보다가 시늉이 아닌 실제로 던져 봤다.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가던 공은 금세 뚝 떨어져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처음엔 타격 훈련을 하고 남는 시간에 공을 던졌다. 하루, 그다음 날, 일주일, 한 달. 시간이 지날수록 배트를 휘두르는 것보다 공 던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엔 감독의 지시하에 투수로서 첫 경기를 나갔다.
그날 경기는 11 대 1. 콜드 패(*5회 10점 차 이상, 7회 7점 이상 점수 차이 시 경기 종료)로 끝났다.
처참한 점수 차이나 패전 투수가 됐다는 아쉬움보다 두근거림이 더 컸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등이나 새빨갛게 변한 손바닥의 감촉이 신기해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야.”
연습 경기 내내 불만 어린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이치연이 다가왔다.
“나 지금 공 던질 거니까 준비해.”
평소라면 군말 없이 배트를 쥐었던 임성이 고개를 저었다.
공을 던지고 싶었다. 투수 하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이치연은 길길이 날뛰며 ‘나는 투수로, 넌 타자로 함께 코시(*코리안 시리즈. 줄여서 코시라고 함. 동의어: 한국 시리즈) 시리즈에 나가기로 하지 않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마운드에 서고 싶었다.
“미안.”
시무룩하게 건넨 사과에 이치연은 임성의 글러브를 빼앗아 그에게 집어 던졌다.
“오늘 경기 졌잖아. 너 때문에. 네가 못 던져서. 투수 해 봤자 앞으로도 똑같을걸. 모르겠냐?”
“…….”
“됐다. 너랑 안 하고 말지.”
이치연은 일부러 어깨를 퍽 치며 사라졌다. 그에게 떠밀려 넘어질 뻔했던 임성은 이치연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겨울 방학이 시작됐고, 어머니의 몸이 급격히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임성은 정신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느라 한동안 야구단에 가지 못했다.
방학 내내 동생들과 보내고 겨우 졸업식에 갔을 때 이치연은 이미 전학 간 뒤였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었잖아. 다급히 이치연에게 연락해 봤지만, 번호를 바꿨는지 없는 번호라는 건조한 기계음만 울릴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몰라. 너랑 제일 친했잖아.”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치연과의 인연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임성은 야구부가 없던 초등학교에서 야구로 꽤 유명한 소명중학교로 진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편도 50분, 왕복 2시간 남짓 걸리는 먼 거리에도 야구를 좋아하는 애들과 함께 야구를 한다는 게 그저 좋았다.
임성이 막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갔을 무렵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다. 프로에 진출은 했지만, 한 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그대로 은퇴 후 지도자 과정을 밟은 젊은 감독이었다.
야구와 관련된 일엔 누구보다 진지하고 엄했던 감독은 선수 한 명 한 명을 눈여겨보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야구 기초는 모두 그 감독님에게 배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예준이 전학 왔다.
지금으로선 전혀 상상이 안 되지만, 그때의 조예준은 또래와 비교해 체구가 현저히 작고,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처럼 깡말랐었다. 성격도 소심해 부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대는 걸 당시 부주장이었던 임성이 데려왔다.
조예준은 포수에 관심을 보였지만, 백업조차 되지 못했다. 기본 체력이 없다 보니 블로킹이나 송구가 약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초보인 조예준과 배터리를 이루는 걸 원치 않았다. 부원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돌던 조예준을 챙긴 것도 임성이었다.
조예준은 이제 열네 살, 갓 중학교 1학년이었다. 지금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무한한 가능성이며 발전이었다. 마음에 찰 때까지, 하고 싶을 때까지 해야 나중에 후회도 남지 않은 법이니까.
매일 밤늦게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공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백업으로도 서지 못했던 조예준은 명실상부 소명중 주전 포수로 당당하게 거듭났다. 그즈음 임성 역시 팀 내 핵심 투수로 자리매김하며 두 사람은 약 1년간 중학 리그에서 배터리로 이름을 날렸다.
젊은 감독이 이끄는 소명중학교는 매년 우승 후보로 뽑혔고, 그에 맞는 성적을 거뒀다. 오늘 무명 학교에게 처맞기 직전까지.
사실 감독을 비롯한 소명중 선수들은 문일중학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결승, 혹은 우승을 위한 통과점 정도로만 여겼을 뿐. 무시와 방심의 결과는 1학년 한 명이 타석에 들어섬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깡-!
유난히 크고 선명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딱 알아차렸다. 저건 홈런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확인한 전광판엔 ‘HR(홈런) 1’이 떠 있었다. 앞서 진루한 주자가 없어서 솔로 홈런으로 기록됐다.
점수를 확인하고 다시 그라운드를 보자 『문일』이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천천히 베이스를 밟고 있었다.
조예준에게 혹시 저 선수 아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성은 다시 한번 전광판을 보며 이름을 확인했다.
9번 타자, 김희도.
비록 홈런을 맞으며 문일중에 1점을 내주긴 했지만, 앞선 이닝에서 소명중이 점수를 많이 낸 덕분에 아직 이기는 중이었다.
임성은 공수 교대 후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후배 투수에게 물을 건넸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후배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고마움을 표했다.
“어땠어?”
“홈런 맞은 거요? 그냥 운이 없었던 것 같아요.”
홈런 맞은 사람치고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 보면 본인 말처럼 운 없어서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고개를 갸웃대는데, 박수 소리가 울렸다. 소명중 타자가 2루타를 치며 선행 주자가 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점수는 다시 벌어졌다.
“우리 학교가 무난히 이기겠는데요?”
그 후 공수 교대가 전환되고, 타순이 한 바퀴 돌아 솔로 홈런을 쳤던 9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김희도라고 했나.
소년은 건조한 표정으로 투수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섰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쓴 헬멧이 살짝 헐렁해 보였다. 배트 끝을 짧게 쥐는 건 버릇인 것 같았다. 그는 초구(初球)에 짧게 쥔 배트를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첫 타석도 그렇고, 보기보다 배짱 있는 스윙을 하네. 하지만 홈런은 우연이겠지.
마치 임성의 생각을 비웃듯, 소년은 우익수 뒤를 훌쩍 넘기는 깊은 장타를 때렸다. 공을 맞히는 것과 동시에 1루 베이스를 밟고 있던 문일중 주자가 2, 3루를 돌아 처절하게 슬라이딩하며 홈인 했다. 요란한 선행 주자와 다르게 김희도는 1루에서 멈추고 다소 무성의하게 유니폼에 묻은 흙을 털었다.
“음?”
충분히 더 갈 수 있었는데, 왜 멈췄을까? 혹시 다른 작전 같은 게 있나.
동일 인물에게 두 번 연속 장타를 얻어맞자, 가장 먼저 흔들린 건 소명중 투수였다. 그는 그 후 연속 4개의 볼을 던졌고, 문일중 타자들은 한 베이스씩 진루했다. 투수가 흔들리면 수비라도 도와야 하는데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쉬운 공을 놓치거나 악송구를 하는 등 실수를 연발했다.
팔짱을 낀 채 경기를 지켜보던 감독이 임성을 불렀다.
“임성. 몸 풀어라.”
“예. 감독님.”
오늘 경기에 출전할 거란 예상은 하지 못한 터라 급하게 몸을 풀어야 했다.
“주자 남겨서 죄송합니다. 주장.”
“죄송하긴 뭘 죄송해. 고생했다. 뒤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임성은 분한 듯 입을 앙다무는 후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운드로 걸어 나갔다.
볼록하게 솟은 마운드에 서서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바로 역전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임성은 특유의 호쾌한 피칭으로 타자들을 처리했다. 급하게 준비한 것치곤 볼 끝이 좋았다.
쌓아 놓은 주자들을 모두 정리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후배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그 후에도 임성은 주자를 내보내지 않고 아웃 카운트를 깔끔하게 쌓아 올렸다.
깡!
하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은 김희도에게 홈런을 맞으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높게 뜬 공이 우측 담장을 넘어 관중석에 툭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홈런.
김희도의 두 번째 홈런이자 투 런으로 양 팀은 마침내 4 대 4 동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성은 당황한 표정을 얼른 수습하며, 로진 주머니를 여러 번 매만졌다. 조예준이 포수 마스크를 들며 다가왔다.
“주장, 괜찮아요?”
“어. 괜찮아. 이번에는 꼭 잡자.”
홈런을 얻어맞은 충격도 잠시, 후속 타자들을 깔끔하게 돌려세우며 이닝을 끝냈다.
방금 그 홈런은 뭐였을까? 잘 들어간 공이었다. 가장 자신 있는 코스였는데, 어떻게 쳤지?
그리고 문일중 공격 차례인 9회 말, 투 아웃. 베이스에는 아무도 없는 상황. 스코어는 동점.
마지막 하나의 아웃 카운트만 남겨 둔 시점, 타석에 ‘또’ 그 타자가 들어섰다.
두 번째 맞대결인가.
임성은 로진 주머니로 손바닥의 땀을 없애고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모자챙을 만졌다. 이미 몇 번이고 매만졌으니 손자국이 허옇게 났을 것이다.
조예준이 제 왼쪽 어깨를 툭 친 다음 손가락을 움직이며 사인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임성이 공을 쥔 손을 글러브 안으로 숨기며 들어 올렸다.
오늘 이 경기를 잡으면 다음은 상대 전적이 훨씬 유리한 학교와 맞붙는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이기면 결승 진출이었고.
임성은 아래턱에 힘을 준 채 몸통을 한껏 비틀었다. 들어 올렸던 발을 바닥에 디딤과 동시에 팔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포수 미트를 향해 빨려 가기 바로 직전, 배트가 빠른 속도로 끼어들었다.
까앙-!
배트에 맞은 공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멀리, 멀리, 멀리 날아갔다. 땀으로 범벅된 임성의 고개가 공의 궤적을 멍하니 따라갔다.
그게 끝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집이 그를 반겼다.
현재 시각, 저녁 8시. 여동생들은 할머니 댁에 갔고, 남동생들은 아직 학교에서 오지 않은 모양이다.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거실을 그대로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불도 켜지 않고 유니폼 차림 그대로 이불 위에 엎어졌다.
유니폼 밴 땀 냄새와 건조하고 쌉쌀한 흙냄새가 콧속을 파고드는 순간, 애써 눌렀던 감정이 북받쳤다.
본격적으로 투수로 전향한 뒤 타자들에게 얻어 많은 공 개수는 셀 수 조차 없었다. 그중엔 만루 홈런도 있었고, 끝내기 안타도 더러 있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경기를 망친 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허탈한 건 처음이었다.
자신 있었고, 실제로도 컨디션 또한 좋았다. 몸을 틀고 팔을 뻗을 때 느껴지던 바람의 감촉도, 손끝에 쏟아지는 힘의 흐름 또한 나쁘지 않았다. 감히 오늘 최고의 공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플라이라고 생각한 공은 또 홈런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던 애한테, 그것도 두 번이나.
“쪽팔려.”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 중얼거리던 임성이 돌아누웠다. 천장에는 여동생들이 꼬물꼬물 붙여 놓은 야광별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샤워하고 밥도 지어야 하는데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충격은 대비할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을 뒤흔들었다. 흐린 별들을 보며 홈런을 맞던 장면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겼다.
김희도라고 했었지.
오늘 경기에만 홈런을 세 번 쳤어. 개 중 2개는 내게서 뽑아낸 거고.
자신의 공을 치고도 기뻐하지 않던 얼굴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 * *
비록 14살에게 홈런을 2개 맞으며 중학리그를 마무리를 했으나 임성은 그동안 보여 준 게 많은 전도유망한 자원이었다. 그는 야구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온 몇 개의 제의 중 선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든든한 주장에서 다시 새싹 감자가 된 임성은 마음을 다잡았다. 중학교 때와는 확연히 다른 실력과 연습량, 분위기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다. 때론 선배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로 기합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버텼다.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하다 보니 1학년 끝 즈음엔 팀의 주축 투수 중 한 명이 됐고, 에이스로 불렸다.
그다음 해 조예준이 선유고 신입생으로 당당히 입학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도 자주 보고, 후배로 들어온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니 반가웠다.
“주장! 오랜만입니다. 선유고 야구부 신입생 조예준 빡세게 인사드립니다.”
선유고 유니폼을 입은 조예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부주장이야. 그리고 주말에 만났으니까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지 않냐?”
“주…… 선배랑 또 같은 유니폼 입게 돼서 기뻐요.”
“그래. 또 잘 부탁해. 조예준.”
소명중학교 배터리가 선유고등학교 배터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선유고는 서울 지역은 물론, 지방 팀 스카우터가 종종 방문해 선수들을 체크하는 야구 강호였다.
임성은 1학년 말부터 2학년 중순까지 좋은 모습을 보이며 스카우터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선유고는 전반기 주말리그 2위, 황금사자기 4강, 대통령배 8강 등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전국 대회가 막 끝난 2학년 늦여름, 기존 감독이 건강 문제로 물러나며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다. 프로 출신인 새 감독은 매우 호전적이고 자신만만한 성격으로 가끔 인터뷰에서 “나는 다른 감독들과 다르다. 무척 체계적인 훈련을 하고 있다. 아이들 또한 나를 잘 따라 줘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다.” 하고 말했다.
3학년들의 신인 드래프트가 마무리되고 은퇴하자 임성은 주장이, 조예준은 부주장이 되었다.
“이젠 진짜 주장이네요, 주장.”
임성은 활짝 웃는 조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임성이 선유고에서 열심히 경기를 소화하는 동안, 김희도는 중학리그에 얼굴을 비췄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무명 중의 무명이던 문일중학교는 ‘김희도’라는 이름 하나로 통하게 됐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중에서 김희도만 전혀 다른 야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주장. 김희도 나왔어요.”
공기에 싸늘한 기운이 묻어나고,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던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늦가을, 임성과 조예준은 중학교 추계리그를 관람 중이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벌써 두 번째였다.
중고교리그가 그렇듯 구장에는 선수들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과 스타우터로 보이는 관중 몇 명이 다였다. 한마디로 조용하다 못해 썰렁했다.
“어, 타석에 섰다.”
임성이 중얼거리자 한껏 어깨를 움츠린 채 부르르 떨던 조예준이 고개를 쭉 뺐다.
입을 꾹 다문 시큰둥한 표정의 소년이 배트를 들고 타석에 들어섰다. 유난히 하얀 소년은 여름내 땡볕에서 훈련하느라 까맣게 탄 아이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못 본 새 더 컸네. 174쯤 되려나, 거의 4, 5cm는 자란 것 같은데?”
2년 전, 갓 초등학교를 졸업해 조그마하던 아이는 그사이 꽤 컸다. 어깨가 벌어지고 팔다리가 긴 걸로 봐선 앞으로 한참 더 클 것 같았다.
180cm은 넘겠네. 생각하는 사이 상대 학교 투수가 공을 흩뿌렸다. 곧게 뻗어 가다가 타자 바로 앞에서 훅 떨어지는 꽤 좋은 변화구였다. 그러나 김희도는 떨어지는 각도에 맞춰 팔을 내렸다가 마치 퍼 올리듯 스윙했다.
첫 타석의 초구, 그것도 변화구에 겁 없이 배트를 휘두르는 건 여전하구나.
딱!
그리고 여전히 높은 성공률을 보였고.
힘도 스피드도 작년보다 월등하게 늘었다. 중학리그가 아니라 고교리그에 데려다 놔도 충분히 통하지 않을까.
“와 씨, 저걸 치냐? 방금 진짜 잘 들어간 공이었잖아요. 싸가지랑 실력이 비례하나? 이제부터 저도 막 나갈까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던 조예준은 좌중간을 정확히 가르는 공을 보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싸가지?”
“못 들었어요?”
“……음, 쟤 또 저러네.”
임성은 소년, 김희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분명 좀 더 진루할 수 있는 깊은 타구였음에도 김희도는 1루에서 멈췄다. 저런 플레이 하나가 흐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나? 기회를 날리는 것도 날리는 거지만, 팀 사기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 진짜 몰라요? 중학리그에선 꽤 유명한데.”
“그러니까 뭐가? 내가 독심술 있는 것도 아닌데 말해야 알지, 인마.”
“김희도 말이에요.”
조예준은 1루 베이스를 무심히 밟고 있는 소년을 눈으로 가리켰다. 저런 상황이면 보통 도루 자세를 취해 투수를 압박하기 마련인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김희도가 왜?”
“존나 싸가지 없대요.”
싸가지가 없어? 조예준을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곤 의자에 등을 붙이곤 김희도를 턱짓했다.
“문일중 애가 그러는데 부원들이랑 아예 상종도 안 한대요. 빠따는 존나 잘 치니까 뭐라 하진 못하는데, 김희도 때문에 나간 애들 한둘이 아니래요. 그래서 쟤 앞에 타자들은 일부러 안 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시합에서? 그게 무슨 짓이야?”
임성은 눈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김희도와 문일중 부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경기에 나온 이상 사적인 감정을 개입하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안치는 건 따돌린다는 말이잖아.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뒤이어 나온 문일중 타자들이 아웃당하며 한 점도 내지 못했다.
임성은 헬멧을 벗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김희도의 뒷모습을 쫓았다. 아직 젖살이 남아 뺨이 둥글고 턱선은 부드러웠다. 어깨가 넓긴 해도 팔뚝이 두툼하진 않았다. 저런 가는 팔로 매번 어떻게 장타를 때려낼까. 신기하네.
이번엔 문일중학교의 수비 차례가 됐다. 공이 김희도 쪽으로 빠르게 뻗어 갔다. 꽤 어려운 타구임에도 어렵지 않게 잡아낸 김희도가 1루수에게 송구하며 아웃 카운트를 하나를 따냈다. 움직임은 그리 크지 않은데 순발력과 판단력이 돋보였다.
역시 잘한다. 센스도 좋고.
“김희도 타석 돌아왔어요. 이번엔 어쩌나 보자.”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다시 김희도의 차례가 돌아왔다. 김희도의 플레이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임성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나갔다.
“주장. 저 편의점 갈 건데 뭐 드실래요?”
“…….”
“주장?”
“아, 어. 미안. 뭐라고 했어?”
“뭐 드실 거냐고요. 핫바나 음료수요.”
“괜찮아.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조예준이 편의점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임성은 김희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상대 팀 코치가 마운드로 가더니 투수에게 뭔가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투수가 모자를 벗으며 시무룩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가는 걸 보니 교체 같았다. 예상대로 새로운 투수가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마운드에 올랐다.
“어? 투수 교체됐네요. 못 보던 얼굴 같은데, 전학 왔나?”
조예준은 덤덤하게 말하며 음료수 뚜껑을 땄다.
깡! 탄산이 부글부글 올라오는 소리가 묻힐 정도로 커다란 타격 소리가 울렸다. 아치형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외야 펜스를 훌쩍 넘어 텅 빈 관중석 한가운데에 툭 떨어졌다.
“!”
순간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던 임성은 곧 제 행동을 깨닫고 다소 머쓱하게 앉았다.
“또 홈런이네. 비거리 좀 봐. 펜스가 낮은 편도 아닌데 저게 말이 돼요? 완전 미친놈이네.”
“안 될 건 없지.”
실제로 눈앞에서 봤으니까.
교체되자마자 홈런을 맞은 투수가 고개를 떨궜다. 지금 어떤 기분일지 아주 잘 알겠다.
하지만 투수가 마운드에서는 실망하는 모습을 쉽게 보이면 안 됐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잘 안 될 때가 더 많지만.
산책하듯 느리게 베이스를 돈 김희도는 홈플레이트를 밟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승리의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홈런임에도 문일중학교 선수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살폈다. 당사자인 김희도 역시 홈런을 친 사람 특유의 흥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묘하게 불쾌한 얼굴로 팀원들과 한참 떨어진 곳에 앉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은 장면은 지난 2년 동안 자주 봤던 것이었다.
관중석에서 그 상황을 보던 임성이 복잡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예준아. 나 쟤한테 삼진 뽑아낼 수 있을까?”
“당연하죠. 주장이라면 바로 루킹 삼진(*looking三振: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하고 세 번의 스트라이크로 아웃되는 일)으로 잡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김희도의 플레이를 지켜보면 볼수록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저 무심한 표정을 깨트려 보고 싶긴 했다.
이쪽은 그 후 한동안 방황할 정도로 충격받았는데, 쟨 너무 멀쩡하잖아. 억울하게.
“주장. 애들 도착했다는데, 가서 한마디 해 주시죠.”
“어? 벌써? 그래. 슬슬 가자.”
이 게임이 끝나면 곧바로 소명중학교 경기가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옛 주장들의 조언을 듣고 싶어 했고, 학교에 애정이 남달랐던 임성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구장을 빠져나가기 직전 김희도를 돌아봤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 어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라운드를 정비하며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임성은 중학교 후배들을 찾아갔다. 개중 3학년들이 가장 먼저 선배들을 알아보고 뛰어왔다.
“안녕하세요, 주장! 주장.”
앞의 주장은 임성을, 뒤의 주장은 조예준을 말하는 것이었다.
“야. 티 나게 차별하는 거 아니냐? 목소리 톤이 다르잖아.”
“앗. 들켰습니까?”
후배의 말에 조예준이 기막힌 듯 헛웃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후배들의 엉덩이를 장난스럽게 차는 사이 임성은 오랜만에 보는 감독에게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그새 더 멋있어지셨습니다. 멀리서 보고 연예인인 줄 알았습니다.”
“요놈. 은근히 뺀질뺀질한 건 하나도 안 변했네.”
넉살 좋은 말에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청룡기 잘 봤다. 너 어깨 올리는 버릇 그대로더라. 그러면 팔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고 팔꿈치까지 영향 미친다고 했지? 당장 몇 게임 이겨 보겠다고 그러다간 진짜 큰일 난다.”
“고치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됩니다.”
“쉐도우 자주 하고 자세부터 잡아라. 웨이트는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그리고 조예준, 너는 웨이트 제대로 하고 있냐? 인마, 허리에 힘이 없으니까 자꾸 공을 흘리지. 주자가 없어서 망정이지 있었으면 실점으로 이어졌다. 포수가 블로킹 제대로 못 해서 실점하면 투수 힘 쭉 빠진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냐?”
“예. 감독님. 시정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애들처럼 열중쉬어를 한 채 잔소리 같은 조언을 묵묵히 들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차마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저, 감독님. 슬슬 시합 준비하셔야죠. 애들 기다리는데…….”
하다 하다 과거에 말아먹은 시합 얘기까지 나오자 더는 견디지 못한 임성이 대화를 돌렸다.
“그래도 선배라고 후배들 앞에서 폼 잡고 싶은가 보네.”
그걸 어떻게 아셨대. 우리 감독님 감 좋으신 건 여전하네.
“좋다. 그럼, 선배로서 조언 좀 해 줘라. 둘 중 누가 먼저 할래?”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예준이 냅다 임성의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앞에 나서게 된 임성은 후배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뺨이 달아오른 채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특히 1학년들은 콧구멍을 벌름대거나 아랫입술을 연신 핥으며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귀여운 자식들.
임성은 한껏 상기된 아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해 춘계리그 우승은 소명중학교였다.
* * *
눈이 아릴 정도로 건조하고 차갑던 바람에 따뜻한 기운이 슬금슬금 스미는 계절이었다. 이른 봄, 야구 방망이처럼 길게 뻗은 가지 끝에 야구공만큼 둥근 꽃봉오리가 맺혔다.
새로움은 설렘을 동반하기 마련이라, 3학년들이 졸업한 빈자리는 갓 중학교를 졸업한 새내기들이 채웠다.
그리고 올해 열아홉 살이 된 임성은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 야구를 앞두고 있었다.
모든 수험생이 그렇듯 운동부에게도 고3은 중요한 시기로 이때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프로 진출 여부가 갈렸다.
현재 한국 고교야구협회에 등록된 고등학교 3학년은 약 900명가량인데, 이 중 프로에 진출하는 선수는 100명이 채 안 됐다. 대학 선수나 해외 특별 지명 등을 합치면 경쟁률은 더욱 치열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3학년들은 조금이라도 많은 시합에 출전하기 위해 미친 듯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었고.
“으음. 이제 좀 괜찮나.”
임성은 왼쪽 팔꿈치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부상은 운동선수와 한 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빈번한 일이었다. 육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건 물론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범위까지 이용하는 게 일상이니.
야구를 잘한다 해서 부상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에이스라는 이유로 혹사를 당하거나 재활 시기를 놓쳐 무너지는 일도 많았다.
보통 부상은 체온이 높은 여름보다 근육이 쉽게 경직되는 겨울에 더 많이 발생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경우, 1년을 통으로 날릴 수 있어 특히 주의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해도 부상이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임성은 막 겨울로 지나가는 작년 늦가을에 팔꿈치 염증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할 정도는 아니라 재활을 하며 겨울 방학을 보냈다.
감독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네 잘못이다. 아픈 모습 보이면 신입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으니 내가 부를 때까지 개인 훈련을 해라.” 하고 통보했다.
임성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은 조예준은 누구 덕분에 청룡기 준우승한 줄 아냐며, 야구부에 주장이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당사자보다 더한 분노를 터트렸다.
* * *
개학한 지 이틀이 지난 늦은 오후, 맨 뒷자리에 앉은 임성은 노트를 펴 놓고 훈련 일정을 짜고 있었다.
요 며칠 이런저런 일로 조예준과 연락하지 못한 터라 야구부에 신입생이 몇 명이나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괜찮은 애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는데.
“주장! 주장 여기 있어요?”
볼펜 꽁다리로 노트 위를 툭툭 두드리던 중,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교실에 남아 있던 아이들이 뒤를 돌았다. 야구부 유니폼을 입은 까까머리 남자가 뒷문을 짚은 채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덩달아 고개를 들었던 임성은 익숙한 얼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조예준?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곧 훈련 시간이잖아.”
“주장. 빨리 와 봐요, 빨리.”
“왜? 무슨 일인데?”
성큼성큼 교실에 들어온 조예준이 다짜고짜 임성의 팔을 잡아당겼다.
“저랑 같이 부실에 가요. 아, 얼른요.”
엉덩이를 반쯤 들썩이던 임성이 그 말을 듣고 멈춰 섰다. 팔이 완전히 낫기 전까지, 그러니까 감독이 부를 때까지 혼자 훈련 하라는 말을 들은 게 얼마 전이었다. 그 당시 제일 날뛴 게 조예준이었으니 모를 리 없을 텐데.
“인마, 나 당분간 부실 출입 금진 거 모르냐?”
“그건 아는데, 그래도 지금 주장이 말리지 않으면 싸움 날지 모른다고요. 선배들도 다 화나서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미 난장판일지도 몰라요! 조예준은 답답한 듯 주먹을 꽉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운동부 특성상 체격이 확실히 좋아서 바닥이 쿵쿵 울렸다.
“싸움? 누구랑 누가?”
상황이 대체 어떻길래 조예준이 못 말린다는 거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봤으나 그럴듯한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아무튼, 가 보면 알아요. 진짜 큰일 나기 전에 빨리요.”
우물쭈물 말을 흐린 조예준이 임성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조예준과는 중학교 2학년 때 만나서 지금까지 약 4년 동안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다. 오래 함께한 만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경황없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마도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거겠지.
잠시 생각하던 임성이 볼펜을 내려놓고 조예준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거의 뛰듯이 운동장과 그라운드를 달려 순식간에 야구부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나는 익숙한 냄새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파스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후텁지근하고 더운 공기. 이게 얼마 만이더라.
“다들 잘 있었…… 너희 지금 뭐 하냐?”
오랜만의 야구부 방문에 웃으며 문을 열었던 임성이 표정을 굳혔다.
“박종열. 양민성. 왜 그러고 있냐고.”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임성이 빠르게 부실을 훑었다. 익숙한 얼굴 사이로 보이는 새 얼굴은 신입생인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신입생들은 임성을 보고 더욱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1학년들에게 좋은 모습은 못 보일망정 이게 뭔 짓거리야.
“뭐 하냐고 묻잖아. 너희 설마 싸우고 있었냐? 거기 안에 있는 애는 누구고?”
임성이 고개를 쭉 빼고 기웃거렸다.
싸움 날지도 모른다는 조예준의 말과 다르게 지금 상황은 다수가 한 사람을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한 덩치 하는 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안쪽에 몰린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언뜻 보이는 교복 소매가 유난히 희다는 것과 둥그스름한 운동화 앞코가 깨끗한 걸로 봐서 신입생이겠거니 하고 짐작할 뿐.
만약 박종열과 양민성이 신입생을 몰아붙이는 중이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다들 비켜 봐.”
임성이 한 발짝 다가가자 2학년 몇 명이 서로 눈짓하더니 우물쭈물 옆으로 비켜섰다. 그제야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인상을 쓰고 있던 임성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김희도?”
쟤가 여기 왜 있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사람을 발견한 임성이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많이 불렀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당사자에게 처음으로 내뱉어서겠지.
김희도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얀 얼굴 중에서 유난히 도드라진 붉은 입술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꽉 다물려 있었다.
“와, 이 자식. 건방진 것 좀 봐라. 선배를 보고도 개무시를 하네.”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임성을 대신해 박종열이 화를 냈다. 부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김희도가 눈을 살짝 찌푸리자 박종열이 “나 참. 이 새끼가?” 하고 욕설 섞인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금세 정색하며 김희도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완전 위아래도 없는 놈이잖아, 이거. 너 아까 뭐라고 그랬냐?”
“꺼지라고.”
16살에 김희도를 처음 만나고 일방적으로 알고 지낸 지 3년 가까이 됐지만,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는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러웠고, 오히려 너무 매끄러워 감정이 없어 보였다.
“말하는 본새 좀 봐라. 넌 선배가 만만해 보이냐?”
박종열과 함께 김희도를 밀어붙이던 양민성이 두툼한 가슴을 내밀며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누구 한 명이 멱살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흉흉한 분위기였다. 이래서야 조예준이 새파랗게 질려 교실까지 찾아올 만했다.
임성은 지금 상황을 가늠하려 애쓰며 다시금 아이들을 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박종열과 양민성, 두 사람과 달리 무표정한 김희도.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신입생들과 2, 3학년까지.
김희도를 제외한 부원들의 얼굴은 다들 조금씩 상기돼 있었고, 짙은 남색 유니폼은 땀과 흙으로 엉망이었다. 운동장에서 구르는 게 일인 애들에겐 일상이었으니 그리 특별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러닝 도중 무슨 일이 일었던 건가? 아니야. 같이 뛰었다기엔 김희도는 지금 교복 차림이잖아.
“다들 조용히 하고 박종열, 네가 상황 설명 좀 해 봐.”
괜한 추측만 하느니 직접 듣는 게 정확할 것 같아 박종열에게 물었다.
“야, 말도 마라. 저 새끼가 우리보고 뭐랬는지 알아?”
“냄새나. 사람들도, 여기도 역겨워.”
박종열의 질문 아닌 질문에 대답한 건 김희도였다. 임성을 비롯한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 방금 폭탄을 터트린 사람답지 않게 평온한 표정을 한 김희도에게.
“냄새……?”
냄새가 난다고? 임성은 반사적으로 부실을 훑었다. 한창 자랄 나이대의 남자애들을 수용하기엔 너무 좁은 공간엔 젖은 유니폼을 비롯해 구겨진 교복과 돌돌 말린 양말, 심지어 속옷까지 마구잡이로 널려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쓰레기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깨끗하냐 더러우냐의 이분법으로 물으면 당연히 더럽다고 하겠지만, 이 나이대의 남자애들은 보통 다 이렇지 않나?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미쳤냐? 갑자기 와서 웬 지랄이야?”
임성이 잠시 머뭇대는 사이 목에 핏대를 세운 양민성이 기어코 김희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김희도는 제 눈앞에 주먹이 다가와도 움츠러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살짝 내리뜬 시선과 찡그린 콧등이 그가 느끼는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중이었다. 어쩌면 그게 양민성을 더 자극했는지도 모르고.
“주장, 안 말려요? 저러다 양민성 선배가 쟤 진짜 때릴 것 같은데.”
저로선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임성이 부실 출입을 금지 중이란 걸 알면서도 데려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당연히 말릴 거라는 조예준의 예상과 달리 임성은 김희도만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주장, 뭐해요. 덕분에 조예준의 똥줄은 타들어 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준아. 김희도가 여기 왜 있어?”
“신입 부원으로 들어왔어요.”
“왜 나한테 말 안 했냐?”
시비 거는 게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중학교 추계리그를 보러 다닌 이유 중 하나가 김희도라는 건 조예준이 가장 잘 알 테니까.
“오늘 입부 했으니까요. 아니, 입부가 맞긴 한가…… 아무튼, 저도 30분 전에 알았어요.”
그러니까 조예준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김희도는 30분 전에 야구부에 와 선배들과 멱살잡이부터 하고 있다는 뜻이다.
보통 신입생들은 낯섦에서 비롯된 특유의 어색함과 긴장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강한 운동부는 오죽할까?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진 않을 것이다. 초기에는 기강을 잡는답시고 더 엄격하게 대하기도 했다. 물론 임성은 똥군기라고 생각하고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대부분 신입생들은 선배를 어려워하기 마련인데 김희도에게선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면전에 대고 역겹다고 한 거 보면 말 다 했지.
“조예준. 김희도가 먼저 시비 걸었냐?”
“아, 그게요…….”
조예준은 여전히 멱살이 잡힌 김희도를 힐끔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김희도는 아이들이 러닝을 딱 끝냈을 무렵 부실에 갑자기 등장했다. 처음엔 중학 리그를 씹어 먹던 애가 왔다며 다들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일중 김희도가 좀 유명했었어야지.
특히 타자들은 김희도를 둘러싼 채 이런저런 질문을 퍼부었다. 어떤 배트를 쓰냐, 따로 레슨 받는 건 있느냐, 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하냐.
김희도는 ‘예.’, ‘아니요.’ 같은 단답형으로 말하며 마치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살폈다. 성의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1차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야야, 신입생이잖아. 애 얼었나 보다. 박종열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상의를 훌렁 벗었다.
보통 본격적인 훈련을 하기 전에 러닝으로 몸을 데우며 혹시 모를 부상을 방지했다. 새 학기에 괜히 더 열심히 공부하듯 운동부 아이들도 학기 초에 더욱 힘껏 뛰었다. 눈앞이 노래지고 목구멍에 비린 쇠 맛이 느껴질 때까지. 운동장 수십 바퀴를 뛴 아이들은 땀으로 범벅된 채였고, 몸에서 더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번졌다.
‘몸 좋네. 야, 스윙 좀 해 봐라.’
양민성이 대뜸 김희도의 왼쪽 어깻죽지와 전완근을 더듬었다. 근육의 크기와 탄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다짜고짜 만지는 건 실례였다.
김희도는 냄새나니까 떨어지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어깨를 짚은 손을 쳐 냈다.
찰싹-.
시끄러운 부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정적이 흘렀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대던 양민성이 씨발,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평소엔 장난기도 많고 헐렁해도 선후배 간의 예의는 엄격히 따지는 박종열이 따라 일어서며 김희도에게 다가갔다.
그 이후는 보다시피 개판 5분 전이고.
“대충 그렇게 된 거예요.”
조예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임성이 김희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작년 추계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소년은 몇 달 새 한 뼘 더 자라 있었다. 목이 길고 어깨는 넓었으며 팔다리가 길쭉길쭉했다. 특히 허리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육체는 교복으로 가려졌음에도 탄탄한 게 느껴졌다. 골격이 좋았지만, 우락부락하거나 두툼한 느낌은 없었다. 물론 이제 성장기니까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쌍꺼풀이 없는 눈은 가로로 길게 뻗다가 끝이 살짝 올라갔다. 아직 앳되어서인지 새치름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반듯한 이마와 공들여 그린 것 같은 모양 좋은 눈썹, 그 사이로 높은 콧대와 날렵한 코끝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 위보다 아래쪽이 더 도톰한 입술은 봉숭아꽃을 물들인 것처럼 붉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건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였다. 보통 운동선수들은 야외 훈련이 많아 햇볕에 그을리기 마련인데, 김희도는 꼭 반사판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희었다. 윤이 나는 뺨엔 옅은 홍조가 발그스름하게 번져 있었다. 꽉 다문 입매가 차가우면서도 화려해 왠지 오묘한 분위기가 났다. 한마디로 사람의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고 할까.
예쁘게 생겼다.
하지만 김희도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외모가 아닌 신체적 능력, 꼭 집어 말하면 야구 실력이었다.
“김희도.”
지금 이 개판을 수습하는 게 먼저라는 건 알면서도 무심코 관심이 갈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2년 내내 지켜보던 선수잖아.
“야구부에 잘 들어왔다. 내 이름은 임성이고, 주장이다. 앞으로…….”
임성은 양민성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김희도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잘해 보자.”
“…….”
김희도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지 않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고 팔을 늘어트린 채 가만히 서 있을 뿐.
임성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손을 내렸다. 하늘 같은 주장이 무시당한 걸 본 조예준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금방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조예준을 불렀다.
“조예준, 얘네 물 좀 갖다줘라. 냉수 마시고 정신 좀 차리게. 그리고 다들 가만히 있을 거야? 곧 훈련 시작인 거 몰라?”
한곳에 뭉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아이들이 마지못해 흩어졌다. 에이, 재밌었는데, 조금만 더 해 보지. 같은 중얼거림도 들렸다.
조예준은 구석에 놓인 아이스박스에서 생수를 꺼내 박종열과 양민성에게 건넸다. 김희도에게 주지 않는 건 주장을 무시한 것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박종열. 그동안 나 없으니까 좋았냐?”
“말해 뭐하냐. 완전 천국이었지. 이제 너 왔으니까 또 존나 지옥이 펼쳐지겠네. 푹 쉬지 왜 벌써 왔냐?”
“그러니까 왜 사고 쳐서 부르냐. 조예준이 얼굴 새파래져서 찾아왔더라. 감독님 허락 없는 복귀니까 혼나면 네가 나 커버 좀 쳐 줘라?”
“너 하는 거 보고.”
박종열이 픽 웃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예민하던 공기가 누그러졌다. 바짝 졸아 있던 신입생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놓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 임성이 등장하고 나서였다.
주먹이 오가는 등의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껄끄러운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양민성은 연신 쌍욕을 내뱉으며 글러브와 배트를 들고 부실을 나갔다.
나머지 부원들도 운동장으로 나가자 부실에는 임성과 김희도, 두 사람만 남았다.
“마실래? 물 말고 이온 음료도 있어.”
생수를 흔들며 말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반응을 기다리다가 생수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곤 몸을 틀어 김희도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섰다.
“우리 학교에 올지는 몰랐어. 문일중은 대부분 주강고로 가잖아.”
주강고는 선유고와 비슷한 시기에 야구부를 창단해, 지금까지 여러모로 경쟁 중이었다. 두 학교 사이에 오가는 신경전은 살벌했는데, 오죽하면 ‘우승을 못 할지언정 주강고와의 대결에선 이겨야 한다.’ 하는 말까지 있을까.
“주강고에서 레드카펫 안 깔아 줬어? 모셔 가려 했을 텐데.”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던진 농담에도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구나. 임성이 이마를 긁적였다.
“민성이가 무례했지? 미안하다. 너 기분 나쁜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럴 만해. 하지만 좀 돌려서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야구, 안 합니다.”
중학교 마지막 경기에서 김희도에게 역전 홈런을 맞고, 시간 날 때마다 그의 시합을 보러 갔지만, 서로 말을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그게 탈퇴 요청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사이 김희도는 제 것으로 보이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임성을 지나쳤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팍.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김희도가 손을 쳐 냈다. 언뜻 보이는 얼굴은 불쾌함으로 가득해 순간 멈칫하게 됐다.
발갛게 변한 손을 살필 생각도 못 하고 그를 쫓아가는데, 마침 감독이 들어왔다. 감독은 임성을 보자마자 이맛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감독님.”
임성은 감독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정수리가 거의 바닥에 닿는 인사였다.
“오랜만이고 자시고 여기 왜 왔냐?”
“1학년들이 입부 했다고 해서 잠시 들렀습니다.”
숙였던 고개를 들며 김희도가 사라진 곳을 힐끔 봤지만, 활짝 문 사이로 봄바람만이 소리 없이 살랑살랑 불어올 뿐이었다.
* * *
감독의 허락을 받지 않고 멋대로 부실에 온 대가는 가혹했다. 뒤늦게 온 코치가 보다 못해 말리지 않았더라면 온종일 기합과 쓴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야구부에 복귀할 수 있었으니 결과는 만족이었다.
문제는 그 사달이 벌어지고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김희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나. 정말 그만두려고?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온 것도 놀라운데,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아직 김희도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 했잖아.
결국 임성은 사흘째 되는 날,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1학년 교실을 찾았다.
선유고는 학년마다 명찰 색이 달랐다. 1학년 명찰 색이 3학년까지 쭉 이어지고, 신입생이 졸업생이 쓰던 명찰 색을 다는 식이었다.
올해 열아홉, 고3의 명찰은 노란색이었다. 오른쪽 가슴 주머니에 노란 명찰을 단 임성이 등장하자 어색한 소란함으로 가득하던 복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복도에 발을 내딛자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아이들이 양옆으로 비켜섰다.
이거 꼭 런웨이를 걷는 모델 같네. 딱히 1학년들을 위협할 생각은 없었는데. 괜히 자신 때문에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얼른 볼일만 보고 가야겠어. 임성은 뺨을 긁적이며 코치에게 들었던 김희도의 반을 찾았다.
1학년 3반. 여긴가?
“저기, 뭐 하나 물어볼게요.”
마침 뒷문에서 남학생 두 명이 나오고 있었다.
“미친 새끼. 존나 구라 까고 있…… 네, 네? 저요?”
킬킬 웃으면서 친구에게 욕설 섞인 말을 내뱉던 남학생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살짝 꺾어야 할 정도로 키가 큰 남자가 내려 보고 있었다. 덩치가 막 우락부락한 것도 아닌데, 묘하게 분위기가 위압적이었다.
명찰 색이 노란 걸 보면 3학년인데. 처음 보는 선배가 왜 날 불렀을까. 빵셔틀, 일진, 왕따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여기 김희도 반 맞습니까?”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남학생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 다행히 맞게 찾아왔나 보다. 남의 교실에 덥석 들어갈 순 없으니 불러내야겠지.
“미안한데, 김희도 좀 불러 줄래요? 아, 내 이름은 임성이고, 야구부 주장입니다. 김희도도 알 겁니다.”
“어…… 네에.”
임성은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지만, 남학생은 여전히 긴장한 듯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 교실로 돌아갔다.
꽉 닫지 않아 한 뼘쯤 열린 문틈으로 새 학기 교실 풍경이 보였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은 감자처럼 풋풋하고 귀여웠다.
고개를 살짝 틀며 안쪽을 훑던 임성은 어렵지 않게 김희도를 발견했다. 그는 마스크를 낀 채 창가 옆 맨 뒷자리에 엎드리고 있었다.
남학생은 김희도 근처를 한참이나 배회하다가 이내 결심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멀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이쪽을 가리키며 입을 달싹이는 게 보였다. 아마 내 얘기를 하는 거겠지. 고개를 돌린 김희도와 눈이 마주쳐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분명 알아봤을 텐데도 김희도는 반응하지 않았다. 남학생이 민망해하며 다시 뭐라고 말했지만, 못 들은 척 자리에 엎드리는 것으로 대화를 차단했다.
결국 눈썹을 팔자로 내린 남학생이 곤란한 얼굴로 돌아왔다.
“저기…….”
“괜찮습니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임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남학생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1학년 교실은 5층이고, 3학년 교실은 2층이라 지금 가야 조회에 늦지 않을 것이다.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김희도를 한 번 더 보고 교실을 향해 뛰었다.
점심시간에 1학년 3반을 다시 찾아갔지만, 찾는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먹을 걸로 좀 꾀어 볼까 했더니 없구나. 임성이 손에 쥔 까만 비닐봉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쉽게 김희도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아침에 말을 전해 줬던 남학생이 보였다.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대화 하던 남학생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뒷문에 서 있는 임성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저 선배는 왜 또 왔어. 임성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남학생을 향해 손짓했다.
“저요?”
고개를 끄덕이자 남학생이 앞에 앉은 친구와 눈빛을 주고받고선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 사이 임성은 봉지를 뒤적여 꺼낸 바나나 우유를 남학생에게 우유를 건넸다. 김희도의 몫까지 두 개였다.
“아까 부탁 들어줘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이거 김희도 자리에 놔 줄래요?”
“아……, 가, 감사합니다.”
설마 무언가를 받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남학생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록 김희도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지만, 임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1학년 3반 교실을 찾았다. 하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나흘 정도 허탕을 치고,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게 1교시 시작 직전에 갔다.
“김희도 찾으세요?”
“네. 불러 줄 수 있어요?”
“저 1학년이라서 말 놓으셔도 되는데…… 잠깐만요.”
그래도 몇 번 봤다고 익숙해졌는지 남학생은 살짝 웃고서는 돌아갔다. 그리고 김희도의 어깨를 흔들더니 뒷문을 가리켰다. 김희도는 뒷문에 멀뚱히 서 있는 임성을 못 본 척했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
나오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임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1교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혹은 저들끼리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달라붙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임성은 개의치 않고 김희도의 앞에서 멈췄다.
“나 누군지 알지?”
“……뭡니까?”
바로 앞에서 버티는 건 외면하지 못하겠는지 김희도가 무뚝뚝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훈련 나와.”
야구부에 왜 안 나오냐고 묻는 것도 아닌, 다짜고짜 훈련 나오라는 말에 김희도가 코웃음을 쳤다. 어찌 보면 상당히 건방진 반응에도 임성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안 한다고 말한 것 같은데요.”
“아직 퇴부서 못 받았어.”
사실 입부서나 퇴부서는 형식에 불과한 종이 쪼가리였지만, 그 형식을 핑계 삼아서라도 잡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 내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한 김희도가 벌떡 일어나서 교실을 나가려 했다. 임성은 다급히 그를 부르며 어깨를 붙잡았다. 이대로 김희도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어서.
물론 굳은 얼굴로 돌아보는 김희도를 보고 양손을 번쩍 들고 물러섰지만.
“만지지 마세요.”
“아, 미안. 어쨌든 퇴부서 받아도 처리 안 할 거야. 헛수고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거다.”
“내가 없는 게 더 편할 텐데요. 거기 부원들끼리 잘해 보세요.”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정확한 상황을 못 봐서 섣불리 말하기 어렵지만, 그런 애들 아니야.”
“섣불리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애들’이 뭔지 모르겠지만, 관심 없습니다.”
생각보다 태도가 강경했다.
“야구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 아니었어? 우리 학교 야구부가 어떤 곳인지 아직 겪어 보지 못했잖아.”
“냄새나고 더럽다는 건 충분히 알았습니다.”
임성 또한 부실이 깨끗한 편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참혹하긴 했다. 작년에 매니저가 그만둔 후 그나마 부원들을 챙기고 청소를 하던 임성이 자리를 비운 결과였다.
“그 후에 대청소했어. 갑자기 합류하기 어려우면 연습 경기만이라도 나와.”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표정도 목소리도 차가웠다.
“야구 선수가 경기하는 건 당연…….”
열심히 설득하던 중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대로 계속 1학년 교실에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우선 후퇴하기로 했다.
“정식으로 탈퇴하지 않은 이상 넌 야구부야. 마음대로 도망갔다간 또 잡으러 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이거 마셔.”
임성이 김희도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그가 받지 않아 책상에 내려놨다.
“그럼 간다. 오후에 부실에서 보자.”
임성은 김희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뛰어갔다.
아직 선생님 안 오셨겠지. 지금 뛰면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김희도는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중간 둘레가 유난히 뚱뚱한 바나나 우유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처음 보는 남자가 ‘3학년 선배가 주더라. 야구부 주장이라던데…… 아는 사람이야?’ 하고 말하며 바나나 우유를 줬었지.
김희도는 당연히 받지 않았고, 한참이나 우유를 내밀고 있던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었다.
* * *
김희도는 임성의 말을 깨끗이 무시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이미 예상했던 일인 듯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그를 야구부에 돌아오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부상 등의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몰라도 싸우고 그만두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공기에 아직 찬 기운이 서린 3월 둘째 주 목요일, 유난히 해가 바짝 떠오른 이른 아침이었다.
전체 훈련을 끝내고 정규 수업이 시작되기 전, 남은 시간에 2, 3학년들은 자율 훈련을 했다. 각자 할 일을 하는 선배들과 다르게 신입생들은 여전히 어색한지 우물쭈물 댔다.
임성은 첫날 탈주한 김희도를 제외한 총 스무 명의 신입생들을 투수와 타자 조로 나누어 기초 훈련을 지시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기초 중의 기초으로, 과하게 해도 모자란 훈련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늦가을에 팔꿈치 염증 진단을 받았던 임성은 러닝으로 운동을 대체했다. 천천히 달렸다가, 빠르게, 또 천천히 달리며 열량을 소모했다.
임성은 그라운드가 아닌 운동장을 뛰며 교문을 주시했다. 뛰다가 교문을 보고, 또 뛰다가 교문을 보는 일을 반복하던 임성의 눈이 반짝 빛났다.
“김희도.”
허억, 헉. 임성은 김희도를 팔을 붙잡으며 입을 벌렸다. 목구멍에 억지로 욱여넣은 숨을 거칠게 뱉어 냈다. 전력으로 달린 심장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가파르게 움직였다.
“이제 등교하냐? 오늘은 야구부에 올 거지? 어제부터 라이브 배팅 시작했거든. 엄청 재밌을 거야.”
임성은 아주 중요한 사실처럼 말했지만, 사실 라이브 배팅은 야구 선수라면 예외 없이 매일 하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김희도는 딱히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후, 아직 3월인데 벌써 덥네. 아무튼 청백전도 할 거다.”
임성은 땀에 젖은 상의를 펄럭여 바람을 만들었다. 아직 3월밖에 안 됐는데 햇볕이 강한 걸 보니 올여름은 아주 더울 모양이었다. 얼굴을 흥건히 적신 땀을 손등으로 닦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김희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 변화는 없는데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왜?”
임성을 가만히 보던 김희도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임성이 다시 입을 떼는 순간, 저 멀리서 “주장! 감독님께서 정렬하랍니다. 빨리 오세요.” 하는 조예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지만 이만 가야했다.
“어, 알았어! ……김희도. 나 먼저 간다. 오늘은 꼭 와. 알았지?”
여전히 대답 없는 남자를 향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임성이 멀어진 후에도 김희도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 *
1950년 초에 세워진 선유고등학교는 매년 S대학교 합격자를 다수 배출하는 명문고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의 집합소였다. 공부뿐 아니라 운동 쪽으로도 꽤 유명했는데, 특히 야구부에선 매년 프로 선수를 배출할 정도로.
최근 KBO에서 타점을 쓸어 담는 유니콘즈 타자 김이설이나 페어리즈 구단의 부동의 마무리라 일컫는 권재영 역시 선유고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과거에 불과할 뿐, 현재의 야구부는 여러모로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매년 우승권에 들지만 결국 하지 못하는, 만년 2등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개개인의 기량은 나쁘지 않지만 ‘확실히 해결 하는’ 타자가 부족하다는 게 선유고의 평가였다.
임성이 김희도를 유달리 관심 있게 본 이유 또한 장타를 뽑아내는 능력 때문이었다. 기록만 놓고 보면 중학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키가 조금 작은 편인데도 저 기록이면 앞으로 무시무시할 것이다. 다소 의욕 없어 보이는 점만 빼면 완벽했다.
임성은 천재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김희도를 표현하기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없었다. 물론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됐고, 고교리그엔 데뷔조차 안 했지만 기대할 수밖에 없달까.
만약 김희도가 야구부에 들어오면 여러 작전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지난 2년간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것을.
그러려면 제일 중요한 김희도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구슬려도 반응이 없으니.
대체 뭘 해야 하나. 어떻게 하지? 부실 청소는 진작 끝냈고. 박태영, 양민성에게도 대충 얘기해 놨다. 아, 땀 냄새가 싫다고 했던가? 하지만 축축한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란 건 말이 안 됐다.
다른 방도가 없을까? 김희도가 관심을 보일 만한 것.
“3번 지문 읽어 볼 사람? ……보자, 오늘이 27일이니까 27번 읽어 봐라.”
설득이든 뭐든 대화라도 해 봤으면 좋겠네. 이건 뭐, 만나 주지도 않으니까.
“27번 없어? 27번. 임성.”
생각에 잠겨 있던 임성은 옆자리 짝이 툭 치자 눈을 깜빡였다. 선생님을 비롯한 아이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차, 수업 시간이었지.
“죄송합니다. 어, 그러니까…….”
어디 읽으면 되지? 임성이 머뭇대자 짝이 손가락으로 교과서 3번 지문을 가리켰다. 고마워. 눈으로 인사를 하고 지문을 읽어 내렸다.
노트에는 임성이 무의식중에 끼적인 이름이 가득했다.
김희도.
* * *
임성이 매일 아침 교문에서 아는 척을 해 오자, 김희도는 아예 야구부 미팅 시간에 맞춰 등교를 했다. 설마 훈련 중간에 빠져나오지 못하겠지 하며.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던 듯, 김희도는 거의 열흘 만에 조용히 등교할 수 있었다.
“안녕?”
“…….”
하지만 그로부터 이틀 뒤, 김희도는 흙이 잔뜩 묻은 유니폼을 입고 자신의 반을 찾은 임성을 볼 수 있었다.
김희도는 그제야 자신이 임성을 너무 얕잡아 봤다는 걸 인정했다.
교복 차림일 때도 은근하게 느껴지던 위압감은 유니폼을 입음으로써 완성됐다. 얼굴만 보면 오히려 잘생긴 쪽에 가깝지만, 키가 훌쩍 크고 체격이 좋아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그만둔다고 했잖아요. 왜 자꾸 찾아옵니까?”
왜긴, 너 데려가려고 그러는 거지. 너랑 같이 야구 하고 싶으니까. 임성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끈질긴 것 같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삼고초려가 다 뭐냐, 한 달 내내 찾아올 수도 있는데.
“곧 주말리그 시작해. 지금이라도 합 맞춰야 플레이하기 편할 거야.”
“내가 왜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1주일 넘게 쫓아다니는 이유가.
“너 야구부잖아. 잔류든 탈퇴든 결판 짓고 싶으면, 한 번은 부실에 와.”
임성은 부리나케 뛰어오느라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람으로 식혔다. 그리고 한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김희도 쪽으로 상체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그리고 이거.”
샤워도 못 하고 급히 오는 와중에도 소중히 가져온 바나나 우유를 책상에 내려놨다. 노란 우유를 본 김희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건 대체 왜 줍니까?”
“잘 좀 생각해 달라는 일종의 뇌물……이라고 할까. 내가 좋아하는 거 샀는데, 별론가?”
임성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쓸며 겸연쩍게 웃었다.
* * *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어느새 3주 가까이 흘렀다. 벌써 4월이 된 것이었다.
프로 야구 1차 지명이 6월 중순이고, 신인 드래프트가 9월에 있었다. 뛸 수 있는 경기는 한정돼 있으니 그 안에 뭔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됐다. 특히 3학년들은 간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목. 다들 모여 봐.”
선글라스를 낀 코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혹시 아픈 사람 있냐?”
2학년 중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어제 허벅지에 공 맞아서 조금 아픕니다.”
“그건 뛰면 낫는다. 또?”
“며칠 전부터 종아리가 땅깁니다. 발톱이 깨져서 뛸 때마다 욱신거립니다.”
“스트레칭 잘하고 계속 뛰다 보면 낫는다. 다음.”
눈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이상 뭘 말해 봤자 어차피 결론은 ‘뛰면 낫는다.’ 일 게 뻔했다.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자 코치가 노트를 탁 접었다.
“없지? 그럼 7시까지 운동장 50바퀴 돈다. 실시.”
코치의 말에 아이들은 죽상을 한 채 뛰기 시작했다. 하나둘, 하나둘. 운동화 끝에서 흩어진 모래가 뿌연 바람을 일으켰다.
죽음의 러닝 후 쉴 틈도 없이 포지션별로 나뉘어 훈련하고, 끝나기가 무섭게 전체 수비 연습을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근육 트레이닝 등 개인 운동을 했는데, 사실 정규 훈련만 해도 푹 삶은 시래기처럼 늘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아, 죽겠다. 훈련 양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진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박종열이 앓는 소리를 내자 또 다른 3학년 정의영은 아예 말할 기운도 없는지 거친 숨만 들썩였다. 1학년들은 반 이상이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다 했으면 다들 샤워해. 곧 수업 시간이다.”
임성이 늘어진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출석만 하고 하루 종일 운동에 집중하던 과거와 달리 요즘엔 정규 수업을 듣는 게 필수였다. 그러니 아이들 대부분은 수업 시간에 부족한 잠을 채웠고, 그마저도 끝나면 오후 훈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짧게는 3, 4년에서 길게는 10년 넘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정규 수업이 끝난 늦은 오후, 아이들이 하나둘씩 야구부로 모였다. 글러브를 낀 아이들이 이리저리 온몸을 날려 가며 공을 던지고, 받았다. 헉헉, 거친 숨이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주장. 장난 아니고 진짜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죽을 것 같겠지만, 안 죽어.”
가볍게 던진 말에 경악 어린 시선들이 날아왔다.
“와, 저 독한 새끼. 나는 더는 못하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어. 차라리 날 밟고 지나가라.”
아예 훈련장에 드러누운 정의영이 넋 놓고 중얼거렸다.
수비 훈련이 끝나면 약 10분 남짓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자리에 널브러졌으며 몇 명은 수분 섭취를 위해, 혹은 축축한 연습복을 갈아입기 위해 부실로 이동했다.
임성과 조예준 그리고 박종열은 좀비처럼 부실로 향하는 무리에 끼었다.
“할 만하냐?”
웃음 섞인 임성의 질문에 신입생들이 머뭇댔다. 할 만하다고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1학년들은 더는 못 하겠다느니, 죽겠다느니 하면서도 결국 해내는 선배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침묵으로 대답하는 그 마음을 짐작한 듯 임성이 신입생들을 위로했다.
“중학교 때랑 많이 다르지? 처음엔 다들 그러니까 기죽을 필요 없어. 훈련하다가 토하거나 코피 터지는 건 예사야. 근육 땅기거나 마사지 필요하면 말해. 간단한 응급 처치는 가능하니까.”
“네. 주장님.”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신입을 보던 조예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너희들. 여기 이분이 사실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조예준은 마치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았다.
“그래. 쟤가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지독한 놈이라니까. 우리 1학년 때 3학년 중에 진짜 좆같은 선배 놈 한 명이 있었거든? 꼴에 애들 기강 잡는답시고 존나 뺑이 돌렸단 말이야. 다들 못하겠다고 죽어 가는데 저 새끼만 결국 해낸 거 알아?”
조예준의 말을 박종열이 받았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대의 남자애들이 오랜 시간 함께 있다 보면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좋은 쪽이면 좋겠지만, 안 좋은 쪽으로 발산되기도 했다. 선유고 야구부도 크게 다르지 않아, 2년 전, 그러니까 지금 3학년이 신입생일 때 선배들로부터 일방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개중 자신의 초조함과 불안을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풀던 선배가 있었다. 후배들을 한 줄로 쭉 세우고 가슴이나 어깨를 툭툭 치는 건 예사고 쌍욕을 퍼부었고,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야구 방망이로 후려 패기도 했다.
문제의 그 날은 그 선배가 스타우터 앞에서 조기 강판을 당한 날이었다.
‘야. 지금부터 운동장 200바퀴 돈다. 한 사람이라도 성공하면 끝내고, 아니면 단체 기합이다. 단체 기합에서 낙오하는 새끼 한 명당 열 대씩이다.’
당시 선유고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시합에 나갔던 선배들 대부분 기분이 좋지 않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하늘 같은 선배 말이라 어쩔 수 없이 뛰었는데, 100바퀴가 넘어가자 다들 얼굴이 시뻘게졌고, 150바퀴 즈음엔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구역질을 했다.
이제 죽었구나. 또 얼마나 맞을까. 눈에 안 띄는 허벅지나 엉덩이만 때리겠지.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1학년 한 명이 아직 뛰고 있었다. 정확히 200바퀴를 채운 1학년은 선배 앞에 멈춰 서서 ‘끝났습니다.’ 하고 딱 한 마디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신입 새끼가 어디서 눈깔을 똑바로 뜨냐며 오지게 맞았다.
“그 사람이 여기 이 임성 선배님이시다 이거야. 그러니까 너희도 조심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대단한 사람이구나. 후배들의 시선을 느낀 임성이 눈썹을 내리며 쓰게 웃었다.
“박종열. 오버 좀 하지 마라.”
“내가 무슨 오버를 했다고. 그 뒤로 그 새끼 너만 갈군 거 몰라? 졸업할 때까지 온갖 트집 다 잡고 개지랄했잖아. 네 덕에 우리는 좀 편해졌다만.”
쩝. 박종열이 입맛을 다셨다.
“과거 얘기는 됐고, 1학년들 아프면 바로 말해. 감독님이나 코치님께 말하기 어려우면 내게 해도 되니까.”
“네.”
아이들이 합창하듯 대답했다.
“그나저나 올해는 날씨가 왜 이러냐? 벌써부터 쪄 죽겠네.”
박종열이 두 손으로 상의 끝을 잡고 양쪽으로 비틀어 짰다. 흙이 뒤섞여 희뿌연 땀이 물 흐르듯 뚝뚝 떨어졌다.
“부실에 에어컨 달자고 건의 좀 해. 덩치 큰 남자들이 50명 넘는데 선풍기 한 대가 말이 돼?”
“건의해 볼게.”
박종열의 불만에 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하나 있던 에어컨이 가을에 고장 나고 여태 선풍기로만 버티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다.
“졸업한 선배님께서 기증 한 대 안 해 주시나? 배트랑 글러브도 너무너무 감사하지만, 바람 짱짱한 에어컨 하나 해 주셨으면 좋겠다. 안 그러냐, 예준아?”
“종열 선배 말이 무조건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김이설 선배님이 안 오셨네요.”
조예준이 부실 문을 열며 말했다. 창문을 닫고 나왔던 탓에 정체돼 있던 공기가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빈말로도 상쾌하다는 말이 안 나왔다.
“물 마실 사람? 음료수 마실 사람도 말해.”
냉장고와 아이스박스에서 물과 음료수를 꺼내던 임성은 주변이 묘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 쏟아지는 봄 햇빛에 금방이라도 녹을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을 찌르는 햇볕에 순간 찡그렸던 눈을 뜨고 얼굴을 확인한 임성의 안색이 밝아졌다.
“김희도?”
드디어 왔구나. 음료수를 옆에 서 있던 후배의 품에 안기고 김희도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는 임성이 가까이 다가오자 상체를 살짝 물려 거리를 확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성은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몇 번이나 설득하고 반까지 찾아갔는데도 반응이 없어서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떨떠름해하는 박종열이나 조예준, 그리고 그날의 참사를 잊지 못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1학년들 틈에서 임성 혼자 그를 반겼다.
“잘 왔다.”
처음부터 기분이 썩 안 좋아 보이던 김희도는 임성이 자신의 손을 붙잡자 더 심해졌다. 꼭 뭔가를 참는 사람처럼 미간에 굵은 주름이 몇 개나 졌으며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어디 아프냐?”
걱정이 밴 말에도 김희도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빳빳한 셔츠 위로 드러난 목 한가운데 불거진 울대뼈가 크게 움직였다. 힘주어 입을 다물었는지 턱뼈가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떨……어져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임성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며 김희도의 안색을 살폈다. 한여름 복숭아처럼 발간 뺨이 점점 질리더니 이내 새파래졌다.
“아프면 양호…….”
아프면 양호실에 가. 임성이 입을 떼는 순간,
“욱, 우욱. 웩!”
임성의 가슴팍을 세게 밀친 김희도가 입을 틀어막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임성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우웩. 우웨엑. 토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요란하게 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했다.
“저 미친 새끼, 가만히 안 둔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조예준이었다. 그는 김희도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 임성이 조예준을 다급히 붙잡았다.
“따라가서 뭐 하게.”
“놔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갑자기 밀고 지랄이야?”
“그러지 말고 물이나 좀 줘라. 목말라.”
임성은 행여 조예준이 쫓아갈까 봐 그의 어깨를 짚으며 대화를 돌렸다. 여기서 조예준과 김희도가 싸우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졌다.
임성은 김희도를 야구부에 데려올 예정이었고, 그러려면 부주장인 조예준과도 잘 지내야 했으니까.
“주장 다칠 뻔했잖아요!”
정작 떠밀린 사람보다 조예준이 더 크게 화를 냈다.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기에 살짝 웃었다.
“안 다쳤으니 됐잖아. 우리 예준이가 날 얼마나 생각하는지 잘 알았다. 나 지금 엄청 감동 받았어.”
짧게 잘라 빡빡이에 가까운 조예준의 뒤통수를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일 분노해야 할 사람이 농담을 내뱉자 조예준은 한숨을 내뱉으며 제 가슴을 퍽퍽 쳤다.
“지금 농담이 나와요? 주장은 열 안 받아요?”
후배 놈이 갑자기 밀친 것도 모자라 제 얼굴을 보고 토했는데, 기분 나쁘지도 않나? 만약 자신이 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한 대 쳤을 거다.
“열 받을 게 뭐 있냐? 갑자기 속이 안 좋아졌겠지.”
임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마른 수건이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갑자기가 아니라 주장 얼굴 보고 토했다고요. 이건 주장 얼굴이 토할 정도라는 뜻 아닙니까? 물론 주장이 김희도처럼 꽃미남은 아니라도 나름 인기 많잖아요.”
“야, 조예준.”
이건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네. 임성이 어이없는 듯이 웃으며 그의 목에 수건을 걸었다. 조예준은 가장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었다.
“김희도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누구나 똑같지 않나? 상대성 오징어.”
“기생오라비 같은데요.”
조예준은 임성이 걸어 준 수건으로 턱을 닦으며 뚱하게 내뱉었다.
얼굴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편협한 일이지만,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얼굴이라 호감을 결정하는데 상당 부분 적용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김희도는 상당히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운동선수답지 않게 피부가 희고 입술이 도톰하고 붉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은 햇볕 아래에서 더욱 윤이 났다. 목이 길고 어깨가 넓으며 팔다리도 늘씬해 시커먼 빡빡이들 사이에서 단연 튀었다.
하지만 운동선수에게 외모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잘생긴 얼굴을 줄까, 운동 능력을 줄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후자를 택할 테니까. 하지만 김희도는 당시 무명에 가깝던 중학교의 이름을 단숨에 알릴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한마디로 얼굴도 되고 실력도 되는, 다 가진 놈이란 뜻이었다.
“김희도 공부도 잘해요. 전교에서 놀아요.”
여태껏 눈치만 보고 있던 1학년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임성은 김희도가 공부를 잘하든 말든 큰 관심이 없었지만, 후배가 무안할까 봐 고개를 끄덕여 호응했다.
“야. 운동부가 무슨 전교에서 놀아. 구라도 작작 쳐야 믿는 시늉이라도 하지.”
아무 생각 없는 임성과 달리 조예준은 그 사실이 퍽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욕을 먹은 신입이 턱을 아래로 당기며 어깨를 움츠렸다.
“김희도가 공부 잘하는데 네가 왜 애를 잡냐?”
“솔직히 전교는 오버잖아요. 아직 중간고사도 안쳤는데.”
“잘할 수도 있지.”
대부분의 운동부는 성적을 바닥에 깔고 가지만, 드물게 공부를 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잘’하는 게 아니라 ‘그나마.’, ‘좀.’
“임성 너도 반에서 상위권이잖아.”
김희도가 입을 틀어막으며 뛰어나갈 때부터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전하던 박종열이 툭 내뱉었다.
“나는 겨우 중간 정도고.”
중간은커녕 시험지를 받자마자 한 번호로 찍고 엎드려 자던 애들이 뜨끔한 표정을 했다.
“겨우란다. 저놈도 은근히 재수 없다니까.”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하다. 잘하는 걸 어쩌겠냐?”
박종열의 타박에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남짓한 휴식 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자, 다들 나가자.”
또 훈련이냐며 죽상이 된 아이들을 다독이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오며 주변을 살펴봤지만, 이미 김희도는 보이지 않았다.
“예준아. 나한테서 냄새 심하게 나냐?”
갑자기 뛰쳐나갈 정도로? 옆머리를 긁적이며 조예준에게 물었다.
“운동하는데 당연히 땀 냄새가 나지 꽃향기가 나겠어요?”
조예준은 별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알지. 구역질할 정도로 심한가 싶어서.”
임성이 제 팔을 들고 킁킁댔다. 땀 냄새가 나긴 해도 토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조예준에겐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새파랗게 질린 채 뛰쳐나가던 김희도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거기 어물거리지 말고 얼른 뛰어와. 캐치볼 할 거니까, 둘씩 짝지어.”
코치의 말에 아이들이 후다닥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