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티페레트에서 포타라카로 돌아온 지도 이제 어언 삼주가 흘렀다.
티페레트의 최상층과 지하 세계에 박혀 있던 크리스털들은 비단 세피로트의 각 세피라로 연결된 것뿐만 아니라 알고 보니 관음존자의 수정궁과도 포털이 직결되어 있었다.
허, 적과 우리의 심장부끼리 아무도 모르게 서로 이어져 있었다니.
관음존자가 나에게 크리스털은 창조의 도구이자 포털을 연결하는 전이의 힘이라고 했었지만, 그게 설마하니 티페레트에서 티뷸라 황금 사원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어쩐지 그날 아돌프가 클리포트의 지하 세계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게 사실 무지하게 수상쩍다 했었다.
손우경의 말로는 예전에 단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곳이면 그 좌표를 기억했다가 기문파공으로 언제든지 다시 공간을 열어 그곳으로 곧장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관음존자는 분명 그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서쪽의 마법사들 몰래 포털을 등록해놓은 듯하다고 했다.
그날 손우경이 여의봉을 아돌프의 왼쪽 가슴에 꽂아 넣은 후로 갑자기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던 땅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귓가에서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손우경은 여의봉이 관음존자의 심장을 관통했을 때, 지구의 수많은 기억 같은 것들이 자신에게로 마구 흘러들어오며 어떤 우주심을 각성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금방이라도 티페레트의 요새가 폭삭 무너질 듯이 몹시 위태로웠지만, 이윽고 손우경이 허공으로 손을 번쩍 치켜들고는 한참 동안이나 뭔가 이상한 짓을 벌이자 그 대지진은 서서히 잦아들다가 결국엔 뚝 멈추었다. 나는 까닥하다간 이 세상이 아예 멸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고선 손우경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정말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뭐야, 그게 다 이런 거였어?’ 하면서 자기 혼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역정을 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침 같은 시간대에 전 대륙 각지에서도 심각한 대지진과 건물 붕괴가 일어났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산이나 나무 등의 뿌리에서 윗부분이 아랫부분에서 옆으로 약 몇 센티 정도 밀려나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거였다. 그걸 알게 된 손우경이 조만간 날짜를 잡고서 다시 정밀하게 붙여놔야겠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살짝 미친 놈인데 이번 일로 인해 어쩌면 정신이 더 나간 게 아닌가 싶어 속으로 무진장 걱정이 됐다.
심지어 손우경은 두 개의 세상을 하나로 유지하던 자의 순간적인 부재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던 세계를 자기가 다시 이어 붙였다는 괴상한 헛소리를 했지만, 주변에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쨌거나 현재 환영제야단의 수장 자리는 잠시 공석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조만간 종단관계자들로부터 손우경의 정식적인 수장 추대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녀석이 석가여래님의 제자라는 것과 기문파공 계승자라는 두 가지 사유만으로도 그럴 이유는 충분했다. 아직 즉위식은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새로운 수장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심이 크게 증폭되고 있었다.
티뷸라 궁에서는 여전히 날건달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파오가 웬 기타를 들고 요상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악독한 여우가 가더니 그보다 더한 놈이 나타났네.
사람들은 차라리 예전의 그 여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아주아주 슬픈 얘기가~
우연히 그 가사를 듣게 된 내가 종단에서 또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손우경 귀에는 안 들어가게 조심하라고 조언했지만 공연히 참견했다가 후렴 가사만 더 늘어났다.
그 여우보다 더한 놈 옆에는 진짜로 여우같은 놈 한 마리가 붙어 있네.
그런데 둘 다 수컷이라는 아주아주 슬픈 얘기가~
여기에도 웬 미친놈이 한 분 계시온데 심지어 저런 놈이 조만간 천봉대원수 자리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흠. 근데 왜 노래 멜로디가 자꾸 중독성 있지?
나와 손우경더러 수컷이 어쩌고를 운운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도 그리 깨끗한 입장만은 아니었다. 벌써 종단으로 돌아온 지가 삼 주째에 접어들고 있는데 우리 앞에서 수치도 모르고서 지껄이던 오조와의 거사는 아직까지도 성사되지 못하고 있었다.
애가 뭘 봤는진 모르겠는데 오조가 나에게 파오가 무서운 무기로 자길 죽이려 든다며 사색이 된 채로 몇 주째 도망만 다니고 있었다. 대충 짐작 가는 부분은 있지만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겐 아무쪼록 적당한 성교육이 꼭 필요한 법이다.
여하간 다시 손우경의 얘기로 돌아오자면, 녀석은 원래 석가여래 이후로 종단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미 내정되어 있던 환영제야단의 정식 후계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 후계자에게는 석가여래님께서 수장을 도와 함께 종단을 이끌어나갈 어느 그림자적인 존재를 붙여주려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관음존자, 아돌프였다.
허나 그 둘은 빛과 어둠 같은 존재였기에 석가여래께서 음과 양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서로를 절대 죽일 수 없게끔 어떤 제약 같은 것을 걸어놨다고 했다.
때문에 아돌프는 몇 년 전에도 손우경을 직접 죽이지 못하고서 그저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가둬둘 수밖에 없었고, 이번엔 나를 이용해서 그 녀석을 완전히 해하려는 계획을 꾸몄던 것이었다.
그 외에도 내가 결코 알지 못했던 사실들과 감춰진 비밀들이 너무 많았다.
지난번, 모든 일들이 다 끝나자마자 슬금슬금 다가오려는 손우경에게 나는 다짜고짜 크게 화부터 냈었다. 진짜 미친 듯이 화를 내다가 결국엔 주먹으로 얼굴까지 한 대 휘갈기고 말았다. 손우경은 내게 얻어맞은 한쪽 뺨을 부여잡더니 나한테 이렇게 막 대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라며 또 개소리를 지껄였다.
네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내가 그동안 너에게 못했던 말들 다 해줄게.
물론 그러한 생각은 진짜로 손우경이 죽었는지 알고 나 혼자서 잠시나마 신파를 찍었던 거고, 막상 일이 전부 해결되어 들끓었던 감정들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나니 머리가 다시 차가워졌다. 사람 못돼먹은 성격이 쉽게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솔직히 죽는 연극까지 벌여가면서 다른 이도 아닌 나를 속였다는 사실이 너무 괘씸하고 억울했다. 그럴 거였으면 적어도 나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주든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알고 보니 손우경과 척살부가 다 함께 조각상 근처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울면서 생난리를 쳤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다시 화끈거린다.
손우경이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꽉 껴안고서 네 마음 다치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그 순간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졌다. 진짜로 녀석이 죽은 줄만 알고서 같이 따라 죽겠다는 못난 생각까지 했던 나였었다.
물론 쪽팔리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니, 실은 나를 세게 안아주는 녀석의 팔에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아 한참이나 아무 말을 잇지 못했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놈의 품 안에서 너무 떨고 있어서 손우경도 더 이상은 미안하단 말조차 못하고서 날 계속해서 안아주기만 했다.
녀석은 관음존자가 자신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이번 일을 계획한 걸 이미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정황상 몹시 당연한 일이었고, 내가 굳이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주야장천 떠들어대지 않았어도 어차피 서로간의 끝장을 봐야 하는 사이라, 잠시 속는 셈 치고 그 계획에 응하는 척했었다고.
비록 나에게 자신이 아는 걸 전부 다 말해주진 않았지만, 내게 이야기한 그간의 대략적인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손우경이 쿠르게오르 사막이나 아부-게르다에서 밤낮으로 정신없이 찾아다녔던 것은 바로 자신의 머리에 심어진 금고아칩을 제거하기 위한 뇌 전문 기술자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쪽에 도착하기 전까진 자기 머리에 박힌 금고아칩을 제거하지 않는 한 관음존자를 이길 승산이 없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수술을 집도할 의사를 찾아다녔다는 말이었다.
특히 사막 지대에서는 몇 년 전에 천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연구소와 그 일환으로 부랑자나 기형인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의학적인 실험이 벌어졌기에 분명 그 어딘가에는 아직도 실력 있는 기술자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 자신이 천도 프로젝트와 관련된 것들을 전부 다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아돌프 역시 그때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서 애꿎은 사막 사람들을 동원하여 땅을 열심히 파헤치고 있었을 거라는 게 손우경의 추측이었다.
어쨌거나 결국엔 자신의 뇌수술을 도와줄 믿음직한 의사를 아부-게르다에서 발견했으나, 일단 자신이 금고아칩을 제거하는 건 나를 비롯하여 그 아무도 몰라야 하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때까지만 해도 파오와는 서로 의심이 팽배한 사이였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고. 우선은 뇌수술 시간을 충분히 벌기 위해 일부러 마하데바 호 선장의 도발에 응해가며 자그마치 일주일의 기간을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물론 좀 더 여유를 벌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일주일마다 반드시 정기를 나눠줘야 하는 내 문제까지 함께 걸려 있는지라 그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켰다고 했다.
나라카 던전에 들어가서 고라토를 잡아 온 것은 실제로 만 하루도 안 걸리는 일이었고, 그보다는 뇌에서 칩 제거 수술을 한 뒤의 회복 기간 자체가 꽤나 오래 걸렸다고 했다.
그때 손우경이 일주일 만에 돌아와서 나와 섹스를 하던 도중 내가 봤던 상처가 바로 그 금고아칩을 제거한 흔적이었구나 싶었다.
손우경은 자신의 머리에 심겨진 금고아칩과 관음존자의 긴고주가 있는 한 사실상 본인에게 거의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고 한다. 자기가 죽는 연기를 했을 때에도 그렇고 다시 살아 돌아온 직후에도 관음존자가 공중에서 자신을 상대하며 몇 번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의 진언을 외웠다고 했다.
긴고주로 머리가 터져나갈 듯한 행동을 한 건 분신술의 연기였으나, 그전에 내가 무인도에서 손우경이 분신술을 사용하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었기에 혹시라도 나한테 들킬까 봐 무척이나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그리고 얘기했다시피 에메랄드 태블릿과 관련하여 세계가 멸망한다는 핑계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으니, 아마도 자신이 서쪽에 도착하게 되면 분명 최종적으로는 아돌프와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강한 확신마저 있었다고.
어쨌든 서쪽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 직전에, 아직 손우경과 파오는 서로의 정체와 그 목적에 대해서 아무런 믿음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자기 쪽에서 큰마음을 먹고 파오를 한번 떠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부-게르다에서 곧 의사의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어떤 놈들이 뒤를 연신 쫓아 다녔는데, 역으로 미행해보니 그놈들이 바로 파오의 사주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숨어서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파오는 아무래도 관음존자의 뒤통수를 치려는 자신의 목적과도 상당 부분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나 서쪽으로 가는 것 자체는 그리 내켜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손우경 본인은 관음존자와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결판을 지어야 했기에 차라리 그럴 거면 파오를 확실하게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이번 일에 있어서 더 수월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고 말했다.
파오도 분명히 자신처럼 관음존자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를 이유가 없는 사람이니, 그래봤자 밑져야 본전이 아니겠냐며 자기가 먼저 마하데바 호 화물칸에 가득 실려 있는 무기 얘기들을 꺼내면서 교섭을 시작했다고.
기문파공의 약점마저 알려주겠다고 하자 처음엔 믿는 눈치가 아니었으나, 사실 그대로를 증명하여 보여주자 파오가 상당히 얼떨떨해하며 대체 왜 이런 걸 나에게 알려주냐며, 그때부터 둘은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상황이 됐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근데 너, 파오한테 네 약점 같은 걸 알려줬다가 나중에 그쪽에서 딴 마음이라도 먹었으면 대체 어쩌려고 그랬어?”
손우경이 눈을 깜빡이더니 후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뭐 고작 그 정도 얘기를 알려준다고 해서 내가 파오 사형에게 질 거라곤 생각 안 하는데. 그리고 그건 비단 나만의 약점이 아니라 어차피 사람인 이상 총 잘못 맞으면 죽는 건 다 마찬가지인 거 아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파오도 총 맞으면 죽을 텐데 둘 다 똑같은 조건이라면 손우경이 결코 파오에게 질 리가 없었다. 진짜 딱히 약점이라고 알려준 것도 아니네. 그러니 관음존자도 나한테 기문파공으로는 물리적인 공격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냥 다 말해준 건가.
좌우지간 그때 마하데바 호에서 술을 먹었던 날은 둘이 화물칸에 실려 있던 무기들을 털려고 작정한 날이었고, 파오가 선장들을 붙잡고서 술을 마시는 사이 손우경이 기문파공으로 공간 상자를 만들어서 화물칸에 들어 있던 무기들을 전부 싹쓸이해 왔다고 얘기했다.
그 후로 공교롭게도 일부러 서쪽으로 가는 시간을 질질 끌어왔던 파오의 의도대로, 관음존자가 마음이 다급해져서 우리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척살부를 차례차례 보내왔고, 손우경은 파오가 아돌프의 하수인들에게 드디어 본 실력을 드러내며 가차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고.
문제는 그때까지도 관음존자의 사람이었던 나라는 변수였다. 파오가 중간에 몇 번이나 설득하려 해봤지만 내가 전혀 말을 들어먹지를 않았다고.
당시 파오가 나만 보면 자꾸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떨었던 것도 손우경이 말하길 그 성격에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가 무척이나 답답해서 그랬던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파오는 아마도 일이 전부 다 터지기 전까지는 손우경을 백 퍼센트 신임하진 않은 것 같다. 녀석은 모르겠지만, 파오가 나하고 둘이서 얘기할 때마다 툭하면 온갖 험담과 함께 손우경을 절대 믿지 말라는 얘기들을 죽어라 늘어놨으니 말이다.
듣자하니 파오는 천봉대원수직을 관두고서 초야에 묻혀서 관음존자를 칠 세력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클리포트 지하에서 마주친 그 척살부 대원들은 모두 다 관음존자에게 큰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초반부터 아주 대놓고서 수상한 기색을 풀풀 풍겨대던 파오는 그런 자신의 정체를 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손우경에게 그 의심의 눈초리를 밀어댄 것이었다. 마치 ‘나 말고 쟤나 의심하렴’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길잡이 역이었던 오조를 제외하곤 손우경과 파오 둘 다 처음부터 관음존자를 배신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내가 그동안 수없이 품어왔던 그 의심들이 결국엔 전부 다 맞았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저쪽에서도 관음존자의 충실한 하수인 포지션이던 나를 전혀 안 믿었었고.
하지만 찜찜한 구석은 여전히 남았다.
“근데 우리 서쪽에 도착했을 때, 황무지에서 너 마법사들에게 느닷없이 공격당했잖아?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난 그것도 다 파오가 꾸민 짓인 줄로만 알았는데.”
“뭐, 배에서도 그렇고 섬에서까지 녀석의 수하들이 전부 다 박살 났으니까 아돌프가 서쪽에다 미리 심어둔 자객들을 푼 거 아냐? 그래서 그때에도 나만 노렸었거든.”
“그치만, 파오는 그날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면서 뭔가 신호를…….”
“당시 네 눈엔 뭐든 게 다 의심스러워 보일 때니까 별거 아닌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거겠지. 가뜩이나 오조랑도 어색한데 그 전날부터 너하고 사이가 급격히 틀어져서 아예 나하고까지 말 한 마디 못하는 입장이니 혼자 외로움을 삭이려고 담배나 줄창 피워댄 거 아냐? 그다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음.
‘야, 그건 니들이 어제부터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었잖아! 그럼 담배라도 피우고 있어야지, 그 분위기에서 나 혼자 가만히 서 있어야 되냐?’
그래, 다시 생각해보니 나한테 억울하다는 듯이 엄청 화를 내긴 했었다.
“그럼 내 뒤를 미행하던 그놈들은 뭐야?”
“걔네야말로 진짜 서쪽에서 종단 안에 몰래 심어놨던 첩자들이겠지. 낌새가 이상하니까 우리 뒤를 따라다니면서 교단에게 실시간으로 보고를 하는 놈들이었을 거야. 너한테 얘기해준 놈들 말고도 혹시 아돌프가 붙인 놈들인가 해서 내가 몇 놈 정도 잡아서 족쳐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더군. 하지만 유리 돔까지가 한계였으니 그 후로는 서쪽으로 별다른 얘기가 들어가진 않았던 것 같아. 그리고 나도 나중에야 안 거지만, 우리가 유리 돔 안에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건, 바로 파오 사형이 관음존자의 주의를 끌어서 자신의 부하들 말고 다른 척살부를 일일이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어. 거긴 돔 자체에 막대한 전자기장 같은 게 흐르고 있어서 네 손목에 박혀 있었던 신분 인증석으로는 위치 추적이 아예 불가능한 곳이거든. 대원수직을 그만두고서 초창기에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던 도중에 발견했대. 아마 장시간 동안 너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되면 분명 관음존자가 초조해져서 제일 믿을 만한 부하들을 보낼 거라고 예상했었나 봐. 아무튼 사형도 보통내기가 아냐.”
비록 파오가 우리를 유리 돔 안으로 인도하려고 든 것은 맞지만, 다만 그곳에서 그라우마탄급의 소환수들을 불러낸 것은 일행들 중 어느 누구의 소행도 아니었다. 아무리 파오에게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설마 자신을 비롯한 일행 전체를 커다란 위험 속에 빠트릴 만큼 그런 정신 나간 초강수를 뒀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그 사건은 정말이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이라는 건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아마도 나를 통한 관음존자의 추적이 계속 따라붙고 있었기에 실로 그의 심한 장난질이 아니었을까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소환수들을 불러낸 자가 과연 누구였는지는 우리에게도 끝까지 큰 의문점으로 남게 되었다.
다들 그마저도 당연히 아돌프의 짓이라고 확신을 굳힌 듯하지만, 단지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당시 그 망자들의 도시에서는, 우연히 그곳을 찾게 된 새로운 방문자들을 죽음으로 환영하기 위해 어쩌면 도시 스스로가 그 이계의 존재들을 끌어당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파오 얘기를 끝마친 손우경이 갑자기 내 표정을 살피며 뭔가를 얘기하려고 들었다.
“……너 아직도 그때 잠시 기억 잃어버렸던 거 아무 생각 안 나?”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일을 어떻게 다시 입에 올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미 지난 일이라고 해서 당시의 상처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언젠가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에 대해 손우경과 진지하게 얘기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도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만한 자신이 없었다.
아예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을 만큼 아주 끔찍하게 싫은 기억이지만, 만일 그랬다가 자칫 어색했던 예전의 사이로 돌아가게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사실 때때로 미친놈처럼 난폭하게 구는 녀석을 정말로 감당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저쪽에서 나를 좋아해주는 것과는 별개로 나를 향한 소유욕과 질투심만큼은 오랜 시간 관음존자에게 매섭게 단련된 나도 몹시 버거웠으니까.
하지만 나 때문에 한편을 맺기로 결정했다던 파오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 정도라면 그건 달리 말해 단순히 나를 남에게 빼앗기기가 싫었다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이제 녀석의 곁이 아니면 어느 곳에도 갈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도 나를 델 것처럼 뜨겁게 바라보는 손우경의 시선은 마치 올가미처럼 집요하고 또 사슬처럼 단단하기만 하다.
녀석이 가만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 손길은 비록 한없이 다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고 다시 그때와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헌데 나도 이렇게 네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다른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상관없어져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늘 즐겁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아픈 기억이, 때로는 슬픈 기억도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상대방이 나에게 아주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타인이 나에게 부여한 상처들을 곱씹으며 내가 받은 상처만큼 반드시 너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물론 손우경 한정으로만 그런 대견한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원한이나 미움 같은 부정적인 에너지는 파장을 밖으로 내보낸 것 이상으로 어차피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확실한 건 내 비좁은 인간관계에서 이때껏 가장 좋은 기억들을 선사해준 사람이 바로 저 녀석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그게 설사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나는 그저 앞으로의 모든 순간들 역시 모두 네 옆에서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도 널 놔줄 수 없어. 크게 화를 내도 좋고 날 때려도 상관없어. 어쩌면…… 네가 정말로 미쳐버린대도. 그런 거 다 내 옆에서만 해.’
당시 녀석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 그럴 생각이니까 너도 날 놔줄 수 없다는 그 약속만큼은, 꼭 지켜줘.
한참 뒤에야 내 머리에서 손을 뗀 녀석이 이윽고 종단 제복이 갑갑한지 목의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나하고 사형이 그렇게나 많은 준비를 하고도 결과적으로는 네가 오조를 시켜 클리포트의 기온을 뚝 떨어트려놓지 않았다면, 그때 난 아마 아돌프를 이기지 못했을 거야.”
그날 티페레트 요새를 약 서른 층 가까이 쉬지 않고 내려왔던 것은 일단 오조의 복수를 도와주려던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놈들의 진짜 목적은 수십 명에 달하는 척살부를 건물 안에 몰래 잠입시키기 위해 자기네들이 먼저 마법사들의 주위를 끌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파오가 클리포트 문 앞에 도착해서 왜 진작에 기문파공을 안 쓴 거냐고 손우경에게 툴툴거린 것도 다 연기였다고.
“서쪽으로 떠난 다음부터는 내 머리에서 금고아칩을 꺼내려고 한 반년 정도 진짜 밤낮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녔어. 오년 전에 내가 그 자식한테 졌던 건 너무 경황이 없어서다, 그러니 이것만 제거하면 내가 틀림 없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여겼었는데, 웬걸, 막상 아돌프하고 제대로 겨뤄보니까 그 자식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 게다가 원래 파오 사형은 종단으로 돌아가 적당한 때를 봐서 실은 자기 부하들인 가짜 척살부와 함께 관음존자를 칠 작정을 했었나 봐. 하지만 배에서 네가 몸져누워 있는 동안, 나하고 아예 같은 편을 맺기로 하고 나서는 서로 이것저것 다른 계획들을 많이 짰었지.”
하긴 그때부터 니네 이상하게도 갑자기 친해 보이더라.
“그렇게 내가 죽은 척했다가 놈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척살부와 무기들을 들고서 함께 밀어붙이자고 결정한 다음에 우리가 그 연극을 벌였던 거거든. 그럼에도 별다른 소용이 없어서 속으로 당황하고 있는데 현이 네가 아돌프의 진짜 약점을 생각해낸 거지. 나도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너 그 사실을 원래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그 순간에 극적으로 생각난 거야?”
나는 뺨을 긁적였다. 그게 대답하기가 좀 애매한 거라서.
“그냥.”
잠시 망설이다가 얘기했다.
“만약 지금의 나를 지켜보고 있을 어떤 신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 순간에 제발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빌었어.”
“그게 다야?”
“응. 그랬더니 머리에서 갑자기 여기저기 널려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저절로 맞춰지면서 계속 어두웠던 통로 안에서 어떤 돌파구 같은 게 보이더라.”
내 말을 들은 손우경이 뭔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침묵하다가 잠시 후 이야기했다.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무언가를 정말로 간절하게 빌게 되면 범우주적인 차원에서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도 하더라. 만약 그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정말 신일 수도 있고 혹은 아닐 수도 있겠지.”
사실 그때의 그러한 체험이 기적이든 아니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 가로막혔을 때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믿음이었으니까. 일전에 오조가 배 안에서 마법에 대해서 알려줬을 때, 마나의 그릇을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을 믿는 것이 더 중하다는 얘기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모든 것을 전부 다 포기하고 싶었던 그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손우경에 대한 내 간절한 마음이, 바로 이 녀석이 사용하는 기문파공처럼 다른 곳에서 어느 기적의 순간을 뚝 잘라다가 지금 내가 사는 현실 세계에 그대로 이어 붙였던 건지도 모른다. 만일 녀석의 거짓 죽음 이후 내가 삶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거나 혹은 관음존자에게 다시 굴종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손우경이 어쩌면 이 세계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그런 묘한 생각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손우경은 아돌프가 인간이 아닌 것은 대략 짐작하고 있었지만, 영혼이 없는 호문쿨루스이거나 심지어 추위가 약점일 거라고는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기 직전, 아돌프의 시선이 향한 것은 바로 나였었다. 그 눈빛은 마치…….
가끔씩 드는 생각이지만, 그는 정말 영혼이라는 게 없었을까.
하지만 내게 그것에 따른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손우경의 여의봉이 아돌프의 가슴을 관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육신은 새빨간 빛을 뿜어내며 여의봉 안으로 모두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손우경 말로는 그 안으로 봉인된 거라고 하던데 왠지 요즘 들어 여의봉 놈이 좀 더 요사한 빛을 띠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자리에서.
앞으로 환영제야단을 이끌게 될 새로운 수장의 명칭을 정해야 하는데, 혼자 고민하고 있던 손우경이 내게 넌지시 의견을 물어왔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우경은 어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너 좋을 대로 해.”
마침 등 뒤에서 놈을 껴안고서 함께 창 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거의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다시피 하는 포타라카의 얼어붙은 날씨가 오늘따라 아주 화창하고 맑았다. 손우경이 자기 허리에 둘러진 내 팔을 풀고는 몸을 돌려서 똑바로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고개가 천천히 내게로 기울어져 다가온다. 그렇게 두 입술이 완전히 겹쳐지는 순간, 자연스럽게 내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무수한 세계가 공존하고 또 교차하는,
바로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너와 만나게 되었다.
<신 서유기 마침>
쉬어가는 페이지 10 <손우경>
★ 살다 보면 때론 모르고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유익한 일일 수도 있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실력만으로는 절대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네 안의 자만심을 모두 버리거라, 우경아.’
석가여래님의 근엄한 목소리가 여전히 내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나는 현재 기문파공 계승자의 최종 관문인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스승님께서 내가 떠나기 전에 꼭 얘기할 것들이 있다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신 말들이 머리에서 재차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앞으로 며칠 후면 다시 집에 돌아갈 텐데 꼭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뭐 그리도 해줄 말이 많았는지.
그날 석가여래님은 우리가 예전에 신전 요하임에서 가져왔던 여의봉만은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며 정 급할 경우 몸 안에다가 봉인하는 비법까지 일러주셨다. 나는 그 얘길 듣다가 이 여의봉이 자유자재로 길이가 마구 늘어나는 걸 떠올리며 만약 정말로 그래야 할 상황이 온다면 내 하반신에다가 봉인하는 것도 왠지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녀석은 오래전에 굉장히 기분 나쁜 장소에서 데려왔기에 물건 자체에 깃들어 있을 나쁜 사념이나 액들을 지우기 위해, 나는 무한한 애정을 담아 존슨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고 있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은 물건들은 그것에다가 제법 좋은 이름을 붙여주면 본래 나빴던 기운이 상쇄되는 법이니까.
존슨 이 녀석은 성격 자체가 제법 불같은 놈이었다. 가끔 풀밭 위에 멍하게 앉아 있으면 나보고 ‘피를 마시고 싶다아아아!’ 하고 말하거나 ‘나에게 당장 피를 바치거라!’ 하고서 음침한 목소리로 말을 걸곤 했다. 그럴 때면 발로 몇 번 차주면 금세 조용해졌다.
어쨌든 나는 현재 석가여래님께서 건네주신 차원 지도를 이리 들추고 저리 들추며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나로서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들이라서 그곳의 시간과 공간의 좌표들을 잘 알지 못했기에 작은 실수라도 벌어질 시엔 아주 곤란한 일들이 생겼다.
바로 지금처럼.
좌표를 조금 잘못 맞췄더니 모든 사람들의 눈이 하나밖에 달리지 않은 다른 평행우주의 지구 세계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서둘러 좌표를 수정했다. 그러자 이번엔 사람의 눈이 세 개씩 달린 게 정상적으로 통용되는 다른 지구에 도착했다. 맙소사, 차라리 하나만 달려 있는 편이 더 나았다.
얼른 차원 지도에 적힌 깨알 같은 숫자들을 다시 읽어 내렸다.
4819234020239302830.2883122399339384447732324324823629.
아, 실수로 뒷번호를 두 개나 잘못 계산했다. 이번엔 제발 알맞은 장소에 도착하길 바라며 나는 기문파공으로 시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간 여행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절대로 과거 사람들의 인생이나 사건에 내가 함부로 개입하거나, 설령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혹은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과거 사람들에게 미주알고주알 발설한다거나.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 한 번이 지구 반대편에 폭풍우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개념인데 어찌 보면 인과 관계 중 인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니 과거의 돌멩이 하나라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어쩌면 지금의 내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의 유명한 현자들과 만나는 일들은 내 예상외로 아주 유익한 시간들이었다.
하루에 한 명씩 대종말 이전에 지구에서 살던 역사 속의 위인들을 만나가며 나는 조금씩 새로운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석가여래께서 나에게 굳이 왜 이런 귀찮은 짓을 시키시는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따지고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열흘 남짓한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어릴 적부터 내가 쭉 머물던 시공간의 틈새 안에 세워진 마을로 돌아가기까지는 이제 만 하루가 남은 시점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니 만큼,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다른 녀석들의 얼굴도 보고, 며칠 동안 시간 여행을 다니느라 잔뜩 지쳐버린 심신도 편히 쉬게 하고 싶었다.
‘이것도 너와 나의 인연이자 운명인 듯하구나.’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는데 상당히 오래전 기억이 났다. 몇 살 때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석가여래께서 다른 평행우주의 지구에서 이곳의 지구로 뭔가를 한꺼번에 옮겨 오는 도중, 실수로 섞여 들어온 유일한 생존자라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내가 살던 곳의 모든 인류와 동식물들이 완전히 멸종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어차피 생명체가 사라진 곳이라 그대로 남겨둬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으니 자기가 기문파공으로 어느 부분을 뚝 떼어다가 아직은 회생이 가능한 곳으로 옮겨 왔다던데, 나도 그게 정확히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거라.’
나는 그때부터 그 마을에서 석가여래의 제자로서 살게 되었다. 그곳엔 나 말고도 스승님이 ‘바깥’에서 데려오신 다른 녀석들이 많았다.
여하튼 다른 차원의 지구라곤 해도 어차피 다 같은 개념이다. 다원 우주는 동시성의 문을 가진 것이니 사실 어떤 문을 선택한다고 해도 결과만 나뉠 뿐, 모든 것은 전부 자신의 선택이었다. 아마 어떤 우주에서는 석가여래의 실수 없이 내가 본래 살던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예전에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이름 앞에 성씨를 붙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단지 이름만으로 사람을 부른다.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두 세계의 차이점은 딱 그 정도였다.
뭐, 이제 내일이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텐데 쓸데없는 생각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잠이나 일찍 자야겠다.
내가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걸까. 시공간의 틈 안에 만들어진 우리 마을이 불에 탄 흔적들과 더불어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집집마다 녹슨 문들을 열고서 다른 녀석들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내가 살고 있던 집으로 뛰어갔다. 허나 처참하게 뜯겨나간 대문 너머에는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순간 다리가 꺾일 뻔했으나 나는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미 썩어서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시체들이었으나 이들이 누구인지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
입고 있던 옷들로 인해 한 명씩 그 신원이 밝혀질 때마다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감정들이 내 눈물샘을 강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서 끝까지 버텨냈다.
이건, 단번에 일격으로 죽인 것이 아니었다. 잔인한 고문을 거쳐서, 마치 누구 보란 듯이 쌓아놓은 시체들을 보며 심장이 터져나갈 듯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몸 안에서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다. 팔다리나 관절 마디마디가 다 꺾인 채로, 죽기 직전까지도 아주 고통스러워했을 녀석들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흐릿해져갔다.
이 안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단 두 구의 시체였다.
석가여래님과 아돌프.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지 인상이 썩 좋지 않던 그 붉은빛 눈동자가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석가여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내가 오래전에 딱 한번 언덕 위에서 본 그 남자를 빼고. 하지만 그에 관한 일은 석가여래께서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도반이자 친구였던 다른 아이들의 시신을 마을 뒤편의 언덕 위에다가 한 구씩 차례대로 묻어주면서 이게 누구의 짓인지를 꼭 밝혀내리라 다짐했다.
내가 시간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세상은 약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있었다. 말도 안 돼. 고작 열흘에 불과한 날들이었다. 허나 시간 여행 속에서 만 하루의 시간이 이쪽 시간으로는 자그마치 일 년이나 됐단 말인가. 그동안 마을 안에서의 출가가 전혀 불가능했던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아돌프에 관한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나는 그 빨간 눈의 애송이가 벌써 십년 전에 환영제야단 수장 자리에 올라서는 현재 서쪽과의 전쟁을 수없이 일으키며 포타라카 사람들에게 끔찍한 독재 철권을 휘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눈이 뒤집혔다.
설마 그놈이 그런 짓을 한 건 아닐 거라며 계속 속으로만 삭이던 것을, 아예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맞닥뜨리게 되자 가슴 안에서 천불과도 같은 분노가 용솟음쳤다.
그 모든 만행이 전부 다 아돌프의 짓이었음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내 스승이신 석가여래마저 이미 행방불명이었다. 혹시라도 그놈에게 험한 일을 당하신 건 아닌지가 못내 걱정됐지만, 아직 내 눈으로 시신을 본 게 아니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믿어야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의 자리를 덥석 차지한 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도반들까지 전부 살해한 아돌프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기필코 놈에게 복수하리라고 다짐했다. 출타가 잦으신 스승님을 대신하여 그동안 놈에게 기문파공을 전수해준 것은 사형인 나나 진배없었다. 당연히 나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을 싸움이지만, 그럼에도 바깥세상에서 약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쯤 놈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는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세차게 뛰어대는 심장을 힘들게 가라앉히며 당분간은 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녀석이 더러운 짓을 꾸미고 있다는 사막의 어느 연구실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그곳에서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파괴하던 도중, 연구실 곳곳마다 실험에 쓰인 사람의 시체가 아무 데나 널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순간 마을에서 죽어 있던 내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없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까 봐 이제까지는 일부러 무시했던 감정이지만, 나는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구실 내부에는 수많은 전선이 연결된 커다란 크리스털 덩어리가 있었다. 그러자 별안간 내 손에 들려 있던 여의봉이 웅웅거리며 사납게 진동했다.
피라면 아주 환장하는 이 녀석이 유독 이런 소리를 낼 때는 저것이 결코 좋은 물건 따위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돌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크리스털들을 여의봉으로 사정없이 때려 부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자식과 결판을 내야 했다.
그때였다. 내 앞으로 제복을 차려입은 무리들이 떼거지로 나타났다. 그들의 등 뒤로는 번질번질한 인상을 가진 몇몇 남자들이 보였는데 직감적으로 바로 저 녀석들이 이곳의 책임자인 것 같았다.
서서히 나를 에워싸고 있는 놈들은 얼추 사십여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입에서 그저 같잖은 웃음이 나왔다. 고작 저 숫자를 가지고서 이 나를 상대해보겠다 이건가.
그 사십여 명의 몸과 목을 완전히 분리시켜놓고 나는 그길로 아돌프를 찾기 위해 포타라카로 향했다. 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내 모든 것을 그 녀석이 전부 앗아가버린 기분이었다.
먼 곳에서 원래는 나를 품었어야 할 티뷸라 궁 황금 사원의 모습이 천천히 그 장엄한 위용을 드러냈다. 시공간의 틈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루했던 그 세월을 그나마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젠가는 저것의 주인이 될 내 모습을 떠올리며 끝없이 인내했던 까닭이었다.
석가여래님은 나에게 항상 겸손의 미덕에 관하여 지겨운 설교를 늘어놓았지만, 사실상 힘과 실력을 갖춘 자가 권력을 잡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였다.
나는 하얀 설원으로 뒤덮인 언덕 위에 올라 입으로 손에 낀 가죽장갑을 벗으며 웅장한 모습의 티뷸라 궁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놈에게 복수를 끝마치고서 다시 내 것을 되찾는다. 그것이 오늘의 목적이었다.
내가 기절하던 순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아돌프가 웃는 얼굴이었다.
놈들이 팔다리를 묶어놓고 내 머리에다가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에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얼굴로 최면 가스가 새어나오는 마스크를 들이대며 몸에 지속적인 전기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마취 주사를 세 통이나 투여했는데도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니 완전 괴물 같은 놈이군.
-설마 마취 도중에 깨어나서 그런 난리를 피울 줄은 몰랐습니다. 현재 수용소의 피해가…….
점점 가물거리는 뇌리에서 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후로는 암전이었다.
양팔이 묶인 채로 계속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은 꽤나 지루한 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돌프가 날 위해 특별하게 준비했다던 이 방 안은 기문파공으로 만들어진 시간과 공간이 아예 정지되어버린 장소였다. 이것은 불과 몇 년 전 내가 아돌프에게 직접 가르쳐줬던 기술임에도 지금 그것의 덫에 빠진 채로 꼼짝도 할 수 없는 내 신세가 그저 처량할 뿐이었다.
초반에는 조만간 여기에서 다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도 품어봤지만,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난번에 내 머리에다가 무슨 금고아칩을 심겠다며 아돌프가 다른 녀석들과 함께 나를 찾아왔을 때, 적절한 기회를 봐서 탈출하려고 들었다가 도리어 발이 더 꽁꽁 묶여버렸다. 아예 벽 전체에다가 빼곡하게 봉인 부적들을 붙여놓고서 거기에 한 번 더 쐐기를 박기 위해 속박의 결계까지 쳐놓고 간 것이었다.
이건 밖에서 누가 풀어주지 않는 한 내 자의로는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나는 이 안에 갇혀서 분노하고, 화를 내고, 비참해하거나 절망하며,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추악한 감정들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주 어두운 감정들이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지배했다. 좁은 감옥 안에 갇혀서 시간의 흐름 속에 묶여버린 내가 오로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미쳐가는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아예 기약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시공간이 멈춘 터라 점점 나이를 먹어서 자연사를 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갇혀 있는 기간이 앞으로 일 년이 될지, 십년이 될지, 혹은 수백 수천 년이 흐를지,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상태로 계속해서 이곳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내가 잘못한 것은 정녕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음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비참하게 살 바엔 차라리 고결한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도 밖에서 환영제야단의 수장으로서 거들먹거리며 살아가고 있을 아돌프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억울한 짓도 할 수 없었다. 자는 것을 제외하고는 늘 아돌프에 대한 생각들로 맹렬한 복수심에 타오르거나, 지금의 내 처지에 대해 한없이 자포자기하는 것만이 내 일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못 견디게 만든 것은 바로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내가 이제는 성별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마디라도 말을 나눌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그저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배 속에서 끓어 넘치는 성욕을 어떻게든 풀고 싶었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오직 나 혼자밖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삶에 대한 아무런 의지도 들지 않았다. 그냥 계속 잠만 자거나 그나마도 일어나 있는 시간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반복해 떠올리며 홀로 미친놈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감고 있는데 내 머릿속에서 갑자기 묘한 영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돌프가 내 머리에 심어둔 금고아칩이 녀석의 눈과 연결되어서 나의 뇌 안으로 전송되는 어느 현실 속의 편린들이었다.
항상 일정한 시각은 아니었지만 거의 하루에 한 차례씩 아돌프는 나에게 어떤 짤막한 영상들을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그 영상의 주인공은 오직 한 명이었다.
나는 그 주인공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수용소에 내도록 갇혀 있어서 아주 오랫동안 굶기도 했었지만, 저런 이상형의 미인이라니. 넋을 놓고서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만 입이 헤에 하고 벌어질 정도였다. 아주 오래전에 지금은 내 첫사랑이 된, 마을 뒤편의 언덕에서 만났던 그 남자와도 어딘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상당히 차갑고 도도할 것 같은 인상이었으나 티 없이 깨끗한 하얀 피부와 함께 저 아름다운 이목구비에서 도저히 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영상은 하루에 겨우 이 삼분 남짓한 길이만이 전송되어 왔다. 다만 금고아칩에서 음성 기능은 전혀 지원하질 않는지 그 목소리만은 들리질 않았다. 저 녀석이 대체 어떤 목소리를 낼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영상의 내용은 주로 그 미인이 아돌프와 대화를 나누면서 몹시 곤란해하거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어느샌가 아돌프가 그것을 보내주기만을 온종일 오매불망 기다리는 애석한 처지가 되었다.
영상이 전해지지 않는 시간에는 그 미인의 얼굴과 제복 속에 감춰진 몸매를 떠올리며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내게 남아도는 건 시간뿐이었다.
그 녀석의 옷을 벗겨놓고서 강제로 범하는 상상을 너무 지겹게 하다 보니 가끔은 나답지 않게 아주 건전한 생각들도 떠올랐다. 풀밭에 앉아서 벗겨진 신을 신겨준다든가, 눈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얼굴을 어루만진다거나, 아니면 그 녀석이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마에 살짝 키스를 하는 등, 내가 생각해도 진짜 낯간지러운 망상들이나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차츰 더 흐르다 보니 그 영상 속의 미인은 이미 나의 머리 안에서 오랜 연인 사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물론 하루에 딱 한 번만 얼굴을 볼 수 있는 연인이긴 했지만, 이 안에서 그 녀석의 모습을 아주 잠시나마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하루하루를 버터갈 수 있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저 하얀 피부를 단 한 번이라도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꾹 다문 저 입에 키스를 하고, 말랑거리고 질척한 혀를 내 입으로 쪽쪽 빨아 당기다가 나중엔 사슴 같은 목덜미를 아프게 깨물어보고 싶었다.
그다음 쇄골을 핥은 다음 손가락으로 비틀고 있던 유두의 돌기를 혀끝으로 애무하고서, 무성한 털이 자라나 있을 놈의 페니스로 내려가서 한 손에 뿌리와 불알을 쥐고…….
내 상상에서는 이미 저 녀석과의 오만 진도를 다 끝냈지만, 진짜 현실에서는 정신적 능욕이나 하고 있는 처량한 신세였다.
게다가 아돌프가 전해오는 영상을 매일같이 보다 보니 이제는 그 녀석의 미세한 얼굴 표정까지도 하나하나 외우는 수준이었다. 겉보기에는 크게 변화가 없는 듯해도 나는 이제 입술을 깨무는 작은 습관이나 그의 표정들만을 가지고도 놈의 심리 상태를 손바닥 보듯 훤히 파악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미인은 평상시에는 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 사연이 있는 듯한 슬픈 눈빛만큼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툭 떨어트릴 것처럼 아주 애처롭게 보였다.
망상이 폭주하다 못해 녀석을 내 아래에 깔아놓고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거칠게 퍽퍽 박아대서 결국 놈이 엉엉 우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저 녀석과 직접 만나야 했다. 생각만으로도 탐이 나고 애가 탔다. 내가 이렇게 갇혀 있는 동안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확 채가면 어쩌나 하고 심각한 불안 증세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이름이 대체 뭘까.
목소리는 어떨까.
아무리 남자를 좋아해도 실은 섹스 자체가 좋은 거지 나는 누굴 진심으로 좋아해본 역사가 없었다.
사실 남색 취향마저도 예전에 언덕 위에서 아주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그 남자를 보고 난 직후에 생겨난 어떤 호기심의 발로였을 뿐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내 또래가 약 사오십 명쯤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물론 날 좋아하는 계집애들이야 쌔고쌨었다. 그렇지만 여자에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첫 관계는 마을에서 제일 예쁜 남자아이였다. 그 녀석과 몸을 섞을 때 하반신에 엄청난 쾌감이 느껴졌고 그 후로는 다른 놈들까지 꼬셔대는 형국이었다. 허나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신 석가여래님께서 아주 큰 불호령을 내리셔서 마을에 있는 놈들과는 더는 같이 잘 수 없게 됐을 때에도, 나는 솔직히 전혀 아쉽거나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영상 속의 저 남자만은 달랐다. 지금은 그저 나 혼자만의 짝사랑에 불과했지만, 만일 여기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한달음에 달려가서 저 녀석에게 내 마음을 전부 고백하고 싶을 정도였다.
근데 저 녀석은 어차피 이런 나의 존재를 모르지 않나. 갑자기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혹시라도 날 이상한 놈으로 취급하진 않을까. 아니,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대도 충분히 날 좋아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정 안 되면…….
혼자서 아무리 이런 생각들을 머금어봤자 역시나 완전히 무의미한 짓거리였다. 그래봤자 녀석은 지금 내 손에는 아예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여러 가지로 모색해봤으나 공연히 눈앞이 깜깜하고 속만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영상 속의 그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내 품에 안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어느새 네가 나에겐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만날 수만 있다면 너의 모든 말이 나에겐 경전이 될 것이며, 너의 모든 행동은 나에게 진리가 될 것이며, 그리고 너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한 줄기의 빛이 될 것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것에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향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만 심장이 뚝 멈추는 줄 알았다. 도저히 꿈인지 생시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래, 일단은 침착하자, 손우경…….
아돌프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놈이었다. 지난 오년 동안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나에게 그 영상들을 보낸 이유를 깨닫자마자 속에서 다시 분노의 감정이 불타올랐다. 녀석은 미인계를 써서 날 또다시 깊은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당장에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내 머리에 박힌 금고아칩이 또 말썽을 부렸다.
하지만 서쪽으로까지의 여정이라. 그것도 저 녀석과 함께.
냉정하게 그런 제안을 거부하기에는 나는 이미 장장 오년 만에 실제로 처음 보게 된 그 미인에게 첫눈에 푹 빠진 상황이었다. 진짜 실물은 더 환장하게 예뻤다. 심지어 내가 생각했던 성격 그대로였다. 어딘지 쉽지 않은 느낌이라 더 좋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뭘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현실보다 저 멀리 앞서갔지만, 자칫해서 녀석과의 관계를 망칠 수야 없었다.
예전처럼 앞뒤 분간도 못하고서 무작정 달려들기에는, 나는 오년간 시공간이 멈춘 방에서 멍청하게 영상이나 보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게는 딱 두 가지의 주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돌프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바로 저 녀석에 관한 일들이었다.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나는 매번 같은 상황들을 설정해놓은 뒤, 머릿속에서 수백에서 수천가지의 무수한 가지들을 뻗어가며 모든 경우의 수에 미리 대비하는 상상 속의 예행 연습을 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가진 거라곤 진짜로 시간밖에 없었으니까.
출발을 앞두고서 내게서 가장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 내 옆으로 어느 비구니 한 명이 쓱 다가와서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물건을 건네었다. 어제 그 비구니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혹시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종이에 적어달라고 부탁하기에 나는 단 한 가지의 품목만을 적어 냈던 것이다.
방금 비구니에게서 받은 물건을 기문파공으로 작은 창을 띄워서 일단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잘 보관해두었다.
나는 다시 그 녀석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기대해도 좋다구.
* * *
나를 몹시도 경계하고 있다. 그것도 무지하게.
그 미인의 이름은 ‘현’이었다. 현玄이라. 그 이름의 뜻처럼 까만 머리색과 검은 눈동자가 하얀 피부와 극명하게 대조되어서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저 녀석은 나를 상당한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첫 만남부터 놈의 얼굴에다가 내 중심부에 봉인해두었던 여의봉을 키워댔으니 전혀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도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자제한 것이었다.
아돌프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는 아직 확실하게 짐작 가지 않았으나 어차피 뭐 뻔할 뻔자였다.
예전에 내가 시간 여행을 떠나기 직전, 석가여래께서는 나를 기문파공의 정식 후계자로 약속하시면서 그림자 인간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서로가 공생하는 관계이기에 서로를 죽일 수가 없는 그런 관계. 놈이 오년 전에 나를 죽이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녀석들의 말을 들어보니 에메랄드 태블릿으로 무슨 세계 멸망이 어쩌고를 지껄인 것 같은데 하늘만 몹시 쾌청하고 맑았다. 나는 현을 슬쩍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놈이 내 숨통을 마저 끊어놓기 위해 이번 계획을 세운 것이 틀림없다고 말이다. 뭐, 저런 미인계라면 나도 사양하지는 않겠어. 물론 단지 나 하나만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벌인 것은 아닐 터였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앞으로 차차 알아가도 되니 우선은 저 현이라는 녀석과 어떻게든 친해질 필요성이 있었다. 오년 동안 별 상상을 다해가며 내 머릿속에서 수천 차례나 범해졌던 인물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도 저쪽에서 너무 경계를 하느라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못 붙여본 상태였다.
게다가 놈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반신에서 즉각적인 신호가 오는데 그걸 태연한 얼굴로 가라앉히느라 죽을 맛이었다. 날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몸에서 은은한 향냄새가 나는 것도 사람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녀석에게는 싫은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 굳이 하나만 꼽으라면 지금 날 경계하는 거?
파란 눈의 그림리퍼나 전직 천봉대원수인 파오와는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저 고양이 같은 자식은 통 사람을 따를 생각을 안 했다. 친해지는 건 둘째치고 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머리는 오직 야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제복 안에 감춰진 허리 라인을 눈여겨보며 나는 슬슬 조바심을 냈다.
내가 무슨 핑계를 대야 너하고 잘 수 있을까.
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윗입술을 혀로 핥아대고 있었다.
제법 금욕적인 얼굴의 현은 사실 몸이 민감한 녀석이었다. 내가 박아줄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 신음 소리를 흘리며 자기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댈 정도로 내재된 음란함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 자고 났더니 더 미칠 것 같았다. 내 상상 속에서나 했던 일들을 실제로 하게 됐지만, 역시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었다. 이걸로는 아직 부족했다. 녀석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아돌프고 뭐고 어느새 복수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나는 현에게 푹 빠져 있었다.
하루 종일 놈의 몸에 붙어서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그 녀석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한 번도 순순하게 내 말에 따르지는 않았지만, 내가 살짝만 강하게 밀어붙여도 결국엔 다 넘어왔다. 하지만 나는 첫 섹스 이후로는 일부러 녀석과 거리를 뒀다. 거의 말도 붙이지 않고 무심한 척 대했다. 참아내기가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이 나 때문에 애를 태우는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를 어떻게 만난 건데, 나한테 쉽게 질리게 만들 수야 없었다.
어쨌든 내가 계속 무시하자 녀석은 살짝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현은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길고양이처럼 조금씩 길들여가는 재미가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서 천천히 함락시키는 것도 재밌겠지만, 그보다 빨리 내 손에 확실하게 넣고 싶은데 생각만큼 잘되지가 않았다.
다음번엔 또 무슨 핑계를 대야 자꾸 비싸게 구는 널 홀딱 벗겨서 밤새도록 안아볼 수 있을까. 얼굴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매일같이 처박아대도 결코 안 질릴 것 같은 야한 몸이었다.
내 발기한 좆을 놈의 가랑이 사이에 억지로 집어넣고 실신할 때까지 허리를 움직여보고 싶다. 아님 아랫구멍이 찢어질 때까지 여의봉의 크기를 늘여서 놈이 스스로 다리를 한계까지 벌리고 고통에 찬 얼굴로 끙끙거리는…….
사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 몇 년 사이에 나는 음험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현의 앞에서는 나름대로 수위 조절을 하고 있었지만, 파오 사형과 둘만 있을 때에는 사형 쪽에서 너 그렇게 이중적으로 살지 말라며 혀를 쯧쯧 찼다. 그는 현에 대한 나의 집착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이 징그러운 자식아, 뒤에서 현이 좀 쳐다볼 때 그렇게 소름 끼치는 눈으로 보지 말라구. 걔가 제발 니 이런 모습을 다 알아야 하는데.”
아돌프 때문에 꼴이 많이 우스워지긴 했지만 나는 예전부터 설렁설렁 장난치듯 해도 뭐든지 다 잘하는 놈이었다. 지금도 막상 하려고 들면 쉬운 것들이 참 많은데도 이상하게도 현에 관해서만큼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며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내가 놈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녀석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너무 깊게 의미를 두며 생각하는 편이었다.
오년이나 그 표정을 관찰했기에 이제는 얼굴만 봐도 대강의 속마음이 짐작되긴 했지만, 그래도 놈이 나에게 과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가 몹시 궁금했다. 게다가 아돌프에게 강한 충성심을 보이고 있어서 이따금씩 그런 모습들을 직접 확인할 때마다 질투와 같은 강렬한 감정에 내 심장이 뜨거워졌다.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현을 잠시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만일 현이 나를 제외한 사람에게 그 마음을 주게 된다면 그게 누가 됐든지 놈의 눈앞에서 잔인하게 목을 따버릴지도 몰랐다. 난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파오 사형이 현이와 가벼운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였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그들의 별것 아닌 일상 대화에도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였었다.
네가 싫다고 해도 반드시 널 내 손안으로 떨어트리고 말 것이다. 겁이 많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네가 결코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교묘하고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앞으로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은 너이니 표면적으로는 다정하게 굴어줄게. 그런 모습을 평생 연기하는 것쯤이야 너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현의 앞에서 나는 두 번이나 의도적으로 말을 꺼냈다.
뒤에서 우릴 따라붙고 있는 미행자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 번은 오래전에 천도 프로젝트를 파괴하러 갔을 당시에 한창 인간들을 강시로 만드는 실험 중이던 그 마을 안에서 놈이 혼자서 내 뒤를 따라붙게 만들기 위해서였고,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키스에 성공했었다.
두 번째는 바로 지금.
“나도 이게 내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이 도시에서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
“뭐?”
파오 사형이 무슨 소리냐며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꿋꿋하게 주장했다.
“파오 사형, 혹시 사막에서 우릴 따라붙던 놈들 기억나?”
“어? 그놈들은 갑자기 왜.”
“아마 한 놈 정도가 이 도시에 함께 숨어든 것 같은데 그때의 그 녀석들이랑 추적하는 방식이 거의 흡사해서.”
“근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 미행하는 수법이 다 거기서 거기지.”
“여긴 지난번 오조가 그 역겨운 놈들을 전부 처리하기 직전까진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아니었어. 그러니 방금 전에 내가 느꼈던 그 기척은 우릴 따라서 이 도시에 따라 들어온 거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어. 일단 그 자식을 찾아내서 여기서 나가는 출구가 어디인지를 물어봐야겠어.”
후에라도 써먹을 일이 있을까 싶어 뒤를 따라붙던 미행자 놈들 중 마지막 한 명을 살려둔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출구를 찾는 일에도 사실 전혀 관심 따위 없었다. 우리들 중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어딘지 의기소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현을 자극해서 놈이 직접 나서게 만들 작정이었으니까.
그때 오조가 원치 않게 끼어들었다.
“내가 우리 애들을 시켜서 한번 찾아내볼까? 나랑 계약된 소환수들 중에는 후각 기능이 엄청 발달한 녀석이 있거든.”
얘를 어째야 하나 싶었는데 그 순간 파오 사형이 화를 내주어서 다행이었다. 오조의 시한부 인생 고백 이후로는 크게 내색은 안 해도 속으로는 엄청 동요하고 있었는데, 사형이 갑자기 멱살까지 잡으며 저럴 줄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작작 해라, 좀.”
나는 둘이 뭘 하든지 간에 현의 반응이나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과연 이번에도 걸려들까?
미행자는 그리 대단한 실력을 가진 놈이 아니었지만, 내 예쁜 인형 씨에게 혹여 무슨 일이 생길까 봐서 나는 기척을 숨기고서 현의 뒤를 따라갔다. 하긴 무슨 일은 오늘 밤에 내가 할 거긴 하지만.
몸을 숨기고서 현의 실력을 고스란히 지켜보는데 솔직히 빈틈이 너무 많다. 내가 맘 잡고 한 삼년 정도만 가르쳐주면 실력 자체를 꽤 일취월장시켜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놈이 저렇게 약한 것이 너무 좋았다. 그야 그럴수록 나에게 더 크게 의지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요즘 들어 분위기가 묘해진 오조와 파오 사형만 봐도 사형 쪽에서 일방적으로 실력적인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 굳이 내 옆에 평생 끼고 살 녀석이 강해봤자 사실상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내가 지켜주면 되는데.
무슨 부적 같은 걸로 무서운 환상을 보게 만든 다음, 적을 쓰러트린 현이가 잠시 후 문 안에서 빠져나왔다. 놈보다는 먼저 숙소에 도착해야 하겠지만, 일단 여기서 제대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여유 있게 현의 숙소에 먼저 도착한 나는 녀석의 침대에 드러누워서 어서 이 방의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한쪽 팔로 머리를 기대고서 눈빛만으로 놈을 반겨주는데 어째 또 눈초리가 썩 곱지가 않다. 녀석이 잔뜩 피곤에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꺼져. 지금 너랑 상대할 기분 아니야.”
자주 느끼는 거지만 저 예쁜 얼굴에 비해서 그다지 예쁜 말을 쓰지는 않는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서 가만히 웃고만 있으니 이번엔 날 회유하는 방법을 바꾸려 든다.
“제발 부탁인데 여기서 나가주라. 나 정말 피곤해.”
네가 암만 떠들어도 난 오늘 이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현은 그런 날 잠시 내려다보다가 아예 자신이 다른 방으로 피하려는지 몸을 빙글 돌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 다음 몸을 확 끌어당겨 내 품속으로 넣어버렸다.
그런데 아까 현이가 미행자의 심장을 꿰뚫었던 왼쪽 손에 기분 나쁜 사념체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흔히들 부정 탄다고 하는 말들이 바로 이런 거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몸에 들러붙어서 에너지나 축내는 놈들이니 나는 손등에 키스하는 척하면서 그것들을 전부 떼어내버렸다.
감히 누구 걸 넘봐.
사념체들을 제거하고서 나는 놈의 목덜미로 내 얼굴을 옮겼다. 목덜미 깊숙하게 코를 들이박고서 현이의 냄새를 맡았다. 빌어먹을.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벌써 아랫도리가 뻣뻣해진다. 아니, 오늘은 아니야. 손우경.
나는 녀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네 냄새가 좋더라.’
귀가 예민해서인지 내가 귓속말을 하면 현이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피 냄새가 나는데도 이상하게 달콤해.’
내 말에 녀석의 몸이 살짝 굳어지는 게 품 안에서 느껴졌다. 지금쯤 그 작은 머릿속에서는 혹시나 자기 행동이 간파당한 줄 알고 아주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런 걸 즐겁게 지켜보는데 현이의 뺨에 작은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아까 그 자식에게 당한 건가. 이런 작은 상처 하나에도 크게 화가 나려고 하는 내 자신이 정말 나조차 이해가 안 되고 있었다. 나는 뺨 언저리의 상처를 혀로 핥으며 놈에게 물었다.
‘누가 그랬어?’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그 상처 난 자리를 핥았다. 놈이 통증을 느끼도록. 그랬더니 아픈 걸 참다못해 놈이 이제 그만하라며 몸을 뒤틀었다.
‘아프라고 하는 거야.’
나는 내 허락도 없이 얼굴에다가 이런 상처를 나게 만든 녀석에게 마치 벌을 주듯이 그곳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현이는 몸이 많이 피곤한 듯했다. 내 품에서 전혀 벗어날 생각도 안 하고 내가 머리카락을 매만져도 그저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녀석. 나에 대한 반항은 그냥 포기한 건가.
나는 녀석에게 조금 겁을 주고 싶었다.
‘나 몰래 놀러 나갈 때마다 바깥에서 남자 원혼 같은 거 달고 들어올 생각이라면 질투 나니까 그만둬.’
품 안에서 현이가 다시 움찔거렸다.
‘문 앞에서 심장과 팔 한쪽이 없는 남자가 널 아주 무섭게 쳐다보고 있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까 그곳에서 나오기 전에 원한이 남은 원혼은 내가 이미 처리해버리고 온 지 오래였다. 물론 귀신을 보는 거야 영안이 개방된 나로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망자의 영은 그렇게 빨리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본디 두려움이 그것을 끌어당기는 법이지,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저쪽 세상에서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현은 내 말이 무서웠는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저런, 가엾기도 해라. 나는 현이의 몸을 내 쪽으로 더 끌어당긴 후에 녀석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려주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내 허락 없이는 너한테 아무 짓도 못해.’
잠시 후 계속 불안에 떨던 현이가 잠이 들었다. 나는 완전히 잠든 현의 얼굴에 키스해주면서 놈을 침대에 바로 눕혔다. 지금부터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서 결국엔 곯아떨어진 현이가 어떻게 보면 불쌍하기까지 했다.
아돌프 하나만으로도 벅찬 녀석에게 이런 나까지 얹혔으니 진심으로 동정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굴 위로 다시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이대로 바지를 벗겨내어 마구 쑤셔 넣고 싶은 욕구를 애써 감내했다. 네가 낮에 깨어 있는 동안, 너에게 아무 짓도 안 하고서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 진짜 죽을 만큼 힘들다는 건 알고 있냐.
나는 놈의 건조해진 입술에 한 번 더 키스를 하고서 내 주머니 안에서 그것을 꺼내었다. 바로 황금 사원을 떠나오기 전에 비구니가 나에게 챙겨준 그 물건이었다. 실은 수용소 안에서부터 현이의 왼손에 심어진 아돌프의 기운을 보면서 나는 계속 그걸 제거할 만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녀석에게 진실에 관해 모두 고백하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내가 감옥 안에서 너를 오년간이나,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사실들을.
넌 아마 상상도 못하겠지만 너에 대한 거라면 어지간한 일들은 모두 알고 있어.
네 작은 습관이나 자주 짓는 표정, 네가 왜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지까지도.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할 생각이었다.
이 겁 많은 녀석이 무서워할 테니까.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놈 정말 소름 끼치거든.
나는 병의 뚜껑을 열고서 그것을 현의 입술에 두세 방울 흘려보냈다.
이것은 증상적으로는 마치 절지 동물류의 싸구려 독 같아 보이겠지만, 실은 약 여덟 시간 후부터 약 사흘 동안 그것과 거의 비슷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었다. 이것이 사람 몸에 들어가게 되면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게 되며 며칠간은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잠이 쏟아지게 된다.
물론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으나 자칫 잘못하면 인체의 장부에 미세한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사람이 음용할 경우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제거해주어야 한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잠시 잠들어 있는 동안, 아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거야.”
아돌프가 현이의 왼손을 통해 담아둔 에너지들은 약 일 년 이상 써도 너끈하게 남아돌 만큼 충분한 양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그렇게 양심적으로 굴지는 않을 거였다.
“현아, 있지, 난 지금부터 네 아무런 동의도 없이 아돌프의 기운을 이어받은 그 지점을 내 마음대로 끊어놓을 예정이야. 그 뒤엔 네 엉덩이를 통해서 너의 몸속 깊은 곳에다가 그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에너지 통로를 뚫어놓을 생각이고.”
깊은 잠에 빠져든 현이에게서는 당연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미친놈처럼 계속해서 입을 열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넌 앞으로 내가 섹스를 통해 나눠주는 에너지들로 움직이는 진짜 내 인형으로서 살아가게 될 거야.”
나는 후후 웃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한시라도 내 손에서 놔줄 수 없어.”
나는 현이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잘 자, 내 인형.”
쉬어가는 페이지 10 <손우경> 편 마침